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眞如(진여)의 自體相(자체상)을 거듭 밝힘

問曰(문왈) 上說眞如其體平等(상설진여기체평등) 離一切相(리일체상)

물음, 위에서 설명하기를, "진여 그 자체=其體는 평등하여 일체의 모습을 떠났다"고 하였으나, 

云何復說體有(운하부설체유) 如是種種功德(여시종종공덕)

어찌하여 다시 자체에 이와 같은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설하는가?

答曰(답왈) 雖實有此諸功德義(수실유차제공덕의)

답함, 비록 실로 이 모든 공덕의 의미(뜻)가 있지만,  

而無差別之相(이무차별지상) 等同一味(등동일미) 唯一眞如(유일진여)

차별의 모습이 없고, 평등하고 동일한 한 가지 맛으로, 유일한 진여일 뿐이다.

此義云何(차의운하) 以無分別離分別相(이무분별리분별상) 是故無二(시고무이)

이 의미가 무엇인가? 분별이 없으므로 분별의 대상을 여의었으니, 그러므로 둘이 아니다.

 

[진여의 공덕은 한 맛으로 같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중생들의 업식 때문에 다르게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무이(無二)라고 하였다. 

* 고순호 : 진여는 온갖 相을 떠났다고 하면서 다시 여러 차별적인 공덕의 상을 설하니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상을 떠났다는 것은 여실공의 면이며, 공덕이 있다는 것은 여실불공의 면을 이른 것이니, 이런 문답은 이를 회통시키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물처럼바람처럼]

 

[앞에서 진여의 덕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여 질문을 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여 해명한다. 일체가 진여이고, 진여 아닌 것은 없는 것이므로 진여에 대비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일 진여에 대비되는 것이 있다면, 진여는 상대적 존재가 되어, 그것과 비교하여, 진여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설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체가 진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진여는 비교를 절(絶)한 것이 되어, 진여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다. 그 점을 설하여 '평등진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여를 아무것도 없는 무내용(無內容)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진여는 비교가 끊긴 자리이지만, 그러나 무한히 풍부한 내용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말로서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진여는 무한히 풍부한 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상대적 존재가 아닌 것이므로 '차별의 상'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평등일미(平等一味)이고 오직 하나의 진여(唯一眞如)라고 말하는 이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진여는 어떠한 별개의 것과 비교하여 설한다면, 진여에 무한히 풍부한 공덕을 꺼내어 나타낼 수가 있으나, 진여 그 자체에 대하여 설한다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라든가 평등진여(平等眞如) 또는 일심(一心)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이다.-전종식]

 

[여기서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입장에서 진여의 작용을 자문자답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물음으로 앞에서 설명하길, "진여 그 자체는 평등하여 일체의 차별적인 모습을 떠났다고 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시 진여의 자체에 이와 같은 갖가지 공덕의 차별적인 모습이 있다고 하는가"라고 자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답하길, 비록 실제로 이러한 모든 공덕의 모습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텅 빈 진여(眞如)의 자체에는 차별적인 모습이란 없고 평등하고 한결같은 진여일 뿐이라고 간결하게 답하고서 다시 의문을 제기 하면서 답하였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인가? 허망하게 분별하는 주관적인 허망한 마음이 없기 때문에 분별할 객관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주관·객관의 상대적인 의존관계가 없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진여자체와 그 공덕상은 두 모습이 없다고 제기한 의문에 답하였습니다.-수선]

 

復以何義(부이하의) 得說差別(득설차별) 以依業識生滅相示(이의업식생멸상시)

다시 무슨 의미로서 차별하여 설할 수 있는가? 업식의 생멸하는 모습에 의지하여 나타낼 수 있다. 

 

[元曉 : 以依業識生滅相示 - 생멸상 내에 모든 허물이 있지만, 다만 그 근본만을 들었기 때문에 업식(業識)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런 허물에 대하여 모든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此云何示(차운하시) 以一切法(이일체법) 本來唯心(본래유심) 實無於念(실무어념)

이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일 뿐, 실제론 망념이 없지만, 

而有妄心(이유망심) 不覺起念(불각기념) 見諸境界(견제경계) 故說無明(고설무명)

망심이 있어서, 깨닫지 못하여 망념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므로, 그러므로 설하여 무명이라고 한다. 

 

[本來唯心 實無於念 而有妄心 :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본래 허망한 생각이라는 것도 없지만, 허망한 생각이 있어서---’ 허망한 생각도 꿈과 같은 것이고, 그것이 지어낸 경계도 역시 꿈과 같은 것이다.]

 

[본래 마음은 망념이 없는 무념(無念)이지만, 현실세계의 우리의 마음은 망심(妄心)이며, 무명에 의하여 발동되어, 불각에서 염(念)을 일으켜, 분별의 인식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인식계가 실재라고 망상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무명(無明)'이라고 말한다.]

 

心性不起(심성불기) 卽是大智慧光明義故(즉시대지혜광명의고)

심성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음의 본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그것이 대지혜광명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성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은 본래의 힘을 발휘하여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성격을 나타낸다.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인식계가 '대지혜광명'이다. 이것은 범부가 외계를 보려하는 전식(轉識)의 작용과 대비(對比)되는 불타의 인식계이다.]

 

若心起見(약심기견) 則有不見之相(즉유불견지상)

만약 마음이 견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모습=不見이 있는 것이나, 

 

[그러나 범부의 마음에는 망념이 일어나 보려고 하는 능견상(能見相)이 있어, 이 보려고 하는 능견상 자신은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불견(不見)의 상(相)'으로 남아, 그것이 마음의 암흑(暗黑) 부분이 된다. 마치 보고 있는 눈이 보는 눈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진여의 자체와 그 지닌 공덕상이 둘이 아니라면 다시 무슨 의미 때문에 차별적인 공덕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업식의 생멸하는 모습에 의지하여 그것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진여는 본래 허망한 생각으로 요동하지 않아 차별적인 모습이란 없는데도 공덕의 모습인 이 의미는 무엇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인 유심(唯心)일 뿐, 실제론 허망한 생각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허망한 업식심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무명의 불각(不覺)으로 인하여 허망한 생각을 일으켜 모든 차별적인 경계를 주관이 보기 때문에 이를 무명의 업식심이라고 설명하지만, 마음의 본질에서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바로 그것이 대지혜광명의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심성에서 허망한 견해를 일으킨다면 보지 못하는 모습도 있겠지만, 심성이 허망한 견해를 여읜다면 바로 법계를 두루두루 관조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무명의 망심인 염법을 의지하여 진여정법에 상반되었으므로 진여엔 망심의 상대인 대지혜광명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허망한 마음으로 요동하면 진실하게 식별하여 아는 것은 아니며, 허망한 마음으로 움직이는 염법은 자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망상으로 요동하면 망상이며 망상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망상은 실제의 자성은 없이 움직였다 하면 생멸염법의 인연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알 수 있는 것은 망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진실하게 식별하고 알아 염법을 여읜 진여정법이라는 점입니다.]

 

心性離見(심성리견) 卽是遍照法界義故(즉시편조법계의고)

마음의 성품(본성)이 견을 여의면 이것이 곧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망견으로 보면,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는 것 같지만, 실은 허깨비와 같은 것을 본다. 이를 여의었을 때 실상을 볼 수 있다.]

 

[진여에는 보려는 주관과 보이는 객관이 없는, 다시 말하면 주객(主客) 분열이 없다함은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으나, 그렇다고 심진여의 상(相)에 인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여의 인식은 마치 거울이 사물을 반영하듯이 보려는 욕망 없이도 자연의 업(業)으로 있는 그대로의 인식(認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심진여(心眞如)는 일체의 상을 떠나 있어 상대적 의미로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지만, 이를 상대적 미망(迷妄)의 인식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서는, 부득이 차별이 있는 것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이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범부는 여래장의 무명이 발동하여 아리야식이 되고, 여기에서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지식(智識) 상속식(相續識) 등 미망의 인식세계가 성립되어, 마음에 찰나(刹那)의 생멸이 일어나고 상대적 인식세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범부에게 진여를 설하기 위해서는 '평등의 진여'를 부득이 '차별의 방법'으로 설하는 것으로서, 망심(妄心)에 대하여 진여의 덕(德)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차별상'에 의하는 것이지만, 진여 자체에는 차별상이 없다는 것은 앞에서도 설명한바 있다. 우리들의 인식세계는 '자기'와 '대상 세계'가 인식되고, 일체법이 있으나, 그것은 모두가 마음에 귀착되는 것으로서, 오직 마음만인 유심(唯心)인 것이다.]

 

若心有動(약심유동) 非眞識知(비진식지) 無有自性(무유자성)

만약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답게 식별하여 아는 것이 아니며, 자성이 없어서,

非常非樂(비상비락) 非我非淨(비아비정) 熱惱衰變(열뇌쇠변)

항상함도 아니고=非常, 즐거움도 아니며=非樂, 아도 아니고=非我, 청정함도 아니며=非淨, 뜨거운 번뇌로 쇠잔하고=熱惱衰, 변하면=變, 

 

[그러나 이같은 보고자 하는 '능견(能見)'의 집착을 떠나면 암흑이 사라져 온갖 사물이 바르게 보여, 보는 힘이 법계(法界)를 두루 비치는 것이다. 이것은 불타가 보는 '진실의 세계'로서 범부가 보는 경계상(境界相)인 현식(現識)의 작용과 대비된다. 여래(如來)의 마음은 적정(寂靜)이지만 범부의 마음에는 망념의 동상(動相)이 있다. 그러므로 진실을 진실 그대로 판단하지 못하여 피아대립(彼我對立)의 일상적 인식이 있고, 선악의 판단 또한 바르지 못하다. 즉 '진(眞)의 식지(識知)'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진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불타의 '진실식지(眞實識知)'는 범부가 본능적으로 분별하는 '지식(智識)'의 작용과 대비된다. 불타의 본성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지만 범부의 마음은 망심으로서, 탐욕과 노여움, 어리석음 등의 번뇌에 오염되어 청정한 자성(自性)을 갖지 못하고 있다. 불타의 '자성청정심'은 범부가 망분별을 상속시켜 오염시키는 상속식(相續識)과 대비된다. 그 때문에 범부의 마음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성질이 없으며,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에 오염되고, 번뇌와 고뇌에 태워지고 힘을 잃어, 쇠진(衰盡)해간다. 불타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은 범부가 고락에 대하여 벗어나려하고 유지하려는 집착의 집취상(執取相)과 대비된다.]

 

[나아가 상(常)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정(淨)도 아닌 심성을 태우는 삼독의 뜨거운 네 가지 전도(顚倒)된 번뇌가 망염으로 천류하면서 쇠잔하며 변하면서 업에 속박되어 자유자재하질 못하게 됩니다. 이 염법에서 진여로 다시 돌이킨다면 진여자체엔 네 가지 전도(顚倒)된 번뇌의 반대인 진상(眞常)·진락(眞樂)·진아(眞我)·진정(眞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나아가서는 항하사를 능가하는 허망한 오염의 의미를 갖추고 있는데, 이 의미를 상대적으로 마주하기 때문에 심성이 허망한 생각으로 요동하지 않으면 항하사를 능가하는 모든 청정한 공덕상(功德相)의 의미로서 나타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허망한 마음을 일으킴이 있어 허망한 생각으로 분별할 만한 목전의 법을 다시 본다면 진여의 본성공덕에 부족한 오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법의 한량없는 공덕은 바로 일심(一心)이므로 다시 일심 밖에서 허망한 생각으로 분별할 만한 대상의 세계란 본래로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에 청정한 공덕상이 빠짐없이 만족한 것입니다. 이를 법신여래를 간직한 곳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앞의 여실공(如實空)의 진여자체만을 집착하여 여실불공(如實不空)인 그 공덕상을 의심하며 따져 물었던 것입니다]

 

則不自在(즉부자재) 乃至具有過恒沙等妄染之義(내지구유과항사등망염지의)

곧 자재하지 않으며=不自在, 나아가 갠지스강 모래들=恒沙보다 많은 헛된 물듦=妄染의 뜻을 갖추고 있어서,

對此義故(대차의고) 心性無動(심성무동)

이 뜻을 대비하기 때문에 마음의 성품=심성이 동하지 않으면 

則有過恒沙等諸淨功德相義示現(즉유과항사등제정공덕상의시현)

갠지스강 모래=恒沙보다 많은 모든 청정한 공덕의 상=功德相의 의미로서 나타냄=示現할 수 있으나,

若心有起(약심유기) 更見前法可念者(갱견전법가념자) 則有所少(즉유소소)

만약 마음이 일어나 다시 목전의 법을 보아 생각을 하는 자는 곧 부족한 것이 있을 것이다.

如是淨法(여시정법) 無量功德(무량공덕) 卽是一心(즉시일심)

이와 같은 청정한 법=淨法의 한량없는 공덕은 곧 일심이므로,

更無所念(갱무소념) 是故滿足(시고만족) 名爲法身如來之藏(명위법신여래지장)

다시 생각할 바가 없으니, 이런 까닭으로 원만한 구족이기에 이를 이름하여 법신여래의 장=法身如來之藏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불타의 공덕은 망심, 망념에 의한 번뇌로 말미암아 '청량불변자재(淸凉不變自在)'의 세계가 오염되고 생멸이 있어 쇠변(衰變)하고 번뇌에 속박되어 있어 자재(自在)를 잃고 있는 것이다. 불타의 청량불변은 범부가 이름붙여 헤아리는 계명자상(計名字相)과 대비되고, 자재(自在)는 업을 지어 고통받아 부자재한 기업상(起業相)과 업계고상(業繫苦相)과에 대비된다.
이상과 같이 범부의 망심에는 간지스강의 모래보다도 더 많은 무량한 망염(妄染)의 뜻이 있다. 그러나 이 무량한 망염은 심성이 가동하지 않으면, 역으로 무량무변의 청정한 공덕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마음에 망염이 일어나, 조금이라도 마음밖에 무엇이 실재한다고 인식한다면 그것은 청정한 공덕에 결함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미세한 염(念)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불타의 청정한 무량공덕은 부동(不動)의 일심(一心)에서 성립되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어떠한 망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심성에 무량한 정공덕(淨功德)이 가득 구족하고 있을 때, 그것을 이름하여 법신(法身) 또는 여래장(如來藏)이라 부른다.

이상에서 체(體)와 상(相)의 이대(二大)를 자체상(自體相)으로 결합 설명하였으므로 다음에는 진여의 용대(用大)에 대하여 설명한다.]

 

[머리 식히기;

어느  누군가 부처님께 우바리는 전생에 무엇을 했기에 저렇게 수행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우바리의 전생 이야기를 해줍니다옛날 바라나 성에 범덕왕이 있었는데 대지가 겁게 불타고 있는 여름  그는 왕궁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사나이가 왕궁 근처를 지나가며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혼자서 빈둥거리며 음탕한 래를 부르고 있으니 풍속을 해칠  같아 왕은 신하에게 명하 그를 잡아오게 하여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며 어떤 일을 하길래 한낮에 그런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그러 사나이가 말했습니다. “저는 우바가라고 하오며 친구에게 려준 금화  닢을 받으러 가는 중입니다.” 왕은 저렇게 내버려 두면 사방에 음탕한 노래를 퍼트릴  같아 말합니다. “우바가 내가 그대에게 금화  닢을 줄테니 가지 말고 여기에 있거 .” “훌륭하십니다대왕이시여 닢을 주실 바에 이왕   더해  닢을 주시옵소서그럼 저는 마을에  빌려준   받고 금화  잎으로 저의 부인과 함께 오욕락을 즐기겠습니.” 그러자 범덕왕이 마을에 가지말고 자신과 함께 있으면  여덟 닢을 주겠다고 합니다그러자 우바가가 왕에게 말했습니다. “착하신 대왕이시여크게 기뻐하소서저는 다시  닢을  원하옵니다그러면 아홉 닢이 되고 저는 마을에 내려가  닢을 받아  닢으로 부인과 함께 오욕락을 즐기겠습니다.”  우바가란 인물에 대해 흥미가 점점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계속되어 금화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결국 범덕왕은 우바가에게 마을에 가지말고 자신과 함께 있으면  고을 주겠다고까지 합니다그제서야 우바가는 승낙하고  고을 다스리게 되자 일찍 일어나고 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하며 심으로 대왕을 섬겼습니다대왕은 우바가를 진심으로 믿고 라의 반을 다스리게 하였고 왕궁 창고의 반도 우바가에게 주었습니다하루는 범덕왕이 우바가의 무릎을 베고 자고 있었는데 우바가가 생각을 합니다. ‘어찌  나라에  임금이 있을  는가내가 그를 죽이면 왕위를 취하여 혼자서  나라를 다스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칼을 빼려고 하다가 대왕이 지금까지 베풀어준 은혜를 생각하자 마음을 돌려먹었습니다그렇  번이나 망설이다 우바가는 마침내  소리로 울었습니다대왕이 잠에서 깨어 이유를 물었습니다우바가는 자신이 나쁜 마음을 먹고 대왕을 해칠 생각을 하였다고 고백을 했습니다바가는 나쁜 마음을 참회하고 출가 수행자가 되었습니다은혜 생각 못하고 악한 마음이 일어났다는 것에 견디지 못해 출가  우바가는 결국 수행 끝에 벽지불 연각의 단계를 이루게 됩니 그렇게 도를 이루게 되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범덕왕의 이발사인 항가바라가 있었습니다그는 매우 성실하여 우바가가 떠난  대왕의 관심은 항가바라에게 쏠렸습니다대왕은 그를 매우 좋아해 많은 재산을 준다고 하였지만 항가바라는 모두 거절하였습니다오히려 우바가에게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항가바라가 여러 차례 청한 끝에 결국 범덕왕은 항가바라의 출가를 허락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벗들이여 들어라  우바가가 지금의 나이며범덕왕은 나의 부친이신 정반왕의 전생이우바가 밑에서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며 수행정진한 항가바라는 우바리의 전생이다이러한 인연으로 우바리는 오백 대신 들과 정반왕의 예배를 받았느니라또한 비구들이여나의 제자 중에서 계율을 갖는데 가장 으뜸인 사람은 우바리 비구임을 알지니라그는 혼란과 암흑이 난무하는 시대일 수록 더욱  빛날 것이니라계율은 인내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무적이니.” 규칙적이고 질서 있는 매일매일의 삶이 계율입니다수행 이란  규칙적인 삶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과연  생에 어떻게 하는 것이 위대한 삶일까요독일 철학자 칸트는  1초의 시간도 어긋남 없이 살았습니다우리는 항상 흩어진 생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계율을 지키는  만큼 빠른 길은 없을 것입니다계율은 출가 수행자만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중생도 계율을 지키며 질서있게 산다면  좋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흐트러진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계율이 필요합니다.-통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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