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用(용)의 二種(이종), 應身(응신)과 報身(보신)
此用有二種(차용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작용=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일자) 依分別事識(의분별사식) 凡夫二乘心所見者(범부이승심소견자)
첫째는 분별사식을 의지하여 범부와 이승의 마음에 보이는 것을
名爲應身(명위응신) 以不知轉識現故(이불지전식현고)
이름하여 응신이라 하니, 전식의 나타냄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見從外來(견종외래) 取色分齊(취색분제) 不能盡知故(불능진지고)
밖으로부터 온 것이라 보고, 색상의 한계=色分齊를 취하지만, 능히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色分齊 : 보이는 차별상의 내용이나 정도.
[지운 : 기도나 수행 중에 부처나 보살이 나타나면 범부나 이승은 그것이 부처님의 진여가 아리야식의 전식으로 나타난 것인 줄 모르고 밖에 따로 있어서 온 줄 안다. 이를 응신이라고 한다.
* 元曉 : 依分別事識이란 범부와 이승은 오직 식(識)뿐임을 알지 못하고 바깥의 경계에 있다고 계탁하는 것이다. 불신을 보고서 마음 밖에 있다고 생각함은 의식(意識)의 뜻에 따르는 것이니 그래서 분별사식에 의해 본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전식에 의해 색상을 나타낸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以不知轉識現故 見從外來라고 한 것이다.
* 達磨 : 《少室六門》<悟性論> - 붓다에는 삼신이 있는데, 화신과 보신과 법신이다. 만약 중생이 늘 선근을 실천하면 화신이 나타나고, 지혜를 닦으면 보신이 나타나고 무위를 깨치면 법신이 나타난다. … 하급이 지혜를 가진 사람은 무릇 복력을 일으켜 화신불만 보고, 중급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번뇌를 단제하여 무릇 보신불만 보고, 상급이 지혜를 가진 사람은 보리를 증득하여 법신불만 보지만, 상상(上上)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안으로 원적의 경지를 비추어보아 본래 마음이 곧 붓다임을 발명한 까닭에 분별 마음을 통해서 붓다를 터득하지 않는다.
* 憨山 : 범부와 이승은 삼계만법이 심식의 그림자임을 모르고 마음 밖에서 외진(外塵)을 헤아린다. 이는 내 마음의 육식의 분별이다. 그래서 부처를 보는 것도 역시 외진으로 찾아오게 되니, 칠식의 분별지상에서 나타난 미세한 모습인 보신임을 모르기 때문에 쉽게 감지할 수 있는 부처의 모습인 응신만을 보게 된다.-물처럼바람처럼]
[불타는 법신(法身)과 보신(報身) 그리고 응신(應身) 등 세 가지 몸이 갖추어져 있다고 설해진다. 진여(眞如)의 자체상(自體相)은 인격화(人格化)된 법신(法身)을 의미한다고 설명한 바 있으며, 그중 체대(體大)는 법신의 본질 그 자체, 즉 진여이고 상대(相大)는 법신이 갖추고 있는 덕성, 즉 진여의 지(智)를 말한다. 따라서 제불여래(諸佛如來)의 실재(實在)는 법신지신(法身智身)뿐으로서, 거기에는 세간의 경계는 없는 것이지만, 진여를 깨달은 불타가 세간(世間)속에 서게 될 때는 제1의제(第一義諦)인 법신의 입장으로는 있을 수가 없다. 자타(自他)를 구별하는 중생을 상대로 할 때는 그것을 인정한 위에서 진리를 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중생의 상황, 즉 중생의 견문(見聞)에 따라 그들 속에 나타날 때는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본 절에서는 이것을 상설(詳說)하는 부분이다.
제불(諸佛)의 용대(用大)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중생의 분별사식(分別事識)으로, 보고 듣는 불신(佛身)이다. 분별사식은 이미 설명한 의식(意識)의 다른 이름으로서, 외계(外界)가 보이는 바와 같이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분별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범부의 일상적 판단과 인식을 말한다. 이러한 분별사식(分別事識)의 입장에서, 자기의 인식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범부와,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등 이승(二乘)이다. 그들이 보는 불타를 응신불(應身佛)이라 일컬은다. 응신(應身)은 중생의 능력에 따라 모습을 나타내는 불신(佛身)이다. 화신(化身; Nirmana-kaya)이라고도 말한다.
범부, 이승은 유식(唯識)의 이(理)를 알지 못하므로 자기가 인식하는 대상 모두가 마음의 심층(深層) 작용인 전식(轉識)이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전식(轉識)은 이미 오의(五意)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가운데의 하나로서 마음이 무명(無明)에 의하여 기동(起動)하여 주객(主客)으로 분극화(分極化)한 때의 주관적 식(識)작용을 말한다. 이것이 분별사식(分別事識)이 보는 불신(佛身)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응신(應身)은, 주관(主觀)적 전식(轉識)이 보는, 객관(客觀)적 현식(現識)이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범부, 이승(二乘)은 전식(轉識)이 인식한 외계(外界)가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색분재(色分齋), 즉 불신(佛身)의 크기를 정하고, 32상(相) 80종호(種好) 등과 같은 불타의 상호(相好)를 주관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불타가 외계에 실재로 존재하여, 불타에 의하여 자기가 인도(引導)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진여의 무차별적 큰 작용인 용대(用大)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전종식]
[앞에서 말한 용대(用大)는 부처님의 입장에서 논한 것이고, 여기서는 중생의 입장에서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을) 둘로 나누어 논하였습니다. 먼저 본래 법신(法身)의 작용은 오직 식(識)일뿐임을 모르고서 밖의 육진(六塵)이 실제로 있다고 헤아리는 분별사식을 의지하여 범부와 이승(二乘)의 사람이 마음으로 보는 법신의 작용이 있는데, 이를 분별사식의 분별로 보는 응화신(應化身)이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보신의 미세한 모습은 전식(轉識)에서 나타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 밖의 육진에서 온 것으로 보고 나타난 색의 한정된 경계를 취합니다. 그 이유는 몸과 마음은 부분적인 한계가 없다는 것을 끝까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수선]
二者(이자) 依於業識(의어업식) 謂諸菩薩從初發意(위제보살종초발의)
두 번째는 업식을 의지한 것으로, 이른바 모든 보살이 처음 뜻을 발함=初發意로부터
乃至菩薩究竟地心所見者(내지보살구경지심소견자) 名爲報身(명위보신)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보이는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고 하며,
身有無量色(신유무량색) 色有無量相(색유무량상) 相有無量好(상유무량호)
몸에는 한량없는 색신이 있고, 색신에는 한량없는 모습(형상)이 있으며, 모습(형상)에는 한량없는 상효=好가 있다.
[은정희 : 相好(상호) - 부처가 갖추고 있는 여러 가지 신체적 특징들이다. 相은 몸에 특별히 잘생긴 것을 말하고, 好는 相 중에 자세한 모습이다. 이 상호(相好)가 완전하여 하나도 모자람이 없는 것을 불신(佛身)이라고 한다.
* 元曉 : 依於業識이란 십해 이상의 보살은 오직 마음일 뿐 바깥의 경계가 없는 뜻을 잘 알아서 업식의 뜻을 따라 불신을 보기 때문에 업식에 의해 본다고 한다. 그러나 이 보살은 그 분제(分齊)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곳에 따라 한계가 없으며… 훼손하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장애 없는 불사의한 일이 모두 육도의 심행의 훈습 및 진여의 불사의훈(不思議熏)으로 말미암아 성취한 것이므로 이런 뜻이므로 보신이라 하며, 그러므로 (아래 문장에서) 具足無量樂相故 說爲報이라 하였다.]
[둘째는 업식(業識)이 보는 불신, 즉 보신(報身)이다. 업식은 무명에 의하여 일심(一心)이 움직인 가장 미세한 식(識)이다. 거기에는 아직 전식(轉識)과 현식(現識)의 분극(分極)이 일어나지 않은 그 이전의 식작용(識作用)이다. 이것이 업식이라 불리는 것은 과거의 업에 의한 순수 경험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깊은 심층(心層)에서 불신을 보는 것은 보살(菩薩)이다. 초발의 (初發意)에서 보살진지(菩薩盡地)까지의 보살들은 모두가 유심(唯心)의 이(理)를 알고 있어, 자기가 보는 것은 오직 마음의 인식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식(轉識) 현식(現識)작용 그 이전에서 불신(佛身)을 보는 것이다. 이들 보살이 보는 불신을 보신(報身; Sambhoga-kaya)이라 한다.
이같이 보신은 보살시 십지(十地) 수행의 결과 번뇌를 끊고 깨달음의 지혜를 얻은 결과로서 나타난 불신이므로 성불(成佛)의 행을 완성한 불타라는 의미이다.
주관과 객관이 대립된 인식에서 보이는 불타는 유한(有限)의 불타이지만, 이같은 주객의 대립이 사라진 업식(業識)에 반영되는 불타는 온갖 공덕을 갖추고, 그 공덕에 의하여 장엄되어 있는 불타이다. 따라서 이 보신(報身)은 무량한 색(色)이 있어, 크기에 한정이 없으며, 32상(相) 80종호(種好) 같은 유한한 모습으로 한정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보신불(報身佛)의 '무한한 신체(色)'에는 또한 '무량한 상(相)'이 있고 '무량한 호(好)'가 있다. 따라서 응신불(應身佛)에서 설해지는 유한(有限)한 신체의 크기나, 32상(相), 80종호(種好)와 같은 유한한 색(色)과 상(相)과 호(好)와는 달리, 보신불(報身佛)은 무량색(無量色), 무량상(無量相), 무량호(無量好)의 한량없는 불(佛)이다.
호(好)는 신체에 갖추어져 있는 부수적 장업(莊嚴)을 의미한다. 즉 손톱의 색이 적동색(赤銅色)이라던가 손가락이 풍만하다는 등의 부수적 상(相)을 말한다. 32상(相)은 머리에 가마가 있다던가 두발이 오른쪽으로 감겨 있다던가, 미간(眉間)에 백호(白虎)가 있다던가 하는 것이다. 범부나 이승(二乘)이 보는 불타는 유한한 색(色)과 상호(相好)를 갖추고 있으나, 보신(報身)은 그들이 볼 수 없는 무량한 색(色)과 상(相)과 호(好)를 갖춘 불타이다. 그래서 보신불(報身佛)이 사는 바 정토(淨土)도 한량이 없으며, 무량한 여러 가지 장엄으로 장식되어 있다. 화엄경에서 나오는 비로자나 불(佛)의 정토인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가 바로 그것이라고 정영소(淨影疏)가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보신불(報身佛)은 우주법계에 가득한 무량한 불타이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고, 따라서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에 나타나는 그러한 불타가 아니다. 보신불(報身佛)은 보살(菩薩)이 관(觀)하는 바에 따라 나타나기 때문에 유한(有限)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이며,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도 다하여 없어지는 일이 없는, 분재(分齋)의 상(相), 다시 말하면 유한(有限)한 상(相)을 떠나 있어, 보살의 기(機)에 응하여 끊임없이 나타나 상주하고 있으므로, 훼손되거나 소실(消失)되는 일이 없는 불타이다.
보신불(報身佛)이 이와 같이 보살의 기(機)에 응하여 끊임없이 나타나는 무한(無限)의 상(相)이 있는 것은, 번뇌를 완전히 차단한 무루청정(無漏淸淨)의 바라밀(波羅蜜)을 행한 불타의 훈습력에 의하여, 그 공덕이 이 보신불(報身佛)을 보는 보살에게 시각(始覺)의 내훈(內熏)으로 작용하고, 동시에 본각(本覺)으로부터 나오는 신비하고 부사의(不思議)한 훈습력이 함께 합하여, 성취되어 나타나는 불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불타는 순수선(純粹善)의 수행결과 얻어지는 무량한 안락(安樂)의 상을 갖추고 있으며, 그 때문에 이 불타를 과거의 수행 결과, 과보로 나타나는 불타라 하여 보신(報身)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십해(十解) 이후로 법신보살이, 심식(心識)일 뿐 외진의 색상(色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업식(業識)에 의지하여 보는 불신의 작용입니다. 이는 모든 법신보살들이 처음 뜻을 발한 십해(十解)로부터 보살의 구경지인 법운지에 이르기까지 허망한 마음으로 보는 불신의 모습을 보신(報身)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물질과 불이(不二)인 법신(法身)은 한량없는 색신(色身)이 있고, 법신(法身)을 의지한 색신은 한량없는 공덕상(功德相)을 갖추었으며, 그러한 공덕상엔 한량없는 32상(相)과 80종호(種好)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正報)의 삶의 주체인 불신(佛身)이 안주하여 의지하는 과보토(果報土)의 의보(依報)인 삶의 환경도 한량없는 갖가지 공덕으로 장엄(莊嚴)되었다는 것입니다.]
所住依果(소주의과) 亦有無量種種莊嚴(역유무량종종장엄)
머무는 의보의 과보도 또한 한량없는 갖가지 장엄이 있으며,
隨所示現(수소시현) 卽無有邊(즉무유변) 不可窮盡(불가궁진) 離分齊相(리분제상)
나타나는 바에 따라 곧 끝이 없어 궁극에 다할 수가 없고, 한정된 모습=分齊相을 여의었기에
隨其所應(수기소응) 常能住持(상능주지) 不毁不失(불훼불실)
그 상응함을 따라 항상 주지하면서 훼손하지도 않고 퇴실하지도 않는다.
如是功德(여시공덕) 皆因諸波羅蜜等無漏行熏(개인제바라밀등무루행훈)
이와 같은 공덕은 다 모든 바라밀 등의 무루한 수행의 훈습에 의한 것이며,
及不思議熏之所成就(급불사의훈지소성취) 具足無量樂相故(구족무량락상고) 說爲報(설위보)
불가사의한 훈습으로 인해서 성취한 것으로 한량없는 안락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에 설하여 보신이라고 한다.
又爲凡夫所見者(우위범부소견자) 是其麤色(시기추색) 隨於六道(수어륙도)
또 범부에게 보여지는 이것은 바로 그 거친 현색(대상)으로 육도를 따라서
各見不同(각견불동) 種種異類(종종리류) 非受樂相(비수락상) 故說爲應(고설위응)
각각 보는 것이 동일하지 않아, 갖가지 다른 무리가 안락한 모습을 수용하지 못하므로 설하여 응신이라고 한다.
[보이는 대상은 불신(佛身)이다. 범부는 여실히 보지 못하고 육도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며, 다 같이 낙상(樂相)을 받는 것이 아니며, 보는 자에 응하여 다르게 나타나므로 응신이라고 한다.
부처가 보이는 것은 보는 사람의 식(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 여래 법신은 늘 안주하여 훼손되거나 잃는 것이 없다. 보신불로 보이는 것도 수행자의 수행의 결과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므로 보신이라고 한다.
* 元曉 : ≪攝論≫의 주장에 의하면 지전(地前 : 10지 전)에서 보는 것을 변화신이라 하고, 지상에서 보는 것을 수용신(受用身)이라 하였다. 이제 이 론에서는 범부와 이승이 보는 육도 차별의 상을 응신이라고 하고, 십해 이상의 보살이 보는 분제를 여읜 색을 보신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같지 않은 것은 법문이 한량없어 오직 한 길만이 아니므로 곳에 따라 시설(施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攝論≫ 에 지전의 흩어진 마음으로 보는 분제가 있는 상을 말하기 때문에 화신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 론에서는 보살의 삼매로 보는 분제를 여읜 상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보신에 속하는 것이니 이런 도리가 있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 은정희 : 변화신 - 3신(자성신, 수용신, 변화신) 중의 하나. 이승과 범부를 교화하기 위해 성소작지의 힘에 의해 화현한 불신(佛身)]
[이상의 설명에서 응신(應身)과 보신(報身)을 요약하면, 응신(應身)은 범부, 이승(二乘)의 전식(轉識)에 의하여 분별사식(分別事識)으로 유한(有限)한 불타를 보는 것이 되고, 보신(報身)은 보살(菩薩)이 그들의 수행의 결과로서 업식(業識)에 의하여, 과거의 순수 경험적 인식으로 보는 무한(無限)한 불타가 된다.
이와 같이 '기신론'이 설하는 응신(應身)과 보신(報身)은 중생의 망심(妄心)에 나타나는 불타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에 대응하는 객관적 실재(實在)로서의 응신과 보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은 진여(眞如)의 용대(用大) 뿐이며 그것은 상이 없는 무상(無相)일 따름이다.
이에 대하여 법장(法藏)의 의기(義記)에는 '만약 이 해석에 의한다면, 용대(用大)는 스스로 마음속에 있는 진여의 작용에 불과하다. 어찌하여 이것을 불(佛)의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라고 말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답하여, '중생의 진심(眞心) 그것이 제불(諸佛)의 체(體)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이상의 해석을 확인하고 있다. '기신론'에서는 중생의 진심(眞心)과 불타의 체(體)는 평등무이(平等無二)이고, 일체가 진여(眞如)라고 보고 있는 것이므로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보살을 따라 나타내는 불신이 바로 끝없어 끝까지 다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이 보살은 색(色)·심(心)이 나뉘는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업행(業行)을 따라서 불신이 감응하여 항상 머물면서 삼재(三災, 불의 재난·물의 재난·바람의 재난에 초선천 또는 제삼선천이 무너지는 것)에도 무너지지 않고 유실되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은 정보(正報)와 의보(依報)의 공덕상은 다 온갖 육바라밀 등의 번뇌가 없는 청정한 진리를 수행한 훈습(熏習)과 불가사의한 본래 깨달은 내훈(內熏)으로 성취하여 한량없는 안락한 공덕의 모습을 빠짐없이 만족하였기에 보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범부가 보는 불신은 거친 물질의 현상으로 육도(六道)의 중생이 각기 보는 것이 같지 않아서 그것을 따라서 갖가지 다른 종류의 중생이 안락함을 받지 못하는 불신의 모습으로 감응하기 때문에 이를 응신(應身)이라고 하였습니다.]
쉬어가는 곳;
업의 작용은 어떻게 일어날까요?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의 왕이었습니다. 파세나디왕은 부처님의 후원자 였 습니다. 그는 왕으로서의 권력과 쾌락을 즐겼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보시와 지계 그리고 다른 공덕을 닦은 결과였습니다. 그는 과거에 지은 공덕으로 부처님을 만났고 부처님의 후원자가 됩니다. 하지만 지혜를 닦는 통찰명상을 하지 않았으므로 지혜가 충분하지 않아서 확실하게 법을 볼 수가 없었는데, 그는 도과의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분입니다. 비록 경전에는 부처님과 법에 관하여 토론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그것은 단지 개념적 수준에 불과한 피상적인 토론이었을 뿐입니다.
통찰명상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는 것으로 정념 정정입니다.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 옆에서 많은 후원을 했음 에도 불구하고 지혜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도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아자타삿뚜 왕은 예류자[수다원]로 부처님과 승가에 아주 큰 후원자였던 빔비사라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 위하여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밤에 부처님을 찾아오자, 부처님께서는 수행과경이라는 위대한 가르침을 설하였습니다. 왕은 그의 아버지처럼 예류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바른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지만 이번 생에서 공덕을 닦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과보로 내생에 지 옥에 태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자타삿뚜 왕은 도과를 성취할 수 없었고 범부로서 생을 마쳤습니다.
사띠 비구의 이야기는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과거에 지은 공덕 덕분에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비구로서 계를 받고 계, 정, 혜 삼학을 닦았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과거 생에 대하여 비구들에게 설하실 때 사띠 비구는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한 생이 끝나면 다음 생으로 마음이 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과거의 해롭고 유익한 업의 과보를 경험한 어떤 마음이 생에서 생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충분히 닦지 않았기 때문에 법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현명한 비구들이 자기 주변에 많이 있고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침을 주신다고 해도 사띠 비구는 12연기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하다나 영주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도 봅시다. 그는 바라나 시의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주 부유한 집안의 처녀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를 지키지 않고 전 재산을 마시고 치장하고 향수와 노래, 음악과 춤에 탕진하여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는데 그와 그의 부인은 이미 늙은 몸이었습니다. 그들은 늙은 나이로 이시빠타나 수도원에 음식을 구걸하러 갔다가 불교를 접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아난 존자에게 만약 그가 젊었을 때 사업을 열심히 했다면 지금은 바라나시의 재정관이 되었을 것이고, 젊었을 때 수행을 했다면 지금은 아라한 과를 얻었을 것이며 그의 부인은 불환자[아나함]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밀린다왕문경에서도 밀린다 왕이 묻습니다. “당신들 수행자들이 젊었을 때부터 수행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왜 그런 가?” 그러자 나가세나 비구가 대답합니다. “왕이시여. 전쟁에서 이기는 비결이 뭡니까?”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군량을 비 축해놓고 성을 쌓아놓고 군대를 미리 훈련시켜 놓는 것이다. 갑자기 적이 공격해 와도 이길 수 있다.” “수행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항상 준비가 되어 있으면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젊어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철학자 사짜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지은 공덕 때문에 부처님을 만나서 법에 대하여 토론하고 부처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혜를 닦음이 불충분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에게 귀의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스승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부처님을 만나 법에 관한 토론을 하는 예가 많습니다.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수승하다고 인정하지만 자기가 갖고 있는 견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열심히 해야 합니다-통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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