維摩詰所說經卷下(유마힐소설경 하권)

10. 향적불품(香積佛品)
香積佛品 第十

Chapter 10. The Buddha Fragrance Accumulation
[香積(향적)은 향기가 모여 쌓였다는 뜻으로, 진리를 깨닫는 법열을 음식에 비유한 것이다. 사리불이 점심시간이 되어 마음속으로 많은 보살들은 무엇을 먹어야 할까하고 고민하자 유마힐이 일찍이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음식을 드리겠노라며 신통력으로 ‘향적여래(香積如來)’가 계시는 ‘중향성(衆香城)’의 전경을 보여주며 향적여래가 베푼 ‘향반(香飯)’의 묘용을 설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사찰음식을 높여 부르는 비유적 표현으로 향적이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

 

[불교에서 향기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이 불교의 향기다부처님 앞에 예를 올릴 때 분향(焚香)을 하는 것도 실은 오분법신의 향기를 피워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정화하라는 뜻이다계의 향기요선정의 향기요지혜의 향기요해탈의 향기요해탈지견의 향기다이 다섯 가지 향기가 있는 사람은 어디에 살든 언제나 향기를 풍기어 사람들의 정신을 맑게 하며 주변 환경을 향기롭게 하며 세상을 향기롭게 한다경문에서 밥이 향기롭고 땅이 향기롭고 중향(衆香)이니 향적(香積)이니 하는 이름들도 모두 그와 같은 뜻이리라.-무비스님]

[직접적으로 어떤 사물에서, 또는 나무에서 꽃에서 아니면 흙에서 등등 좋은 향기가 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경전에서 향기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사물에서 향기나는 것을 넘어서서 뜻으로 향기를 말하는 것이다.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정신의 땅에 잘 스며들어서 향기화 하자는 것이다. 오분법신향의 향기를 풍기면 그것으로써 사람들을 교화하고 감동시키고 거기에 자연스럽게 큰 노력을 들이지 아니하고 중생제도가 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


於是舍利弗心念(어시사리불심념)

日時欲至(일시욕지) 此諸菩薩當於何食(차제보살당어하식)?
그 때 사리불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제 점심 식사 시간이 이르렀는데 이 많은 보살들이 무엇을 먹을 것인가?’

At the moment, Sariputra thought, It is approaching noon. What should all the bodhisattvas eat? 

時維摩詰知其意而語言(시유마힐지기의이어언)

그러자 유마힐이 그러한 생각을 알고 말하였다.
Then Vimalakirti, knowing this thoughts, said 

佛說八解脫(불설팔해탈) 仁者受行(인자수행) 豈雜欲食而聞法乎(기잡욕식이문법호)?

부처님께서는 8해탈에 대해 설하셨으니, 그대도 가르침을 받아서 수행할 터인데, 어찌 식사를 하고자 하는 잡된 생각을 섞어서 가르침=法을 듣습니까? 

The buddha as spoken of the eight liberations. Benevolent One, receive them as your practice. Why are you mixing listening to Dhuddha’s Dharma with thoughts about eating? 

[유마거사가 소승성문인 사리불에게 다시 또 보살의 대승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무튼 향적불품의 서두는 사리불이 밥을 생각하는 것이 인연이 되어 장황한 이야기가 전개 되며 사찰의 부엌을 향적단(香積壇)이라고 명명하여 사찰의 모든 음식은 중향국의 향적여래가 잡수시는 향기나는 음식으로 알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리불이 그렇게 소견이 없고 밥만 생각하는 사람이겠는가 마는 그러나 여기서는 대승의 이치를 드날리고 소승을 좀 억제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경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출발이 그렇다.]

 

[八 解脫= 일반적으로 慧解脫이나 俱解脫 이라고 할 때의 해탈은 그 원어가 vimucti로 “벗어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八 解脫의 解脫은 그 원어가 vimoksa로서 “sa”는 희구법이 적용되는 문법법칙의 작용으로서 “…하려고 희구함”의 뜻이 된다.  따라서  解脫 이란 解脫하려고 하는 여덟 가지 禪定이라는 내용이 된다.   

1). 내유색상 관외색 해탈 →색계의 경지

2). 내무색상 관외색 해탈→ 색계의 경지

3). 정해탈(subha; 맑고 밝은 것) →색계와 무색계의 경계

4). 공무변처 해탈→무색계의 경지

5). 식무변처 해탈 →무색계의 경지

6). 무소유처 해탈→무색계의 경지

7). 비상비비상처 해탈→ 무색계의 경지

8). 상수멸 해탈→무색계도 벗어난 경지 

八 解脫은 그目的이 해탈을 하기위한 선정이라는 내용이 된다. 다시 말하면 八 解脫이란 “8가지 해탈하려고 하는 선정의 경지” 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는 九次第定을 다른 각도에서 여덟 단계로 구성한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 선정이란 해탈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지 선정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이 될 수 도 있다. ]

  

若欲食者(약욕식자) 且待須臾(차대수유) 當令汝得未曾有食(당령여득미증유식)
만약 시장하여 잡숫고 싶으면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마땅히 그대에게 일찍이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음식을 드리겠습니다.

If you want to eat wait for a moment, and you will receive a meal that you have never tasted before. 
時維摩詰卽入三昧(시유마힐즉입삼매) 以神通力示諸大衆(이신통력시제대중)

그때 유마힐은 곧 삼매에 들어서 신통력으로 모인 대중에게 한 부처님의 나라를 보여 주었다. 

At that moment, Vimalakirti entered samadhi. With his divine power, he revealed to the audience a region high above with the Land of Many fragrances. 

上方界分過(상방계분과) 四十二恒河沙佛土(사십이항하사불토)

이 나라로부터 상방의 세계=界分으로 42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불국토를 지나서 

With a distance apart greater than the Buddha lands that are as countless as the sand grains of forty-two ganges. 

有國名衆香(유국명중향) 佛號香積(불호향적) 今現在其國香氣(금현재기국향기)

比於十方諸佛世界人(비처시방제불세계인) 天之香最爲第一(천지향최위제일)

한 나라가 있었으니, 이름이 중향(Sarvagandha sugandh)이며, 그곳에 향적(Sugandhaka)이라는 부처님께서 계시는데, 지금 현재 그 나라의 향기로움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 나라의 인간과 천상의 향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으뜸이었다.

The Buddha with the name Fragrance Accumulations is present there. And the fragrance of this land is the most fragrant among fragrances of the human and heavenly realm in the worlds of the Buddhas in the ten directions. 

彼土無有聲聞(피토무유성문) 辟支佛名(벽지불명) 唯有淸淨大菩薩衆(유유청정대보살중)

그 국토에는 성문이나 벽지불 등의 이름이 전혀 없었으며, 오직 청정한 대보살 대중들만 있으며,

In this land, there aren’t terms like sravakas or pratyekabuddhas, except an assembly of tranquil great bodhisattvas whom the Buddha preaches the Dharma. 

 

佛爲說法(불위설법) 其界一切(기계일체) 皆以香作樓閣(개이향작누각) 經行香地(경행향지)

苑園皆香(원원개향) 其食香氣(기식향기) 周流十方無量世界(주류시방무량세계)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시니, 이 국토의 경계의 일체는 모두 향으로 만들었으니, 향으로 누각을 지었고, 향기가 넘치는 땅 위를 경행하였고, 정원과 동산도 향기로 가득 차 있었고, 그곳의 음식의 향기는 시방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를 두루 감싸 흐르고 있었다. 

Everything in that realm forms from fragrances, including the pavilions, the fragrant earth for walking meditation, and the gardens, all emitting a fragrance. And the aroma of their foods spreads to countless worlds throughout the ten directions. 

 

時彼佛與諸菩薩方共坐食(시피불여제보살방공좌식) 有諸天子皆號香嚴(유제천자개호향엄)

悉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실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때마침 그 향적부처님께서 많은 보살들과 함께 앉아서 막 식사를 하려고 하였으니, 그 자리에는 여러 천자들이 있었는데, 모두 향엄(Gandavyhra)이라 이름하며, 그들은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으며, 

At that moment, Buddha and bodhisattvas from there were sitting down to eat together. Many male celestials there with the name Fragrant Dignified set their minds upon attaining unsurpassed perfect awakening and were making an offering to the Buddha and bodhisattvas. 

 

供養彼佛及諸菩薩(공양피불급제보살) 此諸大衆莫不目見(차제대중막불목견)
부처님과 보살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었으니, 여기에 있는 대중들이 눈앞에서 빠짐없이 환히 볼수 있었다.

Everyone in the assembly could see it. 
[유마거사가 삼매의 힘으로 보여준 나라는 중향국(衆香國), 온갖 향으로 충만한 나라이다오분법신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만 가득한 나라에는 소승성문이나 벽지불은 아예 없다대승보살대중들만 가득하다나라와 나라의 경계에는 오로지 향으로 지은 누각들이다땅도 향이요동산도 향이다부처님과 보살들에게 올린 공양도 향엄(香嚴)이라는 천자가 올린 음식이다사람도 향이라는 뜻이다그들이 먹는 음식은 물론 향기로 넘친다어떤 나라든지 나라의 주인은 사람이다나라의 주인인 사람이 오분법신향으로 그 인격이 되었다면 그 사람이 수용하는 모든 것은 저절로 향기가 넘치도록 되어있다.]

 

時維摩詰問衆菩薩言(시유마힐문중보살언) 諸仁者(제인자) 誰能致彼佛飯(수능치피불반)?

그 때 유마힐은 여러 보살들에게 물었다. 여러 보살들이여, 누가 저 향적부처님 나라에 가서 음식을 얻어 올 수 있겠습니까?
Then Vimalakirti asked the bodhisattvas Benevolent Ones, who here can go to that Buddha to bring back some food? 

 

以文殊師利威神力故(이문수사리위신력고) 咸皆默然(함개묵연)

문수사리의 위신력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묵묵히 침묵하고 있으므로, 유마힐이 물었다.
Since there were under the influence of Manjusri’s mighty divine powers, they all remained silent. Vimalakirti said, 

 

維摩詰言(유마힐언) 仁此大衆(인차대중) 無乃可恥(무내가취)?

문수사리여, 그대는 이 많은 대중들이 (모두가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지 않습니까?

Virtuous One, for such a large assembly, isn’t it disgraceful? 


文殊師利曰(문수사리왈) 如佛所言(여불소언) 勿輕未學(물경미학)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未學들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Manjusri said, Buddha has said don’t despise the unlearned. 

[유마힐은 누군가가 신통력을 발휘해서 중향국에 가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향적불의 음식을 가져오기를 희망하였다그러나 다른 보살들은 문수사리보살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았는데 그 점을 아직은 수행이 부족하다고해서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고 하여 위안하였다따라서 문수사리도 신통으로 음식을 가져오지 못한다고 해서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하였다.]


於是維摩詰不起于座(어시유마힐불기우좌) 居衆會前(거중회전) 化作菩薩(화작보살)

그때 유마힐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모든 대중들 앞에 순식간에 보살의 모습을 변화하여 나타내었다. 

At that point, Vimalakirti, still sitting in his seat, manifested a bodhisattva in front of the audience, 

 

相好光明(상호광명) 威德殊勝(위덕수승) 蔽於衆會(폐어중회) 而告之曰(이고지왈)

상호는 빛나고 위덕이 수승하여 견줄 수 없이 뛰어나, 모인 대중을 압도하였다. 그리고는 (유마힐은) 이 보살에게 말하였다.
whose auspicious marks and characteristics were radiant in majesty, who is rare, and extraordinary in virtue, overshadowing the entire congregation. 

 

汝往上方界分(여왕상방계분) 度如四十二恒河沙佛土(도여사십이항하사불토)

그대는 상방의 세계로 42항하사의 부처님 나라를 지나, 

And he said to him, Go to the region high above and pass through innumerable Buddha lands as the sand grains of forty-two Ganges, 

有國名衆香(유국명중향) 佛號香積(불호향적) 與諸菩薩方共坐食(여제보살방공좌식)

汝往到彼(여왕도피) 如我辭曰(여아사왈)

중향이라고 하는 부처님 나라가 있으니, 부처님의 호는 향적이시며, 많은 보살들과 함께 앉아 지금 식사를 하고 계시니, 그대는 그곳에 가서 나의 문안을 그대로 전하시오.

where there is the Land of Many Fragrances. There the Buddha, named Fragrance Accumulation, sits down with all the bodhisattvas to eat together. When you go there, speak according to my instruction, 


維摩詰稽首世尊足下(유마힐계수세존족하) 致敬無量(치경무량)

유마힐이 세존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한없는 존경심으로 예배드리며,

Vimalakirti bows to the feet of His Holiness with innumerable reverence and inquires in respect- 

問訊起居(문신기거) 少病少惱(소병소뇌) 氣力安不(기력안부)? 訊 물을 신 

요즘 근황이 어떠하신지 묻사오니, 작은 병과 근심이라도 계신지, 기력도 여전히 편안하신지 문안드립니다. 

that your illness and distress are few and that you may be full of vigor. 

願得世尊所食之餘(원득세존소식지여) 當於娑婆世界施作佛事(당여사바세계시작불사)

'바라옵건대 세존께서 잡수시고 남은 음식을 얻어서 사바세계(sahloka)에 불사를 베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He would like to receive the leftovers of this fragrant meal from the World Honoured One and bring it back to the saha world 

[娑婆世界(사바세계)= sah를 음사(音寫)한 것으로 뜻으로 옮겨 ‘인토(忍土),’ ‘인계(忍界),’ ‘감인토(堪忍土)’라고 한다. 모든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할 세계라는 뜻이다.]

 

令此樂小法者得弘大道(영차락소법자득홍대도) 亦使如來名聲普聞(역사여래명성보문)

이 세계의 작은 법=小法을 좋아하는 이곳의 중생들에게 대도를 널리 펴고, 여래의 명성이 널리 퍼지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십시요.

so that those absorbed in the lesser Dharma may promote the great path and spread the renown of the Tathagata far and wide. 


時化菩薩卽於會前(시화보살증어회전) 昇于上方(승우상방) 擧衆皆見其去(거중개견기거)

그러자 그 가짜로 만든 보살=化菩薩(nirmita bodhisattva)이 모여 있는 대중들 눈앞에서 곧장 위로 올라가니, 대중들이 모두 이것을 보았다. 

The the conjured bodhisattva ascended into the region high above in front of the congregation. 

 

到衆香界(도중향계) 禮彼佛足(예피불족) 又聞其言(우문기언)

그 보살은 중향국에 이르러 향적부처님 발에 예배하고는 유마힐의 인사말을 전했다.
All the people in the assembly saw the illusory bodhisattva arrive at the Land of Many Fragrances and bow to the feet of the Buddha there. 

[42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국토를 오고가고 하는데 조금도 시간이 걸리거나 노력이 들지 않았다. 전부 마음의 세계, 마음이 하는 것이니까, 마음이 가는데 힘이나 시간도 걸리지 않고, 그냥 순식간에 갔다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는 현상세계에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상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현상세계에서의 이치를 바탕으로 이해하려는 습관의 관문을 통과해야 된다. 불교 공부는 깨달았다고 가정하고 공부해야 된다.]

 

維摩詰稽首世尊足下(유마힐계수세존족하) 致敬無量(치경무량)

'유마힐은 세존의 발에 머리를 조아리며 한없는 존경심으로 예배합니다. 

They also heard him say, Vimalakirti bows to the feet of His Holiness with innumerable reverence  

問訊起居(문신기거) 少病少惱(소병소뇌) 氣力安不(기력안부)?

요즘 근황을 묻사오니, 작은 병이나 근심이라도 계신지, 기력은 여전하신지 문안드립니다. 

and inquires in respect-that your illness and distress are few and that you may be full of vigor. 

願得世尊所食之餘(원득세존소식지여) 欲於娑婆世界施作佛事(욕어사바세계시작불사)

바라옵건대 세존께서 잡수시다가 남은 음식을 얻어다가 사바세계에 불사를 베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He would like to receive the leftovers of this fragrant meal from the World Honoured One and bring it back to the saha world 

使此樂小法者得弘大道(사차락소법자득홍대도) 亦使如來名聲普聞(역사여래명성보문)

작은 법을 좋아하는 이곳의 중생들에게 대도를 널리 펴고 또 여래의 명성이 널리 퍼지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so that those absorbed in the lesser Dharma may promote the great path and spread the renown of the Tathagata far and wide.

28.월상보살
月上菩薩曰(월상보살왈) 闇與明爲二(암여명위이無闇無明則無有二(무암무명즉무유이

월상(Cantrottara)보살이 말하였다. 어두움= 밝음= 서로 대립한 둘이라고 하나,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으면 곧 둘도 없으니,

The bodhisattva Upon the Moon said, Darkness and light are a duality. There would not be a duality if there were no light and dark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如入滅受想定(여입멸수상정無闇無明(무암무명)

왜냐 하면, 느낌과 생각 작용이 소멸한 적정 삼매의 선정 들면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는 것과 같이 

Why? When one enters the cessation of ideation and sensation, there is no darkness or light. 

一切法相亦復如是(일체법상역부여시於其中平等入者(어기중평등입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일체법의 모습도 그와 같기 때문이니,  가운데에서 평등하게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The same is true of all Dharmas, and those who enter the equal perceiving of things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어둡고 밝음을 아는 것은 사람에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만약 느끼고 생각함이 소멸한 선정에 들어가면 어두움도 없고 밝음도 없다일체의 법도 또한 그와 같다.]

[“밝음과 어둠을 둘이라고 하며, 밝음도 없고 어둠도 없는 것을 불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멸진정에 들어가게 되면 정작 밝음도 어둠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그 평등성을 깨닫는 그것이 바로 불이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순야 착지]

29.보인수보살
寶印手菩薩曰(보인수보살왈) 樂涅槃不樂世間爲二(낙열반부락세간위이)

보인수(Ratnamudrhasta)보살이 말하였다. 열반을 즐기는=樂涅槃 세간 좋아하지 않는=不樂世間 둘이라고 하지만,

The bodhisattva Ratnamudrahasta said, To delight upon nirvana and be unhappy with the world is a duality. 

若不樂涅槃(약불락열반) 不厭世閒則無有二(불염세간즉무유이)

만약 열반을 즐기지도 않고 세간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라면 둘의 대립은 없으니,

If one does not delight in nirvana and does not detest the world, there would be no duality. 

所以者何(소이자하) 若有縛則有解(약유박즉유해)

왜냐 하면, 번뇌의 속박이 있으면 벗어나는=해탈이 있지

Why? Where there is bondage, then there is the need for liberation. 

若本無縛(약본무박) 其誰求解(기수구해)? 無縛無解(무박무해) 則無樂厭(즉무락염)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본래부터 속박된 것이 없다면  누가 해탈을 구하겠습니까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면  좋아하고 싫어함도 없을 것이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But when one is originally not in bondage, where is the need to seek liberation? With no bondage or liberation, there’s no yearning nor aversion, which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열반을 좋아하고 세간을 싫어하는 것은 분명히 둘이다. 만약 열반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세간을 싫어하지 아니하면 열반도 세간도 없다. 즉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고, 속박도 해탈도 없다.]

[“열반을 좋아하고 윤회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둘이라고 하며, 반대로 열반도 좋아하지 않고 윤회 또한 싫어하지 않는 것을 불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속박이 있는 경우라면 해탈을 간절히 구하겠지만 속박이 전혀 없는 경우라면 누가 굳이 해탈하고자 마음을 내겠습니까?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는 비구에게는 정작 기뻐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습니다.]

30.주정왕보살
珠頂王菩薩曰(주정왕보살왈) 正道邪道爲二(정도사도위이)

주정왕(Maikarja)보살이 말하였다. 바른 길=正道와 삿된 길=非道를 서로 대립한 둘이라고 하나, 

The bodhisattva Pearl Crown King said, The orthodox path and heterodox path form a duality. 

住正道者(주정도자) 則不分別是邪是正(즉불분별시사사시정)

離此二者(이차이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그러나 바른 길에 머무는 사람은이것은 정도이 저것 사도라고 분별하지 않으니,   가지 차별을 떠나는 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The ones dwelling upon the right path do not distinguish between what is heterodox and what is orthodox. When one leaves such dualism, i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삿된 법과 바른 법은 분명히 둘이지만 만약 바른 법에 머문 사람이라면 삿되고 바르다는 것이 없다. 그것을 나누는 사람은 아직 바른 법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31.낙실보살
樂實菩薩曰(낙실보살왈) 實不實爲二(실부실위이)

낙실(Satyarata)보살이 말하였다. 진실=, 거짓=不實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The bodhisattva Delights in the Real said, Real and unreal are a duality. 

實見者尚不見實(실견자상불견실) 何況非實(하황비실)?

그러나 진실을 보는 사람은 오히려 진실이라는 그 자체도 보지 않는데, 하물며 거짓을 보겠습니까

Anyone who truly perceives does not perceive what’s real. So how more for what’s unreal?

所以者何(소이자하) 非肉眼所見(비육안소견) 慧眼乃能見(혜안내능견)

왜냐 하면 (진실은) 육안으로 보는 바가 아니고, 지혜의 눈=慧眼으로만 능히 있는 것으로

Why? What is invisible to the naked eye is visible to the eyes of wisdom, 

而此慧眼(이차혜안) 無見無不見(무견무불견)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혜안은 봄도 없고 보지 않음도 없기 때문입니다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which see and do not see. Tha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진실과 허위를 둘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진실에 도달한 자라도 정작 진실의 본질을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허위를 어찌 알겠습니까? 왜냐하면 진실의 본질을 보는 자는 단순히 몸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눈으로 보는 그것이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볼 대상이 없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보는 이도 볼 대상도 없는 그것이 바로 불이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32.문수보살
如是諸菩薩各各說已(여시제보살각각설이) 問文殊師利(문문수사리)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하등시보살입불이법문)?

이와 같이 여러 보살들이 제각기 설하기를 마치고 나자,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무엇 보살의 불이법문(advaya dharmamukha)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까?

So, after each bodhisattva had spoken, they asked Manjusri, What is it for the bodhisattva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文殊師利曰(문수사리왈) 如我意者(여아의자) 於一切法無言無說(어일체법무언무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생각으로 일체법에 대해서 말함 없는=無言이며, 설함도 없는=無說이며

Manjusri said, According to my understanding, all Dharmas are without words, without explanation, 

無示無識(무시무식) 離諸問答(이제문답)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일법문)

보임 없는=無示이며, 인식함 없는=無識이니모든 질문과 대답=問答을 떠난 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감입니다.

have no representations or consciousness, and transcend all question and answer. Tha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문수사리보살은 일체법이 말을 할 것도 없으며 보일 것도 없으며 알 것도 없어서 모든 문답과 언설을 떠난 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 것은 지금까지의 31 보살들의 언설을 모두 부정한 것이다.]

[문수 보살은 '그대들의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만, 거기에는 아직도 둘이라는 찌꺼기가 남아 있으니, 어떠한 것도 논하지 않고 말로써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하며 나타내 보이는 것도 아니며, 설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불이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於是文殊師利問維摩詰(어시문수사리문유마힐)

이때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물었다.
Then Manjusri asked Vimalakirti, Each one of us had spoken. 

我等各自說已(아등각자설이) 仁者當說(인자당설)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하등시보살입불이법문)?
저희들 각자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였으니, 인자께서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어떤 것을 보살의 입불이법문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Benevolent One, please tell us what it is for a bodhisattva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時維摩詰默然無言(시유마힐묵연무언)
그 때 유마힐은 오직 아무런 말 없이=黙然히 침묵할 뿐이었다.

At this time, Vimalakirti was silent, with nothing to say. 

[時維摩詰默然無言(시유마힐묵연무언)= 이것을 ‘유마의 일묵(一黙),’ ‘묵불이(黙不二)’라고 하며, 이것을 찬탄해서 선가에서는 흔히 “유마의 일묵(一黙)이 만뢰(萬雷)와 같다”고 한다.]

 

文殊師利歎曰(문수사리탄왈) 善哉善哉(선재선재)

乃至無有文字(내지무유문자) 語言是眞入不二法門(어언시진입불이법문)
문수사리는 찬탄하여 말하였다.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문자와 언어의 설명=語言도 전혀 없는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불이의 경지에 깨달아 들어가는 법문인 것입니다.

Manjusri exclaimed, Wonderful, wonderful! Without even words or language, that is the true entry into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說是入不二法門品時(설시입불이법문품시) 於此衆中(어차중중)

五千菩薩皆入不二法門(오천보살개입불이법문) 得無生法忍(득무생법인)
이와 같이 입불이법문품을 설하였을 때, 이곳에 모인 대중들 가운데 5천의 보살들 모두가 무생법인을 얻었습니다.
Upon explaining the discourse of entering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five thousand bodhisattvas among the multitude entered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and attained fortitude in the non-arising of Dharmas.

[유마거사가 묵묵히 말이 없는것을 유마거사가 비야리성에서 입을 막고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도리를 보였다는 뜻 비야리성의 두구(杜口)라고 한다. 문수보살도 훌륭하십니다훌륭하십니다.”라고 찬탄하였다여기까지가 그 유명한 불이법문품으로, 유마경의 절정이라고들 한다.

삼장법사가 수년에 걸쳐 천신만고 끝에 부처님의 경전을 인도에서 모시고 왔는데 장안에 다 도착하여 어느 강가에서 잠깐 쉬고 있을 때 바람이 불어서 경전이 날아가서, 여기저기 흩어진 경전을 주워 모아 펼쳐보니 경전 속에는 글자가 한자도 없었다. 경전의 어떤 말씀이 그 고생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진리는 말과 문자가 없다는 도리를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 아닐까!]

21.심혜보살
深慧菩薩曰(심혜보살왈) 是空是無相(시공시무상) 是無作爲二(시무작위이)

심혜(Gambhīramati)보살이 말하였다. 공함이 차별의 모습을 떠난=無相이니, 구하는 바가없는=無作(aparaihita)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지만, 

The bodhisattva Deep Wisdom said, Whether it is emptiness, formlessness, aimlessness-constitute a duality. 

空卽無相(공즉무상) 無相卽無作(무상즉무작

그러나 공은 곧 무상이며, 무상이 곧 무작이니,  

Emptiness is formlessness, and formlessness is aimlessness. 

若空無相無作(약공무상무작) 則無心意識(즉무심의식

만약 공하고 모양도 없고 작위도 없다면, 곧 마음=心意識이 없다는 것이며  

If empty, formless, and aimless, then there is no mind, intent, or consciousness. 

於一解脫門卽是三解脫門者(어일해탈문즉시삼해탈문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이 중 하나인) 한 해탈의 문=一解脫門에서   가지 해탈의 문=三解脫門 (체득하는 )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Who is in one liberating gate is within all three gates of liberation, and this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若空無相無作(약공무상무작則無心意識(즉무심의식)()()() 나집은 이하의 가지 것에 관계시켜 이것들이 없는 것에는 식의 가지 작용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지겸, 현장, 티베트 역에서는 모두 가지 것을 바라는 생각이 없는 [無作․無願]”이라고 했다.]

[공과 무상과 무작이 다른 것[]이지만 공이 곧 무상이며 무상이 곧 무작이라서 결국 다른 셋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하나하나가 각각 한 가지 해탈문이지만 셋이 하나이므로 삼해탈문이 곧 일해탈문이다.]
[대승의 3해탈문(三解脫門)을 말하고 있으며, 3해탈문은 바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입니다. ‘무작’을 어떤 경전에서는 ‘무원(無願)’이라고도 번역합니다. ‘무원’= ‘무작’은 하면서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空) 반야심경에서는 ‘제법공상(諸法空相)’을, 금강경에서는 ‘온갖 유위법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와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 같나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라고 합니다. 
이 공(空)은 절대 궁극의 필경공(畢竟空)을 말합니다. 
공(空)은 철저한 무상(無相)이고 당연히 무작(無作)ㆍ무원(無願)입니다. 내가 공의 경계나 광명 경계를 하나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짓는 행위[作]가 있는 것입니다. 짓는 행위가 있음은, 닦음이 있고 증득함이 있습니다. 무작은 닦음도 없고 증득도 없습니다. 공ㆍ무상ㆍ무작에 도달한다면, ‘심의식(心意識)’은 자연히 공해지고 해탈하게 됩니다. 해탈이란? 지혜에 의한 해탈, 대지혜의 성취입니다.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과 ‘심(心)ㆍ의(意)ㆍ식(識)’ 에서 ‘무작’은 ‘심’과 ‘무상’은 ‘의’와 ‘공’은 ‘식’과 짝이 됩니다. 그러므로 심혜보살은 ‘어느 하나의 해탈문으로 깊이 들어가도 곧 3해탈문이니, 이것이 절대적인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홍남서원] 

 

22.적근보살
寂根菩薩曰(적근보살왈) 佛法衆爲二(불법중위이)

적근(ntendriya)보살이 말하였다.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가르침을 행하는 승단=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The bodhisattva Serene Root said, Buddha, Dharma, and the Sangha are a duality. 

佛卽是法(불즉시법) 法卽是衆(법즉시중)

부처님은  법(가르침)이며, 법(가르침)은  그것을 실천하는 승단이니,

Buddha is the Dharma, and the Dharma is the Sangha. 

是三寶皆無爲相(시삼보개무위상) 與虛空等(여허공등)

 3 모두가 모양이 없는=無爲으로서 허공과 같으며, 

The three treasures are the marks of the unconditioned, the same as emptiness, 

一切法亦爾(일체법역이) 能隨此行者(능수차행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일체법 또한 이와 같아서 이것을 알고  행하는 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and all Dharmas are also thus. Who cultivates according to this enters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佛卽是法(불즉시법)=  부분을현장은 “() 본성(本性:法性) 그대로 법의 본성,” 티베트 역에서는 “불의 본성은 가르침이다,” “가르침의 본성은 승단(僧團)이다 했다.]

[부처님과 법과 대중[]이 둘이라는 말은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삼보가 둘이면서 둘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무위이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다무위라는 것은 허공과 같다따라서 일체법도 또한 그렇다일체법이 무위법이며 불법이다.]

 

23.심무애보살

心無碍菩薩曰(심무애보살왈) 身 身滅爲二(신신멸위이)

심무애(Apratihatanetra)보살이 말하였다. 몸=身과 몸의 멸=滅身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지만, 

The bodhisattva Unimpeded Mind said, The body and body cessations are a duality. 

身卽是身滅(신즉시신멸) 所以者何(소이자하) 見身實相者(견신실상자)

不起見身及見滅身(불기견신급견멸신) 

몸이 그대로 몸의 멸함이니, 왜냐 하면, 몸의 진실한 본성=實相을 보는 사람은 몸도 몸의 멸함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The body is the extinguishment of the body. Why? Those who perceive the body’s true form do not give rise to perceiving the body or of the body’s extinguishment. 

身與滅身無二無分別(신여멸신무이무분별) 於其中不驚(어기중불경)

不懼者(불구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몸과 몸의 멸함은 상대적인 차별이나 분별도 없으니, 이것을 알고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There’s no duality nor distinction between the body and the extinguishment of the body. Those from among this without fright nor fear enters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몸은 번뇌를 뜻하고 몸의 소멸은 열반을 뜻한다. 번뇌를 소멸한 자리가 열반이며 열반은 번뇌의 반대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 두 가지가 아니며 나누어 질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변화에도 놀랄 것이 아니며 두려울 것도 아니다.]


24. 상선보살

上善菩薩曰(상선보살왈) 身口意善爲二(신구의선위이) 是三業皆無作相(시삼업개무작상) 

상선(Suvinīta)보살이 말하였다. 몸=身과 입=口과 뜻=意의 삼업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나, 이 삼업 모두에는 지음이 없는=無作相이니, 

Bodhisattva Supreme Goodness said, Good body, speech, and mind form a duality. The three types of karma are all marks of non-action. 

身無作相(신무작상) 卽口無作相(즉구무작상) 口無作相(구무작상) 卽意無作相(즉의무작상)

몸의 지음이 없는 상이 곧 입의 지음이 없는 상이며, 입의 지음이 없는 상 그대로가 곧 뜻의 지음이 없는 것이니,  

Body’s marks of non-action is the same as the mark of non-action of speech. Mark of non-action of speech is the same as mark of non-action of the mind. 

是三業無作相(시삼업무작상) 卽一切法無作相(즉일체법무작상)

이들 삼업의 지음 없음이 곧 일체법의 지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能如是隨無作慧者(능여시수무작혜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능히 이와 같이 지음이 없음=無作의 지혜에 따르는 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Those who can follow the wisdom of non-action like this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작위(作爲)하는 것은 몸과 말과 생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셋 하나하나가 지어도 지음이 없는 무작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모두 지음이 없는 모습이다. 지음이 없는 모습은 곧 지음이 없는 지혜다.] 

[몸과 말과 생각<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 이 셋은 모두 억지로 작위 함이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애써 짓지 않으면 곧 말도 애써 짓지 않고 동시에 생각도 애써 짓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것에 애써 작위 함이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며 이와 같이 아는 그것이 바로 불이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25. 복전보살
福田菩薩曰(복전보살왈) 福行罪行不動行爲二(복행죄행부동해위이)

복전(Puyaketra)보살이 말하였다. “(욕계의 선행인) 복행과 (10악도의 악행인) 죄행과 (색계, 무색계의 선행인) 부동행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나

The bodhisattva Blessed Field said, Meritorious deeds, sinful deeds, immovable deeds are a duality. 

三行實性卽是空(삼행실성즉시공) 空則無福行(공즉무복행)

이들 세 가지 행의 실다운 본성=實性이 곧 공한 것이며, 공하므로 곧 복의 행도 없으며,

The true nature of the three kinds of deeds is empty. Since they are all empty, 

無罪行無不動行(무죄행무부동행) 於此三行而不起者(어차삼행이불기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죄의 행도 없으며, 무동행도 없으며, 이 세 가지 행을 일으키지 않는 이를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there are no meritorious deeds, sinful deeds, or immovable deeds. Those not raising distinctions between the three deeds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부동행(不動行, nijybhisaskra)= 나집의 설명에 의하면, 복덕은 욕계의 선행으로 업의 과보를 가져오고, 악행은 10불선도(不善道)를 행하는 것으로 고의 과보를 가져오며, 무동행(無動行), 즉 부동행(不動行)은 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행위라고 주석했다.(卍續藏 27, p.506下)]

[복이 되는 행동죄가 되는 행동 등의 문제는 일반적인 불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들이다또 죄도 복도 아닌 움직임이 없는 행동도 있으나, 이 세 가지 행동은 모두가 실다운 자성이 없다는 이치를 아는 것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덕과 비공덕과 그 어떤 것도 아닌 부동(不動)이라는 이 세 가지 행위를 둘이라고 하며 반대로 공덕과 비공덕과 부동이 모두 무작위인 것을 불이라고 합니다.
공덕과 비공덕과 부동을 행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공이며, 거기에는 공덕도 없고 비공덕도 없으며, 또 부동인 것도 없고 작위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결국 이 셋 모두를 행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불이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순야 착지]

['유정(有情)은 제대로 동(動)하거니와 무정물(無情物)은 도무지 동(動)하지 못하니
어떤 사람은 부동행(不動行)을 수행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무정물의 부동(不動)과 같으리.
만약 참된 부동 찾으려 하면 움직임 그 위에 부동이 있음을 알라.
움직이지 않음이 부동이라면 무정에는 원래로 불(佛) 종자 없느니라.
능히 모든 상을 잘 분별하되 제1의(義)엔 동함이 없으니
다만 이 같은 견해 가지면, 이는 바로 진여(眞如)를 씀이로다.'
유정은 사람이나 동물처럼 움직이는 것을 말하고 무정은 돌이나 나무처럼 못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있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다면 그건 돌맹이와 같은 것이니 그런데 현혹이 돼서는 안 된다. 정말 부동이란 게 뭔지를 알고자 하거든 늘 움직이는 그 속에 부동이 있음을 알아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는 속에도 경계에 집착하지 아니하는 것을 부동이라 한다,
몸뚱이를 움직이지 않고 생각을 안 하는 것으로 참부동을 구한다면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분별하지 말라니까 콩인지 팥인지도 구분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모든 상을 잘 분별하되 옳으니 그르니 하는 상을 짓지 않으면 제1의 근본 자리에서는 동함이 없다.-법륜스님의 육조단경]

 

26.화엄보살
華嚴菩薩曰(화엄보살왈) 從我起二爲二(종아기이위이)

화엄(Padmavyha)보살이 말하였다. 我=나로인해 일어나는 구별(법)을 서로 대립한 두 가지라 하지만, 

The bodhisattva flower Adornment said, Dualism arises from the self, which is a duality. 

見我實相者(견아실상자) 不起二法(불기이법)

나의 진실한 실상을 (공이라고) 보는 사람은 (남과 나라는) 두 가지 분별=二法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Those who see the true form of the self do not arise dualistic Dharmas.

若不住二法(약불주이법) 則無有識(즉무유식) 無所識者(무소식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이 두 가지 법에 집착=住하지 않으면 (나와 남이라는) 식별함=有識이 없고, 식별되는=所識도 없으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One has no consciousness when there’s no abiding upon dualistic Dharmas. Those without consciousness of anything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세상사는 모두가 나로부터 남이 있게 된다그래서 두 가지가 되지만 나라는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꿰뚫어 보아 텅 비어 공한 줄 안다면 나와 남이라는 두 가지 법을 일으키지 않는다.]

[“자아가 일어나면서부터 둘 사이의 대립이 나타나지만, 자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이에게는 둘 사이의 대립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둘 사이의 대립을 벗어나게 되면 정작 알려는 주체도 없고 그 대상도 없다는 뜻입니다.”- 순야 착지]

 

27.덕장보살
德藏菩薩曰(덕장보살왈) 有所得相爲二(유소득상위이)

덕장(rīgarbha)보살이 말하였다. 얻을 바가 있는 모습을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니,

The bodhisattva Virtue Treasury said, The appearance of having something to attain is dualistic. 

若無所得(약무소득) 則無取捨(즉무취사無取捨者(무취사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제법이 공하다고 깨달아) 얻을 것(집착할 대상) 없다면, 취하고 버릴 것이 없으며, 취하고 버릴 것이 없는 이를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When there is nothing to gain, there is no seizing or forsaking. The ones who neither grasp nor forsake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얻을 것이 있으면 얻는 자가 있고, 따라서 취할 것도 있게 되고, 버릴 것도 있게 되어서 상대적인 차별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얻을 것이 없는 불교의 근본 이치를 알면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식행위에 의하여 둘 사이의 대립이 나타나지만 인식이 없는 곳에는 둘 사이의 대립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식의 결과를 바탕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불이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13.선의보살
善意菩薩曰(선의보살왈) 生死涅槃爲二(생사열반위이)
선의(Dntamati)보살이 말하였다. 생사(svabhava)와 열반(nirva)을 대립하는 둘이라 하지만,
The bodhisattva Good Intent said, Birth-death and nirvana make a duality. 
若見生死性(약견생사성) 則無生死(즉무생사) 無縛無解(무결무해)
不生不滅(불생불멸) 如是解者(여시해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생사의 성품을 본다면 곧 생사는 없는 것이며, 속박도 없고, 벗어날 해탈도 없으며, 생기지도 않는=불생이며 소멸하지도 않는=불멸이니, 이를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If one sees the nature of birth and death, then there will be no birth nor death, no bondage nor liberation, neither arising nor perishing. For one with such insight, tha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생사와 열반은 불교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참구하는 주제이다. 생사의 본성을 사무쳐 보면 생사가 없는 것이며, 생사가 없으면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 그래서 법성게에도 “생사와 열반이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14. 현견보살

現見菩薩曰(현건보살왈) 盡不盡爲二(진불진위이)

현견(Pratyakadarana)보살이 말하였다. 다함=盡(kaya)과 다함이 없는=不盡(akaya)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The bodhisattva Manifest Vision said, The exhaustible and inexhaustible are a duality. 

法若究竟(법약구경) 盡若不盡(징약불진) 皆是無盡相(개시무진상)

無盡相卽是空(무진상즉시공) 空則無有盡不盡相(공즉무유진불진상)

如是入者(여시입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법이 만약 구경에 다함이거나, 다하지 않거나 간에, 양자 모두는 다함이 없는 무진상입니다. 무진상이 곧 공한 것이며, 공함은 다함이나 다하지 않는 모양이 없으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Whether the Dharma is in the end exhaustible or is inexhaustible, it is all without the marks of exhaustion. And any marks of the inexhaustible are all empty. So, in this way, emptiness has neither the marks of the exhaustible nor the inexhaustible. Thus one who conforms with this enters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다한다=盡이라는 말은 없어진다는 뜻으로서 “법이 만약 다하거나 다하지 아니함은 모두가 다함이 없는 모습이다.”라는 본문의 내용은 일체의 존재인 법은 근본적으로 다함이 없이 지금의 현상 그대로 여여한다는 뜻이다.]

[盡不盡爲二(진불진위이)= 이 부분은 현장 역, 티베트 역이 모두 일치하지 않고 뜻을 파악하기 힘들다. '주유마힐경(注維摩詰經)'에 따르면 “무상은 공을 깨닫는 처음의 관문이니, 존재를 깨뜨려도 다 없어지지 않음을 부진(不盡)이라고 이름한다. 내지는 한 생각이라도 않으면 생할 것이 없으니, 생할 것이 없다면, 생이 다한다. 생이 다하면 곧 끝내는 공적[畢竟空]하니, 이를 진(盡)이라 이름한다”고 나집은 풀이하였다.(卍續藏 27, p. 504上)]

 

15. 보수보살
普守菩薩曰(보수보살왈) 我無我爲二(아무아위이)

보수(Pariguha)보살이 말하였다. 아와 무아를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나,  

The bodhisattva Universal Guardian said, The self and non-self form a duality. 

我尚不可得(아상불가득) 非我何可得(비아하가득)?

見我實性者(견아실성자) 不復起二(불부기이)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그러나 아를 (찾아보아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비아를 어떻게 (찾아내)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의 실다운 성품=實性을 보는 사람은 다시는 이 두 가지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Since the self is beyond grasping, how is it attainable to grasp what’s non-self? Those who see the reality of the self will no longer arise such duality and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아와 무아가 둘이 아니라는 말은 본문에 “아도 오히려 얻지 못하는데 아가 아닌 것을 어찌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과 같이 아든 무아든 이 들은 둘이 아니다.]

 

16.전천보살
電天菩薩曰(전천보살왈) 明無明爲二(명무명위이)

전천(Vidyuddeva)보살이 말하였다. 명(vidy)과 무명(avidy)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나,  

The bodhisattva Lightning Celestial said, Understanding and ignorance are a duality. 

無明實性卽是明(무명실성즉시명) 明亦不可取(명역불가취) 離一切數(이일체수)

於其中平等無二者(어기중평등무이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그러나 무명의 실다운 성품이 곧 명이나, 이 명 또한 취할 수 없는 것이니, 일체의 헤아림=數를 떠나 버리면, 그 가운데에서 평등하여 상대적인 차별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The true nature of ignorance is understanding. Understanding is not graspable and is apart from all existing enumerations. Those abiding in between, perceiving both as equal and without duality,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바깥 경계나 사람의 마음이나 밝음과 어둠은 같은 원리다밝음과 어둠을 불교에서는 지혜와 어리석음으로 표현한다이 밝음과 어둠은 둘이 아니다무명실성 즉불성(無明實性卽佛性)이라는 증도가의 구절과 같이 무명의 성품이 곧 불성이니, 무명과 불성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이다. ]

[무명(無明; avija, avidya)이란 원래 명(明), 명지(明知), 즉 진실한 지혜가 없는 것, 여실지견(如實知見)을 결여(缺如)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은 선(善)과 불선(不善), 무명(無明)과 명(明)을 대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표리(表裏)의 관계에 서서 파악하고 무명이 여실지(如實智)에 의해서 소멸되는 곳에 명(明)이 나타난다고 본다.-혜경스님]

 

17.희견보살
喜見菩薩曰(희견보살왈) 色色空爲二(색색공위이)

희견(Priyadarana)보살이 말하였다. 색(rpa)과 색의 공함=色空(rpanyat)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The bodhisattva Joyful Perceiving said, Form and emptiness of form are a duality. 

色卽是空非色滅空(색즉시공비색멸공) 色性自空(색성자공)

색이 곧 공(nya)이며, 색이 멸함으로써 공한 것이 아닌, 색의 본성 자체가 공한 것이니,

Form is emptiness, not because of form are a duality. Form is emptiness, not because emptiness is the extinguishment of form, but that the nature of form is itself empty. 

如是受想行識(여시수상행식) 識空爲二(식공위이) 識卽是空(식즉시공) 非識滅空(비식멸공)

識性自空(식성자공) 於其中而通達者(어기중이통달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이와 같이 수, 상, 행, 식과 식공(識空, 생각이 끊어진 자리, 무념의 자리)을 서로 대립한 둘이라고 하나, 식이 곧 공이며, 식이 멸했기 때문에 공한 것은 아니라, 식의 본성 자체가 공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통달하여 아는 이를 불이법문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The same goes for sensations, perceptions, mental formations, and consciousness. Consciousness and emptiness form a duality. Consciousness is emptiness, not that consciousness extinguishes emptiness, but that the nature of consciousness is itself empty. Those who go among and understand thoroughly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반야심경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한 가르침과 같다. 유마경과 반야심경에서 중요한 점은 색수상행식이 소멸한 뒤에 공하여 지는 것이 아니고 색수상행식이 곧 그대로 공하다는 것이다. 또는 하나하나 인연에 의하여 결합되었기 때문에 그 결합을 분해하면 공이라는 뜻도 아니다. 즉 분석공(分析空)도 아니고 연기공(緣起空)도 아닌, 즉공(卽空)이다. 분석공은 성문들이 이해하는 공이고, 연기공은 연각들이 이해하는 공이며, 즉공은 보살들이 이해하는 공이다.]

 

18.명상보살
明相菩薩曰(명상보살왈) 四種異空種異爲二(사종이공종이위이)

명상(Prabhketu)보살이 말하였다. 四種=지․수․화․풍의 4가지 종성의 다름과 공의 종성이 다름(kadhtu)이 서로 대립하는 둘이나,

The bodhisattva Understanding Form sai, The four elements and emptiness are a duality. 

四種性卽是空種性(사종성즉시공종성) 如前際後際空(여전제후제공)

4대의 본성 그대로가 空種=공의 본성이니, 과거의 실제=前際(purvanta)와 미래의 실제=後際(aparanta)가 다 공하기 때문에 

The nature of the four elements is the nature of emptiness. They have been empty in the past and future, 

故中際亦空(공중제역공) 若能如是知諸種性者(약능여시지제종성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중간인 현재의 실제=中際(pratyutpanna)도 공한 것이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모든 종류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불이법문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so they are also empty in the present. If someone can understand the nature of the various elements thus, i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空種, kadhtu=허공(虛空)을 말한다. 즉 공간으로서 일체가 걸림이 없이 그 안에 안주시킬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또 이 부분은 현장 역과 같이 “네 가지 원소(元素)와 공(空)과는” 하는 것이 더 이해를 빠르게 한다.]

[지풍은 공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그러므로 지풍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지풍이다그렇다면 결국은 앞도 공이며 뒤도 공이며 중간도 공이다.]

 

19.묘의보살
妙意菩薩曰(묘의보살왈) 眼色爲二(안색위이)

묘의(Paramati)보살이 말하였다. 눈(cakus)과 사물=色(rpa)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The bodhisattva Wonderful Intent said, Sense of sight and things perceived by sight are a duality. 

若知眼性(약지안성) 於色不貪(어색불탐) 不恚不癡是名寂滅(불애물치시명적멸)

만약 눈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을 알면, 색=사물에 대하여 탐착하거나, 성을 내거나, 어리석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적멸이라 이름하며, 

When there isn’t greed, hostility, or confusion about what’s perceived, that’s called silent cessation. 

如是耳聲(여시이성) 鼻香舌味(비향설미) 身觸意法爲二(신촉의법위이)

이와 같이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마음(뜻)과 마음의 대상=法 등이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지만, 

Similarly, the ear and sound, the nose and scent, the tongue and taste, the body and touch, and the mind and Dharma are a duality. 

若知意性(약지의성) 於法不貪(어법불탐) 不恚不癡是名寂滅(불애물치시명적멸)

安住其中(안주기중)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마음의 본성을 알면 마음의 대상=법에 대해서 탐착하거나, 성내거나, 어리석지 않을 것이므로, 이것을 적멸이라고 이름하며, 그 안에 안주하는 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If one understands the nature of the mind, then there will not be an attachment to Dharma, no hostility, nor confusion, and is called nirvana. Abiding within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사람의 삶의 영역은 6()과 6()이다근과 경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둘이라고 하여, 눈과 사물이 둘이며 귀와 소리가 둘이며 코와 향기가 둘이다이와 같이 6근과 6경이 둘이라 하였으나 6근의 본성을 알고 6경의 본성을 알면 6경에 대해서도 6근에 대해서도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지도 않다.]

 

20.무진의보살
無盡意菩薩曰(무진의보살왈) 布施迴向一切智爲二(보시회향일체지위이)

무진의(Akayamat)보살이 말하였다. 보시(dna)와 (공덕을) 일체지로 회향하는 것이(sarvajna-pariman)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지만, 

The bodhisattva Aksayamati says, Generosity and to transfer merit for the wisdom of all form a duality. 

布施性卽是迴向一切智性(보시성즉시회향일체지성) 如是持戒(여시지계)

忍辱精進禪定(인욕정진선정) 智慧迴向一切智爲二(지혜회향일체지위이)

보시의 성품이 곧 일체지로 회향하는 것임과 같이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와 일체지에 회향하는 것이 서로 대립하는 둘이 아니라, 

Nature of generosity is the same nature as transferring merit for the wisdom of all. Thus upholding the precepts, to have patience, to be diligent, meditative concentration, wisdom, and transfer merit for all-knowledge are dualities. 

智慧性卽是迴向一切智性(지혜성즉시회향일체지성) 於其中入一相者(어기중입일상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지혜의 성품이 곧 (그 공덕을) 일체지의 성품에 회향하는 것이니, 그 가운데에서 진실한 도리인 一相에 들어가는 것 (깨닫는 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Nature of wisdom is the nature of transferring merit for the wisdom of all, and those who enter this one form from among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一相= 앞의 선안(善眼)보살이 “일상(一相)과 무상(無相)”이라고 대립해서 이야기했고, 또 선안(善眼)보살의 이야기와 지금 것이 같지 않으므로 현장 역 ‘일리(一理),’ 티베트 역의 ‘일리취(一理趣)’를 참고하였다.]

[불교에서 보살이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 수행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등 6바라밀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일체지혜에 회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6바라밀과 일체지혜는 둘이 아니다.]

3. 불순보살

不眴菩薩曰(불순보살왈) 受不受爲二(수불수위이)

불순(Animia)보살이 말하였다.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受(dna)와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는=不受(andna)를 둘이라고 하며, 

The bodhisattva Unblinking said, Experiencing and non-experiencing being a duality. 

若法不受(약법불수) 則不可得(즉불가득以不可得(이불가득) 故無取無捨(고무취무사)

無作無行(무작무행)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존재하는 것= 受=받아들이 않으면, (사물을) 얻을 수가 없으며, 얻을  없기 때문에 취함도 없고, 버림 없으며, 지음도 없고, 행하는 다 없으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There will be no attainment where there is non-experiencing of the Dharmas. When there is no attainment, there is no seizing, renouncing, creating, or enforcing. Which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사람의 삶이란 다만 이 받아들임 뿐이다. 감수하고 느껴 아는 모든 것으로부터 사람의 삶이 영위된다고 할 수 있겠다. 경계를 어떻게 감수하고 또 감수하여 어떻게 반응하면서 일생이 다 지나간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 대해서 감수하는 것이 해결되면 취하고 버릴 것이 없게 되므로, 지음도 없고 행함도 없어서,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4.덕정보살

德頂菩薩曰(덕정보살왈) 垢淨爲二(구정위이)

덕정(Śrīka)보살이 말하였다. 垢=더러움(saklea)과 淨=청정함(vyava-dna) 둘이라고 합니다.

Virtue peak bodhisattva said, Defilement and purity are a duality. 

見垢實性(견구실성) 則無淨相(즉무정상) 順於滅相(순어멸상)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그러나 더러움의  實性=실다운 성품(bhla-kana) 보면, 곧 청정한 모습=相도 없는 적멸 모습=滅相 따르게 되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Hence, when one perceives the real nature of defilement, there will no longer exist marks of purity, leading to the extinction of marks. That is to enter Dharma gate of nonduality. 
[見垢實性(견구실성) 則無淨相(즉무정상) 順於滅相(순어멸상)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문장을 현장은 번뇌와 청정함이 둘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 분별은 없고 깊이 분별을 끊어서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현장의 역문 참고했다.]

[삶의 대부분은 깨끗하고 더럽다, 좋고 나쁘다, 선이고 악이라는 상대적인 문제에 휘둘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깨끗한 것이든 더러운 것이든 그 실체를 잘 관찰해 보면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없다. 오직 텅 빈 적멸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5.선숙보살

善宿菩薩曰(선숙보살왈) 是動是念爲二(시동시념위이)

선숙(Bhadrajyotis)보살이 말하였다. (마음 또는 행동이) 움직이는=動(vikepa) 念=생각(manasikra)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The bodhisattva Excellent Dwelling said, The mind’s movements and thoughts are a duality. 

不動則無念(부동즉무념) 無念則無分別(무념즉무분별)

通達此者(통달차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움직이지 않는 것=不動은 곧 생각이 없는=無念이요 생각 없다는 것은 곧 분별이 없는=無分別이니 통달한 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선숙보살이 말하기를 동[행동]과 염[생각]이 둘이 되거늘  움직이지 아니하면 생각도 없음이요, 생각이 없으면 분별이 없음이라  이것을 통달하는 사람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So, if there are no mental movements, then there will be no thoughts, and without thoughts, there will be no distinctions. The one who realizes this is the one who enters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是動是念爲二(시동시념위이)= 이에 대해서 현장은 산동(散動) 사유(思惟),” 티베트 역에서는 동요(動搖) 집착(執着)”이라고 했다.]

[경계가 움직이는 것이 먼저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생각하여 아는 것이 먼저인가? 또 이런 말도 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은 바람 때문인가? 깃발 때문인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고 그대의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생각하여 아는 것이 없다면 분별이 없다.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6.선안보살

善眼菩薩曰(선안보살왈) 一相無相爲二(일상무상위이)

선안(Sunetra)보살이 말하였다. 하나의 모양=一相(ekalakaa) 모양 없음=無相(alakaa)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합니다

The Excellent Eyed bodhisattva said, Oneness of forms and formlessness is a duality. 

若知一相卽是無相(약지일상즉시무상) 亦不取無相(역불취무상)

入於平等(입어평등)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일상 무상으로 알고 무상을 취하지 않아 평등을 체득하게 되면이것을 입불이법문이라고 합니다.”

Understand that the oneness of forms is non other than formlessness. Non-grasping of what’s formless is to perceive all things as equal. Which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여기서의 일상은 절대적인 일상이다. 하나나 둘이나 셋 등에서의 일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의 일상은 곧 무상이나 마찬가지이고, 무상은 그 무상마저 없는 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一相과 無相 만법이 모두 하나이니, 상대적 개념으로 크고 작다, 가깝고 멀다 등의 분별을 떠난 곳에서 한 모양(一相)이 된다. 어느 정신적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올랐다는 상이 있으면 이미 한 모양이 아니다.  하나의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아무 모양을 짓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즉 무상(無相)이 된다.

法性, 즉 법의 성품이란 바로 공(空)이며, ​일체가 공하기에 일체개공이고, 일체가 공하기에 한 모양(一相)이며, 한 모양이란 곧 無相입니다. 즉 空과 無相은 결국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7.묘비보살

妙臂菩薩曰(묘비보살왈) 菩薩心聲聞心爲二(보살심성문심위이)

묘비(Subbu)보살이 말하였다. 보살의 마음=菩薩心과 성문 마음=聲聞心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지만

The Exquisite Arm bodhisattva said, The bodhisattva mind and the sravaka mind are a duality. 

觀心相空(관심상공) 如幻化者(여환화자) 無菩薩心(무보살심) 無聲聞心(무성문심)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마음의 모습=心相 공하여 허깨비=幻化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관찰하게 되보살심 없고 성문심 없는 것이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By perceiving the mind’s forms as empty, like a conjured figure, that there is no bodhisattva mind and no sravaka mind. I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보살의 마음과 성문의 마음 뿐이 아니라, 내 마음과 너의 마음, 갑이라는 사람의 마음을이라는 사람의 마음남자의 마음여자의 마음젊은이의 마음늙은이의 마음동양 사람의 마음서양 사람의 마음 등등 무수히 많다그러나 마음의 실체는 텅 비어 공한 것이라고 아는 것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8.불사보살

弗沙菩薩曰(불사보살왈) 善不善爲二(선불선위이)

불사(Puya)보살이 말하였다. (kuala) 불선(akuala)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나니,

The bodhisattva Pusya said, Virtuous and unvirtuous are a duality. 

若不起善不善(약불기선불선) 入無相際而通達者(입무상제이통달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그러나 만약 선도 불선도 일으키지 않고, 상이 없는 경지(실제)=無相際 들어가서 이를 통달하면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 합니다.
So, if one does not arise the virtuous and unvirtuous, but understand thoroughly and enter the realm of the formless, tha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선함과 선하지 않음은 틀림없는 두 가지이나, 그러나 그것은 그와 같은 행위를 일으켰을 때에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만약 선함과 선하지 아니함이 형상이 없음을 통달한다면 그것은 둘이 아닌 것이라고 하였다.]

9.사자보살

師子菩薩曰(사자보살왈) 罪福爲二(죄복위이)

사자(Siha)보살은 말하였다. 죄(svadya)와 복(anavadya)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지만

Lion bodhisattva said, Sin and blessing are a duality. 

若達罪性(약달죄성) 則與福無異(즉여복무이) 以金剛慧決了此相(이금강혜결요차상)

無縛無解者(무박무해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죄악  자체의 본성(성품)을 통달하면 복과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되니금강의 지혜로써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속박되지도 않고, 해방=벗어남 없으니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If you realize the nature of sin, then there is no difference with blessing. When one resolves such an appearance by using diamond wisdom, without bondage or liberation, i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罪福爲二(죄복위이)= 현장티베트 역은 “유죄와 무죄이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죄와 복이라는 이 두 가지의 문제에 전전긍긍하며 산다죄의 성품도 본래 공하고 복의 성품도 본래 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안다면 그것은 금강의 지혜다그렇게 되면 죄나 복에 대해서 속박도 없으며 벗어남도 없을 것이다.]

 

10. 사자의보살
師子意菩薩曰(사자의보살왈) 有漏無漏爲二(유루무루위이)

사자의(Sihamati)보살은 말하였다. 유루(ssrava)와 무루(ansrava)를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Lion Intent bodhisattva said, Outflow and non-outflow are a duality. 

若得諸法等(약득제법등) 則不起漏不漏想(즉불기누불누상) 不著於相(불착어상)

亦不住無相(역불주무상)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모든 법이 평등함을 알면, 그 때 번뇌=漏나 번뇌가 없는 생각=無漏는 일어나지 않으며, 그러한 생각에 집착함도 없으며, 생각이 없는=無想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If one receives the Dharmas as equals, there will not be distinctive thoughts between outflow and non-outflow, and no attachment to form nor any dwelling upon the formless, tha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不著於相(불착어상) 亦不住無相(역불주무상)=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생각’을 나집은 ‘상(相)’이라고 했으나, 전문(前文)과의 관계로 보아 ‘상(想)’이 옳을 듯하고, 현장과 티베트 역도 ‘상(想)’이다. 또 이곳을 ‘상(相),’ ‘무상(無相)’이라고 한다면, 앞의 선안(善眼)보살과 중복되므로 지금은 ‘상(想),’ ‘무상(無想)’으로 번역했다.]

['루(漏)'는 번뇌를 의미하고 무루는 번뇌가 없다는 뜻이며, 유루는 번뇌가 있다는 말이다. 유루는 번뇌를 가진, 번뇌에 더럽혀진 것이라는 의미이며, 무루는 그 반대의 의미이다.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외적인 자극이 오면 그것에 물들어 내적인 습기로 말미암아서 번뇌에 노출되는 현상을 '루(漏)'라 한다. 따라서 ‘유루’란 육근에서 ‘번뇌’라는 허물을 항상 만들어 누출한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무루’란 물이 새지 않는다는 말인데, 구경위(究竟位 - 최상의 깨달음에 도달한 부처의 경지) 단계의 마음으로서 일체 세간사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고 원만해 번뇌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아미산]

 

11. 정해보살

淨解菩薩曰(정해보살왈) 有爲無爲爲二(유위무위위이)

정해(uddhdhimukti)보살이 말하였다. 유위(saskta)와 무위(asaskta)를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며,

The bodhisattva Pure Liberation said, The conditioned and the unconditioned are a duality. 

若離一切數(약리일체수) 則心如虛空(즉심여허공)

以淸淨慧無所碍者(이청정혜무소득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일체 (유위의) 헤아림=數(saskara)를 떠나면 마음은 허공과 같아져 (집착을 떠나) 맑은 지혜는 걸림이 없게 된,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But if one transcends all enumerations, then the mind will be like emptiness, free from all obstacles with pure and tranquil wisdom. Tha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有爲無爲爲二(유위무위위이) 이 부분의 티베트 역은 “이것은 업이다, 이것은 불업이다”이다.]

[인과 연에 의하여 만들어진 생멸 변화하는 유위나 반대로 각종의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무위나 둘이라면 둘이지만 백법(百法중에 6종 무위이니, 나머지 수의 유위니 하는 그 숫자를 떠나면 마음은 텅 빈 허공과 같다.]

[유위법(有爲法)이란 위(爲)는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다. 유위는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은 것,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또는 이렇게 하여 드러난 생성과 소멸의 세계, 즉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한다. 즉, 여러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생성과 소멸의 현상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역사이래로 사람이 만든 법은 모두 유의법인 셈이다. 성경, 불경, 코란, 헌법 등등 모두 유의법이다. 선풍기 바람은 유의에 의한 바람이다.   

무위법(無爲法)이란 인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연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 생멸변화 등의 작용을 갖지 않는 상태, 생멸변천 현상을 초월한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절대의 법을 말한다. 이는 탐(貪) 진(瞋) 치(癡)가 소멸돼 온갖 분별 망상과 번뇌가 끊어진 상태이며, 고락(苦樂)로부터 해탈한 열반의 경지를 의미한다.-지리산 천년 3암자길]

 

12. 나라연보살

那羅延菩薩曰(나라연보살왈) 世閒出世閒爲二(세간출세간위이)

나라연(Nryana)보살이 말하였다. 세간(laukika)과 출세간(lokottara)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며,

The bodhisattva Narayana said, The human world and transcendental world are a duality.  

世閒性空(세간성공) 卽是出世間(즉시출세간) 於其中不入(어기중불입)

不出不溢不散(불출불익불산) 是爲入不二法門(시위윕불이법문)

그러나 세간의 본성 자체가 공(함을 깨닫는 것)이 그대로 출세간이며, 그 가운데에서 들어가고 나감이 없으며, 넘치거나 흩어지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The human world is inherently empty, thus is the transcendental world. Which is without entering nor exiting, without outflow nor scattering; this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불교에서는 출세간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그런데 흔히 세속에서 사는 것을 세간이라 하고 사찰이나 특별한 수행처에서 사는 것을 출세간이라고 생각한다유마경에서는 세간의 본성이 공한 그 자리가 곧 출세간이라고 하였다세간도 출세간도 사람의 안목에 달려있다어디에 살든지 사는 곳이 공하다는 사실을 알면 곧 출세간이다.]

 

[일반적으로 초기불교에서 세간과 출세간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번뇌와 욕망의 속박여부에 따라 둘로 나눈 이다. 즉 세간이란 번뇌와 욕망에 속박된 미망의 세계를 말하며, 반면에 출세간이란 번뇌와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를 지칭한다. 예컨대 세간은 중생들의 정신적인 단계나 수행의 정도에 따라 생사윤회를 거듭하면서 살아가는 세계를 의미하는 3계(욕계․색계․무색계)와도 일맥상통한다. 아울러 출세간은 생사윤회의 세간을 뛰어넘은 경지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세간과 출세간은 물질적인 세계가 아닌 정신적인 세계나 그 경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세간(世間)이란 산스크리트 원어로는 ‘로카(loka)’인데, 이는 ‘부수다(to break)’ 등을 의미하는 ‘동사어근 √luj’에서 파생된 명사로 ‘부서지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출세간(出世間)이란 산스크리트 원어로는 ‘로코타라(lokottara)’인데, 이는 ‘loka(세간)’와 위쪽이나 반대편을 의미하는 접두어(ut)에 ‘벗어나다(to escape from)’ 등을 의미하는 ‘동사어근 √tṝ’가 결합된 형태에서 파생된 명사로 ‘세간을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요컨대 세간과 출세간은 윤회와 업에 종속되는 세속적인 삶과 윤회와 업을 벗어나고자 하는 출세간적인 삶으로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 세간과 출세간은 탐욕․성냄․어리석음 등의 부정적인 잠재적 번뇌로 인한 업과 윤회의 굴레에 종속됐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이 두 차원의 삶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삶을 영위하면서 자신의 삶을 짚어보고 되돌아보는 깊은 성찰을 하거나 수행적인 측면에서 개인적인 노력을 어떻게 기울이느냐에 따라 삶의 양상이나 그 차원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앙굿따라니카야’에서 “비구들이여,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세상은 다시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을 돌아가게 한다. 무엇이 여덟인가? 그것은 이득과 손실, 명성과 악명, 칭송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 등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세상은 다시 이러한 여덟 가지 세상의 법을 돌아가게 한다.”

한편 출세간적인 지혜로운 삶에 대해서 ‘앙굿따라니카야’에서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 이득이 생기면, 그는 다음과 같이 숙고한다. 나에게 이득이 생겼지만 이것은 참으로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그는 이처럼 있는 그대로 통찰한다. …그리하여 이득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못하고, …괴로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머물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순응함과 적대함을 버려서 생로병사로부터 해탈한다.” 

사실 세간적인 삶은 바로 자신의 욕망이나 자아의식(ego)에 따라 살아가는 범부들의 을 말한다. 이러한 범부들의 삶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성욕․수면욕․재물욕․명예욕 등의 5욕락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는 8가지 세상의 법들을 쫓아 허둥지둥 분주하게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무엇을 위해 그리도 열심히 살아왔는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무상함이나 허망함 등을 뒤늦게 실감하게 된다. 

결국 세간적인 삶과 출세간적인 삶은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5욕락의 경계와 그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에 기인하는 애착이나 집착 등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거나 성찰하는 수행적인 노력 및 그 통찰적인 지혜계발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활동과 더불어 이러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노력, 즉 사티(sati)를 통한 성찰과 지적 통찰이 세간적인 삶과 출세간적인 삶을 매개하고 지혜롭게 중도적으로 지양할 수 있는 요체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김재권, 법보신문]

9.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
維摩詰所說經入不二法門品第九
Chapter 9.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평등과 존중의 불이사상(不二思想)입니다.

출가, 재가, 부처와 중생, 정토(행복의 땅)와 예토(불행의 땅), 보리(깨달은 즐거운 마음)와 번뇌(힘들고 지친 중생마음)와 같은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는 불이(不二)사상을 통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들어가야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장 이상적인 ‘진리’는 사실 볼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글로 적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직 자신의 확실한 신념과 의지에 달려 있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남일스님]

[‘불이(不二)’에서 ‘이(二)’는 산스크리트어 dvaya로서 ‘가짜’ ‘거짓’이란 뜻이다. 그래서 유마 거사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은 ‘가짜가 아닌 법문’ 혹은 ‘진리의 노선을 따라가는 법문’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진리의 법문을 문수보살은 언설(言說)로써 표현한 반면, 유마거사는 실천으로 응답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마경>은 대승불교란 출가자에 국한된 가르침이 아닌, 모든 사람 특히 재가자를 위한 가르침이란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또한 경전 속 내용 중에서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내가 아프다’는 유마 거사의 말은 현대인들의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지성을 읽을 수 있다.

불이란 ‘둘이 아니며’ 따라서 ‘다르지 않다’, 즉 불이(不異)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깨달음과 무명이 다르지 않고, 성(聖)과 속(俗)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바로 불이의 세계관이다. 저 너머의 구원이 아닌 지금 여기 서 있는 자리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대승불교 정신이 압축적으로 표현돼 있다.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진리를 찾으려면 확고부동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 명제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철학사에 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불교는 데카르트에게 묻는다.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한다면, 고로 ‘나’라는 존재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바로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려는 것이 불이사상이다. 
존재를 만듦으로써 비존재를 만들고,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냄으로써 ‘너’라는 상대적인 존재를 만들어 내는 생각과 마음의 허상을 지적한 불이사상의 출발점이 곧 무아사상(無我思想)이다. 
즉, 불이사상(不二思想)이 부처님 근본 가르침인 무아(無我)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말이다.
무아(無我)가 단순한 철학적 개념에 머물지 않고 자비라는 실천윤리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계관이 있어 비로소 가능해진다. 대승의 정신이란 바로 불이적 세계관의 실천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불이(不二)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줄인 말로서 “다르지 않다”라고 말할 때에는 “같지 않다”라는 말이 전제돼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같은 ‘일(一)’이라는 숫자에 두 가지 개념이 있다. 이(二), 삼(三) 등을 전제로 한 분별하는 상대적인 개념의 일과 일원상(一圓相)에서 일(一)처럼 절대의 일(oneness), 진리의 일이 있다.-
불일불이(不一不二)에서 일(一)은 절대의 일(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의 일(一)을 말한다. 불일불이(不一不二)는 너와 내가 하나가 아니고 그렇다고 둘도 아니라는 말인데, 여기서 하나라는 말은 벌써 상대가 있다는 말이다. 분별의 일이라는 말이다. 즉, 불일(不一)에서 일(一)은 상대가 있는 분별의 일을 말한다. 
따라서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며 ‘무명과 깨달음이 하나’라는 말에는 당연히 그 중생과 부처가 다르며, 무명과 깨달음이 엄격히 구별돼야 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부처와 구별되는 나의 ‘중생성=불일(不一)’이 철저히 인식될 때 중생이 곧 부처라는 불이의 인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이(不二)는 불일불이(不一不異;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지금 있는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번뇌 즉 보리’라고 한 것은 깨달음을 어떤 초월적인데서 찾지 말고, 구원을 밖에서 찾지 말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세간적, 생물학적 욕망과 번뇌를 그대로 발산하면서 불이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믿는 것은 착각을 넘어 자기기만(自己欺瞞)이다. 불이는 깨달음의 경지요, 부처의 경지이다. 이 경지를 중생의 경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 착각의 근저에는 정신적 나태함과 방종을 수행의 경지로 호도하는 자기기만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오늘날 불교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출가자들의 비윤리적 파계행위도 이러한 착각 혹은 의식적 호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불교 전통에서는 7세기 원효(元曉) 대사와 근대 한국불교의 경허(鏡虛) 선사 등이 보여준 파계행위를 불교적 깨달음과 세간적 윤리 간의 일정한 긴장관계를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기보다 파계가 오히려 깨달음의 경지라는 치졸한 오류가 있다. 
불일(不一)은 다(多)의 세계로서 구별의 세계요, 언어와 이성의 세계이며 현실의 세계이다. 
한편 불이(不二)의 세계는 일(一)의 세계로서 차별과 언어 이전의 세계요, 이성 너머의 세계이다. 
따라서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하는 것은 언어와 언어 이전, 이성과 이성 너머를 다 긍정하며 포괄하고자 하는 불교적 가르침이 담겨 있다. 불교가 종교이면서 철학이요, 철학이면서 종교일 수 있는 그 근거가 바로 불일(不一)과 불이(不二)의 세계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가 그 다른 어떤 종교보다 현대사회에 더 적절한 가르침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언어와 이성의 세계인 불일(不一)을 전제한 불이(不二)의 세계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불일(不一)이 전제되지 않는 불이(不二)의 세계가 일종의 폭력일 수 있고, 정신적 전체주의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성(理性)과 언어의 사용을 부정하고,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폭력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불이(不二)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라고 하는 것은 서양 중세 역사가 보여준 바 있다. 불교의 경우 불이(不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수행의 엄격성과 필요성이 소홀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불일(不一)의 현실을 못 보고, 불이의 오용과 남용의 폐해로 인해 진짜와 가짜, 불교적인 것과 비불교적인 것,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처님과 무당집의 귀신이 구별이 되지 않고, 만행(萬行)이 만행(漫行)과 구별되지 않고, 멍청함(昏沈)을 무심(無心)의 경지로 착각하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다.
불교가 여타 종교와 다르고, 부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른 것은 부처님은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지 않고, 세속의 일에 ‘감 놓고 배 놓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속과 인간의 일이 움직이고 있는 이치가 어떤 절대자의 권능과 도움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다는 것이 불교의식의 출발점이다.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선가(禪家)의 말은 자신 외에 어떠한 절대적, 초월적 권위도 부정하는 철저한 선불교(禪佛敎)의 인간주의 선언이다. 그런데 입시철이 되면 모든 절에서 합격기도를 하고 수험 당일에는 대규모 기도회를 열어 시루떡을 갖다 놓고 내 아들, 내 딸을 합격시켜 달라고 기도를 한다. 오늘날 불교인들이 절대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절대자의 처분과 권능을 기다리는 다른 종교인들을 흔히 비판하지만, 그러면서 이와 같이 닮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작성자 아미산]

[역사가 깊고 규모가 큰 사찰에는 일주문을 지나고 사천왕문을 지나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불이문(不二門)이다. 진정한 불법의 문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불법의 이치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지만 특히 둘이 아니라는 뜻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무비스님]

 
爾時維摩詰謂衆菩薩言(이시유마힐위중보살언)

그 때에 유마힐은 수많은 보살들에게 말하였다.

At this time, Vimalakirti said to the bodhisattvas, 

諸仁者(제인자) 云何菩薩入不二法門(운하보살입불이법문)? 各隨所樂說之(각수소락설지)

여러 훌륭하신 분들이여, 무엇이 상대적 차별을 뛰어넘는=不二(advaya)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지를 저마다 생각하시는 대로 말씀해 보십시오.

‘Benevolent Ones! What is it for the bodhisattva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May each of you speak of it as you please.’

[이 품에서는 32명의 보살들에게 불교의 여러 가지 명제와 이치 중에서 가장 궁극적인 이치라고 할 수 있는 중도(中道), 또는 절대 평등한 완전 하나의 경지=不二에 대한 견해를 듣고자 유마거사가 청을 하여 듣게 된다.]

 

1. 法自在보살
會中有菩薩(회중유보살) 名法自在說言(명법자재설언)

법회 가운데 보살이 있어 이름이 '법자재'라고 하는 보살이 말하였다.
A bodhisattva in the assembly called Dharma Unrestrained said, 

諸仁者(제인자) 生滅爲二(생멸위이) 法本不生(법본불생) 今則無滅(금즉무멸)

得此無生法忍(등차무생법인)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인자 여러분, 생(utpda)과 멸(nirodha)을 서로 대립하는 두가지라 하지만, 존재하는 것=法은 본래 '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멸'함도 없습니다. 이같이 생멸이 없는 법=無生法忍을 얻는 것을 곧 둘이 아닌 법문=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Benevolent Ones! Arising and ceasing are a duality. From the beginning, the Dharma does not arise, so in the present there is no perishing, which is to attain a forbearance for the non-arising of Dharmas and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먼저 법자재보살은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두 가지인데 진리=法은 본래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기고 없어짐이 없는 진리=無生法忍을 터득하는 것이 곧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니 생사해탈(生死解脫)이니 하는 말은 불교에서 증득해야할 목표로 설정되어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불이법문입니다.]

 

2. 덕수보살
德守菩薩曰(덕수보살왈) 我我所爲二(아아소위이)

덕수(rīgandha)보살이 말하였다. '아'(tman)와 '나의 것=我所'(tmīya)를 서로 대립하는 둘=二라고 하나, 

Guarding Virtue bodhisattva said, 'I' and 'mine' constitute a duality. 

因有我故(인유아고) 便有我所(편유아소) 若無有我(약무유아) 則無我所(즉무아소)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아'가 있음으로 해서 '아소'가 있는 것이요, 만약 아가 없는=無我(antman)이면 아소도 없을 것이니, 이것을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It is from having a self that there is self-ownership (‘my’ or ‘mine’). Without a self, there would not be a sense of self-ownership. And this is entering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무아(無我, pali. anatta)’ 혹은 자아(自我)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윤회(輪廻, saṁsāra) 혹은 자아(自我)가 생사를 반복하면서 지속됨을 뜻한다. 따라서 이 둘은 모순적 관계로 볼 수 있다. 만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하겠는가. 혹은 윤회가 사실이라면 윤회의 주체인 자아가 전제되는 셈이 아닌가. 그렇다면 모순이 아닌가. 이러한 당혹감이 문제의식으로 떠오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은, 무아 = "내가 없다"」가 아니다. 무아란 고정불변 하는 ― 항상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내가 아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무아를 내가 없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잘못된 무아론에 빠져버린다.

무아(無我)에서 ()’라는 것은, 영원성을 의미한다. 무아(無我)의 뜻은 라는 게 없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고, ‘라고 여기는 몸과 마음에 내재된 영원성을 유지하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은 변화해갈 수밖에 없다. 변화한다는 것은 곧 그 안에 어떤 영원성이 내재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많은 분들이 무아(無我)를 한자 무()에 얽매여서 그냥 단순하게 라는 존재가 없다는 식으로 잘못 해석한다. 내가 없다면 이 글을 쓰는 는 누군인가? 따라서 무아를 내가 없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불교 교의의 두 기둥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인데, 무상(無常)과 윤회(輪廻)의 개념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나 자이나교에서 이미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무아(無我)만은 석가모니불이 성도한 후 최초로 설파한 가르침이다. 빠알리어 atta 참나이다. 따라서 anatta(무아)란 참나가 아니란 말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 무아는 불교 근본교리로서, 고대 인도에는 브라만 교설에 의해 아트만(atman-)사상이 보편화돼 있었으므로 부처님은 일차적으로 그 아트만()’의 관념을 부정하기 위해 무아설을 주장했다. , 당시 우파니샤드철학이 아()를 실체시 하는데 반해 부처님이 이런 견해를 거부한 것이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무아(無我-pali. anatta)이다.

pali. anatta, skt. anatman(무아) atman이 아니란(an) 말이다. 아트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무아라고 해서 의 실존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비록 가아(假我)이지만 는 존재한다. 아트만(atman)이란 실체를 뜻하고, 무아란 존재론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당시 브라만교에서는 고정 불변의 자아(skt. atman)를 인정하고 그러한 자아를 터득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을 그들의 제일의 교의로 삼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자아사상을 단지 자아가 있다는 인식[아상(我相)]’일 뿐이라며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므로 인무아(人無我)ㆍ법무아(法無我) "나의 본질은 없는 것이며, 대상으로서의 사물들(삼라만상)의 본질도 없다"와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내가 없고 대상으로서의 존재자도 없는 공무(空無)란 말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종교도 필요 없고, 선행도 다 헛된 것에 불과 할 뿐이며, 깨달음을 얻는 것도 다 헛된 일일 뿐이다. 불교의 무아의 사상은 공무(空無)의 사상이 아니다. 무아를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이 해석하지 말고 본질(本質)이 없다, 실체가 없다와 같이 해석해야 한다. 그리하여 존재는 "심찰나적으로 생멸(태어나고 죽음)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이라고 표현한다.

윤회란 반드시 "무언가가 다음 생으로 건너가야" 한다. 그것을 남방권에서는 바왕가(bhavaṅga)라고 하고 유식불교에서는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남방권에서는 그러한 바왕가조차도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심찰나적으로 생명을 거듭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라는 존재가 지금 여기 있지만 이 존재의 양상은 단 1초도 고정돼 있지 않듯이 라는 존재가 없다가 아니라 라는 고정된 존재가 없다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라는 고정된 존재가 있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취착하고 갈애하고 번뇌를 일으키고 업을 쌓아간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의문이나 논리는 단순히 무아를 그냥 내가 없다는 정도로만 인식하는 수준에서 생기는 의문이다. 무아를 확실히 알고 실현하면 윤회하지 않는다. 본래 삼라만상은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무아이지만, 중생은 모든 게 다 실체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윤회를 한다. 수행을 하고 삼라만상의 실체가 없음, 즉 무아를 깨달으면 윤회하지 않는다. , 무아를 깨달으면 윤회하지 않고, 무아를 모르면 윤회한다. 중생은 무아를 몰라서 육도윤회하고, 무아를 완전히 체득하면 해탈하게 된다.

「무아ㆍ윤회」라는 단어의 배합은 맞지 않는다.

유아ㆍ윤회 - 실체가 있다고 여기면, 반드시 죽으므로 생멸을 반복한다. 즉 윤회한다.

무아ㆍ해탈 - 실체가 없다고 깨닫게 되면, 죽을 게 없으므로 윤회가 없고, 해탈이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하실 때 두 부류로 나누어서 설법을 하셨다. 깨닫지 못한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육도 윤회를 말씀하셨고, 각자(覺者)의 입장에서는 삼라만상의 실체를 깨달으면(무아의 개념을 확실히 깨달으면) 생노병사의 윤회를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불교경전에는 윤회에 대한 설법도 있고, 그 반대로 윤회가 없는 해탈에 대한 설법도 있다.

무아(無我)에서 ()’라는 것은 실체라는 뜻이다. 단순이 라는 뜻이 아니다. 라는 개념의 정확한 뜻은 고정불변하는 영원한 자아(自我)를 의미한다. 그걸 라고 부른다. 무아(無我)의 뜻은 완전히 모든 게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당장 내 몸은 있다. 하지만, 이 몸이 영원하지 못하다. ()ㆍ노()ㆍ사() 한다. 그러니 이 몸은 영원하다고 할 수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 본래 의미이다.

그렇다면 과연 실체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몸과 마음은 있다. 그러나 이 몸과 마음이라는 것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상호의존적으로만 존재가 가능하다. 몸은 당장 공기가 없고 음식이 없으면 죽는다. 땅이 없으면 서 있을 수조차 없다. 따라서 몸이 혼자서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바깥 것들과 같이 공존, 즉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은,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게 늙어가는 것이고, 죽는 현상이다.
마음 역시, 혼자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대상, 물질적 대상이든 정신적 대상이든 대상 따라 마음이 일어난다. ‘나’라고 여기는 몸과 마음, 이것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가능하다면 변화가 없이 영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변하고, 실체가 없어 무아이다. 인간 개개인이건 삼라만상이건 모든 것의 본래 모습은 텅 비어,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이다.
그러나 중생은 모든 게 다 있다, 영원하다고 여긴다. 이게 전도몽상이다. 그러니 본질적으로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생로병사 윤회하는 것이다.
무아(無我)는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 인무아(人無我) : 각자 개개인으로서의 나,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 법무아(法無我) :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현상, 삼라만상이 다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무아를 깨달은 자는 윤회하지 않고, 무아를 깨닫지 못한 자는 윤회한다.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했느냐 하는 차이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사유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머릿속으로 분석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무아를 깨닫고 체득하면, 혹시 완전히 사라져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자유롭게 되는 것이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는 형이상학적 견해(見, diṭṭhi)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무아의 진리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인식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무아에 대한 통찰은 염리(厭離), 이탐(離貪),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 등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실천적 과정이 고려되지 않은 순수 이론으로서의 무아는 부처님의 원래 취지에서 벗어난 것이며, 형이상학적 견해에 해당하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범부는 스스로가 오온(五蘊)이라는 경험세계를 지배하는 힘(vaso)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괴로움의 현실은 자신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닥쳐온다. 이 점에서 오온을 이끄는 내부의 통솔자 혹은 주재자 따위는 인정될 수 없다. 어떠한 물질현상(色=오온)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내부적인 것이든 외부적인 것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모든 물질현상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러한 ‘나’는 있지 않다.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우리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거기에는 고정불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른 종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 무아를 깨친 자에겐 윤회가 없다. 원칙적으로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따라서 무아인데 누가 윤회하는가 라는 질문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 범부 = 자아의 상태 = 윤회
• 아라한 = 무아의 상태 = 윤회 종식
즉, 아라한은 무아이고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윤회의 종식을 획득했으니 윤회의 주체에 대해서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지만 범부들은 윤회에 종속되고 무아가 아닌 자아가 있다고 하는 정신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자아가 계속해 윤회한다. 범부가 윤회하는 것은 자아의식 때문이다. 따라서 무아인데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왜냐하면 무아라는 말은 곧 윤회를 종식시킨 아라한이라는 말인데, 아라한에게는 윤회가 없다. 따라서 윤회의 주체라느니 누가 윤회하는가 라는 의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남방권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아라한 = 오온(五蘊)
• 중생 = 오취온(五取蘊)따라서
• 아라한 = 오온 = 무아
• 중생 = 오취온 = 자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중생에게는 윤회가 있지만 아라한은 윤회가 없다. 즉, 중생은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윤회하는 것이고, 무아를 깨달으면 윤회가 종식된다. 그래서 무아와 윤회란 말은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과(道果)가 결정되는 것은 무아를 얼마나 완전하게 아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무아를 아는 것에 따라서 집착을 끊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처음부터 무아를 알기는 어렵다. 먼저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無常)을 알고, 그 뒤에 무상을 안 뒤에 오는 괴로움을 통찰하고, 그 괴로움이 자기 뜻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무아의 진리를 봐야 한다. 그리고 무아의 진리를 봤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기 때문에 유신견(有身見)이 생기지 않아서 그 결과로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업(業)을 생성하지 않아서 미래의 태어남이 없고, 받을 것이 없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끝내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윤회는 무아를 모르는 범부 중생의 바람일 뿐이다. 죽음이 두렵고 허망하니까 윤회라도 있어 다소간 위안을 받으려는 어리석은 소망이다. 무아와 관련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윤회는 없다. 부처님도 윤회는 없다고 단언하셨다.
다만 고대인도 사회에는 윤회설을 믿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을 후대 불교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대승 밀교에서는 적극적으로 윤회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윤회가 불교의 기본교설처럼 됐고, 부처님께서도 윤회설을 지지하셨다고 오해를 받고 계신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覺知衆魔事(가지중마사而示隨其行(이시수기행)

온갖 마군이들의 소행을 알지만, 그들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서

Aware of the numerous demonic deeds, And seems to comply with their actions. 

以善方便智(이선방편지隨意皆能現(수의개능현)
(중생을 제도하는) 훌륭한 방편지혜를 뜻을 따라 
마음대로 사용한다네.

He can manifest all such things at will.

[세상을 살다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일도 많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많다불교에서 말하는 마군이란 모두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나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들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인연에 따라 함께 하되 늘 훌륭한 방편과 지혜로 그들을 교화하고 선도해야 하는 것이 보살이다보살에게 결코 물리쳐야하거나 보지 않아야할 마군은 없기 때문이다.-무비스님]

 

或示老病死(혹시노병사成就諸群生(성취제군생)

혹은 늙고 병들고 죽음=생로병사를 보여서 모든 중생을 성취=깨우치되

Perhaps showing aging, sickness, and death, So that all sentient beings have attainment,

了知如幻化(요지여환화通達無有礙(통달무유애)
모든 것이 허깨비=幻化 같음을 사무치게 알아 
걸림 없이 모든 것에 통달하였네.

to know that things are thus like an illusion, So there are no obstacles to understanding. 

[인생을 성숙시키고 지혜가 나게 하고 철이 들게 하는 무수한 선지식 중에 자신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보다 뛰어난 선지식은 없다늙고 병들고 죽음을 통해서 자기 중생도 제도하고 다른 중생도 제도한다석가와 달마도 다 그러하고 임제와 황벽도 다 그러하였다.]

 

或現劫盡燒(혹현겁진소天地皆洞然(천지개동연

혹은 겁이 다함을 보이기 위해 하늘과 땅이 모두 불타는 것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Perhaps showing the kalpa’s burning end, where the sky and the earth are all consumed. 

衆人有常想(중인유상상照令知無常(조령지무상)
모든 것이 항상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지혜로 비춰서 무상함을 알게 .
Everyone has the desire for permanence, Hence, he illuminates the understanding of impermanence. 

[순간순간 늙고 병들고 죽어가면서도 항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생이다인생무상과 세상무상을 지혜로 잘 알고 느끼며 살아간다면 그는 종교적으로 철이 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無數億衆生(무수억중생俱來請菩薩(구래청보살)

무수억 중생이 함께 와서 보살을 청한다면

Countless billions of sentient beings All come forth to invite the bodhisattva. 

一時到其舍(일시도기사化令向佛道(화령향불도)
일시에 그들의 집에 이르러 그들을 교화하여 불도에 나아가도록.
They all arrive at his house at one, And he turns them to the Buddha’s Way. 

[보살은 중생이 와서 법을 청하면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가서 인연을 따라 근기를 따라 가르쳐 줘야 한다힘이 들고 고통이 따르더라도 불법에 대한 애착과 중생을 아끼는 마음과 정법을 깨우쳐주려는 원력으로 청하는 것을 들어줘야 한다.]  

 

經書禁呪術(경서금주술工巧諸伎藝(공교제기예)

경전이든 주술서이든, 온갖 기술에 관련된 책이든지

Scriptures, forbidden spells, and techniques, Skilful with various crafts and arts. 

盡現行此事(진현행차사饒益諸群生(요익제군생)
남김없이 통달하여 중생들을 널리 이익 되게 베푸시네.
He presents himself doing all these things, To be of benefit to all sentient beings.

[중생을 요익하게 하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다첫째는 불교 중에서도 가장 수승한 대승법으로 요익하게 하여야 하고 법의 인연이 안 되면 물질이나 기타 온갖 것을 다 동원하여 일체중생을 요익하게 하기위해서 사는 것이 보살의 삶이다그러나 무엇보다 가치가 우수한 것은 최상의 바른 법을 가르치는 일이다.]

 

世閒衆道法(세간중도법悉於中出家(실어중출가)

세간의 온갖 도법 가운데에서 출가하

 All the world’s Dharma teachings, He became a renunciate in their midst, 

因以解人惑(인이해인혹而不墮邪見(이불타사견)
그로 인하여 사람들의 미혹을 풀어 주고 사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네.

So that people may be relieved of delusions, So that they do not fall upon erroneous views.

[인도에는 예나 지금이나 갖가지 종교가 많아서 그들의 종교마다 출가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모두가 올바른 견해를 가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유마보살은 그들이 출가하여 수행하지만 삿된 견해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그들의 종교에도 출가하여 그들의 미혹을 해소시켜준다는 뜻이다.]

 

或作日月天(혹작일월천梵王世界主(범왕세계주)

혹은 日=일천자도 되고 月=월천자도 되고 범왕과 세계의 주인이 되고

Sometimes he serves as the sun, moon, or as celestial being, Or as Brahma or as the lord of the world. 

或時作地水(혹시작지수或復作風火(혹부작풍화)
혹은 흙=주지신이 되고 물=주수신이 되며, 혹은 바람=주풍신이 되고 불=주화신이 된다네.
Sometimes turning into earth or water, Or again as wind or fire. 

[무엇이나 되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보살이 중생을 향한 자비심이다.]

 

劫中有疾疫(겁중유질역現作諸藥草(현작제약초 염병

어떤 해에 전염병이 돌면 (질병의 소겁 동안에는) 온갖 약초가 되어

When a plague arises amid the kalpa, He appears as all kinds of medicine herbs. 

若有服之者(약유복지자除病消衆毒(제병소중독)
만약 그것을 복용한 자는 온갖 독과 병을 없애 준다네.
When someone takes them. It cures their disease and poison. 

 

劫中有飢饉(겁중유기근現身作飮食(현신작음식 주릴 흉년들

기근의 소겁 동안에 (어떤 해에 기근이 오면) 몸을 바쳐 음식이 되어

When there is a famine during a kalpa, He appears as the food and drinks. 

先救彼飢渴(선구피기갈卻以法語人(각이법어인 물리칠

먼저 그들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가시게 다음 가르침을 설하여 교화한다네.

First, to quench their hunger and thirst, While using the Dharma to speak to people. 


劫中有刀兵(겁중유도병) 爲之起慈心(위지기자심)

전쟁=刀兵의 소겁 동안에 (어떤 해에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를 위하여 자비심을 일으켜
When weapons of war appear amid the kalpa, He shows compassion for them, 
化彼諸衆生(화피제중생) 令住無諍地(영주무쟁지)
저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싸움이 없는 땅=無諍地에 살도록 한다네.
To transform all sentient beings So they may dwell in the land of non-conflict. 

[석가모니부처님도 성도하신 후 한창 중생교화가 크게 일어날 무렵 코살라라는 나라의 유리[비루다카]왕이 전쟁을 일으켜 부처님의 고국인 카필라국을 멸망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 부처님은 유리왕이 군대를 이끌고 카필라국을 쳐들어가는 길목에서 잎이 다 말라버린 앙상한 나무 밑에서 유리왕을 기다렸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심으로 유리왕을 설득하여 침략을 막아보려고 하였으나 두 번까지는 막았지만 세 번째는 막지 못하고 카필라국이 멸망한 역사가 있었다. 유마경은 아마도 세존에게 있었던 이러한 역사적 가슴 아픈 사실을 상기하며 설해졌으리라 생각한다.]


若有大戰陣(약유대전진) 立之以等力(입지이등력)

만약 커다란 싸움터가 있다면 (전쟁이 일어나면 보살은) 대등한 병력을 만들어서
If there are troops for a great battle, He establishes them with equal strength. 
菩薩現威勢(보살현위세) 降伏使和安(항복사화안)
보살의 威勢=능력과 권위를 나타내어, 항복받아 화평하고 편안하게 살게 한다네.
Through manifesting a bodhisattva’s power, He subdues them and reconciles peace. 


一切國土中(일체국토중) 諸有地獄處(제유지옥처)

일체 국토 중에 있는 온갖 지옥까지도
In all the lands, Where there are hells, 
輒往到于彼(첩왕도우피) 勉濟其苦惱(면제기고뇌) 輒 문득 첩
서슴없이 찾아가 즉시 그곳에 이르러 힘써 그들의 고뇌를 구제한다네.
He promptly goes forth, To relieve their suffering. 


一切國土中(일체국토중) 畜生相食噉(축생상식담) 噉 씹을 담

모든 국토 안에서 모든 축생들이 서로 물고 뜯으면 (잡아 먹으면)
In all the lands, Where animals feed upon each other, 

皆現生於彼(개현생어피) 爲之作利益(위지작이익)
보살은 그들에게 태어나 그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게 하네.
There he would always manifest his birth, To be of benefit to them. 

[지옥이란 인간으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며, 축생이란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고 어리석기가 개나 돼지나 소나 말과 같아서 미련하고 캄캄하게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지옥과 같은 고통을 받거나 축생과 같이 어리석거나 모두가 지혜가 없기 때문이므로 불교는 무엇보다 지혜를 강조한다.]


示受於五欲(시수어오욕) 亦復現行禪(역부현행선)

5욕의 몸을 받는 것을 보여 주나, 마음은 선정을 닦아 안온하며
He appears to receive the five desires, While also appearing to be in meditation, 

令魔心憒亂(영마심괘란) 不能得其便(부능득기편) 憒 심란할 궤
마군이 찾아와 마음을 어지럽히려 해도 그들이 기회를 얻지 못하게 하네.
So that the demons would be confused, Cannot find themselves getting their way. 


火中生蓮華(화중생연화) 是可謂希有(시가위희유)

불꽃 속에 핀 연꽃이 가히 희유=드물고 힘든 일이듯이
For a lotus flower to bloom among flames, It could be described as something rare. 

在欲而行禪(재욕이행선) 希有亦如是(희유역여시)

욕심 중에 있으면서 참선을 행함도 이와 같이 희유한 일이네.

Practice of meditation within desires, That is also thus of the same rarity. 

[육조혜능대사의 제자인 영가현각대사는 이 유마경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혜능대사에게 인가를 받고 돌아오면서 지은 증도가(證道歌)에는 이 부분의 내용이 나온다. “재욕행선지견력 화중생연종불괴(在欲行禪知見力 火中生蓮終不壞)”라고 하였다. “욕심 속에서 참선을 하는 것은 지혜의 힘이다. 마치 불꽃 속에서 연꽃이 핀 것과 같아서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인간은 누구나 욕심이 있다. 참선이든 염불이든 그 욕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는 수행이다. “욕심과 진심과 어리석음을 제거해야 수행이 된다.”라고 가르치는 불교는 저급한 방편불교다. 유마거사는 세속적 욕심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참선을 하는 것은 희유하고 특별한 일이라고 하였다. 가장 수승한 불교, 즉 신불교(新佛敎), 신대승불교(新大乘佛敎)는 쉬우면서 희유하고 특별하다. 제법무행경의 말씀처럼 “탐욕이 곧 도이고 진심과 어리석음도 또 그와 같다. 이 세 가지 중에 곧 일체불법이 다 갖추어져있는 것이다.”]

 

或現作婬女(혹현작음녀) 引諸好色者(인제호색자)

혹 어느 때는 음탕한 여인이 되어 온갖 호색한=好色者들을 유인해서

Or to appear as a seductress, To seduce all those who are lustful. 

先以欲鉤牽(선이욕구견) 後令入佛道(후령입불도) 鉤 갈고리 구 牽 끌 견

먼저 욕망의 갈고리로 끌어들인 후 佛道=부처님의 지혜에 들게 한다네.

First, seduce their minds with desire, Then lead them into the Buddha’s wisdom.
[사람을 이끌어 들이는 데는 동사섭(同事攝)과 같은 방편이 없다. 음탕한 사람을 교화하려면 자신도 음탕한 사람이 되어 함께 음탕한 짓도 하면서 나중에는 깨달음의 지혜에 들게 한다면 이 이상 더 훌륭한 교화방편은 없을 것이다.]


或爲邑中主(혹위읍중주) 或作商人導(혹작상인도)

혹 어느 때는 마을의 읍장이 되고, 혹은 상인을 이끄는 인도자가 되고

 Maybe appearing as a county official, Or perhaps as a merchant leader, 
國師及大臣(국사급대신) 以祐利衆生(이우리중생)
국사도 되고 대신이 되기도 하여 중생을 복되고 이롭게 하네.

A teacher of the state or a minister, To assist and benefit all sentient beings. 


諸有貧窮者(제유빈궁자) 現作無盡藏(현작무진장)

모든 빈궁한 자들에게는 무진장한 재산가가 되어

For all those who are destitute, He appears as an endless treasure. 
因以勸導之(인이권도지) 令發菩提心(영발보리심)

그들에게 베풀고 이끌어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보리심을 내게 하네.

Hence so as to persuade them, Lead them to initiate the bodhi mind.


我心憍慢者(아심교만자) 爲現大力士(위현대력사)

아상이 강해 교만한 자에게는 대역사로 나타나

For those who have an arrogant attitude, He appears as a powerful warrior, 
消伏諸貢高(소복제공고) 令住無上道(영주무상도)

갖가지 뽐내고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마음을 굴복시켜 위없는 길=無上道에 머물게 한다네.
To destroy their pride and arrogance, So that they abide upon the supreme path.


其有恐懼衆(기유공구중) 居前而慰安(거전이위안) 懼 두려워할 구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무리가 있으면 그들 앞에 나타나 위로하고 안심시켜서

When there are those feeling fearful, He goes up to them and reassures them. 
先施以無畏(선시이무외) 後令發道心(후령발도심)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베풀어 주고 마침내 도심을 일으키게 한다네.
First, to establish fearlessness, Then develop a mind seeking enlightenment.

[보시 중에 무외시(無畏施)이다. 세상에는 사람을 두렵게 하는 일이 여러 가지가 있다또한 사람이 스스로 두려워하는 경우도 많다사람들이 두려움에 떨 때 그를 위로하여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보시이다.]


或現離婬欲(혹현이음욕) 爲五通仙人(위오통선인)

혹 어느 때는 음욕을 멀리함을 나타내어 다섯 가지 신통력을 가진 선인(신선)이 되어

 Perhaps manifesting freedom from lust, As an immortal of the five powers, 
開導諸群生(개도제군생) 令住戒忍慈(영주계인자)

모든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어 계율과 인욕과 자비로움에 머물게 하네.
To enlighten all sentient beings, So that they may abide by the precepts, patience, and compassion. 

 

見須供事者(견수공사자) 現爲作僮僕(현위작동복)

공양을 구하는 자를 보면 그를 위하여 종이나 심부름꾼이 되고

When seeing someone in need of help, He appears to them as a servant, 
旣悅可其意(개열가기의) 乃發以道心(내발이도심)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도에 대한 마음을 일으키도록 한다네.

To serve them to their satisfaction, Then arouse a mind seeking awakening. 


隨彼之所須(수피지소수) 得入於佛道(득입어불도)

다른 사람이 필요호 하는 것을 따라서 얻게 하여 불도에 이끌어 들이고

Whatever that they need, By entering upon the Buddha’s Way, 
以善方便力(이선방편력) 皆能給足之(개능급족지)
뛰어난 방편의 힘으로 모든 것을 능히 흡족하게 마련해 준다네.

With the power of expedient means, All can receive them with abundance. 

[유마보살은 모든 분야에서 중생을 교화하려는 원력이 있으므로 어떤 성향의 사람이라도 위와 같은 계율과 인욕과 자비에 머물게 한다. 때로는 어린 종이 되어 시자노릇도 한다. 시자노릇을 잘하여 어른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러나 보살은 어른을 기쁘게 하여 끝내는 도에 대한 마음을 발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따라주며 불도에 들게 하는데 훌륭한 방편을 쓴다.]


如是道無量(여시도무량) 所行無有涯(소행무유애) 涯 물가 애

이와 같이 도는 무량하여 한량이 없고 행하는 것도 끝이 없으며

Thus, the Way is beyond measure. There is no end to his practice. 
智慧無邊際(지혜무변제) 度脫無數衆(도탈무수중)
지혜는 또한 끝없이 무한하여서 무수한 중생을 해탈케 한다네.

His wisdom is without bounds, Having liberated countless beings.


假令一切佛(가령일체불) 於無量億劫(어무량억겁)

가령 일체의 부처가 무량억겁에 걸쳐

 Even if all the Buddhas, In countless billions of kalpas,  Foolish, stubborn, or not using wisdom.  
讚歎其功德(찬탄기공덕) 猶尚不能盡(유상불능진)
그 공덕을 찬탄한다 해도 결코 다할 수 없다네.

Were to be praising his merits, It would still not be complete. 


誰聞如是法(수문여시법) 不發菩提心(부발보리심)

그 어느 누가 이 같은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랴.

Who can hear such a Dharma, And still not set their minds intent upon awakening? 
除彼不肖人(제피부초인) 癡冥無智者(치명무지자)肖 닮을 초

다만 저 불초하여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을 제외할 뿐.
Except for those who are unworthy,

[불교의 결론은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이다. 불도품의 불도란 곧 보살도이다.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보통의 사람이라면 위와 같은 보살의 삶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모두가 다 환희심을 발하리라 믿는다]

◎維摩詰偈頌

智度菩薩母(지도보살모) 方便以爲父(방편이위부)
智度=반야바라밀다(지혜)는 보살의 어머니이며, 방편바라밀로 아버지를 삼아

Wisdom is the mother of a bodhisattva, Skilful means the father, 

一切衆導師(일체중도사) 無不由是生(무불유시생)
일체 중생을 이끄는 스승(부처님)도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태어나질 않네.

The teacher of all sentient beings, and there are none not born from them. 

[불교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그 깨달음을 만천하에 가르침으로부터 출발합니다그와 같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가 지혜와 방편이라는 것을 통해서 성취된 것입니다-무비스님]

 

法喜以爲妻(법희이위처) 慈悲心爲女(자비심위녀)

법의 기쁨(dharmapramudit)으로 아내를 삼고, 자비심으로 딸을 삼고
The joy of the Dharma is his wife, The mind of compassion is the daughter, 

善心誠實男(선심성실남) 畢竟空寂舍(필경공적사)
성실을 아들로 삼아, 畢竟=마침내 공으로 돌아감이 나의 집이라네.
Benevolent mind and sincerity, the son, Absolute emptiness is the silent abode. 

[절 집안의 속설에 상좌가 하나면 지옥이 하나라는 말이 있다제자나 자식이나 사람의 인연이란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닌, 그야말로 진로번뇌다그런데 유마거사의 제자는 진로번뇌지만 그 진로번뇌가 마음 가는대로 따라 온다자식이나 상좌들이 모두 그렇게만 된다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그에 더하여 37조도품이 모두 나의 선지식이 되니 정각을 이루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으리라.]


弟子衆塵勞(제자중진노) 隨意之所轉(수의지소전)

여러 번뇌는 나의 제자가 되어 마음대로 따라 다스려 가고
The disciples are all the worldly afflictions, Which he changes at the dictates of his will. 

道品善知識(도품선지식) 由是成正覺(유시성정각)

37도품은 선지식이니, 그로 말미암아 正覺=깨달음에 이르네.
The qualities which facilitate awakening are his good friends, Through this, he attains enlightenment. 


諸度法等侶(제도법등려) 四攝爲伎女(사섭위기녀) 侶 짝 려

여러 바라밀다=度法은 모두 다 도반(벗)이며, 4섭법은 기녀일세.
The perfections are his Dharma companions. Four means of embracing are the courtesans.

歌詠誦法言(가영송법언) 以此爲音樂(이차위음악) 誦 욀 송

법을 노래하고  말씀을 읊조리니, 이들로 음악을 삼는다네. 

Chanting aloud the words of the Dharma, To regard it as the music. 


摠持之園苑(총지지원원) 無漏法林樹(무루법임수)

다라니=摠持의 동산과, 무루법의 숲에

A garden that is of total retention, The Dharma of non-outflow are the trees, 

覺意淨妙華(각의정묘화) 解脫智慧果(해탈지혜과)

7가지 깨달음의 꽃=七覺意의 청정하고 오묘한 꽃이 만발하고, 해탈과 지혜의 열매가 무르익네. 

The intent upon awakening is the pure and wonderful flowers, Liberation and understanding are the fruit. 


八解之浴池(해탈지욕지) 定水湛然滿(정수담연만) 湛 즐길 담

8해탈(8정도)의 연못에 삼매(선정)의 맑은 물=定水가 가득하니,
The eight types of emancipation is the bathhouse, Overflowing with the water of meditation. 

布以七淨華(포이칠정화) 浴此無垢人(욕차무구인) 
七淨華=일곱 가지 맑은 꽃들을 두루 흩어놓고, 모두 번뇌가 없는=無垢人들이 거기에서 목욕하네.
Spreading the seven flowers of purity, One bathing in this has no impurity. 

[七淨華= 7정(淨)이라고도 한다. 청정한 행을 비유한 것으로

①일상생활을 청정하게 하는 것=戒淨,

②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心淨,

③청정한 지혜에 의하여 신견(身見)을 끊고 바르게 보는 것=見淨,

④바르게 보고 의혹을 끊는 것=度疑淨,

⑤정도(正道)와 사도(邪道)를 바르게 보는 것=分別道淨, 道非道淨,

⑥번뇌를 끊고 지혜가 밝은 것=行斷知淨, 行知見淨,

⑦깨달음을 얻는 것=涅槃淨, 斷知見淨.]

 

[8해탈이란 곧 8정도를 뜻한다불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수행법이다. 마음에 선정을 얻은 결과로서 칠정화(七淨華), 즉 칠정(七淨)을 갖추어 한없이 넓고 큰 덕을 성취하였으므로 그 덕을 아름다운 꽃에 비유하여 칠정화라 한다.]


象馬五通馳(상마요통치) 大乘以爲車(대승이위거) 馳 달릴 치

다섯 가지 신통력은 코끼리와 말로 치달리고, 대승으로 수레를 삼아
The galloping of the five transcendental powers are the elephants and horses, Taking the Great Vehicle to be the chariot. 

調御以一心(조어이일심) 遊於八正路(유어팔정로)
한마음=一心으로 잘 몰아 가며 (일심으로 잘 다스려), 8정도의 길을 잘 간다네.
Single-mindedness is the directing control, Traversing freely upon the eightfold paths.

[대승법이라는 큰 수레에 무수한 사람들을 싣고 천안통천이통타심통숙명통신족통과 같은 신통력이 말이 되고 코끼리가 되어 일심법으로 조복하고 제어하며 정견(正見)으로 올바로 보고 정사(正思正思惟)로 올바로 생각하며정어(正語)로 올바로 말하며정업(正業)으로 올바로 행동하며정명(正命)으로 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며정근(正勤正精進)으로 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며정념(正念)으로 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며정정(正定)으로 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길에 노닌다.]

 

[調御以一心(조어이일심)= 나집의 설명에 의하면, 산스크리트 원본에는 ‘화합(和合)’이라고 되어 있다 하며, 그 화합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데, 수레를 잘 몰아서 마음대로 운전할 수 있는 것처럼 잘 다스리는 것을 화합이라고 했다(주유마힐경, 卍續藏 27, p.496上~下). 현장과 티베트 역에는 “깨달음에 나아가는 마음”이라고 되어 있으며, 지겸도 ‘도심(道心)’이라고 번역하여 같은 의견이다. 깨달음에 나아가는 마음은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는 마음이다.]

 

相具以嚴容(상구이엄용) 衆好飾其姿(중호식기자) 姿 맵시 자

32상을 갖추어 장엄하고, 80종호로 그 자태를 드러내어,
Complete with excellent marks to adorn appearance, A multitude of secondary characteristics as decoration. 

慚愧之上服(참괴지상복) 深心爲華鬘(심심위화만)
부끄러워 하는=慚愧의 옷을 입고, 깊은 마음은 꽃다발로 삼네.
Repentance is the upper garment, Determination is the necklace of flowers. 


富有七財寶(부유칠재보) 敎授以滋息(교수이자식)

7가지 재보=七財의 보물을 재산으로 (佛法의) 가르침을 자애로운 휴식으로 삼아
The seven treasures are his wealth, The growth of interest is guiding others. 

如所說修行(여소설수행) 迴向爲大利(회향위대리)
如說=가르침대로 수행하여 깨달음으로 회향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네.
He practices according to explanation, And the greatest benefit is to give back. 

[七財寶= 7성재(聖財)라고도 한다.

①바른 가르침을 믿는 것=信,

②계를 지키는 것=戒,

③보는 것을 버려서 보시하는 것=施,

④바른 가르침을 많이 듣는 것=聞,

⑤진실한 지혜를 얻는 것=慧,

⑥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것=慚,

⑦타인(他人)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나'는 '우리'의 일부분이고, 구성의 한 개체입니다. 그런데, '나'를 '우리'의 중심으로 알고, 전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증장시키는 일은 중요한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일이 자신을 파괴 할 수도 있습니다.

중도, 팔정도와 같은 반듯한 길을, 조심조심 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우리'에서 도태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사랑하고 증장시키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기' '아만' '아상'이라고 부릅니다.-남일스님]


四禪爲牀座(사선위상좌) 從於淨命生(종어정명생)

4선(사선정)의 자리를 펴고 앉아 (사선정의 수행으로), 淨名=청정한 생활을 따라 살며,
The four meditations as the seat, With which a pure life is born.

多聞增智慧(다문증지혜) 以爲自覺音(이위자각음)
많이 배움=多聞으로써 지혜를 늘려 가고, 스스로 깨달음=自覺을 음성으로 삼네.
 Wisdom grows from hearing widely, It is the sound of self-realization. 

[정명(淨名)= 비구가 걸식으로 깨끗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

[사선(四禪)은 사선정이다우리들의 마음을 닦아서 일체의 어지러운 생각을 없애고 절대의 진리와 일치시키는 과정을 네 단계인 초선이선삼선사선으로 나눈 것]

 

甘露法之食(감로법지식) 解脫味爲漿(해탈미위장) 漿 미음 장

이익이 되는 가르침=감로의 법은 밥이요, 해탈의 맛으로 간장을 삼으며,
The nectar of the Dharma as food, The flavor of liberation is the sauce. 

淨心以澡浴(정심이조욕) 戒品爲塗香(계품위도향)
맑은 마음으로 목욕하고, 계를 잘 지킴=戒品을 향수로 삼아 몸에 바르네.
Washes in the mind’s purification, The precepts serve as his ointment. 

[감로의 법이란 불사(不死)의 법이다생사를 초월한 법으로 밥을 삼고 그 법에 의하여 해탈하는 것은 간장이다지금의 반찬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摧滅煩惱賊(최멸번뇌적) 勇健無能踰(용건무능유) 踰 넘을 유

(바른 마음을 훔쳐가는) 번뇌의 도적을 무찌르니, 그 용감함은 누구보다 뛰어나며,
Destroying the thief of afflictions, His courage is unparalleled. 

降伏四種魔(항복사종마) 勝幡建道場(승번건도량) 幡 기 번
네 가지 마군을 항복받아, 승리의 깃발을 도량에 휘날리네.
Subduing the four kinds of demons. He establishes the victory banner upon the position of awakening. 

[자신의 번뇌를 이기는 사람은 전쟁에서 천군만마를 이기는 사람보다 우수하고 용감하다네 가지 마군이란 번뇌마(煩惱魔), 온마(蘊魔), 천마(天魔), 사마(死魔)이이와 같은 마군들을 항복 받고 또 수많은 종파들의 주의주장을 정법으로 이긴 승리의 깃발로 도량을 건립한다는 것이다]

 

[四種魔= ①5온(蘊:五陰)은 죽음이 작용하는 대상이므로 이는 악마이다=五陰魔

②번뇌는 내생(來生)의 근원이며 죽음을 초래한다=煩惱魔,

③죽음 그 자체=死魔

④죽음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天子魔.]

 

雖知無起滅(수지무기멸) 示彼故有生(시피고유생)

생과 멸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태어나고 죽는 단계를 벗어났지만),

(중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짐짓 생사를 보여 주는 것을
Though knowing nothing arises or perishes, He show there is birth for the sake of demonstration. 

悉現諸國土(실현제국토) 如日無不見(여일무불견)
온갖 국토에 남김없이 나타내나니, 마치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네.
Revealing the various lands of the world, Like the sun, which none doesn’t see. 


供飬於十方(공양어시방) 無量億如來(무량억여래)

시방 3세의 한량없는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지만,
He makes offering to ten directions, For the countless hundred million Buddhas. 

諸佛及己身(제불급기신) 無有分別想(무유분별상)
그 모든 부처님과 (나 자신) 중생을 분별하는 마음이 전혀 없네.
All the Buddhas and oneself, there are no distinctive thoughts. 

[필자=무비스님이 주창하는 인불사상(人佛思想)이란 모든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라는 뜻이다유마거사가 시방의 무량 억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되 부처님과 자신을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 곧 인불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다른 사람이 부처님이라면 자신도 부처님이기 때문에 분별하는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만약 석가모니와 같은 특정한 부처님만을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무량 억만 부처님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지금 그대로 부처님으로 이해할 때 가능한 이야기다불교의 궁극적 가르침을 최승불교(最勝佛敎)라고 한다면 그 최승불교는 사람 사람이 본래로 복덕과 지혜를 더 닦아야 한다거나 번뇌와 망상을 더 제거해야 할 필요가 없이 지금 그대로 완전무결한 부처님이라는 인불사상을 근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雖知諸佛國(수지제불국) 及與衆生空(급여중생공)

비록 諸佛國=모든 부처님의 나라와 더불어 모든 중생들 모두가 공함을 알지만,
Although knowing the kingdoms of the Buddhas  And that all living beings are empty, 

而常修淨土(이상수정토) 敎化於群生(교화어군생)
항상 정토의 행을 닦아 모든 중생을 교화하네.
Yet he always cultivates the pure land, To teach and transform sentient beings. 

[보살의 국토와 중생에 대한 안목은 이렇다모든 국토는 지금 현재 그대로 청정한 화장장엄 불국토이며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모두가 부처님이다보다 좀 낮은 견해라면 국토와 중생이 다 텅 비어 공하다고 본다그와 같은 견해로서 국토를 청정하게 닦으며 또한 중생을 교화한다이와 같은 안목을 중도적 안목이라 한다.]

 

諸有衆生類(제유중생류) 形聲及威儀(형성급위의)

(모든 능력을 갖춘 보살은) 모든 곳의 중생들에게 형상과 소리와 몸가짐=威儀와
All the various kinds of sentient beings, Their sound, form and stately manner, 

無畏力菩薩(무외력보살) 一時能盡現(일시능진현)
두려움 모르는=無畏力을 보살을 일시에 능히 다 나타내 보인다네.
The bodhisattva with the fearlessness and powers, Can manifest them all in an instant. 

[대승의 보살은 이런 정도의 마음과 능력을 가진 분들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마음들을 바라보는 요즘입니다.

마치 갑자기 불어왔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오후나절의 바람을 보고 앉아 있는 느낌입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분명 왔다가 간 흔적은 남은. 바람. 마음의 번뇌라는 것도 그런 것이겠지요.

그러나 떠나간 바람에 마음을 더 이상 두지 않듯, 지나간 번뇌에도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미 지나간 번뇌인데, 그 번뇌를 잊지 못하여 두려움, 그리움, 미안함, 집착함을 자꾸 더하다보면, 결국 마음이 번뇌에 지배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또한 아직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남일스님]



又如殖種於空(우여식종어공) 終不得生(종불득생) 糞壤之地乃能滋茂(분양지지내능자무)

, 흙덩이 불을 우거질 , 무성할

또한 마치 허공에 종자 심으 싹이 끝내 날 없지만, 똥과 흙의 거름으로 비옥한 땅=糞壤之地에서는 무성하게 자라는 것과 같으며,

It is also like a seed planted in the void, which will never be able to grow. But if you sow the seed upon a soil that’s fertile with manure, it will grow and flourish. 

 

如是入無爲正位者(여시입무위정위자) 不生佛法(불생불법)

이와 같이 무위의 올바른 경계=정위에 들어간 사람은 불법에서 일으키지 않지만, 

Thus, the ones who enters the unconditioned place of awakening cannot grow the Buddha’s Dharma. 


起於我見如須彌山(기어아견여수미산) 猶能發于(유능발우)

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生佛法矣(생불법의)!

'나'라는 고집=我見 수미산과 같이 일으키는 사람은 오히려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 불법을 일으킬  있으니, 

While those who raise a view of a self as large as Mount Sumeru can still develop an aspiration for attaining unsurpassed complete perfect enlightenment and bring forth the Buddha’s Dharma.


是故當知(시고당지) 一切煩惱(일체번뇌) 爲如來種(위여래종)

그러므로 마땅히 일체 모든 번뇌가 여래의 종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Therefore, you should know that all afflictions are the seed of the Tathagata. 

 

譬如不下巨海(비어불하거해) 不能得無價寶珠(부능득무가보주)

비유하자면 마치 大海=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값을 매길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을 능히 얻을 없는 것과 같이

For instance, if one does not go into the ocean, one can never obtain a priceless pearl. 


如是不入煩惱大海(여시불입번뇌대해) 則不能得一切智寶(증부능득일체지보)

번뇌의 대해에 들어가지 않으면 一切智=일체지혜 보물을 얻을  없는 것입니다.'

So likewise, it is impossible to attain all the treasures of wisdom without entering the ocean of afflictions.

[사람에게는 번뇌가 있고, 세상에는 악이 있기 때문에 여래가 있고 불교가 필요한 것이다.]

 

◎大迦葉歎言

爾時大迦葉歎言(이시대가섭탄언) 善哉善哉(선재선재) 文殊師利(문수사리) 快說此語(쾌설차언)

그 때에 가섭이 찬탄하며 말하였다.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문수사리여, 이러한 말씀을 명쾌하게 설하시니, 

At this point, Mahakasyapa sighted and said, Wonderful! Wonderful! Manjusri, these words of yours are truly well-spoken. 

[여기서 가섭존자는소승불교의 최고 단계인  '아라한(阿羅漢)'을 상징하며, 아라한은 번뇌를 떠난 수행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번뇌가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번뇌 = 아뇩다라삼먁사보리심'이라는 공식에서 보면, 아라한은 번뇌가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없다는 말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고(苦)=번뇌(煩惱)=삶=오온(五蘊)'이라는 공식이 다시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몸과 정신을 이루는 오온과 그 오온으로부터 생기는 모든 고(번뇌)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가 되려면 번뇌를 회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의 고통으로부터 아묙다라삼먁삼보리심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부분입니다.-남일스님]

 

誠如所言(성여소언) 塵勞之疇爲如來種(진노지주위여래종) 疇 두둑 주 

진실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塵勞之疇=온갖 번뇌의 벗이 여래의 종자가 됩니다. 

Indeed, as you said, the companions of worldly afflictions are the seeds of the Tathagata. 

 

我等今者(아등금자) 不復堪任發(불수감임발) 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이제 다시 저희들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But for those like us, we are no longer capable of aspiring to attain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乃至五無閒罪(내지오무간죄) 猶能發意生於佛法(유능발의생어불법)

而今我等永不能發(이금아등영불능발)

또한 설사 5무간 지옥에 떨어질 죄를 지었다 하여도 오히려 능히 뜻을 내어 불법을 일으킬 것이나, 지금 저희들은 영원히 (그 마음을)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Even those who have committed the five rebellious acts can still give rise to the Buddha’s Dharma. Yet we are now forever unable to generate such aspiration.

[번뇌가 바로 여래의 씨앗이기에 번뇌가 없는 우리('아라한'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생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저 오무간지옥에 갈 정도의 죄를 지어야 부처님 가르침에 뜻을 낼 수 있다 하셨는데, 우리는 이제 아라한이 되어 영원히 불법의 뜻을 낼 수 없으니] 

 

譬如根敗之士(비여근패지사) 其於五欲不能復利(기어오욕불능부리)

비유하자면, 마치 根敗=육근의 불구자가 된 사람은 5욕락을 다시 만족시킬 수 없는 것과 같이 

It is as if we are now people whose sense faculties are defective and can no longer enjoy the five desires.

 

如是聲聞諸結斷者(여시성문제결단자) 於佛法中無所復益(어불법중무소부익)

永不志願(영불지원)

그와 같이 모든 결박(번뇌)를 끊은 성문(아라한)은 불법 안에 더 이상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으니, 앞으로 (그러한) 서원을 영원히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Thus, sravakas who have severed all the mental fetters, can no longer have any further benefits from the Buddha’s teachings, and will never have the aspiration.


是故文殊師利(시고문수사리) 凡夫於佛法有返復(범부어불법유반복) 而聲聞無也(이성문무야)

그러므로 문수사리여, 범부는 불법에 다시 회복할 수 있지만(돌아 오지만) 성문은 그렇지 못합니다.

So, Manjusri, an ordinary person can still return to the Buddha’s Dharma, but a sravaka can not. 

[凡夫於佛法有返復(범부어불법유반복)= 이 문을, 나집은 “불법(佛法)으로 다시 되돌아온다”고 했으나 승조(僧肇)는 이것을 주석하여 “범부는 법(法)을 듣고 능히 불(佛)의 종(種)을 이을 수가 있으니, 곧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여 불법으로 되돌아옴[反復]이 있다(僧肇 選, 󰡔注維摩詰經󰡕, 卍續藏 27, p.492下)”고 했다. 현장, 티베트 역은 “불은(佛恩)에 보답한다”이다.]

 

所以者何(소이자하) 凡夫聞佛法(범부문불법) 能起無上道心(능기무상도심) 不斷三寶(부단삼보)

왜냐 하면, 범부는 불법을 들으면 능희 최상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無上道心을 내어서 불․법․승 3보를 단절하지 않지만, 

Why? Upon hearing the Buddha’s Dharma, a common individual can conceive the intent of attaining unsurpassed enlightenment and does not cut off the Three Jewels. 

 

正使聲聞(정사성문) 終身聞佛法(종신문불법) 力無畏等(역무외등)

永不能發無上道意(영부능발무상도의)

정작 성문은 설사 목숨을 마치도록 불법의 십력과 두려움 없음=4無畏 등을 들어도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영원히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But for a sravaka, even if he spends his entire life listening to the Buddha’s Dharma, powers, fearlessness, and others, he would still never be able to conceive the intent for attaining unsurpassed enlightenment. 

[불교는 참다운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인생과 세상의 바르고 참된 이치를 깨우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가르침이다이 유마경은 그와 같은 불교를 공부하노라 하면서 엉뚱하게도 길을 잘못 들어 존재의 참된 이치를 모르고 치우치고 편벽된 좁은 소견에 사로잡혀서 오히려 불교를 아예 공부하지 않은 사람보다도 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소승적 삶을 사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깨우쳐서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는 지극한 가르침이다. 소승성문의 대표격인 대가섭 존자의 입을 통해서 스스로 토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선불교에서 대가섭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한다면 야기될 문제가 매우 많을 것이다.]

 

爾時會中有菩薩(이시회중유보살) 名普現色身(명보현색신) 問維摩詰言(문유마힐)

그때 이 법회 가운데 한 보살이 있어, 이름이 보현색신(sarvarpasadarana)이라는 보살이 유마힐에게 물었다.

Thereupon, a bodhisattva in the assembly named Universally Manifest Form Body asked Vimalakirti, 

 

居士(거사) 父母妻子(부모처자) 親戚眷屬(친척권속) 吏民知識(사민지식)

悉爲是誰(실위시수)?戚 겨레 척 僕 종 복

거사님, 그대의 부모와 처자, 친척, 권속, 하인=吏民, 벗(도반)=知識, 이들은 모두 어떤 사람들이며(누구이며), 

Who are your parents, wives, relatives, subordinates, servants, and friends? 

 

奴婢僮僕(노비동복) 象馬車乘(상마거승) 皆何所在(개하소재)?

노비와 심부름꾼=僮僕, 코끼리와 말, 수레 따위는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Where are the indentured servants, boy servants, elephants, horses, chariorts, and carriages? 


於是維摩詰以偈答曰(어시유마힐이게답왈)

이에 유마힐은 게송으로 답하였다.
Thereupon, Vimalakirti replied with a verse:

[반드시 알고 읽어야 하는 유마경 핵심주제-남일스님

첫째. ‘현실의 국토가 불국토(정토)’, 불국토라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현재 살고 있는 이곳이라는 것입니다. '불국품'에서 “직심(直心), 심심(深心), 보리심(菩提心)이 보살의 정토이다.” “이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도 청정하다.”라고 하여 정토(불국토)라는 것은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보살(사람들)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실천하고 표현해서 마음과 행위를 같게 한다면 현실국토(고통의 땅)가 바로 정토(불국토. 행복의 땅)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둘째. 자비정신의 실천입니다. '문질품'에서 “어리석음과 탐욕, 성내는 마음으로부터 내 병이 생겼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병에 걸려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일 모든 중생들의 병이 나으면, 그때 내 병도 나을 것입니다.”라는 유마거사의 말은 중생과 고통을 함께하는 보살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보살(우리들)의 병은 자비로운 마음에 의해서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보살 (우리들)의 병은 이 자비를 실천하여야 치유되며, 타인의 치유에 의해서 보살(우리들)도 함께 치유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번뇌에 싸인 중생(병든 중생)들을 깨달음(치유)에로 인도하는 것이 보살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병을 치유해주기 위해서는 5무간죄. 지옥, 아귀, 축생의 3악도. 탐, 진, 치의 3독에 몸을 던지면서도 주저하거나, 망설이거나, 비하려하거나, 무서워하거나 하는 마음 없이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옥을 갈지언정, 이것이 자비로 누군가를 치유해 줄 수 있다면, 그 길을 가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보살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평등과 존중의 불이사상(不二思想)입니다. 출가, 재가. 부처와 중생. 정토(행복의 땅)와 예토(불행의 땅). 보리(깨달은 즐거운 마음)와 번뇌(힘들고 지친 중생마음)와 같은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는 불이(不二)사상을 통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들어가야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장 이상적인 ‘진리’는 사실 볼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글로 적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직 자신의 확실한 신념과 의지에 달려 있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넷째. 중생들에게 모두 깨달음의 가능성이 있음을 말합니다. 유마거사는 현실의 인간이 비록 번뇌를 가지고 악을 행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악인줄 알고, 번뇌인줄을 알아서 바꿀수만 있다면,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체의 번뇌가 곧 부처의 씨앗이다.”라고 하여 부처님 가르침은 이러한 중생의 번뇌에 기인하고, 그것을 고쳐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示有資生(시유자생) 而恒觀無常(이항관무상) 實無所貪(실무소탐)

재물이 있음을 보이나, 항상 무상을 관찰하여 실로 탐내는 바가 없으며, 

Shows himself possessing the necessities of life, yet constantly observing impermanence, and is truly free from greed. 

 

示有妻妾采女(시유처첩채녀) 而常遠離五欲淤泥(이상원리오욕어니)

아내와 첩과 채녀가 있음을 보이나, 항상 5욕의 진흙탕에서 멀리 떠나 있으며, 

Reveals to have wives, concubines, and maids while always removed from the sludge of the five desires. 

 

現於訥鈍(현어납둔) 而成就辯才(이성취변재) 摠持無失(총지무실)

訥 말더듬을 눌, 말 더듬거릴 눌, 鈍 무딜 둔, 둔할 둔

말이 어눌하고 둔함을 보이나, 변재를 성취하여 惣持=모든 것을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으며, 

Appears to join those who are slow of speech and blunt while having attainment of eloquence, with total retention that has no loss. 

 

示入邪濟(시입사제) 而以正濟(이이정제) 度諸衆生(도제중생)

邪濟=삿된 가르침에 들어감을 보이나, 正濟=바른 가르침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며, 

Appears to conform with the unorthodox to help people, yet accords with what is correct to deliver all sentient beings. 

 

現遍入諸道(현편입제도) 而斷其因緣(이단기인연)

여러가지 세속의 도에 두루 빠져드는 것을 보이나, 그 인연을 끊으며, 

He appears to be entering the various paths while severing causes and conditions. 

 

現於涅槃(현어열반) 而不斷生死(이부단생사)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을 보이나, 생사를 끊어 없애지 않으며, 

Appears to be in nirvana, yet not ceasing birth and death. 

 

文殊師利(문수사리) 菩薩能如是行於非道(보살능여시행어비도) 是爲通達佛道(시위통달불도)

문수사리여, 보살이 능히 이와 같이 도 아닌 길=非道를 행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불도에 통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Manjusri If a bodhisattva can in this way conform with the heterodox paths, that is to understand thoroughly the Way of the Buddha. 

 

如來種(여래종)
於是維摩詰問文殊師利(어시유마힐문문수사리) 何等爲如來種(하등위여래종)?
그 때에 유마힐이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무엇을 여래의 근본=如來種(tathgata-gotra)라 합니까?'

Then Vimalakirti asked Manjusri, What is the seed of Tathagata?


文殊師利言(문수사리언) 有身爲種(유신위종) 無明有愛爲種(무명유애위종)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有身(satkya)=몸이 있음이 여래의 종자가 되며,

무명과 생존에 대한 집착=有愛(bhava)가 그 종자이며, 

Manjusri said, To have a body is a seed; ignorance and having infatuation are the seeds. 

 

貪恚癡爲種(탐에치위종) 四顚倒爲種(사전도위종) 五蓋爲種(오개위종)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그 종자이며, 4전도(vipary)와 다섯 가지 번뇌=5蓋(paca-varani)가 그 씨앗이며, 

Four inverted views are the seeds, and the five obstructions are the seeds. 

[전도(顚倒), 미혹하여 바른 견해, 바른 이치, 본연의 상태인 것에 반(反)하여 진리에 어긋나게 보는 것, 즉 거꾸로 된 생각, 그릇된 생각, 그릇된 얽매임, 도리에 어긋난 생각이나 미혹하여 갈피를 못 잡는 것.

사전도(四顚倒)=사종전도(四種顚道), 사도(四倒), ① 무상(無常) ②무락(無樂) ③부정(不淨) 또는 무정(無淨) ④무아(無我), 상(常) 전도, ②낙(樂) 전도, ③아(我) 전도, ④정(淨) 전도 등 4 가지의 진리와 배반한 견해를 취하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이 빠져 있는 네 가지 그릇된 견해이다.]

[5개(五蓋, 산 pañca āvaranāni, five hindrances)는 《잡아함경》 등의 초기불교 경전에 따르면 고타마 붓다가 설한, 마음에 번뇌를 일으키고 지혜를 약하게 하는 5가지의 장애[障] 또는 덮개[蓋]를 말한다. 이들은 막히게 하고 걸리게 하는 법으로, 밝음[明]이 아니고 바른 깨달음[正覺]이 아니어서, 열반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달리 말하면, 이 5가지 법들은 심성(心性)을 은폐하고[覆] 덮어 가려서[蓋] 선법(善法)을 낼 수 없게 한다. 즉, 마음을 덮어 선심(善心) 또는 청정심(清淨心)을 내는 것을 가로막는다.
①탐욕개(貪欲蓋, rāga-āvarana): 탐욕, 5욕(五欲)에 집착하는 것
②진에개(瞋恚蓋, pratigha-āvarana): 성냄, 성내는 것
③혼면개(惛眠蓋, styāna-middha-āvarana) 또는 혼침수면개(惛沈睡眠蓋): 게으름, 마음이 흐리고 몸이 무거워지는 것
④도회개(掉悔蓋, auddhatya-kaukrtya-āvarana) 또는 도거악작개(掉舉惡作蓋): 들뜸, 마음이 흔들리고 근심 또는 후회하는 것
⑤의개(疑蓋, vicikitsā-āvarana): 의심, 즉 법에 대하여 결단하지 못하고 미루는 것
5개를 대치(對治)하는 선법(善法)은 염각지(念覺支) · 택법각지(擇法覺支) · 정진각지(精進覺支) · 희각지(喜覺支) · 경안각지(輕安覺支) · 정각지(定覺支) · 사각지(捨覺支)의 7각지(七覺支)이다. 7각지는 마음에 번뇌가 일어나게 하지 않고 지혜를 더욱 자라게 하며, 밝음[明]이 되고 바른 깨달음[正覺]이 되어 열반으로 나아가게 한다.]

 

六入爲種(육입위종) 識處爲種(칠처위종) 八邪法爲種(팔사법위종)

6입(sat-yatana)이 그 종자이며, 7識處=일곱 가지 마음가짐이 그 종자이며, 8邪法=여덟가지 삿된 법이 그 종자이며, 

The six sense objects are the seeds, and the seven kinds of consciousness are the seeds. Eight false teachings are the seeds.

[6입(六入) ṣaḍāyatana, six sense gates, six sense bases, 6처(六處) · 6입처(六入處) · 내6입(內六入) · 내6입처(內六入處) · 6내입처(六內入處) · 6정(六情) · 제입(諸入) · 6촉입처(六觸入處) · 6촉처(六觸處) · 6갱락처(六更樂處) 또는 6근(六根)이라고도 한다. 6입은 명색연6입(名色緣六入)과 6입연촉(六入緣觸)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명색연6입 또는 연명색6입은 명색(名色)이 있으므로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이 있다는 뜻이고, 6입연촉 또는 연6입촉은 6입 즉 6처 즉 6근이 있으므로 촉(觸)이 있다는 뜻이며, 이들은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에서 6입(六入)을 6입처(六入處)라고 부르고 있는데, 부처님의 설명에 따르면 안입처(眼入處) · 이입처(耳入處) · 비입처(鼻入處) · 설입처(舌入處) · 신입처(身入處) · 의입처(意入處)의 6내입처(六內入處)를 말한다.
입(入)과 처(處)가 합쳐서 이루어진 입처(入處)는, 입(入)은 섭입(涉入: 거두어들임) 또는 촉입(趨入: 재촉하여 들임)의 뜻으로 6근(六根)과 6경(六境)이 서로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처(處)는 소의(所依) 즉 발동근거 · 의지처 · 도구라는 뜻으로, 6경에 대하여 6식이 생겨날 때 6근이 소의 즉 발동근거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입처(入處)는 6식의 수동적 작용이라는 입장에서는 6근과 6경이 서로를 거두어 들여서 6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또한, 6식의 능동적 작용이라는 입장에서는, 입처(入處)는 6식이 6근을 통해 6경을 거두어들임으로써 6경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앎 또는 요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대상과 관련된 여러 가지 마음작용들이 일어나는 것도 포함하는 말이다. '아비달마구사론'에 따르면, 처(處)는 생장문(生長門)을 뜻하는 것으로, 마음과 마음작용이 생겨나게 하고 증장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을 뜻한다. 즉, 6근은 6식 즉 마음의 단순한 인식도구일 뿐만 아니라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을 현행하게 하고 그 세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6근 가운데 의근(意根)의 경우 이러한 점이 두드러진다.
명색연6입(名色緣六入) 또는 연명색6입(緣名色六入), 즉 명색(名色)이 있으므로 6입(六入)이 있다는 것은 심신(心身)의 그릇된 상태 즉 심신의 부조화가 있기 때문에 6입 즉 6처 즉 6근의 그릇된 상태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6식 즉 마음이 6경을 인식할 때 6근이 인식도구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생겨나기도 하고 혹은 마음과 마음작용을 생겨나게 하고 증장시키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때로는 그릇된 방향으로 생겨나게 하고 증장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명색연6입(名色緣六入) 또는 연명색6입(緣名色六入)은 또한 이미 발생한 6입 즉 6처 즉 6근의 그릇된 상태가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심신(心身)의 그릇된 상태 즉 심신의 부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7識處=일곱 가지 마음가짐, 중생의 마음이 과보를 받아 거기에 머물기를 구하는 일곱 가지 안식처, 즉 유정의 심식(心識)이 머물기를 좋아하는 7주처로 색계의 3곳과 무색계의 3곳을 말하며, 초기불교 경전인 '중아함경' 제24권 등의 고타마 붓다의 설법에서 유래한 불교 교의로, 문자 그대로는 3계의 유정들의 식(識) 즉 마음이 편안히 머무는 곳을 뜻한다.
유정이 지은 바 업에 따라 과보로서 받는 3계의 처소 가운데 유정의 의식[識]이 특히 애락(愛樂)하여 머무는 다음의 7가지 처소 또는 하늘[天]을 말하나,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유정의 의식[識]이 애착하여 머무는 일곱 영역을 뜻한다.

①욕계의 인간이나 천상의 세계 및 겁의 초기를 제외한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인 신이상이식주처(身異想異識住處),

②겁 초기의 초선천인 신이상일식주처(身異想一識住處),

③제2선천(第二禪天)인 신일상이식주처(身一想異識住處),

④제3선천인 신일상일식주처(身一想一識住處),

⑤무색계(無色界)의 공무변천처(空無邊天處)인 공무변처(空無邊處),

⑥무색계의 식무변천(識無邊天)인 식무변처식주처(識無邊處識住處),

⑦무색계의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인 무소유처식주처(無所有處識住處)이다.]

 

[8邪法=여덟가지 삿된 법, 8정도에 반대되는 것이다. 8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여기서 정견은 나머지 일곱을 달성하기 위한 조건이다.]

 

九惱處爲種(구뇌처위종) 十不善道爲種(십불선도위종)

9뇌처가 그 씨앗이 되며, 10불선도 모두가 그 씨앗이며, 

The nine sources of afflictions are the seeds, and the ten unwholesome paths are the seeds. 

[구뇌처(九惱處) 나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 나의 친구를 미워하는 것, 내 몸이 세 가지 시끄러운 곳인데 이 셋을 과거, 현재, 미래로 분별하면 아홉이 된다.

구뇌처(九惱處)= 석존도 인과의 법에 따라 전생의 인연에 의하여 금생에서 받는 아홉 가지 고뇌가 있었다 한다. 

①깨달음을 얻기 전의 6년 동안의 고행, 

②바라문의 여인 손타리(孫陀利)가 한 비방(誹謗), 

③전다녀(旃茶女)가 아이를 배태했다고 하는 비방,

 ④제바달다(提婆達多)가 바위를 떨어뜨려 발가락에 상처를 입힌 것, 

⑤목창(木槍)으로 발을 다친 일, 

⑥석가족이 유리왕(流離王)에게 살육을 당한 일, 

⑦아기달다(阿耆達多) 바라문의 초청을 받아 마맥(馬麥)을 여러 달 동안 먹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 

⑧동지 전후의 8일간을 3의(衣)만으로 추위를 견뎌야 했던 일, 

⑨걸식(乞食)을 나갔어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다.]

 

以要言之(이요언지) 六十二見(육십이견) 及一切煩惱(급일체번뇌) 皆是佛種(개시불종)

요점을 말한다면 62견이나 모든 사견과 일체 번뇌가 모두 부처의 종자가 됩니다.

In a nutshell, the sixty-two views and all afflictions are the Buddha’s seeds.

[여래의 종자, 여래의 근본은 일반 불교에서는 버려야 하고 제거해야 하고 끊어야 하고 없애야 하는 악과 번뇌와 삿된 견해들이다.]

[62견(六十二見)은 초기불교 경전 등에서 외도(外道)의 모든 견해 또는 사상을 62종으로 분류한 것으로 '62가지의 모든 (외도의) 견해'라는 뜻에서 62제견(六十二諸見) 또는 '62가지의 (외도의) 견해와 내용'이라는 뜻에서 62견취(六十二見趣)라고도 불리며,간단히 줄여서 62(六十二)라고도 한다. 본겁본견 (18견)과 말겁말견 (44견)을 주로 말한다]

 

() 何謂也(하위야)?

유마거사가 다시 물었다 '그것은 왜 그러합니까?'

Vimalakirti asked, why do you say that?

 

答曰(답왈) 若見無爲入正位者(약견무위입정위자) 不能復發(부능부발)

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문수사리가 답하여, '무위(asaskta) 보고 올바른 깨달음의 지위=正位 들어간 사람은 다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니

Manjusri replied, By perceiving the unconditioned and enters the place of awakening, one cannot again aspire for unsurpassed complete perfect enlightenment.

 

譬如高原陸地(비여고원육지) 不生蓮華(불생연화) 卑濕淤泥乃生此華(비슴어니내생차화)

비유하자면 마치 메마른 고원의 육지에서는 연꽃이 자라지 않지만 더럽고 습한 진흙땅에서는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For example, a lotus flower cannot grow on a highland plateau but can only grow upon the lowly place of muddy, silty wetlands. 

 

如是見無爲法入正位者(여시견무위법입정위자) 終不復能生於佛法(종불부능생어불법)

이와 같이 무위법을 보고 올바른 깨달음의 경계에 사람은 마침내 다시는 불법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것이며,(다시는 불법 중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며) 

In this way, those who see the unconditioned Dharma and enters the place of awakening will never again be able to be born in the Dharma. 


煩惱泥中(번뇌니중) 乃有衆生起佛法耳(내유중생기불법이)

번뇌의 진흙 속에 있는 중생이라야 불법의 마음을 일으킬 뿐입니다.'

Whereas the sentient beings in the mud of mental afflictions can give rise to the Buddha’s Dharma. 

[이 대목에서 유명한, 고원육지 불생연화 비습어니 내생차화(高原陸地 不生蓮花 卑濕淤泥 乃生此華)라는 명언이 등장하였다. 앞에서 온갖 번뇌와 삿된 견해가 모두 여래의 종자라고 하니 유마거사도 놀라고 의아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여래의 종자란 달리 표현하면 불교며, 불법이다. 곧 연꽃을 비유하여 처렴상정(處染常淨)의 내용으로 설명하였다. 연꽃은 결코 높은 언덕이나 육지나 잘 다듬어진 화단에는 피지 않고 낮은 곳, 더러운 곳, 습한 곳, 진흙탕에서 핀다. 불법은 온갖 번뇌와 악과 부정과 부패와 시비와 갈등과 고통과 어려움과 아픔 가운데서 꽃을 피우고 또 그와 같은 곳에 불법이 필요하다. 여래는 세상이 그와 같은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오신 것이며 연꽃과 같은 가르침을 펼쳐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이와 같이 무위법을 보고 바른 지위에 들어간 사람은 마침내 다시는 불법 중에 태어나지 아니하고 번뇌의 진흙 속에 중생이 있으므로 그곳에서 불법을 일으킬 뿐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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