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眞如熏習(진여훈습)
眞如熏習義有二種(진여훈습의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진여가 훈습하는=眞如熏習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自體相熏習(일자자체상훈습) 二者用熏習(이자용훈습)
첫째는 자체상훈습이며, 둘째는 용훈습이다.
自體相熏習者(자체상훈습자) 從無始世來具無漏法(종무시세래구무루법)
자체상훈습이란 비롯함이 없는(시작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무루의 법을 갖추어서
備有不思議業(비유불사의업) 作境界之性(작경계지성)
불가사의한 업을 갖추어 경계의 성품을 짓는다.
[지운 : 無漏(무루)란 새어나감이 없다는 뜻인데, 부동(不動), 공(空)을 말한다. 번뇌가 없음을 말한다.[공] 이것은 가만히 있지만 외부에서 자극을 주면 작용을 한다. 무루법을 갖추고 생각할 수 없는 진여의 작용을 준비하여[不空], 경계를 만드는 성품이다[空].
* 元曉 : 具無漏法 備有不思議業이란 본각 불공의 문에 있는 것이다.
作境界之性이란 여실공문의 경계에서 나아가 말한 것이니, 이러한 본래 가지고 있는 경지(境智)의 힘에 의하여 암암리에 망심을 훈습하여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는 마음 등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 고순호 : 具無漏法 備有不思議業 作境界之性 - 진여는 본래 무루법과 부사의한 업용을 갖추고 있어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시각(始覺)의 관지(觀智)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여실불공], 그 관지의 대경이 되는 본각(本覺)의 성품까지 된다.[여실공]
* 憨山 : 진여 자체를 말한다면 중생들이 무시이래로 원래 갖추고 있는 본각무루의 법성인데, 이는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정인불성(正因佛性)인 것이다. 이것이 진여의 본체인데도 자체상이라고 하여 상(相)이라고 한 것은 자체에 상즉한 그 자체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는 여실공한 진여의 자체에 갖춘 여실불공한 정무루공덕의 모습이다. 이는 이른바 항하사와 같은 본성에 걸맞은 공덕에 해당한다. 備有不思議業이란 이 자체에 상즉한 진여의 공덕상에 불가사의한 업지의 작용을 빠짐없이 지니고 있어 외부의 세계에 있어서는 무정과 함께 경계의 근본[性]이 된다.
* 무루법이란 공의 측면에서 한 말이다. 무루(無漏)란 새어 나감이 없다는 뜻으로 불생불멸을 말하며, 불변(不變)을 말하며, 번뇌나 일체의 상이 없음을 말한다. 不思議業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불공(不空)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진여가 갖추고 있는 공덕을 말한 것이다. 진여를 체득했을 때는 고요하지만, 체득하지 못했을 때는 체득하도록 스스로 영향을 주어 깨달음에로 나아가게 한다. 이때 깨달음에로 나아가려는 것을 시각(始覺)이라고 한다. 경계의 성품을 짓는다는 것은 시각이 본각을 목표로 하되 그 본성이 공함을 말한다.-물처럼바람처럼]
[앞에서 설명한 망심훈습(妄心熏習)은 정법훈습(淨法熏習)으로서의 망심훈습이었으므로 진여(眞如)의 정화(淨化)작용이 망심에 훈습하여 이를 정화해 나가는 수행 과정이었다. 그러한 진여의 정화 작용이 어떠한 것인가를 다루는 것이 바로 진여훈습(眞如熏習)의 내용들이다. 진여훈습은 진여(眞如) 본래의 작용인 정화(淨化)시키는 힘을 말한다.
진여훈습에도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이고, 다른 하나는 용훈습(用熏習)이다. 진여에는 체(體), 상(相), 용(用)의 삼대(三大)가 있다함은 여러 번 밝힌바 있지만, 이 가운데 체대(體大)와 상대(相大)를 합친 진여의 작용이 자체상(自體相)훈습이다. 여기에서 스스로라는 「자(自)」자가 붙여진 것은 진여가 인격화되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여 그 자체는 법계일상(法界一相)이므로 자타(自他)의 구별이 없는 것이지만, 생멸문(生滅門)에서는 진여가 자성청정심으로서 인격화(人格化)되어 개인적(個人的)인 것이 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체상(體相)이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진여(眞如)가 스스로의 체(體)이며, 그 덕성인 지혜가 스스로의 상(相)이다. 이것은 아리야식(阿梨耶識)에 있어서는 각(覺)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심생멸문(心生滅門)에서는 자성청정심으로서의 활동이 있고, 그 활동을 통하여, 진여의 체(體)와 상(相)이 구별되고, 불타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용(用)이 있어, 진여의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과 용훈습(用熏習)이 설해지는 것이다. 진여의 자체상훈습은 범부(凡夫)와 이승(二乘), 보살(菩薩)등에 설해지는 것이며, 불타에 대하여는 이미 자체상(自體相)이 완전히 실현되어 있으므로 특별히 진여의 훈습작용을 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용훈습(用熏習)은 저절로 진여의 작용이 중생 구제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불타(佛陀)나 대보살(大菩薩)에 대하여 설해지는 것이다.-전종식]
[진여가 훈습하는 의미의 두 종류, 첫째는 인훈(因熏)인 진여의 자체상훈습(自體相薰習)이며, 두 번째는 연훈(緣熏)인 진여의 용훈습(用薰習)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체상훈습은 시작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여실불공(如實不空)의 본각(本覺)인 무루법을 갖추어 불가사의하고 그윽하게 훈습하는 진여자체상의 작용인 업지(業智)가 있어 망심을 훈습하여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는 시각(始覺)의 능관지(能觀智)를 이룰 뿐 아니라, 역시 능관지(能觀智)로 관찰할 대상의 경계인 본각(本覺)의 성품까지를 짓습니다.
이러한 본훈(本熏)과 신훈(新熏)인 이 두 공능의 의미를 의지하여 항상 훈습하면서 그 세력이 있으므로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에서 싫증을 내고 열반의 도를 즐겨 구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기의 몸에 진여의 법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수선]
依此二義(의차이의) 恒常熏習(항상훈습) 以有力故(이유력고)
이 두 가지 뜻에 의지하여 항상 훈습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能令衆生(능령중생) 厭生死苦(염생사고) 樂求涅槃(락구열반)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게 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며,
自信己身有眞如法(자신기신유진여법) 發心修行(발심수행)
스스로 자기 몸에 진여의 법이 있음을 믿어,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
[첫째의 자체상훈습; 중생은 시작도 없는 종래의 세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루법(無漏法)인 오염되지 않는, 자성이 청정한 진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진여의 정화력(淨化力)이 끊임없이 내부로부터 무명(無明)의 망심에 활동하고 있음에도 우리 중생은 그러한 진여본각(眞如本覺)의 끊임없는 힘의 작용을 알지 못한다. 이 여실불공(如實不空)의 힘이 중생의 망심에 나타나 시각(始覺)의 지(智)가 된다. 이것을 부사의업(不思議業)이라 한다. 망심에 대한 그러한 끊임없는 힘의 작용에 의하여 역으로 진여 자체가 관찰의 대상이 되어,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의 지혜가 진여 그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각(始覺)의 지(智)로서, 망심 속의 진여가 관찰할 수 있는 능관(能觀)의 지(智)가 되어, 진여 자체를 관찰하게 되며, 이때, 관찰 대상이 된 진여는 여실공(如實空)의 본각진여(本覺眞如)로서, 다른 이름으로 성정본각(性淨本覺)의 진여이다. 그와 같이 관찰의 대상이 된 본각진여는, 그 때 관찰되는 소관(所觀)의 경(境), 즉 관찰되는 자리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여(眞如)는 보려는 능관(能觀)의 지(智)와, 보이는 소관(所觀)의 경(境)과의 두 가지 성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원효는 능소(能所)의 구체적 구분설명은 없지만, 보려는 능관(能觀)의 지(智)를 본각 불공문(不空門)으로, 보이는 소관(所觀)의 경(境)을 여실공문(如實空門)으로 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진여의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이다.
이와 같이 진여는, 중생에 있어서, 부사의업(不思議業)과 경계(境界)의 두 성품의 존재로서 중생에 훈습하고 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부사의업을 갖추고 있어 경계의 성품을 만든다」고 설하고 있다. 이같은 진여의 내적 훈습이 무시이래(無始以來)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 힘에 의하여 중생이 불교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생사의 고를 싫어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중생이 가지고 있는 망심(妄心)의 힘이 아니고, 진여(眞如)의 힘이 가동되어 고(苦)를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반의 즐거움을 원하게 되고, 자기에게 진여의 법이 있음을 믿게되어, 발심수행(發心修行)하게 되는 것이다.]
[자체상훈습에서 ‘체상용’의 ‘체상’이 나옵니다. 본체와 본체의 모양입니다. 중생이 평생 일으키는 생각, 행동은 모두 유루법입니다. 다음 생에 업따라 태어나게 합니다. 무루는 번뇌 망상, 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진여에 훈습하는 것이 무루법으로, 무명이 훈습되면 끝없는 유루법 속에서 살게 됩니다. 무명의 상을 짓지 않고 경계가 없는 것입니다.
자체상훈습, 내 속에서 진여가 증장하고 진여에 훈습되면 중생도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에게 진여법이 있다고 믿고 수행을 하게 됩니다. 목적만 잘 설정해 놓으면 한 생 끝없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통섭불교]
問曰(문왈) 若如是義者(야여시의자) 一切衆生悉有眞如(일체중생실유진여)
묻나니, "만약 이와 같은 의미가 있다면 일체 중생이 다 진여가 있을 것이므로
等皆熏習(등개훈습) 云何有信無信(운하유신무신) 無量前後差別(무량전후차별)
평등하게 다 같이 훈습을 할 것인데,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한량없이 차별하고 전후 차이가 있는가?
皆應一時(개응일시) 自知有眞如法(자지유진여법) 勤修方便(근수방편) 等入涅槃(등입열반)
모든 것은 마땅히 다 일시에 진여법이 있음을 스스로 알아, 방편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열반의 도를 평등하게 깨달아 들어가야만 하리라."
[無量前後差別 진여법이 갖추어져 있음을 믿는데 시간적으로 엄청난 전후의 차이가 있음.]
答曰(답왈) 眞如本一(진여본일) 而有無量無邊無明(이유무량무변무명)
답하나니, 진여는 본래 하나이나, 중생에게는 한량없고 가이없는 무명이 있음으로 해서,
從本已來(종본이래) 自性差別(자성차별) 厚薄不同故(후박불동고)
본래로부터 자성에 차별이 있게 되었으니, 두텁고 엶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自性差別 厚薄不同故 : 자성이 차별이 있다는 것은 모든 중생들이 갖추고 있는 진여성품이 차별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무명에 물든 정도가 다르다는 말이다. 진여성품은 누구나 같다.]
過恒沙等上煩惱(과항사등상번뇌) 依無明起差別(의무명기차별)
갠지스 강(항하강)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상의 번뇌가 무명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我見愛染煩惱(아견애염번뇌) 依無明起差別(의무명기차별)
아견과 아애의 물든 번뇌가 무명에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니,
如是一切煩惱(여시일체번뇌) 依於無明所起(의어무명소기)
이와 같이 일체의 번뇌는 무명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前後無量差別(전후무량차별) 唯如來能知故(유여래능지고)
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을 오직 여래만이 능히 알수 있기 때문이다.
[元曉 : 상번뇌(上煩惱)는 알아야 할 진리를 알지 못해 보리를 장애하는 소지장(所知障)이며,
아견애(我見愛)의 염번뇌는 열반을 장애하는 번뇌장(煩惱障)이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되어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된다. 만약 진여가 그러한 의미로서 무시이래 중생의 인격에 무루법(無漏法)으로서 존재하고, 항상 훈습하고 있다면, 일체 중생이 모두 진여를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더욱이 그 진여가 불변평등(不 平等)하여 모든 중생에게 동등하게 훈습하고 있을 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발심 수행하여, 다같이 열반에 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자기의 불성(佛性)을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또한 발심 수행하는 사람 중에도 빠르고 늦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심(發心)의 전후(前後)에도 무량한 차별이 있다. 이것들은 어떠한 이유에서인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또한 동시에, 자기에게 진여의 법이 있다는 믿음을 일으키고, 정진 수행하여, 여러 가지 방편을 써, 동등하게 열반에 들어 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대하여 본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진여는 본래부터 하나이다. 또한 자성청정심이나 진여의 본성이 변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무명은 그렇지가 않다. 진여와 무명과는 이점에서 크나큰 차이가 있다. 진여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본성으로 하고 있지만, 무명은 생멸(生滅)의 이치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무명은 제각기 시간과 장소에 따라 천차만별이 있는 것이다. 무명은 무량무변(無量無邊)의 차이가 있으며, 그 존재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사람에 따라 두터운 사람도 있고 엷은 사람도 있다. 무명이 두터운 사람은 신심(信心)이 없으나, 엷은 사람은 신심이 있다. 무명이 두터운 사람은 진여의 광명이 외부로 나오지 못한다. 더욱이 간지스강의 모래만큼의 무수한 번뇌는 모두가 근본무명(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의 차이에 의하여, 일어나는 번뇌도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고 또한 아견(我見)등의 견혹(見惑)이나,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 (無色界)의 삼계(三界)에 걸친 탐애(貪愛) 등의 번뇌도 무명의 차이에 의하여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이 일체의 번뇌는 무명을 바탕으로 일어나고 천차만별의 무량한 차별이 있는 것이다. 이 차별은 오직 불타만이 바르게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일체 중생의 본성이 진여라는 사실은, 모두가 평등 하지만, 사람마다 제각기 무명이 다른 것이므로 발심수행(發心修行)의 차별도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묻는 것은 이처럼 진여의 자체상과 그 작용이 둘로 훈습하는 의미가 있다면 일체 중생이 다들 진여법이 있으므로 평등하게 모두 훈습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믿음이 있는 중생과 믿음이 없는 중생이 있으며, 공간적으로는 중생의 믿는 마음이 있고 없는 것이 한량없이 차별하고 시간적으로는 미래와의 전후로 차이가 나는가? 모든 중생들은 안으로 훈습하는 작용이 꼭 같으므로 응당 일시에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방편도를 부지런히 수행하여 열반의 도를 평등하게 깨달아 들어가야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들이 평등하게 진여법을 갖추었지만 발심하고 수행하고 열반을 증득함이 평등하지 않다는 질문입니다.
질문한 의도에 두 가지 차별을 포함하고 있어 평등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즉, 첫째의 의문은 "중생들이 이 진여법을 동일하게 타고나 한결같은 본각의 성품으로서 평등하다면 무엇 때문에 중생의 근기엔 영리함·둔함·사됨·올바름·믿음·불신 등의 한량없이 차별하여 평등하지 못함이 있는가"이고, 두 번째의 의문은, "중생들이 동일하게 진여의 안으로 훈습하는 것에 의지하여 발심하였다면 의당 일시에 동일하게 믿고, 동일하게 수행하고, 동일하게 열반을 증득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선후지속의 평등하지 못한 한량없는 차별이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답을 합니다. 진여정법은 성인과 범부가 동일하여 자체로서 평등하며 둘이 없는 본래 하나이지만, 중생에겐 한량없고 끝이 없는 근본무명주지(根本無明住地)로 인해서 원래는 평등했던 자성에서 차별이 생겨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마음이 두터운 중생과 믿음은 있으나 마음이 엷은 중생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부연하여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근본무명증상(根本無明增上)의 지말무명의 번뇌는 근본무명을 의지하여 소지장(所知障)과 번뇌장[塵沙惑]의 차별을 일으켰습니다. 근본무명에서 일으킨 사주번뇌장(四住煩惱障)인 아견(我見)과 아애(我愛)로 물든 번뇌가 한량없고 끝이 없는 차별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체의 번뇌인 소지장과 번뇌장은 근본무명을 의지하여 일어난 경계입니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전후가 한결같지 않고 차별이 한량없어서 전후를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유일하게 오직 여래만이 그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답변한 의도도 두 가지 평등하지 않은 차별을 두었습니다. 첫째는 "중생은 원래 진여의 한결같은 성품을 동일하게 타고났으나 단지 근본무명이 안으로 훈습하는 후박(厚薄)의 정도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에게 영리하고 우둔함, 삿되고 올바름, 믿음과 불신 등등의 차별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였고, 두 번째로 "중생들은 한결같이 근본무명이 안으로 진여를 훈습하여, 훈습으로 성취된 번뇌인 삼세와 육추의 정도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수행과 증오에 있어서 더디고 신속한 차별이 있을 뿐"임을 말한 것입니다.
"항하사와 평등한……번뇌"는 삼계의 사법(事法)에 무지(無知)한 소지장(所知障)입니다. 이 법집(法執)은 미세하여 끊기 어렵기 때문에 증오를 취함이 더디다는 것입니다. 또 아견(我見)과 아애(我愛)의 염법은 번뇌장입니다. 이 아집의 번뇌는 인지(認知)하기 쉬운 추분별(麤分別)이므로 끊기가 쉬운 때문에 증오함이 신속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신심과 불신, 영리함과 우둔함, 더디고 신속한 차별이 근본무명에서 일어난 이혹(二惑)과 육염심(六染心)의 허물일지언정 진여에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상은 무명을 훈습함이 한결같지 않은 측면에서 요약하였고, 다음에서는 진여외연(外緣)의 훈습이 한결같지 않은 측면에서 요약하고 있습니다.]
又諸佛法(우제불법) 有因有緣(유인유연) 因緣具足(인연구족) 乃得成辦(내득성판)
그리고 또 모든 불법은 인=正因이 있고, 연=緣熏이 있으니, 인연이 모두 구족하여야 나아가 판별할 수 있으니,
[有因有緣 : 인(因)은 진여에 의한 훈습이다. 연(緣)은 선지식을 만남이다.]
如木中火性(여목중화성) 是火正因(시화정인) 若無人知(야무인지)
이는 마치 나무 가운데 불의 성품이 있는 것이 불의 정인이지만,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不假方便(불가방편) 能自燒木(능자소목) 無有是處(무유시처)
방편을 빌리지 못한다면, 저절로 나무가 탈수 있다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衆生亦爾(중생역이) 雖有正因熏習之力(수유정인훈습지력)
중생도 그와 같아서, 비록 정인으로 훈습하는 힘이 있다 하여도,
若不遇諸佛菩薩善知識等(야불우제불보살선지식등) 以之爲緣(이지위연)
만약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 등을 만남으로서, 그 인연을 삼지 않으면,
能自斷煩惱入涅槃者(능자단번뇌입열반자) 則無有是處(즉무유시처)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든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할 곳이 없다.
若雖有外緣之力(야수유외연지력) 而內淨法(이내정법) 未有熏習力者(미유훈습력자)
만약 비록 밖으로의 연=外緣이 있다 하여도 안으로 정법이 훈습하는 힘이 아직 있지 않은 자는,
亦不能究竟(역불능구경) 厭生死苦(염생사고) 樂求涅槃(락구열반)
역시 구경에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의 도를 즐겨 구하지 못할 것이다.
若因緣具足者(약인연구족자) 所謂自有熏習之力(소위자유훈습지력)
만약 인과 연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른바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又爲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우위제불보살등자비원호고)
또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자비와 원력과 보호함이 되기 때문에,
能起厭苦之心(능기염고지심) 信有涅槃(신유열반) 修習善根(수습선근)
능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선근을 닦아 수습할 수 있으며,
以修善根成熟故(이수선근성숙고) 則値諸佛菩薩示敎利喜(즉치제불보살시교리희)
선근을 수습하여 성숙한 까닭에, 곧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교법의 이익과 기쁨을 만나,
乃能進趣向涅槃道(내능진취향열반도)
이에 승진하여 열반의 도로 나아갈 수 있다.
[진여가 동일한데 왜 믿고 안 믿는 차이나, 열반에 들어가는 차이가 있는가 하는 물음의 답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무명이 두터움과 엷음이다. 둘째는 내적으로 일어나는 진여훈습의 차이이다. 셋째 외적으로 불보살의 가르침을 만나는 차이이다.]
[또하나 생각하여야 할 것은 중생에게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불보살의 연(緣)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因)이 있어도 연(緣)에 의하여 개발되지 않으면 그 인(因)은 힘을 내지 못한다. 마치 종자(種子)라는 인(因)이 있어 싹이 트는 힘이 있다하더라도, 땅에 뿌려져 물이 있고 태양의 빛과 열이 있는 연(緣)을 만나지 못하면, 싹을 티을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제불(諸佛)의 가르침에는 반드시 인과 연이 설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모든 나무는 그 속에 탈 수 있는 성질, 즉 화성(火性)이 불의 정인(正因)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 나무에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나무가 스스로 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중생의 경우도 그와 같아서 진여가 정인(正因)으로서 내부에서 훈습하는 힘은 있다할지라도, 만약 부처나 보살 기타 선지식(善知識) 등 지도자를 만나 외연(外緣)으로서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자력으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갈 도리가 없다. 다시 말하면 인(因)이 있어도 연(緣)이 없으면 일은 성사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연(外緣)이 있다 하더라도, 내부로부터 훈습하는 정화작용( 化作用)이 미비하다면, 궁극적으로 그 중생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게 되고 열반을 즐겨 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불보살(佛菩薩)의 연력(緣力)이 위대하다 하더라도 그 외연의 힘만으로는 성취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생은 내부에 무명(無明)의 힘이 강성하기 때문에 진여(眞如)의 정법력(淨法力)이 충분치 못하면 열반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因)이 결핍된 상태이다.
다음은 인(因)과 연(緣)이 함께 있는 경우로서, 내부에는 진여의 훈습력이, 제힘을 발휘하고 있어 구도(求道)의 마음이 성숙되고, 외부로부터는 부처와 보살의 자비(慈悲)와 서원(誓願)으로 지켜지고 가르침을 받게되는 등 내훈(內熏)의 인(因)과 외연(外緣)의 힘이 겸비될 때, 중생의 망심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며, 열반이 진실로 있다는 것을 믿어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의 삼선근(三善根)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선근이 성숙됨에 따라 시각(始覺)의 지혜가 강화되고, 보살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이해하여, 법(法)에 대한 희열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차차로 향상되어 열반의 길에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현대적 의미로서의 고(苦)의 탈출(脫出)과 상락(常樂)의 추구(追求)를 본론에 설해지는「생사(生死)의 고(苦)에 대한 염리(厭離)」와「열반에의 낙구(樂求)」를 어떻게 해석 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본문이 설해진 과거에는 병고(病苦)와 굶주림, 한서(寒暑)의 고통 때문에「인생은 고통이다」라는 명제(命題)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지만,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욕망'이 충분히 충족되고 있는, 이러한 시대에 '인간은 고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반의 낙(樂)을 구해가야 한다'고 설해질 때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불교에서 설해지는 여덟 가지 고통은 생(生) 노(老) 병(病) 사(死)의 기본적 고통과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취온고(五取蘊苦)등 현실적 생활고가 설해지는 것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리를 항상(恒常)으로 보는데서 발생하는 것이며, 또한 일시적 향락을 영원한 상락(常樂)으로 보는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므로 불타의 가르침의 근본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현실적 모든 존재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불타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 사람도 죽음에 직면하게 될 때나 상락(常樂) 이라고 믿었던 사실이 권세의 상실이나 어떤 사고의 발생 등으로 그것이 상실될 때, 비로소 그것이 하나의 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이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론에 제기된 '생사의 고를 싫어하게 되고, 열반의 낙(樂)을 추구하는 의미'를 '인간이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과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즐거움이 무엇인가'라는 명제(命題)를 되새기면서,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를 향하여 정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본론의 주장이라 할 것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열반락(涅槃樂)은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서, 그것은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것이며, 순간적 즐거움이 아닌 영원한 극락이며, 또한 자유자재한 참나의 세계이며, 그곳에는 때묻지 아니한 순정(純淨)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위는 쉽게 비유를 든 것으로, 내훈의 정인(正因)과 진여자체의 작용인 연훈(緣熏)이 빠짐없이 만족해야만 모든 불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나무의 불의 성품이 불이 붙는 정인이긴 하지만, 만일 그 정인을 아는 사람이 없어 방편을 빌리지 않는다면 저절로 불이 생겨나서 나무를 태운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해 줄 곳이 없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연훈(緣熏)까지를 갖추었느냐 빠뜨렸느냐 하는 측면에서 요약하여 중생들이 불법을 이룸이 전과 후로 한결같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불성(佛性, buddhata , buddhadhaq tu, tathagatagarbha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즉 정인(正因)과 연훈인 연인(緣因)과 불법을 이루는 요인(了因)입니다. 진여는 중생들이 본래 지녔으므로 불법을 이루는 근본종자인 정인불성이고, 선지식이 본래 지닌 정인을 도와 발심(發心)하게 하는 것은 연인이며, 이와 같은 정인과 연인이 빠짐없이 만족하여 불성을 개오(開悟)하는 것은 요인입니다. 이는 마치 나무에서 불을 내는 나무 속의 불의 정인과 나무를 비비는 연인이 갖추어져야만 그 결과인 불을 취할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즉, 나무에 있는 불의 성품은 중생불성의 정인에 비유하였고, 사람의 힘으로 나무를 비벼서 불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연인에 비유하였으며, 불이 붙어 나무를 태우는 것은 번뇌를 끊고 열반도를 증득하는 요인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나무의 불의 성품과 같은 불성(佛性)의 바른 요인의 훈습하는 세력이 있다고 하여도 나무의 불의 성품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제불보살과 선지식 등을 만나 그들의 자비(慈悲)와 원력으로 구하여 보호하는 것으로서 도와주는 조건을 삼지 않고 나무가 저절로 불이 붙어 타지 않듯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로 깨달아 들어가는 자는 옳다고 긍정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이 자비스런 원력과 보호해주는 바깥의 훈습하는 세력이 있다고 해도 무명(無明)이 무겁고 두터운 부류의 중생들은 본각(本覺)으로 내훈한다고 하지만 안으로 본각(本覺)의 정법(淨法)을 훈습하는 세력이 아직 있지 않은 자는 역시 생사의 괴로움에서 염증을 내고, 열반도를 즐겨 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불법이 좋고 잘 가르쳐 주어도 업장이 두텁고 망상번뇌로 뒤얽힌 중생은 깨달아 열반으로 가는 것에서 멀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여래성)이 정인(正因)이고, 제불보살과 선지식의 설법인 진여에서 유출한 자비원호(慈悲願護)의 교법(敎法)이 외연인 연인(緣因)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안으로는 정인의 본훈(本熏)과 외연인 연훈(緣熏)이 교대로 진여정법을 훈습하기 때문에 이혹(二惑)을 끊고 진여를 증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불보살과 선지식은 올바른 의지처이고 믿음의 대상입니다.
즉 안으로 본각의 내훈인 정인(正因)과 밖으로 제불보살 선지식 등의 연인(緣因)을 빠짐없이 갖춘 자라면 스스로에겐 정인훈습의 세력이 있고, 다시 제불보살 등의 자비(慈悲)와 사홍서원(四弘誓願)·호념(護念)의 연인훈습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생사의 고통에서 싫증을 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의 도가 있다는 것을 믿어 선근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수습하여 선근이 성숙하기 때문에 곧바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제시한 대승법의 의미에 대한 이해(解)와 교법(敎法)의 실천과 대승법의 이익을 얻고, 해(解)와 행(行)을 갖추었기 때문에 법의 희열을 만나게 됩니다. 이리하여 십신위(十信位)에서 십해(十解)·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으로 승진(勝進)하여 더욱 나아가서 마침내 십지(十地)에서 불과(佛果)인 열반의 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정인(正因)과 연인(緣因)을 빠짐없이 만족했기 때문에 불과인 열반의 도를 쉽게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즉, 수행자는 안으론 진여의 승인(勝因)으로 훈습하는 세력을 의지하고, 밖으로는 제불보살의 뛰어나고 훌륭한 도움을 믿고 의지하여 불성의 탁월한 정인(正因)을 돕고 발기하는 세력이 있음으로 해서 열반으로 신속하게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의 가르침을 열어 보여 주심에 이익을 얻어 환희하는 마음을 내는 의미입니다. 이는 조연(助緣)의 탁월함입니다.
이상으로 자성에서 훈습하는 작용을 밝혔고, 다음엔 진여로 훈습하는 작용을 밝힙니다. 불교는 어렵다고 하지만, 사실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불교공부는 하다가 멈추면 물러나 버립니다. 굳은 결심과 믿음으로 완벽한 깨달음을 완성할 때까지 불퇴전(不退轉)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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