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二是菩提(불이시보리) 離意法故(이의법고)

둘이 아닌 것=不二가 보리이니, 마음과 대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며,

Non-duality if bodhi, separate from mind and Dharma. 

[둘이 아닌 것이 보리다. 보리는 육근, 육진의 두 가지 법에 속하지 않는 의근과 법진에 해당됩니다.
안, 의, 비, 설, 신, 의 다음에 색, 성, 향, 미, 촉, 법이니까 의와 법, 안과 색, 비와 향이 상대가 되는 육근과 진을 떠난 것이니까 둘이 아닌 것이 보리다.]  

[‘불이(不二)’ 마음[] 그것의 대상[] 둘이 있다. 그러나 보리에는 마음마저 없으니, 어찌 () 따위가 있겠는가,]

[용수(龍樹)는 '중론송(中論頌)' 첫머리의 유명한 ‘귀경게(歸敬偈)’ 내용이 ‘팔불(八不)’이라서, 팔부중도(八不中道)라고 한다. 팔부중도의 ‘팔불(八不)’은 아래와 같다. 
• 불생불멸(不生不滅) -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 개별존재의 생겨남과 사라짐에 대한 부정임. 
• 불상부단(不常不斷) -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된 것도 아니다. ― 존재의 영원함과 단절됨에 대한 부정임. 
• 불일불이(不一不異) -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 존재의 같음과 다름에 대한 부정임. 생사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다. 번뇌와 보리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다. 그런 뜻이다. 
• 불래불거(不來不去) -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 존재의 개별 원인과 개별 결과에 대한 부정임. 일체중생이 무명 망상으로 윤회해 왔다 갔다 하지만 본래 진리의 당체는 오고 가는 체성이 아닌데, 임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실제의 현상으로 집착하는 것을 타파한 것이다.

여기서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지향은 중도(中道)를 말하는 것이다. 
나와 네가 굳이 같다고 우겨서도 안 되고, 나와 네가 다르다고 우겨서도 안 된다. 나와 네가 엄연히 다른데, 굳이 같다고 우기면서 똑 같이 나누자고 하니까 싫어진다. 반대로 친해지고 싶은데, 나와 네가 다르다고 구분 지으니 섭섭하다. 중도는 나와 네가 다름을 인정해야 하고, 나와 네가 다르지 않음도 인정함이다.
그러니 너와 나는 같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 따라서 너와 나를 분별하지 말고, 자비로 타인을 감싸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보살’이다.
다시 말하면, 불일불이(不一不異)로 본다는 것은 곧 중도로 봄을 의미한다. 붉은 장미와 노란 장미를 놓고 볼 때 둘은 같지 않다. 그러나 장미란 점에서는 다르지도 않다. 이와 같이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할 수 없는 이런 관계를 용수(龍樹, 나가르주나)는 ‘불일불이(不一不異)’라고 했다. 같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는 말이다. 물과 파도는 동일하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은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를 가진다. 
현실적으로 남북문제에 있어서 ‘남북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라고 말하기보다 먼저 ‘남과 북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다름을 인정하는 데에서 같음을 도출해야 무리가 없어진다. 그렇지 않고 불일(不一;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같음만 강조하다가 보면 그 뒤에 숨은 ‘다름’을 해결하고 해소할 길이 없어 갈등만 커진다.

생사 즉 열반, 번뇌 즉 보리도 생사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같은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하고, 번뇌와 보리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다. 즉,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입장이다. 
그리고 불일불이(不一不異)란 개체와 전체에 치우친 견해이기도 하다. 개체적으로 보면 다름이 있지만[불일] 전체적으로 보면 다름이 없다[불이]. 개체는 전체의 부분이며, 전체는 개체의 종합된 모습이다.
이러한 사실을 사회현상에 적용할 경우, 사회 전체만 보는 것도 치우친 견해이며, 부분만 보는 것도 치우친 견해이다. 왜냐하면 개체는 전체의 부분이며, 전체는 개체의 종합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나 독재 국가에선 전체만 있지 개인은 존중 받지 못한다. 
그래서 나와 사회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나에 치우치면 개인주의가 되고, 사회에 치우치면 전체주의가 된다. 따라서 사회와 개체를 함께 봐야 한다. 개인을 무시한 사회는 살벌하고, 사회를 무시한 개인생활이란 방종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원융(圓融)한 관계가 바로 불일불이요, 중도이다.

그런데 불이(不異)를 지나치게 생각한 나머지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니까 이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지금 있는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불이는 깨달음의 경지요, 부처의 경지이다. 이 경지를 중생의 경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착각을 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거나 그런 착각의 근저에 정신적 나태함과 방종을 수행의 경지로 호도하는 자기기만(自己欺瞞)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일(不一)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중생과 부처가 다르며, 무명과 깨달음이 다르고, 성(聖)과 속(俗)이 다르다는 ‘불일(不一)’이란 말에 매몰돼서도 안 된다. 
지금 한국의 많은 불자들이 지나치게 퇴굴심을 가지고 진리의 세계는 진리의 세계대로 따로 있고, 현실세계는 현실세계라는 ― 불일정신을 오해하거나 착각해서 수행을 멀리하고 기복에만 매달리고 있다. 
‘번뇌 즉 보리’라는 불이(不二)의 가르침이 깨달음을 어떤 초월적인데서 찾지 말고, 구원을 밖에서 찾지 말라는 것인데도 불일(不一)에만 치우쳐 퇴굴심을 일으키니 불교가 개인수양이나 사회정화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명색이 출가자라 하면서도 세간적, 생물학적 욕망의 번뇌를 그대로 발산하면서 ‘번뇌 곧 보리’라는 불이(不異)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착각을 넘어 사기요 자기기만이다.-
작성자 아미산]

 

等是菩提(등시보리) 等虛空故(등허공고)

평등함=이 보리이니, 허공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며,

Equality is bodhi, equal to emptiness. 

[평등한 것이 보리다. 무흠무여(無欠無餘)해서 원동태허(圓同太虛 ),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음이 마치 저 태양과 같다. 허공은 원동태허하야 태허(허공)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이 없다 그래서 평등한 것이 보리다.]  

 

無爲是菩提(무위시보리) 無生住滅故(무생주멸고)

함이 없는=無爲가 보리이니, (낢)하고 머무르며,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The unconditioned is bodhi, in which there is no more arising, abiding, and dissolution. 

[생주이멸 구체적으로, 태어나고, 머물고, 옮겨가고, 소멸하는 것이 없으니까 무위이고, 그래서 무위가 보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위(無爲)=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절대한 경지]

 

知是菩提(지시보리) 了衆生心行故(요중생심행고)

아는 것(깨달음)=知가 보리이니, 중생의 마음 흐름=心行을 명확하게 알기 때문이며, 

To know is bodhi, to understand the minds of all sentient beings.

[깨달음이 보리이고 도가 깨달음이고 도가 보리이니까 중생들의 마음이 흘러가는 것, 마음 움직임, 마음씀씀이, 생각 등을  다 아는 것이다]

 

不會是菩提(불회시보리) 諸入不會故(제입불회고)

만나지 않음(모이지 않음)=不會가 보리이니, 마음과 그 행을 알게 하는 대상(6입, 6근, 6경)=諸入이 만나 결합함이 없기 때문이며, 

To not unite is bodhi because all entry is without convergence. 

[불여만법위려자시심마(不與萬法爲侶者是甚麽)인고! 만법으로 더불어 짝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냐고 했는데, 보리라고 하는 것이 만법과 짝하지 않는 자, 만법과 모일 수 없는 자, 만법과 벗 삼지 않고 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諸入은 육근 육입 등 모든 입이 모이지 않는다.]  

[‘불회(不會)’ 제입(諸入)이란 것은 내외(內外) 6(:66)이다. 내외(內外) 함께 공하므로 제입이 만나지 않는다. 제입이 만나지 않음은 보리이다.  보리의 ()이다”라 승조는 주역(註譯)하고 있다.]

 

不合是菩提(불합시보리) 離煩惱習故(번뇌뇌습고)

합하지 않음=不合이 보리이니, 번뇌의 습기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이며, 

Not conforming is bodhi because it is independent of the tendencies of afflictions. 

[‘번뇌’의 원어인 산스크리트어 ‘클레사(klésa)’는 고통스럽다, 더럽다는 동사의 명사형으로, 더러워진 마음, 괴로운 마음, 상처 주는 마음, 괴롭히는 생각이라는 뜻이다. 우리들을 괴롭히고 해쳐서 오류로 이끄는 불선(不善)의 마음을 번뇌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쓸데없는 생각, 허무맹랑한 생각, 잡념(雜念), 이런 게 번뇌다. 
밤에 잠이 안 오면, 눈 감고 누워 있어도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그게 모두 번뇌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 업(業)을 짓게 되며, 괴로움의 과보를 받아 미혹의 세계를 헤매게 된다. 
번뇌란 번요뇌란(煩擾惱亂)을 줄인 말로서, 우리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괴롭히는 등 미혹하게 하는 나쁜 정신작용이다.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을 나타내는 불교 심리용어이다. 
중생은 사물을 대할 때에 그것을 욕심내어 소유하려 하고, 본능적으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음을 애태우게 되며, 경쟁하고 싸우고, 심지어는 살생까지 하게 된다. 
또한 번뇌는 사물에 대해 참다운 진리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도록 지혜의 눈을 가려 버리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집착하게 한다.
그러나 번뇌의 정체를 확실히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크고 작은 것을 물을 것 없이, 큰 문제는 큰 번뇌를 일으키고 작은 문제는 작은 번뇌를 일으켜서 인생 전체를 번뇌 속으로 빠뜨린다. 따라서 삶이 곧 번뇌요, 번뇌가 곧 삶이라는 논리까지 전개된다. 
이러하므로 불교에서는 번뇌의 깊은 뿌리를 근원적으로 파악해서 해결한다는 것은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참다운 길이며, 그 지름길이 된다고 본다. 불교의 모든 법문은 이 번뇌를 다스리는 교훈이며, 번뇌가 다할 때 거기에는 해탈이 있다고 본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음의 본래 모습은 청정하지만 손님과 같은 번뇌로 인해 더럽혀진 상태를 객진(客塵)이라 한다. 손님 같은 번뇌로 인해 내 마음이 더럽혀진 것을 객진번뇌라 한다.‘108 번뇌(煩惱)’라 하기도 한다. 
‘백팔(108) 번뇌’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6근(六根)이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 6경(六境)이라는 여섯 가지 대상을 파악할 때에 호(好)ㆍ오(惡)ㆍ평(平=非好, 非惡)의 셋 감정이 발생해 18이 된다. 그 하나하나에 염(染)과 정(淨) 두 가지가 있어 합하면 36이 된다. 
여기에 또 각각 과거ㆍ현재ㆍ미래 셋이 있어, 합계 108 번뇌가 된다는 설이다. 번뇌의 종류가 많은 것을 보이기 위해 108이라는 수를 든 것이다. 한편 번뇌의 본체를 정사(正使 또는 使)라고 하고, 이런 번뇌의 본체가 소멸한 다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번뇌의 남은 기운을 습기(習氣)라 한다. 습기는 마치 향을 담았던 그릇이 향을 비었어도 향기가 남아 있는 것과 같이 배어있음에 비유한다.-작성자 아미산]

[습기(習氣)=번뇌로 인하여 몸에 배었던 습성의 나머지]

 

無處是菩提(무처시보리) 無形色故(무형색고)

자리함이 없는=無處가 보리이니, 형색(형상)이 없기 때문이며

Nowhere is bodhi, because there is no form or shape.   

假名是菩提(가명시보리) 名字空故(명지공고)

가명이 보리이니, 이름과 문자=名字가 공한 것이기 때문이며,

The false name is bodhi because artificial words are empty. 

[편의상 보리, 깨달음, 도라고 할 뿐 그것이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니까 편의상 보리라고 표현했을 뿐이니까 명자(이름)의 성품이 공한 것이다. 공한 까닭에 이름의 실체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如化是菩提(여화시보리) 無取捨故(무취사고)

허깨비(幻)과 같이 변화하는=化하는 것이 보리이니, 하고 버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The instant of change is bodhi because there is no grasping or letting go. 

[化는 변화 한 것, 환상으로 변화 한 것 등은 취사가 없는 불 가취=가히 취할 수도 없고, 불 가사= 가히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버리려고 하니까 있는 같고 또 있는 것 같아서 취할려고 하면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如化가 是菩提다]

 

無亂是菩提(무란시보리) 常自靜故(상자정고)

혼란이 없는=無亂이 보리이니, 항상 스스로 고요하기 때문이며,

Absence of disturbance is bodhi, which is always serene. 

[보리라고 하는 것은 움직이고 요동하는 것이 없는 常自靜故=항상 스스로 고요한 것이다]

 

善寂是菩提(선적시보리) 性淸淨故(성청정고)

미혹을 떠난 경계(고요한 선정)=善寂가 보리이니, 그 성품이 깨끗하기 때문이며,

Wholesome tranquillity is bodhi, because its nature is pure. 

[善寂은 억지로 힘들게 고요한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안정된 좋은 고요한 자리, 근본적으로 고요한 자리.

끊는 물에 찬 물을 섞어서 식히는 것이 아니라, 불을 꺼버리고 물을 식히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입니다. 근본적으로 고요한 자리 즉 성품이 청정한 까닭이다. 성품이 텅 비었기 때문에 그렇다]

 

無取是菩提(무취시보리) 離攀緣故(이반연고)

대상을 취하지 않음=無取가 보리이니, 마음이 대상에 의하여 움직임=攀緣함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며,

Non-grasping is bodhi, being free from clinging to the external. 

[無取 취함이 없는 것이 보리인 것은 離攀緣故, 모든 반연에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갖 반연에 얼기설기 엮여서 사는데, 보리= 본심자리= 깨달음의 그 자리는 반연을 다 떠나 있는 것이다. 표면의 물결과 깊은 물속과 같이 현상= 겉으로 마음을 쓰는 것은 전부 반연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지만, 우리의 속 마음자리의 보리는 출렁거리게 하는 모든 반연들을 떠났다] 

 

無異是菩提(무이시보리) 諸法等故(제법등고)

다르지 않음=無異가 보리이니, 모든 존재=는 동등하기 때문이며,

The absence of distinction is bodhi, all Dharmas being equal. 

無比是菩提(무비시보리) 無可喩故(무가유고)

비교할 수 없음=無比가 보리이니,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며,

No comparison is bodhi, since there is no analogy to compare to it.

[보리는 오직 하나 뿐인 자리이고, 평등한 자리이고 통일된 자리, 외롭게 뚝 떨어져 있는 하나가 아닌, 모두 한 덩어리된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부 보리(깨달음, 근본 마음자리) 속에 다 포함이 되니까 상대가 없고, 상대가 없으니까 비유가 안되는 것입니다. 비유로써 미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微妙是菩提(미묘시보리) 諸法難知故(제법난지고)

미묘함이 보리이니, 제법을 알 수 없기 때문이며,

The subtle is bodhi because the Dharmas are difficult to know.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보리를 떠나서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 보다 쉽다고 해도 맞는 말이 됩니다. 

깨달음이 완벽한 분, 그 깨달음이라고 하는 주제가 확실하면 어떤 말을 해도, 어떤 사물을 봐도,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전부 깨달음과 연관이 가능하고 또 연관시켜서 이해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일상생활 속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마거사의 보리에 대한 설명이 대충 25가지인데, 중요하고 어려운 낱말들을 선별해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말들로써  아주 똑 떨어지게 설명이 가능한 것은 그 분이 깨달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사의 게송처럼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라,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또 아침마다 함께 일어나서, 앉고, 서고, 가고, 오며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 바로 부처라고 했습니다. 깨달음이 완벽한 사람은 무엇을 해도 전부 깨달음 속에 있고, 깨달음의 작용이고, 깨달음의 표현일 뿐입니다.]

[여기서 이 이야기의 내용은 끝났다(나집․지겸의 번역도 같다). 그러나 현장과 티베트 역에는 다음 절의 한 구절이 더 있어서 깨달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첨가한다. “깨달음은 허공과 같은 성질이며, 모든 곳에 빈틈없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몸으로나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신체는 풀이나 나무, 석벽(石壁), 길, 그림자와 같은 것이며, 마음은 비물질적인 것, 들에 나지 않는 것, 의지하는 곳이 없는 것, 표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世尊(세존) 維摩詰說是法時(유마힐설시법시)

二百天子得無生法忍(이백천자득무생법인)

세존이시여, 유마힐이 이같이 설법하였을 때, 2백의 천상의 신들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습니다. 

World Honoured one, when Vimalakirti spoke this teaching, two hundred celestial beings attained patient acceptance in the truth of no rebirth. 

[‘무생(無生)’이란 모든 현상은 연기법에 따라 변화하는 여러 요소들이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과할 뿐 생기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무엇인가 고정된 실체가 존재해야 무엇인가가 생겨난다는 말이 성립되겠는데, 연기법이 적용되는 무아(無我)의 세계에 고정된 실체가 있을 수 없다면 생길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인연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과할 뿐이라니 어떠한 존재도 새로 생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생(無生)’은 깨달음의 다른 이름이다. 깨달으면 다른 헛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니 무생이다. 
따라서 무생이란 ‘무생의 이치’, ‘남[生]이 없는 진리’, ‘불변의 진리’ 등을 이르는 말이다. 즉,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달아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한 상황을 말한다. 
무생이란 ‘무(無)’에서 ‘유(有)’가 생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포함한다. 
연기적으로 생성된 모든 사물은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조건의 이합집산이요, 형상과 현상[相]의 변화에 불과하다. 
사물의 실체가 공한 것은 연기적으로 화합한 것이기 때문이고이렇게 일시적인 가합(假合)이므로 생겨나도 실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만 변화했을 뿐이다.

중생이 사물의 상(相)에 집착해서 실체성과 영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사물이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사견[生滅相]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무생에는 이치[理]로서의 무생과 행위[行]로서의 무생이 있다. 
이치로서의 무생은 무생법(無生法)을 이름이다. ‘무생(無生)의 법’은 불변의 진리를 이르는 말로서 결국 공(空)의 이치를 뜻한다.
‘무생행(無生行)’이란 일체법이 무아(無我)라는 근거를 통해 ‘분별’에서 벗어나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말한다. 무생행은 또한 시비 분별과 조작 관념이 없는 무념으로서, 무생의 실천으로서, 무공용(無功用-無爲)이기도 하다. 
따라서 무생의 행위는 그 성품과 특성이 모두 공적(空寂)해서 형상으로 볼 수 없고 언설로 전달할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취해 증득할 수가 있겠는가?-작성자 아미산]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This is why I do not dare to go ask him about his hill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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