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선의보살
善意菩薩曰(선의보살왈) 生死涅槃爲二(생사열반위이)
선의(Dntamati)보살이 말하였다. 생사(svabhava)와 열반(nirva)을 대립하는 둘이라 하지만,
The bodhisattva Good Intent said, Birth-death and nirvana make a duality. 
若見生死性(약견생사성) 則無生死(즉무생사) 無縛無解(무결무해)
不生不滅(불생불멸) 如是解者(여시해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생사의 성품을 본다면 곧 생사는 없는 것이며, 속박도 없고, 벗어날 해탈도 없으며, 생기지도 않는=불생이며 소멸하지도 않는=불멸이니, 이를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If one sees the nature of birth and death, then there will be no birth nor death, no bondage nor liberation, neither arising nor perishing. For one with such insight, tha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생사와 열반은 불교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참구하는 주제이다. 생사의 본성을 사무쳐 보면 생사가 없는 것이며, 생사가 없으면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 그래서 법성게에도 “생사와 열반이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14. 현견보살

現見菩薩曰(현건보살왈) 盡不盡爲二(진불진위이)

현견(Pratyakadarana)보살이 말하였다. 다함=盡(kaya)과 다함이 없는=不盡(akaya)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The bodhisattva Manifest Vision said, The exhaustible and inexhaustible are a duality. 

法若究竟(법약구경) 盡若不盡(징약불진) 皆是無盡相(개시무진상)

無盡相卽是空(무진상즉시공) 空則無有盡不盡相(공즉무유진불진상)

如是入者(여시입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법이 만약 구경에 다함이거나, 다하지 않거나 간에, 양자 모두는 다함이 없는 무진상입니다. 무진상이 곧 공한 것이며, 공함은 다함이나 다하지 않는 모양이 없으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Whether the Dharma is in the end exhaustible or is inexhaustible, it is all without the marks of exhaustion. And any marks of the inexhaustible are all empty. So, in this way, emptiness has neither the marks of the exhaustible nor the inexhaustible. Thus one who conforms with this enters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다한다=盡이라는 말은 없어진다는 뜻으로서 “법이 만약 다하거나 다하지 아니함은 모두가 다함이 없는 모습이다.”라는 본문의 내용은 일체의 존재인 법은 근본적으로 다함이 없이 지금의 현상 그대로 여여한다는 뜻이다.]

[盡不盡爲二(진불진위이)= 이 부분은 현장 역, 티베트 역이 모두 일치하지 않고 뜻을 파악하기 힘들다. '주유마힐경(注維摩詰經)'에 따르면 “무상은 공을 깨닫는 처음의 관문이니, 존재를 깨뜨려도 다 없어지지 않음을 부진(不盡)이라고 이름한다. 내지는 한 생각이라도 않으면 생할 것이 없으니, 생할 것이 없다면, 생이 다한다. 생이 다하면 곧 끝내는 공적[畢竟空]하니, 이를 진(盡)이라 이름한다”고 나집은 풀이하였다.(卍續藏 27, p. 504上)]

 

15. 보수보살
普守菩薩曰(보수보살왈) 我無我爲二(아무아위이)

보수(Pariguha)보살이 말하였다. 아와 무아를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나,  

The bodhisattva Universal Guardian said, The self and non-self form a duality. 

我尚不可得(아상불가득) 非我何可得(비아하가득)?

見我實性者(견아실성자) 不復起二(불부기이)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그러나 아를 (찾아보아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비아를 어떻게 (찾아내)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의 실다운 성품=實性을 보는 사람은 다시는 이 두 가지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Since the self is beyond grasping, how is it attainable to grasp what’s non-self? Those who see the reality of the self will no longer arise such duality and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아와 무아가 둘이 아니라는 말은 본문에 “아도 오히려 얻지 못하는데 아가 아닌 것을 어찌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과 같이 아든 무아든 이 들은 둘이 아니다.]

 

16.전천보살
電天菩薩曰(전천보살왈) 明無明爲二(명무명위이)

전천(Vidyuddeva)보살이 말하였다. 명(vidy)과 무명(avidy)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나,  

The bodhisattva Lightning Celestial said, Understanding and ignorance are a duality. 

無明實性卽是明(무명실성즉시명) 明亦不可取(명역불가취) 離一切數(이일체수)

於其中平等無二者(어기중평등무이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그러나 무명의 실다운 성품이 곧 명이나, 이 명 또한 취할 수 없는 것이니, 일체의 헤아림=數를 떠나 버리면, 그 가운데에서 평등하여 상대적인 차별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The true nature of ignorance is understanding. Understanding is not graspable and is apart from all existing enumerations. Those abiding in between, perceiving both as equal and without duality,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바깥 경계나 사람의 마음이나 밝음과 어둠은 같은 원리다밝음과 어둠을 불교에서는 지혜와 어리석음으로 표현한다이 밝음과 어둠은 둘이 아니다무명실성 즉불성(無明實性卽佛性)이라는 증도가의 구절과 같이 무명의 성품이 곧 불성이니, 무명과 불성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이다. ]

[무명(無明; avija, avidya)이란 원래 명(明), 명지(明知), 즉 진실한 지혜가 없는 것, 여실지견(如實知見)을 결여(缺如)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은 선(善)과 불선(不善), 무명(無明)과 명(明)을 대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표리(表裏)의 관계에 서서 파악하고 무명이 여실지(如實智)에 의해서 소멸되는 곳에 명(明)이 나타난다고 본다.-혜경스님]

 

17.희견보살
喜見菩薩曰(희견보살왈) 色色空爲二(색색공위이)

희견(Priyadarana)보살이 말하였다. 색(rpa)과 색의 공함=色空(rpanyat)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The bodhisattva Joyful Perceiving said, Form and emptiness of form are a duality. 

色卽是空非色滅空(색즉시공비색멸공) 色性自空(색성자공)

색이 곧 공(nya)이며, 색이 멸함으로써 공한 것이 아닌, 색의 본성 자체가 공한 것이니,

Form is emptiness, not because of form are a duality. Form is emptiness, not because emptiness is the extinguishment of form, but that the nature of form is itself empty. 

如是受想行識(여시수상행식) 識空爲二(식공위이) 識卽是空(식즉시공) 非識滅空(비식멸공)

識性自空(식성자공) 於其中而通達者(어기중이통달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이와 같이 수, 상, 행, 식과 식공(識空, 생각이 끊어진 자리, 무념의 자리)을 서로 대립한 둘이라고 하나, 식이 곧 공이며, 식이 멸했기 때문에 공한 것은 아니라, 식의 본성 자체가 공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통달하여 아는 이를 불이법문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The same goes for sensations, perceptions, mental formations, and consciousness. Consciousness and emptiness form a duality. Consciousness is emptiness, not that consciousness extinguishes emptiness, but that the nature of consciousness is itself empty. Those who go among and understand thoroughly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반야심경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한 가르침과 같다. 유마경과 반야심경에서 중요한 점은 색수상행식이 소멸한 뒤에 공하여 지는 것이 아니고 색수상행식이 곧 그대로 공하다는 것이다. 또는 하나하나 인연에 의하여 결합되었기 때문에 그 결합을 분해하면 공이라는 뜻도 아니다. 즉 분석공(分析空)도 아니고 연기공(緣起空)도 아닌, 즉공(卽空)이다. 분석공은 성문들이 이해하는 공이고, 연기공은 연각들이 이해하는 공이며, 즉공은 보살들이 이해하는 공이다.]

 

18.명상보살
明相菩薩曰(명상보살왈) 四種異空種異爲二(사종이공종이위이)

명상(Prabhketu)보살이 말하였다. 四種=지․수․화․풍의 4가지 종성의 다름과 공의 종성이 다름(kadhtu)이 서로 대립하는 둘이나,

The bodhisattva Understanding Form sai, The four elements and emptiness are a duality. 

四種性卽是空種性(사종성즉시공종성) 如前際後際空(여전제후제공)

4대의 본성 그대로가 空種=공의 본성이니, 과거의 실제=前際(purvanta)와 미래의 실제=後際(aparanta)가 다 공하기 때문에 

The nature of the four elements is the nature of emptiness. They have been empty in the past and future, 

故中際亦空(공중제역공) 若能如是知諸種性者(약능여시지제종성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중간인 현재의 실제=中際(pratyutpanna)도 공한 것이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모든 종류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불이법문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so they are also empty in the present. If someone can understand the nature of the various elements thus, it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空種, kadhtu=허공(虛空)을 말한다. 즉 공간으로서 일체가 걸림이 없이 그 안에 안주시킬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또 이 부분은 현장 역과 같이 “네 가지 원소(元素)와 공(空)과는” 하는 것이 더 이해를 빠르게 한다.]

[지풍은 공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그러므로 지풍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지풍이다그렇다면 결국은 앞도 공이며 뒤도 공이며 중간도 공이다.]

 

19.묘의보살
妙意菩薩曰(묘의보살왈) 眼色爲二(안색위이)

묘의(Paramati)보살이 말하였다. 눈(cakus)과 사물=色(rpa)을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 하나,

The bodhisattva Wonderful Intent said, Sense of sight and things perceived by sight are a duality. 

若知眼性(약지안성) 於色不貪(어색불탐) 不恚不癡是名寂滅(불애물치시명적멸)

만약 눈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을 알면, 색=사물에 대하여 탐착하거나, 성을 내거나, 어리석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적멸이라 이름하며, 

When there isn’t greed, hostility, or confusion about what’s perceived, that’s called silent cessation. 

如是耳聲(여시이성) 鼻香舌味(비향설미) 身觸意法爲二(신촉의법위이)

이와 같이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마음(뜻)과 마음의 대상=法 등이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지만, 

Similarly, the ear and sound, the nose and scent, the tongue and taste, the body and touch, and the mind and Dharma are a duality. 

若知意性(약지의성) 於法不貪(어법불탐) 不恚不癡是名寂滅(불애물치시명적멸)

安住其中(안주기중)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만약 마음의 본성을 알면 마음의 대상=법에 대해서 탐착하거나, 성내거나, 어리석지 않을 것이므로, 이것을 적멸이라고 이름하며, 그 안에 안주하는 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If one understands the nature of the mind, then there will not be an attachment to Dharma, no hostility, nor confusion, and is called nirvana. Abiding within is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사람의 삶의 영역은 6()과 6()이다근과 경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둘이라고 하여, 눈과 사물이 둘이며 귀와 소리가 둘이며 코와 향기가 둘이다이와 같이 6근과 6경이 둘이라 하였으나 6근의 본성을 알고 6경의 본성을 알면 6경에 대해서도 6근에 대해서도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지도 않다.]

 

20.무진의보살
無盡意菩薩曰(무진의보살왈) 布施迴向一切智爲二(보시회향일체지위이)

무진의(Akayamat)보살이 말하였다. 보시(dna)와 (공덕을) 일체지로 회향하는 것이(sarvajna-pariman) 서로 대립하는 둘이라고 하지만, 

The bodhisattva Aksayamati says, Generosity and to transfer merit for the wisdom of all form a duality. 

布施性卽是迴向一切智性(보시성즉시회향일체지성) 如是持戒(여시지계)

忍辱精進禪定(인욕정진선정) 智慧迴向一切智爲二(지혜회향일체지위이)

보시의 성품이 곧 일체지로 회향하는 것임과 같이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와 일체지에 회향하는 것이 서로 대립하는 둘이 아니라, 

Nature of generosity is the same nature as transferring merit for the wisdom of all. Thus upholding the precepts, to have patience, to be diligent, meditative concentration, wisdom, and transfer merit for all-knowledge are dualities. 

智慧性卽是迴向一切智性(지혜성즉시회향일체지성) 於其中入一相者(어기중입일상자)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지혜의 성품이 곧 (그 공덕을) 일체지의 성품에 회향하는 것이니, 그 가운데에서 진실한 도리인 一相에 들어가는 것 (깨닫는 것)을 불이법문에 들어감이라고 합니다.

Nature of wisdom is the nature of transferring merit for the wisdom of all, and those who enter this one form from among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一相= 앞의 선안(善眼)보살이 “일상(一相)과 무상(無相)”이라고 대립해서 이야기했고, 또 선안(善眼)보살의 이야기와 지금 것이 같지 않으므로 현장 역 ‘일리(一理),’ 티베트 역의 ‘일리취(一理趣)’를 참고하였다.]

[불교에서 보살이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 수행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등 6바라밀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일체지혜에 회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6바라밀과 일체지혜는 둘이 아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