云何彌勒受一生記乎(운하미륵 수일생기호)?

미륵이여, 어느 생에서 수기를 받으려 합니까

In that case, why does Maitrey Bodhisattva have the prophecy (or becoming a Buddha) in the next life?

[바른 지위 제 값을 하는 자리, 부처자리에서는 네가 나중에 부처 된다는 수기 또는 약속 그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못난 사람들끼리 하는 것으로, 바른 지위에 있고 부처의 지위에 있고 제값을 하는 인간의 자리에 있다면 수기가 필요 없는=亦無受記이니, 어떻게 일생에 보리를 얻는다는 그런 받음이 되겠는가? 그것은 맞지 않다는 뜻입니다]

 

爲從如生得受記耶(위종여생득수기야)? 爲從如滅得受記耶(위종여멸득수기야)?

여여(진여) 경지가 생기는 것으로부터 수기를 받으렵니까, 아니면 여여(진여)한 경지가 하는 것으로부터 수기를 받으려 합니까

Is this prophecy (of Buddhahood) coming from the birth of suchness, or is it arising from the extinguishment of suchness? 

[爲從如生= 누구나 가지고 있는 如= 진여 또는 근본 마음자리로부터 수기를 받으시렵니까?] 

 

若以如生得受記者(약이여생득수기자) 如無有生(여무유생)

만약 여여한 경지가 생기는 것으로써 수기가 이루어진다면 여여는 거기에는 생기는 일이 없으며

If the prophecy is from the birth of suchness, yet suchness is without birth. 

[진여는 생이 없으니까 멸이 없는 것이나, 만약 생이 있으면 멸이 있게 되는 것이니까 진여생, 진여멸, 여생, 여멸이라는 말을 쓴 것 자체가 맞지 않는 억지 물음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진여의 생으로부터 수기를 얻는 것 이라면 如無有生, 진여는 생하는 것이 없다]

若以如滅得受記者(약이여멸득수기자) 如無有滅(여무유멸)

만약 여여한 경지가 멸하는 것으로써 수기가 이루어진다 해도 여여에는 없는 것이며, 

If the prophecy is from the extinguishment of suchness, yet suchness is without extinguishment. 

[진여는 생기는 것이 아니니까 소멸도 없는 것으로, 우리 본래의 마음, 참나는 불생불멸이고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으로 미륵 당신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一切衆生皆如也(일체중생개여야) 一切法亦如也(일체법여여야)

일체 중생이 다 여여하고, 일체법이 여여하며

All sentient beings are suchness, and all Dharmas are suchness, 

[일체중생이 다 진여이고 일체법이 亦如也 또한 진여이다]
[이 구절은 티베트 본에 의하면 “일체 중생이 여여하다(Sarva Sattvatathat)”이다.]

 

衆聖賢亦如也(중성현역여야) 至於彌勒亦如也(지어미륵역여야)

모든 성인과 현자도 여여하니, 그대 미륵까지도 여여합니다

and all sages or wise ones are suchness, and even Mairtreya is suchness. 

[진여의 마음 자리는 누구에게 다 동등하고 평등한 자리이니까 일체 성현이 다 진여이고, 미륵 당신 역시도 진여이다]

 

若彌勒得受記者(약미륵득수기자) 一切衆生亦應受記(일체중생역응수기)

그러므로 만약 그대 미륵이 수기를 얻었다고 하면, 일체 중생도 수기 얻는 것이 될것 입니다

Therefore, if you, Maitreya, have received the prophecy (of becoming a Buddha), then all sentient beings should be able to receive the prophecy. 

[만약 미륵 당신이 진여의 입장을 가지고 수기를 얻었다고 한다면 一切衆生도 亦應受記=일체중생 또한 응당히 수기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 夫如者不二不異(부여자불이불이)

왜냐 하면 여여에 있어서는 不二= 가지도 아니고  不異=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Why? All is suchness, non-dual and undifferentiated.

[진여라고 하는 것은 不二不異 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진여는 평등하니까 미륵이나 중생이나 부처나 유마거사나 다르지 않은 것이다]

 

若彌勒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약미륵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자)

一切衆生皆亦應得(일체중생개역응득)

만약 그대 미륵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면, 일체 중생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것입니다

 If you, Maitreya, attain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all sentient beings should also be able to attain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만약에 미륵이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면 일체중생 또한 응당히 다 얻을 것이니, 즉 미륵보다 못한 일체 중생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근본자리,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진여의 입장에서는 만약에 미륵이 얻으면 얻는 그 순간에 모든 중생이 같이 얻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다르지도 않고 둘이 아니니까, 즉 미륵과 우리 중생이 둘이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니까 미륵이 얻으면 일체중생이 다 얻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 一切衆生卽菩提相(일체중생즉보리상)

왜냐 하면 일체 중생 그대로가 菩提相= 깨달음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Why? All sentient beings are the mark of bodhi.

[일체중생이 곧 보리의 모습=깨달음의 모습이라는 것은 정말 결정적인 말입니다. 왜 그러냐? 미륵이 수기를 얻는데 왜 일체중생이 다 얻느냐 일체중생이 곧 보리의 상(모습)이다. 중생도 깨달음 그 자체이다. 중생의 삶 그 자체, 삶 그대로가 도이고, 진리 그대로가 삶이고, 진여 그대로가 삶 그 자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若彌勒得滅度者(약미륵득멸도자) 一切衆生亦應滅度(일체중생역응멸도)

만약 그대 미륵이 멸도(깨달음의 경계, parinirva)를 얻는다고 한다면, 일체 중생도 멸도(깨달음의 경계)에 이를 것이며, 

If you, Maitreya, can attain the extinguishment of nirvana, all sentient beings should be able to do the same. 

[멸도= 번뇌를 소멸해서 제도를 얻는다면, 일체중생 또한 응당히 멸도를(제도)를 얻게 될 것이다]

[멸도(滅度)=나고 죽는 큰 환란을 없애고, 번뇌의 바다를 건넜다는 뜻으로  곧 열반을 번역한 말이다.

열반(涅槃)=불교의 최고 이상이며, 니원(泥洹) 열반나(涅槃那) 라고 음역한다.
구역제사(舊譯諸師)는 번역하여 멸(滅), 멸도(滅度), 적멸(寂滅), 불생(不生), 무위(無爲), 안락(安樂), 해탈(解脫) 등 이라 하고, 신역(新譯)의 번역은 원적(圓寂)이라 한다.
멸(滅)은 生死와 因果를 멸한다는 뜻이며, 滅度는 생사의 인과를 멸하고 생사의 폭류(暴流)를 건넜다는 뜻이며, 이 멸(滅)은 곧 도(渡)이다.]

所以者何(소이자하) 諸佛知一切衆生(제불지일체중생) 畢竟寂滅(필경적멸)

왜냐 하면, 제불께서는 일체 중생이 필경 깨달음=寂滅을 얻고, 

Why? The Buddhas know that all sentient beings ultimately enter silent extinguishment, 

[일체중생이 철저히, 끝까지, 궁극적으로 적멸이다. 중생이 아무리 번뇌 망상을 일으키고 탐진치 삼독이 아니라 팔만사천번뇌를 일으키더라도 그 궁극의 자리, 그 근본마음의 자리, 일심의 자리는 끝내 적멸한 자리이다]   

[적멸이란 寂은 有無로 공적안온(空寂安穩)의 뜻이며, 滅은 생사의 대환大患을 멸하는 것을 말한다.]

 

卽涅槃相(즉열반상) 不復更滅(불부갱멸)

그대로 열반의 모습이며, 다시는 멸하는 일이 없다고 알기 때문이며,

the appearance of nirvana, and there is nothing more to extinguish. 

[卽涅槃相=열반모습 그대로에는 탐,진,치 삼독도 번뇌 망상도 없는 완전무결한 자리, 궁극적으로 적멸한 깊은 자리, 畢竟寂滅의 자리를 중생들은 다 가지고 있다. 속 마음 아주 깊은 자리는 본래 완전무결해서, 탐, 진, 치, 삼독 번뇌도 없고 팔만사천 번뇌도 없고, 중생의 때라고 생각하고 죄업이고 업장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굳이 떨쳐버리려고 하지 말라, 본래 적멸하고 깨끗한 자리를 우리는 다 가지고 있다.  그 것이 업의 바람에 의해서 물결치는 것이다. 바다가 파도친다고 해도 깊은 바다 밑까지 파도치고 동요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겉만 육식의 작용으로 물결칠 뿐, 깊은 속마음 본래심, 진여심 자리에는 전혀 파도가 없는 완전무결 한자리이다. 거기에는 일체 죄업이나, 허물이나, 일체업장도 없는 자리, 畢竟寂滅이라는 자리라는 것을 諸佛=모든 부처님은 아신다. 즉 知一切衆生이 畢竟寂滅하야 卽涅槃相이라 일체중생이 필경에 적멸해서 곧 열반의 모습 그대로 이라서 不復更滅, 다시 더 번뇌를 소멸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아신다.
본래 소멸할 것이 없는 번뇌를 소멸하려고 바동바동 애를 쓰고 목이 터져라 부르는데, 그냥 다 놓아버리면 편안한 것을 모르고 번뇌, 망상이라는 환상에 속아서 아등바등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이 필경에 적멸해서 그대로 열반이라 다시 더 소멸할 것이 없는 것을 부처님은 아신다.]          

[열반이란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진리를 궁구하며 미(迷)한 生死를 초월해서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를 말한다.]

[卽涅槃相(즉열반상) 不復更滅(불부갱멸)= 이 대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역본을 보면, 지겸은 “불(佛)은 중생을 버리고 혼자만 깨닫는=滅度하지 않는다. 반드시 어리석은 중생을 깨닫게 한다” 했으며,

티베트 역에서는 “중생이 모두 깨닫는=涅槃을 얻지 않으면 불은 깨닫지 않는다” 했다.]

 

是故彌勒(시고미륵) 無以此法誘諸天子(무이차법유제천자)

그러므로 미륵이여, 이러한 (나는 장차 깨달음을 얻으리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것을 설하여 천상의 신들을 유혹해서는 안 됩니다. 

Therefore, Maitreya, do not fool the celestial beings with such teachings.

實無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실무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亦無退者(역무퇴자)
실제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다는 것도 없고, 또한 그러한 마음이 후퇴한다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In reality, no one is developing the intention to attain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or a person reaching the stage of non-retrogression. 

[더욱 강한 표현으로 實無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발할 것도 없다. ]


彌勒(미륵) 當令此諸天子(당령차제천자) 捨於分別菩提之見(사어분별보리지견)

미륵이여, 이 모든 천상의 신들로 하여금 보리(bodhi)를 분별하는 생각(見)을 버리게 해야 합니다. 

Maitreya, let these celestial beings renounce their differentiated perspectives regarding bodhi. 

[그동안 일생의 문제, 수기문제, 진여의 문제, 멸도의 문제 등을 이야기 하다가 궁극에는 보리, 깨달음 등의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를 25종류의 보리에 대한 설명으로 설명하게 됩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 菩提者不可以身得(보리자불가이신득) 不可以心得(불가이심득)

왜냐 하면 보리라는 것은 몸으로 얻을 수도 없는 것이며, 마음으로도 얻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Why? Bodhi is not something that one can attain with the body, nor can one attain it with the mind. 

寂滅是菩提(적멸시보리) 滅諸相故(멸제상고)

적멸이야말로 보리이니, 모든 모습=相을 멸하였기 때문이며,

Silent extinguishment is bodhi, the cessation of all forms. 

[우리 눈앞에 벌어져 있는 현상은 차별하지만,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는 적멸해서 온갖 차별이 다 소멸된 자리이기 때문이다=滅諸相故. 제상=여러 가지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생의 상, 멸의 상, 선의 상, 악의 상, 남의 상, 여의 상 등의 온갖 상에 기준해서 웃고 울고, 잘났네 못났네 하지만, 우리의 본래심 보리의 마음 자리는 그러한 것들을 다 초월한 자리=滅諸相이다]

 

不觀是菩提(불관시보리) 離諸緣故(이제연고)

또 관(관찰)하지 않는 것이 보리이니, 온갖 대상과의 관계=緣을 떠난 것이기 때문이며,

Non-perceiving is bodhi, which is apart from all causes.

[관찰=觀은 이것과 저것과의 관계를 통해서 무엇이 존재하는 것, 또 이것과 저것과 어떤 인연과 어떤 조건이 결합해서 이러한 사건이 있고, 이 물건은 이것과 저것과 연해서 있다. 이런 저런 온갖 조건들로 인해서 이 꽃이 이 순간 여기에 있게 되었다는 것을 관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관하지 않는 것이 보리다. 왜냐 모든 인연을 떠났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은 이것과 저것, 어떤 조건, 어떤 인연으로 있는 것이나, 보리 깨달음 자리는 그런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인 뿌리, 본래심 자리를 가지고 논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구하지 않는다. 본질의 자리에서는 그러한 인연적인 현상을 볼 수가 없다. 근본을 못 보니까 그래서 不觀= 보지 않는, 관찰하지 않는 것이 보리이다]  

[不觀是菩提(불관시보리) 離諸緣故(이제연고)= 승조(僧肇)는 '주유마경(注維摩經)'에서

“관(觀)은 연(緣)으로부터 생(生)하고 연(緣)을 떠나면 즉 관(觀)이 없다”고 주석(註釋)하고 있다.]

 

不行是菩提(불행시보리) 無憶念故(무억념고)

행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보리이니, 잊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憶念이 없기 때문이며,

The unconditioned is bodhi, no thoughts of remembrance. 

[행이라는 것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흘러간다는 것은 우리생각이 순간순간 계속 흘러가지만 본래의 마음자리에서는 행하지 않으니, 그것이 보리이다]

[승조는 ‘불행(不行)’의 “행(行)은 염(念)으로부터 생(生)하고 염(念)이 없기 때문에 행(行)이 없다,”] 

 

斷是菩提(단시보리) 捨諸見故(사제견고)

끊어 없애는 것=斷이 보리이니, 모든 그릇된 견해=邪見을 끊어 버리기 때문이며,

To cut off (attachment) is bodhi because the mind has given up all opinions. 

[諸見=온갖 소견, 있다는 소견, 없다는 소견 등의 온갖 사견들, 즉 있음에 치우쳐도 안 되고, 없음에 치우쳐도 안 되고, 있고 없는데 치우쳐도 안 되고, 또는 있고 또는 없음에 치우쳐도 안 되는, 즉 온갖 소견들을 전부 버리는 것= 斷이 보리다.] 

 

離是菩提(이시보리) 離諸妄想故(이제망상고)

떠나는 것=離가 보리이니, 모든 망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Separation is bodhi, separate from all delusions. 

[모든 망상을 떠나면 보리라고 하는 것은 일체전도망상을 멀리하여 떠나면 보리이다.]

 

障是菩提(장시보리) 障諸願故(장제원고)

장애가 보리이니, 모든 잘못된 바램 (치구심) =願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며,

Obstruction is bodhi, obstructing all desires and wants. 

[모든 원을 장애하는 것이 보리다. 여기서의 원(願)은 치구심, 즉 개인적인 욕망을 말하는 것으로, 諸願을 것을 障=막아서 편안히 본래의 자기모습으로 되돌아온 자리가 보리이다]

[‘장(障)’은 “진도(眞道)에는 욕(欲)의 온갖 원(願)을 막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不入是菩提(불입시보리) 無貪著故(무탐착고)

들지 않는 것=不入이 보리이니, 탐착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Not entering is bodhi, free from craving. 

[‘불입(不入)’은 “입(入)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順是菩提(순시보리) 順於如故(순어여고)

(진여를) 따르는 것=順하는 것이 보리이니, 여여에 따르기 때문이며, 

Bodhi compiles, for it complies with suchness.

住是菩提(주시보리) 住法性故(주법성고)

머무는 것[住]이 보리이니, 법성(진여의 자성, 본성)에 머물기 때문이며, 

Abiding is bodhi, for it abides with the true nature of reality. 

[앞에서는 진여는 무주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머무는 것이 보리라고 한 것은 법의 자리에 머물기 때문이다. 法性= 진여의 자성에 머물기 때문에 당연한 보리이다]

[ 법성(法性)=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본성(本性).]

 

至是菩提(지시보리) 至實際故(지실제고)

이르는 것=至가 보리이니, 실제(진리)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o reach is bodhi, which is to reach the edge of reality. 

[ 실제(實際)=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극한(極限) 또는 변제(邊際).]

4. 보살품(菩薩品)
維摩詰所說經菩薩品 第四

Chapter 4 Bodhisattvas 

◎미륵보살(彌勒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자씨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한다. 미륵보살에 관한 경전으로는 미륵3부경으로 일컬어지는 〈미륵상생경 彌勒上生經〉·〈미륵하생경 彌勒下生經〉·〈미륵성불경 彌勒成佛經〉 등이 있다. 이에 따르면 미륵보살은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으나 석가모니보다 먼저 돌아가셨으며, 현재는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에 머무르면서 천상의 사람들에게 설법하고 있다.
또한 설화에 따르면 보살은 초발심 때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자씨보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일찍이 석가모니로부터 수기(受記)를 받았는데, 도솔천에서 4,000세(인간세상에서는 56억 7,000만 년)의 수명이 다한 후에 인간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여, 3번에 걸친 설법으로 모든 중생들을 제도할 것이라 했다. 이처럼 미래에 석가모니를 대신해 부처가 되어 설법한다는 의미에서 보처보살(補處菩薩)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부처가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미륵불·미륵여래라고도 한다. 이로 인하여 미륵보살과 미륵불을 나타내는 2가지 조상이 있게 되었다.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미륵상생경〉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현재 미륵보살이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상생신앙(上生信仰)이며, 다른 하나는 〈미륵하생경〉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미래에 미륵보살이 성불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널리 중생을 구제할 때에 그 세계에 태어나 설법에 참여함으로써 성불하고자 하는 하생신앙(下生信仰)이다. 상생신앙은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정토신앙이 흥성하면서 점차 쇠퇴했으나, 하생신앙은 역사를 통틀어 면면히 이어져왔는데, 특히 어지러운 시대에 성하게 일어났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시대가 지나가고 하루빨리 평화로운 미륵불의 세상이 오기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는 하생신앙은 미륵불을 자칭하는 자들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 미륵불에 대한 신앙이 유포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널리 유행하고 있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익산의 미륵사는 삼국시대 최대 규모의 사찰로서 미륵이 하생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함으로써 이상적 세계를 이룬다는 미륵하생신앙에 의거하여 세워진 대표적 사찰이다. 신라 화랑으로 유명한 김유신은 자신의 낭도들을 용화향도라고 불렀는데, 이는 미륵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리라는 예언에 입각하여 이상적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희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於是佛告彌勒菩薩(어시불고 미륵보살)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진)

그 때에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을 하도록 하라.” 

The Buddha then said to bodhisattva Maitreya, Go ask Vimalakirti about his illness.

彌勒白佛言(미륵백불언) 世尊 我不堪任詣彼問疾(세존 아불감임예피문질)

미륵보살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Maitreya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cannot bear the responsibility to go ask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我昔(억념아석) 爲兜率天王及其眷屬(위도솔천왕급기권속)

說不退轉地之行(설불퇴전지행)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제가 도솔천왕과 그 권속들을 위하여 불퇴전지의 수행에 대해 설하고 있었는데, 

Why? I recalled that I once spoke to the King of Tusita Heaven and his subordinates about the practice of reaching the stage of non-retrogression. 

[미륵보살이 당신이 금생만 보살하고 다음 생은 부처가 되는,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경지에 오른 분이니까 불퇴전에 대한 행을 설하고 있었다.]

[도솔천(兜率天),범어 투시타(Tuṣita)를 의역하여 지족천(知足天)이라하며, 이곳에 사는 무리들은 오욕(五欲)을 만족하고 있음을 뜻한다. 욕계6천 중 네 번째 하늘로, 욕계 제3천인 야마천(夜摩天)으로부터 16만 유순(由旬) 위에 위치한다고 한다.
도솔천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외원은 수많은 천인들이 즐거움을 누리는 곳이고,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로서 내원궁(內院宮)이라고 부른다. 이 내원궁은 석가모니가 인도에 태어나기 직전까지 머무르면서 중생교화를 위한 하생(下生)의 때를 기다렸던 곳이다.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보살은 현재 이 내원궁에서 설법하면서 남섬부주(南贍部洲)에 하생하여 성불(成佛)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미륵상생도솔천경'에 의하면, 바라나시국의 칼파리촌에서 태어난 한 브라흐만계급의 아들인 미륵은 부처의 제자가 되어 교화를 받고 마침내 도솔천에 태어나서 4,000세, 인간의 나이로 56억6700만 년을 보낸 뒤 지상으로 내려와 성불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도솔천에 상생하기를 바라고 미륵불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용화회상(龍華會上)에서 설법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되기를 바라는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즉, 미륵보살이 등장하면서부터 총 27천 중 아래에서 네번째에 위치하는 도솔천이 별안간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불교의 이상세계인 극락과 같은 비중을 점하는 불국정토(佛國淨土)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으며, 도솔천도 내·외의 이원(二院)으로 분리된 것이다.
이 하늘은 보관(寶冠)·칠보(七寶)·광명(光明)·연화(蓮華) 등으로 장엄되어 있고, 자연히 생긴 악기에서 십선(十善)과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설하는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 나온다고 한다. 신라의 원효(元曉) 등은 불경을 근거로 하여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아홉 가지 인연을 들고 있다.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8계(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백제의 무왕은 미륵보살이 있는 도솔천을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해서 익산에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였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도솔암 또는 지족암·내원암이라는 명칭의 암자가 매우 많이 있다. 이는 도솔천과 내원궁을 상징하는 명칭으로 도솔천을 중요시하였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時維摩詰來謂我言(시유마힐래위아언) 彌勒 世尊授仁者記(미륵 세존수인자기)

一生當得(일생당득) 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뇩다라삼막삼보리)

그 때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미륵이여, 세존께서는 그대에게 수기 주시기를 이제 한 생만 더 태어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다는데, 

Vimalakirti then came to me and said, Maitreya, the World Honoured One once gave a prophecy, saying that you would attain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in one more lifetime. 

[수기(授記) 범어 vyakarana의 번역으로서 화가라나(和伽羅那) 또는 화라나(和羅那)라 음역하며, 기별(記別).수기(受記).기설(記說).수결(受決).수결(授決).기(記)라 번역한다. 수행자가 미래에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리라고 부처님이 약속하고 예언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제자에게 미래에는 부처님이 되리라고 보증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예언,인가,미래의 약속을 의미한다. <법화경> 내지 천태종의 가르침에 의하면 수기란 주로 소승의 성문이 일승의 묘법에 눈뜨고 기사회생하며, 미래에 평등한 부처님이 되리라고 인증(認證)받는 것이다. 또는 12부경의 하나로서 부처님의 제자들의 미래에 관한 증언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경전을 지칭한다. 수기의 종류는 <수능엄삼매경> 권하에선 ①미발심이여수기(未發心而與授記 ; 중생이 오도를 왕래할지라도 근기가 예리해서 大法을 좋아하므로 이런 사람은 백천만아승지겁을 지나 보리심을 내고 보리를 얻는다고 수기하는 것) ② 발심즉여수기(發心卽與授記 ; 사람들이 오랫동안 덕을 심고 선행을 닦고 내지는 발심해서 아유월치지에 살고, 보살위에 오면 수기를 주는 것) ③ 밀수기(密授記 ; 보살이 아직 수기를 받지 못했을지라도 항상 정근하고 보리를 추구하며 육바라밀을 행하여 성불의 모습이 있으므로 다른 보살 앞에서 수기를 주되 본인은 모르게 하는 것) ④ 현전수기(現前授記 ; 보살이 일체법에서 무생인을 얻었기 때문에 대중들 앞에서 수기를 주는 것)의 4가지를 주장한다.

<대승장엄경론> 제12에선 인차별(人差別)수기와 시차별(時差別)수기로 구별 한다.
인차별수기는 미발심(未發心)수기와 이발심(已發心)수기, 현전(現前)수기와 불현전(不現前)수기의 4가지로 나뉜다.
시차별수기는 유수시(有數時)수기와 무수시(無數時)수기로 나뉜다.
즉 <수능엄경>의 주장에 겁수(劫數)의 정(定)과 부정을 더한 것이다. 수기(授記)란 용어는 구마라집 이후의 번역어다. 그
이전에는 기별(記別).수결 (授決)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爲用何生(위용하생) 得受記乎(득수기호) 過去耶(과거야)? 未來耶(미래야?)?

現在耶(현재야)?

어느 생에서 수기를 받으렵니까? 과거의 생입니까, 미래의 생입니까, 현재의 생입니까? 

But in which lifetime did you receive the Buddha’s prophecy? The past? The future? Or is it the present? 

[생에는 전생, 금생, 후생, 내후생, 전전생 등 여러 가지 생 가운데 간단하게 세 가지로 말해서 과거생, 미래생, 현재생이 있으니, 그대가 수기를 받는다면 어느 생을 일생이라고 할것인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미륵보살이 한생에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해서 형식적인 수기 받은 것에 들떠있는데, 미륵보살의 그 허황된 꿈을 부셔 버리고, 진정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도가 무엇이고,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들어내보이는 질문입니다.]

 

若過去生(약과거생) 過去生已滅(과거생이멸)

만약 과거의 생이라고 한다면, 그 과거의 생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If it is born in the past, the past has already perished; 

若未來生(약미래생) 未來生未至(미래생미지)

만약 미래의 생이라고 한다면,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if it is to be born in the future, the future is not yet present; 

若現在生(약현재생) 現在生無住(현재생무주)

만약 현재의 생이라고 하여도 그 현재의 생은 (끊임없이 流動하고 있어서) 한 군데 머무르는 일이 없습니다. 

and if it is born in the present, the present moment is impermanent, and there is no abiding. 

[시간은 1초,1초 지나가는 것이니까, 현재라고 하는 것도 꼭 집어서 이 순간이 현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당장 이 순간이라는 현재도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가 되어버린 것으로, 아무리 짧은 한 순간을 잡으려고 하여도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간 것이 되는 無主이므로 시간은 머물지 않는 것이다.]  

 

如佛所說(여불소설) 比丘 汝今卽時(비구 여금즉시) 亦生亦老亦滅(역생역로역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비구여, 그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나고 늙으며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So the Buddha has said, Monk, within this instant, you are born, aging, and passing away. 

[또한 태어나기도 하고 또한 늙기도 하고 또한 멸하기도 한다. 
우리 몸의 세포도 하루에 얼마나 많은 변화를 합니까? 지금 이 순간에 생노멸이 계속 일어 나듯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 시간이라는 것이라고 부처님이 말씀을 하셨다.
금강경에 '과거생불가득 현재생불가득 미래생불가득'과 같은 무주입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미래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현재의 마음도 얻지 못한다. 즉 잡아내지 못 한다. 이 것이라고 들어 보이지 못 하고, 찾지 못 하고, 취할 수 없는 것이다.]                             

[亦生亦老亦滅(역생역로역멸) 티베트 본에서는 “이와 같이 한 찰나에 그대는 태어나고, 죽고, 가고, 다시 온다”고 되어 있다.]
若以無生得受記者(약이무생득수기자) 無生卽是正位(무생즉시정위)

만약 무생(생사가 없는)의 경지에서 수기를 받은 것이라면, 정위(바른 지위, 부처의 지위)이므로, 

If receiving the prophecy is based on no-birth, then no-birth is the place of awakening. 

[무생, 생사가 없는 최고의 경지 또는 의식으로써 수기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卽是正位라. 정위, 바른 지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제 자리에 있는 것으로, 제 자리라는 것은 부처의 지위입니다. 사람이 제 값을 하고 살려면 부처가 되어서 가지고 있는 값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부처노릇 하기 전에는 제 값을 하고 산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값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 물건 값을 다하려면 부처노릇을 해야지 우리들의 값을 다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를 가지고서도 형편없는 육도의 수준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부처나 보살로 살 때 제 값을 하고 사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중생이 부처가 된다고 해서 상당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비로써 제 값을 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좋은 재료를 가지고도 형편없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것이 되게 살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正位가 바로 부처의 지위이고 생사 없는 경지입니다.]

 

[무생(無生). anutpda로 생멸(生滅)하는 미혹의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정위(正位). niymvakrnti로 생멸을 초월하는 것은 영원불변한 깨달음을 얻는 경지이다.]

[‘무생(無生)’이란 모든 현상은 연기법에 따라 변화하는 여러 요소들이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과할 뿐 생기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무엇인가 고정된 실체가 존재해야 무엇인가가 생겨난다는 말이 성립되는데, 연기법이 적용되는 무아(無我)의 세계에 고정된 실체가 있을 수 없다면 생길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과할 뿐이니 어떠한 존재도 새로 생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생(無生)’은 깨달음의 다른 이름이다. 깨달으면 다른 헛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니 무생이다. 
따라서 무생이란 ‘무생의 이치’, ‘남[生]이 없는 진리’, ‘불변의 진리’ 등을 이르는 말이다. 즉,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달아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한 상황을 말한다.

무생이란 ‘무(無)’에서 ‘유(有)’가 생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포함한다. 
연기적으로 생성된 모든 사물은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조건의 이합집산이요, 형상과 현상[相]의 변화에 불과하다. 사물의 실체가 공한 것은 연기적으로 화합한 것이기 때문이고, 이렇게 일시적인 가합(假合)이므로 생겨나도 실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만 변화했을 뿐이다. 
중생이 사물의 상(相)에 집착해서 실체성과 영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사물이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사견[生滅相]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무생에는 이치[理]로서의 무생과 행위[行]로서의 무생이 있다. 
이치로서의 무생은 무생법(無生法)을 이름이다. ‘무생(無生)의 법’은 불변의 진리를 이르는 말로서 결국 공(空)의 이치를 뜻한다.
‘무생행(無生行)’이란 일체법이 무아(無我)라는 근거를 통해 ‘분별’에서 벗어나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말한다. 
무생행은 또한 시비 분별과 조작 관념이 없는 무념으로서, 무생의 실천으로서, 무공용(無功用-無爲)이기도 하다.

따라서 무생의 행위는 그 성품과 특성이 모두 공적(空寂)해서 형상으로 볼 수 없고 언설로 전달할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취해 증득할 수가 있겠는가?
원효(元曉) 대사는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무생법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허공에 형상과 위상이 없듯이 마음 역시 형상과 처소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갓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허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듯이 마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허공은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고 허공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지된다. 
마음 역시 생각이 일어날 때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마음이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니 무생법(無生法)이란 모든 법의 본래 생겨남이 없는 실상을 깨달아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 작성자 아미산]

於正位中(어정위중) 亦無受記(역무수기)

亦無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역무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이 정위(바른 지위, 제 값을 하는 부처자리)에서는 수기를 받는 일도 없을 것이며,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However, there is no such thing as receiving the prophecy in the place of awakening, nor is there the attaining of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바른 지위 제 값을 하는 자리, 부처자리에서는 네가 나중에 부처 된다는 수기 또는 약속 그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못난 사람들끼리 하는 것으로, 바른 지위에 있고 부처의 지위에 있고 제값을 하는 인간의 자리에 있다면 수기가 필요 없는, 亦無受記라.]

아난(阿難)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阿難 Ananda), 아난타(阿難陀)라고도 하며,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날에 태어났으므로 환희(歡喜), 경희(慶喜), 무염(無染) 등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부처님의 제자이자 사촌 동생이며, 데바닷다의 친동생으로 8세에 출가해 부처님이 깨달은 후 고향에 갔을 때 제자가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특정한 시자를 두지 않았는데, 대중들의 천거에 따라 아난다가 시자를 맡게 되었으며, 잘생긴 탓으로 여러 차례 여자들로부터 유혹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 바, 부처님 입멸 후 수행에 전력한 끝에 깨달음의 경지인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었다. 25년간 부처님 시자였던 까닭에 부처님 법의 내용을 가장 많이 들어, 부처님 입멸 후 마하가섭에 의해 경전이 결집되던 당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의 내용을 그대로 외워 경전을 결집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불경에서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시작되는 我는 ​아난을 가리키는 것이다.​


佛告阿難(불고아나)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 아난(Ānanda)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을 하도록 하라.

The Buddha said to Ananda, Go ask Vimalakirti about his illness.

阿難白佛言(아난백불언) 世尊 我不堪任詣彼問疾(세존 아불감임예피문질)

아난도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Ananda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am afraid I cannot visit him to ask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昔時(억념석시) 世尊身小有疾(세존신소유질)

當用牛乳(당용우유) 我卽持鉢(아즉지발) 詣大婆羅門家門下立(예대파라문가문하립)

왜냐 하면 기억하건데, 예전에 세존께서 몸이 조금 불편하시던 때에 저는 우유를 잡수시면 좋으리라 생각하고, 발우를 들고 큰 바라문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는데, 

Why? I remembered that in the past, when the World Honoured One had a minor illness, and it was necessary to drink cow’s milk. So I took my bowl and stood at the door of a great Brahamin’s house. 

時維摩詰來謂我言(시유마힐내위아언) 唯 阿難(유 아난)

何爲晨朝(하위신조) 持鉢住此(지발주차)? 晨 새벽 신

그곳에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기를,
‘아난이여, 무슨 일로 이런 晨朝=이른 아침에 鉢=발우를 들고 여기에서 있습니까?’
Vimalakirti came to me and said, O Ananda, why are you standing here so early in the morning with your food bowl?  

我言(아언)  居士 世尊身小有疾(거사 세존신소유질)

當用牛乳(당용우유) 故來至此(고래지차)

저는 대답하기를,
‘세존께서 몸이 좀 불편하셔서 우유를 잡수시면 좋을 것 같아서 이곳에 왔습니다.’

I said Householder, the World Honoured One is a little sick and needs milk, so I am waiting here for alms. 

維摩詰言(유마힐언) 止止 阿難(지 지 아난) 莫作是語(막작시언)

유마힐은 말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아난이여.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Vimalakirti said, Wait, Wait, Ananda! Don’t say that. 

[止止, 그만두게 그만두게. 무슨 그런 어둡잖은 짓을 하느냐는 의미도 포함되어있습니다] 

 

如來身者(여래신자) 金剛之體(금강지체) 諸惡已斷(제악이단) 衆善普會(중선보회)

여래의 몸은 금강석과 같은 몸으로, 모든 악을 已斷=이미 끊어셨으며, 衆善=모든 선을 빠짐없이 몸에 지니고 계시는데, 

The body of the Tathagata is the body of vajra, breaking all evil and bringing together all that is good what illness is there? 

當有何疾(다유하질)? 當有何惱(당유하뇌)?

어떤 병이 있겠으며, 어떤 괴로움이 있겠습니까? 

How can there be any trouble? 

嘿往阿難(묵왕아난) 勿謗如來(물방여래) 莫使異人聞此麤言(막사이인문차추언)

嘿=잠자코 돌아가십시오. 아난이여, 부처님을 勿謗=비방하지 마십시오. 그같이 설익은 말=麤言을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됩니다. 

嘿 잠잠할 묵, 麤 거칠 추

Do not make such remarks, Ananda, and do not slander the Tathagata, and do not let others hear such foolish words. 

無令大威德諸天(무영대위덕제천) 及他方淨土諸來菩薩得聞斯語(급타방정토제래보살득문사어)

또 뛰어난 위엄과 덕을 갖춘 제천과 다른 곳의 불국토에서 온 보살들로 無令=하여금 이런 말을 듣지 않도록 하십시오. 

Do not let the celestial beings of great power and virtue and the bodhisattvas of other pure lands hear this. 

阿難 轉輪聖王(아난 전륜성왕) 以少福故(이소복고) 尚得無病(향득무병)

아난이여, 전륜성왕은 약간의 복덕 (작은 복) 으로도 오히려 병에 걸리지 않는데, 

Ananda Even a wheel-turning king does not get sick because of a small measure of blessings. 

況如來無量福會普勝者哉(기황여래무량복회보승자재)

하물며 어떻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덕을 모두 모아 몸에 지니고 계시며, 모든 것을 이기신 분=勝者인 부처님께서 어찌 병을 앓겠습니까? 

How much more so for Tathagata, with boundless blessings that surpass all three realms? 

行矣阿難(행의아난) 勿使我等受斯恥也(물사아등수사치야)矣 어조사 의

아난이여 行矣=얼른 돌아 가시어, 우리들이 이 같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해 주시오. 

Go Ananda. Do not bring such shame upon us, too! 

外道梵志若聞此語(외도범지약문차어) 當作是念(당작시념)

만약 외도인 바라문=梵志이 이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If the Brahmins of the external paths hear these words, they will think: 

 

[범지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시던 당시 고대 인도의 출신 성분을 뜻하는 사종성[四種姓]의 계급 가운데 브라흐만을 말한다. ① 범지(梵志) : 브리흐만 ② 찰리(刹利) : 크샤트리아 ③ 거사(居士) : 베이샤 ④ 공사(工師) : 수드라

중아함경의 범지품에 기술된 내용에 의하면, 부모가 천거한 바로서 생(生)을 받음이 청정하며, 7대 동안 부모의 종족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대대로 악이 없었고, 널리 듣고 모두 기억해 네 가지 경전을 환히 외우고, 인(因) 연(緣) 정(正) 문(文) 희(戱)의 5구설(句說)을 깊이 통달한 사람을 말한다. 이를 두고 범천의 아들로서 그 입에서 나왔으며, 범천(梵天)의 변화로 된 것으로 당대인들이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시각에서 보면 그저 웃고 넘겨야 하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범지에는 다시 다섯 종류의 범지가 있다. ① 범(梵)과 같은 범지 ② 하늘과 같은 범지 ③ 범지의 경계를 넘지 않는 범지 ④ 범지의 경계를 넘는 범지 ⑤ 전다라(旃茶羅) 범지 등이 그것이다.]

 

何名爲師(하명위사)? 自疾不能救(자질부능구) 而能救諸疾(이능구제질)?

'어떻게 스승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자신의 병도 고칠 수 없는 주제에 남의 병을 고칠 수 있다니.'

How can you be called the teacher of all celestial beings who save others who are sick in this world if you cannot save yourself from your own illness? 

仁 可密速去(인가밀속거) 勿使人聞(물사인문)

仁=인자여 빨리 (다른 사람들이) 密=모르게 돌아가셔서 남이 듣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So go away quietly. Don’t let anyone overhear your words. 

當知阿難(당지아난) 諸如來身(제여래신) 卽是法身(즉시법신) 非思欲身(비사욕신)

아난이여 마땅히 아십시요, 모든 여래의 몸은 진리 그 자체의 몸=法身이지, 思= 애정과 慾= 탐욕으로 하는 몸이 아니며, 

Ananda, understand that the body of the Buddha is the Dharma body, not the tangible body of thoughts and desires of the three realms. 

佛爲世尊(불위세존) 過於三界(과어삼계) 佛身無漏(불신무루) 諸漏已盡(제루이진)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世尊으로서 삼계에서 過=벗어나셨으며, 부처님의 몸에는 無漏=번뇌가 없으시며, 諸漏=어떠한 번뇌도 已盡=이미 사라져 없으며, 

Buddha is the World Honoured One, beyond the three realms. The Buddha’s body has no shortcomings since he has extinguished all shortcomings. 

[번뇌가 있음으로 해서 공덕이 그 번뇌 때문에 漏=새어 나간다.]  

 

佛身無爲(불신무위) 不墮諸數(불타제수) 如此之身(여차지신) 當有何疾(당유하질)?

當有何惱(당유하뇌)?

부처님의 몸은 무위이시니 세상의 온갖 도리(생멸)=諸數에 떨어지는 일이 없으시니, 이러한 몸에 어떻게 병이나 고뇌가 있겠습니까?’

The Buddha’s body is unconditioned and does not fall into various causes and conditions. With such a body, what illness should it have? 

[不墮諸數=모든 숫자에 떨어지지 않는다. 數=생. 생과 멸에 떨어지지 않는다. 생멸이 없는 것이 불신이다]

 

時我(시아) 世尊(세존) 實懷慚愧(실회참괴) 得無近佛而謬聽耶(득무근불이류청야)

세존이시여, 저는 그 때 참으로 부끄러움과 죄송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을 近佛=가까이 모셨으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어떻게 謬聽=잘못 알아듣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謬 그릇될 류

At that time, World Honoured One, I was truly humbled and thought I had misheard something when I was near the Buddha, listening to the Dharma.

[내가 부처님을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유마거사의 말을 잘 못 들었는가하고 있는 중에]

 

卽聞空中聲曰(즉문공중성왈) 阿難 如居士言(아난 여거사언)

그러자 공중에서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아난이여, 거사의 말과 같다. 

I then heard a voice in the air saying, Ananda, the householder’s words are correct. 

但爲佛出五濁惡世(단위불출오탁악세) 現行斯法(현행사법) 度脫衆生(도탈중생)

다만 부처님은 이 오탁악세에 나타나셨기에, 실제로 이 가르침을 드러내심으로써 중생을 해탈하게 하기 위해서 現行=행하고 계실 뿐이니라. 

The Buddha appeared in the evil world of the five turbidites and manifested all these Dharmas to liberate sentient beings. 

[부처님도 이 몸을 받아서, 이 五濁惡世에 태어난 이상은 병이 나기도 하고 또 병이 나면 약을 먹게 되는, 그런 이치를 깨우치려고, 말하자면 부처님이 그것을 일부러 나타내 보여주어서 중생을 건지려고 하는 것이다]

 

行矣 阿難(행의 아난) 取乳勿慚(취유물참)

아난이여, 勿慚=부끄러워하지 말고 우유를 가지고 돌아가라.’
So go on, Ananda! Take the cow’s milk and do not be ashamed. 

世尊(세존) 維摩詰智慧辯才(유마힐지혜변재) 爲若此也(위약차야)

是故不任詣彼問疾(시고불임예피문질)

세존이시여, 유마힐의 지혜와 변재(辯才)는 이같이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그를 찾아가 문병을 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World Honoured One Vimalakirti’s wisdom and eloquence are so unsurpassed that I dare not go to him to consult his illness.

[그 순간 마음이 환이 밝아지고, 마음이 텅비어져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병이 나신 이치를 꿰뚫어 본 뒤에 비로소 떳떳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래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이 몸을 받아서 이 세상에 태어 나신 것과 병이나신 것과 우유가 필요했던 이러한 사실들은 다 중생들을 건지기 위해서 보여주시는 방편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난 소리는) 아난존자가 마음을 비우니까 당연한 이치가 밝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如是五百大弟子(여시오백대제자) 各各向佛說其本緣(각각향불설기본연)

이와 같이 5백의 제자들은 각각 부처님께 그들이 전에 경험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In this way, each of the five hundred great disciples told the Buddha their prior experience, 

[本緣= 본래의 인연, 유마거사와 만났던 인연.]

 

稱述維摩詰所言(칭술유마힐소언) 皆曰(개왈) 不任詣彼問疾(불임예피문질)

유마힐이 했던 말을 稱=칭찬하여 모두 述=말하였으니,
“저희들은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and described what Vimalakirti had spoken to them, and they all said that they were not qualified to ask Vimalakirti of his illness.

◎羅睺羅(라후라)

밀행제일(密行第一) 나후라(羅喉羅 Rahula), 부처님께서 출가하시던 날 밤에 ​태어난 부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다. ‘라훌라’라는 이름은 아수라의 일종으로 그 아수라의 무리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자를 일컫는 말이다. 신화에 근거하여 ‘라훌라’라는 말은 월식으로 불리게 되고 결국에는 장애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하고 출가를 결심하여 돌아오던 ​길에 아들이 태어나 “라훌라(장애)가 생겼구나”라고 통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라후라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 카피라성에(고향) 갔을 때 사리불과 목건련을 스승으로 하여 15세에 출가, 최초의 사미승이 되어,​ 20세로 도구계를 접수하는 비구가 되었다. 그는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나 불언 실행으로 선행 및 수행을 완수해, 밀행 제일로(密行第一) 칭해졌지만, 석가불보다, 많은 비구사람들이라도 학을 좋아하는 것으로, 학습 제일이라고도 칭해졌다. 불화에는 부처님 좌측에 마하가섭, 우측에 아난존자가 배치됐는데, 라후라는 가섭이 ​위치한 자리에서 약간 위에 머리를 단아하게 깍은 젊은 비구의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佛告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는 라후라(Rhula)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The Buddha said to Rahula, Go to Vimalakirti and ask him about his illness. 

羅睺羅白佛言(라후라백불언) 世尊 我不堪任詣彼問疾(세존 아불감임에피문질)

라후라도 부처님께 말씀드렸으니,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Rahula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cannot undertake the visit there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昔時(억념석시)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Why? I recalled that in the past 

毘耶離諸長者子來詣我所(비야리제장자자내예아소) 稽首作禮(계수작례)

問我言(문아언) 

비야리성의 여러 장자의 아들들이 저를 찾아와 머리를 숙여 예배하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when the sons of the elders of Vaisali came to my abode, bowed to me, and said, 

唯 羅睺羅(유 라후라) 汝佛之子(여불지자) 捨轉輪王位(사전륜왕위)

出家爲道(출가위도) 其出家者(기출가자) 有何等利(유하등리)?

‘라후라여, 당신은 부처님의 아들로서 전륜왕의 지위를 버리고 깨달음을 위하여 출가하셨으니, 그 출가에는 어떠한 이익이 있습니까?’

O Rahula, you are the son of the Buddha, yet you cast aside the position of a wheel-turning king and became a monk to seek the Way. What are the benefits of becoming a monk? 

我卽如法爲說(아즉여법위설) 出家功德之利(출가공덕지리)

그래서 저는 여법하게 (불법대로) 출가의 공덕과 이익에 대해서 그들을 위해 말해주고 있었는데, 

I then spoke to them about the benefits of monastic merit, according to the Dharma. 

時維摩詰來謂我言(시유마힐내위아언) 唯 羅睺羅(유라후라)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라후라여, 

Then Vimalakirti came to me and said, O Rahula, 

不應說出家功德之利(불을설출가공덕지리) 所以者何(소이자하)

출가의 공덕이나 이익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you should not talk about the benefits and merits of being a monk. Why? 

無利無功德(무리무공덕) 是爲出家(시위출가)

아무런 이익도 공덕도 없는 것이 출가이기 때문이며,

Not seeking benefits and merits is the original meaning of monasticism. The one with no benefit and no merit is a monk.

[이익과 공덕을 먼저 계산해서 따져서 출가하는 것이 아니고, 출가는 이익도 없고 공덕도 없는 것이다]

 

有爲法者(유위법자) 可說有利有功德(가설유리유공덕)

유위법이라면 이익이나 공덕이 있다 할 수 있겠지만, 

It is only possible to state that conditioned Dharmas have benefits and merits. 

[함이 있는 법, 조작이 있는 법, 억지가 있는 법은 이익도 있고 공덕도 있다고 가히 말할 수 있거니와]      

[불교에는 일체법(一切法) 또는 제법(諸法)을 분류하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그 중에는 크게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이 있다. 이 분류 방식은 일체법을 크게 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과 더불어 불교 전반에서 널리 사용되는 분류법이다.
유위(有爲, 산: saṃskrta, 팔: savkhata, 영어: created, formed, conditioned)에서 위(爲)는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으로, 유위는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은 것,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또는 이렇게 하여 드러난 생성과 소멸의 세계, 즉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한다. 유위법(有爲法, 산: sajskrta-dharma, 영어: Karmic existence, conditioned existence)은 유위(有爲)의 세계, 즉, 여러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생성과 소멸의 현상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무위(無爲, 산: asaṃskrta, 팔: asavkhata, 영어: uncreated, unformed, unconditioned)는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 없는 것으로 유위의 대(對)가 되며, 조작되지 않은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세계, 즉 생멸변화를 떠난 절대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무위법(無爲法, 산: asaṃskrta-dharma, 영어: non-Karmic existence, unconditioned existence)은 무위의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리의 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원래 무위 혹은 무위법은 열반(涅槃)의 다른 명칭이었는데, 후대의 아비달마불교와 대승불교에 의해 3무위(三無爲), 6무위(六無爲), 9무위(九無爲) 등의 설이 생겼다.]

 

夫出家者(부출가자) 爲無爲法(위무위법)

출가는 爲無爲法=무위법을 구하는 것으로서 

When a monk pursues the Dharma of noncausality,

[출가라고 하는 것은 爲無爲法=무위법이다.

爲無爲法= 무위법, 함(환)이 없는 법, 조작이 없는 법, 진리에 입각한 법이다. 

우리는 전부 유위법의 상식 속에서 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함이 있습니다.]

 

無爲法中(무위법중) 無利無功德(무리무공덕)
무위법에는 이익이나 공덕이 없습니다.
he is within the realm without causation, and there is no benefit or merit. 

[이익이나 공덕을 따지면, 그것은 이미 유위법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되면 출가와는 관계가 없게 되는 것이다.

출가는 불법을 위해서 한 것이고, 불법이 무위법이고 무위법이 불법이니까 거기에 이익이나 공득이 있음을 따지면 아직도 불법의 진정한 경지에 들어서지 못한 것이다. 아직 불법이라는 것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羅睺羅 出家者(라후라 출가자) 無彼無此(무피무차) 亦無中閒(역무중간)

라후라여, 출가에는 彼= 너도 없고 此=나도 없고 또한 그 중간도 없으며, (출가에는 彼=깨달음도 없고 此=미혹도 없고 또한 그 중간도 없습니다.)

Rahula! When one is truly a monk, there is no other shore of nirvana, no birth and death, and no in-between. 

[피도 없고 차도 없다. 대게 출가라고 하는 것은 피차가 없는 것이고, 亦無中間= 또한 중간도 없는 것이니까 중도입니다.

피차(彼此)= 이쪽 저쪽, 나다 너다, 옳다 그르다, 선이다 악이다, 깨달음과 미혹 등이 아닌 중간이다. 즉 피차와 중간을 다 초월해서 떠난 진정한 중도가 출가이다.

우리는 중간가면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중간도 사실 어렵고, 우리의 행위는 대게 피 아니면 차입니다. 이쪽에 치우지지 않으면 저쪽에 치우지고, 이 사람 편들지 않으면 저 사람 편들고, 저 사람 편들지 않으면 이 사람 편들고, 이쪽으로 기울이지 않으면 저쪽으로 기울고 소양의 흑백논리에 영향을 받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이 중도냐 하면 중간이라는 것도 중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분명히 또한 중간도 없다고 했으니까 진정한 출가의 의미는 중도에 있고, 중도의 정신은 출가라는 의미입니다]

   

離六十二見(이육십이견) 處於涅槃(처어열반)

62종의 소견(견해)을 멀리 떠나 열반에 처하는 것이니 

They are free from the sixty-two viewpoints and are in the realm of nirvana. 

[육십이견= 잘못된 소견의 육십이를 말함이니 여러 경론의 해석이 제각기 다른 것입니다.

천태지자의 해석은 오온 가운데 색온(色蘊)이 곧 나이고, 우리 육신이 곧 나이다. 즉 육신을 떠나서 내가있다. 육신 가운데 내가 있다. 육신이 내 가운데 있다. 색온이 내 가운데 있다는 네 가지 견해에서 수, 상, 행, 식의 사온에도 역시 그와 같이 네 가지 소견을 적용하면 이십이 되고, 또 이것을 과거, 미래, 현재를 곱하면 육십이 되고, 근본의 단견(허무주의)과 상견(현실주의)의 두 가지 견해를 더하면 육십이견이 됩니다.

대품반야경의 한 예로, 이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소견 견해들이며, 그것은 편협한 견해고 중도적인 견해가 못되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서 떠나야 된다

열반이란, 번뇌가 다 사라진 자리, 온갖 희로애락과 피차와 중간이 사라진 자리이고, 무위이고, 무위법이고, 무위법은 곧 출가이고, 출가는 곧 피차와 중간을 떠난 것이고, 육십이견을 떠나서 번뇌가 사라진 뒤, 열반에 머무르는 그것이 출가이다  ]

 

[62견(六十二見)은 초기불교 경전 등에서 외도(外道)의 모든 견해 또는 사상을 62종으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62가지의 모든 (외도의) 견해'라는 뜻에서 62제견(六十二諸見) 또는 '62가지의 (외도의) 견해와 내용'이라는 뜻에서 62견취(六十二見趣)라고도 불리며, 간단히 줄여서 62(六十二)라고도 한다.

본겁본견(本劫本見) - 18견 = 18제악견취(十八諸惡見趣), 전제분별견(前際分別見), 과거에 관한 18종의 사견.

말겁말견(末劫末見) - 44견 = 44제악견취(四十四諸惡見趣), 후제분별견(後際分別見), 미래에 관한 44종의 사견]

 

智者所受(지자소수) 聖所行處(성소행처) 降伏衆魔(항복중마)

지혜로운 이가 받아 들이는 바이며, 성인이 닦는 길인 것이며, 온갖 마군을 항복시켜 

It is the path of monasticism that all sages and wise people hold and practice. Subduing all demons, 

[출가란 것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바이고 성인들이 해야 할 곳이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사람=성인이야말로 진정한 출가의 의미를 제대로 새기면서 산다. 출가의 정신을 제대로 누리면서 산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출가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몸이 집을 떠나서 산중에 들어갔다고 해서 출가가 아닙니다. 글자대로는 집을 벗어났다라는 말인데 은 편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옳다 그러다, 좋다 나쁘다는 등의 편견은 진정한 출가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度五道(도오도) 淨五眼(정오안) 得五力(득오력) 立五根(입오근)

5도=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를 넘어서 5眼=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을 맑게 하고, 5력을 얻었고, 5근을 바르게 세워 

seeking to deliver all sentient beings in the five realms, purifying the five eyes, acquiring the five powers, and establishing the five capacities. 

[집을 떠났다 안 떠났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 집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관계없이 이러한 중도적인 정신, 무위의 정신에서 노니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출가라는 것입니다

降伏衆魔= 온갖 유혹과 집착과 끄달림을 전부 항복 받아서 극복하고, 거기서 다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五道=육도 가운데의 다섯 개,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를 전부 度=제도한다.

五力과 五根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오력을 얻고 오근을 세운다.
五根은= 三보, 三체를 믿는 信根, 꾸준히 착한 법을 닦는 淸進根, 옳은 법을 생각 하는 念根, 마음을 한 곳에 머물러 산란하지 않는 定根, 진리를 생각하는 慧根, 이러한 다섯 가지 온갖 착한 법을 내는 근본=根이 커져서, 
五力=다섯 가지 장애되는 것을 대치하는 힘을 말한다. 그래서 믿는 信力, 전진하는 淸進力, 생각하고 기억하는 念力, 어떠한 상황에서도 동요하거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 또는 선정행 定力, 판단할 수 있는 지혜의 慧力이 생기는 것으로, 오력을 얻고 오근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

 

[여래(如來)의 오안(五眼)= 사물과 이치를 보는 부처님이 가지신 다섯 가지의 눈, 모든 법의 사리(事理)를 관조하는 부처님이 갖추신 다섯 가지 눈을 말한다. 
'금강경'에서 여래의 오안(五眼)을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이라 했으며, 중생도 수행 정진해서 여래와 같은 마음이 되면 오안을 구족하게 된다고 했다.

육조 혜능(慧能) 대사는 '금강경오가해'에서 오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오안(五眼)이 있지만 어리석음에 덮여 스스로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어리석음을 제거하면 오안이 오롯이 밝아 생각 생각에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
①육안(肉眼) :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는 것.
②천안(天眼) : 일체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음을 보고 애틋한 마음(연민심)을 일으키는 것.
③혜안(慧眼) :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
④법안(法眼) : 법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
⑤불안(佛眼) : 미세한 번뇌까지 영원히 없어져 오롯하게 밝아 모든 것을 빠짐없이 두루 비추는 것.-아미산]

不惱於彼(불뇌어피) 離衆雜惡(이중잡악)

그 어떤 것으로부터 不惱=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온갖 잡다한 악을 떠났으며, 

Free from all worldly discontent, free from all kinds of impure and evil thoughts, 

[惱는 괴롭힌다. 복잡하게 한다. 시끄럽게 한다. 귀찮게 한다는 등의 의미입니다. 옛날 말로' 뇌롭다'인데, 뇌롭게 하지말라는 말을 절에서는 아직 쓰느데, 잘 못 알아듣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안 끼치고, 여러 가지 잡학= 뒤섞이고 나쁜 것들을 전부 떠나는 것이 출가이지, 반드시 집을 떠나는 것이 출가라고 말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摧諸外道(최제외도) 超越假名(초월가명) 摧 꺾을 최, 越 넘을 월, 

모든 외도들을 꺾었으며, 가명에 집착하지 않으며, 

able to dispel the external paths, and transcend false names. 

[假名= 헛된 이름. 거짓이름 허상, 허상으로부터 초월한다.

우리는 헛된 이름 속에 많이 놀아나지만, 출가란 어디에 살든지 상관없는 것으로, 많은 식구들과 더불어 살고, 복잡한 세상사에 어울려 살더라도 超越假名이라=헛된 이름, 거짓이름, 거짓모습, 허상으로부터 초월, 떠나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假名=가설(假說)․가(假)․시설(施說)이라고도 한다. 사물을 승의제(勝義諦)의 입장에서 보면 공(空)이지만, 세속제(世俗諦)의 입장에서 보면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가유(假有)이다. 이처럼 방편으로 이름 붙여진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出淤泥(출어니) 無繫著(무계착) 無我所(무아소) 無所受(무소수)

애욕의 淤泥=진흙탕을 벗어나 온갖 속박을 벗어났으며, 내 것이라는 집착이 없고, 집착하는 마음=所受도 없고, 

淤 진흙 어, 泥 진흙 니, 繫 맬 계, 著 드러날 저, 저축할 저, 붙일 착,擾 어지러울 요, 

Out of the mud, no ties of attachment. Without the sense of subject and object, without being suject to things, 

[淤泥=진흙이라는 것은 여기저기 푹 푹 빠져 들게 하는 것으로, 온갖 인연의 수렁, 정의 수렁, 사랑의 수렁, 감정의 수렁 등에 연결되어서 줄줄이 다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出淤泥=수렁으로부터 벗어난다.

繫(계)는 죄수를 오라줄로 묶고 손과 발에 수갑을 채우고 목에 칼 세우는 것을 繫(계)라고 합니다. 그렇게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옭고 묶는 것이 없어야 출가이지, 산속에 혼자 들어가서 풀 뜯어 먹고 솔잎 먹고 사는 것만이 출가라고 할 수 없다.

그러한 온갖 현상들의 묶임으로부터 벗어나려면 我所= 내 것이 없어야 되고, 내 것이 없으려면 내 것을 만드는 과정이 없어야 되는데 내 것을 만드는 것은 所受=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들고 좋아서 쓰윽 받아들일 때에는 힘 들지 않고, 별로 짐도 되지 않아서 그냥 막 받아들여놓고, 지나 보니까 그것이 내 것이고, 나의 소유라는 것으로써 오라줄이 되어 이렇게 저렇게 연결이 되고, 또 내 것이라는 집착이 연결이 되어서 繫着= 옭아 메여서 꼼짝달짝 못 하게 되는데, 그렇게 한 사람이 매여 있으면, 그 한 사람이 빠지면 그 밧줄에 같이 매여 있는 다른 사람도 같이 빠지게 되니까 그것이 淤泥= 수렁이고, 수렁에 빠지는 줄 알고도 끊을 수 없어서 못 끊는 것이= 繫着이라. 그 관계가 묘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無擾亂(무요란) 內懷喜(내회희) 護彼意(호피의) 隨禪定(수선정) 懷 품을 회

마음의 혼란이 없고, 안으로 늘 기쁨을 간직하고 중생들의 마음을 지켜 주며, 선정을 따르며 

without disturbance. Full of inner joy, and intending to protect others. Conforms with meditation,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마음에 요란= 흔들고 어지럽게 하는 것이 없어야 된다. 무요란까지는 부정적인 것들로써 이러한 것들이 없어야 좋다는 것이고, 內懷喜(내회희)부터는 출가의 긍정적인 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內懷僖= 기쁨을 가득히 품고 있다. 항상 긍정적으로 보고 기쁘게 생각해야 됩니다. 세상이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세상을 대하는 생각, 견해, 안목이 달라져야 됩니다. 사람도 잘 안 바뀌니까 사람 바뀌리라는 기대도 하지 마시고 내가 그 사람을 좋게 보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부처님도 세상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을 좋게 볼 수 있게 네 마음을 잘 다스려라. 극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극락으로 보는 것이며, 극락으로 보려면 지혜가 있어야 된다. 지혜가 있으면 극락으로 보이지만 지혜가 없으면 지옥으로 보인다. 그저 내가 보는 그 안목, 그 소견, 그 지혜가 성인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꾸 변하고 발전하고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형체가 없는 것이라서 바꾸는 것이 차라리 쉽습니다. 
행복이나 불행이라고 하는 것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우리가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으로, 우리가 행복감을 느낄 때 그때 비로소 행복이 있는 것이고, 불행도 불행을 느낄 때 그때 비로소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우리가 마음으로 느낄 때에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행복과 불행의 주체가 마음이니까 마음이 자꾸 행복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離衆過(이중과) 若能如是(약능여시) 是眞出家(시진출가)

온갖 잘못을 다 떠나 버립니다. 만약 능히 이렇게 한다면 이것이 참다운 출가인 것입니다.

freedom from all faults. It one can do these things, one is a true monk. 

於是維摩詰語諸長者子(어시유마힐어장자자)

이 때 유마힐은 장자의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Then Vimalakirti said to the sons of the elders, 

汝等於正法中(여등어정법중) 宜共出家(의공출가) 所以者何(소이자하)

佛世難値(불세난치)

그대들은 정법을 받아들여 함께 출가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기회를 만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You should become monks together during this period of the True Dharma. Why? It is rare to come across a time when the Buddha is living in the world. 

 

諸長者子言(장자자언) 居士 我聞佛言(거사 아문불언) 父母不聽(부모불청)

不得出家(부득출가)

장자의 아들들은 말하였습니다.
‘거사님, 저희들이 듣기에는 부모님의 허락이 없으면출가할 수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만…….’
The sons of the elders said, Householder, we have heard the Buddha say one cannot become a monk without the parents’ permission. 

[父母不聽 허락할 聽으로, 부모가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할 수 없다고 부처님이 말씀 합니다. 그런데 거사님이 출가하라고 해서 어떻게 우리가 출가 할 수 있겠습니까? 즉 유마거사가 설명한 출가의 의미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居士(거사)=세간에 머물며 가족을 거느리고 사생활을 하면서도 남다른 수행과 정진으로 출가자들 못지않게 탁월한 지혜를 득한 이들이 많은 분들을 일러 거사(居士) 칭한다.
산스크리트어는 그라파티(grhapati)이며, 가라월(迦羅越, 伽羅越)로 음역하기도 했으며, 중국에서는 거사 외에 장자(長者), 또는 가주(家主), 가장(家長)으로도 한역했다. 
우리나라에선 처사(處士)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용어이다. ‘처사(處士)’란 원칙적으로 조선시대 유학자로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거해 생활하는 선비를 칭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불교의 거사에도 혼용해서 쓴 것인데, 합당하지 많은 말이다. 
거사(居士)란 말은 부처님 당시 재가 남자신도로 덕이 높고 수행을 원만히 성취한 유마힐(維摩詰) 거사 이름에서 유래한다.즉, 거사란 출가하지 않는 재가 남자신도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삼귀(三歸)⋅오계(五戒)를 지키며 불교 신행(信行)을 하는 덕이 높고 수행을 원만히 성취한 사람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용어들이 평가절하 되어서, 신앙심이야 어떻든 여자신도를 보통 ‘보살’이라 칭하고, 남자신도를 ‘거사’라 부른다. 
초기불교에서 승가(僧伽)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 사부대중으로 구성했으며, 우바새와 우바이는 비구, 비구니를 믿고 그들을 외호(外護)하는 사람들로서 우바새가 거사에 해당한다. 또 다른 말로는 청신사(淸信士)라고도 했다. 
그 뒤 대승불교가 발전하면서 출가하지 않고 속가에 있으면서 불도에 정진하는 수행자, 즉, 세속 생활에 종사하면서도 수행에 힘쓰는 재가 남자불자를 일컫는 말이 됐다.
이들은 승단의 외호와 함께, 비록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정진하는 남자 신도들로서 이들은 나름으로 불교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중국 수(隋)나라시대의 정영사(浄影寺) 혜원(慧遠, 523~592)의 <유마의기(維摩義記)>에 ‘거사’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재산을 많이 쌓은 거재지사(居財之士)로 승가를 외호하는 자들을 말하며, 다른 하나는 재가생활을 하면서 불도에 전념하는 재가수행자를 말한다고 정의했다.
전통적인 인도의 4성 계급에 따르면, 평민계층에 해당하는 "바이샤"에 속하면서 재력이 있는 자산가들로 상공업이나 무역에 종사하는 부호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장자 또는 거사라고 했다. 부처님께 기원정사를 지어 바친 수달타(sudatta, 須達陀) 같은 사람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리고 초기 교단 형성하던 시기인 BC 5~6세기에는 이들 바이샤의 사회진출이 두드러졌는데, 이들이 불교에 매우 호의적이었으며, 이들의 지원으로 불교가 초창기에 크게 신장될 수 있었다. 
역사상 유명한 거사로 세계 3대 거사로 일컬어지는 사람으로는,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인 인도 유마힐(維摩詰) 거사, 중국의 방(龐) 거사, 신라의 부설(浮雪) 거사 등이 있다.- 아미산]

 

維摩詰言(유마힐언) 然 汝等便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연여등편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是卽出家(시즉출가) 是卽具足(시즉구족)

그러자 유마힐이 말하였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그대들이 지금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다면, 그것이 곧 출가이며, 구족입니다.
Vimalakirti replied, That is so. But once you have developed the intention to seek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it is the same as if you have become a monk and taken the full monastic vow. 

[유마거사의 법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보리심입니다.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보리심을 내는 것이 출가이다= 是卽具足= 곧 이것이 구족계를 받는 것이다. 출가를 하면 바로 구족계를 받는데 보리심을 발하면 그것이 출가이고 보리심 발하면 그것이 바로 구족계를 받는 것이다]

 [구족(具足)= 교단이 정하는 완전한 계율을 받은 것.]

 

爾時三十二長者子(이시삼십이장자자)

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개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그 때 서른두 명의 장자의 아들들은 한결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Then all the thirty-two sons of the elders set their minds to attain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For this reason, I cannot undertake the visit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優波離

지계제일(持戒第一) 우바리(優波離 Upali) 우발리(優跋利), 우파리(優波梨) 또는 근취(近取), 근집(近執)이라 번역한다. 인도의 카스트 중 가장 천한 노예 계급인 수드라 출신으로, 석가족의 이발사였다. 아난과 난타, 아나율 등이 출가할 때 머리를 깎아주러 갔다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의례에 따라 먼저 출가한 사람을 차례로 존경해 예배하도록 명해, 제왕자들은 슈드라 출신인 우파리에게도 예배한 것을 본 석가불은 '석가족의 고만한 마음을 잘 깨었다'라고 찬탄했다. 계율을 잘 지켜 지계제일(持戒第一)이라고 하며, 부처님 열반 후 왕사성 밖 칠엽굴에서 제1회 불전 결집을 할 때 계율에 대한 모든 사항을 암송하여 율장 성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佛告優波離(불고우바리)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는 다시 우바리(Upli)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하라.

The Buddha said to Upali, Go to Vimalakirti and ask him about his illness. 


優波離白佛言(우바리백불언) 世尊 我不堪任詣彼問疾(세존 아불감임예피문질)

우바리도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저도 그에게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Upali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O am afraid I cannot bear the responsibility of asking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昔者(억념석자) 有二比丘犯律行(유이비구범율행)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두 사람의 비구가 계율을 범하고 

How can this be? I remember that in the past, two monks who were ashamed of their transgressions 

 

以爲恥(이위치) 不敢問佛(불감문불) 來問我言(내문아언)

부끄러움에 못 이겨 감히 부처님께는 여쭙지 못하고 저를 찾아와 말하였습니다.

恥 부끄러워할 치, 敢 감히 감, 

and did not dare to ask the Buddha came to me and said, 

 

唯 優波離(유우바리) 我等犯律(아등범율) 誠以爲恥(성이위치)

우바리 존자여, 저희들은 계율을 범하였습니다. 진심으로 부끄럽게 생각하여 

O Upali, we have broken the precepts, but we are too ashamed to have the courage 

 

不敢問佛(불감문불) 願解疑悔(원해의회) 得免斯咎(득면사구)

감히 부처님께 나아가 여쭙지 못하오니, 바라옵건대 부디 저희들의 疑=의심과 悔=뉘우침을 풀어 주시어, 그리하여 斯咎=허물을 면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悔 뉘우칠 회, 斯 이 사, 천할 시, 咎 허물 구, 성 고, 큰 북 고

to ask the Buddha about our transgressions. So please help us resolve our doubts and remorse. 


我卽爲其如法解說(아즉위기여법해설) 時維摩詰來謂我言(시유마힐내위아언)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如法=법대로 설명을 할 때,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I then explained to them according to the precepts. Then Vimalakirti came to me and said, 

[여법해설(如法解說), 법대로, 계율에 명시된 대로,  곧이 곧대로 여법하게 그들을 위해서 이야기 해줬습니다.  

이 구절은 여러 곳에서 많이 인용되는 내용으로, 영가 '증도가'에서 ‘유이비구범음살(有二比丘犯淫殺)에 파리형광증죄결(波離螢光增罪結)하고 유마대사돈제의(維摩大士頓除疑)가 유여혁일소상설(猶如赫日銷霜雪)이라.’→두 비구가 음살, 하나는 음행을 범하고 하나는 살인을 범했는데, 우바리 존자는 반딧불과 같은 빛으로 죄의 매듭만 더 견고하게 만들어 줬으나, 유마대사돈제의(維摩大士頓除疑)라 유마대사는 몰록 의심을 제하게 해주어서 유여혁일소상설(猶如日銷霜雪)이라, 마치 뜨거운 태양이 서리나 이슬을 순식간에 녹여버리는 것과 같이 시원하게 만들어 줬다하는 찬사가 있습니다.

옛날 주해서(註)에 나와 있기를, 두 비구가 난야의 토굴에서 공부하면서 살았는데 한 사람이 볼 일 보러 나한 후 다른 한 사람은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도녀부정이라 해서, 여자가 나무하러 왔다가 길 옆에서 잠자고 있는 비구승을 훔쳤다고 했습니다. 그때 마침 도반 비구가 난야로 돌아와서 그것을 보고는 그 여자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때려줄려고 쫓아가자, 그 여자가 피해서 정신없이 도망 가다가 타갱이사라,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게 되어서, 결국은 살인이 된것입니다. 두 사람이 “공부하려고 이렇게 토굴에 와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해서, 부처님한테는 차마 갈수가 없으니까, 지계제일 우바리 존자에게 상의를 하자고 해서 우바리에게 간 것입니다.

우바리 존자는 소견이 꼭 막혀서 원칙대로 “너희가 그런 범행을 했으면, 우리와 같이 공부 못한다. 너희는 완전히 제도불능이고 참회도 안 통한다.”는 식으로 몰아붙이니까, 증죄결(增罪結)=죄의 매듭만 더 견고하게 더 만들어 준 격이 된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타락의 길로 계속 가도록 하는 입장 밖에 안됐다는 것입니다.]

 

唯 優波離(유우바리) 無重增此二比丘罪(무중증차이비구죄)

‘우바리여, 이 두  사람의 비구에게 죄를 無重增=더욱 무겁게 키우지 마십시오. 

O Upali! Do not add to the transgressions of these two monks! 

 

當直除滅(당직제멸) 勿擾其心(물요기심) 所以者何(소이자하)

곧장 그 除滅=죄를 멸하도록 해서 두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게 하지 마십시오. 왜냐 하면 

勿 말 물, 擾 어지러울 요, 시끄러울 요,

You should directly extinguish their transgressions and not additionally burden their minds. Why is this so? 

[그 사람들의 마음을 근심하지 않도록, 흔들리지 않도록 동요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라.]

 

彼罪性不在內(피죄성불재내) 不在外(불재외) 不在中閒(불재중간)

저 죄라는 본성은 (그들 자신의) 안에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고, 또 그 중간에도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Their nature for committing offenses is neither within, outside, nor in the middle. 

[피죄성(彼罪性)이 부재내(不在內)하고 부재외(不在外)하며 부재중간(不在中間)이니. →많은 조사스님들이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죄라고 하지만, 죄의 성품이라는 것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다.

'내외중간(內外中閒)'에서  내(內)는 근(根), 외(外)는 경계(境界), 중간(中閒)은 식(識)으로, 근경식(根境識)=육근 육경 육식 어디에도 죄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如佛所說(여불소설) 心垢故衆生垢(심구고중생구) 心淨故衆生淨(심정고중생정)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과 같이 마음이 더러우므로 중생도 더럽고, 마음이 깨끗하므로 중생이 깨끗해지는 것이며,

As the Buddha has spoken, sentient beings will taint with defilement when their minds taint with defilement. If the mind is pure, the sentient beings will be pure. 

 

心亦不在內(심역불재내) 不在外(불재외) 不在中閒(불재중간)

또 이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닌 것처럼

Neither is the mind within, outside, or in the middle. 

 

如其心然(여기심연) 罪垢亦然(죄구역연) 諸法亦然(제법역연) 不出於如(불출어여)

마음이 그러하듯이 죄 또한 그와 같고, 제법도 그와 같으며, 사물의 於如=있는 그대로의 모습(진여, 如如, tathat, 마음의 근본 자리)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As the mind is, so are transgression and defilement, and so are all the Dharmas, which are not outside of suchness. 

[여기심연(如其心然)하야 그 마음이 그러한 것과 같이 죄구역연(罪垢亦然)이다. 죄의 때도 또한 그러하며 제법(諸法)도 그러하다. 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법 또한 그렇다. 마음도 그렇고, 죄도 그렇고, 모든 법이 역시 그러해서,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고, 중간에도 없다. 지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저 잠깐 인연이 모여서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사실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기본적으로 외우는 '천수경'에도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이것은 선구(禪句)입니다.  그 이상의 어떤 도리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피죄성(彼罪性)이 부재내(不在內)하고 부재외(不在外)하며 부재중간(不在中間)’을 '천수경'에서는 줄여서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라’ 했습니다. 죄는 부재내, 부재외 부재중간으로 자성이 없다. 종심기(從心起)= 마음으로부터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이 때 묻으면 중생이 때 묻고,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이 청정하다고 하지만, 심부재내 심부재외, 말인즉슨 그렇지만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오, 밖에 있는 것도 아니오, 또한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는 마음 위에 건립 된것이니까 마음이 뿌리이고 죄는 가지인데, 그 뿌리가 없어지면 가지가 있을 까닭이 없으니까, 마음이 만약에 소멸하면 죄도 또한 소멸한다.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죄도 없고 그래서 마음도 없다. 죄도 찾아보니까 없고, 마음도 찾아보니까 없으니까 둘 다 공한 것입니다.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라, 그렇게 이치를 아는 것이 진짜 참회이다.

기본적인 경전인 '천수경'과 한 마디도 틀리지 않는 이치인데 여기에서는 부연해서 마음도 그렇고, 죄도 그렇고 또한 제법까지도 그렇다고 했습니다.  

2조 혜가스님도 달마스님에게 마음이 불안하다고 하자, 달마스님이 “그러면 그 불안한 마음을 꺼내 놔라. 내가 고쳐주마.”

그런데 찾아보니까 불안한 것도 없고, 마음도 찾을 길이 없으니까 한참 끙끙대다가 “찾아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하니까 “그래? 니가 찾을 길이 없다면 나는 니한테 할 일 다 했다. 다 고쳐줬다. 찾아도 찾을 길이 없다면, 고칠 것이 아무 것도 없는것이고, 고칠 것이 없으면 불안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것을 듣는 그 순간 완전히 깨달아 버린 것입니다.

'유마경'의 이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如優波離(여우바리) 以心相得解脫時(이심상득해탈시) 寧有垢不(영유구부)?

우바리여, 마음의 心相=본래 모습으로 해탈을 얻었을 때, 그 때에도 (그 마음은) 더러움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If you, Upali, attained liberation by viewing the reality of the mind, would there be any defilement? 

[예컨대 우바리 존자가 마음으로써 해탈을 얻었을 때 어찌 거기에 때가 있던가 없던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我言不也(아언불야) 維摩詰言(유마힐언)

저는 대답하기를, ‘없습니다.’라고 하자 유마힐이 말하기를,
No, I said. Vimalakirti said, 

一切衆生心相無垢(일체중생심상무구) 亦復如是(역부여시)

‘일체 중생의 마음의 본래의 모습의 無垢=더럽지 않음도 이와 같습니다. 

The same is true of all sentient beings, whose minds are free from impurities. 

[마음의 근본자리에는 아무 때가 없고, 죄도 없고, 업도 없는 또한 똑 같다. 그 자리가 부처님과 동등한 자리이고 또 유마힐 하과도 동등한 자리입니다]

 

唯優波離(유우바이) 妄想是垢(망상시구) 無妄想是淨(무망상시정)

우바리여, 망상이 垢=더러움(때)이요, 망상 없는 것이 깨끗한 것이며,

O Upali, thoughts of delusion are defilement, but it is purity where there is no delusive thought. 

[일체중생(一切衆生)이 심상무구(心相無垢)인데, 망상(妄想)=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일으키는 그것이 때가 되는 것이다.]

 

顚倒是垢(전도시구) 無顚倒是淨(무전도시정)

顚倒=그릇된 생각(뒤 바뀐 생각)이 더러운 것이지만 그릇된 생각이 없으면 곧 깨끗한 것이며,

Deranged thinking is defilement and purity when there is no deranged thinking. 

 

取我是垢(취아시구) 不取我是淨(불취아시정)

取我=나를 취하는 것이 더러운 것이지만, 나를 취하지 않으면 깨끗한 것이며

To cling onto the self is defilement, and without grasping onto the self is purity. 

[取我=나를, 아상을 취하는 것이 때가 되고, 나를 취하지 않는 것,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 정(淨)이 된다.]

[취아(取我)= tmasamropa로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

 

優波離(우바이) 一切法生滅不住(일체법생멸불주) 如幻如電(여환여전)

우바리여, 일체법이 生滅=생하고 멸하여 不住=머무르지 않는 것이 幻=허깨비나 電=번갯불과 같으며, 

Upali, all Dharmas arise and perish without a single moment of abiding, like a dream, like lightning. 

[모든 법이 생하고 멸하고, 계속 생멸 생멸하는 것이 不住=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 마치 환(幻)과 같고 전(電)= 번갯불이 번쩍 하고 사라지듯이 그렇게 빨리 변해가는 것과 같다.]

 

諸法不相待(제법불상대) 乃至一念不住(내지일념불주)

제법은 不相待=서로 기다리지 않으며,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며,

The Dharmas are not interdependent, even for the instant of a single thought. 

[불상대(不相待)= 모든 법이 서로 의지하지 아니하며, 서로 기다리지 않으며]

 

諸法皆妄見(제법개망견) 如夢 如焰(여몽여염) 如水中月(여수중월)

如鏡中像(여경중상) 以妄想生(이망상생)

제법은 모두 妄見=망령된 소견이며, 夢=꿈과같고, 焰=아지랑이 같고, 물 위에 뜬 달과 같고, 거울 속에 비친 모습과 같이 (모든 현상이) 망상으로부터 생긴 것입니다. 

All Dharmas are delusions, like mirages, like flames, like the moon in water, like the image in the mirror, and arise from delusional thinking. 

 

其知此者(기지차자) 是名奉律(시명봉율) 其知此者(기지차자) 是名善解(시명선해)

이와 같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라 이름할 수 있으며, 이 같은 도리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善解=잘 깨달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Anyone who truly understands this truth is a practitioner of the precepts. The one who know this is a person who has good understanding. 

[이치를 이렇게 꿰뚫어 아는 사람, 모든 현상의 근본 이치를 꿰뚫어 아는 사람이 시명봉율(是名奉律)=계율을 잘 받드는 사람이다]


於是二比丘言(어시이비구언) 上智哉(상지재)

그 때에 두 사람의 비구가 말하였습니다.‘참으로 높은 지혜를 가진 분이시군요. 

Then the two monks said, Such supreme wisdom! 

 

是優波離所不能及(시우바리소불능급) 持律之上而不能說(지율지상이불능설)

이는 우바리 존자가 감히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아무리 계율을 잘 지킨다 해도 이렇게 설하지는 못합니다.
It is beyond the reach of even Upali, who keeps the precepts like no one else but could not speak these words. 

 

我卽答言(아즉답언) 自捨如來(자사여래) 未有聲聞及菩薩(미유성문급보살)

저도 대답하였습니다. ‘여래를 제외하고는 어떤 성문이나 보살도 

I replied, Except for the Tathagata, no sravaka or bodhisattva can organise such eloquent and delightful discourses. 

[여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이처럼 변재가 뛰어나고 말씀을 잘 하는 이가 없다. 즉 세속의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能制其樂說之辯(능제기낙설지변) 其智慧明達(기지혜명달) 爲若此也(위약차야)!

이 유마힐의 걸림없는 樂說之辯=훌륭한 말솜씨를 따를 자가 없으며, 그 지혜가 밝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함이 이와 같습니다.
Such is the clarity and profoundness of his wisdom! 

 

時二比丘疑悔卽除(시이비구의회즉제)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作是願言(작시원언) 令一切衆生皆得是辯(영일체중새개득시변)

그 때 두 사람의 비구는 의심과 죄책감에서 벗어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다고 발원하고, 일체 중생이 모두 이러한 말솜씨를 얻을 수 있게 하리라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Then the two monks, having removed their doubts and repentance, developed the intention to attain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and made this vow: May all sentient beings attain such eloquence.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Therefore, I am not qualified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유마거사의 입을 빌어서 불교의 중심이 되고 핵심이 되는 이치들만 뽑아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阿那律

천안제일(天眼第一) 아나율(阿那律 Aninuddha)​ 산스크리트 명은 아니룻다(Aniruddha)의 (niruddha)란 멸하다, 떠나다, 끊어지다, 없어지다라는 동사(rudh)의 과거분사형으로 거기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아(a)가 붙어 무멸(無滅), 불멸(不滅) 등으로 의역되며, 아니룻다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형용사로서 장애가 없는, 내지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뜻에서 여의(如意) 이장(離障) 선의(善意) 등으로 의역된다. 아니루타(阿尼樓陀) 또는 아우룻다라고 하며, 정반왕의 동생 감로반왕의 아들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사촌이다. 석가모니의 앞에서 졸다가 꾸지람을 듣고 잠들지 않을 것을 맹세한 뒤 밤낮으로 자지 않고 수도 정진하다가 그만 눈이 멀어서, 육신의 눈은 잃었지만 참 지혜의 눈인 천안통(天眼通)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육안으로 사물을 식별할 수 없었지만 직감으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꿰뚫어보게 된 것이다. 미세한 사물까지 멀리 그리고 널리 볼 수 있으며, 중생들의 미래에 생사하는 일도 알아내는 천안(天眼)을 얻은 것이다. ​바람직한 수행자의 모범을 제시한 부처님 제자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 하나를 뽑으라면 주저 없이 아나율 존자를 들어야 할 것이다. 


佛告阿那律(불고아나율) 汝行詣維摩詰問疾(여해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는 아나율(Aniruddha)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라.”

The Buddha said to Anuruddha, Go to Vimalakirti and inquire about his illness.  

阿那律白佛言(아나율백불언) 世尊 我不堪任詣彼問疾(세존 아불감임예피문질)

아나율이 부처님께 말씀드렸으니,
세존이시여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없습니다

Anuruddha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cannot go to Vimalakirti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我昔於一處經行(억념아석어일체경행)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예전에 제가 어느 곳을 경행하고 있었는데

Why? I remembered a time in the past when I was doing walking meditation, 

 

[경행(經行), 경(經)자를 쓰는 뜻은, 베를 짤 때 위(緯)경(經), 씨줄과 날줄이 반복되는 것과 같이 일정한 장소를 계속 반복해서 오고간다는 뜻에서 경행이라고 하며, 그렇게 익숙한 장소를 반복해서 왔다갔다 함으로써 주변으로 인해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는다. 옛날 법당은 부처님이 거의 중앙에 위치해서, 부처님을 중심으로 경행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경행(經行), ‘가구경행(街衢經行)’이라고도 하며, 고려 초기인 1046년(정종 12) 이 행사가 처음으로 행하여졌으며, 그 뒤로는 연중행사로 되었다. 경행은 걸으면서 경전을 독송하는 의식으로, 큰 법회가 있을 때 법사를 앞세우고 경문을 외면서 부처님의 우측으로부터 여러 번 계속해서 도는, 전통적인 사원 내의 의식이었다.
당나라 정토교의 대사 선도(善導)의 경행설명에서는 전경(轉經)과 행도(行道)를 중심으로 한 의식으로, 경행의 앞뒤로는 봉청(奉淸)·발원·참회·주원(呪願) 등의 의식이 행하여진다고 하여, 경행의 기복적인 성격을 말하고 있다.
고려 정종 때 처음으로 행하여졌던 경행의식은 그 때 대궐에서 시중이었던 최제안(崔齊顔)이 왕을 대신하여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공양한 뒤, 대중을 세 패로 나누어서 개경 시내를 돌았다. 그때 각 무리마다 『인왕경』을 모셔놓은 가마를 행렬의 맨 앞에 메고 돌았는데, 가마는 여러 가지 예쁜 빛깔로 단장을 화려하게 하였고, 그 뒤에는 법복의 장엄한 승려들이 걸어가면서 '인왕경을 외었고, 승려의 행렬 뒤에는 관복을 입은 관원들이 따랐다.]

 

[경행(經行)이란 일정한 거리를 왕복하며 걷는 것으로, 약 30보 정도 되는 거리를 왕복하며 걸으면서 위빠사나 관찰수행한다고 하여 행선(行禪)이라고도 한다. 선종에서는 포행(匍行.布行)이라고도 부른다. 포행이라고 할 때는 마당을 돌면서 하는 경우도 있고, 산길을 멀리 걷는 것도 포행이라고 하기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초저녁(初夜)과 새벽(後夜)에는 잠을 자지 말고 좌선을 하거나, 경행을 하면서 오장애(五蓋)를 없애라고 가르치셨다. 초저녁(初夜)은 오후 6시 ~ 10시이고, 한밤중(中夜)은 10시 ~ 새벽 2시이며, 새벽(後夜)은 2시 ~ 6시이다. 즉, 잠을 3 ~ 4시간만 자고 수행하라는 것이다. 
잠을 잘 때는 오른쪽으로 누워 무릎을 구부리고 발을 포개고 잔다. 부처님은 항상 이렇게 주무셨다. 경에는 똑바로 위를 보고 눕는 것은 아귀의 자세이고, 왼쪽으로 눕는 것은 감각적 욕망의 자세이며, 오른쪽으로 눕는 것은 사자왕의 자세라고 한다. -지견청정]

時有梵王(시유범왕) 名曰嚴淨(명왈엄정) 與萬梵俱(여만법구)

  엄정이라는 범왕 1만을 헤아리는 범천 함께 

when a Brahma king, whose name was Sovereign Purity, along with then thousand other celestial beings of Brahma, 

放淨光明(방정광명) 來詣我所(내예아소) 稽首作禮問我言(계수작에문아언)

밝은 빛을 발하면서 제가 있는 곳으로 와서, 그들은 저의 발에 머리를 대고 예배한 다음 저에게 물었습니다.
their bodies all shone with pure light proceeding to where I was. Bowing down and asking me, 

[비록 하늘에서 왔지만 부처님 제자에게는 예를 드리는 것이 되겠습니다.]

 

幾何阿那律天眼所見(기하아나율천안소견) 我卽答言(아즉답언)

아나율이여그대는 천안제일이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수가 있습니까?’
저는  대답하였습니다.
Anuruddha, how far can you see with your heavenly eyes? I answered, 

 

仁者(인자) 吾見此釋迦牟尼佛土三千大千世界(오견차석가모니불토삼천대천세계)

如觀掌中菴摩勒果(여관장중암마륵과)

대범천이여저는  석가모니부처님의 불국토를 포함한 삼천대천세계 손바닥에 있는 암마륵(Amra) 열매를 보듯이 볼 수 있습니다.’

掌 손바닥 장, 菴 암자 암, 摩 갈 마, 勒 굴레 륵

O Benevolent One, I see the trichiliocosm in the land of Shakyamuni Buddha, and it s clarity is a clear as looking at a myrobalan fruit in the palm of my hand. 

 

時維摩詰來謂我言(시유마힐내위아언) 唯 阿那律(유아나율)

  유마힐이 저에게로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나율이여

Then Vimalakirti came to me and said, Well, Anuruddha, 

 

天眼所見(천안소견) 爲作相耶(위작상야)? 無作相耶(무작상야)?

천안으로 보는 것은 作相=작용, 보겠다는 생각에서 보는 것입니까無作相=무작용, 보겠다는 생각없이 보는 것입니까

is what you see with your divine eyes a contrived form, or is it a non-contrived form? 

[작상(作相)=조작으로 보느냐, 無作相=조작 없이 보느냐.]

[작용(作相)abhi-sasktalakana. 인연으로 해서 만들어진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假使作相(가사작상) 則與外道五通等(증여외도오통등)

가령 보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보는 것이라면, 바로 외도들의 얻은 오통 등과 같을 것이요.

If it is a contrived form, it is the same as the five divine powers of the external paths. 

[외도들도 정진을 잘하고 오랫동안 하면 오신통을 얻을 수 있지만, 번뇌가 다한 누진통을 포함하는 육신통은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유마힐이 작상이라면, 육신통 가운데 오신통을 갖춘 외도들도 그런 것 정도는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5통(通), 오신통=천안통(天眼通)․천이통(天耳通)․숙명동(宿命通)․타심통(他心通)․신족통(神足通)이다. 여기에 누진통(漏盡通)을 더하면 6통(육신통)이 된다.]

 

若無作相(약무작상) 卽是無爲(즉시무위) 不應有見(불응유견)

만일 無作相=보겠다는 생각 없이라면, 곧 無爲=함이 없는 것이니 응당히 본다는 것에 있을 수 없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If it is a non-contrived form, it is inaction, and there is nothing to be seen.

[불응유견(不應有見), 본다고 할 수 없다. 응당히 봄에 있지 않다.
무위(無爲)니까 함이 없는 것이고, 무작상이고, 조작이 없는 것이고, 지음이 없는 것이고, 생긴 것이 아닌 것이고, 본래적인 적인 것이니까 본다고 하는 표현이 틀렸다는 뜻입니다.]

[무위(無爲)=인연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닌 존재라는 뜻]

 

世尊 我時嘿然(세존 아시묵연) 彼諸梵聞其言(피제범문기언) 得未曾有(득미증유)

세존이시여저는  때에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으나, 

범천들은  말을 듣고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말이라 하고 

World Honoured One, I was speechless. But when those celestial beings of Brahma heard his words, it was as if they had never heard of anything better. 

卽爲作禮而問曰(즉위작예이문왈) 世孰有眞天眼者(세숙유진천안자)?

유마힐에게 예배하고는 물었습니다.
 세상에서 누가 참다운 천안을 가지고 있습니까?’
So they made a formal prostration and asked, Who in the world has the true heavenly eyes? 

[그 범천들이 아나율에게 물으러 왔다가 유마거사의 말을 듣고는 거기에서 감화되어서, 그분에게 예배를 드리고는 이문왈(而問曰), 아나율보다 뛰어난 유마거사에게 묻는 것입니다.] 

 

維摩詰言(유마힐언) 有佛世尊得眞天眼(유불세존득진천안)

유마힐은 대답하시되,
부처님 세존이 계시니, 세존만이 참다운 천안을 얻으셨으니,

Vimalakirti said, There is the Buddha, the World Honoured One, who has the true celestial eye, 

常在三昧(상재삼매) 悉見諸佛國(실견제불국) 不以二相(불이이상)

항상 삼매에 드셔서 諸佛國=모든 부처의 나라를 빠짐없이 보시되 2상=두 가지 상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always in samadhi, and sees all the lands of the Buddhas, all without duality. 

[실견하되 두 가지 모양으로써 보지 않는다. 하나의 통일된 모양으로 본다. 평등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 2상(相)=상대적인 차별을 가진 관념이라는 뜻.]

 

於是嚴淨梵王(시어엄정범왕) 及其眷屬五百梵天(급기권속오백범천)

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개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말을 들은 엄정대범왕  권속 5백의 범천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고 유마힐의 발에 예배한 다음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Thereupon, the Brahma king Sovereign Purity and the five hundred celestial beings that’s with him aspired for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They prostrated with their heads touching Vimalakirti’s feet, then suddenly withdrew and disappeared. 

禮維摩詰足已(예유마힐족이) 忽然不現(홀연부현)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부임예피문질)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Therefore, I am not qualified to go to him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 摩訶迦旃延(마하가전연)

논의제일(論議第一) 가전연(迦旃延 Katyayana)​, 가연자(迦延子), 마하 카차야나(Mahakatyayana ), 카트야나라고도 불렸다. 남인도 아반타국의 크샤트리아 출신으로, 왕명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러 갔다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며, 귀국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논의(論議)를 ​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질을 가졌다고 하며, 뛰어난 언변과 말솜씨로 논리 정연하게 상대방의 주장을 꺾었으며, 인도 전역을 다니며 중생 교화 포교에 힘썼으며, 특히 마두라에서 ​아반티풋 국왕을 만나 사성(四姓) 제도의 모순을 설득한 것으로 유명하다.

불경을 대별하여 경(經) 율(律) 론(論)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논은 그 말씀에 대한 해설이다. 굳이 설법 제일인 부루나와 논의 제일인 가전연을 비교하면, 부루나는 재가자들을 상대로 설하는데 뛰어났고, 가전연은 출가한 사문들에게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해설을 설하는데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총명한 머리로 명석하게 논리를 구사하여 부처님 말씀을 해설하여 펴는데 걸림이 없었다. 

 

佛告摩訶迦旃延(불고마하가전연)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는 마하가전연(Mahktyyana)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The Buddha said to Mahakatyayana, Go to Vimalakirti and ask about his illness.

迦旃延白佛言(가전연백불언) 世尊 我不堪任詣彼問疾(세존 아불감임예피문질)

가전연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Mahakatyayana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am not qualified to go to Vimalakirti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昔者(억념석자) 佛爲諸比丘略說法要(불위제비구약설법요)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을 위하여 간략히 法要=중요한 가르침의 요점을 설하셨을 때, 

Why I recall the Buddha had previously given a brief lecture to the monks on the essentials of Dharma. 

[법요(法要), 법은 중요한 것이니까 법(法)에  요(要)를 붙여서 말하기도 합습니다. 법에 대한 요점이라는 의미보다, 법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뜻으로 법요라고 합니다.]

 

我卽於後(아즉어후) 敷演其義(부연기의) 敷 펼 부

저는 곧 이어서 그 뜻을 敷演=자세하게 설명하여,

Then I explained elaborately 

[부처님이 법요를 말씀하신 법문의 깊은 의미를 부연(敷演)= 펼쳐서 알기쉽게 자세히 설명하는, 세세하게, 현실에 맞게,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설명을 하는 것.]

 

謂無常義(위무상의) 苦義空義(고의공의) 無我義寂滅義(무아의적멸의)

저는 ‘무상의 뜻이며, 괴로움의 뜻이며, 공의 뜻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無我=주체는 없다는 뜻이며, 적멸의 뜻’이라고 말하였는데, 

the meaning of impermanence, suffering, emptiness, non-self, and nirvana. 

[부처님이 어떤 법문을 하셨다는 것은 여기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이것은 소승교리 즉 성문들의 불교적 지식의 모든 것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 적멸(寂滅)은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여기에서는 다섯 가지 뜻을 이야기합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무상하다. 일체개고(一切皆苦)-모든 것을 괴로움으로 본 것은 사성제 중에서의 고집멸도의 교리에서만 그렇다는 것으로, 모든 교리에서 괴로움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일체개공(一切皆空)- 모든 것은 무상하니까 결국은 변하고 변해서 텅 빈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공에서 어떻게 인연이 결합해서 뭔가 새로운 사물과 그에 따른 이치가 생기는,
예를 들어 인과 연이 맞아서, 봄에 새싹이 나지만, 나무가 있어도 연, 조건이 안 맞으면 싹이 안납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공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싹이 나서 잎이 피고, 그 다음에 단풍이 들어서 잎이 지면 또 공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사람을 위시한 삼라만상이 다 공이라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아(我)라고 하는, 고정불변하는 주체, 알맹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파초의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줄기가 없는 것으로, 전체를 볼 때 줄기처럼 보일 뿐인 것과 같이 이 세상 삼라만상이 다 그와 같이 이것과 저것이 모여서 어떤 하나의 사실, 하나의 사물을 만들어 내었을 뿐이니까 내 것이라는 주체가 없는 것으로, 아(我)가 없다고 합니다. 이 육신도 지수화풍 사대로 결합했고, 또 몸과 마음이 결합을 해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탄생이 되어서 이렇게 번듯이 살아있는 내가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 인연이 다 해서 뿔뿔이 흩어지면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장 이 법회라고 하는 구성 역시도 한 시간 전에는 없었던 것이고 또 한 시간 후에는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공(空)의 관점으로 보고, 무아(無我)의 관점으로 보고, 무상(無常)의 관점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현상은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파악하고 나면 아무런 마음도 일으킬 거리가 없으니, 번뇌가 다 사라진 것이 적멸(寂滅)의 뜻입니다.
유마경은 보살사상 중심의 대승경전으로, 소극적인 불교의 사상이나 정신을 배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대승적인 입장은 상락아정(常樂我淨)- 상(常)= 항상한 것이다. 무상이 아니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상락아정은 부처님의 덕이고 불교의 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을 모시고 상락아정, 즉 무상, 고의 반대인 낙(樂)이다. 이 인생은 즐거운 것, 우리들이 상상하는 어떤 인간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 열반락(涅槃樂)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이 아니라 유(有), 공과 반대되는 묘유(妙有), 진공묘유(眞空妙有)- 묘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我), 진아(眞我), 참나가 있다. ‘나’는 영원히 변치 않는 것으로, 이 몸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이 몸이 소멸한 이후에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 대승불교의 기본 나에 대한 관념입니다.
적멸이나 열반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사라진 이후에 아주 활발한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님도 중생제도를 위해서 49년간 활발한 삶을 살으셨습니다. 적멸 속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보살행으로써 일관했다는 것입니다. 적멸의 반대로 작용으로써 일관했고, 보살행으로 일관했고, 불행(佛行)으로써 일관했습니다. 이것이 대중적인 불교이고 바람직한 불교라는 것입니다.]
[삼법인(三法印,tilakkhaṇa)은 불교의 교의를 요약하여 제시한 기치 또는 슬로건으로, 불교의 기본적 입장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근본불교 시대에 발생한 교의이다. 여기서 빠알리어의 ti는 3을, lakkhaṇa는 특징을 뜻하는 말로써, <3가지 특징>이라고 직역되며, 일반적으로 <3법인>이라고 부른다. 법인(法印)이란, 법의 도장이라는 뜻으로, "이것이 찍혀있으면 진짜이고, 이것이 찍혀있지 않으면 가짜이다."라고 말해질 정도로 불교의 진.위를 판별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처음에 삼법인은 일체개고(一切皆苦 · Dukkha) · 제행무상(諸行無常 · Anicca) · 제법무아(諸法無我 · Anatta)의 세 가지를 가리켰다. 이 최초의 삼법인의 각각은 간단히 고(苦) · 무상(無常) · 무아(無我)라고도 한다. "삼법인"이라는 낱말의 영어 번역어인 "Three marks of existence (존재의 세 가지 특징 또는 성격)"는 이 최초의 삼법인에 대한 번역어이다. 후에는 일체개고를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대체하여 제행무상 · 제법무아 · 열반적정을 삼법인이라고 하기도 하였다또는 최초의 삼법인에 열반적정을 추가하여 일체개고 · 제행무상 · 제법무아 · 열반적정을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하였다.
고타마 붓다는 이 현실세계는 모두 고(苦)라고 하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현실인식에서 출발하여, 고(苦)의 원인이 인간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자기모순에 있다고 하였다. 일체개고의 현실인식은 현실 또는 존재(existence) 그 자체에 고(苦)라고 하는 고정된 성질 또는 실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며 또한 고(苦)의 원인이 현실 또는 존재 그 자체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 흘러가고 변화하고 있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는데(제행무상) 인간은 항상 불변을 바라고, 또 모든 것은 무엇 하나 고정적 실체인 것은 없는데도(제법무아) 그것을 실체라고 고집하려 하는 데에 고(苦)의 원인이 있다고 고타마 붓다는 말하였다. 따라서 올바른 지혜(반야 · 보리)를 통해서, 이러한 자기모순에 빠진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욕망을 버리고 집착에서 벗어날 때야말로 아무것에도 어지럽혀지지 않은 이상적인 열반적정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이라는 교의 속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기본적 입장이다.-위키]

[이 구절의 티베트 역에서 살펴보면 “제행은 변화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운 것이며, 제법은 공한 것이고, 제법은 무아이며, 열반은 적정하다”는 의미이다. 곧 4법인(法印)보다 하나가 더 있다.]

 

時維摩詰來謂我言(시유마힐내위아언) 唯 迦旃延(유 가전연)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唯=여보시오 가전연이여, 

Then vimalakirti came to me and said, Oh mahakatyayana,

無以生滅心行(무이생멸심행) 說實相法(설실상법)

생멸하는 마음으로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實相을 無=설하여서는 안 됩니다. 

do not speak of the ultimate reality of Dharmas with the mind of birth and death. 

[무이생멸심행(無以生滅心行)으로 설실상법(說實相法)이어다.- 조사님들이 많이 인용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가전연은 영원하고 불생불멸한 마음 작용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생멸하는 마음으로써 실상법을 설하고 있다.

행(行)= 마음의 흘러감, 마음의 작용, 변화해서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멸하니까 흘러가는 것으로, 우리의 표면적인 마음은 사실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계속’이라는 말을 알아듣고, 또 ‘알아듣고’ 라는 말을 알아듣듯이, 그런 생멸심이 있음으로 해서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 보통 중생들의 마음 상태인데, 가전연도 역시 그런 마음 상태로써 실상법(實相法)=불생불멸의 법= 진실한 모습, 실,상,법(實,相,法)에 대한 이치를을 설명하고 있었다. 생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멸하지 않는 실상법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그 설명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迦旃延(가전연) 諸法畢竟不生不滅(제법필경불생불멸) 是無常義(시무상의)

가전연이여, 제법=모든 법은 마침내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니, 이것이 무상의 뜻이요, 

Mahakatyayana, all Dharmas are without birth or death, and this is the meaning of impermanence. 

[유마거사의 법문은 우리의 상상을 뒤엎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 십대 제자들의 지식과 지혜 그리고 그 분들의 어떤 틀을 다 깨어 버리고 뒤엎어 버리는 이론입니다. 

제법(諸法)이 필경(畢竟)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여여하고 항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제법이 끝내에는 불생불멸하는 것이 무상의(無常義)= 항상함이 없는 이치다.

생멸하는 것이 무상의 이치가 아니라, 불생불멸이 무상의 이치다. 성불한다 하는 것은 무상해야지, 무상하지 않으면 성불하지 못한다.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은 변화이고, 변화는 무상으로, 그대로 굳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하는 그것이야 말로 무상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생불멸하면서도 무상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불생불멸하는 우리 중생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가 될 수 있지 아니면 부처가 될 수 없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육조스님의 육조단경에도 불생불멸이라고 해서 굳어져 있다고 이해하면 안되는 것으로, 변화무쌍해서 중생이 부처가 되는 그것이 무상의 이치이고, 즉 불생불멸이 무상의 이치다.]

 

五受陰(오수음) 洞達空無所起(통달공무소기) 是苦義(시고의) 洞 골 동, 밝을 통

五受陰=오음은 공하여 생기는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 이것이 괴로움의 뜻입니다. 

It is the meaning of suffering to realize that the five aggregates of attachment are empty with no arising. 

[오수음(五受陰)= 오음(五陰) 또는 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색은 우리의 육신을 말하고 수생행식은 마음의 작용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느낌이라든지 또 어떤 느낌에 의해서 마음의 흐름, 작용이 있고 또 그 작용을 의지해서 인식하는 것 등이 우리의 마음의 네 가지 작용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육신과 아울러서 ‘나’라고 합니다.

오음= 오수음= 오온을 ‘나’라고 하는데, 이것을 통달= 환히 깨달아서 공무소기(空無所起)= 공에서 일어나는 바가 없는, 이것이 고의 이치라는 것입니다. '고'라면 통달하지 못한 입장에서 변했다고 하는데 유마거사는 그것이 아니라 통달해서 일어남이 없다. 우리 몸이 일찍이 생긴 바가 없는 것으로 아는 것, 없는 것으로 아는, 이것이 괴로움의 뜻이고 괴로움의 이치라는 것입니다.

왜냐? 우리 몸이 괴로움의 이치를 초월해서 극복하려면 이 몸이 생기는 바가 없는, 공무소기(空無所起)의 도리를 알아야 괴로움의 이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비록 괴롭다고 하여도 아직도 괴로움의 근원을 꿰뚫어 알지 못했으나, 부처님이야 말로 이 몸이 ‘나’라고 하는 존재가 괴롭다는 이치를 제대로 아신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고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괴로움이라고 하는  이치’를 부처님이야말로 제대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역설적으로 오수음(五受陰)이 통달(洞達)하야 공무소기(空無所起)가 시고의(是苦義)라는 것입니다.]

 

諸法究竟無所有(제법구경무소유) 是空義(시공의)

제법=모든 법이 구경에는  無所有= 존재하는 (있는) 바가 없으니, 이것이 공의 뜻이며, 

All Dharmas have no existence, which is the meaning of emptiness. 

於我無我而不二(어아무아이불이) 是無我義(시무아의)

我=나와 無我=내가 없다라고 것에 있어서 둘이 아닌=不二인것, 이것이 무아의 뜻이며,

The meaning of no-self is to realize there is no duality between self and non-self. 

[‘나’다 ‘내가 없다’ 라고 하는, 둘이 아닌 이치야 말로 진짜 무아이다. 아와 무아가 둘이 아닌 것을 아는 것이 진짜 무아다. 아=내가 있다는 것에 떨어져 있어도 곤란하고, ‘내가 없다’=무아에 떨어져 있어도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공한 것 까지 공하다’고 하면, 공했으면 됐지 공한 것 까지 공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그릇에 오물을 잔뜩 담고 있어서 그 오물을 비워서 오물은 없지만, 오물을 담았던 그릇은 있으니까 그 그릇마저 버리라는 뜻입니다.

공한 것 까지 공해야 된다, 아와 무아가 둘이 아닌 것이 진짜 무아다. 남아 있는 것까지 철저히 없애야, 공하다고 할 것도 없다. 공했다는 것까지 없으면은 공했다는 말이 있을 필요가 없는 그것이 진정 묘한 것이라는 말인데 여기서 아와 무아가 둘이 아니면 '아'라고 할 수도 없고, '무아'라고 할 수도 없고, 혹은 '아'라고 해도 되고 '무아'라고 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무아의 이치라는 것입니다. 즉 '무아'가 안 되면 '아'도 될 수가 없고, '무아'도 될 수가 없으니까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이법문이 유마경의 중요 포인트로 뒤에 불이법문품에서 자세히 나옵니다.]

 

法本不然(법본부연) 今則無滅(금즉무멸) 是寂滅義(시적멸의)

(존재하는) 법은 본래 그러한 것이 아니므로 지금 곧 멸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적멸의 뜻입니다.
The Dharma originally does not ignite, so there is nothing in the present to extinguish the meaning of tranquil cessation. 

[법본불연(法本不然)=법은 본래 일어남이 아니나, 그러할 연(然)이 여기서는 일어난다, 생긴다는 기(起)나 생(生)의 의미로 씌였습니다.

법은 본래 생긴 것도 아니요, 지금 없어진 것도 아닌 것,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은 것이란, 생긴 것이 없으니까 없어질 것이 없는 것이다. 생기지 않은 것은 없어지지도 않는, 그것이 진짜 적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전부 변하는 것으로, 새로 생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육신, 저 나무의 새싹도 없던 것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물이든지 거름이든지간에 그 소재(형체)가 변해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그러한 이치, 법본불연(法本不然), 법=일체법의 본질은 생기는 것이 아니고 또 없어지는 것도 아닌 그것이 시적멸의(是寂滅義)=진짜 적멸의 뜻이다]

 

說是法時(설시법시) 彼諸比丘心得解脫(피제비구심득해탈)

이러한 법을 들었을 때, 여러 비구들이 마음속 깊이 해탈을 얻었습니다. 

When Vimalakirti said this, the minds of those monks attained liberation. 

[설시법시(說是法時)에 이러한 법문을 유마거사가 설할 때 저 모든 비구가 심득해탈(心得解脫)= 마음의 해탈을 얻었더라.]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
그러므로 제가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Therefore, I am not qualified to go to him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부루나(富樓那) - 說法(설법)

만원자(滿願子), 만자자(滿慈子), 만축자(滿祝子)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라고도 하며, 십대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부처님과 생일이 같다. 코살라의 카피라성 근교, 드나바스트 (또는 스나파란타) 라는, 바라문 종족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카피라 성주인 슈도다나 (즉 석가의 친아버지)의 국사로, 어머니는 석가의 최초의 제자들인 오비구의 중의 교진여 (카운단냐)의 여동생으로도 전해진다. 그의 친가는 거만의 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어렸을 때 이미 총명하고, 바라문의 4베다 (성전) 와 오명 (성·인·의·공·내) 에 통하고 있었지만, 세진을 싫어해 눈산 (히말라야)에 입산학도 해, 고행을 거듭해 무색계와 5신통을 얻었지만, 부처님이 성도한 소식을 듣고서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 파라나 (파라나시) 국의 베나레스에서 귀의하였다. 득도한 후, 각지를 떠돌며 포교에 전념하여 9만 9000명의 사람들을 교화했다고도 전해지며, 교묘한 언변으로 교화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하여 설법제일(說法第一)이라고 불렸다.

 

佛告富樓那彌多羅尼子(불고부루나미다라니자)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는 부루나(Pramaitryaīputra)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대가 가서 유마힐을 문병하도록 하라.”

Then the Buddha said to Purna Maaitrayaniputra, Go ask Vimalakirti about his illness. 

富樓那白佛言(부루나백불언) 世尊 我不堪任詣彼問疾(세존 아불감일예피문질)

부루나가 부처님께 답하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Purna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am not qualified to go ask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我昔於大林中(억념아석어대림중)

在一樹下爲諸新學比丘說法(재일수하위제신학비구설법)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숲 속의 큰 나무 아래에서 새로 출가한 신학비구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고 있었는데, 

Why? I remember I was once under a tree in a big forest, giving a talk to the new monks that were learning. 

時維摩詰來謂我言(시유마힐내위아언) 唯 富樓那(아부루나)

先當入定(선당입정) 觀此人心(관차인심) 然後說法(연후설법)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부루나여, 먼저 入定=선정에 들어 이들의 마음을 살핀 다음에 설법하여야 할 것입니다.

Then Vimalakirti came to me and said, Well, Purna, you should first enter meditation and see what capacities these people have before you speak. 

[부처님도 선당입정(先當入定), 마땅히 먼저 입정을 해서 사람의 마음을 관찰한 연후에 설법하라 하셨습니다.

그냥 보기에는 멀쩡하게 아무 탈 없는 것 같지만, 각각의 근기와 마음은 누구와도 같지 않게, 각자의 숙세의 업으로 인한 습관과 심성과 욕락과 취미와 재능 등 복잡미묘한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無以穢食置於寶器(무이예식치어보기) 當知是比丘心之所念(당지시비구심지소념)

더러운 음식을 寶器=보배로운 발우에 담지 마십시오. 마땅히 이들 비구들이 마음으로 바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Not to put filthy food in a precious vessel. Do you know what is in the mind of these monks? 

無以琉璃同彼水精(무이유리동피수정)

(귀한) 유리(vairya)를 (한낱) 수정(kcakamai)과 같게 보지 마시고,

Do not take lapis lazuli for ordinary glass crystal.

汝不能知衆生根源(여부능지중생근원) 無得發起以小乘法(무득발기이소승법) 

그대는 중생의 根源=근기도 알지 못할진댄, 소승의 가르침으로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發起=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Since you do not know the many sentient beings’ capacity for wisdom, then you should not start them with the Dharma of the Hinayana. 

[중생근원(衆生根源)= 신학비구들이 과거에 익혀온 공부를 말하는 것과 함께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승법은 부처된다기 보다는 기껏해야 아라한과가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전부 본래의 불성을 가지고 있는 부처의 그릇이니까, 소승법을 가르치는 것이 더러운 음식을 보배 그릇에 담는 격이 된다는 뜻입니다.]

 

彼自無瘡(피자무창) 勿傷之也(물상지야)

그들 자신들은 부스럼(흠)이 없는데 상처를 주지 마시고,

Their bodies are originally free of wounds, so don’t harm them. 

瘡 부스럼 창, 徑 지름길 경, 건널 경, 迹 자취 적

[저 사람들은 아무런 흠집이 없는데, 당신의 법문이 오히려 상처를 내는 격이 된다는 뜻입니다]

 

欲行大道(욕행대도) 莫示小(막시소경)

큰 길=大道를 가려고 하는 이들에게 작은 오솔길을 가르쳐 (보여)주지 마시고

If someone wants to tread on the main highway, do not show them the unpaved trail. 

無以大海(무이대해) 內於牛迹(납어우적)

큰 바닷물을 가져다 소 발자국에 (패인 곳에) 넣으려 하지 마시고,

Don’t pour the vast ocean into one of those pits trodden out by the cow’s hoof, 

[납어우적(內於牛跡)의 내(內)를 들일 납(內) 또는 받아들일 납(內)으로 봅니다.]

無以日光(무이일광) 等彼螢火(등피형화)
햇빛을 저 반딧불과 함께 비교하지 마십시오.

and don’t equate the dazzling daylight with the light of a glowing fire.

[등피형화(等彼螢火), 등(等)은 같다고 여기지 말라. 태양의 빛을 반딧불과 같이 취급하지 말라]


富樓那(부루나) 此比丘久發大乘心(차비구구발대승심)

中忘此意(중망차의) 如何以小乘法而敎導之(여하이소승법이교도지)?

부루나여, 이들 비구는 대승의 마음을 일으킨 지 오래지만, 

도중에 이 발보리심을 잊은 것인데, 어떻게 소승의 가르침으로써 이를 가르쳐 이끌고자 합니까?

Purna, how can you teach these monks, who had long ago made a vow to seek the Great Vehicle but have in midway forgotten their original intention, with the Dharma of the Lesser Vehicle? 

我觀小乘智慧微淺(아관소승지혜비천) 猶如盲人(유여맹인)

不能分別一切衆生根之利鈍(부능분별일체중생근지이둔)
제가 보기에 소승은 지혜가 미천함이 마치 장님과 같아 모든 중생의 근기의 예리하고 우둔한 것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As I see, the wisdom gained from the teachings of the Hinayana is very shallow, just like a blind man who cannot distinguish the roots of all sentient beings from the dull ones.

[이 전부가 우리들 각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時維摩詰卽入三昧(시유마힐즉입삼매) 令此比丘自識宿命(여차비구자식숙명)

그 때 유마힐은, 곧 삼매에 들어 이 비구들이 스스로의 과거=宿命을 알게 하였으며, 

Thereupon, Vimalakirti immediately entered samadhi and, by the power of his meditation, made the monks see for themselves their own past lives. 

 

曾於五百佛所 植衆德本(증어오백불소 식중덕본)

그리하여 일찍이 (전생에) 5백 부처님께서 계신 곳에 온갖 선근(kualamla) 공덕을 심고

They realized they had once planted blessings and merits with five hundred Buddhas 

 

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회향아녹다라삼막삼보리) 卽時豁然(즉시활연) 

還得本心(환득본심) 豁 뚫린 골 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로 회향하고, 즉시 豁然=곧바로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왔으며,

and had set their minds toward the aspiration of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Thus, they immediately realized and remembered their mind’s original intention.  

[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 아뇩다라샴먁삼보리에 회향하다= 이것을 알게 되었다.
앞의 자식(自識)의 식(植)의 의미가 여기까지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는 즉시확연(時豁然)= 확연히 깨달아서, 환득본심(還得本心)=본래의 마음을 얻었다. 즉 본래 수행하던 그 상태로 순식간에 되돌아 간 것입니다.  대학교 다 마친것을 잊어버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국민학교 수준으로 가르치고 있었으나,  그것을 되돌려 주니까 그 공부하던 차원으로 되돌아갔다.

사람의 근기와 마음을 잘 알아서 상대를 잘 이해한 다음, 그에 맞게 적절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친구, 인간관계,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녀의 관계 등 모든 관계에 해당됩니다. 상대를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으나, 서로 이해를 못하니까, 충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於是諸比丘稽首禮維摩詰足(어시제비구계수예유마힐)

그 때에 여러 비구들은 유마힐의 발에 稽首=머리를 조아려 예배하였습니다. 

Thereupon, the monks bowed down in homage to Vimalakirti with their heads touching his feet. 

[계수예유마힐족(稽首禮維摩詰足), 유마힐의 발에 계수= 머리를 조아려서 예배를 올렸다.
최대의 존경 표시가 발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時維摩詰因爲說法(시유마힐인위설법)

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어아뇩다라삼막삼보리) 不復退轉(불복퇴전)

그 때 유마힐은 그들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서 다시는 물러서지 않도록 설법하였습니다. 

Vimalakirti then spoke to them so they would not fall back from their pursuit of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我念聲聞不觀人根(아념성문불관인근) 不應說法(불응설법)

그 때 저는 생각하기를, ‘성문은 중생의 근기를 정확히 살피지 않고서 설법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I realize a sravaka should not speak the Dharma when he does not observe people’s capacities. 

[이 경에서는, 부처님 제자들이 겨우 부처님 설법을 듣고 쪼금 깨달아 아는 성문의 입장이 되어서 사람들의 근기를 잘 파악하지도 못하고 또 맞게 설법도 못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是故不任詣彼問疾(시고불임예피문질)

그러므로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Therefore, I am not worthy of going to him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십대제자(十代弟子)​

부처님은 성도 이후 마가다바(Magadava)(鹿野苑 : 선인주처녹야원(仙人住處鹿野苑)이라고 하는데, 신도들이 모이고 사슴이 뛰노는 원림(園林) 이라는 뜻이다.)에서 비구들을 대상으로 최초의 설법을 하셨다.
이후 부처님의 제자는 계속 늘었는데, 이들 가운데 수행과 지혜가 특출한 제자 10인을 간추려 십대제자라고 부른다.
1. 지혜제일(知慧第一) 사리불(舍利弗 Sariputra)은 부처님 수제자 중의 으뜸으로, 사리자(舍利子), 취로자(鷲鷺子), 신자(身子) 라고도 한다. 사리불은 수행·정진·교화에 노력하였는바, 부처님께서는《화엄경華嚴經》《반야심경般若心經》등 어려운 경전을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사리불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셨다.

2. 신통제일(神通第一) 목건련(目揵連 Maudgalyana) 사리불과 함께 회의론자 산자야의 제자였으나, 불도에 귀의하게 되었다. 목건라야나(目犍羅夜那), 마하목건련(摩訶目犍連)이라고도 하며 보통 줄여서 목련(目蓮)이라고 부른다. 마가다국 왕사성 밖의 콜리타촌(村) 사람으로 바라문족 출신이다. 신통력이 대단히 뛰어나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고 불린다. 마가다국의 브라만 출신이며,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았다. 불교에 귀의한 후 여러 고장을 찾아 부처님에 교화의 법을 전하였다. 부처님의 사후 교단을 이끌었다. 

3. 두타제일(頭陀第一) 마하가섭(摩訶迦葉;Mahakasyapa)은 무집착(無執着)에 투철하였으며, 사엽파(迦葉波)라고도 하며 대음광(大飮光), 또는 대구(大龜)라고 번역한다. 마가다국에서 태어났으며 수행을 엄격히 하고 소욕지족(少欲知足)하였으므로 두타(頭陀)제일이라고 불린다. 석가모니부처님 열반 후 교단을 통솔하여 칠엽굴(七葉窟)에서 아난다와 오백 아라한과 석가모니의 말씀을 제1차 불전 결집을 주도하여 부법장(付法藏)의 1조(祖)가 되었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불교교단을 운영하였으며, 500명의 제자들을 모아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經)·율(律)을 결집하였으며, 선가(禪家)에서는 부처님 법을 전한 ‘제1조 조사(第一祖 祖師)’로서 받들고 있다

4.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須菩提 Subhuti), 수정제(須淨提), 수부제(須扶提)라고도 하며 선(善), 선보(善實) 등으로 번역한다. 공(空;제법개공(諸法皆空))을 가장 잘 이해해서 무쟁삼매(無諍三昧)의 법을 깨쳐, 모든 제자들 가운데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공사상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반야부 경전에는 항상 수보리가 등장한다.  사위국의 브라만 출신이며, 특히 16나한(羅漢) 중의 하나로서, 그는 어려서 성질이 사나워 부모·친척들 사이에서 큰 골칫거리였는데, 마침내 출가, 입산수도하여 훌륭한 불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수보리 존자는 지혜가 총명하여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5. 설법제일(說法第一) 부루나(富樓那 Purna) 만원자(滿願子), 만자자(滿慈子),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라고도 불리는 부루나(푸르나)는 브라만 출신으로 설법을 잘 하였으며, 생년월일이 부처님과 같다고 한다. 
그는 설법 때마다 먼저 변재로써 뭇사람들을 기쁘게 만들고, 다음에는 폐부를 찌르는 고언(苦言)으로 마음에 절실한 가책감(苛責感)을 가지게 하고, 끝으로 밝은 지혜로 모든 것이 공함을 가르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외 없이 해탈하게 하여,  9만 9000명을 열반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6. 천안제일(天眼第一) 아나율(阿那律 Aninuddha)​ 아니루타(阿尼樓陀) 또는 아우룻다라고 하며 무멸(無滅), 여의(如意) 등으로 번역하며, 정반왕의 동생 감로반왕의 아들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사촌이다. 석가모니의 앞에서 졸다가 꾸지람을 듣고 잠들지 않을 것을 맹세한 뒤 밤낮으로 자지 않고 수도 정진하다가 그만 눈이 멀어서, 육신의 눈은 잃었지만 참 지혜의 눈인 천안통(天眼通)을 얻었다고 한다. ​

7. 논의제일(論議第一) 가전연(迦旃延 Katyayana)​ 마하가전연(摩訶迦旃延), 가연자(迦延子), 카트야나라고도 불렸다. 남인도 아반타국의 크샤트리아 출신으로, 왕명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러 갔다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며, 귀국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논의(論議)를 ​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질을 가졌다고 하며, 뛰어난 언변과 말솜씨로 논리 정연하게 상대방의 주장을 꺾었으며, 인도 전역을 다니며 중생 교화 포교에 힘썼으며, 특히 마두라에서 ​아반티풋 국왕을 만나 사성(四姓) 제도의 모순을 설득한 것으로 유명하다.

​8. 지계제일(持戒第一) 우바리(優波離 Upali) 우발리(優跋利), 우파리(優波梨) 또는 근취(近取), 근집(近執)이라 번역한다. 인도의 4성 계급 중 가장 천한 노예 계급인 수드라 출신으로, 석가족의 이발사였다. 아난과 난타, 아나율 등이 출가할 때 머리를 깎아주러 갔다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계율을 잘 지켜 지계제일(持戒第一)이라고 하며, 부처님 열반 후 왕사성 밖 칠엽굴에서 제1회 불전 결집을 할 때 계율에 대한 모든 사항을 암송하여 율장 성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9. 밀행제일(密行第一) 나후라(羅喉羅 Rahula) 부처님께서 출가하시던 날 밤에 ​태어난 부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다. ‘라훌라’라는 이름은 아수라의 일종으로 그 아수라의 무리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자를 일컫는 말이다. 신화에 근거하여 ‘라훌라’라는 말은 월식으로 불리게 되고 결국에는 장애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하고 출가를 결심하여 돌아오던 ​길에 아들이 태어나 “라훌라(장애)가 생겼구나”라고 통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라후라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 고향에 갔을 때 사리불과 목건련을 스승으로 하여 15세에 출가, 최초의 사미승이 되었다.​ 그는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나 선행 및 수행을 철저히 했기에​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불린다. 불화에는 부처님 좌측에 마하가섭, 우측에 아난존자가 배치됐는데, 라후라는 가섭이 ​위치한 자리에서 약간 위에 머리를 단아하게 깍은 젊은 비구의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10.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阿難 Ananda), 아난타(阿難陀)라고도 하며, 환희(歡喜), 무염(無染) 등으로 번역한다. 부처님의 제자이자 사촌 동생이다. 데바닷다의 친동생으로 8세에 출가해 부처님이 깨달은 후 고향에 갔을 때 제자가 되었다.잘생긴 탓으로 여러 차례 여자들로부터 유혹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 바, 부처님 입멸 후 수행에 전력한 끝에 깨달음의 경지인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었다. 25년간 부처님 시자였던 까닭에 부처님 법의 내용을 가장 많이 들어, 부처님 입멸 후 마하가섭에 의해 경전이 결집되던 당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의 내용을 그대로 외워 경전을 결집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불경에서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시작되는 我는 ​아난을 가리키는 것이다.​

須菩提(수보리) - 取食(취식)

[부처님의 십대제자-해공제일 수보리, Subhūti는 십대제자 중 유일하게 코살라국 출신이다. 코살라국 출신의 부호이자 바라문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시하기를 좋아해 급고독장자(아나타빈다타. 외롭고 홀로 된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부자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수보리의 큰아버지 수달다(수다타)는 사업차 마가다국에 왔다가 수보리의 부모인 동생 부부로부터 부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에 깊게 감화되어 죽림정사를 서성이다가 결국 석가모니를 만나 법문을 들었다. 법문을 듣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마가다국을 떠나면서 석가모니에게 코살라국을 방문하여 주십사 청하였다. 사정하고 부탁하여 사리풋다와 함께 코살라국으로 돌아온 그는 막대한 돈을 사용하여 기원정사를 세웠다. 기원정사는 기수급고독원으로도 부른다. 이때 수보리의 부모님도 불법에 귀의하고 수보리에게도 귀의하라고 열광적으로 권했으나 수보리는 반발심이 일어나 까칠하게 거절하였다. 옆에서 자꾸 억지로 권하면 하기 싫은 법이다. 결국은 산속으로 들어가 방황하다가 기원정사에서 처음 석가모니와 만났다.(처음에는 성품이 악하여 모든 것에 성을 잘 냈으나, 부모 친족이 거부하는 자신을 싫어하자 집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갔고 부처님에게 인도되어 불법에 귀의했다.) 법문을 멀리서 듣고 감화되어 직접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지혜가 총명하여 누구도 넘어설 자가 없었다고 하며, 상좌부 불교의 팔리어 경장에서는 공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없이 수보리를 소개하는 정도이고, 대승 불교 경전에 비해서 수보리의 비중이 작은 편이다.]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는 수보리(Subhti)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The Buddha said to Subhuti, Go to Vimalakirti and ask him about his illness. 


須菩提白佛言(수보리백불언) 世尊(세존)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

수보리도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問疾=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Subhuti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cannot go to Vimalakirti to ask him about his ill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我昔(억념아석) 入其舍從乞食(입기사종걸식)

왜냐 하면 憶念=생각해 보니, 저는 昔=옛날 入其舍=그의 집에 들어가 걸식하였는데, 

Why? In the past, I once went to his house to beg for food. 

[사람은 자기의 고정관념, 가치관, 선과 틀과 기준 등이 자꾸 깨어져야 합니다. 안 깨어지면 발전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깨뜨려질 때 거부감을 일으키고, 안 깨어지게 하려고 도사리고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흔히 본능이라고 하는데, 자기의 의식, 자기의 틀은 자꾸 깨어져야 발전하고 넓어지는 것입니다.

도오악자(道吾惡者)는 시오사(是惡師)라, 도오선자(道吾善者)시오적(是惡賊)이요,

틀렸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나의 스승이고,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사람은 나의 적이다]

 

時維摩詰取我鉢(시유마힐취아발) 盛滿飯謂我言(성망반위아언)

그 때 유마힐은 저의 발우를 들고 밥을 가득 채워 주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鉢 바리때 발, 飯 밥 반

When Vimalakirti took my bowl and filled it with food, 

唯 須菩提(유 수보리) 若能於食等者(약능어식등자) 諸法亦等(제법역등)

‘수보리여, 만약 먹는 것(음식)에서 평등할 수가 있으면 모든 법에서도 평등할 수 있으며,  

he said, Well, I say, Subhuti, if one could have an equal mind toward food, then there will be no difference between all the Dharmas. 

[이것은 유명한 구절입니다.

약능어식(若能於食)에 등자(等者)는 제법(諸法)에도 역등(亦等)하고 제법(諸法)에 등자(等者)는 어식(於食)에 역등(亦等)하다. 일상생활에서 유의해야 할 부분이 음식인데, 누구에게나 똑같은 불성, 본래 평등한 법을 먹는 것에서 인정할 수 있으면, 불성의 평등을 진여의 평등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음식에 평등한 실천적인 것이, 끝내는 부처와 중생이 본래로 평등하다 라고 하는 차원에까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諸法等者(제법등자) 於食亦等(어식역등) 如是行乞(여시행걸) 乃可取食(내가취식)

모든 법에서 평등할 수가 있으면 먹는 것에도 평등합니다. 이와 같이 걸식하고 다닐 수 있으면 가히 주어진 것을 取食=먹을 수 있습니다.

If one considers all the Dharmas equal, one will not consider food as differentiated. Only when one can beg with such an attitude, then can one take the food.

[수보리는 부잣집만을 돌면서 걸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부자면 여유가 있겠지만 가난한 집은 자기들 먹을 것도 없을텐데, 수행자에게  밥을 줄 수 있겠는가 해서 수보리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한 것이 좁은 소견이었다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걸식하면서까지 평등한 불성을 볼 줄 아는 안목없이 차별된 것을 염두에 두면, 진리를 어떻게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若須菩提不斷婬怒癡(약수보리부단음노치) 亦不與俱(역불여구)

수보리여, 음행=淫과 분노=怒와 어리석음=癡를 끊지 않으나, 또한 그것들과 더불어 함께 하는 것도 아니며, 

Shubhuti, do not deliberately cut off lust, anger and foolishness, but do not walk with them,

[부단음노치(不斷淫·怒·痴)하고 역불여구(亦不與俱)하며, 이도 유명한 문구입니다.

음욕치를 행사할 때는 하지만, 거기에 늘 젖어 있는 것도 아닌= 불여구(不與俱)입니다

음욕치를 끊으면 세상 생활이 안 되니까, 분노할 땐 분노하고 어리석을 때는 어리석어서 세상 삶을 부정하지 않고 또 거기에 얽매이거나 빠지지 않는 그것이 중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음욕치를 항상 지니고 빠져서 사는 것은 범부이고, 음행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끊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승이고 이승이니까, 범부의 행도 아니고, 이승과 소승의 좁은 소견도  아닌, 대승의 생각이 곧 중도라는 것을 바로 이 구절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도를 깨달은 사람들은 낙이불음(樂而不淫)이라. 즐거운 일에는 한껏 즐거워 하지만 그에 빠지지 않는다.

애이불상(哀而不傷), 슬퍼할 때 슬퍼하되 그로 인해 에 상하지 않는다.

중생들은 좋고 맘에 들면, 빠져 들어서 정신을 못차리게 되고, 그것을 아예 끊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소승이니까 끊을 것도 아니고, 빠질 것도 아니다.] 

[婬怒癡= 탐욕 이하의 성냄, 어리석음은 탐(貪)․진(瞋)․치(痴)의 3독(毒)이라 한다. 나집은 이 ‘탐’을 ‘음(淫)’으로 번역하고 있다.]

 

不壞於身(불괴어신) 而隨一相(이수일상)

내 몸이라는 생각을 버리지(파괴하지) 않고서도 一相=진리의 한 모양을 따를 수가 있으며, 

 Not destroy the body to accord with the oneness of all things. 

[불괴어신(不壞於身)하고, 이 몸을 무너뜨리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이수일상(而隨一相)이다. 진리의 일상, 열반일상, 한 모양, 법을 따른다.

보통 몸은 진리와 상반되는 것이라서, 이 몸을 조복 받아야 되고, 몸을 부정해야 되고, 몸을 무시해야 되고, 몸은 형편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몸을 무너뜨리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도 처음 출가했을 때는 고행을 많이 하시다가 깨달은 후, 몸을 너무 편안하게 할 것도 아니고, 너무 혹독하게 고행할 것도 아니라고 녹야원에서 오비구에게 설법하신 것이 중도였습니다.  

또 부처님의 설법 중의 하나로, 거문고 타는 사람에게 묻기를 ‘줄을 느슨하게 하면 어떠냐?’ ‘소리가 제대로 안나지요.’ ‘그러면 바짝 당기면 어떠냐?’ 또한 소리가 제대로 안 납니다. 적당하게 당겨서 조절을 해야 정상적인 소리가 납니다.’는 대화가 나타내고 있듯이, 중도의 삶은 몸을 부정하지도 않고, 진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不滅癡愛(불멸치애) 起於明脫(기어명탈)

癡=어리석음과 愛=애착을 없애 버리지 않고서도 明=밝음(지혜)와 脫=해탈을 일으키며, 

One does not have to extinguish foolish infatuation before the arising of liberation. 

[우리의 상식은 애착을 끊고, 어리석음을 떠나는 것이지만,  어리석음과 애착을 소멸시키지 않고, 그 가운데서 명탈(明脫)=명(明)은 치(痴)와 상반되는 지혜이고, 탈(脫)은 애착에서 벗어나는 해탈, 밝음과 해탈을 일으키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 매여서 가정에 충실한 사람은 매였다고 생각 안하니까 편안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거기에 살되 거기에 매이지 않는 것, 가정에 충실하되 가정에 매이지 않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반면에 매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조선팔도를 다 다녀도 매여 있는 것이고, 매였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작은 방안에서 맴돌아도 행복한 것입니다.

불멸치애(不滅痴愛). 제한된 어떤 공간, 제한된 내 상황에서도, 거기서 행복과 자유와 보람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자기 ‘우물이 제일 넓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以五逆相而得解脫(이오역상이득해탈) 亦不解不縛(역불해불박)

五逆相=5역죄를 범하는 모습으로도 해탈을 얻고, 또한 不解= 벗어나지도 말고, 不縛=속박되지도 않는 것이며,

Even if one commits the five rebellious acts, one can still become free from bondage. 

[불교에서 제일 무서운 죄가 오욕죄인데, 그런 일도 세상을 살면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로 부터 해탈을 얻어라. 아주 극한 법문입니다.]

[불교 용어로서의 죄(罪)는 도리(道理)에 반하는 행위, 계율을 어기는 행위, 또는 고의 과보를 불러올 악행을 말한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죄(罪)는 모든 선사(善士) 즉 모든 아라한 또는 성현(聖賢)이 꾸짖고 싫어하는 법 또는 꾸짖을 만한 것으로서 그 과보 즉 그것이 가져 올 애호할 만하지 않은 결과[非愛果]를 두려워 해야 할 것으로 정의되는데, 전통적인 용어로 꾸짖고 싫어하는 법을 가염법(訶厭法)이라 하고, 꾸짖을 만한 것을 가가(可訶)라고 하며, 두려워 해야 할 것을 포외(怖畏)라고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죄 즉 가염법 · 가가 또는 포외는 시라(尸羅: 계율)와 궤칙(軌則), 그리고 온갖 청정한 명[淨命: 淨 · 청정 · 무루의 생활, 즉 8정도의 正命]을 훼범(毀犯: 허물고 범함)하는 것을 말한다.
5역죄=① 어머니를 죽임(殺母) ② 아버지를 죽임(殺父)  ③ 아라한을 죽임 (殺阿羅漢) ④ 부처님 몸에 피를 냄 (出佛身血)
⑤ 승가의 화합을 깸(破和合僧)]

 

不見四諦(불견사제) 非不見諦(비불견제)

4성제=四諦를 보는 것도 아니며, 또한 4성제(진리)를 보지 않는 것도 아니며, 

It is not absence for seeing the Four Noble Truths, nor not that one does not see the truth.

[사제(四諦)=사성제(四聖諦)는 소승들이 기본적으로 따르는 기본교리인데, 이에 너무 심취해 있지 말라. 즉 비불견제(非不見諦), 진리는 진리대로 깨닫되, 사제에 그렇게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非得果(비득과) 非不得果(비불득과)

得果=과를 얻음도 아니나, 不得果=과를 얻지 않음도 아니며,

Not that one has attained the fruit of enlightenment, nor is it that one c

[결과에 너무 매달릴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결과를 버릴 것도 아니고, 얻게 되면 얻는 것이지, 결과에 집착한다고 좋은 결과가 꼭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를 얻을 것도 아니나, 그러나 과를 얻지 아니할 것도 아니다.]

 

非凡夫(비범부) 非離凡夫法(비리범부법)

범부도 아니지만, 범부의 법을 떠난 것도 아니며,

Although not a common mortal, one still does what a mortal does. 

[불교에서 성인의 반대가 범부이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성인과 부처님 경지이지만, 그러나 또한 범부의 법, 범부의 입장을 떠난 것도 아니다. 범부를 떠나서 성인이 없고, 범부 따로 있고, 성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그 어디에도 고집하거나 집착하는 것은 불교에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편견이고 편협한 것이기 때문에 중도가 아니고, 바람직한 소견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非聖人(비성인) 非不聖人(비불성인)

성인도 아니나, 또한 성인이 아닌 것도 아니며, 

Even though one is not a sage, one cannot say that one is not a sage. 

[성인을 꼭 추구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또 성인을 배재하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고집할 것이 아닙니다.]

 

雖成就一切法(수성취일체법) 而離諸法相(이이제법상) 乃可取食(내가취식)

비록 일체법을 성취하나, 모든 법의 상에서 떠났다면 可取食=먹어도 될 것입니다.

If one can accomplish all the Dharmas and are far from the characteristics of all the Dharmas, then one can take the food.

若須菩提不見佛(약수보리불견불) 不聞法(불문법) 彼外道六師(피외도육사)

수보리여, 만약 부처를 만나지도 못하고 가르침도 못 듣지 못하고, 또한 저 육사외도인 

Subhuti, if you do not see the Buddha, do not hear the Dharma, and the six teachers of the heterodox paths, 

[외도육사,부란나가섭(富蘭那迦葉) ② 말가리구사리자(末伽梨拘賖梨子) ③ 산자야비라지자(刪闍夜毘羅胝子) ④ 아기다시사흠바라(阿耆多翅舍欽婆羅) ⑤ 가라국타가전련(迦羅鳩駄迦旃延) ⑥ 니건타야제자(尼犍陀若提子)  

그 당시 인도에 많은 외도들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 여섯 사람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그 당시 인도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외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富蘭那迦葉(부란나가섭) 末伽梨拘賖梨子(말가리구사리자)

부란나가섭(Praa kyapa), 말가리구사리자(Maskarin Golīputra), 

Purana Kassapa, Makkhali Gosala, 

刪闍夜毘羅胝子(산자야비라지자) 阿耆多翅舍欽婆羅(아기다시사흠바라)

산자야비라지자(Sajayin Vairaiputra), 아기다시사흠바라(Ajita Keakambala), 

Sanjaya Belatthiputra, Ajita Kesakambali, 

迦羅鳩馱迦旃延(가라구태가전연) 尼犍陁若提子等(니건타야제자등)

是汝之師(시여지사)

가라구태가전연(Kakuda Kty- yana), 니건타야제자(Nirgrantha Jtiputra) 등을 그대의 스승으로 삼아 

Pakudha Kaccayana, Nirgrantha Jnatiputra are your teachers. 

因其出家(인기출가) 彼師所墮(피사소타) 汝亦隨墮(여역수타) 乃可取食(내가취식)

그들을 따라서 출가하고, 그 스승이 떨어지는 곳에 역시 그대가 따라서 떨어질 수 있다면 이 밥을 먹어도 될 것입니다.

墮 떨어질 타, 무너뜨릴 휴
If you follow them to become a renunciate and if they fall into hell, you follow them into hell, then you may receive your food.

[피사소타(彼師所墮) 여역수타(汝亦隨墮). 이 또한 유명한 문구입니다.

저 사람들의 뒤 떨어진 곳에 너도 따라서 떨어질 수 있어야 진정 불자로서 밥을 빌어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외도들과 같이 더불어서 그런 소견에 같이 어울려 준다는 것으로, 사섭법 중에서 동사섭(同事攝)입니다.

불교인은 어떤 종교인과도 같이 더불어 함께하면서 좋은 것은 인정 해주는 포용력을 가져야 진정한 불자입니다. 그릇이 크고 명백하고 소견이 바르면 주변의 어떤 사람의 말도 들어주는 반면에 자기의 주관은 그대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若須菩提入諸邪見(약수보리입제사견) 不到彼岸(불도피안)

수보리여, 그대가 만일 온갖 사견=삿된 견해를 받아들여서 피안에 이르지 못하고, 

Subhuti, if you immerse yourself in various evil views, you will not reach the other shore. 

[삿된 견해에 들어가면 피안에 못 이른다는 뜻입니다.]

 

住於八難(주어팔난) 不得無難(부득무난) 同於煩惱(동어번뇌) 離淸淨法(이청정법)

8난에 머물되 장애(어려움)가 없음을 얻으려 하지 않으며, 번뇌와 함께 하면서 청정한 법을 떠나고,  

When you dwell in the eight adversities, you shall not be free from hardship. The same in affliction and away from the pure Dharma. 

[삼도팔난( 三途八難)= 지옥·축생·아귀의 삼악도부처님을 만나지 못하고, 정법을 듣지 못하는 여덟 가지의 큰 재난(災難)을 말하는데 풀이하자면, ⓵재지옥난(在地獄難) ⓶재축생난(在畜生難), ⓷재아귀난(在餓鬼難), ⓸재장수천난(在長壽天難), ⓹재북울단월주난(在北鬱單越洲難), ⓺농맹음아(壟盲瘖瘂), ⓻세지변총(世智辯聰), ⓼불전불후(佛前佛後)의 여덟 가지 재난을 말한다.]

 

汝得無諍三昧(여득무쟁삼매) 一切衆生亦得是定(일체중생역득시정)

그대가 다툼 없는 삼매=無諍三昧를 얻거든, 모든 중생 역시 또한 그러한 삼매를 얻으며,

Having attained the concentration of non-conflict (Aranasamadhi), all sentient beings will also attain this meditation. 

[수행을 잘한 수보리가 무쟁삼매를 얻었는데, 중생들 또한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무쟁삼매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其施汝者(기시여자) 不名福田(불명복전) 供飬汝者(공양여자) 墮三惡道(타삼악도)

그대에게 보시하는 자에게 그대가 복전이 되지 않는다면, 그대에게 공양을 올리는 자는 3악도에 떨어져 

If you are not a field of blessing for those who give alms to you; the people who give you alms fall into the three evil paths; 

爲與衆魔共一手作諸勞侶(위여중마공일수작제노여) 侶 짝 려

여러 악마와 더불어 손을 잡고, 온갖 번뇌=勞의 벗(짝)이 되고, 

you’re in alliance with the demons and are their companion and helper, 

汝與衆魔(여여중마) 及諸塵勞(급제진노) 等無有異(등무유이)

그대는 온갖 마구니와 모든 번뇌=塵勞와 더불어 같아 다름이 없으며,

and do not differ from the demons and the various kinds of defilements; 

[불교에서 보통 이야기 하고 있는 수행과 이상 또는 생활 태도 등을 완전히 깨뜨리고, 무너뜨려 버리는 설법입니다.]

 

於一切衆生而有怨心(어일체중생이유원심) 謗諸佛(방제불) 毀於法(훼어법)

모든 중생에게 원한을 품고, 모든 부처를 비방하며 정법=法을 훼손하고, 

have grudges against all sentient beings, slander the Buddhas, ruin the Dharma, 

[일체중생에게 이유원심(而有怨心)하며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도저히 수행자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보통 우리 범부들은 다 그런 원망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은 우리는 보통사람으로서, 지극히 잘못된 소견만을 제외하면, 다 제대로 도통 해서 도의 삶, 진리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면 불교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이건 전부 잘 못 되었으니까 지금까지 생활을 전부 다 청산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만약 불교가 처음부터 그렇게 했다면 이 세상에 이렇게 남아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남아 있을 가치도 없는 것이되었을 것입니다.]

 

不入衆數(불입중수) 終不得滅度(종부득멸도) 汝若如是(여약여시) 乃可取食(내가취식)
승가=衆數에 동참하지 않고 마침내 깨달음=滅度를 얻지 않는다면, 그 때에는 밥을 먹어도 좋습니다.

does not enter the multitude, and as a result, never able to attain nirvana; if you are like this, then you may take the food.  

[불입중수(不入衆數)= 부처님의 제자, 불교 공부하는 대중의 숫자에도 들어가지 않아서, 마침내 부득멸도(不得滅度)= 마침내 멸도=제도를 얻지 못할지니. 그대가 만약 이와 같이 하면, 내가취식(乃可取食)= 밥 먹을 자격이 있다,  

우리의 어떤 이상, 배재해야 할 어떤 번뇌, 수행을 통해서 이뤄야 할 경지, 그리고 이러 이러한 삶은 옳지 못하다는 등으로 갈등하면서, 그러한 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것들이 따지고 보면 전부 환상과 같은 허망된 상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고 하는 것도 허망한 상이고, 내가 못난 중생이라는 것도 허망한 상이고, 번뇌라는 것도 허망한 것이고, 깨달음의 경지라는 것 역시도 허망한 상입니다. 탐진치 삼독 번뇌라고 하는 것도 떠나야 하는 것이라 하지만, 그 또한 다 허망한 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속아서 캄캄한 길을 가고  있는데, 여기서 유마거사는 부처니 중생이니, 선이니 악이니 하는 모든 것이 전부 허망한 것이라는 겁니다.

수보리는 공의 도리를 제일 깊이 깨달은 사람이니까, 보통의 보통 법문으로는 어림도 없으니까 불법과 부처님을 믿지 말라, 법을 비난하라, 부처님도 비방하고 법을 헐어 뜨리라고 해서, 수보리의 마음에 있는 상들을 완전히 두드려 부수는 것입니다.

나쁜 것이 상인 반면, 좋다고 하는 관념도 상인데, 이 차원에서는 좋다 나쁘다는 모든 상을 다 두드려 부수고 다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으로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처님을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라는 것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고 법을 비방하고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고 또한 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칭찬하는 것도 상이니까,  칭찬과 비방을 초월한 경지이고, 수보리의 깨달음의 경지를 완전히 넘어선 차원의 법문입니다. 유마경외에는 세상에 이런 법문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의 상에 대한 관념으로는 공(空)의 이치,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전에 내가 존경하는 스님이 관악산 주지를 하셨는데, 그 주변의 군인들이랑 거의 매일 대판 욕을 하고 싸우면서도, 군인들이 항상 절에서 물을 가져가니까 아주 신경써서 우물에 물을 항상 넉넉하게 준비해 놓아서 얼마든지 가져 가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싸움하면 물을 못가져가게 할 것이라서, 대중들이 왜 물을 주느냐고 하니까, 싸우는 건 싸우는 것이고, 물 주는 건 물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스님을 존경하게 되었는데, 군인들은 그것을 이해를 못하다가, 나중에 이해하게 되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時我世尊(시아세존) 聞此語茫然(문차어망연) 不識是何言(불식시하언)

세존이시여, 그 때 저는 이 말을 듣고 망연자실하여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고 

At that point, World Honoured One, I was so confused by these words that I did not know what he was talking about 

茫 아득할 망,

不知以何答(불지이하답) 便置鉢欲出其舍(편치발욕출기사) 維摩詰言(유마힐언)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몰라서 곧 발우를 내려놓고 그 집을 나오려 하였더니,
그러자 유마힐이 또 말을 하였습니다.
and did not know how to answer. So then I put down the bowl and tried to leave his house. Vimalakirti called for me and said, 

唯須菩提(유수보리) 取鉢勿懼(취발물구) 於意云何(어의운하)

‘수보리여, 두려워하지 말고 발우(바루)를 받으십시요. 그대 생각은 어떠하오? 

‘O subhuti, don’t be afraid. Take your bowl. Why do you suppose? 

勿 말 물,懼 두려워할 구, 詰 물을 힐, 꾸짖을 힐

如來所作化人(여래소작화인) 若以是事詰(약이시사힐) 寧有懼不(여유구불)?

我言(아언) 不也(불야)
여래께서 만드신 꼭두각시=化人이 만약 이러한 일로 나무랐다면(힐난한다면) 그래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여서
저는 ‘아닙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If the Buddha manifests a conjured person and questions that conjured person with these things, would he have fear? I answered Vimalakirti, No.

[부처님이 소작화인(所作化人), 부처님이 만든 가짜 사람이 힐(詰)= 힐난, 따진다고 해서, 당신이 두려워서 발우대를 놓고 도망가려는 생각을 하느냐? 그러니까 너의 너 자신에 대한 이해나, 또 유마힐 나에 대한 이해나, 또 세상에 대한 이해를 그동안 어떻게 하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은 다 가짜인데, 네가 속아서 전부 진실로 여기고 살아왔으며,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이 상(相)이고, 상과 상의 대결, 허망과 허망의 대결이라는 것입니다.]


維摩詰言(유마힐언) 一切諸法(일체제법) 如幻化相(여환화상)

유마힐이 말하였습니다. ‘일체제법(一切諸法)은 꼭두각시의 모습=幻化相과 같으니, 

Vimalakirti said, All the Dharmas are like illusory manifestations, 

[결론으로, 일체제법(一切諸法)이, 여환화상(如幻化相)하니 여금(汝今)에 불응유소구야(不應有所懼也)니라

일체제법= 부처, 중생, 선악, 탐진치(貪瞋痴) 삼독, 열반 해탈 등의 모든 것들이 여환화상(如幻化相)=가짜 모양이다. 환술로 만든 눈속임수로 나타난 가짜 상이다.

그러니 그 일체제불 속에 너와 나 유마힐과 네가 생각하고 있는 부처님과 부처님이 설한 설법이 다 들어 있으니 그것을 비난하나, 칭찬하나 아무 영험이나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가짜 상을 보고 가짜라고 비난해본들 아무런 영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마경에서 특히 이 수보리와의 대화는 아주 상당한 차원입니다.]

 

汝今不應有所懼也(여금불응유소구야) 所以者何(소이자하)

一切言說不離是相(일체언설불리시상)

그대는 지금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모든 말=言說도 이 꼭두각시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니, 

and you need not be fearful right now. What is the reason for this? All words are not separate from this illusory form 

[여금(汝今)= 그대는 불응유소구야(不應有所懼也)=그것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있지 않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일체언설(一切言說)=내가 말한 그 모든 것이 불리시상(不離是相)=이 모양=상(相)=환화상(幻化相)을 떠나있지 않다.

유마거사가 그동안 정말 다른 경전에서는 꿈도 못꾸던 그런 설법을 펼쳐놓고는 그 모든 언설이 전부 환화상이니, 그 상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至於智者(지어지자) 不著文字(불착문자) 故無所懼(고무소구)

지혜로운 사람에 이르러서는 문자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but the wise person, because he is unattached to words, and therefore does not fear 

[지어지자(至於智者)=지혜로운 사람에게 이르러서는 불착문자(不着文字)=문자에 집착하지 않으니, 고(故)로, 무소구(無所懼)하나니= 두려워 하는 바가 없나니.

수보리 당신 정도 수준이니까 내 말을 듣고 두려워서 발우대를 놓고 도망가려는 입장이지만, 당신보다 차원이 높은 지혜로운 사람은 두려워 하지 않고, 아마 실컷 지껄여라 하고 있을 것이다. ]

 

何以故(하이고) 文字性離(문자성이) 無有文字(무유문자) 是則解脫(시즉해탈)

왜냐 하면 문자는 자성(svabhva)을 여의었기 때문(에 실상이 空한 것)이니, 문자(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 곧 해탈입니다. 

Why? Words are by nature a departure from the true reality, and discarding them is liberation. 

[문자성리(文字性離)=문자는 자성(性)을 떠나서 무유문자(無有文字)=문자가 없는 것이, 시즉해탈(是則解脫)=이것이 곧 해탈이다. 문자(文字), 이런 훌륭한 설법이라고 하는 것도 상이고 문자(文字)이니까. 그것까지도 떠나야 해탈이다.]

 

解脫相者(해탈상자) 則諸法也(시제법야)

해탈의 모습이란 것은 곧 제법인 것입니다.
The essence of liberation is also the reality of all the Dharmas. 

[해탈상자(解脫相者)=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즉제법야(卽諸法也)= 결국은 본래 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체제법이 환화상이라 했는데, 일체제법이 해탈상이고, 해탈상이 일체제법이라 했습니다.

이 모습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이 모습 그대로 환화상(幻化相)=눈앞에 벌어지는 모든 현상이 그대로 해탈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말이예요.

해탈상자(解脫相者)는 즉제법야(卽諸法也)라. 그러면 제법이 곧 해탈상이라, 눈 앞에 벌어지는 일체제법이 그대로 해탈상입니다. 즉 환화상으로 볼 줄 알면 그대로 해탈입니다. 

부처님을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고, 대중의 숫자에도 들지 못하는 그것이 다 허망한 줄 알면 그대로 해탈이다. 그쯤 되면 해탈의 경지입니다. 그러니까 제법, 일상사에서 해탈을 따로 찾을 수가 없는 것이고, 따로 찾아지지도 않습니다.

해탈은 곧 제법이요, 제법이 곧 해탈이다. 어두운 자리가 밝은 자리요, 밝은 자리가 어둠이다. 번뇌가 곧 보리요, 보리가 곧 번뇌이다.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오는 소리이지만, 우리는 해탈이 따로 있고, 지혜 또한 따로 있는 줄 알고, 번뇌 또한 따로 있고, 보리 또한 따로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열반(生死涅槃)이 상공화(常共和)=한 덩어리라 했는데, 그것이 한덩어리일 수 없다고 우리는 자꾸 고집하니까 쉽게 깨닫지 못하는가 봐요.]

 

維摩詰說是法時(유마힐설시법시) 二百天子得法眼淨(이백천자득법안정)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

유마힐이 이러한 법을 설하였을 때, 2백의 천자들은 진리를 바르게 보는 눈=法眼이 맑아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을 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When Vimalakirti spoke this Dharma, two hundred celestial beings attained the pure Dharma eye. So I am not qualified to go ask him about his illness.

[구름이 아무리 많이 끼어도 태양 전체를 가릴 수 없듯이, 선이니 악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관념들은 마치 구름과 같은 것이고, 우리의 본성, 심지, 불성은 태양과 같아서, 구름이 다 가릴래야 가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과 구름의 관계같이 우리들 마음속에 떠 있는 관념의 상 구름이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大迦葉(대가섭) - 貧里乞食(빈리걸식)

[大迦葉(대가섭) 마하카샤파(산스크리트어: Mahākāśyapa) 또는 마하가섭(摩訶迦葉)은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이다.가섭 또는 대가섭(大迦葉)이라고도 하며, 의역하여 대음광(大飮光) 또는 대구씨(大龜氏)라고도 부른다.  

‘두타제일(頭陀第一)  가섭존자(迦葉尊者)’라고도 하며, 부처님보다 연세가 많았으며, 과거생 또는 출가하기 전에 음악가 이어서 수행자가 된 후에도 음악연주나 풍류를 보면은 정신을 잃고 멍하니 듣고 바라보았다는 전해지고 있다.
또 가섭은 과거생에 부처님 몸에 개금(改金)하는 시주를 많이 하여서 얼굴이 불그스럼하고 얼굴빛이 좋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인도의 왕사성 마하바드라의 거부였던 브라만 니그루다칼파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비팔라 나무 밑에서 탄생하였으므로 비팔라야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 청결한 인물로서 고타마 붓다의 신임을 받아 제자들 중에서 상위를 차지하였다. 고타마 붓다가 반열반에 든 후 비탄에 빠지거나 동요하는 제자들을 통솔하여 교단의 분열을 막았으며, 제1회 불전 결집을 지휘하였다.
영취산(靈鷲山)에서 고타마 붓다가 꽃을 꺾어 보였을 때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이심전심으로 이해하고 미소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고사(故事)가 전해진다. 선종에서는 마하가섭을 선법(禪法)을 받아 이어준 제1조로 높이 받들고 있다.

○염화미소(拈華微笑, Flower Sermon)는 마하가섭이 석가모니로부터 법을 전해받았다는 설화이다. 삼처전심은 염화미소,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곽시쌍부(槨示雙趺)를 말한다. 중국 송(宋)의 회암지소가 저술한 『인천안목(人天眼目)』에는 "대범천왕이 영산에 와서 석가모니께 바라화를 바치고 중생들을 위한 설법을 청하자 석가모니가 단위에 올라가 꽃을 들어 보였다. 대중들 가운데 여기에 응대하는 자가 없었는데 유독 금색의 가섭이 파안 미소했다. 그러자 석가모니가 '나의 정법안장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고 나온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대범천왕문불결의경』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은 1004년 발간된 『전등록』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 즉 가짜로 알려진 경전으로, 염화미소는 중국 선불교에서 만들어졌다. 최초의 기록은 1036년에 등장한다.]

 

佛告大迦葉(불고대가섭)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 대가섭(Mahkyapa)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The Buddha said to Mahakasyapa, Go on your way to Vimalakirti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나제가섭, 가야가섭 등 경전에 여러분의 가섭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분별하기 위해서 흔히 마하가섭이라 부릅니다.]

 

迦葉白佛言(가섭백불언) 世尊(세존) 我不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

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에게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Mahakasyapa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cannot visit him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我昔(억념아석) 於貧里而行乞(어빈리이행걸)

왜냐 하면 憶念=기억하건대, (생각해 보니) 我昔=저는 옛날 貧里=가난한 마을에서 걸식을 행하고 있었는데, 

Why is that ? In the past, I was once begging for food in a poor village 

[가섭존자는 가난한 사람들은 과거생에 복을 짓지 못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니까, 그 사람들에게 복 지을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자비심에서 늘 가난한 동네를 찾아다니면서 걸식하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時維摩詰來謂我言(시유마힐내위아언) 唯 大迦葉(유 대가섭)

그 때 유마힐이 저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대가섭이여,

when Vimalakirti came to me ans said, Oh mahakasyapa! 

有慈悲心而不能普捨豪富(유자비심이부능보사호부) 從貧乞(종빈걸) 豪 호걸 호

자비심을 가지면서도 널리 펴지 못하고, 이같이 부잣집을 내버려두고 가난한 사람만 쫓아가 걸식을 하니, 

You are compassionate but not yet all-embracing, and that is why you have given up begging for alms from the rich and powerful and have your eyes fixed only on the poor.

[부자는 부자대로 복 지어야 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복 지어야 옳은데, 자비심이 넓지 못한 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迦葉(가섭) 住平等法(주평등법) 應次行乞食(응차행걸식)

가섭이여, 평등한 법에 머물러 마땅히 차례대로 걸식해야 합니다. 

Mahakasyapa, abide in the Dharma of equality, and ask for alms in accord with this order.

[가난하고 부자라는 외형적인 면을 보는 것은 차별심이니까, 부처나 중생이나 차별없이 갖추고 있는 본래 평등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차제걸이(次第乞已) ​ 가식(七家食)= 금강경에서 말하는 걸식(乞食)은 불교의 근본정신이라 할 수 있는 차별없는 마음을 실천하기를 가르치는 칠가식(七家食)에서 비롯한 것인데, 칠가식은 부처님이 날마다 성안으로 들어가서 먹을 음식을 빌 때는, 어느 집에서 시작을 하여, 무엇을 얻든 차례대로 일곱 집만 다닌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오늘 일곱 집을 다녔으면, 다음 날에는 여덟 번째 집에서부터 다시 일곱 집을 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칠가식(七家食)이 걸식의 문화로 자리하게 된 연유는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섭존자는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복 짓게 하려고 가난한 집만을 찾아다녔고, 반면에 수보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부잣집만을 골라 찾아 다녔는데,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이 착하기는 하나, 분별하는 그 마음 자체가, 분별과 차별을 일으키는 잘못된 마음이기에, 선별하는 제자들의 잘못된 분별과 차별을 깨우치는 뜻에서, 몸소 차례대로 일곱 집에서 음식을 구하였고, 이것으로 이른바 상(相)을 떠나서 반야의 진리로 드는 문을 연 것이다.]

 

爲不食故(위불식고) 應行乞食(응행걸식)

먹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걸식을 해야 하며, 

Do not even think about eating, but beg without the thought of begging.

[위불식고(爲不食故) 응행걸식(應行乞食)을 그대로 해석하면, 먹지 않기 위해서(때문에) 걸식을 행한다.

‘먹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으로, 수행자가 배고파서, 몸을 유지하려고 걸식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으로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爲壞和合相故(위괴화합상고) 應取揣食(응취단식) 揣 잴 췌, 잴 취, 둥글게 할 단, 

(5온에 의해 임시적으로) 뭉쳐진 (육신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함이니, 마땅히 주먹밥=揣食을 먹어야 하며,

One should take food and drink to break the appearance of convergence. 

[揣食(박식, 췌식, 단식)= 덩어리로 된 밥. 숟가락으로 밥을 먹을 때 한 숟가락이면 박식이 됩니다. 인도에서는 손으로 뭉쳐서 먹으니까 박식이라고 합니다.

爲壞和合相故=인연과 모든 조건들이 화합해서 이루어진 화합상을 깨뜨리면 공한 것으로, 사대가 결합해서 된 육신을 공한 것으로 볼 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화합상을 본래 화합한 것이 아닌, 공한 것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화합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 형상이 본래 공한 것으로 볼 줄 알고 한 덩어리의 밥을 취한다. 밥알 하나하나가 하나의 덩어리가 되듯이, 원래 공한 것인데 인연에 의해서 하나의 덩어리가 된 것으로 보고 박식을 취한다는 뜻입니다] 

 

爲不受故(위불수고) 應受彼食(응수피식)

(생사의 과보를) 받지 않기 위한 까닭으로 마땅히 그 음식을 받아야 하며, 

For the sake of not receiving, one should receive food from others. 

[받지 않기 때문에 저 사람의 밥을 받는다. 우리는 받으면 받는 게 있지만, 받는 것이 없는, 말하자면 받지 않은 정신으로, 不食=먹어도 먹는 것이 아니고, 또 밥을 받아도 받음이 없는, 그런 도리로써 밥을 받아야 제대로 밥을 받는 것이다.

받았으니 아이구, 감사하다, 이 은혜를 언제 갚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은 우리의 상식이지만, 유마거사의 한 차원 높은 입장에서는 그것이 안 맞는 것으로, 받아도 받음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은혜를 모르는 것 같지만,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 차원이 아닌, 줘도 주는 게 없고, 받아도 받음이 없어야, 제대로 주고 제대로 받는것이라는 것입니다.

관삼륜청정 (觀三輪淸淨)하야 불위도용(不違道用)이로다’ → ‘삼륜(三輪)=베푸는 사람, 베푸는 물건, 그 베품을 받는 사람이 청정(淸淨)= 공함을 관하라’, 그래서 불수, 불식이라는 말입니다.]

 

以空聚想(이공취상) 入於聚落(입어취락)

(이 몸은) 空聚=사람이 살지 않는 빈 마을이라는 생각으로 마을에 들어가야 하며,
Enter a village while viewing it as empty aggregates. 

[공취(空聚)= 텅 빈 마을이라는 생각으로 취락에 들어간다. 저 마을에 가면 누가 살고있다는 분별심을 가지고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所見色與盲等(소견색여맹등) 所聞聲與響等(소문성여향등) 響 울림 향

형상=色을 보아도 장님과 같이 보아야 하며, 소리를 들을 때는 메아리를 듣는 것과 같이 하며, 

To see the worldly forms and colours without distinction of beauty or ugliness, without preferences or dislikes. Hear all beautiful sounds as natural echoes in the valley. 

[소견색(所見色)= 형상을 본다는 것을 여맹등(與盲等)=맹인이 더불어 똑같이 하고,

마을에 탁발하러 가면서 온갖 것을 다 보지만, 맹인이 사물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과 같이 하라. 꽃을 보고 좋아서, 좋은 것을 느끼되 마음에 머물러 가지고 있으면 안되고, 맹인이 본 것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여향등(與響等) 메아리는 본래 소리가 아니고, 본래 소리의 울림이니까 메아리를 듣는 것과 같이 하라.]

 

所嗅香與風等(소취향여풍등) 所食味不分別(소식미불분별)

향내음을 맡아도 바람과 같이 맡고, 먹고도 맛을 분별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The fragrance that one smells has no difference from the wind.  When eating something, to have no distinction. 

[소후향(所齅香)= 향기로운 냄새 맡아도, 여풍등(與風等)=바람이 스치는 것으로 더불어 같이 한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면, 그 뿐이지, 향기 좋다 나쁘다는 분별이 없는 것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소식미(所食味)= 먹고 그 맛을 불분별(不分別)= 분별하지 말며,  맛있다 맛없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受諸觸如智證(수제촉여지증) 知諸法如幻相(지제법여환상)

諸觸=온갖 감촉을 受=느낄 때에도 智證=지혜를 증득하듯이 해야 하며,

또 존재하는 모든=諸法을 환상과 같이 알며, 

To receive all sensations of touch as if they were the realization through wisdom. Knowing that all Dharma is illusory and has no self-nature or any external nature. 

[이 몸이 느끼는 감촉, 따뜻하다 춥다 등을 받아는 들이되, 지혜를 깨달을 때의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無自性(무자성) 無他性(무타성) 本自不然(본자불연) 今則無滅(금즉무멸)
법에는 자성도 없고 타성도 없으므로 그 자체로는 생기지 않으므로 지금도 멸함이 없습니다.

Originally, there was nothing, so now there’s no extinguishing. 

[無自性(무자성)= 자기 자체의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

無他性(무타성)= 다른 힘이나 조건에 의해서 존재하는 어떤 것도 없음을 알아야 된다]

본자불연(本自不然)= 본래 스스로 연(然)=일어나다, 생기는 것이 아닌, 금즉무멸(今則無滅) 지금 없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니다.  옛날에 일어난 것이 없으니까, 지금 없어질 것도 없다는 뜻으로, 여여한 중도(中道)의 입장입니다. 생기고 없어지는것이 아니라 본래 평등한 법의 이치, 중도의 경지를 걸식을 통해서 깨달아야 된다.
공부란 경을 보는 것만이 아니고, 걸식하면서 거리를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낌을 통해서 철저한 공부가 되어야 된다.
일체가 공(空)한 것으로 아는 것 즉 중도의 이치를 알아서 평등한 도리를 깨달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걸식 그 자체가 아주 좋은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迦葉(가섭) 若能不捨八邪(약능불사팔사) 入八解脫(입팔해탈)

以邪相入正法(이사상입정법)

가섭이여, 능히 여덟 가지 사도(8정도에 반대되는 8악도)를 버리지 않고서도 8해탈(解脫)에 들어가며, 사악한 모습을 지닌 채 정법(正法)에 들어가며, 

Mahakasyapa, if one can enter the eight liberations without deliberately abandoning the eight evils, then one can enter the true Dharma with the countenance of evil. 

[若能不捨八邪= ‘중생들은 팔사도를 행한다’ → 바르게 보지 않고 삿되게 본다, →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 보통 중생들의 행위인데, 여기서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행한다 즉 편견=여덟 가지 삿된 법을 버리지 않은 채 여덟 가지 해탈에 들어간다. 

八邪=여덟 가지 삿된 도리는 어리석은 중생들의 보통 삶을 말하는 것으로, 그런 어리석은 중생의 보통 삶에서  八解脫=해탈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불교인의 상식은 팔정도를 닦아야 해탈을 얻는다는 것이지만 유마거사의 차원은 중생들의 편협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해탈을 얻는다는 것으로, 이것이 진정한 중도입니다. 삿된 법이라지만 삿된 법이 삿된 법이 아니라, 중생들이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니까, 그러한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꽃과 꽃잎의 차이가 없는, 즉 꽃잎과  꽃, 줄기, 뿌리의 가치가 똑같은 것이다. 어떠한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누어서 보지 않고, 그대로 평등하게 보는 안목이 있어야 되는 그것이 진짜 도(道)고 중도(中道)입니다.

이사상(以邪相)= 이러한 삿된 모양으로 입정법(入正法)= 정법에 들어간다. 어리석은 차원에서 따질 것 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以一食施一切(이일식시일체) 供飬諸佛(공양제불) 及衆賢聖(급중현성) 然後可食(연후가식)

한 끼의 밥으로도 모든 중생에게 베풀며, 모든 부처와 온갖 성현에게 공양한 다음에야 먹을 만합니다. 

If you can offer all sentient beings and all the Buddhas and sages in the ten directions with one food, then you can eat. 

[이일식(以一食) 시일체(施一切)은 우리가 식사할 때 합장하고 ‘공양시방불(供養十方佛)’과 같이, 내가 먹을 한 그릇의 밥으로 공양제불(供養諸佛)과 더불어, 급중현성연후(及衆賢聖然後)에게 공양 올린다는 그 한마디 말과 그 한 생각이 시방불에게 공양 올리는 것과 같이 한 그릇의 밥으로 일체 중생에게 다 베푼다는 것입니다

식사하실 때 꼭 공양시방불 하십시요 분명히 그런 도리가 있습니다.]

 

如是食者(여시식자) 非有煩惱(비유번뇌) 非離煩惱(비리번뇌)

만약 이와 같이 먹는 사람은 번뇌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번뇌가 없기 때문도 아니며, 

He who eats like this has neither afflictions nor is free from afflictions; 

[여시식자(如是食者)= 이와 같이 먹는 사람은 비유번뇌(非有煩惱)며, 비리번뇌(非離煩惱)니라, 번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번뇌를 떠난 것도 아니다, 번뇌가 있다 없다, 없앤다는 것은 소승적인 생각입니다. 번뇌를 번뇌로 보는 차원을 떠나서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고,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것으로 보는 차원이 되어야 됩니다.

생각이 너무 굳어져 있고, 편협 되어 있어서, 선을 그어놓고 이 것은 버려야 되고, 이것은 취해야 된다는 나름의 원칙대로 사는 중생들의 잘못된 소견, 굳은 소견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캄캄한데 불을 켜면 밝아지는 것은 그 어두움이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어두운 그 자리가 그대로 밝은 자리가 된 것이니까, 밝고 어두운 것이 둘이 아닌 것으로, 이 공간에는 아무 변화 없이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본래의 모습, 한 물건 또는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것으로, 단지 부처라 이름하고, 중생이라 이름 하고, 번뇌라고 이름하고, 보리라고 이름 붙인 것일 뿐이니까, 번뇌도 되고 보리도 되는 것이지, 사실 번뇌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 보리의 자리이고, 생사하는 그 자리가 바로 열반의 자리로 그것이 둘이 아닙니다.

유마거사는 둘이 아닌 이치를 알아서 생사와 열반, 보리와 번뇌를 나누지 않으니까 번뇌가 있는 것도 아니요, 번뇌를 떠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번뇌라 하자니 보리이고, 보리라 하자니 또 번뇌라서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非入定意(비입정의) 非起定意(비기정의) 非住世閒(비주세간) 非住涅槃(비주열반)

또 定意=선정의 마음에 (삼매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선정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며,

이 미혹한 세간에 非住=머문 것도 아니고, 열반에 非住= 머문 것도 아닙니다.
neither the thought of entering nor leaving meditative consciousness; not abiding in the present world, nor abiding in nirvana. 

[세간에 머물지 않으면 열반에 있어야 되는데, 열반에 머문 것도 아니라는 것은 중도(中道)입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니고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때로는 세간도 되고, 때로는 열반도 되는 것이니까, 세간에 머물지도 않고, 열반에 머물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반도 세간도 떠나있다는 말 또한 아니고,  동시에 함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공부할 때에는 반부처 노릇하다가, 아귀일 때는 아귀하고, 부처일 때는 부처가 되는 것이 중도인데, 나는 아귀도 부처도 싫으니까 그냥 중간 쯤되는 사람 할려고 해도 그렇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방이 어둡기만 한 것도 아니고, 밝기만 한 것도 아니요, 때로는 밝다가, 때로는 어둡기도 한 것입니다.

불교 이론은 어떤 가설을 설정해 놓은 것을 우리가 억지로 이해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그대로 있는 이치, 진실을 그대로 설법하는 것입니다. 이치가 아닌 것을 경전에서 설하는 것은 절대 없습니다.

우리가 한 순간 한 순간  살아가는 그 이치가 여기에서 말하는 중도의 자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간에 머물고 있는 것도 아니오, 열반에 머문 것도 아니다. 지금 이렇게 좋은 공부를 하는 순간을 세간에 머문다고 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그렇다고 열반에 머무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좀 건방스러운 것 같은 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그런 차원으로 이해를 해야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순간은 열반에 머무는 것도 아니오, 세간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또 세간에 있을 수도 있고 열반에 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 중도입니다. 즉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순간이 알고 보면 중도인 것입니다.]

 

其有施者(기유시자) 無大福無小福(부대복무소복)

그 보시하는 사람에게는 큰 복도 없고, 작은 복도 없으며, 

For the giver of alms he does not receive greater or smaller blessings, 

[베푸는 사람에게 대복도 소복도 없다. 너는 조금 베풀었으니까 소복이고, 나는 많이 베풀었으니까 대복이라고 확정해서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풀고도 복이 없을 수가 있고, 정말 지혜가 있어야만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 수가 있는 것이지요.

설산동자가 사슴을 숨겨주고는, 사냥꾼이 와서 물을 때 다른 방향으로 갔다고 가르쳐 준 것이, 그 사슴 한 마리 잡으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온 산천을 헤매다가 거의 다 잡을 상황에서, 헛걸음하게 만들었으니까 사냥꾼의 입장에선 나쁜 사람이 되지만, 사슴의 입장에선 고마운 생명의 은인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꼭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不爲益不爲損(불위익불위손) 是爲正入佛道(시위정입불도) 不依聲聞(불의성문)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니니, 이같이 (손익을 생각하지 않고) 하는 것이야말로 바르게 불도(대승)에 들어가는 것이며, 성문(소승)의 길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nor is it for gain or loss. But for the sake of proper entry to the Buddha’s Way, not relying on the path of the sravaka. 

[시위정입불도(是爲正入佛道)= 이것은 바로 불도에 들어가는 것이다. 즉 그렇게 되어야 제대로 불도에 들어가는 것이고

불의성문(不依聲聞)= 성문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성문(聲聞)은 소승이고, 불도(佛道)라고 하는 것은 바른 깨달음의 길, 대승입니다.]

 

迦葉(가섭) 若如是食(약여시식) 爲不空食人之施也(위불공식인지시야)
가섭이여, 이와 같이 먹는다면 남의 보시를 헛되이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Mahakasyapa! Only when you beg for food and eat with such an attitude, you are not eating the giver’s alms in vain. 

[가섭이여 만일 이와 같이 식사를 하면, 다른 사람이 베푸는 밥을 공식(空食)=공짜로 먹는 것이 안 된다.

가난한 집에 가서 걸식을 해서 복을 짓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어떻게 보면 좋은 것 같지만, 실은 차원이 얕고 좁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時我 世尊(시아 세존) 聞說是語(문설시어) 得未曾有(득미증유)

세존이시여, 그 때 저는 이같이 설하는 말을 듣고서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라 생각하고는 

Then, World Honoured One, when I heard those words which I have never heard before, 

卽於一切菩薩(즉어일체보살) 深起敬心(심기경심) 復作是念(부작시념)

모든 보살들(세속 보살, 재가 거사)에 대해서 깊이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으며, 또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I received what’s unprecedented and felt a deep reverence for all bodhisattvas. I thought to myself, 

[그 후로는 곧 모든 보살들에게 깊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여기서 보살은 세속보살을 말하는 것으로 대승보살을 말하는 것이니까 유마거사가 보살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가섭존자는 출가해서 공부하는 사람이 제일인 줄 알았으나, 유마거사 만나서 이 법문 들은 다음부터는 세속의 보살을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斯有家名(사유가명) 辯才智慧乃能如是(변재지혜내능여시)

斯=이 분이 재가에 있으면서 변재와 지혜가 이럴 수가 있는데, 

Who is this householder, who is so wise and so eloquent? 

[사(斯)= 이 사람은 속인, 가명(家名)= 재가거사, 집에 있는 사람, 속가거사라는 뜻]

其誰聞此不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기수문차부발아뇩다락삼막삼보리심)?

그 누가 이를 듣고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Who would not, upon hearing his advice, aspire towards the unexcelled complete enlightenment? 

[유마경은 출가한 좁은 소견을 가진 스님네를 낮추어 보는 것과 보이지만, 사실은 세속에 있는 불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분발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바로 이 구절이 더욱 그렇습니다.]

 

我從是來(아종시래) 不復勸人以聲聞(불부권인이성문) 辟支佛行(벽지불행)

저는 이 때부터 다시는 성문, 벽지불의 수행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Since then, I no longer advise people to pursue the practice of s sravaka or pratyekbuddha. 

是故不任詣彼問疾(시고불임예피문질)

그러므로 그를 찾아가 문병을 하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World Honoured One! That’s why I do not dare to go to him to see his ill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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