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8. 증상심학분(增上心學分) 2

 

▶論曰:云何菩薩,能行惠施? 若諸菩薩, 無少所施, 然於十方無量世界, 廣行惠施.

云何菩薩,樂行惠施? 若諸菩薩, 於一切施, 都無欲樂. 

논문; 보살이 은혜로운 보시를 어떻게 능히 행하는가? 모든 보살은 조금도 베푸는 바가 없으나, 시방의 무량한 세계에서 널리 은혜로운 혜시(惠施) 행하는 까닭이며,

보살이 은혜로운 혜시(惠施) 어떻게 즐겁게 행하는가? 모든 보살은 일체의 보시에 있어서 전혀 욕락(欲樂)하는 바 없이 행하는 까닭이며,

 

云何菩薩,於惠施中,深生信解?若諸菩薩, 不信如來,而行布施. 云何菩薩,於施策勵? 若諸菩薩,於惠施中, 不自策勵.云何菩薩, 於施耽樂?若諸菩薩,無有暫時,少有所施.

보살이 은혜로운 혜시(惠施) 안에서 어떻게 깊은 믿음의 신해(信解)를 일으키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여래를 믿지 않고서도 보시를 행하는 까닭이며,

어떻게 보살은 이 보시를 재촉하고 격려하는 책려(策勵)를 하는가? 모든 보살은 은혜로운 혜시(惠施) 안에서 스스로를 책려하지 않는 까닭이며,

어떻게 보살이 보시에 대하여 탐락(耽樂)하는가? 모든 보살은 잠시도 적게 보시하는 바가 없는 까닭이며,

 

云何菩薩,其施廣大?若諸菩薩,於惠施中,離娑洛想.云何菩薩,其施淸淨? 若諸菩薩,殟波陁慳.云何菩薩,其施究竟?若諸菩薩,不住究竟.云何菩薩,其施自在?若諸菩薩,於惠施中,不自在轉.云何菩薩,其施無盡?若諸菩薩,不住無盡. 如於布施,於戒爲初`於慧爲後,隨其所應當知亦爾. 殟 병들 온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는 광대한 것인가? 모든 보살은 은혜로운시에 대해서 흩어져 버리는, 사락(娑洛)이라는 생각을 여읜 까닭이며,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청정한 것인가? 모든 보살은 인색함을 없앤, 온파타간(殟波陀慳)인 까닭이며,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궁극적인 것인가? 모든 보살이 궁극에 머물지 않는 까닭이며,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자재한 것인가? 모든 보살은 은혜로운 보시 안에서 자재하거나 전전하지 않는 까닭이며,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인가? 모든 보살은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에 안주하지 않는 까닭이니,

보시와 같이 계율을 처음으 삼고 지혜를 끝으로 삼아서,  상응하는 바를 따라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曰:云何菩薩,能行惠施等者,謂諸菩薩,一切有情,攝爲自體,是故彼施,卽是己施,是此意趣. 云何菩薩,樂行惠施等者,謂諸菩薩,不樂修行,味著等施,但樂修行,菩薩淨施.言味著者,意說貪染.或有餘處,名來求施.

해석한다; ‘보살이 은혜로운 보시의 혜시를 어떻게 능히 행하는가?’ 등은 보살은 모든 유정을 섭수하여 자체로 삼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보시는  스스로 보시라는 의취(意趣)인 것이다. 

‘보살이 은혜로운 혜시(惠施)를 어떻게 즐겁게 행하는가?’ 등은, 이른바 모든 보살은 탐착하는 등의 미착(味著)의 보시를 즐겨 수행하지 않고, 다만 보살의 청정한 보시를 즐겨 수행한다는 것으로,

미착(味著)의 의미는 탐욕으로 오염된 것이나, 혹 다른 곳에서는 장차 구하는 보시의 내구시(來求施)라 하기도 한다.

ㅡ급다(笈多)ㆍ행구(行矩) 역본인 진본(隋本)에서는 유소득(有所得) 보시로 되어 있다.

 

云何菩薩,於惠施中,深生信解等者,謂諸菩薩,自得施心,而行惠施,不藉他緣.

云何菩薩,於施策勵等者,謂諸菩薩,性自能施,慳悋斷故.不待他策,亦不自策,任運能施,是此意趣.

云何菩薩,於施耽樂等者,謂諸菩薩,常行施故,無暫時施,一切施故,無少所施.

云何菩薩,其施廣大等者,謂諸菩薩,依定行施,卽是離欲,而行施義.

言娑洛者,顯目堅實,密詮流散.今取密義,離流散想,依定行施,故成廣大.

‘보살이 은혜로운 혜시(惠施) 안에서 어떻게 깊은 믿음의 신해(信解)를 일으키는 것인가?’ 등은 모든 보살은 스스로 보시의 마음을 내어 은혜로운 보시를 행하고, 남의 반연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어떻게 보살은 이 이 보시를 재촉하고 격려하는 책려(策勵)를 하는가?’ 등은,

모든 보살종성은 스스로 능히 보시하나니, 인색함을 끊었기 때문이며, 남의 채근을 기다리지 않고 또한 스스로도 책려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능히 보시한다는 의취(意趣)이다.

어떻게 보살이 보시에 대하여 탐락(耽樂)하는가?’ 등은, 이른바 모든 보살은 항상 보시를 행하는, 즉 일시적인 보시가 아니며, 또한 일체를 보시하기 때문에 조금도 보시하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이며,

‘어떻게 보살의 그 보시는 광대한 것인가?’ 등은 모든 보살은 선정에 의지하여 보시를 행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곧 욕심을 여의고 보시를 행한다는 뜻이다. 

‘사락(娑洛, sāra의 음사 音寫)’은 표면적인 뜻으로는 견실(堅實)의 뜻이고, 

은밀한 뜻으로는 흩어져 버림의 유산(流散)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은밀한 뜻을 취해서 흩어져 버린다는 유산(流散)의 생각을 여의는 것이며, 선정에 의지해서 보시를 행하기 때문에 광대함을 이루는 것이다.


云何菩薩,其施淸淨等者,謂諸菩薩,拔除慳足,而行惠施.殟波陁者,顯目生起,密詮拔足.

波陁名足,殟名爲拔.今取密義,拔除慳足,令面傾覆,而行惠施,是故說名殟波陁慳.

云何菩薩.其施究竟等者,謂諸菩薩,不住究竟無餘涅槃,如聲聞等,是故究竟,常能行施.

云何菩薩,其施自在等者,謂諸菩薩,令施等障,不得自在,而行惠施,令所治障,不自在故,施得自在.

云何菩薩,其施無盡,謂諸菩薩,不住涅槃,常行惠施,此中無盡.意取涅槃,不同聲聞住涅槃故,其施無盡.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청정한 것인가?’ 등은 모든 보살이 인색함을 없애어서 은혜로운 혜시(惠施)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온파타(殟波陀, 범어 utpatti의 음사)’는 표면적인 뜻으로는 생기(生起)이고, 

은밀한 뜻으로는 제거함의 발족(拔足)을 나타내는 것으로, 파타(波陀)를 족(足)이며, 온(殟)은 뽑아내는 발(拔)이다.

여기에서는 은밀한 뜻을 취하여 인색함의 발(足)을 빼내고, 얼굴을 기울여 덮어서 은혜로운 혜시(惠施)를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인색함의 발을 빼내는 발족(拔足)이라 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궁극적인 것인가?’ 등은, 이른바 모든 보살은 궁극적으로 무여의열반에 안주하는 성문등과는 다르기 때문에 구경(究竟)에도 항상 능히 보시를 행하며,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자재한가?’란, 모든 보살은 보시 등의 장애가 자재할 수 없게 하여서, 은혜로운 혜시(惠施) 행함을 말하는 것으로, 다스려야  장애의 소치장(所治障)으로 하여금 자재할 수 없게 까닭에 보시의 자재를 얻는 것이며,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인가?’는, 이른바 모든 보살은 열반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은혜로운 보시의 혜시(惠施)를 행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이라는 것은 열반을 의미하는 것이나, 성문이 안주하는 열반과는 다르기 때문에  보시는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인 것이다.

 

ㅡ이하는  가지의 십악업(十惡業)의 은밀한 뜻을 해석한다.

▶論曰:云何能殺生?若斷衆生生死流轉.云何不與取?若諸有情無有與者,自然攝取.云何欲邪行?若於諸欲,了知是邪,而修正行.云何能妄語?若於妄中,能說爲妄.云何貝戍尼?若能常居最勝空住.云何波魯師?若善安住所知彼岸.云何綺閒語?若正說法品類差別.云何能貪欲?若有數數欲,自證得無上靜慮.云何能瞋恚?若於其心,能正憎害一切煩惱.云何能邪見?若一切處,遍行邪性,皆如實見.

논문; 어떠한 것이 능히 살생을 한다는 것인가? 중생의 생사유전을 끊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주지 않는 것을 취한다는 것인가? 유정들은 주는 이가 없어도 자연히 섭취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삿된 행을 하는 것인가? 모든 욕망이 삿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바른 행을 닦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능히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허망된 것에 대해서 허망된 것으로 능히 말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항상 가장 뛰어난 공의 패술니(貝戌尼, 양설, 최승공)인가? 능히 항상 가장 뛰어난 최승공(最勝空)에 안주하여 머무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피안에 머무는 파노사(波魯師, 추어)인가? 알아야  바의 피안에  안주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교묘한 기문어(綺間語)를 말하는 것인가? 법의 품류의 차이를 바르게 말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능히 탐욕한 것인가? 자주자주 스스로 최상의 정려를 증득하고자 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성냄인 것인가?  마음으로 일체 번뇌를 능히 바르게 증오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삿된 사견(邪見)인가? 모든 곳에서 두루 행하는 삿된 성품 모두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釋曰:如經中說,苾芻我是能殺生等者,此中顯彼所說意趣.云何欲邪行.者,謂知諸欲皆是其邪,而修正行.云何貝戍尼者,此貝戍尼,顯目離閒語,密詮常勝空.貝者表勝,戍者表空,尼者表常,今取密義,與答相應,是故答言:若能常居最勝空住.

해석한다; 경전에서 “비구들이여, 나는 능히 살생한다” 등을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의취(意趣)를 여기에서 나타내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삿된 사행(邪行)을 하는 것인가?’란, 모든 욕망의 삿됨을 알아서 바른 행을 닦는 것을 말하며,

‘어떠한 것이 항상 가장 뛰어난 공의 패술니(貝戌尼)인가?’에서  패술니(貝戌尼, paiśunī의 음사)는 표면적인 뜻으로는 이간질하는 말이고, 은밀한 뜻으로는 항상 뛰어난 공을 나타내는 것으로,

패(貝, pai)는 뛰어난 승(勝)을, 술(戌, śu)은 공(空)을, 니(尼, ni)는 항상의 상(常)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은밀한 밀의(密義)를 취한다며, 대답과 상응하는 까닭에 ‘능히 항상 가장 뛰어난 최승공(最勝空)에 안주하여  머문다’고 대답한 것이다.

 

云何波魯師者,此波魯師,顯目麤惡語,密詮住彼岸.波表彼岸,魯師表住,今取密義,與答相應,是故答言:善安住所知彼岸.是到所知彼岸住義.云何能邪見等者,謂色等中,如實觀見遍行邪性.卽是於彼依他起中,如實觀見遍計所執,是邪性義. 於十不善業道文中,餘義易了.

‘어떠한 것이 피안에 머무는 파노사(波魯師)인가?’에서  파로사(波魯師, pāruṣī의 음사)란, 표면적인 뜻으로는 거친 말의 추악어(麤惡語)이고, 은밀한 뜻으로는 피안에 머무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파(波, pā)는 피안을, 노사(魯師, ruṣī)는 머무는 주(住)를 나타낸다. 

여기서는 은밀한 취한다면 대답과 상응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알아야  바인 피안에  안주한다”고 대답한 것이니,  이것은 알아야  바인 피안에 이르러 안주한다는 의미이다.

‘어떠한 것이 삿된 사견(邪見)인가?’ 등은 물질(色) 등에 있어서 두루 작용하는 삿된 속성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곧 의타기성 중에서 변계소집성은 삿된 성품의 뜻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가지불선업도(十不善業道)의 문장에 있어서 다른 의미는 알기 쉬운 것이다. 


▶論曰:甚深佛法者,云何名爲甚深佛法?此中應釋:謂常住法,是諸佛法,以其法身,是常住故. 又斷滅法,是諸佛法,以一切障,永斷滅故. 又生起法,是諸佛法,以變化身,現生起故. 又有所得法,是諸佛法,八萬四千諸有情,行及彼對治,皆可得故. 又有貪法,是諸佛法,自誓攝受,有貪有情,爲己體故. 又有瞋法,是諸佛法;又有癡法,是諸佛法.

논문; 매우 심오한 심심불법(甚深佛法)이란 무엇을 매우 심오한 불법이라고 이름하는가?

이 가운데에서 상주하는 상주법(常住法)이란 모든 부처님의 법이니, 그 법신이 상주하기 때문이며,

또한 단멸하는 단멸법(斷滅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니, 모든 장애가 영원히 없어지기 때문이며,

또한 생기(生起)하는 생기법(生起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니, 변화신이 시현하여 생기하기 때문이며,

또한 소득이 있는 소득법(所得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니, 8만 4천 가지 모든 유정의 행과  다스림을 모두 얻을  있기 때문이며, 

또한 탐욕이 있는 유탐법(有貪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니, 탐욕이 있는 유정을 스스로 섭수할 것을 맹세하여서 자신의 자체로 삼기 때문이며,

또한 성냄이 있는 유진법(有瞋法)이 모든 부처님의 불법이며,

또한 어리석음이 있는 유치법(有癡法)이 모든 부처님의법이다.

 

又異生法,是諸佛法,應知亦爾. 又無染法,是諸佛法,成滿眞如,一切障垢,不能染故. 又無污法,是諸佛法,生在世閒,諸世閒法, 不能污故.是故說名甚深佛法.

또한 범부의 이생법(異生法)역시도 모든 부처님의법이라는 것도 마땅히 알아야 하며,

또한 잡염이 없는 무염법(無染法)이 모든 부처님의법이니, 원만히 성취되어 있는 진여는 모든 장애나 번뇌가 오염시킬  없기 때문이며,

또한 오염이 없는 무오법(無污法)이 모든 부처님의법이니, 세간에 머물러도 모든 세간법이 오염시킬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매우 심오한 심심불법(甚深佛法)이라 말하는 것이다.

매우 심오한 불법에 대해서 비밀스런 말을 해석한 것이다.


▶釋曰:復有餘處,契經說言,謂常住法,是諸佛法,廣說乃至,又無污法,是諸佛法.此中意趣,今當顯示.謂佛法身體,是常住故,說此法爲常住法.斷滅法者,所有障垢,悉皆斷滅,由此義故,卽說此法,爲斷滅法.有所得法,是佛法者,有情諸行,八萬四千,及彼對治,皆有可得,故說此法,名有所得.無染法者,淸淨眞如,一切障垢,所不能染,故說此法,名無染法.餘義易了,無煩重釋.

해석한다; 또한 다른 계경(경전)에서 “상주법(常住法)이 모든 부처님의법이며, 또한 잡염이 없는 무오법(無污法)이 모든 부처님의법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여기서는 그 의취(意趣)를 마땅히 나타내는 것으로,

부처님의 법신의 자체는 상주하기 때문에  법을 ‘상주법(常住法)’이라 말하며,

‘단멸법(斷滅法)’은 모든 장애가  단멸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의미에 의거해서   법을 단멸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소득이 있는 소득법(所得法)이 모든 부처님의법’이라는 것은 유정의 8만 4천의 모든 행과 그것의 다스림은  얻을  있게 되는 까닭에  법을 소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잡염이 없는 무염법(無染法)’이란 청정한 진여는 모든 장애가 오염시킬  없는 까닭에,  법을 잡염이 없는 무염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나머지의 뜻은 알기 쉽운 까닭에 번거롭게 거듭 해석하지 않겠다.


▶論曰:又能引發,修到彼岸,成熟有情,淨佛國土,諸佛法故,應知亦是菩薩等持作業差別.

논문; 또한 능히 이끌어 내어서 도피안(到彼岸, 바라밀다)를 닦아서 유정을 성숙하게 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함이 모든 부처님의법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보살의 삼마지의 작업차별(作業差別)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釋曰:前所未說,作業差別,今於此中,復顯菩薩等持作業.謂諸菩薩,依三摩地,能修一切波羅蜜多.又依此定,能善成熟,一切有情,發神通等,種種方便,引諸有情,入正法故.又由此力,能善淸淨一切佛土,心得自在,隨欲能成,金銀等寶,諸佛土故.又由此力,能正修集一切佛法,是三摩地作業差別.

해석한다; 앞에서 아직 말하지 않은 작업차별(作業差別)로써, 여기에서 다시 보살의 등지(等持, 삼마지)의 작업을 나타낸 것이니, 모든 보살은 삼마지에 의지해서 능히 모든 바라밀다를 수행하고, 또한 이 선정에 의지해서 능히 모든 유정을 성숙시키며, 신통 등의 갖가지 방편을 일으켜서 모든 유정을 인도하여 정법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 힘에 의거해서 능히 모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마음의 심자재(心自在)를 얻으며, 바라는 바를 따라 능히 금ㆍ은 등의 보석으로 장엄된 불국토를 성취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 힘에 의거해서 능히 모든 불법을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삼마지의 작업차별(作業差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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