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迦葉(대가섭) - 貧里乞食(빈리걸식)

[大迦葉(대가섭) 마하카샤파(산스크리트어: Mahākāśyapa) 또는 마하가섭(摩訶迦葉)은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이다.가섭 또는 대가섭(大迦葉)이라고도 하며, 의역하여 대음광(大飮光) 또는 대구씨(大龜氏)라고도 부른다.  

‘두타제일(頭陀第一)  가섭존자(迦葉尊者)’라고도 하며, 부처님보다 연세가 많았으며, 과거생 또는 출가하기 전에 음악가 이어서 수행자가 된 후에도 음악연주나 풍류를 보면은 정신을 잃고 멍하니 듣고 바라보았다는 전해지고 있다.
또 가섭은 과거생에 부처님 몸에 개금(改金)하는 시주를 많이 하여서 얼굴이 불그스럼하고 얼굴빛이 좋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인도의 왕사성 마하바드라의 거부였던 브라만 니그루다칼파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비팔라 나무 밑에서 탄생하였으므로 비팔라야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 청결한 인물로서 고타마 붓다의 신임을 받아 제자들 중에서 상위를 차지하였다. 고타마 붓다가 반열반에 든 후 비탄에 빠지거나 동요하는 제자들을 통솔하여 교단의 분열을 막았으며, 제1회 불전 결집을 지휘하였다.
영취산(靈鷲山)에서 고타마 붓다가 꽃을 꺾어 보였을 때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이심전심으로 이해하고 미소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고사(故事)가 전해진다. 선종에서는 마하가섭을 선법(禪法)을 받아 이어준 제1조로 높이 받들고 있다.

○염화미소(拈華微笑, Flower Sermon)는 마하가섭이 석가모니로부터 법을 전해받았다는 설화이다. 삼처전심은 염화미소,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곽시쌍부(槨示雙趺)를 말한다. 중국 송(宋)의 회암지소가 저술한 『인천안목(人天眼目)』에는 "대범천왕이 영산에 와서 석가모니께 바라화를 바치고 중생들을 위한 설법을 청하자 석가모니가 단위에 올라가 꽃을 들어 보였다. 대중들 가운데 여기에 응대하는 자가 없었는데 유독 금색의 가섭이 파안 미소했다. 그러자 석가모니가 '나의 정법안장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고 나온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대범천왕문불결의경』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은 1004년 발간된 『전등록』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 즉 가짜로 알려진 경전으로, 염화미소는 중국 선불교에서 만들어졌다. 최초의 기록은 1036년에 등장한다.]

 

佛告大迦葉(불고대가섭)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
부처님께서 대가섭(Mahkyapa)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The Buddha said to Mahakasyapa, Go on your way to Vimalakirti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나제가섭, 가야가섭 등 경전에 여러분의 가섭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분별하기 위해서 흔히 마하가섭이라 부릅니다.]

 

迦葉白佛言(가섭백불언) 世尊(세존) 我不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

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에게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Mahakasyapa said to the Buddha, World Honoured One! I cannot visit him to ask him about his illness.

所以者何(소이자하) 憶念我昔(억념아석) 於貧里而行乞(어빈리이행걸)

왜냐 하면 憶念=기억하건대, (생각해 보니) 我昔=저는 옛날 貧里=가난한 마을에서 걸식을 행하고 있었는데, 

Why is that ? In the past, I was once begging for food in a poor village 

[가섭존자는 가난한 사람들은 과거생에 복을 짓지 못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니까, 그 사람들에게 복 지을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자비심에서 늘 가난한 동네를 찾아다니면서 걸식하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時維摩詰來謂我言(시유마힐내위아언) 唯 大迦葉(유 대가섭)

그 때 유마힐이 저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대가섭이여,

when Vimalakirti came to me ans said, Oh mahakasyapa! 

有慈悲心而不能普捨豪富(유자비심이부능보사호부) 從貧乞(종빈걸) 豪 호걸 호

자비심을 가지면서도 널리 펴지 못하고, 이같이 부잣집을 내버려두고 가난한 사람만 쫓아가 걸식을 하니, 

You are compassionate but not yet all-embracing, and that is why you have given up begging for alms from the rich and powerful and have your eyes fixed only on the poor.

[부자는 부자대로 복 지어야 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복 지어야 옳은데, 자비심이 넓지 못한 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迦葉(가섭) 住平等法(주평등법) 應次行乞食(응차행걸식)

가섭이여, 평등한 법에 머물러 마땅히 차례대로 걸식해야 합니다. 

Mahakasyapa, abide in the Dharma of equality, and ask for alms in accord with this order.

[가난하고 부자라는 외형적인 면을 보는 것은 차별심이니까, 부처나 중생이나 차별없이 갖추고 있는 본래 평등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차제걸이(次第乞已) ​ 가식(七家食)= 금강경에서 말하는 걸식(乞食)은 불교의 근본정신이라 할 수 있는 차별없는 마음을 실천하기를 가르치는 칠가식(七家食)에서 비롯한 것인데, 칠가식은 부처님이 날마다 성안으로 들어가서 먹을 음식을 빌 때는, 어느 집에서 시작을 하여, 무엇을 얻든 차례대로 일곱 집만 다닌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오늘 일곱 집을 다녔으면, 다음 날에는 여덟 번째 집에서부터 다시 일곱 집을 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칠가식(七家食)이 걸식의 문화로 자리하게 된 연유는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섭존자는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복 짓게 하려고 가난한 집만을 찾아다녔고, 반면에 수보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부잣집만을 골라 찾아 다녔는데,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이 착하기는 하나, 분별하는 그 마음 자체가, 분별과 차별을 일으키는 잘못된 마음이기에, 선별하는 제자들의 잘못된 분별과 차별을 깨우치는 뜻에서, 몸소 차례대로 일곱 집에서 음식을 구하였고, 이것으로 이른바 상(相)을 떠나서 반야의 진리로 드는 문을 연 것이다.]

 

爲不食故(위불식고) 應行乞食(응행걸식)

먹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걸식을 해야 하며, 

Do not even think about eating, but beg without the thought of begging.

[위불식고(爲不食故) 응행걸식(應行乞食)을 그대로 해석하면, 먹지 않기 위해서(때문에) 걸식을 행한다.

‘먹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으로, 수행자가 배고파서, 몸을 유지하려고 걸식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으로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爲壞和合相故(위괴화합상고) 應取揣食(응취단식) 揣 잴 췌, 잴 취, 둥글게 할 단, 

(5온에 의해 임시적으로) 뭉쳐진 (육신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함이니, 마땅히 주먹밥=揣食을 먹어야 하며,

One should take food and drink to break the appearance of convergence. 

[揣食(박식, 췌식, 단식)= 덩어리로 된 밥. 숟가락으로 밥을 먹을 때 한 숟가락이면 박식이 됩니다. 인도에서는 손으로 뭉쳐서 먹으니까 박식이라고 합니다.

爲壞和合相故=인연과 모든 조건들이 화합해서 이루어진 화합상을 깨뜨리면 공한 것으로, 사대가 결합해서 된 육신을 공한 것으로 볼 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화합상을 본래 화합한 것이 아닌, 공한 것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화합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 형상이 본래 공한 것으로 볼 줄 알고 한 덩어리의 밥을 취한다. 밥알 하나하나가 하나의 덩어리가 되듯이, 원래 공한 것인데 인연에 의해서 하나의 덩어리가 된 것으로 보고 박식을 취한다는 뜻입니다] 

 

爲不受故(위불수고) 應受彼食(응수피식)

(생사의 과보를) 받지 않기 위한 까닭으로 마땅히 그 음식을 받아야 하며, 

For the sake of not receiving, one should receive food from others. 

[받지 않기 때문에 저 사람의 밥을 받는다. 우리는 받으면 받는 게 있지만, 받는 것이 없는, 말하자면 받지 않은 정신으로, 不食=먹어도 먹는 것이 아니고, 또 밥을 받아도 받음이 없는, 그런 도리로써 밥을 받아야 제대로 밥을 받는 것이다.

받았으니 아이구, 감사하다, 이 은혜를 언제 갚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은 우리의 상식이지만, 유마거사의 한 차원 높은 입장에서는 그것이 안 맞는 것으로, 받아도 받음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은혜를 모르는 것 같지만,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 차원이 아닌, 줘도 주는 게 없고, 받아도 받음이 없어야, 제대로 주고 제대로 받는것이라는 것입니다.

관삼륜청정 (觀三輪淸淨)하야 불위도용(不違道用)이로다’ → ‘삼륜(三輪)=베푸는 사람, 베푸는 물건, 그 베품을 받는 사람이 청정(淸淨)= 공함을 관하라’, 그래서 불수, 불식이라는 말입니다.]

 

以空聚想(이공취상) 入於聚落(입어취락)

(이 몸은) 空聚=사람이 살지 않는 빈 마을이라는 생각으로 마을에 들어가야 하며,
Enter a village while viewing it as empty aggregates. 

[공취(空聚)= 텅 빈 마을이라는 생각으로 취락에 들어간다. 저 마을에 가면 누가 살고있다는 분별심을 가지고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所見色與盲等(소견색여맹등) 所聞聲與響等(소문성여향등) 響 울림 향

형상=色을 보아도 장님과 같이 보아야 하며, 소리를 들을 때는 메아리를 듣는 것과 같이 하며, 

To see the worldly forms and colours without distinction of beauty or ugliness, without preferences or dislikes. Hear all beautiful sounds as natural echoes in the valley. 

[소견색(所見色)= 형상을 본다는 것을 여맹등(與盲等)=맹인이 더불어 똑같이 하고,

마을에 탁발하러 가면서 온갖 것을 다 보지만, 맹인이 사물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과 같이 하라. 꽃을 보고 좋아서, 좋은 것을 느끼되 마음에 머물러 가지고 있으면 안되고, 맹인이 본 것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여향등(與響等) 메아리는 본래 소리가 아니고, 본래 소리의 울림이니까 메아리를 듣는 것과 같이 하라.]

 

所嗅香與風等(소취향여풍등) 所食味不分別(소식미불분별)

향내음을 맡아도 바람과 같이 맡고, 먹고도 맛을 분별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The fragrance that one smells has no difference from the wind.  When eating something, to have no distinction. 

[소후향(所齅香)= 향기로운 냄새 맡아도, 여풍등(與風等)=바람이 스치는 것으로 더불어 같이 한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면, 그 뿐이지, 향기 좋다 나쁘다는 분별이 없는 것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소식미(所食味)= 먹고 그 맛을 불분별(不分別)= 분별하지 말며,  맛있다 맛없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受諸觸如智證(수제촉여지증) 知諸法如幻相(지제법여환상)

諸觸=온갖 감촉을 受=느낄 때에도 智證=지혜를 증득하듯이 해야 하며,

또 존재하는 모든=諸法을 환상과 같이 알며, 

To receive all sensations of touch as if they were the realization through wisdom. Knowing that all Dharma is illusory and has no self-nature or any external nature. 

[이 몸이 느끼는 감촉, 따뜻하다 춥다 등을 받아는 들이되, 지혜를 깨달을 때의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無自性(무자성) 無他性(무타성) 本自不然(본자불연) 今則無滅(금즉무멸)
법에는 자성도 없고 타성도 없으므로 그 자체로는 생기지 않으므로 지금도 멸함이 없습니다.

Originally, there was nothing, so now there’s no extinguishing. 

[無自性(무자성)= 자기 자체의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

無他性(무타성)= 다른 힘이나 조건에 의해서 존재하는 어떤 것도 없음을 알아야 된다]

본자불연(本自不然)= 본래 스스로 연(然)=일어나다, 생기는 것이 아닌, 금즉무멸(今則無滅) 지금 없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니다.  옛날에 일어난 것이 없으니까, 지금 없어질 것도 없다는 뜻으로, 여여한 중도(中道)의 입장입니다. 생기고 없어지는것이 아니라 본래 평등한 법의 이치, 중도의 경지를 걸식을 통해서 깨달아야 된다.
공부란 경을 보는 것만이 아니고, 걸식하면서 거리를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낌을 통해서 철저한 공부가 되어야 된다.
일체가 공(空)한 것으로 아는 것 즉 중도의 이치를 알아서 평등한 도리를 깨달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걸식 그 자체가 아주 좋은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迦葉(가섭) 若能不捨八邪(약능불사팔사) 入八解脫(입팔해탈)

以邪相入正法(이사상입정법)

가섭이여, 능히 여덟 가지 사도(8정도에 반대되는 8악도)를 버리지 않고서도 8해탈(解脫)에 들어가며, 사악한 모습을 지닌 채 정법(正法)에 들어가며, 

Mahakasyapa, if one can enter the eight liberations without deliberately abandoning the eight evils, then one can enter the true Dharma with the countenance of evil. 

[若能不捨八邪= ‘중생들은 팔사도를 행한다’ → 바르게 보지 않고 삿되게 본다, →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 보통 중생들의 행위인데, 여기서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행한다 즉 편견=여덟 가지 삿된 법을 버리지 않은 채 여덟 가지 해탈에 들어간다. 

八邪=여덟 가지 삿된 도리는 어리석은 중생들의 보통 삶을 말하는 것으로, 그런 어리석은 중생의 보통 삶에서  八解脫=해탈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불교인의 상식은 팔정도를 닦아야 해탈을 얻는다는 것이지만 유마거사의 차원은 중생들의 편협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해탈을 얻는다는 것으로, 이것이 진정한 중도입니다. 삿된 법이라지만 삿된 법이 삿된 법이 아니라, 중생들이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니까, 그러한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꽃과 꽃잎의 차이가 없는, 즉 꽃잎과  꽃, 줄기, 뿌리의 가치가 똑같은 것이다. 어떠한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누어서 보지 않고, 그대로 평등하게 보는 안목이 있어야 되는 그것이 진짜 도(道)고 중도(中道)입니다.

이사상(以邪相)= 이러한 삿된 모양으로 입정법(入正法)= 정법에 들어간다. 어리석은 차원에서 따질 것 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以一食施一切(이일식시일체) 供飬諸佛(공양제불) 及衆賢聖(급중현성) 然後可食(연후가식)

한 끼의 밥으로도 모든 중생에게 베풀며, 모든 부처와 온갖 성현에게 공양한 다음에야 먹을 만합니다. 

If you can offer all sentient beings and all the Buddhas and sages in the ten directions with one food, then you can eat. 

[이일식(以一食) 시일체(施一切)은 우리가 식사할 때 합장하고 ‘공양시방불(供養十方佛)’과 같이, 내가 먹을 한 그릇의 밥으로 공양제불(供養諸佛)과 더불어, 급중현성연후(及衆賢聖然後)에게 공양 올린다는 그 한마디 말과 그 한 생각이 시방불에게 공양 올리는 것과 같이 한 그릇의 밥으로 일체 중생에게 다 베푼다는 것입니다

식사하실 때 꼭 공양시방불 하십시요 분명히 그런 도리가 있습니다.]

 

如是食者(여시식자) 非有煩惱(비유번뇌) 非離煩惱(비리번뇌)

만약 이와 같이 먹는 사람은 번뇌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번뇌가 없기 때문도 아니며, 

He who eats like this has neither afflictions nor is free from afflictions; 

[여시식자(如是食者)= 이와 같이 먹는 사람은 비유번뇌(非有煩惱)며, 비리번뇌(非離煩惱)니라, 번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번뇌를 떠난 것도 아니다, 번뇌가 있다 없다, 없앤다는 것은 소승적인 생각입니다. 번뇌를 번뇌로 보는 차원을 떠나서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고,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것으로 보는 차원이 되어야 됩니다.

생각이 너무 굳어져 있고, 편협 되어 있어서, 선을 그어놓고 이 것은 버려야 되고, 이것은 취해야 된다는 나름의 원칙대로 사는 중생들의 잘못된 소견, 굳은 소견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캄캄한데 불을 켜면 밝아지는 것은 그 어두움이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어두운 그 자리가 그대로 밝은 자리가 된 것이니까, 밝고 어두운 것이 둘이 아닌 것으로, 이 공간에는 아무 변화 없이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본래의 모습, 한 물건 또는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것으로, 단지 부처라 이름하고, 중생이라 이름 하고, 번뇌라고 이름하고, 보리라고 이름 붙인 것일 뿐이니까, 번뇌도 되고 보리도 되는 것이지, 사실 번뇌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 보리의 자리이고, 생사하는 그 자리가 바로 열반의 자리로 그것이 둘이 아닙니다.

유마거사는 둘이 아닌 이치를 알아서 생사와 열반, 보리와 번뇌를 나누지 않으니까 번뇌가 있는 것도 아니요, 번뇌를 떠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번뇌라 하자니 보리이고, 보리라 하자니 또 번뇌라서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非入定意(비입정의) 非起定意(비기정의) 非住世閒(비주세간) 非住涅槃(비주열반)

또 定意=선정의 마음에 (삼매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선정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며,

이 미혹한 세간에 非住=머문 것도 아니고, 열반에 非住= 머문 것도 아닙니다.
neither the thought of entering nor leaving meditative consciousness; not abiding in the present world, nor abiding in nirvana. 

[세간에 머물지 않으면 열반에 있어야 되는데, 열반에 머문 것도 아니라는 것은 중도(中道)입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니고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때로는 세간도 되고, 때로는 열반도 되는 것이니까, 세간에 머물지도 않고, 열반에 머물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반도 세간도 떠나있다는 말 또한 아니고,  동시에 함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공부할 때에는 반부처 노릇하다가, 아귀일 때는 아귀하고, 부처일 때는 부처가 되는 것이 중도인데, 나는 아귀도 부처도 싫으니까 그냥 중간 쯤되는 사람 할려고 해도 그렇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방이 어둡기만 한 것도 아니고, 밝기만 한 것도 아니요, 때로는 밝다가, 때로는 어둡기도 한 것입니다.

불교 이론은 어떤 가설을 설정해 놓은 것을 우리가 억지로 이해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그대로 있는 이치, 진실을 그대로 설법하는 것입니다. 이치가 아닌 것을 경전에서 설하는 것은 절대 없습니다.

우리가 한 순간 한 순간  살아가는 그 이치가 여기에서 말하는 중도의 자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간에 머물고 있는 것도 아니오, 열반에 머문 것도 아니다. 지금 이렇게 좋은 공부를 하는 순간을 세간에 머문다고 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그렇다고 열반에 머무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좀 건방스러운 것 같은 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그런 차원으로 이해를 해야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순간은 열반에 머무는 것도 아니오, 세간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또 세간에 있을 수도 있고 열반에 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 중도입니다. 즉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순간이 알고 보면 중도인 것입니다.]

 

其有施者(기유시자) 無大福無小福(부대복무소복)

그 보시하는 사람에게는 큰 복도 없고, 작은 복도 없으며, 

For the giver of alms he does not receive greater or smaller blessings, 

[베푸는 사람에게 대복도 소복도 없다. 너는 조금 베풀었으니까 소복이고, 나는 많이 베풀었으니까 대복이라고 확정해서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풀고도 복이 없을 수가 있고, 정말 지혜가 있어야만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 수가 있는 것이지요.

설산동자가 사슴을 숨겨주고는, 사냥꾼이 와서 물을 때 다른 방향으로 갔다고 가르쳐 준 것이, 그 사슴 한 마리 잡으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온 산천을 헤매다가 거의 다 잡을 상황에서, 헛걸음하게 만들었으니까 사냥꾼의 입장에선 나쁜 사람이 되지만, 사슴의 입장에선 고마운 생명의 은인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꼭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不爲益不爲損(불위익불위손) 是爲正入佛道(시위정입불도) 不依聲聞(불의성문)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니니, 이같이 (손익을 생각하지 않고) 하는 것이야말로 바르게 불도(대승)에 들어가는 것이며, 성문(소승)의 길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nor is it for gain or loss. But for the sake of proper entry to the Buddha’s Way, not relying on the path of the sravaka. 

[시위정입불도(是爲正入佛道)= 이것은 바로 불도에 들어가는 것이다. 즉 그렇게 되어야 제대로 불도에 들어가는 것이고

불의성문(不依聲聞)= 성문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성문(聲聞)은 소승이고, 불도(佛道)라고 하는 것은 바른 깨달음의 길, 대승입니다.]

 

迦葉(가섭) 若如是食(약여시식) 爲不空食人之施也(위불공식인지시야)
가섭이여, 이와 같이 먹는다면 남의 보시를 헛되이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Mahakasyapa! Only when you beg for food and eat with such an attitude, you are not eating the giver’s alms in vain. 

[가섭이여 만일 이와 같이 식사를 하면, 다른 사람이 베푸는 밥을 공식(空食)=공짜로 먹는 것이 안 된다.

가난한 집에 가서 걸식을 해서 복을 짓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어떻게 보면 좋은 것 같지만, 실은 차원이 얕고 좁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時我 世尊(시아 세존) 聞說是語(문설시어) 得未曾有(득미증유)

세존이시여, 그 때 저는 이같이 설하는 말을 듣고서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라 생각하고는 

Then, World Honoured One, when I heard those words which I have never heard before, 

卽於一切菩薩(즉어일체보살) 深起敬心(심기경심) 復作是念(부작시념)

모든 보살들(세속 보살, 재가 거사)에 대해서 깊이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으며, 또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I received what’s unprecedented and felt a deep reverence for all bodhisattvas. I thought to myself, 

[그 후로는 곧 모든 보살들에게 깊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여기서 보살은 세속보살을 말하는 것으로 대승보살을 말하는 것이니까 유마거사가 보살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가섭존자는 출가해서 공부하는 사람이 제일인 줄 알았으나, 유마거사 만나서 이 법문 들은 다음부터는 세속의 보살을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斯有家名(사유가명) 辯才智慧乃能如是(변재지혜내능여시)

斯=이 분이 재가에 있으면서 변재와 지혜가 이럴 수가 있는데, 

Who is this householder, who is so wise and so eloquent? 

[사(斯)= 이 사람은 속인, 가명(家名)= 재가거사, 집에 있는 사람, 속가거사라는 뜻]

其誰聞此不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기수문차부발아뇩다락삼막삼보리심)?

그 누가 이를 듣고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Who would not, upon hearing his advice, aspire towards the unexcelled complete enlightenment? 

[유마경은 출가한 좁은 소견을 가진 스님네를 낮추어 보는 것과 보이지만, 사실은 세속에 있는 불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분발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바로 이 구절이 더욱 그렇습니다.]

 

我從是來(아종시래) 不復勸人以聲聞(불부권인이성문) 辟支佛行(벽지불행)

저는 이 때부터 다시는 성문, 벽지불의 수행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Since then, I no longer advise people to pursue the practice of s sravaka or pratyekbuddha. 

是故不任詣彼問疾(시고불임예피문질)

그러므로 그를 찾아가 문병을 하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World Honoured One! That’s why I do not dare to go to him to see his ill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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