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通是道場(신통시도량) 成就六通故(성취육통고)

신통 도량이니, 6신통 성취하기 때문이며, 

Spiritual power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through it accomplishes the six supernatural powers. 

[육통(六通)= 육신통(六神通)은 여섯 가지 신통력을 말하는 것으로 삼명에 세 가지를 더 추가한 것이다. 

삼명육통(三明六通), 삼명(三明)이란 천안명, 숙명명, 누진명이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한 성자에게 갖추어진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세 가지에 대해 밝게 아는 것을 말한다. 삼명이 세계를 보는 세계관이나 또는 지혜의 눈이라는 측면이 강한 반면, 육통(六通)은 어떤 불가사의한 능력, 부처님이나 아라한에게 갖추어진 자유자재한 권능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육신통 중 천안통의 지혜를 천안명이라 하고, 숙명통의 지혜를 숙명명이라 하며, 누진통의 지혜를 누진명이라 하며, 이 셋을 삼명(三明)이라 한다.
①천안명(天眼明)은 거리의 멀고 가까운 것에 상관없이 일체 세간(世間)의 모든 고락(苦樂)의 모습(相)과 가지가지 유형(有形)과 색(色)에 대해 밝게 아는 것을 말한다. 천안명은 단순히 거리상으로 멀리 있는 것을 보는 생리적 능력이라기보다는 세계관에 가까운 지혜를 말한다. 즉 일체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해 고통에 쌓여 있음을 여실하게 보는 지혜와 같다.
②숙명명(宿命明)은 지나간 과거생의 모든 일들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전생(前生)의 일을 아는 신통력이다. 과거 여러 생에 걸친 우리의 전생을 숙세(宿世)라고 한다. 즉, 숙명통은 겹겹이 쌓인 우리의 과거 전생, 현재, 미래의 모든 일들을 다 아는 지혜를 말한다.
③누진명(漏盡明)은 이 생에서 모든 종류의 고통을 밝게 알아서 인간의 모든 번뇌를 끊는 지혜를 말한다. 앞에 나열했던 천안명을 통해서 육도 중생의 모든 현실적인 삶을 관조한 다음, 숙명명을 통해서 숙세의 모든 인과관계를 꿰뚫어 보게 되면, 오늘의 자기 존재를 모두 알게 된다. 즉, 인간존재의 연기적 인과관계를 모두 알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그 이유를 알게 되며, 존재를 둘러싼 고(苦)의 원인을 환하게 꿰뚫어 보게 된다. 그렇게 원인과 결과를 잘 알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다 끊을 수 있다.
6통은 위의 삼명에 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신족통(神足通)을 더한 여섯을 말한다.-아미산]

 

解脫是道場(해탈시도량) 能背捨故(능배사고)

해탈 도량이니, 팔배사(팔해탈) 이룰  있기 때문이며 

Liberation is the place of awakening, being capable of renunciation. 

[解脫이 是道場이니 能背捨故며 능히 등지고 버린다. 장애를 등지고 걸리는 온갖 일들을 전부 버리는 것, 말하자면 어떤 고정관념으로부터 또는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관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배사= 등진다,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팔배사(八背捨, 산 Aṣṭa-vimokṣa), 팔해탈(八解脫). 초선, 제2선, 제3선, 4무색정, 멸진정(滅盡定)에 이르는 8단계의 선정관법을 말한다. 따라서 팔배사는 팔선정(八禪定)과 같은 말이다. 즉, 여덟 단계의 마음집중을 통해 탐착심(貪着心)을 버리고 이루어지는 해탈(vimokṣa)을 일컫는다. 
마음집중을 통해 오욕(五慾)의 경계를 여의고(등지고), 탐하고 고집하는 마음을 버리므로 배사(背捨)라고 하며, 또 이것으로 말미암아 삼계(三界)의 번뇌를 끊고 아라한과를 증득하므로 해탈이라고 한다. 그래서 8해탈(八解脫)이다. 
배사에서 '배(背)'란 정결한 오욕(五欲)을 등져서 오욕(五欲)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며, '사(捨)'란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떨쳐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사를 이루면 해탈을 얻는다. 따라서 배사는 내상(內相-안의 모습)을 말한다. 
아래의 1-3 단계는 특정한 일반적 물질세계와 관련이 있으며, 4-7 단계 는 선정(禪定)에 관한 내용이고, 마지막 8단계는 최상의 깨달음을 뜻한다.
① 내유색상관외색해탈(內有色想觀外色解脫) ② 내무색상관외색해탈(內無色想觀外色解脫) ③ 정해탈신작증구족(淨解脫身作證俱足) ④ 공무변처해탈(空無邊處解脫) ⑤
식무변처해탈(識無邊處解脫) ⑥ 무소유처해탈(無所有處解脫) ⑦ 비상비비상처해탈(非想非非想處解脫) ⑧ 멸수상정해탈 (滅受想定解脫)]

方便是道場(방편시도량) 敎化衆生故(교화중생고)

방편이 도량이니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며.

Skilful means is the place of awakening for teaching and educating sentient beings. 

[방편(方便, 산 upaya, 구파야/漚波耶), 궁극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bodhi)을 향해 점진적으로 접근시켜 나아가게 한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진리 그 자체를 진리로 직접 표현하기 힘들 때 깨달음을 향해 가는 간접적 수단을 말한다.
우빠야(upāya)’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 수단을 가리킨다. 방편은 초기 논장인 '구사론' 등에도 등장하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한 개념이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흥기한 이후, 깨달음을 얻었으나 일체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자기 자신 또한 중생계에 남겠다는 보살의 중생 구제 서원과 맞물리면서 거의 모든 대승 경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다양하게 해석됐다.
‘방편’이란 편리한 방법, 교묘한 방법이란 말로서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게 여러 가지 가르침으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의미이다. 즉, 각자의 상황과 기질에 맞는 최선의 방법과 수단을 통해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접근하다’, ‘도달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대기설법(對機說法), 차제설법(次第說法) 할 때의 대기(對機)ㆍ차제(次第)와 비슷한 말이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의 인도는 여러 가지 종교가 난립해 심한 사상적 혼란을 빚고 있었던 상황에서 각 종교가 설하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진위성 문제는 각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깨닫는 길밖에 없었다.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ttha)가 구도 시에 취한 방법은 바로 이것이었으며, 진리를 깨달은 뒤에 사람들에게 전법(傳法)할 때도 바로 이 방법에 의했었다.]

 

四攝是道場(사섭시도량) 攝衆生故(섭중생고)

 4 도량이니중생을 아우르기=攝하기 때문이며,

The four means of attraction are the place of awakening, which leads all sentient beings. 

[攝(섭)은 포섭한다는 뜻으로 중생을 布施(보시), 愛語(애어), 利行(이행), 同事(동사)의 네 가지로 포섭한다는 말입니다.] 

[사섭법(四攝法)=사사섭법(四事攝法), 사섭사(四攝事) 혹은 사섭(四攝)은 보살이 중생을 제도할 때에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이다. 여기서 ‘섭(攝)’의 본뜻은 "끌어들이다", "품안에 받아들이다", "감싸 안다" “서로 어우러져 화합한다”, ‘굳건히 유지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사섭법이란 중생을 부처의 가르침[佛道]으로 끌어들여 구제하는 보살의 네 가지 행위를 이른다.

‘섭(攝)’ 자의 손 수 변(扌) 옆에 귀 ‘이(耳)’자가 셋이 있는데, 맨 위의 ‘이(耳)’자가 포용 섭수하는 마음의 귀이고, 아래 두 개 ‘이(耳)’자는 사람의 두 귀이다. 이 글자처럼 사섭법은 ‘네 가지 거두어 주는 일’, ‘네 가지 보살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생활 혹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해야 할 네 가지 포용태도를 말하는 일종의 사회윤리이다.-아미산]

 

多聞是道場(다문시도량) 如聞行故(여문행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듣는=多聞 도량이니들은 대로 행하기 때문이며,

Listening to many teachings is the place of awakening, cultivating according to what one has heard. 

[문사수(聞思修), 듣고, 생각하고, 수행하여 닦는 세 단계는 꼭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들으면 생각하게 되어서 그 나름대로의 판단이 생겨서 마음속에 뿌리 내리기 시작하면 저절로 실천하게 됩니다. 이렇게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多聞인데 이렇게 해서 성불하게되고 또 성불하고 나서도 이것을 계속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如聞行故=듣는 것과 같이 행동한다, 들은 것이 결국 행동으로 나아가게 되어있다.]

['우바새경'에 “또 두 가지 법이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니, 첫째는 다문이고, 둘째는 사유이다. 또 세 가지 법이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니, 첫째는 중생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고, 둘째는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이며, 셋째는 염심(불·법·승·계율·보시·천상-육념을 꾸준히 마음에 새기는 것)을 갖추는 것이다. 
또 네 가지 법이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니, 사위의(四威儀-행ㆍ주ㆍ좌ㆍ와-불자로서의 태도를 잘 지님)를 말하는 것이다.”
다문(多聞), 많이 읽는 것에는 많이 듣는 것도 포함이 된다.]
   

伏心是道場(복심시도량) 正觀諸法故(정관제법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마음을 항복 받음)=伏心 도량이니제법을 바르게 관하게 하기 때문이며,

A subdued mind is the place of awakening, thus observing all Dharmas correctly. 

[제법을 바르게 관찰하려면 伏心=나의 어떤 편견, 내 주관 등을 전부 항복 받아야 됩니다.

우리 중생은 자기 가까운 쪽으로 편들게 되어있고, 편견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항복하는 마음 즉 자기의 편견을 항복 받아 놓으면 모든 법을 바르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三十七品是道場(삼십칠품시도량) 捨有爲法故(사유위법고)

37도품이 도량이니유위법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기 때문이며, 

The thirty-seven qualities are the place of awakening for renouncing the conditioned Dharmas.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은 37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 삼십칠보리도법(三十七菩提道法), 37각지(三十七覺支), 37도품(三十七道品), 37도분(三十七道分), 37조도법(三十七助道法), 37품도법(三十七品道法), 37품(三十七品)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깨달음, 도(道), 보리(菩提)]에 이르는 37가지 법’을 말하며, 초기불교의 '아함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37가지 도품(道品), 즉 수행법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실상 초기불교 수행법을 통칭하는 말이다.

'아함경'에서 붓다가 언급하는 37조도품은 네 가지 마음챙김=4념처(四念處), 네 가지 바른 노력=4정근(四正勤), 네 가지 성취수단=4여의족(四如意足), 다섯 가지 기능=5근(五根), 다섯 가지 힘=5력(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7각지(七覺支),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8정도(八正道) 등의 일곱 가지 수행법을 합친 것이며, 이를 7과(七科)라고 한다. ]

諦是道場(제시도량) 不誑世閒故(불광세간고)

4제(사성제) 도량이니세간을 속이지 않기 때문이며,

The Four Noble Truths are the place of awakening, for they do not deceive the world. 

[四諦가 是道場이니 不誑世間故며 세간을 속이지 않는 연고 또는 세간에 속지 않는 때문이다. 고집멸도를 제대로 보면 세간에 속지 않고 인생살이에 속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우루베라의 네란자라강(尼蓮禪江) 기슭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베나레스 교외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녹야원(Migadāya)에서 같이 수행하던 다섯 제자들에게 초전법륜(初轉法輪), 최초로 설한 법이 사성제(四聖諦)이고, 그 수행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이다. 사성제는 부처님이 불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서 가장 처음으로 설한 것이고, 그 후 쿠시나가라(Kuśinagara)에서 반열반에 드실 때까지 45년 동안 가장 많이 설하신 가르침이다.

사성제란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단하게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 고와 고의 원인,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緣起是道場(연기시도량) 無明乃至老死皆無盡故(무명내지노사개무진고)

연기 도량이니무명에서 늙음과 죽음까지 모두가 다함이 없기 때문이며, 

Dependent arising is the place of awakening, because ignorance and even old age and death are all endless. 

[연기의 공식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 있고 없음에 대한 상관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모든 존재의 법칙은 인연의 어떤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연기의 법칙을 아는 것이 보다 중요합니다. 즉 우주의 중심은 '나'이며, 나의 존재 원리가 바로 열두 가지로 연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명(無明),행(行), 식(識), 명색(名色),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열두 연기가 고리같이 계속 연결되어 있는, 정적인 조건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현재 내가 어떤 과정으로 이런 작용을 하고, 이렇게 존재해서 이렇게 말을 하고, 듣는 등의 생활이 펼쳐지고 있는 전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떤 활동으로써 내 삶이 계속되는 것이 '생', 태어난다는 뜻이 아닌 산다는 것이고, 그 삶의 모습이 촉, 수, 애, 취, 유.

은 육입으로 감촉하고, 육입 이전에는 명색=몸과 마음, 명은 마음의 정신세계, 색은 육신입니다.
좀더 미세하게 보면 , 의식이라고 하는 인식작용이 있어서 명색, 몸도 생각하고 마음도 생각하는, 몸도 인식하고 마음도 인식하는데, 그 의식작용= 인식하는 작용은 의식의 움직임으로부터 있는 그것이 '행'입니다. 우리의 의식작용이 작용해서 활동하는 것이 '행', 아~ 꽃이 붉다. 이것은 누가 가져왔구나? 등의 의식이 흘러가면서 좋다 나쁘다를 인식하는 것이 행과 식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식 할 수 있는 의식의 근원자리는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것, 의식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 근원을 찾을 수 없어서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무명, 어둡다, 밝음이 없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혼돈의 의식 근원자리가 있는 그것 (도교에서는 혼돈이라고 함) 혼돈에 일곱 구멍을 뚫어더니 나중에 혼돈이 죽더라는 말이 있는데, 혼돈은 무명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근원자리는 같다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삶 그리고 늙어서 죽는다 것은 누구나 다 겪고 있는 상황들인데, 흔히 십이인연을 이러한 면에서 해석하지 않습니다만, 십이인연을 인연으로 해서 십이인연의 조건으로 해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이해를 해야 되고, 또 십이인연을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해석은 무명, 행, 식 까지를 정신세계로 보고, 그 정신세계가 과거의 어떤 인연에 의해서 모태에 들어가서 정신과 육체의 모습이 겨우 형성되는 것을 명과 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태 안에서 육근이 분명하게 나누어지고 육근이 생겨서 귀, 코, 눈, 혀, 입들이 제대로 모습을 갖추는데, 이 때를 육유라고 해석하고, 그 이후부터는 출퇴를 이야기하는데, 태어나서 갓난아기 때는 촉감만 느끼고 받아들일 줄을 모르다가, 한 2~3세쯤 되면 수, 받아들이는 작용을 한다. 그 다음에는 취, 친한 사람을 취하려 하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배척하는 그것이 취이다. 다음에 점점 철이 들면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소유하려고 하는 소유욕 慾, 그래서 전부 소유당하고 또 소유하면서 살아가고 늙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연연 따라 반쪽 해석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을 작동시키고 육입을 작동시키고 촉, 수, 애, 취, 유가 하루에도 여러 수십 번씩 있는 일인데, 그것은 결국 육근을 가지고 촉, 수, 애, 취, 유, 생, 노, 사를 하고 있는데, 그 육근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명색입니다.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지기 이전에 인식작용이 있는 것이 이다. 인식작용은 뭔가가 움직이는 것, 의식이 움직이면서  흘러가기 때문에 인식하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지금 우리의 현재상태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면 캄캄해서 모르는,
지금 정신을 이렇게 활발하게 쓰고 있지만 이 정신의 근원자리를 찾아낼려고 하면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아무도 꼬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그것이 무명입니다. 밝음이 없는, 캄캄한데서 무엇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다. 어둡고 막연한 곳에서 뭔가 움직여서 하나씩, 하나씩 인식하기 시작하는 의이 나와서, 그 다음에 명색, 정신과 육체에서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는 작용을 하는 촉, 지금 당장 우리가 이것은 나의 입에 맞고 안  맞는다고 하면서 = 받아들이고, 좀 더 마시고 싶으니까 더 달라고 해서 애, 취 유의 이러한 삶이 계속되는 것이 십이인연입니다.

이러한 인연관계로 해서 오늘의 내 활동과 삶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는 것이 연기의 법칙이라고 했는데 내 삶, 이 순간의 이 삶이 십이인연으로 해서 이렇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의 이치가 그대로 도량이고, 그것이 무진= 끝없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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