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方廣佛華嚴經卷第四十 대방광불화엄경권제40
罽賓國 三藏般若 奉詔譯 계빈국 삼장반야 봉조역
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 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
81권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으로 반야삼장(般若三藏)이 번역한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보현행원품을 빼고는 아무래도 완전한 화엄경으로는 미흡한 점이 있기 때문이고, 또한 다른 나라에서도 80권에 이어서 보현행원품을 함께 편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八十一.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화엄경은 60권본과 80권본과 40권본의 세 종류가 있는데
60권본은 동진(東晋)시대에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가 양주(楊州) 도량사(道場寺)에서 서기422년에 번역한 것,
80권본은 당(唐)나라 때 실차난타(實叉難陀)가 695년에 동도(東都)의 변공사(遍空寺)에서 번역을 시작하여 699년에 낙양(洛陽)의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끝마친 것.
40권본은 당(唐)나라 때의 반야삼장(般若三藏)이 798년에 번역한 것이다. 이 40권본 화엄경은 이름이 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라는 한 가지 품뿐이다. 이름은 달라도 60권본과 80권본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한다. 한 가지 품이 무려 40권이나 되는데 그 마지막 권만 따로 떼어내서 우리가 흔히 독송하는 소위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으로 삼은 것이다.
권수도 줄이고 이름도 간략하게 하여, 길고 긴 경전에서 필요한 부분만 떼어내어 별행본(別行本)으로 유통시켜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오히려 훨씬 돋보인다. 보현행원품이 얼마나 많이 읽히는가를 보면 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보현행원품이라는 독립된 경전으로 알고 있을 정도다.
특히 이번에 80권본을 강설하면서 입법계품에 이어서 보현행원품을 연결하여 화엄경의 결론으로 보완한 것은 화엄경의 완벽을 기하는 일이 된다.
보현행원의 행원(行願)이란 사람으로서 마음에 새기며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서원이다. 그리고 그 훌륭한 서원을 실천하는 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살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도 보현보살이 그 대표가 된다.
보현보살은 경전에서 열 가지의 매우 뛰어난 서원을 설명하여 불교적인 삶이 무엇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서원이란 희망이며 꿈이며 기대감이다. 사람의 삶이란 훌륭한 꿈과 희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이익과 삶의 생기를 줄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삶은 빛난다. 그것을 보살의 삶이라 한다.
다시 화엄경의 대지(大旨)를 언급하면, 흔히 화엄경의 대지를 “통만법 명일심(統萬法 明一心)”이라고 한다. 물론 한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는 선명시성정각(先明始成正覺) 후현보현행원(後顯普賢行願)이라고 하고자한다. 화엄경에는 천차만별의 차별한 법을 거두어 오직 한 마음임을 밝히는 가르침이라는 뜻도 일부 담겨있으나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처음 서두에서 세존이 처음 정각 이룸을 말하여 정각의 내용과 정각의 안목을 피력하였다. 그것은 곧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아,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 이대로가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인 것을.”이라는 말로 요약하여 표현하였다. 그러나 깨달음의 안목으로 볼 때 “우리들 인생이 그와 같고 세상이 그와 같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한다면, 보살행 중에서 가장 위대한 보현보살의 행원을 실천하여 본래 아름답기 그지없는 세상에 보현행원의 꽃으로 더욱 아름답게 수놓아가자는 것[華嚴]이 총 결론이기 때문이다. - 무비스님
1, 서분(序分)
爾時에 普賢菩薩摩訶薩이 稱歎如來勝功德已하시고 告諸菩薩과 及善財言하사대
이시 보현보살마하살 칭탄여래 승공덕이 고제보살 급선제언
그때 보현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거룩한 공덕을 찬탄하고 나서 여러 보살과
선재동자에게 말하였습니다.
善男子야 如來功德은 假使十方一切諸佛이 經不可說不可說佛刹極微塵數劫토록
선남자 여래공덕 가사시방 일체제불 경불가설불가설 불찰극미진수겁
선남자여, 여래의 공덕은 가령 시방세계의 일체 모든 부처님들께서 불가설 불가설
불찰 미진수 겁 동안
相續演說하야도 不可窮盡이니라 若欲成就此功德門인댄 應修十種廣大行願이니라
상속연설 불가궁진 약욕성취 차공덕문 응수십종 광대행원
계속하여 연설할지라도 끝까지 다할 수가 없느니라.
만약 이러한 여래의 공덕을 성취하려면 응당 열 가지 크나큰 행과 원을 닦아야 하느니라.
이 단락은 이 품의 서론[序分]에 해당한다.
'그때'란 길고 긴 화엄경의 마지막 부분을 설하는 지금 이 순간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화엄경 제39품인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거룩한 공덕을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지 설명하여 마친 때이다.
앞의 화엄경 본문에서 설명한 부처님의 거룩한 공덕을 아주 작은 일부분만 소개하면,
“한량없는 세월동안 수행하시면서 때로는 보살의 견디고 참고 기다리는 삶도 사시었네.”
“혹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불도를 이룬지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겁을 지나간 것을 보기도 하였으며, 혹은 지금 막 보살이 되어 시방의 모든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사시는 모습을 보기도 하였네.”
“혹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수행을 하시는 것도 보았고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 등등의 바라밀을 모두 다 중생들의 마음을 수순하여 나타내 보이는 것도 보았네.”
“설혹 세계의 먼지 숫자만큼이나 많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들을 다 헤아려서 알고, 또 저 큰 바다의 물을 다 마실 수 있고, 드넓은 저 허공 끝을 다 알고, 심지어 바람마저 손으로 얽어 붙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부처님의 한량없는 그 공덕은 다 설명할 수가 없네.”
“만약 어떤 이가 이러한 공덕을 듣고 환희하는 마음과 믿고 이해하는 마음을 낸다면 위에서 찬탄한 모든 공덕을 다 얻을 수 있으리니, 이 공덕에 대해서 결코 의심하지 말라.”라고 하면서 이와 같이 끝을 맺었다.
이어 보현행원품에서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려면 응당 열 가지 크나큰 행원을 닦아야 한다.”라고 하면서 아래에서 그 열 가지 행원에 대해서 하나하나 설명한다.
2, 정종분(正宗分)
(1) 열 가지 서원(誓願)의 명칭
何等이 爲十고 一者는 禮敬諸佛(예경제불)이요
1. Venerating the Buddhas
그 열 가지 서원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함이요.
여기서부터 이 경전의 본론이다. 보현행원품에서 주로 이야기 하고자하는 내용이 열 가지 서원이다. 먼저 그 열 가지 서원의 이름을 열거하였다. 불교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인 인생, 즉 보살로 살아가는 열 가지의 덕목이라 해도 좋다. 다음에서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우선 간단하게 현대적 의미로 풀어서 이해해 보려한다.
첫째,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함이란, 먼저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나와 남과 가족과 형제자매와 이웃과 직장에서 늘 부딪히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길을 오고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 수없이 부처님, 부처님 하지만 실은 그 사람들 외에는 달리 다른 부처님이 없다. 그리고 그 사람 부처님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보다 더 훌륭하고 위대한 존재는 없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이해할수록 부처님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리고 사람 외에 달리 어디서 부처님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을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그 다음 예배하고 공경하는 일은 한결 쉬워진다. 나무나 돌로 깎은 불상에도 예배하고 공경한다. 세 번씩, 일곱 번씩, 백팔번씩, 천 번씩, 삼천 번씩, 어떤 이는 백만 번을 했다고 자랑하는 이도 있다.
나무나 돌을 부처님으로 보면서 왜 살아있는 사람은 부처님으로 보지 못할까. 간혹 멀쩡한 자연석을 부처님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참 신기하기도 하다. 사람 속에 무슨 물건이 들어있어서 그렇게 볼 줄 아는가. 그 능력을 쏳아서 부디 사람을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그 사람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자. 관세음보살님께 예배를 하다보면 혹 어떤 관세음보살님은 예배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합장하고 예배하는 관음상도 있다. 그 관음상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남은 의혹이 풀리리라. 이것이 사람다운 사람, 즉 보살이 실천해야할 덕목 제1조다.
二者는 稱讚如來(칭찬여래)요
2. Praising the Tathagatas
둘째는 부처님을 칭찬하고 찬탄함이요.
둘째, 부처님을 우러러 찬탄함이란, 먼저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알고 나면 우러러 찬탄할 일은 너무나 많다. 부처님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 올리는 것은 2천 6백 여 년 전에 인도의 역사 속에 나타났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생각한다. 그도 물론 훌륭한 부처님이었다. 그래서 예불문(禮佛文)에도 수많은 부처님 중에서 근본이 되는 스승님 석가모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역사 속에 살다 가신 석가모니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경전상에 나타난 무수한 부처님이나 보살들만도 아니다. 역사 속에서 명멸해 간 수많은 보살들이나 조사스님들만도 아니다.
그 모든 분들을 포함하여 다만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우리들과 가깝고 혹은 멀게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우러러 찬탄하라는 것이다. 못나고 게으르고 살림도 살 줄 모르는 아무짜개도 쓸모없어 보이는 마누라도, 돈도 벌 줄 모르고 옹졸하고 무능력하고 고집만 세고 하여 말이 통 먹히지 않는 저 못난 남편도 내가 사람의 본성을 볼 줄 아는 눈만 열리면 무지 무지하게 존귀하한 부처님이며 값비싼 보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이리보아도 우러러 찬탄할 거리고 저리보아도 우러러 찬탄할 거리다.
고려청자를 그 가치를 모를 때는 개밥그릇으로 썼으며, 때로는 알루미늄그릇과 맞바꾸었지만 그 가치를 알고 나면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안방에 숨겨두고 애지중지한다. 이리 쳐다보고 저리 쳐다보며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아까워서 가족들에게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우러러 찬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불심(佛心)이 있는 불자로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우러러 찬탄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큰 잘못이다.
三者는 廣修供養(광수공양)이요
3. Extensive Cultivation of Offerings
셋째는 널리 공양함이요.
셋째, 널리 공양함이란,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알고 난 뒤 그 많은 사람 부처님들에게 온갖 것으로 이바지하고 공양 올리는 일이다. 살펴보면 부처님들에게 공양 올려야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의식주(衣食住)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 의식주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의료(醫療)다. 이것을 사사공양(四事供養)이라 한다. 그리고 문화적인 것과 사람대접하는 일도 훌륭한 공양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극한 가치를 깨달아 알고, 일체 존재의 이치를 깨달아 알고 있는 불교에서는 무엇보다 인간의 지극한 가치를 일깨우고, 일체 존재의 이치를 가르치는 법공양을 제일 중요한 공양이라고 가르친다.
불교는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불공(佛供)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다. 그러므로 불공의 내용과 방법과 공양물의 우열을 잘 이해하여 가려가면서 공양 올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엉뚱한 단체가 되고 만다. 불자로서 다반사(茶飯事)로 행하는 불공이기에 심사숙고하고 다시 심사숙고하여 해야 할 일이다.
四者는 懺除業障(참제업장)이요
4. Confessing Karmic Hindrances
넷째는 스스로의 업장을 참회함이요.
넷째, 스스로의 업장을 참회함이란, 불교가 하는 일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단혹(斷惑)과 성덕(成德)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즉 미혹을 제거하고 복덕을 갖추는 일이다. 업장을 참회한다는 것은 미혹을 제거하는 일이다. 미혹이 있어서 업을 짓고 업장 때문에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천수경에도 금강경에도 초발심자경문에도 업장을 참회하여 제거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것은 또한 종교가 갖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다 같은 방법으로 업장을 참회하지는 않는다.
불교에서는 처음 대하는 천수경에서는, “죄업이란 독립된 자성이 없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 마음, 하지만 그 마음도 또한 본래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알면 죄업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마치 허공에 세운 건물과 같고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과 같아서 그것은 다만 말만 있을 뿐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니듯이 그래서 죄업도 없고 마음도 없음을 알아서 두 가지가 다 텅 비어 없을 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참회다.”라고 하였다.
스스로의 업장을 참회한다는 것은 그 이치를 이와 같이 이해했을 때 제대로 된 참회라고 할 수 있다. 3조 승찬(僧璨)대사는 40대 중반의 거사로서 평생을 앓고 있는 문둥병이 자신의 죄업 때문이라고 색각하고는 2조 혜가(慧可)대사를 찾아가서 자신의 몹쓸 병이 죄업 때문이니 제발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2조 혜가대사는 당신이 죄업을 가져오면 참회시켜 주리라고 하여 문둥병 환자인 승찬거사는 그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죄업을 찾으려고 하루 종일 골똘히 궁구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는 “죄업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신의 죄업은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라면 이미 다 참회된 것이다.”라고 하여 죄업이 본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몸도 마음도 날아갈듯이 가벼워졌다. 그리고는 거사의 몸으로 부처님의 법맥(法脈)을 이어서 오늘에 이른다. 이것이 스스로의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다. 불자로서 이와 같은 이치를 모른다면 불교적 소양에 결함이 많은 사람이다.
五者는 隨喜功德(수희공덕)이요
5. Rejoicing in the Meritorious Deeds of Sentient Beings
다섯째는 남의 공덕을 따라 기뻐함이요.
다섯째, 남의 공덕을 따라 기뻐함이란, 인간으로서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의 공덕을 따라서 기뻐해줄 줄 알아야 한다. 더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순종하고 부처님을 닮아보려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덕목을 갖추고 사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속된 사람들처럼 남이 잘하고 훌륭한 점을 깎아내리거나 시기하고 질투하고 음해까지 한다면 그것은 비인간적인 처사다. 하물며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남의 공덕을 진심으로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은 아름답다. 설사 크게 들어난 공덕이 아니더라도 남이 한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찬탄하고 기뻐하는 습관을 기르고 생활화해야 한다. 사람들을 행복하게하고 세상을 그래도 살맛나게 하는 길은 경제적 소득을 높이는 것보다도 남이 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보는 습관지수와 기뻐하는 지수를 끌어올리는 일이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소득이 증대되어 1년 소득이 수백만 불이 된다하더라도 남이 하는 일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속이 상하여 일상에 기쁨이 전혀 없다면 무슨 사는 맛이 나겠는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야 무슨 기뻐할 일이 그렇게 많겠는가. 나는 한 사람이지만 남은 사람은 70억이 넘지 않은가. 남의 잘 한 점을 찾아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진심으로 기뻐한다면 순간순간이 기쁜 순간이며, 매일 매일이 기쁜 날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 보살의 아름다운 삶이다.
화엄경의 결론이자 불교의 결론인 이 보현행원품은 이렇게 간단명료하고 쉽다. 그렇다. 불교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알고 보면 지극히 상식적이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이치를 가르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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