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9 1

 

若有三性,如何世尊說一切法皆無自性?頌曰:

만약 원성실자성, 의타기자성, 변계소집자성의 삼성(三性) 있다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세존께서 '해심밀경(解深密經)' 제2권에서와 여러 반야경전 등에서 일체법 모두에는 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삼십송'의 제23ㆍ제24ㆍ제25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니,

ㅡ세 가지 무자성인 삼무자성(三無自性),  상무자성(相無自性)ㆍ생무자성(生無自性)ㆍ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 관하여 해설한다.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삼성(三性) 의해서,  가지의 삼무자성(三無自性)을 건립하는 것으로,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써, 제법은 자성이 없는 무성(無性)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유식위교(唯識違敎) 2() 중에서  번째의 힐난에 대한 해설이다. 

반야경전 등에서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말씀하신 것은 의타기성ㆍ원성실성의 법체(法體) 공이 아닌 것을 말하지 않은 것으로,  여환공적(如幻空寂) 점에만 의거해서 그것을 변계소집의 체상도무(體相都無) 함께 모두 제법개공이라 말한 정도이기 때문에 미요의(未了義) 교설이라는 것이다.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처음의 변계소집성은  상무자성(相無自性)이고

다음의 의타기성은 무자연성(無自然性)이며

나중의 원성실성은 앞의 변계소집성에 집착된

자아(我)와 법(法)을 멀리 떠난 것에 의거하는 자성을 말하느니라.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이 원성실성은 제법의 승의(勝義)이며, 또한 곧 진여이니, 
항상 여여하게 그것의 자성이기 때문에, 곧 유식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이다.

ㅡ유식학의 3대단(三大段)인 유식상(唯識相)ㆍ유식성(唯識性)ㆍ유식위(唯識位) 중에  번째의 유식성을 밝힌 것이다.

 

論曰:卽依此前所說三性,立彼後說三種無性。謂卽相、生、勝義無性。

故佛密意說,一切法皆無自性,非性全無。

▷논하여 말한다.; 곧 앞에서 말한  가지의 상섬(三性)에 의거해서  다음에 말한  가지의 삼무자성(三無自性)을 건립하는 것이니, 곧 상무자성(相無自性)ㆍ생무자성(生無自性)ㆍ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써 일체법은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일 뿐, 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ㅡ삼십송의 23게송의 총체적인 답변의 뜻을 해설한 것이다.


說密意言顯非了義,謂後二性雖體非無,而有愚夫於彼增益妄執實有我、法自性,此卽名爲遍計所執。

爲除此執,故佛世尊於有及無摠說無性。

‘밀의(密意)’라는 말은 요의(了義)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뒷부분의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이성(二性) 자체가 없지는 않지만, 어리석은 우부(愚夫) 그것에 대하여 증익(增益)하여서 망령되게 집착하여서 참으로 자아(我)와 법(法)의 자성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니, 이를 곧 변계소집성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 세존께서 실재(有)와 비실재(無)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무자성, 즉 무성(無性)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云何依此而立彼三?謂依此初遍計所執立相無性,由此體相畢竟非有,如空華故。

어떻게 이 상섬(三性)에 의거해서   가지의 삼무자성(三無自性) 건립하는 것인가?

처음의 변계소집성에 의거해서는 상무자성(相無自性)을 건립하나니, 이것의 체상이 궁극적으로 실재가 아닌 비유(非有)이고, 허공 꽃인 공화(空華)와 같은 것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며,

상무자성(相無自性, lakṣaṇa-niḥsvabhāva)은 변계소집자성, 즉 언어에 의해 파악되는 경험세계의 사물은 모두 비실재임을 말한다.

여기에서 상(相, lakṣaṇa)은 사물의 형상 내지 특질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갖가지 표상(表象)을 마음에 떠올리고, 그것에 산ㆍ강ㆍ나무 등을 언어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 자상(自相)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므로, 따라서 언어로써 표현되는 사물인 변계소집성에는 공화(空華)와 같이 자성이 없으므로 상무자성(相無自性)이라 하는 것이다.

 

依次依他立生無性,此如幻事託衆緣生,無如妄執自然性故,假說無性,非性全無。

그 다음의 의타기성에 의거한 것은 생무자성(生無自性)을 건립하나니, 이것은 환술과 같이 여러 연(緣)에 의탁해서 생겨나는 것으로, 허망되게 집착하듯이 자연적인 자성이 없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무성(無性)이라 말하는 것이나, 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생무자성(生無自性, utpatti-niḥsvabhāva)은 의타기자성의 존재성 부정이다.

의타기자성, 즉 현재의 심식(心識)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업의 습기와 현재의 여러 가지 연(緣)의 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생무자성(生無自性)이라 한다.

 

依後圓成實立勝義無性,謂卽勝義,由遠離前遍計所執我、法性故,假說無性,非性全無,

如太虛空雖遍衆色,而是衆色無性所顯。

나중의 원성실성에 의거해서는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을 건립하나니, 곧 승의(勝義)는 앞에서 말한 변계소집성의 자아(我)와 법(法) 멀리 떠난  의거하는 자성이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무성(無性)이라 하는 것이며, 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마치 큰 허공인 태허(太虛)는 갖가지 색법에 두루하지만, 갖가지 색법의 무성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24게송의 3무자성(無自性) 자세히 해설하였다.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 paramārtha-niḥsvabhāva)은 ‘승의(勝義)이며 무자성인 것’의 의미이다. 원성실자성(완성된 진여眞如)이 모든 존재 중에서 최고의 존재, 즉 승의(勝義)이고 일체법의 법무아성(法無我性)이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雖依他起非勝義故,亦得說爲勝義無性,而濫第二,故此不說。

此性卽是諸法勝義,是一切法勝義諦故。

의타기성도 승의가 아니기 때문에 역시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이라고 말할  있지만, 

ㅡ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에서 () () 뜻으로서,  의타기자성은 승의가 아닌 자성이라는 의미이다.

 

 번째의 것과 에 혼동되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지 않으며,

ㅡ의타기성의 승의무자성에 대하여, 원성실성의 승의무자성을 2 승의무자성이라 한다.

 

제25게송에서 ‘이것’의 원성실성의 승의무자성 법의 승의이니, 제법의 승의제(勝義諦)이기 때문이다.

ㅡ제25게송의 유식성(唯識性) 해설한 것이다.


然勝義諦略有四種:一世閒勝義,謂薀、處、界等;二道理勝義,謂苦等四諦;

三證得勝義,謂二空眞如;四勝義勝義,謂一眞法界。

그러나 승의제(勝義諦)에 대략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승의제(世閒勝義諦)로써, 5온ㆍ12처ㆍ18계 등을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도리승의제(道理勝義諦)로써, 고제 등의 4성제를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증득승의제(證得勝義諦)로써, 아공과 법공의 이공(二空)에서 나타난 진여를 말하는 것이며,

넷째는 승의승의제(勝義勝義諦)이니, 참다운 하나의 법계인 일진법계(一眞法界)를 말하는 것이다.


此中勝義依最後說,是最勝道所行義故。爲簡前三故作是說:此諸法勝義,亦卽是眞如。

 가운데에서 ‘승의(勝義)’라는 것은 최후의 것에 의거해서 말하는 것으로,

가장 뛰어난 도(道), 근본지(根本智)가 행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며,

앞의  가지를 가려내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며,

이 원성실성의 승의무자성은 일체법의 승의이고, 또한  진여(眞如)라고 말하는 것이다. 

 

진여(眞如, tathatā)는 우주 만유에 보편적인 상주불변하는 본체이며, 이것은 진실한 경계로서 오직 성품을 증득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진(眞)은 진실이라는 의미로서 허망한 유루제법(有漏諸法)을 가려내고(簡),

여(如)는 여상(如常)이라는 뜻으로서 변천하는 유위무루법(有爲無漏法)을 가려낸다.

만유제법(萬有諸法) 이체(理體) 동일 평등하므로 ()이고, 하나의 () 일법계만차(一法界萬差) 일체법을 갖추어 어느 것이나 자체(體) 말한다면 ()인 것이다.

 

眞謂眞實,顯非虛妄。如謂如常,表無。謂此眞實於一切位常如其性,故曰眞如,卽是湛然不虛妄義。

진(眞)이란 진실로써, 허망한 것이 아님을 나타내며,

여(如)라는 것은 여여하게 상주하는 여상(如常)을 말하는 것으로, 변하여 바뀌어가는 변이(變易)가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진실한 것이고, 모든 지위에서 상주하고 평등한 상여(常如)이면서, 그것의 자성이기 때문에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니, 곧 가득찬 담연(湛然)한 것과 같아서 허망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亦言顯此復有多名,謂名法界及實際等,如餘論中隨義廣釋。此性卽是唯識實性。

제25게송에서 ‘또한의 역(亦)’이라는 말은 이것에 다시 많은 명칭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법계  실제(實際) 등으로 이름하는 것을 말하며,

다른 논서, 즉 '대승아비달마잡집론'의 제2권에서 뜻에 따라 일곱 가지의 명칭이 있다고 자세하게 해석하였으며,

이 자성(性)은  유식의 참다운 성품인 유식실성(唯識實性)인 것이다. 

 

謂唯識性略有二種:一者虛妄,謂遍計所執;二者眞實,謂圓成實性,爲簡虛妄說實性言。

유식의 성품인 유식성(唯識性)에 대략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허망한 유식의 성품인 허만성(虛妄性)으로, 변계소집성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진실한 유식의 성품인, 진실성(眞實性)으로, 원성실성을 말하는 것이다. 

허망한 것을 가려내기 위해서 참다운 성품의 실성(實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復有二性:一者世俗,謂依他起;

다시  가지의 성품이 있으니,

하나는 세속의 유식성으로, 의타기성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승의의 유식성으로, 원성실성을 말하며,  

세속을 가려내기 위해서 참다운 성품의 실성(實性)이라 말하는 것이다.

 

二者勝義,謂圓成實,爲簡世俗故說實性。

다시  가지의 성품이 있으니,

하나는 세속의 유식성으로, 의타기성을 말하며,

다른 하나는 승의의 유식성으로, 원성실성을 말하는 것으로,

세속을 가려내기 위해서 참다운 성품의 실성(實性)이라 말하는 것이다.


三頌摠顯諸契經中說無性言非極了義,諸有智者不應依之摠撥諸法都無自性。

앞에서 말한  가지 게송은 총체적으로 여러 경전 중에서 말씀하신 무자성의 무성(無性)이라는 말이 지극한 요의(了義)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니, 지혜 있는 자라면 그것에 의거해서 총체적으로 일체법이 모두 자성이 없는 것이라고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경계하여야 하는 것이다.

 

如是所成唯識相性,誰於幾位如何悟入?謂具大乘二種姓者,略於五位漸次悟入。

이상과 같이 설명된 유식의 양상인 상(相)과 성품의 성(性)을 어떠한 이  가지 단계에서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대승의  가지 종성을 갖춘 자가 대략 다섯 단계인 오위(五位)의 과정으로 점차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ㅡ정종의교광성분(正宗依敎廣成分) 중에서  가지  분단인 삼대단(三大段)으로 나눈 가운데에서 3대단(第三大段)으로서 유식위(唯識位) 밝힌 것이다. 

이것은 다시  분단으로 나뉘어서,

①먼저 깨달아 들어가는 주체인 사람과경유(經由)하 단계,깨달아 들어가는 방편을 묻는  가지 질문이 있다.


何謂大乘二種種姓?

▷묻습니다; 무엇을 대승의 두 가지 종성인 이종종성(二種種姓)이라 하는 것입니까?

ㅡ세 가지 질문 중에서 처음에 깨달아 들어가는 주체인 사람에 관하여 묻는 것이다.

 

一本性住種姓,謂無始來依附本識法爾所得無漏法因:二習所成種姓,謂聞法界等流法已聞所成等熏習所成。要具大乘此二種姓,方能漸次悟入唯識。 

 

▷답한다; 하나는 본성에 머무는 본성주종성(本性住種姓)으로, 아득한 옛적부터 근본식에 의탁해서 본래부터 있는 무루법의 원인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훈습으로 이루어진 습소성종성(習所成種姓)으로써, 법계로부터 평등하게 흘러나오는 법을 듣고 나서 문혜(聞慧) 등의 훈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반드시 대승의 이 두 가지 종성을 갖춘 사람이 바야흐로 능히 점차 유식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본성주종성(本性住種姓)은 아득한 옛적부터 근본식 중에 본래부터 있는 법이(法爾)의 무루종자를 갖추고, 아직 발심하지 않은 지위에 있으므로 정법(正法)을 들은 일이 없으므로, 따라서 훈습에 의해 그 종자를 증장(增長)시키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습소성종성(習所成種姓)은 이미 발심한 이후에 만약 부정성(不定姓)인 경우는 대승으로 전향한 회심향대(迴心向大) 이후에, 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의 힘에 의해 유루선(有漏善)의 종자를 훈습하고, 본유무루종자를 증장시켜가는 경우이다.

들어서 얻는 지혜인 문소성혜(聞所成慧), 사유하여 얻은 지혜인 사소성혜(思所成慧), 선정 수행으로 얻은 지혜인 수소성혜(修所成慧)의 세 가지 지혜를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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