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 3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如是說入智相已。彼因果說云何知?六種波羅蜜故,謂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故。

云何此諸六波羅蜜唯記入成?云何彼入果六波羅蜜成?

이상과 같이 지상(智相)에 들어가는 것을 설명하였으니, 그것의 원인(因)과 결과(果)를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바라밀이니, 이른바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이다. 

어떻게  6바라밀에 의하여 유식에 깨달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또한 6바라밀은 어떻게 그것에 들어가는 결과(果)를 이루는 것인가?

ㅡ지상에 깨달아 들어가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으로, 바라밀의 수행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설명한다.


是中菩薩於世不著`於戒不毀`於苦不瞋`於修不懈怠,如是此諸亂因不行故。因不行故,一向已寂靜思惟諸法,入唯記已,依六波羅蜜,及入唯記故,菩薩淨深心所攝故,得六波羅蜜。是以中閒六波羅蜜行順說信故`樂求隨喜故,得利潤離忍,菩薩自大乘中,說甚深大,唯分別正覺,得無分別智。

여기에서 보살은 보시에 집착하지 않고, 계율을 범하지 않으며, 괴로움에 있어서 성내지 않고, 수행에 있어서 게으르지 않으니, 이와 같은 모든 산란된 난인(亂因) 작용하지 않게 된 까닭이다.

난인(亂因)이 작용하지 않으므로, 한결같이 적정하게 일체법을 사유하여 유식의 도리에 깨달아 들어가나니, 

이미 6바라밀에 의지해서 유식에 들어간 까닭에, 보살의 청정하고 심오한 마음에 포섭된 까닭에, 6바라밀을 증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간에 6바라밀의 가행을 여읠지라도 설하신 바를 따라 믿기 때문에 즐거이 구하고, 수순하고, 기뻐하여 이익이 증대하며, 또한 보살 스스로 대승의 말씀이 매우 심오하고 광대함을 알고 정각을 이루어 무분별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다.


欲信淨心明, 本彼覺法流, 十地近菩提, 不假自然得。

의욕(欲)ㆍ믿음(信)ㆍ청정한 정심(淨心)으로 밝혀서, 근본과  깨달음의 각법(覺法)의 흐름에서

10지의 보리(菩提, 깨달음)에 가까워지나니, 자연스럽게 증득하게 된다네.


有何義故,唯說六波羅蜜?障對治差別安故,一切佛法集句處故,及隨順化一切衆生故。不動相對治故,說檀波羅蜜及尸羅波羅蜜。不動相,謂世不著及家不著。動者迴相,對治故說,謂羼提波羅蜜及毘離耶波羅蜜。迴因相者,世閒衆生作惡行長受苦,及於修善行法中,生疲倦。

어떠한 연고로 오직 6바라밀만을 말하는 것인가?

장애에 대치(對治)해서 안립하는 까닭이며, 모든 불법을 쌓는 문구의 처소인 까닭이며, 

수순하여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까닭이니,

다스려진 부동(不動)의 상(相)으로, 단(檀, 보시)바라밀과 시라(尸羅, 지계)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니,

부동(不動)의 상(相)은 세간에 집착하지 않고 가정에 집착하지 않음을 말하는것이다.

움직여 나아가는 동(動)이란, 물러나는 회상(迴相) 다스리기 위해서 찬제(羼提, 인욕)바라밀과 비리야(毘離耶, 정진)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며,

물러나는 원인의 회인상(迴因相) 세간의 중생이 악행을 지어서 오랫동안 받는 고통에서 피로하여 싫증이 나는 피권(疲倦)이다.

ㅡ바라밀의 숫자를 여섯 가지로 안립하는 이유를 밝혔다.


以發不迴失相對治故,謂闍那波羅蜜及般若波羅蜜。失相者,亂心及無智。如是障對治數差別故,四波羅蜜不散相,一波羅蜜不散相成。以散依故,如實法正覺集諸佛法,如是集一切佛法。句處故,數差別。

발심해서 퇴전하지 않을지라도 잃어버리는 실상(失相) 다스리기 위해서 도타(闍那, 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말하나니, 잃어버리는 실상(失相) 산란된 마음의 난심(亂心)과 지혜가 없는 무지(無智)이니,

이와 같은 장애를 다스리기 위해서 숫자를 차별하여 안립한 것이다.

앞의 네 가지 바라밀은 산란되지 않는 불산상(不散相)이고, 뒤의 바라밀은 산란되지 않음을 성취하는 것이며,

산란됨의 의지처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여실법(如實法)을 바르게 깨닫고 모든 불법을 쌓아 모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모든 불법의 의지처를 쌓는 까닭에 숫자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


以檀波羅蜜益衆生,尸羅波羅蜜不作惡,能忍毘離耶波羅蜜,作事盡至故,如是益相化衆生,化以故調伏,於後不入定心爲令入定心`已入定心爲得解脫故,數勸故得解脫。如是化一切衆生,句處故數差別應知。

단(檀, 보시)바라밀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고, 시라(尸羅, 지계)바라밀에 의지해서 악을 짓지 않으며,

찬제(羼提, 인욕)바라밀에 의지해서 능히 참으며,

비리야(毘離耶, 정진)바라밀에 의지해서 해야  일을  이루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이롭게 하여서 중생을 교화하고, 교화함으로써 조복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다음에 마음이 아직 선정에 들지 않은 자는 그 마음이 선정에 들게 하고, 

마음이 이미 선정에  자는 해탈을 얻게 하나니, 자주 권하는 삭권(數勸)으로써 해탈을 얻게 하며,

이렇게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문구이기 때문에 숫자의 차별이 있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然此諸波羅蜜相云何知?以六波羅蜜身最依菩薩心故。彼以最故,遍行不斷增上意,一切衆生助樂故。方便善巧最故,所有無分別知攝取故。發願最者,阿耨多羅三藐三菩提,作願故。淨最煩惱`智障,修集無障故。

그러나, 이러한 모든 바라밀의 상(相)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여섯 가지의 육바라밀은 최상에 의지처에 의하는 것이니,

첫째는 보리심을 의지처로 삼으니, 그것이 최상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두루 행하는 변행(遍行)하여 단멸되지 않으니, 매우 뛰어난 의욕인 증상의(增上意)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일체 중생을 도와서 즐겁게 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최상의 훌륭한 방편이니, 무분별지혜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최상의 발원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원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최상의 청정은 번뇌장과 지장이 수행에 장애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所有布施,彼亦名波羅蜜。所言波羅蜜,布施非波羅蜜。如是四句如布施中,如是諸餘波羅蜜中,皆有四句,如順應知。此諸波羅蜜以此何義故,有此漸次說?前波羅蜜`後波羅蜜,隨順生故。

모든 보시를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혹은 바라밀이 보시인 것인가? 

보시이면서 바라밀이 아닌 것이 있으므로 이와 같은 네 개의 문구를 짓는 것이니, 

보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바라밀에 있어서도 모두  개의 문구를 수순하여 알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바라밀은 무슨 뜻으로 이러한 순서로써 말하는 것인가?

앞의 바라밀에서 그 뒤의 바라밀이 수순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彼復釋,云何知?一切世閒`聲聞`緣覺`布施等善根中,增上到彼岸故。波羅蜜者,妒悋貧窮破除故`令得大勢功德故。布施 `持戒`滅惡道,令得善道。三昧戒,瞋恨滅除故。他者防佯住忍,懈怠及諸惡不善法令遠離故,增長無量善法出故。精進破亂想,內心住將來故。禪定一切見無。智滅除眞故,及相別故,知諸法故名智。

또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여 알아야 하는 것인가?

모든 세간ㆍ성문ㆍ연각은 보시 등의 선근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써 피안에 이르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하며,

인색과 빈궁을 없애기 때문이며, 큰 세력의 공덕을 얻게 하기 때문에 보시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계율을 지녀서 살기 괴로운 악도(惡道) 멸하고, 살기 좋은 선도(善道) 삼매를 얻게 하므로 지계바라밀이라 하며,

성냄과 원한을 없앰으로써 타인을 편안하게 하는 것에 안주하므로 인욕바라밀이라 이름하며,

게으름ㆍ모든 악(惡)ㆍ불선법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무량한 선법을 생겨나게 하고 증장시키므로 정진바라밀이라 하며,

산란된 생각을 없애고, 내심(內心)에 아주하게 하기 때문에 선정바라밀이라 하며,

일체의 잘못된 견해가 없고 악한 지혜를 제거하여, 진실과 개별적인 상을 따라 일체법을 알기 때문에 지혜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다.


云何此諸波羅蜜有修事可知?略有五種修事應知:習行因行修事`信欲修事`心正念修事`方便善巧修事`所作事憶持修事。是中四種事如前所作。憶持事修事者,所有諸佛自然作佛事,不斷不休息,修諸波羅蜜令滿滿已,心念修喜樂隨喜憶念等心,六種心所攝故。修廣心`不斷心`喜心`作益心`大心及眞心。

 모든 바라밀을 어떻게 수행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가?

대략 다섯 가지 수행이 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닦아 익혀서 현행하는 가행의 수행이고, 믿음과 의욕의 수행이며, 마음으로 바르게 생각하는 수행이고, 

훌륭한 방편의 수행이며, 해야 할 소작사(所作事)를 생각하여 지니는 수행이다.

이러한 중에서  가지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해야  소작사(所作事)를 생각하여 지니는 수행은 다음과 같으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불사를 지으시며, 중단하거나 휴식하지 않고 모든 바라밀을 닦아서 원만하게 하시며,

또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수행은 기쁘고 즐거워하는 희락(喜樂)ㆍ따라서 기뻐하는 수희(隨喜)ㆍ생각하여 지니는 억념(憶念) 등의 여섯 가지 마음의 육종심(六種心)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마음의 육종심(六種心)은 광대한 마음의 광심(廣心)ㆍ단절되지 않는 마음의 부단심(不斷心)ㆍ기뻐하는 마음의 희심(喜心)ㆍ이롭게 하는 마음의 작익심(作益心)ㆍ큰 뜻의 마음의 대심(大心)ㆍ진실한 마음의 진심(眞心)이다.


所有菩薩隨所阿僧祇劫,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如是等時念念中,捨一切自身及恒河沙等世界七寶令滿已,施諸佛如來,乃至未坐道場,而菩薩行布施心無厭足。

모든 보살이 약간의 아승기겁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고, 그러한 시기를 경과하는 순간순간 찰나마다 모든 신명을 버리고,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를 7보로써 원만히 장엄하여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나아가 보리도량에 앉았을지라도, 이러한 보살은 보시를 행하는 마음에 싫어함이 없는 것이다.


如是等時念念中,三千大千世界滿中火時,現四種威儀,雖少一切資用而現作,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心,乃至坐道場。如是菩薩不厭修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等心,此是菩薩廣心。

그러한 시기를 경과하는 낱낱의 찰나마다 삼천대천세계를 타오르는 불로써 가득히 채우고, 사위의(四威儀)에서 비록 삶을 돕는 여러 도구가 부족할지라도 계율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의 마음이 현행하며, 

나아가 보리도량에 앉았을지라도 이러한 보살은 계율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를 닦는 마음에 싫어함이 없으니,

이것이 보살의 광대한 마음의 광심(廣心)인 것이다.


所有彼菩薩此無厭足心,乃至坐道場,不斷及不捨,是名此身。若彼菩薩喜心故,彼六波羅蜜所作衆生益,非彼衆生以得此益故,此是菩薩喜心。若彼菩薩作益衆生,於六波羅蜜,作益攝取,見如己身,自身見如衆生,此是菩薩作益心。

또한  보살은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나아가 보리도량에 앉아서, 중단하거나 버리지 않으니, 이것을 의지처(身)라고 이름하며,

 보살이 기뻐하는 희심(喜心)으로써  6바라밀로 중생을 이롭게 할지더라도,  중생이  이익을 얻음을 보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보살의 환희의 희심(喜心)인 것이다. 

만약  보살이 6바라밀로써 중생을 이롭게 한다면, 중생은 보살로부터 이익을 얻는다고 보지만, 보살 스스로는 중생처럼 보지 않으니 이것이 보살의 이익을 짓는 마음의 작익심(作益心)이며, 


若彼菩薩彼如是六波羅蜜所集善根迴發願,令一切衆生得愛果報,此是菩薩大心。若彼菩薩彼如是六波羅蜜修集善根,與一切衆生同,發願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此是菩薩眞心。如是六種心所攝故,修樂喜心。

또한  보살은 이와 같은 6바라밀로 쌓은 선근을 회향하고 발원하여 모든 중생이 사랑할 만한 과보를 얻게 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뜻의 대심(大心)이며,

또한  보살은 이와 같은 6바라밀로 쌓은 선근을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서 함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발원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진실한 마음의 진심(眞心)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의 육종심(六種心)에 포섭되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닦는 것이다.


若彼菩薩六種修心行行者,彼餘無量諸菩薩彼善根令隨喜,如是菩薩六心所攝隨喜心令修。若彼菩薩一切衆生六種心所攝,六波羅蜜修事,希求如記,六心所攝,六波羅蜜修不離者,乃至坐道場,如是菩薩六種心所攝,希求意行修。

또한  보살은 다른 보살들이 여섯 가지 마음의 육종심(六種心)을 수행하는 무량한 선근을 따라 기뻐하나니,

이렇게 해서 보살은 의 육종심(六種心) 포섭되는 바를 따라서 기뻐하는 수희심(隨喜心) 닦는 것이며, 

또한  보살은 일체 중생이 육종심에 포섭되는 6바라밀을 수행할 것을 희구하나니,

육종심에 포섭되는 6바라밀의 수행을 여의지 않고, 나아가 보리도량에 앉을 것을 희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보살은 육종심에 포섭되는 바의 희구(希求)하는 마음을 닦는 것이다.


若此六種心所攝,菩薩心修故,聞已發一好心,彼功德量等功德,及一切惡作障消滅,何況菩薩。

만약  육종심 포섭되는 보살심의 수행을 들은 후에 다만  순간이라도 좋아하는 호심(好心)을 일으켰다면,  공덕이 무량하고, 모든 악업의 장애를 소멸할  있거늘, 하물며 보살이겠는가?


云何此諸波羅蜜有差別?以三種相應知。法施`財施及無畏施。止戒`攝善法戒`作衆生益戒。作惡忍羼提`忍苦羼提`法思惟忍苦羼提。勇猛精進`行精進`不怯弱不瞋恨喜精進行。現相`作憶持`無分別方便行。無分別及有分別及藉彼得智。

 모든 바라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가지의 삼종상(三種相)이 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보시의  가지는, 법의 보시인 법시(法施), 재물의 보시인 재시(財施), 두려움을 없애 주는 보시인 무외시(無畏施)이며,

계율의  가지는, 지계(止戒), 선법을 포섭하는 섭선법계(攝善法戒), 중생을 이롭게 하는 작중생익계(作衆生益戒)이며,

인욕의  가지는, 원한을 참는 인욕의 악인찬제(惡忍羼提), 고통을 참는 인욕의 인고찬제(忍苦羼提), 법을 사유함을 참아내는 인욕의 법사유인고찬제(法思惟忍苦羼提)이며, 

정진의  가지는, 용맹정진(勇猛精進), 가행정진의 행정진(行精進), 두려움이 없고 성냄이 없으며 만족함이 없는 정진이며,

선정의  가지는, 모습을 나타냄의 현상(現相) 선정, 지음의 작(作) 선정, 생각하여 지니는 억지(憶持) 선정이며,

지혜의  가지는, 무분별 방편행의 지혜, 무분별의 지혜, 분별이 있는 후득지혜인, 차득지(藉得智)이다.


云何此諸波羅蜜攝事應知?此諸波羅蜜攝一切善根,彼相`彼隨順及彼因氣故。

 모든 바라밀이 포섭하는 어떠한 것인가?  모든 바라밀은 일체의 선근을 포섭한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것 자체의 상(相)이며, 그것에 수순하며, 그것을 원인으로 하는 기운이기 때문이다.


云何此諸波羅蜜,諸障一切煩惱攝事知?彼相`彼因及彼果。

이 모든 바라밀의 장애가 모든 번뇌를 포섭하는 것인가?

그것의 자체의 상(相)이고, 그것의 원인(因)이며, 그것의 결과(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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