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 1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入智相云何?多聞薰身故,非阿犂耶識所攝,如阿犂耶識種子成。寂靜思惟所攝,諸法義現相所生,可取事處,有見者意言處。

지혜의 지상(智相) 들어가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다문훈습(多聞熏習)의 의지처이기 때문에 아리야식에 포섭되는 바가 아니나,

아리야식의 종자가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적정(寂靜)한 사유가 포섭하는 바로서,법과 뜻(義)과 상(相)으로 나타나고, 인식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유견식(有見識, 견분, 주관)이란 말의 뜻을 생각하는 의언(意言)인 것이다.

ㅡ 상권에서 지혜의 지상(智相)으로서 심식론과 삼성설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이것은 유식학의 이론문(理論門)이며, 이제는 그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수행문에 들어간다.

의언(意言)은 뜻 속의 말, 즉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是中誰入智相?大乘所薰多聞相續身,無量諸親近得故`信欲一向故`善集善根故,善助功德智行菩薩。

그러함에서 누가 지혜의 지상(智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대승의 다문훈습이 상속하고, 무량한 부처님을 모두 친근(親近)한 때문이며, 

믿음과 의욕이 한결같으며, 선근을  쌓음으로써 공덕과 지혜를  갖춘 보살이 들어가는 것이다.

ㅡ유식학에서 보살의 수행과정인 5() 중에서 1위인 자량도(資糧道) 수행을 설명한 것으로,

10주ㆍ10행ㆍ10회향(10회향의 주심住心)까지이다.

 

何處入還?彼現見法義,現相意語處,因大乘法生故;信解地中,見道行`修道行,及盡至一切法,唯記爾,隨順聞信因故`如是彼分別證因故`一切障對治及離障故。

어떠한 곳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유견식(有見識, 견분)이 법의(法義)의 상으로 나타난 그 말의 뜻을 생각하는 의어처(意語處) 원인이 되어서, 대승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니, 신해지(信解地)ㆍ견도의 수행인 견도행(見道行)ㆍ수도의 수행인 수도행(修道行)ㆍ궁극적인 지위인 진지(盡至)인 것이며, 

일체법이 오직 식(識)임을 수순해서 듣고 믿는 원인이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그가 분별하여 깨치는 증인(證因)이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다스려서 장애를 여읜 곳이다.

 

從何處入?善根力持故;三種相心轉明,種種莊處滅故;念法義定慧,一切時正行,及不放逸故。

어떠한 곳으로부터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선근의 힘에 의하여 지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삼종상(三種相)으로 마음을 전환해서 밝힌 때문이며, 갖가지 장엄이 소멸한 때문이며, 법의(法義)를 인식대상으로 하는 선정과 지혜를 어느 때나 바르게 행하고 게으르지 않음으로써이다. 

 

諸世界無量,衆生類無量,念念中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初轉心者。隨所心布施等波羅蜜助集行,彼心我已得,是故我不加用諸波羅蜜,修道能滿成,第二轉明者。諸禪法成就已,死後尋得隨所須一切身事得,有障善根者,況我善修善根,得無障善根,尋卽一切諸勢不成,第三轉明者。

是中有偈:

여러 세계의 수많은 중생의 무리가 무량한 찰나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나니, 이것이  번째로 마음을 전환한 초전심(初轉心)한 것이며,

이러한 마음을 따라서 보시 등의 바라밀을 돕는 행을 모두 행하여서, “그 마음을 나는 이미 얻었으므로, 따라서 나는 모든 바라밀을 더욱 가용(加用)해서 닦지 않아도 수도(修道)를 능히 원만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번째로 전환해서 밝히는 제이전명(第二轉明)인 것이며,

장애가 있는 선근을 성취한 이는 여러 선정법을 성취하여,후(死後)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몸(身) 갖추나니, “하물며 나는 선근을  닦아서 장애가 없는 선근을 얻었거늘, 구하고자 한다면 성취하지 못할 세력이 있겠는가?”라고 한다면,  번째로 전환해서 밝히는 제삼전명(第三轉明)인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人類得菩提, 於念念中閒, 衆生無量故, 至時應捨行。

사람의 무리가 깨달음을 증득함이 염염(念念, 순간순간)마다 있음은 중생이 무량한 때문이니

궁극에 이르기 전에는 퇴전하여 버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隨心所行施, 淸淨無垢心, 彼得心止事, 勇健布施成。

마음이 보시를 행함을 따라, 청정하고 번뇌 없는 무구심(無垢心)이 되나니, 

그는 마음을 얻어서 모든 정진을 멈추지 않으니, 용맹하게 보시를 이루네.

 

善者滅身已, 自勢隨所心, 善者滅身已, 彼勢云何不

착한 선자(善者) 죽은 뒤에 스스로의 마음을 따르나니, 

착한 선자(善者) 죽은 뒤에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捨聲聞`緣覺,心滅念故;於大乘中,一切有疑,無疑故滅疑或;聞思諸法,除我相我`我所相執故,滅法慢者;前所住及安一切相,不念不分別故,及滅分別者。是中有偈:

성문ㆍ연각의 마음을 버려서 생각을 멸하여, 멸념(滅念)한 때문이며, 대승에 관한 일체에 의심이 없기 때문에 의심과 미혹을 단멸하는 것이며,

듣고 사유하는 문사(聞思)의 제법에서 나(我)ㆍ나의 것(我所)이라는 집착을 없앰으로써 법만(法慢, 법집法執)을 멸하며,

현전(現前)에 머물러서 안립한 일체의 상을 생각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음으로써 분별을 끊는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在前隨所除, 相念自住處, 智盡不分別, 得上菩提爾。

현전에 머물러, 제거한 것을 따라서 인식작용과 인식대상이 자재한 곳이네.

지혜가 다하면 분별하지 않으므로, 최상의 깨달음인 상보리(上菩提)를 얻는다네.

 

以何云何入?

무엇에 의해서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2위인 방편도에서의 수행을 설명하는 것으로, 10회향의 만심(滿心)에서  가지 선근인 사구관(四求觀)과 사여식지관(四如實知觀) 닦는 단계이다.

 

彼聞習業 寂靜思惟所攝法義,現見意言

그것은 들어서 훈습되는 문습업(聞習業)이고, 고요한 사유에 포섭되는 바의 법의(法義)와 나타나는 견분(주관)의 생각 속의 의언(意言)이며,

ㅡ유견(有見, 유견식) 말하고 유상(有相) 들지 않은 것은,  관법이 내부의 식을 반연하고 외부 대상을 제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四種求,名`義`性`勝安求等

 가지 사색인 사종구(四種求, 사구관四求觀)에 의한 것이니, 명(名, 명칭)ㆍ의(義, 대상)ㆍ성(性, 자성)ㆍ승(勝, 차별)으로 안립되는 사색이니, 

명(名, 명칭)ㆍ의(義, 대상)ㆍ성(性, 자체의 체성)ㆍ승(勝, 모습과 작용의 차별)의 네 가지 법이 임시적인 존재인 가유(假有)이고 실무(實無)라고 심구(尋求)하여 사찰(思察)하는 관법이다.

ㅡ여기서 () 내용면에서 차별의 의미이므로 편의상 차별이란 의역어를 사용한다.

 

四種如實知故,名`事`性`勝安性勝,如實知彼不覺見故。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아는  가지 지혜인 사종여실지(四種如實知)에 의하는 것이니, 명(名, 명칭)ㆍ의(義, 대상)ㆍ성(性, 자성)ㆍ승(勝, 차별)에서 안립된 뛰어난 성품인 성승(性勝)의 있는 그대로를 여실하게 아는 지혜이니, 그것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지 때문이다.

ㅡ4여실지관(如實智觀) 가지 사색관인 사종구(四種求) 다음에 다시 명확히 인가하여서 결정하고 또한 이렇게 관찰하는 마음인 능취심(能取心)까지도 가유실무(假有實無)라고 인가하고 결정하는 관법이다.

 

如是彼菩薩唯入記故順修,彼名義現見意言,彼名意言唯正觀,彼名所依義唯意言正觀,然彼名性勝安唯觀。

於後唯意言,不覺已有名`彼義`有性`勝安。有性勝義相不見已,此四種求及四種觀見知已,彼名義現相意言中唯記入。

이와 같이  보살들은 유식(唯識)에 깨달아 들어가고자 수순하고 닦는 것이니,

명(名, 명칭)과 의(義, 대상)으로 나타난 견분(주관)의 생각 하는 바의 의언(意言) 대해서, 

명(名, 명칭) 오직 생각하는 바의 의언(意言)라고 바르게 관찰하고, 

명(名, 명칭) 의지처인 대상도 오직 생각하는 바의 뜻인 의언(意言)이라고 바르게 관찰하며,

명(名, 명칭)ㆍ성(性, 자성)ㆍ승(勝, 차별)은 오직 안립일 뿐이라고 관찰한 다음에 오직 생각하는 바의 의언(意言)만이 안립이 아니고, 명(名, 명칭)ㆍ성(性, 자성)ㆍ승(勝, 차별) 안립임을 깨닫는 것이다. 

성(性, 자성)ㆍ승(勝, 차별)에는 대상의 상을 보지 못하나니,

명(名, 명칭)ㆍ의(義, 대상)ㆍ성(性, 자성)ㆍ승(勝, 차별), 네 가지 사색인 사종구(四種求)와 네 가지 관찰에 의해서,  명칭과 대상으로 나타난 생각하는 바의 뜻인 의언(意言)에 대해서 오직 식(識)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彼記事中入已,爲當唯入彼有相見二事及種種事入,名`義`性`勝義,六種相無義故;彼可取能取事現處故;不斷種種相義,現相所生故。

 유식의 성품에 깨달아 들어감은 다음과 같으니, 장차 유식의 성품에 들어가고, 

 유상식(상분, 객관)과 유견식(견분, 주관)의  성품과 갖가지 성품에 들어가나니,

명(名, 명칭)ㆍ의(義, 대상)ㆍ성(性, 자성)ㆍ승(勝, 차별)의 의미(義)에 여섯 가지 육종상(六種相)이 없기 때문이고, 

 취착된 인식대상인 가취(可取), 즉 소취(所取)는 인식주체의 성품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임없이 갖가지의 상과 의미로 사현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闇中如見繩,謂蛇現相故。所謂如繩蛇不實,非衆生故。如是覺義者,非有迴蛇意,唯住繩意,彼亦微思量色`香`味`觸`相故。是中依慧,繩慧亦迴成。如是此諸六種相名現相,意言中如繩慧。六種相實義實處唯記慧,亦思量成就性慧故。

비유하자면 어둠 속에서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노끈에서 본 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살아 있는 중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과 같이 대상이 비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 뱀이라는 지각(意)은 없어지고 오직 노끈의 지각(意)만 남게 되는 것이나, 그것 역시도 세세하게 생각해 보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빛깔(色, 형체)ㆍ냄새(香)ㆍ맛(味)ㆍ촉감(觸)의 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지각(慧)에 의지하면 노끈의 지각(慧) 역시도 없어지는 것이니,

이와 같이  여섯 가지의 상이 명칭으로 나타난, 오직 생각하는 바의 의언(意言) 가운데에서, 여섯 가지 상의 실의(實義) 실처(實處), 유식성의 지각(慧)도 노끈의 지각(慧)과 같이 사량(思量)인 것이니, 성취성의 지각(慧)이기 때문이다.

 

如是此菩薩意言現相義相事入分別性,入成唯主記入故他性。

이와 같이  보살은 생각하는 바의 언어인 의언(意言)이 대상으로 나타난 상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분별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유식(唯識)을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의타성(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云何成就性入?迴唯記想,彼者是諸意言,聞法習者,彼爾時分別義相。菩薩一切義現相生,無有餘成。是故唯記現相亦不生。是故一切義無分別事名住,已於法界,如現見隨住。

어떻게 성취성(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오직 생각(想)하고 있는 것으로 돌아가서 모든 생각하고 있는 바의 의언(意言)과, 문법(聞法)으로써 훈습된 것과 그러함으로 그 뜻과 상을 분별(分別)한다면, 보살은 일체의 나타나는 뜻과 상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모든 대상으로 나타난 것이 생겨날  없기 때문에식(唯識)으로 사현함도 역시 생겨날  없으므로, 일체 분별이 없는 성품의 명칭에 안주하고, 법계에서 현전에서 보는 것에 수순하여 안주하는 것이다.

 

爾時彼菩薩同等念已,生無分別念智,是故此菩薩名爲入成就性。

於中有偈:

그때  보살은 평등한 인식대상과 인식주체의 지혜인 무분별염지(無分別念智)를 일으키나니, 이로 인하여  보살이 성취성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法衆生法義, 同別有性義, 不淨淨盡至, 分別名境界。

법과 중생ㆍ법과 의미ㆍ동일ㆍ차별ㆍ자성ㆍ대상ㆍ부정ㆍ청정ㆍ궁극에 이른다는 것은

명(名, 명칭)의 경계를 분별함이네.

 

如是此菩薩智及相唯記入故,名爲入成。彼入已,名爲住歡喜地,善達法界,及生如來家,得一切衆生平等心,得一切菩薩等心,是彼菩薩見道行。

이 보살은 이렇게 지혜의 지상(智相)과 유식성에 깨달아 들어가므로 깨달아 들어감이 성취된다고 이름하며,

그것에 깨달아 들어가면 환희지에 안주하고, 법계를 잘 통달하며, 여래가(如來家)에 태어나고,

일체 중생에 대하여 평등한 마음을 얻어서, 일체 보살의 평등한 보살등심(菩薩等心)을 얻으니,

이것이 그 보살의 견도의 수행인 견도행(見道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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