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 8권
세친(世親) 보살 지음, 현장(玄奘) 한역.
9. 증상혜학분(增上慧學分) ② 2
▶論曰:般若波羅蜜多,與無分別智,無有差別.如說菩薩,安住般若波羅蜜多,非處相應,能於所餘波羅蜜多, 修習圓滿. 云何名爲非處相應修習圓滿?謂由遠離五種處故,一遠離外道我執處故`二遠離未見眞如菩薩分別處故`三遠離生死涅槃二邊處故`四遠離唯斷煩惱障生喜足處故`五遠離不顧有情利益安樂住無餘依涅槃界處故.
▷논문; 반야바라밀다와 무분별지는 차이가 없으니,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하여서, 반야가 아닌 것을 반야로 오인하는 비처(非處, 개처個處)와 상응하여서 그 반야가 아닌 곳에 의지하지 않으며, 능히 나머지 바라밀다를 닦아 익히는 것을 원만해진다’고 말씀한 바와 같으니,
무엇을 이름하여 반야가 아닌 비처(非處, 개처個處)와 상응하여서 반야가 아닌 것에 의지하지 않고, 닦아 익혀서 원만해지는 것이라 하는가? 다섯 가지 처소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니,
첫째는 외도의 아집처(我執處)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고,
둘째는 아직 진여를 보지 못한 보살이 분별하는 분별처(分別處)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셋째는 생사와 열반의 이변처(二邊處)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넷째는 번뇌장을 끊는 것만으로 기쁘게 만족함을 일으키는 생희족처(生喜足處)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유정의 이익과 안락을 원하지 않고 무여의열반세계에 안주하는 처소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釋曰:無分別智卽是般若波羅蜜多.由彼經中說:諸菩薩安住般若波羅蜜多,非處相應,能於所餘波羅蜜多,修習圓滿.爲欲令知如是義故,顯示彼文.
▷해석한다; 무분별지는 곧 반야바라밀다로써,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가운데에서,
‘모든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하고, 반야가 아닌 비처(非處, 개처個處)와 상응하여서, 능히 나머지 바라밀다를 닦아 익혀서 원만해진다’고 말씀함에 의거해서, 이러한 뜻을 알게 하고자 이 문장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遠離外道我執處者,謂如外道住般若中,執我我所,作如是念:我能住般若,般若是我所.菩薩不爾, 遠離如是諸外道輩我執處故,應知說名非處相應安住般若波羅蜜多.
‘외도의 아집의 처소를 멀리 여읜다’는 것이란, 외도의 부류는 반야에 머물러서 나(我)ㆍ나의 소유인 아소(我所)에 집착하여 ‘나는 능히 반야에 안주한다. 반야는 나의 소유이다’라고 생각하나,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이와 같은 모든 외도의 무리가 아집을 일으키는 아집처(我執處)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반야가 아닌 비처와 상응하여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遠離未見眞如菩薩分別處者,謂如未見眞如菩薩,於無分別般若波羅蜜多中,分別此是般若波羅蜜多.菩薩遠離如是分別,應知說名非處相應安住般若波羅蜜多.
‘아직 진여를 보지 못한 보살이 분별하는 분별처(分別處)를 멀리 여읜다’는 것이란, 아직 진여를 보지 못한 보살 부류는 무분별의 반야바라밀다에 대해서 이것은 반야바라밀다라고 분별하나니, 보살은 이러한 분별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반야가 아닌 비처와 상응하여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遠離生死涅槃二邊處者,謂如世閒安住生死,諸聲聞等安住涅槃.菩薩不爾,遠離二邊,應知說名非處相應安住般若波羅蜜多.
‘생사와 열반의 이변처(二邊處)를 멀리 여읜다’는 것이란, 세간의 무리는 생사에 안주하고, 모든 성문등은 열반에 안주하나,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그러한 두 가지를 멀리 여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반야가 아닌 비처와 상응하여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遠離唯斷煩惱障,生喜足處者,如聲聞等,唯斷煩惱障,便生喜足,菩薩不爾,由此意趣,應知說名非處相應安住般若波羅蜜多.遠離不顧有情利益安樂,住無餘依涅槃界處者,謂如聲聞等,不顧有情利益安樂,於無餘依般涅槃界而般涅槃.菩薩不爾,不住聲聞所住之處,應知說名非處相應安住般若波羅蜜多.
‘오직 번뇌장을 끊는 것만으로 기쁘게 만족함을 일으키는 생희족처(生喜足處)를 멀리 여읜다’는 것이란,
성문등의 부류는 오직 번뇌장을 끊는 것만으로 문득 기쁘하고 만족하나,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이러한 것을 반야가 아닌 비처와 상응하여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유정의 이익과 안락을 원하지 않고 무여의열반계에 안주하는 처소를 멀리 여읜다’는 것이란,
성문등의 부류는 유정의 이익과 안락을 원하지 않고 무여의열반계에 반열반하나,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성문이 머무는 처소에 안주하지 않으니,
이러한 것을 반야가 아닌 비처와 상응하여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聲聞等智,與菩薩智,有何差別?由五種相,應知差別:一由無分別差別,謂於薀等法,無分別故;二由非少分差別,謂於通達眞如,入一切種所知境界,普爲度脫一切有情,非少分故;三由無住差別,謂無住涅槃,爲所住故;四由畢竟差別,謂無餘依涅槃界中,無斷盡故;五由無上差別,謂於此上無有餘乘勝過此故.此中有頌:
▷논문; 성문등의 지혜와 보살의 지혜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다섯 가지의 오종상(五種相)에 의거해서 그 차이를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무분별차별(無分別差別)에 의거하니, 5온(蘊) 등의 법에 대한 분별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적은 것이 아닌, 비소분차별(非少分差別)에 의거하나니, 이른바 진여에 통달함과, 일체 종류의 알아야 할 경계에 들어감과, 널리 모든 유정을 해탈케 함에 대한 것이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셋째는 머물지 않음의 무주차별(無住差別)에 의거하는 것이니, 무주열반(無任涅槃)을 머무는 곳으로 삼기 때문이며,
넷째는 구경의 필경차별(畢竟差別)에 의거하나니, 무여의열반계 중에서 다함이 없고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무상차별(無上差別)에 의거하나니, 이 보다 뛰어난 다른 교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함에 대한 게송이 있으니,
ㅡ 이승(二乘)의 지혜와 보살의 지혜의 차이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였다.
“諸大悲爲體, 由五相勝智, 世出世滿中, 說此最高遠.”
모든 대자비를 자체로 삼고, 다섯 가지 오상(五相)의 뛰어난 승지(勝智)에 의거하나니,
세간과 출세간의 원만함 중, 이를 가장 높고 먼, 최고원(最高遠)이라 한다네.
▶釋曰:此中顯示,聲聞等智,與菩薩智,五相差別.無分別差別者,謂聲聞等緣於薀等,分別識生,非菩薩智分別薀等.
▷해석한다; 여기서는 성문등의 지혜와 보살의 지혜의 다섯 가지 차이를 나타내었다.
‘무분별차별(無分別差別)’은, 이른바 성문등은 5온 등을 반연하여 분별식을 일으키지만, 보살의 지혜는 5온 등을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非少分差別者,謂顯三種,非少分性:一所達眞如非少分性`二所知境界非少分性`三所度有情非少分性.所達眞如非少分性者,謂菩薩智具足,通達補特伽羅法無我性;聲聞等智,入眞如時,唯能通達補
特伽羅無我之性.所知境界非少分性者,謂菩薩智,普緣一切所知境生;聲聞等智,唯緣苦等諸諦而生.所度有情非少分性者,謂菩薩智,普爲度脫一切有情,勤趣菩提;聲聞等智,唯求自利.
‘적은 것이 아닌 비소분차별(非少分差別)’이란 세 종류의 적은 성품이 아닌, 비소분성(非少分性)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 첫째는 통달한 진여가 적은 성품이 아닌 것이며,
둘째는 알아야 할 경계가 적은 성품이 아니며,
셋째는 제도해야 할 유정이 적은 성품이 아니니라는 것이니,
‘통달한 진여가 적은 성품이 아니다’라는 것이란, 보살의 지혜는 구족하여 보특가라와 법의 무아성을 통달하였지만, 성문등의 지혜는 진여에 들어갈 때 오직 보특가라의 무아성에 통달할 뿐이라는 것이며,
‘알아야 할 경계가 적은 성품이 아니다’라는 것은 보살의 지혜는 알아야 할 모든 경계를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이지만, 성문등의 지혜는 오직 고제(苦諦) 등 4성제만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제도해야 할 유정이 적은 성품이 아니다’라는 것은, 보살의 지혜는 널리 모든 유정을 해탈시키기 위해서 부지런히 보리에 나아가는 것이지만, 성문등의 지혜는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구한다는 것이다.
無住差別者,謂菩薩智,正爲安住無住涅槃,非聲聞等,是故差別.畢竟差別者,謂聲聞等,於無餘依涅槃界中,一切滅盡,菩薩於此涅槃界中,功德無盡,是故差別.無上差別者,謂聲聞等,上有大乘,其菩薩乘,無復有上,是故差別.爲顯此義,說一伽他.世`出世滿中者,謂於色`無色界世閒滿中,及於聲聞乘等出世滿中.
‘머물지 않음의 의 무주차별(無住差別)’이란, 보살의 지혜는 바로 무주열반에 안주하기 위한 것이지만, 성문등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이며,
‘구경의 필경차별(畢竟差別)’이란, 성문등은 무여의열반계 안에서 일체를 멸진하지만, 보살은 이 열반계 안에서 공덕이 다함 없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이며,
‘무상차별(無上差別)’는, 이른바 성문등의 위로는 대승이 있지만, 보살승에는 다시 위가 없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하나의 게송으로 말하였으니,
‘세간과 출세간의 원만함 중에서’란, 색계와 무색계 세간의 원만함과 성문승 등의 출세간의 원만함을 말하는 것이다.
▶論曰:若諸菩薩,成就如是增上尸羅`增上質多`增上般若,功德圓滿,於諸財位,得大自在,何故現見有諸有情,匱乏財位? 見彼有情,於諸財位有重業障故;見彼有情,若施財位,障生善法故;見彼有情,若乏財位, 厭離現前故;見彼有情,若施財位,卽爲積集不善法因故;見彼有情,若施財位,卽便作餘無量有情,損惱因故.是故現見有諸有情,匱乏財位.此中有頌:
▷논문; 만약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은 매우 높은 계율의 증상시라(增上尸羅)ㆍ매우 높은 마음의 증상질다(增上質多)ㆍ매우 높은 반야의 증상반야(增上般若)를 성취하여 공덕이 원만하여지면, 모든 재물과 지위에 대하여 큰 자재를 얻거늘,
어찌하여 현재의 모든 유정은 재물과 지위에서 궁핍함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인가?
그들 유정은 모든 재물과 지위에 대해서 무거운 업의 중업장(重業障)이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며,
만약 재물과 지위를 베푼다면 선법을 일으키는 것을 장애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며,
그들 유정은 재물과 지위가 궁핍하여지면 혐오하면서 떠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재물과 지위를 베풀면, 그들 유정은 곧 불선법의 원인을 적집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재물과 지위를 베풀면, 그들 유정은 곧 나머지 수많은 유정들을 괴롭히는 원인을 짓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현재 모든 유정은 재물과 지위에 궁핍한 것이다.
그러함에 대한 게송이 있으니,
ㅡ보살이 증상(增上)의 3학을 성취한 공덕으로 재물과 지위에 대해서 큰 자재를 얻음에도, 중생들이 궁핍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見業障現前, 積集損惱故, 現有諸有情, 不感菩薩施.”
업ㆍ장애ㆍ현전ㆍ적집ㆍ괴롭힘을 볼 수 있는 까닭에,
현재 모든 유정은 보살의 보시를 느끼지 못하는 불감(不感)이라네.
▶釋曰:此中顯示,由是因緣,菩薩雖得財位自在具足大悲,而不施與有情財位.見彼有情,於諸財位,有重業障故者,謂諸有情,有障菩薩神力惡業,由彼惡業,障㝵菩薩無障㝵智.由見此故,雖有堪能,雖彼匱乏,而便棄捨.此中應引餓鬼江喩.如江有水,無障飮者,然諸餓鬼,由自業過,不能得飮.此亦如是.江喩菩薩,財位喩水,鬼喩有情.如彼餓鬼,不合飮用江中淨水,如是有情,不合受用菩薩財位.
▷해석한다; 여기에서 이러한 인연에 의거해서 보살은 비록 재물과 지위의 자재를 얻고 대자비를 구족하였을지라도 유정에게 재물과 지위를 베풀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니,
‘그들 유정은 모든 재물과 지위에 대해서 무거운 업의 장애인 중업장(重業障)이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란,
모든 유정에게는 보살의 신통력을 장애하는 악업이 있고, 그 악업에 의해서 보살의 장애 없는 지혜를 장애하나니, 이러한 것을 본 까닭에, 보살에게는 시여할 능력이 있을지라도, 또한 그들이 궁핍할지라도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아귀와 강의 비유를 인용해야 할 것이니, 강에 물이 있고, 마시는 것을 막는 자가 없지만, 아귀는 스스로의 자업과(自業過) 때문에 마실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또한 그러한 것이니, 강은 보살을 비유한 것이고, 물은 재물과 지위을 비유한 것이며, 아귀는 유정을 비유한 것이다.
그들 아귀가 강에 있는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없는 것과 같이, 유정도 보살의 재물과 지위를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見彼有情,若施財位,障生善法故者,謂復有餘補特伽羅,雖無業障,菩薩見彼,於相續中,當生善法,若施財位,受富樂故,障彼生善.作是思惟:寧彼貧賤順,生善法,勿彼富貴,障善法生.由此道理,雖得自在,不施財位.
‘재물과 지위를 베풀면 그들 유정은 선법을 일으키는 것을 장애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란,
다시 다른 보특가라가 있어서, 보살이 그를 보건대, 그에게는 업의 장애가 없어서 현생(現生)의 상속 중에 장차 선법을 일으킬 수 있으나, 만약 재물과 지위를 베푼다면, 부귀와 즐거움을 누리는 까닭에 그러한 선을 일으킬 수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그로 하여금 오히려 빈천에 수순하여 선법을 일으키게 하고, 그가 부귀하여져서 선법을 일으키지 않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니,
이러한 도리에 의거해서 자재를 얻었을지라도 재물과 지위를 베풀지 않는 것이다.
見彼有情,若乏財位,厭離現前故者,謂復有餘補特伽羅,菩薩見彼,由貧賤故,厭離現前,作是思惟:寧彼貧賤,厭離現前,隨順善法,勿彼富貴,不生厭離.由此道理,雖得自在,不施財位.
‘그들 유정은 재물과 지위가 궁핍하여지면 혐오하면서 떠나는 것을 보기 때문’이란,
다시 다른 보특가라가 있어서 보살이 보건대, 빈천한 까닭에 혐오하면서 떠나려는, 즉 생사를 혐오해서 떠나고자 하는 구도심(求道心)이 현전하나, 그로 하여금 오히려 혐오해서 떠나려는 것을 현전하게 하고 선법에 수순하게 하는 것이니, 그가 부귀해져서 혐오하여 떠나려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니,
이러한 도리에 의거해서 자재를 얻었을지라도 재물과 지위를 베풀지 않는 것이다.
見彼有情,若施財位,卽爲積集不善法因故者,謂復有餘補特伽羅,菩薩見彼,乃至貧窮,常不積集諸不善法,作是思惟:寧彼貧窮,不造諸惡,勿彼富貴,集諸不善.由此道理,雖得自在,不施財位.
‘만약 재물과 지위를 베풀면 그들 유정은 곧 불선법의 원인을 적집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란,
다시 다른 보특가라가 있어서 보살이 그를 보건대, 나아가 질병이나 재해 등 갖가지 불행을 만나서 빈궁할지라도 항상 모든 불선법을 짓지 않으니, 이러한 것을 알고는 그로 하여금 오히려 빈궁하여서 모든 악을 짓지 않게 하고, 그가 부귀하여져서 모든 불선법을 짓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니,
이러한 도리에 의거해서 자재를 얻었을지라도 재물과 지위를 베풀지 않는 것이다.
見彼有情,若施財位,卽便作餘無量有情,損惱因故者,謂復有餘補特伽羅,菩薩見彼,得大財位,卽便苦惱無量有情,作是思惟:寧彼一身,獨受貧賤,勿彼富貴,損惱其餘無量有情.由此道理,雖得自在,不施財位.
‘만약 재물과 지위를 베풀면 그들 유정은 곧 나머지 수많은 유정들을 괴롭히는 원인을 짓는 것을 보기 때문’이란,
다시 다른 보특가라가 있어서 보살이 그를 보건대, 큰 재물과 지위를 얻으면 문득 수많은 유정을 괴롭힐 것이라고 알게 되어서, 그로 하여금 오히려 혼자 빈천하게 하고, 그가 부귀해져서 수많은 다른 유정들을 괴롭히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니,
이러한 도리에 의거해서 자재를 얻었을지라도 재물과 지위를 베풀지 않는 것이다.
爲顯此義,復說伽他,謂見有情,有業障故`障生善故`厭現前故`積集惡故`損惱他故,不感菩薩施彼財位,是故現有匱乏有情.此略顯義,餘廣易了.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게송을 말하였으니, 이른바 유정에게 업의 장애가 있음을 보기 때문이고,
선을 일으키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이며, 혐오해서 떠나려는 것이 현전하기 때문이고,
악을 적집하기 때문이며, 남을 괴롭히기 때문에 보살은 그에게 재물과 지위를 베풀어야 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에 궁핍한 유정이 있는 것에 대하여 간략하게 뜻을 나타내었으나, 나머지 자세한 것은 알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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