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6

 

(8) 부처님이 세상에 오래 머무시기를 청하다

(Requesting that the Buddhas abide in the world)

復次善男子야 言請佛住世者는 所有盡法界虛空界十方三世一切佛刹極微塵數

부차 선남자     언청불주세자     소유진법계허공계 시방삼세 일체불찰 극미진수

또한 선남자여 부처님께서 세상에 머무시기를 청한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 삼세에 계시는 모든 불국토(세계)의 극히 미세한 미진과 같이 수 많은 

諸佛如來가 將欲示現般涅槃者와 及諸菩薩聲聞緣覺有學無學과

제불여래      장욕시현 반열반자    급제보살 성문연각 유학무학

부처님께서 장차 반열반에 드심을 나타내 보이시고자 하시거나,

모든 보살과 성문과 연각과 배우는 이=有學와 배울 것 없는 이=無學과 

乃至一切諸善知識을 我悉勸請하야 莫入涅槃하야

내지일체 제선지식     아실권청        막입열반 

내지 일체의 모든 선지식들에게 내가 모두 권하여 열반에 드시지 말고, 

經於一切佛刹極微塵數劫토록 爲欲利樂一切衆生이니

경어일체불찰 극미진수겁        위욕이락 일체중생

모든 불국토의 미세한 미진과 같이 수 많은 겁을 지나도록

일체중생들을 이익되고 즐겁게하여 주시기를 청함이니,

如是虛空界盡하며 衆生界盡하며 衆生業盡하며 衆生煩惱盡하야도 我此勸請은

여시허공계진         중생계진          중생업진         중생번뇌진           아차권청 

이와 같이 하기를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들의 업이 다하고,

중생들의 번뇌가 다 할지라도, 나의 이러한 권하여 청함은 다함이 없나니,

無有窮盡이니 念念相續하야 無有間斷하야 身語意業이 無有疲厭이니라

무유궁진          염염상속         무유간단         신어의업     무유피염.

염념이 계속하여 잠깐도 끊어짐이 없건만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은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음이니라.

 

그 많고 많은 사람 부처님들과 일체 생명 부처님들의 건강을 염려하고 보살피며, 오래 오래 사시도록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돌보아 드리고 의료와 약을 제공하는 일은 아름다운 삶을 꿈꾸는 보살의 필수 덕목이다. 범망경(梵網經)에는 병든 사람을 보고 간병(看病)하지 않으면 보살계를 범하는 것이라고까지 경고하였다. 

어떤 생명이든 생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극히 존귀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죽음을 앞 둔 어떤 사형수가 남긴 글이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며 우리들을 감동시킨다. 감방 한 모퉁이에서 꾸물대는 작은 벌레를 보고 “차라리 저 보잘 것 없는 미물이 되어서라도 살 수만 있다면...”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을 살려주는 방생(放生)을 권장한다. 방생을 하면 내 생명도 건강해지고 연장이 된다고 가르친다. 미물까지도 방생을 하여 죽을 목숨을 살리는데 하물며 사람 부처님의 병을 낫게 하고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 수 있게 하는데 구체적인 도움을 준다면 그것은 진정 큰 복이 되고 아름다운 보살의 삶이 되리라. 한두 번으 하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허공계가 끝나고, 중생계가 끝나고, 중생의 업이 끝나고, 중생의 번뇌가 끝날 때까지 내가 가진 모든 재산 모든 능력 모든 시간을 다 기우려서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이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9)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다(Dedication to practicing Dharma)

復次善男子야 言常隨佛學者는 如此娑婆世界毘盧遮那如來가

부차선남자      언상수불학자     여차사바세계 비로자나여래 

다시 또 선남자여, 부처님을 따라서 배운다는 것은 이 사바세계의 비로자나부처님께서 

從初發心으로 精進不退하사 以不可說不可說身命으로 而爲布施하며

종초발심          정진불퇴         이불가설불가설신명          이위보시 

초발심부터 정진하여 물러나지 않으시고, 불가설 불가설의 몸과 목숨으로 보시하였으며,

剝皮爲紙하고 析骨爲筆하고 刺血爲墨하야 書寫經典을 積如須彌하시니

박피위지          석골위필        자혈위묵          서사경전      적여수미  剝 벗길 박, 

살 가죽을 벗겨 종이로 삼고, 뼈를 발라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

경전을 베껴 쓰기를 수미산 높이같이 하였으니,   

書寫서사=글씨를 원본과 똑같게 베낌

爲重法故로 不惜身命이어든 何況王位와 城邑聚落과 宮殿園林과

위중법고       불석신명            하황왕위     성읍취락    궁전원림 

법을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으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니, 하물며 임금의 자리나

성읍, 취락, 궁전, 정원 등의 

一切所有와 及餘種種難行苦行이리오

일체소유      급여종종 난행고행

모든 가진 바와 그 외의 갖가지 난행과 고행은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닮고자 하는 이가 부처님이다. 막연하게 부처님이 좋고 부처님이 살아 온 생애가 좋고 그 생애 중에서 하나하나가 모두 감동적이어서 좋다. 그래서 부처님이 하신 일이면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삶이 있게 된다.

무엇보다 부처님으로서 부처님이 된 것은 보시를 많이 행했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6바라밀에도 그 첫째가 보시며, 사섭법(四攝法) 중에서도 그 첫째가 보시다. 무엇을 베풀든 무상으로 베풀어 주는 일은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 그 나라의 모든 사람과 재물과 산해진미가 모두 임금의 것이다. 그러나 시골의 촌부가 정성을 드려서 장만해온 보잘것없는 곶감 몇 개라도 그것을 갖다 준 사람이 어여쁘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임금의 자리에서 곶감 몇 개가 무엇이 그리 귀하겠는가 만은 주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베푸는 일은 그와 같이 중요하다.

법을 아껴서 보시하지 못한다면 법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며 성불이니 견성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공염불에 불과하다.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수행자의 자세가 아니고 아름다운 보살의 삶이 아니다.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법을 위해서 보시하는 일을 연습하다보면 자신의 재산도 아끼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서 법을 펴는 일에 큰 보시도 할 수 있게 되며 아름다운 보살행의 실천도 어렵지 않은 때가 멀지 않을 것이다.

 

乃至樹下에 成大菩提하사 示種種神通하며 起種種變化하며

내지수하      성대보리         시종종신통          기종종변화 

또한 보리수 아래에서 대보리(큰 깨달음)를 이루심과 갖가지 신통을 보이고,

갖가지의 변화를 일으키고, 

現種種佛身하사 處種種衆會하사대 或處一切諸大菩薩衆會道場하며

현종종불신          처종종중회            혹처일체 제대보살 중회도량 

갖가지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시어 온갖 대중이 모인 법회에 계시나니,

혹은 일체 모든 대보살 대중 법회 도량에 계시고, 

或處聲聞及辟支佛衆會道場하며 或處轉輪聖王小王眷屬衆會道場하며

혹처성문 급벽지불 중회도량          혹처전륜성왕 소왕권속 중회도량 

혹은 성문과 벽지불의 대중 법회 도량에 계시고,

혹은 전륜성왕과 소왕들이나 그 권속들의 대중 법회 도량에 계시고,

或處刹利及婆羅門長者居士衆會道場하며 乃至或處天龍八部人非人等衆會道場하사

혹처찰리 급바라문 장자거사 중회도량        내지혹처천룡팔부 인비인등 증회도량  

혹은 찰제리와 바라문과 장자와 거사들의 대중 법회 도량에 계시고,

내지 혹은 천신들과 용과 팔부 신중과

사람인 듯 사람 아닌 듯한 이들이 모인 도량에까지 계시었나니,

處於如是種種衆會하야 以圓滿音으로 如大雷震하사 隨其樂欲하야 成熟衆生하며

처어여시종종중회          이원만음         여대뢰진        수기낙욕         성숙중생 

이와 같은 갖가지 대중 법회에서 원만한 음성이 커다란 천둥소리와 같으며,

그들의  즐겨하고 좋아하는바에 따라 중생들을 성숙시키고, 

乃至示現入於涅槃이어시든 如是一切를 我皆隨學하니라

내지시현 입어열반                여시일체      아개수학

마침내 열반에 듦을 보이시는, 이와 같은 온갖 일을 내가 모두 수순하여 배웠느니라.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일 중에서 깨달음을 이룬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어떤 방법이든 인생과 일체 존재에 대한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깨달음이라는 밝은 안목이 없다면 불교를 배우고 공부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깨달음의 안목을 갖추고 나면 세상이 온통 꽃과 금은보화로 꾸며져 있는 것처럼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보인다. 화엄경 첫머리에도 “부처님이 처음 바른 깨달음을 이루고 나니 그 땅은 견고하여 모두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졌더라.”라고 하였다.

여러 가지 신통과 변화와 몸을 나타내는 등등의 일은 모두가 깨달음의 안목에 의한 긍정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깨달음의 안목은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많은 대중들이 모인 도량인 보살들이 모인 도량과 성문들이 모인 도량과 벽지불들이 모인 도량과 전륜왕, 작은 왕, 찰제리와 바라문과 장자와 거사들이 모인 도량이나, 내지 천신들과 용과 팔부 신중과 사람인 듯 사람 아닌 듯 한 이들이 모인 도량에 법을 설하여 중생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일이다. 부처님은 6년간의 고행과 49년간의 설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화하였다. 위에서 열거한 갖가지의 도량들이 일생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가르침을 펴고 깨우침을 전하였던 그 법석(法席)이다.

부처님의 일생에서 만약 설법하신 것을 뺀다면 아무 것도 없다. 팔만대장경이라는 위대한 가르침도 수많은 제자들도 모두가 설법을 통하여 성취한 업적이다. 부처님을 따라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배운 것만치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특히 불자(佛子)들의 가장 큰 약점이 남을 가르쳐주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겸손이 아니라 불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일이며, 그동안 들은 법문에 대한 빚을 지는 일이다.

부처님에게 정성을 다하여 불공을 올리는 일은 몇 푼의 금전과 공양미와 꽃이나 향이나 초 등등으로써 할 일을 다 하였다고 생각해서는 부족하다. 부처님의 식성은 법공양이다.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일 중에 가장 하기 쉽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설법이다. 세상과 인생에 대해서 참다운 이치를 사람들에게 깨우쳐주는 일은 보살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일이다. 법을 전하는데 있어서 경전의 가르침이 어려우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인과의 법칙만이라도 가르치면 될 것이다.

마승(馬勝)비구가 사리불과 목건련을 교화할 때에도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소멸한다. 우리 부처님 큰 사문(沙門)께서는 항상 이와 같은 이치를 설하십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존재의 이치에 눈을 뜨게 하여 부처님께 귀의하지 않았던가.

 

如今世尊毘盧遮那하야 如是盡法界虛空界十方三世一切佛刹所有塵中

여금세존 비로자나        여시진법계허공계 시방삼세 일체불찰 소유진중

지금의 비로자나 세존과 같이 이와 같은 법계와 허공계가 다하도록

시방 삼세 모든 불국토에 있는 미진 속의 

一切如來도 皆亦如是어든 於念念中에 我皆隨學이니

일체여래      개역여시         어염염중     아개수학

모든 부처님들 또한 다 이와 같이 하신 것을 염념 가운데 내가 모두 수순하여 배우나니,

如是虛空界盡하며 衆生界盡하며 衆生業盡하며 衆生煩惱盡하야도 我此隨學은

여시허공계진           중생계진        중생업진          중생번뇌진          아차수학 

이와 같이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들의 업이 다하고,

중생들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나의 이러한 수순하여 배움은 

無有窮盡이니 念念相續하야 無有間斷하야 身語意業이 無有疲厭이니라

무유궁진          염염상속         무유간단        신어의업      무유피염

다함이 없나니, 염념이 계속되어 끊어짐이 없이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피로하거나 싫어함이 없음이니라.

 

비로자나 부처님이라는 이름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이야기 하였고, 그 생애를 모두 따라 배운다고 하였다. 불교의 경전에는 부처님이 무수히 등장하나 그것은 모두가 경전상에 등장하는 부처님이다. 그 여러 부처님들의 모델은 석가모니부처님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 그대로 과거의 부처님도 미래의 부처님도 다 그와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예불문에도 “우리들의 근본스승[是我本師]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경전상에 등장하는 모든 부처님들의 근본 부처님인 셈이다. 아무튼 그 많고 많은 부처님들의 아름다운 삶을 따라 배우는 것은 보살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화엄경의 근본정신이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 이 셋이 차별 없이 같다고 하였으니 부처님을 보는 시각이 보다 더 넓어야하고 전체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큰 눈과 넓은 안목으로 모든 사람, 모든 생명, 일체 존재에게서 배울 것을 찾아 낱낱이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특별한 부처님만 찾는 생각도 잘못이지만 그와 같은 특별한 부처님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 사람들에게서 훌륭한 점을 배우는 일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심지어 바위에게는 그 굳은 것을 배우고, 소나무에게는 늘 푸른 지조와 고상함을 배우고, 대나무에게는 그 곧은 것을 배우고 바다에게는 드넓음을 배우고, 허공에게는 텅 빈 마음을 배우고, 흘러가는 구름에게는 그 변화를 배운다. 눈을 뜨고 배울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낱낱이 배울 점이요 곳곳이 스승이다.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배우기를 청한 일도 또한 그와 같은 맥락이리라.

이러한 마음가짐을 하루나 한 달로 끝나지 않고 허공계가 끝나고, 중생계가 끝나고, 중생의 업이 끝나고, 중생의 번뇌가 끝나더라도 나의 이 따라서 배우는 일은 끝나지 않고 염념이 계속하여야 할 것이다. 늘 남을 따라 배우는 자세와 같은 아름다움이 또 있을까.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려는 보살로서는 필수적인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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