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힐소설경 중권(維摩詰所說經卷中)

 

5.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

文殊師利問疾品 第五

Chapter 5

Manjusri Inquires about the Illness

 

[문수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 만주스리(Manjusri)의 음역이며, 문수사리(文殊師利) 혹은 만수사리(曼殊師利)라고 번역되며 줄여서 문수(文殊), 묘길상(妙吉祥) 만수실리(曼殊室利), 만수시리(滿殊尸利), 문수시리(文殊尸利), 문수지리(文殊支利), 묘덕(妙德), 묘수(妙首), 보수(普首)이라 부른다. 만주(ma ju) 즉 문수는 묘(妙)를 뜻하고, 슈리( r ) 즉 사리란 두(頭), 덕(德), 길상(吉祥)을 뜻한다. 요컨대 매우 지혜가 뛰어나서 묘한 공덕을 지녔다는 뜻으로, 문수사리는 항상 부처님의 왼쪽에 자리를 잡고서 불법의 지혜를 상징한다. 존상의 모습은 대일여래의 5지를 상징하는 5계를 머리에 묶고 있는 동자형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연화대에 앉아 바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들고 왼손에는 청련화를 쥐고 있으며, 위엄과 용맹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자를 타고 있거나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보살에 대한 신앙이 삼국시대 이래 널리 전승되었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인도에서 태어나 반야(般若)의 도리를 선양한 이로서, 항상 반야지혜의 상징으로 표현되어 왔다. 그는 '반야경'을 결집, 편찬한 이로 알려져 있고, 또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요 부모라고 표현되어 왔다. 이는 '반야경'이 지혜를 중심으로 취급한 경전이고, 지혜가 부처를 이루는 근본이 되는 데서 유래된 표현이다.

일설에는 이 문수보살이 석가의 교화(敎化)를 돕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몸을 바꾸어 보살의 지위에 머물고 있으나, 오랜 옛적에 이미 성불하여 용존상불(龍尊上佛)·대신불(大身佛)·신선불(神仙佛)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또 미래에 성불하여 보견여래(普見如來)로 불릴 것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일설에는, 현재 북방의 상희세계(常喜世界)에 있는 환회장마니보적불이 곧 문수보살로, 이 부처님의 이름을 들으면 사중죄(四重罪)가 없어진다고 하였다.

이 문수보살의 상주처(常住處)는 신라의 고승 자장(慈藏)이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서 기도를 드렸던 중국 산시성(山西省)청량산(淸凉山, 일명 五臺山)으로, 현재 1만 명의 보살과 함께 있다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강원도의 오대산을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으로 믿고 신봉한다.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함께 비로자나불의 양쪽 협시보살(夾侍菩薩:좌우에서 모시는 보살)이 되어 삼존불의 일원을 이루고 있다. 보현보살이 세상 속에서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띠고 행동할 때 문수보살은 사람들의 지혜의 좌표가 되었다. 이 두 보살은 항상 서로의 지혜와 실천행을 주시하고 사랑하면서 스스로의 소임을 다한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이다. 지혜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곧 마음에 아무런 분별심·차별의식·우열관념 등이 없는 한없는 고요 속의 밝음이다.

文殊師利(문수사리)보살 십대원(十大願); ①禮敬諸佛(예경제불) ②稱讚如來(칭찬여래) ③廣修供養(광수공양) ④懺除業障(참제업장) ⑤ 隨喜功德(수희공덕) ⑥ 請轉法輪(청전법륜) ⑦ 請佛住世(청불주세) ⑧ 常隨佛學(상수불학) ⑨ 恒順衆生(항순중생) ⑩ 普皆廻向(보개회향)]

 

爾時佛告文殊師利(이시불고문수사리)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그 때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Mañjuśrī)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Then the Buddha said to Manjusri, Go to Vimalakirti and ask him about his illness.  

文殊師利白佛言(문수사리백불언)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되
Manjusri said to the Buddha, 

世尊(세존) 彼上人者(피상인자) 難爲詶對(난위수대) 詶 대답할 수

세존이시여, 저 웃어른=上人을 저는 상대하기가 어렵습니다.

World Honoured One, it is difficult to talk to a wise man like him. 

[上人= 아주 훌륭한 사람, 높은 분, 손윗사람을 말하고 또 윗사람이 아랫 사람을 존칭으로 부를 때 상인이라 하기도 합니다.]

 

深達實相(심달실상) 善說法要(선설법요) 辯才無滯(변재무체) 滯 막힐 체

智慧無礙(지혜무애)

그는 실상에 깊이 통달하고, 진리의 요지=法要를 훌륭하게 설하며,

변재에 걸림이 없고, 지혜는 막힘이 없으며, 

He deeply understands the reality of all Dharmas and is good at explaining the essence of all Dharmas. His eloquence is unhindered, and his wisdom is all-encompassing. 

一切菩薩法式悉知(일체보살법식실지) 諸佛秘藏無不得入(제불비장무득입)

모든 보살에게 필요한 작법=法式을 모두 알고 있으며, 모든 부처님의 비밀스러운 공덕=秘藏을 모두 다 간직하고 있으며, 

He fully understands all the rituals performed by bodhisattvas and all the hidden treasures of the Buddhas, none of which he cannot access. 

[法式= 예의범절, 일체교리 또는 부처님과의 관계에서 또는 승단에서 갖추고 지켜야할 일체 법에 대한 격식들.

秘藏= 비밀의 장, 부처님만의 정신세계, 부처님만의 진리의 세계, 다른 사람이 쉽게 알 수 없는 것이 秘,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모든 부처님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에 無不得入, 즉 이 사람은 부처님의 마음과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降伏衆魔(항복중마) 遊戲神通(유희신통) 其慧方便(기혜방편) 皆已得度(개이득도)

온갖 마군을 항복시키고 신통력을 마음대로 부리며, 그 지혜와 방편을 모두 원만히 이루었으며, 

He can subdue all demonic obstacles and use his margical powers freely, and he has reached the perfection of all wisdom and convenience. 

[其慧方便(기혜방편) 皆已得度(개이득도) 이하에 현장 및 티베트 역에 있는 구절이 빠져 있다. 현장 역에 의하면 “이미 어떠한 문답에도 매듭을 지을 수 있으며, 자신이 있으며, 자유자재하여 어리석은 자의 변설로써 대적할 수가 없다”고 했다.]

 

雖然(수연) 當承佛聖旨(당승불성지) 詣彼問疾(예피문질) 旨 뜻 지
비록 그러하지만 부처님의 거룩한 뜻=聖旨를 받들어 그를 찾아가 문병하겠습니다.

None the less, since I have received the holly decree of the Buddha, I will go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於是衆中諸菩薩(어시중중제보살) 大弟子釋梵四天王等(대제자석법사천왕등)

咸作是念(함작시념) 

이에 회중 중의 많은 보살과 대제자들,  제석천, 범천, 사천왕 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Thereupon, all the bodhisattvas, the great disciples, with Sakra, Brahma, and the four heavenly kings thought inside,

今二大士(금이대사) 文殊師利(문수사리) 維摩詰共談(유마힐공담) 必說妙法(필설묘법)

‘이제 두 보살=大士이신 문수사리와 유마힐이 함께 이야기하면 반드시 묘법을 설할 것이리라.
Now that the two great masters, Manjusri and Vimalakirti, are now meeting and conversing, they will surely speak the profound and mysterious Dharma. 

卽時八千菩薩(즉시팔천보살) 五百聲聞(오백성문) 百千天人皆欲隨從(백천천인개욕수종)

바로 그 때에 8천의 보살들과 5백의 성문들, 백천의 천인들 모두가 뒤따라가고자 원하였습니다.

Immediately, eight thousand bodhisattvas, five hundred sravakas, and hundreds and thousands of celestial beings all wanted to go with them. 

於是文殊師利與諸菩薩(어시문수사리여제보살) 大弟子衆及諸天(대제자중급제천인)

恭敬圍繞(공경위요) 入毘耶離大城(입비야리대성)

그리하여 문수사리는 수많은 보살과 대제자와 천인들에게 공경하게 둘러싸인 가운데 비야리 대성으로 들어갔습니다.

In this way, Manjusri, all the great disciples of the bodhisattvas and celestial beings, went respectfully into the great city of Vaisali. 

爾時長者維摩詰心念(이시장자유마힐심념) 今文殊師利與大衆俱來(금문수사리여대중구래)

그 때 장자 유마힐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지금 문수사리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고 있으니, 

At that moment, Vimalakirti, the elder, thought, Now Manjusri has come with a large multitude. 

卽以神力空其室內(즉이신력공기실내) 除去所有及諸侍者(제거소유급제시자)

신통력=神力으로 방을 깨끗이 비워야겠다.’
그리고는 방안에 있는 것들을 치우고, 시자들까지도 내보낸 후, 

He emptied the room with his divine power, removing everything and all the attendants, 

唯置一牀(유치일상) 以疾而臥(이질이와) 牀 평상 상, 臥 누울 와

텅 빈 방안에는 오직 하나의 침상(침대)만을 놓아두고, 앓는 몸으로 누워있었다.

and placed only one bed on which he lay on in a sickly state. 

文殊師利旣入其舍(문수사리개입기사) 見其室空(견기실공) 無諸所有(무제소유)

獨寢一牀(독침일상)

문수사리가 그 집에 들어가자 방안은 室空=텅 비어 아무것도 없고, 뎅그라니 침상 하나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When Manjusri entered his dwelling, he saw that the room was empty, and there was nothing there except him alone on a bed. 

[아무것도 없이 홀로 침상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그야말로 초라하게 장식품도 없고, 지키는 사람도 없이 방안에 혼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時維摩詰言(시유마힐언) 善來文殊師利(선래문수사리)

그 때 유마힐은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문수사리여. 

At that moment, Vimalakirti said, Greetings, Manjusri, 

不來相而來(불래상이래) 不見相而見(불견상이견)

온다고 하는 상 없이 왔고, 본다고 하는 상 없이 보았습니다.

you have come with the appearance of not coming, and you have seen with the appearance of not seeing.

[문수보살이 여기 왔지만 오지 않는 모습으로써 왔으며, 또 나를 보았지만 보지 않는 모습으로써 나를 본다. 즉 당신이 여기 왔지만 오지 아니한 모습으로 왔고, 당신과 내가 서로 보지만 보는 것이 없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지만 정말 흔적 없이 오고 흔적 없이 가는 것, 법이 본래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가고 옴에 대해서 뭔가 종적을 남기려 하고 뭔가 표시를 내려는 마음을 쓰지만, 이 분들은 와도 오지 않는 모습으로 오고 보아도 보지 않는 모습으로 본다]


文殊師利言(문수사리언) 如是居士(여시거사)

문수사리는 말하되, 그렇습니다, 거사님.

Manjusri said, Indeed, householder. 

若來已(약래이) 更不來(갱불래) 若去已(약거이) 更不去(갱불거)

만약 와 버렸다면 다시는 오지 않고, 만약 가 버렸다면 다시는 가지 않는 것이니,

When one comes, there is no coming. When one goes, there is no going. 

[왔다고 하면 다시는 올 수가 없다 즉 왔다고 하는 것이 고정되어버리니까 또 올 수가 없다. 얼마든지 오고가고 해야 되는데, 갔다고 하면 다시는 가는 것이 없게 된다. 법이 얼마든지 오고 갈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왔다 갔다고 고정해버리면 죽은 말이 되니까 그런 표현은 삼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오는 사람은 쫒아온 바가 없이 온다. 어디서 왔느냐? 예를 들어 우리의 상식으로는 기원정사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가 지금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대답할 수가 있고 또 기원정사에 오기 전, 출가하기 전에는 어디 있었다는 등,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에서 왔다는 등 모든 아는 상식을 다 동원하면 이야기하겠지만, 실은 오는 것도 끝이 없고 가는 것도 끝이 없어 본래 그렇게 되어있는 생사유유무정지입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 來者無所從來(내자무소종래) 去者無所至(거자무소지)

왜냐 하면, 온다고 하지만 어디로부터 온 곳이 없고,

간다고 해도 어디로든 가는 곳이 없기 때문이며,

What is the reason? Those who come have nowhere to come from; those who goes has nowhere to go,

[來者無所從來, 어디라고 쫒아온 바가 없는 이치를 알기 때문에 내가 어디서 왔다하여도 꼭 어디서부터 왔다고 고집할 수 없다]

[去者는 無所至며, 간다고 해서 비록 내가 기원정사로 돌아가겠지만 실은 이르를 곳이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여기 온 것이 다 온 것은 아닌 것이, 공부 끝나면 가야 되고 또 집에 가서 다 갔다고 생각하지만, 다 간것이 아닌, 또 일보러 나가야 되고, 나가면 또 들어와야 되고, 자고는 또 어디 갈 곳이 있는 등 매일매일 계속 가야할 일이 있으니까 이를 곳이 없이 끝없이 가는= 無所至라. 끝없이 가고 끝없이 오는 것이 잠깐 어딘가에 정착해서 그저 잠깐 머무를 뿐입니다.  

그래서 삼계여박(三界旅泊)이라. 우리 인생살이가 욕계, 색계, 무색계를 돌면서 그런 삶의 모습들을 거쳐가는 것이 마치 나그네가 여관에서 하루 밤 머무는 것과 같은=無所至입니다.]

 

所可見者(소가견자) 更不可見(갱불가견)

또 보이는 것은 또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and what is visible is no more.

[所可見者는 更不可見이니, 가히 봄이 있는 자는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본다고 고정해 버리면 죽은 것이지만, 사람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 보고 또 보고 또 볼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본다고 고정된 말은 更不可見= 다시는 보지 못하는 말이 된다.

즉 보지 않는 모습으로 보는 것, 보되 보지않는 모습으로 본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且置是事(차치시사) 居士(거사) 是疾寧可忍不(시질영가인부)? 且 또 차

자, 이런 (지혜 겨룸) 이야기는 그만두고, 거사님, 이 병은 어찌 견딜 만하십니까? 

Let’s not discuss this for a moment. Householder, can you bear your illness? 

療治有損(요치유손) 不至增乎(불지증호)

치료를 받는 것이 병에 덜함이 있습니까, 더하지는 않았습니까? 

Is the treatment not making it worst rather than better? 

世尊慇懃致問無量(세존은근치문무량) 居士是疾(거사시질) 何所因起(하소인기)?

세존께서는 慇懃=매우 걱정하시며 문병하라 저를 보내셨습니다. 거사님, 이 병은 무엇 때문에 생겼으며, 

The World Honoured One has made immeasurable inquiries concerning you. Householder, how did this illness start? 

其生久如(기생구여)? 當云何滅(당운하멸)?

또 얼마나 오래되었고,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겠습니까?”

How long have you been suffering f

rom this disease? How con you get rid of it?

유마경변상도 1

示現受生而起無作(시현수생이기무작) 護持正法起方便力(호지정법기방편력)

이승에 생을 받는 모습을 나타내더라도 무작(apraihita)이라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오.

정법을 지키고 간직하면서 방편의 힘을 발휘하고

Manifest the receiving of rebirth to give rise to the unconditioned. 

To uphold the true Dharma and give rise to the power of skilful means. 

[示現受生으로 而起無作하며, 수생을 시현함으로써 무작을 일으킨다.

일부러 생을 받아서 태어나는 것이 수생입니다. 우리도 말하자면 수생을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우리는 수생이라 하지 않고, 경지에 이른 보살들이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어느 곳이든 자유자재하게 태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을 수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부처나 보살들이 그런 수생을 시현하되 무작=지음이 없음이다. 예를들면 우리가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가면 잠깐 구경하고 올 뿐, 그 나라의 정치나 교통문제 등의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듯이, 능엄경에서 이 삼계를 살아가기를 나그네처럼 살아간다고 한것 처럼, 부처님이나 보살들 도인들은 전부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무작, 지음이나 조작이 없는 것이란 두 손을 놓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 하되 내 마음이 거기에 매달려서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護持正法으로 起方便力하며, 정법을 잘 지키려면 방편이 필요하니까 방편력을 써서 정법을 호지한다.]

 

以度衆生起四攝法(이도중생기사섭법) 以敬事一切起除慢法(이경사일체기제만법)

중생을 제도하면서 4섭법(sagraha-vastu) 행하며,

一切=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事=봉사하기 위하여 교만한 마음을 없애고

To deliver sentient beings by bringing about the power of the four means of embracing.

By serving all sentient beings with respect, one develops the practice of eliminating self-importance. 

[以敬事一切로 起除慢法하며, 일체사람들을 공경하고 섬기며, 섬길 사=事. 공경하고 섬기게 되면 내가 잘났다는 교만을 제하는 법을 일으킨다. 자기 교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존경할 수 없느니까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만큼 교만을 없앴다는 뜻이 됩니다.]

 

於身命財起三堅法(어신명재기삼견법) 於六念中起思念法(어육념중기사념법)

몸= 생명= 재산= 있어서 (法身 慧命 法財) 3견법 얻도록 노력하며,

6하면서 올바른 사념(samyaksmti) 잊지 않고,

In body, life, and wealth, the three solid Dharmas arise.

From the six mindfulness, the Dharma of contemplation arises. 

[6념(六念, 산 ṣaḍ-anusmṛti, six kinds of mindfulness, six lines of thought)
염(念)의 마음작용을 사용하는 수행체계인 4념처(四念處) · 6념처(念處) · 10념(十念) · 10념처(十念處) 등에서 6념을 말한다. 6념은 6념처와 동의어이지만, 10념은 10념처와 다르다.
10념(十念) 가운데 처음의 6가지 염(念)이 6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6념은 6념법(六念法) · 6념처(六念處) 또는 6수념(六隨念)으로 불린다.
염(念, 산smṛti, 팔리 sati)의 마음작용은 관(觀), 정념(正念), 4념처(四念處), 끊임없는 수동적 관찰, 명기(明記)와 불망(不忘), 주의집중, 불산란 등을 뜻하며, 영어로는 mindfulness, awareness, inspection, recollection, retention, memory 등으로 번역된다.
6념은 초기불교, 북방과 남방의 부파불교, 대승불교 전체에 걸친 불교 일반의 보편적인 수행법이다.
6념은 여섯 가지 생각으로 번역되며, 다음의 6가지 염(念)을 사용한 수행을 말한다. 《잡아함경》 제33권 〈931. 수습주경(修習住經)〉의 용어와 표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염불(念佛) - 여래의 일을 생각함[念如來事] - 여래(如來) · 응(應) 등의 여래10호
염법(念法) - 법의 일에 대해 생각함[念於法事] - 세존의 법(法)과 율(律)
염승(念僧) - 비구의 일에 대해 생각함[念於僧事] - 4쌍8배(四雙八輩)의 현성(賢聖)
염계(念戒) - 계를 생각함[念戒] - 정계(淨戒) · 불괴계(不壞戒) 등의 계(戒)
염시(念施) - 보시의 일을 생각함[念施事] - 보시[施]와 사법(捨法)
염천(念天) - 모든 하늘의 일을 생각함[念諸天事] - 4대천왕(四大天王) · 33천(三十三天) 등의 천(天)]

[삼견법(三堅法)- '몸'과 '목숨'과 '재물', 사람들이 견고하게 붙들어 쥐려고 하는 세 가지]

 

於六和敬起質直心(어육화경기질직심) 正行善法起於淨命(정행선법기어정명)

6화경 행하면서 순박하고 올곧은 마음=質直心 가지게 되며,

착한 일을 바르게 행하기를 노력하여 청정한 생활=淨命 하고

Through the six reverent points of harmony to develop an upright mind.

The correct practice of the righteous Dharma beings with living a pure life. 

[바르게 선을 행하는 법으로써 淨命을 일으킨다. 淨命은 좋은 직업을 말하는 것으로, 깨끗한 직업으로써 생명을 깨끗히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맹자도 모순에서 모와 순은, 이 창은 어떤 방폐도 다 뚫는다. 그리고 이 방폐는 어떤 창도 다 막는다고 해서 모순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하지만, 이왕 무기를 만들어서 먹고 살려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창을 만드느니 사람을 보호하는 방폐를 만들어서 살아가는 것이 나은 것이니 직업을 선택해서 살라고 했습니다. 불교에서 어떤 직업을 선택하라고 하지는 않지만, 청명할 淨이기 때문에 깨끗한 직업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라, 즉 선한 행을 행하는 법으로써 하라는 것입니다]

[六和敬(육화경)
身和敬(신화경) 몸으로 부처님 행을 하여 화합하고.
口和敬(구화경) 입으로 부처님 말을 하여 화합하고.
意和敬(의화경) 뜻으로 부처님과 같은 생각을 하여 화합하고.
戒和敬(계화경) 율법을 서로 지켜 바른 행동을 하여 화합하고.
見和敬(견화경) 바른 견해를 가져 화합하고.
利和敬(이화경) 자리이타에 충실하여 화합하라.
六和敬法(육화경법)은 불교의 진리를 깨치고자 수행하는 사람들이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여 깨달음을 성취해야 하는 여섯 가지 도리로 송(宋)나라 高僧(고승)인 睦庵善鄕(목암선향)스님이 설했다고 한다.
六和合(육화합) 혹은 六和라고도 한다.
이 도리는 가장 기본적인 계율이며 수행 생활에서 생기는 불화나 분열을 막는 역할을 한다.
분명하고 확실한 도덕적 윤리적 해결책이 부처님 가르침 안에 있는데. 이것이 六和敬法(육화경법)의 가르침이다.]

 

心淨歡喜起近賢聖(심정환희기근현성) 不憎惡人起調伏心(불증오인기조복심)

마음을 깨끗이 하고 기쁜 마음으로 성인과 어진 이를 가까이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악인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다스리도록 하고

With a pure and joyful mind, one comes close to the sages.

Not to detest those who are evil and generate a disciplined mind. 

[不憎惡人으로 起調伏心하며, 미운데도 미워하지 않으려면 자기 자신을 조복해서,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됩니다]

 

以出家法起於深心(이출가법기어심심) 以如說行起於多聞(이여설행기어다문)

출가하는 마음으로 깊은 마음=深心 간직하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는=如說行하기 위하여 보다 많이 듣고자 하며

Whith the Dharma of renouncing to arise determination.

By practicing according to the teaching, one becomes learned. 

以無諍法起空閑處(이무쟁법기공한처) 趣向佛慧起於宴坐(취향불혜기어연좌)

다툼이 없는 회합을 위하여 고요하고 한적한 수도장을 마련하며,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좌선=宴坐를 행하고

By the Dharma of non-contention brings forth a secluded place.

解衆生縛起修行地(해중생박기수행지)
중생을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수행의 단계=修行地(yogcra bhmi)대로 올라가는 것이요,

Meditating in seclusion to seek the Buddha’s wisdom Liberating all sentient beings from bondage to bring about the place of practice.

[解衆生縛으로 起修行地하며, 중생의 속박을 풀어버리므로써 행을 닦는 수행하는 진리를 일으킨다.

결국 수행은 중생의 속박, 중생이 가지고 있는 온갖 속박을 푸는데 뜻이 있으니까, 수행의 지를 일으키므로써 중생의 속박을 푼다.]


以具相好及淨佛土(이구상호급정불토) 起福德業(기복덕업)

상호(32상 80종호)를 갖추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복덕을 짓는 업을 행하며

By possessing the marks and qualities to reach the pure land of the Buddha, and to bring about actions of merit and virtue. 

[以具相好와 及淨佛土로 起福德業하며, 절에 다니는 사람일수록 늘 예쁘게 하고, 단정하고 깨끗한 좋은 옷을 입으시라고 무비스님은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하는 자신도 좋지만 남에게 보시하는 것이 됩니다. 또 세상 살아가는 이치 그대로 福德業일을 일으킨다. 복덕 되는 것이죠]

 

知一切衆生心念(지일체중생심념) 如應說法(여응설법) 起於智業(기어지업)

일체 중생의 마음속의 생각을 알고, 각자에게 마땅한 가르침= 설하여 지혜의 업=智業 일으키며

To know the thoughts of all sentient beings and to expound the Dharma accordingly to bring about actions of wisdom. 

[智業= 지(智)는 jna의 역어(譯語), 혜(慧)는 prajna의 역어. 일반적으로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으나 따로 떼어서 말하면, 혜는 사물․도리(道理) 등을 알고 추리․판단하는 정신작용이며, 지는 그러한 사물․도리에 대하여 시비를 결정하고 단정하는 것으로서 번뇌를 끊는다고 하는 따위는 이 지의 작용이 중심이다. 또 여기에서 밖을 향하여 설해지고 있다.]

 

知一切法不取不捨(지일체법불취불사) 入一相門起於慧業(입일상문기어혜업)

일체법을 취하는=取하거나 버리지=捨하지 않고서 일상문(ekanaya) 들어가기 위해 지혜의 업=慧業 일으키며

Knowing all Dharmas without seizing or rejecting, enter the gate of one from, and bring forth the actions of wisdom. 

[知는 작용하는, 밖으로 표출해서 다른 사람을 건지는 것이라면, 이것을 자기 자신이 지니는 입장이 혜업이라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즉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지혜의 경지를 혜업이라면 그것을 이용해서 밖으로 중생을 제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지업이 된다고 분별해서 볼 수도 있습니다]

 

斷一切煩惱一切障碍(단일체번뇌일체장애) 一切不善法起一切善業(일체불선법기일체선업)

일체의 번뇌, 일체의 장애, 일체의 불선 모두 끊어 버리고, 일체의 바른 일=善業 모두 행하며

Breaking all vexations, all that separates and obstructs, all unwholesome Dharmas, and gives rise to all wholesome acts. 

[起一切善業하며, 번뇌를 끊은 것, 일체 장애를 끊은 것, 착하지 못한 법을 끊는 것, 착하지 못한 것을 전부 없애고, 일체 착한 업을 일으키는 것이 법보시다. 불손한 일을 안 하고, 선한일 하는 것이 법보시이고, 번뇌를 없애는 것이 법보시이고, 중생들의 근기를 잘 알아서 맞는 설법을 해주는 것이 법보시이다. ]

 

以得一切智慧一切善法(일득일체지혜일체선법) 起於一切助佛道法(기어일체조불도법)

일체의 지혜와 일체의 공덕을 얻음으로써 불도 도움이 되는 일체의 보조적인 수행법(37조도품 등)을 빠짐없이 행하는 것이요.

With the attainment of all wisdom and all wholesome Dharmas from which all methods that assist that Way of the Buddha arise. 

如是善男子(여시선남자) 是爲法施之會(시위법시지회)

같은 것을 법을 설해 주는 모임이라고 하오

Thus, good man, that is the meeting of Dharma-giving. 

若菩薩住是法施會者(약보살주시법시회자) 爲大施主(위대시주)

亦爲一切世閒福田(역위일체세간복전)
만약 보살이 같은 법을 설해 주는 모임에 머무른다면 그는 대시주 되고, 일체 세간의 복전 것입니다.
If a Bodhisattva abides in this kind of Dharma-giving, he is a great giver and a field of blessings for all the world. 

世尊(세존) 維摩詰說是法時(유마힐설시법시) 婆羅門衆中二百人(바라문중중이백인)

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개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세존이시여, 유마힐이 이러한 가르침을 설했을 , 바라문들 중의 2 명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으며, 

World Honoured One! When Vimalakirti spoke this Dharma, two hundred Brahmins in the multitude set their minds to develop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我時心得淸淨(아시심득청정) 歎未曾有(탄미증유) 稽首禮維摩詰足(계수예유마힐족)

卽解瓔珞價直百千以上之(즉해영락가치백천이상지) 不肯取(불긍취)

저는 마음이 청정(텅비어)해지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라 감탄하고 그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한 다음 몸에 두르고 있던 십만=百千이나 되는 값비싼 영락(구슬 목걸이) 풀어서 바쳤으나 받지 않았습니다

At that time, I also felt purified and praised his words as unprecedented. Then I bowed with my head touching Vimalakirti’s feet and offered him a necklace worth a hundred thousand, but he refused to accept it. 

我言(아언) 居士(거사) 願必納受(원필납수) 隨意所與(수의소여)
제가 말했습니다.
거사님원하오니 아무쪼록 받으시어 당신의 뜻대로 주고 싶은 이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I said, Householder, I wish you to take it. You may give it to whomever you wish. 

維摩詰乃受瓔珞(유마힐내수영락) 分作二分(분작이분)

유마힐은 영락을 받아 들고 반으로 나눈  

So Vimalakirti accepted the necklace and divided it into two parts. 

持一分施此會中一最下乞人(지일분시차회중일최하걸인)

모임에 사람 중에 가장 비천한 거지에게 절반을 주고

He gave one part to the lowliest beggar in the congregation 

持一分奉彼難勝如來(지일분봉피난승여래)

나머지 반은 광명국토 난승여래(Duprasaha-Tathgata)에게 바쳤습니다

and the other for Tathagata Difficult to Surpass. 

[奉彼難勝如來,이기기 어려운 여래, 어떤 여래도 이 여래를 못 이긴다. 즉 여래 중에 최고 높은 여래라는 뜻입니다. 제일 못난 걸인과 최고 높은 여래, 두 분께 평등하게 나누어주었다, 상하가 평등한 도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못나고 잘 난 것이 없다. 진실생명은 두구나 똑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 본래 생명의 가치, 본래의 마음의 가치는 누구나 동등하다. 거지란 겉 포장과 왕이라는 겉 포장과 부처라는 포장이 다를 뿐, 차별은 없다. 절대평등의 인간존엄성, 인간 절대의 가치성을 잘 나타내 보이는 대목입니다.]

 

一切衆會皆見光明國土難勝如來(일체중회개견광명국토난승여래)

모임의 모든 대중=會衆 난승여래를 우러러보았으며

All the assembly members beheld Tathagata Difficult to Surpass of the Land of the Light. 

又見珠瓔在彼佛上變成四柱寶臺(우견주영재피불상변성사주보대)

四面嚴飾(사면엄식) 不相障蔽(불상장폐)

부처님께 바친 영락이 부처님 주위에서 개의 보배로운 대좌와 기둥이 되어 4면을 거룩하게 장식했는데도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They saw the beads on that Buddha transforming into a four-pillar platform, decorated on all sides and without obscuring. 

[不相障蔽러라, 서로 가리거나 장애가 되지 않더라. 그런 것을 환히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時維摩詰現神變已(시유마힐현신변이) 作是言(작시언)

유마힐은 신통한 변화=神變을 나타내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After Vimalakirti had shown these divine changes, he said, 

若施主等心施一最下乞人(약시주등심시일최하걸인)

猶如如來福田之相(유여여래복전지상)

만약 보시를 하는 사람이 평등한 마음으로 가장 비천한 거지에게 보시하면서 여래복전 대하듯이 

If the giver gives to the humblest beggar with an equal mind, his merit and virtue are the same as the field of blessings planted by the Buddha, 

無所分別(무소분별) 等于大悲(등우대비) 不求果報(불구과보)

是則名曰具足法施(시즉명왈족법시)
분별함이 없이 평등하게 대비심을 드리우고 과보를 바라지 않고서 보시한다면, 이를 빠짐없이 법을 설해 즌,ㄴ=具足法施라 부릅니다.
and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two. With no differentiation, equal to great compassion, does not desire for rewards, is called the complete bestowal of Dharma. 
城中一最下乞人(성중일최하걸인) 見是神力(견시신력) 聞其所說(문기소설)

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개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비야리성에서 가장 비천한 거지도 신력을 보고, 설법을 듣고 (다른 사람들과)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When the lowest beggars in the city saw this divine power and heard what he said, they all developed the intention of attaining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Therefore, I could not go ask him about his illness.

 

如是諸菩薩各各向佛說其本緣(여시제보살각각향불설기본연)

이와 같이 모든 보살들도 저마다 부처님께 그들의 지난 경험[本緣]을 이야기하며 

稱述維摩詰所言(칭술유마힐소언) 皆曰(개왈) 不任詣彼問疾(불임예피문질)

유마힐이 말한 것을 칭찬하면서 모두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Then all the bodhisattvas each told the Buddha about their past causes, described what Vimalakirti had done, and said they did not dare to visit him to ask about his illness.


◎長者子善德

[보살(菩薩) bodhisattva , 보리살타, 보살마하살, 각유정=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므로 누구나 보살일 수 있다. 몇몇 특정한 보살들은 영원한 부처의 화현이자 위대한 구세주로 존중되고 있으며,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종종 역사상의 부처보다도 더욱 친근한 신앙의 대상으로 숭앙되고 있다.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자신의 궁극의 목표인 열반(涅槃)을 연기하겠다고 하는 보살의 서원(誓願)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 이전의 소승불교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아라한(阿羅漢 arhat)이나 스승의 지도없이 홀로 깨달음에 이르는 독각불(獨覺佛 pratyeka-buddha)을 이상적 전형으로 삼고 있었으나, 대승불교에서는 그러한 전형들을 개인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위와 같은 보살의 전형을 강력하게 내세워 그 위상을 높였던 것이다.
이러한 보살의 개념은 자비(慈悲 karuṇā)의 가치를 지혜(智慧 prajñā)의 가치에 대등하도록 고양시켜 주었다. 여기에서 보살은 특히 신도들에게 자신이 쌓은 공덕(puñña)을 이전해줌으로써 자비를 실천한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보살이 되겠다는 서원을 세울 수 있고, 일단 서원을 세우기만 하면 '십지'(十地 daśa-bhūmi)라고 하는 보살로서의 정신적 수행단계의 첫번째 단계에 들어가게 되며 이때부터는 인간의 세상이나 신의 세상에만 태어나게 된다.
그처럼 큰 뜻을 품는 보살은 대개 남자이지만 꼭 남자이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고, 재가자일 수도 있으며 반드시 출가자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므로 누구나 보살일 수 있고, 따라서 보살이 될 수 있는 이는 무한히 많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칭호는 주로 위대한 학자와 스승들의 경칭으로 사용되었으며, 동남아시아 등지에서는 불교도로서의 왕의 영예를 나타내는 관습적인 칭호로 자리잡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여성 재가신자의 일반적 경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몇몇 특정한 보살들은 영원한 부처의 화현이자 위대한 구세주로 존중되고 있으며,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종종 역사상의 부처보다도 더욱 친근한 신앙의 대상으로 숭앙되고 있다. 이러한 보살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보살은 자비로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Avalokiteśvara)로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ābha)과 관계가 깊다. 중국에서 널리 숭앙되는 보살로는 지혜를 특색으로 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 Mañjuśῑ), 저승에 있는 이들에게 특히 도움을 준다고 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 Kṣitigarbha), 보살행의 실천과 의지를 대변하는 보현보살(普賢菩薩 Samantabhadra) 등이 있다.
티베트에서는 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 그리고 금강저를 들고 불법을 수호한다는 집금강보살(執金剛菩薩 Vajrapāṇi)이 가장 널리 숭앙받는 세 보살이다. 다음 세상의 부처이자 현세의 보살로 묘사되는 미륵보살(彌勒菩薩 Maitreya)은 대승불교와 상좌부(上座部 Theravādā) 불교 모두에서 숭앙받는 유일한 보살이다.]

 

[재시, 법시, 무외시 3가지 중에서 여기서는 재시와 법시를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佛告長者子善德(불고장자자선덕)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는 장자의 아들 선덕(Sudatt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The Buddha said to Good Virtue(Sudatta), the son of an elder, Go to Virmalakirti and ask about illness. 


善德白佛言(선덕백불언) 世尊(세존)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

선덕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Good Virtue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am not qualified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我昔 自於父舍設大施會(억념아석자어부사설대시회)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저는 아버지의 집에서 성대한 보시 모임=大施會를 열어서, 

How come I remembered that I had set up a large charity meeting in my father’s house 

 

供飬一切沙門(공양일체사문) 婆羅門及諸外道(바라문급제외도)

貧窮下賤孤獨乞人(빈궁하천고독걸인)

모든 사문과 바라문, 그리고 수많은 외도와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 의지할 데 없는 사람=孤獨, 거지들에게 공양하였는데, 

to provide for all the monks, brahmins, laypeople, the poor, the lower class, those who are friendless, and beggars. 

[孤獨(고독)= 孤(고)는 부모가 없는 어린이의 경우이고 獨(독)은 나이가 들었으나 자식이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늙어서 자식이 없는 것도 외로운 일이요 어린데 부모가 없는 것도 외롭다는 뜻에서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期滿七日(기만칠일) 時維摩詰來入會中(시유마힐래입회중) 謂我言(위아언)

마지막 7일째 되는 날, 그 때 마침, 유마힐이 찾아와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At the end of the eventh day, when Vimalakirti came to the meeting, he said to me,

[우리나라에서도 예전(고려)에는 소위 반승(半僧)이라 해서, 천명, 오백 명, 천명 이천 명, 삼천 명, 고려 말 쯤에는 만 명이상에게 최소한 1박2일, 2박3일 동안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뜻있는 정치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 정권이 바뀌자 불교를 배척하는 배불정책이 시작되었고, 배불정책이 나중에는 척불과 억압까지 이르러서 스님들은 장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려 때의 반승(半僧)이라는 것이 인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유가 있는 장자의 집안이라면 일체사문과 바라문 빈궁한사람들 하천한 사람들 고한사람 독한사람 걸인들에게 공양하였다는 것입니다]

 

長者子(장자자) 夫大施會不當如汝所設(부대시회부당여여소설)

當爲法施之會(당위법시지회) 何用是財施會爲(하용시재시회위)?

‘장자의 아들이여, 성대한 보시의 모임=大施會라는 것은 그대가 하고 있는 것처럼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오. 마땅히 법을 설해 주는 모임=法施를 해야하나니, 어찌하여 이같이 재물을 베푸는 모임을 열고 있는 것이오?’

Elder Son! A large almsgiving meeting should not be as you have set it up. What you should arrange is a Dharma-giving assembly. Why should it be a meeting of giving only with material wealth? 

[大施會, 우리나라의 무차대회와 같은 말입니다.

누구든지 참석만 하면 다 공양을 올릴 수 있고 또 공양을 받을 수 있는 모임을 무차대회라고 하는데, 심청전에서 심봉사를 찾기 위해서  천하에 있는 모든 맹인들을 다 불러 모은 것도 역시 불교의 대시회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我言(아언)  居士(거사) 何謂法施之會(하위법시지회)?
저는 말했습니다. ‘거사님, 어떻게 하는 것을 법을 설해 주는 모임이라 합니까?’

I replied, Householder, what is a Dharma-giving meeting like? 


答曰(답왈) 法施會者(법시회자) 無前無後(무전무후)

一時供飬一切衆生(일시공양일체중생) 是名法施之會(시명법시지회)

법을 설해 주는 모임=法施會라는 것은, 앞뒤의 차이가 없이 일시에 일체 중생을 공양하는 것이니, 이것이 법을 설해 주는 모임이라는 것이오. 

Vimalakirti replied The meeting of Dharma giving is without prior and without after, and provides for all sentient beings in a single instant. If you ask, What does this mean?

[法施會者는 無前無後로, 예를 들어 밥을 받는다고 하면, 밥은 먼저 받는 사람도 있고 뒤에 받는 사람이 있을 것이나, 법이라고 하는 것은 無前無後가 없다. 법을 베푸는 모임은 순서가 없는,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문제이고 진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에 관계가 되지 않으니까 일시에 일체중생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 된다.]

 

◎사무량심(四無量心)

曰(왈) 何謂也(하위야)? 謂以菩提(위이보리) 起於慈心(기어자심) →자(慈)무량심

무슨 말인가 하면, (중생에게) 깨달음=菩提로써 대자심(mah-maitri)을 일으키고, 

It means that bodhi originates from a compassionate mind. 

 

以救衆生起大悲心(이구중생구대비심)비(悲)무량심

以持正法起於喜心(이지정법기어희심)→희(喜)무량심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비심(mah-karua)을 일으키며, 정법(Saddharma)을 지니려는 대희심(mah-mudit)을 일으키고, 

Arise a mind of great compassion for the sake of saving sentient beings.

Arise a joyful mind by upholding the supreme Dharma. 

 

以攝智慧行於捨心(이섭지혜행어사심)→사(捨)무량심

지혜를 간직하려는 대사심(大捨心, mah-pek)을 행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Through the practice of surrender, to receive wisdom.

[以攝智慧로 行於捨心하며, 지혜를 포섭함으로써 버리는 마음을 일으킨다 즉 행한다. 사심도 일종의 보시이지만, 여기서의 보시는 희사의 뜻보다는 지혜가 있어서 자기의 번뇌, 탐, 진, 치, 삼독 등의 애착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가 없으면 어떻게든 더 붙들고, 더 집착하게 되니까, 지혜를 섭하므로써 삼독과 온갖 애착심들을 버리는 마음을 행한다.]

 

◎육바라밀(六波羅蜜) 

以攝慳貪起檀波羅蜜(이섭견탐기단바라밀)

그것은 인색함과 욕심을 거두어들임으로써 보시바라밀(dna-pramit)을 일으키고, 

Arise the perfection of giving by subduing stinginess and greed. 

 

以化犯戒起尸羅波羅蜜(이화범계기시라바라밀)

계율을 범한 자를 교화하는 것으로써 지계바라밀(īla-pramit)을 일으키며,

With the paramita of proper conduct to transform the violation of precepts. 

 

以無我法起羼提波羅蜜(이무아법기찬제바라밀)

무아(無我)의 진리[法]를 알게 함으로써 인욕바라밀[羼提波羅蜜, knti-pramit]을 일으키고, 

With the paramita of forbearance to bring forth the Dharma of non-self. 

[제대로 참으려면 내가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됩니다. 내 자존심 내 아상이 있으면 제대로 참아지지 않습니다. 나를 비워야 제대로 참을 수 있지, 그냥 억지로 짓눌러서 참으려고 하면 속병이 되든지, 누적되어서 나중에 폭발하면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무아 법으로써 인욕바라밀을 일으킨다는 것이 참 묘한 이치입니다.

사실 우리가 모두 '나'라는 관념 속에서 삶을 살아가지만 그 '나'라는 것이 정체가 시원치않습니다. 따지고 들어가면 '나'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부처님은 있는데 무리하게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눈을 뜨고 허상을 허상으로 보아라, 제대로 보면 너라고 할 것이 없다. 그래서 무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허상을 제대로 간파하려면 지혜의 눈이 밝아야 가능합니다.

참는 것도 무아=아가 없다고 꿰뚫어 봐야 제대로 참는 인욕바라밀이 살아나는, 찬제 바라밀을 일으키는 것이다.]

 

以離身心相起毘梨耶波羅蜜(이이신심상기비리야바라밀)

몸과 마음의 겉모양=身心相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정진바라밀(vīrya-pramit)을 일으키며, 

By departing from the appearance of body and mind to bring forth the paramita of enthusiastic effort. 

[身心, 몸과 마음을 그대로 두고는 온전한 정진이 안되죠. 사실 정진하려면 몸을 무시해야 온전한 정진이 됩니다. 그저 몸 하자는 데로 먹고 싶으면 먹고, 쉬고 싶으면 쉬면 정진이 되지 않으니까 무시해버려야 정진이 됩니다. 그래서 심신의 상을 떠남으로써 정진 바라밀이 일어난다.]

 

以菩提相起禪波羅蜜(이보리상기선바라밀) 以一切智起般若波羅蜜(이일체지기반야바라밀)
보리의 경계=相으로써 선정바라밀(dhyna-pramit)을 일으키고,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아는 지혜=一切智로써 반야바라밀(praja-pramit)을 일으키는 것이오.

Arise the perfection of meditation by the appearance of the bodhi.

Arise the perfection of wisdom through wisdom of all.

[깨달음의 상으로써 선 바라밀을 일으킨다. 선과 깨달음의 관계, 부처님은 보리를 이룰 때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경전을 보다가 깨달기도 하고, 일을 하다가도 깨달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집중하는 마음의 자세에서야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선은 집중하는 것,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그것이 선정입니다. 우리가 좌선을 하는 것은 좌선이 마음 집중에 제일 좋은 방법이라 해서 좌선을 하는 것이지만, 어떤 경우라도 집중하는 것을 선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집중하는 선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른다는 것입니다.]

 

敎化衆生而起於空(교화중생이기어공) 不捨有爲法而起無相(불사유위법이기무상)

 중생을 교화하면서 (snyat)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유위법(saskta) 버리지 않고서도 무상(animitta) 실상을 바르게 알며

To teach all sentient beings through emerging from emptiness.

Not renounce the conditioned Dharma to give rise to formlessness. 

[敎化衆生하되 而起於空하며, 중생을 교화하되 공을 일으킨다.

그러니까 중생을 교화의 의미를 起於空이라 했습니다. 교화해도 교화하는 내도 없고 교화 받는 중생도 없는 입장이 되어야 제대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무량심, 육바라밀 등은 바람직한 수행법이고 바람직한 보살의 실천행이고, 보살이 살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삶의 모습들이고, 이러한 삶이 법공양이하는 것입니다. 물론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좋은 공양이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수행법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 더욱 좋은 법공양이라는 것입니다]

[不捨有爲法하고 而起無相하며, 이것은 3해탈문(三解脫門) 중의 공해탈문(空解脫門)입니다.

유의법, 함이 있고, 어떤 조작이 있는 것을 버릴려고 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인 것으로 우리 보퉁 중생들이 행하는 일인데, 유의법을 버리지 아니하고 무상을 일으킨다. 상이 없는 이치, 상이 없는 관점에서 일상생활을 그대로 해나가는 것이다.

상이 없는 공이라는 이치를 설사 알았다 하여도 밥 먹어야 되고, 잠자야 되고, 하던 일 해야 되고, 또한 해는 그대로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상황도 변한 것이 아니다. 무상이라는 관점으로 살아가되, 그것이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한 영원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유의법을 버리지 않고 일상생활을 그대로 살되, 고정불변하는 어떤 상으로 영원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것입니다.]

 

[3해탈문(三解脫門, 산 trīni vimoksa-mukhāni) 또는 3삼매문(三三昧門)은 3계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번뇌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득하는 방편[門]인 공해탈문(空解脫門) ·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 ·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의 3가지 선정을 말한다. 공(空: 空寂, 실체가 없음) · 무상(無相: 차별이 없음) · 무원(無願: 원함 즉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 없음)을 관조하는 3가지 선정이 해탈 즉 열반에 들어가는 문(門, 방법, 방편)이 되기 때문에 3해탈문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3해탈(三解脫) · 3탈문(三脫門) · 3문(三門) · 3공문(三空門) · 3공관문(三空觀門) 또는 3삼매(三三昧) 또는 3공(三空)이라고도 한다.
공해탈문은 일체법이 공하다는 것 즉 실체[自性]가 없다는 것을 관조하는 선정이고, 무상해탈문은 일체법에 차별[相]이 없다는 것을 관조하는 선정이고, 무원해탈문은 공용(功用, 願)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관조하는 선정 즉 무공용(無功用, 無願)을 성취하는 선정이다.
공해탈문은 공삼매(空三昧) 또는 공삼마지(空三摩地)라고도 하며, 무상해탈문은 무상삼매(無相三昧) · 무상삼마지(無相三摩地) · 무상심삼매(無相心三昧) · 무상심삼마지(無相心三摩地) 또는 무상정(無相定)이라고도 하며, 무원해탈문은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 · 무원삼매(無願三昧) · 무원삼마지(無願三摩地) 또는 무원심삼마지(無願心三摩地)라고도 한다.[11][12] 이 가운데 무상해탈문의 다른 말인 무상정(無相定, 산 ānimitta)은 무상정(無想定, 산 asaṃjñi-samāpatti)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무상해탈문의 다른 말인 무상삼매(無相三昧, 산 ānimitta-samādhi)는 힌두교의 무상삼매(無想三昧, 산 nirvikalpa samādhi)와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於是波旬告諸女言(어시파순고제여언) 我欲與汝俱還天宮(아욕여여구환천궁)

  마왕이 천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대들과 함께 하늘의 궁전=天宮으로 돌아가고자 하노라.’

Then Mara said to all the women, I want to return to the heavenly palace with all of you. 

 

諸女言(제여언) 以我等與此居士(이아등여차거사)

천녀들이 대답하기를,
당신은 이미 우리들을 거사님에게 주었습니다

Those women said, Since you have given us to this householder, 

 

有法樂(유법락) 我等甚樂(아등심락) 不復樂五欲樂也(불부락요욕락야)

우리들은 법락 알게되어, 그것을 대단히 즐기고 있으므로, 다시는 5욕락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we have the delight of the joy of the Dharma, and we no longer wish to pursue the pleasures of the five desires. 

 

魔言(마언) 居士可捨此女(거사가사차녀)?

악마가 말하되, 거사님 여인들을 버려야  것이니, 

The devil said, The householder could give up these women 

 

一切所有施於彼者(일체소유시어피자) 是爲菩薩(시위보살)

모든 소유 彼者=남에게 보시하는 자가 보살인 것입니다.’
since a bodhisattva can give all that he has to give. 

[일체소유를 彼者=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보살이니, 천녀들이 유마거사 법문을 듣고 안 갈려고 하니까, 유마거사 당신이 보살이라면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할텐데 왜 천녀들을 나에게 돌려주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維摩詰言(유마힐언) 我已捨矣(아이사의) 汝便將去(여편장거)

유마힐이 말하되 나는 이미 버렸느니라그대가 바로 데리고 가도록 하시오

Vimalakirti said, I have already surrendered. Therefore, you may take them away 

 

令一切衆生得法願具足(영일체중생득법원구족)

그대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처럼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는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라.’
so that all sentient beings can realize the fulfilment of their aspirations for the Dharma. 

 

於是諸女問維摩詰(어시제녀문유마힐)

 때에 천녀들이 유마힐에게 물었습니다.
Then the women asked Vimalakirti, 

 

我等云何(아등운하) 止於魔宮(지어마궁)?

저희들이 어떻게 마왕의 궁전에 머물 수가 있단 말입니까?’

Why should we still stay in the devil’s palace?

 

維摩詰言(유마힐언) 諸姊(제자) 有法門名無盡燈(유법문명무진등)

  손위누이 , 손윗누이  

유마힐이 말했습니다.
자매들이여꺼지지 않는 등불=無盡燈이라고 하는 법문이 있으니

Vimalakirti said, Sisters There is a Dharma door called the Endless Lamp, 

 

汝等當學(여등당학) 無盡燈者(무진등자)

그대들은  법문을 배워야만 하오꺼지지 않는 등불이라는 것은 

which you should study. 

 

譬如一燈(비여일등) 然百千燈(연백천등) 冥者皆明(명자개명) 明終不盡(명종부진)

비유하자면 등불로 백천 등불에 불을 밝혀 어둠이 모두 밝아지고  밝음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이

The Endless Lamp is like one lamp lighting a hundred or thousand lamps, illuminating all the darkness so that the brightness is endless. 

[우리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음에 진리의 등불이 밝혀지면, 즉 법문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하면, 우리들의 죄업이나, 업장, 번뇌, 망상이, 등불을 밝힐 때 어두움이 사라지듯이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明終不盡= 밝음이 다함이 없이 계속 밝아진다. 비록 지나가는 한 마디의 법문 말씀이지만 그것이 우리들 마음 속에 수억겁 동안 쌓인 업장을 정화시키는 계기 또는 원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如是諸姊(여시제자) 夫一菩薩開導百千衆生(부일보살개도백천중생)

자매들이여이같이  사람의 보살이 백천의 중생의 마음을 열고 이끌어 

In this way, sisters, if a bodhisattva can enlighten a hundred or a thousand sentient beings 

 

令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영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도록 하고

so that their minds aspire for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於其道意亦不滅盡(어기도의역부멸진) 隨所說法(수소설법)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에 따라 

one’s own intent for the Way will also be inextinguishable. 

[於其道는 亦不滅盡하며, 그 도 또한 滅盡하지 않으며.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이에게 소개해준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법은 백천중생에게 보리심을 발하게 하지만 또한 멸진하지 않으며]

 

而自增益一切善法(이자증익일체선법) 是名無盡燈也(시명부진등야)

스스로의 모든 선법 자꾸만 늘어나게 하는 것을 꺼지지 않는 등불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All one’s good Dharmas will grow as one speaks the Dharma, and this is the so-callend Endless Lamp. 

[是名無盡燈也니, 하나의 등불이 백천의 등불을 밝히는 비유와 같이 한 보살이 백천중생들을 개도해서 보리심을 발하게 하여도 그 도는 다하지 않고 설법하는 바를 따라서 일체선법이 더욱더 불어나는 것의 이름이 무진등이라는 법문이다]

 

汝等雖住魔宮(여등수주마궁) 以是無盡燈(이시무진등)

그대들이 비록 마왕의 궁전에 있다 하더라도  꺼지지 않는 등불로써 

Although you live in the devils’ palace, with this endless lamp, 

 

令無數天子天女(영무수천자천녀)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자)

무수한 천자의 천녀들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게 한다면

you can make countless celestial sons and daughters aspire to attain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爲報佛恩(위보불은) 亦大饒益一切衆生(역대요익일체중생)

이야말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베풀어 주는 것이  것이오.’

in order to repay the Buddha’s kindness, and also to benefit all sentient beings greatly. 

[亦大饒益一切衆生이니라. 그 마구니의 궁전에 가서 포교하고 법을 설해야 할 상황인데, 파순이 데리고 가려하니까 얼른 따라가서 거기에 있는 무수한 천자천녀들에게 불법 가르쳐서 보리심을 발하도록 하라, 그러면 너희들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고 또 내 은혜를 갚는 것이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나와 함께 하는 것이 된다.]

 

爾時天女頭面禮維摩詰足(이시천녀두면예유마힐족) 隨魔還宮(수마환궁)

忽然不現(홀연부현) 

  천녀들은 유마힐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한 다음 마왕을 따라 마궁으로 돌아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Thereupon, the celestial maidens bowed and touched Vimalakirti’s feet with their heads, returning to the palace with the demon and disappearing from sight. 

 

世尊(세존) 維摩詰有如是自在神力(유마힐유여시자재신력) 智慧辯才(지혜변재)

세존이시여유마힐은  같은 자유자재한 신통력과 지혜와 변재(辯才) 있습니다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World Honoured One! Vimalakirti has such free and unimpeded use of divine power, wisdom, and eloquence that I am not in a position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지세보살의 세계에서는 보다 극적인 장면이 농후한 편입니다]

所言未訖(소언미걸) 時維摩詰來謂我言(시유마힐래위아언 이를 , 마칠

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때에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Before I finished speaking, Vimalakirti came to me and said. 

非帝釋也(비제석야是爲魔來嬈固汝耳(시위마래뇨고여이 번거로울 ,

이는 제석천이 아닙니다마군이 와서 당신을 희롱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It is not Sakra, but the devil who is ensnaring you. 

卽語魔言(즉어마언) 是諸女等(시제여등) 可以與我(가이여아)

그리고는 마왕 파순을 향하여 말하되 천녀들을 나에게 주시오

Then he told the demon, These women, you can give them to me, 

如我應受(여아응수魔卽驚懼念(마즉경구념)  놀랄 , 두려워할 ,

維摩詰將無惱我(유마힐장무뇌아)?

나와 같은 사람이나 받을 만하오.’
마왕은 두려움으로 떨면서, ‘유마힐이 나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for (I’m a householder, so) I can accept them. The demon was afraid and thought, Has Vimalakirti come to oppose me? 

欲隱形去(욕은형거) 而不能隱(이불능은 숨을 , 기댈

모습을 감추어 달아나려 했지만, 도무지 숨을 수가 없었으며,

He wanted to disappear through invisibility, but he could not conceal his form, 

盡其神力(진기신력) 亦不得去(역불득거)

(파순은) 그의 신통력=神力 다해 보았지만, 달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and even after exhausting all his magic power, he still could not slip away. 

卽聞空中聲曰(즉문공중성왈) 波旬(파순) 以女與之(이여여지) 乃可得去(내가득법)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으니
파순아, 천녀들을 그에게 주어야만 도망갈 수가 있느니라.’
The a voice in the air said, Mara, give him the women, and then you can leave. 

魔以畏故(마이외고) 俛仰而與(면앙이여)    힘쓸 

마왕은 두려운 나머지 용서를 빌며 천녀들을 주었습니다.

The devil, terrified, bowed down and gave them to him. 

[() 존경하는 마음이고 () 고개를 숙인다는 뜻입니다

그냥 고개를 숙이고 어떻게 해야 할바를 몰라서 여자들을 가져가시라고 하거늘]

 

爾時維摩詰語諸女言(이시유마힐어제여언) 魔以汝等與我(마이여등여아)

유마힐은 천녀들에게 말하되, ‘마왕은 그대들을 나에게 주었으니

Then Vimalakirti spoke to all the women, saying, The devil has given you to me, 

今汝皆當發(금여개당발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이제는 그대들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야만 하느니라.’
and now you should all develop the mind that seeks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卽隨所應而爲說法(즉수소응이위설법) 令發道意(영발도의)

所應=그들 각자에게 마땅한 가르침을 설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道意를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He then preached the Dharma according to their wishes so that they would develop the intention to attain enlightenment. 

復言(부언) 汝等已發道意(여등이발도의) 有法樂可以自娛(유법락가이자오)

不應復樂五欲樂也(불응부락오욕락야)

復言=또 말하되, 그대들은 이미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므로 각자가 즐길 만한 법락 있을 것이니

다시는 (天上) 5욕락으로 돌아가서는 되느니라.’

Then he said, Now that you have already developed the intention of seeking the Way, you have the joy of the Dharma as your enjoyment, so you should no longer relish the pleasure of the five worldly desires. 

[오욕락(五欲樂)= 식욕(食慾). 음욕(淫欲). 재욕(財欲). 명예욕(名譽慾). 수면욕(睡眠欲). 
5욕(五欲, 산 pañca-kāmāh, pañca-kāma-guṇa, five desires,five kinds of desire, five lusts)은 외적 대상인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의 5경(五境)에 대한 탐욕 또는 집착인 색욕(色欲) · 성욕(聲欲) · 향욕(香欲) · 미욕(味欲) · 촉욕(觸欲)을 말한다. 5묘욕(五妙欲) · 5묘색(妙色) · 5묘(五妙) · 묘5욕(妙五欲) · 5욕덕(五欲德) · 5욕공덕(五欲功德) · 5욕락(五欲樂) · 5락(五樂) · 5종락(五種樂)이라고도 한다. 욕(欲)에는 욕구 · 원함 · 희망 · 바람의 뜻도 있고, 애착 · 탐 · 탐욕 · 갈애 · 집착 · 탐착의 뜻도 있는데 5욕(五欲)에서의 욕(欲)은 후자의 번뇌로서의 욕을 뜻한다. '마하지관' 제4권과 '천태사교의'와 '삼장법수'에 따르면, 5욕(五欲)은 재욕(財欲) · 색욕(色欲) · 음식욕(飲食欲) · 명욕(名欲) · 수면욕(睡眠欲)을 말한다. 여기서의 욕(欲)도 욕구 · 희망 등의 뜻이 아니라 갈애 · 집착 · 탐착 등의 뜻이다.]

 

天女卽問(천녀즉문) 何謂法樂(하위법락)?

천녀들은 물었습니다. ‘무엇을 가리켜법락이라고 합니까?’

The celestial maidens asked, What do you mean by the joy of the Dharma?

[사람들은 누구나 괴로움이 없이 즐거움이 있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삶을 원한다. 일상의 삶이란 무엇인가? 온통 몸 걱정, 돈 걱정, 사람 걱정이다. 그 가운데 무엇 하나라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걱정과 불안, 미움과 분노가 끊이질 않는다. 더 두려운 것은 죽음이다. 어느 순간 세상을 떠날 것이다. 모든 것과 이별하게 되고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한꺼번에 잃게 될 것이다. 더욱이 사후(死後)의 세계는 있는 것인지 죽음 뒤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불안하기만 하다.

삶에서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우선 생존(生存)이다. 진정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요 행복이다. 생존이 해결되면 쾌락을 추구한다. 눈과 귀, 코와 혀 그리고 피부 등 오감(五感)으로 느끼는 순간의 감정은 짜릿하다. 무엇이든 쾌락의 감정에 깊이 중독(中毒)되어 버리면 여기에서 나오기가 쉽지 않다. 현명한 사람은 이런 쾌락에서 벗어나 무엇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느끼는 것이 희열의 기쁨이다. 학자와 예술가의 삶이 그렇고 정치가나 실업가의 삶이 그렇다.

선각자들은 말한다. 삶에는 보다 높은 차원의 즐거움이 존재한다고 한다. 존재와 생명의 실상(實相)을 감득한 기쁨이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삶에서 느끼는 법희선열(法喜禪悅)인 법락(法樂)이요 환희락(歡喜樂)이다. 이런 지혜의 삶에도 보다 높은 차원이 있다. 그것이 바로 즐거움의 구경(究竟)인 열반락(涅槃樂)이요 적멸락(寂滅樂)이다.

자신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진정한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삶을 사는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망상과 번뇌 속에서 아까운 삶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선각자들이 체험한 지혜의 삶을 불신(不信)하지 마라. 선각자들의 삶의 처방전을 믿고 그런 지혜의 삶을 추구하라.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제대로 된 발심(發心)과 원력(願力)이 있다면 언제든 돈오(頓悟)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삶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곁에 있는 것이다. 자신은 지금 지혜 광명의 바다의 물고기임을 잊지 마라. 바로 진리의 바다에 있는 것이다.-형천의 내면세계]

 

答言(답언) 樂常信佛(낙상신불) 樂欲聽法(낙욕청법)

유마힐이 답하였습니다.
항상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즐기고,→ .  가르침을 듣고자 원함을 즐기며,

He replied, The joy of always having faith in the Buddha, the joy of longing to receive the Dharma, 

 

樂供飬衆(낙공양중) 樂離五欲(낙이오욕)

스님=들을 공양함을 즐기고, . 5욕을 떠남을 즐기며

the joy of making offerings to the multitudes, and the joy of being free from the five desires. 

[衆= 승가, 부처님 대중, 불도들, 불교 단체를 이름. 무리 衆(중)을 쓴것은 스님들은 일단 무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

樂離五欲= 오욕에 빠지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오욕을 깨끗이 떠나는 것은 새로운 아주 묘한 즐거움입니다. 아주 인간적인 즐거움에 탐욕했을 때 그 나름의 즐거움이지만, 그것을 완전히 벗어나버린 즐거움은 아주 청순하고 맑고 깨끗한, 오욕락 보다 한 차원 높은 그런 즐거움이 있습니다.]

 

樂觀五陰如怨賊(나관오음여원적) 樂觀四大如毒蛇(낙관사대여독사)

5온(색수상행식) 관하기를 원수나 도둑과 같다고 즐기고, 4(지수화풍) 관하기를 독사와 같다고 즐기며

The joy of viewing the five aggregates as bandits, the joy of viewing the four elements as vipers, 

[오음= 색, 수, 상, 행, 식, 즉 우리의 몸과 마음입니다. 수, 상, 행, 식은 마음 작용들.

四大=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4가지 큰 요소. 우리는 몸뚱이 시봉하고, 몸뚱이 심부름하다가 일생 다 보내는 것입니다. 도가 좋은 줄 알고 법이 좋은 줄 알고 진리가 좋은 줄 알지만은 몸뚱이 하자는 데로 하다보니까 그냥 세월 다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樂觀內入如空聚(낙관납입여공취) 樂隨護道意(낙수호도의)

마음[內入] 관하기를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空聚와 같다고 관하는 것을 즐기고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道意를 지키겠다고 즐기며

the joy of viewing the internal entries as an empty gathering. The joy of upholding the intention of seeking the Way, 

[內入(내입)의 발음은 들일 '납'으로 읽습니다. 납입(내입)= 안으로 받아들인다.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空聚=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마을과 같다고 관하는 것을 즐겨라, 즉 육근으로 여러 가지 받아들이는 것, 눈으로 사물을 받아들이고 귀로서 소리를 받아들이는 등의 받아들이는 것이 공취 도적= 도적의 소굴이라는 뜻입니다. 마을이 비어 있으면 의례히 도둑떼들이나 나쁜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는 것으로, 마을이 텅텅 비었다는 의미가 아닌, 도둑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안, 의, 비, 설, 신, 의로 눈을 좋은 것을 보려 하고 귀는 좋은 소리 들으려 하고, 입은 좋은 것을 먹으려 하고, 좋은 것 맡으려고 하는 그 육근으로써 여섯 가지 경계에 팔려 다니는 것이 도둑 당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 진성을 도둑 당하고 또 거기에 시간을 다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근을 받아들이는 것을 마치 도둑당하는 것으로 관찰하는 그런 차원 높은 즐거움을 맛보라는 것입니다.

樂隨護道意=도 닦을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잘 보호하고 연장시켜서 것을 즐기도록 하라]

 

樂饒益衆生(낙요익중생) 樂敬飬師(낙경양사)

중생들에게 饒益=넉넉하게 이익을 베풀기를 즐기고스승을 존경하며 공양하는 것을 즐기며

the joy of benefiting all sentient beings, the joy of offering respect and support to teachers. 

[중생들을 饒益= 넉넉하게 하고 이롭게 하고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것으로써 즐거움을 삼도록 하라]

 

樂廣行施(낙광행시) 樂堅持戒(낙견지계) 樂忍辱柔和(낙인욕유화)

널리 보시 행하기를 즐기고굳게 계를 지키기를 즐기며인욕하고 부드럽게 조화하기를 즐기고

The joy in giving alms abundantly, the joy in keeping the precepts, the joy of being patient and humble, 

樂勤集善根(낙근집선근) 樂禪定不亂(낙선정불란) 樂離垢明慧(낙이구명혜) 

부지런히 선근을 쌓고모으기를 즐기며선정에 들어 흐트러지지 않기를 즐기고

번뇌를 떠나 지혜를 밝게 하기를 즐기며

the joy in being diligent and cultivating good roots, the joy in the practice of meditation and remaining composed, the joy of being free from all defilements and the attainment of clear wisdom.

樂廣菩提心(낙광보리심) 樂降伏衆魔(낙항복중마) 樂斷諸煩惱(낙단제번뇌)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菩提心 넓혀 가는 것을 즐기고수많은 마군을 항복시키기를 즐기며온갖 번뇌를 끊기를 즐기고

The joy of spreading the awakiening mind, the joy of subduing all demons, the joy of breaking free from all worries.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樂降伏衆魔=온갖 부정적인 생각들, 여러 가지 유혹들, 장애 요소들, 사회적인 체면유지 등의 경우도 일종의 마구니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장애요소들을 마음으로부터 항복 받는 것을 즐기도록 하라]

 

樂淨佛國土(낙정불국토) 樂成就相好故(낙성취상호고) 修諸功德(수제공덕

불국토를 깨끗하게 하기를 즐기며상호(相好) 성취하기 위하여 많은 공덕을 닦기를 즐기고

Rejoicing in the purification of the pure land of the Buddha, and enjoying the cultivation various virtues for the attainment of the (thirty-two) marks and (eighty noble) qualities. 

[成就相好를 즐기라, 상호는 외모, 32상 80종호는 전부 밖으로 들어난 외모입니다. 관세음보살 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꾸미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공덕을 많이 지어야 아름다운 모습이 되겠지만, 그러나 현재 가진 모습에서 아름답게 할 수 있는데 까지 아름답게 해야 됩니다. 부처님께 갈 때 일수록 더욱 아름답게 치장하고 가시기 바랍니다.]

 

樂嚴道場(낙엄도량) 樂聞深法不畏(낙문심법불외) 樂三脫門(낙삼탈문)

도량을 장엄하기를 즐기며대승=深法 심원한 가르침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기를 즐기고 무상 무원 3해탈 즐기며

Delighting in the austere place of enlightenment and enjoys hearing the profound Dharma without fear. Joy in the three doors of liberation, 

[樂莊嚴道場하며, 어떤 자리에 갔을 때 그 자리가 빛나게 하는 일들을 하는 것, 말하자면 자기 혼자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도량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즐거울 수 있도록 도량을 장엄하는 것으로써 즐거움을 삶아라.]

[三脫門=또는 3해탈(解脫)․3삼매(三昧)라고 한다. 티베트 역에는 이 3해탈을 설하고, “열반의 관상(觀想)을 즐긴다”는 한 구절이 더 있다.]

[삼해탈(三解脫)= 해탈(解脫)에 이르기 위하여 닦는 세 가지의 해탈(解脫)을 말합니다.
① 공해탈(空解脫)은 모든 현상은 인연(因緣)따라 모이고, 흩어지므로 거기에 불변(不變)하는 실체(實體)가 없다고 관조(觀照)하는 해탈(解脫).
② 무상해탈(無相解脫)은 대립적(對立的)인 차별(差別)을 떠난 해탈(解脫).
③ 무원해탈(無願解脫)은 원(原)하고. 희구(希求)하는 생각을 버린 해탈(解脫).]

 

不樂非時(불락비시) 樂近同學(낙근동학)

때가 아닌 때=非時 즐기지 않으며, 함께 공부하는=同學과 가까이 사귀는 것을 즐기며
and not delighting in the untimely. Joy with being close to fellow disciples, 

[不樂非時하며, 때가 아닌 때=非時는 삼해탈문과 반대되는 것. 삼해탈문을 즐겨서 不樂非時= 해탈문에 해당되지 않는 다른 것들을 즐겨하지 말며,

樂近同學하며, 불교에서는 동학도반, 동학 동주라는 말을 써서 같이 공부하는 사람, 같이 수행하는 사람 등의 의미.]

[ 또는 때가 아닌 때의 식사를 말하기도 한다. 비시(非時)는 보통 식사 시간을 지난 정오 이후, 또는 정오 이후의 식사를 말한다.]

 

樂於非同學中(낙어비동학중) 心無恚碍(심무가())

동학이 아닌 사람들 속에 있어도 분노와 미움을 갖지 않음을 즐기며

and delights being amid those that are not disciples without hostile obstruction.

[心無恚碍= 마음에 아무른 걸림이 없는 것]

 

樂將護惡知識(낙장호악지식) 樂親近善知識(낙친근선지식)

악지식 거느려서 지킴을 즐기며선지식 가까이 사귀는 것을 즐기며

Delights in supporting those who are evil companions, and enjoy being close to friends that are good acquaintances. 

[선지식을 섬기고 보호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있지만, 惡知識을 거느려서 보호하는 것을 즐겨라

惡知識은 나를 나쁜 길로 인도하는 사람, 나쁘게 가르치는 사람도 나름대로 지식이라고 할 수가 있으니까 그런 사람을 제도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

 

樂心喜淸淨(낙심희청정) 樂修無量道品之法(낙수무량도품지법)

是爲菩薩法樂(시위보살법락)
마음으로 깨끗함을 기뻐함을 즐기며깨달음을 위한 헤아릴  없이 많은 수행을 닦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이것을 보살이 진리= 익히는 즐거움인 법락이라고 하는 것이다.’

The joy in the mind’s delight of tranquillity. The joy of practicing all the immeasurable qualities conducive to awakening. These are the bodhisattva’s joy of the Dharma.

[법락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이 사실은 전부 수행법입니다.]

◎ 持世菩薩(지세보살) 

[보살(菩薩) बोधिसत्त 보디삿따(Bodhisatta) बोधिसत्त्व(Bodhisattva) 菩提薩埵(보리살타)

*대승불교의 보살 개념은 설일체유부 등의 부파불교를 비판하면서 새로이 생겨났다. 북방에서 위빳사나 수행이 사라지고 불교 이론이 전개되면서 기존의 '개인의 해탈 추구'에 대한 일반 신도의 불만이 생겨났으며, 이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대승불교가 생겨나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단순히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성자)가 아닌, 만인을 구원하는 부처가 되기 위해 지상에서 윤회를 겪으며 사람들을 구제하며 수행을 하는 이들을 보살이라 부르게 됐다.
이후 의미가 확장, 모든 불교 수행을 하는 신도를 전부 보살이라 하게 되었다. 이는 만인에게 불성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된다는 사상에 따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의미는 상당히 넓어서, 초기에는 대승불교 계통의 승려 중에 수양이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고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등 신화적인 보살이 더해졌다.
대승불교의 보살들은 단순히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자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보다 등급이 낮은 존재도 아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든 부처나 나한(아라한)보다 보살이 더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맛지마 니까야에 보면 석가모니 부처 역시 인간 세상에 화생하기 직전에는 천상에서 호명보살이라는 이름의 보살로써 존재하고 있었으며, '관음삼매경'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은 석가모니보다 먼저 부처가 된 정법명왕여래로 석가모니 전생의 스승이었는데 중생 구제를 위해 스스로 부처에서 보살로 내려왔다. 티베트 불교도 최고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고 2인자인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지장보살의 경우 지옥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지옥의 중생들이 모두 열반할 때까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겠다고 하여 보살로 남아 있으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역시 원래는 부처지만 불법을 통한 중생의 계도를 위해 보살로 내려왔다. 문수보살은 과거 7불의 스승이다. 중국 산시성의 오대산(우타이 산)은 문수보살의 성지이다.
현재 한국 불교에서는 흔히 여자 신도를 높여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으며 남자 신도는 거사나 처사라고 한다. 사실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오용돼있는 사례지만 이미 관습상 굳어진 것이다.
*초기불교와 남방불교의 입장,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은 불법이 없던 오랜 기간 후에 처음으로 불법을 가르치는 존재라는 의미로 주로 쓰이는데, 이 경우는 특히 정등각자(正等覺者, 삼마삼붓다)로 불린다. 그리고 이 삼마삼붓다가 열반을 깨닫기 전 수행자 시절을 보디삿따(보살)이라 부른다. 초기불교에서 보살은 닙바나(Nibbāna)를 체험하여 부처님이 되기 전의 존재로서 전 우주시대를 아우르는 초인적인 존재다.
특히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는 오랜 공겁 시대를 지나 닙바나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편 사람이다. 그래서 우주의 시대는 부처님에 의해서 구분되고 한 우주에 부처님, 특히 정등각자는 오직 한 분 뿐이다. 그래서 지금은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하나라도, 소문으로든 글로든 전설로든 남아 있는 한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부처님이 될 수 없고, 오직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히 사라진 시대를 공겁(空劫) 시대라고 하며, 공겁 시대가 끝나고 인간 수명이 8만 살일 때 다음 부처님이 닙바나의 가르침을 펴는데, 이 분이 멧떼이야(Metteyya) 부처님이다. 공겁 시대를 지나 새로 가르침을 펼 수 있는 분들은 참으로 비범한 존재여서 아라한으로만 끝날 분이 아니다. 이런 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즉시 아라한이 될 수 있고,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의 윤회는 없기 때문에 다음 부처님 시대를 준비하는 보살이 될 수 없으므로, 부처님의 설법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초기불교에 따르면, 보살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든가 보살이 설법을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초기불교 경전에서 보살의 청법(聽法), 설법하는 모습이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그래서 초기불교 입장에서는 보살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든가, 보살이 설법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전은 다 위경이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본다. 초기 불교에서 보살은 4아승기와 십만 대겁을 두고 온갖 바라밀을 쌓는 존재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40년 동안 별 탈 없이 불법(佛法)을 새로이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4아승기 십만 대겁의 공덕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아라한과를 얻은 사람들 중 비참한 최후를 마친 사람들도 있었다. 전생에 부모를 죽인 목건련 존자는 이교도로부터 몰매를 맞아 죽었다. 전생이나 현생의 공덕이 부족하므로... 4아승기와 십만 대겁의 스케일로 온갖 공덕과 바라밀을 행해야 불법을 새로이 펴는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리고 보살은 마지막 생까지는 초기불교의 성위 4과를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본생경에서도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으로서 선정(사마타)을 닦고 바라밀을 쌓는 인간 보살들이 등장하지만, 대개는 이를 통해 쌓은 공덕으로 죽은 뒤 천신이 되는 선에서 끝난다.
기원전 1세기에 성립된 붓다왐사(Buddhavamsa, 佛種姓經)에 따르면, 수메다 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로서의 생이 되기 전에는 수행을 했지만 위빳사나의 16단계 지혜 중 형성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 ñāṇā)까지는 이루었지만, 종성(種姓)의 지혜로 가지 않고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일단 종성의 지혜로 들어가면 바로 형성평온의 지혜로 후퇴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종성의 지혜(도의 지혜)를 거쳐 닙바나를 체험하면 최소한 수다원과는 얻는다.
그런데 수다원과를 얻으면 그 뒤로 7번 환생한 뒤 해탈하므로 4아승기 10만 대겁 뒤의 다음 우주 시대에 붓다가 되는 보살행을 완수할 수 없다. 연등불께서도 수메다 행자가 삼마삼붓다가 되시겠다고 발심했을 때, 찬탄하고 “4아승기(阿僧祗) 십만 대겁 후에 부처가 되리니, 그때의 명호를 석가모니라 이를 것이다.”라며 축복하셨지만, 깨달음에 관한 말씀은 일언반구도 않고 떠나셨다. 연등불께서 깨달음에 대해 한 마디 하면 수메다 보살은 최소한 수다원과를 증득하여 보살행은 물 건너가기 때문이다. 당시 지혜 보살이신 수메다는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4구게 중 세 번째 구절이 끝나기 전에 바로 아라한이 될 만한 지혜를 갖춘 분이셨다고 한다. 따라서 보살은 부처님의 설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다음 붓다 시대를 준비하는 보살은 이미 멧떼이야(Metteyya), 즉 미륵불이 되실 분으로 내정되었다. 즉, 향후 확정된 보살은 멧떼이야 부처가 되실 한 사람뿐이다. 지금 시대에 사실상 보살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금 시대에 혹시라도 보살이 되기를 서원하는 사람은 이미 한 사람으로 예약이 차 있기 때문에, 멧떼이야 붓다 시대 지난 후 아주 먼 미래 뒤를 위하여 깨달음을 미루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불교 수행자는 성문(聲聞)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지금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한 분뿐인 보살은 부처님 같이 되려고 하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를 유지하는, 지금 부처님 시대가 지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흔적도 없는 시대에 다시 불법을 펼 존재다. 그리하여 수메다 보살을 연등불께서도 찬탄하고 연등불의 제자들도 찬탄하지만, 모두들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 없이 입적했다.]


佛告持世菩薩(불고지세보살)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는 지세보살(Jagatidhar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을 하도록 하라.”

The Buddhas said to bodhisattva World Upholder, Go to Vimalakirti and ask him about his illness. 

持世白佛言(지세백불언) 世尊(세존)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

지세보살도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World Upholder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am not qualified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我昔(억념아석) 住於靜室(주어정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저는 조용한 방에 있었는데, 

What is the reason for this? I remembered that in the past, I was staying in a quiet room 

[마구니를,파순은 아귀이며, 불교에서는 불교의 이치를 반대하거나, 사람을 악한 쪽으로 인도하여 진리와 등지게 하는 것을 마구니라 합니다.

보통 3가지 악(삼악)을 말하는데 첫째는 보통악, 두 번째는 대악 그리고 세 번째는 악중악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가해를 행할 때 그에 대하여 욕이나 신체적 보복으로 대처하는 것, 중생사가 으레히 그렇듯이 그냥 남에게 해롭힘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그것은 누구나 저지르는 보통악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남이 나를 악하게 한 것에 대한 과보를 되갚는다는 것이지만, 불교에서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악은 악인데 보통 악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상대가 나에게 악을 가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까닭없이 남을 해롭게 하거나, 손해를 끼치는 악을 대악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한 큰 악중 악은 나에게 존경과 공양과 온갖 선의를 다하는데, 내가 오히려 반대로 악으로써 되갚는 것은 악중 악입니다.

법구경에서 원한은 원한으로서 갚으면 그 원한은 끝이 없나니라 오직 참으로써만이 그 원한은 사라지나니라 했습니다.

내가 당했다고 갚으면 저쪽에서 또 그 이자까지 붙여서 또 갚고 또 이쪽에서 또 갚고 갚으면, 그것이 계속 된다는 것입니다. 한쪽에서 참고 풀어야 그 윤회가 끝나는 것입니다. 波旬은 악이라는 말입니다]

 

時魔波旬(시마파순) 從萬二千天女(종만이천천녀) 狀如帝釋(상여제석)

鼓樂絃歌(고악현가) 來詣我所(내예아소)

鼓 북 고, 絃 악기줄 현, 밧줄 현, 歌 노래 가. 絃歌현가=현악기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

그 때 마왕 파순이 1만 2천의 천녀를 거느리고 마치 제석천과 같이 꾸며서 북을 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제가 있는 곳으로 와서는, 

when the demon Mara visited me, while accompanied by twelve thousand celestial madens, and came to me resembling Sakra, accompanied by music and songs. 

[마왕 파순(魔波旬)= Mra Ppīyn의 음사(音寫)가 잘못되어 파순(波旬)으로 되었다. 악애(惡愛), 살인자(殺人者), 악자(惡者)라고 번역한다. 파순(波旬), 파피야의 음역. 파순유(波旬喩), 파비연, 파비(播裨), 파비야(波卑夜), 악자(惡者), 악물(惡物), 악애(惡愛), 살자(殺者). 마구니, 마(魔)는 ‘인명(人命)을 죽게 하는 것이나, ’장애하다‘ ’요란하게 한다, 파괴한다'는 범어(梵語) māra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마(魔)의 왕(王)은 파순(波旬)으로 욕계(欲界) 제육천(第六天)의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왕이며, 팔만사천 마구니와 그 권속들(마의 백성 - 마민(魔民) )의 의 왕입니다.  
'파사론(破邪論)'에 ‘부처님께서는 ‘혜명(慧命)=지혜의 목숨을 끊는 것을 마(魔)라고 하느니라그리고 마(魔)에 걸리면 항상 방일(放逸)해지고 해태(懈怠)하여서 일념으로 공부하지 못하니까 혜명=지혜의 목숨을 끊게 되는 것이니, 그것을 마구니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지도론(智度論)'에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경지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그것에서 벗어난 일체법은 다 마구니이다. 내가 도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인(人) ・ 사(事) ・ 물(物) ・ 현상이 전부 마(魔)가 될 수가 있는 것이며, 그러한 마(魔)는 3마, 4마, 5마, 10마, 광범위하게는 팔만사천(八萬四千)가 있다고 하나, 그 대표적인 십마(十魔)를 들면, ①오온마(五蘊魔)=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음(五陰) 또는 오온의 중악(衆惡)으로 인해서 정도(正道)를 방해하고 혜명(慧命)을 끊는 것. 번뇌마(煩惱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 업마(業魔)=살생, 도둑질, 사음, 거짓말 등의 악업(惡業) ④마음의 마[心魔]= 아만심(我慢心), ‘내가 잘났다, 내가 옳다, 내가 유식하다, 내가 부자다라는 아만심. 아만심을 좋게 해석을 해서 ‘긍지를 가지고 있다’, ‘자존심을 가지고 떳떳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참선하는 사람은 ‘나야말로 참으로 발심한 사람이요, 나야말로 계행이 청정한 사람이요, 나야말로 청정한 수행인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공부에 크게 방해가 되는 마구니가 되는 것. 사마(死魔)= 사람의 목숨은 한계가 있어서 병들어 죽어버리면 도(道)를 닦지 못하여 혜명을 얻지 못한다.
⑥천마(天魔)=욕계(欲界) 육천(六天)의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을 주재하는 왕(王)으로, 불보살, 또는 불제자(佛弟子)의 마음을 교란시키고 악으로 유혹하는 마왕(魔王). 선근마(善根魔) 삼매마(三昧魔)= 선정(禪定)의 마(魔). 삼매의 고요하고 편안한 경지에 탐착(貪着)해서 즐기고 있으면 비록 오신통(五神通)을 얻는다고 해도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얻지 못하는 것. 선지식마(善知識魔)= 비록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선지식이 되었다 하여도 자기가 얻은 법에 간탐심(慳貪心)이 나서 남한테 설하지 않는 것. ⑩보리심마(菩提心魔)=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수행을 해서 얻은 지혜, 각견(覺見)에 집착하는 것. '금강경'에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했을 때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하면 이는 벌써 아견(我見) ・ 인견(人見) ・ 중생견(衆生見) ・ 수자견(壽者見)에 떨어진 것이라서, 이것은 아라한이라 할 수가 없다고 했듯이 각견(覺見)에 집착하면 찰나간에 마구니에 포섭이 된 것이다.]

與其眷屬(여기권속) 稽首我足(계수아족) 合掌恭敬(합장공경) 於一面立(어일면립)

제 발에 머리를 숙여 예배하고 두 손을 합장하고 나서 한쪽에 늘어섰습니다. 

Then, whith his subordinates, he bowed down, touched my feet with their heads, respectfully joined his palms in respect, and stood to one side. 

[合掌恭敬하야 於一面立이어늘 - 전부 나를 향해 서서 합장공양하고 우러러 보고 있더라.]

 

我意謂是帝釋(아의위시제석) 而語之言(이어지언)

저는 마음속으로 이들을 제석천이라고 생각하고 말하였으니,
I assumed it was Sakra and said to him, 

[경전에 보면 의례히 수행사문에 제천, 제석천왕이 제석천에서 의식을 대어준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제석천왕은 대게 공부하는 사람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세보살이 공부하다가 그런 모습을 하고 온 사람은 분명히 제석천왕일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善來憍尸迦(선래 교시가) 雖福應有(수복응유) 不當自恣(불당자자) 恣 방자할 자,

잘 오시었소, 교시가(Kauika)여. 그대에게 비록 복덕이 마땅히 갖추어져 있다 하여도 스스로 방자해서는 안됩니다. 

Welcome, Kausika! Although you are fortunate, you shouldn’t be so self-indulgent. 

[尸迦는 제석천왕의 성이며, 尸迦라는 낱말의 본래 뜻은 누에꼬치라는 말입니다]

[지세보살은 마왕파순이 제석천왕인줄 알고 '비록 당신이 천이백 천녀를 거느릴 정도의 복(법)은 있지만, 응당히 스스로 그렇게 방자하게 함부로 수용할 것은 아니라고 충고를 한 것입니다]   

 

當觀五欲無常(당관오욕무상) 以求善本(이구선본) 於身命財而修堅法(어신명재이수견법)

마땅히 5욕은 무상하다고 관하고, 이로써 공덕의 근본=善本을 구하며, 신체와 목숨과 재물, 이 세 가지를 견고하게 간직할 수 있는 수행=堅法을 닦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You should observe the impermanence of the five desire, pursue the root of goodness, and cultivate the solid Dharma with your body, life, and wealth. 

[마땅히 오욕락(五慾樂)= 재(財), 색(色), 식(食), 명(名), 수(壽) -불교적으로 보면 불선법-이 무상함을 관해서 선의 근본을 구할 것이며,→이것은 불선에서 선법을 구해라는 말입니다.

'법연사계'의 첫마디가 福不可受盡이라, 복이 설사 있다 하여도 그것을 다 받아 써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勢不可使盡이라 → 세력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휘두르지 마라.  

好語不可說盡이라 → 좋은 말이라고 해서 해버리지 말라.

規矩不可行盡이라 → 규범, 법규가 정해져 있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다 적용시키지 말라. 즉 융통성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身命財=여기서 말하는 신체와 목숨과 재물의 세 가지를 수행을 통하여 끝이 없는 영원한 것으로 이루는 것을 삼견법(三堅法: 즉 세가지 견고한 법신, 혜명, 법재를 얻는 수행)이라고 한다.]

[삼견법(三堅法)-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견고하게 붙들어 쥐려고 하는 세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몸'과 '목숨'과 '재물' 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견고하게 붙잡고자 하여도 삼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사는 한 이 세 가지를 영원히 지켜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니, 불보살님들께서는 '佛身(법신,보신,화신으로 이루어진)'과 '영원한 수명'과 '무한한 보배공덕'을 얻는 진정한 3견법을 일러주신다.]

 

卽語我言(즉어아언) 正士(정사) 受是萬二千天女(수시만이천천녀) 可備掃灑(가비소쇄)

掃 쓸 소, 灑 뿌릴 쇄, 掃灑소쇄=비로 쓸고 물을 뿌림

저의 이러한 말에 그(파순)가 곧 말하기를, 
보살=正士시여, 이 1만 2천의 천녀를 받아 주셔서 씻고 닦는 일을 시켜 주십시오.

He said to me, Good sir, please accept these twelve thousand celestial maidens that can serve and sweep for you.

['현겁경(賢劫經)' 제1권에 ‘개사(開士)’와 ‘정사(正士)’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들은 보살(菩薩)의 두드러진 성향이나 능력을 분별하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분을 나타내는 칭호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많은 보살 가운데 특정 보살에게만 이런 칭호를 붙인 것으로 보면 더욱 그러하다.

개사(開士)는 그 많은 보살 가운데 부처님께 질문을 하는 희왕보살에게만 썼고, 정사(正士)는 여덟 명의 보살에게만 국한하여 썼다. 여기서 말하는 개사란, 부처가 되는 바른길을 열어서 인도하는 스승 격의 보살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고, 정사(正士)란 작은 집착이나 삿된 소견 따위를 모두 여의고 바른 법의 이치를 꿰뚫어 보고 말하는 보살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들우물]

 

我言(아언) 憍尸迦(교시가)

저는 교시가에게 말하되,

無以此非法之物要我沙門釋子(무이차비법지물요아사문석자)

此非我宜(차미아의) 

‘교시가여, 이는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라 제게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제자=釋子(수행자)인 사문으로 이는 저에게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I said, Kausika, as a monk and disciple of Shakyamuni, do not impose on me such unlawful things. I don’t want them. It is not proper for me. 

[非法之物= 법답지 못한 이 물건으로서 나 이 사문 석자 사문= 수행자 석자, 부처님의 아들, 부처님의 제자에게 강요 또는 유혹하지마라]

[고대 인도에는 바라문(婆羅門, brahman)과 사문(沙門, sāmaña)이라는 두 부류의 종교인이 있었다. 바라문은 전통적인 브라만교인으로 '베다'를 신봉하는 브라만계급이고, 이외의 출가 수행자를 사문이라 했다. 즉, 바라문에 대항해 새로운 정신적 수행자(지도자)로 등장한 사람들을 사문이라 일컬었다. 당연히 불교도도 사문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부처님 당시의 인도사회에는 각양각색의 종교가나 사상가가 등장해 일가견을 이룸으로써, 가히 이 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라 할만 했다. 이러한 현상이 생긴 것은 사회경제적 구조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기존의 권위체계가 도전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원래 북방유목민족이었던 아리안족이 인도라는 신천지에 들어와 농경생활에 정착하면서 생산력의 신장으로 사회의 안정을 구축하게 된 과정에서 농업의 신장은 가내수공업을 발전시켰고, 이로 인한 잉여생산물은 상공업을 발달시켰다.

이렇게 경제력이 신장됨으로써 농경사회의 절대적 권위였던 사제(司祭), 즉 브라만계급은 그 권위가 실추되기에 이른다.다시 말해서 제2계급인 왕족, 귀족과 제3계급인 상인들이 제휴함으로써 브라만의 권위가 실추되고, 이 두 계급의 사람들이 브라만이 독점한 정신문화의 대열에 뛰어듦으로써 자유로운 사상이 발휘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신흥종교가 또는 사상가를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사문(沙門, samana)이라 불렀다. 이들은 현실생활 속에서 인생의 의의를 찾으려는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며, 또 한편으로는 인생의 모든 향락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출가해 수행에 전념하기도 했다.
자유사상가인 사문(沙門)은 바라문과는 달리 예로부터 내려오던 계급제도를 무시해 어떠한 계급도 사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또 모든 '베다' 성전의 권위를 부정하는 등 브라만교에 비판적이었다. 
언어적으로도 바라문의 용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 민중언어에 근거한 프라크리트어(Prakrit, 俗語)를 사용했다. 초기불교 언어인 빠알리어도 프라크리트어의 일종이다.

그들은 브라만교에서 규정한 네 가지 생활단계에도 따르지 않았다. 네 가지 생활단계란,
• 스승 밑에서 학습하는 청년시절의 범행기(梵行期), • 가정에서 생활하며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가주기(家住期), • 가정과 재산을 아들에서 물려주고 숲 속에 들어가 은거하는 임서기(林捿期), • 숲 속의 거처까지 버리고 완전히 무소유로 걸식하고 편력하는 생활에 들어가는 유행기(遊行期). 
사문들은 이런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시기에 출가해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유행생활에 들어가 여러 가지 수행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설했다. 바라문을 정통사상가라고 한다면 사문은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장아함경> 제1권 <대본경(大本經)>에는 “사문이란 은혜와 사랑을 끊고 집을 떠나 도를 닦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든 감각기관을 잘 제어해 바깥 욕망에 물들지 않고, 자비스런 마음으로 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는다. 괴로움을 당해도 슬퍼하지 않고, 즐거움을 만나도 기뻐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잘 참는 것이 마치 대지(大地)와 같다. 그러므로 사문이라 한다.”
위의 글은 붓다가 출가하기 전 태자 시절에 지나가는 한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마부에게 물었을 때, 마부가 지나가는 사람이 사문이라며, 사문에 대해 설명을 하는 대목이다. 당시 사문이 상당한 수준의 수행을 쌓은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아미산]

諸煩惱是道場(제번뇌시도량知如實故(지여실고)

온갖 번뇌가 도량이니, (무명번뇌의 본바탕이 불성임을여실하게 알게 하기 때문이며, 

All afflictions are the place of awakening, to know the reality of suchness. 

[우리는 번뇌를 떨쳐버릴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합니까? 이 번뇌 때문에 기도가 안 되고, 이 번뇌 때문에 공부가 안 되는데, 번뇌가 도량,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의 좋은 조건이라 했으니, 그러면 번뇌가 많으면 많을수록 깨달음이 커진다고도 해석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知如實故=여실하게 사실과 같은 줄 아는 연고다. 번뇌가 없으면 실다운 것을 모른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衆生是道場(중생시도량知無我故(지무아고)

중생이 도량이니중생이 무아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며,

Sentient beings are the place of awakening to know the emptiness of the self.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 이름이 중생이지 중생이 중생이 아니다. 중생이라고 하는 어떤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

 

一切法是道場(일체법시도량知諸法空故(지제법공고)

일체법이 도량이니제법의 실성이 공함을 알게 하기 때문이며, 

All Dharmas are the place of awakening, knowing the emptiness of all Dharmas. 

[知諸法空故 모든 법이 공한 줄을 아는 연고다. 일체법 하나하나에서 공함을 알면 그대로 깨달음에 이른다.]  

 

降魔是道場(항마시도량不傾動故(불경동고)

마군을 항복 받는=降魔 도량이니, (악마로 인하여 마음이) 動=움직이고 傾=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Subduing of demons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there is no wavering. 

[마구니의 항복을 받으면 끄달리지도 않고 어디에도 동요되지 않는다.]   

 

三界是道場(삼계시도량無所趣故(무소취고)

삼계가 도량이니, (마음이 업에 얽매이지 않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The three realms are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s free from having a certain a direction. 

[삼계(三界)=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는 부처의 지위에 도달하지 못한, 즉 출세간(出世間)에 이르지 못한 중생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하며, 바로 인간들이 사는 곳을 말한다. 곧 이 ‘우주’, 좁게는 이 지구를 말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삼계는 원래 고대 인도인들의 우주관으로서 이 우주에 삼계가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중생이 살고 있는 삼계를 도덕적인 표준으로 삼아, 정신상의 수행단계로 보고 있다. 
• 욕계는 음식에 대한 욕망, 이성에 대한 욕망, 수면에 대한 욕망, 재산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 치성한 중생의 세계를 말한다. 
• 색계의 색(色)은 형체로 육체를 말하며, 육체가 있지만 욕심이 없는 중생의 세계를 말한다. 
• 무색계는 형체가 없어 육체가 보이지 않는 신이나 부처님, 천인(天人) 등의 경계를 말한다. 
중생이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와 천상, 삼계는 욕심도 있고, 육체도 있고, 동물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생리적인 현상도 있으며, 부처의 정신, 자비심도 있는 곳으로, 이를 세간(世間)이라고도 한다. 
불교 세계관에서 중생이 생사유전(生死流轉), 윤회한다는 3단계 미망의 세계이
나 엄격하게 말하면, 삼계에서 욕계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지구)이고, 색계와 무색계는 우리가 사는, 현세인이 사는 이 우주와 무관한 상상으로 시설된 세계이다. 욕계⋅색계가 물질적 세계라면, 무색계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 정신세계이다. 
그리고 물질적 세계 중에서도 특히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를 욕계라고 하고, 욕망이 배제된 세계를 색계라고 한다. 욕계보다는 색계가, 색계보다는 무색계가 보다 뛰어난 세계이다. 따라서 욕계가 가장 아래에 위치한 이 세계이고, 색계ㆍ무색계는 이 우주 밖에 위치한 상상의 세계이다. 
① 욕계(欲界)는 맨 아래에 있으며 애욕, 재욕, 식욕, 성욕, 명예욕의 오욕 등 온갖 욕망이 창궐하는 우리 인간이 사는 세계이다. 그리고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의 4악취(惡趣)와 인간ㆍ천상의 육도(六道)가 여기에 속한다. 4악취(惡趣)와 인간인 인취(人趣)를 더하면 오취(五趣)가 된다. 그리고 천상에는 사왕천, 도리천(33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등 소위 욕계 6천(六天-六欲天)이 있다. 그래서 욕계엔 5취와 육욕천(六欲天)이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욕계에는 우리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지옥과 ‘욕계 천상’도 포함된다.

② 색계(色界), 욕계 위에 있는 세계로서 천인(天人)이 거주하는 천상이다. 색(色)= 물질의 물질세계이지만 욕망을 끊어 욕망에서 자유로워진 청정세계이다. 이 세계에 거주하는 중생들은 음욕을 떠나 더럽고 거친 색법에는 집착하지 않으나 청정하고 미세한 색법에 묶여 있으므로 색계라 한다. 물질적인 것은 있어도 감관의 욕망을 떠난 청정한 세계로 남녀구별이 없다. 이곳에는 천상인 사선천(四禪天)이 있다.
③ 무색계(無色界), 육체를 가지지 않고 오직 정신적 요소만 있는 세계. 무색계는 색 아닌 법체의 세계로서 물질과 공간 개념을 초월한, 형질이 없는 허공 자체이자, 순수한 정신적 영역의 세계이다. 무념무상의 정(定:三昧)을 닦은 자가 태어나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 삶도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미혹의 중생세계이다. 
색계와 무색계는 정(定)의 세계이고 일종의 정신세계임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인도 신화에서 뇌성벽력의 주재자인 인드라(Indra)가 불교로 수용되면서 선신(善神)인 제석천(帝釋天)이 됐다. 이와 같이 불교는 인도의 신격을 거부하지 않고 자기화 과정을 통해 수용했다. 삼계에 대한 소박한 믿음도 불교 고유의 것이 아니라 인도인 특유의 염원을 수용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인도 고유의 사상을 수용해서 삼계라는 우주관이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삼계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에 있는 여러 현상이 외부로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 다시 말해서 마음의 계층조직을 그대로 투영한 것으로, 이것을 정신적 깊이나 수행의 정도에 따라서 분류한 것이 삼계(三界)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계는 세상(bhumi/loka)과 마음(citta)의 두 가지에 다 적용되는 용어라는 점이다. 
먼저 세상으로서의 삼계(三界)를 살펴보면, 
욕계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육욕천(六欲天)]이라는 무리들이 사는 곳이다. 이 중에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를 4악취(惡趣), 인간은 인취(人趣), 그래서 욕계는 5취가 거주하고, 육욕천(욕계 6천)이 있는 곳이다. 
색계는 초선천(初禪天)부터 사선천(四禪天)까지의 18가지 색계천(色界天)이다. 단, 18천 이외에 16천, 17천, 22천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 무색계는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부터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까지 4가지 무색계천(無色界天)이다. 
즉 그러하여 5취+욕계 6천+색계 18천+무색계 4천=33천으로 구성된 것이 삼계이다. (욕계 육천(六天) 중 제2천인 도리천(忉利天)에도 삼십삼천(三十三天)이 있으므로 두 종류의 33천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세상(삼계)은 모두 중생들 마음의 반영이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했다. 
욕계는 다양한 감각적 욕망에 휩싸인 심리상태를 가진 중생들이 사는 곳이다. 
색계는 색계선(色界禪)이라 불리는 초선부터 사선까지의 선정(禪定)의 심리상태에 있는 중생들이 머무는 곳이고, 
무색계는 무색계 사선(無色界四禪)의 심리상태를 가진 중생들이 머무는 곳이다. 
이러한 심리상태, 즉 마음을 분류해보면 다음 넷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① 욕계마음(kāmāvacara-citta), 욕계마음은 선정 즉 근본집중의 경지에 들지 않은 나머지 모든 심리상태
② 색계마음(rūpāvacara-citta), 초선부터 제4선까지의 근본집중(appanā-samādhi)에 든 심리상태를 뜻
③ 무색계마음(arūpāvacara-citta), 무색계선에 든 상태를 뜻
④ 출세간의 마음(lokuttara-citta), 열반에 든 심리상태 등의 넷으로 분류한다. 
그러므로 욕계에 있는 인간이 초선에 들어있으면 그때 그의 몸은 욕계에 머물지만 색계마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욕계에 있는 인간이 열반을 실현하면 그의 몸은 욕계에 머물지만 그의 마음은 삼계를 벗어난 출세간의 경지에 가있다.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대오(大悟)해서 멸진정(滅盡定)에 든 선지식은 비록 몸은 현세에 있지만 그분의 마음은 출세간의 경지인 열반(극락)에 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삼계는 세상과 마음의 두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고, 삼계를 분류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선정
(근본집중)이다. 따라서 색계와 무색계는 근본집중(禪定)의 증득 없이는 불가능한 마음이고 세상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은 “계(戒, sīla)는 나쁜 세계를 뛰어넘는 수단을 나타내고, 집중(定, samādhi)은 욕계를 뛰어넘는 수단을 나타내며, 지혜(慧, paññā)는 모든 존재(삼계)를 뛰어넘는 수단을 나타낸다.”라고 적고 있다. 
비록 선정이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고 뛰어넘는 수행은 되지만, 생사윤회의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을 타파하는 지혜(paññā)가 없이는 삼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삼계를 설하신 것은 단순히 세상을 분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집중을 닦아서 감각적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나아가 제법의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를 통찰해 삼계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삼계는 허공, 하늘, 대지 따위의 즉물적 구분이 아니라 매우 섬세한 철학적 구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삼계(三界)나 삼계 속에 나오는 천상(天上), 그리고 삼계 밖의 극락(極樂)과 같은 환상적 세계나 초월적 세계를 부정하는 의견도 있다. -아미산]

 

師子吼是道場(사자후시도량無所畏故(무소외고)

사자후(부처님의 설법)가 도량이니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며, 

Lion’s roar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there is no fear. 

 

力無畏不共法是道場(역무외불공법시도량無諸過故(무제과고)

10, 4무소외, 18불공법 도량이니모든 잘못이 없기 때문이며,

The (ten) powers, the (four) fearlessnesses, and (eighteen)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re the place of awakening, since there are no faults. 

[십력(十力) : 부처님의 열 가지 지혜의 힘, ①옳고 그른 것을 아는 지혜의 힘, ②중생들의 三세 업보(業報)를 아는 것, ③여러 선정과 八해탈, 三삼매를 아는 것, ④중생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아는 것, ⑤중생의 여러 가지 지해(知解)를 아는 것, ⑥중생들의 여러 가지 경계(境界)를 아는 것, ⑦여러 가지 업행(業行)으로 어디 가서 나게 되는 것을 아는 것, ⑧천안통으로 걸림 없이 보는 것, ⑨숙명통으로 중생의 숙명을 아는 것, ⑩온갖 번뇌의 습기를 영원히 끊는 지혜의 힘.

4무소외(無所畏) 네 가지 무외로서 일체지무외(一切智無畏), 누진무외(漏盡無畏)ㆍ설장도무외(說障道無畏)ㆍ출고도무외(出苦道無畏)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①신무실(身無失): 몸으로 짓는 행위에 오실(誤失)이 없음. ②구무실(口無失): 말에 오실이 없음. ③염무실(念無失): 생각에 오실이 없음. ④무이상(無異想): 일체중생을 차별하지 않음. ⑤무부정심(無不定心): 항상 선정에 들어 있어 산란하지 않음. ⑥무불지이사심(無不知已捨心): 무지 때문에 평정한 마음을 내는 일이 없음. ⑦욕무감(欲無減):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이 줄어들지 않음. ⑧정진무감(精進無減):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이 줄어들지 않음. ⑨염무감(念無減): 기억하는 힘이 줄어들지 않음. ⑩혜무감(慧無減): 지혜가 줄어들지 않음. ⑪해탈무감(解脫無減): 해탈이 줄어들지 않음. ⑫해탈지견무감(解脫知見無感): 일체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했다는 지견이 줄어들지 않음. ⑬일체신업수지혜행(一切身業隨智慧行): 모든 신업(身業)은 지혜가 수반함. ⑭일체구업수지혜행(一切口業隨智慧行): 모든 구업은 지혜가 수반함. ⑮일체의업수지혜행(一切意業隨智慧行): 모든 의업은 지혜가 수반함. ⑯지혜지과거세무애무장(智慧知過去世無碍無障): 지혜로써 과거의 일을 모두 통달하여 하등의 장애도 없음. ⑰지혜지미래세무애무장(智慧知未來世無碍無障): 지혜로써 미래의 일을 모두 통달하여 하등의 장애도 없음. ⑱지혜지현재세무애무장(智慧知現在世無碍無障): 지혜로써 현재의 일을 모두 통달하여 하등의 장애도 없음.]

三明是道場(삼명시도량無餘碍故(무여애고)

3 도량이니천안통(天眼通)숙명통(宿命通)누진통(漏盡通)으로 3세의 이치에 통달해  어디에도 걸림이 없기 때문이며, 

The three understandings are the place of awakening, and no obstacles remain. 


一念知一切法是道場(일념지일체법시도량成就一切智故(성취일체지고)

 생각(한 순간)=一念에 일체법을 아는 것이 도량이니일체지 성취하기 때문이며,

A single thought to know all Dharmas is the place of awakening, for it is the attainment of all wisdom. 

[成就一切智故, 꼭 경전의 내용만을 불법이라고 강조해서 그로 인해서만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두두물물 사사물물 모든 것이 전부 법이니까, 그 하나하나 어디에도 지혜를 성취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명명백초두(明明百草頭)에 명명조사의(明明祖師意)로다 사물 하나하나에 전부 조사의 뜻이 들어 있다. 불교 경전 속의 부처님 말씀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현상들이 그대로 법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며, 그로 인해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안내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일상 생활과 환경, 산이면 산, 나무면 나무, 풀이면 풀, 돌이면 돌, 하늘이면 하늘, 구름이면 구름 등의 전부가 다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如是善男子(여시선남자菩薩若應諸波羅蜜敎化衆生(보살약응제바라밀교화중생)

이와 같이 선남자여보살이 만약 온갖 바라밀에 따라서 중생을 교화하고 

In this way, good fellow, if a bodhisattva teaches and transforms all sentient beings with all kinds of paramitas, 

諸有所作(제유소작擧足下足(거족하족)

當知皆從道場來(당지개종도량래住於佛法矣(주어불법의)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일거수일투족=擧足下足, ( 모든 말과 행동이모두가 도량으로부터 나와서 불법에 머물게 되는 것으로 알아야만 합니다.

all their actions, lifting of the foot, or lowering of the foot, know that all comes from the place of awakening and abides in Buddha’s Dharma. 

[결론입니다. 如是善男子 선남자야 보살이 이와 같이 응당히 모든 바라밀에 맞추어 바라밀로써 중생을 교화하면 諸有所作 모든 하는 것, 무엇을 하든, 발을 들고 발을 놓는 등의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도량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은 실천불교 행동불교를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즉 중생을 교화하는 일, 다시 말해서 남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부처의 행동이고 또 남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성불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성불하고 나서도 남을 위하는 것이 행동불교이고 실천불교 대승불교이다. 왜 실천불교인가 하면 우리 모두는 그대로 완전무결한 부처이니까 밖으로 행하는 행동이 부처의 행이면, 안팎이 그대로 다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행이란 무엇인가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고 또 남을 위하는 것이다. 남을 위하는 일이 결국 성불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고 또 성불한 후에도 부처님이나 보살들과 같이 남을 위하는 일 그것 밖에 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비스님은 一行一佛사상이다. 한 가지 부처행동 하면 그 동안은 부처입니다. 하루에 일분 만이라도 부처행동하면 그 일분동안은 부처가 된 것입니다. 一行一佛 안은 아예 부처이니까 부처 행동을 한 일분 동안은 안팎이 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說是法時(설시법시五百天人皆發(오백천인개발)

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이같이 설할  5 명의 천인들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When he spoke this Dharma, five hundred celestial beings developed the mind to seek the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

그러므로 제가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Therefore, I cannot go to him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神通是道場(신통시도량) 成就六通故(성취육통고)

신통 도량이니, 6신통 성취하기 때문이며, 

Spiritual power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through it accomplishes the six supernatural powers. 

[육통(六通)= 육신통(六神通)은 여섯 가지 신통력을 말하는 것으로 삼명에 세 가지를 더 추가한 것이다. 

삼명육통(三明六通), 삼명(三明)이란 천안명, 숙명명, 누진명이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한 성자에게 갖추어진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세 가지에 대해 밝게 아는 것을 말한다. 삼명이 세계를 보는 세계관이나 또는 지혜의 눈이라는 측면이 강한 반면, 육통(六通)은 어떤 불가사의한 능력, 부처님이나 아라한에게 갖추어진 자유자재한 권능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육신통 중 천안통의 지혜를 천안명이라 하고, 숙명통의 지혜를 숙명명이라 하며, 누진통의 지혜를 누진명이라 하며, 이 셋을 삼명(三明)이라 한다.
①천안명(天眼明)은 거리의 멀고 가까운 것에 상관없이 일체 세간(世間)의 모든 고락(苦樂)의 모습(相)과 가지가지 유형(有形)과 색(色)에 대해 밝게 아는 것을 말한다. 천안명은 단순히 거리상으로 멀리 있는 것을 보는 생리적 능력이라기보다는 세계관에 가까운 지혜를 말한다. 즉 일체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해 고통에 쌓여 있음을 여실하게 보는 지혜와 같다.
②숙명명(宿命明)은 지나간 과거생의 모든 일들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전생(前生)의 일을 아는 신통력이다. 과거 여러 생에 걸친 우리의 전생을 숙세(宿世)라고 한다. 즉, 숙명통은 겹겹이 쌓인 우리의 과거 전생, 현재, 미래의 모든 일들을 다 아는 지혜를 말한다.
③누진명(漏盡明)은 이 생에서 모든 종류의 고통을 밝게 알아서 인간의 모든 번뇌를 끊는 지혜를 말한다. 앞에 나열했던 천안명을 통해서 육도 중생의 모든 현실적인 삶을 관조한 다음, 숙명명을 통해서 숙세의 모든 인과관계를 꿰뚫어 보게 되면, 오늘의 자기 존재를 모두 알게 된다. 즉, 인간존재의 연기적 인과관계를 모두 알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그 이유를 알게 되며, 존재를 둘러싼 고(苦)의 원인을 환하게 꿰뚫어 보게 된다. 그렇게 원인과 결과를 잘 알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다 끊을 수 있다.
6통은 위의 삼명에 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신족통(神足通)을 더한 여섯을 말한다.-아미산]

 

解脫是道場(해탈시도량) 能背捨故(능배사고)

해탈 도량이니, 팔배사(팔해탈) 이룰  있기 때문이며 

Liberation is the place of awakening, being capable of renunciation. 

[解脫이 是道場이니 能背捨故며 능히 등지고 버린다. 장애를 등지고 걸리는 온갖 일들을 전부 버리는 것, 말하자면 어떤 고정관념으로부터 또는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관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배사= 등진다,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팔배사(八背捨, 산 Aṣṭa-vimokṣa), 팔해탈(八解脫). 초선, 제2선, 제3선, 4무색정, 멸진정(滅盡定)에 이르는 8단계의 선정관법을 말한다. 따라서 팔배사는 팔선정(八禪定)과 같은 말이다. 즉, 여덟 단계의 마음집중을 통해 탐착심(貪着心)을 버리고 이루어지는 해탈(vimokṣa)을 일컫는다. 
마음집중을 통해 오욕(五慾)의 경계를 여의고(등지고), 탐하고 고집하는 마음을 버리므로 배사(背捨)라고 하며, 또 이것으로 말미암아 삼계(三界)의 번뇌를 끊고 아라한과를 증득하므로 해탈이라고 한다. 그래서 8해탈(八解脫)이다. 
배사에서 '배(背)'란 정결한 오욕(五欲)을 등져서 오욕(五欲)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며, '사(捨)'란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떨쳐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사를 이루면 해탈을 얻는다. 따라서 배사는 내상(內相-안의 모습)을 말한다. 
아래의 1-3 단계는 특정한 일반적 물질세계와 관련이 있으며, 4-7 단계 는 선정(禪定)에 관한 내용이고, 마지막 8단계는 최상의 깨달음을 뜻한다.
① 내유색상관외색해탈(內有色想觀外色解脫) ② 내무색상관외색해탈(內無色想觀外色解脫) ③ 정해탈신작증구족(淨解脫身作證俱足) ④ 공무변처해탈(空無邊處解脫) ⑤
식무변처해탈(識無邊處解脫) ⑥ 무소유처해탈(無所有處解脫) ⑦ 비상비비상처해탈(非想非非想處解脫) ⑧ 멸수상정해탈 (滅受想定解脫)]

方便是道場(방편시도량) 敎化衆生故(교화중생고)

방편이 도량이니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며.

Skilful means is the place of awakening for teaching and educating sentient beings. 

[방편(方便, 산 upaya, 구파야/漚波耶), 궁극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bodhi)을 향해 점진적으로 접근시켜 나아가게 한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진리 그 자체를 진리로 직접 표현하기 힘들 때 깨달음을 향해 가는 간접적 수단을 말한다.
우빠야(upāya)’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 수단을 가리킨다. 방편은 초기 논장인 '구사론' 등에도 등장하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한 개념이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흥기한 이후, 깨달음을 얻었으나 일체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자기 자신 또한 중생계에 남겠다는 보살의 중생 구제 서원과 맞물리면서 거의 모든 대승 경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다양하게 해석됐다.
‘방편’이란 편리한 방법, 교묘한 방법이란 말로서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게 여러 가지 가르침으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의미이다. 즉, 각자의 상황과 기질에 맞는 최선의 방법과 수단을 통해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접근하다’, ‘도달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대기설법(對機說法), 차제설법(次第說法) 할 때의 대기(對機)ㆍ차제(次第)와 비슷한 말이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의 인도는 여러 가지 종교가 난립해 심한 사상적 혼란을 빚고 있었던 상황에서 각 종교가 설하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진위성 문제는 각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깨닫는 길밖에 없었다.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ttha)가 구도 시에 취한 방법은 바로 이것이었으며, 진리를 깨달은 뒤에 사람들에게 전법(傳法)할 때도 바로 이 방법에 의했었다.]

 

四攝是道場(사섭시도량) 攝衆生故(섭중생고)

 4 도량이니중생을 아우르기=攝하기 때문이며,

The four means of attraction are the place of awakening, which leads all sentient beings. 

[攝(섭)은 포섭한다는 뜻으로 중생을 布施(보시), 愛語(애어), 利行(이행), 同事(동사)의 네 가지로 포섭한다는 말입니다.] 

[사섭법(四攝法)=사사섭법(四事攝法), 사섭사(四攝事) 혹은 사섭(四攝)은 보살이 중생을 제도할 때에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이다. 여기서 ‘섭(攝)’의 본뜻은 "끌어들이다", "품안에 받아들이다", "감싸 안다" “서로 어우러져 화합한다”, ‘굳건히 유지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사섭법이란 중생을 부처의 가르침[佛道]으로 끌어들여 구제하는 보살의 네 가지 행위를 이른다.

‘섭(攝)’ 자의 손 수 변(扌) 옆에 귀 ‘이(耳)’자가 셋이 있는데, 맨 위의 ‘이(耳)’자가 포용 섭수하는 마음의 귀이고, 아래 두 개 ‘이(耳)’자는 사람의 두 귀이다. 이 글자처럼 사섭법은 ‘네 가지 거두어 주는 일’, ‘네 가지 보살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생활 혹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해야 할 네 가지 포용태도를 말하는 일종의 사회윤리이다.-아미산]

 

多聞是道場(다문시도량) 如聞行故(여문행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듣는=多聞 도량이니들은 대로 행하기 때문이며,

Listening to many teachings is the place of awakening, cultivating according to what one has heard. 

[문사수(聞思修), 듣고, 생각하고, 수행하여 닦는 세 단계는 꼭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들으면 생각하게 되어서 그 나름대로의 판단이 생겨서 마음속에 뿌리 내리기 시작하면 저절로 실천하게 됩니다. 이렇게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多聞인데 이렇게 해서 성불하게되고 또 성불하고 나서도 이것을 계속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如聞行故=듣는 것과 같이 행동한다, 들은 것이 결국 행동으로 나아가게 되어있다.]

['우바새경'에 “또 두 가지 법이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니, 첫째는 다문이고, 둘째는 사유이다. 또 세 가지 법이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니, 첫째는 중생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고, 둘째는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이며, 셋째는 염심(불·법·승·계율·보시·천상-육념을 꾸준히 마음에 새기는 것)을 갖추는 것이다. 
또 네 가지 법이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니, 사위의(四威儀-행ㆍ주ㆍ좌ㆍ와-불자로서의 태도를 잘 지님)를 말하는 것이다.”
다문(多聞), 많이 읽는 것에는 많이 듣는 것도 포함이 된다.]
   

伏心是道場(복심시도량) 正觀諸法故(정관제법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마음을 항복 받음)=伏心 도량이니제법을 바르게 관하게 하기 때문이며,

A subdued mind is the place of awakening, thus observing all Dharmas correctly. 

[제법을 바르게 관찰하려면 伏心=나의 어떤 편견, 내 주관 등을 전부 항복 받아야 됩니다.

우리 중생은 자기 가까운 쪽으로 편들게 되어있고, 편견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항복하는 마음 즉 자기의 편견을 항복 받아 놓으면 모든 법을 바르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三十七品是道場(삼십칠품시도량) 捨有爲法故(사유위법고)

37도품이 도량이니유위법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기 때문이며, 

The thirty-seven qualities are the place of awakening for renouncing the conditioned Dharmas.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은 37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 삼십칠보리도법(三十七菩提道法), 37각지(三十七覺支), 37도품(三十七道品), 37도분(三十七道分), 37조도법(三十七助道法), 37품도법(三十七品道法), 37품(三十七品)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깨달음, 도(道), 보리(菩提)]에 이르는 37가지 법’을 말하며, 초기불교의 '아함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37가지 도품(道品), 즉 수행법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실상 초기불교 수행법을 통칭하는 말이다.

'아함경'에서 붓다가 언급하는 37조도품은 네 가지 마음챙김=4념처(四念處), 네 가지 바른 노력=4정근(四正勤), 네 가지 성취수단=4여의족(四如意足), 다섯 가지 기능=5근(五根), 다섯 가지 힘=5력(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7각지(七覺支),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8정도(八正道) 등의 일곱 가지 수행법을 합친 것이며, 이를 7과(七科)라고 한다. ]

諦是道場(제시도량) 不誑世閒故(불광세간고)

4제(사성제) 도량이니세간을 속이지 않기 때문이며,

The Four Noble Truths are the place of awakening, for they do not deceive the world. 

[四諦가 是道場이니 不誑世間故며 세간을 속이지 않는 연고 또는 세간에 속지 않는 때문이다. 고집멸도를 제대로 보면 세간에 속지 않고 인생살이에 속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우루베라의 네란자라강(尼蓮禪江) 기슭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베나레스 교외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녹야원(Migadāya)에서 같이 수행하던 다섯 제자들에게 초전법륜(初轉法輪), 최초로 설한 법이 사성제(四聖諦)이고, 그 수행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이다. 사성제는 부처님이 불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서 가장 처음으로 설한 것이고, 그 후 쿠시나가라(Kuśinagara)에서 반열반에 드실 때까지 45년 동안 가장 많이 설하신 가르침이다.

사성제란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단하게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 고와 고의 원인,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緣起是道場(연기시도량) 無明乃至老死皆無盡故(무명내지노사개무진고)

연기 도량이니무명에서 늙음과 죽음까지 모두가 다함이 없기 때문이며, 

Dependent arising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gnorance and even old age and death are all endless. 

[연기의 공식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 있고 없음에 대한 상관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모든 존재의 법칙은 인연의 어떤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연기의 법칙을 아는 것이 보다 중요합니다. 즉 우주의 중심은 '나'이며, 나의 존재 원리가 바로 열두 가지로 연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명(無明),행(行), 식(識), 명색(名色),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열두 연기가 고리같이 계속 연결되어 있는, 정적인 조건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현재 내가 어떤 과정으로 이런 작용을 하고, 이렇게 존재해서 이렇게 말을 하고, 듣는 등의 생활이 펼쳐지고 있는 전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떤 활동으로써 내 삶이 계속되는 것이 '생', 태어난다는 뜻이 아닌 산다는 것이고, 그 삶의 모습이 촉, 수, 애, 취, 유.

은 육입으로 감촉하고, 육입 이전에는 명색=몸과 마음, 명은 마음의 정신세계, 색은 육신입니다.
좀더 미세하게 보면 , 의식이라고 하는 인식작용이 있어서 명색, 몸도 생각하고 마음도 생각하는, 몸도 인식하고 마음도 인식하는데, 그 의식작용= 인식하는 작용은 의식의 움직임으로부터 있는 그것이 '행'입니다. 우리의 의식작용이 작용해서 활동하는 것이 '행', 아~ 꽃이 붉다. 이것은 누가 가져왔구나? 등의 의식이 흘러가면서 좋다 나쁘다를 인식하는 것이 행과 식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식 할 수 있는 의식의 근원자리는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것, 의식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 근원을 찾을 수 없어서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무명, 어둡다, 밝음이 없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혼돈의 의식 근원자리가 있는 그것 (도교에서는 혼돈이라고 함) 혼돈에 일곱 구멍을 뚫어더니 나중에 혼돈이 죽더라는 말이 있는데, 혼돈은 무명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근원자리는 같다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삶 그리고 늙어서 죽는다 것은 누구나 다 겪고 있는 상황들인데, 흔히 십이인연을 이러한 면에서 해석하지 않습니다만, 십이인연을 인연으로 해서 십이인연의 조건으로 해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이해를 해야 되고, 또 십이인연을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해석은 무명, 행, 식 까지를 정신세계로 보고, 그 정신세계가 과거의 어떤 인연에 의해서 모태에 들어가서 정신과 육체의 모습이 겨우 형성되는 것을 명과 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태 안에서 육근이 분명하게 나누어지고 육근이 생겨서 귀, 코, 눈, 혀, 입들이 제대로 모습을 갖추는데, 이 때를 육유라고 해석하고, 그 이후부터는 출퇴를 이야기하는데, 태어나서 갓난아기 때는 촉감만 느끼고 받아들일 줄을 모르다가, 한 2~3세쯤 되면 수, 받아들이는 작용을 한다. 그 다음에는 취, 친한 사람을 취하려 하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배척하는 그것이 취이다. 다음에 점점 철이 들면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소유하려고 하는 소유욕 慾, 그래서 전부 소유당하고 또 소유하면서 살아가고 늙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연연 따라 반쪽 해석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을 작동시키고 육입을 작동시키고 촉, 수, 애, 취, 유가 하루에도 여러 수십 번씩 있는 일인데, 그것은 결국 육근을 가지고 촉, 수, 애, 취, 유, 생, 노, 사를 하고 있는데, 그 육근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명색입니다.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지기 이전에 인식작용이 있는 것이 이다. 인식작용은 뭔가가 움직이는 것, 의식이 움직이면서  흘러가기 때문에 인식하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지금 우리의 현재상태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면 캄캄해서 모르는,
지금 정신을 이렇게 활발하게 쓰고 있지만 이 정신의 근원자리를 찾아낼려고 하면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아무도 꼬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그것이 무명입니다. 밝음이 없는, 캄캄한데서 무엇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다. 어둡고 막연한 곳에서 뭔가 움직여서 하나씩, 하나씩 인식하기 시작하는 의이 나와서, 그 다음에 명색, 정신과 육체에서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는 작용을 하는 촉, 지금 당장 우리가 이것은 나의 입에 맞고 안  맞는다고 하면서 = 받아들이고, 좀 더 마시고 싶으니까 더 달라고 해서 애, 취 유의 이러한 삶이 계속되는 것이 십이인연입니다.

이러한 인연관계로 해서 오늘의 내 활동과 삶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는 것이 연기의 법칙이라고 했는데 내 삶, 이 순간의 이 삶이 십이인연으로 해서 이렇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의 이치가 그대로 도량이고, 그것이 무진= 끝없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

◎光嚴童子(불고광엄동자)

[광엄동자(光嚴童子) 표상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광(光)은 色ㆍ心ㆍ絶對를 상징한다.

동자(童子)란 어린 아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도심에 눈뜬 사람을 말한다.

광엄동자(光嚴童子)란 광엄보살을 일컫음이나, 보살을 동자라 함은 ① 여래의 왕자라는 뜻 ② 음욕이 없는 것이 아이들과 같다는 뜻이다.]

 

佛告光嚴童子(불고광엄동자)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는 동자인 광엄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하도록 하라.

The Buddha then said to Child of Shining Austerity, Go to Vimalakirti and ask him about his illness. 

 

光嚴白佛言(광엄백불언) 世尊(세존)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

광엄도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Shining Austerity replie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am afraid I cannot go there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我昔(억념아석) 出毘耶離大城時(출비야리대성시)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제가 비야리 대성을 나가려 하였을 때에 

Why? I thought back to when I was leaving the great city of Vaisali, 

 

維摩詰方入城(유마힐방입성) 我卽爲作禮而問言(아즉위작예이문언)

유마힐이 마침 성문으로 들어오고 있어서, 저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물었습니다.
as Vimalakirti was entering the city, so I bowed to him and asked, 

 

居士從何所來(거사종하소래)?

‘거사님, 어디서 오십니까?’(어디 갔다 오십니까?)

Where did you come from householder? 

 

答我言(답아언) 吾從道場來(오종도량래)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도량에서 오는 길입니다.
He replied, I came from the place of awakening. 

 

我問(아문) 道場者何所是(도량자하소시)?

제가 다시 묻기를, 그 도량이 어디에 있습니까

I asked What is the place of awakening? 

[道場(도량) 불가에서는 수행자가 수행하는 곳을 도량(道場)이라고 합니다.

*한자로는 도장(道場)으로 쓰지만 ‘도량’으로 읽습니다. 도장으로 읽을 때는 태권도나 검도 등을 가르치거나 연습하는 장소나 집을 가리킬 때이고, 도량은 ‘도를 닦는 장소, 도가 있는 장소’를 일컫는 말입니다. 원래는 ‘석가모니부처님이 도(道)를 이룬 땅’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삼보(三寶)를 모시고 수행하는 장소, 또는 법(法)을 펴기 위해 대회를 여는 장소로 ‘절’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으며 좁게는 좌선이나 염불, 수계 등을 하는 방이나 법당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 사찰의 법당 안에서 진행되는 법회는 물론, 법당과는 관계없이 일정한 곳에서 진행되는 법회를 일컫기도 합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고도의 신비화된 종교의식을 지칭하여 도량이라고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질병을 낫게 하거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없도록 하고 수명을 연장하게 하며, 번영을 이룩하고 도둑이나 외적을 굴복시키기 위한 갖가지 주술을 조직적으로 의식화한 것을 도량이라고 파악하였던 것입니다.
신라시대에는 불법을 펴고 수행한다는 의미로 『삼국유사』에 인왕도량 · 미타도량 · 관음도량 · 백좌도량 등의 이름이 보이며, 613년(진평왕 35) 나라에서 황룡사에 100명의 고승을 초청하여 백좌도량을 열었을 때 원광(圓光)이 가장 윗자리에 앉아 이를 주관하였다고 합니다. 또, 670년(문무왕 10)에는 문두루(文豆婁) 도량을 열어 당나라 군사 50만 명을 물리쳤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작성자 사이공

* 조주스님은 도량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조주스님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다. “무엇이 도량입니까?”
그대는 도량에서 와서 도량으로 간다. 전체가 다 도량인데 도량 아닌 데가 어디냐?”]

 

答曰(답왈) 直心是道場(직심시도량) 無虛假故(무허가고)

그는 답하였습니다.
올곧은 마음=直心이 도량이니, 헛되고 거짓됨이 없기 때문이며,

He replied, The upright mind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is free from falsehood. 

[直心이 是道場이다. 정직하고 곧은 마음이 도량이다. 유명한 구절입니다 
정직한 마음이면 그대로 깨달음에 이른다. 그리고 깨달은 후의 표현이 直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야기 되어지고 있는 것은 원인이자 결과입니다. 불교에서는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성불만하면 된다는 논리는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 그 자체가 결과이어야  되는, 즉 결과와 원인이 같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고 나서도 직심이요, 깨닫기 위해서도 직심으로, 원인도 직심이요 결과도 직심이다. 곧은 마음= 직심이 도량이다. 왜냐, 헛되고 거짓됨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곧 정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니까]       

[도량(道場)은 건물이나 환경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직심(直心)이란 흩어지지 않은 유연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마음에는 거짓이나 에누리가 없으므로 도량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직심(直心)"이란 순수한 마음으로 사로잡히지 않은 마음이기도 하므로 "빈(空) 마음"과도 상통됩니다. 

영가(永嘉) 대사(8세기의 중국 선승)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진리를 찾으려는 욕구에 불타 있으면 마음은 조용해진다. 다만 마음이 조용해지기만을 바라고 진리를 구하기를 잊으면 산 속도 소란스러워진다."
자기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기를 잊고, 멀리 한적한 곳을 찾는 한, 아무데도 "도량(道場)"은 없습니다.- 향수선사]

 

◎사심 (四心)

發行是道場(발행시도량) 能辦事故(능판사고)

올곧은 마음으로 행하는=發行이 도량이니, 만사를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이며,

Initiation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can accomplish deeds. 

[發行= 행을 실천한다. 어떤 행위를 한다. 실천에 옮긴다.  
가릴 판, 판단할 판. 辦事는 어떤 일을 마련한다. 일을 판단한다. 일을 해나간다는 뜻으로 直心을 실천에 옮겨서 어떤 일을 성취해나간다]

 

深心是道場(심심시도량) 增益功德故(증익공덕고)

깊은 마음=深心이 도량이니, 공덕을 증대(증장)시키기 때문이며,

The mind of profound faith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is the development of good merits. 

[얕은 마음, 한 번 듣고 마는 마음, 한번하고 마는 마음, 시작만하고 끝이 없는 마음이 아니라  深心=깊은 마음은 끝까지 하는 마음, 오래도록 하는 마음, 꾸준히 하는 마음 등이 됩니다. 공부하는 것이나 어떤 기술을 배우는 것도 深心= 꾸준히 계속해야 공부도 깊어지고 기술도 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득이 증익되는 것입니다.]

 

菩提心是道場(보리심시도량) 無錯謬故(무착류고)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菩提心이 도량이니, 잘못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The bodhi mind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there is no confusion. 

[보리심의 문자적 해석은 깨달음에 대한 마음이지만 보리심은 불교에 대한 온갖 설명이 이 보리심이라고 하는 말속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깨달아야 하며 또 어떻게 해야 깨달으며, 깨닫고 나서 무엇 해야하는가 등의 논리 또한 보리심이라는 말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여기서의 보리심은 깨달음 그 자체이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는 그 장소= 是道場이니, 錯謬= 그릇됨, 착각, 오류가 없다. 즉 보리심은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심 (四心)=직심(直心)ㆍ발행심(發行心)ㆍ심심(深心)ㆍ보리심(菩提心)이 6도(度) 행의 근본이 됨.]

[ "보리심(菩提心)이란, 본래 인도 불교와 티베트 불교에서 말하는 보리심은 ‘단지 깨달음의 마음’이 아닌, ‘일체중생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큰 연민(비심, 大悲)과, 자신이 그 일을 반드시 성취하고 말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바탕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보살의 마음’으로 정의한다." - <람림 첸모(보리도차제광론)> 중에서  
그래서 보리심을 곧 '이타의 보리심'이라 하여 '이타'라는 단어가 '보리심'앞에 전제하는 것이다. 보리심은 대승불교(현교와 밀교)의 귀의점이자 입문이다. 반면 소승불교의 입문은 삼귀의와 사성제이다. 한국의 논서와 많은 책에서는 심지어 스님들조차도 보리심을 단지 깨달음의 마음으로만으로 알고 있다. 

‘단지 깨달음의 마음’이라 한다면, 소승과 대승을 전혀 구분할 수가 없게 될 뿐더러, 수행의 입문 첫 시작서부터, 바랴밀의 개념과 밀교의 개념까지, 대승불교의 기초와 기본 체계와 스텝이 처음부터 어긋나버리게 되는 매우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보리심'의 참뜻을 알고서 불교에 대한 구분을 명확하게 하여야 한다!  -상원(商源)]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은 불교에서 깨달음의 마음. 깨달음을 향한, 혹은 이미 깨달은 마음을 말한다. 여러 가지 명칭이 있으나 그것은 오직 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보리심이 일어났을 때 땅이 진동하며 부처님의 법좌까지도 진동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의 공통된 업으로 우주가 생긴 것이 라고 말한다.
보리심은 모든 중생들을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하기 의해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염원(상대적 보리심), 모든 것이 공 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완전히 깨어난 마음(궁극적 보리심)을 말한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순간 윤회의 감옥에 갇혀 있는 불쌍한 분들도 부처님의 아들,딸이 되어 인간과 신들에게 예경의 대상이 된다.]

 

◎6바라밀: 六婆羅蜜 

布施是道場(보시시도량) 不望報故(불망보고)

보시가 도량이니, 보답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며,

Generosity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one does not expect a reward for charity. 

[보시와 不望報(불망보), 보시의 제일 중요한 것이 과보를 바라지 않는 마음, 어떤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대가나 과보를 바라지 않는 마음 자세라면 성불할 수 있고, 성불 후에도 불망보의 정신으로 남에게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持戒是道場(지계시도량) 得願具故(득원구고)

계를 갖는=持戒가 도량이니, 온갖 구족한 소원=願具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며, 

Ethical conduct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is the attainment of aspirations. 

[願具= 온갖 소원이 구족한 것은 십악을 저지르지 않는 십선(十善), 십선행(十善行)를 행하면 우리들 마음에 바라는 바를 충분히 구족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원이 구족함을 얻는다.]

 

忍辱是道場(인욕시도량) 於諸衆生心無礙故(어제중생심무애고)

인욕이 도량이니, 모든 중생에 대하여 마음에 걸리는 바가 없기 때문이며,

Patience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accords with all sentient beings free from hindrance. 

[주변에 잘 참고, 어떤 것도 잘 소화하고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참 편안하지만, 아주 까다로워서 말하기가 무서울 정도로 곡해를 잘 하고, 잘 못 참아서 걸핏하면 반대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아주 불편합니다. 그래서 忍辱이 是道場이다. 모든 중생에게 마음에 걸림이 없게 하는 까닭에 인욕이 충분히 깨달음의 조건이 된다. 깨달음의 도량이 된다.]

 

精進是道場(정진시도량) 不懈退故(불해퇴고)

정진이 도량이니, 게을러 물러서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Spiritual diligence is the place of awakening, the cause of ongoing effort and never falling back. 

[精進= 꾸준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계속하는 것을 不懈怠(불해태)=게으르지 않는다.

신록의 계절이 되면 아무리 큰 나무도 계속 커지고, 굵어지는 것이 정진입니다. 그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나무도 1년에 20~30cm씩 자라고 또 자꾸 굵어지듯이, 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러하게끔 되어 있는 그것이 삶의 법칙입니다. 사실 나이와 관계없이 계속 정진= 계속 성장해야 되고, 자기발전을 도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禪定是道場(선정시도량) 心調柔故(심조유고)

선정이 도량이니, 마음이 조화롭고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며, 

Meditative absorption is the place of awakening, for it subdues the mind into tranquility. 

[열심히 나부 데고 설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진이라고 좋게 볼 수도 있지만, 공부, 참선이나 기도 등을 할 때에는 禪定의 입장에서 차분하고 안정하게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면 調柔(조유) 조화롭고 부드러워진다. 그러니까 마음을 집중시키는 훈련을 통해서 정진을 할 수 있다면 마음이 조화롭고 부드러워진다는 것입니다]

 

智慧是道場(지혜시도량) 現見諸法故(현견제법고)

지혜가 도량이니, 눈앞에 있는 제법을 現見=환히 보기 때문이며,

Wisdom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presents the perception of all Dharmas. 

[지혜를 흔히 불교에서는 빛, 등불 또는 광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혜가 도량이다 現見諸法= 지혜로우면 모든 법의 이치, 세상으로 돌아가는 모든 것들을 現見=환히 들여다본다. 

금강경에서 離一切諸相 卽明諸佛이라 했습니다. 허상을 허상으로 볼수 있으면 벗어날 수 있는데, 허상으로 보이지 않으니까(허상으로 볼 수있는 지혜가 없으니까)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체상을 떠난 것이 부처라, 현견=모든 법, 모든 이치를 환히 보게 되면 곧 성불이고, 성불하고 나서도 제법을 현견해서 모든 이치를 환히 보고 지혜롭게 살면 그것이 바로 부처된 보람이고 성불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사무량심(四無量心)

慈是道場(자시도량) 等衆生故(등중생고)

가 도량이니,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Loving-kindness is the place of awakening, being equal to all sentient beings. 

[한자어의 자(慈)의 단어적 의미
- 이외에도 사랑을 표현하는 한자어로 사랑 자(慈, 㤵)가 있다. 기본적으로 사랑 자(慈)를 쓰는데, 속자로 사랑 자(㤵)라는 글자가 존재하기도 한다. 
- 사랑 애(愛)는 인간이나 자연 생태계의 생물 종 모두에게 존재하는 일반적 마음의 작용으로서 사랑을 의미하지만, 사랑 자(慈)는 자비(慈悲), 자애(慈愛), 자선(慈善)과 같이 헌신적 사랑, 돌보는 사랑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慈(자)자는 이 자(玆)와 마음 심(心)이 결합한 모습이다. 자(玆)는 실타래가 늘어진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무성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무성함을 뜻하는 자(玆)자에 심(心)자가 더하여 사랑 자(慈)자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무성한 마음, 즉 힘쓰고, 애쓰며 돌보는 사랑의 마음을 말한다
- 사랑 자(慈)의 속자인 자(㤵)자는 힘쓸 자(孜)와 마음(心)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풀어쓰면 힘쓰는 마음, 애쓰고 돌보는 마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강마을]
[자무량심(慈無量心)은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 마음가짐]  

 

悲是道場(비시도량) 忍疲苦故(인피고고)

가 도량이니, (중생을 구제하는데) 피곤함과 괴로움을 잘 참아 내기 때문이며,

Compassion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t can withstand pain and suffering. 

[사랑자 慈 슬플비 悲. 비(悲)는 어여삐 여긴다, 안타깝게 여긴다, 마음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悲가 是道場이니 피곤하고 괴로움을 받는=疲苦를 참는다.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그저 애석하고 안타까워해서, 그 자식생각에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마음, 아무리 피곤하고,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내 목숨을 대신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 피고=고통을 참는 그것이 悲의 정신입니다. 慈는 사랑을 부어넣는 것이라면, 어려움을 견딜 줄 아는 그런 마음이 悲의 정신입니다]     

[()란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며 근본적으로 그 근심과 슬픔의 뿌리를 뽑아내어 주는 것을 라고 한다.=<悲能拔苦(능발고)>

비무량심(悲無量心)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고통의 세계로부터 구해내어 깨달음의 해탈락(解脫樂)을 주려는 마음가짐이다.]

 

喜是道場(희시도량) 悅樂法故(열락법고)

가 도량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기 때문이며

Joyfulness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there is a delight in the Dharma. 

[불교에서 말하는 기쁨이란 진리, 가르침, 불법에서의 즐거움과  환희를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희무량심(喜無量心)은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버리고 낙을 얻어 희열하게 하려는 마음가짐]

 

捨是道場(사시도량) 憎愛斷故(증애단고)

버림=가 도량이니, 사랑과 미움을 끊어 버리고 평등하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Surrender is the place of awakening, for it breaks hatred and love. 

[버릴사 捨, 흔히 버리듯이 보시한다, 미련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버리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지만, 여기서는 증애를 끊는다. 미워하고 애착하는 것을 끊는다. 미워하고 애착하는 것은 상대적이고 대립된 것이기 때문에 중도가 안 되는 것이니까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량심(捨無量心)은 탐욕이 없음을 근본으로 하여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고 미움과 가까움에 대한 구별을 두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不二是菩提(불이시보리) 離意法故(이의법고)

둘이 아닌 것=不二가 보리이니, 마음과 대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며,

Non-duality if bodhi, separate from mind and Dharma. 

[둘이 아닌 것이 보리다. 보리는 육근, 육진의 두 가지 법에 속하지 않는 의근과 법진에 해당됩니다.
안, 의, 비, 설, 신, 의 다음에 색, 성, 향, 미, 촉, 법이니까 의와 법, 안과 색, 비와 향이 상대가 되는 육근과 진을 떠난 것이니까 둘이 아닌 것이 보리다.]  

[‘불이(不二)’ 마음[] 그것의 대상[] 둘이 있다. 그러나 보리에는 마음마저 없으니, 어찌 () 따위가 있겠는가,]

[용수(龍樹)는 '중론송(中論頌)' 첫머리의 유명한 ‘귀경게(歸敬偈)’ 내용이 ‘팔불(八不)’이라서, 팔부중도(八不中道)라고 한다. 팔부중도의 ‘팔불(八不)’은 아래와 같다. 
• 불생불멸(不生不滅) -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 개별존재의 생겨남과 사라짐에 대한 부정임. 
• 불상부단(不常不斷) -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된 것도 아니다. ― 존재의 영원함과 단절됨에 대한 부정임. 
• 불일불이(不一不異) -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 존재의 같음과 다름에 대한 부정임. 생사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다. 번뇌와 보리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다. 그런 뜻이다. 
• 불래불거(不來不去) -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 존재의 개별 원인과 개별 결과에 대한 부정임. 일체중생이 무명 망상으로 윤회해 왔다 갔다 하지만 본래 진리의 당체는 오고 가는 체성이 아닌데, 임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실제의 현상으로 집착하는 것을 타파한 것이다.

여기서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지향은 중도(中道)를 말하는 것이다. 
나와 네가 굳이 같다고 우겨서도 안 되고, 나와 네가 다르다고 우겨서도 안 된다. 나와 네가 엄연히 다른데, 굳이 같다고 우기면서 똑 같이 나누자고 하니까 싫어진다. 반대로 친해지고 싶은데, 나와 네가 다르다고 구분 지으니 섭섭하다. 중도는 나와 네가 다름을 인정해야 하고, 나와 네가 다르지 않음도 인정함이다.
그러니 너와 나는 같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 따라서 너와 나를 분별하지 말고, 자비로 타인을 감싸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보살’이다.
다시 말하면, 불일불이(不一不異)로 본다는 것은 곧 중도로 봄을 의미한다. 붉은 장미와 노란 장미를 놓고 볼 때 둘은 같지 않다. 그러나 장미란 점에서는 다르지도 않다. 이와 같이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할 수 없는 이런 관계를 용수(龍樹, 나가르주나)는 ‘불일불이(不一不異)’라고 했다. 같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는 말이다. 물과 파도는 동일하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은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를 가진다. 
현실적으로 남북문제에 있어서 ‘남북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라고 말하기보다 먼저 ‘남과 북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다름을 인정하는 데에서 같음을 도출해야 무리가 없어진다. 그렇지 않고 불일(不一;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같음만 강조하다가 보면 그 뒤에 숨은 ‘다름’을 해결하고 해소할 길이 없어 갈등만 커진다.

생사 즉 열반, 번뇌 즉 보리도 생사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같은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하고, 번뇌와 보리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다. 즉,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입장이다. 
그리고 불일불이(不一不異)란 개체와 전체에 치우친 견해이기도 하다. 개체적으로 보면 다름이 있지만[불일] 전체적으로 보면 다름이 없다[불이]. 개체는 전체의 부분이며, 전체는 개체의 종합된 모습이다.
이러한 사실을 사회현상에 적용할 경우, 사회 전체만 보는 것도 치우친 견해이며, 부분만 보는 것도 치우친 견해이다. 왜냐하면 개체는 전체의 부분이며, 전체는 개체의 종합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나 독재 국가에선 전체만 있지 개인은 존중 받지 못한다. 
그래서 나와 사회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나에 치우치면 개인주의가 되고, 사회에 치우치면 전체주의가 된다. 따라서 사회와 개체를 함께 봐야 한다. 개인을 무시한 사회는 살벌하고, 사회를 무시한 개인생활이란 방종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원융(圓融)한 관계가 바로 불일불이요, 중도이다.

그런데 불이(不異)를 지나치게 생각한 나머지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니까 이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지금 있는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불이는 깨달음의 경지요, 부처의 경지이다. 이 경지를 중생의 경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착각을 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거나 그런 착각의 근저에 정신적 나태함과 방종을 수행의 경지로 호도하는 자기기만(自己欺瞞)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일(不一)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중생과 부처가 다르며, 무명과 깨달음이 다르고, 성(聖)과 속(俗)이 다르다는 ‘불일(不一)’이란 말에 매몰돼서도 안 된다. 
지금 한국의 많은 불자들이 지나치게 퇴굴심을 가지고 진리의 세계는 진리의 세계대로 따로 있고, 현실세계는 현실세계라는 ― 불일정신을 오해하거나 착각해서 수행을 멀리하고 기복에만 매달리고 있다. 
‘번뇌 즉 보리’라는 불이(不二)의 가르침이 깨달음을 어떤 초월적인데서 찾지 말고, 구원을 밖에서 찾지 말라는 것인데도 불일(不一)에만 치우쳐 퇴굴심을 일으키니 불교가 개인수양이나 사회정화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명색이 출가자라 하면서도 세간적, 생물학적 욕망의 번뇌를 그대로 발산하면서 ‘번뇌 곧 보리’라는 불이(不異)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착각을 넘어 사기요 자기기만이다.-
작성자 아미산]

 

等是菩提(등시보리) 等虛空故(등허공고)

평등함=이 보리이니, 허공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며,

Equality is bodhi, equal to emptiness. 

[평등한 것이 보리다. 무흠무여(無欠無餘)해서 원동태허(圓同太虛 ),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음이 마치 저 태양과 같다. 허공은 원동태허하야 태허(허공)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이 없다 그래서 평등한 것이 보리다.]  

 

無爲是菩提(무위시보리) 無生住滅故(무생주멸고)

함이 없는=無爲가 보리이니, (낢)하고 머무르며,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The unconditioned is bodhi, in which there is no more arising, abiding, and dissolution. 

[생주이멸 구체적으로, 태어나고, 머물고, 옮겨가고, 소멸하는 것이 없으니까 무위이고, 그래서 무위가 보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위(無爲)=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절대한 경지]

 

知是菩提(지시보리) 了衆生心行故(요중생심행고)

아는 것(깨달음)=知가 보리이니, 중생의 마음 흐름=心行을 명확하게 알기 때문이며, 

To know is bodhi, to understand the minds of all sentient beings.

[깨달음이 보리이고 도가 깨달음이고 도가 보리이니까 중생들의 마음이 흘러가는 것, 마음 움직임, 마음씀씀이, 생각 등을  다 아는 것이다]

 

不會是菩提(불회시보리) 諸入不會故(제입불회고)

만나지 않음(모이지 않음)=不會가 보리이니, 마음과 그 행을 알게 하는 대상(6입, 6근, 6경)=諸入이 만나 결합함이 없기 때문이며, 

To not unite is bodhi because all entry is without convergence. 

[불여만법위려자시심마(不與萬法爲侶者是甚麽)인고! 만법으로 더불어 짝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냐고 했는데, 보리라고 하는 것이 만법과 짝하지 않는 자, 만법과 모일 수 없는 자, 만법과 벗 삼지 않고 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諸入은 육근 육입 등 모든 입이 모이지 않는다.]  

[‘불회(不會)’ 제입(諸入)이란 것은 내외(內外) 6(:66)이다. 내외(內外) 함께 공하므로 제입이 만나지 않는다. 제입이 만나지 않음은 보리이다.  보리의 ()이다”라 승조는 주역(註譯)하고 있다.]

 

不合是菩提(불합시보리) 離煩惱習故(번뇌뇌습고)

합하지 않음=不合이 보리이니, 번뇌의 습기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이며, 

Not conforming is bodhi because it is independent of the tendencies of afflictions. 

[‘번뇌’의 원어인 산스크리트어 ‘클레사(klésa)’는 고통스럽다, 더럽다는 동사의 명사형으로, 더러워진 마음, 괴로운 마음, 상처 주는 마음, 괴롭히는 생각이라는 뜻이다. 우리들을 괴롭히고 해쳐서 오류로 이끄는 불선(不善)의 마음을 번뇌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쓸데없는 생각, 허무맹랑한 생각, 잡념(雜念), 이런 게 번뇌다. 
밤에 잠이 안 오면, 눈 감고 누워 있어도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그게 모두 번뇌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 업(業)을 짓게 되며, 괴로움의 과보를 받아 미혹의 세계를 헤매게 된다. 
번뇌란 번요뇌란(煩擾惱亂)을 줄인 말로서, 우리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괴롭히는 등 미혹하게 하는 나쁜 정신작용이다.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을 나타내는 불교 심리용어이다. 
중생은 사물을 대할 때에 그것을 욕심내어 소유하려 하고, 본능적으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음을 애태우게 되며, 경쟁하고 싸우고, 심지어는 살생까지 하게 된다. 
또한 번뇌는 사물에 대해 참다운 진리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도록 지혜의 눈을 가려 버리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집착하게 한다.
그러나 번뇌의 정체를 확실히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크고 작은 것을 물을 것 없이, 큰 문제는 큰 번뇌를 일으키고 작은 문제는 작은 번뇌를 일으켜서 인생 전체를 번뇌 속으로 빠뜨린다. 따라서 삶이 곧 번뇌요, 번뇌가 곧 삶이라는 논리까지 전개된다. 
이러하므로 불교에서는 번뇌의 깊은 뿌리를 근원적으로 파악해서 해결한다는 것은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참다운 길이며, 그 지름길이 된다고 본다. 불교의 모든 법문은 이 번뇌를 다스리는 교훈이며, 번뇌가 다할 때 거기에는 해탈이 있다고 본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음의 본래 모습은 청정하지만 손님과 같은 번뇌로 인해 더럽혀진 상태를 객진(客塵)이라 한다. 손님 같은 번뇌로 인해 내 마음이 더럽혀진 것을 객진번뇌라 한다.‘108 번뇌(煩惱)’라 하기도 한다. 
‘백팔(108) 번뇌’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6근(六根)이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 6경(六境)이라는 여섯 가지 대상을 파악할 때에 호(好)ㆍ오(惡)ㆍ평(平=非好, 非惡)의 셋 감정이 발생해 18이 된다. 그 하나하나에 염(染)과 정(淨) 두 가지가 있어 합하면 36이 된다. 
여기에 또 각각 과거ㆍ현재ㆍ미래 셋이 있어, 합계 108 번뇌가 된다는 설이다. 번뇌의 종류가 많은 것을 보이기 위해 108이라는 수를 든 것이다. 한편 번뇌의 본체를 정사(正使 또는 使)라고 하고, 이런 번뇌의 본체가 소멸한 다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번뇌의 남은 기운을 습기(習氣)라 한다. 습기는 마치 향을 담았던 그릇이 향을 비었어도 향기가 남아 있는 것과 같이 배어있음에 비유한다.-작성자 아미산]

[습기(習氣)=번뇌로 인하여 몸에 배었던 습성의 나머지]

 

無處是菩提(무처시보리) 無形色故(무형색고)

자리함이 없는=無處가 보리이니, 형색(형상)이 없기 때문이며

Nowhere is bodhi, because there is no form or shape.   

假名是菩提(가명시보리) 名字空故(명지공고)

가명이 보리이니, 이름과 문자=名字가 공한 것이기 때문이며,

The false name is bodhi because artificial words are empty. 

[편의상 보리, 깨달음, 도라고 할 뿐 그것이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니까 편의상 보리라고 표현했을 뿐이니까 명자(이름)의 성품이 공한 것이다. 공한 까닭에 이름의 실체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如化是菩提(여화시보리) 無取捨故(무취사고)

허깨비(幻)과 같이 변화하는=化하는 것이 보리이니, 하고 버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The instant of change is bodhi because there is no grasping or letting go. 

[化는 변화 한 것, 환상으로 변화 한 것 등은 취사가 없는 불 가취=가히 취할 수도 없고, 불 가사= 가히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버리려고 하니까 있는 같고 또 있는 것 같아서 취할려고 하면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如化가 是菩提다]

 

無亂是菩提(무란시보리) 常自靜故(상자정고)

혼란이 없는=無亂이 보리이니, 항상 스스로 고요하기 때문이며,

Absence of disturbance is bodhi, which is always serene. 

[보리라고 하는 것은 움직이고 요동하는 것이 없는 常自靜故=항상 스스로 고요한 것이다]

 

善寂是菩提(선적시보리) 性淸淨故(성청정고)

미혹을 떠난 경계(고요한 선정)=善寂가 보리이니, 그 성품이 깨끗하기 때문이며,

Wholesome tranquillity is bodhi, because its nature is pure. 

[善寂은 억지로 힘들게 고요한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안정된 좋은 고요한 자리, 근본적으로 고요한 자리.

끊는 물에 찬 물을 섞어서 식히는 것이 아니라, 불을 꺼버리고 물을 식히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입니다. 근본적으로 고요한 자리 즉 성품이 청정한 까닭이다. 성품이 텅 비었기 때문에 그렇다]

 

無取是菩提(무취시보리) 離攀緣故(이반연고)

대상을 취하지 않음=無取가 보리이니, 마음이 대상에 의하여 움직임=攀緣함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며,

Non-grasping is bodhi, being free from clinging to the external. 

[無取 취함이 없는 것이 보리인 것은 離攀緣故, 모든 반연에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갖 반연에 얼기설기 엮여서 사는데, 보리= 본심자리= 깨달음의 그 자리는 반연을 다 떠나 있는 것이다. 표면의 물결과 깊은 물속과 같이 현상= 겉으로 마음을 쓰는 것은 전부 반연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지만, 우리의 속 마음자리의 보리는 출렁거리게 하는 모든 반연들을 떠났다] 

 

無異是菩提(무이시보리) 諸法等故(제법등고)

다르지 않음=無異가 보리이니, 모든 존재=는 동등하기 때문이며,

The absence of distinction is bodhi, all Dharmas being equal. 

無比是菩提(무비시보리) 無可喩故(무가유고)

비교할 수 없음=無比가 보리이니,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며,

No comparison is bodhi, since there is no analogy to compare to it.

[보리는 오직 하나 뿐인 자리이고, 평등한 자리이고 통일된 자리, 외롭게 뚝 떨어져 있는 하나가 아닌, 모두 한 덩어리된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부 보리(깨달음, 근본 마음자리) 속에 다 포함이 되니까 상대가 없고, 상대가 없으니까 비유가 안되는 것입니다. 비유로써 미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微妙是菩提(미묘시보리) 諸法難知故(제법난지고)

미묘함이 보리이니, 제법을 알 수 없기 때문이며,

The subtle is bodhi because the Dharmas are difficult to know.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보리를 떠나서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 보다 쉽다고 해도 맞는 말이 됩니다. 

깨달음이 완벽한 분, 그 깨달음이라고 하는 주제가 확실하면 어떤 말을 해도, 어떤 사물을 봐도,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전부 깨달음과 연관이 가능하고 또 연관시켜서 이해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일상생활 속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마거사의 보리에 대한 설명이 대충 25가지인데, 중요하고 어려운 낱말들을 선별해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말들로써  아주 똑 떨어지게 설명이 가능한 것은 그 분이 깨달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사의 게송처럼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라,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또 아침마다 함께 일어나서, 앉고, 서고, 가고, 오며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 바로 부처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이 완벽한 사람은 무엇을 해도 전부 깨달음 속에 있고, 깨달음의 작용이고, 깨달음의 표현일 뿐입니다.]

[여기서 이 이야기의 내용은 끝났다(나집․지겸의 번역도 같다). 그러나 현장과 티베트 역에는 다음 절의 한 구절이 더 있어서 깨달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첨가한다. “깨달음은 허공과 같은 성질이며, 모든 곳에 빈틈없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몸으로나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신체는 풀이나 나무, 석벽(石壁), 길, 그림자와 같은 것이며, 마음은 비물질적인 것, 들에 나지 않는 것, 의지하는 곳이 없는 것, 표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世尊(세존) 維摩詰說是法時(유마힐설시법시)

二百天子得無生法忍(이백천자득무생법인)

세존이시여, 유마힐이 이같이 설법하였을 때, 2백의 천상의 신들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습니다. 

World Honoured one, when Vimalakirti spoke this teaching, two hundred celestial beings attained patient acceptance in the truth of no rebirth. 

[‘무생(無生)’이란 모든 현상은 연기법에 따라 변화하는 여러 요소들이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과할 뿐 생기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무엇인가 고정된 실체가 존재해야 무엇인가가 생겨난다는 말이 성립되겠는데, 연기법이 적용되는 무아(無我)의 세계에 고정된 실체가 있을 수 없다면 생길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인연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과할 뿐이라니 어떠한 존재도 새로 생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생(無生)’은 깨달음의 다른 이름이다. 깨달으면 다른 헛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니 무생이다. 
따라서 무생이란 ‘무생의 이치’, ‘남[生]이 없는 진리’, ‘불변의 진리’ 등을 이르는 말이다. 즉,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달아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한 상황을 말한다. 
무생이란 ‘무(無)’에서 ‘유(有)’가 생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포함한다. 
연기적으로 생성된 모든 사물은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조건의 이합집산이요, 형상과 현상[相]의 변화에 불과하다. 
사물의 실체가 공한 것은 연기적으로 화합한 것이기 때문이고이렇게 일시적인 가합(假合)이므로 생겨나도 실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만 변화했을 뿐이다.

중생이 사물의 상(相)에 집착해서 실체성과 영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사물이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사견[生滅相]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무생에는 이치[理]로서의 무생과 행위[行]로서의 무생이 있다. 
이치로서의 무생은 무생법(無生法)을 이름이다. ‘무생(無生)의 법’은 불변의 진리를 이르는 말로서 결국 공(空)의 이치를 뜻한다.
‘무생행(無生行)’이란 일체법이 무아(無我)라는 근거를 통해 ‘분별’에서 벗어나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말한다. 무생행은 또한 시비 분별과 조작 관념이 없는 무념으로서, 무생의 실천으로서, 무공용(無功用-無爲)이기도 하다. 
따라서 무생의 행위는 그 성품과 특성이 모두 공적(空寂)해서 형상으로 볼 수 없고 언설로 전달할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취해 증득할 수가 있겠는가?-작성자 아미산]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This is why I do not dare to go ask him about his hillness.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