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 8권
세친(世親) 보살 지음, 현장(玄奘) 한역.
9. 증상혜학분(增上慧學分) ① 2
▶論曰: ▷논문;
“諸菩薩行相, 復於所緣中, 是無分別智, 彼所知無相.”
모든 보살의 행상(行相, 인식작용)은 다시 소연(所緣, 인식대상)에서이니,
무분별지로서 그 알아야 할 바의 소지(所知)는 무상(無相)이라네.
▶釋曰:菩薩行相,於所緣中,所現無相,謂卽此智,於眞如中,平等平等,生起無異無相之相,以爲行相.
▷해석한다; 보살의 행상(行相, 인식작용)은 소연(所緣, 인식대상) 가운데 나타난 진여의 무상(無相)이니,
곧 이 지혜는 진여 가운데서 평등한 것이며, 평등하게 생겨나며 다르지 않은 무이(無異)이고 무상(無相)의 상으로써 행상(行相, 인식작용)을 삼는 것이다.
행상(行相, 인식작용)인 진여와 인식주체인 지혜가 평등하게 생기하여서, 진여와 지혜가 하나의 체(體)로서 다르지 않고, 두 가지의 개별적인 상이 없는 것을 평등한 등상이라 한다.
如眼取色,見靑等相,非此靑等,與色有異.此亦如是,智與眞如,無異行相.卽於此中,爲釋疑難,復說二頌.
눈이 색(色)을 취하여 푸른 색 등의 상을 보는 것과 같으며, 이 푸른 색 등은 색과 다르지 않은 것과 같이, 지혜와 진여가 다른 행상(行相, 인식작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의심과 비판을 풀기 위해서 다음의 두 게송을 말하였다.
▶論曰: ▷논문;
“相應自性義, 所分別非餘, 字展轉相應, 是謂相應義.
상응(相應)은 자성의 뜻이고, 분별의 대상은 다른 것이 아니니,
글자가 전전하여 상응하니, 이를 상응의 뜻이라 한다네.
非離彼能詮, 智於所詮轉, 非詮不同故, 一切不可言.”
그 능전(能詮)을 떠난 지혜는 소전(所詮)에 대해서 전전하지 않으니,
나타내는 전(詮)이 아니고, 같지 않은 부동(不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네.
▶釋曰:若一切法皆不可言,復以何等,爲所分別? 爲釋此故, 說如是言, '相應自性義,所分別非餘.'
謂卽相應, 爲自性義, 是所分別, 非離於此, 故言非餘. 此云何成? 爲重成立,復說是言.
▷해석한다; 만약 일체법 모두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다시 무엇으로써 분별하는 것인가? 이러함을 해석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상응은 자성의 뜻이고, 분별의 대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란, 상응을 자성의 뜻으로 삼고 분별의 대상은 이 자성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어떻게 성립해야 하는가? 거듭 성립시키기 위해서 다시 이렇게 말한 것이며,
字展轉相應,是謂相應義.謂別別字相續宣傳,以成其義,是相應義.如言斫芻.二字不斷,說成眼義.是相應義,爲所分別.
‘글자가 전전하여 상응하니, 이것을 상응의 뜻이라 말한다’는 것은, 낱낱의 글자가 상속하고 널리 전전함으로써 그 의미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이 상응의 의미인 것이다.
눈(眼)의 범어 cakṣu의 음사(音寫)를 작추(斫芻)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두 글자가 끊어지지 않으면 눈(眼)의 뜻을 이루는 것이니, 곧 cak와 ṣu의 두 글자가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한 단어를 이루기 때문에 cakṣu(眼)라는 단어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상응의 뜻을 분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又一切法,皆不可言,因何成立?故復說言,非離彼能詮智於所詮轉.由若不了能詮之名,於所詮義,覺知不起,故一切法,皆不可言.若言要待能詮之名,於所詮義,有覺知起.爲遮此故,復說是言,非詮不同故,以能詮名與所詮義,互不相稱,各異相故,能詮`所詮,皆不可說.由此因故,說一切法,皆不可言.無分別智,何所任持?
또한 ‘일체법은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에 의거해서 성립하는 것인가?
따라서 다시 말하기를 ‘그 능전(能詮)을 떠난 지혜(所詮)는 소전에 대해서 전전하지 않네’라고 하였으니,
만약 능전인 명칭을 알지 못한다면 소전인 뜻에 대해서 지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일체법은 다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며,
만약 반드시 능전인 명칭을 기다려서 소전인 뜻에 대한 지각이 일어난다고 말한다면, 이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같지 않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이다.
능전인 명칭과 소전인 뜻은 서로 계합하지 않고 각각 다른 상이기 때문에, 능전과 소전은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니, 이러한 원인에 의거해서 일체법 모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분별지는 누가 맡아 지니는, 임지(任持)하는 것인가?
▶論曰: ▷논문;
“諸菩薩任持, 是無分別智, 後所得諸行, 爲進趣增長.”
모든 보살이 맡아 지니는 임지(任持)는 무분별지이니,
후득지의 모든 행으로 나아가게 하고 증장시키기 때문이라네.
▶釋曰:由無分別後所得智,得菩薩行,此行卽依無分別智.爲進趣增長者,爲令如是諸菩薩行,得增長故.無分別智,是彼任持,此智復以何爲助伴?
▷해석한다; 무분별 이후에 얻은 지혜에 의거해서 보살의 행을 얻는 것이니, 이 행이 곧 무분별지에 의지하는 것이며,
‘나아가게 하고 증장시키기 때문’이란 이러한 보살의 행을 증장시키기 때문에 무분별지는 그가 맡아 지니는 임지(任持)인 것이다.
이 지혜는 다시 무엇으로써 돕는 반조(助伴)로 삼는 것인가?
▶論曰: ▷논문;
“諸菩薩助伴, 說爲二種道, 是無分別智, 五到彼岸性.”
모든 보살의 돕는 반조(助伴)를 두 가지의 이종도(二種道)라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무분별지의 5 도피안(到彼岸, 바라밀다)의 성품이라네.
▶釋曰:二種道者:一資糧道`二依止道.資糧道者,謂施`戒`忍及與精進波羅蜜多.依止道者,卽是靜慮波羅蜜多.由前所說,波羅蜜多,所生諸善,及依靜慮波羅蜜多,無分別智卽得生長,此智名慧波羅蜜多.
乃至未得佛果已來,無分別智,於何處所感異熟果?
▷해석한다; 두 가지의 이종도(二種道)는 첫째는 자량도(資糧道)이고, 둘째는 의지도(依止道)로써,
자량도는 이른바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의 바라밀다이며, 의지도는 곧 정려바라밀다이다.
앞에서 말한 바라밀다가 일으킨 모든 선에 의거하고 정려바라밀다에 의지해서 곧 무분별지혜가 생기하고 증장하는 것이니, 이 지혜를 반야바라밀다라 이름하는 것이다.
나아가 무분별지혜를 얻고 나서부터 아직 불과(佛果)에 이르지 않은 이전으로부터, 무분별지는 어떠한 곳에서 이숙과(異熟果)를 초감하는 것인가?
▶論曰: ▷논문;
“諸菩薩異熟, 於佛二會中, 是無分別智, 由加行證得.”
모든 보살의 이숙(異熟)은 부처님의 두 가지 법회 중에 있으니,
이것은 무분별지의 가행과 증득으로 인하여 다른 이숙과를 얻는 것이라네.
▶釋曰:於佛二會中者,謂受用身會中,及變化身會中.若無分別加行轉時,於變化身會中受生,受異熟果.若已證得無分別智,於受用身會中受生,受異熟果.爲顯此義故,復說由加行證得.無分別智誰爲等流?
▷해석한다; ‘부처님의 두 가지 법회’란 이른바 수용신(受用身)의 법회와 변화신(變化身)의 법회이다.
무분별의 가행이 전전할 때에는 변화신의 법회 중에서 생을 받아 이숙과를 받으며,
이미 무분별지를 증득하였다면 수용신의 법회 중에서 생을 받아 이숙과를 받는,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가행과 증득에 의한 것이라네’라고 말하였다.
무분별지는 누구의 등류(等流)가 되는 것인가?
▶論曰: ▷논문;
“諸菩薩等流, 於後後生中, 是無分別智, 自體轉增勝.”
모든 보살의 등류(等流)는 다음다음의 후후생(後後生) 가운데에 있으니
무분별지로서 자체가 전전하여 점차 뛰어나게 되는 전증승(轉增勝)이라네.
▶釋曰:諸菩薩等流於後後生中者,於次前說,二身大會後後生中.是無分別智,自體轉增勝者,卽彼所修無分別智,展轉增勝,應知卽是彼等流果.無分別智,出離云何?
▷해석한다; ‘모든 보살의 등류(等流)는 다음다음의 후후생(後後生) 가운데 있다’는 것이란, 바로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불신의 법회의 다음다음 생에 있는 것을 말하며,
‘무분별지로서 자체가 전전하여 점차 뛰어나게 되는 전증승(轉增勝)이다’는 것은, 그 수행한 무분별지가 전전하여 점차 뛰어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그것의 등류과(等流果)라고 알하야 하는 것이다.
무분별지의 벗어남의 출리(出離)는 어떠한 것인가?
▶論曰: ▷논문
“諸菩薩出離, 得成辦相應, 是無分別智, 應知於十地.”
모든 보살이 벗어남의 출리(出離)로서 증득과 성취에 상응하는 것이 무분별지이니,
10지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네.
▶釋曰:諸菩薩出離者,進趣究竟,故名出離,卽是進趣大涅槃義.得成辦相應,是無分別智者,初獲此智,名得相應,次後無量百千大劫,成辦相應.應知於十地者,謂從初地,乃至第十,如是次第.此智初地,唯名爲得,爾後多時,乃名成辦,是故菩薩,經無數劫,乃證涅槃,由爾所時,方到究竟.無分別智,誰爲究竟,而次前說,次第獲得.
▷ 해석한다; ‘모든 보살의 벗어남의 출리(出離)’란, 나아가 궁극에 이르기 때문에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이니, 곧 대열반에 나아간다는 뜻이며,
‘증득과 성취에 상응하는 것이 무분별지이네’는 최초로 이 지혜를 얻음을 증득과 상응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후의 무량한 백천 대겁에서는 성취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며,
‘10지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네.’란, 초지부터 10지까지의 이와 같은 순서인 것이니,
이 지혜는 초지에서는 오직 증득이라 이름하고, 이후의 많은 시기에서는 성취라고 부르는 것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무수겁을 경과하여 이에 열반을 증득하고, 그 시기에 의해서 비로소 궁극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무분별지는 누가 구경(究竟)으로 삼는 것인가? 바로 앞에서는 순서대로 획득함을 말하였을 뿐이다.
ㅡ앞에서는 무분별지를 순서대로 획득하는 것만을 말하였을 뿐으로, 아직 그 구경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으로 구경을 질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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