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
維摩詰所說經入不二法門品第九
Chapter 9.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평등과 존중의 불이사상(不二思想)입니다.

출가, 재가, 부처와 중생, 정토(행복의 땅)와 예토(불행의 땅), 보리(깨달은 즐거운 마음)와 번뇌(힘들고 지친 중생마음)와 같은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는 불이(不二)사상을 통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들어가야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장 이상적인 ‘진리’는 사실 볼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글로 적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직 자신의 확실한 신념과 의지에 달려 있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남일스님]

[‘불이(不二)’에서 ‘이(二)’는 산스크리트어 dvaya로서 ‘가짜’ ‘거짓’이란 뜻이다. 그래서 유마 거사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은 ‘가짜가 아닌 법문’ 혹은 ‘진리의 노선을 따라가는 법문’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진리의 법문을 문수보살은 언설(言說)로써 표현한 반면, 유마거사는 실천으로 응답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마경>은 대승불교란 출가자에 국한된 가르침이 아닌, 모든 사람 특히 재가자를 위한 가르침이란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또한 경전 속 내용 중에서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내가 아프다’는 유마 거사의 말은 현대인들의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지성을 읽을 수 있다.

불이란 ‘둘이 아니며’ 따라서 ‘다르지 않다’, 즉 불이(不異)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깨달음과 무명이 다르지 않고, 성(聖)과 속(俗)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바로 불이의 세계관이다. 저 너머의 구원이 아닌 지금 여기 서 있는 자리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대승불교 정신이 압축적으로 표현돼 있다.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진리를 찾으려면 확고부동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 명제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철학사에 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불교는 데카르트에게 묻는다.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한다면, 고로 ‘나’라는 존재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바로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려는 것이 불이사상이다. 
존재를 만듦으로써 비존재를 만들고,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냄으로써 ‘너’라는 상대적인 존재를 만들어 내는 생각과 마음의 허상을 지적한 불이사상의 출발점이 곧 무아사상(無我思想)이다. 
즉, 불이사상(不二思想)이 부처님 근본 가르침인 무아(無我)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말이다.
무아(無我)가 단순한 철학적 개념에 머물지 않고 자비라는 실천윤리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계관이 있어 비로소 가능해진다. 대승의 정신이란 바로 불이적 세계관의 실천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불이(不二)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줄인 말로서 “다르지 않다”라고 말할 때에는 “같지 않다”라는 말이 전제돼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같은 ‘일(一)’이라는 숫자에 두 가지 개념이 있다. 이(二), 삼(三) 등을 전제로 한 분별하는 상대적인 개념의 일과 일원상(一圓相)에서 일(一)처럼 절대의 일(oneness), 진리의 일이 있다.-
불일불이(不一不二)에서 일(一)은 절대의 일(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의 일(一)을 말한다. 불일불이(不一不二)는 너와 내가 하나가 아니고 그렇다고 둘도 아니라는 말인데, 여기서 하나라는 말은 벌써 상대가 있다는 말이다. 분별의 일이라는 말이다. 즉, 불일(不一)에서 일(一)은 상대가 있는 분별의 일을 말한다. 
따라서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며 ‘무명과 깨달음이 하나’라는 말에는 당연히 그 중생과 부처가 다르며, 무명과 깨달음이 엄격히 구별돼야 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부처와 구별되는 나의 ‘중생성=불일(不一)’이 철저히 인식될 때 중생이 곧 부처라는 불이의 인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이(不二)는 불일불이(不一不異;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지금 있는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번뇌 즉 보리’라고 한 것은 깨달음을 어떤 초월적인데서 찾지 말고, 구원을 밖에서 찾지 말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세간적, 생물학적 욕망과 번뇌를 그대로 발산하면서 불이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믿는 것은 착각을 넘어 자기기만(自己欺瞞)이다. 불이는 깨달음의 경지요, 부처의 경지이다. 이 경지를 중생의 경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 착각의 근저에는 정신적 나태함과 방종을 수행의 경지로 호도하는 자기기만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오늘날 불교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출가자들의 비윤리적 파계행위도 이러한 착각 혹은 의식적 호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불교 전통에서는 7세기 원효(元曉) 대사와 근대 한국불교의 경허(鏡虛) 선사 등이 보여준 파계행위를 불교적 깨달음과 세간적 윤리 간의 일정한 긴장관계를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기보다 파계가 오히려 깨달음의 경지라는 치졸한 오류가 있다. 
불일(不一)은 다(多)의 세계로서 구별의 세계요, 언어와 이성의 세계이며 현실의 세계이다. 
한편 불이(不二)의 세계는 일(一)의 세계로서 차별과 언어 이전의 세계요, 이성 너머의 세계이다. 
따라서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하는 것은 언어와 언어 이전, 이성과 이성 너머를 다 긍정하며 포괄하고자 하는 불교적 가르침이 담겨 있다. 불교가 종교이면서 철학이요, 철학이면서 종교일 수 있는 그 근거가 바로 불일(不一)과 불이(不二)의 세계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가 그 다른 어떤 종교보다 현대사회에 더 적절한 가르침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언어와 이성의 세계인 불일(不一)을 전제한 불이(不二)의 세계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불일(不一)이 전제되지 않는 불이(不二)의 세계가 일종의 폭력일 수 있고, 정신적 전체주의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성(理性)과 언어의 사용을 부정하고,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폭력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불이(不二)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라고 하는 것은 서양 중세 역사가 보여준 바 있다. 불교의 경우 불이(不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수행의 엄격성과 필요성이 소홀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불일(不一)의 현실을 못 보고, 불이의 오용과 남용의 폐해로 인해 진짜와 가짜, 불교적인 것과 비불교적인 것,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처님과 무당집의 귀신이 구별이 되지 않고, 만행(萬行)이 만행(漫行)과 구별되지 않고, 멍청함(昏沈)을 무심(無心)의 경지로 착각하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다.
불교가 여타 종교와 다르고, 부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른 것은 부처님은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지 않고, 세속의 일에 ‘감 놓고 배 놓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속과 인간의 일이 움직이고 있는 이치가 어떤 절대자의 권능과 도움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다는 것이 불교의식의 출발점이다.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선가(禪家)의 말은 자신 외에 어떠한 절대적, 초월적 권위도 부정하는 철저한 선불교(禪佛敎)의 인간주의 선언이다. 그런데 입시철이 되면 모든 절에서 합격기도를 하고 수험 당일에는 대규모 기도회를 열어 시루떡을 갖다 놓고 내 아들, 내 딸을 합격시켜 달라고 기도를 한다. 오늘날 불교인들이 절대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절대자의 처분과 권능을 기다리는 다른 종교인들을 흔히 비판하지만, 그러면서 이와 같이 닮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작성자 아미산]

[역사가 깊고 규모가 큰 사찰에는 일주문을 지나고 사천왕문을 지나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불이문(不二門)이다. 진정한 불법의 문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불법의 이치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지만 특히 둘이 아니라는 뜻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무비스님]

 
爾時維摩詰謂衆菩薩言(이시유마힐위중보살언)

그 때에 유마힐은 수많은 보살들에게 말하였다.

At this time, Vimalakirti said to the bodhisattvas, 

諸仁者(제인자) 云何菩薩入不二法門(운하보살입불이법문)? 各隨所樂說之(각수소락설지)

여러 훌륭하신 분들이여, 무엇이 상대적 차별을 뛰어넘는=不二(advaya)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지를 저마다 생각하시는 대로 말씀해 보십시오.

‘Benevolent Ones! What is it for the bodhisattva to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May each of you speak of it as you please.’

[이 품에서는 32명의 보살들에게 불교의 여러 가지 명제와 이치 중에서 가장 궁극적인 이치라고 할 수 있는 중도(中道), 또는 절대 평등한 완전 하나의 경지=不二에 대한 견해를 듣고자 유마거사가 청을 하여 듣게 된다.]

 

1. 法自在보살
會中有菩薩(회중유보살) 名法自在說言(명법자재설언)

법회 가운데 보살이 있어 이름이 '법자재'라고 하는 보살이 말하였다.
A bodhisattva in the assembly called Dharma Unrestrained said, 

諸仁者(제인자) 生滅爲二(생멸위이) 法本不生(법본불생) 今則無滅(금즉무멸)

得此無生法忍(등차무생법인)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인자 여러분, 생(utpda)과 멸(nirodha)을 서로 대립하는 두가지라 하지만, 존재하는 것=法은 본래 '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멸'함도 없습니다. 이같이 생멸이 없는 법=無生法忍을 얻는 것을 곧 둘이 아닌 법문=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Benevolent Ones! Arising and ceasing are a duality. From the beginning, the Dharma does not arise, so in the present there is no perishing, which is to attain a forbearance for the non-arising of Dharmas and enter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먼저 법자재보살은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두 가지인데 진리=法은 본래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기고 없어짐이 없는 진리=無生法忍을 터득하는 것이 곧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니 생사해탈(生死解脫)이니 하는 말은 불교에서 증득해야할 목표로 설정되어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불이법문입니다.]

 

2. 덕수보살
德守菩薩曰(덕수보살왈) 我我所爲二(아아소위이)

덕수(rīgandha)보살이 말하였다. '아'(tman)와 '나의 것=我所'(tmīya)를 서로 대립하는 둘=二라고 하나, 

Guarding Virtue bodhisattva said, 'I' and 'mine' constitute a duality. 

因有我故(인유아고) 便有我所(편유아소) 若無有我(약무유아) 則無我所(즉무아소)

是爲入不二法門(시위입불이법문)

'아'가 있음으로 해서 '아소'가 있는 것이요, 만약 아가 없는=無我(antman)이면 아소도 없을 것이니, 이것을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It is from having a self that there is self-ownership (‘my’ or ‘mine’). Without a self, there would not be a sense of self-ownership. And this is entering the Dharma gate of nonduality. 
[무아(無我, pali. anatta)’ 혹은 자아(自我)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윤회(輪廻, saṁsāra) 혹은 자아(自我)가 생사를 반복하면서 지속됨을 뜻한다. 따라서 이 둘은 모순적 관계로 볼 수 있다. 만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하겠는가. 혹은 윤회가 사실이라면 윤회의 주체인 자아가 전제되는 셈이 아닌가. 그렇다면 모순이 아닌가. 이러한 당혹감이 문제의식으로 떠오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은, 무아 = "내가 없다"」가 아니다. 무아란 고정불변 하는 ― 항상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내가 아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무아를 내가 없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잘못된 무아론에 빠져버린다.

무아(無我)에서 ()’라는 것은, 영원성을 의미한다. 무아(無我)의 뜻은 라는 게 없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고, ‘라고 여기는 몸과 마음에 내재된 영원성을 유지하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은 변화해갈 수밖에 없다. 변화한다는 것은 곧 그 안에 어떤 영원성이 내재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많은 분들이 무아(無我)를 한자 무()에 얽매여서 그냥 단순하게 라는 존재가 없다는 식으로 잘못 해석한다. 내가 없다면 이 글을 쓰는 는 누군인가? 따라서 무아를 내가 없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불교 교의의 두 기둥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인데, 무상(無常)과 윤회(輪廻)의 개념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나 자이나교에서 이미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무아(無我)만은 석가모니불이 성도한 후 최초로 설파한 가르침이다. 빠알리어 atta 참나이다. 따라서 anatta(무아)란 참나가 아니란 말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 무아는 불교 근본교리로서, 고대 인도에는 브라만 교설에 의해 아트만(atman-)사상이 보편화돼 있었으므로 부처님은 일차적으로 그 아트만()’의 관념을 부정하기 위해 무아설을 주장했다. , 당시 우파니샤드철학이 아()를 실체시 하는데 반해 부처님이 이런 견해를 거부한 것이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무아(無我-pali. anatta)이다.

pali. anatta, skt. anatman(무아) atman이 아니란(an) 말이다. 아트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무아라고 해서 의 실존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비록 가아(假我)이지만 는 존재한다. 아트만(atman)이란 실체를 뜻하고, 무아란 존재론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당시 브라만교에서는 고정 불변의 자아(skt. atman)를 인정하고 그러한 자아를 터득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을 그들의 제일의 교의로 삼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자아사상을 단지 자아가 있다는 인식[아상(我相)]’일 뿐이라며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므로 인무아(人無我)ㆍ법무아(法無我) "나의 본질은 없는 것이며, 대상으로서의 사물들(삼라만상)의 본질도 없다"와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내가 없고 대상으로서의 존재자도 없는 공무(空無)란 말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종교도 필요 없고, 선행도 다 헛된 것에 불과 할 뿐이며, 깨달음을 얻는 것도 다 헛된 일일 뿐이다. 불교의 무아의 사상은 공무(空無)의 사상이 아니다. 무아를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이 해석하지 말고 본질(本質)이 없다, 실체가 없다와 같이 해석해야 한다. 그리하여 존재는 "심찰나적으로 생멸(태어나고 죽음)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이라고 표현한다.

윤회란 반드시 "무언가가 다음 생으로 건너가야" 한다. 그것을 남방권에서는 바왕가(bhavaṅga)라고 하고 유식불교에서는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남방권에서는 그러한 바왕가조차도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심찰나적으로 생명을 거듭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라는 존재가 지금 여기 있지만 이 존재의 양상은 단 1초도 고정돼 있지 않듯이 라는 존재가 없다가 아니라 라는 고정된 존재가 없다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라는 고정된 존재가 있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취착하고 갈애하고 번뇌를 일으키고 업을 쌓아간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의문이나 논리는 단순히 무아를 그냥 내가 없다는 정도로만 인식하는 수준에서 생기는 의문이다. 무아를 확실히 알고 실현하면 윤회하지 않는다. 본래 삼라만상은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무아이지만, 중생은 모든 게 다 실체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윤회를 한다. 수행을 하고 삼라만상의 실체가 없음, 즉 무아를 깨달으면 윤회하지 않는다. , 무아를 깨달으면 윤회하지 않고, 무아를 모르면 윤회한다. 중생은 무아를 몰라서 육도윤회하고, 무아를 완전히 체득하면 해탈하게 된다.

「무아ㆍ윤회」라는 단어의 배합은 맞지 않는다.

유아ㆍ윤회 - 실체가 있다고 여기면, 반드시 죽으므로 생멸을 반복한다. 즉 윤회한다.

무아ㆍ해탈 - 실체가 없다고 깨닫게 되면, 죽을 게 없으므로 윤회가 없고, 해탈이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하실 때 두 부류로 나누어서 설법을 하셨다. 깨닫지 못한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육도 윤회를 말씀하셨고, 각자(覺者)의 입장에서는 삼라만상의 실체를 깨달으면(무아의 개념을 확실히 깨달으면) 생노병사의 윤회를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불교경전에는 윤회에 대한 설법도 있고, 그 반대로 윤회가 없는 해탈에 대한 설법도 있다.

무아(無我)에서 ()’라는 것은 실체라는 뜻이다. 단순이 라는 뜻이 아니다. 라는 개념의 정확한 뜻은 고정불변하는 영원한 자아(自我)를 의미한다. 그걸 라고 부른다. 무아(無我)의 뜻은 완전히 모든 게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당장 내 몸은 있다. 하지만, 이 몸이 영원하지 못하다. ()ㆍ노()ㆍ사() 한다. 그러니 이 몸은 영원하다고 할 수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 본래 의미이다.

그렇다면 과연 실체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몸과 마음은 있다. 그러나 이 몸과 마음이라는 것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상호의존적으로만 존재가 가능하다. 몸은 당장 공기가 없고 음식이 없으면 죽는다. 땅이 없으면 서 있을 수조차 없다. 따라서 몸이 혼자서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바깥 것들과 같이 공존, 즉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은,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게 늙어가는 것이고, 죽는 현상이다.
마음 역시, 혼자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대상, 물질적 대상이든 정신적 대상이든 대상 따라 마음이 일어난다. ‘나’라고 여기는 몸과 마음, 이것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가능하다면 변화가 없이 영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변하고, 실체가 없어 무아이다. 인간 개개인이건 삼라만상이건 모든 것의 본래 모습은 텅 비어,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이다.
그러나 중생은 모든 게 다 있다, 영원하다고 여긴다. 이게 전도몽상이다. 그러니 본질적으로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생로병사 윤회하는 것이다.
무아(無我)는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 인무아(人無我) : 각자 개개인으로서의 나,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 법무아(法無我) :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현상, 삼라만상이 다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무아를 깨달은 자는 윤회하지 않고, 무아를 깨닫지 못한 자는 윤회한다.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했느냐 하는 차이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사유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머릿속으로 분석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무아를 깨닫고 체득하면, 혹시 완전히 사라져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자유롭게 되는 것이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는 형이상학적 견해(見, diṭṭhi)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무아의 진리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인식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무아에 대한 통찰은 염리(厭離), 이탐(離貪),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 등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실천적 과정이 고려되지 않은 순수 이론으로서의 무아는 부처님의 원래 취지에서 벗어난 것이며, 형이상학적 견해에 해당하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범부는 스스로가 오온(五蘊)이라는 경험세계를 지배하는 힘(vaso)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괴로움의 현실은 자신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닥쳐온다. 이 점에서 오온을 이끄는 내부의 통솔자 혹은 주재자 따위는 인정될 수 없다. 어떠한 물질현상(色=오온)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내부적인 것이든 외부적인 것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모든 물질현상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러한 ‘나’는 있지 않다.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우리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거기에는 고정불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른 종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 무아를 깨친 자에겐 윤회가 없다. 원칙적으로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따라서 무아인데 누가 윤회하는가 라는 질문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 범부 = 자아의 상태 = 윤회
• 아라한 = 무아의 상태 = 윤회 종식
즉, 아라한은 무아이고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윤회의 종식을 획득했으니 윤회의 주체에 대해서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지만 범부들은 윤회에 종속되고 무아가 아닌 자아가 있다고 하는 정신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자아가 계속해 윤회한다. 범부가 윤회하는 것은 자아의식 때문이다. 따라서 무아인데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왜냐하면 무아라는 말은 곧 윤회를 종식시킨 아라한이라는 말인데, 아라한에게는 윤회가 없다. 따라서 윤회의 주체라느니 누가 윤회하는가 라는 의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남방권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아라한 = 오온(五蘊)
• 중생 = 오취온(五取蘊)따라서
• 아라한 = 오온 = 무아
• 중생 = 오취온 = 자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중생에게는 윤회가 있지만 아라한은 윤회가 없다. 즉, 중생은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윤회하는 것이고, 무아를 깨달으면 윤회가 종식된다. 그래서 무아와 윤회란 말은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과(道果)가 결정되는 것은 무아를 얼마나 완전하게 아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무아를 아는 것에 따라서 집착을 끊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처음부터 무아를 알기는 어렵다. 먼저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無常)을 알고, 그 뒤에 무상을 안 뒤에 오는 괴로움을 통찰하고, 그 괴로움이 자기 뜻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무아의 진리를 봐야 한다. 그리고 무아의 진리를 봤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기 때문에 유신견(有身見)이 생기지 않아서 그 결과로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업(業)을 생성하지 않아서 미래의 태어남이 없고, 받을 것이 없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끝내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윤회는 무아를 모르는 범부 중생의 바람일 뿐이다. 죽음이 두렵고 허망하니까 윤회라도 있어 다소간 위안을 받으려는 어리석은 소망이다. 무아와 관련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윤회는 없다. 부처님도 윤회는 없다고 단언하셨다.
다만 고대인도 사회에는 윤회설을 믿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을 후대 불교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대승 밀교에서는 적극적으로 윤회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윤회가 불교의 기본교설처럼 됐고, 부처님께서도 윤회설을 지지하셨다고 오해를 받고 계신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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