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 10권 2
雖眞如性實無差別,而隨勝德假立十種。雖初地中已達一切,而能證行猶未圓滿,爲令圓滿後後建立。
진여의 성품인 진여성(眞如性)은 실로 차별이 없지만, 수승한 덕을 따라 10 가지를 가립하나니,
초지(初地) 중에서 이미 일체, 즉 열 가지의 진여를 통달하지만, 증득의 주체인 수행이 아직 원만하지 않으니,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다음 단계를 건립하는 것이니,
ㅡ진여는 본래 평등무차별의 이체(理體)로서, 실제는 서로 다른 명칭을 시설하지 않지만, 10지(地)의 계위(階位)의 차이에 따라 가정적으로 각 지(地)에서 증득되는 진여에 명칭을 붙여서 열 가지 진여를 건립한 것이다.
如是菩薩於十地中勇猛修行十種勝行,斷十重障,證十眞如,於二轉依便能證得。
이와 같은 보살은 십지(十地) 중에서 용맹하게 열 가지의 뛰어난 승행(勝行)을 닦고,
열 가지 무거운 장애를 끊으며, 열 가지의 십진여(十眞如)를 증득하여
문득 두 가지 전의(轉依)인 보리(菩提)와 열반을 능히 증득하는 것이다.
ㅡ이상은 능히 증득하게 하는 원인인 능증인(能證因)을 밝혔으며, 이하 증득되는 결과인 소증과(所證果)를 밝힌다.
轉依位別略有六種:一損力益能轉,謂初二位,由習勝解及慚愧故,損本識中染種勢力,益本識內淨種功能,雖未斷障種,實證轉依,而漸伏現行亦名爲轉。
보리(菩提)와 열반을 증득하는 전의(轉依)의 단계의 차이에는 대략 6 가지가 있으니,
제1은 세력을 감소시키고 능력을 증성하게 전의인 손력익능전(損力益能轉)으로서, 처음의 두 가지 지위인 자량위와 가행위에서의 수행의 힘인 공능(功能)으로, 자량위에서 승해(勝解)를 닦고 가행위에서 참회함으로써, 근본식 중의 염종자의 세력을 감소시키고 근본식 중의 청정종자의 능력을 증성하게 함을 말하며,
아직 장애의 종자를 단멸하여 실제로 전의를 증득하지는 못하였지만, 점차 현행을 조복시키므로 역시 전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ㅡ먼저 단계에 따른 여섯 가지 전의(轉依)를 판별한다.
二通達轉,謂通達位,由見道力通達眞如,斷分別生二障麤重,證得一分眞實轉依。
제2는 통달전의(通達轉依)이니, 통달위(通達位)를 말하는 것으로, 견도의 힘에 의해 변행진여(遍行眞如)를 통달함으로써,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두 가지 장애의 종자와 습기의 추중을 끊고, 일부분의 참다운 진실한 전의를 증득한다.
三修習轉,謂修習位,由數修習十地行故,漸斷俱生二障麤重,漸次證得眞實轉依。
제3은 수습전의(修習轉依)이니, 수습위(修習位)이니, 10지의 수행인 십지행(十地行)을 거듭 닦아 익힘으로써,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두 가지 장애의 추중을 점차 끊고, 참다운 전의를 점차로 증득하는 것이다.
ㅡ10지의 수행인 십지행(十地行)이라고 말하지만, 초지(初地)에서 견도를 제외한 주심위(住心位)와 출심위(出心位) 그리고 나머지 9지이다.
攝大乘中說通達轉在前六地,有無相觀,通達眞俗閒雜現前,令眞、非眞現不現故。說修習轉在後四地,純無相觀長時現前,勇猛修習,斷餘麤重,多令非眞不顯現故。
세친의 '섭대승론석' 9권에서 제 2의 통달전의(通達轉依)는 앞부분의 6지에 있다고 말한 것은 후득지(後得智)로써 관조하는 형상이 있는 관법인 유상관(有相觀)과 근본지(根本智)로써 관조하는 형상이 없는 관법인 무상관(無相觀)으로써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통달하는 것이 뒤섞여서 현전하여, 참다운 무상관(無相觀)을 현현하게 하고, 진실하지 않은 유상관(有相觀)을 나타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섭대승론석'에서 제 3의 수습전의(修習轉依)는 뒷부분의 4 지위인 제7지ㆍ제8지ㆍ제9지ㆍ제10지에 있다고 말한 것은 무상관이 오랫동안 현전하여 용맹스럽게 닦아 익혀서 나머지 추중을 끊고 진실하지 않은 것을 대부분 현현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四果圓滿轉,謂究竟位,由三大劫阿僧企耶修集無邊難行勝行,金剛喩定現在前時,永斷本來,一切麤重,頓證佛果圓滿轉依,窮未來際利樂無盡。
제4는 증과가 원만한 전의인 과원만전의(果圓滿轉依)로써, 구경위(究竟位)를 말한다. 3아승기겁 동안 무량하고 무변한 어려운 난행(難行)의 뛰어난 승행(勝行)을 닦음으로써 금강유정(金剛喩定)이 현전할 때에 본래의 모든 추중을 영원히 끊고 불과(佛果)의 원만한 전의를 단박에 증득하여, 미래세가 다하도록 유정을 이롭고 무진하게 안락하게 하는 것이다.
금강유정(金剛喩定), 보살이 제10지의 만심(滿心), 즉 최후의 일념(一念)에서 불과(佛果)의 장애를 끊어 없애고, 참으로 묘각(妙覺)의 증득에 들어가는 단계를 금강무간도(金剛無間道)라고 하고, 이 지위의 선정을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 이름한다. 그 자체(體)가 견고하고 그 작용이 예리하여서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에 금강석에 비유하여 이름한 것이다.
五下劣轉,謂二乘位,專求自利,厭苦欣寂,唯能通達生空眞如,斷煩惱種,證眞擇滅,無勝堪能名下劣轉。
제5는 낮고 열등한 하열전의(下劣轉依)이니, 2승의 지위를 말한다. 오로지 자신의 이로움인 자리(自利)만을 구하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적멸을 좋아하며, 오직 아공진여만을 통달해서 번뇌의 종자를 단멸하고 ,진여의 택멸(擇滅)만을 증득하여 자재함이 없는, 일체를 아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갖추지 못한 까닭에 아직 자재하지 못한 것을 낮고 하열전의라 이름한다.
六廣大轉,謂大乘位,爲利他故趣大菩提,生死涅槃俱無欣厭,具能通達二空眞如,雙斷所知煩惱障種,頓證無上菩提、涅槃有勝堪能,名廣大轉。
제6은 광대전의(廣大轉依)이니, 대승의 지위를 말한다.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를 위해서 대보리에 나아가고, 생사와 열반 모두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으며, 이공(二空)에서 나타난 진여를 모두 통달하고, 소지장과 번뇌장의 종자를 함께 단멸하여 최고의 보리와 열반을 단박에 증득하고, 뛰어난 자재함이 있는 것을 광대전의라 이름한 것이다.
此中意說廣大轉依,捨二麤重而證得故。
'삼십송' 제29의 게송에서 말하는 ‘전의(轉依)’의 뜻은 광대한 전의를 말하는 것이니, 두 가지의 추중을 버려서 증득하기 때문이다.
轉依義別略有四種:一能轉道。此復有二:一能伏道,謂伏二障隨眠勢力,令不引起二障現行,此通有漏無漏二道,加行根本後得三智,隨其所應漸頓伏彼。
전의(轉依)의 의미 차이에는 대략 네 가지가 있으니,
제1은 능히 전의를 이루는 능전도(能轉道)로써 여기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능히 조복하는 능복도(能伏道)이니, 이장(二障)의 수면의 세력을 조복하여서 두 가지 장애의 현행을 이끌어 내지 않게 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공통적으로 가행지(加行智)의 유루도와 근본지와 후득지에서의 무루도의 두 가지와 가행지ㆍ근본지ㆍ후득지의 세 가지 지혜에 의해서 그 상응하는 바를 따라 그것을 가행지에서는 점차로 또는 근본지와 후득지에서는 단박에 조복하는 것이다.
ㅡ진정한 의미의 전의(轉依)를 자세히 해설한 것이다.
二能斷道,謂能永斷二障隨眠,此道定非有漏加行,有漏曾習相執所引未泯相故,加行趣求所證所引未成辦故。
둘째는 능히 단멸하는 능단도(能斷道)이니, 능히 두 가지 장애의 수면을 영원히 단멸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무루의 근본지와 후득지의 도(道)는 반드시 유루도와 가행지는 아니니,
유루심(有漏心)의 가행지와 유루심의 후득지의 유루도는 예전에 익힌 것으로, 형상에 집착하는 것에 이끌려진 것이며, 아직 상분을 멸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가행지는 증득할 바의 진여와 이끌어 일으켜지는 무분별지에 나아가 구하고, 아직 판별하지 못한 때문이다
有義根本無分別智親證二空所顯眞理,無境相故能斷隨眠,後得不然,故非斷道。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근본무분별지혜는 직접 이공(二空)에 나타난 진리에서 증득되는 것이며, 대상의 형상(상분)이 없기 때문에 이장(二障)의 수면을 단멸할 수 있으나,
후득지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단멸의 도(道)가 아니니, 가령 무상관(無相觀)을 할지라도 상분인 대상의 상이 있기 때문에 단멸하지 못하는 것이다.
ㅡ무루심과 근본지ㆍ후득지를 밝힌다.
有義後得無分別智雖不親證二空眞理,無力能斷迷理隨眠,而於安立非安立相明了現前,無倒證故,亦能永斷迷事隨眠。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후득무분별지혜는 직접 이공(二空)의 진리를 증득하지 못하므로 도리에 미혹한 수면을 단멸할 능력이 없지만, 안립제와 비안립제의 상에 대해서 명료하게 현전하여 전도되지 않고 증득하기 때문에, 역시 현상(事)에 미혹한 수면을 영원히 단멸할 수 있는 것이다.
故'瑜伽'說修道位中有出世斷道世出世斷道,無純世閒道能永害隨眠,是曾習故,相執引故。
그러므로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말하기를 “수도위 중에서 출세간의 단멸하는 도인 근본지 및 세간(안립)과 출세간(비안립)의 단멸하는 도인 후득지가 있다. 순수한 세간도는 수면을 영원히 없애지 못하나니, 이것은 예전에 익힌 것이고, 형상에 집착하는 것에 이끌려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由斯理趣諸見所斷及修所斷迷理隨眠,唯有根本無分別智,親證理故,能正斷彼。餘修所斷迷事隨眠根本後得俱能正斷。
이러한 이치에 의거하여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과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의 본체(理)에 미혹한 모든 수면을 오직 근본무분별지혜만이 직접 진여에서 증득함으로써 그것을 능히 참으로 단멸하고
나머지는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이니, 현상에 미혹한 수면을 근본지와 후득지가 함께 능히 참으로 단멸하는 것이다.
二所轉依。此復有二:一持種依,謂根本識,由此能持染淨法種與染淨法俱爲所依。
聖道轉令捨染得淨。餘依他起性雖亦是依,而不能持種,故此不說。
제2는 전의되는 소전의(所轉依)이며, 여기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종자를 지니는 의지처인 지종의(持種依)로써, 근본식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능히 잡염법ㆍ청정법의 종지를 지니므로 잡염법ㆍ청정법 모두의 의지처가 된다.
성스러운 성도(聖道)가 전의(轉依)해서 잡염법을 버리고 청정법을 얻게 하며,
나머지 의타기성인 제 7식도 역시 의지처이지만, 종자를 집지(持)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二迷悟依,謂眞如,由此能作迷悟根本,諸染淨法依之得生,聖道轉令捨染得淨。
餘雖亦作迷悟法依,而非根本,故此不說。
둘째는 미혹과 깨달음의 의지처인 미오의(迷悟依)로써, 진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능히 미혹과 깨달음의 근본이 됨으로써 모든 잡염법ㆍ청정법이 그것에 의지해서 생겨날 수 있으며, 성스러운 성도(聖道)가 전의해서 잡염법을 버리고 청정법을 얻게 하며,
나머지 다른 것, 즉 의타기성인 8식도 역시 미혹ㆍ깨달음의 법의 의지처가 되지만 근본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三所轉捨。此復有二:一所斷捨,謂二障種,眞無閒道現在前時,障治相違,彼便斷滅,永不成就,說之爲捨。彼種斷故,不復現行,妄執我法。所執我法不對妄情,亦說爲捨,由此名捨遍計所執。
제3은 전의해서 버려지는 소전사(所轉捨)이며, 여기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단멸해서 버려지는 소단사(所斷捨)로써, 이장(二障)의 종자이며, 참다운 무간도가 현전할 때 장애와 다스리는 것이 서로 다른 까닭에 그것이 문득 단멸되어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는 것을 ‘버리는 사(捨)’라 하는 것이며,
그것의 종자가 단멸되기 때문에 다시 현행하여 망령되게 자아와 법으로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되는 자아와 법도 허망한 생각에 배대되지 않으므로 역시 ‘버릴 사(捨)’하 하는 것이니, 이것에 의거해서 변계소집을 버리는 사변계소집(捨遍計所執)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二所棄捨,謂餘有漏劣無漏種,金剛喩定現在前時,引極圓明純淨本識,非彼依故,皆永棄捨。彼種捨已,現有漏法及劣無漏畢竟不生,旣永不生,亦說爲捨,由此名捨生死劣法。
둘째는 포기해서 버려지는 소기사(所棄捨)이니, 이장(二障)의 나머지 유루와 열등한 무루 종자가 금강유정이 현전할 때에 매우 원만하고 밝은 순수하고 청정한 근본식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그 나머지 유루와 열등한 무루의 종자의 의지처가 아니므로 모두 영원히 그 종자를 버리며, 버리고 난 때에는 현재의 유루법과 열등한 무루법도 궁극적으로 생겨나지 않으며, 또한 영원히 생겨나지 않으므로 역시 ‘버리는 사(捨)’라 하며, 이것에 의거해서 생사와 열등한 무루의 법을 버린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有義所餘有漏法種及劣無漏,金剛喩定現在前時,皆已棄捨,與二障種俱時捨故。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나머지 유루법의 종자와 열등한 무루법의 종자를 금강유정이 현전할 때에 모두 이미 버리는 것으로, 이장(二障)의 종자와 동시에 버려지는, 인과동시(因果同時)이고 무간도에서 버린다고 하였으며,
有義爾時猶未捨彼,與無閒道不相違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그 때에는 아직 그것을 버리지 못하나니,
무간도와 서로 다르기 때문이고,
ㅡ제8식 등의 나머지 유루법은 무간도와 다른 것임을 말한다.
菩薩應無生死法故,此位應無所熏識故
금강유정(金剛喩定)이 현전할 때의 보살에게는 생사의 법이 없는 변역생사(變易生死)이기 때문이며,
이 지위에서는 훈습되는 식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고,
ㅡ만약 금강심의 무간도(無間道)에서 유루(有漏)가 없다면 훈습을 받는 소훈식(所熏識)이 없어야 하는 것으로, 선(善)과 무루는 훈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住無閒道應名佛故,後解脫道應無用故。
무간도에 안주함을 부처님이라고 이름해야 하기 때문이며, 만약 그러하다면 이후의 해탈도는 작용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니,
ㅡ만약 훈습 받는 식이 없다면, 이 지위의 보살도 역시 부처님이라고 이름해야 한다.
由此應知餘有漏等解脫道起方棄捨之,第八淨識非彼依故。
이러함 의거해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나머지 유루 등은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 비로소 유루와 열등한 무루의 종자를 버리며, 그것을 버나니, 제8청정식은 그것의 의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四所轉得。此復有二:一所顯得,謂大涅槃。此雖本來自性淸淨,而由客障覆令不顯,眞聖道生,斷彼障故,令其相顯,名得涅槃。此依眞如離障施設,故體卽是淸淨法界。
제4는 전의해서 얻어지는 소전득(所轉得)으로, 여기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현현해서 얻어지는 소현득(所顯得)이니, 대열반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본래부터 자성청정이지만, 객진번뇌의 장애가 덮어서 현현하지 못하게 하므로, 참다운 성스러운 도(道)가 생겨나서 그 장애를 끊는다.
따라서 그 상(相)을 현현하게 하는 것을 열반을 증득한다고 이름하며, 이것은 진여가 장애를 떠난 것에 의거해서 시설하기 때문에 체(體)가 곧 청정법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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