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 7권
세친(世親) 보살 지음, 현장(玄奘) 한역.
5. 피입인과분(彼入因果分) 3
又諸菩薩,以其六種波羅蜜多,饒益有情,見彼於己,有大恩德,不見自身,於彼有恩,是名菩薩荷恩意樂.
又諸菩薩,卽以如是六到彼岸所集善根,深心迴施一切有情,令得可愛勝果異熟,是名菩薩大志意樂.
또한 모든 보살은 6 가지의 바라밀다로써 유정을 이롭게 하여서, 유정들이 보살에 대해서 큰 은덕이 있다고 볼지라도, 보살 스스로는 그들에 대한 은덕이 있다고 보지 않으니, 이것을 보살이 은혜를 짊어지는 하은의요(荷恩意樂)이며,
또한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은 6 가지의 도피안으로 쌓은 선근으로써 깊은 마음으로 모든 유정들에게 되돌려 베풀고, 사랑할 만한 뛰어난 결과인 이숙을 얻게 하나니, 이것을 보살의 큰 뜻의 대지의요(大志意樂)라 이름하며,
又諸菩薩,復以如是六到彼岸所集善根,共諸有情,迴求無上正等菩提,是名菩薩,純善意樂,
如是菩薩,修此六種意樂所攝,愛重作意.
또한 모든 보살은 다시 이와 같은 6 가지의 도피안으로 쌓은 선근으로써, 모든 유정과 함께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무상정등보리를 구하나니, 이것을 보살의 순수한 순선의요(純善意樂)라 하며,
이와 같이 보살은 이러한 6 가지의 의요에 포섭되는 지극히 사랑하는 바의 애중작의(愛重作意)를 수행하는 것이다.
又諸菩薩,於餘菩薩六種意樂,修習相應,無量善根,深心隨喜,如是菩薩,修此六種意樂,所攝隨喜意樂.
又諸菩薩,深心欣樂,一切有情,六種意樂所攝六種到彼岸修, 亦願自身與此六種到彼岸修,恒不相離, 乃至安坐妙菩提座,如是菩薩,修此六種意樂,所攝欣樂作意.
若有聞此菩薩,六種意樂,所攝作意修已,但當能起一念信心,尚當發生無量福聚,諸惡業障,亦當消滅,何況菩薩.
또한 모든 보살은 다른 보살이 6 가지의 의요를 닦아 익힘과 상응하는 무량한 선근을 깊은 마음으로 따라서 기뻐하나니, 이렇게 보살은 이 6 가지의 의요에 포섭되는 바를 따라 기뻐하는 수희의요(隨喜意樂)를 수행하며,
또한 모든 보살은 깊은 마음으로 즐겁게, 모든 유정의 육종의요(六種意樂)에 포섭되는 6 가지의 도피안을 닦아서, 스스로가 이 6 가지 도피안의 수행을 항상 여의지 않으며, 나아가 승묘한 보리좌에 편안히 앉을 것을 서원하나니, 이렇게 해서 보살은 이 여섯 가지의 육종의요(六種意樂)에 포섭되는 수희의요(隨喜意樂)를 수행하는 것이다.
만약 이 보살의 여섯 가지의 육종의요(六種意樂)에 포섭되는 작의의 수행을 듣고 나서, 다만 일념동안 만이라도 믿는 신심(信心)을 일으킨다면, 장차 무량한 복취(福聚)를 일으키고, 모든 악업의 장애를 소멸할 수 있거늘, 하물며 보살이겠는가!
▶釋曰:五種修中,現起加行修者,謂於現起加行而修.成所作事修者,謂諸如來安住法身,有無功用所作佛事,常無休息.於其六種波羅蜜多,雖無現行,然爲攝益諸有情故,恒常現行,成所作事.
▷해석한다; 5 가지의 수행 가운데 ‘현재 가행을 일으키는 현기가행수(現起加行修)’란, 현재 가행을 일으켜서 수행함이며,
‘해야 할 사업을 성취하는 소작사수(所作事修)’이란, 모든 여래는 법신에 안주하고,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無功用)으로 불사(佛事)를 지으시나, 항상 휴식이 없으며, 그 6 가지의 바라밀다에 대한 현행이 없을지라도 모든 유정을 섭수하여 이롭게 하기 때문에, 항상 현행해서 해야 할 사업을 성취하는 것이며,
於爾所時,一一剎那者,假使以三無數劫量,爲一剎那,如是剎那積集時量,乃至菩提.經爾所時,一一剎那,假使頓捨一切身命等,其義易了,應隨本文.如此次第積集時量,乃至菩提,經爾所時,一一剎那,假令爲起一戒等心,處在三千大千世界,滿中熾火,恒乏一切資生衆具,此言顯示住處艱難資緣乏少,
‘그 경과하는 시기의 낱낱의 찰나’는 가령 3무수겁(無數劫)의 분량을 한 찰나로 삼는다면, 이러한 찰나가 적집된 시간의 분량인 것이며,
‘나아가 깨달음으로부터 그 시기를 경과하는 낱낱의 찰나마다 가령 단박에 모든 신명을 버리고’ 등은 그 의미를 알기 쉬운 것이니, 본문에 따라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순서로 적집된 시간의 분량으로부터 나아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그 경과하는 시기의 낱낱의 찰나마다 가령 지계 등의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타오르는 불에 처하고, 항상 삶을 돕는 여러 도구가 부족하다’는 것이란, 머무는 곳의 어려움과 도구, 조건의 궁핍을 나타낸 것이다.
此中意樂無有厭足,當知卽是廣大意樂.卽此長時,恒無閒斷,當知卽是長時意樂.長者久也.餘義易了.諸惡業障,亦當消滅者,此中意說,滅彼能與異熟功能,或對治彼往惡趣力.
‘이 중에서 의요(意樂)에 싫어함이 없다’는 것은, 곧 광대한 광대의요(廣大意樂)라고 알아야 하며,
이것이 오랜 기간 동안 항상하여서 중단됨이 없다는 것은, 곧 오랜 기간의 장시의요(長時意樂)이니,
‘장(長)’은 오래된 구(久)의 의미이니, 그외 다른 것의 뜻은 알기 쉬운 것이다.
‘모든 악업의 장애도 역시 장차 소멸시킨다’것의 취지는, 그것을 멸하여도 능히 이숙의 작용 능력을 주거나, 혹은 그 살기 괴로운 악취(惡趣)로 나아가는 힘을 다스리는 것이다.
ㅡ장애를 소멸하여도, 오히려 이숙의 결과를 얻는 것은 보살의 원력에 의한 생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論曰:此諸波羅蜜多差別,云何可見?應知一一各有三品.施三品者:一法施`二財施`三無畏施.戒三品者:一律儀戒`二攝善法戒`三饒益有情戒.忍三品者:一耐怨害忍`二安受苦忍`三諦察法忍.
▷논문; 이 모든 바라밀다의 차이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나하나에 각각 세 가지의 삼품(三品)이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보시의 시삼품(施三品)은 첫째는 법의 보시인 법시(法施)이고,
둘째는 재물의 보시인 재시(財施)이며,
셋째는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無畏施)이다.
계율의 세 품류인 계삼품(戒三品)은, 첫째는 율의계(律儀戒)이고,
둘째는 일체의 선법을 닦는 섭선법계(攝善法戒)이며,
셋째는 유정을 널리 이롭게 하는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이다.
인욕의 세 품류인 인삼품(忍三品)은 첫째는 원한을 참는 내원해인(耐怨害忍)이고,
둘째는 고통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안수고인(安受苦忍)이며,
셋째는 법을 자세히 관찰하는 제찰법인(諦察法忍)이다.
精進三品者:一被甲精進 `二加行精進`三無怯弱,無退轉,無喜足精進. 靜慮三品者: 一安住靜慮`二引發靜慮`三成所作事靜慮. 慧三品者:一無分別加行慧`二無分別慧`三無分別後得慧.
정진의 세 품류인 정진삼품(精進三品)으로는, 첫째는 큰 서원을 일으키는 피갑정진(被甲精進)이고,
둘째는 가행정진(加行精進)이며,
셋째는 두려움이 없는 무겁약(無怯弱), 퇴전이 없는 무퇴전(無退轉), 만족함이 없는 무희족(無喜足)의 정진이다.
정려의 세 품류인 정려삼품(靜慮三品)으로는, 첫째는 안주함의 안주정려(安住靜慮)이고,
둘째는 이끌어 내는 인발정려(引發靜慮)이며,
셋째는 해야 할 바를 성취하는 성소작사정려(成所作事靜慮)이다.
지혜의 세 품류인 혜삼품(慧三品)으로는,
첫째는 아공을 체득하는 무분별지혜의 무분별가행혜(無分別加行慧)이고,
둘째는 법공을 체득하는 무분별지혜인 무분별혜(無分別慧)이며,
셋째는 아공과 법공을 체득하는 무분별지혜의 무분별후득혜(無分別後得慧)이다.
ㅡ바라밀다의 종류에 관한, 제7 차별장(第7 差別章).
피갑(被甲)은 갑주(甲胄, 갑옷)를 입는다는 뜻으로, 보살의 수행을 말한다. 갑옷을 입고 적진을 향할 때 두려워하지 않고 큰 위세가 있는 것과 같은 정진을 말한다.
▶釋曰:於此宣說波羅蜜多品差別中,顯示體性,各三差別. 此中何故,說法施等三種差別? 謂由法施故,資他善根,由財施故資益他身`由無畏施故資益他心,以是因緣故,說三施.
▷해석한다; 이 바라밀다 품류의 차별을 널리 말하는 가운데 체성에 각각 세 가지의 차별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니, 어찌하여 여기에서 법보시 등의 세 가지 차별을 말하는 것인가?
‘법의 보시의 법시(法施)’에 의해서 다른 이들의 선근을 키우고,
‘재물의 보시인 재시(財施)’에 의해서 남의 몸을 이롭게 하며,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無畏施)’에 의해서 남의 마음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으로 세 가지 보시의 시삼품(施三品)를 말하는 것이다.
三種戒中,律儀戒者,是依持戒,爲欲建立其餘二戒,是故安住.所以者何?住律儀者, 便能建立攝善法戒, 由此修集一切佛法,證大菩提,復能建立益有情戒,由此故能成熟有情.
세 가지 계율 중에서 ‘율의계(律儀戒)’란 의지(依持)의 계율로서, 그 나머지 두 가지 계율을 건립하기 위하여 안주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곧, 율의에 안주하는 자는 능히 ‘섭선법계(攝善法戒)’를 건립할 수 있고, 이로 인하여 모든 불법을 닦아서 대보리를 증득하게 되며,
또한 ‘능히 유정을 이롭게 하는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을 건립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능히 유정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三種忍中,耐怨害忍,能忍受他所作怨害,勤修饒益有情事時,由此忍力,遭生死苦,而不退轉.安受苦忍,能正忍受所遭衆苦,由此忍力,於生死中,雖受衆苦,而不退轉.諦察法忍,堪能審諦觀察諸法,由此忍力,建立次前所說二忍.
세 가지 인욕 가운데 ‘원한을 참는 내원해인(耐怨害忍)’이란, 능히 남이 짓는 원한을 참고 받아들이는 것이니, 유정을 이롭게 하는 일을 부지런히 닦을 때, 이 인욕의 힘에 의해서 생사의 고통을 만나도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안수고인(安受苦忍)’이란, 맞닥드려진 갖가지의 고통을 능히 바르게 참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 인욕의 힘에 의해서 생사 안에서의 갖가지 고통을 받을지라도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법을 자세히 관찰하는 제찰법인(諦察法忍)’이란, 능히 제법을 진실하게 살펴서 관찰하는 것을 감당해 내는 것이니, 이 인욕의 힘에 의해서 앞의 두 가지 인욕을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三精進中,其體差別,卽薄伽梵契經中說:有勢`有勤`有勇`堅猛`不捨善軛.彼經五句,卽是此中,三精進體之所解釋.由被甲精進故,最初有勢.由加行精進故,於加行時,能有精勤.由無怯弱,無退轉,無喜足精進故, 如其次第,於此後時,有勇`堅猛,不捨善軛故.
세 가지 정진 중에서 그 자체의 차이는 곧 박가범(부처님)께서 계경(契經, 경전)에서 ‘힘이 있고, 부지런함이며, 용맹스러움이고, 견고하고 맹렬하며, 선법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경전의 다섯 문구는 곧 이 세 가지 정진의 자체를 해석한 것이다.
‘큰 서원을 일으키는 피갑정진(被甲精進)’에 의해서 처음의 힘이 있게 되고,
‘가행정진(加行精進)’에 의해서 가행시에 능히 정진하며,
‘두려움이 없는 무겁약(無怯弱), 퇴전이 없는 무퇴전(無退轉), 만족함이 없는 무희족(無喜足)의 정진’에 의해서 그 순서대로, 이후의 시기에 용맹하고, 견고하며, 맹렬하여서 선법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由此三釋彼五句.所以者何?或有最初,爲求無上正等菩提,雖有勢力,而加行時不能策勵,故說有勤. 雖復有勤,心或怯弱,爲對治彼,故說有勇.由有勇故,心無退屈,應知怯弱卽是退屈. 心雖無怯,逢生死苦,心或退轉,由此退失所求佛果,爲對治彼,立無退轉. 無轉退者,卽是堅猛,故無退轉,顯示堅猛,由堅猛故,逢苦不退.
따라서 이 세 가지에 의해서 그 다섯 문구를 해석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혹은 처음에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무상정등보리를 구하기 위해서 힘이 있을지라도, 가행할 때에 책려할 수 없기 때문에 부지런함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며,
또한 부지런한 마음이 있을지라도, 두려움이 있는 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용맹하다고 말하는 것이니, 용맹이 있음으로써 마음에 퇴굴심이 없는 것이니, 두려움이 곧 퇴굴심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겁약즉시퇴굴怯弱卽是退屈)
비록 마음에 두려움이 없을지라도 생사의 고통을 만나면, 혹 마음이 퇴전하기도 하여서 구하던 불과를 잃어버리게 되나니,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퇴전이 없는 것을 건립하는 것이다.
‘퇴전이 없는 무퇴전(無退轉)’이란, 곧 견고하고 맹렬한 것이니, 따라서 퇴전이 없다는 것은 견고하고 맹렬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견고하고 맹렬함으로, 고통을 만날지라도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有雖逢苦能不退轉,而得少善,便生喜足,由此不證無上菩提,是故次須說無喜足.是不得少生喜足義,此卽顯示不捨善軛.由是義故,說三精進.
어떤 이는 비록 고통을 만났을지라도, 퇴전하지 않아서 작은 소선(少善)을 얻게 되어, 문득 기쁘하고 만족함을 일으키나니, 이로 인하여 무상보리를 증득하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다음에 반드시 ‘기뻐하거나 만족함이 없는 무희족(無喜足)’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조금도 기쁘하고 만족함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의미로써, 곧 선법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뜻에 의거해서 세 가지 정진을 말하는 것이다.
三靜慮中,安住靜慮者,由此能安現法樂住.引發靜慮者,由此引發六種神通.成所作事靜慮者,謂依此故,成立所作利有情事,是故說名成所作事.由此義故,靜慮有三.安立慧體,有三種中,其義易了.
세 가지 정려 가운데 ‘안주함의 안주정려(安住靜慮)’란 이로 인하여 능히 현재 안락한 경지에 머무는 현법낙주(現法樂住, 선정의 다른이름)에 안주하는 것이다.
‘이끌어 내는 인발정려(引發靜慮)’란, 이로 인하여 여섯 가지의 육신통을 이끌어 내는 것이며,
‘해야 할 바를 성취하는 성소작사정려(成所作事靜慮)’는, 이것에 의지함으로써 해야 할 바, 즉 유정을 이롭게 하는 사업을 성취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해야 할 사업을 성취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뜻에 의거해서 정려에 세 가지가 있으며, 반야를 안립함에도 세 가지가 있으나, 그 의미는 알기 쉬운 것이다.
▶論曰:如是相攝,云何可見?由此能攝一切善法,是其相故`是隨順故`是等流故.
▷논문; 이와 같이 서로 포섭함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것에 의거해서 능히 모든 선법을 포섭하나니, 그것의 상(相), 즉 체상(體相)이기 때문이고, 수순(隨順)하기 때문이며, 등류(等流)이기 때문이다.
ㅡ서로 포섭함에 관한, 제8 섭장(第8 攝章).
▶釋曰:如是相攝,云何可見者,此問如是波羅蜜多,與諸善法,互相攝義,云何可見.由此能攝一切善法者,應知由此波羅蜜多,能具足攝一切善法,彼亦能攝波羅蜜多.應知此中,一切善法,卽是一切菩提分法.是其相故者,是般若相.是隨順故者,應知卽是信輕安等.是等流故者,謂六神通及十力等,諸餘功德.
▷해석한다; ‘이와 같이 서로 포섭함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란, 이와 같은 바라밀다와 모든 선법이 서로 포섭하는 뜻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며,
‘이것에 의거해서 능히 모든 선법을 포섭한다’는 것이란, 능히 이 바라밀다를 구족해서 모든 선법을 포섭함으로써, 그것도 역시 능히 바라밀다를 포섭한다는 것이며,
여기서 모든 선법이란 모든 보리분법(菩提分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의 상(相), 즉 체상(體相)이기 때문’이란, 반야의 상(相)을 말하는 것이며,
‘수순하기 때문’이란, 믿음의 신(信)과 경안(輕安) 등의 심소를 말하는 것이니, 믿음과 경안 등은 선심소(善心所)이기 때문에 바라밀다에 수순함을 말하는 것이며,
‘등류(等流)이기 때문’이란 여섯 가지 신통의 육통(六通)과 10력(力) 등 나머지 모든 공덕으로, 바라밀다로부터 등류(等流)된 결과들이다.
경안(輕安), 번뇌를 멀리하여 경(輕)하고, 몸과 마음을 평안히 조절하여 안(安)하는 능력의 심소로서 선심소(善心所)이다. 이것은 욕계의 산심위(散心位)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색계ㆍ무색계의 정위(定位)에서만 생기하는 것이다.
▶論曰:如是所治攝諸雜染,云何可見?是此相故`是此因故`是此果故.
▷논문; 이와 같이 다스려지는 소치(所治)에 모든 잡염이 포섭됨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것 자체의 상(相)이기 때문이고, 이것의 원인(因)이기 때문이며, 이것의 결과(果)이기 때문이다.
ㅡ다스림에 관한, 제9 대치장(第9 對治章).
▶釋曰:如到彼岸攝諸白法,前已顯示;此所對治,亦攝一切諸雜染法,今當顯示.是此相故者,是貪等相.是此因故者,是慳等因,所謂不信及邪見等.是此果故者,謂慳`犯戒`忿等諸果.
▷해석한다; 바라밀다(도피안到彼岸)에 모든 청정법을 포섭한다는 것은 앞에서 나타내 보인 바와 같으며,
이 다스려지는 바의 소대치(所對治) 역시도 일체의 모든 잡염법을 포섭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며,
‘이것 자체의 상(相)이기 때문’이란 탐욕 등의 자체의 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의 원인(因)이기 때문’이란 인색한 간(慳) 등의 원인으로서 불신(不信)과 삿된 사견(邪見) 등이며,
‘이것의 결과(果)이기 때문’이란 인색한 간(慳)ㆍ계율을 범하는 범계(犯戒)ㆍ분노 등의 모든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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