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6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3

 

▶論曰:由四尋思,謂由名`義`自性`差別,假立尋思;

及由四種如實遍智,謂由名`事`自性`差別,假立如實遍智,如是皆同不可得故.

논문; 네 가지 사색인 4심사관(四尋思觀)에 의거하는 것으로, 이른바 명칭(名)ㆍ대상(義)ㆍ자성(自性, 자체의 체성體性)ㆍ차별(差別, 모습과 작용의 차별성)에서 가립된 사색에 의거하며,  

그리고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두루 아는  가지 지혜인 사종여실편지(四種如實遍智)에 의거하나니, 이른바 명칭(名)ㆍ사물(事)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에서 가립되어 있는 그대로 두루 여실하게 아는 여실편지(如實遍知)에 의거하나니, 

이러한 것들 모두는 얻지 못하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다.

 

4심사관(四尋思觀) 인식의 대상인 명칭(名)ㆍ대상(義)ㆍ자성(자체의 체성體性)ㆍ차별(모습과 작용의 차별성)의  가지 법이 임시적인 존재인 가유(假有)이고 실무(實無)라고 심구(尋求)하여 사찰(思察)하는 관법이다.

4여실지관(四如實智觀)  가지 심사관 다음에 다시 명확히 인가(認可) 결정하고 또한 이렇게 관찰하는 마음인 능취심(能取心)까지도 가유실무(假有實無)라고 인가 결정하는 관법이다.

 

以諸菩薩,如是如實爲入唯識,勤修加行,卽於似文似義意言,推求文名唯是意言, 推求依此文名之義, 亦唯意言, 推求名義自性差別,唯是假立.若時證得唯有意言,爾時,證知若名若義, 自性`差別,皆是假立,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유식에 깨달아 들어가기 위해서 부지런히 닦고 가행함으로써  글자(文)와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는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에 대해서, 글자(文)와 명칭(名)은 오직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일 뿐이라고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글자(文)와 명칭(名) 의지하는 의미(義)도 역시 오직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일 뿐이라고 추구하며,

명칭(名)과 대상(義)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은 오직 가립일 뿐이라고 추구하는 것이니,

오직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득한다면, 그 때에 명칭(名)이나, 대상(義)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 모두 가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自性`差別義相無,故同不可得.由四尋思,及由四種如實遍智,於此似文似義意言,便能悟入唯有識性.

자성과 차별에는 대상(義)의 상이 없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인 것이다.

 가지 사색의 4심사(四尋思)와  가지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4여실지(四如實智) 의거해서,  글자(文)와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는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에 대해서,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능히 깨닫는 것이다.

ㅡ가행위에서 닦는 4심사관(四尋思觀) 4여실지관(四如實智觀) 대한 설명으로,


釋曰:如是悟入,今當顯示.由四尋思者,謂由名`義`自性等文之所顯說.及由四種如實遍智者,謂由名`事`自性`差別,假立等文之所顯說.如實遍知若名`若事`自性`差別,皆是假立,於中實義,皆不可得,是故說言,如是皆同不可得故.又先推求若名`若義`自性`差別,唯是假立,後如實知,如是眞實皆不可得, 於推求時,名爲尋思.若如實知,不可得時,卽名四種如實遍智.

해석한다;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이제 나타내 보이겠으니,

‘4심사(四尋思)에 의거한다’는 것은 ‘명칭(名)과 대상(義)의 자성(自性) 등에 의거한다’는 문장에서 말하는 바이며,

‘4여실지(四如實智)에 의거한다’는 것은 ‘명칭(名)과 사물(事)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에 의거해서 가립한다’ 등의 문장에서 말하는 바이다.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여실지(如實智) 명칭(名)이나 사물(事)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 모두 가립으로서, 그로부터  참다운 실의(實義) 얻을 수가 없으므로, 마찬가지로 이러한 것들 모두는 얻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먼저 명칭(名)이나 대상(義)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 4심사관(四尋思觀)에 의해서 오직 가립임을 추구하고,

나중에 있는 그대로 여실한 것들은 사여실변지관(四如實遍智觀)에 의해서 참으로 무소득임을 아는 것이다.

추구하여 사색하는 때를 심사(尋思)라 하고,

무소득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을 사여실변지(四如實遍智)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於此悟入唯識性中.何所悟入?如何悟入?入唯識性,相見二性及種種性,若名`若義`自性`差別假自性差別義,如是六種義皆無故,所取`能取性現前故, 一時現似種種相義而生起故.

논문; 이 유식성 안에 깨달아 들어감에 있어서, 어느 곳에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유식성과 상분(相分)ㆍ견분(見分)의  성품과 갖가지 성품에 들어가는 것이다. 

명칭(名)이나, 대상(義)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ㆍ가유의 자성인 가자성(假自性)ㆍ차별의 대상인 차별의(差別義),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의미는 모두 없는 무(無)이기 때문이다. 

취착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취착된 인식주체인 능취(能取)의 성품이 현전하기 때문이고,

동시에 현전하여 갖가지 상과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如闇中繩顯現似蛇,譬如繩上蛇非眞實,以無有故.若已了知彼義無者,蛇覺雖滅,繩覺猶在.若以微細品類分析,此又虛妄色`香`味`觸,爲其相故,此覺爲依繩覺當滅.

어두울 때에 노끈이 뱀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비유하자면 뱀이라고 생각한 노끈, 즉 그 뱀은 진실이 아닌 것이니, 존재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대상이 비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뱀이라는 지각은 없어졌으나 노끈의 지각은 아직 남아 있으니,  

만약 미세한 품류로써 분석한다면, 이 노끈의 상 또한 허망한 것이니, 빛깔(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을  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렇게 빛깔(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을 지각하는 것 의지처로 삼는다면, 노끈의 지각도 마땅히 멸하여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如是於彼似文似義六相意言,伏除非實六相義時, 唯識性覺,猶如蛇覺,亦當除遣,由圓成實自性覺故.

이상과 같이  문장(文)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한 여섯 가지 육상(六相)의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 속의 언어에 대해서 진실하지 못한 육상(六相)의 뜻을 조복할 때, 유식성의 지각은 마치 뱀의 지각과 같이 마땅히 없어져야 하는 것이니,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의 지각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釋曰: 今於此中,問所悟入及悟入譬. 唯識性者,唯有識性. 相見二性者,顯示有相, 有見之識, 顯現似因似所建立, 故名爲相. 種種性者,唯是一識顯現, 似有種種相生,非速疾故, 別別而現.於此悟入唯識性中,如是三種爲所悟入.

해석한다; 여기에서는 깨달아 들어가는 바의 소오입(所悟入)과 깨달아 들어감의 비유인 오입비(悟入譬)를 묻는 것이다. 

‘유식성(唯識性)’은 오직 식만이 존재하는 성품이며,

‘상분과 견분의  성품’은 유상식(有相識)과 유견식(有見識)을 나타내는 것으로, 원인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건립된 것과 비슷하게 현현하기 때문에 상이라 한다.

‘갖가지 성품’은 오직 하나의 식(識)이 현현할지라도, 존재(有)와 비슷한 갖가지  생겨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빠르게  지나가지 않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유식성(唯識性)에 깨달아 들어감에는 이와 같은  가지를 깨달아 들어가는 것으로 삼는 것이다.

 

一時現似種種相義而生起故者,謂似種種名`句`文相而生起故,及似種種依止此義而生起故.此中繩喩顯示悟入三種自性.伏除非實六相義時者,謂於遣滅六相義時,此中遣滅,名爲伏除.

‘현전에서 동시에 갖가지 상과 의미와 비슷하게 생겨나기 때문’이란, 갖가지 명칭(名)ㆍ문구(句)ㆍ글자(文)의 상과 비슷하게 현현하기 때문이고, 이것을 의지로 하는 갖가지 의미와 비슷하게 현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끈의 비유는  가지자성(三自性)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진실이 아닌 여섯 가지 육상(六相) 의미를 조복할 때’는 여섯 가지 육상(六相) 의미를 제거할 때를 말하는 것이며, 여기서 제거한다는 것은 조복하여 없애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명칭(名, nāman)은 어떤 의미를 갖는 최소단위의 단어. 명칭이라는 뜻으로, 사물을 가리키는 명칭이며, 언어표현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문구(句, pada)는 단어로 구성된 문구ㆍ문장 전체를 가리키며,

문자(文ㆍ味, vyañjana)는 단어나 문구ㆍ문장을 구성하는 낱낱의 글자의 음절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이 논서는 '섭대승론석'이다”라고 할 때, ‘이’ㆍ‘논’ㆍ‘서’ 등 한 자 한 자가 글자인 문(文)이고, ‘논서’ㆍ‘섭대승론석’이 명칭(名)이며, 이들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 전체가 문구(句)인 것이다.


▶論曰:如是菩薩,悟入意言似義相故,悟入遍計所執性,悟入唯識故,悟入依他起性.云何悟入圓成實性? 若已滅除意言,聞法熏習種類,唯識之想,爾時菩薩,已遣義想,一切似義,無容得生,故似唯識,亦不得生.由是因緣,住一切義無分別名,於法界中,便得現見相應而住, 爾時菩薩,平等平等所緣能緣無分別智,已得生起,由此菩薩,名已悟入圓成實性.

논문; 이와 같이 보살은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과 비슷하게 현현한 대상(義)의 상(相)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변계소집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유식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 어떻게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만약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으로 법을 들어서 훈습한 종류의 유식의 표상(想)을 없앤다면, 그때 보살은 대상의 표상인 의상(義想)을 없애어서, 모든 대상(義)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이 생겨날  없기 때문에, 오직 식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 역시도 생겨날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모든 의미의 일체의무분별지혜(一切義無分別)의 명칭에 안주하고, 

법계 안에서 문득 현전에 보는 것과 상응하여 안주할  있는 것이다. 

그때 보살은 평등하고 평등한 인식대상의 평등소연(平等所緣)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의 무분별지혜를 일으킬  있는 것이니, 이로 인하여 보살은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釋曰:悟入意言似義相故,悟入遍計所執性者,謂知諸義唯是遍計分別所作.由是故言悟入遍計所執自性. 悟入唯識故,悟入依他起性者,擧其唯識,卽取意言,了知一切唯意言性,由此悟入依他起性.

해석한다;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이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한 상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변계소집상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은 이른바 모든 대상이 오직 변계의 분별이 지은 것임을는 것이니, 이로 인하여 변계소집자성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며, 

‘유식(唯識)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에서,  유식(唯識)이라는 말을 거론하여도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을 가리키는 것이니, 일체는 오직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 성품임을 알고, 이로 인하여 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유식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하여 ‘유식’이란 말을 거론하지만, 여기서는 유식의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 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一切似義無容得生者,謂無如是品類實義可似其生.故似唯識亦不得生者,謂唯識相,亦不得起.何以故?計有識時,卽有義故.從是已後,現證眞如,此現證位,不可宣說,內自證故.

‘모든 대상(義)과 비슷하게 현현한 것이 생겨날  없다’는 것은 이와 같은 품류의 참된 대상은 그것과 비슷하게 생겨날  없기 때문이며,

‘오직 식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도 역시 생겨날  없다’는 것은 유식상(唯識相) 역시도 생겨날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식이 존재할 때에는  대상(義)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것 이후에는 진여를 현전에서 증득하는 것이니, 현전에서 증득하는 지위는 널리 말할  없는 것으로, 내면에서 스스로 증득하는 내자증(內自證)이기 때문이다.

 

爾時菩薩,平等平等所緣能緣無分別智,已得生起者,所緣謂眞如,能緣謂眞智,此二平等,譬如虛空,卽是不住所取能取二種性義.由不分別所取能取,是故說名無分別智.如是悟入圓成實性.

‘그때 보살은 평등하고 평등한 인식대상인 평등소연(平等所緣)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의 무분별지혜를 일으킬  있다’는 것이란,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은 진여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은 근본지혜인 진지(眞智)를 말하는 것으로, 둘은  평등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허공과 같은 것이다. 

 인식대상인 소연(所緣)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의  가지 성품의 의미에 머물지 않는 것이니, 인식대상인 소연(所緣)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를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무분별지혜라 이름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論曰:此中有頌:

▷논문;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法補特伽羅, 法義略廣性, 不淨淨究竟, 名所行差別.”

법과 보특가라(윤회하는 유정)ㆍ법ㆍ의미(義)ㆍ대략(略)ㆍ자세함(廣)ㆍ본성(性)ㆍ부정(不淨)ㆍ청정(淨)ㆍ구경(究竟)은

명칭(名)이 행하는 바의 차별이라네.


▶釋曰:如前所說,住一切義無分別名,何等爲名?幾品類義?爲答此問,以頌顯示,名類差別.

해석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의미의 일체의무분별(一切義無分別)의 명칭(名)에 머문다는 것에서,

무엇을 명칭(名)으로 삼고,  가지 품류의 뜻하는 바 있는 것인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게송으로써 명칭(名)과 품류의 차별을 나타내었다.

 

此中法名者,謂色受眼耳等.補特伽羅名者,謂佛及隨信行等.又法名者,謂契經等.義名者,謂依此法義.略名者,謂有情等,廣名者,謂彼一一各別能詮.

여기에서, 존재의 구성요소라는 뜻의 법(法)의 명칭(名)은 물질(色)ㆍ감수작용(受), 눈ㆍ귀 등이고, 

보특가라의 명칭(名)은 부처님을 따라서 믿고 행하는 수신행(隨信行, 수행의 계위(階位)에서 최초의 단계를 예로 든것) 등이며,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법의 법(法)의 명칭(名)은 계경 등을 말하고, 

의미(義)의 명칭(名)은  법에 의지하는 의미를 말하며,

대략(略)의 명칭(名)은 유정 등을 말하고, 

자세함(廣)의 명칭(名)은  하나하나의 각각 다른 능전(能詮)을 말하는 것이다.

ㅡ여기서 능전은 이름(名)의 뜻으로, 유정들 사이에 각가 다른 이름이 있는 것을 말한다.

 

姓名者,謂諸字本母.不淨名者,謂諸異生.淨名者,謂有學等.究竟名者,謂一切法摠相所緣.

본성(性)은 모든 글자의 본모(本母)를 말하고, 부정(不淨)의 명칭(名)은 모든 이생(異生, 범부)를 말하며,

청정(淨)의 명칭(名)은 유학(有學) 등을 말하며,

구경(究竟)의 명칭(名)은법의 총체적인상(摠相)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을 말한다.

 

이생(異生)은 범부라는 뜻으로, 갖가지 견해와 번뇌에 의해 여러 가지 과보를 받고 여러 세계(趣)에 태어나며, 또한 성자와 다른 생류(生類)이기 때문에 이생이라 한다.

유학(有學), 이미 4성제 등의 진리를 지견(知見)하여 자각하였지만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한 까닭에, 번뇌를 소멸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항상 계율ㆍ선정ㆍ지혜의 3학(學)을 닦는다.

성문의 4향(向)4과(果) 중에서 최후의 아라한과를 제외한 다른 단계인 수다원과ㆍ사다함과ㆍ아나함과를 유학이라 하고, 아라한과를 무학(無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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