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摩訶迦旃延(마하가전연)
논의제일(論議第一) 가전연(迦旃延 Katyayana), 가연자(迦延子), 마하 카차야나(Mahakatyayana ), 카트야나라고도 불렸다. 남인도 아반타국의 크샤트리아 출신으로, 왕명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러 갔다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며, 귀국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논의(論議)를 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질을 가졌다고 하며, 뛰어난 언변과 말솜씨로 논리 정연하게 상대방의 주장을 꺾었으며, 인도 전역을 다니며 중생 교화 포교에 힘썼으며, 특히 마두라에서 아반티풋 국왕을 만나 사성(四姓) 제도의 모순을 설득한 것으로 유명하다.
불경을 대별하여 경(經) 율(律) 론(論)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논은 그 말씀에 대한 해설이다. 굳이 설법 제일인 부루나와 논의 제일인 가전연을 비교하면, 부루나는 재가자들을 상대로 설하는데 뛰어났고, 가전연은 출가한 사문들에게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해설을 설하는데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총명한 머리로 명석하게 논리를 구사하여 부처님 말씀을 해설하여 펴는데 걸림이 없었다.
佛告摩訶迦旃延(불고마하가전연)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는 마하가전연(Mahktyyana)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The Buddha said to Mahakatyayana, Go to Vimalakirti and ask about his illness.
迦旃延白佛言(가전연백불언) 世尊 我不堪任詣彼問疾(세존 아불감임예피문질)
가전연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Mahakatyayana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am not qualified to go to Vimalakirti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昔者(억념석자) 佛爲諸比丘略說法要(불위제비구약설법요)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을 위하여 간략히 法要=중요한 가르침의 요점을 설하셨을 때,
Why I recall the Buddha had previously given a brief lecture to the monks on the essentials of Dharma.
[법요(法要), 법은 중요한 것이니까 법(法)에 요(要)를 붙여서 말하기도 합습니다. 법에 대한 요점이라는 의미보다, 법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뜻으로 법요라고 합니다.]
我卽於後(아즉어후) 敷演其義(부연기의) 敷 펼 부
저는 곧 이어서 그 뜻을 敷演=자세하게 설명하여,
Then I explained elaborately
[부처님이 법요를 말씀하신 법문의 깊은 의미를 부연(敷演)= 펼쳐서 알기쉽게 자세히 설명하는, 세세하게, 현실에 맞게,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설명을 하는 것.]
謂無常義(위무상의) 苦義空義(고의공의) 無我義寂滅義(무아의적멸의)
저는 ‘무상의 뜻이며, 괴로움의 뜻이며, 공의 뜻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無我=주체는 없다는 뜻이며, 적멸의 뜻’이라고 말하였는데,
the meaning of impermanence, suffering, emptiness, non-self, and nirvana.
[부처님이 어떤 법문을 하셨다는 것은 여기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이것은 소승교리 즉 성문들의 불교적 지식의 모든 것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 적멸(寂滅)은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여기에서는 다섯 가지 뜻을 이야기합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무상하다. 일체개고(一切皆苦)-모든 것을 괴로움으로 본 것은 사성제 중에서의 고집멸도의 교리에서만 그렇다는 것으로, 모든 교리에서 괴로움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일체개공(一切皆空)- 모든 것은 무상하니까 결국은 변하고 변해서 텅 빈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공에서 어떻게 인연이 결합해서 뭔가 새로운 사물과 그에 따른 이치가 생기는, 예를 들어 인과 연이 맞아서, 봄에 새싹이 나지만, 나무가 있어도 연, 조건이 안 맞으면 싹이 안납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공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싹이 나서 잎이 피고, 그 다음에 단풍이 들어서 잎이 지면 또 공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사람을 위시한 삼라만상이 다 공이라는 것입니다.
무아(無我)도 아(我)라고 하는, 고정불변하는 주체, 알맹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파초의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줄기가 없는 것으로, 전체를 볼 때 줄기처럼 보일 뿐인 것과 같이 이 세상 삼라만상이 다 그와 같이 이것과 저것이 모여서 어떤 하나의 사실, 하나의 사물을 만들어 내었을 뿐이니까 내 것이라는 주체가 없는 것으로, 아(我)가 없다고 합니다. 이 육신도 지수화풍 사대로 결합했고, 또 몸과 마음이 결합을 해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탄생이 되어서 이렇게 번듯이 살아있는 내가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 인연이 다 해서 뿔뿔이 흩어지면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장 이 법회라고 하는 구성 역시도 한 시간 전에는 없었던 것이고 또 한 시간 후에는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공(空)의 관점으로 보고, 무아(無我)의 관점으로 보고, 무상(無常)의 관점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현상은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파악하고 나면 아무런 마음도 일으킬 거리가 없으니, 번뇌가 다 사라진 것이 적멸(寂滅)의 뜻입니다.
유마경은 보살사상 중심의 대승경전으로, 소극적인 불교의 사상이나 정신을 배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대승적인 입장은 상락아정(常樂我淨)- 상(常)= 항상한 것이다. 무상이 아니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상락아정은 부처님의 덕이고 불교의 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을 모시고 상락아정, 즉 무상, 고의 반대인 낙(樂)이다. 이 인생은 즐거운 것, 우리들이 상상하는 어떤 인간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 열반락(涅槃樂)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이 아니라 유(有), 공과 반대되는 묘유(妙有), 진공묘유(眞空妙有)- 묘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我), 진아(眞我), 참나가 있다. ‘나’는 영원히 변치 않는 것으로, 이 몸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이 몸이 소멸한 이후에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 대승불교의 기본 나에 대한 관념입니다.
적멸이나 열반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사라진 이후에 아주 활발한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님도 중생제도를 위해서 49년간 활발한 삶을 살으셨습니다. 적멸 속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보살행으로써 일관했다는 것입니다. 적멸의 반대로 작용으로써 일관했고, 보살행으로 일관했고, 불행(佛行)으로써 일관했습니다. 이것이 대중적인 불교이고 바람직한 불교라는 것입니다.]
[삼법인(三法印,tilakkhaṇa)은 불교의 교의를 요약하여 제시한 기치 또는 슬로건으로, 불교의 기본적 입장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근본불교 시대에 발생한 교의이다. 여기서 빠알리어의 ti는 3을, lakkhaṇa는 특징을 뜻하는 말로써, <3가지 특징>이라고 직역되며, 일반적으로 <3법인>이라고 부른다. 법인(法印)이란, 법의 도장이라는 뜻으로, "이것이 찍혀있으면 진짜이고, 이것이 찍혀있지 않으면 가짜이다."라고 말해질 정도로 불교의 진.위를 판별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처음에 삼법인은 일체개고(一切皆苦 · Dukkha) · 제행무상(諸行無常 · Anicca) · 제법무아(諸法無我 · Anatta)의 세 가지를 가리켰다. 이 최초의 삼법인의 각각은 간단히 고(苦) · 무상(無常) · 무아(無我)라고도 한다. "삼법인"이라는 낱말의 영어 번역어인 "Three marks of existence (존재의 세 가지 특징 또는 성격)"는 이 최초의 삼법인에 대한 번역어이다. 후에는 일체개고를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대체하여 제행무상 · 제법무아 · 열반적정을 삼법인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또는 최초의 삼법인에 열반적정을 추가하여 일체개고 · 제행무상 · 제법무아 · 열반적정을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하였다.
고타마 붓다는 이 현실세계는 모두 고(苦)라고 하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현실인식에서 출발하여, 고(苦)의 원인이 인간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자기모순에 있다고 하였다. 일체개고의 현실인식은 현실 또는 존재(existence) 그 자체에 고(苦)라고 하는 고정된 성질 또는 실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며 또한 고(苦)의 원인이 현실 또는 존재 그 자체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 흘러가고 변화하고 있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는데(제행무상) 인간은 항상 불변을 바라고, 또 모든 것은 무엇 하나 고정적 실체인 것은 없는데도(제법무아) 그것을 실체라고 고집하려 하는 데에 고(苦)의 원인이 있다고 고타마 붓다는 말하였다. 따라서 올바른 지혜(반야 · 보리)를 통해서, 이러한 자기모순에 빠진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욕망을 버리고 집착에서 벗어날 때야말로 아무것에도 어지럽혀지지 않은 이상적인 열반적정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이라는 교의 속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기본적 입장이다.-위키]
[이 구절의 티베트 역에서 살펴보면 “제행은 변화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운 것이며, 제법은 공한 것이고, 제법은 무아이며, 열반은 적정하다”는 의미이다. 곧 4법인(法印)보다 하나가 더 있다.]
時維摩詰來謂我言(시유마힐내위아언) 唯 迦旃延(유 가전연)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唯=여보시오 가전연이여,
Then vimalakirti came to me and said, Oh mahakatyayana,
無以生滅心行(무이생멸심행) 說實相法(설실상법)
생멸하는 마음으로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實相을 無=설하여서는 안 됩니다.
do not speak of the ultimate reality of Dharmas with the mind of birth and death.
[무이생멸심행(無以生滅心行)으로 설실상법(說實相法)이어다.- 조사님들이 많이 인용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가전연은 영원하고 불생불멸한 마음 작용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생멸하는 마음으로써 실상법을 설하고 있다.
행(行)= 마음의 흘러감, 마음의 작용, 변화해서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멸하니까 흘러가는 것으로, 우리의 표면적인 마음은 사실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계속’이라는 말을 알아듣고, 또 ‘알아듣고’ 라는 말을 알아듣듯이, 그런 생멸심이 있음으로 해서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 보통 중생들의 마음 상태인데, 가전연도 역시 그런 마음 상태로써 실상법(實相法)=불생불멸의 법= 진실한 모습, 실,상,법(實,相,法)에 대한 이치를을 설명하고 있었다. 생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멸하지 않는 실상법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그 설명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迦旃延(가전연) 諸法畢竟不生不滅(제법필경불생불멸) 是無常義(시무상의)
가전연이여, 제법=모든 법은 마침내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니, 이것이 무상의 뜻이요,
Mahakatyayana, all Dharmas are without birth or death, and this is the meaning of impermanence.
[유마거사의 법문은 우리의 상상을 뒤엎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 십대 제자들의 지식과 지혜 그리고 그 분들의 어떤 틀을 다 깨어 버리고 뒤엎어 버리는 이론입니다.
제법(諸法)이 필경(畢竟)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여여하고 항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제법이 끝내에는 불생불멸하는 것이 무상의(無常義)= 항상함이 없는 이치다.
생멸하는 것이 무상의 이치가 아니라, 불생불멸이 무상의 이치다. 성불한다 하는 것은 무상해야지, 무상하지 않으면 성불하지 못한다.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은 변화이고, 변화는 무상으로, 그대로 굳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하는 그것이야 말로 무상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생불멸하면서도 무상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불생불멸하는 우리 중생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가 될 수 있지 아니면 부처가 될 수 없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육조스님의 육조단경에도 불생불멸이라고 해서 굳어져 있다고 이해하면 안되는 것으로, 변화무쌍해서 중생이 부처가 되는 그것이 무상의 이치이고, 즉 불생불멸이 무상의 이치다.]
五受陰(오수음) 洞達空無所起(통달공무소기) 是苦義(시고의) 洞 골 동, 밝을 통
五受陰=오음은 공하여 생기는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 이것이 괴로움의 뜻입니다.
It is the meaning of suffering to realize that the five aggregates of attachment are empty with no arising.
[오수음(五受陰)= 오음(五陰) 또는 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색은 우리의 육신을 말하고 수생행식은 마음의 작용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느낌이라든지 또 어떤 느낌에 의해서 마음의 흐름, 작용이 있고 또 그 작용을 의지해서 인식하는 것 등이 우리의 마음의 네 가지 작용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육신과 아울러서 ‘나’라고 합니다.
오음= 오수음= 오온을 ‘나’라고 하는데, 이것을 통달= 환히 깨달아서 공무소기(空無所起)= 공에서 일어나는 바가 없는, 이것이 고의 이치라는 것입니다. '고'라면 통달하지 못한 입장에서 변했다고 하는데 유마거사는 그것이 아니라 통달해서 일어남이 없다. 우리 몸이 일찍이 생긴 바가 없는 것으로 아는 것, 없는 것으로 아는, 이것이 괴로움의 뜻이고 괴로움의 이치라는 것입니다.
왜냐? 우리 몸이 괴로움의 이치를 초월해서 극복하려면 이 몸이 생기는 바가 없는, 공무소기(空無所起)의 도리를 알아야 괴로움의 이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비록 괴롭다고 하여도 아직도 괴로움의 근원을 꿰뚫어 알지 못했으나, 부처님이야 말로 이 몸이 ‘나’라고 하는 존재가 괴롭다는 이치를 제대로 아신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고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괴로움이라고 하는 이치’를 부처님이야말로 제대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역설적으로 오수음(五受陰)이 통달(洞達)하야 공무소기(空無所起)가 시고의(是苦義)라는 것입니다.]
諸法究竟無所有(제법구경무소유) 是空義(시공의)
제법=모든 법이 구경에는 無所有= 존재하는 (있는) 바가 없으니, 이것이 공의 뜻이며,
All Dharmas have no existence, which is the meaning of emptiness.
於我無我而不二(어아무아이불이) 是無我義(시무아의)
我=나와 無我=내가 없다라고 것에 있어서 둘이 아닌=不二인것, 이것이 무아의 뜻이며,
The meaning of no-self is to realize there is no duality between self and non-self.
[‘나’다 ‘내가 없다’ 라고 하는, 둘이 아닌 이치야 말로 진짜 무아이다. 아와 무아가 둘이 아닌 것을 아는 것이 진짜 무아다. 아=내가 있다는 것에 떨어져 있어도 곤란하고, ‘내가 없다’=무아에 떨어져 있어도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공한 것 까지 공하다’고 하면, 공했으면 됐지 공한 것 까지 공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그릇에 오물을 잔뜩 담고 있어서 그 오물을 비워서 오물은 없지만, 오물을 담았던 그릇은 있으니까 그 그릇마저 버리라는 뜻입니다.
공한 것 까지 공해야 된다, 아와 무아가 둘이 아닌 것이 진짜 무아다. 남아 있는 것까지 철저히 없애야, 공하다고 할 것도 없다. 공했다는 것까지 없으면은 공했다는 말이 있을 필요가 없는 그것이 진정 묘한 것이라는 말인데 여기서 아와 무아가 둘이 아니면 '아'라고 할 수도 없고, '무아'라고 할 수도 없고, 혹은 '아'라고 해도 되고 '무아'라고 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무아의 이치라는 것입니다. 즉 '무아'가 안 되면 '아'도 될 수가 없고, '무아'도 될 수가 없으니까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이법문이 유마경의 중요 포인트로 뒤에 불이법문품에서 자세히 나옵니다.]
法本不然(법본부연) 今則無滅(금즉무멸) 是寂滅義(시적멸의)
(존재하는) 법은 본래 그러한 것이 아니므로 지금 곧 멸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적멸의 뜻입니다.
The Dharma originally does not ignite, so there is nothing in the present to extinguish the meaning of tranquil cessation.
[법본불연(法本不然)=법은 본래 일어남이 아니나, 그러할 연(然)이 여기서는 일어난다, 생긴다는 기(起)나 생(生)의 의미로 씌였습니다.
법은 본래 생긴 것도 아니요, 지금 없어진 것도 아닌 것,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은 것이란, 생긴 것이 없으니까 없어질 것이 없는 것이다. 생기지 않은 것은 없어지지도 않는, 그것이 진짜 적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전부 변하는 것으로, 새로 생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육신, 저 나무의 새싹도 없던 것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물이든지 거름이든지간에 그 소재(형체)가 변해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그러한 이치, 법본불연(法本不然), 법=일체법의 본질은 생기는 것이 아니고 또 없어지는 것도 아닌 그것이 시적멸의(是寂滅義)=진짜 적멸의 뜻이다]
說是法時(설시법시) 彼諸比丘心得解脫(피제비구심득해탈)
이러한 법을 들었을 때, 여러 비구들이 마음속 깊이 해탈을 얻었습니다.
When Vimalakirti said this, the minds of those monks attained liberation.
[설시법시(說是法時)에 이러한 법문을 유마거사가 설할 때 저 모든 비구가 심득해탈(心得解脫)= 마음의 해탈을 얻었더라.]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
그러므로 제가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Therefore, I am not qualified to go to him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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