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4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① 4

 

▶論曰:又於一切,所依轉時,似種種相二影像轉,謂唯似義影像及分別影像.

又一切處,亦似所觸影像而轉,有色界中,卽此意識依止身故,如餘色根,依止於身.

논문; 또한 모든 소의(所依, 의지처)에서 전전할  갖가지의 상에 비슷한  가지의 영상이 전전하나니,

이른바 오직 의(義, 대상)로 비슷하게 현현하는 의영상(義影像)과 분별영상(分別影像)이다. 

또한 신식(身識)의 대상인 촉감의 사경(似境)인, 모든 곳에서도 역시 접촉된 영상과 비슷하게 전전하나니,

유색계에서  의식(意識)은 의지하기 때문이니, 나머지 감각기관인, 색근(色根)이 의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釋曰:或有難言:眼等諸根,無有分別,是故意識,依彼轉時,應無分別;

如染污意,爲雜染依,令雜染轉,此亦應爾.

해석한다; 혹 어떤 이는 비판하여 말하기를, “안근  모든 감각기관인, 색근(色根)에는 분별이 없는 까닭에, 의식이 그것들을 의지하여 전전할 때에도 마땅히 분별이 없어야 하며,  

염오의는 잡염의 의지처가 되어서 잡염으로 하여금 전전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 역시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하였다.

 

故次解言: 又於一切, 所依轉時, 似種種相二影像轉,謂唯義影像及分別影像. 此中一切所依者,謂眼等所依.

似種種相二影像轉者, 謂唯似義影像及分別影像, 二句解釋. 由此二句, 說唯一識,一分唯義影像顯現, 第二分別此義相生, 是故前說無有過失.

그에 따라서, 이제 해석하여 말하겠으니, 

“또한 소의(所依, 의지처)에서 전전할  갖가지의  비슷한  가지 영상이 전전하나니, 이른바 오직 대상의 영상인 의영상(義影像)과 분별영상(分別影像)이다”라고 한 것에서,

‘모든 소의(所依, 의지처)’란 안식(眼識) 등의 의지처를 말하는 것이고,

‘갖가지  비슷한  가지 영상이 전전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오직 의(義, 대상) 비슷하게 현현한영상과 분별영상이라는  문구는 해석이고, 

  문구로 인하여, 오직 하나의 식(識)에서, 그  부분에는 오직 대상(義) 영상이 현현하고, 다른 부분에는  대상(義) 분별하는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것에 과실이 없는 것이다.

 

又一切處,亦似所觸影像而生,謂有色處於定位中,無五識時,在色身中, 內領受起,如餘色根,依止於身者, 如餘眼等,有色諸根,依止於身.由此諸根,依止身故,於自所依,能起損益.意識亦爾, 依止身故, 應知於身, 能作變異.

‘또한 일체처(一切處)에서도 역시 접촉된 영상과 비슷하게 생겨난다’는 것이란, 유색계에서의 선정 중에서 5식(識)이 없을 때에는 몸(身) 있어서 그 내면으로 받아들여서 일으키는 것이며, 

‘나머지 감각기관(根)이 의지함과 같다’는 것은, 나머지 안근 등의 감각기관이 몸(身) 의지하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감각기관(根)은 몸(身) 의지함으로써 스스로 의지처에 대해서 능히 손익(損益)을 일으키는 것이다.

의식 역시도 그러한 것으로, 몸(身)을 의지하기 때문에 몸(身) 대해서 변이(變異)를 지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復有別義,謂如身根依止於身,若有外緣,所觸現前, 身根便似所觸相起.卽此起時,於自依身,能作損益.意識亦爾,依止身故,似彼所觸影像生時,於所依身,能作損益.

또한 별도의 의미가 있으니, 몸(身)을 의지하는 것과 같이, 만약 외연(外緣, 외부대상)이 있어서 소촉(所觸, 접촉의 대상)이 현전한다면, 신근(身根)에 소촉(所觸, 접촉의 대상) 비슷한 모습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이 일어날 때에는 스스로의  의지처인 몸(身) 대해서 능히 손익(損益) 지으며,

의식 역시도 그러한 것은 몸에 의지하기 때문에  소촉(所觸, 접촉의 대상) 비슷한 영상이 일어날  의지처인 대하여 능히 손익을 짓는 것이다.

 

▶論曰:此中有頌:

▷논문;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若遠行獨行, 無身寐於窟, 調此難調心, 我說眞梵志.”

멀리 작용하거나 홀로 작용하고, 몸(身)이 없는 것으로서, 동굴에서 잠자는 것이라.

 조복하기 어려운 난조심(難調心)을 조복하는 이를, 나는 참다운 범지(梵志)라 말하노라.

 

범지(梵志), ‘청정한 행을 하는 자’라는 의미로서, 바라문의 네 기간의 생활 가운데 제1기이다. 이 기간에는 스승에게 가서 수학하면서 훈식(熏食)ㆍ사치ㆍ정욕을 금하는 등 여러 가지 고행을 하며 성지(聖智)에 이르기 위해 정진한다. 이 기간을 마치면 집에 돌아가 결혼하여 살다가 나중에 다시 숲으로 가서 공부하며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교화활동을 한다.


▶釋曰:彼諸菩薩,爲成此義,引阿笈摩伽他爲證. 若遠行者,能緣一切,所緣境故.言獨行者,無第二故.言無身者,遠離身故.寐於窟者,於身窟中,而居止故.言調此者,作自在故.難調心者,性暴惡故.

해석한다; 그 여러 보살은 앞에서 말한 바대로 오직 하나의 의식만 있고 별도로 오식이 없다고 주장하는 뜻을 성립시키기 위해 아급마(아함)의 게송을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니,

‘멀리 작용한다’는 것은 능히 모든 소연(所緣, 인식대상)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며,

‘홀로 작용한다는 독행(獨行)’이란, 하나의 의식 이외에 다른 식, 즉 제이(第二)가 없다는 것이며,

‘신체가 없다는 무신(無身)’이란, 신체를 멀리 여의는 까닭이며,

‘동굴에서 잠잔다’는 것이란, 식이 신체라는 동굴에 머문다는 것이며,

‘이것을 조복한다는 것’은 작용함이 자재(自在)한 것이며,

‘조복하기 어려운 마음의 난조심(難調心)’이란, 성품이 포악한 것이다.


▶論曰:又如經言:如是五根所行境界,意各能受,意爲彼依.

논문; 또한 경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식은 이러한 5근(五根)이 행해지는 경계를 각각 능히 수용하나니, 의식이 그것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釋曰:復引餘教,證成此義.如是五根所行境界,意各能受者,諸根所行,名爲境界.如是境界,意各能受,悉能分別一切法故.一一各各,能領受故,名各能受.意爲彼依者,是彼諸根,能生因故,以意散亂,彼不生故.

해석한다; 다시 다른 경전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의미를 증명하였다. 

‘의식은 이러한 5근이 행해지는 경계를 각각 능히 수용한다’는 것이란,

모든 감각기관의 제근(諸根)이 행하는 바를 경계라 이름하며, 이러한 경계를 의식이 각각 능히 수용하여서, 능히 일체법을 분별하기 때문이며, 각각 하나하나를 능히 받아들이기 때문에 능히 각각 수용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의식은 그것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이란, 그 모든 감각기관의 제근(諸根)이 능히 생겨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고, 의식이 산란하면 그것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論曰: 又如所說十二處中,說六識身皆名意處.

논문; 또한 말씀한 바와 같이 12처설(處說)에서는 6 가지 식을 말하여서 모두 의근의 의처(意處, 포섭처)라고 이름한다.


▶釋曰:復有聖教,能證此義,謂六識身,皆說名意,無餘識名.由六識身,皆是意處,聖所說故,是故得知唯有意識.

해석한다; 또한 성스러운 가르침이 있어서 능히  의미를 증명하였으니, 이른바 여섯 가지 육식(六識) 모두를 의(意)라 이름하고 다른 식의 명칭이 없는 것으로, 여섯 가지의 육식이 모두 의근의 포섭처인 것은 성인이 말씀한 바에 의거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오직 의식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있는 것이다.


▶論曰:若處安立阿賴耶識識爲義識,應知此中, 餘一切識,是其相識,若意識識及所依止,是其見識.由彼相識, 是此見識, 生緣相故,似義現時,能作見識生依止事.如是名爲安立諸識,成唯識性.

논문; 어떤 곳에서는, 아뢰야식의 식을 안립하여 의식(義識)으로 삼으니, 여기에서의 나머지 모든 식이란  상분(객관)의 식이라고 알아야 하며,  

의식(義識)의 식과 소의지(所依止, 의지처)는  견분(주관)의 식으로, 그것의 상분의 식에 의거하는 것이다. 

 견분의 식이 일어나는 연상(緣相, 인식대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니,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할  능히 견분의 식이 일어나는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함을 이름하여 모든 식을 안립하고 유식성(唯識性)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이다.


▶釋曰:於阿賴耶識,亦得安立相`見二識.謂阿賴耶識,以彼意識及所依止,爲其見識,眼等諸識,爲其相識,以一切法,皆是識故.由彼相識者,謂眼等諸識.是此見識生緣相故者,是見生因,由所緣性,名見生因. 似義現時,能作見識生依止事者,能於彼見,故名見識. 卽此見識,似義現時,彼諸相識,與意見識,能作相續不斷住因,是故說名生依止事.

해석한다; 아뢰야식에 대해서도 역시 상분의 식과 견분의 식을 안립할  있으니,

이른바 아뢰야식은  의식과 소의지(所依止, 의지처)로써  견분의 식을 삼고,

안식 등의 여러 식을  상분의 식으로 삼으니, 일체법은 모두 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상분의 식에 의거한다’는 것은 안식 등의 여러 식을 말하는 것이며,

‘이 견분의 식이 일어나는 연상(緣相, 인식대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란 견분이 일어나는 원인인 것으로, 인식대상의 성품으로 인하여 견분이 일어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대상으로 비슷하게 현현할  능히 견분의 식이 일어나는 의지처가 된다’는 것은 능히 그것을 보기 때문에 견분의 식이라 이름하는, 즉  견분의 식이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할 때,  모든 상분의 식은 의식의 견분의 식과 함께 능히 상속하여서 끊임없이 머무는 원인이 되는 것이므로, 일어나는 의지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論曰:諸義現前分明顯現,而非是有,云何可知? 如世尊言:若諸菩薩,成就四法, 能隨悟入一切唯識, 都無有義.

논문; 모든 대상들이 눈앞에 분명히 현현하거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있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모든 보살이  가지의 사법(四法)을 성취하면, 일체가 오직 식인 유식(唯識)으로서 대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깨달아 들어갈  있다”고 하신 것과 같다.

ㅡ이하  가지 지혜를 성취한 보살은 유식무경(唯識無境) 도리를 깨달을  있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가지 내용은 외적인 사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一者成就相違識相智,如餓鬼`傍生及諸天`人,同於一事,見彼所識,有差別故;

첫째는 다른  식의  대한 지혜인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를 성취하는 것으로, 아귀ㆍ축생ㆍ여러 천인들 같이, 동일한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인식하는 바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ㅡ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다르면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같은 물에 대해서도 아귀는 고름이나 피가 가득한 강으로 보고, 고기는 살아가는 장소나 통로로 보고, 천인들 보석으로 장식한 땅으로 보고, 인간은 깨끗한  또는 파도로 보는  제각가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나, 만약 외적인 사물이 실재한다면 이런 일은 있을  없을 것이다.

 

二者成就無所緣識現可得智,如過去`未來夢影緣中,有所得故;

둘째는 소연(所緣, 인식대상이) 없는 식을 현재 얻는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무소연식현가득지(無所緣識現可得智)를 성취하는 것이니, 과거ㆍ미래ㆍ꿈의 영상의 대상 중에서 얻는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이기 때문이다. 

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이 현실적으로 있음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과거나 미래의 , 꿈속의 대상, 물이나 거울에 비친 영상 등은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三者成就應離功用無顚倒智,如有義中,能緣義識,應無顚倒,不由功用智眞實故;

셋째는 노력하지 않아도 전도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응이공용무전도지(應離功用無顚倒智)를 성취하는 것이니, 어떠한 대상으로부터 능히 대상을 반연하는 식과 같이, 전도되지 않는 것이 노력에 의하지 않고서도 지혜가 진실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ㅡ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  수행하지 않고서 오류가 없는 무전도(無顚倒) 지혜를 얻을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만약 인식대상이 인식되는 것과 같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범부도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노력 정진하지 않고도 자연히 해탈할  있기 때문이다.

 

四者成就三種勝智隨轉妙智.何等爲三?

넷째는  가지의 뛰어난 지혜인 승지(勝智)를 따라서 전전함이 묘하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수삼지전지(隨三智轉智)를 성취하는 것이니, 무엇이  가지인가? 

ㅡ다음의  가지 지혜를 따라 인식대상이 갖가지 존재로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一得心自在,一切菩薩,得靜慮者,隨勝解力,諸義顯現;

첫째, 마음의 자재를 얻은 보살로서 정려를 얻은 자는 뛰어난 이해의 승해력(勝解力)을 따라 모든 의(義, 대상)이 현현하는 것이며,

ㅡ자재자(自在者) 지혜를 따라 바뀌는,  마음이 자재함을 얻은 보살은 하고자 하는 대로   있으니, 예를 들면 땅을 물로 변화시킬  있는 것 등이다.

 

二得奢摩他,修法觀者,纔作意時,諸義顯現;

둘째, 사마타(奢摩他)를 얻어서 법관(法觀)을 닦는 이가 작의할 때에는  모든 대상이 현현하는 것이며,

ㅡ관찰자의 지혜를 따라 바뀌는 것으로, 즉 지관(止觀) 닦는 유가사(瑜伽師) 부처님의 교법을 관찰해서 사색할 , 어떤 대상이 사색하는 대로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三已得無分別智者,無分別智現在前時,一切諸義,皆不顯現.

셋째, 무분별지혜를 얻은 자의 무분별지혜가 현전할 때에는, 모든 대상이  현현하지 않는 것이다.

ㅡ무분별지를 따라 바뀌는 것으로, 무분별지가 일어날 때에는 어떠한 인식대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由此所說三種勝智隨轉妙智,及前所說三種因緣,諸義無義道理成就.

여기서 말한  가지 뛰어난 지혜인 삼종승지(三種勝智)가 전전하는 승묘한 지혜와 앞에서 말한  가지의 인연인 삼종인연(三種因緣)에 의거해서 모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리가 성취되는 것이다.


▶釋曰:相違識相智者,謂能了知相違者,識所緣義相.無所緣識,現可得智者,謂現見有雖無所緣而識得生,如過去等.

 해석한다; ‘다른 자의 식의 모습에 대한 지혜인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란 능히 다른 이의 식의 인식대상의 상을 아는 것이다.

‘인식대상이 없는 식을 현재 얻는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무소연식현가득지(無所緣識現可得智)’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인식대상이 없지만 식이 생겨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과거 등과 같은 것이다.

 

應離功用無顚倒智者,謂能了知若如是義,如所顯現,卽是實有,離起對治,無顚倒智,任運應成.三種勝智隨轉妙智者,謂能了知三種勝智,境隨轉義.

‘노력하지 않아도 전도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응이공용무전도지(應離功用無顚倒智)’란, 만약 이러한 대상이 현현하는 것과 같이, 이러란 것들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다스림의 대치(對治)를 일으키지 않고도 전도됨이 없는 지혜가 자연히 성취된다는 것을 능히 아는 것이다.

‘세 가지 뛰어난 지혜에 따라서 전전함이 묘하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수삼지전지(隨三智轉智)’는 세 가지의 뛰어난 지혜의 경지를 따라 전전하는 의미를 능히 아는 것이다.

 

得心自在者,得心調順,有所堪能.得靜慮者,謂諸聲聞及獨覺等,已得靜慮.

隨勝解力,諸義顯現者,謂若願樂地成其水,如意則成,火等亦爾.

‘마음의 자재를 얻는다는 득심자재(得心自在)’란, 마음의 조복을 얻어서 감당 능력이 있게 되는 것이고,

‘정려를 얻은 득정려자(得靜慮者)’란, 모든 성문과 독각 등은 이미 정려를 얻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뛰어난 승해력(勝解力)을 따라서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는 것이란, 만약 땅에서 물을 이루려는 소원을 세우면, 곧 뜻대로  성취되는 것으로, 불 등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得奢摩他者,得三摩地,修法觀者,於契經等,策勤觀察. 纔作意時,諸義顯現者, 隨於一義, 如如作意, 如是如是, 非一品類境相顯現. 無分別智,現在前時,一切諸義,皆不顯現者,若如顯現義,卽如是實有,應不得有無分別智.無分別智,若是實有,決定應許諸義皆無.

‘사마타를 얻는다는 득사마타(奢摩他)’란, 삼마지를 얻는 것이고,

‘법의 관찰을 닦는 수법관(修法觀)’이란, 계경(契經) 등을 부지런히 관찰하는 것이고, 
‘작의할 때 곧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는 것은, 하나의 대상(義)을 따라 작의하는 그대로 이렇게 이렇게 하나가 아닌 품류의 대상의 모습인 경상(境相)이 현현하는 것이고,

‘무분별지혜가 현전할 때에는 모든 대상(義)이 다 현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만약 현현하는 대상(義)과 같이 곧 그렇게 실재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무분별지혜를 얻지 않아야 하고,

무분별지혜가 실체라면 결정적으로 모든 대상(義)이 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4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① 3

 

▶論曰:若此諸識,亦體是識, 何故乃似色性顯現? 一類堅住 相續而轉, 與顚倒等,諸雜染法, 爲依處故. 若不爾者, 於非義中, 起義顚倒, 應不得有. 此若無者,煩惱`所知二障雜染, 應不得有. 此若無者,諸淸淨法,亦應無有.是故諸識,應如是轉.此中有頌:

논문; 만약 이 모든 식도 역시 체가 식이라면, 무슨 까닭으로 물질의 속성인 색성(色性)에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인가?

한 부류인 일류(一類)로서 견고하게 머물며, 상속하여 전전하고, 전도 등의 모든 잡염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해서 대상을 일으키는 전도(顚倒)는 마땅히 없을 것이며,

만약 이러한 전도가 없다면 번뇌장(煩惱藏)과 소지장(所知藏)의 두 가지 장애의 잡염도 마땅히 없을 것이며, 

만약 이러한 이장(二障)의 잡염이 없다면 모든 청정법 또한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식은 마땅히 이렇게 전전하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게송이 있으니, 

 

“亂相及亂體, 應許爲色識, 及與非色識, 若無餘亦無.”

산란한 난상(亂相)과 산란한 난체(亂體)를 마땅히 인정해서,

안근 등 다섯 감각기관의 작용의 색식(色識)과 비색식(非色識)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니, 

만약 없는 것이라면, 그 나머지도 역시 없는 것이라네.


▶釋曰: 一類堅住, 相續轉者,由相似故,名爲一類,多時住故,說名堅住. 諸有色識,相似多時,相續而轉.

해석한다; ‘한 부류인 일류(一類)로서 견고하게 머물며 상속하여 전전한다’는 것이란,

상(相)이 비슷하기 때문에 인 일류(一類) 하는 것이며,

오랫동안 머물기 때문에 견고하게 머문다고 말하는 것이다. 

유색계(有色界)의 식은 상(相) 모두 비슷하게 오랫동안 상속해서 전전하는 것이다. 

 

顚倒等者,卽是等取諸雜染法,與煩惱障及所知障` 爲因性故. 爲依處者,爲彼因性. 若彼諸識離如是轉, 於非義中, 起義心倒應不得有. 此若無者,若煩惱障諸雜染法`若所知障諸雜染法,應不得有.

‘전도(顚倒)’ 등이란,  이것들이 모든 잡염법을 취해서 번뇌장과 소지장의 원인의 성품인, 인성(因性)이 되는 까닭이며,

‘의지처가 된다’는 것이란, 그것의 인성(因性) 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식이 이와 같이 전전함을 떠난다면,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해서 대상을 일으키는 마음의 전도가 마땅히 없을 것이며,

‘만약 이것이 없다면’이란, 번뇌장의 모든 잡염법이나 소지장의 모든 잡염법은 마땅히 있을  없다는 것이다. 

 

於此頌中,顯如是義.亂相亂體,如其次第, 許爲色識及非色識. 此中亂相卽是亂因, 色識爲體;

亂體卽是諸無色識. 色識亂因, 若無有者,非色識果,亦應無有.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내는 것이니,

산란한 난상(亂相)과 산란한 난체(亂體)  순서대로 인정하여 색식과 비색식으로 삼는 것이다. 

여기서 산란한 난상(亂相)이란,  산란의 원인인 난인(亂因)으로서 색식을 체로 삼으며,

산란한 난체(亂體)  모든 비색식이다. 

만약 색식인 산란의 원인인 난인(亂因)이 없다면 비색식의 결과 또한 없게 되는 것이다.


▶論曰:何故身`身者`受者識`所受識`能受識,於一切身中,俱有和合轉? 能圓滿生`受用`所顯故.

논문; 무슨 까닭에 신식(身識)ㆍ신자식(身者識)ㆍ수자식(受者識)ㆍ수용되는 소수식(所受識)ㆍ그 수용하는 능수식(能受識) 모든 신체에서 함께 있으면서 화합하여 전전하는 것인가? 

능히 원만히 생겨나는 수용이 나타난 바이기 때문이다. 

 

何故如說世等 諸識差別而轉?無始時來,生死流轉無斷絕故` 諸有情界無數量故` 諸器世界無數量故` 諸所作事展轉言說無數量故` 各別攝取受用差別無數量故` 諸愛非愛業果異熟受用差別無數量故`所受死生種種差別無數量故.

어찌하여 말한 바와 같은 세식(世識) 등의 모든 식은 차별적으로 전전하는 것인가? 

아득한 무시로부터 생사유전하여 단절함이 없었기 때문이고, 모든 유정계는 무수하게 많은 때문이며, 

모든 기세간(器世界, 자연계)가 무수하게 많기 때문이고,

모든 짓 소작사(所作事)가 전전하여 언설함이 무수하게 많기 때문이며, 

각각 다르게 섭취하여 수용(受用)하는 차별도 무수하게 많기 때문이고,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 않은 모든 업의 과보의 이숙이 수용하는 차별도 무수하게 많기 때문이며, 

받는 바의 나고 죽음의 갖가지 차별도 무수하게 많기 때문이다.

2 차별장(差別章)

 

▶釋曰:爲令自身,圓滿受用故. 身`身者`受者三識,一切身中, 許彼一時俱有, 和合一時轉故, 說名俱有. 所顯故者,是彼因性.

해석한다; 자신으로 하여금 원만히 수용케 하기 위해서 신식(身識)ㆍ신자식(身者識)ㆍ수자식(受者識)  가지 식은 모든 신체 중에서 동시에 함께하여 화합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동시에 전전하기 때문에 함께 있다고 말하며,

‘나타난 바의 소현(所顯)이기 때문’이란 그것의 원인의 성품인 인성(因性)이다.

 

신식(身識), 안근(眼根) 등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오근(五根)

신자식(身者識), 번뇌에 오염된 식,

수자식(受者識), 의근(意根). ㅡ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4권 1

 

▶論曰:復次云何安立如是諸識,成唯識性? 略由三相: 一由唯識,無有義故;二由二性, 有相`有見二識別故;三由種種,種種行相,而生起故. 所以者何? 此一切識,無有義故,得成唯識,有相見故,得成二種. 若眼等識,以色等識爲相,以眼識識爲見,乃至以身識識爲見;若意識,以一切眼爲最初,法爲最後.諸識爲相, 以意識識爲見,由此意識,有分別故,似一切識,而生起故.此中有頌:

논문; 또한 어떻게 이와 같은 모든 식을 안립하여 유식(唯識)의 성품을 이루는 것인가? 

간략히  가지 상에 의거하는 것이니,

첫째는 오로지 유식(唯識)에 의거하는 것이니,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가지의 성품, 즉 구체적인 인식상황 속에서 식은 주관적인 식과 객관적인 식으로 이분(二分)됨으로써 인식작용이 이루어지는, 유상식(有相識, 상분, 객관)과 유견식(有見識, 견분, 주관)은 별개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여러 가지에 의거하는 것이니, 여러 가지인 행상(行相, 인식작용)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서인가?  모든 식은 대상이 없기 때문에 유식을 이룰  있으며,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 있기 때문에  가지를 이룰  있는 것이다. 

만일 안식(眼識) 등이라면 색식(色識) 등으로써 상분을 삼고, 안식의 식으로써 견분을 삼으며, 나아가 신식(身識)의 식으로써 견분을 삼으며,  

만약 의식(意識)이라면, 안식을 최초로 삼고 법식(法識)을 최후로 삼는 모든 식으로써 상분을 삼고, 의식(意識)의 식으로써 견분을 삼으니, 이 의식에 분별이 있기 때문이고, 모든 식과 비슷하게 생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유상식(有相識)은 객관적인 인식대상(所緣)으로 현현한 식, 즉 상분(相分)이다.

유견식(有見識)은 주관적인 식, 즉 능연식(能緣識),견분(見分)을 말한다.


“唯識二種種, 觀者意能入, 由悟入唯心, 彼亦能伏離.”

유식과 (상분과 견분)  가지와 여러 가지의 상에 관자(觀者, 관행자)의 의지(意)가 능히 들어가나니, 

유심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그것마저도 역시 능히 조복하여 여읜다네.


▶釋曰:此中長行及頌,顯示由三種相, 成立唯識. 於長行中,由唯識者,唯有識故,一切諸識, 皆唯有識, 由所識義,無所有故.

해석한다; 이 가운데 산문과 게송은  가지 삼종상(三種相) 의거해서 유식을 성립하는 것이다.

문장 중에서 ‘유식에 의거한다는 유유식(由唯識)’이란, 오직 식(識)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체의 식도 모두 오직 식만이 있을 뿐, 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인식되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由二性者,由於一識, 安立相見, 卽此一識一分成相`第二成見. 眼等諸識,卽於二性,安立種種, 謂一識上,如其所應,一分變似種種相生, 第二變似種種能取.

‘두 가지 성품에 의거한다’는 것은 하나의 식에 상분과 견분을 안립하기 때문이니, 즉  일식(一識)  부분은 상분을 이루고, 다른 하나는 견분을 이루는 것이다. 

안식  모든 식은  가지의 이성(二性)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안립하나니, 이른바 하나의  위에  상응하는 바와 같이,  부분은 변하여 여러 가지의 비슷한 으로 현현하고, 다른 하나는 변하여 여러 가지의 비슷한 능취(能取, 인식주체)로 현현하는 것이니,  

 

若就意識, 卽以一切眼爲最初,法爲最後. 諸識爲相,意識識爲見, 由此意識, 遍分別故, 似一切識,而生起故.

의식(意識)을 취하여 말한다면, 곧 모든 안식을 최초로 삼고, 법식을 최후로 삼으며, 모든 식을 상분으로 삼고, 의식의 식을 견분으로 삼는 것이니,  

 의식으로 인하여 두루 분별하기 때문이고, 모든 식에 비슷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又於三中, 唯就意識,以爲種種,所取境界,不決定故. 其餘諸識,境界決定,又無分別, 意識分別, 故唯於此, 安立第三種種相見,是故於此, 意識具足, 安立唯識.

또한, 세 가지 중에서 오직 의식(意識)만을 여러 가지라 하나니, 소취(所取, 인식대상)의 경계(境界)가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 여러 식은 경계가 결정적이고 또한 분별이 없는, 즉, 안식ㆍ이식 등 5식은 그 소취(所取, 인식대상)가 빛깔(色)과 소리(聲) 등으로서 결정적이고, 오식 그 자체에는 분별작용이 없는 현량(現量)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분별하기 때문에 오직 이 의식에 대해서만  번째의 여러 가지 상분과 견분을 안립하는 것이며, 따라서  의식에 대해서 구족하게 유식을 안립하는 것이다. 

 

於伽他中,能入唯識者,悟入所取義,永無有故. 能入二者,悟入此識,有相`見故.能入種種者,悟入此識,似種種相,而生起故.觀者意者,諸瑜伽師,所有意趣.

게송에서 ‘능히 유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소취(所取, 인식대상) 뜻이 영원히 없는 것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능히  가지에 들어간다’는 것은  식에 상분과 견분이 있는 것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능히 여러 가지에 들어간다’는 것은  식이 여러 가지의 비슷한 상으로 일어나는 것에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이다. 

‘관자(觀者, 관행자)의 의지(意)’란 모든 유가사(瑜伽師)가 갖는 의취(意趣)이다.

 

問: 於何悟入?

答: 由悟入唯心,彼亦能伏離.若能悟入,唯有其心,都無有義,是則於彼,亦能伏離.旣無所取義,

何有能取心?說入二性,及入種種,皆爲成立入唯識因;餘義相似.

묻겠습니다; “무엇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까?”

답한다; 유심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그것마저도 능히 조복하여 여의는 것다.

만약 오직  마음이 존재하고 의(義, 대상)이 전혀 없다고 능히 깨달아 들어가게 되면, 이것은  유심(唯心) 대해서도 역시 능히 조복하여 여의는 것으로, 이미 소취(所取, 인식대상)가 없는데 어떻게 능취(能取, 인식주체) 마음이 있을 수 잇겠는가? 

 가지 성품에 들어가고  여러 가지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유식에 들어가는 원인을 성립하기 위한 것이며, 나머지 의미는 앞에서 말한 바와 비슷하다.

 

▶論曰: 又於此中,有一類師,說一意識,彼彼依轉,得彼彼名,如意思業,名身語業.

논문; 또한 이 중에  부류의 논사가 있어서 말하기를 “하나의 의식(意識)일 뿐이며, 그것들의 의지처가 전전하여 그들의 명칭을 얻은 것이니, 의사업(意思業)을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으로 이름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釋曰:一類菩薩,欲令唯有一意識體,彼復次第安立顯示. 如意思業,名身語業者, 如一意思, 於身門轉, 得身業名, 於語門轉,得語業名, 然是意業.意識亦爾, 雖復是一,依眼轉時,得眼識名,如是乃至依身轉時,得身識名.非離意識,別有餘識,唯除別有阿賴耶識. 

해석한다; 한 부류의 보살은 오직 하나의 의식의 체만이 있다고 말하며, 그들이 차례로 생겨나서 갖가지 명칭을 안립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의사업(意思業)을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으로 이름함과 같다’는 것이란,

즉 하나의 의사(意思)가 몸에 전전한다면 신업이라 이름하고, 입에서 전전하면 구업이라 이름하지만,

이 모두는 의업(意業)인 것과 같이, 의식 역시도 그러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이지만 눈에 의지해서 전전할 때는 안식이라 이름하고, 이와 같이 나아가 몸에 의지해서 전전할 때는 신식이라 이름하지만 의식을 떠나서 별도로 다른 식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오직 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별도로 제외한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4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① 2

 

▶論曰:此中身`身者`受者識,應知卽是眼等六內界. 彼所受識,應知卽是色等六外界. 彼能受識,應知卽是眼等六識界.

▷논문; 마땅히 알지니,  중에서 신식(身識)ㆍ신자식(身者識)ㆍ수자식(受者識) 안계(眼界) 등의 여섯 가지 내적인 세계인, 육내계(六內界)라고 알아야 하며, 

 수용되는 소수식(所受識) 색계 등의 여섯 가지 외적인 세계인, 육외계(六外界)라고 알아야 하고,

 능히 수용하는 능수식(能受識) 안식계 등의 여섯 가지 식의 세계인, 육식계(六識界)라고 알아야 한다.

 

其餘諸識, 應知是此諸識差別. 又此諸識, 皆唯有識,都無義故. 此中,以何爲喩顯示? 應知夢等爲喩顯示. 謂如夢中, 都無其義,獨唯有識, 雖種種色`聲`香`味`觸`舍`林`地`山` 似義影現,而於此中,都無有義. 由此喩顯應隨了知,一切時處,皆唯有識, 由此等言應知.復有幻誑 `鹿愛` 瞖眩等喩. 瞖 눈에 백태 낄 예, 흐릴 예

 나머지 여러 식은  모든 식의 차별이며, 

또한  모든 식은 오직 식만 있을 뿐, 의(義, 대상)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중에서 무엇을 비유로 하여 나타내는가?  등을 비유로 하여 나타내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 꿈속에서는  의(義, 대상) 전혀 없고 오직 식만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록 갖가지 빛깔(色)ㆍ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ㆍ집ㆍ숲ㆍ땅ㆍ산 등이 의(義, 대상)으로써, 비슷하게 현현하지만,  중에는 대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이 비유가 나타내는 것에 의해서 마땅히 모든 시간의 일체시(一切時)과 모든 장소의 일체처(一切處)에서 오직 식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에 의해서, 다시 요술로 속임과  목마른 사슴이 물을 구해서 아지랑이를 쫓아가는 것과
눈병으로 흐리고 보이는 예현(瞖眩) 등의 비유가 있는 것이다. 

 

若於覺時,一切時處,皆如夢等. 唯有識者,如從夢覺,便覺夢中,皆唯有識.覺時何故,不如是轉? 眞智覺時, 亦如是轉. 如在夢中,此覺不轉,從夢覺時,此覺乃轉. 如是未得眞智覺時,此覺不轉,得眞智覺,

만약 깨어 있을 때에 모든 시간의 일체시(一切時)과 모든 장소의 일체처(一切處)에서 모두 꿈과 같이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면, 꿈에서 깨어난 후에, 꿈속의 모든 것에는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고 깨달아 아는 것과 같이, 

깨어 있을 때에는 무슨 까닭으로 이와 같이 전전하지 못하는 것인가?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인 진지각(眞智覺)일 때에는 역시 이와 같이 전전하게 되는 것이다.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이러한 깨침이 전전하지 않지만 꿈에서 깬 후에는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아직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인 진지각(眞智覺)을 증득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깨침이 전전하지 않는 것이다. 

 

此覺乃轉.其有未得眞智覺者,於唯識中,云何比知?由教及理,應可比知.此中教者,如『十地經』薄伽梵說,如是三界,皆唯有心.又薄伽梵『解深密經』,亦如是說,謂彼經中,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을 증득하면  깨침이  전전하게 되는 것이나, 

아직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한 자는 유식에 대해서 어떻게 미루어   있는 것인가? 

경전의 가르침인 교(敎)와 바른 논리의 이(理), 즉 마땅히 교리(敎理)에 의거해서 미루어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경전의 가르침이란 '십지경(十地經)'에서 박가범(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삼계(三界)는 모두 오직 마음(心)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또한 박가범(부처님)께서는 '해심밀경(解深蜜經)'에서도 역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경전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ㅡ'해심밀경' 본문에는 ‘위빠사나 삼마지’로 되어 있다.

 

慈氏菩薩,問世尊言:諸三摩地所行影像, 彼與此心,當言有異`當言無異?

佛告慈氏: 當言無異.何以故?由彼影像,唯是識故. 我說, 識所緣,唯識所現故.

“자씨보살(慈氏菩薩, 미륵보살)이 세존께 여쭈었다.

‘모든 삼마지에서 행해지는 영상(影像)은, 그것이  마음(心)과 다른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영상(影像)은 오직 식(識)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나는 식의 인식대상인 식소연(識所緣)은 오직 식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는 때문이니라.’

 

世尊!若三摩地所行影像,卽與此心,無有異者,云何此心還取此心?

慈氏!無有少法,能取少法.然卽此心, 如是生時,卽有如是影像顯現. 如質爲緣,還見本質,而謂我今見於影像, 及謂離質別有所見影像顯現.此心亦爾,如是生時,相似有異所見影現.

‘세존이시여, 만약  삼마지에서 행해지는 영상이   마음(心)과 다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마음(心)을 돌이켜  마음(心)을 취하는 것입니까?’

‘자씨여, 어떠한 작은 법이라도 능히 작은 법을 취할  있는 것은 없느니라. 그러나  마음(心)이 이와 같이 생겨날 때에  이와 같은 영상의 현현함이 있느니라. 

본질로써 인식대상을 삼아서 돌이켜 본질을 보는 것을 내가 지금 영상을 본다고 말하는 것이나, 

본질을 떠나서 별도로 보여지는 영상의 현현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느니라. 

 마음(心)도 역시 그러해서 이와 같이 일어날 때, 그 모습이 비슷하면서 다르게 보여지는 영상이 현현하는 것이니라.’”

 

미륵(彌勒) 보살은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mitra)에서 파생한 마이트리야(Maitreya)라는 단어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마이트리야는 자씨(慈氏)로 의역되므로 미륵보살은 흔히 자씨보살로도 불리우며, 미래불이다.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았다. 현재에는 도솔천(兜率天, 지족知足)에 올라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부처가 되기 이전 단계에 있기 때문에 보살이라 부르며, 도솔천은 미륵보살이 머무는 정토이며, 내원궁(內院宮)이라고도 한다.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머물다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 동안,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에 잠겨 있는 자세를 한 불상이 미륵반가사유상이다.ㅡ 다

 

卽由此教,理亦顯現.所以者何?於定心中,隨所觀見諸靑瘀等所知影像,一切無別靑瘀等事,但見自心.由此道理, 菩薩於其一切識中, 應可比知皆唯有識 無有境界. 又於如是靑瘀等中,非憶持識, 見所緣境現前住故.

聞`思所成二憶持識,亦以過去,爲所緣故,所現影像,得成唯識.由此比量,菩薩雖未得眞智覺,於唯識中,應可比知.

 경전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바른 논리도 역시 현현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선정의 마음 중에서 관찰하는 바에 따른, 고름나고 문드러진 모습의 청어상(靑瘀相) 등 알아야  모든 상에는 별도의 청어상(靑瘀相) 등의 모든 사물이 없는, 다만 스스로의 마음을  뿐인 것이니,  

 도리에 의거해서 보살은 일체의 식(識)에 대해서 오직 식만이 존재하고 경계가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이 청어상(靑瘀相) 등은 기억하여 알고 있는 억지식(憶持識)이 아니니, 왜냐하면 인식대상의 경계인 소연경(所緣境)이 현전하여  머물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들어서(聞) 이루거나 사유해서(思) 이루어진  가지 억지식도 역시 과거를 소연(所緣,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나타난 영상은 유식(唯識)을 이룰  있으니, 이 비량(比量)으로 인하여 보살은 아직 진실한 진지(眞智)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유식에 대해서 마땅히 미루어   있는 것이다.

 

▶釋曰:此唯有識,由教顯示.如『十地經』言,如是三界,皆唯有心故. 『解深密經』中,我說識所緣唯識所現故者.謂識所緣, 唯識所現,無別境義. 復擧識者,顯我所說, 定識所行,唯識所現,無別有體.

▷해석;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경전의 가르침에서 나타나 보인 바에 의거하는 것으로, '십지경'에서 “이와 같이 삼계는 모두 오직 마음(心)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해심밀경'에서 “나는 식의 소연(所緣, 인식대상) 오직 식이 현현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니라”는 것은, 식의 소연(所緣, 인식대상) 오직 식이 나타난 것일 뿐, 별도의 대상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식을 드는 것은, 박가범(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선정에서 식이 행해지는 것에서도 오직 식이 나타난 것으로 별도의 자체가 없음을 나타내었다.

 

然卽此心,如是生時者,謂卽由此品類生時. 相似有異所見影現者,謂定所行相似離識, 別有所取分明顯現.

‘그러나  마음(心)이 이와 같이 일어날 때’란,  이로 인하여 마음의 대상인 갖가지 차별상의 품류(品類)가 생겨날 때를 말하는 것이며,

‘상(相)이 비슷하면서 다르게 보여지는 영상이 현현한다’는 것은 선정에서 행하여지는 비슷한 상(相) 식을 떠나서 취하는 바가 있어서 분명히 현현하는 것을 말하며,

 

又於如是靑瘀等中,非憶持識見所緣境現前住故者, 謂靑瘀等,是三摩地所行影像, 非憶持識. 由此不卽在彼方處, 如昔所受還如是憶, 此住現前分明見故. 彼憶持識,所見暗昧, 此現前住所見分明.

‘또한 이와 같이 고름나고 문드러진 모습의 청어상(靑瘀相) 등에 대한 것은 억지식이 아니다.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이 현전에 머무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란, 이른바 고름나고 문드러진 모습의 청어상(靑瘀相) 등은 삼마지에서 행하여지는 영상으로서 억지식이 아닌 것이니, 곧 이것은  장소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예전에 받아들인 바와 같이 돌이켜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것이 머무는 것을 현전에 분명히 보기 때문이다. 

 억지식이 보는 것은 어둡지만, 현전에 머물며 보여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이니, 

 

若有復謂如聞`思慧,由串習故, 境雖謝往, 纔作意時, 如昔而生. 此亦爾者.聞`思兩慧,境旣謝往`現無有體,於無體中,若更生時,但識影現似彼而生故. 聞`思慧不緣謝往曾所受境,是故唯識,由此彌彰所取義無,理亦成就.

만약 어떤 이가 다시 말하기를 “들어서 이루는 문혜(聞慧)와 사유해서 이루는 사혜(思慧) 같은 것은 자주자주 익히기 때문에, 대상이 지나가 버렸어도 작의(作意)할 때에는 예전처럼 생겨난다”고 하였으니, 이것 역시도 그러한 것으로, 문혜(聞慧)와 사혜(思慧) 대상은 이미 지나가서 현재에 체가 없으나, 만약 체가 없는 것에서 다시 생겨날 때는 다만 식의 영상이 현현해서 그것과 비슷하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혜(聞慧)와 사혜(思慧)가 예전에 받아들여서 이미 지나가 버린 대상을 반연하지 않는 것이니, 따라서 유식(唯識)의 이치가 이로 인하여 두루 밝게 드러나는 것이며, 소취(所取, 인식대상)의 의미가 없는 이치도 역시 성취되는 것이다.

 

▶論曰:如是已說, 種種諸識,如夢等喩,卽於此中, 眼識等識,可成唯識. 眼等諸識旣是有色,亦唯有識,云何可見?此亦如前,由教及理.

▷논문; 이와 같은, 갖가지 모든 식을 꿈과 같다고 비유하여 말하는 것이니, 곧  가운데 안식(眼識) 등의 식은 유식(唯識)의 취지를 성취할  있게 하는 것이다.

안식  모든 식에는 이미 물질(色)이 있으나, 역시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도 역시 앞에서와 같이 경전의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의거하여야 하는 것이다.


▶釋曰:眼識等識,皆非有色,可成唯識;眼等諸識,旣是有色, 云何唯識?

此亦如前,由教及理者,此眼等識如前所引,理教顯示亦成唯識.

▷해석한다; 안식(眼識) 등의 식 모두에 물질(色)이 있지 않은 것이라며, 유식(唯識)의 취지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안식(唯識) 등의 여러 식에는 이미 물질(色)이 있거늘, 어떻게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인가?

‘이것도 역시 앞에서와 같이 경전의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의거한다’는 것이란, 즉 이 안식 등은 앞에서 인용된 바른 논리와 경전의 가르침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역시 유식의 취지를 성취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4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① 1

 

▶論曰:已說所知依.所知相復云何應見?此略有三種:一依他起相`二遍計所執相`三圓成實相.

▷논문; 앞에서 알아야  의지처의 소지의(所知依)를 말하였으니,

알아야  상의 소지상(所知相)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에 간략히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의타기상(依他起相)이고, 둘째는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며, 셋째는 원성실상(圓成實相)이다.

ㅡ소지상(所知相), 현상계와 본체계의 전개 상을 의타기상ㆍ변계소집상ㆍ원성실상의 가지의 삼자성(三自性)으 분류해서 설명한다.

 

▶釋曰:依所知相,說如是言.略者,要也.

▷해석한다; 알아야  소지상(所知相) 의지해서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니,

‘간략한 약(略)’은 요점을 말한다는 것이다.

 

ㅡ이하는 유정의 식이 일체법에 두루함을 11가지의 식으로 나누어 밝힌.
▶論曰:此中何者依他起相?謂阿賴耶識爲種子,虛妄分別所攝諸識.此復云何?謂身`身者`受者識`彼所受識`彼能受識`世識`數識`處識`言說識`自他差別識`善趣惡趣死生識.

▷논문; 이 중에서 무엇이 의타기상(依他起相)인가? 이른바 아뢰야식을 종자로 하는 허망된 분별에 포섭되는 모든 식이다. 

다시 이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안근(眼根) 등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오근(五根)의 신식(身識)과

번뇌에 오염된 식인 신자식(身者識)ㆍ의근(意根)의 수자식(受者識)과

색식(色識) 등 6식(識)으로 그 수용되는 소수식(所受識, 응수식應受識)과 

안식 등 6식의 그 능히 수용하는 능수식(能受識, 정수식(正受識)과

생사가 단절하고 상속하는 식의 세식(世識)ㆍ숫자의 수식(數識)ㆍ기세간(器世間, 자연계)의 처식(處識)과

감각과 지각 작용인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모든 언설에 의한 언설식(言說識)과

자신과 타신(他身)이 의지하는 차별식의 자타차별식(自他差別識)과

생사의 여러 종류의 차별인 선취악취(善趣惡趣)의 생사식(生死識, 선악양도차별식善惡兩道差別識)이다.

 

此中若身`身者`受者識`彼所受識`彼能受識`世識`數識`處識`言說識, 此由名言熏習種子.

 중에서 신식(身識)ㆍ신자식(身者識)ㆍ수자식(受者識)ㆍ그 수용되는 소수식(所受識)ㆍ그 수용하는 능수식(能受識)ㆍ세식(世識)ㆍ수식(數識)ㆍ처식(處識)ㆍ언설식(言說識)은 명언훈습(名言熏習)의 종자에 의한 것이고,

 

若自他差別識, 此由我見熏習種子.

자타차별식(自他差別識)은 아견훈습(我見熏習)의 종자에 의한 것이고,

 

若善趣`惡趣死生識,此由有支熏習種子.

선취악취의 생사식(生死識)은 유지훈습(有支熏習)의 종자에 의한 것이다.

 

由此諸識,一切界趣雜染所攝依他起相虛妄分別,皆得顯現. 如此諸識,皆是虛妄分別所攝, 唯識爲性,

是無所有,非眞實義, 顯現所依,如是名爲依他起相.

 모든 식으로 인하여 모든 윤회세계(趣)의 잡염에 포섭되는 의타기상의 허망분별이 모두 현현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모든 식은  허망분별에 포섭되는 것으로 오직 유식(唯識)을 속성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이며, 진실이 아닌 의(義, 대상)이 현현하는 소의(所依, 의지처)이니,

이와 같은 것을 의타기상(依他起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의(義)는 artha의 번역어로서 의미ㆍ도리ㆍ의의(意義)ㆍ사물ㆍ대상 등의 뜻이 있으며, 여기에서는 대상, 즉 명칭에 상응하는 실체적 대상을 가리킨다.

의타기상(依他起相, paratantra-svabhāva)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의타기(依他起)의 속성을 지니는 법상이다. 그것은 일체법의 연생(緣生)의 자성, 즉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이다.

의타기상은 변계소집상처럼 체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인연소생법이므로 상주실유(常住實有)가 아니고 세속제(世俗諦)에서 그 존재성이 인정된다.

의타기상은 인연소생법이므로 5위100법(五位百法) 가운데 심왕법ㆍ심소법ㆍ색법ㆍ불상응행법의 4위(位) 94가지 법이 포섭되지만, 식일원론의 입장인 유식학에서 의타기상은 결국 아뢰야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을 가리킨다.


▶釋曰:虛妄分別所攝諸識者, 謂此諸識虛妄分別,以爲自性.謂身`身者`受者識者, 身謂眼等五界,身者,謂染污意, 能受者, 謂意界,彼所受識者,謂色等六外界,彼能受識者,謂六識界,世識者,謂生死相續不斷性,數識者,謂筭計性,處識者,謂器世閒,言說識者,謂見聞覺知,四種言說.如是諸識,皆用所知依中所說,名言熏習差別爲因.

▷해석한다; ‘허망된 분별에 포섭되는 모든 식’이란, 이 모든 식은 허망분별로써 자성을 삼는 것을 말한다.

‘신식(身識)ㆍ신자식(身者識)ㆍ수자식(受者識)’에서,

신식은 안계(眼界)ㆍ 이계(耳界)ㆍ비계(鼻界)ㆍ설계(舌界)ㆍ신계(身界)의 5계(界)를 말하고, 

신자식은 염오의(染污意)를 말하며, 

수자식은 의계(意界)를 말한다.

 ‘그 수용되는 소수식(所受識)’은 색계(色界)ㆍ소리의 성계(聲界)ㆍ냄새의 향계(香界)ㆍ맛의 미계(味界)ㆍ닿임의 촉계(觸界)ㆍ법계(法界)  육외계(六外界)를 말하고,

‘그 능히 수용하는 능수식(能受識)’은 안식(眼識)을 비롯한,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6식계(六識界)를 말한다. 

‘세식(世識)’은 생사가 상속해서 단절되지 않는 속성을 말하고, 

‘수식(數識)’은 숫자를 계산하는 속성을 말하며, 

‘처식(處識)’은 기세간(器世間, 자연계)를 말하고,

‘언설식(言說識)’은 보고 듣고 감각하고 아는 견문각지(見聞覺知)의  가지 언설을 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모든 식은  알아야  바의 의지처인, 소지의(所知依)에서 말하는 명언훈습(名言熏習)의 차별을 원인(因)으로 삼는 것이다.

 

견문각지(見聞覺知)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ㆍ혀ㆍ몸으로 냄새ㆍ맛ㆍ감촉을 감각하고, 뜻으로 법을 아는 것이다. 감각ㆍ지각 작용의 기능인 6() 작용을 말한다.


自他差別識者,謂依止差別,此用前說,我見熏習差別爲因.善趣惡趣死生識者, 謂生死趣種種差別, 此由前說, 有支熏習差別種子. 由此諸識者, 卽由次前所說諸識. 一切界趣雜染所攝者,謂墮三界五趣雜染,是彼自性,故名所攝.

‘자타차별식(自他差別識)’은 의지(衣止)의 차별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앞에서 말한 아견훈습(我見熏習)의 차별을 원인으로 삼는것으로, 곧 자타의 차별을 이루는 것은 아견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선취악취(善趣惡趣)의 생사식(生死識)’은 생사세계의 갖가지 차별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앞에서 말한 유지훈습(有支熏習)의 차별의 종자에 의해서이다.

‘이 모든 식으로 인한다는 유차제식(由此諸識)’이란, 앞에서 말한 모든 식에 의한다는 것이며,

‘모든 윤회세계의 잡염에 포섭된다’는 것이란, 삼계와 오취(五趣, 5 윤회세계)의 잡염에 떨어지는 것이  자성이기 때문에 포섭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依他起相者,謂依他起爲體,虛妄分別,皆得顯現. 如此諸識,皆是虛妄分別所攝,唯識爲性者, 謂此諸識,皆是虛妄分別自性,故名所攝, 是無所有非眞實義顯現所依者, 謂無所有非眞實義顯現所因. 非眞實故,名無所有, 如所執我無所有故 名非眞

義者所取.謂卽彼我實無所有,似我顯現.言所依者,顯現所依,是所因義.此卽名爲依他起相.

‘의타기상(依他起相)’이란 의타기를 체로 삼아서 모든 허망분별이 현현할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와 같은 모든 식은  허망분별에 포섭되는 것으로 오직 유식(唯識)을 속성으로 한다’는 것은  모든 식이  허망분별의 자성이기 때문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이며, 진실이 아닌 대상이 현현하는 의지처’란, 존재하지 않으며 진실이 아닌 대상이 현현하는 원인을 말하는 것이니,

진실이 아닌 비진실(非眞實)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라 하고, 

집착된 자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진실(非眞實)이라 말하는 것이다. 

‘대상의 의(義)’란, 취해진 인식대상인 소취(所取)로써, 곧  자아는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실무소유(實無所有)이나, 자아와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을 말한다.

‘소의(所依, 의지처)’란 현현하는 것의 의지처로서 원인(因)이 된다는 뜻이니,  

이러한 것을 의타기상(依他起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此中何者,遍計所執相?謂於無義,唯有識中,似義顯現

▷논문; 이 중에서 무엇이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인가? 

이른바 의(義, 대상)이 없고 오직 식(識)이 존재하는 가운데 의(義, 대상)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이다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 parikalpita-svabhāva)에서 변계(遍計)는 이리저리 헤아리고 억측하는 주변계도(周遍計度)의 뜻이고, 소집(所執)은 두루 계탁함으로써 잘못 보고 집착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유식학에서는 미혹의 근원을 특히 명칭이나 언설에서 찾는다. 변계소집상은 명칭에 의해 가정적으로 안립된 자성차별이다. 그것은 허망분별에 의해 실체인 실아(實我) 또는 실법(實法)으로 착각되고 집착하는 것이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인연화합으로 생겨난 임시적인 존재의 가법(假法)이며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음에도, 범부들은 미혹하여 허망된 견해를 내어서 마음 밖에 실법(實法)이 존재하는 것으로 허망되게 집착하는 것이다.

변계소집상은 범부들의 허망된 견해에 의해 인연소생의 가아가법(假我假法) 위에 오인되어진 실아실법에 대한 미혹된 집착이며, 공허한 환상과 같은 것이어서 체성(體性)이 전혀 없는 것이다.


▶釋曰:於無義者,謂無所取,如實無我. 唯有識中者, 謂無實義, 似義識中, 如唯似我,顯現識中.

似義顯現者,似所取義相貌顯現,如實無我,似我顯現.

▷해석한다; ‘의(義, 대상)이 없다’는 것은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자아가 없는 무아(無我)인 것과 같은 것이며,

‘오직 식이 존재하는 가운데’란, 실제적인 대상이 없는 무실의(無實義)이고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식을 말하는 것으로, 오직 자아와 비슷하게  가운데에서 현현하는 것과 같으며,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한다는 사의현현(似義顯現)’이란,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비슷한 모습(相)이 현현하는 것이니, 실제로는 자아가 없는, 무아(無我)인데 자아와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論曰:此中何者,圓成實相?謂卽於彼依他起相,由似義相永無有性.

▷논문; 이 중에서 무엇이 원성실상(圓成實相)인가? 

이른바  의타기상에서 대상과 비슷한 모습(相)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거하는 성품이다.

 

원성실상(圓成實相, pariniṣpanna-svabhāva)은 원만히 성취되어 있는 참다운 성품인 원만성취진실성(圓滿成就眞實性)의 법상이고, 현상계 제법의 본체인 진여이다.

진여는 제법에 두루한 원(圓)이고, 체성이 상주불변하여 항상 변함없이 성취되어 있는 성(成)이며, 제법의 진실한 체성이어서 허망된 법이 아닌 실(實)이니, 그것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계인 것이다.


▶釋曰:於無所有,非眞實義,顯現因中,由實無有,似義相現,永無有性,如似我相,雖永是無而無我有.

▷해석한다;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이고 진실이 아닌 의(義, 대상) 현현하는 원인(因)에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의(義, 대상)와 비슷한 모습이 현현하는 것이 영원히 없음에 의거하는 성품이며,  

자아와 비슷한 상이 영원히 없지만 무아(無我)는 있다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3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③ 6

 

▶論曰: 復次此阿賴耶識差別云何?略說應知或三種`或四種.此中三種者,謂三種熏習差別故,一名言熏習差別`二我見熏習差別`三有支熏習差別.四種者,一引發差別`二異熟差別`三緣相差別`四相貌差別.

▷논문; 또한  아뢰야식의 차별은 어떠한가?

간략히 말하자면 3 가지 혹은 4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3 가지란  가지의 훈습차별 때문이니, 첫째는 명언훈습(名言熏習)의 차별이고, 

둘째는 아견훈습(我見熏習)의 차별이며, 셋째는 유지훈습(有支熏習)의 차별이다. 

4 가지란 첫째는 이끌어 내는 인발차별(引發差別)이고, 둘째는 이숙차별(異熟差別)이며, 

셋째는 형상을 반연하는 연상차별(緣相差別)이고, 넷째는 모습의 상모차별(相貌差別)이다.

ㅡ아뢰야식의 품류의 차이를 논한, 제17 차별장(17 差別章).


▶釋曰:如是已成立阿賴耶識,今當顯此品類差別.於三種熏習差別中, 名言熏習差別者, 謂眼名言熏習, 在異熟識中, 爲眼生因.異熟生眼,從彼生時,用彼爲因,還說名眼.如是耳等一切名言差別亦爾.我見熏習差別者,由染污意薩迦耶見力故,於阿賴耶識中,我執熏習生.由此爲因,謂自爲我`異我爲他,各有差別.有支熏習差別者,由善`不善,不動行力故,於諸趣中,流轉差別. 此三如後所知相初當廣分別.

▷해석한다; 이상과 같이 아뢰야식이 존재함을 성립하였으니, 이제는 품류의 차별을 나타내는 것이다. 

 가지 훈습의 차별에서 명언훈습(名言熏習)의 차별이란, 안(眼, 눈)이라는 명칭의 훈습은 이숙식 중에 있으면서 눈이 생기하는 원인이 되고, 다르게 성숙해서 눈을 일으키는 것이니, 그것으로부터 생겨날 때, 그것을 사용해서 원인으로 삼는 것을 돌이켜서 안(眼, 눈)이라 이름하는 것으로, 귀  모든 명칭의 차별 역시도 이와 같은 것이며, 

두 번째의 아견훈습(我見熏習)의 차별은 염오의(染汚意)의 살가야견의 세력으로 인하여 아뢰야식에 아집의 훈습이 생겨나고, 이를 원인으로 삼음으로써 스스로를 나(我)로 삼고 나와 다른 것을 남(他)으로 삼아서 각각 차별하는 것이며, 

세 번째의 유지훈습(有支熏習)의 차별은 선(善)ㆍ불선(不善)ㆍ부동행(不動行)의 세력으로 인하여 제취(諸趣, 여러 윤회세계)에서 유전하여 차별이 있는 것이다.

  가지는 나중에 알아야  바의 소지상(所知相)의 서두에서 자세히 분별할 것이다.


▶論曰:此中引發差別者,謂新起熏習.此若無者,行爲緣識`取爲緣有,應不得成.

▷논문;  중에서 이끌어 내는 인발차별(引發差別)이란, 새롭게 훈습을 일으키는 것이니, 만약 이것이 없다면 행(行) 지분이 식(識) 지분의 연(緣, 조건)이 되고, 취(取) 지분이 유(有) 지분의 연(緣, 조건) 되는 것이 성립될  없는 것이다.


▶釋曰:引發差別者,謂能引發品類差別.謂新起熏習者,謂彼最先所起熏習.若此能引阿賴耶識差別無者,諸行生滅熏習成識,由取攝受生有現前,此所作有,應不得成,能有後生,故名爲有.此所說取或善`不善,是串習果.
串꿸 천, 꿸 관, 익숙할 관

해석한다; 이끌어 내는 인발차별(引發差別)이란, 능히 품류를 이끌어 내는 차별을 말하는 것이니,

‘새롭게 훈습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가장 먼저 일으켜진 훈습을 말하는 것으로, 만약  능히 이끄는 아뢰야식의 차별이 없다면 모든 행(行)의 지분이 생멸하고 훈습하여서 식(識)의 지분을 이루고, 

취(取)의 지분의 섭수로 인하여 유(有) 지분을 생겨나게 해서 현전하게 할지라도, 

 만들어지는 소작(所作)의 유(有) 지분이 성취될  없어야 하는 것이다.

능히 다음 생(生)이 있기 때문에 유(有)라 이름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말하는 ‘취(取)’는 선(善)ㆍ불선(不善)으로서 자주 익힌, 습과(習果)인 것이다.


▶論曰:此中異熟差別者,謂行有爲緣,於諸趣中,異熟差別.此若無者,則無種子,後有諸法生應不成.

논문; 이 중에서 이숙차별(異熟差別) 행(行)과 유(有)의 지분을 조건(緣)으로 해서 제취(諸趣, 모든 윤회세계)에서 다르게 익어서 차별되는 것이니, 만약 이것이 없다면  종자가 없게 되므로, 존재인 후유(後有)의법이 생겨날  없는 것이다.


▶釋曰:異熟差別者,謂行有爲緣,於諸趣中,所引異熟.若此所引阿賴耶識差別無者,則無有因,後有諸法,眼等色根,此等異熟生應不成.當知此則是異熟果.

해석한다; ‘이숙차별(異熟差別)’이란 행(行)과 유(有)의 지분을 조건(緣)으로 삼아서 제취(諸趣, 모든 윤회세계)에서 이끌려진 이숙을 말한다. 만약  이끌려진 아뢰야식의 차별이 없다면,  원인이 없는 것으로, 다음 존재인 후유(後有)의 제법과 안근 등의 감각기관의 이숙이 생겨나는 것이 성립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숙의 결과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此中緣相差別者,謂卽意中我執緣相.此若無者,染污意中,我執所緣,應不得成.

논문; 이 중에서 ‘형상을 반연함의 차별의 연상차별(緣相差別)’이란, 말나식(意) 가운데 아집의 상을 반연하는 것이니, 만약 이것이 없다면 염오의(染污意) 중의 아집의 소연(所緣, 인식대상)이 성립될  없는 것이다.

 

의(意), 제7 말나식을 가리키며, 이때 의(意)의 범어는 manas(思量)이다. 그런데 제6의식을 mano-vijāna라고 해서 똑같이 manas가 사용된다. 따라서 제6 의식과 구분하기 위해서 단지 의라고 부르거나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음역어를 사용한다.

의(意), 즉 제7식에 무간멸의(無間滅意)와 염오의(染汚意)의 두 가지 의미가 있어서,

무간멸의(無間滅意)는 제7식이 제6식의 의지처인 의근(意根)임을 나타내고 낸다.

염오의(染汚意)는 제7식으로 인하여 무명의 아치(我癡)ㆍ아견 등의 근본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며, 자아 등에 집착해서 사번뇌(四煩惱)와 항상 함께 상응한다.


▶釋曰:緣相差別者,謂此阿賴耶識,卽是染污意中,能依我見我執緣相.若此緣相阿賴耶識差別無者,染污意中,薩迦耶見爲因,我執此所緣境,應不得成.當知此則是等流果.

해석한다; ‘형상을 반연함의 연상차별(緣相差別)’이란 이른바  아뢰야식이 염오의(染污意)에 능히 의지하는 아견(我見)ㆍ아집(我執)의 상을 반연하는 것이다. 

만약 아뢰야식에  상을 반연하는 연상(緣相) 차별이 없다면, 염오의 중의 살가야견을 원인으로 하는 아집이  소연경(所緣境, 인식대상)으로 성립될  없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은 등류과(等流果)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此中相貌差別者,謂卽此識,有共相`有不共相,無受生種子相`有受生種子相等.

논문; 이 중, 모습의 상모차별(相貌差別)은, 곧  식에 공통된 상의 공상(共相)과 공통되지 않은 상의 불공상(不共相)이 있고, 감각ㆍ지각 작용이 없는 종자의 무수생종자(無受生種子)의 상과 

감각ㆍ지각작용이 있는 종자의 유수생종자(有受生種子)의  등이다.

 

▶釋曰:相貌差別有多品類,謂於此中,有共相`有不共相,無受生種子相`有受生種子相等者.是略摽擧,後當廣釋.

해석한다; 상모차별(相貌差別)에는 많은 품류가 있으니, ‘이른바  가운데 공통된 공상(共相)이 있고, 공통되지 않은 불공상(不共相) 있고, 감각ㆍ지각 작용이 없는 무수생종자(無受生種子) 상과 

감각ㆍ지각 작용이 있는 유수생종자(有受生種子)  등이다’고 간략히 열거하였으니, 나중에 자세히 해석하겠다.


▶論曰:共相者,謂器世閒種子.不共相者,謂各別內處種子.共相,卽是無受生種子,不共相,卽是有受生種子. 對治生時,唯不共相所對治滅;共相爲他分別所持,但見淸淨.如瑜伽師,於一物中,種種勝解,種種所見,皆得成立.此中二頌:

논문; 공통된 공상(共相) 기세간(器世間, 자연계)의 종자를 말하고, 

공통되지 않은 불공상(不共相) 각각의 내부 종자이다. 

공상(共相)은 감각ㆍ지각 작용이 없는 무수생종자(無受生種子)이고,

불공상(不共相)은 감각ㆍ지각 작용이 있는 유수생종자(有受生種子)이다. 

다스림의 대치(對治)가 생겨날 때에는 오직 불공상(不共相)만을 다스려서 멸하고,

공상(共相)은 다른 분별에 섭지되어져서 다만 청정함을  뿐이니,

관행을 닦는 유가사(瑜伽師)가 하나의 사물에서 갖가지 뛰어난 승해(勝解) 갖가지의 소견을 모두 성립할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러함을  게송으로 말하였다.


“難斷難遍知, 應知名共結, 瑜伽者心異, 由外相大故.

멸(滅)하기 어렵고 두루 알기 어려운 것을 공통된 속박의 공결(共結)이라 한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리니, 

관행을 닦는 유가자(瑜伽者)는 마음이 다르고 외부가 상대(相大)이기 때문이라네.


淨者雖不滅, 而於中見淨, 又淸淨佛土, 由佛見淸淨.”

청정한 사람은 멸(滅)하지 않아도  안에서 청정함을 보며,

또한 청정한 불국토는 부처님께서 청정함이라고 보기 때문이라네.


復有別頌,對前所引,種種勝解`種種所見,皆得成立.

또한 별도의 게송이 있어서, 앞에서 인용한 것에 대하여, 갖가지 뛰어난 승해(勝解) 갖가지 소견 모두를 성립하였다.


“諸瑜伽師於一物, 種種勝解各不同, 種種所見皆得成, 故知所取唯有識.”

관행을 닦는 모든 유가사(瑜伽師)  사물에 대하여 뛰어난 승해(勝解) 갖가지로 각각 다르고

갖가지의 소견도  이루나니, 그러므로 인식대상은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此若無者,諸器世閒`有情世閒,生起差別,應不得成.

만약 이 식(識)이 없다면, 모든 자연계와 유정의 기세간에서의 차별이 일어나는 것은 마땅히 성립될  없어야다.


▶釋曰:此中,若阿賴耶識,爲一切有情,共器世閒因體,卽是無受生種子.若阿賴耶識,爲不共各別色等諸處因體,卽是有受生種子.若離如是品類共相阿賴耶識,一切有情共受用因,諸器世閒,應不得成.如是若離第二不共阿賴耶識,有情世閒,亦應不成.由此應如木石等生.

해석한다; 이 중, 만약 아뢰야식이 모든 유정의 공통된 자연계인 기세간(器世間) 자체의 원인인 인체(因體)가 된다면,  감각ㆍ지각 작용이 없는 무수생종자(無受生種子)일 것이고,

만약 아뢰야식이 공통되지 않은 각각의 다른 색처(色處) 등의 12처 자체의 원인인 인체(因體)가 된다면  감각ㆍ지각 작용이 있는 유수생종자(有受生種子)일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품류의 공상(共相)인 아뢰야식을 떠난다면, 모든 유정이 공통적으로 수용하는 원인(因)인 모든 기세간(器世間, 자연계)이 마땅히 성립될  없어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이 만약  번째의 불공(不共)의 아뢰야식을 떠난다면 유정세간 또한 마땅히 성립될  없어야 할 것이니,

이로 인하여 나무ㆍ돌 등과 같은 것이 생겨나는 것이다.


▶論曰:復有麤重相,及輕安相.麤重相者,謂煩惱隨煩惱種子.輕安相者,謂有漏善法種子.此若無者,所感異熟無所堪能,有所堪能所依差別,應不得成.

▷논문; 또한 거칠고 무거운 추중상(麤重相)과 가볍고 평안함의 경안상(輕安相)이 있으니,

거칠고 무거운 추중상(麤重相)이란 번뇌와 수번뇌의 종자이고,

가볍고 평안함의 경안상(輕安相)은 유루 선법의 종자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초감된 이숙에 감당 능력이 없는 무감능(無堪能)의 소의(所依, 의지처)와

감당 능력이 있는 유감능(有堪能)의 소의(所依, 의지처) 차별이 성립될  없어야 할 것이다.

 

復有有受盡相`無受盡相.有受盡相者,謂已成熟異熟果,善`不善種子.無受盡相者,謂名言熏習種子,無始時來,種種戲論流轉種子故.此若無者,已作已作善惡二業,與果受盡,應不得成.又新名言熏習生起,應不得成.

또한 수용의 다함이 있는 유수진(有受盡)의 상(相)과 수용의 다함이 없는 무수진(無受盡)의 상(相)이 있으니,

수용의 다함이 있는 유수진상(有受盡相) 이미 이숙과를 성숙시킨 선ㆍ불선의 종자이며,  

수용의 다함이 없는 무수진상(無受盡相) 명언훈습의 종자이니, 아득한 옛적부터 갖가지 희론에 의해 유전되는 종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이미 짓고 지어진 선악의  가지 업의 과보를  받는 일이 이루어질  없어야 할 것이며, 또한 새롭게 명언훈습이 생기하는 일이 이루어질  없어야 할 것이다.

 

수용의 다함이 있는 유수진(有受盡)이란, 종자의 공능(功能, 작용의 힘)을 다 수용해서 남음이 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선ㆍ불선의 과거의 업종자는 이숙(異熟)의 과보를 초감하기 때문에 남음이 없는 것이다.


復有譬喩相,謂此阿賴耶識,幻`炎`夢`翳爲譬喩故.此若無者,由不實遍計種子故,顚倒緣相,應不得成.

復有具足相`不具足相,謂諸具縛者,名具足相,世閒離欲者,名損減相.有學`聲聞及諸菩薩, 名一分永拔相,

阿羅漢`獨覺及諸如來,名煩惱障,全永拔相,及煩惱`所知障,全永拔相,如其所應.此若無者,如是次第,雜染還滅,應不得成.

또한 비유의 비유상(譬喩相)이 있으니, 이 아뢰야식은 환(幻)ㆍ불꽃 염(炎)ㆍ몽(夢)ㆍ흐리고 어둠운 음예(陰翳)를 비유로 삼기 때문에, 만약 이것이 없다면, 불실(不實)한 변계소집의 종자로 인하여 전도된 연상(緣相)은 이루어질  없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갖춘 구족상(具足相)과 갖추지 않은 불구족상(不具足相)이 있으니,

모든 속박을 갖춘 것을 구족(具足)의 상(相)이라 이름하고,

세간의 욕망을 여읜 이를, 감손상(損減相)이라 하나니, 유학의 성문과 모든 보살을 부분적으로 영원히 없앤, 일분영발상(一分永拔相)이라 이름하며,

아라한과 독각과 모든 여래는 번뇌장을 전부 영원히 없앤, 전영발상(全永拔相) 

번뇌장과 소지장을 모두 영원히 없앤, 전영발상(全永拔相)이라 하는 것이니,  상응하는 바는 같은 것이다. 

만약 이러함이 없다면, 이와 같이 잡염이 차례로 소멸하는 것이 성립될  없어야 할 것이다.


▶釋曰:麤重相者,謂所依中,無堪能性.輕安相者,謂所依中,有堪能性. 若無有受盡相,阿賴耶識,數數已作善惡二業,與果受盡,應不得成.無受盡相謂名言熏習種子者, 如名言熏習差別中已說.

해석한다; ‘거칠고 무거움의 추중상(麤重相)’은 소의(所依, 의지처) 중에서 감당 능력이 없는 무감능(無堪能)의 성품(性)을 말하고, 

‘가볍고 평안함의 경안상(輕安相)’은 소의(所依, 의지처) 중에서 감당 능력이 있는 유감능(有堪能)의 성품(性)을 말한다. 

만약 수용의 다함이 있는 유수진상(有受盡相)인, 아뢰야식이 없다면, 누누하게 이미 지어진 선업과 악업의 과보를 받아서  수용하는 이루어질  없어야 할 것이며, 

‘수용의 다함이 없는 무수진상(無受盡相)이 명언훈습의 종자’라는 것은, 명언훈습의 차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

 

無始時來,種種戲論流轉種子故者,謂無始時,來共言說因故.若無如是阿賴耶識, 新起名言熏習生起應不得成. 何以故?若無舊熏習,今名言亦無故.若於世閒,本來無者,本無今有不應道理.譬喩相者,如由所作幻等因故,得有象等,顚倒緣相.阿賴耶識,亦復如是,由所說譬喩相,不實遍計種子故,有顚倒緣相.此若無者,顚倒緣相,應不得成.

‘아득한 무시로부터 갖가지의 희론에 의해 유전되는 종자이기 때문’이란 아득한 무시로부터 언설의 언설인(言說因) 함께하기 때문이니, 만약 이러한 아뢰야식이 없다면 새로운 명언훈습이 생기하는 것이 성립될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예전의 훈습이 없었다면 지금의 명언(名言)도 역시 없을 것이기 때문이며, 

만약 세간에 본래 없는 것이라면, 본래 없었던 것이 지금에는 있게 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비유의 비유상(譬喩相)’이란 지은 요술 등의 원인으로 인하여 나타내어진 코끼리 등과 같이, 전도되어 반연된 연상(緣相)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아뢰야식도 이와 같아서, 말한 비유의 상인 진실되지 않은 변계소집의 종자로 인하여 전도되어 반연된 된 연상(緣相)이 있는 것이나, 만약 이것이 없다면 전도되어 반연된 연상(緣相) 이루어질  없어야 할 것이다.


▶論曰:何因緣故,善`不善法,能感異熟? 其異熟果,無覆無記 由異熟果,無覆無記,與善`不善,互不相違,善與不善,互相違故.若異熟果,善`不善性,雜染還滅,應不得成,是故異熟識,唯無覆無記.

논문; 선과 불선의 법은 어떻게 이숙을 초감하는 것인가? 

 이숙과는 무부무기(無覆無記)이기 때문이다. 이숙과는 무부무기인 까닭에 선과 불선이 서로 위배되지 않는 것이나,

선과 불선은 서로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이숙과가 선ㆍ불선의 성품이라면 잡염과 환멸(還滅)이 성립될  없어야 할 것이니, 따라서 이숙식은 오직 무부무기(無覆無記)일 뿐인 것이다.


▶釋曰:無覆無記者,此中無染說名無覆,卽無染無記,名無覆無記.非如色界生煩惱不善說爲無記.

若異熟果善`不善性,雜染還滅,應不得成者.以從善更生善`從不善更生不善故, 則生死流轉, 無有邊際,

流轉雜染通有漏善故.

▷해석한다; ‘무부무기’는 그 중에 잡염이 없는 것을 무부(無覆)라 이름하는 것으로, 즉 잡염이 없는 무기를 무부무기(無覆無記)라 하는 것이다.

색계에서 생겨나는 번뇌의 불선을 무기로 삼는 유부무기(有覆無記)와는 다른 것이다.

‘만약 이숙과가 선ㆍ불선의 성품이라면 잡염과 환멸은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이란,

선(善)으로부터 다시 선(善)이 생겨나게 하고, 불선(不善)으로부터 다시 불선(不善)을 일으키기 때문에, 곧 생사유전하여 끝이 없게 되는 것이며, 

유루의 선은 유전의 원인인 잡염에 포섭되기 때문에 유전의 잡염은 유루선(有漏善)에 통하는 것이다.


攝大乘論釋卷第三 終 섭대승론석 제 3권을 마침.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3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③ 5

 

▶論曰:又此定中,由意識故,執有心者,此心是善`不善`無記,皆不得成,故不應理.

▷논문; 또한  선정(멸진정) 중에서 의식(意識)에 의거해서 마음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마음은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釋曰:已廣廢立滅定有心,今當略顯第二頌義.若有欲除阿賴耶識,以意識故,滅定有心.此心,是善`不善`無記,皆不得成, 故不應理. 何以故?由此滅定,是善性故,且非不善`無記亦爾,威儀`工巧`變化無記定不得有.若說此是異熟無記,理卽應至阿賴耶識,除此更無第五無記.

▷해석한다; 이미 멸진정에 마음이 있다는 견해를 자세히 논파하였으니, 이제는 두 번째 게송의 의미를 나타내겠다.

만약 어떤 이가 아뢰야식을 부정하기 위하여 의식(意識)으로써 멸진정에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선ㆍ불선ㆍ무기가  성립될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멸진정은 선의 성품인 선성(善性)이기 때문에 불선(不善)이 아니고, 또한 무기(無記)도 아닌 것이니,

사무기(四無記) 중에서 이숙무기(異熟無記)를 제외한 나머지  위의(威儀)ㆍ공교(工巧)ㆍ변화(變化)의 무기는 결정적으로 있을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이숙무기(異熟無記)라고 말한다면, 그 이치가 마땅히 아뢰야식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니, 이것을 제외한 다섯 번째의 무기란 없기 때문이다.

 

사무기(四無記), 일체 만유의 도덕적 성질의 분류에 3성(性)이 있는 중, 선악이 결정되지 아니하여, 선악의 결과를 불러 올 힘이 없는 무기성을 네가지로 나눈 것.

① 이숙무기(異熟無記), 선악의 업종자를 증상연(增上緣)으로 하여서 얻는 과보.

② 위의무기(威儀無記),, 위의로심(威儀路心)이라고도 하며, 앉고 서고 가는 동작 등을 일으키는 마음의 성질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

③ 공교무기(工巧無記)니, 공교처심(工巧處心)이라고도 하며,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물품을 만드는 신공교(身工巧)와, 노래를 부르는 등의 어공교(語工巧)를 일으키는 마음의 성질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

④ 변화무기(變化無記), 정력(定力)으로 사람과 궁전 등을 변작(變作)하는 마음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


又此定中,心若是善,應無貪等, 善根相應, 染污意滅,唯善心在, 爾時,善心所依`所緣,皆悉是有三事和合, 云何此中不生其觸? 旣有其觸,受等心法,何得不生? 如是滅定,應不得成,諸心`心法,皆不滅故.

또한  선정 중에서 심왕이 선(善)이라면 마땅히 무탐 등의 선근과 상응하여 염오(染污)의 의식은 멸하고 오직 선심만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니, 그 때에는 선심(善心)ㆍ소의(所依, 의지처)ㆍ소연(所緣, 인식대상) 모두가 존재하여서  가지가 화합하는 삼사화합(三事和合)하는 것이다. 

촉(觸) 심소는 근(根)ㆍ경(境)ㆍ식의 3사화합(事和合)으로 설명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이 멸진정 중에서  촉의 심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인가?

만약  촉(觸)이 있다면, 어찌하여 감수작용의 수(受) 등의 심소법이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그러하다면 멸진정이 성립될  없는 것이니, 이 멸진정에서는 모든 심왕과 심소가  멸한 때문이다.


又若有執 此定是善,由心所引定前方便能引善心力所引故. 定中善心, 非無貪等,善根相應.
又三和合,若有堪能,亦能生受;若三和合,無有堪能,唯生其觸. 是故定中,雖有善心,非無貪等善根相應,亦無受等. 此義不然,

또한 만약 어떤 이가 집착하여서, “이 선정이 선(善)인 것은 마음이 이끄는 심소인(心所引)의 선정 이전의 방편의 능인(能引)의 선심력(善心力)에 이끌린 것이기 때문에, 선정 중의 선심은 무탐 등의 선근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감각기관의 근(根)ㆍ대상의 경(境)ㆍ식(識)이 3사화합(事和合)한 촉(觸)을 말하는 것이니,

3사화합(事和合)에서 감당 능력의 감능(堪能)이 있으면, 능히 감수작용의 수(受)를 생겨나게 할 수 있지만, 

만약 3사화합에서 감당 능력의 감능(堪能)이 없으면 오직  촉을 생겨나게  뿐인 것이다. 

따라서 선정 중에 비록 선심이 있을지라도 무탐 등의 선근과 상응하지 않으며, 역시 감수작용의 수(受) 등도 없다”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方便善心,旣無貪等善根相應, 從此所引等流果心, 何故不爾? 又從所依拔除能依,不應理故,心與心法,無始已來, 於一切時,互不相離,

방편의 선심은 이미 무탐 등의 선근과 상응하는데,  이끌려진 소인(所引)으로부터 등류과(等流果)의 마음은 어찌하여 그렇지 않은 것인가? 

또한 소의(所依, 의지처)로부터 능히 의지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심왕과 심소는 아득한 무시로부터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서로 여의지 않는 것이다. 

 

등류과(等流果)는 원인과 결과가 같은 부류인 것을 말한다. 지옥에서 때로는 즐거움을 초감하는 경우에는 이전에 그럴 만한 같은 부류의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고, 지옥의 과보인 이숙과(異熟果) 자체는 순전히 괴로움일 뿐이다.

 

今拔能依, 令離所依,必不可得. 何以故?有譬喩故.謂於世閒,從生至壞,於一切時,互不相離,無有道理拔除能依令離所依. 譬如大種與所造色,無有道理令其所造離於能造.心法亦爾, 不可令其離所依心.是故於此無心定中,無有心法,但有善心,不應道理.

이제 능의(能依, 의지처)를 부정하여 소의(所依, 의지처)를 떠나게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비유가 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생(生)으로부터 멸(滅)하기까지의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서로를 떠나지 않는 것이니, 도리적으로 능히 의지하는 능의(能依, 의지처)를 부정하여 소의(所依, 의지처)를 떠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4대(大)와 4대로 이루어진 물질(色)과 같으니, 그 이루어진, 소조(所造)로 하여금 능히 이루는 것의 능조(能造)로부터 떠나게 하는 도리가 없는 것이니,

심소 역시도 그러한 것으로, 그것으로 하여금 의지처인 심왕을 떠나게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심정 중에서 심소의 심법(心法)은 없고 다만 선심(善心)만 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若有復謂,令拔能依令離所依,雖不應理,然想及受能障此定, 於方便中,厭患彼故. 唯二不行,餘法不爾, 亦得現行, 不應道理. 何以故? 如非遍行,此不有故.

만약 어떤 이가 다시, “지금 능히 의지하는 능의(能依, 의지처)를 부정하여 소의(所依, 의지처) 떠나게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나, 그러나 표상작용(想)과 감수작용(受)의 심소는 능히  선정을 장애하는 것이니, 방편에서 그것을 혐오하기 때문에 오직 이  가지만은 작용하지 않지만 다른 심소는 그렇지 않아서 역시 현행할  있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변행심소가 아닌 것은 여기에 없기 때문이다. 

 

변행심소(遍行心所), 변행(遍行)은 이라고도 하며, ①작의(作意), ②촉(觸), ③수(受), ④상(想), ⑤사(思) 심소이다.

변행심소가 아닌 것은, 51가지 심소법 가운데 변행심소 이외의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 선심소(善心所) 11가지 ·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의 20가지 · 부정심소(不定心所) 4가지이다.

변행심소(遍行心所) 8식에 언제나 상응하여 함께 작용하는 보편적인 심리작용이다.  심소는 선ㆍ악ㆍ무기의 3 모두에 두루 일어나는 일체성(一切性)이며, 삼계 어디에서나 작용하는 일체지(一切地)이며, 유심ㆍ무심의 모든 순간에 일어나는 일체시(一切時)로써, 변행의 다섯 심소는 언제나 함께 일어나는 일체구(一切俱)인 것이다.  

 

非遍行者,此中可滅,二是遍行,故不可滅.遍行若滅,心亦隨滅,無別因故.是故此中言有心者,是異熟識,定非意識.

변행심소가 아닌 것은  선정 중에서 멸하지만, 표상작용(想)과 감수작용(受)의 심소 변행심소이기 때문에 멸하지 않으며, 

변행심소가 멸한다면 심왕도 따라서 멸하나니, 별도의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정 중에서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숙식일 뿐, 결코 의식이 아닌 것이다.

 

▶論曰:若復有執色心無閒生是諸法種子,此不得成,如前已說.

又從無色`無想天沒,滅定等出,不應道理.又阿羅漢後心不成,唯可容有等無閒緣.

▷논문; 만약, 다시 어떤 이가 집착해서 말하기를, “물질과 마음의 색심(色心)이 끊임없이 제법의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성립될 수 없으니,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때문이다.

또한 무색계(無色界)나 무상천(無想天)에서 죽거나 멸진정(滅盡定)에서 나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한 아라한 이후의 마음이 성립되지 않으니, 오직 등무간연(等無墾緣)이 있음이 인정될 뿐인 것이다.

ㅡ신체의 물질(色)과 마음(心)이 끊임 없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는 견해를 논파한 것이다.

 

▶釋曰:若復有執色心無閒生,是諸法種子者, 謂若有執前剎那色,能爲種子,後剎那色因彼而生, 前識後識相望亦爾.此前已破.

▷해석한다; ‘만약 다시 어떤 이가 집착해서 말하기를, 물질(色)과 마음(心)이 중단됨 없이 법의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는 것이란, 만약 어떤 이가 집착으로, “앞 찰나의 물질(色)이 종자가 되어서,  찰나의 물질(色)이 그것으로 인하여 생겨나며, 앞의 식(識)과 그 뒤 (識)이 서로 배대되는 것도 그러하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이미 앞에서 논파하였다.

 

又無色沒,色復生時,色久斷滅,何有種子?無想天沒,或復從於滅定等出,心復生時,心久斷滅,何有心因?

若如是者, 諸阿羅漢,終不應得無餘涅槃, 色心兩因,永無盡故. 前剎那色,望於後色,

前剎那識,望於後識,應知容有等無閒緣,無有因緣.

또한 무색계에서 죽어서 물질(色)이 다시 생겨날 때, 물질(色)이 오래전에 단멸했는데 어떻게 종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무상천에서 죽거나 혹은 다시 멸진정에서 나와서 마음(心)이 다시 생기할 때, 마음이 오래도록 단멸했는데, 어떻게 마음의 원인인 심인(心因)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이러하다면 모든 아라한은 마지막에도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갈  없는 것이니, 신체(色)와 마음(心)의  원인(因)이 영원히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찰나의 물질(色)을 그 뒤 찰나의 물질(色)에 배대하고, 

 찰나의 식(識)을 그 뒤 찰나의 식(識)에 배대하는 것은 등무간연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 뿐, 인연(因緣)이 아닌 것이다.


▶論曰: 如是若離一切種子,異熟果識,雜染`淸淨,皆不得成.是故成就如前所說相,阿賴耶識決定是有.

▷논문; 이와 같이 일체종자의 이숙과식을 떠나서는 잡염과 청정 모두가 성립될 수 없으니,

따라서 앞에서 말한 상(相)의 아뢰야식은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


▶釋曰:由前所說,無量道理,是故成就阿賴耶識決定是有.

▷해석한다; 앞에서 수많은 도리를 말한 것으로 인하여 아뢰야식이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


▶論曰:此中三頌:

논문;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菩薩於淨心, 遠離於五識, 無餘心轉依, 云何汝當作?

보살은 청정한 마음의 정심(淨心)으로 5식(識)을 멀리 여의거늘, 

다른 것이 없는 마음의 전의(轉依)를 그대는 장차 어떻게 이루고자 하는 것인가?

 

전의(轉依), 문자 그대로의 뜻은 '소의(所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꾸는 전(轉)'으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transformation)시키는,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의는 소의이전(所依已轉) 또는 변주(變住)라고도 하는데, 소의이전(所依已轉)은 소의(所依)가 이미 변형되었다는 뜻이고 변주(變住)는 변형이 완료되어 그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다. ㅡ 위키


若對治轉依, 非斷故不成, 果因無差別, 於永斷成過.

만약, 다스림의 대치전의(對治轉依)라면, 단멸이 아니므로 성립되지 않고, 

결과와 원인에 차별이 없어서, 영원히 단멸함에 있어서 과실을 이룰 뿐이라네.


無種或無體, 若許爲轉依, 無彼二無故, 轉依不應理.”

만약 종자가 없는 무종(無種)이거나, 혹 체가 없는 무체(無體)를 전의라고 인정한다면

  가지 없음의 이무(二無)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전의라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네.


▶釋曰:如住轉識,轉依不成,三頌顯示.菩薩於淨心者,是於出世對治相應善意識義. 遠離於五識者,謂此遠離眼等五識. 言無餘者,無善有漏雜染意識. 已擧淨心,復擧無餘, 爲欲遮遣善有漏識.

해석한다; 전식(轉識)에 있어서는 전의(轉依)가 성립되지 않음을  개의 게송으로 나타내 보였으니,

‘보살은 청정한 마음의 정심(淨心)’이란, 출세간의 대치(對治, 다스림)과 상응하는 착한 성품의 의식의 의미이며,

‘5식을 멀리 여읜다’는 것은, 안식 등의 5식을 멀리 여의는 것을 말하며,

‘다른 것이 없는’것이란, 착한 성품의 유루잡염(有漏雜染)의 의식이 없는 것이다.

이미 청정한 마음의 정심(淨心)을 말하고, 다시 다른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은 착한 성품의유루식(善有漏識)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전식(轉識),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 · 말나식의 7가지의 식은 모두 제8식인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긴 것 또는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통칭하여 7전식(七轉識) 또는 전식(轉識)이라 부른다. 또한 이들 7가지 식들을 전7식(前七識)이라고도 한다.


言心轉依云何作者, 若汝信有阿賴耶識,可作一切雜染種子, 無種子義, 名心轉依. 若不爾者, 云何當作?若對治生,名爲轉依,此不應理.何以故?若對治轉依非斷故,不成雜染.永斷故,名轉依,非能對治卽是永斷, 由此但是永斷因故.

‘마음의 전의(心轉依)를 어떻게 이루는 것인가?’란, 만약 그대가 아뢰야식이 모든 잡염법의 종자가 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종자가 없다는 뜻을 마음의 심전의(心轉依)전의로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장차 어떻게 짓겠는가? 

만약 다스림의 대치로 생겨나는 것을 전의로 이름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만약 다스림의 대치전의라면 단멸이 아니기 때문에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잡염이 영원히 단멸되기 때문에 전의(轉依)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능히 다스려서 대치한다는 것은 영원히 단멸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은 다만 영원히 단멸의 원인이 될 뿐인 것이다. 

 

若必爾者,便至果因無差別過.果是永斷說名涅槃,因是對治說名聖道.

若能對治,卽是永斷,應至果因一體之過,纔生對治應卽涅槃.

만약 그렇다면, 문득 결과와 원인의 차이가 없는 과실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결과는 영원히 단멸한 것으로서, 열반이라 이름하고, 

원인은 대치(對治, 다스리는)하는 것으로서 성도(聖道)라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다스리는 능대치(能對治)가 영원히 단멸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결과와 원인이 하나의 체(體)라는 과실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다스림의 대치가 생겨나게자말자  열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無種或無體,若許爲轉依者,若於轉識,作無種子,或卽無體許爲轉依.無彼二無故,轉依不應理.雜染轉識,此定位中,不得有故,亦無種子可令作無.無二可無而名轉依,不應道理.

‘만약 종자가 없는 무종(無種)이거나, 혹 체가 없는 무체(無體)를 전의라고 인정한다면’이란,

만약 전식에 대해서 종자가 없다면, 무종자(無種子)라 하고, 혹은 자체가 없는 무체(無體)를 인정해서 전의라고 한다면,

그 두 가지의 없음의 이무(二無)이기 때문에 전의의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잡염의 전식은 이 선정의 단계에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종자가 없다고도 할 수 없으면, 무종(無種),  무체(無體)의 두 가지도 없을 수 없으니, 전의로 이름하는 것의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ㅡ소의(所依, 의지처) 종자가 없고, 능히 의지하는 능의(能依) 의식도 없다면 의지처를 전환한다는 전의(轉依) 의미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若決定有阿賴耶識,雜染轉識, 此定位中, 雖不得有, 而彼種子一切, 住在阿賴耶識, 可能作其無種無體.

由汝轉依不應道理,故應信有阿賴耶識.

만약 결정적으로 아뢰야식이 있는 것이라면, 잡염의 전식이 이 선정의 단계에서 존재하지 않아도 그것의 모든 종자가 아뢰야식에 존재하며, 능히 그 종자도 없는 무종(無種)과 자체도 없음의 무체(無體)를 지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는 전의는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아뢰야식이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3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③ 4

 

▶論曰:又若有執,以意識故,滅定有心.此心不成,定不應成故`所緣行相不可得故` 應有善根相應過故`不善無記不應理故`應有想受現行過故`觸可得故`於三摩地有功能故`應有唯滅想過失故`應有其思信等善根現行過故`拔彼能依令離所依不應理故`有譬喩故`如非遍行此不有故.

▷논문; 또한 만약 어떤 이가 집착해서 말하기를, “의식이 있기 때문에 멸진정에 마음(心)이 있다”고 한다면, 이 마음(心)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니, 선정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며, 멸진정은 의식의 작용이 멸하는 선정인 까닭이며,  

소연(所緣,인식대상)과 행상(行相, 인식작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선근(善根)과 상응한다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며, 불선과 무기는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며,

표상작용의 상(想)과 감수작용의 수(受) 심소가 현행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며,

접촉의 촉(觸)의 심소가 있기 때문이며, 삼마지에서 작용의 힘이 있기 때문이며,

오직 표상작용의 상(想) 심소만을 멸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며,

그 의지의 사(思)와 믿음의 신(信) 심소 등의 선근이 현행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며,

그 능히 의지하는 능의(能依)의 표상작용의 상(想) 등의 여러 심소(心所, 심리작용)을 부정하고, 그들 심소법이 수반되는 심왕의 소의(所依, 의지처)를 여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며,

비유가 있기 때문이고, 변행(遍行)심소가 아닌 것은 여기에 없기 때문이다.

 

▶釋曰:又若有執,以意識故,滅定有心,此心不成者, 若有欲離前說自相阿賴耶識,以餘轉識,滅定有心,此不應理.何以故?定不應成故

▷해석한다; ‘또한 만약 어떤 이가 집착해서 말하기를, 의식이 있기 때문에 멸진정에 마음(心)이 있다고 한다면, 이 마음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만약 어떤 이가 앞에서 말한 자체의 자상(自相)의 아뢰야식을 부정하고자 다른 전식(轉識)으로써 멸진정에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마땅히 선정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며, 

ㅡ멸진정에 전식(轉識) 있다고 안립하는 것의 과실을 11가지 이유를 들어서 논파한 것에서  번째 과실이다.

 

`未曾見心離心法故.

일찍이 심왕법(心王法)이 심소법(心所法)을 여의는 것을 보지 못한 때문이며,

 

정신세계를 식별작용의 주체인 심왕(心王) 그에 수반되는 심리작용의 심소(心所)로 나눈다. 

심왕(citta)은 정신작용의 주체로서 구체적으로 8식(識)이고, 심소(caitta)는 심왕에 종속된 심리작용이다. 

심왕과 심소는 체(體)를 달리하며 상응(相應)하여 함께 일어나는 구기(俱起)하며,

구체적인 인식상황 속에서 심왕은 대상의 전체적인 윤곽을 취하고, 

심소는 구체적인 모습들까지 취함으로써 전체적인 대상의 인식작용이 가능한 것이다.

 

如餘心法,想受亦爾,俱應不滅.然此滅定俱滅所顯,是故應至定不應成.若立唯有阿賴耶識,則無此過.求靜住者,爲治彼怨,餘心`心法故生此定,不爲對治不明了性阿賴耶識.

나머지 심소법인 표상작용의 상(想)과 감수작용의 수(受)와 같은 것 역시도 그러해서 함께 멸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나, 이 멸진정은 전식(轉識)의 심왕과 그에 수반되는 심소법이 함께 멸함이 나타나는 바이므로 마땅히 선정이 성립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오직 아뢰야식이 존재할 뿐이라고 안립한다면 곧 이러한 과실이 없게 되는 것이니,

고요히 머무르기를 구하는 이는, 고요히 선정에 머무는 것을 장애하는, 그 원수 같은 심왕과 심소법을 다스리기 위해서 이 선정을 일으키는 것일 뿐,

아뢰야식의 체성(體性)은 선도 악도 아닌 무기성(無記性)으로써 명료하지 않은 성품의 아뢰야식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又此定內無有餘心.何以故?所緣行相不可得故. 諸心`心法相續不斷,必不遠離所緣行相.此滅定中,若有心者,亦應不離所緣行相.然此二種,俱不可得,是故此定,無有餘心.若唯立有阿賴耶識,無此妨難,執受所依之所顯故.

또한  선정(멸진정)에는 다른 심왕법은 존재하지 않으니, 왜냐하면 소연(所緣, 인식대상)과 행상(行相, 인식작용)을 얻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심왕과 심소법(心法)이 상속해서 단절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소연(所緣, 인식대상)과 행상(行相, 인식작용) 멀리 여의지 않아야 하며,

 멸진정 중에 만약 심왕법이 있다면 역시 소연(所緣, 인식대상)과 행상(行相, 인식작용) 여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연(所緣, 인식대상)과 행상(行相, 인식작용)의 두 가지 모두가 없기 때문에  선정에는 다른 심왕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아뢰야식이 존재할 뿐이라고 안립한다면 이러한 비판이 없는 것이니, 집수(執受)는 소의(所依, 의지처) 나타난 바이기 때문이다.

ㅡ두 번째 과실.

 

又此定中,若有轉識,此識必有善等差別,謂或是善`或是不善`或是無記.然此中識且非是善,應有善根相應過故,此則相違. 亦非此識是自性善,由此不離善根相應成善性故,

또한  선정 중에 만약 전식이 있다면,  식에는 반드시 선(善) 등의 차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른바 선(善) 혹은 불선(不善) 혹은 무기(無記)인 것이다. 

그러하다면, 이 선정 중의 식(識)은 선이 아닌 것이니, 선근과 상응하는 과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위배되는 것이다. 

역시  식의 자성선(自性善)이 아닌 것이니, 이 식이 선근과 상응함을 여읜다면 선성(善性)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ㅡ 세 번째 과실

 

由立定心,是善性故. 至所不欲與無貪等善根相應,此不應許,

선정의 마음인 정심(定心)은 선성(善性)으로 안립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의도하지 않았던 무탐(無貪) 등의 선근과 상응하게 되는 것이니, 이러함 마땅히 인정되지 않는 것으로,  

ㅡ 앞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정심(定心) 선성(善性)이라고 안립한다든가, 

혹은 그것이 무탐(無貪) 등의 선근과도 상응한다고 해서,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與餘善心,無差別故,遍一切處,應成此過.

나머지 선심(善心)과 차이가 없기 때문에 두루 모든 곳에서 이러한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ㅡ선심(善心) 일어나는 모든 곳에 동일한 과실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선정에 선심이 있다면 멸진정의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又於此中,亦不得有不善`無記,不善`無記,不應理故.

또한  가운데에서는 불선과 무기도 있을  없으니, 불선과 무기는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ㅡ네 번째 과실.

 

於離欲時,諸不善根,皆永斷故,不成不善,

욕망을 여읠  모든 불선근(不善根)이 영원히 단멸되기 때문에 불선을 이루지 못하며,

ㅡ멸진정은 욕계의 욕망을 멀리 여의기 때문에, 불선은 그 때에  멸진되는 것이다.

 

亦非無記,此定善故.

무기 역시도 아닌 것이니, 이 선정은 선(善)이기 때문이다.

ㅡ멸진정에 선심(善心), 선의 심소법은 없지만 선정 자체는 ()인 것이다.

 

又不可立此心是善,應有想受現行過故. 若離善根, 善心不有, 是故應至善根現行.此中如有善根現行,想受亦爾,應至現行, 無別因故. 然不應理,所治現行,能治無故.譬如貪等,正現行時,不淨觀等決定無有.

또한  마음을 선(善)이라고 안립해서도  되는 것이니, 표상작용의 상(想)과 감수작용의 수(受) 심소가 현행하는 과실이 있게 되기 때문이며,  

선근을 여읜다면 선심이 없는 것이 때문에, 마땅히 선근이 현행하는  이르러야 하며,

 선정 중에서 선근이 현행하는 것과 같이 표상작용의 상(想)과 감수작용의 수(受) 심소 역시도 그러해서 마땅히 현행하는  이르러야 할 것이니, 별도의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다스림의 소치(所治)가 현행할 때에는 능히 다스리는 능치(能治)가 없기 때문이니, 예를 들면 탐욕 등이 현행하는 바로 그 때에는 부정관(不淨觀) 등이 결정적으로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선심(善心)이 있다면 선근(善根)이 있어야 하고, 선근이 있다면 표상작용의 상(想)과 감수작용의 수(受) 역시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다스려지는 마음에 감수작용과 표상작용이 있게 되는 까닭 능히 다스리는 선정이 없게 되는 것이.

 

상(想, sanjā)은 표상작용(表象作用), 즉 대상의 형상을 취하여 명칭을 붙이는(언어와 일치할 수 있는) 개념화 작용을 한다.

수(受, vedanā)의 심소는 감수작용(感受作用),. 심왕으로 하여금 대상에 따라 수순(隨順)ㆍ거스름의 위역(違逆)ㆍ수순도 거스름도 아닌 비순비역(非順非逆) 중에서 어느 하나를 취하도록 하며, 이로 인하여 고(苦)ㆍ낙(樂)ㆍ사(捨)의 3수(受) 또는 고수(苦受)ㆍ우수(憂受)ㆍ낙수(樂受)ㆍ희수(喜受)ㆍ사수(捨受)의 5수(受)가 있게 되는 것이다.

 

又此定中,離阿賴耶識,餘心不容有,必應有觸可得過故.

또한  선정 중에는 아뢰야식을 떠난 다른 심왕은 없어야 하는 것이니, 반드시 접촉의 촉(觸) 심소가 있어야 하는 과실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ㅡ여섯 번째 과실.

 

如住餘定決無有疑,謂餘定中,善根相應, 餘識轉時,決定有觸,以定所生,輕安爲相,

다른 선정에 머무는 것과 같이 결정코 의심이 없는 것이니, 다른 선정에서 선근과 상응하는 다른 식이 전전할 때에는 결정적으로 접촉의 심소가 있는 것이며, 선정이 일으킨 바로써 경안(輕安)의 상으로 삼는 것이다. 

경안(輕安), 선심소(善心所)의 하나로서, 선정 중에서 몸과 마음이 평안하고 쾌적한 상태이다.

 

或順樂受`或有隨順非苦樂受.此觸爲緣,或生樂受,或復生於非苦樂受.何以故?於餘三摩地,有此功能故.

혹은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낙수(樂受) 수순하고, 혹은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비고비낙수(非苦非樂受) 수순하나니,

 접촉의 촉(觸) 심소를 반연하여, 혹은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낙수(樂受)를 일으키거나, 혹은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수작용인 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를 일으키는 것이니,

왜냐하면 다른 삼마지에서  공능(工能, 작용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ㅡ일곱 번째 과실,

 

촉(觸, sparśa) 심소는 감각기관의 근(根)ㆍ대상의 경(境)ㆍ식(識_의 3사화합(事和合)한  셋이 최초의 접촉에 해당된다. 심왕과 심소로 하여금 대상에 접촉케 하며, 그 결과로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의 감수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

 

於餘定中,見此二觸,於生二受,必有功能,此亦應爾,無障因故.

다른 선정에서 낙수(樂受)와 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 이  가지의 촉(觸) 심소는 즐거움의 낙수(樂受)와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  가지 감수작용이 생기게 하는 공능(工能, 작용의 힘)이 반드시 있듯이, 이것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니, 장애의 원인이 없는 무장인(無障因)이기 때문이다. 

 

觸爲緣受,此中應至,然不應理.何以故?應有唯滅想過失故.

若許此觸爲緣生受, 於此定中, 唯應想滅. 然不應許想受俱滅,聖所說故. 

그러나, 촉(觸) 심소를 반연하는 감수작용(受)이 여기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니,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오직 표상작용의 상(想)만을 멸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촉(觸) 심소를 반연하여 감수작용의 수(受)을 생겨나게 되는 것 인정한다면,  선정 중에서는 오직 표상작용의 상(想)만을 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땅히 인정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표상작용의 상(想)과 감수작용의 수(受)가 함께 멸한다고 성인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ㅡ여덟 번째 과실

 

又此定中,若有餘識,必與其觸,俱有相應.此不應理.何以故?若有觸者,應有其思信等,善根現行過故.若有其識觸相應轉,必有與此俱生思等, 聖所說故,此中應至有思現行.若此定中,有思現行,造作善心,必有信等,善根現行,然不應許.

또한  선정 중에 만약 다른 식이 있어서 반드시   심소와 상응한다면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만약  심소가 있다면  의지의 사(思)와 믿음의 신(信) 심소 등의 선근이 현행하는 과실이 반드시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식(識)과 촉심소가 상응해서 전전한다면 반드시 이것과 함께 생겨나는 의지의 사(思) 심소 등이 있는 것라고, 성인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기서 의지의 사(思) 심소가 현행하는 것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선정 중에서 의지의 사(思) 심소가 현행하여 조작(造作, 사심소의 작용) 선심이 있다면 반드시 믿음의 신(信)ㆍ정진의 근(勤) 등의 선근이 현행함이 있을 것이나, 이것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ㅡ아홉 번째 과실.

 

사(思, cetanā)는 5변행심소(遍行心所) 중의 하나로서 의식적인 의지작용을 한다. 심왕ㆍ심소로 하여금 선ㆍ악의 대상에 대해서 선ㆍ악의 마음의 작업을 일으키게 하여 업도(業道)의 근원이다.

변행심소(遍行心所)는 변행(遍行)이라고도 하며, 심소법의 6가지 종류는 변행심소(遍行心所)는  5가지 ·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 선심소(善心所) 11가지 ·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 부정심소(不定心所) 4가지)이다.
변행(遍行)이라는 낱말은 '두루 작용한다'는 뜨으로,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함께 일어나며, '언제나 함께 일어난다는 변행([遍行)'은 일체성(一切性)에서, 일체지(一切地)에서, 일체시(一切時)에서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체구(一切俱)를 뜻한다.
5가지 마음작용이 5변행(五遍行)은; 
①작의(作意): 경각(警覺), 대상으로 이끔이는 인심(引心), 대상으로 나아가는 취경(趣境), 
②촉(觸): 근 · 경 · 식의 삼사화합(三事和合), 대상을 만나는 촉경(觸境), 수(受) · 상(想) · 사(思) 등의 의지처가 된다.

③수(受): 지각, 고 · 낙 · 불고불락을 느낌, 애착을 일킨다.
④상(想): 표상의 취상(取像), 개념화하는 시설명언(施設名言), 명칭을 붙이는 시설명언(施設名言)

⑤사(思): 의지, 마음을 지음의 조작(造作), 선 · 악 · 무기의 의업(意業, 心作業)을 일으킨다.

 

若有欲避如前所說種種過失,及阿笈摩相違過失,由但厭離諸心法故`唯拔心法,於此定中,唯立有心,無有心法,此亦不然. 何以故?拔彼能依,令離所依,不應理故.

만약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갖가지 과실과 아급마(阿笈摩, 아함)에 위배되는 과실을 피하기 위하여,

촉(觸)ㆍ수(受)ㆍ상(想)ㆍ사(思) 등의 심소법을 여의기 위해서 오직 심소법을 부정하고,  선정 중에는 오직 심왕만 있고 심소법은 없다고 안립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않은 것이니,

왜냐하면  능히 의지하는 것을 부정하고 의지처를 여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ㅡ열 번째 과실.

 

所依是心`能依是心法,所依`能依心與心法, 無始生死來,更互不相離.由此相引,是故定應與無貪等善根相應.若言此定,及定方便,與無貪等,善根相違故,於定中善根不轉,唯善心轉.此於餘處,都未曾見.若於因時`彼法相應等流果時,亦有相應,故不應理.

소의(所依, 의지처)는 심왕이고, 능히 의지하는 능의(能依)는 심소이다.

소의(所依, 의지처, 심왕) 능의(能依, 심소),  심왕과 심소는 아득한 무시로부터 윤회하면서 서로 여의지 않는 것이니, 이들은 서로를 이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정은 마땅히 무탐(無貪) 등의 선근과 상응하는 것이니,

만약  선정과 선정의 방편이 무탐 등의 선근과 거슬러서, 선정 중에 선근이 전전하지 않고 오직 선심만이 전전한다고 말한다면, 이러함은 일찍이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것으로,

만약 수행단계의 시기에  법과 상응한다면, 등류과(等流果)의 시기에도 역시 상응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무탐(無貪, alobha)은 선심소의 하나로서 애착심을 없애는 능력의 심리작용이다.

 

又不應理,有譬喩故.謂世尊說:諸身行滅`諸語行滅`諸意行滅.此中身行謂入出息,其語行者,謂尋與伺,其意行者,謂思想等.如尋伺滅,語必不起.意亦如是,若意行滅,亦應不起.

또한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비유가 있으니,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신체의 작용인 신행(身行)이 멸하고, 모든 언어 작용의 어행(語行)이 멸하며, 모든 의지 작용의 의행(意行)이 멸한다”고 하셨으니,

여기에서 신체의 작용인 신행(身行)은 들숨과 날숨을 말하고, 

 언어 작용의 어행(語行)이란 색각을 일으키는 심(尋)과 고찰의 사(伺)의 심소를 말하며, 

 의지 작용의 의행(意行)은 의지(思)와 표상작용(想)의 심소 등을 말한다. 

심(尋)과 사(伺)가 멸한다면, 언어가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이, 의식 역시도 이와 같아서 의지 작용(思)이 멸하면 당연히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ㅡ열한 번째 과실.

 

심(尋)과 사(伺)는 부정심소(不定心所)이다. 심구의 심(尋, vitarka)의 심소는 대상에 대하여 그 뜻과 이치를 대강 심구(尋求)하는 것이다.

사찰(伺, vicāra)의 심소는 심구에 의해 대강 파악된 대상을 세밀하게 분별해서 사찰(伺察)한다.

이로써 몸과 마음의 평안이나 불안이 있게 되므로 부정심소라 하는 것이다.

 

若汝意謂,如身行滅,安住定中,身在不滅;意亦如是,雖意行滅,應在不滅.此亦不然. 何以故? 如非遍行, 此不有故.

만약 그대의 생각으로 말하기를, “신체의 작용인 신행(身行)이 멸하여 선정 중에 안주하는 몸은 존재하는 것으로, 멸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의지 작용의 의행(意行) 역시 이와 같아서 의행(意行)이 멸하여도, 마땅히 존재해서 멸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면, 이것 역시 옳지 않은 것이니, 왜냐하면 변행심소가 아닌 것은 여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如世尊說:離身行外有身住因,所謂飮食`命根`識等.由此雖無入息,出息而身安住. 意卽不爾,離意行外,更無別因持心令住,由此應至無意識,故名無心定,異熟果識此中有故. 世尊說,識不離於身,卽從此識一切種子,後出定時,轉識還生,故知定有阿賴耶識.

세존께서 “신행(身行)을 떠나서도 몸이 머무는 원인이 있으니, 음식(飮食)ㆍ명근(命根)ㆍ식(識) 등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들숨과 날숨이 없어도 신체는 안주하는 것이나 의식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의행(意行)을 떠난, 외부에 다시 별도의 원인의 마음을 지녀서 머물게 하지 않는다.

이로 인하여 마땅히 무의식에 이르러야 하므로, 무심정(無心定)이라 이름하며,

이숙과의 식은 이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에, 세존께서 식(識)이 몸(身)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곧, 나중에 선정에서 나올 때, 이 식의 일체종자로부터 전식(轉識)이 다시 생겨나는 것이므로,

결정코 아뢰야식이 존재한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3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③ 3

 

▶論曰:此聞熏習,爲是阿賴耶識自性`爲非阿賴耶識自性?若是阿賴耶識自性,云何是彼對治種子? 若非阿賴耶識自性, 此聞熏習種子所依, 云何可見?

乃至證得諸佛菩提,此聞熏習,隨在一種所依轉處,寄在異熟識中,與彼和合俱轉,猶如水乳;然非阿賴耶識,是彼對治種子性故.

▷논문; 이 들음의 문훈습(聞熏習)은 아뢰야식의 자성인가? 아뢰야식의 자성이 아닌 것인가?

만약 아뢰야식의 자성이라면 어떻게 그 다스림의 대치(對治) 종자가 되는 것이며?

만약 아뢰야식의 자성이 아니라면 이 들음의 문훈습 종자의 소의(所依, 의지처)는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나아가 모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증득하시기까지, 이 들음의 문훈습은 한 종류의 소의(所依, 의지처)가 전전하는 곳에 있음을 쫒아서, 이숙식(異熟識) 안에 머물러서 그것과 화합하여 함께 전전하였으니, 마치 물과 우유와 같았다.

그러나 들음의 문훈습은 아뢰야식이 아니니, 그 대치 종자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ㅡ물과 우유는 화합하긴 하지만 성품이 다르면서 함께 생겨난다. 이처럼 들음의 훈습은 아뢰야식과 성품이 다르긴 하지만 안에 화합하여 머물러서 함께 생멸하는 것을 말한다.


▶釋曰:此聞熏習,爲是阿賴耶識自性`爲非阿賴耶識自性?若爾何過?若是阿賴耶識自性,云何卽爲阿賴耶識對治種子?若非阿賴耶識自性,此聞熏習種子,卽應別有所依.乃至證得諸佛菩提者,謂乃至得諸佛所
證無上菩提.此聞熏習者,卽是最淸淨法界等流,正聞熏習.隨在一種所依轉處者,謂隨在一相續轉處.寄在異熟識中,與彼和合俱轉,猶如水乳者,此聞熏習,與異熟識,雖不同性,而寄識中,猶如水乳,和合俱轉.然非阿賴耶識等者,雖復和合,似一性轉,然非卽是阿賴耶識,是能對治阿賴耶識種子性故.

▷해석한다; 이 들음의 문훈습은 아뢰야식의 자성인가? 아뢰야식의 자성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것인가?

만약 아뢰야식의 자성이라면 어떻게 아뢰야식의 대치 종자가 되는 것인가?

만약 아뢰야식의 자성이 아니라면 이 들음의 문훈습 종자는 마땅히 별도로 소의(所依, 의지처)가 있어야 한다.

‘나아가 모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증득하시기까지’는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최고의 깨달음을 얻기까지를 말하며,

‘이 들음의 문훈습’은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오는 바르게 듣는 정문훈습(正聞熏習)이며,

‘한 종류의 의지처가 전전하는 곳을 쫒아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상속이 전전하는 곳을 쫒아서 있는 것을 말하는, 즉, 어느 세계(趣)에서 어떠한 몸을 받더라도, 그 정문훈습으로 된 종자는 그 생을 좇아서 이숙식 안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숙식 안에 머물러서 그것과 화합하여 함께 전전하는 것이 물과 우유와 같다’는 것은, 이 문훈습과 이숙식의 성품이 다르지만, 식 안에 머무르는 것이, 마치 물과 우유가 화합해서 함께 전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며,

‘그러나 아뢰야식이 아니다’ 등은 비록 화합해서 같은 성품인, 일성(一性)과 유사하게 전전하지만, 문훈습은 아뢰야식이 아닌 것이니, 이 문훈습은 능히 아뢰야식을 다스리는 종자의 성품인 종자성(種子性)이기 때문이다.


▶論曰:此中依下品熏習,成中品熏習,依中品熏習,成上品熏習,依聞`思`修,多分修作,得相應故.

▷논문; 이 중에서 하품(下品)의 훈습에 의지해서 중품(中品)의 훈습을 이루며,

중품의 훈습에 의지해서 상품(上品)의 훈습을 이루나니,

듣고 사유하며 닦음의 문사수(聞思修)에 의지해서 거듭 거듭 닦아서 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釋曰:此中下中上品者,應知依聞思修所成慧說,由彼一一,有三種故.

▷해석한다; 여기에서 하품ㆍ중품ㆍ상품은 듣고 사유하며 닦음의 문사수(聞思修)의 지혜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며, 그 하나하나에 각각 세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ㅡ들어서 이루는 지혜인 문혜(聞慧) 하품(下品)으로 하고,

사유해서 이루는 지혜인 사혜(思慧)를 중품(中品)으로 하며,

닦아서 이루는 지혜인 수혜(修慧)를 상품(上品)으로 한다

 

復有別義,聞所成慧是下品`思所成慧是中品`修所成慧是上品.依聞思修多分修作,得相應故者,謂依聞等數數猛利而修作故.又於此中,下品爲因,得成中品,中品爲因,得成上品.

다시 다른 견해로서는, 들어서 이루는 문혜(聞慧)는 하품(下品)이고, 사유해서 이루는 사혜(思慧)는 중품(中品)이며, 닦아서 이루는 수혜(修慧)는 상품(上品)이라 하였다.

‘듣고 사유하며 닦음의 문사수(聞思修)에 의지해서 거듭 거듭 닦아서 상응할 수 있기 때문’이란, 듣는 것 등에 의지해서 누누이 맹렬하게 닦기 때문이며, 또한 이러함으로써 하품을 원인으로 삼아서 중품을 이룰 수 있고, 중품을 원인으로 삼아서 상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ㅡ세 가지 지혜의 하나하나에 다시 하품ㆍ중품ㆍ상품이 있음을 말한다.

 

▶論曰:又此正聞熏習種子,下中上品,應知亦是法身種子,與阿賴耶識相違,非阿賴耶識所攝,

是出世閒,最淨法界等流性故.雖是世閒,而是出世心種子性.

▷논문; 또한 이 바르게 들음의 정문훈습(正聞熏習) 종자의 하품ㆍ중품ㆍ상품은 역시 법신의 종자로서 아뢰야식과 서로 다르고, 아뢰야식에 포섭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간의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오는 성품이기 때문에, 비록 세간이지만 출세간심의 종자성(種子性)인 것이다. 

 

又出世心,雖未生時, 已能對治諸煩惱纏` 已能對治諸嶮惡趣`已作一切所有惡業朽壞對治, 又能隨順逢事一切諸佛菩薩.雖是世閒,應知初修業菩薩所得,亦法身攝, 聲聞`獨覺所得,唯解脫身攝. 又此熏習,非阿賴耶識,是法身解脫身攝.

또한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이 비록 아직 생겨나지 않았지만, 능히 모든 번뇌의 계박을 다스리고, 이미 능히 모든 험난한 괴로움의 악취(惡趣)를 다스리며, 이미 일체의 모든 악업을 다르려서 쇠퇴시키며, 

또한 능히 모든 불보살을 만나서 수순하여 섬기나니,

이것은 비록 세간이긴 하지만 처음 수행하는 보살이 얻는 바 역시도 법신에 포섭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며, 

성문과 독각이 얻는 것은 오직 해탈신(解脫身)에만 포섭되는 것으로, 이 훈습은 아뢰야식이 아니니, 법신과 해탈신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如如熏習下中上品,次第漸增,如是如是,異熟果識,次第漸減,卽轉所依.

훈습이 하품ㆍ중품ㆍ상품의 순서로 점차 증가되면서, 이와 같이 이러이러하게 이숙의 과식(果識)이 순서대로 점차 멸하는 것이니, 곧 소의(所依, 의지처)를 전환하는 것이다.

ㅡ훈습이 순서대로 증가함에 따라, 반대로 이숙식은 순서대로 점차 멸해감을 표현한 것이다.

 

旣一切種所依轉已,卽異熟果識及一切種子無種子而轉,一切種永斷.

이미 일체종자의 소의(所依, 의지처)를 전환한 까닭에, 곧 이숙과의 식과 일체종자는 종자가 없는 무종자(無種子)로 전환되어서 모든 종자가 영원히 단멸되는 것이다.

 

▶釋曰: 已能對治諸煩惱纏者,謂是能斷增上貪等,現起轉因. 已能對治諸嶮惡趣者,謂若能斷諸煩惱纏, 卽能對治諸嶮惡趣. 已作一切所有惡業朽壞對治者, 謂若雖有順後受業, 應墮惡趣,而能爲彼, 作朽壞因.擧要言之, 此聞熏習, 能治一切過去`未來`現在惡業.

▷해석한다; ‘능히 모든 번뇌의 계박을 다스린다’는 것은, 매우 강한 탐욕 등이 일어나서 전전하게 되는 원인을 능히 단멸하는 것을 말하며,

‘이미 능히 모든 험난한 괴로움의 세계인 악취(惡趣)를 다스린다’는 것은, 만약 모든 번뇌의 계박을 끊는다면 곧 능히 모든 험난한 괴로움의 악취(惡趣)를 다스리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미 일체의 모든 악업을 쇠퇴시켜서 다스린다’는 것은, 만약 다음 세상에 받아야 할 과보업인 순후수업(順後受業)이 있을 경우에는 마땅히 괴로움의 악취(惡趣)에 떨어져야 하지만, 능히 그것을 쇠퇴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요점을 말한다며, 이 들음의 문훈습은 능히 모든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악업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순후수업(順後受業) 보통 순후업(順後業)이라 하며, 과거의 업인(業因)으로서 현세에 과보를 불러오지 않고 다음 세상에 과보를 받는 업이다.

 

又能隨順逢事一切諸佛菩薩者,謂是當來,逢事善友自身得因.雖是世閒,應知初修業菩薩所得,亦法身攝者,謂諸異生菩薩,名初修業菩薩,亦是法身種子故,說亦法身攝.

聲聞`獨覺所得,唯解脫身攝者,謂聲聞等正聞熏習,唯是解脫因,唯得解脫身`不得法身故.

‘또한 능히 모든 불보살을 수순하여 만나서 섬긴다’는 것은 장래에 훌륭한 벗을 만나 섬겨서 스스로의 원인을 얻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비록 세간이지만 처음 수행하는 보살이 얻는 것 역시도 법신에 포섭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생(異生,범부) 보살을 처음 수행하는 보살이라 하며, 역시 법신의 종자이기 때문에 법신에 포섭된다고 말하는 것이며,

‘성문과 독각이 얻는 것은 오직 해탈신에만 포섭된다’는 것은, 성문 등의 바르게 듣는 정문(正聞) 훈습은 오직 해탈의 원인으로서, 오직 해탈신을 얻을 뿐, 법신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문ㆍ연각의 과신(果身), 즉 아라한과 벽지불은 혹장(惑障, 번뇌장)의 계박은 벗어났지만 아직 지장(智障, 소지장)에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해탈신이라고만 하며,

불과(佛果)는 큰 적정(寂靜)을 성취한 까닭에 번뇌장뿐만 아니라 소지장의 계박도 소멸되고 10력ㆍ4무외(無畏) 등 뛰어난 공덕으로 장엄되므로 해탈신의 차원을 넘어서 법신이라 한다.


▶論曰:復次云何猶如水乳?非阿賴耶識,與阿賴耶識,同處俱轉,而阿賴耶識一切種盡`非阿賴耶識一切種增.譬如於水,鵝所飮乳.又如世閒,得離欲時,非等引地熏習漸減`其等引地熏習漸增,而得轉依.

▷논문; 또한 마치 물과 우유같이, 아뢰야식이 아닌 것과 아뢰야식이 같은 곳에서 함께 전전하는데, 어떻게 아뢰야식의 일체종자는 멸진하고 아뢰야식의 일체종자가 아닌 것은 증가하는 것인가?

비유하자면 물과 거위가 마시는 우유와 같은 것이며, 또한 세간의 욕락을 여읠 때, 선정이 아닌 지위인 비등인지(非等引地)의 훈습은 점차 감소하고, 그 선정의 지위의 훈습은 점차 증가하여 전의(轉依)를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


▶釋曰:非阿賴耶識,與阿賴耶識,雖同處俱轉,而阿賴耶識盡`非阿賴耶識在.還卽以前水乳和合,鵝所飮時,乳盡水在,譬喩顯示.又如世閒,得離欲時,於一阿賴耶識中,非等引地煩惱熏習漸減`其等引地善法熏習漸增,而得轉依,此中轉依,當知亦爾.

▷해석한다; '아뢰야식이 아닌 것과 아뢰야식이 같은 곳에서 함께 전전하기는 하지만, 아뢰야식은 멸진해도 아뢰야식이 아닌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란,

앞에서 물과 우유가 화합하여 있을지라도 거위가 마실 때에는 우유가 없어지고 물만 남는 비유로써 나타낸 것이며,

또한 세간의 욕락을 여읠 때, 하나의 아뢰야식 안에서 선정이 아닌 지위의 번뇌의 훈습은 점차 감소하나, 그 선정 지위의 선법의 훈습은 점차 증가하여서 전의를 얻게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기서의 전의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又入滅定,識不離身,聖所說故.此中異熟識,應成不離身,非爲治此滅定生故.

▷논문; 또한 멸진정에 들어갔을지라도 식(識)이 신(身, 몸)을 떠나지 않음은 성인이 말씀하신 바이기 때문이니, 여기서 이숙식은 마땅히 신(身, 몸)을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아뢰야식을 다스리기 위해서 멸진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에 수순함을 말한, 제16 순도리장(16 順道理章).


▶釋曰: 引入滅定,識不離言, 爲成定有阿賴耶識.

世尊說識不離身者,除異熟識,餘不得成,以滅定生,對治轉識,故觀此定,爲極寂靜.

▷해석한다; ‘멸진정에 들어가도 식(識)은 떠나지 않는다’란, 결정적으로 아뢰야식이 존재함을 성립시키기 위한 것이다.

세존께서 식(識)이 신(身, 몸)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숙식을 제외하고서 다른 것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니, 멸진정이 생긴다면, 전식을 다스리기 때문에 이 선정을 관하면 지극히 적정하게 되는 것이다.


▶論曰:又非出定,此識復生,由異熟識,旣閒斷已,離結相續,無重生故.

▷논문; 또한 선정으로부터 나와도 이 식(識)이 다시 생기는 것이 아니니,

이숙식이 중단되고 나서 결생(結生) 상속을 떠난다면 거듭해서 다시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결생(結生), 윤회하면서 중유(中有)가 없어지고 모태에 다음 생을 위탁하는 것.


▶釋曰: 若執出定,此識還生,由此意故,識不離身.此不應理,以從定出,識不復生.

異熟果識旣閒斷已,離結相續,更託餘生,無重生故.

▷해석한다; 만약 선정에서 나와서 이 식이 다시 생겨난다고 집착하여서, 이러한 의미로써 식이 몸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선정에서 나올지라도 식은 다시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며,

이숙과의 식이 중단되고 나면 생을 맺는 결생(結生) 상속은 다시 다른 생에 의탁하지 않아서 거듭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3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③ 2

 

▶論曰:復次生無色界,若離一切種子異熟識,染污善心應無種子,染污善心應無依持.

▷논문; 또한 무색계에 태어나서, 만약 일체종자의 이숙식(異熟識)을 여읜다면 염오심(染污心)과 선심(善心)은 마땅히 종자가 없어야 할것이고, 염오심과 선심이 의지할 곳 또한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다.


▶釋曰:生無色界者,謂已解脫.色染污善心者,謂能愛味及三摩地.應無種子者,謂應無因.應無依持者,謂應無依.

復有別義,謂此二心,若無種子, 從何而生? 若無依持,依何而轉?

阿賴耶識所攝受故,從自種生,爲所依故,令此能依,相續而轉.

▷해석한다; ‘무색계에 태어나는’ 것은 물질로부터의 해탈을 말하며,

‘염오심(染污心)과 선심(善心)’은 선정의 맛에 애착하는 것과 삼마지이며,

‘마땅히 종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마땅히 원인이 없어야 하는 것을 말하며,

‘마땅히 의지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마땅히 의지처가 없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의미가 있으니, 염오심과 선심, 두 가지 마음에 만약 종자가 없다면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만약 의지할 곳이 없다면 무엇에 의지해서 전전하는 것인가? 

아뢰야식이 섭수함으로써, 스스로의 종자로부터 생겨나고, 의지처가 됨으로써, 능히 의지하는 것으로 하여금 상속해서 전전하게 하는 것이다.


▶論曰:又卽於彼,若出世心,正現在前,餘世閒心,皆滅盡故,爾時,便應滅離彼趣.

▷논문; 또한, 만약 그곳에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심(出世心) 바로 현전한다면, 나머지 세간심은  멸진한 까닭에, 그 때에는 바로 그 세계(趣)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釋曰:卽於彼界,若出世心,現在前時,除此所餘,是世閒心,彼世閒心,爾時皆滅.

如是彼趣便應永斷,不由功用,自然證得無餘涅槃.旣無此理,不應撥無阿賴耶識.

▷해석한다; 그 세계(界)에서 만약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심(出世心) 현전할 때, 이 출세심을 제외한 나머지는 세간심으로 그 세간심이 그 때에  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계(趣)는 문득 영원히 단절되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에 의하지 않고 자연히 무여열반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마땅히 아뢰야식을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論曰:若生非想非非想處`無所有處,出世閒心,現在前時, 卽應二趣, 悉皆滅離.

此出世識,不以非想非非想處,爲所依趣,亦不應以無所有處,爲所依趣,亦非涅槃爲所依趣.

▷논문; 만약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무소유처(無所有處)에 태어나서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이 현전할 때에는 마땅히  세계를  여의어야 하는 것이니,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식(出世識)은 비상비비상처를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로 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무소유처로써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로도 삼지 않으며,

또한 열반을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로 삼지도 않는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무색계의 제4천으로, 이 하늘은 삼계 최고의 위치이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한다. 이 하늘에 나는 이는 하지(下地)와 같은 거친 표상작용의 상(想)이 없기 때문에 비상(非想) 또는 비유상(非有想)이라 하나, 그러면서도 아직 미세한 표상작용이 있으므로 비비상(非非想) 또는 비무상(非無想)이라고 한다.

비유상(非有想)이므로 외도들은 이곳을 참다운 열반인 진열반처(眞涅槃處)라 하고, 비무상(非無想)이므로 불교에서는 이곳도 생사윤회의 범주에 넣는다.

무소유처(無所有處), 무색계의 제3천으로서, 제2천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서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의 공함을 관하여 무소유의 지혜를 얻어서, 그 수행한 힘으로 나게 되는 하늘이다.


▶釋曰:若生非想非非想處,或時起彼無所有處,出世閒心,令現在前,由彼處心極明利故.

又由非想非非想處,心闇鈍故,住於彼處,極明利心,起出世心,令現在前,

此出世心,不應以彼第一`第二爲所依趣,由彼二地,皆世閒故,

▷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나서  어느 때는  무소유처의 출세간심(出世閒心)을 일으켜서 현전하게 하나니, 그 무소유처의 마음은 극히 밝고 예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상비비상처의 마음은 어둡기 때문에, 무소유처의 극히 밝고 예리한 마음에 머물러서 출세간심 일으켜서 현전하게 하나니,  출세간심은 마땅히   번째의 비상비비상처와  번째의 무소유처로써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로 삼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지위 모두는 세간이기 때문이다. 

 

又生餘地,起餘地心,現在前故,二所依趣,俱不應理.

또한 다른 지위에 태어나면 다른 지위의 마음을 일으켜서 현전하기 때문이니, 두 가지의 의지할 세계인 이소의취(二所依趣)와 함께 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다.

ㅡ이 마음은 명료하기 때문에 비상비비상처에 의지하지 않고, 이미 무소유처를 여의었기 때문에 무소유처도 역시  마음의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又卽此心,不應涅槃,爲所依趣,有餘依故.如是三種,爲所依趣,旣不得成,若不信有阿賴耶識,此出世心,何所依趣?

또한  마음은 열반을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로 삼지 않으니, 업보의 과체(果體)가 있는, 유여의(有餘依)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상비비상처, 무소유처, 열반의  가지는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로 삼을  없는 것이니,

만약 아뢰야식이 존재함을 믿지 않는다면, 어떠한 곳 출세심이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가겠는가?


▶論曰:又將沒時,造善造惡,或下或上,所依漸冷. 若不信有阿賴耶識, 皆不得成.

是故若離一切種子異熟識者,此生雜染,亦不得成.

▷논문; 또한 장차 죽으려  때에는 지은 선과  때문에 혹은 아래부터 혹은 위로부터의 소의(所依, 의지처)가 점점 차가워지나니,

만약 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이러한 것 모두가 성립될  없으므로,

따라서 만약 일체종자의 이숙식을 여읜다면,  생의 잡염 역시도 성립될  없는 것이다.

생전에 선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임종할 식이 4()의 말단에서부터 머리쪽으로 점차 거두워지고, 반대로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머리부터 식어져서 점차 아래로 내려간다고 한다.


▶釋曰:將捨命時,造善造惡,或下或上,身分漸冷,以造善者,必定上昇,若造惡者,必定下墜.若

不許有阿賴耶識爲能執受,云何得有所依漸冷?阿賴耶識,能執受故,或下或上,如其次第,隨所捨處,身卽有冷.

▷해석한다; 장차 목숨을 버리려  때에는, 지은 선과  때문에 혹은 아래부터 혹은 위로부터 신체가 점차 차가워진다. 그리하여 선(善)을 지은 자는 반드시 위로 올라가고, 악(惡)을 지은 자는 반드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만약 아뢰야식이 존재하여 집수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소의(所依, 의지처) 점차 차가워질  있겠는가? 

아뢰야식이 능히 집수하기 때문에 혹은 아래부터 혹은 위로부터  차례대로 버린 곳을 따라서 신체가 차가워지는 것이다.


▶論曰:云何世閒淸淨不成?謂未離欲纏貪未得色纏心者, 卽以欲纏善心爲離欲纏貪故,勤修加行. 此欲纏加行心與色纏心,不俱生滅故, 非彼所熏,爲彼種子,不應道理.

▷논문; 어찌하여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아직 욕전(欲纏, 욕계)의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색전(色纏, 색계)의 마음을 얻지 못한 자는, 욕계의 선심(善心)으로써 욕계의 탐욕을 여의기 위해서 가행(加行)하여 부지런히 닦는다. 

 욕계의 가행하는 마음과 색계의 마음은 함께 생멸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소훈(所熏, 훈습처)이 아닌 것이므로, 따라서 그것의 종자가 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又色纏心,過去多生,餘心閒隔,不應爲今定心種子,唯無有故. 是故成就色纏定心, 一切種子異熟果識, 展轉傳來, 爲今因緣, 加行善心,爲增上緣.如是一切離欲地中,如應當知.如是世閒淸淨,若離一切種子異熟識,理不得成.

또한 색계의 마음은 과거의 여러 생에서의 다른 마음들과 사이가 벌어져서, 지금은 선정의 마음인 정심(定心)의 종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색계 선정의 마음을 성취하는 일체종자의 이숙과식(異熟果識)이 전전하여서 전래하여 지금의 인연이 되고, 

가행의 선심(善心)이 증상연이 되는 것이다. 

욕락을 떠난 모든 지위에서도 마땅히 이와 같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세간의 청정은 일체종자의 이숙식을 여의고는 그 도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ㅡ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말한, 제14 세간정장(14 世間淨章).

 

욕전(欲纏)은 재물욕ㆍ식욕ㆍ수면욕ㆍ음욕ㆍ명예욕의 세간 5욕락(欲樂) 등에 얽매인 욕계를 말한다.

색전(色纏)은 물질(色)에 얽매인, 색계이다.


▶釋曰:如世閒淸淨理不得成,今當顯示.謂爲遠離欲纏貪故,以欲纏善心,修加行時,卽此欲纏加行善心,未曾爲彼色纏善心之所熏習,不俱生滅故,今色纏心,應無種子,自然而生. 又過去世色纏善心,多生所閒`餘識所隔,唯無有故`已過去故, 不得爲今定心種子.

▷해석한다; 세간 청정의 도리가 성립될  없음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 보이겠으니,

욕계의 탐욕을 멀리 여의기 위해서 욕계의 선심(善心)으로써 가행을 닦을 때,  욕계에서의 가행의 선심은 일찍이  색계의 선심으로부터 훈습된 바가 아니고, 함께 생멸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색계심에 종자 없이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과거세의 색계의 선심은 여러 생의 사이에서 오는 것이고, 다른 식과의 간격이 있어서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이미 과거인 까닭에, 지금의 정심(定心, 선정의 마음)의 종자가   없는 것이다. 

 

展轉傳來,爲今因緣者,阿賴耶識持彼種故.今色纏心, 從自種生, 加行善心,非無功力.言功力者,但增上緣,非是因緣,由彼增上力,生此色纏心,如是遠離色纏貪等,如應當知.

‘전전하여 전래하여서 지금의 인연이 된다’는 것은 아뢰야식이 그 색계의 종자를 지니기 때문에, 지금 색계의 마음이 스스로의 종자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이며,

가행의 선심에는 공력(功力, 작용의 힘)이 없지 않으니, 공력(功力)이란 다만 증상연일 뿐, 인연이 아닌 것이다. 

그것의 증상력으로 인하여  색계의 마음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니, 이렇게하여 색계의 탐욕 등을 멀리 여읜다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云何出世淸淨不成?謂世尊說,依他言音, 及內各別如理作意, 由此爲因,正見得生.

此他言音,如理作意,爲熏耳識` 爲熏意識`爲兩俱熏?

▷어찌하여 세간을 벗어나는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타인의 말과 함께 각각의 내면적인 이치 그대로 작의(作意)함에 의하는 것이며, 이것을 원인으로 해서 바른 견해가 생겨날  있다”고 하셨다. 

이 타인의 말과 이치 그대로 작의하는 것이 이식(耳識)에 훈습되는 것인가? 

의식에 훈습되는 것인가? 

아니면 양쪽에서 함께 훈습되는 것인가?

 

若於彼法, 如理思惟,爾時,耳識且不得起,意識亦爲種種散動,餘識所間. 若與如理作意,相應生時,此聞所熏意識,與彼熏習,久滅過去,定無有體,云何復爲種子,能生後時,如理作意,相應之心?

만약  법에 대해서 이치 그대로 사유한다면, 그 때의 이식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며,

의식(意識) 역시도 갖가지로 산란하게 움직이는 다른 식에 의해서 중단되나니,

만약 이치 그대로 작의함과 상응해서 생겨날 때에는,  들음으로써 훈습된 의식과  훈습은 오래전에 멸하여 과거가 되어서 그 자체가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다시 종자가 되어서 능히 나중에 이치 그대로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又此如理作意,相應是世閒心,彼正見相應是出世心,曾未有時,俱生俱滅,是故此心非彼所熏.

旣不被熏,爲彼種子,不應道理. 是故出世淸淨,若離一切種子異熟果識,亦不得成.

此中聞熏習攝受彼種子不相應故.

또한  이치 그대로 작의하는 여리작의(如理作意)와 상응하는 것은 세간심(世閒心)이고, 

 바른 견해의 정견(正見)과 상응하는 것은 출세간심(出世閒心)이다. 

예전에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한 적이 없으니, 따라서  마음은 그것의 훈습처가 아닌 것이며,

훈습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종자가 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간 청정은 일체종자의 이숙과식(異熟果識)을 떠나서는 성립될  없는 것이니,

여기에서 들음의훈습(聞熏習)이  종자를 섭수하는 것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아뢰야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출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설명한, 제15 출세간정장(15 出世間淨章).


▶釋曰:如出世閒淸淨不成,今當顯示.此他言音,如理作意者,謂與言音, 相應作意. 意識亦爲種種散動餘識所閒者,是與正見相應出世閒心被閒隔義.

▷해석한다;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간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 보이겠다. 

‘타인의 말’과 ‘이치 그대로 작의함의 여리작의(如理作意)’는 말과 상응하는 작의(作意)를 말한다. 

의식 역시 갖가지의 산란되게 움직이는 다른 식에 의해 중단되는 것은, 정견(正見)과 상응하는 출세간심(出世閒心)이 다른 식에 의해서 사이가 벌어진다는 뜻이다.

 

작의(作意),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심왕과 심소(心所, 심리작용)를 대상에 주의시켜서 인도하는 작용으로, 촉(觸) 심소(心所) 다음에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감수작용의 수(受)가 있게 되는 것이다.

 

若與如理作意,相應生時者,謂於後時.此聞所熏意識與彼熏習,久滅過去定無有體者,謂經長時,已謝隔越,決定無體.云何復爲種子能生後時,如理作意,相應之心者,謂彼久滅,現無有體,不能爲因. 此中聞熏習攝受彼種子,不相應故者,謂在世閒意識之中故.言此中聞熏習者,依他言音,正聞熏習. 攝受彼種子者,在意識中,攝受出世淸淨種子.不相應故者,謂彼所計,不應理故,云何可說,此從彼生?

‘만약 이치 그대로의 여리작의(如理作意)와 상응해서 생겨날 때’란, 나중에 청정한 마음이 일어날 때의 그 시기를 말하는 것이며,

‘이 들어서 훈습된 문훈습 의식과  훈습은 오래전에 멸하여 과거가 되어서 반드시 자체가 없다’는 것은 오랜 기간이 지나서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결정적인 자체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어떻게 다시 종자가 되어서 능히 나중에 이치 그대로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란,

그것이 오래전에 멸하여 현재 자체가 없기 때문에 원인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중에서 '들음의훈습이  종자를 섭수하는 것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세간의 의식 중에 있기 때문에 ‘이 중에서’라고 말한 것이며,

‘들음의 문훈습(聞熏習)’은 남의 말을 바르게 들음으로써 훈습되는 것이며,

‘그 종자를 섭수한다’는 것은 의식에 있으면서 출세간의 청정종자를 섭수하는 것이며,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그가 사량하는 바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출세간의 청정이 그 의식(意識)으로부터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論曰:復次云何一切種子異熟果識,爲雜染因, 復爲出世能對治彼淨心種子?

又出世心,昔未曾習故,彼熏習決定應無,旣無熏習,從何種生?

是故應答:從最淸淨法界等流,正聞熏習種子所生.

▷논문; 또한 어떻게 일체종자의 이숙과식(異熟果識)이 잡염의 원인이 되며, 

또한 출세간과 그것을 능히 다스리는 청정한 마음의 종자가 되는 것인가? 

또한 출세간의 마음은 예전부터 아직 훈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훈습은 결정코 없는 것이며,

이렇게 훈습이 없는데 어떠한 종자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마땅히 가장 청정한 법계(法界)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오는, 바르게 들음의 훈습인 정문훈습(正聞熏習)된 종자가 생겨난 것이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釋曰:云何等者,謂異熟識是所治因,爲能治因,不應道理.又出世心,昔未曾習者, 謂先未生故. 彼熏習決定應無者, 由此因故,彼出世心,無有熏習,決定無疑.

▷해석한다; ‘어떻게……’ 등은 이숙식이 다스려지는 원인이면서 또한 능히 다스리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음을 말한 것이며,

'또한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심(出世心)은 예전부터 아직 훈습되지 않은 것이다’는 것은 이전에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훈습은 결정적으로 없어야 한다’는 것은 이 원인으로 인하여 그 출세간의 마음에 훈습이 없음은 결정적인 것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며, 

 

從最淸淨法界等流, 正聞熏習種子所生者, 爲顯法界異聲聞等. 言最淸淨,由佛世尊所證法界,永斷煩惱`所知障故, 從最淸淨法界所流經等教法,名最淸淨法界等流.無倒聽聞如是經等,故名正聞.由此正聞,所起熏習,名爲熏習.或復正聞,卽是熏習,是故說名正聞熏習. 卽此熏習相續住在,阿賴耶識爲因,能起出世閒心,是故說言:從最淸淨法界所流,正聞熏習,種子所生.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오는, 바르게 들어서 훈습된 정문훈습(正聞熏習)의 종자가 생겨난 것’이란,

법계는 성문등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가장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니,

부처님 세존께서 증득하신 법계는 번뇌장과 소지장을 영원히 끊었기 때문에, 이러한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흘러나오는 가르침의 경전 등의 교법을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온 것이라 이름하며,

전도됨이 없이 이러한 경전 등을 듣기 때문에 바르게 듣는 정문(正聞)이라 하며,

이 바르게 들은 정문(正聞)으로써 일어난 훈습을 훈습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

혹은 바르게 듣는 것이 곧 훈습이기 때문에 바르게 들음의 정문훈습(正聞熏習)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곧 이 훈습이 상속해서 아뢰야식에 머무름으로서, 원인이 되어 능히 출세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온 바를 바르게 들음의 정문훈습(正聞熏習)의 종자가 생겨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3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③ 1

 

▶論曰:云何爲生雜染不成?結相續時, 不相應故.

▷논문; 어찌하여 태어남의 잡염인 생잡염(生雜染)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모태에 다음 생을 위탁하는 결생(結生) 상속의 시기에 상응하지 않는, 즉 그 의미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ㅡ아뢰야식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태어남의잡염이 성립되지 않음을 말한, 제13 생염장(13 生染章).

 

결생(結生), 윤회하면서 중유(中有)가 없어지고 모태에 다음 생을 위탁하는 것.


▶釋曰:若不信有阿賴耶識,如生雜染, 亦不得成,今當顯示.結相續時,不相應故者,謂得自體,不相應故.

▷해석한다; 만약 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태어남의 잡염인 생잡염(生雜染) 역시 성립될  없음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 보일 것이니,   

‘결생(結生) 상속의 시기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란, 이 생에서 멸하여 다음 생을 맺는 결생(結生)의 생명 자체를 얻는 것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論曰:若有於此非等引地,沒已生時,依中有位,意起染污意識, 結生相續,此染污意識,於中有中滅,於母胎中,識羯羅藍,更相和合.

▷논문; 만약 선정이 아닌 지위인, 비등인지(非等引地)에서 죽어서 태어날 때, 중유(中有) 단계의 의(意)에서 염오의식(染污意識)을 일으킴으로써 결생 상속하는 것이라면,  염오의식(染污意識)은 중유 안에서 멸하고, 모태 중에서 식(識)과 갈라람(羯羅藍)과 다시 서로 화합하는 것이다. 

 

등인(等引) 범어 samāhita의 번역으로서 선정(禪定),  마음을 집중하여 안정시켰다는 의미이고,

등(等) 마음에 혼침과 들뜸의 도거(掉擧)가 평정되어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선정을 닦으면 등(等)을 일으키므로 등인이라 이름하며, 비등인지(非等引地) 선정이 아닌 지위,  산지(散地)인 욕계(欲界)의 뜻이다.

중유(中有) 4유(有)의 하나로서, 죽은 뒤에 다음의 생을 받아  때까지의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갈라람(羯羅藍)은 범어 kalalaṃ의 음역으로서 가라라(柯羅邏) 등으로 음역되고, 응골(凝骨)ㆍ시태막(始胎膜) 등으로 의역된다. 수태(受胎)로부터 1주일 동안의 태아이다.

갈라람은 식(識)과 수정란의 물질적 사대(四大) 요소가 화합한 것으로, 아뢰야식이 갈라람에 의탁함과 동시에 중유(中有)가 소멸되고, 아뢰야식 안의 종자가 동력인(動力因)이 되어 4대와 작용하기 시작해서 미세한 감각기관이 생겨날 가능성이 시작되는 것이다.

 

若卽意識,與彼和合,旣和合已,依止此識,於母胎中,有意識轉. 若爾,卽應有二意識, 於母胎中,同時而轉. 又卽與彼和合之識,是意識性,不應道理,依染污故`時無斷故`意識所緣,不可得故.

만약 의식과 그 갈라람이 화합한다면, 이미 화합한 후에는  식에 의지하여서 모태 중에서 의식이 전전함이 있게 되는 것이며,  

만약 그러하다면 마땅히  의식이 있어서 모태 중에서 동시에 전전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그것과 화합하는 식이 의식성(意識性)이라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을 것이니, 염오(染污)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때로는 끊어짐 없기 때문이며, 의식의 소연(所緣, 인식대상)을 얻을  없기 때문이다.

 

設和合識,卽是意識,爲此和合意識,卽是一切種子識`爲依止此識, 所生餘意識,是一切種子識?若此和合識,是一切種子識,卽是阿賴耶識,汝以異名,立爲意識.

설사 화합식(和合識)이 의식(意識)이라 할지라도  화합의식(和合意識)이 바로 일체종자식인 것인가? 

화합의식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다른 의식이 일체종자식인 것인가? 

만약  화합식이 일체종자식이라면 이것이 바로 아뢰야식인 것이니, 그대는 다른 명칭으로 안립하여서 의식이라 하는 것이다.

 

若能依止識,是一切種子識, 是則所依因識非一切種子識, 能依果識是一切種子識,不應道理. 是故成就此和合識,非是意識,但是異熟識,是一切種子識.

만약 능히 의지하는 의지식(依止識) 일체종자식이라면, 소의인(所依因, 의지처의 원인)으로서의 식이 일체종자식이 아니고, 능히 의지하는 과보로서의 능의과식(能依果識) 일체종자식이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합식은 의식(意識)이 아니라, 다만 이숙식(異熟識)일 뿐이니, 

이것이 일체종자식이라는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

 

▶釋曰: 非等引地,卽是欲界.沒者,死也.染污意識,卽是煩惱俱行意識.

結生相續者,謂攝受自體,此染污意,識緣生有爲境,於中有中滅.

▷해석한다; ‘선정이 아닌 지위의 비등인지(非等引地)’란  욕계이며,

‘죽는다는 몰(歿)’은 죽음의 사(死)를 말하며,

‘염오의 의식인 염오의식(染污意識)’이란 번뇌와 함께 작용하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며,

‘결생상속한다는 결생상속(結生相續)'이란, 그 자체를 섭수하는 것을 말한다. 

 염오의식(染污意識) 모태에 임신되는 순간의 존재인, 생유(生有)를 반연하여 대상으로 삼고, 내세에 다시 태어나게 되는 중유(中有)에서 멸하는 것이다. 

 

윤회과정을 생유(生有)ㆍ본유(本有)ㆍ사유(死有)ㆍ중유(中有)의 4유설(四有說)로써 설명하기도 하는데, 4유는 생명적 존재의 윤회 속에서의 네 가지 존재형태이다.

생유(生有), 모태에 임신되는 순간의 존재이다.

본유(本有)는 모태에 임신되면서부터 출산되어서, 생존하다가 사망할 때까지의 존재이고,

사유(死有)는 사망하는 찰나에 수온( 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蘊)의 4온(蘊)이 신체인 색온(色蘊)을 벗어나는 순간의 존재이고, 

중유(中有)는 사망한 이후부터 업력에 따라 내세에 태어나기까지의 존재이다.

 

言和合者,識與赤白同一安危, 若和合識卽是意識, 依此復生所餘意識,是則一時, 二意識轉, 謂所依止和合意識, 及能依止所餘意識.

‘화합(和合)’이란 식(識)과 적백(赤白, 부모의 정혈精血)이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함께하는 것이니, 

만약 화합식이 의식이라면 이것에 의지해서 다시 다른 의식을 생겨나게 할 것이니, 그렇게 된다 일시(一時)  개의 의식이 전전하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의지처인 화합식(合意識)과 능히 의지하는 다른 의식의 여의식(餘意識)인 것이다. 

 

화합(和合), 범어로는 saṃmūrcchati로서 ‘결합ㆍ응결(凝結)’의 의미이며, 윤회의 주체인 아뢰야식이 부모의 수정란에 결합해서 응결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의 어원인 √saṃmūrch는 ‘응결해서 증대하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이 화합은 단순한 기계적이고 무기적(無機的)인 결합이 아니라 생리적이고 유기적(有機的)으로 결합해서 성장하고 발달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현장은 이를 ‘화합’ 이외에 ‘의탁(依託)’ㆍ‘화합 의탁’으로 번역하였다.

 

又和合識,是意識性,不應道理. 何以故? 依染污故`時無斷故. 謂此意識,貪等煩惱,所染污意, 爲所依止, 緣生有境, 故是染污,卽此爲依,名依染污. 於此位中,所依異熟,不容染污,是無記故.此和合識,常無閒斷,任業轉故.

또한 화합식이 의식의 성품이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염오(染污)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때에 따라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며,  

 의식은 탐욕 등의 번뇌에 염오되고, 의(意, 말나식, 제 7식)을 의지처로 삼고, 생유(生有)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 염오가 이것의 의지가 되어 주는 것을 염오에 의지하는 의염오(依染污)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에서의 의지처는 이숙으로써, 염오가 아니니, 이것은 무기(無記)이기 때문이며,  

 화합식은 항상 중단됨이 없고, 업에 의해서 전전하기 때문이다.

 

意識所緣不可得故者,意識所緣明了可得,所謂諸法.此和合識,無有如是明了所緣,是故此識,是意識性,不應道理.

‘의식의 인식대상인 의식소연(意識所緣)은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으니,

의식의 인식대상인 의식소연(意識所緣)은 명료한 것이니, 이른바법인 것이다. 

그러나, 이 화합식은 이와 같은 명료한 인식대상인 의식소연(意識所緣)이 없기 때문에,  화합식이 의식의 성품이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論曰:復次結生相續已,若離異熟識, 執受色根,亦不可得.其餘諸識,各別依故`不堅住故,是諸色根不應離識.

▷논문; 또한 결생(結相) 상속하고 나서, 만약 이숙식을 여읜다면, 감각기관(根)을 집수(執受)하는 것이 있을  없으니, 그 나머지 모든 식은 각각의 의지처가 다르기 때문이고, 견고하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기관은 식(아뢰야식)을 떠날  없는 것이다.


▶釋曰:結生相續已者,謂已得自體.若離異熟識者,謂離阿賴耶識,其餘諸識各別依故. 不堅住故者, 謂餘六識各別處故`易動轉故.且如眼識,眼爲別依,如是其餘,耳等諸識,耳等色根,爲各別依.由此道理,如是諸識,但應執受自所依根.又此諸識,易動轉故,或時無有,若離阿賴耶識,爾時,眼等諸根,無能執受,便應爛壞.

▷해석한다; ‘결생상속(結生相續)한 후’란, 이미 자체를 얻은 것을 말하며,

‘만약 이숙식을 여읜다면’이란, 아뢰야식을 여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 나머지 모든 식은 각각의 의지처가 다르기 때문이고 견고하게 머물지 않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으니,

나머지 육식(六識) 각각의 의지처를 달리하기 때문이고, 쉽게 전전하기 때문이니,

우선 안식은 안근을 별도의 의지처로 삼는다는 것으로 알  있는 것과 같이, 나머지 이식(耳識) 등의 여러 식은 이근(耳根) 등의 여러 감각기관(根)을 각각의 의지처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로 인하여, 이와 같은 여러 식은 다만 스스로 의지처인 감각기관(根)만을 집수할 뿐이며, 또한 이들 식은 쉽게 전전하기 때문에 간혹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만약 아뢰야식을 여읜다면, 그 때의 안근(眼根) 등의 여러 감각기관(根)은 능히 집수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흩어져서 파괴되는 것이다.


▶論曰:若離異熟識,識與名色,更互相依,譬如蘆束,相依而轉,此亦不成.

▷논문; 만약 이숙식(아뢰야식)을 여읜다면, 식(識)과 명색(名色)이 다시 서로 의지하여서, 마치 갈대 묶음이 서로를 의지해서 전전하는 것과 같은 것이 성립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명색(名色, nāma-rūpa)은 정신적인 명(名)과 물질적인 색(色)이 결합된 상태이다.


▶釋曰:若離異熟識者,謂離阿賴耶識,如不得成, 今當顯示.謂世尊言:識緣名色,名色緣識.此中識緣名者,謂六識中,非色四薀.識緣色者,謂羯邏藍.若不說有阿賴耶識,何等名爲名色緣識?由依名色,剎那展轉,相似相續,流轉不絕.

▷해석한다; ‘만약 이숙식을 여읜다면’이란, 아뢰야식을 여의면 성립될  없음이다.

지금 마땅히 현시(顯示)할 것이니,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식(識)은 명색(名色)을 반연하고, 명색(名色)은 식(識)을 반연한다”고 하신 가운데에서, 

여기서의 ‘식(識)이 명(名)을 반연한다’는 것은식(六識) 중에서 물질이 아닌 수온, 상온, 행온,식온의 사온(四蘊)을 말하는 것으로,

‘식은 색을 반연한다’는 것은 갈라람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아뢰야식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이름하여 명색이 식을 반연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명색에 의지해서 찰나에 전전함으로써 비슷하게 상속하고 유전하여 단절되지 않는 것이다.


▶論曰:若離異熟識,已生有情識食不成.何以故?以六識中,隨取一識,於三界中,已生有情,能作食事,不可得故.

▷논문; 만약 이숙식을 여읜다면 이미 태어난 유정의 식식(識食)은 성립되지 않으니, 어떠한 까닭인가? 

육식(六識) 가운데 하나의 식만을 취하여 따른다면, 삼계에 태어난 유정은 능히 음식작용의 일을   없기 때문이다.


▶釋曰:此言顯示識食不成.如世尊說:食有四種,一者段食`二者觸食`三者意思食`四者識食.此中段食者,是能轉變,由轉變故,饒益所依.觸食者,是能取境,由暫能見色等境界,便令所依,饒益生故.意思食者,是能悕望,由悕望故,饒益所依,如遠見水,雖渴不死.識食者,是能執受,由執受故,所依久住,若不爾者,應同死屍,不久爛壞. 是故應許識亦是食,能作所依饒益事故.

▷해석한다; 이 말은 식식(識食)이 성립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음식작용물(食)에  가지의 사식(四食)이 있으니,

첫째는 단식(段食)이고, 둘째는 촉식(觸食)이며, 셋째는 의사식(意思食)이고, 넷째는 식식(識食)이다. 

 가운데 단식(段食)은 형태를 변화시켜서 영양분이 될 수 있게끔 능히 전변하고, 전변함으로써 의지처를 이롭게 하며,

촉식(觸食)은 능히 대상을 취하는 것이니, 빛깔 등의 경계를 잠깐 보는 것에 의해서 문득 의지처로 하여금 이익이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며,

의사식(意思食)은 능히 희망하고,  희망으로 인하여 의지처를 이롭게 하는 것이니, 멀리에서 물을 보게 되면 갈증이 날지라도 죽지 않는 것과 같으며,

식식(識食)은 능히 집수하는 것이니, 집수함으로 인하여 의지처를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니,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마땅히 시체와 같아서  않아 문드러지고 파괴될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식(識)도 역시 음식작용의 식(食)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니, 능히 의지처를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此中觸食,屬六識身,意思食者,屬悕望意,有何別識,可說爲食?

又若無心`睡眠`悶絕`入滅定等,六識身滅,誰復有餘能執受身令不爛壞?若有棄捨阿賴耶識,身必爛壞.

 중에서 촉식은 6식신(六識身)에 속하고, 의사식은 희망의 의식인 희망의(希望意)에 속하는 것이니, 어떠한 별도의식(別識)이 있어서 음식작용물(食)로 삼겠는가? 

또한, 만약 무심(無心)ㆍ수면(睡眠)ㆍ기절함의 민절(悶絕)ㆍ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간 경우 등에는 6식신(六識身)이 멸하는 것이니, 나머지 무엇이 신체를 집수하여 파괴되지 않게것인가? 

만약 아뢰야식을 여의게 되면 신체는 반드시 문드러지고 파괴되는 것이다.

 

사식(四食), 유정의 신명(身命)을 유지시키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음식작용물이다.

첫째, 단식(段食, 團食)은 밥이나 나물처럼 형체가 있는 음식으로서, 이것을 쪼개고 으깨는 분분단단(分分段段)하여 먹어서 능히 신명을 무너지지 않게 하며,

둘째, 촉식(觸食)에서 촉(觸)은 육식에 상응하는 심소(心所, 심리작용)으로, 사랑할 만한 대상에 접촉할 때 희락의 쾌감을 일으켜서 신체를 이롭게 하기 때문에 능히 음식작용물의 뜻이 있는 것이며,

셋째, 의사식(意思食 또는 사식思食)에서 의사는 의식에 상응하는 사(思)의 심소이며, 이 심소가 욕구(欲) 등의 심소를 동반해서 사랑할 만한 대상을 희구해서 심신을 자양(滋養)하는 것이며,

넷째, 식식(識食)은 앞의 세 가지 음식작용물의 세력에 의해서 증장할 수 있고, 이 식이 모든 감각기관이나 4대(大)를 장양(長養)하기 때문이다.


▶論曰:若從此沒,於等引地,正受生時,由非等引, 染污意識, 結生相續. 此非等引染污之心,彼地所攝,離異熟識,餘種子體定不可得.

▷논문; 만약 여기서 죽어서(沒) 선정의 지위인 등인지(等引地)에서 바로 생을 받을 때, 선정이 아닌 비등인지(非等引地)의 염오의식으로 인하여 생을 맺어 상속하는 결생상속(結生相續)하는 것이다. 

 선정이 아닌 지위의 비등인지(非等引地)의 염오심은  지위에 포섭되는 것이니, 이숙식을 여의고는 다른 종자의 자체는 결정코 반드시 있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인 것이다.


▶釋曰:如是已說非等引地, 結生相續,離異熟識,不可得成. 如等引地,亦不得成,今當顯示.

謂於此處, 由染污識結生相續, 於等引地, 由非等引染污意識結生相續.

言染污者,彼地煩惱之所染污. 彼地煩惱者,謂飡定味等.此染污心在不定地.

不定地沒,從此沒已,卽彼地心,云何現前?旣不現前, 云何當得結生相續?

由此道理,定應許有阿賴耶識,無始時來,恒有彼地,此心熏習,由此熏習,此心現行,由此心故,結生相續.

▷해석한다; 이와 같이 선정이 아닌 지위의 비등인지(非等引地)에서 생을 맺어 결생상속(結生相續)한다는 것은 이숙식을 떠나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선정의 지위인 등인지(等引地)와 같은 것에서도 역시 성립될 수 없음을 이제 나타내 보이겠으니,

이곳에서 염오식(染污識)으로 인하여 생을 맺어 결생상속(結生相續)한다는 것은, 선정의 등인지에서도 선정이 아닌 비등인지의 염오식으로 인하여 생을 맺어 상속한다는 것이니, 

‘염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지위의 번뇌에 오염된 것이며, 

그 지위의 번뇌란 선정의 맛을 만끽하는 것 등으로, 이 염오심은 선정이 아닌 지위의 부정지(不定地)에 있는 것이니,

부정지(不定地)에서 죽은(沒) 다음에 그 지위의 마음은 어떻게 현전한다는 것인가!

이미 현전하지 않거늘, 어떻게 장차 결생(結生)하여 상속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도리로 인하여 반드시 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나니, 아득한 무시로부터 항상 그 지위가 있어서 이 마음을 훈습하고, 이 훈습으로 인하여 이 마음이 현행하는 것이며, 이 마음으로 인하여 생을 맺는, 결생상속(結生相續)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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