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 4권
세친(世親) 보살 지음, 현장(玄奘) 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① 4
▶論曰:又於一切,所依轉時,似種種相二影像轉,謂唯似義影像及分別影像.
又一切處,亦似所觸影像而轉,有色界中,卽此意識依止身故,如餘色根,依止於身.
▷논문; 또한 모든 소의(所依, 의지처)에서 전전할 때 갖가지의 상에 비슷한 두 가지의 영상이 전전하나니,
이른바 오직 의(義, 대상)로 비슷하게 현현하는 의영상(義影像)과 분별영상(分別影像)이다.
또한 신식(身識)의 대상인 촉감의 사경(似境)인, 모든 곳에서도 역시 접촉된 영상과 비슷하게 전전하나니,
유색계에서 이 의식(意識)은 몸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나머지 감각기관인, 색근(色根)이 몸에 의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釋曰:或有難言:眼等諸根,無有分別,是故意識,依彼轉時,應無分別;
如染污意,爲雜染依,令雜染轉,此亦應爾.
▷해석한다; 혹 어떤 이는 비판하여 말하기를, “안근 등 모든 감각기관인, 색근(色根)에는 분별이 없는 까닭에, 의식이 그것들을 의지하여 전전할 때에도 마땅히 분별이 없어야 하며,
염오의는 잡염의 의지처가 되어서 잡염으로 하여금 전전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 역시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하였다.
故次解言: 又於一切, 所依轉時, 似種種相二影像轉,謂唯義影像及分別影像. 此中一切所依者,謂眼等所依.
似種種相二影像轉者, 謂唯似義影像及分別影像, 二句解釋. 由此二句, 說唯一識,一分唯義影像顯現, 第二分別此義相生, 是故前說無有過失.
그에 따라서, 이제 해석하여 말하겠으니,
“또한 소의(所依, 의지처)에서 전전할 때 갖가지의 상에 비슷한 두 가지 영상이 전전하나니, 이른바 오직 대상의 영상인 의영상(義影像)과 분별영상(分別影像)이다”라고 한 것에서,
‘모든 소의(所依, 의지처)’란 안식(眼識) 등의 의지처를 말하는 것이고,
‘갖가지 상에 비슷한 두 가지 영상이 전전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오직 의(義, 대상)로 비슷하게 현현한 의영상과 분별영상이라는 두 문구는 해석이고,
이 두 문구로 인하여, 오직 하나의 식(識)에서, 그 한 부분에는 오직 대상(義)의 영상이 현현하고, 다른 부분에는 이 대상(義)을 분별하는 상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설한 것에 과실이 없는 것이다.
又一切處,亦似所觸影像而生,謂有色處於定位中,無五識時,在色身中, 內領受起,如餘色根,依止於身者, 如餘眼等,有色諸根,依止於身.由此諸根,依止身故,於自所依,能起損益.意識亦爾, 依止身故, 應知於身, 能作變異.
‘또한 일체처(一切處)에서도 역시 접촉된 영상과 비슷하게 생겨난다’는 것이란, 유색계에서의 선정 중에서 5식(識)이 없을 때에는 몸(身)에 있어서 그 내면으로 받아들여서 일으키는 것이며,
‘나머지 감각기관(根)이 몸에 의지함과 같다’는 것은, 나머지 안근 등의 감각기관이 몸(身)에 의지하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 모든 감각기관(根)은 몸(身)에 의지함으로써 스스로의 의지처에 대해서 능히 손익(損益)을 일으키는 것이다.
의식 역시도 그러한 것으로, 몸(身)을 의지하기 때문에 몸(身)에 대해서 변이(變異)를 지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復有別義,謂如身根依止於身,若有外緣,所觸現前, 身根便似所觸相起.卽此起時,於自依身,能作損益.意識亦爾,依止身故,似彼所觸影像生時,於所依身,能作損益.
또한 별도의 의미가 있으니, 몸(身)을 의지하는 것과 같이, 만약 외연(外緣, 외부대상)이 있어서 소촉(所觸, 접촉의 대상)이 현전한다면, 신근(身根)에 소촉(所觸, 접촉의 대상)과 비슷한 모습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이 일어날 때에는 스스로의 의지처인 몸(身)에 대해서 능히 손익(損益)을 지으며,
의식 역시도 그러한 것은 몸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 소촉(所觸, 접촉의 대상)과 비슷한 영상이 일어날 때 의지처인 몸에 대하여 능히 손익을 짓는 것이다.
▶論曰:此中有頌:
▷논문;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若遠行獨行, 無身寐於窟, 調此難調心, 我說眞梵志.”
멀리 작용하거나 홀로 작용하고, 몸(身)이 없는 것으로서, 동굴에서 잠자는 것이라.
이 조복하기 어려운 난조심(難調心)을 조복하는 이를, 나는 참다운 범지(梵志)라 말하노라.
범지(梵志), ‘청정한 행을 하는 자’라는 의미로서, 바라문의 네 기간의 생활 가운데 제1기이다. 이 기간에는 스승에게 가서 수학하면서 훈식(熏食)ㆍ사치ㆍ정욕을 금하는 등 여러 가지 고행을 하며 성지(聖智)에 이르기 위해 정진한다. 이 기간을 마치면 집에 돌아가 결혼하여 살다가 나중에 다시 숲으로 가서 공부하며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교화활동을 한다.
▶釋曰:彼諸菩薩,爲成此義,引阿笈摩伽他爲證. 若遠行者,能緣一切,所緣境故.言獨行者,無第二故.言無身者,遠離身故.寐於窟者,於身窟中,而居止故.言調此者,作自在故.難調心者,性暴惡故.
▷해석한다; 그 여러 보살은 앞에서 말한 바대로 오직 하나의 의식만 있고 별도로 오식이 없다고 주장하는 뜻을 성립시키기 위해 아급마(아함)의 게송을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니,
‘멀리 작용한다’는 것은 능히 모든 소연(所緣, 인식대상)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며,
‘홀로 작용한다는 독행(獨行)’이란, 하나의 의식 이외에 다른 식, 즉 제이(第二)가 없다는 것이며,
‘신체가 없다는 무신(無身)’이란, 신체를 멀리 여의는 까닭이며,
‘동굴에서 잠잔다’는 것이란, 식이 신체라는 동굴에 머문다는 것이며,
‘이것을 조복한다는 것’은 작용함이 자재(自在)한 것이며,
‘조복하기 어려운 마음의 난조심(難調心)’이란, 성품이 포악한 것이다.
▶論曰:又如經言:如是五根所行境界,意各能受,意爲彼依.
▷논문; 또한 경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식은 이러한 5근(五根)이 행해지는 경계를 각각 능히 수용하나니, 의식이 그것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釋曰:復引餘教,證成此義.如是五根所行境界,意各能受者,諸根所行,名爲境界.如是境界,意各能受,悉能分別一切法故.一一各各,能領受故,名各能受.意爲彼依者,是彼諸根,能生因故,以意散亂,彼不生故.
▷해석한다; 다시 다른 경전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이 의미를 증명하였다.
‘의식은 이러한 5근이 행해지는 경계를 각각 능히 수용한다’는 것이란,
모든 감각기관의 제근(諸根)이 행하는 바를 경계라 이름하며, 이러한 경계를 의식이 각각 능히 수용하여서, 능히 일체법을 분별하기 때문이며, 각각 하나하나를 능히 받아들이기 때문에 능히 각각 수용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의식은 그것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이란, 그 모든 감각기관의 제근(諸根)이 능히 생겨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고, 의식이 산란하면 그것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論曰: 又如所說十二處中,說六識身皆名意處.
▷논문; 또한 말씀한 바와 같이 12처설(處說)에서는 6 가지 식을 말하여서 모두 의근의 의처(意處, 포섭처)라고 이름한다.
▶釋曰:復有聖教,能證此義,謂六識身,皆說名意,無餘識名.由六識身,皆是意處,聖所說故,是故得知唯有意識.
▷해석한다; 또한 성스러운 가르침이 있어서 능히 이 의미를 증명하였으니, 이른바 여섯 가지 육식(六識) 모두를 의(意)라 이름하고 다른 식의 명칭이 없는 것으로, 여섯 가지의 육식이 모두 의근의 포섭처인 것은 성인이 말씀한 바에 의거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오직 의식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論曰:若處安立阿賴耶識識爲義識,應知此中, 餘一切識,是其相識,若意識識及所依止,是其見識.由彼相識, 是此見識, 生緣相故,似義現時,能作見識生依止事.如是名爲安立諸識,成唯識性.
▷논문; 어떤 곳에서는, 아뢰야식의 식을 안립하여 의식(義識)으로 삼으니, 여기에서의 나머지 모든 식이란 그 상분(객관)의 식이라고 알아야 하며,
의식(義識)의 식과 소의지(所依止, 의지처)는 그 견분(주관)의 식으로, 그것의 상분의 식에 의거하는 것이다.
이 견분의 식이 일어나는 연상(緣相, 인식대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니,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할 때 능히 견분의 식이 일어나는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함을 이름하여 모든 식을 안립하고 유식성(唯識性)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이다.
▶釋曰:於阿賴耶識,亦得安立相`見二識.謂阿賴耶識,以彼意識及所依止,爲其見識,眼等諸識,爲其相識,以一切法,皆是識故.由彼相識者,謂眼等諸識.是此見識生緣相故者,是見生因,由所緣性,名見生因. 似義現時,能作見識生依止事者,能於彼見,故名見識. 卽此見識,似義現時,彼諸相識,與意見識,能作相續不斷住因,是故說名生依止事.
▷해석한다; 아뢰야식에 대해서도 역시 상분의 식과 견분의 식을 안립할 수 있으니,
이른바 아뢰야식은 그 의식과 소의지(所依止, 의지처)로써 그 견분의 식을 삼고,
안식 등의 여러 식을 그 상분의 식으로 삼으니, 일체법은 모두 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상분의 식에 의거한다’는 것은 안식 등의 여러 식을 말하는 것이며,
‘이 견분의 식이 일어나는 연상(緣相, 인식대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란 견분이 일어나는 원인인 것으로, 인식대상의 성품으로 인하여 견분이 일어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대상으로 비슷하게 현현할 때 능히 견분의 식이 일어나는 의지처가 된다’는 것은 능히 그것을 보기 때문에 견분의 식이라 이름하는, 즉 이 견분의 식이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할 때, 그 모든 상분의 식은 의식의 견분의 식과 함께 능히 상속하여서 끊임없이 머무는 원인이 되는 것이므로, 일어나는 의지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論曰:諸義現前分明顯現,而非是有,云何可知? 如世尊言:若諸菩薩,成就四法, 能隨悟入一切唯識, 都無有義.
▷논문; 모든 대상들이 눈앞에 분명히 현현하거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모든 보살이 네 가지의 사법(四法)을 성취하면, 일체가 오직 식인 유식(唯識)으로서 대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과 같다.
ㅡ이하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한 보살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이 네 가지 내용은 외적인 사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一者成就相違識相智,如餓鬼`傍生及諸天`人,同於一事,見彼所識,有差別故;
첫째는 다른 이의 식의 상에 대한 지혜인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를 성취하는 것으로, 아귀ㆍ축생ㆍ여러 천인들과 같이, 동일한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그 인식하는 바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ㅡ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다르면 그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같은 물에 대해서도 아귀는 고름이나 피가 가득한 강으로 보고, 고기는 살아가는 장소나 통로로 보고, 천인들은 보석으로 장식한 땅으로 보고, 인간은 깨끗한 물 또는 파도로 보는 등 제각가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나, 만약 외적인 사물이 실재한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二者成就無所緣識現可得智,如過去`未來夢影緣中,有所得故;
둘째는 소연(所緣, 인식대상이) 없는 식을 현재 얻는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무소연식현가득지(無所緣識現可得智)를 성취하는 것이니, 과거ㆍ미래ㆍ꿈의 영상의 대상 중에서 얻는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이기 때문이다.
ㅡ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이 현실적으로 있음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과거나 미래의 일, 꿈속의 대상, 물이나 거울에 비친 영상 등은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三者成就應離功用無顚倒智,如有義中,能緣義識,應無顚倒,不由功用智眞實故;
셋째는 노력하지 않아도 전도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응이공용무전도지(應離功用無顚倒智)를 성취하는 것이니, 어떠한 대상으로부터 능히 대상을 반연하는 식과 같이, 전도되지 않는 것이 노력에 의하지 않고서도 지혜가 진실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ㅡ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 즉 수행하지 않고서 오류가 없는 무전도(無顚倒)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만약 인식대상이 인식되는 것과 같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범부도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노력 정진하지 않고도 자연히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四者成就三種勝智隨轉妙智.何等爲三?
넷째는 세 가지의 뛰어난 지혜인 승지(勝智)를 따라서 전전함이 묘하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수삼지전지(隨三智轉智)를 성취하는 것이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ㅡ다음의 세 가지 지혜를 따라 인식대상이 갖가지 존재로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一得心自在,一切菩薩,得靜慮者,隨勝解力,諸義顯現;
첫째, 마음의 자재를 얻은 보살로서 정려를 얻은 자는 뛰어난 이해의 승해력(勝解力)을 따라 모든 의(義, 대상)이 현현하는 것이며,
ㅡ자재자(自在者)의 지혜를 따라 바뀌는, 즉 마음이 자재함을 얻은 보살은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 예를 들면 땅을 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 등이다.
二得奢摩他,修法觀者,纔作意時,諸義顯現;
둘째, 사마타(奢摩他)를 얻어서 법관(法觀)을 닦는 이가 작의할 때에는 곧 모든 대상이 현현하는 것이며,
ㅡ관찰자의 지혜를 따라 바뀌는 것으로, 즉 지관(止觀)을 닦는 유가사(瑜伽師)가 부처님의 교법을 관찰해서 사색할 때, 어떤 대상이 사색하는 바대로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三已得無分別智者,無分別智現在前時,一切諸義,皆不顯現.
셋째, 무분별지혜를 얻은 자의 무분별지혜가 현전할 때에는, 모든 대상이 다 현현하지 않는 것이다.
ㅡ무분별지를 따라 바뀌는 것으로, 무분별지가 일어날 때에는 어떠한 인식대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由此所說三種勝智隨轉妙智,及前所說三種因緣,諸義無義道理成就.
여기서 말한 세 가지 뛰어난 지혜인 삼종승지(三種勝智)가 전전하는 승묘한 지혜와 앞에서 말한 세 가지의 인연인 삼종인연(三種因緣)에 의거해서 모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리가 성취되는 것이다.
▶釋曰:相違識相智者,謂能了知相違者,識所緣義相.無所緣識,現可得智者,謂現見有雖無所緣而識得生,如過去等.
▷ 해석한다; ‘다른 자의 식의 모습에 대한 지혜인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란 능히 다른 이의 식의 인식대상의 상을 아는 것이다.
‘인식대상이 없는 식을 현재 얻는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무소연식현가득지(無所緣識現可得智)’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인식대상이 없지만 식이 생겨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과거 등과 같은 것이다.
應離功用無顚倒智者,謂能了知若如是義,如所顯現,卽是實有,離起對治,無顚倒智,任運應成.三種勝智隨轉妙智者,謂能了知三種勝智,境隨轉義.
‘노력하지 않아도 전도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응이공용무전도지(應離功用無顚倒智)’란, 만약 이러한 대상이 현현하는 것과 같이, 이러란 것들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다스림의 대치(對治)를 일으키지 않고도 전도됨이 없는 지혜가 자연히 성취된다는 것을 능히 아는 것이다.
‘세 가지 뛰어난 지혜에 따라서 전전함이 묘하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수삼지전지(隨三智轉智)’는 세 가지의 뛰어난 지혜의 경지를 따라 전전하는 의미를 능히 아는 것이다.
得心自在者,得心調順,有所堪能.得靜慮者,謂諸聲聞及獨覺等,已得靜慮.
隨勝解力,諸義顯現者,謂若願樂地成其水,如意則成,火等亦爾.
‘마음의 자재를 얻는다는 득심자재(得心自在)’란, 마음의 조복을 얻어서 감당 능력이 있게 되는 것이고,
‘정려를 얻은 득정려자(得靜慮者)’란, 모든 성문과 독각 등은 이미 정려를 얻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뛰어난 승해력(勝解力)을 따라서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는 것이란, 만약 땅에서 물을 이루려는 소원을 세우면, 곧 뜻대로 성취되는 것으로, 불 등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得奢摩他者,得三摩地,修法觀者,於契經等,策勤觀察. 纔作意時,諸義顯現者, 隨於一義, 如如作意, 如是如是, 非一品類境相顯現. 無分別智,現在前時,一切諸義,皆不顯現者,若如顯現義,卽如是實有,應不得有無分別智.無分別智,若是實有,決定應許諸義皆無.
‘사마타를 얻는다는 득사마타(奢摩他)’란, 삼마지를 얻는 것이고,
‘법의 관찰을 닦는 수법관(修法觀)’이란, 계경(契經) 등을 부지런히 관찰하는 것이고,
‘작의할 때 곧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는 것은, 하나의 대상(義)을 따라 작의하는 그대로 이렇게 이렇게 하나가 아닌 품류의 대상의 모습인 경상(境相)이 현현하는 것이고,
‘무분별지혜가 현전할 때에는 모든 대상(義)이 다 현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만약 현현하는 대상(義)과 같이 곧 그렇게 실재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무분별지혜를 얻지 않아야 하고,
무분별지혜가 실체라면 결정적으로 모든 대상(義)이 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4권 6 (1) | 2025.03.15 |
---|---|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4권 5 (0) | 2025.03.14 |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4권 3 (0) | 2025.03.13 |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4권 2 (0) | 2025.03.13 |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4권 1 (1) | 2025.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