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 하권 7
아 승 가(阿 僧 伽, 무착) 지음. 불타선다(佛陀扇多) 한역.
是中無分別功用行有三種,因現相取`生差別故。無分別智,亦有三種:少欲知足`不顚倒`無分別無謗故。
藉彼得智,亦有五種:證得`憶念`差別`雜成就 時現分別故。
이 중에서 의식적인 노력을 행하는 공용행(功用行)의 무분별지혜에 3 가지가 있으니,
인연(因), 모습을 나타내는 현상(現相), 취함의 취(取)로 생겨나는 차별이며,
무분별지혜에도 역시 3 가지가 있으니,
적은 것으로 만족을 아는 소욕지족(少欲知足), 전도되지 않음의 불전도(不顚倒),
분별이 없고 비방이 없는 무분별무방(無分別無謗)이며,
후득의 무분별지혜에도 역시 5 가지가 있으니,
증득(證得)ㆍ생각하여 지니는 억념(憶念)ㆍ차별(差別)ㆍ여러가지의 성취인 잡성취(雜成就)ㆍ때때로 나타냄의 시현분별(時現分別)이다.
ㅡ증상혜학의 상 중에서 다시 3 가지 무분별지혜의 차이를 말하였다.
釋成無分別智義故,復說餘偈:
무분별지혜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 다시 나머지 게송을 설하나니,
餓鬼畜生人, 諸天如羅漢, 等同意差別, 得成諸塵義。
아귀ㆍ축생ㆍ인간ㆍ하늘세계가 아라한과 같이 평등하나, 마음이 다른 의차별(意差別)이므로
모든 대상의 진의(塵義)가 성립되는 것이네.
過去如夢等, 無差亦有二, 非有而作念, 彼念順義故。
과거ㆍ꿈 등과 같으며, 차별이 없으니, 역시 두 가지는 없는 것이라.
존재하지 않는 비유(非有)이면서 생각 속의 대상(念)을 이루나니
그 생각 속의 대상(念)이 외부의 대상에 수순하기 때문이라네.
義及成就義, 彼智無分別, 彼無卽無佛, 得事卽不成。
대상(義)로서 대상(義)을 성취한다면, 그 지혜는 무분별이라.
그것이 없다면 부처님도 없는 것이며, 증득 됨도 성립되지 않는다네.
菩薩得神通, 彼以信力故, 地等如是無, 隨善者覺見。
보살이 신통을 얻음은 그 믿는 신력(信力)에 의한 것이라.
땅 등은 이와 같이 존재하지 않는 무(無)이나, 착한 선자(善者)가 인식하여 보는 것에 따를 뿐이네.
成就此智慧, 勇健得禪定, 一切法正依, 及見如是義。
이 지혜를 성취하여 용맹하게 선정을 얻으면,
일체법의 바른 의지처인 정의(正依)이니, 이와 같은 의미(義)를 보는 것이네.
智行分別中, 及現一切義, 應知無義事, 彼記永所無.
지혜가 분별을 행하는 가운데에서는 모든 대상이 나타나나,
마땅히 알아야 할지니 대상이 존재하지 않고, 그 식도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般若波羅蜜中,無分別智及無優劣,如『大品經』說:菩薩住般若波羅蜜中,以不住故,能滿修行。
반야바라밀과 무분별지혜에 우열이 없으니,
'대품반야경'에서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나, 안주하지 않음으로써 능히 수행이 원만하여진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으나,
彼云何以不住故,能滿諸波羅蜜? 捨無種處故`捨離外道我見處見故` 捨離未得正諸菩薩妄念分別處故`
捨離世閒涅槃二邊處故`捨離唯滅煩惱障處喜故`捨離衆生益捨離無餘涅槃界處。
보살이 어떻게 안주하지 않음으로써 능히 모든 바라밀을 원만하게 하는 것인가?
다섯 가지 처소인 사오종처(捨五種處)를 여의기 때문이니,
외도의 아견처(我見處)를 여의기 때문이고,
아직 정법을 증득하지 못한 보살이 허망된 생각으로 분별하는 망념분별처(妄念分別處)를 여의기 때문이며,
세간과 열반의 두 가지 극단적인 이변처(二邊處)를 여의기 때문이고,
오직 번뇌장을 소멸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유멸번뇌장처(唯滅煩惱障處)를 여의기 때문이며,
중생의 이익을 원하지 않고 무여열반세계에 안주하는 무여열반계처(無餘涅槃界處)를 여의기 때문이다.
ㅡ원문의 사무종처(捨無種處)는 사오종처(捨五種處)의 오자로 보아야 함.
聲聞乘及菩薩乘中,有何勝?差別有五種相勝故。無分別勝故,唯陰等法無分別故;
非有方勝,證正一切相知,及依一切衆生方故;不住勝因不住涅槃故;
永勝無餘,涅槃界中,住到無量故;及上勝果,此經無乘有上勝故。 是中有偈:
성문승과 보살승에는 어떤 뛰어난 차이(勝)가 있는 것인가? 5 가지 상의 뛰어남인 상승(相勝)이 있기 때문이니,
첫째는 무분별의 뛰어남인 무분별승(無分別勝)으로, 5음 등의 법에 대해서 오직 분별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있음이 이어지는 것이 아닌 것의 뛰어남인 비유방승(非有方勝)으로, 진여를 증득함과 일체상에 대해서 증득하는 것과 일체 중생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며,
셋째는, 머물지 않음의 뛰어난 원인인 불주승인(不住勝因)으로, 열반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며,
넷째는, 궁극의 뛰어남인 영승(永勝)으로, 무여(無餘) 열반세계 중에서 무량함에 이르러 안주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최상의 뛰어난 결과인 상승과(上勝果)이니, 이 경보다 뛰어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五種勝義故, 慈悲以爲身, 世閒出世勢, 不久當得現。
다섯 가지의 뛰어난 의미인 승의(勝義)인 까닭에 자비를 의지처로 삼으니,
세간과 출세간의 힘이 장차 머지않아 나타나리라.
若諸菩薩成就如是增上戒`增上心`增上慧功德,得自在於衆生益處;
何故復有諸衆生,而復有苦縛者? 示彼衆生有彼衆生業障對故,諸善法受彼助得勢;
示現於彼生善起障故`示現開現故`示現還受,彼受用勢時,現彼不善法益因事故;
助受彼勢時,還彼餘衆多衆生,示現有障因故,而見衆生衆生衆事有縛。是中說偈:
만약, 모든 보살들이 이와 같은 매우 높은 계율의 증상계(增上戒), 매우 높은 마음의 증상심(增上心), 매우 높은 지혜의 공덕인 증상혜공덕(增上慧功德)을 성취한다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에 자재를 얻게 된다.
그러나 어찌하여 많은 중생들이 있고, 또한 그 중생들에게 고통의 속박이 있는 것인가?
그 중생들에게는 그 각각의 업의 장애가 있기 때문이나, 그들에게 여러 선법을 주어서 힘을 얻게 되면 장애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힘을 수용할 때 그들의 불선법의 원인을 보는 이익이 되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힘을 주면, 나머지의 많은 중생들에게 장애되는 것에 되돌려 돕는 원인을 짓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중생 중생 중생들에게는 갖가지로 속박이 있음을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게송으로 설하나니,
現煩惱障故, 患目不正視, 諸衆生菩薩, 不得諸勢義。
안질이 있는 눈으로는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번뇌의 장애가 있는 까닭에,
모든 중생들은 보살의 많은 힘의 이익을 얻지 못한다네.
如是說增上慧勝事已。滅勝事復云何?菩薩滅者,諸不著不住涅槃,彼相者捨;同諸煩惱染,不捨世閒。偈中轉身,是中世閒是他相性,是煩惱染分`涅槃彼亦是淨分`身者彼是二分。他相性者,轉身,還彼他相性中得對治,所染分中轉淨分中護。
이상과 같이 매우 높은 증상혜(增上慧)의 뛰어난 승사(勝事)를 설명하였으니,
단멸의 뛰어난 멸승(滅勝)의 것은 어떠한 것인가? 보살의 멸(滅)이란, 열반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는 것으로,
그 상은 모든 번뇌의 잡염을 버리지만 세간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게송에서 의지처를 전환하는 전신(轉身) 한다고 말한 것이며, 여기서 세간은 의타상으로, 곧 번뇌의 잡염분이며, 열반은 역시 그 의타성, 즉 8식의 청정분이며,
의지처는 그것의 두 부분인 의타상(의타기성)이며, 의지처의 전환인 전신은 그 의타상에서의 다스림의 대치(對治)가 이루어져서 잡염분을 전환하고 청정분을 보호하는 것이다.
ㅡ증과인 단멸의 뛰어난 양상, 즉 구경도에서 의지처의 전환인 전신(轉身)에 의해 대열반과 대보리를 성취함에 관한 것이다.
전신(轉身), 이 역본에서 전신(轉身)ㆍ전회(轉廻)는 전의(轉依)의 의미이다.
급다ㆍ진제ㆍ현장의 역본에는 전의(轉依)로 되어 있으며, 전의(轉依, āśraya-parivṛtti)는 ‘소의(所依, 의지처)를 전환시켜서 얻어진 것’이란 의미이다. 여기서 의지처는 제8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을 가리킨다.
전환은 전사전득(轉捨轉得), 즉 번뇌장ㆍ소지장(所智障)의 종자를 전사하고, 보리와 열반을 전득함을 말한다. 따라서 전의는 소의(所依)인 자기 존재의 기체(基體)를 허망한 상태(변계소집성)에서 진실한 상태(원성실성)로 변혁시키는 과정, 또는 그 과정의 결과로 증득된 보리와 열반을 가리킨다.
然彼迴略有六種:作微弱益迴,以信力故`住聞習故,依有慚愧煩惱行不行故。
得證迴,入地諸菩薩現正`不正現處故,乃至六地, 修轉,不現有障念相,現善淨正意故,乃至十地中。
滿果迴,現無障一切相念,得一切相念。自在微小迴,小乘已證衆生無我故,一向背世閒故,一向捨世閒。
上迴,諸菩薩已證法無我故,還彼處見寂靜,滅諸煩惱使等,而不捨彼故。
그러나, 그 전환에 대략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미약하게 하고 증익시키는 전환인 미약증회(微弱益迴)이니, 믿음의 신력(信力)에 의하고 문훈습(聞薰習)에 안주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함의 참괴(慚愧) 번뇌가 미약하게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통달의 전환인 득증회(得證迴)이니, 입지(入地)한 보살들이 진실이 현현하고 진실 아닌 것이 현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니, 나아가 제6지까지인 것이다.
셋째는, 수습의 전환인 수전(修轉)이니, 아직 장애가 있으나, 생각 속의 차별된 대상은 현현하지 않으며 매우 청정하고 바른 대상이 현현하는 것이니, 나아가 제10지까지인 것이다.
넷째는, 원만한 증과의 전환인 만과회(滿果迴)이니, 장애가 없고 일체의 생각 속의 모든 차별된 대상이 현현하지 않으며, 모든 차별상에 대하여 자재함을 얻은 것이며,
다섯째는, 미약하고 작은 전환인 자재미소회(自在微小迴)이니, 소승은 오직 중생의 무아를 통달하기 때문이고, 한결같이 세간을 등지기 때문에 한결같이 세간을 버리는 것며,
여섯째는 최상의 전환인 상회(上迴)이니, 모든 보살이 법무아를 통달함으로써 그 생사의 세계를 적정한 곳으로 보고 모든 번뇌를 단멸하나 그것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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