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9 1

 

若有三性,如何世尊說一切法皆無自性?頌曰:

만약 원성실자성, 의타기자성, 변계소집자성의 삼성(三性) 있다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세존께서 '해심밀경(解深密經)' 제2권에서와 여러 반야경전 등에서 일체법 모두에는 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삼십송'의 제23ㆍ제24ㆍ제25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니,

ㅡ세 가지 무자성인 삼무자성(三無自性),  상무자성(相無自性)ㆍ생무자성(生無自性)ㆍ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 관하여 해설한다.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삼성(三性) 의해서,  가지의 삼무자성(三無自性)을 건립하는 것으로,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써, 제법은 자성이 없는 무성(無性)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유식위교(唯識違敎) 2() 중에서  번째의 힐난에 대한 해설이다. 

반야경전 등에서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말씀하신 것은 의타기성ㆍ원성실성의 법체(法體) 공이 아닌 것을 말하지 않은 것으로,  여환공적(如幻空寂) 점에만 의거해서 그것을 변계소집의 체상도무(體相都無) 함께 모두 제법개공이라 말한 정도이기 때문에 미요의(未了義) 교설이라는 것이다.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처음의 변계소집성은  상무자성(相無自性)이고

다음의 의타기성은 무자연성(無自然性)이며

나중의 원성실성은 앞의 변계소집성에 집착된

자아(我)와 법(法)을 멀리 떠난 것에 의거하는 자성을 말하느니라.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이 원성실성은 제법의 승의(勝義)이며, 또한 곧 진여이니, 
항상 여여하게 그것의 자성이기 때문에, 곧 유식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이다.

ㅡ유식학의 3대단(三大段)인 유식상(唯識相)ㆍ유식성(唯識性)ㆍ유식위(唯識位) 중에  번째의 유식성을 밝힌 것이다.

 

論曰:卽依此前所說三性,立彼後說三種無性。謂卽相、生、勝義無性。

故佛密意說,一切法皆無自性,非性全無。

▷논하여 말한다.; 곧 앞에서 말한  가지의 상섬(三性)에 의거해서  다음에 말한  가지의 삼무자성(三無自性)을 건립하는 것이니, 곧 상무자성(相無自性)ㆍ생무자성(生無自性)ㆍ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써 일체법은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일 뿐, 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ㅡ삼십송의 23게송의 총체적인 답변의 뜻을 해설한 것이다.


說密意言顯非了義,謂後二性雖體非無,而有愚夫於彼增益妄執實有我、法自性,此卽名爲遍計所執。

爲除此執,故佛世尊於有及無摠說無性。

‘밀의(密意)’라는 말은 요의(了義)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뒷부분의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이성(二性) 자체가 없지는 않지만, 어리석은 우부(愚夫) 그것에 대하여 증익(增益)하여서 망령되게 집착하여서 참으로 자아(我)와 법(法)의 자성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니, 이를 곧 변계소집성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 세존께서 실재(有)와 비실재(無)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무자성, 즉 무성(無性)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云何依此而立彼三?謂依此初遍計所執立相無性,由此體相畢竟非有,如空華故。

어떻게 이 상섬(三性)에 의거해서   가지의 삼무자성(三無自性) 건립하는 것인가?

처음의 변계소집성에 의거해서는 상무자성(相無自性)을 건립하나니, 이것의 체상이 궁극적으로 실재가 아닌 비유(非有)이고, 허공 꽃인 공화(空華)와 같은 것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며,

상무자성(相無自性, lakṣaṇa-niḥsvabhāva)은 변계소집자성, 즉 언어에 의해 파악되는 경험세계의 사물은 모두 비실재임을 말한다.

여기에서 상(相, lakṣaṇa)은 사물의 형상 내지 특질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갖가지 표상(表象)을 마음에 떠올리고, 그것에 산ㆍ강ㆍ나무 등을 언어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 자상(自相)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므로, 따라서 언어로써 표현되는 사물인 변계소집성에는 공화(空華)와 같이 자성이 없으므로 상무자성(相無自性)이라 하는 것이다.

 

依次依他立生無性,此如幻事託衆緣生,無如妄執自然性故,假說無性,非性全無。

그 다음의 의타기성에 의거한 것은 생무자성(生無自性)을 건립하나니, 이것은 환술과 같이 여러 연(緣)에 의탁해서 생겨나는 것으로, 허망되게 집착하듯이 자연적인 자성이 없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무성(無性)이라 말하는 것이나, 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생무자성(生無自性, utpatti-niḥsvabhāva)은 의타기자성의 존재성 부정이다.

의타기자성, 즉 현재의 심식(心識)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업의 습기와 현재의 여러 가지 연(緣)의 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생무자성(生無自性)이라 한다.

 

依後圓成實立勝義無性,謂卽勝義,由遠離前遍計所執我、法性故,假說無性,非性全無,

如太虛空雖遍衆色,而是衆色無性所顯。

나중의 원성실성에 의거해서는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을 건립하나니, 곧 승의(勝義)는 앞에서 말한 변계소집성의 자아(我)와 법(法) 멀리 떠난  의거하는 자성이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무성(無性)이라 하는 것이며, 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마치 큰 허공인 태허(太虛)는 갖가지 색법에 두루하지만, 갖가지 색법의 무성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24게송의 3무자성(無自性) 자세히 해설하였다.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 paramārtha-niḥsvabhāva)은 ‘승의(勝義)이며 무자성인 것’의 의미이다. 원성실자성(완성된 진여眞如)이 모든 존재 중에서 최고의 존재, 즉 승의(勝義)이고 일체법의 법무아성(法無我性)이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雖依他起非勝義故,亦得說爲勝義無性,而濫第二,故此不說。

此性卽是諸法勝義,是一切法勝義諦故。

의타기성도 승의가 아니기 때문에 역시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이라고 말할  있지만, 

ㅡ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에서 () () 뜻으로서,  의타기자성은 승의가 아닌 자성이라는 의미이다.

 

 번째의 것과 에 혼동되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지 않으며,

ㅡ의타기성의 승의무자성에 대하여, 원성실성의 승의무자성을 2 승의무자성이라 한다.

 

제25게송에서 ‘이것’의 원성실성의 승의무자성 법의 승의이니, 제법의 승의제(勝義諦)이기 때문이다.

ㅡ제25게송의 유식성(唯識性) 해설한 것이다.


然勝義諦略有四種:一世閒勝義,謂薀、處、界等;二道理勝義,謂苦等四諦;

三證得勝義,謂二空眞如;四勝義勝義,謂一眞法界。

그러나 승의제(勝義諦)에 대략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승의제(世閒勝義諦)로써, 5온ㆍ12처ㆍ18계 등을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도리승의제(道理勝義諦)로써, 고제 등의 4성제를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증득승의제(證得勝義諦)로써, 아공과 법공의 이공(二空)에서 나타난 진여를 말하는 것이며,

넷째는 승의승의제(勝義勝義諦)이니, 참다운 하나의 법계인 일진법계(一眞法界)를 말하는 것이다.


此中勝義依最後說,是最勝道所行義故。爲簡前三故作是說:此諸法勝義,亦卽是眞如。

 가운데에서 ‘승의(勝義)’라는 것은 최후의 것에 의거해서 말하는 것으로,

가장 뛰어난 도(道), 근본지(根本智)가 행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며,

앞의  가지를 가려내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며,

이 원성실성의 승의무자성은 일체법의 승의이고, 또한  진여(眞如)라고 말하는 것이다. 

 

진여(眞如, tathatā)는 우주 만유에 보편적인 상주불변하는 본체이며, 이것은 진실한 경계로서 오직 성품을 증득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진(眞)은 진실이라는 의미로서 허망한 유루제법(有漏諸法)을 가려내고(簡),

여(如)는 여상(如常)이라는 뜻으로서 변천하는 유위무루법(有爲無漏法)을 가려낸다.

만유제법(萬有諸法) 이체(理體) 동일 평등하므로 ()이고, 하나의 () 일법계만차(一法界萬差) 일체법을 갖추어 어느 것이나 자체(體) 말한다면 ()인 것이다.

 

眞謂眞實,顯非虛妄。如謂如常,表無。謂此眞實於一切位常如其性,故曰眞如,卽是湛然不虛妄義。

진(眞)이란 진실로써, 허망한 것이 아님을 나타내며,

여(如)라는 것은 여여하게 상주하는 여상(如常)을 말하는 것으로, 변하여 바뀌어가는 변이(變易)가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진실한 것이고, 모든 지위에서 상주하고 평등한 상여(常如)이면서, 그것의 자성이기 때문에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니, 곧 가득찬 담연(湛然)한 것과 같아서 허망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亦言顯此復有多名,謂名法界及實際等,如餘論中隨義廣釋。此性卽是唯識實性。

제25게송에서 ‘또한의 역(亦)’이라는 말은 이것에 다시 많은 명칭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법계  실제(實際) 등으로 이름하는 것을 말하며,

다른 논서, 즉 '대승아비달마잡집론'의 제2권에서 뜻에 따라 일곱 가지의 명칭이 있다고 자세하게 해석하였으며,

이 자성(性)은  유식의 참다운 성품인 유식실성(唯識實性)인 것이다. 

 

謂唯識性略有二種:一者虛妄,謂遍計所執;二者眞實,謂圓成實性,爲簡虛妄說實性言。

유식의 성품인 유식성(唯識性)에 대략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허망한 유식의 성품인 허만성(虛妄性)으로, 변계소집성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진실한 유식의 성품인, 진실성(眞實性)으로, 원성실성을 말하는 것이다. 

허망한 것을 가려내기 위해서 참다운 성품의 실성(實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復有二性:一者世俗,謂依他起;

다시  가지의 성품이 있으니,

하나는 세속의 유식성으로, 의타기성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승의의 유식성으로, 원성실성을 말하며,  

세속을 가려내기 위해서 참다운 성품의 실성(實性)이라 말하는 것이다.

 

二者勝義,謂圓成實,爲簡世俗故說實性。

다시  가지의 성품이 있으니,

하나는 세속의 유식성으로, 의타기성을 말하며,

다른 하나는 승의의 유식성으로, 원성실성을 말하는 것으로,

세속을 가려내기 위해서 참다운 성품의 실성(實性)이라 말하는 것이다.


三頌摠顯諸契經中說無性言非極了義,諸有智者不應依之摠撥諸法都無自性。

앞에서 말한  가지 게송은 총체적으로 여러 경전 중에서 말씀하신 무자성의 무성(無性)이라는 말이 지극한 요의(了義)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니, 지혜 있는 자라면 그것에 의거해서 총체적으로 일체법이 모두 자성이 없는 것이라고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경계하여야 하는 것이다.

 

如是所成唯識相性,誰於幾位如何悟入?謂具大乘二種姓者,略於五位漸次悟入。

이상과 같이 설명된 유식의 양상인 상(相)과 성품의 성(性)을 어떠한 이  가지 단계에서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대승의  가지 종성을 갖춘 자가 대략 다섯 단계인 오위(五位)의 과정으로 점차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ㅡ정종의교광성분(正宗依敎廣成分) 중에서  가지  분단인 삼대단(三大段)으로 나눈 가운데에서 3대단(第三大段)으로서 유식위(唯識位) 밝힌 것이다. 

이것은 다시  분단으로 나뉘어서,

①먼저 깨달아 들어가는 주체인 사람과경유(經由)하 단계,깨달아 들어가는 방편을 묻는  가지 질문이 있다.


何謂大乘二種種姓?

▷묻습니다; 무엇을 대승의 두 가지 종성인 이종종성(二種種姓)이라 하는 것입니까?

ㅡ세 가지 질문 중에서 처음에 깨달아 들어가는 주체인 사람에 관하여 묻는 것이다.

 

一本性住種姓,謂無始來依附本識法爾所得無漏法因:二習所成種姓,謂聞法界等流法已聞所成等熏習所成。要具大乘此二種姓,方能漸次悟入唯識。 

 

▷답한다; 하나는 본성에 머무는 본성주종성(本性住種姓)으로, 아득한 옛적부터 근본식에 의탁해서 본래부터 있는 무루법의 원인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훈습으로 이루어진 습소성종성(習所成種姓)으로써, 법계로부터 평등하게 흘러나오는 법을 듣고 나서 문혜(聞慧) 등의 훈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반드시 대승의 이 두 가지 종성을 갖춘 사람이 바야흐로 능히 점차 유식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본성주종성(本性住種姓)은 아득한 옛적부터 근본식 중에 본래부터 있는 법이(法爾)의 무루종자를 갖추고, 아직 발심하지 않은 지위에 있으므로 정법(正法)을 들은 일이 없으므로, 따라서 훈습에 의해 그 종자를 증장(增長)시키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습소성종성(習所成種姓)은 이미 발심한 이후에 만약 부정성(不定姓)인 경우는 대승으로 전향한 회심향대(迴心向大) 이후에, 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의 힘에 의해 유루선(有漏善)의 종자를 훈습하고, 본유무루종자를 증장시켜가는 경우이다.

들어서 얻는 지혜인 문소성혜(聞所成慧), 사유하여 얻은 지혜인 사소성혜(思所成慧), 선정 수행으로 얻은 지혜인 수소성혜(修所成慧)의 세 가지 지혜를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라고 말한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8 10

 

又聖教中說有五相,此與三性相攝云何?

所詮、能詮各具三性,謂妄所計屬初性攝,相、名、分別隨其所應,所詮、能詮屬依他起,眞如正智隨其所應,所詮能詮屬圓成實,後得變似能詮相故。二相屬相唯初性攝,妄執義名定相屬故。

또한 성스러운 가르침의 '현양성교론' 제16권 등에서

표현의 주체인 능전(能詮)ㆍ표현의 대상인 소전(所詮)ㆍ상속(相屬)ㆍ집착(執着)ㆍ집착하지 않는 불집착(不執着)의 오상(五相)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 오상(五相)과 원성실성, 의타기성, 변계소집성인 삼성(三性)의 포섭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소전(所詮)과 능전(能詮)에는 각각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을 갖추고 있으니,

허망하게 계탁한 것은 초성(初性)인 변계소집성에 속하고,

상(相, 형사)ㆍ명(名, 명칭)ㆍ분별(分別)은  상응한 것을 따라 소전에도 있고 능전에도 있으며, 의타기성에 속하며,

바른 지혜의 정지(正智)와 진여의 여여(如如)는  상응한 것을 따라 소전에도 있고 능전에도 있으며, 원성실성에 속하는 것으로, 후득지가 전변하여 능전의 상으로 사현하기 때문이며,  

능전(能詮)과 소전(所詮), 두 가지가 서로 포함하는 상은 오직 초성(初性)인 변계소집성 포함되나니,

의(義, 뜻)과 명(名, 명칭) 반드시 서로 포함한다고 망령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ㅡ제2 5(五)와의 포섭관계를 판별한 것이다.

 

경전의 뜻과 이치를 능히 풀이해 드러낼 수 있다고 해서 능전(能詮)이라 하고, 이에 비해서 해석되어서 드러내어지는 뜻과 이치를 소전(所詮)이라 한다.
즉, 문자가 뜻을 발생하는 것을 능전(能詮)이라 하고, 문자에 의해 나타나는 뜻을 소전(所詮)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주관 ․ 객관’이라 하지 않고, 능(能-주된 것)과 소(所-객인 것)라는 말을 많이 쓴다.

모든 경전에서는 법(法)과 의(義)를 통해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는데, 법은 언설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의는 언설의 표현을 통해 전달하는 근본 뜻이다. 따라서 법 없이는 뜻이 드러나지 않고, 뜻이 없는 법은 단순한 음향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법(法)은 가르침 내지 진리를 설명하는 주체이므로 능전(能詮)이라 하고, 의(義)는 법을 통해서 드러나는 객체라서 소전(所詮)이라 한다.- 아미산


彼執著相唯依他起,虛妄分別爲自性故。不執著相唯圓成實,無漏智等爲自性故。

又聖教中說四眞實,與此三性相攝云何?世閒、道理所成眞實依他起攝,三事攝故。

二障淨智所行眞實圓成實攝,二事攝故。

 집착상(執著相)은 오직 의타기성이니, 허망분별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며,

집착하지 않는 불집착상(不執著相) 오직 원성실성이니, 무루의 지혜 등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며, 

또한 성스러운 가르침 중에서  가지 진실인 사진실(四眞實)을 말하였는데,  삼성(三性)과의 포섭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세간에서 이루어진, 세간소성진실(世間所成眞實)과 도리에서 이루어진, 도리소성진실(道理所成眞實) 의타기성에 포함되나니, 상(相, 형사)ㆍ명(名, 명칭)ㆍ분별(分別)의 삼사(三事)에 포함되기 때문이며,

번뇌장과 소지장인 이장(二障)의 청정한 지혜가 행한 진실은 원성실성에 포함되며,

정지(正智)와 여여(如如)의 이사(二事) 포함되기 때문이다.

ㅡ3자성과  가지 진실과의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오사법상섭문(第五四法相攝門).

 

사진실(四眞實), ①세간에서 이루어진 진실인 세간소성진실(世間所成眞實)

②도리에서 이루어진 진실인 도리소성진실(道理所成眞實)

③번뇌장의 청정한 지혜가 행한 진실인 번뇌장정지소행진실(煩惱障淨智所行眞實),

④소지장의 청정한 지혜가 행한 진실인 소지장정지소행진실(所知障淨智所行眞實)이다.


'辯中邊論' 說初眞實唯初性攝,共所執故,

第二眞實通屬三性,理通執、無執、雜染、淸淨故,後二眞實唯屬第三。

'변중변론'의 중권에서의  번째의 세간소성진실(世間所成眞實) 오직  번째의 자성인 변계소집성포함된다고 하나니, 모두 집착된 것인 까닭이며,

제2의 도리소성진실(道理所成眞實) 공통적으로  가지 자성에 속하나니, 도리의 이(理)는 집착ㆍ집착이 없음ㆍ잡염ㆍ청정에 통하기 때문이며,

후의 번뇌장정지소행진실(煩惱障淨智所行眞實)과 소지장정지소행진실(所知障淨智所行眞實)의 두 진실은 오직 제3의 자성인 원성실성(圓成實性)에만 통한다고 하였다.

 

三性四諦相攝云何?四中一一皆具三性。且苦諦中無常等四各有三性。

無常三者:一無性無常,性常無故;二起盡無常,有生滅故;三垢淨無常,位轉變故。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과 4성제의 포섭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사제(四諦) 중의 하나하나에 모두  가지 자성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고성제 중의 무상(無常)   가지에는 각각  가지 자성이 있으니, 무상의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자성이 없는 무성무상(無性無常)이니, 자성이 항상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일어나고 다함의 기진무상(起盡無常)이니, 생멸이 있는 때문이며,

셋째는 더러움과 청정함의 구정무상(垢淨無常)이니, 지위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ㅡ3자성과 4성제의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육사제상섭문(第六四諦相攝門).


苦有三者:一所取苦,我、法二執所依取故;二事相苦;三苦相故;三和合苦,苦相合故。

괴로움의 고(苦)에  가지는 다음과 같으니,

첫째는 취착되는 것의 괴로움인 소취고(所取苦)이니, 아집과 법집의 의지처로서 취해지기 때문이며,

둘째는 양상의 괴로움인 상고(相苦)이니,  가지 괴로움인 삼고(三苦)의 상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화합의 괴로움인 화합고(和合苦)이니, 괴로움의 상과 화합하기 때문이다.


空有三者:一無性空,性非有故;二異性空,與妄所執自性異故;三自性空,二空所顯爲自性故。

공(空)의  가지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첫째는 자성이 없는 무성공(無性空)이니, 자성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다른 자성의 공인 이성공(異性空)이니, 허망하게 집착된 것의 자성과 다르기 때문이며,

셋째는 자성공(自性空)이니, 이공(二空, 아공과 법공)에서 나타난 것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無我三者:一無相無我,我相無故;二異相無我,與妄所執我相異故;三自相無我,無我所顯爲自相故。

무아(無我)의  가지는 다음과 같으니,

첫째는 체상이 없는 무상무아(無相無我)이니, 자아의 체상인 아상(我相)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체상이 다른 이상무아(異相無我)이니, 허망하게 집착된 자아의 아상 다르기 때문이며,

셋째는 자상무아(自相無我)이니, 무아에서 나타난 무아의(無我) 소현所顯) 자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集諦三者:一習氣集,謂遍計所執自性執習氣,執彼習氣假立彼名;二等起集,謂業煩惱;

三未離繫集,謂未離障眞如。

집제(集諦)의  가지는 다음과 같으니,

첫째는 습기의 집제인 습기집(習氣集)이니, 변계소집자성이 집착하는 습기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에 집착하는 습기이므로 가정적으로  명칭을 건립한 것이며,

둘째는 같이 일어나는 집제인 등기집(等起集)이니, 업과 번뇌를 말하며,

셋째는 계박을 떠나지 않은 집제인 미리계집(未離繫集)이니, 아직 장애를 못한 진여를 말한다.


滅諦三者:一自性滅,自性不生故;二二取滅,謂擇滅二取不生故;三本性滅,謂眞如故。

멸제(滅諦)의  가지는 다음과 같으니,

첫째는 자성의 멸제인 자성멸(自性滅)이니, 자성은 생멸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2취(取)의 멸제인 이취멸(二取滅)이니, 택멸을 말하는 것으로,  2취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본성의 멸제인 본성멸(本性滅)이니, 진여이기 때문이다.


道諦三者:一遍知道,能知遍計所執故;二永斷道,能斷依他起故;三作證道,能證圓成實故。

然遍知道,亦通後二。

도제(道諦)의 세 가지는 다음과 같으니,

첫째는 두루 아는 도제인, 편지도(遍知道)이니, 능히 변계소집성을 알기 때문이며,

둘째는 영원히 단멸하는 도제인 연단도(永斷道)이니, 능히 의타기성의 잡염분을 단멸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증득을 이루는 도제인 작증도(作證道)이니, 능히 원성실성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루 아는 편지도(遍知道)는 역시 뒤의 둘에도 통하는 것이다.

 

七三三性,如次配釋。今於此中所配三性或假或實,如理應知。

이상은 각각  가지씩 있는 일곱 종류를성(三性)에 순서대로 배대하여 해석한 것으로,

여기에서 배대한 삼성 비실재인 가(假)이기도 하고 실재인 실(實)이기도 한 것이니,

논리에 맞추어 바로 알아야다.


三解脫門所行境界,與此三性相攝云何?理實皆通,隨相各一,空、無願、相如次應知。

삼해탈문(三解脫門)이 행하는 경계와 성의 포섭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진실로써 말한다면 모두 통하는 것이나, 상(相)을 따라 말한다면 각각 하나이니,

공해탈문ㆍ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ㆍ무상해탈문의 순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ㅡ3자성(三自性)  가지 해탈문의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칠삼법상파문(第七三法相擺門).

 

삼해탈문(三解脫門)은 해탈을 얻는 세 가지 방법으로서, 

①공해탈문(空解脫門)은 일체가 다 공하다고 관찰하는 것이고,

②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은 일체를 구할 것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③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은 상대적인 차별상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緣此復生三無生忍:一本性無生忍,二自然無生忍,三惑苦無生忍。如次此三是彼境故。

이 삼성을 반연하여 다시  가지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일으키나니,

첫째는 본성의 무생법인인 본성무생인(本性無生忍)이고, 

둘째는 자연의 무생법인인 자연무생인(自然無生忍)이며, 

셋째는 미혹ㆍ괴로움의 무생법인인 혹고무생인(惑苦無生忍)이니, 순서대로   가지는 그것 대상이기 때문이다.


此三云何攝彼二諦?應知世俗,具此三種,勝義唯是圓成實性。

世俗有三:一假世俗,二行世俗,三顯了世俗。如次應知卽此三性。

삼성가 어떻게  가지인 이제(二諦)를 포섭하는 것인가? 

마땅히 알라. 세속제(世俗諦)는   종류를 갖추고, 승의제는 오직 원성실성뿐이며,

세속제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허망한 것의 세속제인 가세속(假世俗)이고, 

둘째는 수행의 세속제인 행세속(行世俗)이며, 

셋째는 현료(顯了)의 세속제인 현료세속(顯了世俗)이니, 곧 순서대로의 삼성이라고 알아야 한다.

ㅡ3자성과 진속이제(眞俗二諦)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팔이법상파문(第八二法相擺門).


勝義有三:一義勝義,謂眞如,勝之義故;二得勝義,謂涅槃,勝卽義故;

三行勝義,謂聖道,勝爲義故。無變無倒,隨其所應,故皆攝在圓成實性。

승의제(勝義諦)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도리 승의제인 의승의(義勝義)이니, 진여를 말하는 것으로, 뛰어난 지혜인 승지(勝智)의 경계인 의(義)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증득의 승의제인 득승의(得勝義)이니, 열반을 말하는 것으로, 뛰어난 과보인 승과(勝果)가  경계인 의(義)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수행의 승의제인 행승의(行勝義)이니, 성도(聖道)를 말하는 것으로, 뛰어난 승(勝)으로써 경계인 의(義)를 삼기 때문이다. 

변함이 없는 무변(無變)이고, 전도됨이 없으며,  상응한 것에 따르기 때문에 모두 원성실성에 포함된다.


如是三性,何智所行?遍計所執都非智所行,以無自體,非所緣緣故。

愚夫執有,聖者達無,亦得說爲凡聖智境。依他起性二智所行,圓成實性唯聖智境。

이와 같은성은 어떠한 지혜가 작용하는 것인가?

변계소집성은 전혀 지혜의 행하는 경계가 아니니, 자체가 없으므로 인식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며,

어리석은부(愚夫)는 실재하는 유(有)이라고 집착하고, 성자는 비실재인 무(無)에 통달하였으므로 역시 범부와 성인의 지혜의 경계가 된다고 말할  있으며,

의타기성은 범부와 성인 지혜가 행하는 경계이며, 원성실성은 오직 성인의 지혜의 경계일 뿐이다.

ㅡ범부와 성인의 지혜의 경계를 서술한, 제구범성지경문(第九凡聖智境門).


此三性中幾假幾實?遍計所執妄安立故可說爲假,無體相故非假非實。依他起性有實有假,聚集、相續、分位性故說爲假有,心、心所色從緣生故說爲實有。若無實法,假法亦無,假依實因而施設故。圓成實性唯是實有,不依他緣而施設故。

삼성 중에서  가지가 허망한 가(假)이고, 몇 가지는 참된 실(實)인가?

변계소집성은 허망하게 안립한 이유에서는 허망한 것이라고 말할  있으니, 체상이 없는 이유에서는 허망한 가(假) 아니고 참된 실(實) 아니며,

의타기성에는 참된 실(實) 있고 허망한 가(假) 있으니, 쌓여서 모인 취집(聚集)과 상속과 분위의 속성이기 때문에 가유(假有)라고 말할 수 있으며,

심왕ㆍ심소ㆍ색법은 연(緣)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실유(實有)라고 말할 수 있으나,

만약 실법(實法)이 없다면, 가법(假法) 역시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가유(假有)는 실체의 원인인 실인(實因)에 의거해서 시설하는 까닭에 원성실성은 오직 실유일 뿐이며, 다른 연(緣)에 의거해서 시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3자성의 가실(假實)판별한, 제십가실분별문(第十假實分別門).

 

취집(聚集), 병(甁) 등과 같이 여러 분자(分子)가 모이고 쌓여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此三爲異爲不異耶?應說俱非,無別體故,妄執、緣起、眞義別故。如是三性義類無邊,恐厭繁文,略示綱要。

이 세 가지는 다른 이(異)인가? 다르지 않은 불이(不異)인가?

마땅히 함께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개별적인 체가 없기 때문이며,

허망하게 집착하는 망집(妄執)과 연기(緣起)하는 것은 참다운 대상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삼성의(三性義)의 종류가 끝이 없으나, 번쇄한 문장을 싫어할까 염려되어 간략히 강요(綱要)를 보였다.

3자성의 다르거나 다르지 않음을 배대하여 판별한, 제십일삼성대변이불이문(第十一三性對辦異不異門).

 

成唯識論卷第八 終 성유식론 제 8권을 마침.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8 9

 

云何二性非異非一?

如彼無常、無我等性。無常等性與行等法異,應彼法非無常等。不異,此應非彼共相。

▷묻겠습니다; 어찌하여 두 가지 자성인 이성(二性)이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인 것도 아닌 것입니까?

▷답한다; 그 무상ㆍ무아 등의 자성과 같은 것으로, 무상 등의 자성과 유위법의 행(行) 등의 법이 다르다면, 그 법은 무상 등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다르지 않다면 이 무상(無常)ㆍ공(空)ㆍ무아(無我)는 유위법의 공상(共相)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由斯喩,此圓成實與彼依他非一非異,法與法性理必應然,勝義、世俗相待有故。

非不證見此圓成實,而能見彼依他起性。未達遍計所執性空,不如實知依他有故。

無分別智證眞如已,後得智中,方能了達依他起性如幻事等。

이러한 비유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으니, 이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타기성과 하나도 아닌 비일(非一)이고 다른 것도 아닌 비이(非異)이며,

법, 즉 의타기성과 법성(法性, 진여)은 이치가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니, 승의제(勝義諦)와 세속제(世俗諦)가 서로 상대해서 있기 때문이며,

 원성실성을 깨달아서 보지 못한 불증견(不證見)에서는 의타기성을 능히 볼 수 없으며,

아직 변계소집성이 공한 것을 통달하지 못한 미달(未達)인 때에는, 의타기성의 존재를 참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무분별지혜가 진여를 증득한, 후득지 중에서 비로소 능히 의타기성은 허깨비의 환사(幻事) 등과 같다고 요달하는 것이다.


雖無始來心、心所法,已能緣自相、見分等,而我、法執恒俱行故,不如實知衆緣所引自心、

心所虛妄變現,猶如幻事、陽焰、夢境、鏡像、光影、谷響、水月、變化所成,非有似有。

依如是義故,有頌言:

무시(無始)로부터 심왕과 심소법이 능히 스스로의 상분ㆍ견분 등을 반연하지만,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항상 함께 작용한 까닭에 여러 중연(衆緣)에 이끌려서, 스스로의 심왕과 심소가 허망하게 변현한 것을 참되게 알지 못한 것이니,

비유하면 허깨비와 같은 환사(幻事)ㆍ아지랑이의 양염(陽焰)ㆍ꿈속의 대상인 몽경(夢境)ㆍ거울의 영상인 경상(鏡像)ㆍ빛의 그림자인 광영(光影)ㆍ계곡의 메아리인 곡향(谷響)ㆍ물속의 달인 수월(水月)ㆍ변화로 이루어진 변화소성(變化所成) 같이 실재가 아니지만 실재와 비슷한 것이다. 

이러한 뜻에 의한 까닭에 '후엄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으니, 


非不見眞如 而能了諸行, 皆如幻事等 雖有而非眞。

진여(眞如)를 보지 못한다면, 유위법(제행 諸行)은 모두 환술로 만들어진 것과 같이

비록 존재하긴 하지만 참다운 것이 아닌 비진(非眞)임을 능히 요달한 것이 아니다.


此中意說,三種自性皆不遠離心、心所法。謂心、心所及所變現衆緣生故,如幻事等非有似有,

誑惑愚夫,一切皆名依他起性。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으니,

원성실자성, 의타기자성, 변계소집자성의 삼종자성(三種自性)은 모두 심왕과 심소법에서 멀리 떠나지 않으며,

심왕ㆍ심소  변현된 상분과 견분 여러연(衆緣)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허깨비 등과 같이 실재하는 것이 아닌 비유(非有)이지만 실재로 사현해서 어리석은 범부를 미혹시키나니,

이러한 모든 것을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愚夫於此撗執我、法有、無、一、異俱不俱等,如空花等性相都無,一切皆名遍計所執。

依他起上彼所妄執我、法俱空,此空所顯識等眞性名圓成實。是故此三不離心等。

어리석은 우부(愚夫) 그 의타기성(依他起性)에 대해서 제멋대로 

자아(我)ㆍ법(法)이 실재하는 유(有)라거나 실재하지 않는 무(無)라거나,

하나라는 일(一)이라거나, 다른 것이라는 이(異)라거나,

함께하는 구(俱)라거나, 함께하지 않는 불구(不俱)라는 등으로 집착하나니,

허공 꽃과 같이 자성도 체상도 모두 없으며, 일체 모두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이름하며,

의타기성 위에서 허망하게 집착된 자아(我)ㆍ법(法) 모두는 공(空)이며,

 공(空)에서 나타나는 식(識) 등의 참다운 성품인 진성(眞性)을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따라서 심소ㆍ견분ㆍ상분,  가지 자성은 심왕 등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虛空、擇滅、非擇滅等,何性攝耶?

三皆容攝。心等變似虛空等相,隨心生故依他起攝。愚夫於中妄執實有,此卽遍計所執性攝。

若於眞如假施設有虛空等義,圓成實攝。

허공(虛空)ㆍ택멸(擇滅)ㆍ비택멸(非擇滅) 등은 어떠한 자성에 포섭되는 것인가?

 가지 자성에 모두 포섭된다고 인정되나니, 심왕 등이 전변하여 허공 등으로 사현한 상(相)은 심왕을 따라서 생겨나기 때문에 의타기성(依他起性)에 포섭되는 것으로,

어리석은 우부(愚夫)  중에서 망령되게 실유(實有)로 집착하는 것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에 속하는 것이나,

만약 진여에 대해서 가정적으로 시설하여 있는 허공 등의 뜻은 원성실성(圓成實性)에 속하는 것이다.

열한 가지 부문으로 판별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3자성(三自性)여섯가지의 무위의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십육무위상섭문(第一六無爲相攝門).


有漏心等定屬依他,無漏心等,容二性攝,衆緣生故攝屬依他,無顚倒故圓成實攝。

유루의 심왕 등은 반드시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속하며,

무루의 심왕 등은  가지 자성인 이성(二性)에 포함된다고 인정되나니,

여러연(衆緣)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의타기성에 포함되며,

전도(顚倒)됨이 없기 때문에 원성실성(圓成實性)에 포함된다.


如是三性與七眞如云何相攝?

七眞如者一流轉眞如,謂有爲法流轉實性;二實相眞如,謂二無我所顯實性;

三唯識眞如,謂染淨法唯識實性;四安立眞如,謂苦實性;五邪行眞如,謂集實性;

六淸淨眞如,謂滅實性;七正行眞如,謂道實性。

▷묻습니다; 이와 같은  가지의  3자성(三自性) 일곱 가지의 칠진여(七眞如)는 서로 어떻게 포섭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일곱 가지의 칠진여(七眞如)는 다음과 같으니,

제1은 유전진여(流轉眞如)로써, 유위법의 유전하는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2는 실상진여(實相眞如)이니,  가지의 이무아(二無我)에 나타난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3은 유식진여(唯識眞如이니, 잡염ㆍ청정법이 오직 식(識)이라는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4는 안립진여(安立眞如)이니, 고제(苦諦)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5는 사행진여(邪行眞如)이니, 집제(集諦)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6은 청정진여(淸淨眞如)이니, 멸제(滅諦)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7은 정행진여(正行眞如)이니, 도제(道諦)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한다. 

ㅡ3자성과 7진여의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이십칠진여상섭문(第二七眞如相攝門).

 

진여(眞如, tathatā)는 법계(法界, dharmadhātu)ㆍ법성(法性, dharmatā) ㆍ불허망성(不虛妄性, avitathatā)ㆍ불변이성(不變異性, ananyatathatā) 등의 동의어와 병행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유가유식학파는 진여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으며, 이 용어로써 사물의 궁극적인 진리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일곱 가지의 칠진여(七眞如) 중에서 1유전진여는 생사윤회가 시작도 끝도 없음에 대한 진리이고,

2실상진여는 '반야경'에서 확립된 대승의 인무아(人無我)ㆍ법무아(法無我) 진리이며,

4안립진여부터 7정행진여까지는 전통적인 4성제(聖諦)이나, 3요별진여는 유가유식학파가 새롭게 내세운 진리이다.


此七實性圓成實攝,根本、後得二智境故。隨相攝者,流轉、苦、集三前二性攝,妄執雜染故。餘四皆是圓成實攝。

칠진여(七眞如) 실성(實性) 원성실성에 포섭되나니, 근본지와 후득지의 대상이기 때문이며,

상(相)을 따라서 포함시킨다면, 

유전진여ㆍ안립진여ㆍ사행진여는 앞의  가지 자성인 이성(二性)에 포섭되는 것으로, 허망하게 집착된 것과 잡염이기 때문이며, 나머지 넷은 원성실성에 포섭되는 것이다.


三性六法相攝云何?彼六法中皆具三性,色、受、想、行、識及無爲皆有妄執緣生理故。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과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ㆍ무위(無爲)의 여섯 가지법(六法)의 포섭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육법(六法) 중에는 모두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을 갖추었으니,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무위에 모두 망령되게 집착하는 변계소집성,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의타기성과 도리의 원성실성이기 때문이다.

자성과 6법의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삼삼성육법상섭문(第三三性六法相攝門).


三性五事相攝云何?諸聖教說相攝不定。

謂或有處說依他起攝彼相、名、分別、正智,圓成實性攝彼眞如,遍計所執不攝五事。

彼說有漏心、心所法變似所詮說名爲相,似能詮現施設爲名,能變心等立爲分別,

無漏心等離戲論故但摠名正智,不說能、所詮,四從緣生,皆依他攝。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과 상(相)ㆍ명(名)ㆍ분별(分別)ㆍ정지(正智)ㆍ진여의 여여(如如)의 오사(五事)와의 포섭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포섭관계를 설함에 있어서 일정하지 않으니,

 '유가사지론' 제74권에서는 말하기를, 의타기성에 그것의 상(相)ㆍ명(名)ㆍ분별(分別)ㆍ정지(正智) 포섭하며,

원성실성에는 진여의 여여(如如)진여를 포함하나, 변계소집성에는 오사(五事) 포함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에 의하면 유루의 심왕ㆍ심소법이 전변하여 소전(所詮)으로 사현한 것을 상(相)이라 이름하고,

능전(能詮)으로 사현한 것을 시설하여 명(名, 명칭)으로 삼으며,

능변의 심왕 등은 분별(分別)로 건립하고,

무루의 심왕 등은 희론을 떠났기 때문에 다만 총체적으로 바른 지혜의 정지(正智)라고 이름하였으나,  

능전과 소전은 말하지 않았으니, 네 가지는 연(緣)을 따라서 생겨나므로 모두 의타기성에 포함된다고 말하였다.

ㅡ세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과 오사(五事)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사오사상섭문(第四五事相攝門).


或復有處說依他起攝相、分別,遍計所執唯攝彼名,正智眞如圓成實攝。

彼說有漏心及心所相分名相,餘名分別,遍計所執都無體故,爲顯非有假說爲名,二無倒故圓成實攝。

혹은 다시 '변중변론(辯中邊論)'의 중권에서 말씀하시기를 “의타기성에는 상(相)ㆍ분별(分別) 포함하고,

변계소집성에는 오직 명(名, 명칭)만 포함하며,

바른 지혜의 정지(正智)와 진여의 여여(如如)는 원성실성에 포함된다”고 하였으니,

이에 의하면 유루의 심왕과 심소의 상분(相分)을 상(相)이라 이름하고,

나머지의 견분ㆍ자증분ㆍ증자증분은 분별(分別)이라고 이름하였으니, 변계소집성은 전혀 자체가 없는 무체(無體)이기 때문이며, 실재가 아닌 비유(非有)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명(名, 명칭)이라고 가설한 것이며,  

바른 지혜의 정지(正智)와 진여의 여여(如如), 두 가지는 전도됨이 없기 때문에 원성실성에 포함된다고 말하였다.

 

或有處說依他起性唯攝分別,遍計所執攝彼相、名,正智眞如圓成實攝。

彼說有漏心及心所、相、見分等摠名分別,虛妄分別爲自性故,遍計所執能詮、所詮隨情立爲名、相二事。

'입능가경' 제7권에서 말씀하시기를, 의타기성에는 오직 분별(分別)을 포함하고,

변계소집성에는 상(相) 명(名, 명칭) 포함하며,

바른 지혜의 정지(正智)와 진여의 여여(如如)는 원성실성에 포함된다고 하였으니,

이에 의하면 유루의 심왕ㆍ심소의 상분ㆍ견분 등을 총체적으로 분별(分別)이라 이름하는 것으로, 허망분별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며,

변계소집성의 능전(能詮)ㆍ소전(所詮)은 허망한 생각에 따라 건립하여 상(相)과 명(名, 명칭)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復有處說名屬依他起性,義屬遍計所執,彼說有漏心、心所法、相、見分等由名勢力成所遍計,故說爲名。遍計所執隨名撗計,體實非有,假立義名。

또한 세친의 '섭대승론석' 제5권에서 말하기를 “명(名, 명칭)은 의타기성에 속하고,

의(義), 즉 상(相)과 분별(分別)은 변계소집성에 속한다”고 하였으니,

이에 의하면 유루의 심왕ㆍ심소법의 상분ㆍ견분 등은 명(名, 명칭)의 세력에 의해 소변계(所遍計)가 되기 때문에 명(名, 명칭)이라 하며,

변계소집성은 명(名, 명칭)을 따라서 제멋대로 계탁하므로 자체(體)가 실은 은 실재가 아닌 비유(非有)이며,

즉 상(相)과 분별(分別)은 가정적으로 의(義)라는 이름으로 건립한다고 말하였다.

 

諸聖教中所說五事文雖有異,而義無違。然初所說不相雜亂,如'瑜伽論'廣說應知。

여러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말한 오사(五事)는 문장에서 다른 점이 있지만 그 뜻은 위배되지 않으나,  

처음에 말한 것에 서로 잡란되지 않으니, '유가사지론'에서 자세히 말한 바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8 8

 

初能遍計自性云何?有義八識及諸心所有漏攝者皆能遍計,

처음의 능변계(能遍計)의 자성은 어떠한 것인가?

안혜 등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8식과 모든 심소의 유루에 포함되는 것은 다 능변계이다'라고 하였으니, 

ㅡ안혜는 유루(有漏) 8식이 3(三) 공통적으로 집착함이 있기 때문에 모두 능변계로 삼았다.

 

虛妄分別爲自性故。皆似所取、能取現故,說阿賴耶以遍計所執自性妄執種爲所緣故。

허망분별로써 자성을 삼는다고 '입능가경(入楞伽經)' 제2권에서와 '변중변론(辯中邊論)' 상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모두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로 사현한다고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제4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아뢰야식은 변계소집자성의 허망하게 집착된 종자로써 인식대상으로 삼는다고 '유가사지론' 제51권에서와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제17권에서 말한 때문이다.


有義第六第七心品執我、法者是能遍計,唯說意識能遍計故,

호법 등의 견해로는, 제6식과 제7식의 심품(心品)이 아(我, 자아)와 법(法)으로 집착하는 것이 능변계라고 하였으니,

오직 의(意)ㆍ식(識)만이 능변계라고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제4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ㅡ호법에 의하면, 5식과 8식은 집착이 없으므로 능변계(能遍計) 오직 6식과 7식뿐이라고 하였으며,  

그리고 6식은 진정으로 두루 계탁하는 변계(遍計) 뜻이 있고,

7식은 계탁 하고 두루하지는 않지만, 역시 능변계의 부류라고 말하였다.

 

意及意識名意識故,計度分別能遍計故,

의(意, 제7식)와 제6의식을 의(意) 식(識)으로 이름하기 때문이며, 

두루 계탁하여 분별하는 것이 능변계이기 때문이다. 

ㅡ5식과 8식에는 두루 계탁하여 분별하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능변계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執我、法者必是慧故,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는 것은 반드시 혜(慧)심소이기 때문이며,

ㅡ5식과 8식은 ()심소와 함께하지 않는다.

 

二執必與無明俱故,不說無明有善性故,癡、無癡等不相應故,不見有執導空智故,

執有達無不俱起故,曾無有執非能熏故。

아(我)와 법(法)의 이집(二執)은 반드시 무명과 함께하기 때문이니, 무명에 선(善)의 성품이 있다고 '유가사지론'의 제59권에서 말하지 않은 까닭이며,

치(癡)ㆍ무치(無癡) 등의 심소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집착이 있으면서 공의 지혜인 공지(空智)를 이끈다고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한 때문이며,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 즉 법집(法執)을 일으키는 마음과 실재가 없음을 통달하는 가행지(加行智)가 함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일찍이 집착이 있는 것이 능훈(能熏)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有漏心等不證實故,一切皆名虛妄分別。

유루의 심왕 등은 진리를 증득하지 못한 까닭에 일체 모두가 허망분별이라 이름하며,  

ㅡ앞에서 인용한 '입능가경' 2권과 '변중변론' 상권의 내용을 회통한 것이다.

 

雖似所取、能取相現,而非一切能遍計攝。勿無漏心亦有執故,如來後得應有執故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상(相)으로 사현하지만, 일체가 능변계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무루심에도 역시 집착이 있으며, 여래의 후득지(後得智)에도 역시 집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ㅡ모든 보살과 2() 후득의 무루지혜인 후득지(後得智) 능취(能取) 소취(所取) 상(相) 있으므로 모두 집착이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거늘, 어째서 그렇지 않는 것인가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經說佛智現身、土等種種影像如鏡等故,若無緣用應非智等。

경전에서 부처님의 지혜에는 신(身)ㆍ국토 등의 갖가지 영상(影像)을 나타내는 것이 거울 등과 같다고 '불지경론(佛地經論)' 제3권에서 말씀하신 까닭이니, 만약 연(緣)의 작용이 없다면, 마땅히 지혜 등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부처님의 후득지(後得智) 견분ㆍ상분의 이상(二相) 없다고 말한다면, '불지경(佛地經)'에서 말씀한 것에 위배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경전에 의해 상분(相分) 있음을 증명할 있으며,

“만약 () 작용이 없다면……” 등의 문구에 의해 견분(見分) 있음을 증명할 있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 것인가?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雖說藏識緣遍計種而不說唯,故非誠證。

장식(藏識)은 두루 계탁하는 것의 종자를 반연한다고 말하지만, 오직이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한 증거문장인 성증(誠證)이 아닌 것이며, 

ㅡ'유가사지론' 51권의 내용을 회통한 것으로, 제8식은 오직 두루 계탁하는 것의 종자만을 반연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由斯理趣唯於第六第七心品有能遍計。識品雖二,而有二三四五六七八九十等遍計不同,故言彼彼。

이러한 논리의 취지에 의거해서 오직 제6식과 제7식의 심품에만 능변계가 있으며,

식품(識品)은 둘이지만,  자성분별과 차별분별의 둘ㆍ자아ㆍ법ㆍ작용 또는 자성분별ㆍ수념분별(隨念分別)ㆍ계탁분별의 셋 또는 넷ㆍ다섯ㆍ여섯ㆍ일곱ㆍ여덟ㆍ아홉ㆍ열 가지 등의 두루 계탁하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피피(彼彼)’라고 말하는 것이다.

ㅡ제20게송의 1 중에서 ‘이러저러한 피피(彼彼)’라는 말을 해설하였다.

 

次所遍計自性云何?'攝大乘說'是依他起,遍計心等所緣緣故。

다음은 제20게송의 제2구에서의 소변계의 자성은 어떠한 것인가?

'섭대승론' 제 4권에서 의타기성뿐이라고 말하였으니, 두루 계탁하는 심왕 등의 소연연(所緣緣)이기 때문이다.


圓成實性寧非彼境?

眞非妄執所緣境故,依展轉說亦所遍計。遍計所執雖是彼境,而非所緣緣,故非所遍計。

遍計所執其相云何?與依他起復有何別?

有義三界心及心所由無始來虛妄熏習,雖各體一,而似二生,謂見、相分卽能、所取,

如是二分情有理無,此相說爲遍計所執。二所依體實託緣生,此性非無,名依他起,虛妄分別緣所生故。

▷묻습니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어째서 그것의 대상이 아닙니까?

▷답한다; 참다운 자성은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의 소연연(所緣緣)이 아니기 때문이며,

전전(展轉)하는 것에 의거해서 말한다면, 역시 소변계(所遍計)인 것이다.

변계소집은 집착심(執着心)의 대상이지만 인식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소변계가 아니니,

변계소집성의 체상은 어떠한 것이며?

또한 의타기성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안혜 등의 견해로는, 삼계의 심왕ㆍ심소가 무시(無始)로부터 허망하게 훈습함에 의해서 각각의 체(體)는 하나이지만 두 가지로 사현하는 것이니,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을 말하는 것이며, 곧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2분(二分)은 허망한 생각의 정(情)에는 있으나, 진실한 본성의 이(理)에는 없으며,

이러한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양상을 변계소집성이라고 '변중변론'의 상권에서 말하였으며,

두 가지의 의지처인 자체는 실제로 연(緣)에 의탁해서 생겨나는 것이니, 이것의 체성이 비실재가 아닌, 비무(非無)를 의타기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허망분별의 연(緣)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ㅡ삼십송의 제3구와 제4구를 해설한 것으로, 

안혜의 견해 의하면, 자체(體) 하나인 자체분으로부터 능취(能取) 소취(所取) 사현(似現) 견분과 상분을 직접 변계소집(遍計所執)으로 삼는, 자체분만이 의타기(依他起) 자체가 있는 유체법(有體法)이고,

견분과 상분은 변계소집의 자체가 없는 무체법(無體法)이라고 하였다.

그 이분(二分) 총체적인 비실재인 총무(總無) 하고, 그것을 의지처로 하여 일어나는 자아와 법을 개별적인 비실재인 별무(別無)라고 하였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두루 계탁(計度)하여 집착하는 성질"이며, "fully conceptualized (완전히 개념화되다)"라고 직역되며 "imaginary nature (상상성 · 가상성)"라고 번역되며, 존재의 허망한 상태를 말한다.
의타기성(依他起性),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성질"이며, "other dependent (다른 것에 의존하는)"라고 직역되며 "dependent nature (의존성)"라고 번역되며, 연기(緣起)의 성질을 말한다.
원성실성(圓成實性), "원만히 성취한 실재하는 성질"이며, "fully accomplished (완전히 성취하다)"라고 직역되며 "absolute nature (절대성)"라고 번역되며, 존재의 진실한 상태를 말한다. - 위키


云何知然?

諸聖教說虛妄分別是依他起,二取名爲遍計所執。有義一切心及心所由熏習力所變二分從緣生故,亦依他起。遍計依斯妄執定實有、無、一、異、俱不俱等,此二方名遍計所執。

▷묻습니다; 어떻게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까?

▷답한다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 '변중변론' 상권 등에서 허망분별은 의타기성이니, 2취(二取)를 변계소집으로 이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호법 등의 견해로는, 모든 심왕ㆍ심소가 훈습의 세력에 의해 변현된 견분과 상분의 2분(分)도 연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역시 의타기성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며,

두루 계탁하는 변계(遍計)는 이러한 견분과 상분의 2분(分)에 의거해서 허망하게, 참으로 반드시 있는 유(有)라거나 반드시 없는 무(無)라거나, 같은 것(一)이라거나 다른 것(異)이라거나, 함께하는 구(俱)라거나 함께하지 않는 불구(不俱)라는 등으로 집착하나니, 이러한 두 가지를 비로소 변계소집성이라 이름하는 것이라 하였다.

ㅡ호법 등의 견해로써, 그에 의하면 견분과 상분은 ()에서 생겨나는 법이므로 의타기성이고, 견분과 상분의 2() 위에 자아와 법으로 집착하는 허망한 생각에서 일어나는 실아실법(實我實法) 모습을 변계소집이라고 이름하였다.


諸聖教說唯量唯二唯種種,皆名依他起故。

'섭대승론석' 등의 여러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오직 인식하는 양(量, 식識)과 오직 견분(見分)과 상분(相分) 두 가지와 여러 가지의 종종(種種)을 의타기성으로 이름하기 때문이며, 

ㅡ오직 인식하는 양(量)이란 오직 () 것을 말하며, 

여러 가지의 종종(種種)이란 행상(行相) 있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又相等四法、十一識等,論皆說爲依他起攝故。不爾,無漏後得智品二分應名遍計所執,

許應聖智不緣彼生,緣彼智品應非道諦,不許應知有漏亦爾。

또한 상(相)ㆍ명(名)ㆍ분별(分別)ㆍ정지(正智) 등의 사법(四法)과

ㅡ사법(四法)이란, 다섯 가지의 오법(五法)의 상(相)ㆍ명(名)ㆍ분별(分別)ㆍ정지(正智)ㆍ진여(眞如)에서 진여를 제외한 나머지를 말한다.

 

십일식(十一識) 등을 논서, '섭대승론석의 제4권에서와, '유가사지론' 제 72권과 73권에서 모두 의타기성에 포섭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니,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루의 후득지품의 두 가지 심분인 이분(二分)도 변계소집으로 이름해야 할 것이며,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마땅히 성인의 지혜는 의타기성의 상분(相分)을 반연하여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며,

의타기성의 상분(相分)을 반연하는 지혜도 도제(道諦)가 아니어야 할 것이나,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유루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십일식(十一識)은, ①신식(身識)으로 안근 등의 오근(五根)

②신자식(身者識), 5식의 의지처인 의계(意界), ③수자식(受者識), 제6식의 의지처인 의계(意界), 

④피소수식(彼所受識), 색경 등의 육진(六塵), ⑤피능수식(彼能受識), 육식계(六識界),

⑥세식(世識), 삼시(三時)에 비슷한 영상으로 나타난 것, ⑦수식(數識), 하나 등의 산술(算術)과 비슷함,

⑧처식(處識, 마을 등으로 사현함,), ⑨언설식(言說識:보고 듣는 등의 언설에 비슷한 모습을 나타냄), ⑩자타별식(自他別識:나ㆍ나의 소유라는 집착을 일으킴,

⑪선악취생사식(善惡趣生死識, 오취(五趣) 들에 비슷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들이며,

이 11 가지 식 중에서 ①④⑧⑨⑪을 합해서 의타기성으로 삼기 때문에 상분(相分)도 역시 의타기성이라고 밝히는 것이다.


又若二分是遍計所執,應如兔角等非所緣緣,遍計所執體非有故。又應二分不熏成種,後識等生應無二分。又諸習氣是相分攝,豈非有法能作因緣?若緣所生內相、見分非依他起,二所依體例亦應然,無異因故。

또한 만약 상분과 견분, 두 가지의 심분이 변계소집이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토끼의 뿔 등과 같이 소연연(所緣緣)이 아니어야 할 것이니, 변계소집은 자체가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두 가지 심분은 종자를 훈습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다음 찰나의 식(識) 등이 일어날 때에는 두 가지 심분이 없어야 할 것이며,

또한 모든 습기는 상분에 포함되는 것으로, 어찌 실재가 아닌 비유법(非有法)이 능히 인연이 될 수 있겠는가?

만약 인연에 의해 생겨난 내부의 상분과 견분은 의타기성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 두 가지 심분의 의지처인 자체분인, 의타기성(依他起性)인 식체(識體)도 견주어서 역시 그러해야 할 것이니, 다른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由斯理趣,衆緣所生心、心所體及相、見分有漏無漏皆依他起,依他衆緣而得起故。

이러한 논리의 취지에 의거해서 여러 가지 연(緣)에서 일어난 심왕과 심소의 자체분  견분ㆍ상분은 유루이든 무루이든 모두 의타기성(依他起性)인 것으로, 다른 여러 가지 연에 의해서 일어날  있기 때문이다.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은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법을 말한다. 의타기는 초기불교 이래의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에 대하여 유식 논사들이 새로 만들어 사용한 용어이다. 유식(唯識)이라고 할 때의 그 존재성은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의타기(paratantra)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유식 논사들은 식일원론의 입장에서 경험세계가 성립하는 기체(基體)로서의 식을 연기법, 즉 의타기성으로 불렀다.


頌言分別緣所生者,應知且說染分依他,淨分依他亦圓成故。

'삼십송'의 제21게송 중의 제2구에서 말하는 “분별이며, 연(緣)들에서 생기하는도다”라는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잡염분의 의타기성만을 말하는 것으로, 청정분의 의타기성은 역시 원성실성에도 있기 때문이다.


或諸染淨心心所法皆名分別,能緣慮故,是則一切染淨依他皆是此中依他起攝。二空所顯圓滿、成就、諸法實性名圓成實。顯此遍、常,體非虛謬,簡自、共相、虛空、我等。

혹은 모든 잡염ㆍ청정의 심왕과 심소법 모두를 분별(分別)이라고 이름하나니, 능히 반연하여 사려하기 때문이며,

모든 잡염ㆍ청정의 의타기법 모두는  가운데 의타기성에 포섭된다. 

이공(二空)에서 나타나며, 원만하고 성취된 것이며, 제법의 참다운 성품을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이름한다. 

이 진여(眞如)가 두루하고(遍), 항상하며(常), 자체가 비거나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닌 실(實)을 나타내는 것으로, 자상(自相)과 공상(共相), 허공과 자아 등을 가려내는(簡) 것이다.

ㅡ두루한다는(遍) 것은 자상(自相) 가려내는 것으로, 일체법의 자상은 법의 자체인 법체(法體) 국한되기 때문에 다른 것에 공통되지 않으며, 오직 진여(眞如)만이 일체법에 두루한 것이며,

항상한다는 것은 공상(共相) 가려내는 것으로, 무상(無常)ㆍ공()ㆍ무아(無我)는 일체법에 두루하지만, 자체가 실유(實有) 아니며, 또한 자체가 비거나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소승과 외도에서 자체가 상주(常)라고 주장하는 허공과 자아 등을 가려낸 것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ṣpanna-svabhāva)은 궁극적인 진실, 곧 완성된 진여이다. 그것은 존재적 측면에서 진여(眞如)이고, 인식적으로는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모든 존재 가운데에서 최고의 가치를 갖는 승의(勝義, paramārtha)이다.


無漏有爲離倒,究竟,勝用周遍,亦得此名,然今頌中說初非後。

무루의 유위(有爲), 즉 청정분(淸淨分)의 의타기성는 전도(顚倒)를 떠난 궁극적인 것이며, 뛰어난 작용의 승용(勝用)이 널리 두루하므로 역시 이러한 명칭을 붙일  있다. 

그러나, 지금 게송 중에서는 처음의 것, 즉 진여의 원성실성을 말하는 것으로, 나중의 것은 아닌 것이다.

ㅡ무루의 유위법은 증득된 것이 아니고 법성(法性) 아니기 때문에  게송 중에서 원성실성 중에는 포함시키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此卽於彼依他起上常遠離前遍計所執,二空所顯眞如爲性。

이 원성실성은   의타기성 위에서 항상 앞에서 말한 변계소집성을 멀리 떠나고, 이공(二空)에서 나타난 진여로써 자성을 삼는다.

 

說於彼言,顯圓成實與依他起不卽不離。常遠離言,顯妄所執能所取性理恒非有。

前言義顯不空依他,性顯二空非圓成實,眞如離有離無性故。

제21게송에서 ‘그것에 있어서’라고 말하는 것은, 원성실성은 의타기성과 즉(卽)하는 하나도 아니고, 떨어진(離) 별개도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며,

제21게송에서 ‘항상 멀리 떠난, 상원리(常遠離)’라는 말은, 망령되게 집착된 능취와 소취의 자성은 항상 있는 비유(非有)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며,

‘앞의 전(前)’이라는 말의 뜻은, 의타기성을 공(空)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며,

‘성품의 성(性)’이라는 것은, 이공(二空) 원성실성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진여는 실재를 떠난 이유(離有)이고 비실재도 떠난 이무(離無)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ㅡ진여는 공의 성품인 공성(空性)으로, 진여가  공인 진여즉공(眞如卽空)이 아니나, () 원인으로 해서 진여가 참으로 현현되기 때문이다.


由前理故,此圓成實與彼依他起非異非不異,異應眞如非彼實性,不異此性應是無常。彼此俱應淨、非淨境,則本後智用應無別。

앞에서 말한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의 부즉불리(不卽不離)의 이치 의거하기 때문에,  원성실성은  의타기성과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니,

다르다고(異) 말한다면, 마땅히 진여는 그 의타기성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다르지 않은 불이(不異)라고 말한다면, 이 진여의 속성은 무상한 것이어야 할 것이며,

그 의타기성과 이 진여 모두가 청정과 청정하지 않은 경계가 되어야 할 것으로,

만약 그러하다면  근본지와 후득지의 작용에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다.

ㅡ세 가지 자성인 삼자성(三自性)이 다르거나 다르지 않은 상을 판별한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8 7

 

如何道諦實能感苦?誰言實感?

▷묻겠습니다; 어떻게 도제(道諦)가 실로 괴로움을 능히 초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답한다; 누가 실제로 초감한다고 말하였는가?


不爾如何?無漏定願資有漏業,令所得果相續長時,展轉增勝,假說名感。

▷묻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그러한 것입니까?

▷답한다; 무루의 선정과 원력이 유루(有漏)의 업을 의지하여 얻는 과보를 상속하고, 오랜 세월 동안 전전하여 증성하게 함을 가정적으로 초감(招感)이라고 이름하나니,

ㅡ색계 4(第四禪) 무루의 뛰어난 선정에 의해 유루업(有漏業) 의지하고, 얻는 과보를 상속하고 새로 생겨나게 하고, 오랜 기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전전(展轉)하면서 증성하게 한다. 

실제로는 유루업이 초감하는 것으로서, 다만 무루의 돕는 세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초감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무루업이 실제로 괴로움을 초감하는 것은 아님을 밝힌 것이다.

 

如是感時,由所知障爲緣助力,非獨能感。然所知障不障解脫,無能發業潤生用故。

이와 같이 초감할 때에는 소지장이 연(緣)이 되어 조력(助力)하는 것으로, 홀로 능히 초감하는 것이 아니나, 

소지장은 해탈을 장애하지 않으니, 능히 업을 일으켜서 태어남을 촉진하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何用資感生死苦爲?自證菩提利樂他故。

謂不定性獨覺、聲聞及得自在大願菩薩,已永斷伏煩惱障故,無容復受當分段身。恐廢長時修菩薩行,遂以無漏勝定願力,如延壽法資現身因,令彼長時與果不絕。數數如是定願資助,乃至證得無上菩提。

▷묻습니다; 어떻게 도와서 생사의 고통을 초감하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스스로 깨달음을 증득하고, 남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니,

결정적이지 않은 부정성(不定性)의 독각과 성문 및 자재함을 증득한 대 원력의 보살은 이미 영원히 번뇌장을 조복하고 단멸한 까닭에 다시 미래의 분단신(分段身)을 수용하지 않으니, 오랜 세월 동안 보살행을 닦는 것을 그만두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무루의 뛰어난 선정과 원력의 힘으로써 수명을 연장하는 법처럼 현재의 몸의 원인인 현신인(現身因)을 도와서 그 업을 오랜 세월 동안 과보와 함께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니, 

누차 이와 같이 선정과 원력으로써 돕는 것을 최상의 깨달음인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함에 이르기까지 하는 것이다.

 

彼復何須所知障助?

旣未圓證無相大悲,不執菩提有情實有,無由發起猛利悲願。又所知障障大菩提,爲永斷除,留身久住。又所知障爲有漏依,此障若無,彼定非有,故於身住有大助力。

▷묻습니다; 또한 어찌하여 그는 소지장(번뇌의 습기)으로써 돕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무상(無相, 진여)과 대비(大悲)를 원만히 증득하지 않았을 때에는 깨달음인 보리(菩提)와 유정(有情)과 참으로 존재한다는 실유(實有)에 집착하지 않아서, 맹렬한 자비와 원력을 일으킴에 의하지 않으며,

또한 소지장(번뇌의 습기)은 큰 깨달음을 장애하나니, 영원히 단멸시키기 위해서 유신(留身)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며, 

또한 소지장은 유루를 의지처로 삼나니, 만약 이 장애가 없다면 유루법(有漏法)도 반드시 없는 것이니, 따라서 몸의 머무름인 유신(留身)에 크게 돕는 힘이 있게 되는 것이다.

ㅡ무상(無相) 차별상이 없는,  진여(眞如) 말한다.


若所留身有漏定願所資助者,分段身攝,二乘異生所知境故。無漏定願所資助者,變易身攝,非彼境故。

만약 몸의 머무름인 유신(留身)이 유루의 선정과 원력에 의지한다면 분단신(分段身)에 포함되나니, 2승과 이생(異生, 범부)의 소지장의 경계이기 때문이며,

무루의 선정과 원력에 의지하는 것이면 변역신에 포함되나니, 2승(乘)과 이생(異生, 범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由此應知變易生死,性是有漏,異熟果攝,於無漏業是增上果,有聖教中說爲無漏出三界者,隨助因說。

頌中所言諸業習氣,卽前所說二業種子。二取習氣卽前所說二障種子,俱執著故。俱等餘文義如前釋。

이러함에 의거해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변역생사(變易生死)의 성품은 유루이고 이숙과에 포함되며, 무루의 업에 대해서는 증상과인 것이다.

'십지경론(十地經論)'의 제12권에서 무루가 되어 3계를 벗어난다고 말한 것은, 무루가 돕는 원인인 조인(助因)을 따라 말한 것이며,

'삼십송'의 제19 게송 중에서 말하는 ‘모든 업의 습기’는  앞에서 말한  가지의 유루업(有漏業)과 무루업(無漏業) 종자이며,

‘2취 습기(二取 習氣)’란  앞에서 말한 번죄장과 소지장인 이장(二障) 종자이니, 모두 집착하기 때문이며,  

제19게송에서 ‘함께함의 구(俱)’ 등의 나머지 문장의 뜻은 앞에서 해석한 바와 같은 것이다.


變易生死雖無分段前後異熟別盡別生,而數資助,前後改轉,

변역생사는 분단생사가 이전과 이후의 전후이숙(前後異熟)이 별도로 다하는 별진(別盡)과 별도로 일어나는 별생(別生)은 없지만, 수차의 선정과 원력의 도움으로 전과 이후 것을 고쳐서 전환하는 것이니,

의지하는 업력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므로 증성하게 하기 위해서, 이전의 악한 것을 고치고 전환하여 이후의 수승한 것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

 

亦有前盡餘復生義。雖亦由現生死相續,而種定有,頌偏說之。

역시 이전의 두드러지게 악한 추악(麤惡) 다하고 다른 것, 즉 승묘(勝妙)함이 다시 생겨나는 뜻이 있으며,

역시 현행에 의거해서 생사가 상속하지만, 종자가 반드시 있는 것이니, 게송에서 그것에 비중을 두어 말한 것이다.

ㅡ현행(現行) 많이 단절되기 때문에 '삼십송'의 19게송에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或爲顯示眞異熟,因果皆不離本識,故不說現,現異熟因不卽與果,轉識閒斷,非異熟故。

前、中、後際生死輪迴,不待外緣,旣由內識。

혹은 참다운 이숙의 원인(업종자)과 결과(근본식)는 모두 근본식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현행을 말하지 않았으니, 현행의 이숙의 원인인 이숙인(異熟因)은  결과와 함께하는 것은 아닌 것이며,

전식(轉識, 7식)은 잠시 단절됨이 있으므로 이숙이 아니기 때문이며,

과거와 현재  미래세에서 생사에 윤회하는 것은 외부대상인 외연(外緣)을 기다리지 않는 것으로, 내부의 식에 의거한다고 이미 말하였다.

 ㅡ6 중에서도 역시 이숙과가 있는데, 어째서 게송에서 이전의 6식이 다하여 이후의 것이 생겨남 등으로 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6식은 참다운 이숙인 진이숙(眞異熟) 아니므로 6식의 현행을 말하지 않은 것으로, 게송에서는 이에 비중을 두어 8식을 말한 것은, 이것이 진정으로 생사가 상속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전식(轉識),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 · 말나식의 7식(七識)은 모두 제8식인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긴 것 또는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하여서 이들을 7전식(七轉識) 또는 전식(轉識)이라 부르며, 또한 이들 7가지 식들을 전7식(前七識)이라고도 한다.-위키

 

淨法相續應知亦然,謂無始來依附本識有無漏種,由轉識等數數熏發漸漸增勝,乃至究竟得成佛時,轉捨本來雜染識種,轉得始起淸淨種識,任持一切功德種子,由本願力,盡未來際,起諸妙用,相續無窮,由此應知唯有內識。

청정법이 상속하는  역시도 그러하다고 알아야 하나니, 시작이 없는 무시(無始)로부터 근본식에 의탁해 있는 무루종자가, 전식(轉識) 등이 반복적으로 훈습되어서 일으킴에 의해서 점차 증성해지는 것으로, 나아가 구경에 이르러 성불할 즈음에는 본래의 잡염의 식의 종자를 전환하여 버리고, 이에 비로소 일어나는 청정한 종자식을 전환하여 증득하여서 모든 공덕의 종자를 지니는 것이다. 

본원의 힘에 의거해서 미래세가 다하도록 여러 승묘한 작용을 일으킴이 상속하여 다함이 없으므로, 이러함에 의거해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오직 내부의 식인 내식(內識)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若唯有識,何故世尊處處經中說有三性?

▷묻겠습니다; 만약 오직 식(識)만이 있다면, 어찌하여 세존께서 여러 경전에서 세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ㅡ'삼십송'의 1게송 중에서 “자아와 법을 가설함으로 인하여 (자아ㆍ법의) 갖가지들이 생겨난다는 유가설아법(由假說我法) 유종종상전(有種種相轉)”이라는 문구를 자세하게 해설하는 중에서, 1단의 바른 논리에 위배되는 비판들을 해석하였다. 

이하는 2단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되는 비판들을 해석한 것으로, 이것은  가지의 분단으로 나뉘며, 1단에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ㆍ의타기성(依他起性)ㆍ원성실성(圓成實性)  가지 자성, 삼종자성(三種自性) 해설한, 삼성의(三性義)이다.

 

應知三性亦不離識,所以者何?頌曰:

▷답한다; 마땅히 알라. 세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도 역시 식을 떠나지 않는 것이니, 왜인가? '삼십송'의 제20ㆍ21ㆍ22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니, 

ㅡ유식위교(唯識違敎),  유식학이 경전의 말씀에 어긋난다는  가지 힐난인 이난(二難) 중,  번째에 대한 해설로써, 만약 외경(外境) 없다면 '해심밀경'에 나오는 3종자성(三種自性) 성립될  없다는 힐난에 대해 성의 진정한 의미를 해설하여 유식무경(唯識無境) 취지에 위배되지 않음을 밝힌다.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이러저러하게 두루 계탁함에 의해서 갖가지 사물을 두루 계탁하나,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자성은 실재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이다.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은 분별이며, 연(緣) 등에서 생기하는 연소생(緣所生)이네.

ㅡ여기에서 중연(衆緣) 인연(因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ㆍ소연연(所緣緣)ㆍ증상연(增上緣) 4() 말하며,

심법은 모두 이들 4연에 의지하고, 색법은 인연ㆍ증상연의 2연에 의해서 생기하므로, 연생(緣生) 색심제법(色心諸法) 모두 의타기성인 것이다.

 

3성(三性)은 수행자가 수행을 통하여 알아야 할 법 또는 알아야 할 바 즉 알아야 할 모든 앎이라는 뜻에서 소지법(所知法) 또는 줄여서 소지(所知)라고 한다. '섭대승론석' 제1권과 '성유식론' 제3권에 따르면, 소지(所知) 즉 알아야 할 바 즉 3성(三性)이란 염정(染淨), 즉 염(染)과 정(淨), 즉 잡염법과 청정법을 말한다.
이들 3성(三性) 즉 알아야 할 법 즉 모든 잡염법과 청정법은 모두 그 의지처 즉 발동근거가 제8아뢰야식이기 때문에 제8아뢰야식을,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라는 뜻에서 소지의(所知依)라고도 부른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parikalpita-svabhāva), "두루 계탁(計度)하여 집착하는 성질"이며, "fully conceptualized (완전히 개념화되다)"라고 직역되며 "imaginary nature (상상성 · 가상성)"라고 번역되며, 존재의 허망한 상태를 말한다.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성질"이며, "other dependent (다른 것에 의존하는)"라고 직역되며 "dependent nature (의존성)"라고 번역되며, 연기(緣起)의 성질을 말한다.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ṣpanna-svabhāva), "원만히 성취한 실재하는 성질"이며, "fully accomplished (완전히 성취하다)"라고 직역되며 "absolute nature (절대성)"라고 번역되며, 존재의 진실한 상태를 말한다. - 위키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은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앞의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 항상 멀리 떠난 성품인 이니라.

ㅡ 즉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을 항상 멀리 떠난 이공소현(二空所顯)의 진여ㆍ법성(法性)을 의미하는 것으로, 진여는 공(空)의 성(性)이다.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그러므로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은 의타기자성과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니, 

ㅡ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의 비일비이성(非一非異性) 말하는 것으로,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현상(現像) 실성(實性) 관계이기 때문이다. 현상은 () (相)이고, 체(體)는 상(相)의 체이다.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무상, 즉 무아(無我)와 공(空) 등의 자성과 같나니,

ㅡ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의 비일비이성을 비유한다면, 색법 등의 자상이 무상(無常)ㆍ고()ㆍ무아(無我)ㆍ공() 공상(共相) 비일비이(非一非異) 것과 같은 것이다.

 

원성실성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것, 의타기성이 보이지 않는다네.

ㅡ의타기성을 참으로 자각할  있는 것은 원성실성에서이다. 꿈은 깨어났을 때 비로소 그것이 꿈인 것을 아는 것과 같이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신 부처님만이 연기법의 이치를 확연히 아시는 것이. 

 

論曰:周遍計度,故名遍計。品類衆多,說爲彼彼。謂能遍計虛妄分別。

▷논하여 말한다. 널리 두루 주변(周遍)을 꾀하고 헤아리는 계도(計度)하기 때문에 변계(遍計)라 이름하나니, 품류(品類)가 매우 많아서 ‘이러저러한 피피(彼彼)’라고 말하는 것이며, 능변계의 허망분별을 가리키는 것이다.

ㅡ먼저 변계소집성에 관하여 자세하게 해설한 것으로, 먼저 난타(難陀) 등의 견해이다. 

그러나  변계소집올 해설함에 있어서 안혜와 호법은 능변계(能遍計) 소변계(所遍計)  변계소집(遍計所執)  가지인 삼중(三重)을 건립하고,

난타 등은 소변계가  변계소집이라고 하면서, 오직 능변계와 소변계의  가지인 이중(二重)으로 건립하였다.

 난타는 20게송의 1구는 능변계를 밝히고, 나머지  문구 소변계를 밝힌 것이라고 말하였다.

 

卽由彼彼虛妄分別,遍計種種所遍計物。謂所妄執薀、處、界等,若法若我自性差別。此所妄執自性差別,摠名遍計所執自性。如是自性都無所有,理教推徵不可得故。

곧 그들 허망분별에 의해서 갖가지 변계된 사물인 소변계(所遍計)를 두루 계탁하나니,

허망하게 집착된 5온ㆍ12처ㆍ18계 등의 법(法)ㆍ자아의 자성인 아자성(我自性)ㆍ차별을 말하는 것으로, 

이 허망하게 집착된 자성ㆍ차별을 총체적으로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이라 이름하며, 이와 같은 자성은 전혀 실재하는 바가 없는 것이니, 바른 논리와 성스러운 가르침에 의해 추리하고 비판해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변계소집자성(parikalpita-svabhāva)은 두루 분별하여 착각하며 집착하는, 즉 분별된 존재성이다. 이것은 주체면에서 능변계(能遍計)와 대상면에서 소변계(所遍計)로 나눈다.

①능변계(能遍計)의 작용은 우선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견분을 실아(實我)로 착각하는 것으로, 이러한 근본무명인 아치(我痴)로부터 갖가지 번뇌가 생겨나며, 또한 의식이 외부대상을 두루 분별하여 선과 악 등으로 인식ㆍ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②소변계(所遍計)는 식의 이와 같은 계탁작용에 의해 실재하는 것으로 집착되어진 대상, 즉 ‘사현된 자아와 사현된 법인 사아사법(似我似法)’이다. 경험세계의 사물은 허공 꽃과 같이 실재성이 없음에도, 우리의 식에 의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개념이나 언어로써 파악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런 사물을 ‘무(無)’라고 함으로써 그 존재가 철저히 부정되며, 그 존재성의 부정은 상무자성(相無自性)이라 한다.


或初句顯能遍計識,第二句示所遍計境,後半方申遍計所執若我若法自性非有,已廣顯彼不可得故。

혹은 게송의 처음 구절은 능변계의 식(識)을 나타내고, 두 번째 구절은 소변계의 대상인 경(境)을 나타내며,

후반부는 바야흐로 변계소집의 자아ㆍ법의 자성이 실재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미 그것이 있을 수 없음을 본 논서 제7권에서 자세하게 나타내 보였기 때문이다.

ㅡ안혜와 호법의 견해로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삼중변계(三重遍計) 건립하였다.

게송의 1구는 능변계인 () 밝히고, 2구는 소변계인 대상(境) 나타내며,

이후의 2구는 참으로 변계소집(遍計所執) 실아실법(實我實法) 체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는 것이.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8 6

 

有義一切皆通二斷,論說預流果已斷一切一分有支,無全斷者故。若無明支唯見所斷,寧說預流無全斷者?若愛、取支唯修所斷,寧說彼已斷一切支一分?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일체 모두가  가지의 단멸에 통한다는 것이다.

논서, '유가사지론' 제10권에서 말하기를 “예류과는 이미 일체에서 일부분의 지분인 유지(有支)을 단멸하였으나, 전부 단멸한 이는 없다”고 한 까닭이니,

만약 무명의 지분은 오직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면, 어째서 예류과에서는 전부 단멸한 자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애(愛)ㆍ취(取)의 지분이 오직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면, 어째서 '유가사지론' 제10권에서 이미 모든 지분의 일부분을 단멸했다고 말하겠는가?

 

又說全界一切煩惱皆能結生,往惡趣行唯分別起煩惱能發。不言潤生唯修所斷,諸感後有行皆見所斷發,

또한 계의 일체 번뇌 모두는 능히 다음 생(生)을 받는다고 '유가사지론' 59권에서 말하였으며, 

악취(惡趣)에서 왕래하는 행(行)은 오직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번뇌만을 능히 일으킨다고 '유가사지론' 59권에서 말하였다.

생을 촉진하는 윤생(潤生) 오직 수도에서 단멸될 뿐이며, 모든 미래세의 존재를 초감하는  모두가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으로써 일으킨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ㅡ모든 성스러운 가르침 중에서 태어남을 촉진하는 윤생(潤生) 미혹은 오직 수도에서 단멸되는 수소단(修所斷)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삼계의 번뇌가 능히 다음 생을 받게하는 결생(結生)하는 것기 때문이며,

역시 모든 미래세의 존재인 후유(後有) 초감하는 () 모두 견도에서 단멸되는 견소단(見所斷)으로써 일으킨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오직 악취(惡趣) 행만이 분별의 미혹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견소단(見所斷, darśana-prahātavya)은 무루혜(無漏慧)에 의한 4제(諦)의 관찰인 견도(見道)에 의해 끊어지는 법(法)들을 말하며, 여기서의 법은 번뇌(煩惱)인 유루법(有漏法)들과 이것들과 상응하여 함께 발생하는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들을 말한다.

수소단(修所斷, bhāvanā-heya)은 선정(禪定)을 통한 반복된 관찰, 즉 4제(諦)를 관찰하고 나서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자주자주 도(道)를 수습하는 것인 수도(修道)에 의해 끊어지는 법(法)으로, 여기서의 법은 번뇌(煩惱)인 유루법(有漏法)들과 이것들과 상응하여 함께 발생하는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들을 말한다. 수도소단(修道所斷), 수단(修斷) 또는 수혹(修惑)이라고도 한다.-위키

 

由此故知無明、愛、取三支亦通見、修所斷。

이것에 의거하여 무명(無明)ㆍ애(愛)ㆍ취(取)의 세 지분은 역시 견도에서 단멸되는 견소단(見所斷) 수도에서 단멸되는 수소단(修所斷)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然無明支正發行者,唯見所斷,助者不定,愛、取二支正潤生者唯修所斷,助者不定。

그러나 무명(無明)의 지분에 있어서 진정으로 행(行), 즉 총보업(總報業)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견도에서 단멸되는 견소단(見所斷)일 뿐이며, 일정하지 않은 도움이며,

애(愛)ㆍ취(取)의 두 지분에 있어서 진정으로 생(生)을 촉진하는 것은 오직 수도에서 단멸되는 수소단(修所斷)일 뿐이며, 일정하지 않은 도움이다.

 

又染污法自性應斷,對治起時彼永斷故,一切有漏不染污法非性應斷,不違道故。

然有二義說之爲斷。一離縛故,謂斷緣彼雜彼煩惱,二不生故,謂斷彼依令永不起。

또한 염오법(染污法)은 자성이 마땅히 단멸되어야 하는 것이니, 다스리는 무루지혜의 법인 무루명법(無漏明法) 일어날 때에는 그것이 영원히 단멸되기 때문이며, 

모든 유루의 불염오법(不染污法)은 자성이 마땅히 단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니, 도(道)를 거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지 뜻이 있으니, 그것을 단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하나는 계박을 떠나는 이박(離縛)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그것을 반연하여 그것에 잡란되는 번뇌를 끊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불생(不生)이 때문이니, 그것의 의지처를 단멸해서 영원히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말한다.

ㅡ모든 단멸(斷) 뜻을 자세하게 해설한다.


依離、縛斷說有漏善、無覆無記唯修所斷,依不生斷說諸惡趣無想定等唯見所斷。

계박을 떠나는 단멸에 의거해서 유루선(有漏善)ㆍ무부무기(無覆無記)는 오직 수도에서 단멸될 뿐이니,

불생(不生)단멸에 의거해서 모든 악취와 무상정(無想定) 등은 오직 견도에서 단멸될 뿐이라고 '유가사지론' 제57권에서 말하였다.


說十二支通二斷者,於前諸斷如應當知。

유가사지론 등에서 십이지(十二支)가  가지 단멸됨에 통한다고 말한 것은, 앞의 여러 가지 단멸에 상응하는 것에 맞추어  알아야 하는 것으로,

ㅡ무명ㆍ애()ㆍ취() 자성단(自性斷)이고, 

() () 일부분은  가지 단멸에 공통되며,

() 등의 일곱 가지는 오직 이계단(離繫斷) 불생단(不生斷)이니, 잡염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十樂、捨俱,受不與受共相應故,老死位中多分無樂及容捨故,十一苦俱非受俱故。

수(受)와 노사(老死)의 지분을 제외한 열 가지 지분은 낙수(樂受)ㆍ사수(捨受)와 함께하나니,

수(受)의 지분은 느낌(受)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고, 

노사(老死)의 단계에서는 대부분 낙수와 객(客), 육식(六識)의 사수(捨受)가 없기 때문이며,

앞의 열 가지에서 노사의 지분을 첨가한 11 가지는 고수(苦受)와 함께하나니, 수(受)의 지분은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 삼수(三) 함께함을 판별한, 제십삼삼수구문(第十三三受俱門).


十一少分壞苦所攝,

11 가지 지분의 일부분은 자기가 사랑하던 것이 없어질 때에 느끼는 괴로움인 괴고(壞苦)에 포섭되며,

ㅡ12 가지 지분 중에 공통적으로 고고(苦苦) 행고(行苦) 속성이 있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제외하여서 ‘일부분인 소분(少分)’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老死位中多無樂受,依樂立壞故不說之。十二少分苦苦所攝,一切支中有苦受故。

十二全分行苦所攝,諸有漏法皆行苦故。依捨受說十一少分,除老死支如壞苦說。

實義如是,諸聖教中隨彼相增所說不定。

노사(老死)의 단계에서는 대부분 낙수(樂受)가 없으니, 낙수에 의거해서 괴고를 건립하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며,

12 가지 지분의 일부분은 신체적으로 배고프거나, 병이 나거나, 춥고 덥거나, 힘든 노동을 할 때에 느끼는 괴로움인 고고(苦苦)에 포섭되나니, 모든 지분 중에는 고수(苦受)가 있기 때문이며,

12 가지 지분의 전부는 생멸 변화에 의해서 느끼는 고통인 행고(行苦)에 포섭되나니, 모든 유루법은  생멸 변화의 괴로움이기 때문이며,

사수(捨受)에 의거해서 말한다면, 11 가지 지분의 일부분으로, 노사(老死) 지분은 제외하는 것으로 괴고에서 말한 바와 같다. 

진실한 의미로써 말한다면 이상과 같으나, 여러 성교(聖教)에서는  상(相)의 증성함을 따라 설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ㅡ열두 가지 지분 중에서  가지 괴로움인 삼고(三苦)를 판별한, 제십사삼고분별문(第十四三苦分別門).


皆苦諦攝,取薀性故。五亦集諦攝,業、煩惱性故。

모두 고제(苦諦)에 포함되나니,취온(取蘊)의 성품이기 때문이며,

행(行)ㆍ유(有)ㆍ무명ㆍ애(愛)ㆍ취(取)의 5 가지는 역시 집제(集諦)에 포섭되나니, 업과 번뇌의 성품이기 때문이며,

ㅡ4성제(聖諦)에 포섭되는 관계를 판별한, 제십오사제문(第十五四諦門)으로,

다섯 가지가 집제(集諦) 포섭된다는 것은, ()ㆍ유() 업의 속성이고,

무명ㆍ애()ㆍ취() 번뇌의 성품이기 때문이.

 

諸支相望增上定有,餘之三緣有無不定。契經依定唯說有一。

모든 지분이 서로 배대하여서 증상연은 반드시 있으나,

나머지연(三緣)은 있고 없음이 일정하지 않으니, 경전에서는 결정적인 것에 의거해서 오직 하나만이 있다고 말씀하였다.

ㅡ'연기경(緣起經)' 하권에서 오직 하나의 증상연(增上緣)만이 있다고 말씀한 것은 결정적으로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한 것으로, 나머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회통하는 것이다.

 

愛望於取,有望於生,有因緣義。

애(愛) 지분을 취(取)에 배대하고, 유(有) 지분을 생(生) 지분에 배대한 것은 인연(因緣)의 뜻이 있으며,

ㅡ애(愛)가 증성한 것을 취(取)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애(愛) 종자가 취(取)를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 등의 다섯 가지 지분을 바꾸어 유(有)라고 이름하고, 생겨난 현행을 생이라 이름하므로,

따라서 애를 취에 배대하고, 유를 생에 배대하여서 인연의 뜻이 있게 되는 것이.

 

若說識支是業種者,行望於識亦作因緣。餘支相望無因緣義。 

만약 식(識)의 지분은 업종자라고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4권에서 말한 때문이라고 한다면, 행(行)을 식(識)에 배대하여도 역시 인연이 되나, 나머지 지분을 서로 배대하는 것에는 인연의 뜻이 없다. 

ㅡ4() 판별한, 세십육사연문(第十六四緣門).


而'集論'說無明望行有因緣者,依無明時業習氣說,無明俱故假說無明,實是行種。

그러나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4에서 무명을 행(行)에 배대하여 인연이 있다고 말한 것은, 무명 시기(時)의 업습기(業習氣)에 의거한 것이며,

무명과 함께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무명이라고 말한 것으로, 실제로는 행의 종자인 행종(行種)인 것이다.

ㅡ'대승아비달마집론' 4권의 내용을 회통한 것으로, 무명을 () 배대하여 인연의 뜻이 있다고 말한 것은, 무명과 동시(同時) 의지의 업인 사업(思業) 의거한 것으로, 진정한 무명은 아니다.

 

'瑜伽論'說諸支相望無因緣者,依現愛、取唯業有說。

'유가사지론' 제 10권에서 모든 지분을 서로 배대하여 인연이 없다고 말한 것은,

현행의 애(愛)ㆍ취(取) 및 오직 업(業)이 있는 것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ㅡ'유가사지론' 10권의 내용을 회통한 것으로,  가지의 삼(三) 있다고 말하고, 모든 지분을 서로 배대하여 인연이 없다고  것은 현행의 ()ㆍ취() 의거한 것으로, 종자에 의거한 것이 아니며,

또한 업종자의 존재인 유(有) 의거해서 말한 것으로, (등의 다섯 가지의 종자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연이 있다고 말하지 않아도 위배되는 것은 아니라고 회통하는 것이다.


無明望行,愛望於取,生望老死,有餘二緣。有望於生,受望於愛,無等無閒,有所緣緣。

무명(無明)을 행(行)에 배대하고, 애(愛)를 취(取)에 배대하며, 생(生)을 노사(老死)에 배대해서는 그 나머지  가지 연(緣)인, 등무간연(等無間緣)과 소연연(所緣緣)이 있으니,

유(有)를 생(生)에 배대하고, 수(受)를 애(愛)에 배대하면 등무간연은 없으나, 소연연은 있으며,

()ㆍ수() 지분은 종자이기 때문에, 종자를 현행에 배대하면 등무간연이 아닌 것이다.

 

餘支相望,二俱非有。此中且依鄰近順次不相雜亂實緣起說。異此相望爲緣不定,諸聰慧者如理應思。

나머지 지분을 서로 배대하면, 등무간연(等無間緣)과 소연연(所緣緣)의 두 가지 모두가으니,

 가운데에서는 또한 가까이하는 근(近), 순서가 있는 순차(順次), 서로 잡란하지 않는 참다운 연기(緣起)에 의거해서 말하는 것이며,

이것에 다르게 서로 배대해서는 연(緣)이 되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총명하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모두 바른 이치에 맞게 생각해야 하리라.

 

惑、業、苦三攝十二者,無明、愛、取是惑所攝。行、有一分是業所攝,七、有一分是苦所攝。

혹(惑)ㆍ업(業)ㆍ고(苦)의  가지에 12지(支)를 포섭시키는 것을 말한다면,

무명(無明)ㆍ애(愛)ㆍ취(取)는 혹(惑, 미혹)에 포함되며,

행(行)과 유(有)의 일부분은 업(業)에 포함되며,

식(識) 등 다섯 가지와 생(生)ㆍ노사(老死)의 지분의 7 가지와 유(有)의 일부분은 고(苦, 괴로움)에 포함된다.

ㅡ미혹ㆍ업ㆍ괴로움과 12()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십칠혹업고섭지문(第十七惑業苦攝支門).


有處說業全攝有者,應知彼依業有說故。有處說識業所攝者,彼說業種爲識支故。

'유가사지론' 제56권과 '십지경론(十地經論)' 제8권 등에서 유(有)를 업(業)에 모두 포섭시킨다고 말한 것은, 

그것은 업의 존재에 의거해서만 말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며,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4권에서 식(識)도 업(業)에 포함된다고 말한 것은, 업종자를 식의 지분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惑業所招獨名苦者,唯苦諦攝爲生厭故。由惑業苦卽十二支,故此能令生死相續。

혹(惑, 미혹)과 업(業)에 초감된 것만을 독립적으로 고(苦, 괴로움)라고 이름한 것은, 오직 고제(苦諦)에만 포함되므로 혐오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혹(惑)ㆍ업(業)ㆍ고(苦)는 12 가지 지분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것이 능히 생사(生死)를 상속하게 하는 것이다.

ㅡ생사(生死) 상속(相續) 관한  번째 해설로써, 분단생사(分段生死)와 불사의변이생사(不思議變易生死) 관하여 설명한다.

 

復次,生死相續由內因緣,不待外緣,故唯有識。因謂有漏、無漏二業正感生死,故說爲因。緣謂煩惱、所知二障助感生死,故說爲緣。

또한 생사(生死)를 상속하는 것은, 내부의 인(因, 원인)과 연(緣)에 의한 것으로서 외부의 연을 기다리지 않으므로, 오직 식(識)만이 있으며,

인(因, 원인)이란, 유루와 무루의  가지 업을 말하는 것이니, 진정으로 생사를 초감하기 때문에 인(因, 원인)이라 하는 것이며,

연(緣)이라는 것은 번뇌장과 소지장을 말하는 것으로, 도와서 생사를 초감하기 때문에 연(緣)이라 하는 것이다.


所以者何?生死有二:一分段生死。謂諸有漏善、不善業,由煩惱障緣助勢力,所感三界麤異熟果。

身命短長隨因緣力,有定齊限,故名分段。

▷묻습니다; 어찌하여 그러한 것입니까?

▷답한다; 생사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단생사(分段生死)로써, 모든 유루의 선ㆍ불선의 업이 번뇌를 돕는 연의 세력에 의해서 초감한, 삼계의 구체적인 상인 추이숙과(麤異熟果)를 말하는 것이니, 몸(身)과 목숨에 장단(長短)이 있으며, 인(因, 원인) 연(緣)의 세력을 따라 결정적인 제한(際限)이 있기 때문에 분단(分段)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ㅡ생사(生死) 체(體) 나타낸다.  


二不思議變易生死。謂諸無漏有分別業,由所知障緣助勢力,所感殊勝細異熟果,由悲願力改轉身命,無定齊限,故名變易。無漏定願正所資感,妙用難測,名不思議。

둘째는 부사의변역생사(不思議變易生死)이니, 모든 무루의 유분별의 업이 소지장(所知障)의 연이 돕는 세력에 의해서 초감한, 뛰어나고 미세한 수승세이숙과(殊勝細異熟果)를 말하는 것이니,

자비와 원력의 힘에 의거해서, 몸(身)과 목숨 전환하여 결정적인 제한이 없기 때문에 변역(變易)이라고 이름하며,

무루의 선정과 원력에서 진정으로 의지하고 초감되어서 승묘한 작용이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에 부사의(不思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或名意成身,隨意願成故,如契經說,如取爲緣,有漏業因續後有者而生三有,如是無明習地爲緣,無漏業因有阿羅漢、獨覺、已得自在菩薩,生三種意成身。

혹은 의성신(意成身)이라고 이름하나니, 의지의 원력, 즉 대비심(大悲心)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말씀하기를 “취(取)의 지분을 연(緣)으로 하고 유루의 업을 인(因, 원인)으로 하여서 미래세의 유(有)를 상속한 자가계에 태어나며,

이와 같은 무명습지(無明習地)를 연(緣)으로 하고 무루의 업인 유분별(有分別)의 후득지(後得智)를 인(因, 원인)으로 하며, 대승으로 전향한 아라한과 독각  8지(地) 이상으로 이미 자재를 얻은 보살의  가지 의생신(意生身)을 일으킨다”고 '승만경(勝鬘經)'에서 말하고 있다.

 

무명습지(無明習地)는 견혹(見惑)ㆍ사혹(思惑)ㆍ무명의 번뇌를 다섯 가지로 분류한 5주지번뇌(五住地煩惱)로써,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ㆍ애욕주지(愛欲住地)ㆍ색애주지(色愛住地)ㆍ유애주지(有愛住地)ㆍ무명주지(無明住地)의 하나이며, 이것은 곧 소지장(所知障)으로서 법집(法執)에 포함된다.


亦名變化身,無漏定力轉令異本,如變化故。如有論說,聲聞無學永盡後有,云何能證無上菩提?依變化身證無上覺,非業報身,故不違理。

역시 변화신(變化身)이라고도 이름하나니, 무루의 선정의 힘으로써 전환하여 근본, 즉 분단신(分段身)과 다르게 함에 있어서 변화와 같기 때문이며, '현양성교론' 제16권에서 말한 것과 같다.

성문의 무학은 영원히 미래세의 존재인 후유(後有)를 다하나니,

어떻게 능히 최상의 깨달음인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한다고 하는 것인가?

변화신에 의거해서 최상의 깨달음인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하며, 업보신(業報身)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바른 논리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若所知障助無漏業能感生死,二乘定性應不永入無餘涅槃,如諸異生拘煩惱故

만약 법집에 의해 생기하는, 소지장(所知障)이 무루의 업을 도와서 능히 생사를 초감한다고 말하는 2승의 결정적인 종성인 정성(定姓)은 영원히 무여의열반에 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모든 범부가 번뇌에 얽매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8 5

 

老非定有,附死立支。病何非支?

不遍定故。老雖不定,遍故立支。諸界、趣、生,除中夭者,將終皆有衰朽行故。

▷묻겠습니다; 늙음의 노(老)는 반드시 존재 형성의 지분이 아닌 것이니, 죽음의 사(死)에 덧붙여서 지분(支)으로 건립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병(病)을 지분(支分)으로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답한다; 병(病)은 보편적인 것도 아니고 결정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늙음의 노(老)는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이기 때문에 지분으로 건립하는 것으로,

모든 계(界, 삼계)ㆍ취(趣, 오취)ㆍ생(生, 사생)에서 일찍 죽는 자를 제외하고 장차 죽으려  때에 모두 노쇠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ㅡ삼계(三界), 욕계 색계 무색계

5취(五趣),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간ㆍ천상)

4생(四生), 태생(胎生)ㆍ난생(卵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

 

名色不遍,何故立支?定故立支。胎、卵、濕生者,六處未滿,定有名色故。

▷묻습니다; 명색(名色)도 보편적인 것이 아닌데, 무슨 까닭으로 지분으로 건립한 것입니까?

▷답한다; 결정적이기 때문에 지분으로 건립한 것이다.

태(胎)로 태어나는 태생(胎生), 알로 태어나는 난생(卵生), 습기로 태어나는 습생(濕生)에는 여섯 가지 인식기관인 육처(六處)가 아직 구족되지 않았을 때부터 반드시 명색이 있기 때문이다.


又名色支亦是遍有,有色化生初受生位雖具五根,而未有用,爾時未名六處支故。

初生無色雖定有意根,而不明了,未名意處故,由斯論說十二有支一切一分上二界有。

또한 명색(名色)의 지분도 역시 보편적인 것이니, 색계에서 화생(化生)의 초기에 생명을 받는 단계에서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인 오근(五根)을 갖추지만, 아직 작용이 있지 않은 때에는 아직 6처의 지분인 육처지(六處支)라고 이름하지 않으며,

처음 무색계에 태어날 때에는 의근(意根)이 있지만, 명료하지 않으므로 아직 의처(意處)라고 이름하지 않으며,

이러함으로 논서, '유가사지론' 제10권에서 말하기를 “12유지의 모든 하나하나의 지분이 색계와 무색계에 있다”고 한 것이다.


愛非遍有,寧別立支?生惡趣者不愛彼故。

定故別立,不求無有生善趣者定有愛故,不還潤生愛雖不起,然如彼取定有種故。又愛亦遍,生惡趣者於現我境亦有愛故,依無希求惡趣身愛經說非有,非彼全無。

▷묻습니다; 갈애(愛)는 보편적이지 않은 것인데, 어째서 별도의 지분으로 건립한 것입니까?

악취에 태어난 자는 그곳을 애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답한다. 결정적이기 때문에 별도로 건립한 것이다.

미래세의 존재(有)가 없기를 구하지 않으며, 살기 좋은 세계에 태어나는 자는 반드시 애착이 있기 때문이며,

불환과(不還果)가 태어남을 촉진하는 것은 애착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그것의 취착과 같이 반드시 종자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애(愛)도 역시 보편적인 것으로, 악취에 태어나는 자는 현재의 자아와 대상에 대해서 역시 애착이 있기 때문이며,

악취의 몸을 희구하는 애착이 없는 것에 의거해서 경전, '연기경(緣起經)' 상권에서 있지 않다고 말씀한 것으로, 그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何緣所生立生、老死,所引別立識等五支?

▷묻습니다; 무엇에 반연하여 생겨난 것에는 생ㆍ노사의 지분으로 건립하고, 이끌려진 소인(所引)에는 별도로 식(識)ㆍ명색(名色)ㆍ6처(六處)ㆍ촉(觸)ㆍ수(受)식 등의 다섯 가지 지분으로 건립한 것입니까?

 

因位難知差別相故,依當果位別立五支。謂續生時因識相顯,次根未滿名色相增,次根滿時六處明盛,依斯發觸,因觸起受,爾時乃名受果究竟,依此果位立因爲五。果位易了,差別相故,摠立二支以顯三苦。然所生果若在未來爲生厭故,說生、老、死。若至現在,爲令了知分位相生,說識等五。

▷답한다; 원인의 단계인 인위(因位)에서는 차별상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결과의 단계에 의거해서 별도로 다섯 가지 지분으로 건립한 것이다.

다음 생이 이어지는 시기에는 원인인 식(識)의 상(相)을 나타내며,

다음에 감각기관이 아직 구족하지 않은 때에는 명색(名色)의 상(相)을 증장시키며,

다음에 감각기관이 구족할 때에는 6처(六處)가 분명하게 성숙하며,

이것에 의지해서 촉(觸)을 일으키고, 촉에 의거하여 수(受)를 일으키나니, 그 때를 과보를 받는 수과(受果)가 다 이루어진다고 이름하며,

이 과보의 단계에 의지해서 원인을 건립하여 다섯 가지로 삼나니,

과보의 단계에서는 차별된 상(相)을 알기 쉽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생(生)과 노사(老死)의 두 가지 지분인 이지(二支)을 건립함으로써 삼고(三苦)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생겨난 과보인 소생과(所生果)가 미래에 있을 때에는 혐오를 일으키기 때문에 생ㆍ노사라고 말하며,

만약 현재에 이르렀을 때에는 분위가 서로 생겨나게 하는 것을 알게 하기 때문에 식(識) 등의 다섯 가지로 말하는 것이다.

 

삼고(三苦)란 태어남은 행고(行苦), 늙음은 괴고(壞苦), 죽음은 고고(苦苦).


何緣發業摠立無明?潤業位中別立愛、取?

▷묻습니다; 무엇에 반연한 까닭으로, 업을 일으키는 데에 총체적으로 무명만을 건립하고, 업을 성숙시키는 지위에서는 별도로 애ㆍ취(取)의 지분을 건립한 것입니까?

 

雖諸煩惱皆能發潤,而發業位無明力增,以具十一殊勝事故,謂所緣等,廣如經說。於潤業位愛力偏增,說愛如水能沃潤故。要數漑灌方生有芽,且依初後分愛取二,

▷답한다; 모든 번뇌는 다 업을 일으키고 성숙시키지만, 업을 일으키는 단계에서는 무명의 세력만이 증성하여서, 11 가지 뛰어난 십일수승사(十一殊勝事)를 갖추기 때문이니,

인식대상의 뛰어남 등을 말하는 것으로, 자세한 것은 '연기경(緣起經)'의 상권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으며,

업을 성숙시키는 단계에서는 애(愛, 갈애)의 세력만이 집중적으로 증성하나니, 갈애는 물(水)이 능히 기름지고 윤기 나게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까닭에 반드시 여러 번의 물을 끌어 대어 비로소 유(有)라는 싹을 일으키는 것이며,

또한 애(愛, 갈애) 처음과 나중에 의거해서 애ㆍ취 두 가지를 나누나니,

ㅡ애(愛, 갈애) 증성한 것을 취(取, 취착)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처음을 애(愛, 갈애)라고 이름하고 나중을 취(取, 취착)라고 이름한다.

 

無重發義立一無明。雖取支中攝諸煩惱,而愛潤勝說是愛增。

거듭해서 업을 일으키는 뜻이 없으므로 하나의 무명만으로 건립하나니, 취(取)의 지분 중에서 모든 번뇌를 포함하지만, 애가 성숙시키는 것에 뛰어나므로 애가 증성시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업을 일으키는 발업(發業)의 뜻은 거듭해서 일으키는 뜻이 없음을 말한다.

 

십일수승사(十一殊勝事), 제1은 인식대상의 뛰어남의 소연승(所然勝)으로, 두루 잡염법과 청정법을 반연하기 때문이며,

제2는 작용의 뛰어남인 행상승(行相勝)으로, 진실한 것을 조복하고 허망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제3은 인연의 뛰어남인 인연승(因緣勝)으로, 미혹과 업이 생겨나는 근본이기 때문이며,

제4는 평등하게 일으킴의 뛰어남의 등기승(等起勝)이니, 평등하게 능히 능인연(能引緣)ㆍ소인연(所引緣)ㆍ능생연(能生緣)ㆍ소생연(所生緣)의 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제5는 전이의 뛰어남의 전이승轉異勝)이니, 수면(隨眠)ㆍ전박(纏縛)ㆍ상응(相應)ㆍ불공(不共)의 네 가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며,

제6은 삿된 행의 뛰어남인 사행승(邪行勝)이니, 4성제에 대해서 증익ㆍ손감의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제7은 모습의 뛰어남인 상상승(相狀勝)이니, 미세한 자상(自相)이 두루 애착할 만한 것과 애착할 만한 것이 아닌 것의 공상(共相)에 널리 통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며,

제8은 작업의 뛰어남의 작업승(作業勝)이니, 유전(流轉)이 의지처인 소의(所依)를 조작하고, 적정함이 능장(能障)의 일을 조작하기 때문이며,

제9는 장애의 뛰어남의 장애승(障礙勝)이니, 뛰어난 법과 광대한 광법(廣法, 무위진여無爲眞如)를 장애하기 때문이며,

제10은 따라서 전전함의 뛰어남인 수전승(隨轉勝)이니,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 따라서 전전하기 때문이며,

제11은 다스림의 뛰어남인 대치승(對治勝)이니, 두 가지 승묘한 지혜에서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諸緣起支皆依自地,有所發行依他無明?,

如下無明發上地行。不爾,初伏下地染者,所起上定應非行支,彼地無明猶未起故。

▷묻습니다; 모든 연기(緣起)의 지분은 모두 자기 지위에 의지한다고 '유가사지론' 제56권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어떤 상지(上地)에서 일으켜지는 행(行)은 다른 하지(下地)의 무명(無明)에 의지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하지(下地, 욕계)의 무명이 상지(上地)의 행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에 하지의 잡염을 조복시킨 자가 일으킨 상지의 선정은 행(行)의 지분이 아니어야 하는 것으로, 그 지위의 무명은 오히려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從上下地生不上者,彼緣何受而起愛支?彼愛亦緣當生地受,若現若種,於理無違。

▷묻습니다; 상지(上地)와 하지(下地)로부터 상지가 아닌 곳에 태어나는 자는, 어떤 수(受)를 반연해서 애(愛)의 지분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답한다; 그 애(愛)는 역시 다음에 태어나는 지위의 수(受)가 현행이나 종자를 반연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른 논리에 위배되지 않는다.


此十二支十因二果定不同世,因中前七與愛、取、有或異或同,若二、三、七各定同世。

如是十二一重因果足顯輪轉及離斷常,

 12지(支)에 대해서 10인(十因)과 2과(二果)는 반드시 같은 지위(地)가 아닌 것으로,

 가지 원인인 10인(十因)중의 앞의 일곱 가지 원인과 애(愛)ㆍ취(取)ㆍ유(有)는 혹은 다르기도 하고 혹은 같기도 하며,

생(生)과 노사(老死)의  가지와 갈애(愛)ㆍ취(取)ㆍ존재의 형성의 유(有)의  가지와 10인(十因)중의 앞의 일곱 가지 각각 반드시 같은 지위인 정동세(定同世)이니,

이와 같은 12지의   겹침의 일중(一重)의 인과로써 윤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단멸과 상주불변의 두 극단을 떠나는 데에 충분한 것이다. 

ㅡ대승에서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세일중(二世一重) 인과를 건립한다.

 

施設兩重實爲無用,或應過此便致無窮。

  겹치는 양중(兩重)의 인과를 시설하는 것은 참으로 쓸모 없는 것으로, 혹 이것을 지나갈지라도 문득 끝없이 소급하는 과실을 가져오는 것이다.

ㅡ소승에서는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 건립하여, 12연기설은 과거는 무명(無明)ㆍ행(行),

현재는 식(識)ㆍ명색(名色)ㆍ육처(六處)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

미래는 생(生)ㆍ노사(老死) 3() 걸쳐 윤회하는 인과를 밝히는 교리이.


此十二支義門別者,九實,三假,已潤六支合爲有故,卽識等五三相位別名生等故。

五是一事,謂無明、識、觸、受、愛五,

 12 가지 지분에 있어서 뜻의 부문인 의문(義門)의 차이를 말하자면,

ㅡ열일곱 가지의 여러 부문인 제문(諸門) 판별하는 것으로, 먼저 가실(假實) 판별한, 제일가실문(第一假實門).

 

무명ㆍ행(行)ㆍ식(識)ㆍ명색(名色)ㆍ6처(處)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 9 가지는 자체가 있는 요소인 구실(九實)이며,

존재의 형성인 유(有)ㆍ생(生)ㆍ노사(老死)의 3 가지는 자체가 없는 요소인 삼가(三假)이며,

이미 성숙된 행(行)ㆍ식(識)ㆍ명색(名色)ㆍ6처(處)ㆍ촉(觸)ㆍ수(受)의 여섯 가지 지분을 합해서 존재의 유(有)로 하기 때문이니,

 식(識)ㆍ명색(名色)ㆍ6처(處)ㆍ촉(觸)ㆍ수(受)의 5 가지 지분의  가지 양상인 삼상(三相)의 단계가 다른 것을 생(生) 등으로 이름하기 때문이며, 

무명ㆍ식ㆍ촉(觸)ㆍ수(受)ㆍ애의 다섯 가지는  가지 일인 일사(一事)라고 말한다.

ㅡ생(生)ㆍ노사(老死)  자체가  등의 다섯 가지 법으로, 그것의 생(生)ㆍ이(異)ㆍ멸(滅)의  가지 상(三相)에서, 생겨남 태어남의 지분인 생지(生支)이고, 변화하는 이(異) 늙음의 지분이며, 멸함의 멸(滅) 죽음의 지분이다.

 

餘非一事。三唯是染,煩惱性故。

나머지는 일사(一事)가 아니니, 무명ㆍ애ㆍ취의 3가지 지분은 오직 잡염으로, 번뇌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ㅡ12()  가지 일인 것과 그것이 아님을 판별한, 제이일사비일사(第二一事非一事門).

 

七唯不染,異熟果故。七分位中容起染故,假說通二,餘通二種。

식(識)ㆍ명색(名色)ㆍ6처(處)ㆍ촉(觸)ㆍ수(受)ㆍ생(生)ㆍ노사(老死)의 7 가지는 오직 잡염되지 않은 칠유불염(七唯不染)이니, 이숙과이기 때문이며,

일곱 가지 분위 중에서 잡염을 일으킨다고 인정되기 때문에 가정적인 것으로,

즉 일곱 가지는 오직 잡염되지 않은 불염(不染)으로 선(善)과 무기(無記) 가지에 통한다고 '유가사지론' 제10권에서 말하고 있으며,

나머지 행(行)ㆍ유(有)의 2 가지 지분은 잡염과 잡염되지 않은  가지에 통한다.

ㅡ잡염과 잡염되지 않음을 판별한, 제삼염불염문(第三染不染門).


無明、愛、取說名獨相,不與餘支相交雜故。餘是雜相。

무명ㆍ애ㆍ취의 지분은 잡염과 잡염되지 않은 것의 독립적인 상(獨相)이라 이름 하나니, 나머지 지분과 서로 뒤섞이지 않기 때문이며, 그 나머지 지분은 뒤섞인 잡상(雜相)이다.

ㅡ독립적인 모습과 뒤섞이는 모습을 판별한, 제사교잡분별문(第四交雜分別門).

독립적인 모습의 독상(獨相)이란,  체(體)만을 지분으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다른 지분과 서로 뒤섞이지 않는 것이다.

 

六唯非色,謂無明、識、觸、受、愛、取,餘通二種。

무명ㆍ식ㆍ촉ㆍ수ㆍ애ㆍ취, 여섯 가지는 오직 색법이 아닌 것으로, 나머지는 색법과 색법이 아닌  가지에 통하며,

ㅡ두 가지 지분이 색법인 것과 색법이 아닌 것을 판별한, 제오색비색문(第五色非色門).

 

皆是有漏,唯有爲攝,無漏、無爲非有支故。

모두 유루로써 오직 유위법에 포섭되며, 

ㅡ열두 가지 지분이 모두 유루(有漏)이고 유위법임을 판별한, 제육유루유위법(第六有漏有爲門).

 

무루와 무위법은 윤회의 원인적 지분인 유지(有支)가 아니기 때문이다.

ㅡ열두 가지 지분이 무루(無漏) 무위법이 아닌 이유를 밝힌, 제칠무루무위법(第七無漏無爲門).


無明、愛、取唯通不善、有覆無記,行唯善、惡,有通善、惡、無覆無記,餘七唯是無覆無記,七分位中亦起善、染。雖皆通三界,而有分有全。

무명ㆍ애ㆍ취는 오직 불선과 유부무기에 통하며,

행(行)은 오직 선과 악이고, 유(有)는 선ㆍ악ㆍ무부무기에 통하며,

그 나머지 일곱 가지는 오직 무부무기일 뿐이다. 

ㅡ열두 가지 지분의 3() 판별한, 제팔삼성분별문(第八三性分別門).

 

일곱 가지 분위 중에서도 역시 선과 잡염을 일으키나니, 모두계에 통하지만, 부분적이기도 하고 전부이기도 하다.

 열두 가지 지분이 3계에서 어떻게 있는가를 판별한, 제구삼계문(第九三界門)으로, 욕계에서는 열두 가지 지분이 전부 있고, 색계와 무색계에는 12() 일부분이 있을 뿐이다.


上地行支能伏下地,卽麤、苦等六種行相 有求上生而起彼故。

상지의 행지(行支)는 능히 하지의 것을 조복하나니, 곧 두드러짐과 괴로움 등의 여섯 가지 작용의 육종행상(六種行相)이니,  상지에 태어나기를 구하여 일으키는 행(行)의 지분 있기 때문이다.

ㅡ능히 다스리는 것과 다스려지는 것을 판별한, 제십능소치문(第十能所治門)으로, 

상지(上地) 행지(行支)란, 두드러짐의 추(麤)ㆍ고(苦)ㆍ장(障, 장애)ㆍ적정함의 정(靜)ㆍ승묘함의 묘(妙)ㆍ떠남의 이(離) 여섯 가지 작용인 육행상(六行相)이며,

하지 12() 관찰하여 추(麤)ㆍ고(苦)ㆍ장(障, 장애) 삼고,

상지 세계의 일체를 관찰하여 정(靜)ㆍ묘(妙)ㆍ이(離) 삼는다.

 

一切皆唯非學無學, 聖者所起有漏善業,明爲緣故,違有支故,非有支攝。由此應知,聖必不造感後有業,於後苦果不迷求故,

일체가 모두 오직 유학도 무학도 아니니, 성자가 일으킨 유루의 선업은 지혜인 명(明)을 연(緣)으로 삼기 때문이고,

12 가지 지분인 십이유지(十二有支)에 거스르기 때문에 12 가지 지분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니,

이러함으로 마땅히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하나니, 성인은 반드시 미래세의 존재를 초감하는 업을 짓지 않으며, 미래세 존재의 고통스러운 과보를 미혹되게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열두 가지 지분이 유학(有學) 무학(無學) 아님을 판별한, 제십일학등분별문(第十一學等分別門).

 

雜修靜慮資下故業,生淨居等,於理無違。

선정을 닦아서 하지의 선정의 업을 의지하여 정거천(淨居天)등에 태어난다는 것은 바른 논리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비판하여 묻기를, 만약 성자(聖者) 업을 짓지 않는다면, 다섯 가지 정거천(淨居天) 업을 잡염되게 닦는 것은 어째서 () 지분이 아닌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답변한 것으로, 

하지의 선정의 업이란, 색계의 4선천(第四禪天)의 9 중에서 하부의 3천,  복생천(福生天)ㆍ광과천(廣果天)ㆍ무상천(無想天)이다.

 

정거천(淨居天), 제4선천의 9천 가운데에서 불환과(不還果)를 증득한 성인이 나는 하늘인 상부의 5천, 즉 무번천(無煩天)ㆍ무열천(無熱天)ㆍ선현천(善現天)ㆍ선견천(善見天)ㆍ색구경천(色究竟天)이다.


有義無明唯見所斷,要迷諦理能發行故,聖必不造後有業故。愛、取二支唯修所斷,貪求當有而潤生故,九種命終心俱生愛俱故。餘九皆通見、修所斷。

먼저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무명은 오직 견도에서 단멸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4성제의 도리에 미혹해서 능히 행(行)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성인은 반드시 미래세의 존재의 업을 짓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며,

애ㆍ취 두 가지 지분은 오직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으로,

다음 생(生)의 존재를 탐구하여, 태어남을 촉진하기 때문이며,

임종할 때의 아홉 가지 마음인 구종명종심(九種命終心)은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애(愛)와 함께한다고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5권에서 말한 때문이다. 나머지 아홉 가지는 모두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과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에 통한다.

ㅡ견도에서 단멸되는 견소단(見所斷) 등의  가지 단멸을 판별한, 제십이삼단문(第十二三斷門)

 

구종명종심(九種命終心), 3계(界)로부터 3계에 태어날 때에는 각각 태어남을 촉진하는 윤생(潤生)의 마음에 각각 세 가지가 있으므로 전부 아홉 가지가 된다.

즉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의 마지막 마음으로, 이 때에 4종의 애착(愛着)을 일으키며 이 애착에 의하여 미래의 생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① 현재의 자신에 애착 .
② 현재의 권속에 탐회(貪喜)에 애착 .
③ 현재의 재산에 기쁨의 애착 .
④ 미래의 자신에 대하여 후유(後有)의 애착 .
이 네 가지 애착 중에서 마지막 하나는 바로 다음 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앞의 3 가지는 간접 원인된다 .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8 4

 

復次,生死相續由諸習氣,然諸習氣摠有三種:一名言習氣。謂有爲法各別親種。名言有二:一表義名言,卽能詮義音聲差別。二顯境名言,卽能了境心、心所法。隨二名言所熏成種,作有爲法各別因緣。

또한 태어나고 죽는 생사(生死)를 상속함은 모든 습기에 의거하며, 모든 습기에 총체적으로 세 종류인 삼훈습(三熏習)이 있으니,

첫째는 명언습기(名言習氣)로써, 유위법이 각각 다르게 직접 훈습된 종자인 친종(親種)을 말하는 것으로,  

언어 즉, 명언(名言)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뜻을 표현하는 언어의 표의명언(表義名言)으로, 능히 뜻을 나타내는 음성의 차이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을 나타내는 언어의 현경명언(顯境名言)으로, 능히 대상을 요별하는 심왕과 심소법으로,  

두 가지 언어인 명(名)과 언(言)에 따라서 훈습된 종자가 유위법의 각각 다른 인연이 되는 것이다.

 

명언습기(名言習氣)는 명언종자ㆍ명언훈습종자라고도 하며, 언어인 명언(名言)을 사용한 개념적인 사고에 의하여 이식된 종자 또는 모든 종자를 총칭하여 명언종자라고 하기도 하는 것으로, 심리활동의 대부분이 언어에 의한 개념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종자는 언어활동에 의해 아뢰야식에 이식된 잠재적인 에너지이며, 또한 언어활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다.

 

二我執習氣。謂虛妄執我、我所種。我執有二:一俱生我執,卽修所斷我、我所執。二分別我執,卽見所斷我、我所執。隨二我執所熏成種,令有情等自、他差別。

둘째는 아집습기(我執習氣)이니, 허망하게 나(我)ㆍ나의 소유인 아소(我所) 집착하는 종자를 말하는 것으로, 아집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아집인 구생기아집(俱生起我執)으로, 곧 수도에서 단멸되는 나ㆍ나의 소유라는 집착이며,

다른 하나는 분별에 의해 일어나는 아집인 분별기아집(分別起我執)으로, 곧 견도에서 단멸되는 나ㆍ나의 소유라는 집착이으로,  

이러한 두 가지 아집에 따라서 훈습된 종자가 유정 등으로 하여금 자신과 남의 차별을 짓게 만든 것이다.

 

아집습기(我執習氣)는 아집종자ㆍ아집훈습종자라고도 하며, 자아가 실재한다는 견해인 아견(我見)에 의해 아뢰야식에 이식된 종자이다.

①구생기아집(俱生起我執),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견분(見分을 대상으로 하고, 의식이 5취온(取蘊)을 대상으로 하여 각각 나(我)ㆍ나의 소유인 아소(我所)로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②분별기아집(分別起我執), 신체에 대한 잘못된 이론에 근거한 아집이다.

 

三有支習氣,謂招三界異熟業種。有支有二:一有漏善,卽是能招可愛果業。二諸不善,卽是能招非愛果業。隨二有支所熏成種,令異熟果善、惡趣別。應知我執、有支習氣於差別果是增上緣。

셋째는 유지습기(有支習氣)이니, 삼계의 이숙과를 초감하는 업종자를 말하는 것으로,

윤회세계의 원인인 유지(有支)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유루선(有漏善)으로, 곧 능히 애착할 만한 인간과 천상의 즐거움의 과보 초감하는 업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불선법(不善法)으로, 곧 애착할 만한 것이 아닌,  지옥ㆍ아귀ㆍ축생의 3악취(惡趣)의 괴로움의 과보를 초감하는 업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유지(有支)를 따라서 윤회세계의 훈습된 종자가 이숙과로 하여금 살기 좋은 세계인 선취(善趣)와 살기 괴로운 세계인 악취(惡趣)의 차별이 있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알라! 아집습기와 유지습기는 차별 있는 과보에 대해서 증상연이 되는 것이다.

명언습기는 일체법을 생기시키는 직접적인 인연인 친인연(親因緣)이고, 아집습기와 유지습기는 증상연으로,  

아집습기는 우리로 하여금 자타의 구분이 있게 하는 증상연이고, 

유지습기는 이숙과로 하여금 선이나 악취의 차이가 있게 하는 증상연이다.

 

유지습기(有支習氣)는 업습기ㆍ업종자라고도 하며, 유정을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삼유(三有)에서 생사윤회하게 만드는 종자이다. 선이나 악업에 훈습된 종자로서, 미래의 생존상태인 유(有)를 결정하고 발생하는 직접 원인이며, 

유지(有支)에서 유(有)는 3유(有), 즉 3계(界)이고, 지(支)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此頌所言業習氣者,應知卽是有支習氣。二取習氣應知卽是我執、名言二種習氣,取我、我所及取名言而熏成故,皆說名取。俱等餘文義如前釋。

 게송에서 말한 업습기는  유지습기라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이취(二取)습기는  아집습기와 명언습기임을 알아야 하며, 나ㆍ나의 소유를 취착하고 언어를 취착해서 훈습되기 때문에 모두 취(取)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게송에서 ‘함께함의 구(俱)’ 등의 다른 문구의 뜻은 앞에서 해석한 바와 같다.

 

復次,生死相續由惑、業、苦,發業潤生煩惱名惑,能感後有諸業名業,業所引生衆苦名苦,惑、業、苦種皆名習氣。前二習氣與生死苦爲增上緣,助生苦故,第三習氣望生死苦能作因緣,親生苦故。

또한 태어나고 죽는 생사(生死)가 상속하는 것은 혹(惑, 미혹)ㆍ업(業)ㆍ고(苦, 괴로움) 의거하며,

업을 일으키고 윤회의 삶을 촉진하는 번뇌를 ‘혹(惑, 미혹)’이라 이름하며,

능히 미래세의 삶인 후유(後有)를 초감하는 모든 업을 ‘업(業)’이라 이름하며,

업에 이끌려 생겨나는 갖가지 고통을 ‘고(苦, 괴로움)’라 이름하며,

혹(惑, 미혹)ㆍ업(業)ㆍ고(苦, 괴로움)의 종자를 모두 ‘습기(習氣)’라고 이름한다. 

앞의 혹(惑, 미혹)ㆍ업(業),  가지 습기는 생사의 괴로움의 증상연이 되나니, 도와서 고통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번째의 고(苦, 괴로움)의 습기는 생사의 괴로움에 대하여 능히 인연이 되나니, 직접 고통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번째 해설로서 생사를 12유지(有支) 설명하는 것으로, 먼저 생사(生死) 미ㆍ혹ㆍ업ㆍ괴로움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頌三習氣,如應當知。惑、苦名取,能、所取故,取是著義,業不得名。

게송에서 말하는  가지 습기는 상응하는 것에 맞게 알아야 하나니,

혹(惑, 미혹)ㆍ업(業)을 이취습기(二取습習氣)라 이름하는 것은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이기 때문이며, 취(取)는 취착의 뜻이고.

업(業)은 명칭을 얻지 못하여 업습기(業習氣)일 뿐이다.

 

俱等餘文義如前釋。此惑、業、苦,應知摠攝十二有支,謂從無明乃至老死,如論廣釋。

게송에서 ‘함께함의 구(俱)’ 등의 다른 문장은 뜻이 앞에서 해석한 바와 같으며,

혹(惑, 미혹)ㆍ업(業)ㆍ고(苦, 괴로움) 총체적으로 12유지(有支)를 포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곧 무명으로부터 나아가 노사(老死)에 이르기까지인 것으로,

논서 '유가사지론'제9권ㆍ제10권,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4권 등에서 자세히 해석한 바와 같다.

 

然十二支略攝爲四:一能引支。謂無明、行,能引識等五果種故。此中無明唯取能發正感後世善、惡業者,卽彼所發乃名爲行,由此一切順現受業別助當業皆非行支。

그런데 12지(十二支)를 간략히  가지에 포함시킬 수 있으니,

첫째는 능인지(能引支)로써, 무명(無明)과 행(行) 말하는 것으로, 능히 식(識)ㆍ명색(名色)ㆍ6처(處)ㆍ촉(觸)ㆍ수(受) 다섯 가지 결과의 종자인 오과종(五果種)을 이끌기 때문이다. 

 가운데에서 무명(無明)은 오직 진정으로 다음 생을 초감하는 선ㆍ악의 업을 일으키는 것만을 취하는 것으로, 곧 그것이 일으킨 것을 행(行)이라고 이름하나니, 이것에 의해 현세에 받는 모든 업과 미래세에 받는 업은 모두 행의 지분인 행지(行支)인 것은 아니다.

 

二所引支。謂本識內親生當來異熟果,攝識等五種,是前二支所引發故。此中識種謂本識因,除後三因,餘因皆是名色種攝,後之三因如名次第卽後三種。

둘째는 이끌려지는 지분인 소인지(所引支)이니, 근본식 안에서 직접 미래의 이숙과에 포함되는 식(識)ㆍ명색(名色)ㆍ6처(六處)ㆍ촉(觸)ㆍ수(受) 다섯 가지를 일으키는종(五種)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이전의  가지의 지분(支分, 무명과 행)에 이끌려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며,

 가운데에서 식의 종자인 식종(識種)이란, 근본식 중의 원인을 말하는 것이며,

6처(六處)ㆍ촉(觸)ㆍ수(受)의  가지 원인을 제외한 나머지 원인은 모두 명색의 종자에 포함되며,

6처(六處)ㆍ촉(觸)ㆍ수(受)의  가지 원인은 명칭의 순서와 같이  이후의  가지 종자인 후삼종(後三種)이 되는 것이다.

 

或名色種摠攝五因,於中隨勝立餘四種,六處與識摠別亦然。

혹은 명색(名色)의 종자에 총체적으로 다섯 가지 원인을 포함하기도 하나니,

 가운데에서 뛰어난 것을 따라 나머지  가지 종자를 건립하며,

여섯 가지 인식기관인 육처(六處)와 식의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역시도 그러하다.

집지(執持)하는 데에는 식(識)이 뛰어나고, 식을 일으키는 데는 처(處)가 뛰어나며, 대상을 접촉하는 데에는 촉(觸)이 뛰어나고, 느낌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수(受)가 뛰어나다.

 

'集論'說識亦是能引,識中業種名識支故,異熟識種名色攝故。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4권에서는 식(識) 역시도 능히 이끄는 능인(能引)이라고 말한 것은 식(識) 가운데의 업종자를 식의 지분인 식지(識支)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며, 이숙식의 종자는 명색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ㅡ'대승아비달마잡집론' 4권의 내용을 회통한 것으로, 거기에서는 () 역시 능인(能引)이라하여서, 여기에서 말한 것과 다른 이유는, 원래 근본식 중에 공통적으로 () 식(識)이 있으므로 () 종자를 식의 지분인 식지(識支)라고 말하였으나, 만약 그러하다면 식지(識支)의 종자는 명색(名色) 포함 되는 것이다.

 

經說識支通能、所引,業種識種俱名識故,識是名色依非名色攝故。

경전, '분별연기초승법문경(分別緣起初勝法門經)'의 상권에서 식의 지분인 식지(識支)는 능히 이끄는 지분인 능인(能引)과 이끌려지는 지분인 소인(所引)에 통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업종자인 업종(業種)과 식의 종자인 식종(識種) 모두를 식(識)이라고 이름한 때문이니, 식은 명색의 의지처라고 말하고 명색에 포섭된다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識等五種由業熏發,雖實同時,而依主伴、摠別、勝劣、因果相異,

식(識)ㆍ명색(名色)ㆍ6처(六處)ㆍ촉(觸)ㆍ수(受) 등 다섯 가지의 종자인 오종(五種)이 업에 의해 훈습되고 일어나는 것은 실제로 동시(同時)이지만,

비판하여 묻기를,  오종(五種)은 이전 찰나와 이후 찰나에 훈습되는가? 아니면 동시에 훈습되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주체(主)와 

ㅡ식(識)ㆍ명색(名色)ㆍ6처(六處)ㆍ촉(觸)ㆍ수(受)  5 중에서 (근본식) 주체로 하는 것을 이숙과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수반(伴)되는 것,

ㅡ식(識)을 제외한 나머지 명색(名色)ㆍ6(六)ㆍ촉()ㆍ수() 지분을 말한.

 

총체적(總)인 것과 

ㅡ명색(名色)ㆍ6처(六處)ㆍ촉(觸)ㆍ수(受)의 4 가운데에서 명색(名色) 말하는 것으로,  체성(體性)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개별적(別)인 것,

ㅡ6처(六處)ㆍ촉(觸)ㆍ수(受)의 3법은 뜻과 작용이 협소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별(別)이라 한다.

 

뛰어난(勝) 것과 

ㅡ6처(六處)ㆍ촉(觸)ㆍ수(受)의 3 중에서 6처는 수(受) 등의 의지처이기 때문에 뛰어난 승(勝)이라 이름한다.

 

열등한(劣) 것, 

ㅡ촉(觸)과 수(受) 지분은 6처(六處)에 의지해서 생겨나기 때문에 열등한 열(劣)이라 이름한다.

 

원인(因)과 

ㅡ나머지 2법인, 촉(觸)과 수(受) 중에서 촉(觸)은 능히 수(受)를 생겨나게 하기 때문에 원인이라 한다.

 

결과(果)의 차이에 의거하는 것이다. 

ㅡ 수() 촉(觸)에 의해 생겨난 것이므로 결과의 체성이다.

 

故諸聖教假說前後,或依當來現起分位有次第故說有前後。

따라서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에서는 가정적으로 앞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혹은 미래와 현행의 분위(分位)에 의해서 순서가 있기 때문에 앞뒤 순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ㅡ 만약 식(識)ㆍ명색(名色)ㆍ6처(六處)ㆍ촉(觸)ㆍ수(受) 등 다섯 가지의 종자인 오종(五種)이 동시에 훈습된다면, 어찌하여 앞뒤의 순서가 있게 되는가라는 비판에 대한 답변이다.

 

由斯識等亦說現行,因時定無現行義故。復由此說生引同時,潤未潤時必不俱故。

이것에 의해 식(識) 등을 현행에 있다고도 말하나니, 원인의 시기에는 반드시 현행의 뜻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이에 의거해서 생겨나는 것과 이끄는 것이 동시라고 말하나니,

성숙과 미성숙의 시기는 반드시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 훈습할 때에 아직 현행할  없다면, 어째서 '연기경(緣起經)' 상권에서 생겨나는 생(生) 이끄는 인(引) 동시(同時)라고 말씀하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변한 것으로, 장차 일어날 만한 지위에 있어서 동시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三能生支。謂愛、取、有,近生當來生、老死故。謂緣迷內異熟果愚發正能招後有諸業爲緣,引發親生當來生、老死位五果種已,復依迷外增上果愚緣境界發起貪 愛緣愛復生欲等四取,

셋째는 능히 생겨나게 하는 지분인 능생지(能生支)이니, 애(愛)ㆍ취(取)ㆍ유(有)이니, 가까운 장래에 생(生)과 노사(老死)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내부의 이숙과에 미혹한 어리석음에 반연하여 참으로 능히 미래세의 존재를 초감하는 여러 업을 일으켜서 연(緣)으로 삼고, 직접 미래세의 생ㆍ노사 단계의 5과를 일으킬 만한 종자를 이끌어 내며,

다시 외부의 증상과에 미혹한 어리석음에 의해 경계수(境界受)를 반연하여 탐(貪, 탐욕)을 일으키며,

애(愛)를 연으로 하여 다시 욕취(欲取)   가지 취착인 사취(四取)154)을 일으키며,

ㅡ사취(四取)는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로써, 3 번뇌를  가지로 나눈 것이기도 하고, 또한 12연기설 중의 취지(取支) 자세히 구분한 것이기도 하.

 

愛、取合潤能引業種及所引因,轉名爲有,俱能近有後有果故

애(愛)와 취(取)를 합하여 촉진시키는 능인(能引)의 업종자  이끌려지는 원인인 소인지(所引支, 식ㆍ명색ㆍ6처ㆍ촉ㆍ수) 를 바꾸어 유(有)라고 이름하나니, 모두 능히 가까운 장래에서의 존재(有)의 과보를 있게 하기 때문이다.

 

有處唯說業種名有,此能正感異熟果故。復有唯說五種名有,親生當來識等種故。

'유가사지론' 제10권에서 오직 업의 종자인 업종(業種)만을 유(有)라고 이름한다고 말한 것은, 이것이 능히 참으로 이숙과를 초감하기 때문이며,

또한 '유가사지론' 제10권에서 오직 다섯 가지 종자인 오종(五種)만을 유(有)라고 이름한다고 말한 것은 직접 미래세의 식(識) 등을 일으킬 만한 종자이기 때문이다.

 

四所生支。謂生、老死,是愛、取、有,近所生故。謂從中有至本有中,未衰變來皆生支攝,諸衰變位摠名爲老,身壞命終乃名爲死。

넷째는 생겨나는 지분인 소생지(所生支)이니, 생(生)ㆍ노사(老死) 말하는 것으로, 애(愛)ㆍ취(取)ㆍ유(有)의 가까이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며,

중유(中有)에서부터 본유(本有)에 이르기까지, 아직 노쇠하지 않은 미래를 모두 태어남의 지분인 생지(生支)에 포섭시키며,

모든 노쇠하는 단계를 총체적으로 늙음의 노(老)라 하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하는 것을 죽음의 사(死)라 이름한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8 3

 

분별을 일으키는 양상으로, '삼십송' 18게송  4句를 자세하게 해설한, 연생분별(緣生分別)이며, 

  가지 중에서 처음에 현행을 일으키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먼저 종자생(種子生) 판별한다.

本識中種容作三緣,生現分別,除等無閒,謂各親種是彼因緣,爲所緣緣於能緣者

근본식 중의 종자는 인연, 소연연, 증상연의 삼연(三緣)이 되어 현행의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 인정되나, 등무간연을 제외하며, 각각 가까운 종자는 그것의 인연이 된다. 

소연연이 되는 것은 능히 반연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며,

능히 종자를 반연하는 심왕ㆍ심소법에 대해서, 종자를 그것의 소연연(所緣緣)으로 삼는다.

 

若種於彼,有能助力或不障㝵,是增上緣。生淨現行應知亦爾。現起分別展轉相望容作三緣,無因緣故。

만약 종자가 그것에 대해서 능히 돕는 힘이 있거나 혹은 장애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증상연이 되며, 청정의 현행을 일으키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며,

현행의 분별은 전전하여 서로 배대하는데  가지 연이 되는 것이 인정되나니,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현행생(現行生) 판별한다. 현행은 직접 자체를 판별하지 않으므로 인연이 없는 것이다.


謂有情類自他展轉容作二緣,除等無閒。

유정의 무리는 자신과 타인으로 전전하여 소연연(所緣緣)과 증상연(增上緣)의  가지 연(緣)이 되나, 등무간연은 제외한다.

자신과 남(他) 몸으로 서로 배대하여 소연연과 증상연이 되고, 등무간연은 오직 각각 하나의 ()에만 국한되므로 제외된다.

 

自八識聚展轉相望,定有增上緣,必無等無閒,所緣緣義或無或有。

자신의 8식의 모임인 자팔식취(自八識聚)는 전전하여 서로 배대함에 있어서 반드시 증상연이 있으나, 등무간연은 필히 없으며, 소연연의 뜻은 혹 없기도 하고 혹 있기도 하다.

 

팔식취(八識聚), 8식 하나하나와 아울러 그 상응법(심소) 등의 견분과 상분 등을 총체적으로 팔식취라 한다.


八於七有,七於八無,餘七非八所仗質故,第七於六五無一有,餘六於彼一切皆無,第六於五無,餘五於彼有,五識唯託第八相故。

제8식은 7식에 대해서 소연연의 뜻이 있으나, 7식은 제8식에 대해서 없으니, 나머지 7식은 제8식이 의지하는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며,  

제7식을 6식에 대해서 말한다면, 5식에는 없으나 제6식에는 있으며,

나머지 6식은 그 제7식에 대해서 일체가 모두 없으며,

제6식은 5식에 대해서 없으나, 나머지 5식은 제 6식에 대해서 있으니, 5식은 오직 제8식의 상분에만 의탁하기 때문이다.


自類前後第六容三,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의 이전 찰나와 이후 찰나에 관하여 말하자면,

자신의 8식의 하나하나의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 이전 찰나와 이후 찰나로 서로 배대한 전후상망(前後相望)을 논한다.

 

제6식에는  가지가 있는 것이 인정되나,

이전 찰나의 6식은 이후 찰나의 6식에 대하여 소연연ㆍ등무간연ㆍ증상연의 삼연(三緣)이 되는 것으로, 인연(因緣) 제외한 것은 현행을 상망(相望)하여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餘除所緣,取現境故,

나머지 7식에서는 소연연을 제외하나니, 현재의 대상만을 취하기 때문이다.

6식을 제외한 나머지 7식에는 소연연(所緣緣) 제외하나니,  7식은 이전 찰나의 생각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인연이 없다.

 

許五後見緣前相者,五七前後亦有三緣,前七於八所緣容有,能熏成彼相、見種故。

5식의 이후 찰나의 견분이 이전 찰나의 상분을 인식대상으로 한다고 진나(陳那, Dignāga)의 '관소연연론(觀所緣緣論)'에서인정하므로, 전5식과 제7식의 이전 찰나의 것이 이후 찰나에 대해서 역시 인연을 제외한 나머지  가지 연(緣)이 있다고 하였으니,

7식은 제8식에 대해서 소연연이 능히 그 제 8식의 상분ㆍ견분의 종자를 훈습하는 일이 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同聚異體展轉相望,唯有增上。諸相應法所仗質同,不相緣故。或依見分說不相緣,依相分說有相緣義。謂諸相分互爲質起,如識中種爲觸等相質。不爾,無色彼應無境故,設許變色亦定緣種,勿見分境不同質故。

같은 모임인 동취(同聚)의 다른 자체가 전전하여 서로 배대함에는 오직 증상연이 있으니, 모든 상응법(심소)은 의지하는 본질이 같으므로 서로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견분에 의해서는 서로 반연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상분에 의해서는 서로 반연하는 뜻이 있다고 말하나니, 모든 상분이 서로 본질이 되어 일어나므로, 식(識) 중의 종자를 촉(觸)심소 등의 상분의 본질로 하는 것과 같으니,  

그렇지 않다면 무색계에서 촉(觸) 등의 5변행심소(遍行心所) 등 대상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설사 무색계의 제8의 심왕ㆍ심소가 색법을 변현한다고 허용할지라도 반드시 종자만을 반연하나, 견분의 대상이 같은 본질인 동질(同質)이 아니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同體相分爲見二緣,見分於彼但有增上,見與自證相望亦爾。

자체가 같은 동체(同體) 상분은 견분의 소연연과 증상연의 연(緣)이 되나니,

견분은 그 상분에 대해서 오직 증상연만 있을 뿐이며, 견분이 자증분을 서로 배대하여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견분은 자증분에 대해서 소연연과 증상연이 되고, 자증분은 견분에 대해서 오직 증상연만 되고,

또한 견분은 증자증분에 대해서는 오직 증상연만 된다.

 

餘二展轉俱作二緣,此中不依種相分說,但說現起互爲緣故。淨八識聚自、他展轉皆有所緣,能遍緣故。唯除見分非相所緣,相分理無能緣用故。

나머지  가지인 자증분과 증자증분은 전전하여 소연연과 증상연 되나니, 여기에서는 종자의 상분에 의거해서 말하지 않고 다만 현행이 서로 연(緣)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정한 제8식의 모임인 정팔식취(淨八識聚)는 자신과 타인으로 전전하여 모두 소연연이 있으니, 능히 두루 반연하기 때문이나, 오직 견분이 상분의 소연연이 아닌 것만을 제외하나, 상분은 이치에는 능연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旣現分別緣種現生,種亦理應緣現種起,現種於種能作幾緣?

▷묻겠습니다; 이미 현행의 분별이 종자ㆍ현행을 반연하여 일어남을 말하였습니다. 

종자도 이치가 역시 현행ㆍ종자를 반연하여 일어나야 하나니, 현행ㆍ종자는 종자에 대해서 능히  가지의 연이 되는 것입니까?

 

종자를 일으키는 것을 밝힌다.

種必不由中二緣起,待心、心所立彼二故。現於親種具作二緣,與非親種但爲增上,

種望親種亦具二緣,於非親種亦但增上。

▷답한다; 종자는 반드시 중간의  가지 연(緣)인 등무간연과 소연연에 의거해서는 일어나지 않나니, 심왕ㆍ심소를 기다려서   가지를 건립하기 때문이다. 

현행은 직접 훈습한 종자인 친종(親種)에 대해서는 모두 인연과 증상연의 두 가지 연이 되며,

직접 훈습하지 않은 종자인 비친종(非親種)에 대해서는 다만 증상연이 될 뿐이다. 

종자를 자신이 직접 훈습한 친종(親種) 배대하여 역시  가지 연을 갖추나니,

자신이 직접 훈습하지 않은 종자인 비친종(非親種) 대해서는 다만 증상연이 될 뿐이다.


依斯內識互爲緣起,分別因果理教皆成,所執外緣設有無用,況違理教何固執爲?

이러한 내부의 식이 서로 연(緣)이 되어 일어나는 것에 의거해서, 분별(심왕ㆍ심소)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바른 논리와 성스러운 가르침이 모두 성립되는 것이다.

집착된 외부대상인 소집외연(所執外緣)이 설사 있다고 할지라도 작용이 없거늘,

바른 논리와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하면서 고집하는 것이 무엇에 쓸모가 있겠는가?

→총체적으로 결론 맺으면서 소승에서 주장하는 바의 마음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대상인 심외연(心外緣) 논파하였다.

 

雖分別言,摠顯三界心及心所,而隨勝者諸聖教中多門顯示,或說爲二、三、四、五等,如餘論中具廣分別。

‘분별(分別)’이라는 말은 총체적으로계의 심왕과 심소를 나타내지만, 수승한 것을 따라서 여러 성스러운 가르침 중에서 여러 부문으로써 나타내 보이고 있으니, 어떤 곳에서 둘ㆍ셋ㆍ넷ㆍ다섯 가지 등으로 말하나니, 본 논서의 3성(性) 부문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다른 논서, 즉 '유가사지론'의 제38권ㆍ제73권ㆍ제74권 등에서 갖추어 자세하게 분별한 것과 같다.


雖有內識,而無外緣,由何有情生死相續?頌曰:

비록 내부의 식, 즉 내식(內識)만이 있다고 말하지만, 외부의 대상인 외연(外緣)이 없다면, 무엇에 의거해서 유정이 생사에 상속하겠는가? '삼십송'의 제19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니, 


由諸業習氣 二取習氣俱, 前異熟旣盡 復生餘異熟。

모든 업습기(業習氣)가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2취(二取)의 습기와 함께함으로써

이전에 생겨난 과보(果報)인 이숙(異熟)이 이미 멸한다면, 

다시 다른 이숙(후에 생겨나는 과보)을 생겨나게 한다네.

유정상속(有情相續) 연유를 밝힌 것으로, 유정의 상속에는 내심(內心) 종자를 ()으로 하고 ()으로   있기 때문에, 심외실경(心外實境) 없을지라도  상속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는 것이다.

 

이숙(異熟)은 vipāka의 번역으로 과보라는 뜻으로, 이숙이라는 의미는 선 또는 악의 업인(業因)에 의해서 이것과 성질이 다른 무기(無記), 즉 비선비악(非善非惡)인 결과를 산출하는 것을 말한다.

 

論曰:諸業謂福、非福、不動,卽有漏善、不善思業。

▷논하여 말한다.

‘모든 업, 제업(諸業)’이란, 복(福, 낙과)과 복이 아닌 비복(非福, 고과) 부동(不動)을 말하는 것으로, 곧 유루의 선ㆍ불선의 의지로 짓는 업(思業)인 것이다. 

→복(福), 욕계의 선업으로서 즐거움의 과보인 낙과(樂果) 초감할 만한 것.

→비복(非福), 욕계의 악업으로서 괴로움의 과보인 고과(苦果)를 초감할 만한 .

→부동(不動), 색계와 무색계에 속하는 선정의 의업(意業).

 

業之眷屬亦立業名,同招引滿異熟果故。

업의 권속도 역시 업(業)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는 것은 인업(引業)과 만업(滿業)의 이숙과를 초감하기 때문이다.


此雖纔起無閒卽滅,無義能招當異熟果。而熏本識起自功能,卽此功能說爲習氣,是業氣分熏習所成,簡曾、現業,故名習氣。如是習氣展轉相續,至成熟時招異熟果,此顯當果勝增上緣。

이 현행의 업은 일어나자마자 바로 다음 찰나에 멸하여 능히 미래의 이숙과(異熟果)를 초감할 만한 뜻이 없지만, 근본식에서 자신을 일으킬 만한 세력의 자공능(自功能)을 훈습하나니, 곧  세력인 공능(功能)을 습기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업의 기분(氣分)으로, 훈습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전의 업과 현재의 업을 가려내기 때문에 습기라 이름하며,

이와 같이 습기가 전전하고 상속하여서 성숙한 때에 이르러서는 이숙과를 초감하나니,

이것은 미래 과보의 뛰어난 증상연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전의 업이란, 설일체유부에서 과거에 체(體) 있다고 하는 증업(曾業) 말하는 것이며,

현재의 업이란, 순세외도(順世外道)에서 일체의 과보는 오직 현재의 업이 얻는 것으로서, 지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相見、名色、心及心所、本末,彼取皆二取攝。彼所熏發,

親能生彼本識上功能,名二取習氣,此顯來世異熟果心及彼相應諸因緣種。

상분과 견분, 정신적인 요소인 명(名), 물질적인 요소인 색(色), 심왕과 심소, 근본 제 8식과 지말의 제 7식  여덟 가지에 의한 인식인 팔취(八取) 모두 2취(二取)에 포함되나니,  

그 팔취(八取)에 훈습되고 능히 그것을 직접 일으키며,

근본식에 있는 공능(功能) 2취(二取)2취 습기(習氣)라고 이름하나니, 이 이취습기(二取習氣)는 미래세의 이숙과(異熟果)의 심왕과  상응법(심소)의 모든 인연종자를 나타내는 것이다.

→ 이취습기(二取習氣)는 명언종자(名言種子)로서 업종자와 다른 것이다.


俱謂業種二取種俱,是疏親緣互相助義,業招生顯,故頌先說。

제19게송에서 ‘함께함의 구(俱)’란, 업종자와 2취종자(二取種子)와 함께함으로써 소소연연(업종자)과 친소연연(2취 종자)으로서 서로 돕는다는 뜻이며,

‘업(業)’은 태어남의 생(生)을 초감하는 작용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게송에서 먼저 말한 것이다.


前異熟者,謂前前生業異熟果。餘異熟者,謂後後生業異熟果。雖二取種受果無窮,而業習氣受果有盡,由異熟果性別難招,等流、增上性同易感。

게송에서 ‘이전의 이숙인 전이숙(前異熟)’이라 한 것은 전전생(前前生)의 업의 이숙과(異熟果)를 말하는 것이며,

‘다른 이숙의 여이숙(餘異熟)’이라는 것은 다음다음 생인 후후생(後後生)의 업의 이숙과를 말하는 것이며,

2취종자(二取種子)는 과보를 받음이 끝이 없지만, 업습기는 과보를 받는 것이 다함이 있으며,

이숙과(異熟果)는 성품이 다른 것에도 있고, 초감하기 어려운 것도 있으며,

등류과(等流果)와 증상과(增上果)는 성품이 같은 것에도 있고 초감하기 쉬운 것도 있기 때문이다.


由感餘生業等種熟,前異熟果受用盡時,復別能生餘異熟果。由斯生死輪轉無窮,何假外緣方得相續?此頌意說由業、二取、生死輪迴皆不離識,心、心所法爲彼性故。

미래의 다른 생을 초감하는 업 등의 종자가 성숙함으로써, 이전의 이숙과를 수용하는 것이 다할 때, 다시 별도로 능히 다른 이숙과를 생겨나게 하나니, 이것에 의해 생사에 윤회하는 것이 다함이 없는 것이다.

어째서 마음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외부대상인 외연(外緣)을 의지하여 비로소 상속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이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으니, 업습기와 이취습기에 의해서 생사에 윤회하고,

업습기와 2취 습기 모두는 식(識)을 떠나지 않으니, 심왕과 심소법을 그 생사의 자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비판에 답변한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8 2

 

有尋等地說生起因是能生因,餘方便攝。此文意說六因中現種是因緣者,皆名生起因,能親生起自類果故,此所餘因皆方便攝。

'유가론'의 유심사지(有尋伺地)에서 말하기를, 생기인은 능생인이고 나머지는 방편인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문장의 뜻은 다음과 같으니, 여섯 가지 원인인 육인(六因) 중에서 현행과 종자의 인연인 것은 모두 생기인(生起因)이라 이름하는 것으로, 능히 자기 부류의 결과가 직접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며,  

이것의 나머지 원인은 모두 방편인에 포함된다. 

→견인인(牽引因)ㆍ생기인(生起因)ㆍ섭수인(攝受因)ㆍ인발인(引發因)ㆍ정이인(定異因)ㆍ동사인(同事因)의 6(因) 중에서 인연의 종자인 견인인ㆍ생기인ㆍ인발인ㆍ정이인ㆍ동사인 이외의 것, 

 비인연법(非因緣法) 섭수인(攝受因)  나머지 수설인(隨說因)ㆍ관대인(觀待因)ㆍ상위인(相違因)ㆍ불상위인(不相違因) 가리킨다.

 

10인(十因), 수설인(隨說因)ㆍ관대인(觀待因)ㆍ상위인(相違因)ㆍ불상위인(不相違因) 

견인인(牽引因)ㆍ생기인(生起因)ㆍ섭수인(攝受因)ㆍ인발인(引發因)ㆍ정이인(定異因)ㆍ동사인(同事因)

 

非此生起唯屬彼因,餘五因中有因緣故。非唯彼九名所餘因,彼生起因中有非因緣故。

'유가사지론'의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에서 말하는 생기인(生起因)은 오직  원인, 즉 10인 중의 제4 생기인(生起因)에만 속하지는 않으니, 나머지 5 가지 원인 중에도 인연인 것이 있기 때문이며, 

오직  9 가지만을 나머지 원인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아니니, 그 생기인 중에도 인연이 아닌 것이 있기 때문이다.


或菩薩地所說牽引、生起種子卽彼二因,所餘諸因卽彼餘八。

雖二因內有非能生因,而因緣種勝,顯故偏說。雖餘因內有非方便因,而增上者多,顯故偏說。

제2사(第二師)의 견해로써, 혹은 보살지에서 말하는 끌어당기는 종자인 견인종(牽引種)과 생겨나게 하는 종자인 생기종(生起種)이라는 것은  10인 중의 견인인(牽引因)과 생기인(生起因)  가지 원인으로, 나머지 모든 원인이라는 것은   나머지 여덟 가지를 말하며,  

 가지 원인 중에서도 능생인이 아닌 것이 있지만, 인연의 종자가 뛰어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에 비중을 두어 말하는 것이며,

나머지 원인 중에서도 방편인이 아닌 것이 있지만, 증상연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에 비중을 두어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有尋等地說生起因,是能生因餘方便者,生起卽是彼生起因,餘因應知卽彼餘九。雖生起中有非因緣種,而去果近,親顯故偏說。雖牽引中亦有因緣種,而去果遠,親隱故不說。餘方便攝,准上應知。

'유가사지론'의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에서 말한 10인(因) 중의 제4 생기인(生起因)인은 심(尋)심소가 있는 지위에서의 생기인은 능생인이고, 나머지는 방편인이라고 설한 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으니,

생기인이란  그것의 생기인이고,나머지 원인의 여인(餘因)이란   나머지 아홉 가지 원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생겨나게 하는 종자인 생기종(生起種) 중에서도 인연이 아닌 종자가 있기는 하지만, 결과를 버리는 것이 가깝고, 친인연(親因緣, 명언종자名言種子)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에 비중을 두어 말하는 것이며,

끌어당기는 종자인 견인종(牽引種) 중에도 역시 인연인 종자가 있지만, 결과를 버리는 것이 멀고 친인연이 은복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니, 나머지는 방편인에 포함된다는 것도 위의 내용에 견주어서 알아야 할 것이다.


所說四緣依何處立?復如何攝十因、二因?

論說因緣依種子立,依無閒滅立等無閒,依境界立所緣,依所餘立增上。

▷묻습니다; 위에서 말한 인연(因緣) · 등무간연(等無間緣) · 소연연(所緣緣) · 증상연(增上緣)의 사연(四緣)을 어떤 의지처에 의거해서 건립한 것입니까?

또한 어떻게 10인(因)과 2인(因)에 포함되는 것입니까?

▷답한다; 논서, '유가사지론' 제5권에서 말하기를 “종자의 의지처에 의거해서 인연을 건립하고, 무간멸의 의지처에 의거해서 등무간연을 건립하고, 경계의 의지처에 의거해서 소연연을 건립하고, 나머지 의지처에 의거해서 증상연을 건립한다”고 4연(緣)은 15처(處)에 의거함을 밝히고 있으니,

 4() 15() 의거함과 10인과 2인에 포함되는 관계를 밝힌다.


此中種子卽是三、四、十一、十二、十三、十五,六依處中因緣種攝。雖現四處亦有因緣,而多閒斷,此略不說。

 가운데에서 종자(種子)란,  제3ㆍ제4ㆍ제11ㆍ제12ㆍ제13ㆍ제15의 여섯 가지 의지처 중의 인연종자(因緣種子)에 포함되며,

현행의 제11ㆍ제12ㆍ제13ㆍ제15  가지 의지처에도 역시 인연인 것이 있지만, 많이 단절되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해서 말하지 않았으며,

지금은 오직 종자를 말하고 현행을 말하지 않으므로 3ㆍ제4 의지처를 제외한 나머지  가지 의지처(11ㆍ제12ㆍ제13ㆍ제15)에도 역시 현행의 인연인 것이 있긴 하지만, 많이 단절되므로 여기서는 생략해서 인연에 포함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或彼亦能親辦自果,如外麥等亦立種名。

혹은 그것도 역시 능히 직접 자기 결과를 판별하므로, 외부의 맥(麥, 보리) 등과 같이 역시 종자라는 명칭을 건립한 것이다.

 가지 의지처(11ㆍ제12ㆍ제13ㆍ제15) 중의 현행이 능히 인연이 되는 것도 역시  가운데의 종자라는 말에 포함되는 것으로, 직접 자기 결과를 판별하기 때문이다.


或種子言唯屬第四,親疏、隱顯、取捨如前。

혹은 종자라는 말은 오직 제4의 의지처에만 속하는 것으로, 멀고 가까움, 은(隱, 은복)과 현현이 있으므로 취하고 버리는 것은 앞에서 제2사(第二師)가 말한 바와 같으며,

→제4의 의지처는 15 중의 4성숙된 종자의 의지처인 유윤종자의처(有潤種子依處)이다.

 

言無閒滅境界處者,應知摠顯二緣依處非唯五、六,餘依處中亦有中閒二緣義故。或唯五、六,餘處雖有而少隱故,略不說之。

무간멸(無閒滅)ㆍ경계의 의지처인 경계처(境界處)라는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하니 총체적으로 등무간연(等無間緣)과 소연연(所緣緣)의  가지 연(緣)의 의지처를 나타내는 것으로, 오직 제5와 제6의지처가 될뿐인 것은 아니며,

앞의 제1사(第一師)의 견해와 같이 나머지 의지처 중에서도 역시 중간의 등무간연ㆍ소연연의  가지 연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제2사(第二師)의 견해와 같이 혹은 오직 제5와 제6의지처뿐이니, 나머지 의지처에도 비록 있긴 하지만 약간 조복되기 때문에 생략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論說
因緣能生因攝,增上緣性卽方便因,中間二緣攝受因攝。雖方便內具後三緣,而增上多,故此偏說。餘因亦有中閒二緣,然攝受中顯故偏說。初能生攝,進退如前。

논서, '유가사지론' 제38권에서 말하기를 “인연은 능생인에 포함되며,

증상연의 속성은 곧 방편인에 포함되며,

등무간연(等無間緣) · 소연연(所緣緣)은 섭수인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방편인 속에는 뒷부분의 세 가지 연(緣)을 갖추었지만 증상연이 많기 때문에 이것에 비중을 두어서 말한 것이며,

나머지 원인에도 역시 중간의 두 가지 연(緣)이 있지만, 섭수인 중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에 비중을 두어 말한 것이며,

첫 번째의 인연을 능생인에 포함시키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진퇴(進退)는 앞에서와 같다.

앞에서 인용한 '유가사지론'의 보살지에서 밝힌 것에 의거해서, 만약 공통적으로 6() 취한다면 나아감의 진(進)이라 하고, 만약 오직  가지 인만을 취한다면 물러남의 퇴(退)라고 이름한다. 

또한 6인을 취하는 중에서 오직 종자만을 취한다면, 능생인(能生因) 현행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 아니므로 물러남의 퇴(退)라고 하며,

만약 아울러 현행을 취한다면, 그것을 나아감의 진(進)이라 한다. 

또한 '유가사지론'의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 문장에 의해 만약 공통적으로 6인을 취한다면, 나아감의 진(進)이라 이름하고, 오직 하나의 원인만을 취하면 물러남의 퇴(退)라고 말한다.


所說因、緣必應有果,此果有幾?依何處得?

果有五種:一者異熟。謂有漏善及不善法,所招自相續異熟生無記。二者等流。謂習善等所引同類,或似先業後果隨轉。三者離繫。謂無漏道斷障所證善無爲法。四者士用。謂諸作者假諸作具所辦事業。五者增上。謂除前四餘所得果。

▷묻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10인(因)과 4연(緣)은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이 결과에 몇 가지가 있으며, 어떤 의지처에 의거해서 얻는 것입니까

▷답한다; 결과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숙과(異熟果)이니, 유루의 선ㆍ불선의 법에 초감된 자기 상속의 이숙생(異熟生)의 무기를 말하며,

둘째는 등류과(等流果)이니, 선 등을 익혀서 이끌어진 같은 부류의 인동류(引同類)와 혹은 이전의 선업(先業)과 비슷하게 이후의 결과가 따라서 전전하는 것을 말하며,

셋째는 이계과(離繫果)이니, 무루도가 장애를 끊고 증득한 선의 무위법을 말하며,

넷째는 사용과(士用果)이니, 모든 작용의 주체가 모든 만드는 도구를 의지하여 판별한 사업을 말하며,

다섯째는 증상과(增上果)이니, 앞의 네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얻어진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4() 15() 결과를 얻는 것을 밝힌다.

 

'瑜伽'等說習氣依處得異熟果,隨順依處得等流果,眞見依處得離繫果,士用依處得士用果,所餘依處得增上果。

'유가사지론' 제 5권 등에서 말하기를 “습기의 의지처인 습기의(習氣依)는 이숙과(異熟果)를 얻으며,

수순의 의지처인 수순의(隨順依)는 등류과(等流果)를 얻으며,

진실한 견해의 의지처인 진견의(眞見依)는 이계과(離繫果)를 얻으며,

주체의 작용의 의지처인 사용의(士用依)는 사용과(士用果)를 얻으며,

나머지 의지처는 증상과(增上果)를 얻는다”고 하였다.


習氣處言,顯諸依處感,異熟果一切功能。

제1사(第一師)의 견해로써 습기의 의지처인 습기의(習氣依)라는 말은 모든 의지처가 이숙과(異熟果)를 초감하는 모든 세력을 나타낸다고 하였으며,

이숙과(異熟果) 열다섯 가지 의지처 중에 3습기의 의지처, 4성숙된 종자의 의지처, 12차별된 세력의 의지처, 15장애하지 않는 것의 의지처 등으로 다섯 가지로써 얻거나, 또는 이외에 8작용의 의지처를 첨가하여 여섯 가지 의지처로써 얻는다고도 말한다.

 

隨順處言,顯諸依處引等流果一切功能。

수순의 의지처 인 수순의(隨順依)란, 모든 의지처가 등류과(等流果)를 이끄는 모든 세력을 나타내며,

등류과(等流果) 습기ㆍ성숙된 종자ㆍ진실한 견해ㆍ수순ㆍ차별된 세력ㆍ화합ㆍ장애하지 않는 것의 의지처  일곱 가지 의지처로써 얻는다. 또는 이외에 주체의 작용의 의지처를 첨가하여 여덟 가지 의지처로써 얻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혹은 여기에 작용의 의지처를 덧붙여서 아홉 가지 의지처로써 얻는다고 말한다.

 

眞見處言,顯諸依處證離繫果一切功能。

진실한 견해의 의지처인 진견의(眞見依)란, 모든 의지처가 이계과(離繫果)를 증득하는 모든 세력을 나타낸다.

이계과(離繫果) 진실한 견해ㆍ수순ㆍ차별된 세력ㆍ화합ㆍ장애하지 않는 것의 의지처  다섯 가지 의지처로써 얻는다. 또는 여기에 주체의 작용인 사용(士用)ㆍ작용의 의지처의 둘을 첨가하여 일곱 가지 의지처로써 얻는다고 말한다.

 

士用處言,顯諸依處招士用果一切功能。

주체의 작용의 의지처인 사용과(士用果)란, 모든 의지처가 사용과(士用果)를 초감하는 모든 세력을 나타내며,

사용과(士用果) 감각작용ㆍ주체의 작용ㆍ작용ㆍ화합ㆍ장애하지 않는 것의 의지처  다섯 가지 의지처로써 얻는다. 또는 여기에 다시 습기ㆍ성숙된 종자ㆍ무간멸ㆍ진실한 견해ㆍ수순ㆍ차별된 세력의 의지처  여섯 가지를 덧붙여서 열한 가지 의지처로써 얻는다고 말한다.

 

所餘處言,顯諸依處得增上果一切功能。

나머지 의지처라는 말은 모든 의지처가 증상과(增上果)를 얻는 모든 나타내며, 

증상과(增上果) 언어ㆍ경계ㆍ감각기관ㆍ장애의 의지처 등의  가지 의지처와 나머지 열한 가지의 일부분으로써 얻는다.

 

不爾,便應太寬太狹。

그렇지 않다면 문득 크게 관대하거나 크게 협소한 것이어야 한다.

만약 위에서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면, 예를 들면 습기라는 것을 오직 3습기의 의지처에만 배대하고, 성숙된 종자의 의지처  나머지  가지 의지처에 둔다든가, 3의지처 중에서 () 아닌 것까지도 역시 이숙과를 얻을  있다고 말한다면, 관대함의 관(寬)의 과실 되며,

또한 나머지 성숙된 종자의 의지처   가지 중에서 업종자도 있는데, 그것이 이숙과를 얻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협소함의 협(狹)이라는 과실이 있게 된다.


或習氣者唯屬第三,雖異熟因餘處亦有,此處亦有非異熟因,而異熟因去果相遠,習氣亦爾,故此偏說。

제2사(第二師)의 견해로써, 혹 습기는 오직 제3의 의지처에만 속하고 이숙인은 다른 의지처에도 역시 있으나, 이 의지처에도 역시 이숙인이 아닌 것이 있지만, 이숙인은 결과를 버리는 양상이 멀고, 습기도 역시 그러하므로, 따라서 이것에 비중을 두어 말하는 것이다.

치우쳐서 습기가 이숙과를 얻는다고만 말한 것이다.


隨順唯屬第十一處,雖等流果餘處亦得,

수순의(隨順依)는 오직 제11의 의지처에만 속하며, 등류과를 나머지 다른 의지처로써도 역시 얻을 수 있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등류과를 얻을  있는 일곱 가지 혹은 여덟 가지 의지처 중에서 수순의를 제외한 나머지를 가리킨다.

 

此處,亦得非等流果,而此因招勝行相顯,隨順亦爾,故偏說之。

 의지처로써도 역시 등류과가 아닌 것을 얻을  있지만,  원인은 뛰어난 법을 초감하는 작용이 두드러지고 수순도 역시 그러하므로, 따라서 그것에 비중을 두어 말한 것이다.

 

眞見處言唯詮第十,雖證離繫餘處亦能,此處亦能得非離繫,而此證離繫相顯故偏說。

진실한 견해의 의지처인 진견의(眞見依)란, 오직 제10의 의지처만을 말하는 것으로, 이계과(離繫果)를 증득하는 것이 나머지 다른 의지처로써도 역시 가능하고, 이 의지처로써도 역시 능히 이계과가 아닌 것을 얻을 수 있지만,

이것이 이계과를 증득하는 모습이 두드러지므로, 따라서 그것에 비중을 두어 말한 것이다.

→다른 의지처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계과(離繫果) 얻을  있는 다섯 가지 혹은 일곱 가지 의지처 중에서 진실한 견해의 의지처를 제외한 나머지  가지 혹은 여섯 가지를 가리킨다.


士用處言唯詮第九,雖士用果餘處亦招,此處亦能招增上等,而名相顯,是故偏說。所餘唯屬餘十一處,雖十一處亦得餘果,招增上果餘處亦能,而此十一多招增上,餘已顯餘,故此偏說。

주체의 작용의 의지처인 사용의(士用依)라는 말은 오직 제9의 의지처만을 말하는 것으로, 사용과(士用果)는 다른 의지처로써도 역시 초감되고 또한  의지처로써도 역시 증상과 등을 초감할  있지만, 명칭도 모습도 두드러지므로, 따라서 이에 비중을 두어 말하는 것이다.

나머지 다른 의지처란 앞의 네 가지 결과의 의지처를 제외한 나머지의 11 가지 의지처에만 속하며,

11 가지 의지처로써도 역시 나머지 다른 결과, 즉 5과(果) 중에서 증상과를 제외한 나머지 4과(果)를 얻으며,

증상과를 초감하는 것은 다른 의지처로써도 역시 가능하지만,  11 가지가 증상과를 많이 초감하고, 나머지로써도 이미 나머지 결과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11 가지에 비중을 두어 말하는 것이다.

나머지  가지 의지처로써 나머지  가지 결과를 얻는 것을 이미 나타냈기 때문에 치우쳐 11 가지 의지처로써 증상과를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 10인(因)과 4연(緣)의 많고 적음에서 결과를 얻는 것을 밝힌다.
如是卽說此五果中,若異熟果,牽引、生起、定異、同事、不相違因增上緣得

이상과 같이 말한다면,  5과 중에서 이숙과(異熟果)는 견인인(牽引因)ㆍ생기인(生起因)정이인(定異因)ㆍ동사인(同事因)ㆍ불상위인(不相違因)과 증상연(增上緣)으로써 얻으며,

 

若等流果,牽引、生起、攝受、引發、定異、同事、不相違因,初後緣得。

등류과(等流果)는 견인인(牽引因)ㆍ생기인(生起因)ㆍ섭수인(攝受因)ㆍ인발인(引發因)ㆍ정이인(定異因)ㆍ동사인(同事因)ㆍ불상위인(不相違因)과 초연(初緣, 인연)ㆍ후연(後緣, 증상연)으로써 얻으며,

 

若離繫果,攝受、引發、定異、同事、不相違因,增上緣得。

이계과(離繫果)는 섭수인(攝受因)ㆍ인발인(引發因)ㆍ정이인(定異因)ㆍ동사인(同事因)ㆍ불상위인(不相違因)과 증상연(增上緣)으로써 얻는다.

 

若士用果,有義觀待,攝受、同事、不相違因,增上緣得。有義觀待,牽引、生起、攝受、引發、定異、同事、不相違因,除所緣緣餘三緣得。若增上果,十因、四緣一切容得。傍論已了,應辯正論。

사용과(士用果)에 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으니,

첫 번째의 견해는 관대인ㆍ섭수인ㆍ동사인ㆍ불상위인과 증상연으로써 얻는다고 하는 것이며,

두 번째의 견해는 관대인ㆍ견인인ㆍ생기인ㆍ섭수인ㆍ인발인ㆍ정이인ㆍ동사인ㆍ불상위인 그리고 소연연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연(緣)으로써 얻는다고 하였다.

증상과는 10인과 4연으로써 일체를 얻는 것이 인정되니,

15 가지 의지처에 의거해서 4연을 설명한, 방론(傍論)을 이미 요별하였으니 마땅히 정론을 판별하리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