用熏習者(용훈습자) 卽是衆生外緣之力(즉시중생외연지력)
용훈습이라는 것은 곧 중생의 외연적인 힘이니,
如是外緣(여시외연) 有無量義(유무량의) 略說二種(략설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와 같은 외연에는 한량없는 뜻이 있지만 간략히 말하면 두 가지이다.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用熏習 : 자체상훈습은 누구나 갖추고 있는 진여성이 정인(正因)이 되어 훈습하는 것이며, 내부적인 훈습이지만, 용훈습은 수행에 마음을 낸 중생을 불보살 등이 외부에서 돕는 훈습=外緣이다.]
一者差別緣(일자차별연) 二者平等緣(이자평등연)
첫째는 차별적인 조연=差別緣이고 둘째는 평등한 조연=平等緣이다.
[용훈습(用熏習)은 체(體) 상(相) 용(用) 삼대(三大) 중 용대(用大)의 작용을 말한다. 진여의 활동이 부처의 구제 활동이 되어 중생에게 외연(外緣)으로서 작용하여 도와주는 활동을 말한다. 불(佛)이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으로서 교도(敎導)하는 활동이다. '기신론'에서는 체대(體大)와 상대(相大)가 불(佛)의 법신(法身)을 표시한다. 진여의 정용(淨用)이 불(佛)의 용대(用大)로서 완전히 나타나,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를 '이것이 중생에의 외연의 힘이다' 라고 설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외연(外緣)의 힘이 중생에게 가해지는 불보살(佛菩薩)의 활동이 무수한 것이지만, 이것을 요약하여 설명하면 차별연(差別緣)과 평등연(平等緣)이 있다. 차별연은 개인별로 제각기 상이한 외연(外緣)을 말하며, 평등연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작용하는 외연(外緣)을 말한다.-전종식]
[발심(發心)하여 불도를 구하는 중생들을 부처님과 보살들이 외부에서 돕는 조연, 진여법신의 작용에 의해서 배어드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러한 외연의 훈습하는 작용에 한량없는 의미가 있지만, 간략히 두 가지만 언급하고 있는데, 첫째는 분별사식의 훈습으로 발심한 범부와 소승에게 감응하여 훈습해 주는 차별하는 조연(助緣)의 훈습작용이며, 다음은 업식에서 훈습하여 수행하는 모든 보살을 위하여 평등하게 외연으로 훈습해 주는 평등한 조연의 훈습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외연의 훈습하는 작용은 제불보살이 진여법신을 증득하고 나면 자연히 불가사의한 지혜와 자비의 작용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중생들의 느낌이 부딪쳐 오는 대로 감응하여 나타나는 대비원력으로써 갖가지 몸의 형상과 부처님의 사업(事業)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중생들의 근욕성(根欲性)을 따라서 성취시키면서 발심하여 불도를 구하는 중생들을 위해 외부에서 돕는 조연의 훈습을 합니다. 이는 법신의 작용으로 진여의 작용입니다. 중생이 갖추고 있는 본각의 심체가 바로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법신이며, 그 법신 자체가 동일하게 평등하므로 그 작용도 또한 동일하기 때문에 중생이 발심하는 진여훈습의 작용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낸 정도에 따라 모든 부처님이 그 훈습작용을 성취해 주는 외연을 감득할 수 있습니다.-수선]
差別緣者(차별연자) 此人依於諸佛菩薩等(차인의어제불보살등)
차별적인 조연=차별연이란 이 사람이 모든 불보살 등을 의지하여
從初發意始求道時(종초발의시구도시) 乃至得佛(내지득불)
처음으로 뜻을 내어 불도를 구함=求道를 시작할 때부터 나아가 불과를 얻기까지(성불할 때까지),
於中若見若念(어중약견약념) 或爲眷屬父母諸親(혹위권속부모제친)
그 도중에 혹 보기도 하며, 혹 염(생각)하기도 하며, 혹은 권속, 부모와 여러 친척이 되기도 하며,
或爲給使(혹위급사) 或爲知友(혹위지우) 或爲怨家(혹위원가) 或起四攝(혹기사섭)
혹은 급사가 되기도 하며, 혹은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 되기도 하고, 혹은 원수의 집이 되기도 하며, 혹은 사섭법을 일으키기도 한다.
[於中若見若念 或爲眷屬父母諸親 “수행을 하는 사람이 불보살을 보거나 생각하면 불보살이 권속, 부모, 친족이 되어….” 뒤의 부분도 이와 같이 해석하면 된다. 이는 수행자에 맞게 연(緣)이 되어준다는 말이다. 바로 차별연의 예를 든 것이다. 범부와 이승이 분별사식에 따라 보므로 이들의 정도에 맞추어 외연이 되어주기 때문에 이런 차별이 일어나는 것이다.
《法華經》'관세음보살보문품'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 사부대중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사부대중의 몸으로 나타내어 설해준다. 장자와 거사, 재상, 관리, 바라문의 부인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곧 부인의 몸으로 나타내어 설하고, 동남동녀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동남동녀의 몸으로 나타내어 설해준다.…”
* 四攝(사섭) :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 실질적으로 이익을 줌), 동사(同事 : 중생들과 함께 하며 교화함)
* 元曉 : 差別緣이란, 저 범부와 이승의 분별사식훈습을 위해 연을 짓는 것이니, 연을 짓는 자는 십신이상에서 모든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연을 짓게 된다. 平等緣이란, 모든 보살의 업식 훈습을 위해 연을 짓는 것이니, 초지이상에서 모든 부처에 이르기 까지 동체지력(同體智力)에 의하여야 바야흐로 평등연을 짓기 때문이다.
* 憨山 : 분별사식은 훈습을 따라서 발심한 범부와 소승인의 종류를 따라서 갖가지 응화신을 나타내는 것을 차별연이라고 하며, 근본업식의 훈습을 따라 발심한 대승보살이라면 승응신(勝應身)을 나타내어 평등하게 감응해 주는 것을 평등연이라고 한다.-물처럼바람처럼]
[첫째의 차별연(差別緣)은 행자(行者)가 처음으로 보리심을 일으켜, 구도(求道)의 길에 들어서, 차례로 나아가 성불(成佛)할 때까지, 그 중간 과정에서 보고 염(念)하는 불보살의 모든 활동이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러나 제불(諸佛)과 보살 등이 항상 불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도 나타나는 것이다. 때로는 부모 형제나 친척 또는 처자(妻子)로 나타난 불보살도 있고, 때로는 하인(下人)이나 친구로 나타나 교화하기도 하고, 때로는 원수로도 나타나 진로를 바뀌게 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불보살은 수행자를 인도하고 격려하며,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하는 사섭법(四攝法)을 행하여, 행자의 마음을 수습(收拾)하고, 불타의 가르침에 인도하는 등의 여러 가지 무량한 기연(機緣)을 만들어 행자(行者)에게 작용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행자는 그것을 부모나 친척 등의 인도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지만, 실제는 불보살이 그 모습을 바꾸어, 행자에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보살이 그와 같이 온갖 기연을 만들어 행자에게 활동하고 있는 것은, 대비(大悲)의 훈습력이 일어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같은 대비의 훈습력에 의하여 중생은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에서 벗어나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의 선근(善根)을 실행하여 그것을 증장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때로는 보고 듣고 하여 그릇 따라 이익을 얻어가기도 하는데, 그것을 모든 중생은 자기의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훈습력이 활동하게 되는 것이므로, 각자는 서로 상이한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것을 차별연(差別緣)이라 일컬어진다.]
[차별적인 인연이란 삼승인(三乘人)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을 의지하여 처음 발심하여 삼승의 도과(道果)를 구함으로부터 불과에 이르기까지 수행하는 중간에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몸과 형상을 보기도 하며 그 공덕을 깊고 간절히 생각하기도 하며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자비원력으로 중생을 포섭하여 받아들이기도 하고, 혹은 권속·부모·모든 친척이 되기도 하며, 낮은 곳에 거처하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혹은 심부름하는 급사가 되어 주기도 하고, 같은 도반(道伴)으로서 발심하기를 권하기도 하며, 혹은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 되기도 하며, 생사에서 공포를 느끼고 불도에로 들어가게 하려고 하기도 하며, 혹은 원수의 집안이 되기도 하며, 혹은 사섭법(四攝法)을 일으켜 그들을 섭수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공부에는 올바로 발심한 자에게는 모든 경계와 모든 존재가 불‥보살의 자비스런 나타남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중생을 성취시키는 외연은 망상의 의식적인 조작이나 인위적인 작위가 없는 지극히 자연스런 대비(大悲)로 훈습하는 위신력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중생들이 허망한 마음으로 조작하는 경지가 아니고, 삼신(三身) 가운데서 응화신(應化身)이 중생들이 처해 있는 개별적인 상황에 따라서 알맞게 작용해 주는 차별적인 인연입니다. ]
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내지일체소작무량행연)
나아가 일체 짓는 바 모든 한량없는 수행의 연=行緣에 이르기까지,
以起大悲熏習之力(이기대비훈습지력) 能令衆生增長善根(능령중생증장선근)
대비의 훈습하는 힘을 일으켜,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케 하여
若見若聞得利益故(약견약문득리익고)
혹은 보기도 하고, 혹은 듣기도 하면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憨山 : 제불보살이 중생을 위해 성취하는 외연은 망상의 의식적 조작이 없는 무작대비(無作大悲)로 훈습하는 세력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음을 나타내었다. --- 삼신(三身) 가운데 응화신이 중생들이 처해 있는 개별적인 상황에 따라서 알맞게 작용해주는 차별연을 말하였다.]
此緣有二種(차연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외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近緣(일자근연) 速得度故(속득도고)
첫째는 가까운 인연=近緣이니, 빨리 제도를 얻는 까닭이며,
二者遠緣(이자원연) 久遠得度故(구원득도고) 是近遠二緣分別(시근원이연분별)
둘째는 먼 인연=遠緣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제도를 얻는=得度하는 까닭이니,
이것이 가깝고 먼 두 가지 외연의 분별이다.
[得度 : 度는 도(渡)와 뜻이 같다. 건넘이라는 뜻으로 차안=번뇌의 세계에서 피안=열반의 세계로 건너감이다.]
[차별연은 다시 근연(近緣)과 원연(遠緣)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근연(近緣)은 근기(根機)가 성숙된 사람에게 빠르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연(緣)을 만들어 주는 것이며,
원연(遠緣)은 근기가 성숙되지 못한 사람에게 구원한 미래에라도 구원될 수 있도록 기연(機緣)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 근연(近緣)과 원연(遠緣)을 다시 각각 증장행연(增長行緣)과 수도연(受道緣)으로 분류한다.]
[이 차별연의 의미를 시간적으로 구별하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근연(近緣)으로 신속하게 생사를 건널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원연(遠緣)으로 구원(久遠)의 오랜 세월을 수행하고서야 생사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연과 원연을 분류하여 구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이 외연이 되어 삼승(三乘)의 수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수행을 증장하여 정관(正觀)으로 들어가게 하는 증장행연(增長行緣)이며, 둘째는 삼승의 수행하는 사람이 견도위(見道位)에 들어간 뒤에 직접 진여를 증득하게 하는 수도연(受道緣)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을 외연으로 훈습하여 구제하는 주체인 부처님의 교화를 시간적으로 멀고 가까운 차별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이 오래고 가까운 두 가지 바깥 인연인 조연의 훈습은 중생이 처음 발심하여 마지막 성불하기까지의 시종인과에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적인 훈습과정인 멀고·가까움을 말하였습니다.
예를 든다면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전생에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 교주로 출현하였을 때 그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일승도(一乘道)를 이룰 외연의 종자를 심었다가 지금에야 그 열매가 성숙하여 각자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았는데, 이는 구연(久緣)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또 가령 부처님이 성도하여 사바세계의 교주로 머무시면서 영산회상에서 교화할 근기인 중생들이 부처님을 뵙고 새로 발심한 것은 가까운 인연이며, 그들 중생은 다시 근연을 통해 장래에 득도할 인연을 지었는데, 이는 시간적으로 먼 인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은 차별연을 총체적으로 시간적인 오램과 가까움의 측면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또 경전에 "내가 지금 세간에 출현하여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일체중생에게 개시(開示)하여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은 믿게 하고, 이미 믿은 자들은 그 믿음이 더욱 자라나게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증장연에 해당하겠습니다. 다시 말씀하시길, "이미 믿음이 더욱 자라난 자들이 각자 여래가에 태어나 진여가 자라나게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수도연에 해당하겠습니다. 가령 수행의 위치에서 시간적인 원근을 요약한다면 이승삼현위(二乘三賢位)에서 더욱 자라나게 하는 차별적인 외연의 훈습력은 근연이며, 십지에서 불과를 성취하는 것은 원연에 해당하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구(久)·근(近)의 차별은 총체적으로 중생들 번뇌가 두텁고 엷은 정도에 따른 개별적인 상황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지, 진여본질의 세계에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문자의 차별에 집착하지 말고 그 의도를 잘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復有二種(부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근원과 원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고 하는가?
一者增長行緣(일자증장행연) 二者受道緣(이자수도연)
첫째는 수행을 증장시키는 연=增長行緣이고, 둘째는 도를 수지하는 연=受道緣이다.
[元曉 : 增長行緣이란 보시, 지계 등의 모든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受道緣이란 문·사·수(聞思修)를 들어 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증장행연(增長行緣)은 행(行)을 증장시키는 연(緣)으로서 원효는 이를 육바라밀(六波羅蜜) 등의 수행을 증장시키는 연(緣)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행(行)의 증장(增長)에 의하여 새로운 깨달음의 지혜를 얻는 것이 다음의 수도연(受道緣)이다. 원효는 이 지혜를 문혜(聞慧) 사혜(思慧) 수혜(修慧)의 셋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문혜(聞慧)는 스승의 교훈을 듣고 그대로 이해하는 지혜이며,
사혜(思慧)는 듣고 배운 바를 스스로 생각하여 옳다고 믿는 지혜이며,
수혜(修慧)는 그렇게 해서 얻어진 지혜를 그대로 실천 수행하여 체득해 가는 지혜를 말한다.
증장행연(增長行緣)이 지혜를 얻기 위한 방편행(方便行)이라 한다면,
수도연(受道緣)은 그러한 방편행의 증장에 의하여 결과로서 새로운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차별연(差別緣)은 초발심(初發心)으로부터 성불(成佛)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지만, 그 중간에 평등연(平等緣)이 작용한다.]
平等緣者(평등연자) 一切諸佛菩薩(일체제불보살)
평등연이라는 것은 일체 부처님과 보살 모두가
皆願度脫一切衆生(개원도탈일체중생) 自然熏習恒常不捨(자연훈습항상불사)
일체 중생을 해탈하기를 원하셨기에, 자연스럽게 훈습하시면서 항상 (중생들을) 버리지 않으시며
以同體智力故(이동체지력고) 隨應見聞(수응견문) 而現作業(이현작업)
동체지의 힘으로 보고 들음을 따라 출현하시어 업을 지으심을 나타내나니,
隨應見聞 : 중생의 보고 들음에 따라서.
所謂衆生依於三昧(소위중생의어삼매) 乃得平等見諸佛故(내득평등견제불고)
이른바 중생들이 삼매에 의지하여 평등하게 모든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등연이라함은, 삼매(三昧)중에 불(佛)을 보는「관불삼매(觀佛三昧)」를 일컬으는 것으로서, 행자(行者)가 수행이 진척되어 십주위(十住位) 이상이 되면, 삼매에 들어 그 선정(禪定) 체험 속에서 불(佛)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행자의 힘에 의하여 불(佛)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불(佛)쪽에서도 행자에게 훈습작용을 행하는 것이다. 즉 일체제불과 보살은 모두가 일체 중생을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원(願)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 원에 의하여, 저절로, 자연히, 마음먹지 않아도 끊임없이 중생에게 구제 활동을 전개하고 훈습하여, 버리는 일이 없는 것이다. 또한 진여(眞如)에 있어, 일체는 동체(同體)로서, 그러한 동체의 지력(智力)에 의하여 불(佛)은「보고싶어하고 듣고싶어하는」행자(行者)의 원에 따라 그들 행자 앞에 작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은 관불삼매(觀佛三昧)에서 평등하게 제불(諸佛)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평등연(平等緣)이라고 말한다.]
[평등한 조연이란 일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은 일체 중생을 평등한 마음으로 고통으로부터 구제하여 해탈하기를 근본적으로 원하는 힘인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중생의 상황 즉, 근성과 역량에 따라 감응의 작용을 일으켜 자연스럽게 훈습하면서 상주불변하고 항구하게 중생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근본지(根本智)의 인연에 동체(同體)의 지혜로 항상 버리지 않고 훈습하는 위신력 때문에 중생들이 몸의 형상을 친견하거나 진리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이것이 수행하여 얻는 후득지(後得智)의 감응으로 나타나 온갖 불사를 짓습니다. 이는 이른바 십주(十住) 이후의 중생들이 삼매력에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의 법체의 역량이 평등함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평등연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모두가 일체중생이 생사의 세계를 건너 해탈하도록 수행의 인지에서 본래 서원을 세우셨기 때문에 일체 성인과 범부의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에 동일한 진여 자체가 동일한 본체로 대비의 지혜인 근본지(根本智)로 항상 훈습하면서 중생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생은 모든 부처님의 한 마음 안의 중생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생각 생각에 훈습하여 일념에서 잠시도 버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 가운데 진여삼매(眞如三昧)와 관불삼매(觀佛三昧)에 들어가는 자가 있기만 하다면 그가 과거 숙세에 익혔던 견문(見聞)을 따릅니다. 그리고는 즉시 그들 삼매(sam dhi) 가운데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고 중생들의 도를 성숙시켜 성취시킵니다. 예를 든다면 보현보살이 한량없는 세계와 한량없는 중생들에게 두루두루 몸을 나타내는 것과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음성을 따라 감응하는 것과 지장보살이 중생의 원력을 따라서 조그만 선행을 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먼저 과보를 받게 하여 원력에 부응하게 하는 등의 이 모두가 평등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서로 차별이 나는 중생들 때문에 차별이 있는 것이지, 불보살은 모든 중생이 똑 같이 제도되도록 무작대비(無作大悲)로 훈습하므로 평등하다. '법화경'의 약초유품에 “삼천 대천 세계의 모든 식물들에게 짙은 구름이 가득 퍼져 비를 뿌리면 모든 식물들은 제각기 비를 맞으며, 그 초목의 성질에 맞게 자라고 크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였다.
지운 - 주객관이 나뉘어 있는 사람은 외연들을 차별로 보지만, 주객관이 나뉘어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이는 외연들이 모두 진여의 작용임을 안다.
진여훈습: 정법훈습 |
妄心熏習 | 分別事識熏習 | 진여가 의식을 훈습, 厭生死苦 求涅槃 | |
意(業識)熏習 | 진여가 업식을 훈습, | |||
眞如熏習 | 自體相熏習 | 진여자체가 具無漏法 備不思議業 作境界之性, 정법훈습의 내적원인 [正因] | ||
用熏習 | 밖으로부터 불보살이 정법훈습이 되도록 돕는 것[外緣] | |||
差 別 緣 |
수행자를 둘러싼 외연이 다름 | |||
近緣 : 速得度 - 정진의 차이에 따라 이루어짐 | ||||
遠緣 : 久遠得度 | ||||
增長行緣 : 육바라밀을 증장함. | ||||
受道緣 : 聞, 思, 修 | ||||
平等緣 | 다른 외연이 모두 불보살(진여)의 작용임. |
此體用熏習分別(차체용훈습분별) 復有二種(부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자체=體와 작용=用 훈습의 분별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이상에서 진여훈습(眞如熏習)을 자체상(自體相)훈습과 용(用)훈습으로 나누어 따로따로 설명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체(體)훈습과 용(用)훈습을 함께 설한다. 다시 말하면 진여 내훈(內熏)인 체훈습과 불보살의 외연(外緣)인 용훈습을 수행자의 입장에서 함께 설하는 것이다.]
一者(일자) 未相應(미상응) 謂凡夫二乘初發意菩薩等(위범부이승초발의보살등)
첫째는 아직 서로 상응하지 못함이니, 범부와 이승, 초발의 보살 등이
以意意識熏習(이의의식훈습) 依信力故而能修行(의신력고이능수행)
의와 의식으로 훈습하면서 믿는 힘=信力에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할 수는 있지만,
未得無分別心與體相應故(미득무분별심여체상응고)
아직 무분별심이 자체=體와 더불어 서로 호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與體相應 수행자의 지(智)와 진여의 체(體)가 아직 서로 응함을 말하니, 무분별지를 얻지 못하면 상응하지 못한다.
未得自在業修行與用相應故(미득자재업수행여용상응고)
아직 자재한 업을 얻지 못하여 수행과 작용이 더불어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與用相應 : 용(用)은 용 훈습으로서 진여의 작용이며, 이를 응신이라고 한다. 자재업을 얻지 못하여 부처의 응신과 상응하지 못함을 미상응(未相應)이라고 한다. 팔지 이상이 되어야 상응할 수 있다.
* 元曉 : 以意意識熏習 - 의식훈습은 범부와 이승의 훈습이며 분별사식훈습이다. 의훈습은 초발심보살 이상의 훈습이며, 업식훈습이다. (별기) - 법신보살이 법신을 증득할 때 능견상을 여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지전(地前 : 십지이전)의 보살을 의훈습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니, 속지(俗智)로 보불(報佛)을 보는 뜻에 의한다면 금강심(金剛心:제10지의 滿心) 이하에서 모두 견상(見相)이 있음을 통틀어 업식훈습이라고 한다.
[진여의 체용(體用)훈습을 수행자의 입장에서 그 수용(受容)상태를 구별하면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아직 상응하지 못한「미상응(未相應)」단계이며, 다른 하나는 이미 상응한「이상응(已相應)」단계이다.
첫째의 미상응(未相應) 단계라 함은, 진여의 내적(內的)훈습이, 그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행자의 마음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단계이다. 범부와 성문, 연각등 이승(二乘), 그리고 처음 발심을 낸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은 법집이 남아있는 의훈습(意熏習)과 분별심을 바탕으로 한 의식훈습(意識熏習)으로 수행이 진행되고 있어, 그들은 진여(眞如)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법력(法力)은 없으나 불타의 가르침에 의하여 자기의 본성이 진여라고 아는 신심(信心)의 힘은 가지고 있다. 이들은 그 신심만으로 수행을 진전시키기 때문에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세계를 증득하지 못하고 있다. 무분별지의 증득가능성은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진여 평등의 체(體)와 상응 즉 일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무분별지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상응(相應)이라는 용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미상응(未相應)과 이상응(已相應)이 설해져 있으나, 이는 행자(行者)의 지(智)가 그 마음의 본성인 진여(眞如)와 서로 일치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미상응(未相應)은 그 지(智)가 진여와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아직 분열되고 있는 상태를 말하며, 이상응(已相應)은 행자의 지(智)가 진여에 일치하여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범부와 이승(二乘) 및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은 아직 수행 단계가 지전(地前)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아직 분별과 법집이 남아 있어, 진여평등(眞如平等)의 본체에 서로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어, 무분별지의 세계가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범부 이승(二乘)등은 진여와 일치하지 않은 미상응 상태에 있어,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를 증득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 뒤에 나타나는「차별후득지(差別後得智)」도 얻지 못하고 있다. 차별후득지라고 하는 것은, 불타의 깨달음의 지혜가 중생 구제를 위하여, 밖으로 나타나는 지혜로서,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으로서의 불타의 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중생 구제의 활동은 불지(佛智)로부터, 자연히, 저절로, 자유자재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를「자재업(自在業)」이라 일컬은다. 이상과 같은 의미로서 범부, 이승, 초발의보살의 수행 과정에서는 진여훈습(眞如熏習)이 미상응(未相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진여의 자체와 지혜의 작용에 아직 상응하지 못함을 밝혔습니다. 이 진여 자체와 그 훈습하는 작용을 분별하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진여 자체와 그 훈습하는 지혜의 작용에 서로 호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범부와 이승인과 처음 뜻을 발한 보살 등은 오의(五意)로 훈습하고, 범부와 이승은 의식으로 훈습하면서 믿는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할 수 있을 뿐 아직 무분별심(無分別心)으로 진여의 자체와 더불어 서로 호응하진 못하기 때문이며, 진여의 자체를 증득한 데서 일어나는 자재업지(自在業智)로 수행하여 진여 그 작용의 훈습과 더불어 아직은 서로 호응하진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불보살이 능훈(能熏)하는 진여의 자체인 근본지(根本智)와 그 작용으로 얻은 방편지(方便智)는 평등하지만 훈습을 받을 대상인 중생의 근기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종합적으로 밝힌 것입니다. 즉, 범부와 이승과 초발의보살은 단지 오의(五意)와 의식(意識)을 의지하여 훈습할 뿐이므로 발심의 정도가 얕아 오직 십신(十信)의 힘을 의지하여 수행할지언정, 아직은 십지(十地)의 진여삼매에는 깊이 깨달아 들어가진 못하였기 때문에 망념의 분별이 없는 진여일심인 무분별심(無分別心)이 근본지인 진여자체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진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자체에 깨달아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작용인 부사의한 자재업지(自在業智)로 얻는 방편지를 얻어 자체훈습의 작용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훈습의 차별이 중생이 처한 개별적인 상황의 차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중생의 역량에 따라서 얕은 단계에서 수행한 과보는 얻었지만 보다 깊고 높은 단계에는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二者(이자) 已相應(이상응) 謂法身菩薩(위법신보살)
두 번째는 이미 서로 상응(호응)함이니, 이른바 법신보살(십지 보살)이
得無分別心與諸佛智用相應(득무분별심여제불지용상응)
무분별심을 체득하여 모든 부처님의 지혜=佛智의 작용=用이 상응함을 말한다.
唯依法力(유의법력) 自然修行(자연수행) 熏習眞如(훈습진여) 滅無明故(멸무명고)
오직 법력만을 의지하여 자연히 수행하며,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십지보살의 훈습이며, 진여의 근본지와 수행으로 얻은 지(智)가 서로 상응하는 단계임.
* 元曉 : 이상응(已相應) 중에 법신보살이란 십지보살이요,
得無分別心은 체와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이다.
與諸佛智用相應은 여량지(如量智)가 있기 때문이며, 自然修行은 팔지 이상에서 공용(功用 : 애써 노력함)이 없기 때문이다.
* 憨山 : 십지 이상의 보살은 무분별심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진여의 자체와 그 작용인 훈습으로 서로 호응할 수 있다. 법신보살은 진여법으로 훈습하는 세력만을 의지하여 의지적인 노력 없이도 임의로 운행하여 정진수행하기 때문에 진여법 자체와 그 작용인 훈습과 서로 호응할 수 있는 것이다. --- 초지에서 칠지까지는 유상관(有相觀)이 많으므로 진여 자체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고, 팔지(八地) 이후 무상관을 닦을 땐 그 작용의 훈습과 더불어 호응하며, 이승인과 삼현보살은 육식(六識)에 의지하기 때문에 진여의 이치를 비교하여 추리로 관찰하기 때문에 자체와 작용 어느 쪽에도 호응하지 못한다.
* 지운 : 분별심이란 주관과 객관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이다. 초지에 이르면 주객이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진여를 조금씩 보게 되고, 8지에 이르면 상응하게 된다. 7지까지는 수행을 하다가 퇴보할 수도 있지만, 8지부터는 퇴전하는 일이 없다. 8지는 객관이 타파되는 단계이고, 9지는 주관이, 10지는 업식이 타파되는 단계이다.
[이미 상응한「이상응(已相應)」단계이다. 이것은 수행자의 마음이 진여와 서로 일치하는 상응단계(相應段階)이다. 보살이 십지(十地)중 초지(初地)에 들어가면 지전(地前)에 있었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이탈하면서, 진여의 이(理)를 부분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 때문에 초지이상의 보살은 법신(法身)의 보살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마음과 진여가 합체(合體)하여 일치한 상태로서 무분별지(無分別智)가 나타나는 상태이다. 이 무분별지(無分別智)가 진여의 이(理)에 합일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이지불이(理智不二)라고 말하고, 또한 법신(法身)이라고도 말한다.
따라서 법신의 보살은, 불타 자체인 평등진여와 상응하고 있는 것이므로 무분별지(無分別智)의 뒤에 나타나는 중생 구제 활동의 후득지(後得智)가 일어난다. 이 후득지는 무분별지를 바탕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그 지혜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혜의 활동을「자재업(自在業)」이라고 말한다. 십지(十地)까지의 보살의 깨달음은 불타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무분별지가 진여와 상응하여, 자각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즉 보살에 있어, 진여의 법력(法力)이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 법력에 의하여 보살의 자재업(自在業)은, 법력이 나타나는 대로 저절로 수행하고, 그 수행이 진여에 훈습하여 무명(無明)이 소멸되는 것이다.]
[이미 상응하는 것은 진여 자체와 그 작용의 훈습에 이미 서로 호응하는 훈습입니다. 즉, 진여의 이치를 증득한 십지의 법신보살이 진여 자체인 무분별심을 체득하여 모든 부처님의 근본지(根本智)와 그 수행하여 얻은 작용인 방편지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여법신의 세력만을 의지하여 팔지(八地) 이상에선 일부러 의도적으로 수행하려는 노력이 없이도 자연히 수행이 되며 진여법신을 훈습하여 근본무명과 지말무명을 소멸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는 능히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와 구제를 받는 대상인 십지 이상의 보살이 진여 자체와 그 훈습하는 작용이 평등함을 종합해서 밝힌 것입니다. 십지 이상의 보살은 무분별심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진여의 자체와 그 작용인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할 수 있습니다. 법신보살은 진여법으로 훈습하는 세력만을 의지하여 의지적인 노력 없이도 임의로 운행하며 정진수행하기 때문에 진여법 자체와 그 작용인 훈습과 더불어서 서로 호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진여인 근본지로 진여의 평등한 이치를 관조하기 때문에 "진여 법신의 세력"이라 말하였고, 임의로 운행하며 의도적인 수행공부의 노력을 허비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수행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진여(眞如)의 근본지(根本智)로 자연히 수행하면서 진여를 훈습하기 때문에 근본무명과 지말무명인 이혹(二惑)을 소멸시켜 모든 부처님의 진여자체와 그 작용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종합하면 초지에서 칠지(七地)에 이르기까지는 유상관(有相觀)이 많으므로 진여자체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고, 팔지(八地) 이후 무상관(無相觀)을 닦을 땐 그 작용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며, 이승인과 삼현위보살은 육식(六識)을 의지하여 진여의 이치를 비교하여 추리로 관찰하기 때문에 자체와 작용 어느 쪽에도 서로 호응하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은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서로 의지하여 훈습하는 것을 밝히는 가운데 염법·정법의 훈습은 이미 끝났고, 다음은 염법과 정법의 훈습이 끝까지 다하고 못한 의미를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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