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者子善德

[보살(菩薩) bodhisattva , 보리살타, 보살마하살, 각유정=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므로 누구나 보살일 수 있다. 몇몇 특정한 보살들은 영원한 부처의 화현이자 위대한 구세주로 존중되고 있으며,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종종 역사상의 부처보다도 더욱 친근한 신앙의 대상으로 숭앙되고 있다.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자신의 궁극의 목표인 열반(涅槃)을 연기하겠다고 하는 보살의 서원(誓願)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 이전의 소승불교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아라한(阿羅漢 arhat)이나 스승의 지도없이 홀로 깨달음에 이르는 독각불(獨覺佛 pratyeka-buddha)을 이상적 전형으로 삼고 있었으나, 대승불교에서는 그러한 전형들을 개인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위와 같은 보살의 전형을 강력하게 내세워 그 위상을 높였던 것이다.
이러한 보살의 개념은 자비(慈悲 karuṇā)의 가치를 지혜(智慧 prajñā)의 가치에 대등하도록 고양시켜 주었다. 여기에서 보살은 특히 신도들에게 자신이 쌓은 공덕(puñña)을 이전해줌으로써 자비를 실천한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보살이 되겠다는 서원을 세울 수 있고, 일단 서원을 세우기만 하면 '십지'(十地 daśa-bhūmi)라고 하는 보살로서의 정신적 수행단계의 첫번째 단계에 들어가게 되며 이때부터는 인간의 세상이나 신의 세상에만 태어나게 된다.
그처럼 큰 뜻을 품는 보살은 대개 남자이지만 꼭 남자이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고, 재가자일 수도 있으며 반드시 출가자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므로 누구나 보살일 수 있고, 따라서 보살이 될 수 있는 이는 무한히 많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칭호는 주로 위대한 학자와 스승들의 경칭으로 사용되었으며, 동남아시아 등지에서는 불교도로서의 왕의 영예를 나타내는 관습적인 칭호로 자리잡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여성 재가신자의 일반적 경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몇몇 특정한 보살들은 영원한 부처의 화현이자 위대한 구세주로 존중되고 있으며,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종종 역사상의 부처보다도 더욱 친근한 신앙의 대상으로 숭앙되고 있다. 이러한 보살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보살은 자비로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Avalokiteśvara)로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ābha)과 관계가 깊다. 중국에서 널리 숭앙되는 보살로는 지혜를 특색으로 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 Mañjuśῑ), 저승에 있는 이들에게 특히 도움을 준다고 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 Kṣitigarbha), 보살행의 실천과 의지를 대변하는 보현보살(普賢菩薩 Samantabhadra) 등이 있다.
티베트에서는 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 그리고 금강저를 들고 불법을 수호한다는 집금강보살(執金剛菩薩 Vajrapāṇi)이 가장 널리 숭앙받는 세 보살이다. 다음 세상의 부처이자 현세의 보살로 묘사되는 미륵보살(彌勒菩薩 Maitreya)은 대승불교와 상좌부(上座部 Theravādā) 불교 모두에서 숭앙받는 유일한 보살이다.]

 

[재시, 법시, 무외시 3가지 중에서 여기서는 재시와 법시를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佛告長者子善德(불고장자자선덕)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는 장자의 아들 선덕(Sudatt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The Buddha said to Good Virtue(Sudatta), the son of an elder, Go to Virmalakirti and ask about illness. 


善德白佛言(선덕백불언) 世尊(세존)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

선덕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Good Virtue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am not qualified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我昔 自於父舍設大施會(억념아석자어부사설대시회)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저는 아버지의 집에서 성대한 보시 모임=大施會를 열어서, 

How come I remembered that I had set up a large charity meeting in my father’s house 

 

供飬一切沙門(공양일체사문) 婆羅門及諸外道(바라문급제외도)

貧窮下賤孤獨乞人(빈궁하천고독걸인)

모든 사문과 바라문, 그리고 수많은 외도와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 의지할 데 없는 사람=孤獨, 거지들에게 공양하였는데, 

to provide for all the monks, brahmins, laypeople, the poor, the lower class, those who are friendless, and beggars. 

[孤獨(고독)= 孤(고)는 부모가 없는 어린이의 경우이고 獨(독)은 나이가 들었으나 자식이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늙어서 자식이 없는 것도 외로운 일이요 어린데 부모가 없는 것도 외롭다는 뜻에서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期滿七日(기만칠일) 時維摩詰來入會中(시유마힐래입회중) 謂我言(위아언)

마지막 7일째 되는 날, 그 때 마침, 유마힐이 찾아와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At the end of the eventh day, when Vimalakirti came to the meeting, he said to me,

[우리나라에서도 예전(고려)에는 소위 반승(半僧)이라 해서, 천명, 오백 명, 천명 이천 명, 삼천 명, 고려 말 쯤에는 만 명이상에게 최소한 1박2일, 2박3일 동안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뜻있는 정치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 정권이 바뀌자 불교를 배척하는 배불정책이 시작되었고, 배불정책이 나중에는 척불과 억압까지 이르러서 스님들은 장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려 때의 반승(半僧)이라는 것이 인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유가 있는 장자의 집안이라면 일체사문과 바라문 빈궁한사람들 하천한 사람들 고한사람 독한사람 걸인들에게 공양하였다는 것입니다]

 

長者子(장자자) 夫大施會不當如汝所設(부대시회부당여여소설)

當爲法施之會(당위법시지회) 何用是財施會爲(하용시재시회위)?

‘장자의 아들이여, 성대한 보시의 모임=大施會라는 것은 그대가 하고 있는 것처럼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오. 마땅히 법을 설해 주는 모임=法施를 해야하나니, 어찌하여 이같이 재물을 베푸는 모임을 열고 있는 것이오?’

Elder Son! A large almsgiving meeting should not be as you have set it up. What you should arrange is a Dharma-giving assembly. Why should it be a meeting of giving only with material wealth? 

[大施會, 우리나라의 무차대회와 같은 말입니다.

누구든지 참석만 하면 다 공양을 올릴 수 있고 또 공양을 받을 수 있는 모임을 무차대회라고 하는데, 심청전에서 심봉사를 찾기 위해서  천하에 있는 모든 맹인들을 다 불러 모은 것도 역시 불교의 대시회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我言(아언)  居士(거사) 何謂法施之會(하위법시지회)?
저는 말했습니다. ‘거사님, 어떻게 하는 것을 법을 설해 주는 모임이라 합니까?’

I replied, Householder, what is a Dharma-giving meeting like? 


答曰(답왈) 法施會者(법시회자) 無前無後(무전무후)

一時供飬一切衆生(일시공양일체중생) 是名法施之會(시명법시지회)

법을 설해 주는 모임=法施會라는 것은, 앞뒤의 차이가 없이 일시에 일체 중생을 공양하는 것이니, 이것이 법을 설해 주는 모임이라는 것이오. 

Vimalakirti replied The meeting of Dharma giving is without prior and without after, and provides for all sentient beings in a single instant. If you ask, What does this mean?

[法施會者는 無前無後로, 예를 들어 밥을 받는다고 하면, 밥은 먼저 받는 사람도 있고 뒤에 받는 사람이 있을 것이나, 법이라고 하는 것은 無前無後가 없다. 법을 베푸는 모임은 순서가 없는,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문제이고 진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에 관계가 되지 않으니까 일시에 일체중생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 된다.]

 

◎사무량심(四無量心)

曰(왈) 何謂也(하위야)? 謂以菩提(위이보리) 起於慈心(기어자심) →자(慈)무량심

무슨 말인가 하면, (중생에게) 깨달음=菩提로써 대자심(mah-maitri)을 일으키고, 

It means that bodhi originates from a compassionate mind. 

 

以救衆生起大悲心(이구중생구대비심)비(悲)무량심

以持正法起於喜心(이지정법기어희심)→희(喜)무량심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비심(mah-karua)을 일으키며, 정법(Saddharma)을 지니려는 대희심(mah-mudit)을 일으키고, 

Arise a mind of great compassion for the sake of saving sentient beings.

Arise a joyful mind by upholding the supreme Dharma. 

 

以攝智慧行於捨心(이섭지혜행어사심)→사(捨)무량심

지혜를 간직하려는 대사심(大捨心, mah-pek)을 행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Through the practice of surrender, to receive wisdom.

[以攝智慧로 行於捨心하며, 지혜를 포섭함으로써 버리는 마음을 일으킨다 즉 행한다. 사심도 일종의 보시이지만, 여기서의 보시는 희사의 뜻보다는 지혜가 있어서 자기의 번뇌, 탐, 진, 치, 삼독 등의 애착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가 없으면 어떻게든 더 붙들고, 더 집착하게 되니까, 지혜를 섭하므로써 삼독과 온갖 애착심들을 버리는 마음을 행한다.]

 

◎육바라밀(六波羅蜜) 

以攝慳貪起檀波羅蜜(이섭견탐기단바라밀)

그것은 인색함과 욕심을 거두어들임으로써 보시바라밀(dna-pramit)을 일으키고, 

Arise the perfection of giving by subduing stinginess and greed. 

 

以化犯戒起尸羅波羅蜜(이화범계기시라바라밀)

계율을 범한 자를 교화하는 것으로써 지계바라밀(īla-pramit)을 일으키며,

With the paramita of proper conduct to transform the violation of precepts. 

 

以無我法起羼提波羅蜜(이무아법기찬제바라밀)

무아(無我)의 진리[法]를 알게 함으로써 인욕바라밀[羼提波羅蜜, knti-pramit]을 일으키고, 

With the paramita of forbearance to bring forth the Dharma of non-self. 

[제대로 참으려면 내가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됩니다. 내 자존심 내 아상이 있으면 제대로 참아지지 않습니다. 나를 비워야 제대로 참을 수 있지, 그냥 억지로 짓눌러서 참으려고 하면 속병이 되든지, 누적되어서 나중에 폭발하면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무아 법으로써 인욕바라밀을 일으킨다는 것이 참 묘한 이치입니다.

사실 우리가 모두 '나'라는 관념 속에서 삶을 살아가지만 그 '나'라는 것이 정체가 시원치않습니다. 따지고 들어가면 '나'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부처님은 있는데 무리하게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눈을 뜨고 허상을 허상으로 보아라, 제대로 보면 너라고 할 것이 없다. 그래서 무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허상을 제대로 간파하려면 지혜의 눈이 밝아야 가능합니다.

참는 것도 무아=아가 없다고 꿰뚫어 봐야 제대로 참는 인욕바라밀이 살아나는, 찬제 바라밀을 일으키는 것이다.]

 

以離身心相起毘梨耶波羅蜜(이이신심상기비리야바라밀)

몸과 마음의 겉모양=身心相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정진바라밀(vīrya-pramit)을 일으키며, 

By departing from the appearance of body and mind to bring forth the paramita of enthusiastic effort. 

[身心, 몸과 마음을 그대로 두고는 온전한 정진이 안되죠. 사실 정진하려면 몸을 무시해야 온전한 정진이 됩니다. 그저 몸 하자는 데로 먹고 싶으면 먹고, 쉬고 싶으면 쉬면 정진이 되지 않으니까 무시해버려야 정진이 됩니다. 그래서 심신의 상을 떠남으로써 정진 바라밀이 일어난다.]

 

以菩提相起禪波羅蜜(이보리상기선바라밀) 以一切智起般若波羅蜜(이일체지기반야바라밀)
보리의 경계=相으로써 선정바라밀(dhyna-pramit)을 일으키고,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아는 지혜=一切智로써 반야바라밀(praja-pramit)을 일으키는 것이오.

Arise the perfection of meditation by the appearance of the bodhi.

Arise the perfection of wisdom through wisdom of all.

[깨달음의 상으로써 선 바라밀을 일으킨다. 선과 깨달음의 관계, 부처님은 보리를 이룰 때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경전을 보다가 깨달기도 하고, 일을 하다가도 깨달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집중하는 마음의 자세에서야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선은 집중하는 것,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그것이 선정입니다. 우리가 좌선을 하는 것은 좌선이 마음 집중에 제일 좋은 방법이라 해서 좌선을 하는 것이지만, 어떤 경우라도 집중하는 것을 선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집중하는 선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른다는 것입니다.]

 

敎化衆生而起於空(교화중생이기어공) 不捨有爲法而起無相(불사유위법이기무상)

 중생을 교화하면서 (snyat)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유위법(saskta) 버리지 않고서도 무상(animitta) 실상을 바르게 알며

To teach all sentient beings through emerging from emptiness.

Not renounce the conditioned Dharma to give rise to formlessness. 

[敎化衆生하되 而起於空하며, 중생을 교화하되 공을 일으킨다.

그러니까 중생을 교화의 의미를 起於空이라 했습니다. 교화해도 교화하는 내도 없고 교화 받는 중생도 없는 입장이 되어야 제대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무량심, 육바라밀 등은 바람직한 수행법이고 바람직한 보살의 실천행이고, 보살이 살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삶의 모습들이고, 이러한 삶이 법공양이하는 것입니다. 물론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좋은 공양이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수행법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 더욱 좋은 법공양이라는 것입니다]

[不捨有爲法하고 而起無相하며, 이것은 3해탈문(三解脫門) 중의 공해탈문(空解脫門)입니다.

유의법, 함이 있고, 어떤 조작이 있는 것을 버릴려고 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인 것으로 우리 보퉁 중생들이 행하는 일인데, 유의법을 버리지 아니하고 무상을 일으킨다. 상이 없는 이치, 상이 없는 관점에서 일상생활을 그대로 해나가는 것이다.

상이 없는 공이라는 이치를 설사 알았다 하여도 밥 먹어야 되고, 잠자야 되고, 하던 일 해야 되고, 또한 해는 그대로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상황도 변한 것이 아니다. 무상이라는 관점으로 살아가되, 그것이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한 영원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유의법을 버리지 않고 일상생활을 그대로 살되, 고정불변하는 어떤 상으로 영원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것입니다.]

 

[3해탈문(三解脫門, 산 trīni vimoksa-mukhāni) 또는 3삼매문(三三昧門)은 3계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번뇌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득하는 방편[門]인 공해탈문(空解脫門) ·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 ·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의 3가지 선정을 말한다. 공(空: 空寂, 실체가 없음) · 무상(無相: 차별이 없음) · 무원(無願: 원함 즉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 없음)을 관조하는 3가지 선정이 해탈 즉 열반에 들어가는 문(門, 방법, 방편)이 되기 때문에 3해탈문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3해탈(三解脫) · 3탈문(三脫門) · 3문(三門) · 3공문(三空門) · 3공관문(三空觀門) 또는 3삼매(三三昧) 또는 3공(三空)이라고도 한다.
공해탈문은 일체법이 공하다는 것 즉 실체[自性]가 없다는 것을 관조하는 선정이고, 무상해탈문은 일체법에 차별[相]이 없다는 것을 관조하는 선정이고, 무원해탈문은 공용(功用, 願)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관조하는 선정 즉 무공용(無功用, 無願)을 성취하는 선정이다.
공해탈문은 공삼매(空三昧) 또는 공삼마지(空三摩地)라고도 하며, 무상해탈문은 무상삼매(無相三昧) · 무상삼마지(無相三摩地) · 무상심삼매(無相心三昧) · 무상심삼마지(無相心三摩地) 또는 무상정(無相定)이라고도 하며, 무원해탈문은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 · 무원삼매(無願三昧) · 무원삼마지(無願三摩地) 또는 무원심삼마지(無願心三摩地)라고도 한다.[11][12] 이 가운데 무상해탈문의 다른 말인 무상정(無相定, 산 ānimitta)은 무상정(無想定, 산 asaṃjñi-samāpatti)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무상해탈문의 다른 말인 무상삼매(無相三昧, 산 ānimitta-samādhi)는 힌두교의 무상삼매(無想三昧, 산 nirvikalpa samādhi)와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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