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目犍連 - 爲白衣居士說法(위백의거사설법) 재가자를 위한 설법
[目犍連(목건련), 마우두갈야야나(산스크리트어: मौद्गल्यायन) 또는 목갈라나(팔리어: Moggallana), 목건련(目犍連)은 석가의 직속제자의 한 명. 제자중에서 신통 제일이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목건련이지만, 생략해 목련이라고 한다. 또 십대제자의 한 명으로서 필두였으므로, Mahaa (음사: 마하, 역: 대)를 붙여 마하목건련, 대목건련 등으로도 기록된다.
마가다국의 서울 라자그리하(Rājagaha-왕사성) 근교의 꼴리따(Kolita) 마을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나 마을 이름을 따라서 어릴 때는 꼴리따(Kolita)라 불렸다. 또 어머니 이름이 목갈리(Moggalī) 또는 목갈리니(Moggalinī)였기 때문에 목갈라나 또는 마하목갈라나라고도 불렸다.
목갈라나가 태어난 바로 그날에 사리풋타(Sāriputta-사리불, 사리자)도 태어났다고 한다. 목갈라나와 사리풋타 두 집안은 7대째 돈독한 우의를 지켜왔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다. 하루는 자신들을 따르는 바라문 젊은이들과 함께 라자그리하(왕사성)의 축제에 갔다가 갑자기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는 함께 출가해 사문이 됐다.
그리하여 처음엔 육사외도(六師外道) 중 큰 세력인 회의론자 산자야(Sanjaya, 刪闍耶)에 귀의해 그의 제자로 있었다. 산자야 문하에서 두 사람은 이내 스승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이해해버렸다고 한다.
용모 단려로 모두의 학문에 정통하고 있었다. 당초, 500명의 청년 동료들을 거느려 산쟈야 베이랏티풋타에게 입문했지만 만족하지 않고, "만약 만족하는 스승이 발견되면 모두 입문하자"라고 맹세했다.
후에 사리불이 아설시 (앗사지) 에게 출가해 석가와 그 법을 알자 마자, 목련에게 알려 모두 5백명 중 반의 제자사람들을 거느려 죽림 사원에 도달해 불제자가 되었다.
목련은 후에 증과(깨달음)를 얻고, 장로라는 오름세의 제자로 꼽혀 각지로 향해 가 석가의 교화를 부조했다. 그는 신통에 의해서 석가의 설법을 방해 하는 도깨비나 용을 항복시키거나 이단자나 외도를 추방했기 때문에, 많이 원한을 산 적도 있어, 반대로 박해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육사외도의 하나로 여겨지는 자이나교도로부터 자주 박해되었다. 데바닷타의 제자들에게 암살되어 걸렸다고도 한다.]
佛告大目犍連(불고대목건련)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는 대목건련(Mahmaudgalyyana)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을 하라.”
The Buddha said to Maudgalyayana, Go to Vimalakirti and ask him about his illness.
目連白佛言(목련백불언) 世尊(세존)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
목련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그에게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저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Maudgalyayana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am afraid that I cannot visit Virmalakirti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我昔入毘耶離大城(억념아석입비야리대성)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저도 비야리 대성에 들어가서
What is the reason for this? In the past, I had entered the city of Vaisali
於里巷中爲諸居士說法(어리항중위제거사설법) 巷 거리 항
里巷=거리(골목)에서 많은 거사들을 위해 법을 설하고 있었는데,
and was preaching to the people in the streets and alleys.
['처사'는 도교, 유교적인 것이지만, 불교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거사'라고 부르는것이 훨씬 불교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거사를 높임말로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높임말도 아닙니다.]
時維摩詰來謂我言(시유마힐내위아언) 唯 大目連(유 대목련)
그 때 유마힐이 다시 와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대목련이여,
Then Virmalakirti came and said to me, O Maudgalyayana!
爲白衣居士說法(위백의거사설법) 不當如仁者所說(부당여인자소설)
白衣居士= 세속의 신도(재가 신도)를 위해서 설하는 설법은 그대가 설하듯이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위백의거사설법(爲白衣居士說法)인댄, 백의거사를 위해서 설법 할진댄 우리가
You should not speak to the white-robed householders as you did.
[흔히 세속거사, 세속의 신도들을 백의라 하는데, 관세음보살도 백의관음, 출가한 사람이 아닌, 일반인 모습 그대로이어서 백의관음입니다. 그래서 일반 신도를 백의=흰 옷을 입었다, 출가한 사람은 염의= 물들인 옷을 입었다고 분별합니다]
[不當如仁者所說= 마땅히 仁者= 그대와 같이 설할 것이 아니다. 즉 당신 지금 설법 하는 것이 틀렸다는 말입니다]
夫說法者(부설법자) 當如法說(당여법설)
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如法=진리에 맞게, 법대로 설해야 합니다.
To express the Dharma is to speak according to the true nature of the Dharma.
[여법= 법, 법 그대로, 진리 그대로, 사과가 있는 모습과 내용을 그대로 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사과를 설명하지 못하고, 사과만이 사과를 잘 설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과를 설명하면, 내가 지금 무엇을 먹었는지, 평소에 사과에 대한 감정에 따른, 사과 밑에서 이별한 사람인지, 사과 밑에서 만난 사람인지, 사과 밑에서 싸운 사람인지 등에 따라서 사과에 대한 이미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사과 장사를 했던지, 사과 농사를 짓던 사람인지, 사과 따러 갔다가 뱀에게 물렸던 사람인지 등의 어떤 연관에 따라서 사과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지는 우리 사람보다, 사과를 가장 설명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사과 자신이 되는 것이 여법입니다. 법 그대로, 사과는 사과와 같이, 개인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사과 그대로가 여법입니다.
여법이라는 말이 참 좋은 말이면서 또 지극히 쉽고도 또 어려운 말입니다.
사상(四相)= 중생상, 아상, 수자상, 인상을 떠나는 데 대한 진리, 법. (인도에서는 흔히 '법', 중국식 표현은 '도(道)'.) 다른 말로는 화엄세상, 화엄만다라의 세계, 如法(여법)=우리 삶의 그 모습 그대로, 즉 허물이나 오류 없이 그대로 완전무결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을 여기서 법 즉 도라고 했습니다.]
[如法(여법)= 여기서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즉 실상(實相)이라는 뜻.]
法無衆生(법무중생) 離衆生垢故(이중생구고) 法無有我(법무유아) 離我垢故(이아구고)
법에는 중생(중생상)이 없으니, 중생의 垢=번뇌를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有我=자아의 존재(아상)가 없으니, 나=我의 번뇌=垢를 떠났기 때문이며,
The true Dharma is devoid of any sentient beings because it is free from the impurities of sentient beings.
There is no self in the Dharma, free from the stain of the self.
[법무중생(法無衆生) 법에는 중생이라는 것이 없다. 중생상이 없다. 중생이라는 말은 상대적인 것으로, 사람들이 괜히 부처, 중생으로 나눠 놓은 것이지, 법에는 중생도 부처도 없이 동등한 것입니다.
즉 꽃잎이나, 꽃송이나 그 가치는 동등한 것이며, 꽃 잎이 없으면 꽃이 존재할 수 없으니까 어느 것이 나은 것이고 어느 것이 못한 것이고, 어느 것이 가치 있고 가치 없다는 것은 우리의 판단일 뿐입니다.
(개개가 범성이고 일인이 범부)두두문물이 그대로 완전무결하게 갖추고 있는 것이 법이고, 도입니다. 화엄만다라의 세계에서 중생이니 부처라는 것은 우리의 망상이 개입된 분별입니다.]
[이중생구고(離衆生垢故) 중생이라고 하는 垢=때= 상=번뇌가 없으니, '상'이 '때'가 되고, 중생이라는 고집이 열등의식이라고 나는(무비스님) 표현하는데, 중생의 때 즉 나는 못난 중생이라는 열등의식을 떠났기 때문이며.
개개가 다 완전무결한데, 왜 열등의식을 가집니까? 잎이 자기는 꽃이 아니고 잎이라고 해서 열등의식 가져서 태양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꽃이 존재할 수 없고, 또 뿌리가 없으면 꽃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살펴보면 매사가 다 그러하니까 중생이라는 열등의식=중생상을 가질 아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법무유아(法無有我), 법에는 아= '나'라고 하는 '아상'=자아의식이 없으니.
모든 것이 동등하니까 ‘나만’ 이라는 '나' 중심의 생각, '자만의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쌀이 겨에게 ‘너 겨는 쌀을 이렇게 싸주기 위한 것이니까 너는 열등한 것이고 나는 우승한 것이다',
겨는 쌀에게 ‘너는 내한테 쌓여서 나의 보호를 받아야 하니까. 내가 우등하고 쌀 너는 열등한 것이다.'
이는 겨와 쌀의 자만의식이 되는 것이니까 틀린 것입니다. 모두 동참해서 내가 있게 되고, 이 세상이 있게 되고, 이 세상이 돌아가게 되는 것인데, 어떻게 나혼자라는 자만의식에 도취해 있을 수 있습니까. 진리= 법= 도에는 그런 것이 없으니 법무유아(法無有我)입니다.]
法無壽命(법무수명) 離生死故(이생사고) 法無有人(법무유인) 前後際斷故(전후제단고)
법에는 수명(수자상)이 없으니, 생사를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인(인상, 남, 타인, 상대)이 없으니, 과거의 생과 미래의 생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Dharma has no lifespan, and it is free from birth and death.
There is no individual in the Dharma, without interruption between intervals of past and future.
[法無壽命(법무수명) 수자상, 나이를 몇 살 먹었다는 것은 한계의식입니다. 불교는 절대 나이를 인정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나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으로, 본래 우리의 주인공= 우리들의 참 생명은 그런 나이로 한정할 수 없다는 것이 법무수명(法無壽命)입니다. 그러니까 생사를 떠난 것으로, 태어남이 있으면 나이를 먹지만, 본래 우리의 참 주인공은 태어남이 없고, 태어나지 않으니까 나이가 없고, 그래서 생과 사를 떠난 것입니다. ]
[법무유인(法無有人) 법에는 인이 없다. 人은 차별의식, 남(상대, 타인)이라는 생각입니다.
我는 자아, 자만의식, 나라는 생각, 人은 반대로 차별, 남이라는 생각자체가 나와 차별을 두는 의식이지만, 법, 도에는 그런 것이 없다. ]
[전후제단고(前後除斷故) 전후의 제 제(除)가 잘 못된 것으로 제할 제(除)가 아닌 사이 제(際)입니다. 전제는 지난 세상, 후제는 다음 세상이라는 관념으로, 그런 것이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차별의식이 없으니까, 또 법에는 본래 차별할 것이 없기 때문에 지난 일과 다음일, 전생의 일 후생의 일 등을 굳이 나눌 것이 아니라는 것= 끊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법(法)에는 중생이 없으니, 미래의 생(生)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까지는 중생의 공(空)을 설한 것이며, 다음 절(節) “법(法)은 항상 고요하니……” 이하는 법의 공함을 설한 것이다.]
法常寂然(법상적연) 滅諸相故(멸제상고) 法離於相(법이어상) 無所緣故(무고연고)
법은 항상 寂然=고요하니, 모든 상(모양, 형태)을 없애 버렸기 때문이며,
법은 상(모양, 형태)을 떠나 있으니, 인식의 대상=所緣이 없기 때문입니다.
There is always silence in the Dharma, the absence of all forms.
Dharma is free from form and does not arise from karmic conditions.
[법상적연(法常寂然) 법=도는 항상 적연= 고요하다. 즉 진리는 말이 없음이라,
멸제상고(滅諸相故)며, 진리는 말을 떠나서 동하지 않는, 부동이라서 적연한 것입니다.
법이어상(法離於相)=모든 모양을 떠났으며. 모든 상=모양은 차별된 것으로 이렇게도 생겼고, 저렇게도 생겼고, 그렇게 생긴 것이 다르고, 우리는 그 다른 것에 끄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무소연고(無所緣故), 반연할 것, 인연할 것이 없다. 이 세상은 전부 이것과 저것이 연결되어서, 서로 맞추어주고, 서로 인연이 되어서 어떤 현상을 만들어내는데, 법은 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런 상을 만들어 내는 인연의 고리들이 없는 무소연고(無所緣故)이다. ]
[滅諸相故= 하나의 사물을 특징 짓는 그 사물의 특질, 모습, 모양, 형태 등이다. 이곳에서 주의할 것은 ‘상(相)’이라고 했으나 티베트 역에서는 ‘탐욕(貪慾),’ 현장은 ‘탐착(貪着),’ 그리고 나집의 다른 책에서는 ‘상(想)’이라 했다.]
法無名字(법무명자) 言語斷故(언어단고) 法無有說(법무유설) 離覺觀故(이각관고)
법은 이름이 없으니,언어(로 미칠 수 있는 길이) 끊겼기 때문이며,
법은 말=說이 없는 것이니, 크고 작은 생각=覺觀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Dharma is nameless and independent of all verbal expressions.
There is nothing to say regarding the Dharma because the Dharma is free from awareness and contemplation.
[법무명자(法無名字) 언어단고(言語斷故)라, 앞의 사과처럼, 사과를 잘 설명하려면 이것이 사과이다라고, 사과를 주어버리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사과라고 부르지만 다른나라에서는 다른 이름일테니까 사과라는 이름(단어)도 임시방편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없는 법무명자(法無名字) 법, 도에는 명자(이름)가 없다. 말이 필요없는, 언어가 끊어진 연고다. 본래에 명자(名字)가 없으니까 말이 없는 것입니다.]
[법무유설(法無有說) 법은 설명할 것이 없다. 법= 진리는 개구집착(開口執着)이라. 입만 벌리면 어긋나고, 설명을 했다 하면 벌써 거리가 생겨는 것이라. 설명보다는 목격이도존(目擊而道存), 서로 보는 것, 거기에 도가 있지, 설명하면 벌써 그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실 불교에서는 설명을 제일 많이 하고 있는데, 결국 그것은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니니까 말을 떠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법무유설(法無有說) 법은 설이 없다. 설할 법이 없다.
離覺觀故, 각관을 떠난 연고다. 覺觀(각관)은 사물을 보고 거기서 분별하고 느끼고 아는 것, 들어서 느끼고 알고, 거기서 판단해서 ‘아, 이건 자동차 소리다’ ‘이건 누구의 발자국 소리다’ 등을 다 알고 분별하는 그것이 각관인데, 도에는 그런 분별이 개재될 수가 없으니까, 법에는 설명할 것이 없음은 각관을 떠난 연고다]
[覺觀= 각(覺, vitarka)은 치밀하지 못한 생각이며, 관(觀, vicra)은 치밀한 생각, 자세하게 살피는 것이다.]
法無形相(법무형상) 如虛空故(여허공고) 法無戲論(법무희론) 畢竟空故(필경공고)
법은 모양이 없으니, 허공과 같기 때문이며, 법은 부질없는 말=虛論이 없으니, 필경공이기 때문입니다.
There is not a form of the Dharma, and it is like the void.
The Dharma is without conceptual elaboration, because it is empty after all.
[法無戲論(법무희론) 논리화 하고 체계화 해서 이론화 하는 것이 전부 희론입니다. 어떤 논리의 체계를 세워서, 없는데도, 꼭 있는 것 같이 설명해나가는, 그런 것들이 희론(戱論)이다. 희론이라는 말은 농담이라는 말로, 없는 소리를 할 때 농담이라 하듯이. 철학이나 종교에서 아주 복잡한 논리를 펼쳐나가는 것도 도를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고, 어른들 농담에 불과하니까 말 뿐인 희론입니다. 법에는 희론이 없음이라. 필경에 공한 연고이다.]
法無我所(법무아소) 離我所故(이아소고) 法無分別(법무분별) 離諸識故(이제식고)
법에는 내 것=我所이 없으니, 내 것, 네 것을 다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분별이 없으니, 식별하는 작용(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The Dharma has no sense of ownership (as in ‘mine’ or ‘my’) and is apart from the sense of ownership.
There is no distinction in the Dharma, because it is free from all consciousness.
[법무분별(法無分別) 이제식고(離諸識故), 법은 모든 식(識), 인식(認識)을 떠났으니까 분별이 없다. 우리가 ‘지금 어떻다’ ‘기후가 어떻다’ ‘사람이 어떻다’ 등 분별하는 것은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즉 분별과 인식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법에는 분별이 없는, 모든 인식을 떠난 것이다. 인식하는 것에 법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도는 안이비설신의 또는 의식으로써 인식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과를 보고 빨갛다, 파랗다, 또 맛을 보니까, 새콤하다 달다 등의 인식으로는 그 사과에 대한 설명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맛을 보는 사람의 체질에 따라서 새콤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달게 느끼는 사람도 있으니까 사과의 상태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못되는 것과 같으니까, 법은 분별이 없다. 즉 모든 인식을 떠나 있는 것이다.]
[離諸識故= 식(識)을 흔히 ‘알음알이’라고 번역한다. 본래의 뜻은 ‘꾀바른 수’ 또는 ‘서로 가까이 아는 사람’이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식별(識別)하는 것’ 또는 ‘식별하는 작용’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法無有比(법무유비) 無相待故(무상대고) 法不屬因(법불속인) 不在緣故(불재연고)
법은 비교할 수가 없으니, 상대(相對)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은 근본적인 원인=因에 속한 것이 아니니, 간접적인 원인=緣에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며,
There is no comparison of the Dharma, because it is without contradiction.
Dharma is not part of cause and is not within cause.
[법무유비(法無有比) 법은 상대가 없는 연고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평등하고, 혼연한 하나일 뿐이고, 법은 진리이고 진리는 하나이니까, 무상대(無相待)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법불속인(法不屬因) 법이라는 것은 원인이나 결과, 조건에 속해있지 않는 것은 부재연고(不在緣故)다.
불교에서 인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왜 여기서는 그 인연을 부정하는가? 현상계= 눈앞에 드러나는 것은 전부 인연으로 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러나 법은 드러나는 것이 아닌, 드러난 것 이면의 본체적인 것이고, 보이지 않는 우주의 대생명입니다. 그것이 있음으로 우주가 이렇게 운영되고, 그렇게 운영되어서 밖으로 드러난 것은 원인과 조건, 결과가 있지만, 법은 그러한 인과 연에 있지 않다. 인연과(因緣果), 이 세상의 현상은 전부 인연과=연기=인연의 도리로써 이루어져 있지만 도는 그런 것을 초월해 있는 경지이다]
法同法性(법동법성) 入諸法故(입제법고) 法隨於如(법수어여) 無所隨故(무소수고)
법은 모든 존재에 골고루 나타나 있으므로 법성(존재의 본제)과 같기 때문입니다.
법은 여여함을 따르니, 다른 것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Dharma is the same as the Dharma nature, thus entering all Dharmas.
The dharma follows suchness, and it has nothing else to follow.
[법성은 모든 존재의 바탕, 모든 존재의 근본자리, 모든 존재의 본체를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불성(佛性)이라는 말을 쓰고, 모든 유정, 무정 현상을 이야기 할 때에는 법성이란 말을 잘 씁니다.
그래서 법은 법성= 모든 존재의 근본바탕, 본체, 본질이니까 모든 법에 들어가 있다.]
[여여한 것을 따른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여여한 것이니까 따를 것이 없는 것으로, 편의상 말을 수어여(隨於如) 법은 여(如)를 따른다고 했을 뿐, 있는 그대로가 여이니까 따르는 바가 없으며,]
[法同法性= 이 대문에서는 법성(法性), 진여(眞如), 실제(實際) 등이 이야기되고 있으나, 법신(法身)을 비롯한 진여의 이명(異名)이다. 이 대목을 나집은 “법동법성입제법고(法同法性入諸法故)”라고 했다. 의역하면, “법이 사물의 진실한 본성(本性:法性)과 같음은 모든 제법(諸法)에 빠짐없이 사무쳤기[入] 때문이다”이다.]
法住實際(법주실제) 諸邊不動故(제변부동고)
법은 실제=진리 그 자체에 머무르니, 어떠한 邊=편견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Dharma abides in reality, and all its borders remain immovable.
[實際(실제)는 진리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고, 그 진리에 머물기 때문에, 제변부동고(諸邊不動故) 변(邊)은 편견, 변견, 치우침, 변두리에 동하지 않는다.]
法無動搖(법무동요) 不依六塵故(불의육진고) 法無去來(법무거래) 常不住故(상불주고)
법에는 동요함이 없으니, 육진=6경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며,
법은 去來=오고 감이 없으니, 시간 속에 常不住=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The Dharma is unwavering and is not dependent on the Six Dusts.
The Dharma is without coming or going, since it rarely stays in a fixed space.
[육진= 색성향미촉법 경계. 우리 눈 앞에 귀 앞에서 혀 앞에서 벌어지는 경계에 우리는 동요하지만, 법이라고 하는 것은 육진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동요함이 없다.]
[거래(去來)가 있으면 또 머무는 것도 있게 되는 것이니까 常不住입니다]
法順空(법순공) 隨無相(수무상) 應無作(응무작) 法離好醜(법이호추)
법은 공을 따르고 무상을 따르고, 지음이 없는=無作이니,
법은 아름다움과 더러움의 (차별을) 떠났으며, 醜 더러울 추, 損 덜 손
Dharma follows emptiness, follows no form, and should be free from action.
There is no distinction in the Dharma between beauty and ugliness,
[공, 무상, 무작 등은 공 사상, 무아 사상을 나타내는 낱말들입니다. 공을 순하고 무상을 따르고 무작에 응한다.
공 무상 무작은 같은 뜻으로, 공하니까 상이 없고, 상이 없으니까 지음이 없고. 지음이 없다는 것은 상이 없다는 뜻이고 상이 없다는 뜻은 공하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법= 진리= 도는 바로 공이요, 무상이요, 무작이라서 법리호추(法離好醜)이다.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은 좋은 것도 있고, 거친 것도 있고, 추한 것등 다양하게 있지만, 법은 그러한 좋고 나쁜=호추를 떠나서 차별이 없습니다]
法無增損(법무증손) 法無生滅(법무생멸)
법은 더하거나 덜함이 없으니, 법은 生滅=생하고 멸함이 없기 때문이며,
and there is no increase or decrease in the Dharma.
[우리는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만 진리에는 손해볼 것도 없고, 더 불어 날 것도 없는 부증불감=법무증손입니다.]
法無所歸(법무소귀) 法過眼耳鼻舌身心(법과안이비설신심)
법은 돌아가야 할 바(귀의할 바)도 없으니, 법은 안이비설신심을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며,
There is no birth and no death in the Dharma, and there is nowhere to which the Dharma can return.
Dharma transcends the eyes, ears, nose, tongue, body, and mind,
[법은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마음으로 아는 것을 과(過), 훨씬 지나가 있다. 안이비설신의의 경계를 훨씬 지나 있다]
[法過眼耳鼻舌身心= 사물의 진실한 모습 자체인 법에 있어서는 일상적인 상황은 무의미한 것이며, 그러한 법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통상적인 6정(情)을 초월하여 6정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法無高下(법무고하) 法常住不動(법상주부동) 法離一切觀行(법이일체관행)
법에는 높고 낮음이 없으니, 법은 상주(常住)하여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며,
법은 일체의 분별하는 觀行=관찰과 수행에서 떠나 있으며
and there is no high or low in the Dharma.
The dharma is in constant stillness, without the slightest disturbance.
The Dharma is beyond the grasp of all methods of thought and practice.
[관행(觀行)은 수행, 모든 불교적 수행을 말합니다. 법은 수행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든 안하든 본래로 갖춰져 있는 것이 법이기 때문에, 일체관행을 다 떠난 것이다]
[法常住不動= 앞에서 “법이 오고 감이 없는 것은 시간 속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고 한 것은 법을 실재론적(實在論的)으로 보는 것을 부정한 것이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상주(常住)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함은 이법(理法) 그 자체의 절대적인 불변성(不變性)을 강조한 것이다.]
唯 大目連(유대목련) 法相如是(법상여시) 豈可說乎(기가설호)? 豈 어찌 기,
대목련이여, 法相=법의 모습이 이와 같으니, 어찌 가히 설할 수 있겠습니까?
O Maudgalyayana! Since the Dharma is as thus, is it possible to explain it clearly?
[법의 실상은 이러한 것이니,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니, 어찌 가히 설하겠는가?]
夫說法者(부설법자) 無說無示(무설무시) 其聽法者(기청법자) 無聞無得(무문무득)
무릇 법을 설하는 것은 설함도 없고, 가리킴도 없으며,
그 법을 듣는 것도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는 것입니다.
He who speaks the Dharma should have no words to express and nothing to show,
and he who hears the Dharma should have nothing to be heard and nothing to gain
[무릇 법이란 설할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고, 그 법을 듣는 사람은 듣는 것도 없고, 듣고 얻는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는 것은, 본래 자기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과가 사과를 제일 잘 설하고, 사과 맛은 사과가 제일 잘 아는데, 무슨 설명이 필요하고, 어떤 설명을 들어야 하는가?
우리에게 법, 도라고 하는 것이 다 갖춰져 있기 때문에 설법으로 설할 수도 없고, 무시(無示)=보여줄 수도 없고, 법을 듣는 사람 역시 듣는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즉 말로 표현하는 것에 큰 의미가 없다.]
譬如幻士(비여환사) 爲幻人說法(위환인설법) 當建是意(당건시의) 而爲說法(이위설법)
비유하자면 마치 마술사=幻士가 마술로 만든 인형=幻人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갖고서 법을 설하여야 합니다.
It is like a magician who preaches to an illusionary person he has created.
One should have such an attitude and understanding when teaching.
[당건시의(當建是意)= 마땅히 이러한 뜻을 세워서 이위설법(而爲說法)= 그러한 사실을 알고 설법을 해야 된다.]
當了衆生根有利鈍(당요중생근유이둔) 善於知見無所罣碍(선어지견무소가애),
마땅히 중생의 능력=根에 예리하고 무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만 하며,
중생을 보고 지견이 어떠한 것에도 罣碍=걸림이 없어야 하고,
利 날카로울 리, 이로울 리. 鈍 무딜 둔, 둔할 둔. 利鈍이둔=1. 날카로움과 무딤 2. 영리함과 우둔함
Knowing there are sentient beings with sharp and dull capacities;
to be adept at knowing and seeing is to be without hindrance.
[가애(罣碍)=걸리는 바가 없어야 하며, 즉 지법지근(知法知根), 법을 알아야 법을 잘 설명하고 또 근기를 알아야 그 사람에게 적절하게 맞는 이야기를 한다, 맞는 이야기가 아니면 말도 잃고 사람도 잃는 것입니다]
以大悲心讚于大乘(이대비심찬우대승) 念報佛恩不斷三寶(염보불은부단삼보)
然後說法(연후설법)
커다란 자비심으로 대승을 찬탄하며,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염원하여
3보가 끊어지지 않도록 한 다음에 설법해야 합니다.’
To praise the Great Vehicle with a heart of compassion for all; to think of repaying the kindness of the Buddha, striving to make the Three Jewels continue unbroken; only then are you qualified to teach the Dharma.
[대승을 찬탄하며,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며,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영원히 지속되도록 해야 된다는 마음을 낸 뒤에, 그런 마음으로 설법을 해야된다.]
維摩詰說是法時(유마힐설시법시)
八百居士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팔백거사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유마힐이 이와 같이 법을 설하였을 때,
8백 명의 거사들이 한결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When Vimalakiriti delivered this Dharma, eight hundred lay disciples developed the intention to awaken to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
我無此辯(아무차변) 是故不任詣彼問疾(시고불임예피문질)
그러나 저에게는 이러한 辯才=말재주가 없으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을 하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Yet, I do not have such eloquence, hence I do not dare to go to him to ask kim about his ill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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