爾時長者維摩詰(이시장자유마힐) 問文殊師利(문문수사리)

그 때 장자 유마힐은 문수사리에게 물었으니,

At that time, the elder Vimalakirti asked Manjusri, 

 

仁者遊於無量千萬億阿僧祇國(인자어무량천만아승지국) 何等佛土(하등불토)

有好上妙功德成就師子之座(유호상묘공덕성취사자지좌)?

“인자여, 그대는 무량천만억 아승기의 부처님의 나라들을 돌아보았으려니와, 어느 부처님의 나라에 말할 수 없이 훌륭한 공덕을 갖춘 사자좌(Sihsana)가 있습니까?”

Noble one, you have travelled through countless thousands, then thousand, and hundreds of millions of asamkyeya of countries. Can you tell me which Buddha land has lion seats that are the realization of excellent and wondrous merits? 


文殊師利言(문수사리언) 居士(거사) 東方度三十六恒河沙國(동방도삼십육항하사국)

문수사리는 답하기를, 거사님, 동쪽으로 36항하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나라들을 지나서 수미상(Merudhvaj)이라는 세계가 있으며, 

Manjusri said, Householder, in the east, after passing through thirty-six kingdoms that are countless as the sand of the Ganges, 

[앞에서 사리불이 앉을 의자를 생각한 인연으로 법을 구하는 마음에 대해서 길게 설법을 한 후, 유마힐은 다시 인간적인 입장에서 훌륭한 의자를 구해서 문병 온 사람들에게 앉게 하고자, 훌륭한 의자를 구하기 위해서 경험이 많고 견문이 넓은 문수사리에게 물었으며, 문수사리는 수미상 세계의 아름다운 의자를 소개하였다.]

 

有世界名須彌相(유세계명수미상) 其佛號須彌燈王(기불호수미등왕) 今現在(금현재)

그 나라 부처님의 이름은 수미등왕(Merupradīparaja)이시니, 지금 그 곳에 계시며, 

there is a world named Sumeru Form. The Buddha, called Sumeru Lamp King, is now present there. 

 

彼佛身長八萬四千由(旬(피불신장팔만사천유순)

其師子座高八萬四千由旬(기사자좌고팔만사천유순) 嚴飾第一(엄식제일)

그 부처님의 신장은 8만 4천 유순이며, 그 사자좌의 높이도 8만 4천 유순이며, 장엄된 아름다움이 제일입니다.


That Buddha’s body is eighty-four thousand yojanas in height, his lion seat is eight-four thousand yojanas high, and is the most magnificently decorated.  

[由旬(유순)=고대 인도의 거리(距離) 단위. 하루의 행정(行程) 또는 거리를 재는 단위, 유사나, 유연, 유선나라고도 하며 1 유순은 30 또는 40리, 16리, 8 km라고도 함]


於是長者維摩詰現神通力(어시장자유마힐현신통력) 卽時彼佛遣(즉시피불유)

三萬二千師子座(삼만이천사자좌) 高廣嚴淨(고도엄정) 來入維摩詰室(내입유마힐실)

그 때 장자 유마힐이 신통력을 발휘하시니, 즉시 수미등왕 부처님께서 3만 2천개의 사자좌를 유마힐의 방에 들여보내셨는데, 그 사자좌들은 한결같이 높고 넓고 장엄하고 깨끗하였습니다. 

Then Vimalakirti unleashed his divine power, and immediately that Buddha sent theirty-two thousand tall, broad, magnificent, and pure seats into Vimalakirti’s room. 

 

諸菩薩大弟子(제보살대제자) 釋梵四天王等(석범사천왕등) 昔所未見(석소미견)

여러 보살과 대제자들과 제석천, 범천, 사천왕 등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던 일이었습니다.  

Bodhisattvas, the great disciples, Sakra, Brahma, the four heavenly kings, and so on, witnessed an unprecedented sight. 

[이 품의 이름이 부사의품으로,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법사변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도리상상이 안 되는 경지라는 뜻이다즉 유마힐의 작은 방안에 어마어마하게 높고 큰 의자 3만 2천개를 다 넣어도 조금도 비좁거나 걸림이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부사의한 도리라는 것이다즉 먼지 하나 속에 온 시방세계를 다 함유하고 있다[一微塵中含十方]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모든 존재가 꿈이며 가상이며 허상이며 환영이라는 이치를 터득한 경지에서는 크고 작음이 걸림이 없으며 많고 적음도 걸림이 없으며 멀고 가까움도 걸림이 없다. 3만 2천개의 사자좌를 작은 먼지 속에 넣는 것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하물며 방안에 넣는 것이겠는가.]

 

其室廣博(기실광박) 悉皆包容(실개포용) 三萬二千師子座(삼만이천사자좌)

無所妨礙(무소방애)

그 방은 넓고도 커서 이 3만 2천개의 사자좌를 다 수용하고도 비좁거나 걸림이 없었으며,   

The room was so vast that it contained all thirty-two thousand lion seats without there being any sense of constraint. 

 

於毘耶離城(어비야리성) 及閻浮提四天下(금염부제사천하)

亦不迫迮(역부박책) 悉見如故(실견여고)  

비야리성과 염부제(Jambudvīpa) 사천하도 좁아지거나 답답해짐이 없이, 어디를 보아도 전과 같았습니다.

The city of Vaisali, Jambudvipa, and the four continnents also don’t seem crowded, and appearing all as before. 


爾時維摩詰語文殊師利(이시유마힐어문수사리) 就師子座(취사자좌)

與諸菩薩上人俱坐(여제보살상인구좌) 當自立身如彼座像(당자림신여피좌상)

그 때 유마힐이 문수사리에게 말하였으니, 사자좌에 나아가서 보살과 대제자들과 함께 올라 가 앉으십시오. 당연히 저절로 그 사자좌의 크기만큼 그 몸이 갖추어질 것입니다.
Then, Vimalakirti said to Manjusri, Take the lion’s seats and sit along with the bodhisattvas and other distinguished ones, and make yourself like the image of that seat. 

[사람은 작은데 의자는 너무 크다. 그러나 그 의자는 본래로 오지 않으면서 왔고, 크지 않으면서 큰 것이라서, 의자가 사람의 크기에 맞추거나, 사람이 그 의자의 크기에 맞추는 것이 서로가 원융무애하고 자유자재한 경지이기 때문에 아무런 걸림이 없다. 모든 존재는 본래로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현상만 쫓아다니고 현상에 이끌려 살다보니 존재의 공성이나 존재의 원융성은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할 뿐이다. 

 

其得神通菩薩(기득신통보살) 卽自變形(즉자변형) 爲四萬二千由旬(위사만이천유순)

坐師子座(좌사자좌)

신통력을 얻은 보살들은 곧 스스로의 형체(몸)를 바꾸어 4만 2천 유순으로 변하게 해서 사자좌에 앉았으나, 

The bodhisattvas who had attained divine power transformed their bodies to forty-two thousand yojanas in height and sat in the lion’s seats. 

 

諸新發意菩薩(제신발의보살) 及大弟子皆不能昇(금대제자개불능승)

새로 발심한 보살=新發意菩薩들이나, 대제자들은 아무도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However, the bodhisattvas who were recently initiated could not rise to the seat. 

[새로 발심한 보살들이나 설사 부처님의 큰 제자들이라 하더라도 소승적 안목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그 높은 사자좌에 올라가지 못하고 바라만 볼 뿐이다.]


爾時維摩詰語舍利弗(이시유마힐어사리불) 就師子座(취사자좌)

그 때 유마힐이 사리불에게 말하였으니, “사자좌에 나아가십시오.”
Then Vimalakirti said to Sariputra, Sit on the lion seat. 

舍利弗言(사리불언) 居士(거사) 此座高廣(차좌고광) 吾不能昇(오불능승)

사리불이 말하기를 “거사여, 이 사자좌는 높고 넓어서 저는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Sariputra said, Householder, the seat is so tall and broad, I cannot go up there. 

 

維摩詰言(유마힐언) 唯舍利弗(유사리불) 爲須彌燈王如來作禮(위수미등왕여래작례)

乃可得坐(내가득좌)

유마힐이 말하되, “알았습니다, 사리불이여. 수미등왕여래에게 예배하면 앉을 수 있을 것입니다.”
Vimalakirti said, O Sariputra, give salutations to Sumeru Lamp King, and you can ascend to the seat. 

 

於是新發意菩薩(어시신발의보살) 及大弟子(급대제자)

卽爲須彌燈王如來作禮(즉위수미등왕여래작례) 便得坐師子座(편득좌사자좌)

그리하여 새로 발심한 보살과 대제자들이 수미등왕 여래에게 예배하자 곧 사자좌에 앉을 수 있었다.

Then all the bodhisattvas who were recently initiated, as well as the great disciples, offered their obeisance to Sumeru Lamp King to ascend to the lion’s seat. 

[유마경은 대승보살불교를 선양하는 경전이다그러므로 부처님의 출가제자 중에 지혜가 제일이라는 사리불도 사(事)와 사(事)가 무애한 존재의 원융성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높고 높은 사자좌에 스스로 오르지 못하고 수미등왕여래에게 예배를 한 뒤에 부처님의 힘을 빌려 겨우 오르게 됨을 밝혔다.]

 

舍利弗言(사리불언) 居士(거사) 未曾有也(미증유야) 如是小室(여시소실)

乃容受此高廣之座(내용수차고광지좌) 於毘耶離城(어비야리성) 無所妨礙(무소방애)

사리불이 말하였다. “거사님, 전에 없던 희귀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작은 방에 이와 같이 높고 넓은 사자좌를 수용하여도 비야리성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으며, 

Sariputra said, Householder, it is inconceivable such a small room can accommodate so many hight and wide seats, and there is no hindrance to the space of the city of Vaisali. 

 

又於閻浮提聚落(우어염부제취락) 城邑及四天下諸天(성읍급사천하제천)

龍王鬼神宮殿亦不迫迮(용왕귀신궁전역불박책) 迫 다그칠 박, 迮 다그칠 책
또 염부제의 마을과 성과 읍, 그리고 사천하의 모든 천신, 용왕, 귀신들의 궁전 또한 좁아지거나 답답해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And the cities and towns of Jambudvipa, the four continents, and the many palaces of the heavenly beings, dragon kings, and spirits are without constrictions. 

[유형무형이 모두가 사사무애(事事無碍)하다. 마치 한 법당 안에 등불을 천개를 켜나 만개를 켜나 그 불빛들은 서로 장애하지 않고 다 자신의 빛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모양과 형상의 한계에 가로막혀 있는 사리불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보살의 불가사의한 해탈의 경계를 설하기 위하여 불가사의한 현상을 먼저 보여준 것이다.]


維摩詰言(유마힐언) 唯舍利弗(유사리불) 諸佛菩薩有解脫(제불보살유해탈)

名不可思議(명불가사의)

유마힐은 말하되, “그렇습니다, 사리불이여.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에게는 불가사의라는 이름의 해탈이 있습니다. 

Vimalakirti said, O Sariputra, the buddhas and bodhisattvas have a kind of liberation called inconceivable. 

 

若菩薩住是解脫者(약보살주시해탈자) 以須彌之高廣(이수미지고광)

內芥子中無所增減(내개자중무소증감)

만약 보살이 이 해탈에 머무르면, 높고도 넓은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넣어도 그 겨자씨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바가 없고, 

If a bodhisattva has mastered this liberation, he can put the incomparably tall Mount Sumeru into a mustard seed, and there will be no increase or decrease. 

 

須彌山王本相如故(수미산왕본상여고) 而四天王(이사천왕) 忉利諸天(도리제천)

不覺不知己之所入(불각불지기지소입)

수미산도 예전과 같기 때문이며, 사천왕이나 도리천과 같은 제천들은 자신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를 전혀 알지도 못합니다. 

The original appearance of the Sumeru, King of Mountain, will remain unchanged. And the four heavenly kings and Trayastrimsa heaven will not realize they have entered inside. 

[세상사를 자세히 보면 불가사의하지 않은 것이 없다. 첫째는 사람의 마음작용이 불가사의 해서, 훈련에 의해서 상상도 못할 재주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역시 불가사의하다. 요즘은 정보가 발달해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가사의 한 일들을 다 알 수 있다. 수미산이 겨자씨 속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사의 하지만 한 사람이 만권의 책을 읽는 것도 불가사의 하고 손톱만한 작은 칩 속에 수 십 만권의 책이 들어가는 것도 불가사의 하고 한국에 앉아서 미국이나 아프리카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도 불가사의 하니, 모두가 불가사의해탈 법문이다.]

 

唯應度者(유응도자) 乃見須彌入芥子中(내견수미입겨자중)

是名住不思議解脫法門(시명주불사의해탈법문)

오로지 장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사람만이 수미산이 겨자씨 안에 든 것을 알 뿐이니, 이것을 불가사의한 해탈법문에 머묾이라고 합니다.

Only those who should accept deliverance can see the Sumeru inside the mustard seed. It is called the Dharma discourse of inconceivable liberation.

[唯應度者(유응도자) 나집은 ‘응도자(應度者),’ 지겸은 ‘이인(異人),’ 현장은 ‘신통력(神通力)의 조복자(調伏者),’ 티베트 역에서는 ‘신통에 의하여 화한 타인(他人)들’이라 하였다.]

 

又以四大海水入一毛孔(우이사대해수입일모공) 不嬈魚鼈黿(불요별원)

鼉水性之屬(타수성지속) 而彼大海本相如故(이피대해본상여고) 

嬈 번거로울 뇨, 鼈 자라 별, 黿 자라 원, 鼉 자라, 악어 타

또 사대해의 바닷물을 하나의 털구멍에 넣어도 물고기와 자라와 큰 자라, 악어 그 밖의 물에 사는 동물의 권속들을 괴롭히는 일이 없으나, 그 대해도 본래의 모습 그대로이며, 

In addition, when the four seas move into a single pore, it does not disturb the fishes, turtles, soft-shelled turtles, alligators, and other aquatic creatures, and the ocean remains in its original form as before.

[필자(무비스님)가 이 자리에 앉아 쓴 글들을 천명 만명 수 억만 명이 복사를 해서 사용해도 내가 쓴 글은 조금도 손상이 있거나 잘못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림이나 음악이나 동영상도 마찬가지로 수 억만 명이 복사를 해도 조금도 줄어들거나 손상이 되지 않고 원본과 똑 같이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역시 불가사의 한 일이다. 큰 바닷물을 한 모공 속에 넣을 수 있는 것도 불가사의다. 왜 모든 것이 불가사의인가하면 모든 존재의 이치가 본래로 그렇기 때문이다.]

 

諸龍鬼神阿修羅等(제용귀신아수라등) 不覺不知己之所入(불각불지기지소입)

於此衆生亦無所嬈(어차중생역부소요)

온갖 용, 귀신, 아수라들도 자신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 알지도 못하며, 이곳의 중생들 또한 번거롭거나 괴롭히지 않습니다.

The dragons, demons asuras, and so forth are not conscious and do not know of their entry, and these beings are also undisturbed.

6. 부사의품(不思議品)
維摩詰所說經 不思議品 第六
Chapter 6 Inconceivable


爾時舍利弗(이시사리불) 見此室中無有牀座(견차실중무유상좌) 作是念(작시념)

그 때 사리불(舍利弗)은 이 방안에 앉을 자리[牀座]가 없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At that time, when Sariputra saw that there was no bed or seat in this room, he thought to himself,

[不思議= 불가사의 하다'  '도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보통사람의 생각으로는 미칠 수 없는 경지'라는 뜻입니다 

부사의 품에는 화엄경의 事事無碍 이치가 설명 되고 있습니다.]  

 

斯諸菩薩(사제보살) 大弟子衆(대제자중) 當於何坐(당어하좌)?

‘이렇게 많은 보살과 수많은 대제자들은 어디에 앉아야 할 것인가?’

Where should so many bodhisattvas and great disciples sit? 

長者維摩詰知其意(장자유마힐지기의) 語舍利弗言(어사리불언)

장자 유마힐은 그러한 마음을 알고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Vimalakirti, the elder, knowing what he was thinking, said to Sariputra, 

云何仁者(운하인자) 爲法來耶(위법래야)? 求牀座耶(구상좌야)? 

도대체 (어찌하여) 그대는 진리=法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까, 아니면 앉을 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까?”

What is the matter, Benevolent One? Have you come for the Dharma or a seat? 

舍利弗言(사리불언) 我爲法來(아위법래) 非爲牀座(비위상좌)

사리불이 말하되, 저는 진리를 위해서 왔지, 앉을 자리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Sariputra said, I have come for the Dharma, not the seat. 

維摩詰言(유마힐언) 唯舍利弗(유사리불)

夫求法者(부구법자) 不貪軀命(불탐구명) 何況牀座(하황상좌)?

유마힐이 말하되, 唯=여보시오 (알았습니다) 사리불이여.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신명=軀命도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앉을 자리에 집착해서야 되겠습니까? 

Vimalakirti said, O Sariputra, he who seeks the Dharma does not desire a body or a life, let alone a seat? 

[不貪軀命= 몸과 목숨도 생각하지 않는다. 爲法忘軀(위법망구)=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린다는 위법망구의 유래가 열반경 설산동자가 수행자로써 떠돌아다니고 있을 때  어느 산길을 가다가 諸行無常 是生滅法(제행무상시생명법)= 모든 것은 무상하고, 이것은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칙이라는 말을 듣고는, 산중에서 누가 이런 말을 하는가? 하고 찾아보니 험상궂게 생긴 나찰이 나타나서 내가 그 법문을 했다고 하니까, 설산동자가 생각하기에 그 법문은 뭔가 좀 부족하다고 하니까 그 나찰이 반밖에 말하지 못했으나 지금 배가 고파서 도저히 그 나머지 법문을 해 줄 수가 없으니까 갓 죽은 사람의 피로 요기를 해야 뒷구절을 일러줄 수 있다고 해서 설산동자가 당신의 몸을 보시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머지 게송을 일러달라고 부탁합니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열반경 4구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소리든, 감각이든, 맛이든, 무엇이든 전부 생하고 멸하니, 그러나 그 현상이 끊어진 자리, 적멸한 자리가 고요한 적멸의 자리이다.   

설산동자가 그 말을 듣고 깨달아서 너무나도 기뻐서 이 훌륭한 법구를 세상에 전하고자 손을 깨물어서 피를 내어서 암벽에쓰고는 약속한대로 나무에서 뛰어내리니까 나찰이 갑자기 제석천으로 변해가서 뛰어내리는 설산동자의 몸을 사뿐히 받아서 땅에 내려놓으면서 내가 당신의 수행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랬노라, 사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을 지키고 보호하고 때로는 시험하고 때로는 경책도 하는 제석천왕으로써 당신의 수행이 어느 정도 되었는가? 또 얼마나 심신이 지극한가? 정말 법을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세가 되었는가를 보기위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고백을 하는데, 그것이 석가모니 전생에 쌓은 수행이라는 내용입니다.

중국의 선지식을 모신 신라의 혜통국사, 달마스님의 제자 혜가스님들이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리는 위법망구의 표본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불교역사에는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夫求法者(부구법자) 非有色受想行識之求(비유색수상행식지구)

또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색, 수, 상, 행, 식을 구하지 않으며, 

Anyone who seeks the Dharma does not seek the context of form, sensations, perceptions, mental activities, or consciousness; 

非有界入之求(비유계입지구) 非有欲色無色之求(비유욕색무색지구)

계(界)나 입(入) 따위를 구하지 말아야 하며, 有欲=욕계, 色=색계, 無色=무색계도 구하지 말아야 하며, 

he seeks nothing of realms or entrances; he seeks nothing for desires, form or formlessness. 

[계= 육근+육진+육식은 18계. 육근+육진은 12입. 육근은 6입.   

나의 주관을 나누면 6가지가 되고, 객관을 거기에 맞추면 6가지가 되고, 그 관계에서 일어나는 인식작용들이 6가지입니다.

非有欲,色,無色之求니라= 욕계는 우리가 사는 세상, 색계와 무색계는 천상인데, 그 어느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법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법은 그런 현상적인 것에 걸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구하려고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唯舍利弗(유사리불) 夫求法者(부구법자) 不著佛求(불착불구)

不著法求(불착법구) 不著衆求(불착중구)

사리불이여,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부처=佛에게 집착하여 구하지 말고, 부처의 가르침=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며,

승단=僧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아야 하며,
O Sariputra, those who seek the Dharma, is without attachment to the Buddha, without attachment to the Dharma, and without attachment to the Sangha. 

[법을 구하는 것은 부처님이나 그 가르침에 매달리거나, 대중들에 집착해서 구하는 것도 아니다. 대중 衆을 쓴 것은, 사부대중, 불법을 수행하고 함께 구하는 단체, 법을 구하는 입장에서는 대중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夫求法者(불구법자) 無見苦求(무견고구) 無斷集求(무단집구) 無造盡證(무조진증)

修道之求(수도지구)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괴로움을 알고자= 함이 없이 구하고, =괴로움의 원인을 끊고자 구하는 것이 아니며, 盡證=함(열반)을 증득하고자 구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에의 길을 닦고자= 함이 없이 구해야 합니다. 

Anyone who seeks the Dharma does not seek it through perceiving suffering, eliminating the collective, or establishing cessation and cultivating the path. 

[無見苦求=괴로움을 보고 구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이 괴로움이라는 문제에 집착해서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구하는 것도 아니다. 괴로움을 떨쳐버리고자 구하는 것도 아니다.

無斷集求= 사성제 苦集滅道의 集, 원인을 끊으려고 법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無造盡證=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 다함에 나아가는 것을 증득하려고 구하는 것도 아니고  

修道之求=수도는 팔정도를 닦는, 도를 닦는 것을 위해서 법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대게 사성제의 올바른 수행을 위해서 법을 구하는 것을 당연하게 이야기하는데,  이 유마경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그러한 법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법이란 그러한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특정한 것을 내세워서 이것 때문에 법을 구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 法無戲論(법무희론) 若言我當見苦(약언아당견고)

斷集證滅修道(단집증멸수도) 是則戲論(시즉희론) 非求法也(비구법야)

왜냐 하면, 진리에는 무의미한 희론이 없기 때문이니, 만약 말하기를 나는 당연히 見苦=괴로움을 알고,  斷集=집착을 끊고,證滅=깨달음의 경계에 이르고, 修道=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닦는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의미한 희론(말장난)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Why? The Dharma is without conceptual elaboration. If one says, I need to perceive suffering, eliminate the collective, establish cessation, and cultivate the path, that is conceptual elaboration, not seeking the Dharma. 
[戱論=고집멸도, 색, 수, 상, 행, 식, 욕계, 색계, 무색계 이 모두가 이론이기 때문에 희론, 말장난일 뿐, 법에는 희론이 없는 것이다

非求法也= 법은 말을 초월해 있다. 즉 어떠한 좋은 이론도 사실은 이론에 불과할 뿐 법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唯舍利弗(유사리불) 法名寂滅(법명적멸) 若行生滅(약행생멸)

是求生滅(시구생멸) 非求法也(비구법야)

사리불이여, 진리=法은 적멸(upanta)이니, 만약 생멸(현상)을 (반복하면) 이는 생멸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O Sariputra, the Dharma is called calmness and extinction (nirvana), and if one practices birth and death, 

[唯=여보십시오 사리불이시여 法名寂滅=법이라고 하는 것은 굳이 이름하자면 적멸이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의 생멸멸이하면 적멸위락의 적멸입니다.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따라서 마음이 작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작용일 뿐 본체는 아니다. 본체에서 흘러나오는 작용은 적멸한자리, 적멸하니까 작용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본체자리가 어떤 형태로 있으면 한계가 있고 또 있는 것만 나오게 되지만, 적멸해서 아무것도 없는 자리이니까 무한히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텅 비고 아무것도 없는 적멸한 자리에서는 많이 나오게 되어있고 또 무한한 변화가 있게 되어있다. 그것이 본체자리이고, 그래서 법이라고 하는 것의 이름이 적멸이다.

若行生滅=그런데 거기서 생멸을 행 한다면, 是求生滅이요 非求法也며= 이것은 생멸을 구하는 것이고 법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동자의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이라. 구경에 가서는 적멸이 낙이 되고 적멸이 목표다.

여기서 법은 적멸이다 만약에 생멸을 행한다면 생멸은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이고 또 현상 따라서 흘러가는 것이 생각입니다. 내가 이런 말 하면 이렇게 알아듣고 저런 말하면 저렇게 알아듣고 춥고 더운 것 알아차리는 것은 전부 생멸, 우리마음의 생멸상태인데, 생멸의 마음작용이 있어야 이해를 하게 되고 표현을 하게 되는, 그런 작용이 필요하면서도 그 작용의 본 자리는 텅 비고 적멸하다. 적멸하니까 무럭무럭 끝없이 피어오르는 마음의 생멸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생멸 작용은 참 묘하게, 그 안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일어나는 것입니다. 뭔가 있으면 있는 만큼만 나올텐데, 마음의 자리가 적멸하고 텅 비어 없으니까 우리의 생각이 무한히 돌아가고, 생각이 흘러가고, 그 생각이 작용을 하는 그것을 한마디로 생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은 그 적멸한 본체자리이니 눈앞에서 계속 흘러가고, 생멸 변화하는 현상을 쫒아가지 말아라. 그것은 생멸에 불과한 것이고 본체는 아니다. 법을 중요하게 이야기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法名無染(법명무염) 若染於法(약염어법) 乃至涅槃(내지열반) 是則染著(시즉염착)

非求法也(비구법야)

法=진리는 번뇌에 물듦이 없는=無染이니, 만일 진리 내지는 열반에 집착해 染=물들었다면, 그것은 오염된 집착=染着일 뿐,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one is seeking birth and death, not the Dharma or even nirvana stains one, that is staining, not seeking the Dharma. 

[법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것, 어디에도 젖지 않고,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공도리가 좋다고 하지만 공 도리에 집착하고 빠져서 그 공 도리에 물들면, 그것도 역시 병이지 바람직한 법은 아니다]

     

法無行處(법무행처) 若行於法(약행어법) 是則行處(시즉행처) 非求法也(비구법야)

진리는 대상=行處가 없으니, 만약 진리(법)를 행할 것 같으면, 이는 곧 대상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The Dharma has no place for action, but if one practices that Dharma, one is pursuing a place of action, not seeking the Dharma.  

[是則行處요 非求法也며= 행하는 일, 흘러가는 일 흘러가는 곳 그것이지 법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法無取捨(법무취사) 若取捨法(약취사법) 是則取捨(시즉취사)非求法也(비구법야)

진리는 取捨=취하고 버림이 없으니, 만약 진리를 얻거나 버린다고 하면 이는 곧 취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The Dharma has no grasping nor renouncing, but if one grasps and renounces the Dharma, it is grasping and renouncing, not seeking the Dharma.

[만약에 취하고 버리는 취사가 있으면, 선악시비의 좋고 나쁜 것이 있게되고, 옳고 그름이 있게 되어서 좋은 것을 따라가고 옳은 것을 행하려고 하다보면 이미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치우치게 되면 금방 문제가 생기게 되고 그 문제는 온갖 다른 문제들을 끌어들여서 번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경전에서는 항상 중도, 취하고 버리는 것이 없어야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현실은 전부 취할 것과 버릴 것으로 구성되어있고 또 우리의 삶은 매일매일 취하고 버림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때 묻은 옷은 벗어서 씻어야 되고 또 새로운 옷을 갈아 입어야 되는 것도 취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는 것도 깨끗한 쌀은 취하는 것으로 우리 일상생활이라는 것이 취하고 버리는, 취사의 연속이지만 취사에 치우치지 말라, 취사에 빠져 있지 말라, 취사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편협하게 치우치면 그로 인해서 온갖 다른 문제들이 그야말로 칡넝쿨처럼 얽키고 섥키게  되어서 반드시 괴로움과 불행을 낳게 된다. 취하고 버리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法無處所(법무처소) 若著處所(약착처소) 是則著處(시즉착처) 非求法也(비구법야)

진리는 (그를 거두어들이는) 처소가 없으니, 만약 그러한 처소에 집착하면 그것은 처소에 집착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Dharma has no place, but it one attaches oneself to a place, then one is attaching oneself to a place, not seeking the Dharma. 

[法無處所=법에는 처소, 어떤 일정한 장소가 없다

예를 들어 부다가야 보리수 밑에서 법을 얻었다고 해서 누구든지 그 보리수 밑에 가면 깨달아야 될 것이지만, 법은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갓바위가 영험 있다고 하지만 거기에 가는 모두에게 다 영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자세 때문에 영험이 있어지는 것이지, 장소에 영험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서리불이 밥 한 그릇을 부처님께 공양을 했는데, 부처님은 그 공양을 개에게 주고는 사리불에게 묻기를, '사리불이여 그대가 부처님에게 올린 한 그릇의 공양의 공덕이 많겠느냐? 내가 개에게 그 똑같은 한 그릇의 밥 보시의 공덕이 많겠는가?' 사리불이 '부처님이시여 제가 설사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렸다 하여도 그것은 내 수준으로 올린 것이고, 부처님은 비록 개에게 공양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처님의 수준으로 준 것이니, 어떻게 나의 수준과 부처님의 수준을 비교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도대체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중요한 것인데, 확신이 아직 부족하니까 자꾸 대상에 팔려서, 어디가면 공짜로 영험이 돌아오고, 성스러운 기도 도량에 가면 기도가 잘 되는 것으로 믿는데 사실은 내 마음자세 때문입니다. 

불교는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자신에게 귀의하고, 진리에 귀의하고,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고 하는데도 자꾸 어떤 대상에 끌려 가니까 법에는 처소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강화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으면 자신의 힘이 생겨서 강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압니까?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일도 겪게 될 텐데 내 자신을 제대로 지키고 있어야 하늘이 무너질 때도 쏟아날 구멍을 찾을 수 있는 것이지, 내 자신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상황에 부딪첬을 때 완전히 혼비백산할 뿐일 것입니다]

 

法名無相(법명무상) 若隨相識(약수상식) 是則求相(시즉구상) 非求法也(비구법야)

진리는 형상이 없는=無相이니,  만약 형상=相을 따라서 분별하고자 하면 그것은 형상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Name of the Dharma is no-form, so if one is aware through form, that is seeking form, not seeking the Dharma. 

[금감경에서 상을 떠난 사람이 부처님이라 했습니다. 법이란 무상, 상을 떠난 사람이다. 상을 떠난 경지가 법이라 했습니다.  상이란 눈앞에 들어나는 현상으로, 우리 모두가 현상= 눈앞에 들어나는 상을 보고 살지만, 눈앞에 나타난 어떤 상도 전부 헛것, 허상이라고 봐야 상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상에는 미혹되거나 빠지거나 집착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마거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육조스님이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후 오조스님에게 갔을 때, 그대가 여기에 뭐 하러 왔느냐고 물으니까? 惟求作佛(유규작불)이요 不求餘物(불구여물)이니이다. 오직 부처되기 위해서 내가 이절에 왔지, 다른 어떤 물건을 구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 한것과 같이, 사리불이 유마거사의 도량, 집, 수행 장소이고, 도량에 온 것이 '舍利弗言(사리불언) 我爲法來(아위법래) 非爲牀座(비위상좌)' 사리불이 법을 구하러 온 것과 같은 맥락의 구성입니다.]   

 

法不可住(법불가주) 若住於法(약주어법) 是則住法(시즉주법) 非求法也(비구법야)

진리는 머무는 곳이 없으니, 만약 법이 머문다고 한다면 이는 법에 머물고자 하는=住法이지, 진리(법)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Dharma is without abiding, so if one abides in the Dharma, one is abiding in the Dharma, not seeking the  Dharma. 

[금강경에서 妙行無住, 아름다운 행위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했듯이 여기에서도 法不可住라 법은 가히 머물지 않는다.

왜 머무는 것을 경계해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 ? 무엇 하나도 머물러있지 않고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있는 이치를 꿰뚫어 본 그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지, 새로운 법도 아니고, 조작해서 억지로 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있는 사실을 제대로 보라고 하는 것일 뿐 다른 것은 아무것 없습니다. 그래서 무상도 상이 상 그대로 있어지지 않고, 또 본래 없었던 것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변하게 되어있고, 변하다 보면 결국 없어지게 되어있으니까 무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法不可住= 우리는 눈앞의 모습이 영원히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바른 안목을 자꾸 배움으로 해서 우리의 안목도 차츰차츰 교정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도 자꾸 훈습하고 익히고 몸에 배도록 해서 부처님의 안목을 닮아간다는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法不可見(법불가견) 聞覺知若行(문각지약행) 聞覺知是則(견문각지시즉)

見聞覺知非求法也(견문각지비구법야)

진리는 보고, 듣고, 지각해서 식별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만약 보고, 듣고, 지각하며, 식별해 알고자 하면, 그것은 보고, 듣고, 지각하며, 식별해 아는 (것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The Dharma is not visible, not audible, not perceptible, nor knowable, but if you practice seeing, hearing, realizing, or knowing, you are seeing, hearing, realizing, and knowing, and not seeking the Dharma.

[우리는 일상사 전부가 견문각지 속에서 생활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런 견문각지로써 생활하는 안목은 한계가 있어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그것을 초월해서 견문각지를 따르지 않아야 된다.]

             

法名無爲(법명무위) 若行有爲(약행유위) 是求有爲(시구유위) 非求法也(비구법야)

진리는 인연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는=無爲이니, 만약 만들고자 하면 이는 만들어지는=有爲를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The name of the Dharma is unconditioned. If one practices the conditioned, one seeks the conditioned, not pursuing the Dharma. 

是故舍利弗(시고사리불) 若求法者(약구법자) 於一切法(어일체법) 應無所求(응무소구)

사리불이여, 그러므로 만약 진리=法을 구하는 자는 마땅히 일체법에서 無所求=구하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Therefore, O Sariputra, if there is a person who seeks the Dharma, then he should have no seeking for all the Dharmas.

[사리불이 법을 구하러 왔다는 말에 대한 결론적인 대답이  無所求=구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노력을 해서 깨달으려고 하지만 어떤 위치를 깨달고 나면, 깨닫긴 틀림없이 깨달았지만, 그 깨달음에 대한 흔적이 없고, 아무 표시가 없는, 그냥 마음속에서 느낄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밖에 나타나는 것으로써 구하려고 하는 자세가 아니라, 사실은 구하는 것이 없는, 구해도 구한 흔적이 없고, 구한 흔적이 없으니까 어떤 흔적을 가지고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說是語時(설시어시) 五百天子於諸法中(오백천자어제법중) 得法眼淨(득법안정)

이와 같이 말하였을 때, 5백 명 천자들 모두는 모든 사물=法에 있어서 (진리를 바르게 볼 수 있는) 법안이 청정해짐=法眼淨을 얻었습니다.

When Vimalakirti said these words, five hundred celestial beings attained the purity of the Dharma eye amid all Dharmas.

[得法眼淨=법안은 진리의 눈, 법을 아는 안목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雖行四正勤(수행사정근而不捨身心精進(이불사신심정진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4정근(samyakpradhna)행하나, ( 과보를 받지 않고심신의 노력을 버리지 않고 정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Although practicing the four right exertions, one does not give up the effort of body and mind which is what the bodhisattva practice. 

[이러한 수행법들은 불교에서 기본적으로 흔히 사용하고 특히 초기 불교와 소승불교에서 많이 사용해오던 수행방법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4념처(念處), 4정근(正勤), 4여의(如意), 5(), 5(), 7각지(覺支), 8정도의 37조도법 수행을 많이 활용했습니다

 

[사정근(四正勤)=선법(善法) 더욱 자라게 하고, 악법(惡法) 멀리 여의려고 부지런히 수행을 해서 태만한 마음과 장애를 끊도록 하는 가지의 바른 노력=정근(正勤) 말한다
"
비구들이여,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있다. 무엇이 넷인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운 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쓰는 율의단(律儀斷)이며,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쓰는=단단(斷斷)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쓰는 수호단(隨護斷)이며,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닦아서 성취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쓰는 수단(修斷)이니라." - 아미산]

 

雖行四如意足(주생사여의족而得自在神通(이득자재신통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4여의족(ddhipda) 얻어서 행하면서도 이미 자유자재한 신통을 얻고 있는 것이 보살행이고

Although practicing the four bases of spiritual powers, one attains a sense of ease with supernormal powers, which is what the bodhisattva practice. 

 

[4여의족(如意足)= 4 신족(神足); '자유 자재한 힘을 얻기 위한 4가지 기반'. 가지 신통의 발이란 뜻으로 몸은 발을 의지하여 서는 것과 같이 신통이 가지 선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므로 선정을 발이라 하였다.
            
 적극적인 의욕으로 선정을 닦아 자유자재한 힘을 성취하는 ()여의족
            
 정진으로 선정을 닦아 자유자재한 힘을 성취하는 정진 여의족
            
 마음을 가다듬고 선정을 닦아 자유자재한 힘을 성취하는 ()여의족
            
사유하고 관찰하는 선정을 닦아 자유자재한 힘을 성취하는 사유(思惟)여의족]

 

雖行五根(수행오근而分別衆生諸根利鈍(이분별중생제근이둔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5 행하면서도 중생들  예리하고 둔함을 분별하여 아는 것이 보살행이며

Though one cultivates the five faculties, one can distinguish between the sharpness and dullness of sentient beings’ roots, and it is the bodhisattva practice. 

 

[5(五根) : 열반에 이르게 하는 5가지 마음의 기능
 
, 체를 믿는 信根=청정한 신심   꾸준히 착한 법을 닦는 精進根=마음을 집중하여 힘써 정진하는
 
옳은 법을 생각하는 念根=바른 지혜로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다스리는
 
마음을 곳에 머물러 산란하지 않는 定根= 탐욕과 , 불건전한 것들을 여의어서 기쁨과 안락을 느끼는 , 4선을 성취하여 거기에 머무는
 
진리를 생각하는 慧根= = 4성제의 진리를 진실 그대로 아는 등의  다섯 가지는 온갖 착한 법을 내는 근본이므로 다섯 뿌리라 한다. ]

 

雖行五力(수행오력而樂求佛十力(이락구불십력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5 발휘하면서도 (오력에 머물지 않고) 부처님의 10 구하고자 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Although practicing the five powers and yet delight in pursuing the ten powers of the Buddha, this is the practice of a bodhisattva. 

[5가지 五力 머물러 있지 않고 부처님의 가지 =십력까지도 즐겨 구하려고 하는 것이 보살행이다
오력(五力): 다섯 뿌리가 커져서 다섯 가지 장애 되는 것을 대치(對治)하는 힘을 말함이니,
믿는 =信力, 정진하는 =精進力, 생각하는 =念力, 선정힘=定力, 지혜힘=慧力이다]

 

雖行七覺分(수행칠각분而分別佛之智慧(이분별불지지혜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7각지(saptabodhyaga) 하면서도, 부처님의 지혜를  분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Although practicing the seven factors of enlightenment yet being able to distinguish the wisdom of the Buddha, this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칠각분(七覺分) 칠각지(七覺支)라고도 하며오력과 십력과 같이 7각분은 부처님의 지혜하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칠각지(七覺支): 옳게 깨닫는 법을 일곱 가지로 나눈 것이니,

지혜로 법의 참되고 거짓된 것을 가리키는 ,

용맹한 마음으로 참된 법을 꾸준히 행하는 ,

선한 법을 얻고 기뻐하는 ,

번뇌 마음을 끊고 몸과 마음이 가뿐한 ,

선정과 지혜를 항상 생각하는 ,

경계에 마음을 머물러 두어 산란하지 않는 ,

허망과 온갖 법을 버리고 마음이 시원하여져서 다시 생각하지 않는 .]

 

雖行八聖道(수행팔성도而樂行無量佛道(이락행무량불도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8정도(ryagi-kamrga) 행하면서도 헤아릴  없는 불도(buddhamrga) 행하고자 하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Even though one practices the noble eightfold path, one is happy to pursue the endless paths of the Buddha, which is the bodhisattva practice.
[비록 8정도= 바른길을 행하기는 하나, 한량없는 불도를 즐겨 행하는 것이 보살행이다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의 8정도는 일상적 생활의 도덕적인 교훈은 되는 것으로 그것들을 불도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을 행하면서 한량없는 불도를 즐겨 행하는 , 보다 높은 차원의 불도를 행하는 것이 보살행이다. 

팔정도(八正道); 정견= 제의 이치를 올바르게 보는

정사유= 정견으로 제의 이치를 올바르게 생각하여 늘게 하는

정어= 진실한 지혜로 구업(口業) 닦아서 옳지 못한 말을 하지 않는

정업= 진실한 지혜로 신업을 닦아서 잘못된 동작이 없는

정명= 업이 청정하여 정당한 법으로 살아가는

정정진= 진실한 지혜로 열반에 이르는 도를 꾸준히 닦는

정념= 진실한 지혜로 정도를 생각하는

정정= 진실한 지혜로 무루 선정에 들어가는 .]


雖行止觀助道之法
(수행지관조도지법而不畢竟墮於寂滅(이불필경타어적멸)

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비파사나=止觀, 37도법을 수행하면서도 결코 적멸(praamana) 머물고자 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Although one practices the Dharma that assists in the path, such as tranquillity of the mind, one does not ultimately fall into silent cessation, which is the practice of a bodhisattva.

[止觀=선정, 정혜지는 그치는 , 관은 관찰하는 것으로 망상을 그치면 온갖 것이 나타나서 관찰이 용이해집니다.  

해인산매처럼 물결이 그치면 주변의 온갖 것들이 나타나는 그것이 지관, 마음을 닦는 일종의 선정이고 정혜라고도 합니다지는 정이되고 관은 됩니다. 그런 선법을 비록 열심히 행하지만 畢竟 寂滅 필경에 적멸한데 떨어져 있지 않는다일어나서 일할 때는 일하고, 행동할 때는 행동해서 중생교화 때는 교화해야 되는데, 승방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의욕이 없어져서 어떤 가지 일을 맡아서 하다가 힘들면 그만 두고 도망 가버립니다.

정진을 제대로 하면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겨서 남이 못하는 일을 치울 있는 것이 바람직한 정진인데, 묘하게도 굳어져서 용기도 안생기고, 시작했다가도 중도 포기 해버리고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지관조도법을 행하지만, 필경에 적멸에 떨어져서 고요함에만 파묻혀있지 않고 일어나서 활동 있는 보살행이고 바람직한 삶이다]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37 보리 분법=4념처(四念處,) + 4정근(四正勤) + 4여의족(4신족(四神足) + 5(五根) + 5(五力) + 7각지(七覺支) + 8정도(八正道), 4+4+4+5+5+7+8=37]

 

雖行諸法不生不滅(수행제법불생불멸) 而以相好莊嚴其身(이이상호장엄기신)

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제법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님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뛰어난 상호 스스로의 몸을 장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Although practicing the many Dharmas that are without arising or perishing and yet adorning one’s body with the characteristics and marks is the practice of a bodhisattva.  

[諸法不生不滅 제법이 생기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고, 무상하다는 것을 알아서, 제법이 불생불멸 불구부정하지만 멸할 때 멸하더라도, 옷도 잘 입고, 치장도 잘 하고, 화장도 열심히 해서 더 예쁘게 하고, 더 단정하게 단장해서 남에게 호감 줄 수 있는 것이 莊嚴其身이라, 그 몸을 장엄하는 것이 보살행이다.

雖行諸法不生不滅 불자들이 不生不滅에 병들어서, 그냥 아무거나 몸에 걸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경전에 비록 불생불멸하는 것을 알아도, 32상 80종호로써 그 몸을 장엄하는 것이 보살행이라 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육신이 무상한줄 몰라서 그렇게 화려하게 치장하고  온갖 영락과 보주를 걸치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깨끗하게 화장해서 그 몸을 장엄하는 것은 자기 좋아라고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남 좋아라고 장엄하는 것입니다.]

 

雖現聲聞(수현성문) 辟支佛威儀(벽지불위의) 而不捨佛法(이불사불법) 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성문이나 벽지불에게 갖추어져 있는 위의 나타내면서도 (중생을 버리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이 보살행이며

Though manifesting the majestic appearance of a sravaka or a pratyekebuddha, does not give up the Buddha’s teaching, which is what the bodhisattva practice. 

[성분 벽지불은 비구승의 모습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비구성이 할일만 다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행까지 해야 불사불법= 불법을 버리지 않는 보살행이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위의를 나타내지만 불법을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雖隨諸法究竟淨相(수수제법구경정상) 而隨所應爲現其身(이수소응위현기신)

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제법이 궁극적으로는 공이라는 청정상=諸法究竟淨相(atyantavisddhalakana]임 알고 있으나, 인연에 따라서는 스스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보살행이며

Though one follows that ultimately all Dharmas are pure, yet manifest one’s bodily form as the occasion arises, this is bodhisattva practice. 

[究竟淨相=본래로 우리마음은 부처라서 청정본연하다고 경전(능엄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청정 본연한 마음이지만 응할 바를 따라서 맞추고, 而隨所應= 그 상황에 따라서 몸을 나타내는 것이 보살행이다

본래 깨끗하기만 한 것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상황 따라서 먹을 때 먹고, 이 옷 입을 때 이 옷 입고, 저옷 입을 때 저옷 입고,또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고 집에 오면 주부이고, 언니도 되고 또 동생이 되기도 하는 그것이 관세음보살의 32응신이고 부처님의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편입니다.]     

[諸法究竟淨相(제법구경정상)=색(色)이나 형(形)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

 

雖觀諸佛國土永寂如空(수관제불국토영적여공) 而現種種淸淨佛土(이현종종청정불토)

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제불의 국토는 영원히 적정하며 공함을 알고 있으나, 갖가지 청정한 불국토를 나타내는 것이 보살행이며

Although one has observed that all the lands of the Buddha are eternally silent and empty, yet manifesting all kinds of pure Buddha land, this is the bodhisattva practice. 

[본래의 불국토 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 따라서 상황에 맞는 청정불토를 나타내는 것이 보살행이다]

 

雖得佛道轉于法輪(수득불도전우법륜) 入於涅槃(입어열반)

而不捨於菩薩之道(이불사어보살지도) 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불도를 얻어서 법륜을 굴리고, 열반의 경계에 들었으나, 더욱 보살의 수행을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Even though one has attained Buddhahood, turned the wheel of Dharma, and entered the realm of nirvana, one does not abandon the Way of the bodhisattva, which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비록 불도를 얻어서 법륜을 굴린다. 즉 깨달아서 법을 설하고는 결국엔 열반에 드신것이 부처님의 생애입니다. 부천님 과정이면서도 보살도를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부처님의 어떤 경지가 되어서 꼭 부처님처럼 사는 것도 좋지만 보살로써의 삶을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 보살행이다.
불도를 얻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부처님의 일생이지만 보살도라고 하는 것은 중생을 위한 것,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이 보살행이라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유마거사가 자신이 쌓은 온갖 실력과 능력을 다 표현한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풀어주고, 이해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치우지지 않아서 극단적인 양면을 다 이해하고 그 어느 한 면에도 떨어지지 않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바람직한 중도라고 했습니다.]

說是語時(서시어시) 文殊師利所將大衆(문수사리소장대중其中八千天子(기중팔천천자)

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개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이같이 설했을 문수사리가 데리고  많은 대중과  중에서 8천의 천자들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When he spoke these words, all eight thousand beings that came with Manjusri had developed the intention of attaining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雖行無起(수행무기) 而起一切善行(이기일체선행) 是菩薩行(시보살행)

일어남이 없는=無起(anabhisaskra)의 도리를 알고 살지만, 온갖 선행을 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Despite the conduct of non-arising, he still performs all kinds of good deeds, which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無起= 일어남이 없는 도리를 행하지만, 본래 우리 마음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남이 없는 그 자리이지만, 일체의 선행을 일으키는 것이 보살행이다. 마음자리에는 선행이 일어난 어떤 흔적이나 자취도 없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을 일으켜 선행을 행하는 것이 보살행이다]

 

雖行六波羅蜜(수행육바라밀) 而遍知衆生心 心數法(이편지중생심심수법)

是菩薩行(시보살행)

6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바라밀)에 정진하지만 중생의 마음=心과

그 마음의 작용=心數法을 두루 아는 것이 보살행이며, 

Even though he is practicing the six paramitas, he knows the mind of sentient beings and mental factors, which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육바라밀을 행하지만은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의 수법, 심과 심수법을 두루 아는 것이 보살행이다. 심과 심수는 마음은 심왕이라고 해서 마음의 본체고 심수는 그 하나의 마음에도 선심, 악심, 탐심, 진심, 치심 등이 온갖 번뇌가 많은, 소승에서는 44가지 대승에서는 51가지의 여러가지 마음의 작용, 심법을 말합니다.

탐, 진, 치부터, 먹고 싶은 마음이 있다 없다 등등 전부 심소에 해당되고 기쁘다 슬프다 외롭다 이것도 전부 심수에 해당되는 마음의 여러 가지 작용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두루 아는 것이 보살행이다.]   

 

[우리 몸에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다. 이를 육근(六根)이라 한다. 
안(眼-눈)⋅이(耳-귀)⋅비(鼻-코)⋅설(舌-혀)⋅신(身-몸)⋅의(意-뜻), 여섯이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는 여섯 가지 감각 대상이 있다. 이를 육경(六境)이라 한다.
색(色-물체)⋅성(聲-소리)⋅향(香-냄새)⋅미(味-맛)⋅촉(觸-촉감)⋅법(法-현상).
육근이 각각 여섯 가지 대상[육경(6境)]에 부딪쳤을 때 여섯 가지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육식(六識)이라 한다.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 6식이 일어난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렇게 6식까지만 있는 것으로 봤다. 
근⋅경이 만나면 식이 일어난다. 그리고 6근ㆍ6경ㆍ6식 만나는 것을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 한다. 삼사화합이 이루어짐으로써 보는 작용이 일어나고. 듣는 작용이 일어나고, … 대상을 분별하게 된다.

그런데 부파불교시대에 마음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고, 그 후 대승불교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식(識)을 세분해서 8식으로 나누었다. 즉, 6식 외에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과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설정해서 전체 8식으로 나누었다. 이 8식을 마음의 주체 혹은 마음의 체성(體性)이라 해서 심왕(心王, 산스크리트어 citta)이라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통상 마음이라 일컫는 식(識)에는 마음의 주체가 되는 심왕(心王)과 그에 종속돼 있는, 심왕의 부하인 심소(心所, 마음작용, 마음부수, cetasika)라는 것이 있다. 
마음의 주체가 되는 심왕(心王)은 마치 국왕과 같아서 명령만 내리면 그 신하들은 무조건 복종해서 함께 따라다녀야 하는 것에 비유해서 심소(心所)라 이름 붙인 것이다. 따라서 국왕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듯 마음의 체성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마음작용(심소)이다. 다시 말하면, 심왕(心王)은 국왕에 비유할 수 있고, 심소(마음부수)는 신하가 국왕에 소속돼 수족처럼 역할을 하듯이 심왕의 소유물로서 심왕이 하라는 대로 심부름을 다하는 작용의 측면을 말한다. 즉, 심왕이 체성의 측면인데 비해 심소(마음부수)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그리고 심소를 일명 ‘마음부수(附隨)’라 하는데, 부수적으로 따라다니는 마음이란 뜻이다. 심왕과는 전혀 관계없이 심소만이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없으므로, 심소란 심왕에 소속된 다양한 심리활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다. 광고를 보다가, ‘이 게 그 유명한 롤렉스시계구나!’ 하는 안식(眼識)이 일어나고[심왕], 더불어 좋다,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일어난다. 이 더불어 일어나는 마음을 심소(마음작용)라 한다
이때 눈은 안근(眼根)이고, 물건(시계)은 대상(色境)이며, ‘롤렉스시계구나!’하는 것은 심왕이고, 좋다, 가지고 싶다는 마음은 심소이다. 
심왕은 8가지이지만, 심소엔 51가지가 있다. 마음(심왕)이 일어 날 때 함께 발생하는 것이 마음작용인 심소(心所)로서, 이 마음작용은 ‘구생연(俱生緣)’으로 설명 된다. 예컨대 어떤 근(根)이 어떤 대상[경(境)]에 부딪쳐 마음(심왕)이 일어날 때, 동시에 마음작용(심소) 51가지 중 몇 가지가 함께 일어나고 또한 함께 소멸한다. 
--구생연(俱生緣)---심소도 혼자 일어나지 않지만 마음(심왕)도 혼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심왕은 심소(마음부수)와 함께 일어난다. 즉, 왕이 가면 신하가 뒤 따르는 것처럼 마음이 있는 곳에 반드시 마음부수, 즉 마음작용이 함께 하기 마련이다. 구생연이란 이와 같이 ‘함께 생기는 조건’이란 뜻이다.--
이처럼 심왕과 심소, 이 둘은 반드시 서로 상응해서 일어난다. 즉, 인식의 장에서 심왕과 심소가 같은 대상을 반연하므로 연상(緣相)이 같다고 하고, 같은 양상으로 알아차리므로 지상(知相)이 같다고 하며, 연상과 지상이 같기 때문에 심왕과 심소가 상응한다고 한다.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생각하는 주체(심왕)와 생각하는 객체(심소)는 분리돼 있지만 실제로 그 생각이 오염돼 있다거나 깨끗하다고 할 때, 주체와 객체 둘 사이엔 동일성이 있다. 즉, 심왕이 깨끗하면 대상인 심소도 깨끗하고, 심왕이 오염돼 있으면 심소도 오염된다. 이때 심왕을 지상(知相)이라 하고, 심소를 연상(緣相)이라 한다. 지상에 연상이 상응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심소를 심수(心數)라고도 하는지라 심왕과 심수가 상응한다는 말을 왕수상응(王數相應)이라고도 한다

심왕[마음]과 심소[마음현상]의 관계는 반드시 심왕에서 심소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고, 심왕은 언제나 마음작용을 있게 하는 장의 흐름이다. 이를테면 음악을 듣고 슬픈 감정을 느꼈다면, 음악을 듣는 인식활동은 마음(심왕)이고, 그에 수반되는 슬픈 감정은 마음작용(심소)으로 구별한다. 
그리고 ‘식(識)’은 인식판단의 작용, 또는 인식주관으로서 주체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심왕(心王)에 부수적으로 일어나서 대상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마음작용(마음현상)이 심소(心所)이다. 
이와 같이 심식(마음)에는 수많은 작용(심소)들이 있으므로 심소(心所)에 대해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이러한 마음작용들을 확실히 알지 않으면 심식(心識)의 내용도 완전히 알지 못하게 된다. 마음의 체성(심왕)과 작용(심소)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상응(相應)이라 한다. 그리고 심왕과 심소의 불가분의 관계를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성유식론'에 의하면, 
• 심소는 항상 심왕에 의지해 작용을 일으킨다. 
• 심소는 항상 심왕과 더불어 상응하면서 활동한다. 
• 심소는 항상 심왕에 소속된다. 
이와 같이 심소는 심왕에 소속돼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데, 이러한 깊은 관계로 행동을 같이하는 것을 상응(相應)이라고 한다. 
심왕과 심소 둘 사이에는 평등(平等)으로 만나는 상응관계이다. 
‘평등’이란 심왕과 심소, 이 둘이 동등한 성질을 가진다는 말이다. 
심왕이 육근(六根) 가운데 어느 근(根)을 의지처로 하면, 심소도 같은 근을 의지처로 해 일어남을 말한다. 
장미꽃을 보자 마음이 유쾌해졌다면, 장미꽃을 보는 감각기관인 눈(眼)에 의존해서 유쾌한 마음도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심왕과 심소는 동일한 감각기관을 통해 작용한다. 눈이 보는 대상도 장미꽃이고 유쾌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 대상도 장미꽃이다. 다시 말해서 심왕과 심소가 동일한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심왕과 심소가 같은 대상을 봄으로 대상의 모습이 같다. 심왕에 비친 것도 장미꽃이고, 심소에 비친 것도 장미꽃이다. 그리고 눈으로 장미꽃이라고 알아차린 시기와 좋아서 유쾌한 마음이 일어난 시기가 같다. 
그리고 심왕과 심소는 각각 하나씩 일어나고, 동시에 둘 이상의 심왕과 심소가 일어나지 않는다. 장미꽃을 보고서 마음이 유쾌해졌지만, 이 좋은 기분이 그 꽃에 벌레가 있는 것을 보면 불쾌한 기분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눈으로 장미꽃을 보고 유쾌한 기분과 불쾌한 기분이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다. 불쾌해진 것은 장미꽃이 아닌 벌레를 봤기 때문이다. 
이때는 벌써 눈도 장미꽃에서 벌레로 옮겨갔고, 마음작용도 벌레로 옮겨간 후의 일이다. 눈으로 보는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심리가 발동한 것이다. 

심왕은 여덟 가지(8식)이지만, 심소는 매우 다양해서,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해 심소 육위(6位)라 하고, 전체 51가지 심소가 있다. 
1) 변행심소(邊行心所) 5가지
2)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3) 근본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4)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5) 선심소(善心所) 11가지
6) 부정심소(不定心所) 4가지 
이렇게 육위에 모두 51가지 심소가 있다. 
51가지 중 수(受)와 상(想)을 제외한 49가지는 모두 행온(行蘊)에 해당한다. 
1) 변행심소(遍行心所)---변행(遍行)이라는 말은 ‘두루 행한다’ ‘두루 작용한다’는 뜻으로, 변행심소는 마음이 일어날 때면 언제나 함께 일어나는 마음작용(심소법)을 말한다. 변행심소에는 5가지 마음작용이 있다. 
➀ 작의(作意) - 작심한다는 말임, 대상으로 이끔, 대상으로 나아감, 무엇을 시도하고자 하는 마음. 
➁ 촉(觸) - 대상을 만남. 근⋅경⋅식의 삼사화합을 말함.
➂ 수(受) - 지각, 고⋅낙⋅불고불락을 느낌, 애착[愛]을 일으킴.
➃ 상(想) - 표상, 개념화, 명칭을 붙이는 작용.
➄ 사(思) - 의지, 마음을 지음, 선⋅악⋅무기의 의업(意業)을 일으킴.
일어나는 마음이 선한 마음이건 악한 마음이건 혹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마음이건 간에, 그 마음과 더불어 언제나 5가지 마음작용이 발견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5가지 마음작용은 심왕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마음작용으로, 사실상 마음(심왕, 8식)의 본질적 작용이라 할 수 있다.
2) 별경심소(別境心所)---별경심소란 욕(欲), 승해(勝解), 염(念), 정(定), 혜(慧)의 5 가지로서, 온갖 마음에 두루 통해 일어나지 않고, 심왕이 특정한 경계에 대해서 일어날 때만 그 심왕과 함께 일어나는 심소이다. 그러니 모든 심왕에 두루 작용하는 변행심소에 반대되는 심소이다.
예를 들면, 좋은 경계를 만나면 욕(欲, 욕심)의 심소가 일어나고, 결정하고 선택할 필요로 하는 경계를 만나면 승해(勝解)의 심소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승해(勝解)’란 대상을 명료하게 이해해 확신하는 마음작용 혹은 대상을 확실하게 이해해 굳게 믿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염(念)은 기억하거나 알아차림, 마음챙김의 작용을 말하고, 정(定)은 선정, 삼매를 말한다. 그리고 혜(慧)는 정(定)을 바탕으로 해서, 이해, 분별, 반야, 관(觀), 의심 끊음 등의 마음작용이다.
3) 근본번뇌(根本煩惱)심소---본번뇌, 근본혹(根本惑)이라고도 하며, 모든 번뇌 가운데서 근본적인 번뇌로서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악견(惡見) 등 6가지 번뇌를 말한다.
4) 수번뇌(隨煩惱)심소---근본번뇌를 따라 일어나는 번뇌로서 지말번뇌(枝末煩惱)라고도 한다. 분(忿, 분노), 한(恨, 한탄), 뇌(惱, 번뇌), 부(覆, 죄를 감추는 것), 간(慳, 인색함), 질(嫉, 질투), 광(誑, 속이는 것), 첨(諂, 아첨), 해(害, 남을 해치는 것), 교(憍, 교만함), 무참(無慚, 부끄러워할 줄 모름), 무괴(無愧, 악한 짓을 하고 뉘우침이 없음), 혼침(惛沈, 혼미하고 침울한 마음상태), 도거(掉擧, 들뜨고 혼란스러운 마음상태), 불신(不信, 못 믿음), 해태(懈怠, 게으름), 방일(放逸, 방종), 실념(失念, 집중하지 못해 기억할 수 없는 마음상태), 산란(散亂, 대상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는 것), 부정지(不正知, 대상을 잘못 파악하는 것) 등 20가지 번뇌를 말한다. 
5) 선심소(善心所)---선심소(善心所)는 그 성질이 오로지 선(善)인 마음작용(심소법)들의 그룹을 말하는데, 달리 말하면, 오직 선한 마음 또는 착한 마음과 상응해 일어나는 마음작용들의 그룹을 말한다. 여기에는 신(信, 믿음), 참(慚, 자기가 과실을 자기 스스로 반성하는 것), 괴(愧, 남에 대한 잘못을 반성하는 것), 무탐(無貪, 무집착), 무진(無瞋, 성 내지 않는 것), 무치(無癡, 지혜, 어리석지 않는 것), 근(勤, 정진), 경안(輕安, 평온한 마음 상태, 혼침이 없는 것), 불방일(不放逸, 방종하지 않음, 성실), 행사(行捨, 고요함, 마음의 평정), 불해(不害, 중생을 해치지 않는 마음, 자비) 등 11가지 심소를 말한다. 
6) 부정심소(不定心所)---사(伺, 세밀하게 고찰), 심(尋, 개괄적인 고찰), 수면(睡眠, 잠자는 것), 악작(惡作, 후회하는 마음작용) 4가지로서, 그 성질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어서 널리 선⋅악⋅무기(無記) 3성에 통하면서도, 일체 마음에 반드시 수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닌 마음작용이다.-작성자 아미산]

 

雖行六通(수행육통) 而不盡漏(이불진루) 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6通=육신통 행하나, 번뇌= 끊어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Even though he possesses the six divine powers, he does not exhaust the outflow, and this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육신통 중의 누진통을 말하는 것으로, 육신통의 누진통을 행하나 不盡漏= 번뇌가 다하지 않게 남겨둔다, 번뇌를 다하지 않은 것이 보살행이다. 우리처럼 번뇌가 들끊는 중생들은 번뇌를 일단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번뇌가 없어진 사람들은 중생 제도에 필요한 번뇌를 우정 남겨놓는 것이다. 물고기가 놀 수 있을 정도의 물을 만들어 놓아서 고기가 놀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살도 완전히 깨끗한 열반의 세계로 가버리면 중생제도가 힘들어지니까 번뇌를 조금 남겨둔다, 이 세상에 태어날 인연을 지어놓는다.]

 

[육신통(六神通, Pali:chalabhinna)은 부처·보살 등이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6종의 초인적인 능력. 6종의 신통력(神通力). 6통이라고도 불려 지관(명상) 수행에서 지행(사마타, 선나·젠죠우, 4선)에 의한 삼매의 다음에, 관행(위파사나)으로 이행했을 때에 얻을 수 있는 자재인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신족통(神足通, Pali:iddhi-vidha-nana) - 기에 따라 자재로 몸을 나타내, 생각하는 대로 산해를 비행할 수 있는 통력.
천이통(天耳通, Pali:dibba-sota-nana) - 보통 들리지 않는 먼 소리를 듣는 초인적인 귀.
타심통(他心通, Pali:ceto-pariya-nana) - 타인의 마음을 아는 힘.
숙명통(宿命通, Pali:pubbe-nivasanussati-nana) - 자신의 과거세(전생)를 아는 힘.
천안통(天眼通, Pali:dibba-cakkhu-nana) -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통력.
누진통(漏盡通, Pali: asavakkhaya-nana) - 자신의 번뇌가 다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없어졌다고 아는 힘.]

 

雖行四無量心(수행사무량심) 而不貪著生於梵世(이불탐착생어범세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4무량심 행하지만,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려고 탐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Despite practicing the four immeasurable minds, one does not desire to take birth in the Brahma World, which is the bodhisattva practice.

[梵世=범천의 세상, 깨끗한 세상, 거기에 태어나는 것을 탐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사무량심= 자비희사를 행하면 범세=깨끗한 세상에 태어나지만, 거기에 태어나는 것에 탐착하지 않는다.]

 

雖行禪定解脫三昧(수행선정해탈삼매) 而不隨禪生(이불수선생) 是菩薩行(시보살행)
선정과 해탈과 삼매 행하나, 선의 즐거움만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Despite practicing meditation, liberation, and samadhi, yet does not follow a birth to the dyana(heavens), which is the bodhisattva practice. 

[선정을 따라서 태어나지 않는 것 → 선정을 따라서 살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우리 중생들은 뭔가를 한다면 벌써 거기에 상이 생기는데, 선정을 행하면서도 선정대로 살지 않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간단하게 해석하면 상을 안낸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현실적으로 해석을 한다면 참선한다고 참선하는 것에 때가 안 묻고, 가난하지만 가난하게 살지를 않아서 비굴하지 않고, 부자라고 교만하지 않는다. ]


[禪定解脫三昧=선정 이하를 나집은 “선정(禪定)․해탈(解脫)․삼매(三昧)”라고 번역했고, 현장은 “정려(靜慮)․해탈(解脫)․등지(等持)․등지제정(等至諸定),” 티베트 역은 “선정(禪定)과 평등(平等)과 삼매(三昧)에 드는 것”으로 번역했다.]


雖行四念處(수행사념처) 而不永離身受心法(이불영리신수심법) 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4념처(smtyupasthna) 행하지만, 신체=身(kya)과 감각=受(vedan)와 마음=心(citta) 존재=法(dharma)의 신수심법을 영원히 떠나고자 하지 않는 보살의 행이며

Although practicing the four foundations of mindfulness, yet not abandoning the body, mind, and Dharma is the bodhisattva practice. 

[사념처는 신수심법을 떠나고자 하는 것이지만, 비록 사념처를 행하지만 신수심법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몸이 받아들이는 그 마음, 그 법 속에서 더불어서 산다.  

옛날 인도에서는 시체를 사거나, 가족의 허락을 얻어서 시체를 옆에 두고 몸이 부정하다는 부정관, 벌레가 생기고 썩는 모습을 관하는 창능관, 결국에는 뼈만 남게되는 백골관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사념처의 신수신법의 관을 행해서 육신에 대해서 초연해졌지만, 그렇다고 이 육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잘 먹여주고 닦아주지만, 이 육신이 영원한 것으로 애착하거나, 이 몸이 무상하다고 포기하지도 않는 중도적인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신수심법(身受心法), 사념처(四念處)=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함으로써 삼법인과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다. 나의 몸과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위빠사나의 근거가 되는 대념처경(大念處經)에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 4가지를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4념처 수행이라고도 한다.
4념처(四念處) 수행(위빠사나)은 
①몸=身念處,  몸에 대하여 알아차림 
②느낌=受念處, 느끔과 반응을 알아차림
③마음=心念處, 마음을 알아차림
④법=法念處, 마음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  이 세상 모든 대상,  삼라만상, 몸, 느낌, 마음(분별), 대상(삼라만상)을 대상으로 알아차림하는 수행이다.
신념처(身念處) 수행에서는 16가지 몸에 대한 알아차릴 대상이 제시되고 있다.  
그 주요 대상으로는 “호흡”을 비롯하여, 행주좌와 (行住座臥) 4 가지와 지수화풍 4대(四大)에 대한 알아차림 등이 있고, 사마타에 속하지만 위빠사나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몸에 대한 혐오감’ ‘시체에 대한 주시’ 등이 있다.
수념처(受念處)는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모두 느낌이다. 손끝의 부드러움이나 가슴의 두근거림도 느낌이고 행복과 불행도 느낌이다. 이러한 느낌이 왔을 때 우리는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혹은 덤덤하게 반응한다. 이를 부처님은 3 단계로 말씀하셨다. 6근(六根, 혹은 六問)을 통해 인식할 때 받아들이는 느낌(눈, 귀, 코, 혀의 경우)이 있고, 이에 대하여 육체적으로 반응한 육체적 느낌이 있으며, 마음으로 넘어가버린 정신적 느낌이 있다. 이렇게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덤덤한 느낌이 왔을 때, 이것을 알아차림 하게 되면, 다음 단계인 갈애, 욕망으로 반응하지 않는다.(12연기 단계)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은 느낌(受)에서 갈애(愛)로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작성자 진솔당]

 

[이 부분을 현장은 “신(身)․수(受)․심(心)․법(法)을 멀리하는 행위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여 일치하고 있으나, 티베트 역에서는 “신․수․심․법을 진실로 행처(行處)로 하지 않는다” 하여 뜻이 반대다.]

雖過魔行(수과마행) 而現降衆魔(이현항중마) 是菩薩行(시보살행)

모든 마군을 초월한 행이지만, 아직도 여러 마군을 항복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보살행이고, 

Although one has surpassed the demons but still manifests the appearance of subduing all demons, this is the practice of a bodhisattva. 

[마구니의 행= 불교에 방해되고, 불교와 반대되고, 정법이 아닌 경우를 魔라고 합니다. 마구니를 초월했지만 오히려 마구니와 더불어 살면서 온갖 마구니들을 항복 받을 수 있는 그것이 보살행이다. 나는 저런 마구니와 관계없다고 도외시하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상(), 사람들의 마음의 병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상'이라 해서, 생각 '상'을 쓰지 않고 형상 '상'을 씁니다. 고체화해서 형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주 뛰어난 안목입니다. 중생들의 마음에 관념이 형상화 되어버리면, 그 사람의 고집 꺾기 어렵습니다. 이 형상화된 서로의 상들이 부딪치면 소리 나고, 또 깨어져서 상처 나게 되는데, 많이 경험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雖過魔行(수과마행) 而現降衆魔(이현항중마) 是菩薩行(시보살행)= 보살행이 모든 장애를 극복했다고 하는 것에는 번뇌의 극복과 수도하여 성불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마의 소행이 있다. 이 두 가지를 극복하였음에도 계속해서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것은 본래 보살은 중생의 제도에 뜻이 있고 자기만의 수행에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자의 장애는 자신의 수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장애이며, 후자의 장애는 중생제도 과정에서 생기는 장애이다. 따라서 이 후자의 장애는 중생이 있는 한 무한히 계속된다.]

 

求一切智(구일체지) 無非時求(무비시구) 是菩薩行(시보살행)

일체를 남김없이 아는 지혜=一切智(sarvajjna)를 항상 구하지만,

때가 아닌 때에 얻고자 바라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Seeking all wisdom without seeking it at an inappropriate time is the practice of a bodhisattva. 

[일체지혜를 구함에 있어서, 경을 공부 할 때에만 구하고, 밖에 나가면 나와는 관계가 없고 불교와는 관계없고, 부처님 말씀과 관계없는 것이 되어 버리면 보살행이 아니다. 無非時求= 어느 때든지 구하지 아니한 때가 없다는 말입니다. 無非時求= 구하지 않는 때가 없지만, 항상 구하는, 항상 지혜의 관념 속에서 언제나 현명한 불교적인 삶을 사는 것이 보살행이다. 일체의 지를 구하되 법당 안에서만 구하는 것이 아니고 법당 밖에서도 구한다.

求一切智하되 無非時求란 부처님의 지혜는 우리의 삶 전반에서 적용되어져야 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雖觀諸法不生(수관제법불생) 而不入正位(이불입정위) 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제법이 공하여 생하지 않음=不生이라고 관하지만,

깨달음의 경계[正位]에 들고자 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Although one can see that all Dharmas do not arise, one still does not enter the place of awakening, and this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觀諸法不生= 근본적으로 현상은 생멸하지만, 즉 본질에 있어서는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관찰하지만, 正位(정위, 열반)= 불생불멸인 열반의 자리에만 들어가 있지는 않는다. 불생불멸을 알고 불생불멸을 늘 관찰 하지만, 불생불멸에 늘 빠져 있지 않는다. 즉 생멸한다. 본질은 영원한 불생불멸이지만 밖으로는 모든 것이 생멸하는 이 양변, 양쪽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인정하고, 수긍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보살행이다.]

 

雖觀十二緣起(수관십이연기) 而入諸邪見(이입제사견) 是菩薩行(시보살행)

12연기를 관하고 있으면서도 온갖 사견을 가진 중생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 보살행이며, 

Thought perceiving the twelve dependent arising, yet to enter various mistaken views, which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12연기=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12가지 인연, 12가지 조건 입니다.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과정입니다. 어떤 종교보다도 불교가 인간이 태어나서부터의 전 과정을 심리적이고 육체적 문제들이 이러한 12가지 과정과 조건에 의해서 생성 변멸한다는 것을 관찰하였고, 또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12연기의 안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삿된 견해에도 들어갈 줄 아는 것이 보살행이다. 전혀 당치않은 이론도 이해해주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소견이라도 등지지 말고 더불어 같이 생활하면서 그 사람들을 제도하고 바로 가르칠 줄 아는 것이 入諸邪見= 여러 가지 삿된 견해에 들어가는 것이 보살행이다]

[而入諸邪見(이입제사견)= 사견 속에 들어간다”를 지겸․현장․티베트 역은 나집과 반대로 번역하고 있다. 지겸 역을 예로 들면 “온갖 견해를 가졌음에도 무욕(無欲)하다” 하였다.]

 

雖攝一切衆生(수섭일체중생) 而不愛著(이불애착) 是菩薩行(시보살행)

중생을 자비심으로 감싸 안고 섭수하여 제도하지만, 애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Even though assimilating in all sentient beings, but does so without sentimental attachments, which is what the bodhisattva practice.

[일체 중생들을 섭원 섭수한다. 제도한다.  

사실은 부처님 지혜의 경전 말씀이 재미있고 또 굉장히 유익하고 내 삶과 영혼과 정신순화에 여러 면으로 좋은 것어서 공부한다손 치더라도,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남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참선도 중생제도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교리공부도 중생제도를 위해서 하는 것으로 불교적인 모든 행위는 다른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이나 보살들의 마음이고 불교의 마음입니다.

攝一切衆生 일체중생을 포섭하고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중생들에 대해서 너무 애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이다. 중도적인 행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雖樂遠離(수락원리) 而不依身心盡(이불의신심진) 是菩薩行(시보살행)

(번뇌와 망상으로부터) 遠離=멀리 떠나 있기를 즐겨 하지만

몸과 마음의 업이 다한 경계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몸과 마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보살행이다)

Though delighting in being apart, yet does not depend on the exhaustion of the body and mind, and this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雖行三界(수행삼계) 而不壞法性(이불괴법성) 是菩薩行(시보살행)

삼계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법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Even though on practice in the three realms yet does not decline Dharma nature, such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삼계= 欲界, 色界, 無色界 또는 온갖 계층의 삶들을 겪지만, 법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법의 성품은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가 없고, 각계각층, 다종다양한 삶의 양상이 없이 평등한 것입니다. 부처의 삶이나 중생의 삶이나, 축생의 삶이나, 지옥의 삶이나, 천상의 삶이나 이 법성 자리는 평등해서 삼계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삼계를 인연 따라 흘러 다니면서 살지만, 평등한 진리자리 법성자리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부처님의 안목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신선한 부처님의 공부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상황에 돌아가면 축생만도 못한 그런 삶을 살수도 있고, 남과 싸우기도 하고, 화도 내고 속이기도 하고, 남을 헤꼬지하는 수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온갖 차별된 중생의 삶을 산다는 것은 몹쓸 것이라고 해버리면 우리의 삶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어떤 삶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지옥의 삶도 부정하지 않고, 축생의 삶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긍정하면서 그보다 다른 차원의 삶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삼계를 행한다는 것은 온갖 차별된 삶의 여정입니다. 이런 삶, 저런 삶, 별별 삶을 삼계라고 합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의 별별 삶입니다. 

하루 가운데는 밤도 있고 낮도 있듯이, 하루의 삶속에는 부처님과 반대될 경우도 있고, 부처님과 딱 맞아 떨어질 때도 있는 그것이 사람의 삶이니까, 그런 반대되는 삶도 인정해주는 것이 보살의 삶이고 바람직한 삶이다.

삼계를 행하지만 법성의 경지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중생들의 삶속에 욕계 색계 무색계라고하는 온갖 각양각색의 삶이 있기 때문에 신선한 법성의 경지 진리의 경지가 존재할 필요가 되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계를 행하되 법성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부처님 생각을 하면서도 부처님을 등지는 일도 때로는 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부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삶도 전부 인정받게 되는 것이고 마음 놓게 되는, 좋은 경전입니다]

 

雖行於空(수행어공) 而植衆德本(이식중덕본) 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공을 관하면서 수행하지만, 온갖 공덕의 뿌리를 심는 것이 보살행이며, 

Even though all actions are based on emptiness yet planting various virtuous roots, such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雖行於空= 비록 공을 행하며 공의 도리, 모든 것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알지만.

불교하면 언필칭 공, 공의 철학, 공의 도리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들은 실재하지 않고 계속 변멸하는 현상일 뿐 실제는 공입니다.

그러나 공이고 무상이라고 해서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植衆德本= 온갖 덕의 뿌리, 온갖 덕의 근본을 심는, 온갖 좋은 일은 다 한다. 열심히 복 짓고 산다. 그러나 어디에 집착해버리면 그것이 금방 무너지는 도리를 알아서 공의 도리를 행한다. 보통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손을 놓아 버리고 하지 않는 것이 병인데, 집착 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고, 보살행이다]

 

雖行無相(수행무상) 而度衆生(이도중생) 是菩薩行(시보살행)

무상의 도리를 알고 행하지만, 중생을 구제(제도)하고자 하는 것이 보살행이고, 

Although practicing formlessness, he can save all sentient being, which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불교의 핵심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으로 정제된 것들을 소개하고 있다고 이해해도 됩니다.

비록 무상을 행하지만 중생을 제도할 줄 아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고 보살행이다

상이 병이라서, 금강경에서는 無相(무상)으로 爲宗(위종), 으뜸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중생이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은 가관, 치우친 생각이고

중생이 본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관, 허무주의 완전 공에 떨어진 생각이고,

여기서는 중생이 본래 부처라서, 본래 부처인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 중도 정견이고 중도관이라는 말입니다.

과일, 꽃, 온갖 초나 향이 그야말로 허망하기 이를 때 없는 공양거리이고 받는 사람도 받는 물체도 허망한 줄 알지만 또 열심히 정성을 다해 올리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고 또 그런 자세가 중도행 즉 바람직한 소견이라는 것입니다]

 

[무상(無常) : 영원하지 않다.→초기경전에 많이 나오는 용어

무상(無相) : 모습이 없다.대승경전에 많이 나오는 용어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는 '육조단경'의 핵심내용으로서 이를 삼무(三無)라고도 한다. 혜능(慧能, 638~713) 대사의 삼무(三無)라는 말이다.
육조단경에서 "선지식이여! 나의 법문은 위(역대 불조)로부터 내려오면서 먼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바탕)를 삼으며,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나니(善知識 我自法門 從上已來 頓漸皆立:無念為宗 無相為體 無住為本)"라고 했다. 
無相이란 갖가지 차별상에서 떠나는 것을 말한다. 相이란 차별상을 말한다. 그리하여 차별의 현상(계)에 있으면서 현상을 여읨이다. 여기서 ‘相’은 망념으로 일어나는 허상을 말한다. 즉, 우리들 생각인 상(想)이 마음 밖 대상으로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그것이 상(相)이다. 따라서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무상이다. 그리고 무상(無相)이라는 것은 상(相) 속에 있으면서도 상을 떠나는 것이다. 즉, 차별상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그 차별상을 공(空)으로 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갖가지 차별상과 모든 경계에서 집착을 떠난 것이 무상이다. ‘상(相)’은 모두 망상에 물든 마음이다. 그러니 무상은 허상, 차별상, 망상에 물든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한다. 
특히 '금강경'에서는 사상(四相)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상(相)이라고 하는 것은 미혹한 중생들의 본업(本業)이다. 
사실은 상(相)이 있는 것이 아닌데, 미혹하기 때문에, 어리석기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서 없는 상을 있는 상으로 본다. 
'금강경'은 본래 없는 상(相)을 없는 상으로 가르쳐주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즉, 근본취지로 삼는다고 해서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는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무상(無相)이란 공(空)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유상(有相)의 반대어이다. 따리서 무상이란 집착하는 모습이 없다는 말이다. 
상(相, laksana)은 특히 대승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가진 개념이다. 흔히 인식주관이 허망 분별한 객관대상의 형상, 특성, 감정 등에 얽매인다는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는다. “망념을 여의면 일체 경계상이 없을 것”이라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차별상은 망념의 소산이며, 망념을 떠나면 일미평등(一味平等)의 법성(法性)을 체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상이란 4상(四相)인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음을 말하며, 4상으로 인해서 생기는 일체의 분별과 차별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즉, 무상(無相)이란 어떤 사물(대상)을 보면서 그 모양(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차별과 대립을 초월해 무한하고 절대적인 상태, 현상의 모양이 없는 진여법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생멸변천이 없는 무위법이며, 모든 집착을 여윈 경계이이다. 말하자면 갖가지 차별상과 모든 경계에서 집착을 떠난 것이 무상이다. 
無住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음, 마음이 머무르지 않음, 마음에 걸림이 없음을 말한다. 

사람의 본성이 세간의 선⋅악, 좋고⋅나쁨, 원수와 친한 이, 등과 더불어 말을 주고받고 공박하고 속이고 다투게 될 때에도 아울러 공(비어 실답지 않음)함을 알아서, 갚음이나 해칠 생각을 하지 아니하며, 생각 생각 가운데에 지나간 일들(앞의 허물)을 생각지 않은 것이다. 만일 앞생각과 지금생각과 뒷생각에 (남의 허물에 대한)생각 생각이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얽매임이라 하며, 모든 법(현상) 위에 생각 생각이 머물지(집착하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른 무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라는 말이다. 無住란 일어나는 생각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일어나는 생각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들과 서로 말을 주고받거나 좋지 못한 수작을 걸어오더라도 모두 헛것으로 돌려, 대들거나 해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바깥의 경계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다. 
無念이란 생각하되 생각에 꺼들려 집착하지 않음이다. 즉,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생각 속에 있으면서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요, 생각 속에 헛된 생각이 없는 것으로,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안으로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것이 무념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무념은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생각하며 대상과 접촉하는 작용이다. 대상과 접촉하면 보고 듣는 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작용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아야 비로소 무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무념에서 ‘무’는 잘못된 생각이 없는 것이지 바른 생각이 없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즉, 여기서 ‘염(念)’은 잡념 혹은 번뇌를 뜻한다.

'육조단경'에서 “선지식들이여, 지혜로 살펴서 안팎이 분명해야 자신의 본 마음을 안다. 본 마음을 알면 ‘해탈’이고, 해탈이면 ‘반야삼매’이며, 반야삼매는 ‘무념’이다. 
무엇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모든 법을 보되 마음에 집착이 없으면 바로 이것이 무념이다. 
이 마음을 쓰면 마음이 모든 곳에 두루 하되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오직 깨끗한 본 마음이 몸에 있는 감각기관에서 활동하되 경계에 물듦이 없게 해서 오고감이 자유로워 그 쓰임에 걸림이 없는 것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이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이니, 이를 무념행(無念行)이라고 한다. 
만약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끊기만 한다면 이는 법에 얽매인 것이며 한쪽에 치우친 견해라고 한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무념(無念)은 평등하다고 했다. 
「만약 무념(無念)을 얻은 사람은 마음이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 하는 것을 알 것이니 무념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는 실로 시각(始覺)과 다름이 없으니 그 까닭은 사상(四相 ; 생ㆍ주ㆍ이ㆍ멸)이 함께 있어서 다 자립함이 없음이니 본래 평등해 동일한 깨달음(覺)인 까닭이니라-작성자 정단]

 

雖行無作(수행무작) 而現受身(이현수신) 是菩薩行(시보살행)

無作=지음이 없음의 도리를 알고 행하지만 생을 받아 세간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보살행이며, 

Although one performs the unconditioned yet manifests the body of a living being, and this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無作= 지음이 없는, 본래 마음자리, 진리의 입장 불성자리에는 조작이 있어도 지음이 없는, 아무리 지어도 지음이 없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지음이 없는 것이 본래 마음의 자리입니다.

태어나도 무작이라는 말은 태어나도 태어남이 없는 도리를 말하는데, 그러면서 우정 태어날 줄 아는 것이 보살행이다

무작의 도리를 알고 그러한 도리를 실천하지만 또 태어날 때 태어나고, 태어나서 중생제도 할 일 있으면 제도하고, 갈 일이 있으면 가고, 올 일 있으면 오는 그것이 보살행이다]

 

[무작(無作)이란 ① 生滅이 없는 이치. 無爲의 法性, 涅槃의 異名.
② 자연히 되는 것으로 造作이 없는 것.
③ 身·口·意의 造作이 없이 저절로 된 것.

즉 그 어떤 작위나 작용이 없다는 뜻으로, 외부의 작용을 받지 않고 스스로도 겉치레를 하지 않는 본래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말합니다. 또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며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생멸(生滅)도 하지 않는 것을 무작(無作)이라 합니다.
생명에는 모두 법신[(法身): 생명], 응신[(應身): 육체], 보신[(報身): 지혜]의 삼신(三身)을 갖추고 있습니다.
법신(法身)이 영원하다는 것은 이미 제경에서 설해져 있으나 수량품에서 처음으로 삼신(三身)이 그대로 본유상주(本有常住)라고 해서 삼신의 상주를 설했습니다.]

又無方便慧縛(우무방편혜박) 有方便慧解(유방편혜해)

또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이 있는 지혜는 해탈입니다. 

Also, wisdom without skilful means is bondage, while wisdom with skilful means is liberation. 

[지혜와 방편, 지혜가 있으면 지혜에 걸맞은 방편을 써야 되는, 방편과 지혜가 병행되어서 지혜를 동반한 방편이 행해져야 바람직한 것인데,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다.

지혜가 아무리 있어도 그 지혜를 운영하는 방편이 없으면 그것은 여기 저기 걸리는 속박이라는 것입니다.]

 

無慧方便縛(무혜방편박) 有慧方便解(유혜방편해)

지혜가 없는 방편은 속박이며, 지혜가 있는 방편은 해탈입니다.
Skilful means without wisdom is bondage, and skilful mean with wisdom is liberation. 

[이 문장은 지혜와 방편을 바꾸어 놓았을 뿐입니다]

 

何謂無方便慧縛(하위무방편혜박)?

무엇을 가지고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라고 합니까?
What is the meaning of wisdom without skilful means is bondage? 

[何謂= 어째서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입니까? 앞에서 말한 것을 다시 설명하는 것입니다]

 

謂菩薩以愛見心莊嚴佛土(위보살이애견심장엄불토) 成就衆生(성취중생)

보살이 愛見心=애욕에 물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중생들을 제도하며) 

It means that the bodhisattva adorns the Buddha’s land with a loving view when fulfilling sentient beings. 

於空 無相 無作法中(어공무상무작법중) 而自調伏(이자조복)

是名無方便慧縛(시명무방편혜박)
공(unyat), 무상(nimitta), 무작(apraihita)의 (세 가지 해탈문)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조복하는 것을 방편이 없는 지혜의 속박이라 하는 것입니다.

The so-called wisdom without skilful convenience is bondage when one subdues oneself with emptiness, formlessness, and the Dharma of the unconditioned.

[3해탈문(三解脫門, 산 trīni vimoksa-mukhāni) 3삼매문(三三昧門), 3계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번뇌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득하는 방편[門]인 공해탈문(空解脫門) ·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 ·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의 3가지 선정을 말한다. 공(空: 空寂, 실체가 없음) · 무상(無相: 차별이 없음) · 무원(無願: 원함 즉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 없음)을 관조하는 3가지 선정이 해탈 즉 열반에 들어가는 문(門, 방법, 방편)이 되기 때문에 3해탈문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3해탈(三解脫) · 3탈문(三脫門) · 3문(三門) · 3공문(三空門) · 3공관문(三空觀門) 또는 3삼매(三三昧) 또는 3공(三空)이라고도 한다.
공해탈문은 공삼매(空三昧) 또는 공삼마지(空三摩地)라고도 하며, 무상해탈문은 무상삼매(無相三昧) · 무상삼마지(無相三摩地) · 무상심삼매(無相心三昧) · 무상심삼마지(無相心三摩地) 또는 무상정(無相定)이라고도 하며, 무원해탈문은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 · 무원삼매(無願三昧) · 무원삼마지(無願三摩地) 또는 무원심삼마지(無願心三摩地)라고도 한다. 이 가운데 무상해탈문의 다른 말인 무상정(無相定, 산스크리트어: ānimitta)은 무상정(無想定, 산 asaṃjñi-samāpatti)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무상해탈문의 다른 말인 무상삼매(無相三昧, 산 ānimitta-samādhi)는 힌두교의 무상삼매(無想三昧, 산 nirvikalpa samādhi)와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何謂有方便慧解(하위유방편혜해)?

무엇을 有方便=방편을 갖춘 慧解=지혜의 해탈(upyoptta-prja)이라고 합니까?
What is the meaning of wisdom with skilful means is liberation? 

[何謂有方便慧解오, 방편도 있고 지혜도 있는 해탈은 무엇인가?]

 

謂不以愛見(위불이애견심) 莊嚴佛土(장엄불토) 成就衆生(성취중생)

물들지 않은 (애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It means the bodhisattva does not adorn the Buddha’s land with affectionate attachment to fulfil sentient beings. 

於空無相無作法中(어공무상무작법중) 以自調伏(이자조복)

而不疲厭(이불피염) 是名有方便慧解(시명유방편혜해)

공․무상․무작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스스로를 조복하되,

피곤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음을 방편을 갖춘 지혜의 해탈이라고 합니다.
When one subdues oneself with emptiness, formlessness, and the Dharma of the unconditioned without exhaustions is called wisdom with skilful means is liberation. 

[즉 방편이 있는 지혜란 조화를 이룬 해탈이라는 말입니다

앞에서는 애견심, 애착심으로 중생을 건지고 불사를 하는 것은 조화가 깨어진 것으로 속박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애견심이 아닌 마음으로 불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하고 공과 무상과 무작의 이치로써 스스로를 조복하고, 또 생사에 대해서 싫어함 없는 것이 방편도 있고 지혜도 있는 해탈이다]

 

何謂無慧方便縛(하위무혜방편박)?

何謂=무엇을 無慧=지혜가 없는 方便縛=방편의 속박(prajnupttopya)이라고 합니까?
What is the meaning of skilful means without wisdom is bondage? 

[어째서 지혜가 없는 방편은 속박이냐

앞에서 無慧인 方便은 縛이요, 有慧인 方便은 解라고 했었습니다]

 

謂菩薩住貪欲(위보살주탐욕) 瞋恚邪見等諸煩惱(진예사견등제번뇌)

而植衆德本(이식중덕본) 是名無慧方便縛(시명무혜방편박)

보살이 탐욕과 瞋恚=분노와 사견(어리석음)= 탐진치 등 온갖 번뇌에 얽혀 있으면서 

衆德本=많은 선근을 植=심고자 하는 것을 지혜가 없는 방편의 속박이라고 이름합니다.
It means that the bodhisattva plants all kinds of virtuous roots while dwelling upon destructive emotions such as greed, aversions, and evil views. That is the bondage of skilful means without wisdom. 

[탐진치 등의 번뇌의 머물면서, 植衆德本=여러 가지 덕의 근본을 심는다. 우리 모두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탐심, 욕심, 분노, 삿된 소견 등등의 온갖 번뇌에 머물면서도 이렇게 유마경 공부도 하고, 때로는 보시도 하고, 선행도 하는 등이 植衆德本= 여러 가지 덕의 근본을 심는 것,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것 전부가 是名無慧方便縛, 지혜가 없는 방편의 속박이다]

 

何謂有慧方便解(하위유혜방편해)?

무엇을 지혜를 갖춘 (지혜가 있는) 방편의 해탈(prajopttopya)이라 합니까?
What is the meaning of skilful means with wisdom is liberation?

謂離諸貪欲(위리제탐욕) 瞋恚邪見等諸煩惱(지예사견등제번뇌) 而植衆德本(이식중덕본)

탐욕과 분노와 사견 등 온갖 번뇌를 謂離=떠나서 衆德本=많은 선근을 植=심으며, 

It means to be free from all destructive emotions such as greed, aversions,

and evil views and cultivate various roots of virtue;

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회향아뇩다라삼막삼보리) 是名有慧方便解(시명유혜방편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회향하는 것을 지혜를 갖춘 방편의 해탈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dedicating to unsurpassed complete perfect enlightenment. That is called skilful means with wisdom is liberation. 

[중덕본을 심어서 아뇩다라샴먁삼보리 깨달음으로 회향하는 것이 有慧方便解다

즉 우리가 행하는 無慧方便=지혜가 없는 방편은 縛=속박에 해당되고, 보살들의 有慧方便은 解=해탈에 해당된다.  

지혜가 있는 방편은 바람직한 것이고 그것을 이름해서 해탈이라 하는 것으로 요컨대 탐, 진, 치 삼독이 속박과 해탈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文殊師利(문수사리) 彼有疾菩薩(피유질보살) 應如是觀諸法(응여시관제법)

문수사리여, 저 병을 앓고 있는 보살은 반드시 제법에 대하여 이같이 바르게 관찰해야 할 것입니다.
Manjusri, the bodhisattva who is ill, 

[저 병든 보살이 제대로 된 보살이라면 설사 병을 앓고 있는 보살이라 하여도 응당히 이와 같이 모든 이치=법을 관찰한다.]

 

又復觀身(우복관신) 無常苦空非我(무상공공비아) 是名爲慧(시명위혜)

또한 몸을 관찰할지니, 이 몸은 무상하며, 괴로움이며, 공한 것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아는 없는=非我(무아)라고 관하는 것을 이름하여 지혜라고 합니다. 

should see all Dharmas as they are and view the body as impermanent, of hardship, empty, and with no self, which is called wisdom. 

[우리의 육신을 그렇게 復觀, 다시 관찰할 줄 알아야 지혜 있는 사람이다]

 

雖身有疾(수신유질) 常在生死(상재생사) 饒益一切(요익일체) 而不厭倦(이불염권)

是名方便(시명방편

비록 이 몸은 병이 들었으나, 항상 생사 속에 있으면서 一切=일체 중생을 이롭게 함에 있어서, 피곤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것, 이를 방편이라고 합니다. 

Although one’s body is sick and suffering and is always amid birth and death, one benefits all sentient beings without ever becoming weary, and this is called skilful means. 

[비록 몸에 병이 있으나, 사람들을 돕는 일,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고, 넉넉하게 하고 보탬이 되게하고, 일체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에 피로해하거나, 이만치하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없으면, 그것이 바람직한 방편이다.

앞에서는 그것을 植衆德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몸이 아픈 것이라고 했지만, 자기가 현재에 처한 상황에서, 나는 지금 무엇이 없어서 부족한 점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이익하게 하려는 마음, 즉 능력 따라서 도움이 되는 것에 싫어하거나 피곤해하지 않는 것이 방편이다]

 

又復觀身(우복관신) 身不離病(신불리병) 病不離身(병불리신) 是病是身(시명시신)

非新非故(비신비고) 是名爲慧(시명위혜) 故 옛 고古로 해석

또 자기 몸을 관찰하기를, 몸이라고 하는 것은 병을 떠나 있지 않고, 병이 몸을 떠나 있지 않으니,

이 병이나 이 몸이 새로 생긴 것도아니고, 오래 된것도 아니라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지혜라고 이름합니다. 

Also, observe the body, which is not separate from the illness, that the illness is not separate from the body, and that this illness, this body, is neither new nor old. This is called wisdom. 

[非新非故=본래 있던 것도 아니고 또 금방 생긴 것도 아니다

왜냐 몸이 있는 한 병이 따르게 되어있고, 병이 있으면 몸이 있게 되어있으니까

身不離病하고 病不離身=몸은 병을 떠나 있지 않고 병은 몸을 떠나있지 않다

중간에 없던 병이 생긴 것은 몸이 있으니까 생긴 것입니다.

병이 붙을 근거인 몸이 있어서, 즉 병이 들어 않을 소지가 있어서 생긴 것이다. 이것은 중간에 생긴 것이니까 새로운 것도 아니고, 옛것도 아니라고 아는 것이 지혜이다

다른 말로하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무유정법이라고 아는 것이 몸에 대해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設身有疾(설신유질) 而不永滅(이불영멸) 是名方便(시명방편)

설령 몸에 병이 있으나, 영원히 멸하지 않는 것, 이를 방편이라고 합니다.

Suppose that the body is ill yet not in eternal cessation (of suffering) is called skilful means.  

[設身有疾 而不永滅이 是名方便이라=설사 몸에 병이 있다고 하여도 이 병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고 아는것이 방편이다 → 이것은 의례히 있는 것임을 알아라, 이병 끝나면 무슨 병이 있어도 또 있게 되는 것으로 알아라.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딴 병이 생기는 것 보다, 그 병을 가지는 것이 잘 되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 큰 새병을 앓게 되는 것 보다 이 병이 낫다 즉 이렇게 가지고 있는 병은 방편입니다.

이 육신의 속성, 육신의 구조가 이러한 것이 永不滅=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


文殊師利(문수사리) 有疾菩薩應如是調伏其心(유질보살응여시조복기심)

문수사리여, 병을 앓고 있는 보살은 마땅히 이와같이 그 마음을 조복해야 하나니, 

Manjusri, a bodhisattva who is ill, should subdue his mind in this way, 

[應如是調伏其心=그 마음을 조복하라 → 이렇게 마음 먹어라.

문수 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묻기를 '文殊師利言 居士여 有疾菩薩이 云何調伏其心니이까? 문수사리가 말하기를 거사여 병 있는 보살이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리겠습니까?'에 대한 답변들]

 

不住其中(불재기중) 亦復不住不調伏心(역복불주불조복심)

그 가운데 머물지도 않거나 또한 마음을 다스리지 않겠다는 마음=不調伏心에 머물러서도 안되며, 

without abiding within it, and also not abiding in the non-subdued mind.  

[그 가운데 머물지도 말고 또한 다시 조복하지 않는 가운데 머물지도 말라, 바로 그런 형상 속에서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고 또 조복하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된다.

不住其中= 그 가운데 머물지도 말고 그것을 조복하지 않는데도 머물지 말라

즉 조복한다고 해서 내내 그 병만 생각해서도 안 되고 또 그 병의 흐름에 휘말려가도 안된다. 보살의 중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픈 것에 끄달려도 안되고 또 의례히 있는 병이라고 해서 자꾸 조복하려고 하는 것에 머물러 있어도 안 된다. 이러한 것들은 복잡한 교리로, 무엇 하나를 가르치면 거기에 집착하니까 그것들은 순서대로 긍정 부정하면서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 若住不調伏心(약주불조목심) 是愚人法(시우인법)

왜냐 하면, 만약 조복하지 않는 마음에 그대로 머문다면 이는 愚人法=어리석은 사람의 법이며, 

What is the reason for this? It is the practice of fools for one to be abiding upon an unsubdued mind. 

若住調伏心(약주조복심) 是聲聞法(시성문법)

만약 조복한다는 마음에 머문다면 이는 聲聞法=성문의 법이기 때문이니, 

If one abides in a subdued mind, that is the practice of the sravaka. 

是故菩薩不當住於調伏(시고보살부당주어조복) 不調伏心(불조복심)

그러므로 보살은 언제나 조복하는 마음에도, 조복하지 않는 마음에도 머물러 집착=住해서는 안 됩니다.

So the bodhisattva does not dwell in the subdued or non-subdued mind. 

[불교의 이론은 결국 중간이다. 병든 사람이 불자로써 그 마음을 다스리는 법, 마음 조복하는법을 설명해서 몸뚱이가 있음에 이 병이 있는 것으로, 오히려 다른 병이 있는 것 보다 차라리 이 병이 낫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상태까지 설명하고는 결국에는 그것도 떠나라 했습니다.]

 

離此二法(이차이법) 是菩薩行(시보살행)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법을 떠나는 것이 보살행이고, 

And to be apart from such duality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離此二法= 우인법과 성문법을 떠나는 것, 그 두 가지를 다 떠나는 상태가 바람직한 소견, 중도정견이고 그것을 여기에서는 보살행이라고 했습니다. ]  

 

在於生死(재어생사) 不爲污行(불위오행)

住於涅槃(주어열반) 不永滅度(불영멸도) 是菩薩行(시보살행)

생사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더러운 행위=汚行을 하지 않고,

열반에 머물러 있어도 영원히 멸도해 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행이며,

To dwell in the sea of birth and death without being polluted by defilements and to dwell upon nirvana without being perpetually in nirvana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몸뚱이와 생각이 항상 변하듯이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그것이 생사이고,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관념 속에서만 사는 것이 오행입니다. 이렇게 무상해서 곧 죽을 것이니까 아무렇게나 산다던지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 즉 다시 말해서 허무주의적인 관념으로 삶을 함부로 해버리는 것이 오행입니다. 

물론 이 몸은 허망해서 언젠간 변하고 결국 아무것도 없는 공, 무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고 또 누구 없이 그런 과정에 있지만 이 몸뚱이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사 가운데 있지만 오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住於涅槃= 번뇌 망상, 온갖 잡념과 좋지 않은 생각이 다 사라져버린 열반의 경지에 머물되 不永滅度=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생각이 사라져서 나무나 돌처럼 목석처럼 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중생제도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보살행을 하겠다는 바람직한 삶에 대한 생각은 당연히 있어야 되는 것이 보살행이다.]  

 

非凡夫行(비범부행) 非賢聖行(비성현행) 是菩薩行(시보살행)

범부의 행도 아니고, 성자나 어진 사람의 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고, 

The practice of a bodhisattva is neither the practice of the ordinary mortal nor that of a sage. 

非垢行(비구행) 非淨行(비정행) 是菩薩行(시보살행)

때묻은 행도 아니고, 청정한 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며, 

The bodhisattva practice is neither a practice of defilement nor a practice of purity. 

[非垢行非淨行이 是菩薩行이며= 더러운 행도 아니고 또 너무 깨끗한 행만 하는 것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다. 즉 중도라는 것입니다. 신선이 된 것처럼 사는것도 바람직한 생활은 아니다. 정행만도 아지만 구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다. 다른 말로 더러운 행을 해야 할 때는 더러운 행을하고, 깨끗한 행을 해야 할 때는 깨끗한 행하고, 더러운 행 했다고 깨끗한 행 못하는 것이 아니고 깨끗한 행 했다고 더러운 행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장실 가는 반면에 식당에도 가는 그것이 중도이고 사람은 그렇게 살게 되어있으니까 너무 가리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무 치우쳐서 행동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더 잘못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빽빽한 소견, 도대체 바늘 끝 하나도 들어갈 수 없는 소견은 결국 남에게도 피해를 입히고 자기 자신도 어떤 괴로움의 결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옛말에 하루 길을 가는데 중도 보고 소(속인)도 본다. 중 봤다고 계속 중만 본다고 고집할 수도 없고 속인 봤다고 속인만 봤다고 고집할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는 먼 길은 가는 것입니다. 인생, 칠십 팔십년이라고 하는 먼 길에 우여곡절 많고 파란만장한 삶, 인생의 여정에서 무슨 행인들 없겠습니까?

그런데 더러운 행이나 청정한 행을 한 것에 너무 고집하고 치부하거나, 자기 자신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연기(緣起)

文殊師利(문수사리) 是爲有疾菩薩(시위유질보살) 調伏其心(조복기심)

문수사리여, 이것을 앓고 있는 보살이 그의 마음을 조복한다고 하는 것이며, 

Manjusri, it is for the bodhisattva with illness to subdue his mind,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은 것이 그 마음을 조복 받는 것으로, 이런 차원이 되면 병든 것이 좋은 선지식이 되어서 오히려 수행(관)이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爲斷老病死苦(위단노병사고) 是菩薩菩提(시보살보리)

또 노, 병, 사의 괴로움을 끊어 없애는 것, 이것이 보살의 깨달음=菩提이니, 

to cut off the suffering of old age, sickness, and death, and is the bodhi of the bodhisattva. 

[노병사의 고통을 끊는 것이 보살의 깨달음이다. 노병사가 없는 것이 아닌, 老兵死는 있으되 그 노병사에 대하여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진의 보살이 부처님께 묻기를 관세음보살은 어떻게 사바세계에서 노닙니까? 하셨듯이, 그분들은 여기에 와서 우리 중생들 건진다고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마음을 기울여 삽니까? 그러면 관세음보살이 심심풀이로 우리를 제도하시는 것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는데, 그분들은 심혈을 기울여서 피땀 흘려가면서 중생을 건지지만, 마음은 즐거우니까 경전에서는 유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빨래하고 청소하고 하는 것이 힘들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됩니다.

재난에서 마음을 바꾸니까 상황까지 달라지는 것입니다.

독약의 성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달마대사는 그것을 보약으로 먹었으니까 보약이 된것입니다. 우리들 보통 중생에게는 좀 지나친 과분한 생각이 되겠지만, 우리도 그런 무한한 능력의 심성, 진여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若不如是(약불여시) 己所修治(기소수치) 爲無慧利(위무혜리)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미 닦고 다스렸던 것이 지혜로운 이익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If the Boddhisttva does not follow in this way, the disciplined and cultivated wisdom would not be benefiticial.

[보살이 이 와같이 마음을 조복 받고 또 노병사의 고통을 끊는 것이 보살의 깨달음이고, 보살의 삶인데,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자기의 修治= 수행한 것이 지혜의 이익이 없는 것이 된다.

어떤 책은 慧가 은혜 惠(혜)로 되어 있어서 은혜와 이익이 없다고 되어있습니다.]

 

譬如勝怨(비여승원) 乃可爲勇(내가위용)

비유하자면 원수와 싸워 이겨야만 용사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Someone who can overcome an enemy is a person of courage. 

如是兼除老病死者(여시겸제노병사자) 菩薩之謂也(보살지위야) 兼 겸할 겸

(나와 남의) 늙음과 병과 죽음을 함께 없애는 자를 보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In the same way, one who can overcome old age, sickness, and death is a bodhisattva. 

[除(제)한다는 것이 화석처럼 굳어져서 그대로 있는 것이아니라, 남 죽을 때 죽고, 남 늙을 때 늙고, 남 병들 때 같이 병들지만 그러한 것으로부터 초월한 것이다.]

 

彼有疾菩薩(피유질보살) 應復作是念(응부작시념)

이 앓고 있는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니,
The ailing bodhisattva should think to himself: 

如我此病(여아차병) 非眞非有(비진비유) 衆生病亦非眞非有(중생병역비진비유)

나의 이 병이 진실한 것도,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닌 것과 같이,

중생의 병도 또한 진실한 것도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

If this illness of mine is not real and not existent, the illnesses of all sentient beings are also not real and not existent. 

[나의 이 병은 非眞非有 (또는 非眞有)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닌,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참다운 것도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병이라는 것이 없다가 생긴 것이고 그러다 보면 낫는 것으로,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우리들 자만의식의 병들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없던 것이 생긴 것으로,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고, 능력이 있을수록 그러한 '상'의 병이 더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곡식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이 있듯이 사실은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것인데.....

凡所有相(범소유상) 皆是虛妄(개시허망) 형상이 있는 것은 전부 허망하다. 병도 마찬가지로 그렇다.

중생이 앓고 있는 병도 역시 亦非眞非有, 참다운 것도 아니고 실지로 존재하는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作是觀時(작시관시) 於諸衆生若起愛見大悲(어제중생약기애견대비)

卽應捨離(즉응사리)

이와 같이 관할 때에 모든 중생들에 대해서 애욕에 물든 마음=愛見으로

자비심을 일으켰다면 곧 그러한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니,

When viewed this way, if a loving view develops from great compassion, one should immediately abandon it. 

[愛見大悲= 애착의 소견, 애착은 보통 자기와 가까운 사람 또는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이 정에 지우친 진한사랑으로, 애착으로써의 자비를 일으키는 것을 卽應捨離, 곧 응당히 떠나버린다]

 

所以者何(소이자하) 菩薩斷除客塵煩惱(약보살단제객진번뇌) 而起大悲(이기대비)

왜냐 하면 보살은 밖으로부터 주어진 번뇌=客塵煩惱를 끊어 없애고 자비심을 일으켜야 하나니, 

How can this be? The bodhisattva’s great compassion arises from removing the destructive emotions of external defilements.

[보통사람은 애견대비= 정에 의한 자비심을 일으키나 객진번뇌를 끊어버리고 본래적인 보살 심성, 본심에서 일어나는 대자비를 일으키는 것이다.]

[심성본정 객진번뇌(心性本淨 客塵煩惱) 또는 심성본정 객진소염(心性本淨 客塵所染)= 客塵煩惱, 사람의 본성은 청정하며, 번뇌는 실제로는 본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번뇌를 마치 손님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으로,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은 인간 마음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다는 것으로서 부파불교 대중부(大衆部)에 의해서 처음 주장된 사상이다. 
‘심성본정 객진번뇌’란 마음의 본성[性]은 본래 청정한데, 밖의 번뇌가 오염시킨다는 말이다. 즉, 심성은 본래 청정하지만(心性本淨), 객진 번뇌에 오염된다(客塵所染)는 말이다.
번뇌라고 하는 미혹의 마음이 갖가지로 나오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에 있어서 본래적인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경험 속에서 욕심이나 미혹이 일어나서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번되)들은 딴 곳에서 날아온 티끌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청정한 본성의 마음이 때로는 번뇌에 뒤덮이고 유전해 타락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번뇌는 객진번뇌(客塵煩惱)로서 외래(外來)의 2차적 존재에 불과하고, 마음의 본성 자체는 어디까지나 청정무구하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구름(번뇌)이 달빛을 잠시 가리지만 구름이 지나가면 달(마음)은 본래대로 밝게 빛나는 것과도 같다. 이럴 경우 달은 구름에 의해 가려지기 전이나 후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원래대로 빛을 발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 자체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불변(不變)’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생과 멸이라는 대립적 분별의식에 의해서 ‘달라지는 것 없이’ 본래 그대로 있는 진여(眞如)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지, 초월적 절대자의 고정불변이나 영생불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청정’이라는 것도 선과 악의 이분적 가치 판단에 물들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극악과 반대되는 절대적 최고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미산]

愛見悲者(애견비자) 則於生死(칙어생사) 有疲厭心(유피염심)

애욕으로 물든 자비=愛見悲에는 생사에 피곤해 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니, 

If one has compassion because of a loving view, one will inevitably become weary of birth and death. 

[生死(생사)란 현실 생활, 즉 죽고 살면서 온갖 생명이 부단히 이어지고 있는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생사의 반복이니까 결국은 이 생사 속에서는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놈의 인생 그만 살아야지,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지, 아니면 저 이름 없는 산속에 들어가서 돌이 되어서 온갖 세상의 변화를 모르고 지냈으면 하는 등의 현실적인 삶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애견비이고 정이고 애착심이라서 좋은 것을 좋아하는 반면에 생사 현실에서 안 좋은 것을 싫어해서 떠나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於生死에 有疲厭心입니다.]

  

若能離此(약능리차) 無有疲厭(무유피염)

만약 이 (애욕에 물든 마음을) 떠날 수 있으면 피곤해 하고 싫어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If one can be free from this, there is no weariness and aversion, 

[목석같이 싫어하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 도울 때 돕고, 건질 것 건지고, 은혜를 입을 때 입고, 은혜를 베풀 때 베풀면서도 크게 빠지거나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고 또  자기 자신을 망각하여서 정신이 혼미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보살입니다.]

 

在在所生(재재소생) 不爲愛見之所覆也(불위애견지소복야)

在在=어떠한 곳에 所生=태어나더라도 애욕에 물든 마음=愛見에 덮이지 않을 것이며,

and a loving view does not cover oneself no matter where one is born or what happens. 

[보살은 생사를 싫어하지 않으니까 크게 애착하지도 않고, 애착하지 않으니까 생사에 빠져서 정신을 잃거나 하는 일이 없다. 여기서의 문수보살과 재가불자 유마거사와의 대화는 어떻게 보면 유마거사가 모든 재가신자들을 대변하면서 또 유마거사 자신의 정신세계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있습니다.]

 

所生無縛(소생무박) 能爲衆生說法解縛(능위중생설법해박) 

태어나는 곳에 속박되지 않으니,

중생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하고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Being born without bondage, he can speak the Dharma for all living beings and release them from bondage. 

[所生無縛이면, 태어난 바,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에 속박이 없으면

能爲衆生하야 說法解縛이니, 중생을 위하여 능히 설법하여 다른 사람의 속박을 풀어줄 수 있다]

 

如佛所說(여불소설) 若自有縛(약자유박) 能解彼縛(능해피박) 無有是處(무유시처)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만약에 自有縛=자기가 (번뇌에) 결박(속박)되어 있으면서

능히 남의 결박(속박)을 풀어 주는,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니,

As the Buddha said, releasing others from their bondage is impossible if one is still in bondage himself. 

若自無縛(약자무박) 能解彼縛(능해피박) 斯有是處(사유시처)

스스로 결박되어 있지 않아야 남의 결박을 풀어 줄 수 있는 것, 이것이 옳은 것입니다. 

Only when one is not bound can one release the bondage of others. 

是故菩薩不應起縛(시고부살불응기박)

그러므로 보살은 반드시 (번뇌의) 결박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Therefore, I say that a bodhisattva should not give rise to being bound.

[속박되지 않는 것이 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속박은 병이라는 말이죠.]


何謂縛(하위박)? 何謂解(하위해)?

무엇을 속박이라 하며, 무엇을 해탈(벗어남)이라고 합니까? 

What is bondage? What is liberation? 

貪著禪味(탐착선미) 是菩薩縛(시보살박) 以方便生(이방편생) 是菩薩解(시보살해)

참선의 기쁨=禪味에 집착하는 것이 보살의 속박(無方便慧縛, upynu ptta-praj)이요, 

훌륭한 방편을 가지고 (참선의 기쁨을 맛보며) 사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며,

To covet the taste of meditation is bodhisattva bondage. To give rise to skilful means is bodhisattva liberation. 

[승려도 역시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승려 물이 들어야 되는데 나중에는 승려물, 중물이 빠져야 됩니다. 어릴 때는 중물이 안 들었다고 핀잔하고, 조금 지나면 중물이 안 빠졌다고 핀잔을 주는 것이, 승려로써의 틀이나 규정 등만 내세우는 사람은 중물이 안 빠졌다고 합니다.

보살물이든 것도 남에게 피해를 끼칠 수가 있고, 중물도 남에게 부담을 끼치는 것이라 큰 속박이 될 수 있습니다. 주부가 나는 살림살이 잘하는 주부입네 하는 상에 쪌여있으면 그것도 병이듯이 어느 분야에서던지 너무 두드러지게 어떤 모습으로 틀을 고집하는 것은 보통 상이 아니고 보통 병이 아닙니다.

여기 貪着禪味, 선의 맛에 탐착해 있는 것이 얼마나 고상합니까? 그런데 유마거사는 그것도 보살의 속박이라고 합니다.

方便生은 방편으로써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또는 방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방편으로 살아가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라.
금강경에 무유정법이라고 했듯이 이것은 이렇게 해야 되고 저것은 저렇게 해야 된다는 기준이라는 것이 본래 없습니다.
고정된 법은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데, 뭐라고 고집하는 것이 우리들의 상식이고, 통념이고, 관습이고 ,습관이 되어서 또 그것이 자꾸 굳어져서 어떤 선이 생기면, 그 다음 사람들은 그 선에 맞추어야 되고 또 그 선에 안 맞으면 틀렸다고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본래 아무것도 없고 어떠한 선이나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은 없습니다. 미국에서 옳은 것이 한국에서는 틀린 것이고, 한국에서 옳은 것이 미국에서는 틀린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방편으로 살아가는, 방편생이라는 것이 참 좋은 말입니다.
옛날에 어떤 선사가 계셨는데 제자가 스님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하고 물으니까, 그 스님의 대답하기를 '누가 너를 묶었느냐? 왜 해탈이라고 묻느냐?  묶였을 때 해탈이 필요하지만, 누구도 너를 묶은 사람이 없는데 왜 해탈을 묻느냐? 는 문답이 있고, 또 불법승 삼보에서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물으니까 '自家寶藏을 不顧하고 抛家散走하야 作什麽오' 자신이 불보 부처이면서 보배를 묻는다, 자기의 보장, 자기 보배는 돌아보지 아니하고 돌아다니면서 다른 보배를 찾느냐, 남에게서 보배 찾느냐는 기가 막힌 대답을 했습니다.]

彼有疾菩薩(피유질보살) 爲滅法想(위멸법상) 當作是念(당작시념)

이 병든 보살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생각=法想을 떠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러한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니,

To extinguish the conception of the Dharma, the afflicted bodhisattva should think: 

此法想者(차법상자) 亦是顚倒(역시전도)

이 법(이치)에 대한 생각도 그릇된 집착=顚倒(viparysa)이며

The thought of the Dharma is also inversion,

[여러 가지 법으로 이 몸이 이루어졌으며, 거기에 따라서 병이 났으니, 법이라고 하는 생각도 없애야 된다. 그래서 마땅히 이런 생각을 하되, 此法想者=법이라고 하는 생각도 亦是顚倒=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지, 수, 화, 풍 네 가지 온갖 여러 가지 법으로써 존재가 이루어졌다라고 (일단은 맞는 이치이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 역시도 잘못된 생각, 전도된 생각이다]

 

顚倒者是卽大患(전도자시즉대환) 我應離之(아응리지)

이 그릇된 집착=顚倒야말로 마음의 커다란 병(걱정거리)이니,

나는 반드시 이것(대환)으로부터 떠나야 할 것이니, 

and inversion is a great disaster, so I should leave it. 

云何爲離(운하위리)? 離我我所(이아아소)

어떻게 그것(근심거리)을 떠날 수 있는가?

그것은 我=나라고 하는 것과 我所=내 것이라는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What is it to leave? It is to be free from subject and object.

云何離我我所(운하리아아소)? 謂離二法(위리이법)

어떻게 하면 나라는 것과 내 것이라는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두 개의 (상대적인) 법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며,

What does it mean to separate from subject and object? It means to e free from dualism. 

云何離二法(운하리이법)? 謂不念內外諸法行於平等(위불념내외제법행어평등)

어떻게 하는 것이 二法=두가지의 법(내외법, 상대적인 법)으로부터 떠나는 것인가?

그것은 주관=內, 객관=外의 온갖 법을 (분별하여) 마음에 두지 않고 평등한 마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What is to be free from dualism? It means not considering the various Dharmas as internal or external and treating everything equally. 

[謂不念內外諸法하고 行於平等이니, 두 가지 법은 내외, 안밖의 법을 생각하지 않고 평등을 행하는 것이다

내 외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我가 안(내)이면 我所는 바깥(외)이 되어서, 이 세상은 我所에 해당되고 바깥(외)에 해당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 그리고 다른 것, 내외, 안과 밖의 모든 법을 생각하지 않고 평등을 행하는 것, 안팎을 똑 같이 보는 것이다.]

 

云何平等(운하평등)? 謂我等涅槃等(위아등열반등)

어떤 것이 평등인가? 나=我와 열반이 함께 평등한 것이니, 

What is equality? It means the equality of self and nirvana.

所以者何(소이자하)? 我及涅槃此二皆空(아급열반차이개공)

왜냐 하면, 나라는 것과 열반의 둘은 모두가 자성(svabha)이 공하기 때문입니다. 

What is the reason? Self and nirvana both of them are empty. 

[我及涅槃이, 내가 공부해서 열반을 증득한다고 하지만, 나와 내가 증득하고자 하는 열반이 모두 공한=此二皆空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열반은 소승열반을 말하는 것입니다.]

 

以何爲空(이하위공) 但以名字故空(단이명자고공)

무엇이 공하다는 것인가? 다만 이름과 문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인 것입니다. 

Why is it empty? It is all just names, so it is empty. 

[나와 내가 증득 할 목표의 열반이 어째서 공이냐 

나도 열반도 성불도 전부 이름 뿐이지 실제하는 것이 아닌, 이름 뿐이고 말일 뿐이니까 空이다.]

 

如此二法(여차이법) 無決定性(무결정성) 得是平等(득시평등)

이 같은 두 가지 것=法은 변함이 없는 실체성(決定性, 결정된 성품)이 없으니,

이러한 평등함을 얻으면 

Such is the duality, which is indefinite by nature. Establishing such equality, 

[결론입니다. 如此二法이 無決定性,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이 결정된 성품이 없다. 즉 이것 이라고 할 고정불변하다고 내세울 것이 없다. 그러나 중생들은 망상, 전도, 잘못된 생각으로 자꾸 나를 내세우고, 내가 없음에도 자꾸 나를 주장합니다.

대체로 기분이 나쁠 때 자기를 내세우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막연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꺽을 수 없었던 나라고 하는 것이 한 생각 돌이켜 버리면 없어지는 것은, 본래 없었기 때문에 환상에서 나를 인정하고 환상에서 나를 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다 이름 뿐이고 실제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적인 바탕= 無決定性이 있는 것이 아니다]

 

無有餘病(무유여병) 唯有空病(유유공병) 空病亦空(공병역공)

다른 병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공한 병=空病만이 남지만, 이 공과 병도 또한 공인 것입니다.

you will not have other illnesses. The only thing that remains is the illness of emptiness, but the illness of emptiness itself is also empty. 

[得是平等하여는 無有餘病하고, 이와 같은 평등함을 얻었으면, 다른 병은 없더라.

내가 없으니까 나에게 얹혀 있었던 병이 없이지는 것이다. 나를 따지고 보니 없더라, 그리고 다른 병 또한 없지만 오직 한 가지 병, 공병만 있다

唯有空病이니 空病도 亦空일새, 오직 공병이 있을 뿐이나, 그 공병도 따지고 보면 또한 공이다.

나도 열반도 공하다고 하는 그 병만 남아있다. 공이 병이라고 하는, 공병이라는 낱말은 찾기 어렵습니다. 공에 집착하는 그것도 병이라고 하는 말은 흔히 있어도, 바로 병중에 공병이라는 병명은 아마 여기서 처음 보실 것입니다. ]


是有疾菩薩(시유질보살) 以無所受而受諸受(이무소수이수제수)

이 앓고 있는 보살은 (이미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아 들이는=感受하는 일이 없지만,

(중생을 위하여) 온갖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하며, 

In this way, the ailing bodhisattva experiences various sensations with the attitude of non-experiencing any sensation. 

[以無所受로 而受諸受하며, 받아들일 것이 없는 것으로써 모든 받아들이는 것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느끼고, 알고, 지각하는 것으로, 춥다 덥다는 것을 아는 受는 본래 감수하고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수, 병 있는 보살이 본래 받아들일 것이 없는= 無所受로써 받아들인다. 받아들일 것이 없는데서 받아들이다]

 

未具佛法(미구불법) 亦不滅受而取證也(역불멸수이취증야)

또 부처님의 모든 공덕=佛法(pariprabuddha dharma)을 아직 다 갖추지 못하였으나,

또 모든 감수작용=受(vedana)를 없애 버리지 않고서 取證=열반을 증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Although still not possessing the Buddha’s Dharma, he does not extinguish the experience of sensations to take the proof [of nirvana]. 

[未具佛法이라도 亦不滅受而取證也니다. 아직 불법을 갖추지는 못했다. 즉 공을 안다고 해서 불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불법을 갖추지 못했을 지라도 받아들이는 것을 소멸하고 證= 열반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바람직한 불법의 단계는 아직 멀었지만, 여기에서 이야기 해온 이 사람은 아프다, 즐겁다 등의 것을 받아 들이지 않지만, 그러나 열반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상당한 지혜에 이르기는 했으나 불법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불법의 단계와 병의 문제를 불교적으로 잘 수용하는 것과는 아직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設身有苦(설신유고) 念惡趣衆生(염악취중생) 起大悲心(기대비심)

설령 자기의 몸이 괴로움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죄의 과보로) 나쁜 삶의 길에 떨어져 있는 중생=惡趣衆生들을 생각하고 무한한 자비심을 일으켜야 하며,
Supposing that one’s own body is suffering, think of all sentient beings suffering even more in the path of evil, and thus arises great compassion for them.

[設身有苦라도 念惡趣衆生하야, 설사 몸에 고통이 있더라도 악취중생을 생각하라

몸에 고통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설사 이런 저런 괴로움이 많다 하여도 그 보다 더 어려운 곳에 사는 중생들을 생각하여

起大悲心하며, 큰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라. 내가 비록 이렇게 병을 앓고 있지만, 나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을 하는 대비심을 일으키며]

 

我旣調伏(아개조복) 亦當調伏(역당조복) 一切衆生(일체중생)

나는 이미 (괴로움을) 조복하였으므로, 일체 중생들의 고통도 조복해야만 하나니,
As I have subdued, I should also subdue all sentient beings. 

[나를 이미 조복했을진댄, 亦當調伏一切衆生이니, 또한 마땅히 일체중생을 조복할지니.

내 자신을 조복하면 다른 사람들도 조복하도록 할 수가 있다는 뜻]

 

但除其病(단제기병) 而不除法(이불제법) 爲斷病本而敎導之(위단병본이교도지)

다만 그 병은 제거하지만 법(이치)을 제거하지 않으니,

병의 근원을 끊어 없애기 위하여 이를 敎導=가르쳐 이끌어야 하며,

But remove the illnesses rather than removing the Dharma and teach them to break the root of the illness. 

[다만 그 병만 제거하고 법은 제하지 말지니, 爲斷病本而敎導之라, 왜냐 하면 병의 근본을 끊어서 사람들을 敎導=가르치기 위한 까닭이니라. 병은 제하더라도 법, 이치는 놔두어야 된다.]

 

何謂病本(하위병본)? 謂有攀緣(위유반연) 從有攀緣(종유반연) 則爲病本(증귀병본)

무엇을 병의 근원이라고 하는가 하면,

대상을 따라 마음이 일어나는=攀緣(adhylambana)하는 것이니,

마음이 대상을 따라 일어나면, 곧 병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What is the root of the illness? It means when there is a dependence on something. The root of the illness begins when there is a dependence on something. 

[어떤 것을 일러 병의 근본이라고 하느냐, 이를테면 반연이 있음으로부터 병의 근본이 된다.

병이 어디 얹혀질 곳이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피부병도 몸이 있고 피부가 있으므로 해서 피부병이 생기는 것이니까 그러한 것들이 조건이 되어서 반연한다는 것입니다.]


何所攀緣(하소반연)? 謂之三界(위지삼계)

무엇을 마음이 일어나는 대상으로 삼는가? (무엇이 반연하는 바 인가?)

삼계를 대상으로 삼습니다. 

What is is to have dependence? It is the [dependence on the] three realms.

[謂之三界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우리가 얽히고 섥혀서 살기 때문에 그것이 반연이 되고 병의 근본이 된다.]

 

云何斷攀緣(운하단반연)? 以無所得(이무소득)

어떻게 이 마음이 일어나는 대상을 끊습니까? (어떻게 반연을 끊습니까?)

그것은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無所有(anupalabdhi)이어야 합니다. 

How do you cut off the dependence on something? 

[어떻게 하면 반연은 끊느냐? 以無所得이라, 얻을 바 없는 것으로써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 삼계에 살더라도 아무런 얻을 것이 없다. 얻을 바가 없는 것으로 살면 반연이 끊어진다. 사실 얻을 바가 없다고 생각하면 반연이 끊어지죠.]

 

若無所得(약무소득) 則無攀緣(즉무반연)

만약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으면, (만약 소득이 없으면)

그 때 마음은 대상을 따라서 일어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곧 반연이 없어진다)

Through non-grasping. If there is nothing one has grasped onto, there is no hanging to anything.

[만약에 소득이 없으면 곧 반연이 없다.

이 이치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삼계 욕계 색계 무색계에 와서 사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여기에 강의가 없다면 아무도 공부하러 올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무소득이면 斷攀緣이 됩니다.

若無所得이면 則無攀緣이니, 만약에 소득이 없으면 곧 반연이 없다

그 이치로 미루어서 생각하면, 우리가 삼계에 와서 이렇게 반연을 맺고 사는 것, 즉 삼계에 반연이 있는 것은 뭔가 소득이 있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태어날 수도 있는데 한국에 태어난 것은 내가 한국에 인연이 깊고 한국에 가면 더 소득이 많으니까, 또는 전생에 한국에 살았으니까 훨씬 편안하니까 한국에 태어난 것 그것이 소득이라는 말입니다.

소득이 없으면 반연이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무서운 소리 같기도 하지만, 또 알고 보면 사실입니다. 관계 속에서 소득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조건 없이 키운다고 하지만 키우는 보람이 있고, 키우는 재미가 있는 그것도 부모로써 소득이 됩니다. 소득이 없으면 반연이 없다 참 묘한 말이고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사는 것이 그러한 조건으로 얽혀있다는 말이겠죠.]

 

何謂無所得(하위무소득)? 謂離二見(위리이견)

무엇을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요?(무엇을 소득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까?)

상대적인 소견=二見(ddvaya)을 떠나는 것입니다. 

What is the meaning of non-grasping? It means to be free from dualistic views.

何謂二見(하위이견) 謂內見外見(위내견외견) 是無所得(시무소득)
무엇을 상대적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인가요? 주관을 보는 견해=內見(adhytmadi)과 ,

객관을 보는 견해=外見( bahirdhdi]이니,

(이들을 떠나는 것이)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無所得입니다.

What are dualistic views? It means there is nothing to attain upon the internal and external views.

[內見外見이니, 나와 내가 아닌 다른 것, 나는 나의 견이 되고 나아닌 모든 다른 대상은 외견이 됩니다.

是無所得이라, 나라고 하는 것과 나 아닌 바깥세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말뿐인 것으로, 아무것도 실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소득이라는 것이죠. 반야심경의 핵심도 무소득(無所得)이라는 낱말입니다.

보통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이 의미심장한 말 같지만, 그런 의미들을 전부 함축해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소득, 얻을 바 없다는 것입니다.]

爾時文殊師利(이시문수사리) 問維摩詰言(문유마힐언)

그 때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물어 말하되

Then Manjusri asked Vimalakirti, 

菩薩應云何(보살응운하) 慰喩有疾菩薩(위유유질보살)? 慰 위로할 위

보살은 有疾菩薩=병든 보살을 위로=慰喩하는 應云何=적절한 방법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How should bodhisattvas comfort bodhisattvas with illness?   

維摩詰言(유마힐언) 說身無常(설신무상) 不說厭離於身(부설염리어신)

유마힐이 말하되, “몸은 무상하다고 설하여도 그 몸을 싫어하여 버리는=厭離하도록 不說=설하지 않고, 

Vimalakirti said, Speak of the impermanence of the body but do not speak of aversion towards the body. 

[몸은 무상하기 때문에 병이 난것이고, 병을 고쳐도 결국은 죽는 것이지만... 몸은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 세월이 가면 변하게 되어 있고 병들게 되어 있는 것이 무상의 도리이고, 형상이 있는 제행은 무상하니까, 그 까짓것 가지고 있으면 뭐하냐, 앓지 말고 그냥 팍 죽어버려라는 소리하면 안된다. 이것이 중도정견, 중도의 바른 견해입니다.]

 

說身有苦(설신유고) 不說樂於涅槃(부설락어열반)

몸에는 괴로움이 있다고 설하여도, 열반만 좋아하도록 不說=설하지 않으며, 

Explain that the body contains suffering, but don’t instruct him to dwell on the happiness of nirvana. 

[몸이 있으면 고통이 있으니까 더워도 고통, 추워도 고통, 배고파도 배불러도 고통, 고통 투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승적 열반을 즐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열반은 대승불교에서 바람직한 것이 아닌, 지극히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도피불교이니까, 설사 괴로울 때 괴로움을 느끼더라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또 즐거울 때 즐거워하고, 같이 아파할 줄 아는 이런 삶이 진짜 부처의 삶이고 보살의 삶이고 중도 정견입니다]

 

說身無我(설신무아) 而說敎導衆生(이설교도중생)

이 몸은 무아(고정불변의 주체성이 없음)라고 설하여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 것을 설하고, 

Tell him that the body is without a self and instruct him to guide sentient beings. 

[無我=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마음 마음 하지만 마음의 본체가 공적해서 어떤 알맹이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공적하지만 살아있어서 염지=신령스럽게 아는 작용이 있는 것일 뿐, 我=나 자신이라고 하는 주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 여기서의 나는 존재의 실체는 없다, 이 몸뚱이에 我는 없다. 

그러나 我, 내가 없으면 교화할 중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없되 거기서 교화 할 중생은 또 있다. 교화 받아야 할 나도 있고 교화 할 중생도 있다. 그것이 중요한 중도입니다. 내 몸은 주체성이 없지만 그래도 중생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고 설하라.

나라고 하는 존재도 분석해 보면 지수화풍의 사대, 오온, 육근, 육입, 십이처, 십팔계로, 어떤 고정불변한 실체는 없지만, 그래도 교화해야 할 내가 또 있고, 중생을 제도하는 일은 있다

보리심도 바랄게 없는데서 발하고, 불도도 구할게 없는데서 구한다, 내가 없는 가운데 교화할 중생이 있는 중도이고 바른 견해입니다]

 

說身空寂(설신공적) 不說畢竟寂滅(부설필경적멸)

이 몸은 공=空寂하다고 설하여도 언제까지나 영원토록 공한=畢竟寂滅이라고 설하지는 않을 것이며, 

Explain that the body is empty, but do not speak of the ultimate tranquil cessation. 

[이 육신은 공적해서, 화합해 있는 사대육신의 인연이 다해서 흩어져버리면 공적한데로 돌아간다.

몸이 공적하다고 설하되 畢竟寂滅= 철저히 없고, 끝까지 없다고 설하지 말라.

예를 들어서 태워버리면 몸이 공적이지만, 태웠다고 해서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형체가 변했을 뿐입니다. 아무리 없애려야 없앨 수 없는, 불생불멸입니다. 사실 우리 마음만이 불생불멸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전부 불생불멸입니다

이 종이 한 장도 완전히 없앨 수 없습니다. 단지 액체나 기체로 변모해서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는, 그 형태가 사라졌을 뿐이지 이 종이가 가지고 있는 질과 양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이 종이도 다른 것이 변형되어서 이 종이가 되었을 뿐, 종이가 되기 이전에는 다른 것이었는데, 그것이 없어지고 다른 것으로 변모했을 뿐입니다. 새로운 물질, 신소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합집산의 화학적인 작용을 거치면서 다른 모양으로 변한 것을 신소재라고 할 뿐입니다. 사람만 윤회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물질도 이렇게 전부 윤회하는 것입니다.

이 꽃도 나중에 거름이 되면, 다른 작물에 흡수되어서 우리가 먹게 되면 내 몸에 들어와서 나의 피와 살이 될 수 있듯이, 그 자리가 옮겨지고 모양이 변할 뿐이니까 그대로 있는 필경공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畢竟寂滅=끝까지 적멸하고 철저히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說悔先罪(설회선죄) 而不說入於過去(이부설입어과거)

전에 범한 죄=先罪를 뉘우치도록 설하되, 지나간 과거에 몰입하게 설하지 않을 것이며, 

Explain that one should repent for previous transgressions but should not tell him to be involved in the past. 

[유마거사는 중생이 아파서 자기가 아프다고 했지만, 先罪 먼저 지은 죄업 때문에 지금 앓아 누워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단명이나 병을 앓는 것은 과거에 지은 업 때문이다, 죄업 즉 남의 생명에 어떤 손해를 끼쳤을 때 몸이 아프거나 단명하는 것입니다.

지장경에 병고가 있는 것은 부처님으로부터 모든 생명있는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죄업을 참회 할 것을 설명하되, 그렇다고 예전에 지은 업을 한탄하고 과거에 연연해서 푹 빠져있어서는 안 되니까 그런 이야기는 하지말라.

아름다운 추억을 연상하는 것은 좋지만, 어떤 좋지 않은 일에 맴돌면서 헤어날 줄 모르는 것은 큰 문제이니까, 잊어버릴 것은 잊어버려야 됩니다. 不入於過去 과거에 빠져있지 말라. 이 또한 중도적인 견해이고 바른 소견입니다

과거에 매달려 있어도 그것이 변하거나 고쳐지고, 누군가가 보상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되풀이 하는 만치 과보를 더 받는 것입니다. 얼른 잊어버리고 체념 할 줄 알아야 새로운 내일이 있고, 새로운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남의 이야기를 할 때, 너는 그 전에 이러이러해서 지금 그렇다고 말하는 것도 가슴에 못이 이미 박혀 있는데 그 못을 빼 줄지는 못할망정, 그것을 한 번 더 깊이 박는 일 밖에 안되니까 절대 조심해야 됩니다]

 

以己之疾(이기지질) 愍於彼疾(위어피질)

자기의 병을 헤아려 남의 병을 마음을 헤아려 아파하며, 

To be compassionate to the sickness of others from one’s sickness. 

[以己之疾로 愍於彼疾하며, 자기의 병으로써 다른 사람의 병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아라.

유교에서도 以己之心 度人之心이라, 자기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고 했습니다.

우리 보통사람의 생각은 거의 유사하고 비슷합니다. 아주 특별한 성격의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게는 자기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면 맞아들어 갑니다.]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도 하게 하지 않으며,

Do not let others do what I don't want to do.

[아픈 사람 위로 할 때는 자기가 아팠던 때를 생각해서 그런 마음으로 위로하는 것이 잘 하는 것입니다. 경전에 우리 일상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고 또 필요한 교훈이 많이 담겨있습니다.]

 

當識宿世無數劫苦(당식숙세무수겁고) 當念饒益一切衆生(당념요익일체중생)

과거 무수겁에 걸친 괴로움을 當識=마땅히 알고서,

마땅히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고자하는 마음을 가지며, 

One should realize that one has been suffering for countless lifetimes and be thoughtful of benefiting all sentient beings. 

[當識 꼭 알아야 된다. 꼭 인식하고 있어야 된다. 지금 당장 감기나, 다쳤다든지 해서 아픈것만이 아니라, 宿世=과거 세상의 무수한 세월동안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고통들을 생각하라. 생각해보면 하나도 기억이 안납니다. 설사 금생에서 아주 어려웠던 고통을 되짚어 보려고 해도 그 고통이 새로워지지가 않는데, 과거 숙세의 전 전 전생에서 겪었던 그 고통들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當識宿世無數劫苦 당식 숙세 무수겁의 고통도 생각을 해보라, 그런 명상이나 사색에서 깨달을 바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當念饒益一切衆生 일체 중생을 이익케 요익케 할 것을 생각하라, 즉 위문하는 사람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憶所修福(억소수복) 念於淨命(념어정명) 勿生憂惱(물생우뇌) 常起精進(상기정진)

(자신의 병을 헤아려) 지난날 닦은 공덕을 생각하며, 바른 생활=淨命을 염원할 것이며,

근심과 괴로움이 생기지 않도록 해서 항상 정진하는 마음을 내야 하며, 

Remember the blessings one has been cultivating and mindful of a tranquil life.

Do not become distressed, and always remain diligent. 

[憶所修福하야 念於淨命하며, 닦은 바 복을 기억해서, 내가 얼마나 복을 닦았으며 또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생각해서, 淨命=깨끗하게 살 것을 생각하라. 내가 참 전생에 복을 얼마나 지었으며, 또  죄를 얼마나 지었는가? 그리고 내가 지금부터라도  淨命=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직업도 남을 헤치지 않고 또 이왕이면 남에게 복이 되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야 되겠다.  

아파서 누워 있을 때 숙세에 닦은바 복을 기억해서 깨끗하게 살 것을 생각을 하는, 내가 이 병이 나아서 일어나면 어떻게 할 것이라고 철저히 각오하는, 그래서 큰 병 앓고 나서 새 사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勿生憂惱하고 常起精進하며, 아프다고 근심해 보아야 더 낮지도 않는다.

常起精進, 憂惱, 근심을 내지 말고 항상 정진을 일으키라]

 

當作醫王(당작의왕) 療治衆病(요지중병)

훌륭한 의사의 왕=醫王이 되어서 온갖 중생의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발원합니다. 

Be the king of doctors and heal all sicknesses. 

[當作醫王=위문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하더라도 마음으로라도 병을 고쳐주려고 하는 그런 자세]

 

菩薩應如是(보살응여시) 慰喩有疾菩薩(위유유질보살) 令其歡喜(영기환희)

보살은 이같이 병든 보살을 위로하고 기쁨에 넘치도록 하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For bodhisattvas who are ill, other bodhisattvas should say something like this to comfort them and make them rejoice.

[그들을 기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위문 간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위문하는 사람의 자세를 지금까지 이야기 했고, 다음은 병든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하는가, 병이 났을 때 마음 다스리는 법, 調伏其心 그 마음을 항복 받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文殊師利言(문수사리언)

居士(거사) 有疾菩薩(유질보살) 云何調伏其心(운하조복기심)?

문수사리보살이 말하되,
거사님, 병든 보살은어떻게 해서 그 마음을 다스리고 항복 받는=調伏해야 합니까?

Manjusri asked, Householder, what is the way for a bodhisattva with illness to subdue his mind? 

[앞에서는 어떻게 위문하면 좋으냐고 물었고, 여기서는 병든 보살이 그 마음을 어떻게 조복해야 하는가, 병난 사람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維摩詰言(유마힐언) 有疾菩薩(유질보살) 應作是念(응작시념)

유마힐이 말하되, 병든 보살은 반드시 이같이 생각해야 하나니,
The Vimalakirti said, A bodhisattva who is sick should think like this; 

今我此病(금아차병) 皆從前世(개종전세) 妄想顚倒諸煩惱生(망상전도제번뇌생)

지금 나의 이 병은 모두가 전생의 망상과 전도된 생각 등 여러 가지 번뇌로부터 생긴 것이지 

The illness I am suffering from now is from the delusions and vexations of my previous existence; 

[내가 지금 앓고 있는 이 병은 전부 원인, 이유가 있습니다.

교통사고도 전생에 망상과 전도= 앞뒤가 뒤바뀐 생각 그리고 온갖 번뇌, 무명 등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따지고 보면 망상, 전도, 번뇌 등으로 생기지 않는 병이 없으니까, 전부 자기 자신이 과거 생에 바르지 못한 생각 등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다] 

 

無有實法(무유실법) 誰受病者(수수병자)

(나의 몸에는 병을 앓을 만한) 실체로서의 존재=實法는 없다는데, 누가 병에 걸렸단 말인가!

but since there is no actual Dharma, who is suffering from the illness? 

[병도 따지고 보면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망상, 전도, 번뇌 또한 실다운 것이 있지 않은데, 그러한 조건으로 인해서 이 병이 생겼다. 병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된 것,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병을 막론하고 본래부터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부터 있는 것은 낫게 할 수도 없지만, 없다가 중간에 생긴 병이고 또 있다가 보면 언젠가 없어지는 것이 병입니다. 無有實法=어떤 실다운, 고정불변 하는 실체의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誰受病者= 병든 사람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 말로, 그러면 누가 병든 사람이란 말인가? 이렇게 생각이 제대로 들어 버리면 병도 없어지고 병을 앓는 사람도 없어지는 상황입니다 ]

 

所以者何(소이자하) 四大合故(사대합고) 假名爲身(가명위신)

왜냐 하면, 이 몸은 4대(지,수,화,풍)가 결합한 것이므로 몸이라고 임시로 이름[假名]하였을 뿐이지, 

Why do I say so? The four elements of earth, water, fire and wind combine to form a false name called a body. 

[지, 수, 화, 풍 네 가지 요소가 합해서 假名=잠깐 얼기설기 엮여서 거짓으로, 임시로 있는 것을 몸뚱이라고 할 뿐이다]

 

四大無主(사대무주) 身亦無我(신역무아)

이 4대에 주인(adhipati)은 없고, 또한 몸에는 나(주인, tman)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며,

The four elements have no master, and the body has no self. 

[지,수,화,풍 4대는 다 똑같은 조건으로 모였을 뿐 주인이 아니다

身亦無我= 몸도 또한 無我=주인이 없고, 고정불변 하는 어떤 실체로서 내가 없으며]

 

又此病起(우차병기) 皆由著我(개유착아) 是故於我(시고어아) 不應生著(불응생착)

또 이 병이 생긴 것은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집착=著我(tmbhinivea) 때문이니, 

그러므로 나라는 것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이며,

And this illness arises as the result of clinging to a self. Therefore, one should not cling to the self.

[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라고 고집하고 자아의식이 굳어져서, 병이 생긴, 즉 나라고 하는 것에서 병이 생겼다. 나라고 집착하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병이 생겼다. 그런 까닭에 나에게 不應生着=응당히 집착을 내지 말라

어차피 앓고 있는데 나아서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자기에 대한 자아의식만 강해지고 또 그럴수록 병은 더 깊어집니다. 나라는 것이 본래 없는데 나라고 집착 하므로 해서 병이 생겼고 또 집착함으로써 그 병은 더 뿌리가 튼튼해지는, 병이 뿌리 내릴 곳은 나라는 자아의식의 집착이니까, 나라는 집착을 허물어 버리면 병이 뿌리 내릴 곳이 없어져서 홀가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관이라고 하는데, 병이 들었을 때 정통적으로 불교에서는 마음 다스리는 법, 마음을 관하는 법입니다. 이렇게 관하면 결국은 나도 없어지고 병도 없어진다. 마음으로 자기 병을 다스리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그 마음을 조복 받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생의 망상과 전도 번뇌로써 생긴 것이 병이고, 그것은 어떤 실다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사대가 모여서 거짓으로 된 것이고, 그 사대 또한 주인이 없고, 또 몸도 아가 없으니, 이 병은 아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는 집착을 하지 않으면 병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旣知病本(기지병본) 卽除我想(즉제아상) 及衆生想(급중생상)

이미 이와같이 병의 근본을 알았을진댄, 곧 나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我想도,

중생이라는 것에 대한 잘못된 생각=衆生想도 없애 버려야 하며, 

Now that you know the root of the disease, eliminate the attachment to the ego and to sentient beings. 

當起法想(당기법상) 應作是念(응작시념) 但以衆法(단이중법) 合成此身(합성차신)

마땅히 법(물질)이라는 생각=法想(dharma-saja)을 일으켜야하나니,

응당히 이러한 생각을 하되, 衆法=온갖 법(물질, 존재, 지수화풍)으로써,

(어떤 상황 사건과 시간의 흐름과 인연을 통해서) 합하여 이 몸을 이루었으니,  

When there arises thoughts of the Dharma, one should think: This body results from the union of many Dharmas; 

起唯法起(이유법기) 滅唯法滅(멸유법멸) 又此法者(우차법자) 各不相知(각불상지)

(병이) 생겨날 때에는 다만 물질적인 것만에서 (지수화풍) 생기고,

멸할 때에도 물질적인 것만에서 (지수화풍) 멸하는 것이니

또 이 물질적인 것(에는 마음이 없으므로) 서로 각자 알지 못하나니, 

there is only the Dharmas that arises, and it is only the Dharmas that perish.

And thses Dharmas are unknown to each other. 

[起唯法起요,  설사 병이 일어나도 오직 법이 일어난 것이다. 온갖 존재로써 되었으니까 온갖 존재 하나하나 즉 지, 수, 화, 풍이 병이 들었다. 내 몸이 병들면 지, 수, 화, 풍이 병 들었고, 또 병이 소멸하면 오직 지, 수, 화, 풍 그 법이 소멸한 것이다

又此法者는 各不相知하야, 또 이 지, 수, 화, 풍이니 모든 존재라고 하는 법은 各不相知=각각 서로 알지 못한다. 물이 불을 알지 못하고, 불이 나무를 알지 못하고, 흙을 알지 못하고, 흙이 바람을 알지 못하고, 서로 알지 못하는 관계이다]

 

起時不言我起(기시불언아기) 滅時不言我滅(멸시불언아멸)

생할 때에도 내가 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멸할 때에도 내가 멸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When they arise, they do not say that I arise, and when they perish, they do not say that I perish.

[물의 성질 또는 흙의 성질, 바람의 성질, 불의 성질 중에서 그 하나가 병이 난다고해도 不言我起= 나는 병이 날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또 병이 소멸할 때도 不言我滅= 내가 병이 다 나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 서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고 병도 구름처럼 거기에 잠깐 머물러서 그늘을 드리웠다가 옮겨가거나 사라지는 것으로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維摩詰言(유마힐언) 從癡有愛(종치유애) 則我病生(즉아병생)

유마힐이 말하되, 어리석음=痴으로부터 탐심=有愛하여 나의 병은 생겼습니다. 

Vimalakiriti replied, From ignorance comes infatuation, and from which my illness arises. 

[從痴有愛일새,  어리석음을 쫓아서 애착이 있다. 어리석음이란 無明입니다. 無明은 우리 본심의 어리석음이며 또 어리석기 때문에 캄캄하고 어둡습니다. 어리석으면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지혜는 밝음이고 그 반대는 어리석음 어두움입니다]

 

以一切衆生病(이일체중생병) 是故我病(시고아병)

일체 중생이 병들어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Because all sentient beings are sick, I am sick.

[일체중생이 병이든 까닭에 내가 병들었다. 보살이 아픈 것은 중생이 아프기 때문이다.]

 

若一切衆生病滅(약일체중생병멸) 則我病滅(증아병멸)

만약 일체 중생의 병이 사라진다면, 그 때는 나의 병도 사라질 것입니다. 

 And if all sentient beings are not sick, then my illness extinguishes. 

所以者何(소이자하) 菩薩爲衆生故入生死(보살위중생고입생사)

有生死則有病(유생사즉유병)

왜냐 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에 들어섰으니, 생사가 있는 곳에는 병이 있기 때문이나,

Why? The bodhisattva enters life and death for the sake of sentient beings, and if there is life and death, there is the suffering of sickness; 

若衆生得離病者(약중생득이병자) 則菩薩無復病(즉보살무부병) 愈 나을 유

만약 중생이 병에서 떠난다면 보살도 병이 없을 것입니다. (중생에게 병이 없다면 곧 보살도 병이 없다)

if sentient beings are free from sickness, then there is no more sickness for the bodhisattva. 

譬如長者(비여장자) 唯有一子(유유일자) 其子得病(기자득병) 父母亦病(부모역병)

若子病愈(약자병유)父母亦愈(부모역유)

비유하자면, 장자에게 외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병에 걸리면 그 부모도 병을 앓고, 만약 아들의 병이 나으면 부모도 낫는 것과 같으니, 

For example, if an elder has only one son, and the son gets sick, the parents fall ill with him. When the son recovers, the parents will also recover. 

菩薩如是(보살여시) 於諸衆生(어제중생) 愛之若子(애지약자)

보살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을 사랑하기를 내 자식 대하듯 합니다. 

The bodhisattva is also like this, loving sentient beings as if they were his own sons. 

衆生病則菩薩病(중생병즉보살병) 衆生病愈(중생병유) 菩薩亦愈(보살역유)

중생이 병을 앓으면, 보살도 병을 앓으며,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의 병도 낫습니다.”
So when sentient beings are sick, the bodhisattva is also sick. When the sentient beings recover from their illness, the bodhisattva recovers from his illness. 

又言是疾(우언시질) 何所因起(하소인기)? 菩薩病者(보살병자) 以大悲起(이대비기)

또 말하되, “이 병이 무엇으로 인하여 생겨났느냐면, 보살이 병든 것은 드넓은 자비=大悲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And what causes this illness? The bodhisattva’s illness arises out of great compassion.

[육신이 있는 한, 병이 드는 것은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로써, 성인도 병들고 부처님도 병들고 어리석은 중생도 병들고 악한사람도 선한사람도 다 병들지만, 그 병의 의미가 다르고 해석이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병이 들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을 하느냐? 여기에 나타난 유마거사의 병에 대한 해석이 부처님의 마음과 불교의 대자대비를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文殊師利言(문수사리언) 居士此室(거사차실) 何以空無侍者(하이공무시자)?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거사님, 이 방은 어째서 텅 비어 있으며, 시자도 없습니까?”
Manjusri asked, Householder, why is this room empty and without attendants? 

維摩詰言(유마힐언) 諸佛國土亦復皆空(제불국토역부개공)

유마힐이 말했다. “모든 부처님의 불국토 또한 모두 공한 것입니다.”

Vimalakirti said, All the pure lands of the Buddha are empty. 

[내방만 텅 빈 것이 아니고 모든 부처님의 국토가 다 또한 공한 것이다.

모든 유, 있는 것은 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다 변멸, 변하고 소멸하는, 그 본질이 공하기 때문에 변하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본질이 공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본래 공하기 때문에 변해가는 것으로 그 근본이 본래 없기 때문에 변해가는 것으로, 만약에 있다면 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제대로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확실하게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又問(우문) 以何爲空(이하위공)?

또 물었으니, “무엇을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Asking again, What makes them empty?

答曰(답왈) 以空空(이공공)

답하되, “공하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입니다.”

Answering, Are empty because of emptiness. 

[以空空(이공공), 이 부분의 티베트 역은 “공성(空性)이므로 공이다”라고 되어 있다.]

 

又問(우문) 空何用空(공하용공)?

“무엇을 가지고 공하다고 합니까?”

Also asking, How can this emptiness be empty? 

[공이라면 왜 공을 씁니까? 공하기 때문에 공이라고 하니, 공이라면 공으로써 공이라 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

 

答曰(답왈) 以無分別空故空(이무분별공고공)

“공을 분별할 수 없는=無分別이기 때문에 공한 것입니다.”

Answering, Empty because there is no distinction in emptiness. 

[무분별 공으로써 공인까닭에 공입니다. 우리가 공공하지만 사실은 무분별 공, 분별이 없는 공입니다. 본래 공한 것, 근본이 없이 공한 것은 분별= 생각으로 이치를 따져서 이러이러해서 공하다고 할 수있는 것이 아닌, 본질적으로 본래 그냥 그대로 공하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又問(우문)  空可分別耶(공가문별야)?

“그렇다면 공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까?”

Asking another question, Can one distinguish between the emptiness?

答曰(답왈) 分別亦空(분별역공)

“분별하는 것도 공한 것입니다.”

Answeres, Distinction is also empty. 

[분별해보았자 그것도 역시 공이다. 전부 공뿐이다. 내방을 텅 비게 공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그런 이치를 들어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이치가 세속적인 보통의 이치와 다른 점은 있는 것을 공한 것으로 보는 안목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보는 것이 이루어지고 또 계산이 되지만, 불교의 깨달음의 이치는 없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서, 없다고 일단 간주하고 거기서부터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 이치의 이해를 위해서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 않습니까?

우리의 보통 상식적인 것은 전부 있는 것에서 출발해서, 일단은 있으니까 있는 것부터 따지고 보는 것이지만, 거기서 한 단계 나아가면 있는것이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을 근거로 해서 계산하고 따져보니까 너무 쉽고, 그 나머지는 전부 소득이 되는 것입니다. 없다 생각하고 주머니를 보니까 아직도 만원이 남아 있으니까 그 만원은 공짜이고 덤이니까 얼마나 감사하고 좋습니까?

내 삶이라는 것이 본래 없는데 지금 사는 것은 전부 공짜니까 내일 죽어도 괜찮은 것이고 더 사는 것은 덤이 되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플러스발상법입니다. 전부 一切唯心造의 도리,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상은 바뀌지 않으니까 그 안 바뀌는 현상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져보았자, 그렇게 애쓰는 나만 손해입니다.]


又問(우문) 空當於何求(공당어하구)?

“그렇다면 공은 어디서 구해야만 합니까?”

He asked another question, How should one seek emptiness? 

答曰(답왈) 當於六十二見中求(당어육십이견중구)

“그릇된 62종의 소견에서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In reply, One should seek it with the sixty-two views. 

[62견(六十二見)은 초기불교 경전 등에서 외도(外道)의 모든 견해 또는 사상을 62종으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62가지의 모든 (외도의) 견해'라는 뜻에서 62제견(六十二諸見) 또는 '62가지의 (외도의) 견해와 내용'이라는 뜻에서 62견취(六十二見趣)라고도 불리며, 간단히 줄여서 62(六十二)라고도 한다.

본겁본견(本劫本見) - 18견 = 18제악견취(十八諸惡見趣), 전제분별견(前際分別見), 과거에 관한 18종의 사견.

말겁말견(末劫末見) - 44견 = 44제악견취(四十四諸惡見趣), 후제분별견(後際分別見), 미래에 관한 44종의 사견]

 

又問(우문) 六十二見當於何求(육십이견당어하구)?
“62견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He also asked, Where should I seek the sixty-two views? 

答曰(답왈) 當於諸佛解脫中求(당어제불해탈중구)

“모든 부처님들께서 해탈하신 곳에서 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Answered, One should seek in the liberation of the Buddhas.

[마땅히 모든 부처님의 해탈가운데서 구한다.

육십이견이라고 하는 것은 좋지 않은 소견, 편협한 소견, 편법 되고, 비중도적인 소견인데, 그런 소견을 부처님의 해탈 가운데서 구한다.] 


又問(우문) 諸佛解脫當於何求(제불해탈당어하구)?
“부처님들의 해탈은어디서 구해야만 합니까?”
Asking again, Where does one seek the liberation of the Buddha? 

答曰(답왈) 當於一切衆生心行中求(당어일체중생심행중구)

“일체 중생의 마음가짐=心行 (cittaprva-carita)에서 구해야 합니다. 

Answered, One should seek it in the mental activities of all sentient beings. 

[모든 중생들의 마음속에서 구한다. 중생들의 마음 속에 해탈이 있고, 또 거기에서 육십이견이 벌어지고, 공도 그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일체중생에게로 돌아와서, 일체중생의 마음이 근본이라는 말입니다. 일체중생의 마음 가운데 분별도 있고 육십이견도 있고 해탈도 있지만 결국은 공이고, 공은 일체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又仁所問(우인소문) 何無侍者(하무시자)?

또 그대는 왜 시자가 없느냐고 물었지만, 

Also, Benevolent One, you ask why there are no attendants. 

一切衆魔及諸外道(일체중마급제외도) 皆吾侍也(개오시야)

모든 마군과 온갖 외도들이 모두가 나의 시자입니다. 

All the many demons and heretics are all my attendants. 

所以者何(소이자하)? 衆魔者樂生死(중마자락생사) 菩薩於生死而不捨(보살어생사이불사

왜냐 하면, 온갖 마군들은 생사를 좋아하지만,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않고, 

Why is that? The demons rejoice in life and death, while a bodhisattva is in life and death without reluctance to part with them. 

[온갖 마구니들은 생사를 즐기는데, 菩薩은 於生死에 而不捨하며,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

중생들을 제도 하려면 중생들과 같이 생사, 생하고 사함을 더불어 같이 해야 되니까 보살들은 생사를 버리지 않는 것이고 ,생사를 버리지 않으니까 생사를 즐기는 衆魔= 모든 마구니와 내가 생사를 버리지 않고 생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사에 딸려있는 저 마구니들이 전부 내시자다. 다른 의미로 생각하면 생사 그 자체보다 더 훌륭한 시자는 없고 훌륭한 스승은 없고, 훌륭한 선지식은 없다는 뜻이 될수도 있습니다.]

 

外道者樂諸見(외도자락제견) 菩薩於諸見而不動(보살어제견이부동)

외도는 여러 가지 그릇된 견해를 좋아하지만, 보살은 이 그릇된 견해에 동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Heretics take delight in various views, but a bodhisattva is unmoved by the various views. 

[온갖 소견에 보살들은 동요하지 않는다. 외도들은 여러 가지 소견들을 즐기고 있는 반면에 보살들은 그 모든 소견에 움직이지 않는다. 중생들은 여기가 좋다고 하면 여기 쭉~ 따라가고, 저기가 좋다고 하면 또 쭉~ 따라 가는 그것이 樂諸見입니다. 외도만 여러 가지소견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중생들이 자기 주관이나 소신이 없어서, 불교 공부를 했어도 뚜렷한 견해가 없어서 쉽게 동요하는 것이 樂諸見입니다.]


文殊師利言(문수사리언) 居士所疾(거사소질) 爲何等相(위하등상)?

문수사리가 말했다. “거사님의 병세는 어떤 상이 있습니까?”

Manjusri asked, House holder, what form is the illness which you are suffering? 

維摩詰言(유마힐언) 我病無形不可見(아병무형불가견)
유마힐이 말했다. “나의 병은 병상이 없으므로[無形] 볼 수가 없습니다.”
Vimalakirti said, The illness I suffer has no form and is unseen. 

[내 병은 형상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즉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又問(우문) 此病身合耶(차병신합야)? 心合耶(심합야)?
“이 병은 몸과 관계된 병입니까, 아니면 마음과 관계된 병입니까?”

He also asked, Is this illness of the body or the mind? 

[어떻게 아프냐고 물었는데 無形不可見이라고 대답을 하니까, 대답하기 쉽도록 몸이 아픈것이냐? 마음이 아픈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答曰(답왈) 非身合(비신합) 身相離故(신상이고) 亦非心合(역비심합) 心如幻故(심여환고)
“몸과는 관계된 병이 아니니, 몸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과 관계된 병도 아니니, 마음은 허깨비=幻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 answer was Not with the body because the body is apart from form. Nor is it with the mind because the mind is illusionary.  

[마음은 환과 같은 것이다. 마음 마음 하지만 마음의 종적이 있어서 마음과 합친 것이 아니다]


又問(우문) 地大水大火大風大(지대수대화대풍대) 於此四大(어차사대) 何大之病(하대지병)?

지, 수, 화, 풍 4대에서 어느 것이 병든 것입니까?

Asking again, Of the four elements of earth, water, fire and air, to which does the illness belong? 

[몸뚱이는 네 가지 요소뿐이데, 地大= 몸이 무거우냐, 水大= 습으로 물기가 많아서 아프냐, 火大= 열이 나느냐, 風大= 풍이 들었느냐?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 가운데서 어느 쪽이 탈이 났느냐?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4대 중 어느 하나도 부족하거나 과하면 병이 나는 것입니다.]


答曰(답왈) 是病非地大(시병비지대) 亦不離地大(역불리지대)

水火風大亦復如是(수화풍대역부여시)

“이 병은 지대의 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대를 떠나서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수대, 화대, 풍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He answers, The illness is not of the earth element, nor is it separate from the earth element; the same is true of the elements of water, fire and wind. 

[내 병은 온 세상만유와 함께하고 있다,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而衆生病(이중생병) 從四大起(종사대기) 以其有病(이기유병) 是故我病(시고아병)

그러나 중생의 병은 4대로부터 생기며, 중생에게 이러한 병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도 병든 것입니다.”

The illness of all sentient beings arise from the four elements. Because all sentient beings are ill, that is why I am also ill. 

[따지면 중생들이 사대 때문에 병을 앓으니까 나 역시 사대로써 병이 있음이다. 꼬집어서 화기가 성하다 풍이 성하다 수가 성하다 아니면 지가 성하거나, 부족하거나, 그것들의 흐름이 잘못되었다고 꼬집어서 표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병의 형상이 들어나지 않고 병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 결국은 여기서 말하는 공의 이치와 똑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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