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8 7

 

如何道諦實能感苦?誰言實感?

▷묻겠습니다; 어떻게 도제(道諦)가 실로 괴로움을 능히 초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답한다; 누가 실제로 초감한다고 말하였는가?


不爾如何?無漏定願資有漏業,令所得果相續長時,展轉增勝,假說名感。

▷묻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그러한 것입니까?

▷답한다; 무루의 선정과 원력이 유루(有漏)의 업을 의지하여 얻는 과보를 상속하고, 오랜 세월 동안 전전하여 증성하게 함을 가정적으로 초감(招感)이라고 이름하나니,

ㅡ색계 4(第四禪) 무루의 뛰어난 선정에 의해 유루업(有漏業) 의지하고, 얻는 과보를 상속하고 새로 생겨나게 하고, 오랜 기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전전(展轉)하면서 증성하게 한다. 

실제로는 유루업이 초감하는 것으로서, 다만 무루의 돕는 세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초감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무루업이 실제로 괴로움을 초감하는 것은 아님을 밝힌 것이다.

 

如是感時,由所知障爲緣助力,非獨能感。然所知障不障解脫,無能發業潤生用故。

이와 같이 초감할 때에는 소지장이 연(緣)이 되어 조력(助力)하는 것으로, 홀로 능히 초감하는 것이 아니나, 

소지장은 해탈을 장애하지 않으니, 능히 업을 일으켜서 태어남을 촉진하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何用資感生死苦爲?自證菩提利樂他故。

謂不定性獨覺、聲聞及得自在大願菩薩,已永斷伏煩惱障故,無容復受當分段身。恐廢長時修菩薩行,遂以無漏勝定願力,如延壽法資現身因,令彼長時與果不絕。數數如是定願資助,乃至證得無上菩提。

▷묻습니다; 어떻게 도와서 생사의 고통을 초감하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스스로 깨달음을 증득하고, 남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니,

결정적이지 않은 부정성(不定性)의 독각과 성문 및 자재함을 증득한 대 원력의 보살은 이미 영원히 번뇌장을 조복하고 단멸한 까닭에 다시 미래의 분단신(分段身)을 수용하지 않으니, 오랜 세월 동안 보살행을 닦는 것을 그만두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무루의 뛰어난 선정과 원력의 힘으로써 수명을 연장하는 법처럼 현재의 몸의 원인인 현신인(現身因)을 도와서 그 업을 오랜 세월 동안 과보와 함께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니, 

누차 이와 같이 선정과 원력으로써 돕는 것을 최상의 깨달음인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함에 이르기까지 하는 것이다.

 

彼復何須所知障助?

旣未圓證無相大悲,不執菩提有情實有,無由發起猛利悲願。又所知障障大菩提,爲永斷除,留身久住。又所知障爲有漏依,此障若無,彼定非有,故於身住有大助力。

▷묻습니다; 또한 어찌하여 그는 소지장(번뇌의 습기)으로써 돕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무상(無相, 진여)과 대비(大悲)를 원만히 증득하지 않았을 때에는 깨달음인 보리(菩提)와 유정(有情)과 참으로 존재한다는 실유(實有)에 집착하지 않아서, 맹렬한 자비와 원력을 일으킴에 의하지 않으며,

또한 소지장(번뇌의 습기)은 큰 깨달음을 장애하나니, 영원히 단멸시키기 위해서 유신(留身)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며, 

또한 소지장은 유루를 의지처로 삼나니, 만약 이 장애가 없다면 유루법(有漏法)도 반드시 없는 것이니, 따라서 몸의 머무름인 유신(留身)에 크게 돕는 힘이 있게 되는 것이다.

ㅡ무상(無相) 차별상이 없는,  진여(眞如) 말한다.


若所留身有漏定願所資助者,分段身攝,二乘異生所知境故。無漏定願所資助者,變易身攝,非彼境故。

만약 몸의 머무름인 유신(留身)이 유루의 선정과 원력에 의지한다면 분단신(分段身)에 포함되나니, 2승과 이생(異生, 범부)의 소지장의 경계이기 때문이며,

무루의 선정과 원력에 의지하는 것이면 변역신에 포함되나니, 2승(乘)과 이생(異生, 범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由此應知變易生死,性是有漏,異熟果攝,於無漏業是增上果,有聖教中說爲無漏出三界者,隨助因說。

頌中所言諸業習氣,卽前所說二業種子。二取習氣卽前所說二障種子,俱執著故。俱等餘文義如前釋。

이러함에 의거해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변역생사(變易生死)의 성품은 유루이고 이숙과에 포함되며, 무루의 업에 대해서는 증상과인 것이다.

'십지경론(十地經論)'의 제12권에서 무루가 되어 3계를 벗어난다고 말한 것은, 무루가 돕는 원인인 조인(助因)을 따라 말한 것이며,

'삼십송'의 제19 게송 중에서 말하는 ‘모든 업의 습기’는  앞에서 말한  가지의 유루업(有漏業)과 무루업(無漏業) 종자이며,

‘2취 습기(二取 習氣)’란  앞에서 말한 번죄장과 소지장인 이장(二障) 종자이니, 모두 집착하기 때문이며,  

제19게송에서 ‘함께함의 구(俱)’ 등의 나머지 문장의 뜻은 앞에서 해석한 바와 같은 것이다.


變易生死雖無分段前後異熟別盡別生,而數資助,前後改轉,

변역생사는 분단생사가 이전과 이후의 전후이숙(前後異熟)이 별도로 다하는 별진(別盡)과 별도로 일어나는 별생(別生)은 없지만, 수차의 선정과 원력의 도움으로 전과 이후 것을 고쳐서 전환하는 것이니,

의지하는 업력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므로 증성하게 하기 위해서, 이전의 악한 것을 고치고 전환하여 이후의 수승한 것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

 

亦有前盡餘復生義。雖亦由現生死相續,而種定有,頌偏說之。

역시 이전의 두드러지게 악한 추악(麤惡) 다하고 다른 것, 즉 승묘(勝妙)함이 다시 생겨나는 뜻이 있으며,

역시 현행에 의거해서 생사가 상속하지만, 종자가 반드시 있는 것이니, 게송에서 그것에 비중을 두어 말한 것이다.

ㅡ현행(現行) 많이 단절되기 때문에 '삼십송'의 19게송에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或爲顯示眞異熟,因果皆不離本識,故不說現,現異熟因不卽與果,轉識閒斷,非異熟故。

前、中、後際生死輪迴,不待外緣,旣由內識。

혹은 참다운 이숙의 원인(업종자)과 결과(근본식)는 모두 근본식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현행을 말하지 않았으니, 현행의 이숙의 원인인 이숙인(異熟因)은  결과와 함께하는 것은 아닌 것이며,

전식(轉識, 7식)은 잠시 단절됨이 있으므로 이숙이 아니기 때문이며,

과거와 현재  미래세에서 생사에 윤회하는 것은 외부대상인 외연(外緣)을 기다리지 않는 것으로, 내부의 식에 의거한다고 이미 말하였다.

 ㅡ6 중에서도 역시 이숙과가 있는데, 어째서 게송에서 이전의 6식이 다하여 이후의 것이 생겨남 등으로 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6식은 참다운 이숙인 진이숙(眞異熟) 아니므로 6식의 현행을 말하지 않은 것으로, 게송에서는 이에 비중을 두어 8식을 말한 것은, 이것이 진정으로 생사가 상속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전식(轉識),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 · 말나식의 7식(七識)은 모두 제8식인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긴 것 또는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하여서 이들을 7전식(七轉識) 또는 전식(轉識)이라 부르며, 또한 이들 7가지 식들을 전7식(前七識)이라고도 한다.-위키

 

淨法相續應知亦然,謂無始來依附本識有無漏種,由轉識等數數熏發漸漸增勝,乃至究竟得成佛時,轉捨本來雜染識種,轉得始起淸淨種識,任持一切功德種子,由本願力,盡未來際,起諸妙用,相續無窮,由此應知唯有內識。

청정법이 상속하는  역시도 그러하다고 알아야 하나니, 시작이 없는 무시(無始)로부터 근본식에 의탁해 있는 무루종자가, 전식(轉識) 등이 반복적으로 훈습되어서 일으킴에 의해서 점차 증성해지는 것으로, 나아가 구경에 이르러 성불할 즈음에는 본래의 잡염의 식의 종자를 전환하여 버리고, 이에 비로소 일어나는 청정한 종자식을 전환하여 증득하여서 모든 공덕의 종자를 지니는 것이다. 

본원의 힘에 의거해서 미래세가 다하도록 여러 승묘한 작용을 일으킴이 상속하여 다함이 없으므로, 이러함에 의거해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오직 내부의 식인 내식(內識)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若唯有識,何故世尊處處經中說有三性?

▷묻겠습니다; 만약 오직 식(識)만이 있다면, 어찌하여 세존께서 여러 경전에서 세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ㅡ'삼십송'의 1게송 중에서 “자아와 법을 가설함으로 인하여 (자아ㆍ법의) 갖가지들이 생겨난다는 유가설아법(由假說我法) 유종종상전(有種種相轉)”이라는 문구를 자세하게 해설하는 중에서, 1단의 바른 논리에 위배되는 비판들을 해석하였다. 

이하는 2단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되는 비판들을 해석한 것으로, 이것은  가지의 분단으로 나뉘며, 1단에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ㆍ의타기성(依他起性)ㆍ원성실성(圓成實性)  가지 자성, 삼종자성(三種自性) 해설한, 삼성의(三性義)이다.

 

應知三性亦不離識,所以者何?頌曰:

▷답한다; 마땅히 알라. 세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도 역시 식을 떠나지 않는 것이니, 왜인가? '삼십송'의 제20ㆍ21ㆍ22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니, 

ㅡ유식위교(唯識違敎),  유식학이 경전의 말씀에 어긋난다는  가지 힐난인 이난(二難) 중,  번째에 대한 해설로써, 만약 외경(外境) 없다면 '해심밀경'에 나오는 3종자성(三種自性) 성립될  없다는 힐난에 대해 성의 진정한 의미를 해설하여 유식무경(唯識無境) 취지에 위배되지 않음을 밝힌다.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이러저러하게 두루 계탁함에 의해서 갖가지 사물을 두루 계탁하나,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자성은 실재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이다.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은 분별이며, 연(緣) 등에서 생기하는 연소생(緣所生)이네.

ㅡ여기에서 중연(衆緣) 인연(因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ㆍ소연연(所緣緣)ㆍ증상연(增上緣) 4() 말하며,

심법은 모두 이들 4연에 의지하고, 색법은 인연ㆍ증상연의 2연에 의해서 생기하므로, 연생(緣生) 색심제법(色心諸法) 모두 의타기성인 것이다.

 

3성(三性)은 수행자가 수행을 통하여 알아야 할 법 또는 알아야 할 바 즉 알아야 할 모든 앎이라는 뜻에서 소지법(所知法) 또는 줄여서 소지(所知)라고 한다. '섭대승론석' 제1권과 '성유식론' 제3권에 따르면, 소지(所知) 즉 알아야 할 바 즉 3성(三性)이란 염정(染淨), 즉 염(染)과 정(淨), 즉 잡염법과 청정법을 말한다.
이들 3성(三性) 즉 알아야 할 법 즉 모든 잡염법과 청정법은 모두 그 의지처 즉 발동근거가 제8아뢰야식이기 때문에 제8아뢰야식을,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라는 뜻에서 소지의(所知依)라고도 부른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parikalpita-svabhāva), "두루 계탁(計度)하여 집착하는 성질"이며, "fully conceptualized (완전히 개념화되다)"라고 직역되며 "imaginary nature (상상성 · 가상성)"라고 번역되며, 존재의 허망한 상태를 말한다.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성질"이며, "other dependent (다른 것에 의존하는)"라고 직역되며 "dependent nature (의존성)"라고 번역되며, 연기(緣起)의 성질을 말한다.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ṣpanna-svabhāva), "원만히 성취한 실재하는 성질"이며, "fully accomplished (완전히 성취하다)"라고 직역되며 "absolute nature (절대성)"라고 번역되며, 존재의 진실한 상태를 말한다. - 위키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은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앞의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 항상 멀리 떠난 성품인 이니라.

ㅡ 즉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을 항상 멀리 떠난 이공소현(二空所顯)의 진여ㆍ법성(法性)을 의미하는 것으로, 진여는 공(空)의 성(性)이다.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그러므로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은 의타기자성과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니, 

ㅡ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의 비일비이성(非一非異性) 말하는 것으로,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현상(現像) 실성(實性) 관계이기 때문이다. 현상은 () (相)이고, 체(體)는 상(相)의 체이다.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무상, 즉 무아(無我)와 공(空) 등의 자성과 같나니,

ㅡ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의 비일비이성을 비유한다면, 색법 등의 자상이 무상(無常)ㆍ고()ㆍ무아(無我)ㆍ공() 공상(共相) 비일비이(非一非異) 것과 같은 것이다.

 

원성실성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것, 의타기성이 보이지 않는다네.

ㅡ의타기성을 참으로 자각할  있는 것은 원성실성에서이다. 꿈은 깨어났을 때 비로소 그것이 꿈인 것을 아는 것과 같이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신 부처님만이 연기법의 이치를 확연히 아시는 것이. 

 

論曰:周遍計度,故名遍計。品類衆多,說爲彼彼。謂能遍計虛妄分別。

▷논하여 말한다. 널리 두루 주변(周遍)을 꾀하고 헤아리는 계도(計度)하기 때문에 변계(遍計)라 이름하나니, 품류(品類)가 매우 많아서 ‘이러저러한 피피(彼彼)’라고 말하는 것이며, 능변계의 허망분별을 가리키는 것이다.

ㅡ먼저 변계소집성에 관하여 자세하게 해설한 것으로, 먼저 난타(難陀) 등의 견해이다. 

그러나  변계소집올 해설함에 있어서 안혜와 호법은 능변계(能遍計) 소변계(所遍計)  변계소집(遍計所執)  가지인 삼중(三重)을 건립하고,

난타 등은 소변계가  변계소집이라고 하면서, 오직 능변계와 소변계의  가지인 이중(二重)으로 건립하였다.

 난타는 20게송의 1구는 능변계를 밝히고, 나머지  문구 소변계를 밝힌 것이라고 말하였다.

 

卽由彼彼虛妄分別,遍計種種所遍計物。謂所妄執薀、處、界等,若法若我自性差別。此所妄執自性差別,摠名遍計所執自性。如是自性都無所有,理教推徵不可得故。

곧 그들 허망분별에 의해서 갖가지 변계된 사물인 소변계(所遍計)를 두루 계탁하나니,

허망하게 집착된 5온ㆍ12처ㆍ18계 등의 법(法)ㆍ자아의 자성인 아자성(我自性)ㆍ차별을 말하는 것으로, 

이 허망하게 집착된 자성ㆍ차별을 총체적으로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이라 이름하며, 이와 같은 자성은 전혀 실재하는 바가 없는 것이니, 바른 논리와 성스러운 가르침에 의해 추리하고 비판해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변계소집자성(parikalpita-svabhāva)은 두루 분별하여 착각하며 집착하는, 즉 분별된 존재성이다. 이것은 주체면에서 능변계(能遍計)와 대상면에서 소변계(所遍計)로 나눈다.

①능변계(能遍計)의 작용은 우선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견분을 실아(實我)로 착각하는 것으로, 이러한 근본무명인 아치(我痴)로부터 갖가지 번뇌가 생겨나며, 또한 의식이 외부대상을 두루 분별하여 선과 악 등으로 인식ㆍ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②소변계(所遍計)는 식의 이와 같은 계탁작용에 의해 실재하는 것으로 집착되어진 대상, 즉 ‘사현된 자아와 사현된 법인 사아사법(似我似法)’이다. 경험세계의 사물은 허공 꽃과 같이 실재성이 없음에도, 우리의 식에 의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개념이나 언어로써 파악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런 사물을 ‘무(無)’라고 함으로써 그 존재가 철저히 부정되며, 그 존재성의 부정은 상무자성(相無自性)이라 한다.


或初句顯能遍計識,第二句示所遍計境,後半方申遍計所執若我若法自性非有,已廣顯彼不可得故。

혹은 게송의 처음 구절은 능변계의 식(識)을 나타내고, 두 번째 구절은 소변계의 대상인 경(境)을 나타내며,

후반부는 바야흐로 변계소집의 자아ㆍ법의 자성이 실재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미 그것이 있을 수 없음을 본 논서 제7권에서 자세하게 나타내 보였기 때문이다.

ㅡ안혜와 호법의 견해로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삼중변계(三重遍計) 건립하였다.

게송의 1구는 능변계인 () 밝히고, 2구는 소변계인 대상(境) 나타내며,

이후의 2구는 참으로 변계소집(遍計所執) 실아실법(實我實法) 체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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