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0. 과단분(果斷分) 1

 

▶論曰:如是已說,增上慧殊勝. 彼果斷殊勝,云何可見! 斷,謂菩薩無住涅槃,以捨雜染,不捨生死,二所依止,轉依爲相.此中生死,謂依他起性雜染分.涅槃,謂依他起性淸淨分.二所依止,謂通二分依他起性.轉依,謂卽依他起性,對治起時,轉捨雜染分`轉得淸淨分.

▷논문; 이상과 같이 매우 높은 지혜인 증상혜(增上慧)의 수승(殊勝) 관하여 설명하였다. 

 증과의 단멸인 과단(果斷)의 수승함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단(斷)은 이른바 보살의 무주열반으로서, 잡염을 버리고 생사를 버리지 않는 것으로, 두 가지의 의지처의 전의(轉依)로써 상을 삼는 것이다. 

가운데, 생사는 의타기성의 잡염분이며, 열반은 의타기성의 청정분을 말하는 것이며,

 가지의 소의(의지처)란, 이러한 두 가지에 통하는 의타기성을 말하는 것이다. 

전의(轉依)는 의타기성의 다스림의 대치(對治)가 일어날 때, 잡염분을 전환하여 버리고 청정분을 그 전환으로 얻는 이다.

ㅡ증과인 단멸인 과단(果斷)의 뛰어난 , 구경위(究竟位)에서 전의(轉依) 의해 대열반과 대보리를 성취함에 관하여 설명하는 가운에에서 우선 전의(轉依)에 대한 내용이다.

 

전의(轉依, āśraya-parivṛtti)는 ‘의지처인 소의(所依)를 전환시켜서 얻어진 것’이라는 뜻으로, 여기서의 소의(의지처)는 제8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을 가리킨다. 전환은 전사전득(轉捨轉得), 즉 번뇌장ㆍ소지장의 종자를 전사하고, 보리와 열반을 전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전의는 소의(所依)인 자기 존재의 기체(基體)를 허망된 상태(변계소집성)에서 진실한 상태(원성실성)로 변혁시키는 과정, 또는 그 과정의 결과로 증득된 보리와 열반을 가리킨다.


▶釋曰:無住涅槃,以捨雜染,不捨生死,二所依止轉依,爲相者,謂住此轉依時,不容煩惱`不捨生死,是此轉依相.何者生死?謂依他起雜染性分.何者涅槃?謂依他起淸淨性分.何者依止?謂通二分所依自性.何者轉依?謂卽此性對治生時,捨雜染分`得淸淨分.

해석한다; ‘무주열반으로서 잡염을 버리고 생사를 버리지 않으며, 두 가지의 의지처의 전의(轉依)로써 상을 삼는다’는 것이란, 이 전의(轉依)에 안주할 때에는 번뇌를 용인하지 않고 생사를 버리지 않으니, 이것이 전의의 상이다.

무엇이 생사(生死)인가? 의타기성의 잡염성의 부분을 말하는 것이며,

무엇이 열반(涅槃)인가? 의타기성의 청정성의 부분을 말하는 것이며,

무엇이 의지(依止)인가? 이른바 두 부분에 통하는 소의(所依, 의지처)의 자성이며,

무엇이 전의(轉依)인가? 곧 이 자성, 즉 의타기자성의 대치(對治)가 생겨날 때 잡염분을 버리고 청정분을 얻는 것이다.

 
▶論曰:又此轉依,略有六種:一損力益能轉,謂由勝解力,聞熏習住故,及由有羞恥,令諸煩惱,少分現行,不現行故;

二通達轉,謂諸菩薩,已入大地,於眞實非眞實`顯現不顯現現前住故,乃至六地;

논문; 또한  전의(轉依)에 대략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력을 감소시키고 능력을 증성하게 하는, 자량위와 가행위에서의 수행의 힘인 손력익능정(損力益能轉)이니, 이른바 뛰어나게 이해하는 힘의 문훈습(聞勳習)에 안주하기 때문이고, 수치심이 있어서 모든 번뇌를 조금만 현행시키거나 혹은 현행시키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통달의 전의의 통달전(通達轉, 통달위)이니, 모든 보살은 이미 10지 중의 초지(初地)의  지위에 올라서 진실ㆍ진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 현현하거나 현현하지 않고 현전에 머물기 때문이니, 나아가 제6지에 이르기까지이다. 

 

三修習轉,謂猶有障,一切相不顯現`眞實顯現故,乃至十地;四果圓滿轉,謂永無障,一切相不顯現`最淸淨眞實顯現,於一切相,得自在故;五下劣轉,謂聲聞等,唯能通達補特伽羅空無我性,一向背生死`一向捨生死故;六廣大轉,謂諸菩薩,兼通達法空無我性,卽於生死見爲寂靜,雖斷雜染,而不捨故.

셋째는 수습의 전의인 수습전(修習轉, 수습위)이니, 아직 장애가 있으며, 모든 차별상이 현현하지 않고 진실만이 현현하는 까닭이니, 나아가 제10지에 이르기까지이며,

넷째는 증과가 원만한 전의인 관원만전(果圓滿轉, 구경위)이니, 장애가 영원히 없고, 모든 차별상이 현현하지 않으며, 가장 청정한 진실만이 현현하여 모든 차별상에 대해서 자재를 얻는 까닭이며,

다섯째는 낮고 열등한 전의의 하열전(下劣轉, 이승의 지위)이니, 성문등은 오직 능히 보특가라의 공(空)ㆍ무아성(無我性)에 통달할 뿐이며, 한결같이 생사를 등지고 한결같이 생사를 버리는 까닭이며,

여섯째는 광대한 전의인 광대전(廣大轉, 대승의 지위)이니, 모든 보살은 보특가라의 공ㆍ무아성과 아울러서 법공ㆍ무아성에 통달하여서,  생사를 보아 적정으로 삼고, 잡염을 단멸하지만 버리지는 않는 까닭이다.


若諸菩薩,住下劣轉,有何過失?不顧一切有情利益安樂事故`違越一切菩薩法故`與下劣乘同解脫故,是爲過失.若諸菩薩,住廣大轉,有何功德?生死法中,以自轉依爲所依止,得自在故,於一切趣示現一切有情之身,於最勝生及三乘中,種種調伏,方便善巧,安立所化諸有情故,是爲功德.

만약 보살이 낮고 열등한 전의의 하열전(下劣轉, 이승의 지위)에 머문다면 어떠한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인가?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는 사업을 돌아보지 않게 되며, 

모든 보살법에 위배되며, 낮고 열등한 교법의 수행자와 해탈을 같이하는 등의 이러한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보살이 광대한 전의인 광대전(廣大轉, 대승의 지위)에 안주한다면 어떠한 공덕이 있게 되는 것인가? 

생사의  가운데 스스로 전의를 소의(의지처)로 삼아서 자재를 얻는 까닭에, 일체의 윤회세계인 일체취(一切趣)에서 모든 유정의 몸을 시현하여 가장 뛰어난 생과 삼승(三乘)에 있어서 조복하는 갖가지 훌륭한 선교방편으로써 교화하여, 모든 유정을 안립하게 하나니, 이러한 공덕이 있게 되는 것이다.


▶釋曰:又此轉依,略有六種.損力益能轉者,謂損減阿賴耶識中,煩惱熏習力故`增益彼對治功能故,得此轉依.謂由勝解力,聞熏習住故者,謂住勝解行地,安立聞熏習力故,得此轉依.及由有慚羞等者,於此位中,若煩惱現行,卽深羞恥,或少分現行`或全不現行.

▷해석한다; 또한 이 전의(轉依)에 대략 여섯 가지가 있으니,

‘세력을 감소시키고 능력을 증성하게 하는 손력익능정(損力益能轉)’란, 아뢰야식 안의 번뇌의 훈습력을 감소시키고, 그 다스림의 대치 능력을 증성시킴으로써 이 전의를 얻게 되는 것이며,

‘이른바 뛰어나게 이해하는 힘의 문훈습(聞熏習)에 안주하기 때문’이란, 승해행지(勝解行地)에 안주하여 문훈습의 세력을 안립함으로써 이 전의를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수치심이 있어서’한, 이 지위에서 만약 번뇌가 현행한다면, 곧 깊이 부끄럽게 여겨서 혹 조금만 현행하게 하거나 혹은 전부를 현행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通達轉者,謂入地時,所得轉依.於眞實非眞實等者,謂此轉依,乃至六地,或時爲眞實顯現因,或時出觀爲非眞實顯現因.

‘통달의 전의의 통달전(通達轉, 통달위)’란 10 지위, 특히 초지에 들어갈 때 얻는 전의이며,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 등이란, 이 전의는 나아가 제6지에 이르기까지로서, 어느 때는 진실이 현현하는 원인이 되고, 어느 때에는 관찰에서 나와서 진실이 아닌 것이 현현하는 원인이 된다.

ㅡ이 관(觀)에 들어갈 때는 진실이 현현하지만, 관에서 나올 때는 산란된 마음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허망된 것이 현현한다고 하는 것이다.

 

修習轉,謂猶有障者,由所知障,說名有障.一切相不顯現等者,謂此轉依,乃至十地,一切有相,不復顯現,唯有無相,眞實顯現.

‘수습의 전의인 수습전(修習轉, 수습위)는 아직 장애가 있다’는 것이란, 소지장에 의거해서 장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모든 차별상이 현현하지 않고’ 등은, 이 전의는 나아가 제10지에 이르기까지로서, 모든 존재의 유상(有相)이 다시 현현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오직 무상(無相)의 진실이 현현함이 있을 뿐인 것이다.


果圓滿轉,謂永無障者,由無一切障,說名無障.一切相不顯現者,無一切障故.最淸淨眞實顯現者,卽由此故.於一切相,得自在者,由此爲依,得相自在,隨其所欲,利樂有情.下劣轉,謂聲聞等,等者等取獨覺,唯能通達一空無我,不能利他,故是下劣.

‘증과가 원만한 전의인 광대전(廣大轉, 대승의 지위)은 영원히 장애가 없다’는 것이란, 일체의 모든 장애가 없기 때문에 장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며,

‘모든 차별상이 현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란, 일체의 모든 장애가 없기 때문이며,

‘가장 청정한 진실만이 현현한다’는 것은,  이것에 의거하기 때문인 것이며,

‘모든 차별상에 대해서 자재를 얻는다’는 것은, 이것을 의지로 삼아서 차별상에 자재를 얻음으로써  원하는 바를 따라 유정을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는 것 말하는 것이며, 

‘낮고 열등한 전의의 하열전(下劣轉, 이승의 지위)은, 성문등을 말한다’에서, 등(等)은 독각을 같이 취한다는 뜻으로, 오직 능히 하나의 공ㆍ무아에 통달할 뿐, 즉 이승은 아공만을 통달할 뿐 아직 법공은 통달하지 못하므로, 남을 이롭게   없는 까닭에, 이것은 낮고 열등한 것이다.


廣大轉,謂諸菩薩等者,由竝通達二空無我,安住此中,捨諸雜染`不捨生死,兼利自他,故是廣大.住下劣轉,有何過失等者,不顧有情,越菩薩法,下劣乘同,是爲過失.住廣大轉,有何功德等者,以自轉依,爲所依止,於一切法,得自在故,於一切趣,示現一切同分之身,於最勝生,乃三乘中,種種調伏,方便巧智,安立所化難調有情,是爲功德.此中意取世閒,富貴爲最勝生.

‘광대한 전의인 광대전(廣大轉, 대승의 지위)은 모든 보살을 말한다’ 등이란, 공ㆍ무아의 두 가지에 아울러 통달하여  가운데에 안주하고, 모든 잡염을 버리고 생사를 버리지 않는 것이며,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이것은 광대한 것이며, 

‘낮고 열등한 전의의 하열전(下劣轉, 이승의 지위)에 머물면 어떠한 과실이 있게 되는가?’ 등은, 유정을 돌아보지 않고, 보살법을 넘어가며, 낮고 열등한 교법의 수행자와 동등하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이 과실이 되며, 

‘광대한 전의인 광대전(廣大轉, 대승의 지위)에 안주한다면 어떠한 공덕이 있는가?’ 등은, 자신의 전의를 소의(의지처)로 삼고 일체법에 대해서 자재를 얻은 까닭에, 모든 윤회세계인 일체취(一切趣)에서 모두와 같은 신체를 시현하고, 가장 뛰어난 생과 삼승에 있어서 조복하는 갖가지의 훌륭한 선교방편의 지혜로써 교화하는 바, 조복하기 어려운 유정을 안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공덕이 되는 것이며, 여기서의취(意取)는 세간의 부귀를 취하여 가장 뛰어난 생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세간의 과보로서는 가장 뛰어난 생을 얻고, 출세간의 과보로서는 삼승도(三乘道) 의지해서 교화하여 증과를 얻게 한다는이다.


▶論曰:此中有多頌:

논문; 이러함에 대하여 여러 게송이 있으니, 


“諸凡夫覆眞, 一向顯虛妄, 諸菩薩捨妄, 一向顯眞實.

모든 범부는 진실을 덮어서 한결같이 허망을 현현하나, 

모든 보살은 허망을 버리고 한결같이 진실을 현현한다네.


應知顯不顯, 眞義非眞義, 轉依卽解脫, 隨欲自在行.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현현하고 현현하지 않음이란,

진실한 대상인 진의(眞義)와 진실한 대상이 아닌 비진의(非眞義)를 말한다는 것을!

전의(轉依)함이란  해탈하는 것이니, 원하는 바를 따라 자재하게 행하는 것이라네.


於生死涅槃, 若起平等智, 爾時由此證, 生死卽涅槃.

생사와 열반에 대해서 평등지(平等智)를 일으킨다면,

그 때에는 이에 의거해서 생사가  열반임을 깨닫게 된다네.


由,是於生死, 非捨非不捨, 亦卽於涅槃, 非得非不得.”

이로 인하여 생사에 대해서 버리지 않고 버리지 않음도 아닌 것이니, 

역시 열반에 대해서도 증득함도 아니고 증득하지 않음도 아니라네.


▶釋曰:爲顯轉依,故說多頌.如諸凡夫,由無明故,覆障眞實,顯一切種所有虛妄.如是聖者,無明斷故,捨離虛妄,顯一切種,所有眞實.由此道理,應知顯不顯眞義非眞義者,遍計所執非眞不轉,圓成實相眞義轉故.言轉依者,此卽轉依,於此位中,眞義現行,非眞實義不現行故.卽解脫者,卽此轉依解脫相應.隨欲自在行者,謂此解脫,隨其所欲,自在而行,非如聲聞所得解脫,猶如斬首,畢竟安住般涅槃故.

해석한다; 전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많은 게송을 말한 것으로, 모든 범부는 무명으로 인하여 진실을 장애로 덮어서 갖가지의 일체 모든 허망을 현현하나,

성자는 무명을 끊음으로써 허망을 여의고 모든 종류의 진실을 현현하나니, 이러한 도리에 의거해서

‘마땅히 알지니 현현과 현현하지 않음은 진정한 대상인 진의(眞義)와 진정한 대상이 아닌 비진의(非眞義)라네’란, 변계소집성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서 전전하지 않고, 원성실상은 진정한 대상으로서 전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전의(轉依)한다’는 것은, 이 계위에 진실한 대상인 진의(眞義)의 현행으로 전의하는 것이고, 진실하지 않은 대상인 비진의(非眞義)는 현행하지 않는 것이며,

‘곧 해탈이니’는 이 전의가 해탈과 상응한다는 것을 말하며,

‘원하는 바를 따라 자재하게 행한다’는 것이란, 이 해탈은 그 원하는 바를 따라 자재하게 행하는 것이나, 성문이 증득한 해탈은 마치 머리를 자른 것과 같이, 궁극적으로 반열반에 안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於生死涅槃,若起平等智等者,謂於生死,及於涅槃,起平等智,由此二種無別性故,卽於此時,是爾時義.又此二種,云何平等?以諸雜染,名爲生死,卽雜染法,無我之性,名爲涅槃.菩薩通達諸法無我,平等智生,見彼諸法,皆無自性,諸有生死,卽是涅槃,以於其中,見極寂靜,卽涅槃故.

‘생사와 열반에 대해서 평등지(平等智)를 일으키면’ 등은 생사에 대해서도, 열반에 대해서도 평등한 지혜를 일으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차별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곧 이 때에 있어서의 어차시(於此時)'란, ‘그때’의 뜻이며, 

또한 이 두 가지는 어떻게 평등한 것인가? 모든 잡염법을 생사라 이름하고, 잡염법에 상즉하는 무아성(無我性)을 열반이라 하는 것이니, 보살은 제법의 무아에 통달하여 평등지를 일으켜서, 모든 제법이 다 무자성(無自性)이라는 것을 보는 것이니, 

모든 존재의 생사는 곧 열반이니, 그 생사 안에서 지극한 적정, 곧 열반을 보기 때문이다.

 

若如是知,復何所得?由是於生死,非捨非不捨等者,諸有生死,卽是涅槃,是故不捨,卽是無別,有可捨義.卽於其中,見無性故,離諸雜染,名非不捨.旣得如是,亦卽於涅槃,非得非不得.離生死外,無別涅槃,而可證得,故名非得.復於其中,見寂靜故,雖無性別,而證涅槃,名非不得.

만약 이렇게 안다며, 무슨 소득이 있는 것인가?

‘이로 인하여 생사에 대해서 버리지도 않고, 버리지 않음도 아니네’ 등이란,

모든 존재의 생사가 곧 열반이므로 버리지 않는, 곧 별도로 버려야 할 의미가 없는 까닭이며, 그 가운데에 무자성을 보기 때문이니, 모든 잡염을 여의는 것을 버리지 않음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은 것을 증득한다면, 역시 열반에 대해서도 증득함도 아니고 증득하지 않음도 아닌 것이니,

생사를 여의고 외부에 별도의 열반으로서 증득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증득함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그 가운데에서 적정을 보기 때문에, 비록 무성(無性)으로서 별도의 것은 없지만 열반을 증득하나니, 이것을 증득하지 않음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9. 증상혜학분(增上慧學分)  2

 

▶論曰:般若波羅蜜多,與無分別智,無有差別.如說菩薩,安住般若波羅蜜多,非處相應,能於所餘波羅蜜多, 修習圓滿. 云何名爲非處相應修習圓滿?謂由遠離五種處故,一遠離外道我執處故`二遠離未見眞如菩薩分別處故`三遠離生死涅槃二邊處故`四遠離唯斷煩惱障生喜足處故`五遠離不顧有情利益安樂住無餘依涅槃界處故.

▷논문; 반야바라밀다와 무분별지는 차이가 없으니,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하여서, 반야가 아닌 것을 반야로 오인하는 비처(非處, 개처個處)와 상응하여서 그 반야가 아닌 곳에 의지하지 않으며, 능히 나머지 바라밀다를 닦아 익히는 것을 원만해진다’고 말씀한 바와 같으니,

무엇을 이름하여 반야가 아닌 비처(非處, 개처個處)와 상응하여서 반야가 아닌 것에 의지하지 않고, 닦아 익혀서 원만해지는 것이라 하는가? 다섯 가지 처소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니,

첫째는 외도의 아집처(我執處)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고, 

둘째는 아직 진여를 보지 못한 보살이 분별하는 분별처(分別處)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셋째는 생사와 열반의 이변처(二邊處)를 멀리 여의 때문이며, 

넷째는 번뇌장을 끊는 것만으로 기쁘게 만족함을 일으키는 생희족처(生喜足處)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유정의 이익과 안락을 원하지 않고 무여의열반세계에 안주하는 처소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釋曰:無分別智卽是般若波羅蜜多.由彼經中說:諸菩薩安住般若波羅蜜多,非處相應,能於所餘波羅蜜多,修習圓滿.爲欲令知如是義故,顯示彼文.

▷해석한다; 무분별지는  반야바라밀다로써,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가운데에서,

‘모든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하고, 반야가 아닌 비처(非處, 개처個處)와 상응하여서, 능히 나머지 바라밀다를 닦아 익혀서 원만해진다’고 말씀함에 의거해서, 이러한 뜻을 알게 하고자 문장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遠離外道我執處者,謂如外道住般若中,執我我所,作如是念:我能住般若,般若是我所.菩薩不爾, 遠離如是諸外道輩我執處故,應知說名非處相應安住般若波羅蜜多.

‘외도의 아집의 처소를 멀리 여읜다’는 것이란, 외도의 부류는 반야에 머물러서 나(我)ㆍ나의 소유인 아소(我所)에 집착하여 ‘나는 능히 반야에 안주한다. 반야는 나의 소유이다’라고 생각하나,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이와 같은 모든 외도의 무리가 아집을 일으키는 아집처(我執處)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반야가 아닌 비처와 상응하여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遠離未見眞如菩薩分別處者,謂如未見眞如菩薩,於無分別般若波羅蜜多中,分別此是般若波羅蜜多.菩薩遠離如是分別,應知說名非處相應安住般若波羅蜜多.

‘아직 진여를 보지 못한 보살이 분별하는 분별처(分別處) 멀리 여읜다’는 것이란, 아직 진여를 보지 못한 보살 부류는 무분별의 반야바라밀다에 대해서 이것은 반야바라밀다라고 분별하나니, 보살은 이러한 분별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반야가 아닌 비처와 상응하여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遠離生死涅槃二邊處者,謂如世閒安住生死,諸聲聞等安住涅槃.菩薩不爾,遠離二邊,應知說名非處相應安住般若波羅蜜多.

‘생사와 열반의 이변처(二邊處) 멀리 여읜다’는 것이란, 세간의 무리는 생사에 안주하고, 모든 성문등은 열반에 안주하나,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그러한 두 가지를 멀리 여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반야가 아닌 비처와 상응하여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遠離唯斷煩惱障,生喜足處者,如聲聞等,唯斷煩惱障,便生喜足,菩薩不爾,由此意趣,應知說名非處相應安住般若波羅蜜多.遠離不顧有情利益安樂,住無餘依涅槃界處者,謂如聲聞等,不顧有情利益安樂,於無餘依般涅槃界而般涅槃.菩薩不爾,不住聲聞所住之處,應知說名非處相應安住般若波羅蜜多.

‘오직 번뇌장을 끊는 것만으로 기쁘게 만족함을 일으키는 생희족처(生喜足處) 멀리 여읜다’는 것이란,

성문등의 부류는 오직 번뇌장을 끊는 것만으로 문득 기쁘하고 만족하나,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이러한 것을 반야가 아닌 비처와 상응하여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유정의 이익과 안락을 원하지 않고 무여의열반계에 안주하는 처소를 멀리 여읜다’는 것이란,

성문등의 부류는 유정의 이익과 안락을 원하지 않고 무여의열반계에 반열반하나,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성문이 머무는 처소에 안주하지 않으니,  

이러한 것을 반야가 아닌 비처와 상응하여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聲聞等智,與菩薩智,有何差別?由五種相,應知差別:一由無分別差別,謂於薀等法,無分別故;二由非少分差別,謂於通達眞如,入一切種所知境界,普爲度脫一切有情,非少分故;三由無住差別,謂無住涅槃,爲所住故;四由畢竟差別,謂無餘依涅槃界中,無斷盡故;五由無上差別,謂於此上無有餘乘勝過此故.此中有頌:

▷논문; 성문등의 지혜와 보살의 지혜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다섯 가지의 오종상(五種相)에 의거해서차이를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무분별차별(無分別差別)에 의거하니, 5온(蘊) 등의 법에 대한 분별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적은 것이 아닌, 비소분차별(非少分差別)에 의거하나니, 이른바 진여에 통달함과, 일체 종류의 알아야  경계에 들어감과, 널리 모든 유정을 해탈케 함에 대한 것이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셋째는 머물지 않음의 무주차별(無住差別)에 의거하는 것이니, 무주열반(無任涅槃)을 머무는 곳으로 삼기 때문이며,

넷째는 구경의 필경차별(畢竟差別) 의거하나니, 무여의열반계 중에서 다함이 없고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무상차별(無上差別)에 의거하나니, 이 보다 뛰어난 다른 교법 없기 때문이다.

이러함에 대한 게송이 있으니, 

 이승(二乘) 지혜와 보살의 지혜의 차이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였다.


“諸大悲爲體, 由五相勝智, 世出世滿中, 說此最高遠.”

모든 대자비를 자체로 삼고, 다섯 가지상(五相)의 뛰어난 승지(勝智) 의거하나니, 

세간과 출세간의 원만함 중, 이를 가장 높고 먼, 최고원(最高遠)이라 한다네.


▶釋曰:此中顯示,聲聞等智,與菩薩智,五相差別.無分別差別者,謂聲聞等緣於薀等,分別識生,非菩薩智分別薀等.

▷해석한다; 여기서는 성문등의 지혜와 보살의 지혜의 다섯 가지 차이를 나타내었다. 

‘무분별차별(無分別差別)’은, 이른바 성문등은 5온 등을 반연하여 분별식을 일으키지만, 보살의 지혜는 5온 등을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非少分差別者,謂顯三種,非少分性:一所達眞如非少分性`二所知境界非少分性`三所度有情非少分性.所達眞如非少分性者,謂菩薩智具足,通達補特伽羅法無我性;聲聞等智,入眞如時,唯能通達補
特伽羅無我之性.所知境界非少分性者,謂菩薩智,普緣一切所知境生;聲聞等智,唯緣苦等諸諦而生.所度有情非少分性者,謂菩薩智,普爲度脫一切有情,勤趣菩提;聲聞等智,唯求自利.

‘적은 것이 아닌 비소분차별(非少分差別)’이란  종류의 적은 성품이 아닌, 비소분성(非少分性)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 첫째는 통달한 진여가 적은 성품이 아닌 것이며, 

둘째는 알아야  경계가 적은 성품이 아니며, 

셋째는 제도해야  유정이 적은 성품이 아니니라는 것이니, 

‘통달한 진여가 적은 성품이 아니다’라는 것이란, 보살의 지혜는 구족하여 보특가라와 법의 무아성을 통달하였지만, 성문등의 지혜는 진여에 들어갈  오직 보특가라의 무아성에 통달할 뿐이라는 것이며,

‘알아야  경계가 적은 성품이 아니다’라는 것은 보살의 지혜는 알아야  모든 경계를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이지만, 성문등의 지혜는 오직 고제(苦諦)  4성제만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제도해야  유정이 적은 성품이 아니다’라는 것은, 보살의 지혜는 널리 모든 유정을 해탈시키기 위해서 부지런히 보리에 나아가는 것이지만, 성문등의 지혜는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구한다는 것이다.


無住差別者,謂菩薩智,正爲安住無住涅槃,非聲聞等,是故差別.畢竟差別者,謂聲聞等,於無餘依涅槃界中,一切滅盡,菩薩於此涅槃界中,功德無盡,是故差別.無上差別者,謂聲聞等,上有大乘,其菩薩乘,無復有上,是故差別.爲顯此義,說一伽他.世`出世滿中者,謂於色`無色界世閒滿中,及於聲聞乘等出世滿中.

‘머물지 않음의 의 무주차별(無住差別)’이란, 보살의 지혜는 바로 무주열반에 안주하기 위한 것이지만, 성문등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이며,

‘구경의 필경차별(畢竟差別)’이란, 성문등은 무여의열반계 안에서 일체를 멸진하지만, 보살은  열반계 안에서 공덕이 다함 없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이며,

‘무상차별(無上差別)’는, 이른바 성문등의 위로는 대승이 있지만, 보살승에는 다시 위가 없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하나의 게송으로 말하였으니,

‘세간과 출세간의 원만함 중에서’란, 색계와 무색계 세간의 원만함과 성문승 등의 출세간의 원만함을 말하는 것이다.


▶論曰:若諸菩薩,成就如是增上尸羅`增上質多`增上般若,功德圓滿,於諸財位,得大自在,何故現見有諸有情,匱乏財位? 見彼有情,於諸財位有重業障故;見彼有情,若施財位,障生善法故;見彼有情,若乏財位, 厭離現前故;見彼有情,若施財位,卽爲積集不善法因故;見彼有情,若施財位,卽便作餘無量有情,損惱因故.是故現見有諸有情,匱乏財位.此中有頌:

▷논문; 만약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은 매우 높은 계율의 증상시라(增上尸羅)ㆍ매우 높은 마음의 증상질다(增上質多)ㆍ매우 높은 반야의 증상반야(增上般若)를 성취하여 공덕이 원만하여지면, 모든 재물과 지위에 대하여  자재를 얻거늘,

어찌하여 현재의 모든 유정은 재물과 지위에서 궁핍함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인가? 

그들 유정은 모든 재물과 지위에 대해서 무거운 업의 중업장(重業障)이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며,  

만약 재물과 지위를 베푼다면 선법을 일으키는 것을 장애하는 것을 볼 수 있 때문이며,

그들 유정은 재물과 지위가 궁핍하여지면 혐오하면서 떠나는 것을 볼 수 있 때문이며,

재물과 지위를 베풀면, 그들 유정은  불선법의 원인을 적집하는 것을 볼 수 있 때문이며,

재물과 지위를 베풀면, 그들 유정은  나머지 수많은 유정들을 괴롭히는 원인을 짓는 것을 볼 수 있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현재 모든 유정은 재물과 지위에 궁핍한 것이다.

그러함에 대한 게송이 있으니, 

보살이 증상(增上) 3학을 성취한 공덕으로 재물과 지위에 대해서 자재를 얻음에도, 중생들이 궁핍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見業障現前, 積集損惱故, 現有諸有情, 不感菩薩施.”

업ㆍ장애ㆍ현전ㆍ적집ㆍ괴롭힘을 볼 수 있는 까닭에,

현재 모든 유정은 보살의 보시를 느끼지 못하는 불감(不感)이라네.


▶釋曰:此中顯示,由是因緣,菩薩雖得財位自在具足大悲,而不施與有情財位.見彼有情,於諸財位,有重業障故者,謂諸有情,有障菩薩神力惡業,由彼惡業,障㝵菩薩無障㝵智.由見此故,雖有堪能,雖彼匱乏,而便棄捨.此中應引餓鬼江喩.如江有水,無障飮者,然諸餓鬼,由自業過,不能得飮.此亦如是.江喩菩薩,財位喩水,鬼喩有情.如彼餓鬼,不合飮用江中淨水,如是有情,不合受用菩薩財位.

▷해석한다; 여기에서 이러한 인연에 의거해서 보살은 비록 재물과 지위의 자재를 얻고 대자비를 구족하였을지라도 유정에게 재물과 지위를 베풀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니,

‘그들 유정은 모든 재물과 지위에 대해서 무거운 업의 장애인 중업장(重業障)이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란,

모든 유정에게는 보살의 신통력을 장애하는 악업이 있고,  악업에 의해서 보살의 장애 없는 지혜를 장애하나니, 이러한 것을 본 까닭에, 보살에게는 시여할 능력 있을지라도, 또한 그들이 궁핍할지라도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아귀와 강의 비유를 인용해야 할 것이니, 강에 물이 있고, 마시는 것을 막는 자가 없지만, 아귀는 스스로의 자업과(自業過) 때문에 마실  없는 것과 같이,

이 또한 그러한 것이니, 강은 보살을 비유한 것이고, 물은 재물과 지위을 비유한 것이며, 아귀는 유정을 비유한 것이다. 

그들 아귀가 강에 있는 깨끗한 물을 마실  없는 것과 같이, 유정도 보살의 재물과 지위를 수용할  없는 것이다.

 

見彼有情,若施財位,障生善法故者,謂復有餘補特伽羅,雖無業障,菩薩見彼,於相續中,當生善法,若施財位,受富樂故,障彼生善.作是思惟:寧彼貧賤順,生善法,勿彼富貴,障善法生.由此道理,雖得自在,不施財位.

‘재물과 지위를 베풀면 그들 유정은 선법을 일으키는 것을 장애하는 것을 볼 수 있 때문’이란,

다시 다른 보특가라가 있어서, 보살이 그를 보건대, 그에게는 업의 장애가 없어서 현생(現生)의 상속 중에 장차 선법을 일으킬  있으나, 만약 재물과 지위를 베푼다면, 부귀와 즐거움을 누리는 까닭에 그러한 선을 일으킬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그로 하여금 오히려 빈천에 수순하여 선법을 일으키게 하고, 그가 부귀하여져서 선법을 일으키지 않게 되는 것 막는 것이니,  

이러한 도리에 의거해서 자재를 얻었을지라도 재물과 지위를 베풀지 않는 것이다.

 

見彼有情,若乏財位,厭離現前故者,謂復有餘補特伽羅,菩薩見彼,由貧賤故,厭離現前,作是思惟:寧彼貧賤,厭離現前,隨順善法,勿彼富貴,不生厭離.由此道理,雖得自在,不施財位.

‘그들 유정은 재물과 지위가 궁핍하여지면 혐오하면서 떠나는 것을 보기 때문’이란,

다시 다른 보특가라가 있어서 보살이 보건대, 빈천한 까닭에 혐오하면서 떠나려는, 즉 생사를 혐오해서 떠나고자 하는 구도심(求道心)이 현전하나, 그로 하여금 오히려 혐오해서 떠나려는 것을 현전하게 하고 선법에 수순하게 하는 것이니, 그가 부귀해져서 혐오하여 떠나려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니, 

이러한 도리에 의거해서 자재를 얻었을지라도 재물과 지위를 베풀지 않는 것이다.

 

見彼有情,若施財位,卽爲積集不善法因故者,謂復有餘補特伽羅,菩薩見彼,乃至貧窮,常不積集諸不善法,作是思惟:寧彼貧窮,不造諸惡,勿彼富貴,集諸不善.由此道理,雖得自在,不施財位.

‘만약 재물과 지위를 베풀면 그들 유정은 곧 불선법의 원인을 적집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란,

다시 다른 보특가라가 있어서 보살이 그를 보건대, 나아가 질병이나 재해 등 갖가지 불행을 만나서 빈궁할지라도 항상 모든 불선법을 짓지 않으니, 이러한 것을 알고는 그로 하여금 오히려 빈궁하여서 모든 악을 짓지 않게 하고, 그가 부귀하여져서 모든 불선법을 짓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니,

이러한 도리에 의거해서 자재를 얻었을지라도 재물과 지위를 베풀지 않는 것이다.


見彼有情,若施財位,卽便作餘無量有情,損惱因故者,謂復有餘補特伽羅,菩薩見彼,得大財位,卽便苦惱無量有情,作是思惟:寧彼一身,獨受貧賤,勿彼富貴,損惱其餘無量有情.由此道理,雖得自在,不施財位.

‘만약 재물과 지위를 베풀면 그들 유정은 곧 나머지 수많은 유정들을 괴롭히는 원인을 짓는 것을 보기 때문’이란,

다시 다른 보특가라가 있어서 보살이 그를 보건대, 큰 재물과 지위를 얻으면 문득 수많은 유정을 괴롭힐 것이라고 알게 되어서, 그로 하여금 오히려 혼자 빈천하게 하고, 그가 부귀해져서 수많은 다른 유정들을 괴롭히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니,

이러한 도리에 의거해서 자재를 얻었을지라도 재물과 지위를 베풀지 않는 것이다. 

 

爲顯此義,復說伽他,謂見有情,有業障故`障生善故`厭現前故`積集惡故`損惱他故,不感菩薩施彼財位,是故現有匱乏有情.此略顯義,餘廣易了.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게송을 말하였으니, 이른바 유정에게 업의 장애가 있음을 보기 때문이고,

선을 일으키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이며, 혐오해서 떠나려는 것이 현전하기 때문이고,

악을 적집하기 때문이며, 남을 괴롭히기 때문에 보살은 그에게 재물과 지위를 베풀어야 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에 궁핍한 유정이 있는 것에 대하여 간략하게 뜻을 나타내었으나, 나머지 자세한 것은 알기 쉬울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9. 증상혜학분(增上慧學分) 1

 

▶論曰:此中加行無分別智,有三種:謂因緣`引發`數習生差別故.

▷논문; 이 중에서 가행(加行)의 무분별지(無分別智)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인연(因緣)ㆍ이끌어 냄의 인발(引發)ㆍ자주 익힘의 삭습(數習)으로부터 생겨나는 차이이기 때문이다.

ㅡ증상혜학의 중에서 다시 가지 무분별지의 차이를 말하는 것으로, 가행지와 근본지는 가지의 차이, 후득지는 다섯 가지의 차이가 있.


▶釋曰:此中加行無分別智,三種差別:謂或由種姓力`或由前生引發力`或由現在數習力,而得生故. 或由種姓力者, 種姓爲因,而得生故.前生引發力者,由前生中,數習爲因,而得生故.現在數習力者,由現在生,士用力爲因,而得生故.

해석한다; 이 중에서 가행무분별지(加行無分別智)  가지 차이는 

혹은 종성의 세력인 종성력(種姓力)에 의해서이고, 

혹은 전생의 이끌어 내는 세력인 전생인발력(前生引發力)에 의해서이며, 

혹은 현재의 자주 익히는 세력인 현재삭습력(現在數習力)에 의해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혹은 종성의 세력인 종성력(種姓力)에 의한다는 것은 종성을 원인으로 해서 생겨나기 때문이며,

전생의 이끌어 내는 세력인 전생인발력(前生引發力)이란 전생에서 자주 익힌 것을 원인으로 해서 생겨나기 때문이며,

현재의 자주 익히는 세력인 현재삭습력(現在數習力)이란 현재에서의 수행력인, 그 사람의 사용력(士用力)을 원인으로 해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論曰:根本無分別智,亦有三種:謂喜足`無顚倒`無戲論無分別差別故.

논문;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 근본지)에도 역시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기쁘게 만족함의 희족(喜足)ㆍ전도되지 않음의 무전도(無顚倒)ㆍ희론이 없음의 무희론(無戲論)의 무분별지의 차이가 있는 까닭이다.


▶釋曰:此中喜足無分別者,應知已到聞思究竟,由喜足故,不復分別故,名喜足無分別智.謂諸菩薩,住異生地,若得聞思覺慧究竟,便生喜足,作是念言:凡所聞思極,至於此.以是義故,說名喜足無分別智.

해석한다; 여기에서 ‘기쁘게 만족함의 희족무분별(喜足無分別)’이란, 듣고 사유함의 궁극에 이르러 기쁘게 만족하여서 다시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희족무분별지(喜足無分別智)라 이름하는 것이며,

모든 보살은 범부의 지위에 머물러서 만약 들어서 이루는 지혜인 문혜(聞慧)와 사유해서 이루는 사각혜(思覺慧)의 구경을 얻는다면,  만족한 기쁨을 일으켜서 생각으로 말하기를 ‘무릇 듣고 사유하는 바의 구경에 이르렀다’고 하나니, 이러한 뜻으로, 기쁘게 만족함의 희족무분별지(喜足無分別智)라 이름하는 것이며, 

 

復有餘義,應知世閒,亦有喜足無分別智,謂諸有情,至第一有見爲涅槃,便生喜足,作是念言:過此更無所應至處故.名喜足無分別智.

다시 별도의 의미가 있으니, 세간에도 역시 기쁘게 만족함의 희족무분별지가 있으니,

모든 유정은 제일유(第一有, 유정천으로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천)에 이르러서 열반이라 하면서, 문득 기쁘하고 만족한 희족(喜足)을 일으켜서 생각으로 말하기를 ‘이것을 지나면 마땅히 다시 이르러야  곳이 없으리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기쁘게 만족함의 희족무분별지(喜足無分別智)라 이름하는 것이다.

 

無顚倒無分別者,謂聲聞等.應知彼等通達眞如,得無常等四無倒智,無常等四顚倒分別,名無顚倒無分別智.

‘전도되지 않음의 무전도무분별(無顚倒無分別)’이란, 성문등을 말하는 것이니, 성문은 진여에 통달하여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등의  가지 전도됨이 없는 지혜를 얻어서, 상주의 상락아정(常樂我淨) 등의  가지 전도의 사전도(四顚倒)의 분별이 없기 때문에 전도되지 않은 무전도무분별지(無顚倒無分別智) 이름하는 것이다.

 

無戲論無分別者,謂諸菩薩.應知菩薩於一切法,乃至菩提,皆無戲論.應知此智所證眞如,過名言路`超世智境,由是名言不能宣說,諸世閒智,不能了知.

‘희론이 없는 무희론무분별(無戲論無分別)’이란, 모든 보살을 말하는 것으로, 보살은 일체법과 나아가 보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희론이 없으니, 이 지혜가 증득한 진여는 언어로써의 표현을 넘어서고 세간 지혜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이므로 언어로 널리 말할  없고, 모든 세간의 지혜로   없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後得無分別智,有五種:謂通達`隨念`安立`和合`如意思擇差別故.

해석한다; 후득무분별지(後得無分別智, 후득지)에도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통달(通達)ㆍ생각에 따르는 수념(隨念)ㆍ안립(安立)ㆍ화합(和合)ㆍ뜻대로의 여의(如意)의 사유해서 간택함인 사택(思擇)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釋曰:此後得智,五種差別,一通達思擇`二隨念思擇`三安立思擇`四和合思擇`五如意思擇.

해석한다; 이 후득지의 다섯 가지의 차이란,

첫째는 통달의 사유해서 간택함의 통달사택(通達思擇)이고, 

둘째는 생각에 따름의 사유해서 간택하는 수념사택(隨念思擇)이며, 

셋째는 안립의 사유해서 간택함의 안립사택(安立思擇)이고, 

넷째는 화합의 사유해서 간택함의 화합사택(和合思擇)이며, 

다섯째는 뜻대로 사유해서 간택함의 여의사택(如意思擇)이다.

 

此中通達思擇者,謂通達時,如是思擇:我已通達.此中思擇,意取覺察.

여기에서 ‘통달의 사유해서 간택함의 통달사택(通達思擇)’이란 통달할  ‘나는 이미 통달했다’라고 이렇게 생각해서 간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사유해서 간택함의 사택(思擇)의 뜻은 관찰하여 깨치는, 각찰(覺察)의 뜻이다. 

 

隨念思擇者,謂從此出,隨憶念言:我已通達無分別性.

‘생각을 따라 사유해서 간택함의 수념사택(隨念思擇)’이란, 이 선정에서 나와서 지니는 생각을 따라 ‘나는 무분별성에 통달했다’고 말하는 것이며,

 

安立思擇者,謂爲他說此通達事.

和合思擇者,謂摠緣智,觀一切法,皆同一相,由此智故,進趣轉依,或轉依已,重起此智.

‘안립의 사유해서 간택함의 안립사택(安立思擇)’이란, 남을 위해서  통달사(通達事)를 말하는 것이며,

‘화합의 사유해서 간택함의 화합사택(和合思擇)’이란 총체적으로 반연하는 지혜로써 일체법은  동일한 동일상(同一相)이라고 관찰하고,  지혜에 의거함으로써 나아가 전의(轉依)를 이루는 것이니, 전의하고 나서 혹은 거듭  지혜를 일으키는 것이다. 

 

如意思擇者,謂隨所思,一切如意,由此思擇,能變地等.令成金等爲得如意,起此思擇,是故說名如意思擇,如有說言:由思擇故,便得如意.

‘뜻대로 사유해서 간택함함의 여의사택(如意思擇)’이란, 생각하는 바를 따라 모두 뜻대로 되는 것이니, 이 사유해서 간택함에 의하여 능히  등을 변화시켜  등을 만드는 것이다. 

뜻대로 되는 여의(如意)를 얻기 위해서  사유해서 간택함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여의사택(如意思擇)이라 이름하며, 사유해서 간택함에 의해서 문득 뜻대로 되는 여의(如意)를 얻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雖已成立無分別智,猶未宣說成立因緣,是故復說多頌顯示.

비록 이렇게 무분별지를 성립했지만, 아직 성립의 인연을 널리 말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많은 게송으로 인연을 나타내었다.


▶論曰:復有多頌,成立如是無分別智.

논문; 다시 많은 게송으로써 이러한 무분별지를 성립하나니; 


“鬼傍生人天, 各隨其所應, 等事心異故, 許義非眞實.

아귀ㆍ축생ㆍ인간ㆍ하늘 세계가 각각  상응하는 바를 따라,

똑같은 현상의 등사(等事)에 대한 마음이 다른 까닭

대상(義)은 진실이 아닌 의비진실(義非眞實)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라.


於過去事等, 夢像二影中, 雖所緣非實, 而境相成就.

과거의  등, 꿈속의 영상의 두 가지 영상 중에서

소연(所緣, 인식대상)은 진실이 아니지만 경계상인 경상(境相)을 성취하나니, 

 

若義義性成, 無無分別智, 此若無佛果, 證得不應理.

만약 대상(義)으로서 대상의 성품인 의성(義性)을 성취한다면, 무분별지는 없는 것이라.

만약 이것이 없는 것이라면, 불과를 증득함이 도리에 맞지 않을 것이라네.


得自在菩薩, 由勝解力故, 如欲地等成, 得定者亦爾.

자재를 얻은 보살은 뛰어난 이해의 해석력(勝解力) 의거해서

하고자 하는 대로  등을 이루나니, 선정을 얻은  역시도 그러하다네.


成就簡擇者, 有智得定者, 思惟一切法, 如義皆顯現.

간택(簡擇)을 성취한 이와 지혜가 있고 선정을 얻은 이는

일체법을 사유하여 뜻 그대로  현현한다네. 


無分別智行, 諸義皆不現, 當知無有義, 由此亦無識.”

무분별지가 작용한다면 모든 대상(義)은 다 나타나지 않나니,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로 인하여 역시 식(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리.

 

釋曰:鬼`傍生`人`天,各隨其所應等者,謂於傍生,見有水處,餓鬼見是陸地高原;於人所見有糞穢處,猪等傍生見爲淨妙,可居室宅;於人所見淨妙飮食,諸天見爲臭穢不淨.如是衆生於等事中,心見異故,應知境義非眞實有.

▷해석한다; ‘아귀ㆍ축생ㆍ인간ㆍ하늘 세계가 각각 그 상응하는 바를 따라’ 등이란,

축생이 물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을 아귀는 육지의 높은 언덕으로 보며,

인간이 더러운 곳으로 보는 것을 돼지 등 축생은 깨끗하고 승묘한 곳으로서 살 만한 곳으로 보며,

인간이 깨끗하고 승묘한 음식으로 보는 것을 여러 하늘에서는 냄새나고 더러운 것으로 보는 것과 같이,

중생은 똑같은 현상인 등사(等事)에 대하여 그 마음을 따라 다르게 보기 때문에, 대상(義)은 진실된 존재가 아닌 의비진실(義非眞實)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若義實無,識應無境.有無境識,如緣去來`如緣夢像`如緣鏡等,及三摩地所行影像,爲顯此義,說一伽他.謂於過去等,此中前半,由後半釋,如其次第,

만약 대상(義)이 실재가 아니라면 식(識)도 마땅히 대상이 없어야 하는 것인가?

대상이 없는 식이 있으니, 과거와 미래를 반연하는 것, 꿈의 영상을 반연하는 것, 거울 등과 삼마지에서 행하여지는 영상을 반연하는 것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게송으로 말하였으니, 이른바 ‘과거의 일 등과’ 등이다.

여기에서 전반부는 후반부에 의해서 해석되는 것이니, 마땅히 그 순서대로 그 상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應知其相.由無別實境,是故說言,有無境識.由自變爲境,是故說言, 境相成就,卽是自緣心影像義.

별도의 실재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대상이 없는 식이 있다는 무경식(無境識)’이라 말하는 것이니, 스스로 변화시킨 것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경계의 상인 경상(境相)을 성취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곧 스스로의 마음의 영상을 반연한다는 뜻이다.

 

謂緣去來,夢像二影,次第安立境相成就.若義義性成無無分別智者,若義實有義之自性, 是則應無無分別智. 若謂雖無無分別智,當有何失?此若無佛果證得不應理者,若汝撥無無分別智,是則不應證得佛果,故應決定許有如是無分別智.

과거와 미래ㆍ꿈속의 영상, 두 영상을 반연한다는 것은 순서대로 경계의 대상인 경상(境相)을 성취하는 것을 안립하는 것이며, 
‘만약 대상(義)으로서 대상의 성품인 의성(義性)을 성취한다면 무분별지는 없는 것이다’는 것이란,

만약 대상(義)이 실제로 대상(義)의 자성이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무분별지가 없어야 하는 것이며,

만약 무분별지가 없다고 말한다면 어떠한 과실이 있게 되겠는가!

‘만약 이것이 없다면 불과를 증득함은 도리에 맞지 않네’란,

만약 그대가 무분별지를 부정한다면 곧 마땅히 불과를 증득할 수 없어야 하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이 무분별지를 인정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得自在菩薩者,謂已證得自在菩薩.由勝解力故者,由願樂力.如欲地等成者,謂令地等,成金等相,隨欲皆成.得定者亦爾者,謂餘聲聞等.成就簡擇者者,謂已成滿毘鉢舍那.言有智者,謂諸菩薩.得定者者,得三摩地.思惟一切法,如義皆顯現者,謂菩薩等定慧成滿,攝心於內,如如思惟經等法義,如是如是,皆得顯現.若念佛時,隨所思念彼彼法中,佛義顯現,思色受等,應知亦爾.

‘자재를 얻은 보살’이란, 이미 자재를 증득한 보살을 말하는 것이며,

‘뛰어난 이해의 의 해석력(勝解力)에 의거하기 때문’이란, 원락(願樂)의 힘에 의거하는 것이며,

‘하고자 하는 대로 땅 등을 이룬다’는 것은, 이른바 땅 등을 변화시켜 금 등의 모습을 만드는 것과 같이, 하고자 하는 대로 모두 성취하는 것이며,

‘선정을 얻은 이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나머지 성문등을 말하는 것이며, 

‘간택을 성취한 이’는 이미 비발사나(毘鉢舍那, vipassana)를 원만히 성취한 것을 말하며,

‘지혜가 있는 이’란 모든 보살을 말하고, ‘선정을 얻은 이’란 삼마지를 얻는 이를 말하는 것이며,

‘일체법을 사유하여 의미 그대로 다 현현한다’는 것이란, 보살 등의 선정과 지혜가 원만히 성취되어 마음을 내면에 포섭하고, 경전 등의 법의(法義)를 사유하는 그대로 다 현현함을 얻는 것으로,

만약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그 생각하는 바를 따라, 그들의 법 안에서 부처님의 불의(佛義)를 현현하며, 물질(色)ㆍ감수작용(受) 등을 사유함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無分別智行,諸義皆不現者,謂無分別智,正現行時,一切境義,皆不顯現.

當知無有義者,謂由前說種種道理,當知境義實無所有.欲顯其識如境亦無,故言由此亦無識.

所識境義,旣無所有,由此應知能識亦無.此義如前所知相中,分明已顯.

‘무분별지가 작용한다면, 모든 대상(義)은 다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란, 무분별지가 바르게 작용할 때에는 모든 대상인 일체의 경의(境義)가 다 현현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며,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종류의 도리에 의거해서 대상(義)의 의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 식(識)도 대상(境)과 같이 역시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로 인하여 역시 식(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식별되는 대상이 이미 존재하지 않고, 이에 의거해서 식(識, 식별작용)도 역시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하나니, 이러한 뜻은 앞의 알아야 할 바의 소지상(所知相) 중에서 분명히 밝힌 바와 같은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9. 증상혜학분(增上慧學分) ① 3

 

▶論曰: 논문; 
“如人正閉目, 是無分別智, 卽彼復開目, 後得智亦爾.

사람이 바르게 눈을 감는 것과 같은 것이 무분별지이니, 

그러한 즉시 그가 다시 눈을 뜬다면, 후득지 역시 그러한 것이라네.

 

應知如虛空, 是無分別智, 於中現色像, 後得智亦爾.”

마땅히 알지니 허공과 같은 것이 무분별지라는 것을!

 안에서 물질의 모습인 색상(色像)을 나타내나니,

후득지 역시도 그러한 것이라네.


▶釋曰:初頌顯示二智差別,其相可知.如虛空者,譬如虛空,周遍無染,非能分別` 非所分別,如是根本無分別智,應知亦爾.遍一切法,一味空性,故名周遍.一切諸法,所不能染,故名無染.自無分別,是故說名非能分別.亦不爲他分別行相,是故說名非所分別.如是應知,無分別智,譬如虛空.

해석한다; 첫 번째의 게송은  지혜의 차이를 나타낸 것으로, 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공과 같다’는 것이란, 비유하자면 허공이 두루하고 잡염이 없으며, 능히 분별하는 것이 아니고, 분별의 대상이 아닌 것과 같이, 근본무분별지(근본지)도 역시 그러하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며,

일체법에 두루하는 일미공성(一味空性)이기 때문에 두루하다고 말하며,

일체법이 오염시킬  없기 때문에 잡염이 없는 무염(無染)이라 하며,

스스로 분별함이 없기 때문에 능히 분별하는 것이 아닌 비능분별(非能分別)이라 하는 것이니,

역시 다른 것의 분별의 행상(行相, 인식작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분별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니,

무분별지는 이 비유와 같이 허공과 같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現色像'者,譬如空中,所現色像,是可分別,如是後得無分別智,應知亦爾,是所分別,亦能分別.若以如是無分別智,修成佛果,旣離功用作意分別,云何能成利益安樂諸有情事?

‘물질의 모습인 색상(色像)을 나타낸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허공 가운데 나타나는 색상(色像)과 같이 분별할  있다는 것이니, 후득무분별지(후득지)도 역시 그러한 것이라고 알아야 하며,

이것은 분별의 대상인 소분별(所分別)이면서도 역시 능히 분별하는 능분별(能分別)인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무분별지로써 수행하여 불과를 성취한다면, 이미 의식적인 노력이 있는 작의의 분별을 여의는 것이다.

어떻게 능히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사업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인가?

ㅡ무분별지혜에 의거해서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사(無功用事) 대하여 말한다.


▶論曰:
“如末尼天樂, 無思成自事, 種種佛事成, 常離思亦爾.”

말니(末尼, 여의주) 구슬과 하늘의 음악과 같이, 사량하지 않고 스스로의 자사(自事)를 성취하네.

갖가지 불사를 성취함에, 항상 사량을 여의는  역시도 그러하다네.


▶釋曰:如離分別,所作事成.於此頌中,末尼天樂譬喩,顯示如如意珠,雖無分別,而能成辦隨諸有情意所樂事.

해석한다; 분별을 여의고서 해야  바의 소작사(所作事)를 성취하는 것을,  게송에서 말니(末尼, 여의주) 하늘의 음악의 비유로 나타내었다. 

말니(末尼, 여의주)는 분별이 없어도 능히 모든 유정의 뜻을 따라 즐거워하는 일을 성취함과 같으며,

 

말니(末尼, 여의주, 마니摩尼, 末尼)는 범어 maṇi의 음역으로서 보주(寶珠)로 번역되며, 마니보주로 붙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보배구슬의 총칭인데, 여기서는 특히 여의보주(如意寶珠)를 가리키는 것이다.

 

又如天樂無擊奏者,隨生彼處,有情意樂,出種種聲.如是應知,諸佛菩薩,無分別智,雖離分別,而能成辦種種事業.

또한 하늘의 음악인 천락(天樂, 도리천의 선법성 앞에 있는 큰 북)은 두드리는 자가 없어도, 그곳에 태어나는 유정의 의락(意樂)을 따라 갖가지 소리를 내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모든 불보살의 무분별지는 분별을 여의면서도 능히 갖가지 사업을 성취한다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次當顯此無分別智,所有甚深,此智爲緣依他起性,分別事轉爲緣餘境.若爾何失?若緣分別,無分別性,應不得成.若緣餘境,餘境定無,云何得緣?

다음으로는, 이 무분별지가 갖는 매우 심오함을 마땅히 나타내어야 하나니,

 지혜는 의타기성을 반연하는 것인가? 

분별사(分別事)를 전전하는 것이, 나머지 다른 대상(境)을 반연하는 것인가? 

만약 그러하다면 어떠한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인가? 

만약 분별을 반연한다면 무분별의 성품은 마땅히 이루어질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나머지 다른 대상(境)을 반연한다면, 다른 대상(境)은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거늘, 어떻게 반연할  있다는 것인가?

ㅡ증상혜학(增上慧學) 중에서 끝으로 무분별지의 매우 심오함에 관하여 설명한 것이다.

 

▶論曰: 논문; 
“非於此非餘, 非智而是智, 與境無有異, 智成無分別.”

이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지혜가 아니면서도 지혜이니

대상(境)과 다름이 있지 않다면, 그 지혜는 무분별지를 이룬다네.


▶釋曰:非於此非餘者,此智不緣分別爲境,無分別故.不緣餘境,卽緣依他,諸分別法, 眞如法性,爲境界故,

法與法性,若一`若異,不可說故.此說根本無分別智,不緣分別,亦不緣餘.

▷해석한다; ‘이것이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지혜는 분별을 반연하여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기 때문이며,  

다른 대상의 여경(餘境)을 반연하지 않고 의타(依他)를 반연하는 것이니, 모든 분별법은 진여 법성을 경계로 삼기 때문이며,

법과 법성은 혹은 하나의 일(一)이라고도, 혹은 다른 이(異)라고도 말할  없는 까닭에,  근본무분별지(근본지)는 분별을 반연하지 않고 역시 다른 것을 반연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又此根本無分別智,爲智爲非?若爾何失?若是智者,云何是智,而是無分別?若非智者,云何說爲無分別智?答此問言:非智而是智.此顯根本無分別智,非定是智,以於加行分別智中,此不生故.亦非非智,以從加行分別智,因而得生故.

또한  근본무분별지는 지혜인가? 지혜가 아닌 것인가? 

만약 그러하다면 어떠한 과실이 있게 되며? 

만약 지혜라면 어떻게 지혜이면서도 분별이 없다는 것인가? 

만약 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무분별지라 말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여 ‘지혜가 아니면서도 지혜이니’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근본무분별지(근본지)가 반드시 지혜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가행분별지 중에서는 이것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지혜가 아닌 것도 아니니, 가행분별지혜를 원인(因)으로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復有別義,非於此非餘非智而是智者,以非於此分別轉故,說名非智.以非於餘,卽於分別法性轉故,而亦是智.前後二句,互相解釋.

또한 별도의 별의(別義) 있으니, ‘이것이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네. 지혜가 아니면서도 지혜이라네’는  분별에서 전전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가 아니고 말하는 것이며,

‘다른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분별의 법성에서 있어서 전전하기 때문에 역시 지혜라 말하는 것이니,

앞뒤의  문구가 서로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與境無有異智,成無分別者,非如加行無分別智,有其所取`能取性轉,名無分別. 與所取境,無差別轉,平等平等,名無分別. 此智不住所取`能取二種性中,如薄伽梵餘契經中說:一切法皆無分別.爲欲顯示無分別義,復說頌言:

‘대상과 다름이 있지 않으면 지혜는 무분별을 이룬다’는 것이란, 가행무분별지의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인식주체인 능취(能取)의 성품이 전전하는 없음을 무분별이라 하는 것이니,

인식대상의 경계인 소취경(所取境)과 차별 없이 전전하여 평등하고 평등한 것을 무분별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지혜는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과 인식주체인 능취성(能取性)의  가지 성품 안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으로,  

박가범(부처님)께서 다른 계경(경전)에서 ‘일체법은 모두 분별이 없다’고 말씀한 바와 같은 것이다.

무분별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으니, 

 

▶論曰:논문; 
“應知一切法, 本性無分別, 所分別無故, 無分別智無.”

마땅히 알지니, 제법의 본성은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니, 

분별되는 소분별(所分別) 없기 때문에 무분별지도 없는 것이라네.


▶釋曰:應知一切法本性無分別者,是一切法, 本來自性, 無分別義. 何以故?所分別無故. 此卽顯示,所分別事,無所有故,諸法本性,無有分別.

 해석한다; ‘마땅히 알지니, 일체법의 본성은 무분별이라네’란, 이 일체법의 본래 자성에 분별의 뜻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분별되는 소분별(所分別)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분별되는 현상인 소분별(所分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제법의 본성은 분별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若所分別,無所有故,諸法本性, 無分別者, 何故本來一切有情,不得解脫?答此問言:無分別智無.此顯彼無無分別智,雖一切法,本來自性,無有分別,而不解脫.若於諸法,無分別理,眞證智生,現見諸法,無分別性,卽得解脫,此未生故,未得解脫.眞證智者,應知卽是無分別智,今當顯此三智差別.

만약 분별되는 소분별(所分別)이 존재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제법의 본성에 분별이 없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본래의 일체 유정이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여서 ‘무분별지혜도 없다’고 말한 것이니, 이 문구로써 해탈을 얻지 못함을 나타낸 것이다.

무분별지가 없다면 일체법은 본래 자성에 분별이 없을지라도 해탈하지 못하는 것이니,

만약 제법의 분별 없는 도리인 무분별리(無分別理)에 대해서 진실로 증득하는 지혜가 생겨나서 제법의 무분별성(無分別性)을 보게 된다면 곧 해탈을 얻는 것이나, 이것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까닭에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진실로 증득하는 지혜의 진증지(眞證智)가 곧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러므로 지금 세 가지 지혜의 차이를 나타낸 것이다.


攝大乘論釋卷第八 終 섭대승론석 제 8권을 마침.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9. 증상혜학분(增上慧學分) ① 2

 

▶論曰 : 논문;
“諸菩薩究竟, 得淸淨三身, 是無分別智, 得最上自在.”

모든 보살은 궁극적으로 청정한 3신(三身)을 증득하나니, 

이것이 무분별지로서, 최상의 자재를 얻는 것이라네.


▶釋曰:得淸淨三身者,是得如來淨三身義.言淸淨者,謂初地中,唯得三身,至第十地,乃善淸淨.得最上自在者,無分別智,非唯證得淸淨三身以爲究竟,而復獲得十種自在,此如後說,應知其相.

해석한다; ‘청정한 3신을 증득하나니’라는 것은 여래의 청정한 3신(법신, 보신, 응신)을 증득한다는 뜻이며,

‘청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초지(初地) 중에는 오직 3신을 증득할 뿐, 제10지에 이르러서야 매우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며,

‘최상의 자재를 얻는다’는 것은 무분별지는 오직 청정한 3신을 증득하는 것만을 궁극으로 삼지 않음을 말하는 것으로, 다시  가지의 십종자재(十種自在)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할 것이지만, 마땅히  상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無分別智,有何勝利?此中三種無分別智:一者加行無分別智`二者根本無分別智`三者後得無分別智.此中加行無分別智,謂
諸菩薩,初從他聞無分別理,次雖未能自見此理,而生勝解.次此勝解,爲所依止,方便推尋無分別理,是名加行無分別智.由此能生無分別智,是故亦得無分別名.如是加行無分別智,無染勝利,其譬云何?

무분별지에 어떠한 뛰어난 이익이 있는가?  중,  가지 무분별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행(加行)의 무분별지이고, 

둘째는 근본(根本)의 무분별지이며, 

셋째는 후득(後得)의 무분별지이다. 

 중, 가행의 무분별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니, 모든 보살이 최초로 남으로부터 무분별의 도리를 듣고 나서 아직 스스는 이러한 도리를  수는 없지만, 뛰어난 승해(勝解)를 일으키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뛰어난해를 의지처로 삼아서 방편으로 무분별의 도리를 사색하는 것이니, 이것을 가행(加行)의 무분별지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에 의거해서 능히 무분별지를 일으키기 때문에 역시 무분별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며, 

이와 같은 가행무분별지(加行無分別智) 잡염이 없는 뛰어난 무염승리(無染勝利)의 비유는 어떠한 것인가?


▶論曰:
▷논문; 
“如虛空無染, 是無分別智, 種種極重惡, 由唯信勝解.”

허공과 같이 잡염이 없는 무염(無染)이니,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지극히 무거운 갖가지의 중악(重惡)에서

오직 믿음의 뛰어난 이해의 신승해(信勝解)에 의거하나니,

가행도(加行道)이기 때문이라네.

ㅡ이 게송은 가행의 무분별지가 악도(惡道) 업을 능히 다스리는 것을  공력(功力)으로 하는 것 나타낸 것이다.


▶釋曰:爲欲顯示,彼不能染故,說種種極重惡言.爲欲顯示,不能染因故,說由唯信勝解.言由唯信樂無分別理,而起勝解,故能對治種種惡趣,此卽顯示諸惡不染.此中根本無分別智,無染勝利,其譬云何?

해석한다; 그것이 오염시킬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지극히 무거운 갖가지 중악(重惡)’이라 말하는 것이며,

오염시킬  없는 원인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직 믿고 뛰어난 이해 의 신승해(信勝解) 의거한다’고 말한 것이니,

오직 무분별의 도리를 기꺼이 믿는 것에 의거해서 뛰어난 승해(勝解)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갖가지 살기 괴로운 세계의 종종악취(種種惡趣)를 능히 다스린다는 것은  모든 악이 오염시킬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중에서 근본무분별지(근본지)의 잡염 없는 뛰어난 이익의 무염승리(無染勝利)의 비유는 어떠한 것인가?

ㅡ이어서 근본지(根本智) 뛰어난 이익의 승해(勝解)를 말한다.


▶論曰:
논문; 
“如虛空無染, 是無分別智, 解脫一切障, 得成辦相應.”

허공과 같이 잡염이 없는 무염(無染)이니, 무분별지로서 모든 장애를 해탈하여

증득과 함께 힘써 성취함에 상응한다네.

ㅡ이 게송은 근본의 무분별지가 모든 장애를 다스리는 공덕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釋曰:從何解脫?謂解脫一切障.由何解脫?謂成辦相應,如是解脫.由於諸地,唯得相應,成辦相應,以爲因故,此卽顯示,無分別智,能治諸障.此中後得無分別智,無染勝利,其譬云何?

해석한다; 무엇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인가? 이른바 모든 장애로부터 해탈하는 것이며,

무엇에 의거해서 해탈하는 것인가? 이른바 성취와 상응함에 의해서이니,

이와 같은 해탈은 모든 지위에서 오직 증득과 상응하고 성취와 상응함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인 것으로, 이것은  무분별지가 능히 모든 장애를 다스린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중에서 후득무분별지(후득지)의 잡염 없는 뛰어난 이익의 무염승리(無染勝利)에 대한 비유는 어떠한가?

 

▶論曰: ▷논문; 
“如虛空無染, 是無分別智, 常行於世閒, 非世法所染.”

허공과 같이 잡염이 없는 무염(無染)이니, 항상 세간에서 무분별지로서 행하여도

세간법에 오염되지 않는다네.


▶釋曰:由此智力,觀諸有情,諸利樂事故,思往彼世閒受生.旣受生已,一切世法,所不能染.世法有八:一利`二衰`三譽`四毀`五稱`六譏`七苦`八樂.從無分別智所生故,此智亦得無分別名,今當顯此三智差別.
譏 나무랄 기, 비웃을 기

해석한다; 이 지혜의 지력(智力) 의거해서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사업들을 관찰하기 때문이니,

 세간에 가서 생을 받으리라 생각하며, 이미 생을 받았을지라도, 모든 세간법이 오염시킬  없는 것이다. 

세간법이란 여덟 가지의 세법팔유(世法有八, 팔풍 八風)가 있으니,

첫째는 이익(利)이고, 둘째는 손실의 쇠(衰)이며, 셋째는 뒤에서 칭찬하는 예(譽)이고, 

넷째는 뒤에서 험담하는 훼(毁)이며, 다섯째는 면전에서 칭찬하는 칭(稱)이고, 

여섯째는 면전에서 비방하는 기(譏)이며, 일곱째는 고통(苦)이고, 여덟째는 즐거움의 락(樂)이다.

무분별지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후득지(後得智) 역시 무분별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니, 

이제 마땅히   가지 지혜의 차이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ㅡ이제는  가지 무분별지의 차이를 설명한다.

 

세법팔유(世法有八, 팔풍 八風), 이들 여덟 가지 팔법(八法)은 사람들을 선동하므로 8풍(風)이라고도 한다.

 

▶論曰: 논문; 
“如啞求受義, 如啞正受義, 如非啞受義, 三智譬如是.

벙어리가 대상(義)을 수용하려고 하는 것 같고,

벙어리가 바르게 대상(義)을 수용하는 것과 같으며,

벙어리가 아닌 사람이 대상(義)을 수용하는 것과도 같으니,

 가지 지혜인 삼지(三智)의 비유도 그러하다네.


如愚求受義, 如愚正受義, 如非愚受義, 三智譬如是.

어리석은 사람이 대상(義)을 수용하려고 하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사람이 바르게 대상(義)을 수용하는 것과 같으며,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대상(義)을 수용하는 것과 같으니,

 가지 지혜인 삼지(三智)의 비유도 그러하다네.


如五求受義, 如五正受義, 如末那受義, 三智譬如是.

5식(識)이 대상(義)을 수용하려고 하는 것 같고,

5식이 바르게 대상(義)을 수용하는 것과 같으며,

말나(末那, 의식, manovijña)이 대상(義)을 수용하는 것과 같으니,

 가지 지혜인 삼지(三智)의 비유도 그러하다네.


如未解於論, 求論受法義, 次第譬三智, 應知加行等.”

아직 논의를 이해하지 않은 미해론(未解論)과

논의를 구하는 구론(求論)과 법의(法義)를 수용하는 것과 같으니, 

순서대로  가지 지혜인 삼지(三智)를 비유하나니

가행 등의 지혜라하고 마땅히 알아야 하리라.


▶釋曰:此中三智,如其譬喩,應知差別.譬如啞人求受境義,不能言說,如是加行無分別智,應知亦爾. 譬如啞人正受境義,寂無言說,如是根本無分別智,應知亦爾.如非啞人受境義已,如其所受,而起言說,如是後得無分別智,應知亦爾.此中意取能作文字,名爲言說,

 해석한다; 여기에서, 세 가지 지혜인 삼지(三智)는 그 비유와 같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벙어리가 대상(義)을 수용하려고 할지라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가행(加行)의 무분별지 역시도 그러하다고 알하야 하며,

비유하면 벙어리가 바르게 대상(義)을 수용할지라도 적막(寂)해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근본(根本)의 무분별지도 역시 그러한 것이라고 알아야 하며,

벙어리가 아닌 사람이 대상(義)을 수용하는 바와 같이, 그 수용한 대로 이미 말을 하는 것이니, 후득(後得)의 무분별지도 역시 그러하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의취(意取)는 능히 짓는, 능작(能作)의 문자를 취하여 언설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如愚頌中,無所了別說,名爲愚.如前啞喩,應正安立三智差別.如五頌中,五謂眼等五無分別,應知此中求受`正受俱無分別,

어리석은 사람은 게송과 같이 요별하는 바가 없으므로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이니,

앞의 벙어리 비유와 같이, 마땅히 세 가지 지혜인 삼지(三智)의 차이를 바르게 안립해야 하는 것이다.

5식(五識)의 게송에서의 다섯의 오(五)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의 다섯 가지 무분별을 말하는 것이니,

여기서 수용하려고 하는 것과 바르게 수용하는 것 모두가 무분별(無分別)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加行`根本於眞如義,差別亦爾.

진여의 대상에 대한 가행무분별지(加行無分別智)와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 근본지)의 차이도 역시 그러하며,

가행무분별지는 진여를 수용함을 구하는 구수(求受)와 같고, 근본무분별지는 바르게 수용하는 정수(正受)이기 때문이다.

 

如意受義,亦能分別,如是後得,亦能受義,亦能分別.如是三智,如前啞喩安立差別.

의(意, 말나末那, 의식, manovijña)가 대상(義)을 수용하고 또한 능히 분별하는 것과 같이, 

후득무분별지(後得無分別智, 후득지)도 역시 능히 대상을 수용하고 역시 능히 분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 가지 지혜인 삼지(三智)는 앞의 벙어리의 비유와 같은 차이를 안립하였다.

 

於論頌中,如未解論,於論求解,如是加行無分別智,應知亦爾.

如溫習論, 但受於法,如是根本無分別智,應知亦爾.此中法者,意取文字,

논(論)의 게송에서 아직 논의를 이해하지 못하여서, 논의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과 같이, 가행무분별지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하며,

논의를 자주 익혀서 다만 법을 수용하는 것과 같이, 근본무분별지(근본지)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

여기서 ‘법(法)’의 의취는 문자의 의미이다.

ㅡ여기서 법은 논의의 능전(能詮) 문자를 의미하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법이 아닌 것을 밝혔다.

 

如解論者,於法於義,皆能領受,如是後得無分別智,應知亦爾.次第之言,

顯示三智似於法義,領受差別.次當顯示根本後得,譬喩差別.

논의를 이해하는 이는 법(法)에 대해서도, 의미(義)에 대해서도 모두 능히 받아들이나니,

후득무분별지도 역시 그러하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순서의 차제(次第)’라고 말한 것은, 세 가지 지혜의 삼지(三智)가 법의(法義)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차이가 비슷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으로는 근본무분별지와 후득무분별지의 비유의 차이를 나타낼 것이다.

ㅡ다음에서는 근본지와 후득지의 차이를 비유로 설명한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9. 증상혜학분(增上慧學分) ① 2

 

▶論曰: 논문;
“諸菩薩行相, 復於所緣中, 是無分別智, 彼所知無相.”

모든 보살의 행상(行相, 인식작용)은 다시 소연(所緣, 인식대상)에서이니, 

무분별지로서  알아야  바의 소지(所知)는 무상(無相)이라네.

 

▶釋曰:菩薩行相,於所緣中,所現無相,謂卽此智,於眞如中,平等平等,生起無異無相之相,以爲行相.

해석한다; 보살의 행상(行相, 인식작용) 소연(所緣, 인식대상) 가운데 나타난 진여의 무상(無相)이니,

  지혜는 진여 가운데서 평등한 것이며, 평등하게 생겨나며 다르지 않은 무이(無異)이고 무상(無相)의 상으로써 행상(行相, 인식작용) 삼는 것이다.

행상(行相, 인식작용)인 진여와 인식주체인 지혜가 평등하게 생기하여서, 진여와 지혜가 하나의 체(體)로서 다르지 않고, 두 가지의 개별적인 상이 없는 것을 평등한 등상이라 한다.

 

如眼取色,見靑等相,非此靑等,與色有異.此亦如是,智與眞如,無異行相.卽於此中,爲釋疑難,復說二頌.

눈이 색(色)을 취하여 푸른  등의 상 보는 것과 같으며,  푸른  등은 색과 다르지 않은 것과 같이, 지혜와 진여가 다른 행상(行相, 인식작용) 없다는 것이다.

 중에서 의심과 비판을 풀기 위해서 다음의  게송을 말하였다. 

 

▶論曰: 논문; 
“相應自性義, 所分別非餘, 字展轉相應, 是謂相應義.

상응(相應)은 자성의이고, 분별의 대상은 다른 것이 아니니, 

글자가 전전하여 상응하니, 이를 상응의 뜻이 한다네.


非離彼能詮, 智於所詮轉, 非詮不同故, 一切不可言.” 

 능전(能詮)을 떠난 지혜는 소전(所詮)에 대해서 전전하지 않으니, 

나타내는 전(詮)이 아니고, 같지 않은 부동(不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말로 표현할  없다네.

 

▶釋曰:若一切法皆不可言,復以何等,爲所分別? 爲釋此故, 說如是言, '相應自性義,所分別非餘.'

謂卽相應, 爲自性義, 是所分別, 非離於此, 故言非餘. 此云何成? 爲重成立,復說是言.

해석한다; 만약 일체법 모두가 말로 표현할  없는 것이라면, 다시 무엇으로써 분별하는 것인가? 이러함을 해석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상응은 자성의 이고, 분별의 대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란, 상응을 자성의 뜻으 삼고 분별의 대상은 이 자성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어떻게 성립해야 하는가? 거듭 성립시키기 위해서 다시 이렇게 말한 것이며,

 

字展轉相應,是謂相應義.謂別別字相續宣傳,以成其義,是相應義.如言斫芻.二字不斷,說成眼義.是相應義,爲所分別.

‘글자가 전전하여 상응하니, 이것을 상응의 뜻이 말한다’는 것은, 낱낱의 글자가 상속하고 널리 전전함으로써  의미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이 상응의 의미인 것이다. 

눈(眼)의 범어 cakṣu의 음사(音寫)를 작추(斫芻)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두 글자가 끊어지지 않으면 눈(眼)의 뜻을 이루는 것이니, 곧 cak와 ṣu의 두 글자가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한 단어를 이루기 때문에 cakṣu(眼)라는 단어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상응의 뜻을 분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又一切法,皆不可言,因何成立?故復說言,非離彼能詮智於所詮轉.由若不了能詮之名,於所詮義,覺知不起,故一切法,皆不可言.若言要待能詮之名,於所詮義,有覺知起.爲遮此故,復說是言,非詮不同故,以能詮名與所詮義,互不相稱,各異相故,能詮`所詮,皆不可說.由此因故,說一切法,皆不可言.無分別智,何所任持?

또한 ‘일체법은  말로 표현할  없다’는 것은 무엇에 의거해서 성립하는 것인가? 

따라서 다시 말하기를 ‘그 능전(能詮)을 떠난 지혜(所詮)는 소전에 대해서 전전하지 않네’라고 하였으니,

만약 능전인 명칭을 알지 못한다면 소전인 대해서 지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일체법은  말로 표현할  없게 되는 것이며,

만약 반드시 능전인 명칭을 기다려서 소전인 대한 지각이 일어난다고 말한다면, 이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같지 않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이다. 

능전인 명칭과 소전인 뜻은 서로 계합하지 않고 각각 다른 상이기 때문에, 능전과 소전은 모두 말로 표현할  없는 것이니, 이러한 원인에 의거해서 일체법 모두는 말로 표현할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분별지는 누가 맡아 지니는, 임지(任持)하는 것인가?

 

▶論曰: ▷논문;

“諸菩薩任持, 是無分別智, 後所得諸行, 爲進趣增長.”

모든 보살이 맡아 지니는 임지(任持)는 무분별지이니, 

후득지의 모든 행으로 나아가게 하고 증장시키기 때문이라네.


▶釋曰:由無分別後所得智,得菩薩行,此行卽依無分別智.爲進趣增長者,爲令如是諸菩薩行,得增長故.無分別智,是彼任持,此智復以何爲助伴?

해석한다; 무분별 이후에 얻은 지혜에 의거해서 보살의 행을 얻는 것이니, 이 행이  무분별지에 의지하는 것이며,  

‘나아가게 하고 증장시키기 때문’이란 이러한 보살의 행을 증장시키기 때문에 무분별지는 그가 맡아 지니는 임지(任持)인 것이다.

 지혜는 다시 무엇으로써 돕는 반조(助伴)로 삼는 것인가?

 

▶論曰: 논문; 
“諸菩薩助伴, 說爲二種道, 是無分別智, 五到彼岸性.”

모든 보살의 돕는 반조(助伴)를  가지의 이종도(二種道)라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무분별지의 5 도피안(到彼岸, 바라밀다)의 성품이라네.


▶釋曰:二種道者:一資糧道`二依止道.資糧道者,謂施`戒`忍及與精進波羅蜜多.依止道者,卽是靜慮波羅蜜多.由前所說,波羅蜜多,所生諸善,及依靜慮波羅蜜多,無分別智卽得生長,此智名慧波羅蜜多.

乃至未得佛果已來,無分別智,於何處所感異熟果?

해석한다; 두 가지의 이종도(二種道)는 첫째는 자량도(資糧道)이고, 둘째는 의지도(依止道)로써,  

자량도는 이른바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의 바라밀다이며, 의지도는  정려바라밀다이다. 

앞에서 말한 바라밀다가 일으킨 모든 선에 의거하고 정려바라밀다에 의지해서  무분별지혜가 생기하고 증장하는 것이니, 이 지혜를 반야바라밀다라 이름하는 것이다.

나아가 무분별지혜를 얻고 나서부터 아직 불과(佛果)에 이르지 않은 이전으로부터, 무분별지는 어떠한 곳에서 이숙과(異熟果)를 초감하는 것인가?

 

▶論曰: ▷논문; 
“諸菩薩異熟, 於佛二會中, 是無分別智, 由加行證得.”

모든 보살의 이숙(異熟)은 부처님의  가지 법회 중에 있으니,

이것은 무분별지의 가행과 증득으로 인하여 다른 이숙과를 얻는 것이라네.

 

▶釋曰:於佛二會中者,謂受用身會中,及變化身會中.若無分別加行轉時,於變化身會中受生,受異熟果.若已證得無分別智,於受用身會中受生,受異熟果.爲顯此義故,復說由加行證得.無分別智誰爲等流?

해석한다; ‘부처님의  가지 법회’란 이른바 수용신(受用身)의 법회와 변화신(變化身)의 법회이다. 

무분별의 가행이 전전할 때에는 변화신의 법회에서 생을 받아 이숙과를 받으며,

이미 무분별지를 증득하였다면 수용신의 법회 중에서 생을 받아 이숙과를 받는,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가행과 증득에 의한 것이라네’라고 말하였다.

무분별지는 누구의 등류(等流)가 되는 것인가?

 

▶論曰: ▷논문;
“諸菩薩等流, 於後後生中, 是無分別智, 自體轉增勝.”

모든 보살의 등류(等流)는 다음다음의 후후생(後後生) 가운데에 있으니

무분별지로서 자체가 전전하여 점차 뛰어나게 되는 전증승(轉增勝)이라네.


▶釋曰:諸菩薩等流於後後生中者,於次前說,二身大會後後生中.是無分別智,自體轉增勝者,卽彼所修無分別智,展轉增勝,應知卽是彼等流果.無分別智,出離云何?

해석한다; ‘모든 보살의 등류(等流)는 다음다음의 후후생(後後生) 가운데 있다’는 것이란, 바로 앞에서 말한  가지 불신의 법회의 다음다음 생에 있는 것을 말하며,

‘무분별지로서 자체가 전전하여 점차 뛰어나게 되는 전증승(轉增勝)이다’는 것은, 그 수행한 무분별지가 전전하여 점차 뛰어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그것의 등류과(等流果)라고 알하야 하는 것이다.

무분별지의 벗어남의 출리(出離)는 어떠한 것인가?

 

▶論曰: 논문
“諸菩薩出離, 得成辦相應, 是無分別智, 應知於十地.”

모든 보살이 벗어남의 출리(出離)로증득과 성취에 상응하는 것이 무분별지이니,

10지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네.


▶釋曰:諸菩薩出離者,進趣究竟,故名出離,卽是進趣大涅槃義.得成辦相應,是無分別智者,初獲此智,名得相應,次後無量百千大劫,成辦相應.應知於十地者,謂從初地,乃至第十,如是次第.此智初地,唯名爲得,爾後多時,乃名成辦,是故菩薩,經無數劫,乃證涅槃,由爾所時,方到究竟.無分別智,誰爲究竟,而次前說,次第獲得.

해석한다; ‘모든 보살의 벗어남의 출리(出離)’란, 나아가 궁극에 이르기 때문에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이니, 곧 대열반에 나아간다는 뜻이며,

‘증득과 성취에 상응하는 것이 무분별지이네’는 최초로 이 지혜를 얻음을 증득과 상응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후의 무량한 백천 대겁에서는 성취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며,

‘10지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네.’란, 초지부터 10지까지의 이와 같은 순서인 것이니,

이 지혜는 초지에서는 오직 증득이라 이름하고, 이후의 많은 시기에서는 성취라고 부르는 것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무수겁을 경과하여 이에 열반을 증득하고, 그 시기에 의해서 비로소 궁극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무분별지는 누가 구경(究竟)으로 삼는 것인가? 바로 앞에서는 순서대로 획득함을 말하였을 뿐이다.

ㅡ앞에서는 무분별지를 순서대로 획득하는 것만을 말하였을 뿐으로, 아직 구경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으로 구경을 질문한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9. 증상혜학분(增上慧學分) ① 1

 

▶論曰:如是已說,增上心殊勝.增上慧殊勝,云何可見? 謂無分別智,若自性`若所依`若因緣`若所緣` 若行相` 若任持` 若助伴`若異熟`若等流`若出離`若至究竟`若加行無分別後得勝利 `若差別 若無分別後得譬喩` 若無功用作事` 若甚深, 應知無分別智, 名增上慧殊勝.

▷논문; 이상과 같이 매우 높은 마음의 뛰어남인 증상심수승(增上心殊勝)을 설명하였으니, 매우 높은 지혜의 뛰어남인 증상혜수승(增上慧殊勝)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른바 무분별지의 자성ㆍ소의(所依, 의지처)ㆍ인연ㆍ소연(所緣, 인식대상)ㆍ행상(行相, 인식작용)ㆍ맡아 지님의 임지(任持)ㆍ돕는 짝의 반조(助伴)ㆍ이숙(異熟)ㆍ등류(等流)ㆍ벗어남의 출리(出離)ㆍ궁극에 이름의 지구경(至究竟)ㆍ가행의 지혜인 가행무분별지(加行無分別智)와 후득지(後得智)의 뛰어난 이익의 승리(勝利)ㆍ차별ㆍ무분별지와 후득지의 비유ㆍ의식적인 노력이 없이 짓는 무공용작사(無功用作事)ㆍ매우 심오한 심심(甚深)이니,

무분별지를 매우 높은 지혜의 뛰어남인 증상혜수승(增上慧殊勝)이라 이름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釋曰:今正至說,增上慧時. 此中意說,無分別智,名增上慧.此復三種:一加行無分別智,謂尋思慧;二根本無分別智,謂正證慧;三後得無分別智,謂起用慧.此中悕求慧,是第一增上慧;內證慧,是第二增上慧;攝持慧,是第三增上慧.

해석한다; 이제는 매우 높은 지혜의 증상혜(增上慧)를 설명할 때가 되었으니, 여기서의 뜻은 무분별지를 증상혜(增上慧) 이름하는 것이니, 다시 이에  종류가 있다.

첫째는 가행무분별지(加行無分別智)이니, 사유하고 분별하는 심사(尋思)의 지혜를 말하며,

둘째는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 근본지)이니, 바르게 깨닫는 지혜를 말하며,

셋째는 후득무분별지(後得無分別智, 후득지)이니, 작용을 일으키는 지혜를 말한다.

 중에서 무분별지혜를 증득하기를 희구하는 희구혜(希求慧)는  번째의 매우 높은 지혜인 제일증상혜(第一增上慧)이고, 

내면적으로 증득하는 지혜인 내증혜(內證慧)는  번째 매우 높은 지혜인 제이증상혜(第二增上慧)이며, 

섭수의 지혜인 섭지혜(攝持慧)는  번째 매우 높은 지혜인 제삼증상혜(第三增上慧)이다.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 근본지(根本智), 여리지(如理智)ㆍ정체지(正體智)ㆍ진지(眞智) 등이라고도 하며, 진여에 계합(契合)하여 분별을 여의고, 모든 현상계의 본질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아는 지혜이다.

후득무분별지(後得無分別智), 후득지(後得智), 여량지(如量智)ㆍ권지(權智)ㆍ속지(俗智)라고도 하며, 근본지(根本智)에 의해 진리를 깨달은 뒤에, 다시 분별하는 얕은 지혜를 일으켜서 의타기성의 속사(俗事)를 아는 지혜이다.

부처님께서 대비를 일으켜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바로  후득지에 의한 것이다.

 

今且成立無分別智,由唯此智通因果故.其尋思智,是此智因,其後得智,是此智果,所以成此,兼成餘二.

무분별지를 성립하는 것은, 근본무분별지 원인(因)과 결과(果)에 통하기 때문이니,

 사유 분별의 심사지(尋思智)가  지혜의 원인(因)이고,  후득지는  지혜의 결과(果)이니,  

이것을 성취한다면 아울러서 나머지  가지 모두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論曰:此中無分別智,離五種相,以爲自性:一離無作意故`二離過有尋有伺地故`三離想受滅寂靜故`四離色自性故`五離於眞義異計度故.離此五相,應知是名無分別智.

논문; 이 중에서 무분별지는 다섯 가지의 오종상(五種相)을 여의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으니,

첫째는 작의가 없음을 여의는 이무작의(離無作意)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심구의 심소가 있는 유심(有尋)이고, 사찰의 심소가 있는 유사(有伺)의 지위를 지나는 것을 여의기 때문이며,

셋째는 표상작용과 감수작용의 심소가 멸한 적정을 여읜, 이상수멸적정(離想受滅寂靜)이기 때문이고,

넷째는 물질의 자성을 여읜, 이색자성(離色自性)이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진실한 의미에 대한 다른 계탁(計度)을 여읜, 이어진의이계도(離於眞義異計度)이기 때문이니,  

 다섯 가지의 오종상을 여의는 것을 무분별지라 이름한다고 알아야 한다.


▶釋曰:且應先說,無分別智,所有自性,此中體相說名自性.謂諸菩薩,無分別智,離五種相,以爲自性.離五相者, 若無作意, 是無分別智,睡`醉`悶等,應成無分別智.

해석한다; 우선 무분별지가 갖는 자성을 먼저 말하겠으니, 여기서는 체상을 자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모든 보살의 무분별지는 다섯 가지의 상을 여의는, 이오종상(離五種相)으로써 자성을 삼는 것이다

‘다섯 가지 양상을 여의는 이오종상(離五種相)’이란, 다음과 같으니,

만약 작의가 없음의 무작의(無作意)가 무분별지라면 수면(睡)ㆍ술에 취한 취(醉)ㆍ기절함의 민(悶) 등도 마땅히 무분별지를 이루어야 할 것이며,

 

若過有尋有伺地,是無分別智,第二靜慮已上諸地,應成無分別智,若如是者,世閒應得無分別智.

만약 심구의 심소가 있는 유심(有尋)이고 사찰의 심소가 있는 유사(有伺)의 지위를 지나는 것이 무분별지라면, 제2 정려 이상의 모든 지위는 마땅히 무분별지를 이루어야 할 것이니, 만약 이러한 것이라면 세간에서도 마땅히 무분별지를 얻어야 할 것이며,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는 선정의 마음속에 심구(尋求)와 사찰(伺察)의 심소가 모두 있는, 색계 초선천(初禪天)의 선정이며, 이로부터 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가 있게 되고, 제2선(禪) 이후는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이다.

 

若想受滅等位中,心`心法不轉,是無分別智,滅定等位,無有心故,智應不成.

만약 표상작용(想)과 감수작용(受)이 멸한 지위인 상수멸정(想受滅定), 즉 멸진정(滅盡定)에서 심왕과 심소가 전전하지 않는 것이 무분별지라면, 멸진정 등의 지위에서는 심왕법이 없기 때문에 지혜가 마땅히 성취되지 않아야 할 것이며,

 

若如色自性,是無分別智,如彼諸色頑鈍無思,此智應成頑鈍無思.復有餘義,若如色性,智不應成.

만약 물질의 자성 같은 색자성(色自性) 무분별지라면,  모든 물질(色)이 완고하고 둔하며 사량이 없는 것과 같이,  지혜도 마땅히 완고하고 둔하여서 사량이 없어야 할 것이며,

다시 다른 뜻으로는, 만약 물질의 성품의 색성(色性)과 같다면 지혜는 마땅히 성취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若於眞義,異計度轉,無分別智,應有分別.謂分別言,此是眞義,若智遠離如是五相,於眞義轉,於眞義中,不異計度,此是眞義無分別智.有如是相,緣眞義時,譬如眼識不異計度,此是其義.

만약 진실한 진의(眞義) 대해서 다른 계탁(計度)이 전전한다면 무분별지는 마땅히 분별이 있어야 할 것이니, 분별해서 이것은 진실한 대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혜로서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오종상을 멀리 여의고, 진실한 대상에 대해서 전전하며, 진실한 대상에 대해서 다르게 계탁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진정 뜻에서의 무분별지이니, 이와 같은 상(相)으로 진실한 대상을 반연한다면, 마치 안식(眼識)과 같이 다르게 계탁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論曰:於如所說,無分別智,成立相中,復說多頌:

논문; 말한 바와 같은 무분별지를 성립하는 상에 있어서 다시 많은 게송을 말하였다.


▶釋曰:於上所說無,分別智,略成立中,廣說多頌.

해석한다; 앞에서 말한 무분별지를 간략히 성립함에 있어서 많은 게송으로 자세히 말하였다.


▶論曰:
▷논문; 
“諸菩薩自性, 遠離五種相, 是無分別智, 不異計於眞.”

모든 보살의 자성은 다섯 가지 오종상(離五種相) 멀리 여의는 것이니,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진실을 다르게 계탁하지 않는 것이라네.


▶釋曰:由此初頌,顯上所說,無分別智.初自性義,如是已說.此智自性,依彼而轉,次頌當說.

해석한다; 이  번째 게송에 의해서 앞에서 말한 무분별지의  번째 자성의 의미인 이오종상(離五種相)을 나타낸 것으로, 이와 같이  지혜의 자성을 말하였다.

그것에 의지해서 전전한다는 것은 다음의 게송에서 말하고 있다.


▶論曰:
논문;

“諸菩薩所依, 非心而是心, 是無分別智, 非思義種類.”

모든 보살의 소의(所依, 의지처)마음이 아니면서도 마음이라.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사량하는 종류가 아니라네.


▶釋曰:如是所說,無分別智,當言依心`爲依非心?若言依心,能思量故,說名爲心,依心而轉,是無分別,不應道理.若依非心,則不成智.爲避如是二種過失,故說此頌.此智所依不名爲心,不思義故.亦非非心,心所引故.此生所依,是心種類,亦名爲心,因彼而生.次頌當顯.

해석한다; 이렇게 말한 무분별지는 마땅히 마음에 의지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마음이 아닌 것에 의지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만약 마음에 의지한다고 말한다면 능히 사량(思量)하기 때문에 마음이라 이름하거늘, 마음에 의지해서 전전하면서도 무분별지라 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며,  

만약 마음이 아닌 것에 의지한다면  지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가지 과실을 피하기 위해서  게송을 말한 것이다.

 지혜의 소의(所依, 의지처) 마음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이니, 사량할  없는 의미이기 때문이고,  

역시 마음이 아닌 것도 아니니, 마음이 이끈 바의 심소인(心所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생기하는 소의(所依, 의지처) 마음의 종류이므로 역시 마음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그것으로 인하여 생기하는 것은 다음 게송에서 나타내고 있다.

 

▶論曰: ▷논문; 
“諸菩薩因緣, 有言聞熏習, 是無分別智, 及如理作意.”

모든 보살의 인연은 남의 말을 들어서 훈습한 문훈습(聞熏習)이라.

 무분별지는 이치 그대로 작의하는 것이라네.


▶釋曰:諸菩薩因緣者,謂此智因.有言聞熏習者,謂由他音正聞熏習.及如理作意者,謂此熏習爲因,意言如理作意,無分別智因此而生.復何所緣?次頌當顯.

해석한다; ‘모든 보살의 인연’이란  지혜의 원인(因)을 말하는 것이며,

‘남의 말을 들어서 훈습한 문훈습(聞熏習)’이란 남의 음성으로 인하여 바르게 들어서 훈습한 것이며,

‘이치 그대로의 작의’란  훈습을 원인으로 하는 사유(思惟, 의意)를 이치 그대로의 작의라고 말하는 것으로, 무분별지는 이것으로 인하여 생기하는 것이다.

다시 어떤 소연(所緣, 인식대상)인가에 대해서는 다음의 게송에서 말하고 있다.


▶論曰:
▷ 논문; 
“諸菩薩所緣, 可言法性, 是無分別智, 無我性眞如.”

모든 보살의 소연(所緣, 인식대상)말로 표현할  없는 법성이라.

이것은 무분별지로서 무아성(無我性)의 진여라네.


▶釋曰:不可言法性者,謂由遍計所執自性,一切諸法,皆不可言.何等名爲不可言性?謂無我性所顯眞如,遍計所執補特伽羅,及一切法,皆無自性,名無我性.卽此無性,所顯有性,說名眞如.勿取斷滅,故說此言.又於所緣所作行相,次頌當顯.

해석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성’이란 이른바 변계소집자성에 의거해서 일체법은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으로,

어떠한 것들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품이라 하는 것인가? 무아성(無我性)이 나타난 진여를 말하는 것이며,

변계소집의 보특가라와 일체법은 모두 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을 무아성(無我性)이라 이름하나니, 곧 이 무자성이 현현하는 존재성의 유성(有性)을 진여라 이름하는 것이니, 단멸로 취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또한 소연(所緣, 인식대상)에 대하여 짓는 행상(行相, 인식작용)은 다음 게송에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의 행상(行相)은 심식(心識)의 고유한 성능(性能)으로서, 특히 주관적인 인지(認知) 작용을 말한다. 마음에 비친 객관의 영상을 인식하는 주관의 작용인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8. 증상심학분(增上心學分) 2

 

▶論曰:云何菩薩,能行惠施? 若諸菩薩, 無少所施, 然於十方無量世界, 廣行惠施.

云何菩薩,樂行惠施? 若諸菩薩, 於一切施, 都無欲樂. 

논문; 보살이 은혜로운 보시를 어떻게 능히 행하는가? 모든 보살은 조금도 베푸는 바가 없으나, 시방의 무량한 세계에서 널리 은혜로운 혜시(惠施) 행하는 까닭이며,

보살이 은혜로운 혜시(惠施) 어떻게 즐겁게 행하는가? 모든 보살은 일체의 보시에 있어서 전혀 욕락(欲樂)하는 바 없이 행하는 까닭이며,

 

云何菩薩,於惠施中,深生信解?若諸菩薩, 不信如來,而行布施. 云何菩薩,於施策勵? 若諸菩薩,於惠施中, 不自策勵.云何菩薩, 於施耽樂?若諸菩薩,無有暫時,少有所施.

보살이 은혜로운 혜시(惠施) 안에서 어떻게 깊은 믿음의 신해(信解)를 일으키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여래를 믿지 않고서도 보시를 행하는 까닭이며,

어떻게 보살은 이 보시를 재촉하고 격려하는 책려(策勵)를 하는가? 모든 보살은 은혜로운 혜시(惠施) 안에서 스스로를 책려하지 않는 까닭이며,

어떻게 보살이 보시에 대하여 탐락(耽樂)하는가? 모든 보살은 잠시도 적게 보시하는 바가 없는 까닭이며,

 

云何菩薩,其施廣大?若諸菩薩,於惠施中,離娑洛想.云何菩薩,其施淸淨? 若諸菩薩,殟波陁慳.云何菩薩,其施究竟?若諸菩薩,不住究竟.云何菩薩,其施自在?若諸菩薩,於惠施中,不自在轉.云何菩薩,其施無盡?若諸菩薩,不住無盡. 如於布施,於戒爲初`於慧爲後,隨其所應當知亦爾. 殟 병들 온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는 광대한 것인가? 모든 보살은 은혜로운시에 대해서 흩어져 버리는, 사락(娑洛)이라는 생각을 여읜 까닭이며,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청정한 것인가? 모든 보살은 인색함을 없앤, 온파타간(殟波陀慳)인 까닭이며,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궁극적인 것인가? 모든 보살이 궁극에 머물지 않는 까닭이며,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자재한 것인가? 모든 보살은 은혜로운 보시 안에서 자재하거나 전전하지 않는 까닭이며,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인가? 모든 보살은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에 안주하지 않는 까닭이니,

보시와 같이 계율을 처음으 삼고 지혜를 끝으로 삼아서,  상응하는 바를 따라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曰:云何菩薩,能行惠施等者,謂諸菩薩,一切有情,攝爲自體,是故彼施,卽是己施,是此意趣. 云何菩薩,樂行惠施等者,謂諸菩薩,不樂修行,味著等施,但樂修行,菩薩淨施.言味著者,意說貪染.或有餘處,名來求施.

해석한다; ‘보살이 은혜로운 보시의 혜시를 어떻게 능히 행하는가?’ 등은 보살은 모든 유정을 섭수하여 자체로 삼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보시는  스스로 보시라는 의취(意趣)인 것이다. 

‘보살이 은혜로운 혜시(惠施)를 어떻게 즐겁게 행하는가?’ 등은, 이른바 모든 보살은 탐착하는 등의 미착(味著)의 보시를 즐겨 수행하지 않고, 다만 보살의 청정한 보시를 즐겨 수행한다는 것으로,

미착(味著)의 의미는 탐욕으로 오염된 것이나, 혹 다른 곳에서는 장차 구하는 보시의 내구시(來求施)라 하기도 한다.

ㅡ급다(笈多)ㆍ행구(行矩) 역본인 진본(隋本)에서는 유소득(有所得) 보시로 되어 있다.

 

云何菩薩,於惠施中,深生信解等者,謂諸菩薩,自得施心,而行惠施,不藉他緣.

云何菩薩,於施策勵等者,謂諸菩薩,性自能施,慳悋斷故.不待他策,亦不自策,任運能施,是此意趣.

云何菩薩,於施耽樂等者,謂諸菩薩,常行施故,無暫時施,一切施故,無少所施.

云何菩薩,其施廣大等者,謂諸菩薩,依定行施,卽是離欲,而行施義.

言娑洛者,顯目堅實,密詮流散.今取密義,離流散想,依定行施,故成廣大.

‘보살이 은혜로운 혜시(惠施) 안에서 어떻게 깊은 믿음의 신해(信解)를 일으키는 것인가?’ 등은 모든 보살은 스스로 보시의 마음을 내어 은혜로운 보시를 행하고, 남의 반연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어떻게 보살은 이 이 보시를 재촉하고 격려하는 책려(策勵)를 하는가?’ 등은,

모든 보살종성은 스스로 능히 보시하나니, 인색함을 끊었기 때문이며, 남의 채근을 기다리지 않고 또한 스스로도 책려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능히 보시한다는 의취(意趣)이다.

어떻게 보살이 보시에 대하여 탐락(耽樂)하는가?’ 등은, 이른바 모든 보살은 항상 보시를 행하는, 즉 일시적인 보시가 아니며, 또한 일체를 보시하기 때문에 조금도 보시하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이며,

‘어떻게 보살의 그 보시는 광대한 것인가?’ 등은 모든 보살은 선정에 의지하여 보시를 행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곧 욕심을 여의고 보시를 행한다는 뜻이다. 

‘사락(娑洛, sāra의 음사 音寫)’은 표면적인 뜻으로는 견실(堅實)의 뜻이고, 

은밀한 뜻으로는 흩어져 버림의 유산(流散)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은밀한 뜻을 취해서 흩어져 버린다는 유산(流散)의 생각을 여의는 것이며, 선정에 의지해서 보시를 행하기 때문에 광대함을 이루는 것이다.


云何菩薩,其施淸淨等者,謂諸菩薩,拔除慳足,而行惠施.殟波陁者,顯目生起,密詮拔足.

波陁名足,殟名爲拔.今取密義,拔除慳足,令面傾覆,而行惠施,是故說名殟波陁慳.

云何菩薩.其施究竟等者,謂諸菩薩,不住究竟無餘涅槃,如聲聞等,是故究竟,常能行施.

云何菩薩,其施自在等者,謂諸菩薩,令施等障,不得自在,而行惠施,令所治障,不自在故,施得自在.

云何菩薩,其施無盡,謂諸菩薩,不住涅槃,常行惠施,此中無盡.意取涅槃,不同聲聞住涅槃故,其施無盡.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청정한 것인가?’ 등은 모든 보살이 인색함을 없애어서 은혜로운 혜시(惠施)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온파타(殟波陀, 범어 utpatti의 음사)’는 표면적인 뜻으로는 생기(生起)이고, 

은밀한 뜻으로는 제거함의 발족(拔足)을 나타내는 것으로, 파타(波陀)를 족(足)이며, 온(殟)은 뽑아내는 발(拔)이다.

여기에서는 은밀한 뜻을 취하여 인색함의 발(足)을 빼내고, 얼굴을 기울여 덮어서 은혜로운 혜시(惠施)를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인색함의 발을 빼내는 발족(拔足)이라 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궁극적인 것인가?’ 등은, 이른바 모든 보살은 궁극적으로 무여의열반에 안주하는 성문등과는 다르기 때문에 구경(究竟)에도 항상 능히 보시를 행하며,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자재한가?’란, 모든 보살은 보시 등의 장애가 자재할 수 없게 하여서, 은혜로운 혜시(惠施) 행함을 말하는 것으로, 다스려야  장애의 소치장(所治障)으로 하여금 자재할 수 없게 까닭에 보시의 자재를 얻는 것이며,

‘어찌하여 보살의 그 보시가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인가?’는, 이른바 모든 보살은 열반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은혜로운 보시의 혜시(惠施)를 행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이라는 것은 열반을 의미하는 것이나, 성문이 안주하는 열반과는 다르기 때문에  보시는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인 것이다.

 

ㅡ이하는  가지의 십악업(十惡業)의 은밀한 뜻을 해석한다.

▶論曰:云何能殺生?若斷衆生生死流轉.云何不與取?若諸有情無有與者,自然攝取.云何欲邪行?若於諸欲,了知是邪,而修正行.云何能妄語?若於妄中,能說爲妄.云何貝戍尼?若能常居最勝空住.云何波魯師?若善安住所知彼岸.云何綺閒語?若正說法品類差別.云何能貪欲?若有數數欲,自證得無上靜慮.云何能瞋恚?若於其心,能正憎害一切煩惱.云何能邪見?若一切處,遍行邪性,皆如實見.

논문; 어떠한 것이 능히 살생을 한다는 것인가? 중생의 생사유전을 끊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주지 않는 것을 취한다는 것인가? 유정들은 주는 이가 없어도 자연히 섭취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삿된 행을 하는 것인가? 모든 욕망이 삿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바른 행을 닦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능히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허망된 것에 대해서 허망된 것으로 능히 말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항상 가장 뛰어난 공의 패술니(貝戌尼, 양설, 최승공)인가? 능히 항상 가장 뛰어난 최승공(最勝空)에 안주하여 머무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피안에 머무는 파노사(波魯師, 추어)인가? 알아야  바의 피안에  안주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교묘한 기문어(綺間語)를 말하는 것인가? 법의 품류의 차이를 바르게 말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능히 탐욕한 것인가? 자주자주 스스로 최상의 정려를 증득하고자 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성냄인 것인가?  마음으로 일체 번뇌를 능히 바르게 증오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삿된 사견(邪見)인가? 모든 곳에서 두루 행하는 삿된 성품 모두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釋曰:如經中說,苾芻我是能殺生等者,此中顯彼所說意趣.云何欲邪行.者,謂知諸欲皆是其邪,而修正行.云何貝戍尼者,此貝戍尼,顯目離閒語,密詮常勝空.貝者表勝,戍者表空,尼者表常,今取密義,與答相應,是故答言:若能常居最勝空住.

해석한다; 경전에서 “비구들이여, 나는 능히 살생한다” 등을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의취(意趣)를 여기에서 나타내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삿된 사행(邪行)을 하는 것인가?’란, 모든 욕망의 삿됨을 알아서 바른 행을 닦는 것을 말하며,

‘어떠한 것이 항상 가장 뛰어난 공의 패술니(貝戌尼)인가?’에서  패술니(貝戌尼, paiśunī의 음사)는 표면적인 뜻으로는 이간질하는 말이고, 은밀한 뜻으로는 항상 뛰어난 공을 나타내는 것으로,

패(貝, pai)는 뛰어난 승(勝)을, 술(戌, śu)은 공(空)을, 니(尼, ni)는 항상의 상(常)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은밀한 밀의(密義)를 취한다며, 대답과 상응하는 까닭에 ‘능히 항상 가장 뛰어난 최승공(最勝空)에 안주하여  머문다’고 대답한 것이다.

 

云何波魯師者,此波魯師,顯目麤惡語,密詮住彼岸.波表彼岸,魯師表住,今取密義,與答相應,是故答言:善安住所知彼岸.是到所知彼岸住義.云何能邪見等者,謂色等中,如實觀見遍行邪性.卽是於彼依他起中,如實觀見遍計所執,是邪性義. 於十不善業道文中,餘義易了.

‘어떠한 것이 피안에 머무는 파노사(波魯師)인가?’에서  파로사(波魯師, pāruṣī의 음사)란, 표면적인 뜻으로는 거친 말의 추악어(麤惡語)이고, 은밀한 뜻으로는 피안에 머무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파(波, pā)는 피안을, 노사(魯師, ruṣī)는 머무는 주(住)를 나타낸다. 

여기서는 은밀한 취한다면 대답과 상응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알아야  바인 피안에  안주한다”고 대답한 것이니,  이것은 알아야  바인 피안에 이르러 안주한다는 의미이다.

‘어떠한 것이 삿된 사견(邪見)인가?’ 등은 물질(色) 등에 있어서 두루 작용하는 삿된 속성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곧 의타기성 중에서 변계소집성은 삿된 성품의 뜻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가지불선업도(十不善業道)의 문장에 있어서 다른 의미는 알기 쉬운 것이다. 


▶論曰:甚深佛法者,云何名爲甚深佛法?此中應釋:謂常住法,是諸佛法,以其法身,是常住故. 又斷滅法,是諸佛法,以一切障,永斷滅故. 又生起法,是諸佛法,以變化身,現生起故. 又有所得法,是諸佛法,八萬四千諸有情,行及彼對治,皆可得故. 又有貪法,是諸佛法,自誓攝受,有貪有情,爲己體故. 又有瞋法,是諸佛法;又有癡法,是諸佛法.

논문; 매우 심오한 심심불법(甚深佛法)이란 무엇을 매우 심오한 불법이라고 이름하는가?

이 가운데에서 상주하는 상주법(常住法)이란 모든 부처님의 법이니, 그 법신이 상주하기 때문이며,

또한 단멸하는 단멸법(斷滅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니, 모든 장애가 영원히 없어지기 때문이며,

또한 생기(生起)하는 생기법(生起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니, 변화신이 시현하여 생기하기 때문이며,

또한 소득이 있는 소득법(所得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니, 8만 4천 가지 모든 유정의 행과  다스림을 모두 얻을  있기 때문이며, 

또한 탐욕이 있는 유탐법(有貪法)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니, 탐욕이 있는 유정을 스스로 섭수할 것을 맹세하여서 자신의 자체로 삼기 때문이며,

또한 성냄이 있는 유진법(有瞋法)이 모든 부처님의 불법이며,

또한 어리석음이 있는 유치법(有癡法)이 모든 부처님의법이다.

 

又異生法,是諸佛法,應知亦爾. 又無染法,是諸佛法,成滿眞如,一切障垢,不能染故. 又無污法,是諸佛法,生在世閒,諸世閒法, 不能污故.是故說名甚深佛法.

또한 범부의 이생법(異生法)역시도 모든 부처님의법이라는 것도 마땅히 알아야 하며,

또한 잡염이 없는 무염법(無染法)이 모든 부처님의법이니, 원만히 성취되어 있는 진여는 모든 장애나 번뇌가 오염시킬  없기 때문이며,

또한 오염이 없는 무오법(無污法)이 모든 부처님의법이니, 세간에 머물러도 모든 세간법이 오염시킬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매우 심오한 심심불법(甚深佛法)이라 말하는 것이다.

매우 심오한 불법에 대해서 비밀스런 말을 해석한 것이다.


▶釋曰:復有餘處,契經說言,謂常住法,是諸佛法,廣說乃至,又無污法,是諸佛法.此中意趣,今當顯示.謂佛法身體,是常住故,說此法爲常住法.斷滅法者,所有障垢,悉皆斷滅,由此義故,卽說此法,爲斷滅法.有所得法,是佛法者,有情諸行,八萬四千,及彼對治,皆有可得,故說此法,名有所得.無染法者,淸淨眞如,一切障垢,所不能染,故說此法,名無染法.餘義易了,無煩重釋.

해석한다; 또한 다른 계경(경전)에서 “상주법(常住法)이 모든 부처님의법이며, 또한 잡염이 없는 무오법(無污法)이 모든 부처님의법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여기서는 그 의취(意趣)를 마땅히 나타내는 것으로,

부처님의 법신의 자체는 상주하기 때문에  법을 ‘상주법(常住法)’이라 말하며,

‘단멸법(斷滅法)’은 모든 장애가  단멸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의미에 의거해서   법을 단멸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소득이 있는 소득법(所得法)이 모든 부처님의법’이라는 것은 유정의 8만 4천의 모든 행과 그것의 다스림은  얻을  있게 되는 까닭에  법을 소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잡염이 없는 무염법(無染法)’이란 청정한 진여는 모든 장애가 오염시킬  없는 까닭에,  법을 잡염이 없는 무염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나머지의 뜻은 알기 쉽운 까닭에 번거롭게 거듭 해석하지 않겠다.


▶論曰:又能引發,修到彼岸,成熟有情,淨佛國土,諸佛法故,應知亦是菩薩等持作業差別.

논문; 또한 능히 이끌어 내어서 도피안(到彼岸, 바라밀다)를 닦아서 유정을 성숙하게 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함이 모든 부처님의법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보살의 삼마지의 작업차별(作業差別)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釋曰:前所未說,作業差別,今於此中,復顯菩薩等持作業.謂諸菩薩,依三摩地,能修一切波羅蜜多.又依此定,能善成熟,一切有情,發神通等,種種方便,引諸有情,入正法故.又由此力,能善淸淨一切佛土,心得自在,隨欲能成,金銀等寶,諸佛土故.又由此力,能正修集一切佛法,是三摩地作業差別.

해석한다; 앞에서 아직 말하지 않은 작업차별(作業差別)로써, 여기에서 다시 보살의 등지(等持, 삼마지)의 작업을 나타낸 것이니, 모든 보살은 삼마지에 의지해서 능히 모든 바라밀다를 수행하고, 또한 이 선정에 의지해서 능히 모든 유정을 성숙시키며, 신통 등의 갖가지 방편을 일으켜서 모든 유정을 인도하여 정법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 힘에 의거해서 능히 모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마음의 심자재(心自在)를 얻으며, 바라는 바를 따라 능히 금ㆍ은 등의 보석으로 장엄된 불국토를 성취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 힘에 의거해서 능히 모든 불법을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삼마지의 작업차별(作業差別)인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8. 증상심학분(增上心學分) 1

 

▶論曰:如是已說,增上戒殊勝.增上心殊勝,云何可見?略由六種差別應知:一由所緣差別故`二由種種差別故`三由對治差別故`四由堪能差別故`五由引發差別故`六由作業差別故.

논문; 이상과 같이 매우 높은 계율의 증상계수승(增上戒殊勝)을 설명하였다. 매우 높은 마음의 증상심(增上心)의 수승(殊勝)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대략 여섯 종류의 차별에 의거한다는 것으로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인식대상의 차이인 소연차별(所緣差別)에 의거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여러 가지의 종종차별(種種差別)에 의거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다스림의 대치차별(對治差別)에 의거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감당 능력의 감능차별(堪能差別)에 의거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이끌어 내는 것의 인발차별(引發差別)에 의거하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작업의 자업차별(作業差別)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ㅡ매우 높은 선정의 증상심학(增上心學) 관한 설명으로, 계율은 선정을 의지(依止) 삼고 선정에 의지해서 계율을 이루기 때문에, 뛰어난 계율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선정의 뛰어남이 나타나는 것을 증상심학(增上心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釋曰:爲顯增上心學殊勝,作此問答.

해석한다; 매우 높은 증상심학(增上心學)의 뛰어남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러한 문답을 한 것이다.

 

▶論曰:所緣差別者,謂大乘法,爲所緣故.

논문; 인식대상의 차이인 소연차별(所緣差別)이란, 대승법을 소연(所緣,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釋曰:謂大乘法,爲所緣者,諸菩薩定緣於大乘,非聲聞定.

해석한다; ‘대승법을 소연(所緣, 인식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란, 모든 보살의 선정이 대승을 반연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성문의 선정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論曰:種種差別者,謂大乘光明`集福定王`賢守`健行等三摩地,種種無量故.

논문; 여러 가지 차이는 이른바 대승광명(大乘光明)삼마지ㆍ집복정왕(集福定王)삼마지ㆍ현수(賢守)삼마지ㆍ건행(健行)삼마지 등의 삼마지는 여러 가지로 많기 때문이다.

ㅡ진제 역본인 진본(陳本)에서 이들 삼마지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釋曰:大乘光明`集福`定王等者,顯如是等,諸三摩地,種種差別,唯大乘有,聲聞乘等,一種亦無.

해석한다; ‘대승광명(大乘光明)ㆍ집복정왕의 삼마지 등’, 이와 같은 모든 삼마지의 갖가지 차이는 오직 대승에만 있을 뿐,  성문승 등에는  가지도 없음을 나타내었다.

 

▶論曰:對治差別者,謂一切法摠相緣智,以楔出楔道理,遣阿賴耶識中,一切障麤重故.

논문; 다스림의 차이인 대치차별(對治差別)이란, 일체법의 총체적인 총상(摠相)을 반연하는 지혜는, 마치 쐐기로서 쐐기를 빼는 도리와 같이, 아뢰야식 안의 모든 장애의 유루종자인 추중(麤重)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釋曰:緣摠法智,對治一切障㝵而住,如以細楔,除去麤楔.住本識中,諸雜染法熏習種子,說名爲麤,諸對治道能除彼故,是微細義.

해석한다; 총체적인 총법을 반연하는 지혜는 모든 장애를 다스려서 안주하는 것이니, 작은 쐐기로써 크고 무거운 쐐기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본식(本識) 안에 있는 모든 잡염법에 훈습된 종자를 무거운 추(麤)라 하고,

다스리는 모든 대치도(對治道)는 능히 그것을 없애기 때문에 작고 미세하다는 것이다.

 

▶論曰:堪能差別者,謂住靜慮樂,隨其所欲,而受生故.

논문; 감당 능력의 감능차별(堪能差別)이란, 정려의 즐거움에 안주하여 그 소망하는 바를 따라 생을 받기 때문이다.

 

▶釋曰:由有堪能,住靜慮樂,隨有饒益諸有情處,卽往彼生不退靜慮,諸聲聞等,無如是事.

해석한다; 감당 능력의 감능차별(堪能差別)로 인하여 정려의 즐거움에 안주하고, 곧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는 처소를 따라 태어날지라도 정려에서 퇴전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성문등에게는 이러함이 없다.

 

▶論曰:引發差別者,謂能引發一切世界無閡神通故.

논문; 이끌어 내는 것의 인발차별(引發差別)이란 능히 모든 세계의 걸림없는 신통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釋曰:由此靜慮,引發神通,一切世界,皆無障閡.

해석한다; 이 정려에 의거해서 신통을 이끌어 내고, 모든 세계에 장애가 없는 것이다.

 

▶論曰:作業差別者,謂能振動`熾然`遍滿`顯示`轉變`往來`卷舒,一切色像,皆入身中,所往同類,或顯或隱,所作自在,伏他神通,施辯念樂,放大光明,引發如是大神通故.

논문; 작업차별(作業差別)은, 이른바 능히 진동시키고, 맹렬히 타오르며, 두루 가득하고, 나타내 보이며, 전변하고 왕래하며, 감고 펴며, 모든 물질의 색상(色像) 모두를 신체 안에 들이는 것이니, 가는 곳의 부류를 같이하고, 혹은 현현하고, 혹은 숨는 등의 하는 바가 자재하여 다른 이의 신통을 조복하고, 변재(辯才)ㆍ생각하여 지니는 힘의 염(念)ㆍ즐거움을 베풀는 시락(施樂)하며, 큰 광명을 놓는 것으로, 이와 같은 대 신통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釋曰:作業差別,謂發神通所作事業.此中能動一切世界,故名振動.卽彼熾然,故名熾然.言遍滿者, 應知卽是光明普照. 言顯示者,由此威力,令無所能餘有情類,欻然能見無量世界,及見其餘佛菩薩等.言轉變者,應知轉變一切地等,令成水等. 言往來者 謂一剎那,普能往還無量世界.

해석한다; ‘작업차별(作業差別)’이란, 신통을 일으켜서 짓는 것을 말한다.

이러함에서 능히 모든 세계를 움직이기 때문에 ‘진동(振動)’이라 하며,

그것이 맹렬하게 타오르기 때문에 ‘맹렬히 타오르는 치연(熾然)’이라 하며,

‘두루 가득한 편만(遍滿)하다’는 것이란, 곧 널리 광명을 비추는 것으로 알아야 하며,

‘나타내 보인다는 현시(顯示)’는, 이 위력에 의거해서 힘없는 나머지 유정의 무리로 하여금 문득 능히 무량한 세계를 보여주고, 그 나머지 불보살 등을 친견하게 하는 것을 말하며,

‘전변(轉變)’이란, 땅 등을 전변하여 물 등으로 만드는 것이며,

‘왕래(往來)’란 한 찰나에 능히 널리 무량한 세계를 가고 오는 것이다.

 

言卷舒者,謂卷十方無量世界,入一極微,極微不增;舒一極微,包于十方無量世界,世界不減.一切色像,皆入身中者,謂身中現無量種種一切事業.所往同類者,謂如往詣三十三天,色像言音與彼同類,爲化彼故,往一切處,亦復如是.

‘감고 편다는 권서(卷舒)'란 이른바 시방의 수많은 세계를 감아서 하나의 극미(極微)에 넣을지라도, 극미는 늘지도 않고, 하나의 극미를 펼쳐서 시방의 수많은 세계를 포함시켜도 세계가 줄지도 않는다는 것이며, 

‘모든 물질의 색상(色相) 모두를 신체 가운데 들인다’는 것은 신체 안에서 무량한 갖가지 모든 일을 나타냄을 말하며,

‘가는 곳은 부류를 같이한다는 소왕동류(所往同類)’라는 것은, 33천(天, 도리천)에 나아가는 것과 같이, 물질의 모습인 색상(色相)과 음성이 그것과 같은 부류이며, 그것을 변화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 나아감의 왕일체처(往一切處)'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극미(極微), 물질적 존재의 최소단위의 미립자(微粒子)를 말하는 것이며, 틈새를 통해 비쳐 들어오는 광선 중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먼지 정도의 입자가 7의 7승(乘),  823,543의 극미가 집합된 것이라고 한다.

33천(天), 욕계의 제2천인 도리천(忉利天)을 말하며, 사방에 각각 8성이 있고 중앙에 제석천의 선견성을 합하여 33천이라 한다.


顯謂顯現.隱謂隱藏.所作自在者,如變魔王,作佛身等.伏他神通者,謂能映蔽一切神通.於請問者,施以辯才,故名施辯.於聽聞者,施念施樂,令得定故,名施念樂.放大光明者,爲欲召集遠住他方世界菩薩.引發如是大神通者,引前所說,大神通故.如是一切聲聞所無,是故殊勝.

‘현(顯)’은 명백하게 나타내는 현현(顯現)을 말하고, ‘은(隱)’은 숨는 것이며,

‘하는 바가 자재하다는 소작자재(所作自在)’라는 것은, 마왕을 변화시켜 불신(佛身) 등으로 만드는 것과 같으며,

‘다른 이의 신통을 조복한다는 복타신통(伏他神通)’이란, 능히 모든 신통을 비추어 덮어서 가려버리는 것이며,

질문하는 이에게 변재로써 베풀기 때문에 ‘변재를 베푼다’고 말하며,

질문하는 이에게 들은 법을 생각하여 잊지 않는, 억념(憶念)의 힘인 염(念)을 베푸는 것이며,

즐거움을 베푸는 시락(施樂)이란, 선정을 얻어서 마음의 즐거움을 얻게 하기 때문에 ‘생각하여 지니는 힘과 즐거움을 베푼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 광명을 놓는다’는 것은 멀리 다른 방위의 세계에 안주하는 보살들을 소집하기 위한 것이며,

‘이와 같은 대 신통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큰 신통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은 모든 성문들에게는 없기 때문에 뛰어난 수승(殊勝)이라 말하는 것이다.

 

▶論曰:又能引發攝諸難行,十難行故.十難行者:一自誓難行,誓受無上菩提願故;二不退難行,生死衆苦,不能退故;三不背難行,一切有情,雖行邪行而不棄故;四現前難行,怨有情所現作一切饒益事故;五不染難行,生在世閒,不爲世法所染污故;

六勝解難行,於大乘中,雖未能了然,於一切廣大甚深生信解故;七通達難行,具能通達補特伽羅法無我故;八隨覺難行,於諸如來所說,甚深秘密言詞,能隨覺故;九不離不染難行,不捨生死而不染故;十加行難行,能修諸佛安住解脫一切障閡,窮生死際, 不作功用,常起一切有情,一切義利行故.

논문; 또한 모든 난행(難行)을 능히 포섭하는 열 가지의 십난행(十難行)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니,

열 가지의 십난행(十難行)이란, 첫째는 스스로 맹세하는 자서난행(自誓難行)이니, 최상의 깨달음인 무상보리를 얻고자 하는 소원을 맹세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퇴전하지 않는 불퇴난행(不退難行)이니, 생사의 갖가지 고통도 퇴전시킬 수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등지지 않는 불배난행(不背難行)이니, 모든 유정이 삿된 사행을 할지라도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넷째는 현전난행(現前難行)이니, 원망스러운 유정이 있는 곳에도 나타나서 모든 이익되는 일을 하여주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오염되지 않은 불염난행(不染難行)이니, 세간에 머물지라도 세간법에 의해 오염되지 않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뛰어난 이해의 승해난행(勝解難行)이니, 대승에 대해서 아직 분명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대승의 광대하고 매우 심오함에 대해서 믿고 이해함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통달난행(通達難行)이니, 능히 보특가라와 법무아에 대해서 모두 통달하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수순하여 깨달음의 수각난행(隨覺難行)이니, 여래의 매우 심오하고 비밀스러운 말씀에 대해서 능히 수순하여 깨닫기 때문이며,

아홉째는 여의지 않고 오염되지 않는 불리불염난행(不離不染難行)이니, 생사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오염되지 않기 때문이며,

열째는 가행난행(加行難行)이니, 능히 모든 부처님의 안주를 닦아서 모든 장애를 해탈하고, 생사를 다하며, 의식적인 노력을 짓지 않는 불작공용(不作功用)으로, 항상 유정을 이롭게 하는 모든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釋曰:如說菩薩,修諸難行,此中何等,名爲難行?一切難行,十種所顯.於中不離不染難行者,不棄捨故,名爲不離.謂於生死不全捨離,亦不染污,此甚爲難.餘九難行,其義易了.

해석한다; 말한 바와 같이 모든 보살은 난행을 닦나니, 무엇을 난행(難行)이라 하는 것인가?

열 가지의 십난행(十難行)에 나타난 바와 같으니, 그 중에서 ‘여의지 않고 오염되지 않는 불리불염난행(不離不染難行)’이란 버리지 않기 때문에 여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생사에 대해서 전혀 여의지도 않고 역시 오염되지 않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나머지 아홉 가지의 난행에 대한 뜻은 알기 쉬운 것이다.

 

▶論曰:復次隨覺難行中,於佛何等秘密言詞,彼諸菩薩能隨覺了?謂如經言.

논문; 또한 따라서 깨달음의 수각난행(隨覺難行) 가운데, 부처님의 어떤 비밀스런 말씀에 대해서 그 보살들이 능히 따라서 깨닫는 것인가? 경전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것이다.

 

▶釋曰:爲顯秘密言詞意趣,故爲此問.如經言者,摠答前問,後當別釋.

해석한다; 비밀스런 말씀의 취지인 비밀의취(秘密意趣)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는 것은 앞의 질문에 대한 종합적인 대답이니, 마땅히 나중에 별도로 다시 해석하겠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7. 증상계학분(增上戒學分) 1

 

▶論曰:如是已說,因果修差別.此中增上戒殊勝,云何可見?如菩薩地,正受菩薩律儀中說.復次應知略由四種殊勝,故此殊勝:一由差別殊勝`二由共不共學處殊勝`三由廣大殊勝`四由甚深殊勝.

▷논문; 이상과 같이 수행의 원인과 결과의 차이인 인과수차별(因果修差別)를 말하였다.

이 중에서 매우 높은 계율의 증상계(增上戒)의 뛰어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보살지(菩薩地)의 정수보살율의(正受菩薩律儀, 십지경十地經ㆍ지지론地持論) 중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또한 대략 네 종류의 뛰어남에 의거함으로써 이것이 뛰어난 것이니,

첫째는 차이의 뛰어남의 차별수승(差別殊勝)에 의거하고,

둘째는 공통되거나 공통되지 않은 공불공학처(共不共學處) 계율의 수승함에 의거하며,

셋째는 광대함의 광대수승(廣大殊勝)에 의거하고,

넷째는 매우 심오한 심심수승(甚深殊勝)에 의거한다.

ㅡ3() 가운데 증상계 수행에 관하여 설명한, 제7 증상계학분(7 增上戒學分).

보살의 3 수행은 성문등과 차원이 다른 것이므로 3학의 명칭 앞에 증상(增上)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학처(學處), śikṣāpada의 번역어로서 계율을 말하며, 계율은 비구ㆍ비구니가 배워서 수행해야 할 근본이므로 학처라 한다.


▶釋曰:此中問答,辯諸菩薩,所學尸羅,於聲聞等,有大差別,故名殊勝.又此增上戒等三學,卽前所說,波羅蜜多自性所攝,

何故別立? 於先所說,波羅蜜多,別義建立,今當顯示. 爲顯展轉相因性故,別立三學,謂依尸羅發生靜慮,復依靜慮,發生般若.

해석한다; 여기서의 문답은 모든 보살이 배우는 계율을 말하는 것으로, 성문등에 비해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뛰어난 수승(殊勝)이라 말하며,

또한 이 매우 높은 계율의 증상계(增上戒) 등의 3학(學)은 앞에서 말한 바라밀다의 자성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별도로 건립하는 것인가? 앞에서 말한 바라밀다의 별의(別義)에서 건립되는 바를 이제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전전하면서 서로 원인이 되는 인성(因性)을 나타내기 위해서 3학을 별도로 건립한 것이니, 이른바 계율에 의지해서 정려(精慮)가 발생하고, 다시 정려(精慮)에 의지해서 반야(般若, 지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論曰:差別殊勝者,謂菩薩戒有三品別:一律儀戒`二攝善法戒`三饒益有情戒.此中律儀戒,應知二戒建立義故.攝善法戒,應知修集一切佛法建立義故.饒益有情戒,應知成熟一切有情建立義故.

논문; 차이의 뛰어남의 차별수승(差別殊勝)이란, 보살의 계율에 세 가지 품류의 차이인 삼품별(三品別)이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율의계(律儀戒, 섭율의계)이고, 둘째는 선법을 포섭하는 섭선법계(攝善法戒)이며,

셋째는 유정을 널리 이롭게 하는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 삼취정계)이다.

여기서 율의계는, 율의계를 근본으로 해서 섭선법계와 요익유정계의 두 계율을 건립하는 의미라고 알아야 하나니, 섭선법계는 모든 불법을 닦아서 모으는 것을 건립하는 뜻이며,  

요익유정계는 모든 유정을 성숙시키는 것을 건립하는 뜻이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한다.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 대승보살이 닦는 계법인 3취정계(聚淨戒)이다. 대승과 소승의 모든 계법이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취(聚)라고 하고, 그 계법의 자성이 청정하므로 정(淨)이라 한다.

*삼취정계(三聚淨戒), 대승보살이 닦는 계법으로,  

‘취(聚)’는 모았다는 뜻으로, 계율의 근본취지를 셋으로 묶어 모았다는 뜻이며, 대승과 소승의 모든 계법 모두가  가운데 속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이라고 하고,  계법의 자성이 청정하므로 ()이라고 한다.

율의계(律儀戒), 섭율의계(攝律儀戒)의 준말이며, 수계작법(受戒作法)에 의해 5계ㆍ10계ㆍ구족계 등을 받아 지녀서, 몸이나 입으로 짓는 악업을 따로따로 해탈케 하는 계율이므로 별해탈계(別解脫戒)라고도 한다.
진제 역본인 진본(陳本)에는 섭정호계(攝正護戒)로, 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역본인 수본(隋本)에는 수호계(守護戒)로 되어 있다.

섭선법계(攝善法戒), 일체의 선(善)을 모두 하나하나 실행하는 것을 계(戒)로 삼아서 일체의 선(善)을 닦는 계(戒)로써, 작선문(作善門), 작지계(作持戒)라고도 한다. 
요익중생계(饒益衆生戒) 또는 섭중생계(攝衆生戒) 선을 쌓아가면서 중생에게 선을 베풀고 이타문(利他門)으로 일체의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釋曰:差別殊勝,謂聲聞等,唯有一種律儀戒,無攝善法戒,及饒益有情戒.菩薩具三,是故殊勝.

해석한다; ‘차이의 뛰어남의 차별수승(差別殊勝)’이란, 성문등에는 오직 한 가지 율의계만 있을 뿐, 섭선법계닌와 요익유정계가 없으나, 보살은 세 가지 모두를 구족하는 까닭에 뛰어난 수승(殊勝)이라 말하는 것이다.


▶論曰:共`不共學處殊勝者,謂諸菩薩,一切性罪,不現行故,與聲聞共;相似遮罪,有現行故,與彼不共.於此學處,有聲聞犯,菩薩不犯;有菩薩犯,聲聞不犯.菩薩具有身語心戒,聲聞唯有身語二戒,是故菩薩心亦有犯,非諸聲聞.以要言之,一切饒益有情,無罪身語意業,菩薩一切皆應現行`皆應修學.如是應知說,名爲共`不共殊勝.

논문; 공통되거나 공통되지 않는 공불공학처(共不共學處) 계율의 수승이란, 보살은 성죄(性罪, 자성죄)가 현행하지 않기 때문에 성문과 공통적으로 서로 비슷하며, 가벼운 차죄(遮罪)는 현행하기 때문에 공통되지 않은 것이다. 

이 계율(차죄)에서 성문에게는 범하는 것이지만 보살에게는 범하는 것이 아닌 것이 있으며, 

보살에게는 범하는 것이지만 성문에게는 범하는 것이 아닌 것이 있다.

보살은 신(身)ㆍ어(語)ㆍ심(心)의 계율을 갖추지만, 성문은 오직 신(身)ㆍ어(語)의 두 계율만 있을 뿐이니,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심(心)으로도 범하는 것이 있지만 성문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면서도 무죄인 신업ㆍ구업ㆍ의업은 보살에게는 일체가 다 마땅히 현행해야 하고, 모두 마땅히 닦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공통되거나 공통되지 않은 것의 공불공수승(共不共殊勝)이라 이름한다.

 

성죄(性罪), 자성죄(自性罪)ㆍ실죄(實罪)라고도 하며, 살생ㆍ도둑질ㆍ삿된 음행 등은 어떤 환경에 있는 이가 행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죄악 행위이기 때문에 성죄라 하며, 성죄에 대한 금계(禁戒)를 성계(性戒)ㆍ성중계(性重戒)ㆍ주계(主戒)ㆍ구계(舊戒)라고 한다.

차죄(遮罪), 제죄(制罪)ㆍ차제(遮制)라 하며, 여러 가지 과실을 수반하기 때문에, 또 세간의 비방을 피하기 위해서 석존이 제정한 계를 범하는 가벼운 죄를 말한다. 음주는 대개 차죄라고 한다. 차죄에 대한 금계를 차계(遮戒)ㆍ이악계(離惡戒)ㆍ객계(客戒)ㆍ신계(新戒)라 하며, 성계가 제정되지 않더라도 성죄는 죄이기 때문에 범해서는 안 되지만, 차죄는 차계가 제정되어야 비로소 죄가 되는 것이다. 


▶釋曰:共`不共中,一切性罪,謂殺生等,說名爲共. 相似遮罪, 謂掘生地斷生草等, 說名不共. 於此學處者,謂後學處.有聲聞犯`菩薩不犯者,如兩安居,觀益有情,輒行經宿.

해석한다; 공통되거나 공통되지 않은 공불공수승(共不共殊勝) 가운데에서,

모든 ‘성죄(性罪, 자성죄)’란, 살생 등으로서 공통적으로 서로 비슷하며,

‘가벼운 차죄(遮罪)’란, 생물이 사는 땅을 파헤치거나 살아 있는 풀을 끊는 것 등으로서 공통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 계율에 있어서의 차학처(此學處)’란, 나중의 학처(學處, 계율)을 말하는 것이며,

‘성문에게는 범하는 것이지만 보살에게는 범하는 것이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이란, 우안거(雨安居)에도 유정을 이롭게 하는 것을 관하기 때문에 유행하면서 숙박하는 것과 같다.

ㅡ우안거(雨安居) 중에는 유행(遊行) 금하지만,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있다면,  금제(禁制) 지키지 않고 유행하여 다른 곳에서 숙박할  있음을 말한다.

 

有菩薩犯`聲聞不犯者,謂觀有益,而故不行.

‘보살에게는 범하는 것이지만 성문에게는 범하는 것이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이란, 이익이 있음을 관할지라도 일부러 행하지 않는 것이다.

ㅡ바로 앞의 경우에 일부러 유행하지 않음은 이타를 목적으로 하는 보살에게는 범하는 것이지만, 자리 본위(本位) 성문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是故菩薩心亦有犯,非諸聲聞者,謂唯內起欲等尋思,菩薩成犯,非聲聞等.一切饒益有情,無罪身`語`意業,菩薩一切皆應現行`皆應修學者,謂能饒益,而無有罪,如是三業,菩薩應修. 或雖饒益而非無罪,如以女等非法之物,授與他人,爲遮此事,故說無罪.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마음(心)으로도 범하는 것이 있지만 성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란, 보살은 오직 내면적으로만 탐욕 등의 분별을 일으킬지라도 범하는 것이 되지만 성문등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며, 

‘보살에게는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고 무죄의 신업ㆍ구업ㆍ의업의 일체 모두가 마땅히 현행해야 하고,

'그 모두를 마땅히 닦아야 한다’는 것이란, 능히 이롭게 하면서도 이와 같은 무죄(無罪)의 3업(業)을 보살은 마땅히 닦아야 한다는 것이며, 

혹은 이롭게 하더라도 죄가 없지 않는 것이 있으니, 여색(女色) 등의 법이 아닌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러한 것을 막기 위해서 무죄라 말하는 것이다.

 

▶論曰:廣大殊勝者,復由四種廣大故,一由種種無量學處廣大故`二由攝受無量福德廣大故`三由攝受一切有情利益安樂意樂廣大故`四由建立無上正等菩提廣大故.

논문; 광대한 것의 뛰어남인, 광대수승(廣大殊勝)은 다시 네 종류 모두가 광대하기 때문이니,

첫째는 갖가지의 무량한 학처(學處, 계율)이 광대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무량한 복덕을 섭수함이 광대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모든 유정의 이익과 안락의 의요(意樂)를 섭수하는 것이 광대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무상정등보리를 건립하는 것이 광대하기 때문이다.

 

▶釋曰:種種無量學處廣大者,謂諸菩薩,所修學處,亦是種種,亦是無量,由此於彼一切有情,作成熟事,及攝受事故.攝受無量福德廣大者,謂諸菩薩,攝受無量福德資糧,非聲聞故.攝受一切有情利益安樂意樂廣大者,謂於諸有情,勸令修善,名利益意樂.若卽於此補特伽羅,願由彼善,當得勝果,名安樂意樂.

▷해석한다; ‘갖가지의 무량한 학처(學處, 계율)의 광대함’이란, 모든 보살이 닦는 학처(계율)는 여러 가지로써 무량한 것이니, 이에 의거해서 그 모든 유정을 성숙시키는 성숙사(成熟事)와 섭수하는 섭수사(攝受事)를 짓기 때문이며, 

‘무량한 복덕을 섭수함이 광대하기 때문’이란, 모든 보살은 무량한 복덕의 자량을 섭수하나, 성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유정의 이익과 안락의 의요(意樂)를 섭수함이 광대하기 때문’이란, 모든 유정들에게 선을 닦게 권장하는 것을 이익의 의욕인, 이익의요(利益意樂)라 이름하는 것이며,

이 보특가라(유정)에 대해서 그 선(善)으로 인하여 장차 뛰어난 승과(勝果)를 얻을 수 있기를 원한다면 안락의 의욕인 안락의요(安樂意樂)라 하는 것이다.

이익의요(利益意樂) 현재 () 처하여 악을 여의는 이고,

안락의요(安樂意樂)  선이 미래의 과보에 미치는  말한다.

 

建立無上正等菩提廣大者,謂諸菩薩,由此尸羅,建立無上正等菩提,非聲聞故.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무상정등보리를 건립하는 것이 광대하기 때문’이란, 모든 보살은 이 계율에 의거해서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건립하나, 성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論曰:甚深殊勝者,謂諸菩薩,由是品類方便善巧,行殺生等十種作業,而無有罪,生無量福,速證無上正等菩提.又諸菩薩,現行變化身`語兩業,應知亦是甚深尸羅.由此因緣,或作國王示行種種惱有情事,安立有情毘奈耶中.又現種種諸本生事,示行逼惱諸餘有情,眞實攝受諸餘有情,先令他心,深生淨信,後轉成熟.是名菩薩所學尸羅,甚深殊勝.

논문; 매우 심오한 것의 뛰어남의 심심수승(甚深殊勝)이란, 모든 보살은 이 품류의 훌륭한 방편에 의거해서 살생 등 열 가지의 십악업(十惡業)을 행할지라도 죄가 없고, 무량한 복을 일으켜서 조속히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하며, 

또한 모든 보살은 변화해서 신업과 구업을 현행하나니, 이것 역시도 매우 심오한 계율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혹은 국왕이 되어 유정을 괴롭히는 갖가지 일들을 시행하여 유정을 계율 안에 안립하며,

또한 갖가지 본생(本生)의 일을 나타내어서 나머지의 유정들을 핍박하는 일을 시행하기도 하나, 진정으로는 나머지 모든 유정을 섭수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먼저 남의 마음으로 하여금 깊이 청정한 믿음이 생겨나게 하는, 즉 변화의 방편을 나타내어서 먼저 남들로 하여금 보살을 믿게 만든 후에 전전히 성숙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살이 배우는 시라(尸羅, 계율)의 매우 심오하고 뛰어난, 심심수승(甚深殊勝)이라 이름한다.

 

▶釋曰:甚深殊勝中,謂諸菩薩,由是品類方便善巧者,此中顯示,如是菩薩,如是方便善巧功能.謂諸菩薩,若如是知如是品類補特伽羅,於此不善無閒等事,將起加行.以他心智,了知彼心,無餘方便,能轉彼業.如實了知彼由此業定退善趣,定往惡趣,

해석한다; 매우 심오하고 뛰어난, 심심수승(甚深殊勝)한 것 중에서

‘모든 보살은 이 품류의 훌륭한 방편에 의거해서’란, 여기서는 이와 같은 보살의 이러이러한 훌륭한 방편의 작용력을 나타낸 것이며,

모든 보살은 “이러한 품류의 보특가라는 이 불선과 무간지옥 등에 대해서 장차 가행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아는 것이니, 남의 마음을 아는 타심지(他心智)로써 그의 마음을 알지만, 다른 방편으로는 능히 그의 업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니, 그가 이 업으로 인하여 반드시 살기 좋은 선취(善趣)에서 물러나서 결정적으로 살기 괴로운 악취(惡趣)로 갈 것이라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다.

 

如是知已生如是心:我作此業,當墮惡趣,我寧自往,必當脫彼.於彼現在,雖加少苦,令彼未來,多受安樂.是故菩薩譬如良醫,以饒益心,雖復殺之,而無少罪,多生其福,由多福故,疾證無上正等菩提.如是等戒,最爲甚深.

이렇게 알고 나서 마음먹기를 “내가 이 업을 지으면 장차 살기 괴로운 악취(惡趣)에 떨어지겠지만, 오히려 스스로 그곳에 가서 장차 반드시 그를 해탈시켜야 할 것이다.

현재에는 그에게 작은 고통을 가하여야 할지라도, 미래에는 그에게 안락함을 많이 주어야 하리라”고 하는 것이므로, 비유하자면, 보살은 훌륭한 의사와 같아서, 이롭게 하려는 마음 때문에 그를 죽이더라도 약간의 죄도 없고 많은 복을 일으키는 것이다.

많은 복에 의거함으로써 조속히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계율을 지극히 심심(甚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又諸菩薩,現起變化身`語二業,當知亦是甚深尸羅. 由此道理,或作國王現作種種惱有情事,安立有情,毘奈耶中.變化自體,名爲變化,此中應說,無厭足王,化導善財童子等事. 又現種種諸本生事者,如毘濕婆安呾羅等諸本生事.此中菩薩,以其男女,施婆羅門,皆是變化.示行逼惱諸餘有情,眞實攝受諸餘有情者,謂諸菩薩,終不逼惱餘實有情,攝受其餘實有情故,如是亦名甚深殊勝.

‘또한 모든 보살은 변화해서 신업과 구업을 현행하나니, 이 역시 매우 심오한 계율의 심심시라(甚深尸羅)라고 알아야 한다.’ 이 도리에 의거해서 혹은 국왕이 되어 유정을 괴롭히는 갖가지 일을 행할지라도, 유정을 비나야(毘奈耶, 계율) 안에 안립하는 것이니, 자체 변화함을 변화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여기서 마땅히 무염족왕(無厭足王)이 선재동자를 교화하는 등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갖가지 본생의 일을 나타낸다’는 것은 비습바안달라(毘濕婆安呾羅, 소달다태자) 등의 모든 본생의 일이며, 여기서 보살이 바라문에게 보시한 남녀는 모두 변화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른 유정을 핍박하는 일을 시행함으로써, 진정으로 모든 유정을 섭수한다’는 것이란, 핍박하는 유정은 변화한 것이며, 이로 인하여 진짜 유정을 섭수하여 이익되게 한다는 뜻으로, 모든 보살은 변화한 유정을 핍박하면서, 그 나머지의 진짜 유정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을 매우 심오함의 심심수승(甚深殊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무염족왕(無厭足王)은 선재동자가 17 번째로 찾아간 선지식이며, 제7 무착행(無着行)으로 갖가지의 역행(逆行)의 방편으로 다양한 악중생을 조복 받아 이롭게 하는 것에 싫어함이 없음을 표하는 것으로, 무염족(無厭足)이라는 것은 ‘환술과 같은 여환방편(如幻方便)’으로 교화에 집착하는 바가 없으므로 피곤하거나 싫어함이 없다는 뜻이다. 무염족왕에 대해서는 "39 입법계품 7 (入法界品)"를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소달다(蘇達多) 수닷타의 음역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한 사위성의 장자(長者)이며, 빈궁자를 돕는 데 헌신한 까닭에 급고독(給孤獨) 장자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기타(祇陀) 태자가 소유하고 있던 원림(苑林)을 구입하여 기수급고독원을 지어서 헌납한 것으로 유명하다. 수달다(須達多), 선시(善施), 선온(善溫)이라고도 한다.

 

▶論曰:由此略說,四種殊勝,應知菩薩尸羅律儀最爲殊勝.如是差別菩薩學處,應知復有無量差別,如毘奈耶瞿沙方廣契經中說.

논문; 이렇게 대략 네 종류의 수승(殊勝)을 말함으로써, 보살의 시라(尸羅, 계율)과 율의를 가장 뛰어난 것으로 삼으니, 이와 같은 차이가 보살의 계율인 것이다.

다시 수 많은 차이가 있으니, '비나야구사방광계경(毘奈耶瞿沙方廣契經)'에서 말한 바와 같다다고 알아야 한다.

ㅡ비나야구사(Vinayakośa) () 집대성이나, 중국에는 전역(傳譯)되지 않은 것이다.

 

▶釋曰:如是四種略說差別,於『毘奈耶瞿沙經』中,廣說復有百千差別.

해석한다; 이상과 같은 네 종류의 간략한 차이를 말하였으나, '비나야구사경'에서는 다시 백천 가지 차이가 있음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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