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淨佛國土品 第八十二 卷第九十二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2. 정불국토품(淨佛國土品) 풀이함  2

 

須菩提白佛言:“世尊!若菩提卽是道、道卽是菩提者,今菩薩未作佛,應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云何說諸佛、多陁阿伽度、阿羅呵、三藐三佛陁有三十二相、八十隨形好、十力、四無所畏、四無㝵智、十八不共法、大慈大悲?”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리가 곧 도인 보리즉시도(菩提卽是道)요, 도가 곧 보리인 도즉시보리(道卽是菩提)라면,

보살이 아직 부처가 되지 않았을 때에도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할 것이거늘, 

어떻게 다타아나가도(多陀阿伽度)ㆍ아라하(阿羅訶)ㆍ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이신 모든 부처님에게는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와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과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있는 것인지요?”


佛告須菩提:“於汝意云何?佛得菩提不?”

“不也!世尊!佛不得菩提。何以故?佛卽是菩提,菩提卽是佛。”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처님은 보리를 얻은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보리를 얻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이  보리인 불즉시보리(佛卽是菩提)요, 

보리가  부처님인 보리즉시불(菩提卽是佛)이기 때문입니다.”


“如須菩提所問:‘菩薩時亦應得菩提!

菩提!是菩薩摩訶薩具足六波羅蜜、三十七助道法,具足佛十力、四無所畏、四無㝵智、十八不共法,具足住如金剛三昧,用一念相應慧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時名爲佛,一切法中得自在。”

“수보리야, 그대가 물은 바와 같아서 보살일 때에도 역시 보리를 얻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6바라밀과 37조도법을 완전하게 갖추고,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 4무애지와 18불공법을 완전하게 갖추며,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를 완전하게 갖추어  생각의 일념(一念)에 상응하는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 이를 부처님이라 하나니, 일체 가운데서 자재(自在)하게 되는 것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云何菩薩摩訶薩淨佛國土?”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지요?”

 

佛言:“有菩薩從初發意已來,自除身麤業、除口麤業、除意麤業,亦淨他人身、口、意麤業。”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낸 초발의에서부터 스스로가 몸의 거친 업인 신추업(身麤業)을 제거하고, 입의 거친 업인 구추업(口麤業)을 제거하며, 뜻의 거친 업인 의추업(意麤業)을 제거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의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추업(麤業)을 깨끗하게 하여 주느니라.”


“世尊!何等是菩薩摩訶薩身麤業、口麤業、意麤業?”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을 보살마하살의 몸의 거친 업인 신추업(身麤業)이라 하고, 입의 거친 업인 구추업(口麤業)이라 하며, 뜻의 거친 업인 의추업(意麤業)이라 하는지요?”


佛告須菩提:“不善業,若殺生乃至邪見,是名菩薩摩訶薩身、口、意麤業。

復次,須菩提!慳貪心、破戒心、瞋心、懈怠心、亂心、愚癡心,是名菩薩意麤業。

復次,戒不淨,是名菩薩身、口麤業。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살생(殺生) 내지는 삿된 사견(邪見)의 착하지 못한 불선업(不善業)을 바로 보살마하살의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추업(麤業)이라 하느니라.

또한 수보리야, 간탐하는 간탐심(慳貪心)과 계율을 깨뜨리는 파계심(破戒心)과 성을 내는 진심(瞋心) 게으른 해태심(懈怠心) 산란한 난심(亂心) 어리석은 우치심(愚癡心) 바로 보살의 뜻의 거친 업인 의추업(意麤業)이라 하며, 

 계율이 깨끗하지 못한 것을 바로 보살의 몸과 입의 거친 업인 추업(麤業)이라 하느니라.


復次,須菩提!若菩薩遠離四念處行,是名菩薩麤業;遠離四正勤、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分、八聖道分、空三昧、無相、無作三昧,亦名菩薩麤業。

復次,須菩提!菩薩摩訶薩貪須陁洹果,乃至貪阿羅漢果證、辟支佛道,是名菩薩摩訶薩麤業。”

또한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4념처(念處)의 행을 멀리 여의면, 이를 바로 보살의 거친 추업(麤業)이라 하며,

4정근(正勤)과 4여의족(如意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분(覺分)과 8성도분(聖道分)과 공삼매(空三昧)와 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삼매를 멀리 여의는  또한 보살의 거친 추업(麤業)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수다원의 과위를 탐내고 나아가 아라한의 과위를 탐내면서 벽지불의 도를 증득한다면, 이것을 바로 보살마하살의 거친 추업(麤業)이라 하느니라.”


▶論.釋曰:上來須菩提常種種問空法,以時會疑其己體寂滅無戲論法猶復多問,是以不問而心念。

復次,有菩薩及諸天深入禪定,不好語言而欲得法利,是故須菩提不發言而心念。

▷논. 해석한다. 위에서부터 수보리 존자는 언제나 갖가지로 공한법(空法)을 여쭈는 것이니,

그 때에 모임에 있는 대중들에게 의혹이 있는 까닭에, 그는 이미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이며, 희론이 없는 무희론법(無戱論法)을 체득하였음에도 오히려 다시 많은 질문을 하는 것으로, 여쭈 않을 때에도 마음으로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어떤 보살과 하늘들은 선정에 깊이 들어 있으면서 말하기는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법의 이익을 얻고자므로, 수보리 존자는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마음으로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問曰:須菩提雖無言,而世尊以言答?

묻나니, 수보리 존자는 말이 없었는데, 세존께서는 말씀으로 대답하신 것입니까?


答曰:佛身色,視無厭足;如色無厭,聲亦如是,雖語而不妨細禪定行,是故佛以言答。

復次,佛安立寂滅相,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中住,不分別一切法若善、若不善等;衆生有疑而問,佛隨所問、所念而答,是故不與須菩提同。

답하나니, 부처님의 색신(身色)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질 않으니, 마치 빛깔(色)에 싫증냄이 없는 것과 같이, 음성에 있어서도 역시 이와 같으니, 비록 말씀을 하실지라도 미세한 선정의 행에 방해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말씀으로 대답하신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적멸상(寂滅相) 편안히 안립하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에 머물러 일체법의 착한 것과 착하지 못한  등을 분별하지 않으셨으며, 

중생이 의심하면서 여쭈면, 부처님께서는 그가 묻는 것과 생각하고 있는 것을 따라 대답하셨으니,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와는 같지 않은 것이다.


須菩提聞是六波羅蜜等諸法甚深義,不能得其邊,

是故問:“何等是菩薩道?行是道,如淸淨無所著六波羅蜜等諸善法莊嚴?”

수보리 존자는  6바라밀 등의 제법의 매우 깊은 이치를 들으면서도  끝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 보살의 도이기에  도를 행하면서 깨끗하고 집착없는 청정무소작(淸淨無所著)의 6바라밀 등의 착한법을 장엄하는 것입니까?”라고 여쭌 것이다.


佛知其意,於須菩提所益雖少,爲增益諸菩薩故,答:“六波羅蜜等是菩薩道。”

부처님께서는 그의 뜻을 아시고 비록 수보리 존자에게는 이로움이 적을지라도 모든 보살들을 더욱 이롭게 하기 위하여 대답하시기를 “6바라밀 등이 바로 보살의 도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六波羅蜜是菩薩初發心道;次行四禪、八背捨、九次第定及三十七道品,但求涅槃;十八空、佛十力等微細,但爲求佛道。

六波羅蜜道,多爲衆生故;三十七品等,但求涅槃;十八空等,於涅槃中出過聲聞、辟支佛地,入菩薩位道。是三種,皆是生身菩薩所行。所以者何?分別諸法故。

6바라밀은 바로 보살이 처음발심할 때의 도(道)이며,

그 다음으로 4선(禪)과 8배사와 9차제정  37도품(道品)을 행하는 것은 다만 열반을 구하는 것일 뿐이며,

18공(空)과 부처님의 10력 등의 미세한 법은 부처님의도만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6바라밀의 도는 거의 모두가 중생들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요,

37품 등은 다만 열반을 구하는 것일 뿐이며,

18공 등은 열반 가운데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초월하여 보살 지위의 도에 들게 하는 것이니,

  가지는 모두가 생신(生身) 보살이 행하는 것이니, 왜냐하면,법을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今又一切法皆是菩薩道,是法性生身菩薩所行,不見諸法有好惡,安立諸法平等相故。

此中佛自說因緣:“菩薩應學一切法,若一法不學,則不能得一切種智。”

學一切法者,用一切種門,思惟、籌量、修觀、通達。

다시 일체 모두는 보살의 도이니,  법성(法性)은 생신의 보살이 행하는 것으로, 제법에 좋고 나쁨이 있음을 보지 않나니, 제법의 평등한 평등상(平等相) 편안히 안립(安立)한 까닭이다.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보살은 마땅히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하나의법이라도 배우지 않으면 일체종지를 얻을  없다”고 하셨으니,

‘일체법을 배운다는 학일체법(學一切法)’이라 함이란, 일체 종류의 방편문으로써 사유하고 헤아리며 닦고 관찰하여 통달하는 것이다.


須菩提白佛:“若一切法一相,所謂空,云何菩薩學一切法?
將無於無戲論相法中作戲論耶?

所謂此彼諸法。”略說是戲論相:此東、彼西,是上、是下,是常、是無常,是實、是虛、是世閒、是出世閒,乃至是二乘法、是佛法。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약 일체법이 하나의 일상(一相)이라 이른바 공(空)한 것이라면, 보살이 어떻게 일체법을 배우는지요? 

이는 희론이 없는 무희론상(無戲論相) 법에서 희론을 하시는 것이 아닌지요?”라고 하였으니, 이른바법에 대하여 ‘이것이다, 저것이다’ 한다는 것이니, 

 희론의 상(相)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것은 동쪽이다, 저것은 서쪽이다, 이것은 위다, 이것은 아래이다, 이것은 항상이다, 이것은 무상하다, 이것은 진실이다, 이것은 거짓이다, 이것은 세간이다, 이것은 출세간이다, 나아가 이것은 2승의 법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법이다”고 하는 것이다.


佛可具說:“一切法空相。若法實定有不空者,卽是無生無滅,無生無滅故無四諦,無四諦故無佛、法、僧寶,如是三寶等諸法皆壞。

今諸法實空,乃至空相亦空;衆生愚癡顚倒故著。是故於衆生中起悲心,欲拔出故,求佛身力;欲令衆生信受其語,捨顚倒,入諸法實相。

是故菩薩雖知諸法空,而爲利益衆生分別說;若衆生自知諸法空,菩薩但自住空相中,不須學分別一切法。”

부처님께서 그의 말을 인가하시면서 “일체법은 공한 공상(空相)이니, 만약 법이 실로 일정하여 공하지 않다면, 그것은 곧 생겨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인 것이다. 

무생무멸(無生無滅)이기 때문에제(四諦)도 없게 되고, 사제가 없기 때문에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의 삼보도 없게 되나니, 만약 이와 같다면, 삼보(三寶) 등의법은 모두 파괴되는 것이다.

지금 제법은 진실로 공한 실공(實空)이고 나아가 공한 공상(空相)마저 공한 것이지만, 

중생이 어리석고 뒤바뀐 까닭에 집착하는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비심(悲心) 일으켜, 그들을 구하고자 부처님 신력(身力) 구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말씀을 믿고 받게 하며, 뒤바뀜을 버리고법의 실상에 들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비록법이 공한 법공(法空)이라는 것을 알지라도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분별하여하는 것이니, 

만약 중생들 스스로가 제법이 법공(法空)이라는 것을 안다면, 보살은 다만 스스로 공한 공상(空相) 가운데에 머무를 뿐, 일체법을 배우고 분별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다.


菩薩行菩薩道時,從初發意已來,如是思惟:“一切法無定實性,但從因緣和合起;
是衆因緣亦各各從和合起,乃至到畢竟空。畢竟空唯是一法實;餘者無性,故皆虛誑。我從無始世來,著是虛誑法,於六道中厭受苦惱。我今是三世十方佛子,般若是我母,今不應復隨逐虛誑法。”

是故菩薩乃至畢竟空中亦不著,何況餘法,所謂檀波羅蜜等!

보살이 보살도를 행할 때, 처음 뜻을 낸 초발의에서부터 생각하기를 ‘일체법은 정해진 진실한 성품이 없는 무정실성(無定實性)이고, 다만 인연의 화합으로부터 생기는 것일 뿐이며,  모든 인연 또한 저마다의 화합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이에 필경공에 도달하게 되나니, 오직 필경공이라는 이 하나의법만이 진실이요,  밖의 다른 것은 무성(無性)이 때문에 모두가 거짓인 것이다.

나는 비롯함이 없는 무시(無始)의 세상으로부터  거짓된 법에 집착하여 6도(道) 가운데에서, 싫어하면서도 고통을 받았었다. 

나는 이제  3세(世)와 시방(方)의 부처님의 제자인 불자(佛子)요, 반야는 바로 나의 어머니이시니, 지금부터 다시는 거짓된 허광법(虛誑法)을 따르지 않으리라.’고 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나아가 필경공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집착하지 않거늘, 하물며  밖의  즉, 단바라밀 등이겠는가?”라고 하셨다.


爾時,菩薩照明菩薩道,其心安隱,自念:“我但斷著心,道自然至。”

知是事已,念衆生深著世閒,而畢竟空亦空、無性、無有住處,衆生難可信受。

爲令衆生信受是法故,學一切法,修行生起是度衆生方便法。

그 때에 보살은 보살도를 밝게 비추며 그 마음이 안온하여지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다만 집착하는 착심(著心)만을 끊으면 도(道)에 저절로 이르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것을 알고 나서는 생각하기를 ‘중생은 세간에 깊이 집착하지만 필경공일 뿐이며, 또한 그 공도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라서 머무르는 곳이 없으므로 중생들은 믿어 받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중생으로 하여금 이 법을 믿고 받게 하기 위하여 일체법을 배우는 것이다.

수행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법(方便法)인 것이다.

大智度論  釋淨佛國土品 第八十二 卷第九十二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2. 정불국토품(淨佛國土品) 풀이함  1

 

▶經. 爾時,須菩提作是念:“何等是菩薩摩訶薩道?菩薩住是道,能作如是大莊嚴?”

▷경. 그 때에 수보리 존자가, ‘어떠한 것이 보살마하살의 도(道)라서, 보살은 이 도에 머무르면서 이와 같이 크게 대장엄(大莊嚴)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였다.

 

佛知須菩提心所念,告須菩提:“六波羅蜜是菩薩摩訶薩道,三十七助道法是菩薩摩訶薩道,十八空是菩薩摩訶薩道,八背捨、九次第定是菩薩摩訶薩道,佛十力乃至十八不共法是菩薩摩訶薩道,一切法亦是菩薩摩訶薩道。

須菩提!於汝意云何?頗有法菩薩所不學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

須菩提!無有法菩薩所不應學者。何以故?菩薩不學一切法,不能得一切種智。”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6바라밀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도(道)요, 37조도법(助道法)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도(道)이며, 18공(空)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도(道)요, 8배사(背捨)와 9차제정(次第定)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도(道)이며, 부처님의 10력(力) 내지는 18불공법(不共法)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도(道)요, 일체법 역시 보살마하살의 도(道)이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 보살이 배우지 않는 어떠한 법이 있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보살이 배우지 않아도 되는 어떠한 법도 없나니, 왜냐 하면 보살이 일체법을 배우지 않으면 일체종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一切法空,云何言菩薩學一切法?將無世尊無戲論中作戲論耶?所謂是此、是彼,是世閒法、是出世閒法,是有漏法、是無漏法,是有爲法、是無爲法,是凡夫人法、是阿羅漢法、是辟支佛法、是佛法!”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이 공하다면, 보살이 어떻게 일체법을 배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세존께서는 희론이 없는 가운데서 희론을 짓고 계시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이른바 ‘이것은 이것이다, 이것은 저것이다, 이것은 세간법이다, 이것은 출세간법이다, 이것은 유루법이다, 이것은 무루법이다, 이것은 유위법이다, 이것은 무위법이다, 이것은 범부인의 법이다, 이것은 아라한의 법이다, 이것은 벽지불의 법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불법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佛告須菩提:“如是!如是!一切法實空。

須菩提!若一切法不空者,菩薩摩訶薩不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今一切法實空故,菩薩摩訶薩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如汝所言,若一切法空,將無佛於無戲論中作戲論,分別此彼,是世閒法、是出世閒法,乃至是佛法?

須菩提!若世閒衆生知一切法空,菩薩摩訶薩不學一切法、得一切種智。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일체법은 실로 공(空)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약 일체법이 공하지 않은 불공(不空)이라면,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지금 일체법이 실로 공하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만약 일체법이 공하다면, 부처님이 희론이 없는 가운데서 희론을 지어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분별하고 '이것은 세간법이다. 이것은 출세간법이다. 나아가 이것은 부처님의 불법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수보리야, 만약 세간의 중생들이 일체법이 공(空)이라는 것을 안다면 보살마하살은 일체법을 배워서 일체종지를 얻지도 않을 것이니라.

 

須菩提!今衆生實不知一切法空,以是故,菩薩摩訶薩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已,分別諸法爲衆生說。

須菩提!於是菩薩道,從初已來,應如是思惟:‘一切諸法中定性不可得,但從和合因緣起法故有名字諸法。我當思惟諸法實性無所著 若六波羅蜜性、若三十七助道法、若須陁洹果乃至阿羅漢果、若辟支佛道、若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何以故?一切法、一切法性空,空不著空,空亦不可得,何況空中有著!’

수보리야, 지금 중생들은 실로 일체법이 공(空)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뒤에 제법을 분별하여서 중생들을 위하여 설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러한 보살의 도(道)에서 처음부터 마땅히 사유하기를 ‘일체법 가운데에서는 정해진 성품의 정성(定性)을 얻을 수 없으나,  다만 화합한 인연(因緣)으로 생기는 법이기 때문에 이름이 있을 뿐이다.

나는 제법에서 제법의 진실한 성품인 실성(實性)을 사유하면서 6바라밀의 성(性)나 37조도법(助道法)에서나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에서나 벽지불의 도에서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리라’고 해야 하나니,

왜냐 하면, 일체법은 일체법의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기 때문이니, 공은 공에 집착하지 않고, 그 공 또한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공한 가운데에서 집착함이겠는가?

 

須菩提!菩薩摩訶薩如是思惟,不著一切法而學一切法。住是學中,觀衆生心行 是衆生心在何處行?

知衆生虛妄不實中行。是時,菩薩作是念:‘是衆生著不實虛妄法,易度耳!’

是時,菩薩摩訶薩住般若波羅蜜時,以方便力故,如是教化言:‘汝諸衆生!當行布施,可得饒財,亦莫恃布施果報而自高。何以故?是中無堅實法。持戒、禪定、智慧,亦如是。

諸衆生!行是法,可得須陁洹果乃至阿羅漢果、辟支佛道、佛道 莫念有是法!’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사유하면서,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으나 일체법을 배우며,

이 배움의 학(學) 가운데에서 머물러 중생들의 마음의 작용인 심행(心行)을 관찰하여,

‘이 중생의 마음이 어느 곳에 있으면서 작용하는 것인가?’라고 자세히 살피니, 중생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은 가운데서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느니라!

이 때에 보살이 생각하기를 ‘이 중생은 진실하지 않고 허망한 법에 집착하고 있으므로 제도하기 쉽겠다’고 하며,

이 때에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방편력으로써 이와 같이 그들을 교화하며 말하기를

‘그대 중생들이여, 보시를 행하여 재물이 넉넉하여 졌다 하여서 역시 보시의 과보를 믿고 스스로가 높은 체하지 마시요!

왜냐 하면, 이 가운데에는 견실(堅實)한 법이 없기 때문이니, 지계와 선정과 지혜 또한 그러한 것이오.

여러 중생들이여, 이러한 법을 행하여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부처님의 불도를 얻었을지라도 이러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마시오’고 하느니라.

 

如是教化,行菩薩道而無所著,是中無有堅實故。若如是教化,是名行菩薩道。於諸法無所著故。

何以故?一切法無所著相,以性無故、性空故。

須菩提!是菩薩摩訶薩如是行菩薩道時,無所住。是菩薩用不住法故,行檀波羅蜜亦不住是中,行尸羅波羅蜜亦不住是中,行羼提波羅蜜亦不住是中,行毘梨耶波羅蜜亦不住是中,行禪波羅蜜亦不住是中,行般若波羅蜜亦不住是中。行初禪亦不住是中。

이와 같이 교화하면서 보살도를 행하나 집착함이 없나니, 이 가운데에는 견실(堅實)한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약 이와 같이 교화한다면 이를 바로 보살도를 행하는 것이라 하나니, 제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일체법에는 집착할 착상(著相)이 없기 때문이요,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기 때문이며,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보살도를 행할 때, 머무르는 바가 없는 무소주(無所住)이며,

이 보살은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써 단바라밀을 행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고, 시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찬제바라밀을 행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비리야 바라밀을 행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선바라밀을 행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초선(初禪)을 행하면서 그 안에 머무르지 않느니라.

 

何以故?是初禪初禪相空,行禪者亦空,所用法亦空;第二、第三、第四禪亦如是。慈悲喜捨、四無色定、八背捨、九次第定亦如是。得須陁洹果亦不住是中,得斯陁含果、阿那含果、阿羅漢果亦不住是中,得辟支佛道亦不住是中。”

왜냐 하면, 이 초선은 초선(初禪)의 상(相)이 공(空)하고, 선을 행하는 행선자(行禪者)도 또한 공하며, 소용되는 법 또한 공하기 때문이니, 제2ㆍ제3ㆍ제4선(禪)도 또한 이와 같으며, 자(慈)ㆍ비(悲)ㆍ희(憙)ㆍ사(捨)와 4무색정(無色定)과 8배사(背捨)와 9차제정(次第定)도 또한 이와 같으니,

수다원의 과위를 얻어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고,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를 얻어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벽지불의 도를 얻어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何因緣故不住是中?”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인연으로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는지요?”

 

佛言:“二因緣故,不住是中。何等二?

一者、諸道果性空,無住處,亦無所用法,亦無住者;二者、不以少事爲足,作是念:‘我不應不得須陁洹果,我必應當得須陁洹果,我但不應是中住;乃至辟支佛道,我不應不得,我必應當得,我但不應是中住。乃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應住。何以故?我從初發意已來,更無餘心,一心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가지의 이인연(二因緣) 때문에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나니, 어떠한 것이 두 가지의 인연인가?

첫째는 모든 도의 과위인 도과(道果)는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라서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주처(無住處)이고, 또한 소용되는 법도 없으며 머무르는 이도 없느니라.

둘째는 적은 일로써 만족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수다원의 과위를 얻지 못하면 안 된다. 나는 반드시 수다원의 과위를 얻되 다만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나는 벽지불의 도를 얻지 못하면 안 되나니, 나는 반드시 얻되 다만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얻되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내가 처음 뜻을 낸 초발의에서부터, 다시는 그 밖의 다른 마음이 없는 일심(一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하는 것이니라.

 

須菩提!菩薩一心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中,遠離餘心,所作身、口、意業皆應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是菩薩摩訶薩住是一心,能生菩提道。”

수보리야, 보살이 일심(一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향할 뿐, 다른 마음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몸ㆍ입ㆍ뜻으로 짓는 업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응하느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이 일심(一心)에 머무르면서 능히 보리도(菩提道)를 내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一切諸法不生,云何菩薩摩訶薩能生菩提道?”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이 나지 않는 불생(不生)이라면,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보리도를 낼 수 있는지요?”

 

佛告須菩提:“如是!如是!一切法無生。云何無生?無所作、無所起者,一切法不生故。”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일체법은 나는 것이 없는 무생(無生)이니라.

어떠한 것을 무생(無生)이라 하는가? 짓는 것이 없는 무소작(無所作)이고, 생기는 것도 없는 무소기(無所起)가 그것이니, 일체법이 불생(不生)이기 때문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有佛、無佛,諸法法相不常住耶?”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제법의 법상(法相)은 항상 머무르는 것이 아닌지요?”

 

佛言:“如是!如是!有佛、無佛,是諸法法相常住。以衆生不知是法住法相,爲是故,菩薩摩訶薩爲衆生故生菩提道,用是道拔出衆生生死。”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이 제법의 법상(法相)은 항상 머물러 있나니,

중생이 이 법이 머무르는 법상(法相)을 모르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중생들을 위하여 보리도를 내며, 이 도로써 중생들을 생사에서 구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用生道得菩提?” 佛言:“不也!”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나는 생(生)의 도(道)로써 보리를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世尊!用不生道得菩提?” 佛言:“不也!”

“세존이시여, 나지 않는 불생(不生)의 도로써 보리를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世尊!用不生非不生道得菩提?”佛言:“不也!”

“세존이시여, 나지도 않고, 나지 않는 것도 아닌 도로써 보리를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須菩提言:“世尊!云何當得菩提?”

佛言:“非用道得菩提,亦不用非道得菩提。須菩提!菩提卽是道,道卽是菩提。”

수보리 존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리를 얻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도(道)로써 보리를 얻는 것도 아니고, 또한 도가 아닌 비도(非道)로써 보리를 얻는 것도 아니니,

수보리야, 보리가 곧 도인 보리즉시도(菩提卽是道)요, 도가 곧 보리인 도즉시보리(道卽是菩提)이니라.”

大智度論  釋照明品  第八十一  卷第九十一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1. 조명품(照明品) 풀이함  5

 

如是菩薩方便力故教化衆生,令得須陁洹果乃至佛道。是菩薩自行布施,亦教衆生布施。若不自施,或有人言:“若施是好法,何不自行?”是故菩薩先自布施。

復次,菩薩深愛善法,布施是初門,是故行是布施。又菩薩深慈悲衆生,以慈悲心雖大,而不能充滿衆生,是故先行布施,令其心濡,可以引導。

이와 같이 보살은 방편력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부처님의 도를 얻게 하며, 

 보살은 스스로가 보시를 행하고 또한 중생들에게도 보시하도록 가르쳐 주나니,

만약  자신이 보시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보시하는 것이 좋은 법이라면 어찌하여 그 자신은 행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할 것이기 때문에 보살은 먼저 자신이 보시를 하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착한법을 깊이 사랑하나니, 보시, 이것이 그  번째의문(初門)이므로 보시부터 행하는 것이며,

 보살은 중생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지만,  자비심이 비록 클지라 중생을  만족시켜  수는 없으므로 우선 보시를 행하여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놓고 다시 인도하는 것이다.

 

布施因緣生於四姓及作轉輪王;以四攝法攝取衆生,漸漸以三乘法令得涅槃。教他布施,讚歎布施法,歡喜讚歎行布施者,是深愛布施,見同行故,歡喜讚歎。

復次,憐愍心於衆生,若見修福,則爲之歡喜;如慈父見子行善,心則歡喜。是人四種行布施,生剎利等貴姓中。以布施攝已,漸漸教令持戒、禪定等,乃至令得辟支佛道。

보시한 인연으로  가지의 족성의 사성(四姓, 카스타)으로 태어나며 또한 전륜성왕도 되는 것이다.

4섭법(攝法)으로써 중생을 거두어서 점차로 3승의 법으로써 열반을 얻게 하고, 

다른 이에게 보시하도록 가르치고 보시하는 법을 찬탄하며, 보시하는 이를 기뻐하면서 찬탄하나니, 

이를 곧 보시를 깊이 좋아하면서 같이 행하는 동행(同行)을 보기 때문에 기뻐하면서 칭찬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중생을 애련히 여기는 연민심(憐愍心)으로서, 만약 복을 닦는 것을 보면 그를 위하여 기뻐함이 마치 인자한 아버지가 아들이 착한 행을 하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과 같으며,  

 사람은  가지로 보시를 행하여 찰리(刹利) 등의 귀한 족성으로 태어나며, 보시로써 거두어  뒤에 점차로 교화하여 지계와 선정 내지는 벽지불의 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或見衆生有大心者,有少許慈悲心,是人怖畏生死長遠故,其心懈退;菩薩方便力故,語是衆生:“咄!衆生!阿耨多羅三藐三菩提易得,汝等何以爲難?衆生所著處,此中無有定實法能遮者、難解者。汝等當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旣自得度,復當度脫衆生!”

 어떤 대심(大心)을 지닌 중생을 보면 조그마한 자비심이 있기는 하나,  사람은 생사가 길고 오랜 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마음이 게을러지고 물러나게 되므로, 보살이 방편력으로  중생에게 말하기를 “여보시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기 쉽거늘,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어렵다고 여기는 것인가?

중생들이 집착하는 가운데에서도 가로막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어떠한 정해진 실법이 없나니, 그대들은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켜야 하며, 스스로가 제도된 뒤에는 중생들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도탈중생(度脫衆生)하여 하는 것이오”라고 한다.

 

度脫衆生者,菩薩自乘大乘得度,以三乘隨衆生所應度而度之;旣自利益,復利益他人。

利益他者,旣自作佛,而以三乘度脫衆生。

若菩薩能如是行般若波羅蜜者,從初發心,終不墮三惡道,常作轉輪聖王者,

菩薩多生欲界。何以故?以無色界中無形故,不可教化;色界中多味著禪定樂,無厭惡心故難化;亦不生欲天。所以者何?著妙五欲多故難化。在人中,世世以四事攝衆生故,作轉輪聖王。

‘중생들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도탈중생(度脫衆生)’이라 함이란, 보살 자신은 대승의 수레를 타고 건너고, 3승으로써, 제도해야  바에 따라 중생을 제도하나니, 스스로 이익을 얻고 또한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이익타자(利益他者)’란, 스스로가 부처님이 되고 3승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는 것을 말하며,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있다면, 처음발심에서부터 끝내악도에 떨어지지 않으며, 항상 전륜왕이 되는 것이다.

보살은 대부분 욕계에 태어나나니, 왜냐 하면, 무색계에서는 형상이 없기 때문에 교화할 수가 없고, 

색계에서는 거의 모두가 선정의 즐거운 맛에 집착하여 싫증을 내지 않으므로 교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또한 욕계의 하늘인 욕천(欲天)에 나지도 않나니, 왜냐하면, 미묘한 5욕(欲)에 집착하게 됨이 많기 때문에 교화하기 어려우며,

인간 세계에 있을 때에는 세상마다 보시(布施)와 애어(愛語)와 이행(利行)과 동사(同事)의 사사(四事)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므로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다.

 

此中佛自說因緣:“隨其所種,得大果報等。”如經中說布施相。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그 심은 바에 따라  과보 등을 얻는다”고 하셨으니, 경에서 보시의 상(相) 말씀하신 바와 같다.

 

復有菩薩行檀波羅蜜時,見衆生破戒,作是言:“汝曹以因緣不具足故破戒,我當給汝所須,令無乏少。”

破戒人有二種:“一者、持戒因緣不具足故,如貧窮人,飢寒急故作賊;二者、持戒因緣雖具足,以習惡心故,好行惡事。貧窮破戒者,菩薩語之言:“汝但持戒,我當給汝所須!汝等住持戒中,漸漸以三乘而得度脫。”是名“因布施生戒”。

또한 보살이 단바라밀을 행할 때, 중생이 파계(破戒)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인연을 두루 갖추지 못한 까닭에 계율을 깨뜨리고 있는데 나는 그대들이 필요한 것을 모자람 없이  공급하여 주리라”고 하는 것이다. 

파계하는 파계인(破戒人)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계율을 지닐 인연을 두루 갖추지 못한 때문이니, 마치 빈궁한 사람이 배고픔과 추위가  급하기 때문에 도적이 되는 것과 같으며,

둘째는 계율을 지닐 인연은 비록 갖추어졌을지라도 나쁜 악심(惡心) 익힌 때문에 나쁜 일을 좋아하고 행하는 이이다.

가난하여서 계율을 깨뜨린 이라면 보살은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계율만을 지니도록 하라. 내가 그대에게 필요한 것을 더하여 줄것이니, 그대들은 지계(持戒) 가운데에 머물러 점점 3승으로써 제도되어 벗어나게 되리라.”고 하나니, 

이를 이름하여 보시로 인하여 계율을 내는 인보시생계(因布施生戒)라 하며, 

 

衆生以不如意事故瞋:若以求物不如意故瞋,人不稱意故瞋。菩薩住檀中,隨其意而給足之。

중생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  때문에 성을 내기도 하나니, 물건을 구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며,  어떤 사람은  뜻에 맞지 않는다 하여 화를 내기도 하나니,

보살은 단(檀, 보시)에 머무르면서 그들의 뜻에 맞추어 만족하게 공급하는 것이다.

 

問曰:若貧乏者給施令不瞋,可爾;人不得稱意,惱之令瞋,復云何?

묻나니, 가난한 빈핍자(貧乏者)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면서 화를 내지 않게 한다는 것을 있을 수도 있지만, 사람이  뜻에 맞지 않아서 괴로워하며 화를 낸다는 무엇입니까?

 

答曰:以如意珠施之,則使人皆稱意。珠之威德故,人無瞋者;如行者入慈三昧故,人無瞋者。是故說:“少何因緣故瞋?我當令汝所少具足。”

復次,一切法性皆空無所有,汝所瞋因緣亦皆虛誑無定,汝云何以虛誑事故,瞋罵、加害乃至奪命?起此重罪業故,墮三惡道,受無量苦。汝莫以虛誑無實事故,而受大罪!

답하나니, 여의주(如意珠)로써 그들에게 보시하면 사람들의 뜻에  맞게 되나니, 여의주의 위덕 때문에도 화를 내는 이가 없으니, 마치 수행하는 이가 자삼매(慈三昧)에 들어간 까닭에 화를 내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무슨 인연으로 화를 내고 있는가? 내가 그대들에게 모자라는 것을 모두 갖추게 하여 주리라’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일체법의 법성(法性) 모두가 공(空)하여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니, 그대가 화를 내고 있는  인연도 모두가 거짓이요, 정해진 것이 없거늘, 그대들은 어찌하여 이 거짓된 허광사(虛誑事) 때문에 화를 내고 욕하면서 해치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기까지 하는 것인가? 

이러한 중한 죄업을 일으킨 까닭에 3악도에 떨어져서 무량한 고통을 받을 것이니, 그대들은 거짓되고 진실이 없는 일로 인하여  죄과를 받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如山中有一佛圖,彼中有一別房,房中有鬼來恐惱道人故,諸道人皆捨房而去。有一客僧來,維那處分,令住此空房,而語之言:“此房中有鬼神喜惱人,能住中者住。”客僧自以持戒力、多聞故,言:“小鬼何所能?我能伏之!”卽入房住。

 속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 절에는 따로 방이 하나 있어서, 그  안에 귀신이 와서 도인(道人)들을 괴롭히기 때문에 도인들 모두가  방을 버리고 떠났으나, 

마침  객승(客僧)이 찾아왔기에 유나(維那)가   방에 머무르게 하면서 말하기를 “이 방에는 귀신이 있는데, 사람을 괴롭히기 좋아합니다. 거기라도 괜찮으시다면 머무르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객승은 스스로가 지계(持戒)의 힘과 견문이 많은 다문(多聞)한 것을 믿고 “그 하찮은 귀신이 무슨 짓을   있단 말이오. 내가 항복시키겠소” 하고,   방으로 들어가 쉬었다.

 

유나(維那, karam-dāna), 승원에서 잡사를 담당하는 사람을 말하며, 갈마타나(羯磨陀那)라고 음역하기도 함.

 

暮更有一僧來求住處,維那亦令在此房住,亦語:“有鬼惱人。”其人亦言:“小鬼何所能?我當伏之!”先入者,閉戶,端坐待鬼;後來者,夜闇,打戶求入。先入者謂爲是鬼,不爲開戶;後來者極力打戶。在內道人以力拒之,外者得勝,排戶得入;內者打之,外者亦極力熟打。至明旦相見,乃是故舊同學,各相愧謝。衆人雲集,笑而怪之。

날이 저물어서 다시  객승이 와서 묵을 데를 청하니, 유나는 그 역시  방에 머물도록 하면서 또한 귀신이 있어서 사람을 괴롭힌다는 말을 해주었다.  사람도 역시 “그 하찮은 귀신이 무슨 짓을   있단 말이요. 내가 항복시키겠소”라고 하였다.

먼저 들어가 있던 이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단정히 앉아 귀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중에  이가 캄캄한 가운데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들어가기를 청하니, 앞에 들어가 있던 이가 “이것이 귀신이로구나” 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자, 뒤에  이가 온 힘을 다하여 문을 열고자 하였으며, 안에 있던 도인도 힘을 다하여 막아서 잡고 있었다.

결국 밖에 있던 이가 이겨서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가자, 안에 있던 이가 그를 공격하여 때리니, 밖에서 들어간 이도 있는 힘을 다하여 때렸다. 

그들이 밤새도록 치고받고 하다가 날이 밝아 서로의 얼굴을 보자 옛날에 같이 공부하던 동학(同學)이었다. 

그들 서로가 부끄러워하면서 사죄하였으며, 여러 사람들이 모여 와서 웃어대며 괴이하게 여겼으니, 

 

衆生亦如是,五衆無我、無人,空取相致鬪諍;若支解在地,但有骨肉,無人、無我。

是故菩薩語衆生言:“汝莫於根本空中鬪諍作罪,鬪諍故,人身尚不可得,何況値佛!當知人身難得,佛世難値,好時易過;一墮諸難,永不可治!”

중생들 또한 이와 같아서, 5중(衆)에는 무아(無我)이고, 무인(無人)이며 공(空)한 뿐이나, 상(相)을 취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니, 만약 사지(四支)가 해체된  땅에 버려진다면, 다만 뼈와 살만이 남을 뿐이라서 사람도 없는 무인(無人)이고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중생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근본이 공한 근본공(根本空) 중에 다투며 죄를 짓지 말라. 다투기 때문에 사람의 몸조차도 오히려 얻을  없겠거늘, 하물며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 겠는가? 

사람 몸은 얻기 어려운 인신난득(人身難得)이고, 부처님 세상은 만나기 어려운 불세난치(佛世難値)이니, 좋은 시절을 부질없이 보내다가 한번 재난에 떨어지면 영영 헤어나기 어려우니라!

 

若墮地獄,燒炙屠割,何可教化?若墮畜生,共相殘害,亦不可化。若墮餓鬼,飢渴熱惱,亦不可化。若生長壽天,千萬佛過,著禪定味故,皆不覺知。如安息國諸邊地生者,皆是人身,愚不可教化。

만약 지옥에 떨어져서 타고 지지고 삶기고 끊어질 때이라면 어떻게 교화를 받을 수 있겠는가?

만약 축생에 떨어져서 서로 잔인하게 해친다면 역시 교화될  없으며, 

또한 아귀에 떨어지면 배고프고 목마름의 모진 고뇌로 인하여 역시 교화되지 못하며,

만약 장수천(長壽天)에 태어난다면 천만 부처님이  지나가도록 선정의 맛에 집착하여서 깨닫지 못하며, 

안식국(安息國, Arsak)과 같은 여러 변두리의 땅에 태어난다면 사람됨이 모두 어리석어서 교화될 수가 없는 것이다.

 

雖生中國,或六情不具、或四支不完、或盲聾瘖啞、或不識義理。或時六情具足、諸根通利,而深著邪見、言無罪福,不可教化。是故爲說:“好時易過,墮諸難中不可得度。”餘波羅蜜,如經中廣說故,不復解之。

비록 중국(中國)에 태어날지라도 혹은 6정(情)이 불구이기도 하고, 혹은 팔다리가 완전치 못하기도 하며, 혹은 소경ㆍ귀머거리ㆍ벙어리 등이 되기도 하고, 혹은 의리(義理)를 모르기도 하며, 혹은 6정이 온전히 갖추어지고 모든 감관이 영리하면서도 삿된 사견 깊이 집착한 채, “죄와 복은 없는 것이다”고 말하기도 한다면, 그들 역시 교화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하여 “좋은 때는 지나가기 쉬운 호시이과(好時易過)이고, 모든 재난 안에 떨어지면 제도될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니, 

나머지는 바라밀은 경에서 자세히 설하는 바와 같으므로 다시 해설하지 않겠다.

 

問曰:住檀波羅蜜行五波羅蜜訖,何以復更說六波羅蜜?

묻나니, 단(보시)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나머지 다섯 가지 바라밀을 행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6바라밀을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上一度中次第具足五,今則一時摠說。復次,先但說六波羅蜜,今通說三十七品及諸道果。

답하나니, 앞에서는 하나의 바라밀(度) 가운데에서 차례로 다섯 바라밀을 두루 갖추었고, 여기에서는  한꺼번에 통틀어서 설명하는 것이며,

또한 앞에서는 다만 6바라밀만을 설명하였지만, 여기에서는 통틀어서 37조도품과 모든 도의 과위의 도과(道果)를 설명하는 것이다.

 

問曰:三十七品自從心出,云何是因緣可與?

묻나니, 37 조도품은 스스로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거늘, 어떻게 이러한 인연을   있는 것입니까?

 

答曰:菩薩供給坐禪者衣服、飮食、醫藥、法杖、禪鞠、禪鎭,令得好師教照,令得好弟子受化;與骨人令觀,與禪經,令人爲說禪法 如是等三十七助道法因緣。

답하나니,보살은 좌선(坐禪)하는 이에게는 의복ㆍ음식ㆍ의약ㆍ법장(法杖)ㆍ선국(禪毱)ㆍ선진(禪鎭)을 공급하여 좋은 스승의 가르침을 얻게 하고, 

또한 좋은 제자를 얻어서 교화를 이어받게 하며, 

뼈로  사람의 그림을 주어서 골인관(骨人觀)을 하게 하고, 

선경(禪經)을 주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선법(禪法)을 설하여 주게 하나니, 

이와 같은 것들이 37조도법(助道法)의 인연이다.

 

●법장(法杖)은 좌선의 자세를 바로잡아주기 위한 도구이며,

●선국(禪鞠)ㆍ선진(禪鎭)은 모두 좌선할 때 수면을 쫒기 위한 도구이다.

●골인관(骨人觀), 백골관(白骨觀)이 아닌 뼈만 남은 사람의 그림인 골인(骨人)을 통해서 부정관을 수습하는 것.

 

又令人爲說摩訶衍法:“汝等所須衣服、飮食,盡來取之,便是汝物,莫自疑難!汝等得是物已,自行六波羅蜜,亦教化他人令行六波羅蜜。是布施性皆空,汝等莫著是施及以果報。”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마하연(摩訶衍, 대승)의 법을 말하게 하면서 “그대들이 필요한 모든 의복과 음식을 와서 가져가시라. 이것은 곧 그대들의 물건이니, 스스로 의심하거나 어려워하지 마시라. 

그대들은  물건을 얻은 뒤에 스스로 6바라밀을 행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여 6바라밀을 행하게 하시라. 

 보시의 성품은 모두가 공하나니, 그대들은  보시와 과보에 집착하지 마시라”고 하는 것이다.

 

衆生得是性空,漸漸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入無餘涅槃。如布施爲首生五波羅蜜,餘波羅蜜亦如是。

중생은 이 성품의 공함인 성공(性空)을 얻어서 점차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무여열반에 들어가나니, 

마치 보시를 첫 머리로 삼아서 나머지 다섯 가지 바라밀을 내는 것과 같이, 나머지 각각의 바라밀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大智度論卷第九十一 終 대지도론 91권을 마침.

大智度論  釋照明品  第八十一  卷第九十一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1. 조명품(照明品) 풀이함  4

 

問曰:六波羅蜜外更有何法爲勝?何以言更爲說勝法?

묻나니, 6바라밀 외에 다시 어떠한 법이 있기에 더욱 뛰어나다고 하시는 것이며?

무엇 때문에 다시 그들을 위하여 뛰어난 승법(勝法)을 설한다고 하신 것입니까?


答曰:此中不說波羅蜜,但爲慳者說施,乃至癡者爲說智慧。諸佛、菩薩法,有初、有後。初法,所謂布施、持戒;受戒施果報,得天上福樂。爲說五欲味利少失多,受世閒身,但有衰苦;讚歎遠離世閒、斷愛法,然後爲說四諦,令得須陁洹果。

답하나니, 여기에서는 바라밀을 말한 것이 아니다. 다만 간탐하는 이를 위해서는 보시할 것을 말해 주고, 나아가 어리석은 이를 위해서는 지혜를 말해  뿐이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법에는 처음과 나중이 있으니, 처음의 법은 이른바 보시와 지계이며, 지계와 보시의 과보로는 천상의 복락(福樂)을 얻지만, 

그들에게 5욕(欲)의 맛을 말해 주는 것은, 이익은 적고 과실만 많을 뿐이며, 세간의 몸을 받으면 다만 쇠퇴와 고통만이 있을 뿐이니, 세간을 멀리 여의고 탐애의 법을 끊는 것을 찬탄한 뒤에야 그들을 위하여 사제(四諦) 말해 주어 수다원의 과위를 얻게 하는 것이다.


此中菩薩但說欲令衆生得佛道故,先教令行六法。此中善智慧不名爲三解脫門所攝;是善智慧能生布施等善法,能滅慳貪、瞋恚等惡法,能令衆生得生天上。何以知之?更有勝法故。

勝法者,所謂四諦聖法、出法。一切聖人所行法,名爲聖法;出三界生死,名爲出法。以是四諦說法故,隨衆生根因緣,令得須陁洹果乃至得一切種智。此中雖不說初六法,說布施等,當知已攝。

 가운데에서 보살은 다만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불도를 얻게 하고자, 먼저 교화하여 여섯 가지의 육법(六法, 바라밀)을 행하게  뿐이니,

선지혜(善智慧)는 3해탈문(解脫門)에 포섭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나니, 이 선지혜(善智慧) 보시 등의 착한법을 내고 간탐과 성냄 등의 나쁜법을 없애며, 중생으로 하여금 천상에 태어   있게 하는 것이니, 어떻게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가? 보다  뛰어난 승법(勝法)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승법(勝法)’이란, 이른바제(四諦)의 거룩한법(聖法)이며, 벗어나게 하는 출법(出法)이니, 일체의 성인이 행하는 법을 거룩한법이라 하며, 삼계(三界)의 생사를 벗어나게 하므로 벗어나게 하는 출법(出法)이라 하는 것이다.

사제(四諦)로써 법을 설하기 때문에 중생의 근기와 인연에 따라 수다원의 과위를 얻게 하고, 나아가 일체종지를 얻게 하나니,  가운데에서 비록 처음의 여섯 가지의 육법(六法, 바라밀) 말하지 않았을지라도 보시 등을 말하면 이미 포섭된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復次,菩薩爲佛道故說是六法;但衆生意劣故,自取小乘,是故不說“布施、持戒生天受報等初六法”。

 보살은 부처님의 불도를 위하여  여섯 가지의 육법(六法, 바라밀) 설하는 것이나, 다만 중생의 뜻이등하기 때문에 스스로 소승(小乘)을 취할 뿐이니, 

이러한 까닭에 보시와 지계와 생천(生天)과 과보를 받는 수보(受報) 등의 처음 여섯 가지의 육법을 설해주지 않는 것이다.


舍利弗白佛言:“世尊!先說菩薩是畢竟不可得法;今爲無所有衆生說法,令得無所有法,所謂須陁洹果乃至一切種智。

世尊!菩薩今得無所有法故,能令衆生得無所有法 無所得是有所得?”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앞에서 보살은 끝내 얻을  없는 필경불가득법(畢竟不可得法)을 설하고,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셔서,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법(無所有法) 얻게 하셨으니, 이른바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입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지금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법(無所有法)을 얻은 까닭에 중생으로 하여금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법(無所有法)을 얻게   있으니, 

그렇다면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인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佛答:“菩薩行般若波羅蜜時,無有有所得過!何以故?菩薩行般若波羅蜜時不見衆生及法,但諸因緣和合,假名衆生。”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얻을 것이 있다는 유소득(有所得)에 어떤 허물도 없으니,

왜냐 하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중생과 법을 보지 않나니, 다만 모든 인(因)과 연(緣)이 화합한 것에 임시로 가명을 붙인 것이 중생이기 때문이다.


菩薩住二諦中,爲衆生說法,不但說空、不但說有;爲愛著衆生故說空,爲取相著空衆生故說有;有、無中二處不染。如是方便力爲衆生說法:“衆生!現在我身及我尚不可得,何況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舍利弗歡喜白佛言:“世尊!曠大心是菩薩!”

보살은 세제와 제일의의 두 가지의 진리인 이제(二諦)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지만, 다만 공(空)만을 말하지도 않고, 다만 존재의 유(有)만을 말하지도 않나니,

애착이 있는 중생을 위해서는 공(空)을 설해 주지만, 상(相) 취하고 공(空)에 집착하는 중생을 위해서는 존재의 유(有)를 말해 주어서 있다는 유(有)ㆍ없다는 무(無)의 두 가지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편력으로써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나니, 중생은 현재 나의 몸인 아신(我身)과 나(我)조차도 오히려 얻을  없거늘,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겠는가?”라고 하셨다.

사리불 존자가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넓고  마음의 광대심(曠大心)을 지닌 이가 바로 보살입니다”라고 하였다.


曠大心者,此中自說因緣,所謂:“無有法可得若一相、若異相。”如人市買,必須交易;大心人則不然。無所依止而能發大莊嚴,大莊嚴故不生三界,亦拔衆生令出三界,而衆生不可得,不縛不解故,一切法空。

‘넓고  마음의 광대심(曠大心)’이란, 여기에서 사리불 존자가 스스로 그 인연을 말하기를, “이른바 일상(一相)이나 다른 모양의 이상(異相)을 얻을  있는 어떠한 법도 없나니, 

마치 사람이 저자거리에서 물건을  때에는 반드시 서로가 교환하는 교역(交易)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대심(大心)을 지닌 사람은 그렇지 않아서 의지하는 바가 없으나 대장엄(大莊嚴)을 일으키며, 대장엄으로 삼계(三界)에 나지도 않으며, 또한 중생을 구출하여 삼계를 벗어나게 하면서도 중생을 얻을  없으니, 속박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은 까닭에 일체법은 공(空)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從久遠以來,煩惱顚倒皆是虛誑不實,是故名無縛;縛無故亦無解。縛卽是垢,解卽是淨。無淨無垢故,無六道分別;不分別六道故,無罪福業;罪福業無故,無煩惱能起罪福業者;不起罪福業,亦不應有果報。

如是諸法畢竟空中而作大莊嚴,是爲希有!譬如人虛空中種樹,樹葉花果,多所利益。

오랜 옛적부터 번뇌와 뒤바뀜의 전도(顚倒), 그 모두는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속박이 없는 무박(無縛)이라 하며, 무박(無縛)이기 때문에 벗어남도 없는 무해(無解)인 것이다. 

속박은  더러운 구(垢)요, 해탈은  깨끗한 정(淨)이니, 깨끗한 정(淨) 없고 더러운 구(垢) 없기 때문에 6도(道)의 분별이 없으며, 6도를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죄와 복의 업도 없으며, 죄와 복의 업이 없기 때문에 죄의 복의 업을 일으킬  있는 번뇌가 없으니, 죄와 복의 업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과보 또한 있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법이 필경공인 가운데에서 대장엄을 짓나니, 이것이 바로 희유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허공에 나무를 심으면 나무ㆍ잎ㆍ꽃ㆍ열매로 인하여 이로움이 많은 것과 같은 것이다.


佛可舍利弗意。舍利弗難是空故,佛亦答、亦可以其說空故可,以其難空故答,

所謂:“舍利弗!若衆生及諸法先有今無,諸佛賢聖有過罪。”過罪者,所謂令衆生入無餘涅槃,永滅色等一切法;入空中皆無所有,以斷滅衆生及一切法,故有過罪。

부처님께서 사리불 존자의 뜻을 인가하셨으니, 사리불 존자가  공(空)에 대하여 따진 까닭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면서 인가하셨으니, 그 공(空)을 말한 까닭에 인가하는 것이요,  공(空)을 따진 까닭에 대답하신 것이다.

이른바 “사리불아, 만약 중생과법이 앞에서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것이라면, 모든 부처님과 성현에게는 죄과가 있느니라. 그 죄과(罪過)란,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영원히 물질(色) 등의 일체법을 없애고, 공(空)한 가운데에 들게 하여서 모두가 있지 않는 무소유(無所有)라고 하여서 중생과 일체법을 아주 없어지게 단멸(斷滅)한 때문에 죄과가 있게 되는 것이다.


舍利弗!衆生及一切法先來無,若有佛、無佛,常住不異,是諸法實相;是故無六道生死,亦無衆生可拔出。

舍利弗!一切法先空,是故菩薩於諸佛所聞諸法如是相故,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作是念:“菩提中亦無有法可得,亦無實定法令衆生著而不可度,但衆生癡狂顚倒故,著是虛誑法。”

사리불아, 중생과 일체법은 어디서 오는 곳도 없으니,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달라지지 않는 상주불이(常住不異), 이것이 바로법의 실상(實相)이니라. 

이러한 까닭에 6도(道)의 생사도 없고 또한 중생을 구하는 것도 없느니라.

사리불아, 일체법은 본래부터 공한 선공(先空)이므로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법이 이러하다는 상(相)을 듣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면서 생각하기를 ‘보리 가운데에서는 얻을  있는 어떠한 법도 없으며, 또한 중생이 집착하면서 제도될 수 없게 하는 어떤 정해진 정법(定法)도 없으나, 다만 중생이 어리석고 뒤바뀐 까닭에  거짓된 허광법(虛誑法)에 집착할 뿐이다’라고 하느니라.


是故菩薩發大莊嚴,不轉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作是念:“我必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非不得;得已,用實法利益衆生;利益衆生故,衆生從顚倒得出。”

그러므로 보살은 장엄을 일으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니, 얻지 못할 까닭 없는 것이다’고 하며, 

얻은 뒤에는 진실한 실법(實法)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고, 중생을 이롭게 한 까닭 그 중생은 뒤바뀐 전도에 벗어나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欲明了是事故,經中說幻師譬喩:幻師卽是菩薩,幻師所作園林、廬觀卽是六波羅蜜等度衆生法,幻師所作象馬、男女卽是菩薩所度衆生。如幻師一身,以幻力故,幻作衆生、園林、廬觀等娛樂衆生;若幻師以所幻作事爲實,於所幻人求其恩惠,卽是狂人!菩薩亦如是,從諸佛聞一切法性空如幻,而以布施等利益衆生;欲求恩惠福報,卽是顚倒。

이러함을 분명히 알게 하시고자, 경에서 환사(幻師, 마술사)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으니,

환사(幻師, 마술사)란  보살을 말하는 것이고,

환사(幻師) 만든 동산 숲ㆍ집ㆍ누관(盧觀)이란  중생을 제도하는바라밀 등의 법이며, 

환사(幻師)가 만든 코끼리ㆍ말ㆍ남자ㆍ여인이란  보살이 제도해야  중생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환사(幻師) 혼자서 환술의 힘으로 중생과 동산 숲과 집과 누관 등을 환술로 만들어서 중생들을 즐겁게  주는 것과 같으나, 만약 환사가 환술로 만든 일들을 진실이라 생각하여 환술로  사람으로부터  은혜를 구한다면, 그것은  미친것이니,

보살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일체법의 성품은 공하고 마치 환(幻)과 같다”는 말씀을 듣고 보시 등으로 중생들을 이롭게 하면서 그들에게 은혜와 복의 보답을 구한다면  그것은 뒤바뀌어 전도(顚倒)되는 것이다.


問曰:幻法呪術實有,幻所作物可虛。如衆生空,菩薩亦空,菩薩不化作衆生,何得爲喩?

묻나니, 환술을 부리는 환법(幻法)과 주술(呪術)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환술로 만들어진 물건은 거짓인 것입니다. 

마치 중생이 공한 것과 같이 보살 역시도 공하여서, 보살은 중생을 변화로 만들지 못하거늘 어찌하여 비유로 삼을  있는 것입니까?


答曰:諸法實相中,法尚無,何況衆生!衆生異名,名爲幻師,幻師實無,何以言“幻師有而所幻者無”?

如汝以幻師實有、所幻者無,聖人觀幻師及所幻物不異。以明了事故說譬喩,取其少許相似處爲喩,何以盡取爲難?如師子喩王,師子於獸中無畏,王於群下自在無難,故以爲喩;復何可責四腳負毛爲異也?

답하나니, 제법의 실상 가운데에서는 법조차도 없거늘 하물며 중생이겠는가!

중생이라는 이름을 다르게 불러 환사(幻師, 마술사)라  것으로, 환사도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환사는 존재하나 환술로 만든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인가? 

그대는 ‘환사는 실제로 존재하고 환술로 만든 것은 없다’고 하지만, 성인은 환사와 환술로  물건이 다름이 없다고 관찰하나니, 그러함에 대하여 분명히 알게 하시고자 비유를 드신 것이고,  작은 부분의 서로 비슷한 것을 비유로 삼은 것인데 무엇 때문에 모두 취(取)하여서 따지는 것인가?

마치 사자를 왕에게 비유한 것과 같으니, 사자는 짐승 가운데서 두려움이 없고, 왕은 신하들 가운데서 자재하여 어려울 것이 없기 때문에 비유로 삼은 것이거늘, 어찌  발이 돋쳤고 털이 있는 것이 다르다고 책망하겠는가!


佛說性空法,諸法皆空,猶有衆生,是故說幻爲喩。我今說喩以破衆生,汝云何復以衆生爲難?

爾時,須菩提白佛言:“世尊!何等是成就衆生、淨佛國土道?”

須菩提雖知菩薩道,以中說甚深性空故,聽者生疑,是故發問。

부처님께서는 성품이 공한 성공법(性空法)을 설하시고,법은 모두가 공함에도 오히려 중생은 있는 것이기 때문에 환(幻)의 비유를 드신 것이다. 

나는  비유로써 중생을 타파하고 있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다시 중생을 가지고 따지는 것인가!

그 때에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의 불국토를 깨끗하게 하는 도(道)입니까”라고 하였다. 

수보리 존자는 비록 보살의 도를 알고 있었을지라도, 여기에서는 심히 깊은 심심성공(甚深性空)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듣는 이들 중에서는 의심을 내기도 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것이다.


佛答:“菩薩從初發心,行六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是菩薩道;行是道,成就衆生、淨佛國土。”

부처님께서은 대답하시기를 “보살이 처음 초발심한 때부터 6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을 행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도요,  보살도를 행하여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의 불국토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셨다.


須菩提復問:“云何行是法成就衆生?”須菩提意:若是法性空,衆生亦性空,云何可得成就?

수보리 존자가 다시 “어떻게  법을 행하여 중생을 성취시킵니까?”라고 여쭈었는데, 

수보리 존자의 뜻은 ‘만약  법의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고 중생도 또한 성공(性空)이라 어떻게 성취시킬  있겠는가?’라고  것이다.


佛答:“菩薩以方便力故,以布施法教化衆生,不教令著布施以爲眞實。”

方便者,菩薩語衆生:“汝曹,善男子!來布施,莫著是布施。”如經中說。

衆生以布施生貴樂處,貴樂因緣故生我憍慢,我憍慢增長故破善法,破善法故墮三惡道;是故菩薩先教言:“莫著布施!”但因是布施、修持戒等善法,皆迴是法向涅槃。所以者何?是性空諸法實相,不可取相。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방편력으로 보시법(布施法)으로써 중생들을 교화하고, 그들로 하여금 보시에 집착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 진실을 삼느니라”고 하셨다.

방편(方便)이라 함이란, 보살이 중생에게 말하기를 “그대들 선남자여, 와서 보시하면서도 이 보시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 것이니, 경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중생은 보시로써 존귀하고 쾌락한 곳에 태어나며, 존귀와 쾌락을 누리는 인연 때문에 잘난 체하는 교만을 내고, 잘난 체하는 교만이 더욱 자라면, 그 때문에 착한 선법을 깨뜨리며, 착한 선법을 깨뜨린 까닭에 3악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교화하면서 우선적으로 말하는 것이, “보시에 집착하지 말라. 다만 이 보시로 인하여 지계 등의 착한 선법을 닦아서, 이러한 제법을 모두 돌이켜 열반으로 향할 뿐이니,

왜냐하면, 이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의 제법 실상은 상(相)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는 것이다.

大智度論  釋照明品  第八十一  卷第九十一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1. 조명품(照明品) 풀이함  3

 

須菩提!云何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以般若波羅蜜攝取衆生?

須菩提!菩薩見衆生愚癡,無有智慧,作是言:‘汝等何以故不修智慧?’衆生言:‘因緣未具故。’菩薩住檀波羅蜜中,作是言:‘汝等所須得智慧具,從我取之,所謂布施、持戒、忍辱、精進、入禪定。

是因緣具足已,汝等如是思惟:≺思惟般若波羅蜜時,有法可得不?若我、若衆生、若壽命、乃至知者、見者可得不?若色、受、想、行、識,若欲界、色界、無色界,若六波羅蜜,若三十七助道法,若須陁洹果,若斯陁含、阿那含、阿羅漢果、辟支佛道,若阿耨多羅三藐三菩提可得不?≻’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단바라밀을 행하며, 어떻게 반야바라밀로써 중생을 거두는 것인가? 

수보리야, 보살은 중생이 어리석어서 지혜가 없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지혜를 닦지 않는가?’라고 ,  중생들이 말하기를 ‘인연을 아직 두루 갖추지 못한 까닭입니다’라고 한다면, 

 보살은 단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말하기를 ‘그대들이 필요한 지혜를 두루 갖추고자 한다 나로부터 취할 것이니, 이른바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과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오. 

이러한 인연을 두루 갖춘 뒤에, 그대들은, 곧 반야바라밀을 생각할 때에는 '얻을  있는 어떤 법이 있는가! 나(我)와 중생과 수명 내지는 아는 지자ㆍ보는 견자 얻을  있는 것인가?라고 사유하여야 하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욕계ㆍ색계ㆍ무색계와 6바라밀과 37조도법과 수다원의 과위ㆍ사다함의 과위ㆍ아나함의 과위ㆍ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을  있는 것인가?'라고 사유하여야 하오’라고 하느니라.


是衆生如是思惟時,於般若波羅蜜中,無有法可得可著處;若不著諸法,是時不見法有生有滅、有垢有淨;不分別是地獄、是畜生、是餓鬼、是阿修羅衆、是天、是人,是持戒、是破戒,是須陁洹、是斯陁含、是阿那含、是阿羅漢、是辟支佛、是佛。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時,以般若波羅蜜攝取衆生。

 중생들이 이와 같이 사유 때,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얻을  있거나 집착할  있는 어떠한 법도 없나니, 

만약 제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생겨나고 없어짐이 있는 유생유멸(有生有滅)이거나, 더럽고 깨끗함이 있는 유구유정(有垢有淨)의 어떠한 법도 보지 않으며,

‘이것이 지옥이다, 이것이 축생이다, 이것이 아귀이다, 이것이 아수라의 무리이다, 이것이 하늘이다, 이것이 사람이다, 이것이 지계(持戒)이다, 이것이 파계(破戒)이다, 이것이 수다원이다, 이것이 사다함이다, 이것이 아나함이다, 이것이 아라한이다, 이것이 벽지불이다, 이분이  부처님이다’라고 분별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 반야바라밀로써 중생들을 거두어 주느니라.


須菩提!云何菩薩摩訶薩住檀波羅蜜中,以尸羅波羅蜜、羼提波羅蜜、毘梨耶波羅蜜、禪波羅蜜、般若波羅蜜,乃至以三十七助道法,攝取衆生?

須菩提!菩薩摩訶薩住檀波羅蜜中,以供養具利益衆生。以是利益因緣故,衆生能修四念處、四正勤、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分、八聖道分;衆生行是三十七助道法,於生死中得解脫。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以無漏聖法攝取衆生。

수보리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단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 내지는 37조도법으로써 중생을 거두는가?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단바라밀에 머무르면서 공양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나니,

이러한 이익의 인연으로 중생은 4념처(念處)와 4정근(正勤)과 4여의족(如意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분(覺分)과 8성도분(聖道分)을 닦으며, 중생은  37조도법을 행하여 생사 가운데서 해탈을 얻게 되나니,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무루(無漏)의 거룩한법(聖法)으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는 것이니라.


復次,須菩提!菩薩摩訶薩教化衆生時,如是言:‘諸善男子!汝等從我取所須物,若飮食、衣服、臥具、香華乃至七寶等種種資生所須,汝當以是攝取衆生,汝等長夜利益安樂,莫作是念:“是物非我所有。”我長夜爲衆生故,集此諸物;汝等當取是物,如己物無異。’教化衆生令行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乃至令得三十七助道法、佛十力乃至十八不共法,亦令得無漏法果,所謂須陁洹乃至阿羅漢果、辟支佛道、阿耨多羅三藐三菩提。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時,應如是教化衆生,令得離三惡道及一切生死往來苦。

또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교화할 때에 말하기를 ‘선남자들이여, 그대들은 나에게서 필요한 음식과 의복과 침구와 향화 내지는 7보 등의 갖가지와 살림에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가져가시오. 

허나, 그대들은  물건으로써 중생들을 거두어 주되, 그대들을 오랫동안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여 준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물건들은 나의 소유(所有)가 아니며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중생들을 위하여 이러한 모든 물건들을 쌓았을 뿐이니, 그대들은  물건들을 자기 물건이나 다름없이 여기면서 가져가서 중생들을 교화하고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과 지혜를 행하게 하고 나아가 37조도법과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18불공법을 얻게 하며, 

또한 무루법의 과위  수다원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여 하오’라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와 같이 중생들을 교화하며, 3악도와 일체 생사의 왕래하는 고통을 여읠  있게 하여 하느니라.


復次,須菩提!菩薩摩訶薩住尸羅波羅蜜教化衆生,作是言:‘衆生!汝等少何因緣故破戒?我當與汝作具足因緣,若布施乃至智慧及種種資生所須。’

是菩薩住尸羅波羅蜜,利益衆生,令行十善,遠離十不善道。是諸衆生持諸戒,不破戒、不缺戒、不濁戒、不雜戒、不取戒,漸以三乘而得盡苦。

尸羅波羅蜜爲首,如檀波羅蜜說,餘四波羅蜜亦如是。”

또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시라바라밀에 머물러서 중생을 교화하며 말하기를 ‘중생들이여, 그대들은 어떠한 인연이 모자라서 계율을 깨뜨리는 것인가? 

나는 그대들에게  인연  보시 내지는 지혜와 갖가지 생활에 필요한 것을 두루 갖추어지게 할 것이니라’고 하느니라.

 보살은 시라바라밀에 머물러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10선도(善道)를 행하고 10불선도(不善道)를 멀리 여의게 하나니, 

 모든 중생은 모든 계율을 지니어 계율을 깨뜨리지 않고 계율을 이지러뜨리지도 않으며, 계율을 흐리게 하지도 않고 계율을 섞이게 하지도 않으며, 계율에 집착하지도 않으면서 점차로 3승으로써 괴로움이 다하게 되느니라.

시라(보시)바라밀을 첫머리로 삼음은 마치 단바라밀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 나머지  바라밀 또한 그와 같으니라.”


▶論. 問曰:先說“菩薩行六波羅蜜等諸助道法,不具足菩薩道,則不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今須菩提應自知“行六波羅蜜等,具足菩薩道,應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以更問?

▷논. 묻나니, 앞에서 “보살은 6바라밀 등의 모든 도를 돕는 조도법(助道法)을 행하여도 보살의 도를 갖추지 못한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없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지금 수보리 존자는 마땅히 스스로 6바라밀을 행하여 보살의 도를 두루 갖추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알아야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여쭈는 것입니까?


答曰:須菩提不疑“云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今但問”云何具足菩薩道,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답하나니, 수보리 존자는 ‘어떻게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가’에 대하여서 의심한 것이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어떻게 보살의 도를 두루 갖추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까’라고 여쭌 것일 뿐이다.


佛答:“若菩薩用六波羅蜜等諸法,以方便力和合故能行;是時,具足菩薩道。

方便力者,不決定得是布施等三事,亦不離是三事,行檀波羅蜜;是時,照明菩薩道。”照明、具足是一義。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6바라밀 등의 제법을 이용한다면 방편력과 화합함으로써 행할  있고, 이 때에는 보살의 도를 두루 갖춘다”라고 하셨으니,

방편력(方便力)이란, 결코  보시의 시자 시물 수자의 세 가지 삼사(三事)에서 얻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가지 삼사(三事)를 여의고는 단바라밀을 행하지도 못하나니, 이러한 때에 보살의 도를 밝게 비추나니, 

밝게 비춘다는 조명(照明)과 두루 갖춘다는 구족(具足)은 동일한 이다.


若菩薩決定得布施等三事,直墮常顚倒、取相著法等過罪;若不得是三事,則墮斷滅邊,著空,還起邪見等諸煩惱,便離菩薩道。

若菩薩離是二邊 因空捨是施等假名字虛誑法,因諸法實相離是著空無施者、無受者;如阿耨多羅三藐三菩提相,觀是布施亦爾無異。如是布施名爲具足。乃至十八不共法亦如是。

舍利弗在會中,聞佛與須菩提說:“般若甚深果報,大有利益。”雖有利益,無決定性,云何可習?

만약 보살이 보시의 시자 시물 수자의 삼사(三事)를 결정코 얻고자 한다면 항상하다고 생각하는 상전도(常顚倒)와 상을 취하는 취상(取相)과 법에 집착하는 착법(著法) 등의 죄과에 떨어지게 되며, 

만약   가지 삼사(三事)를 얻지 않는다면 단멸(斷滅, 단멸견)의 치우친 견해와 공에 집착한 착공(著空)에 떨어져서 도리어 삿된 등의 모든 번뇌를 일으켜서 보살의 도를 여의게 되며, 

만약 보살이 단멸(斷滅)과 착공(著空)의  가지 치우친 이변(二邊)을 여읜다면, 공(空)으로 인하여 보시 등의 임시로 붙인 가명 거짓된 허광법(虛誑法)을 버리게 되며, 

제법의 실상(實相)으로 인하여  공에 집착한 착공(著空) 여의게 되면 보시하는 시자 없고 받는 수자 없나니, 마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상(相) 같이 되는 것이다. 

 보시를 관찰하는  또한 그러하여 다름이 없으니, 이와 같은 것을  보시를 ‘두루 갖춘 구족(具足)’이라 하며,

나아가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사리불 존자는  모임 안에 있으면서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반야는 심히 깊으며 과보가 크고 이익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비록 이익이 있을지라도 결정된 성품이 없는 무결정성(無決定性)이거늘 어떻게 익힐  있습니까?”라고 여쭌 것이다.

 

단멸(斷滅, 단멸견, ucchedadṛṣṭi), 사후와 선악업의 과보를 부정하며, 사후에는 일체가 단절되어 존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


佛答:“菩薩行般若波羅蜜時,不壞色、不隨色,如是名習般若波羅蜜。”

菩薩初發心,爲知實法故,常行般若波羅蜜;次第隨其所宜,行布施等諸法。

是故常說:“菩薩行般若波羅蜜時,行布施等諸法。”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물질(色)을 파괴하지 않는 불괴색(不壞色)이고, 물질(色)을 따르지도 않는 불수색(不隨色)이니, 이와 같음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을 익힌다 하느니라”고 하셨다.

보살은 처음발심하면서 진실한 실법(實法)을 알게 되기 때문에 항상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차례대로  알맞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보시 등의 제법을 행하나니, 

 때문에 항상 말하기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보시 법을 행한다”고 하는 것이다.


色不壞者,不言是色無常,不言是色空無所有,是名不壞色。不隨色者,不如眼見色取相生著。

復次,不說“是色若常、若無常、若苦、若樂等”,是名不隨色。常、無常等皆非色實相。

‘물질을 파괴하지 않는 불괴색(不壞色)'이라 함이란, ‘이 물질(色)은 무상한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 물질(色)은 공하여 있는 바가 없다’고 말하지도 않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물질을 파괴하지 않는 불괴색(不壞色)이다’고 하는 것이며, 

‘물질을 따르지 않는 불수색(不隨色)’이라 함은, 눈으로 빛깔(色)을 보고 상(相) 취하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물질은 ‘항상 있다는 상(常)’이라거나 ‘무상하다’거나 ‘괴롭다’거나 ‘즐겁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물질을 따르지 않는 불수색(不隨色)’이라 하는 것이니,

항상하다는 상(常) 무상하다는   모두는 물질(色)의 실상이 아닌 것이다.


復次,不說“是色根本從世性中來、若從微塵中來、從大自在天中來”,亦不說“從時來”,亦不說“自然生”,亦不說“無因無緣而强生”。如是等名爲不隨、不壞。

또한 ‘이 물질의 근본인 색근본(色根本)은 '세간의 성품 가운데에서 왔다’거나 ‘작은 티끌에서 왔다’거나 ‘대자재천(大自在天, Maheśvaradeva) 가운데서 왔다’라고 말하지 않으며, 

또한 ‘때가 되어 왔다’고도 말하지 않고 ‘저절로 생겼다’고도 말하지 않으며, 

또한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이 억지로 생겼다’고도 말하지 않으니, 

이와 같은  등을 ‘따르지도 않는 불수(不隨)이고, 파괴하지도 않는 불괴(不壞)이다’고 하는 것이다.


此中佛自說因緣:“是色性無故,不隨、不壞。”性無者,是色從一切四大和合,假名爲色;是中無定一法名爲色。如先“破色”中說。

是色從因緣和合生故,卽是無性;若無性,卽是性空。若得是色相性空,卽是習般若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亦如是。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인연을, “이 물질(色)은 성품이 없기 때문에 따르지도 않는 불수(不隨)이고, 파괴하지도 않는 불괴(不壞)이다”고 말씀하셨으니,

‘성품이 없다는 무성(無性)’이란, 이 물질(色)은 일체가 4대(大)로 화합하여 임시로 물질이라는 가명을 붙인 것일 뿐이니,  가운데에는 물질(色)이는 정해진 어떠한 법도 없다는 것이니, 앞의 물질을 타파하는  색파(破色)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물질(色)은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생긴 까닭에 그것이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요,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다. 

만약 이 물질의 색상(色相)이 성공(性空)이라는 것을 얻으면,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익히는 것이니, 나아가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復問:“世尊!若諸法無自性可壞可隨者,云何菩薩習般若波羅蜜?不學般若波羅蜜,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佛可舍利弗意,自說因緣:“若菩薩用方便力行六波羅蜜,是人雖知諸法空,而能起般若波羅蜜。

다시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이 파괴할 수 없고 따를  무자성(無自性)이라면, 어떻게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익히는 것입니까? 반야바라밀을 배우지 않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사리불 존자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만약 보살이 방편력으로써 6바라밀을 행하면,  사람은 비록법이 공한 것임을 알지라도 능히 반야바라밀을 일으키는 것이다.


舍利弗!若菩薩求一切法,若得少許定性,則可取可著;今菩薩實求覓一切法,不得定實,所謂是般若波羅蜜、是禪波羅蜜,乃至是十八不共法,是諸法皆不可得;不可得故,何所取?

舍利弗!是名菩薩無取般若波羅蜜。菩薩應學無取般若波羅蜜。”無取尚不可得,何況般若等諸法!一切法無性故。

사리불아, 만약 보살이 일체법을 구할 때, 조금이라도 정해진 성품의 정성(定性)을 얻는다면 취하고 집착하는 것이라   있겠지만, 

지금 보살은 일체법을 실로 구하고 찾는 구멱(求覓)하여도 정해진 실체를 얻지 못하나니,

이른바 ‘이것이 반야바라밀이요 이것이 선바라밀이며, 나아가 이것이 18불공법이다’라고 하는  제법 모두는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니, 불가득이거늘 어떻게 취할 바가 있겠는가?

사리불아, 이를 이름하여 보살의 취함이 없는 무취(無取) 반야바라밀이라 하나니, 

보살은 마땅히 취함이 없는 무취(無取)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취함이 없는 무취(無取) 오히려 얻을  없거늘, 하물며 반야 등의 법을 얻음이겠는가?

일체법은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舍利弗復問:“若一切法無性,云何知是凡人乃至佛?”

佛答:“一切法雖無根本定相,但凡人顚倒故著。菩薩行般若波羅蜜時,以方便力故,見一切法無根本,而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사리불 존자가 또 여쭈기를 “만약 일체법이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라면 어떻게 이것은 범부인이요 나아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일체법에는 비록 근본과 정해진 정상(定相)이 없을지라도, 다만 범부인들이 뒤바뀌어 전도(顚倒)된 까닭에 집착할 뿐이며,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방편력으로써 일체법에 근본이 없는 무근본(無根本)임을 알면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니라.


是菩薩深行諸法性空故,不見一切法有根本,不見故不懈不退;了了知一切法無我、無所有性、性常空。但衆生愚癡顚倒故,著是陰、界、入。

是時,菩薩思惟籌量諸法甚深寂滅相,而衆生深著虛誑顚倒。菩薩自立如幻師,種種神通變化,說法度人,如幻所作,無憎無愛,等心說法,所謂慳者教施等六法;復爲說轉勝法,令出生死,得須陁洹果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 보살은 제법의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라는 것을 깊이 행하는 까닭에 일체법에 근본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그렇게 보지 않기 때문에 게으르지 않고 물러나지도 않으며,

일체법은 무아(無我)이고 있는 바 성품이 없는 무소유성(無所有性)이며, 그 성품은 항상 공한 성상공(性常空)이나,

다만 중생들이 어리석고 뒤바뀐 까닭에 이 음(陰, 오온)ㆍ계(界 18계)ㆍ입(入, 12입)에 집착할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아느니라.
이 때에 보살은 제법이 매우 깊은 심심(甚深)한 적멸상(寂滅相)이나, 중생들이 거짓과 뒤바뀐 허광전도(虛誑顚倒)에 깊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사유하고 헤아리면서, 보살 스스로가 일어나서 마치 환술사와 같이 갖가지 신통으로 변화하여 법을 설하면서 사람들을 제도하나니,

마치 환술로 만들어진 이와 같이 미워함도 없고 사랑함도 없이 평등한 등심(等心)으로 법을 설하나니,

이른바 간탐하는 이에게는 보시 등의 여섯 가지 법을 가르쳐주며, 다시 그들을 위하여 점차로 더욱 뛰어난 법을 굴리면서 생사(生死)에서 벗어나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大智度論  釋照明品  第八十一  卷第九十一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1. 조명품(照明品) 풀이함  2

 

舍利弗!是諸法性常空,以是故,諸菩薩摩訶薩從過去佛聞是法相,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意。

是中無有法我當得,亦無有衆生定著處法不可出,但以衆生顚倒故著。以是故,菩薩摩訶薩發大誓莊嚴,常不退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菩薩不疑:‘我當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我必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已,用實法利益衆生,令出顚倒。

사리불아, 법의 성품은 항상 공한 법성상공(法性常空)이니, 이러한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은 과거의 부처님으로부터  법상(法相)을 듣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일으키느니라. 

이러한 가운데에서는 나(我)로서 얻어야 어떠한 법도 없으며, 또한 중생이 결정코 머물 곳과 법도 없어서 벗어날 수도 없는 불가출(不可出)인 것이나, 단지 중생이 뒤바뀌어 전도된 까닭에 집착할 뿐이니,

이러한 까닭에 보살마하살은  서원의 장엄을 일으켜서 항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나니, 

 보살은 ‘나는 장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의심하지 않으며, 

‘나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고 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뒤에는 진실한 실법(實法)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고 뒤바뀐 전도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舍利弗!譬如幻師幻作百千萬億人,與種種飮食令飽滿,歡喜唱言:‘我得大福!我得大福!’

於汝意云何?是中有人食飮飽滿不?” “不也!世尊!”

사리불아, 비유하자면, 마치 환술사가 백천억만의 사람을 환술로 만들어서 갖가지 음식을 배부르게 준다면, 그들은 기뻐하면서 외치기를 ‘나는  복을 얻었다, 나는  복을 얻었다’고 하는 것과 같나니,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러한 가운데에서 사람이 먹고 마셔서 배가 포만(飽滿)한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佛言:“如是!舍利弗!菩薩摩訶薩從初發意已來,行六波羅蜜、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四念處乃至八聖道分、十四空、三解脫門、八背捨、九次第定、佛十力乃至十八不共法,具足菩薩道,成就衆生、淨佛國土,無衆生法可度。”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처음에 뜻을 낸 초발의에서부터 6바라밀과 4선(禪)과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과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과 14공(空)과 3해탈문(解脫門)과 8배사(背捨)와 9차제정(次第定)과 부처님의 10력(力)과  나아가 18불공법(不共法)까지도 행하여 보살의 도를 완전히 갖추어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의국토를 깨끗하게 하나, 중생을 제도하는 어떠한 법도 없는 것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何等是菩薩摩訶薩道?菩薩行是道,能成就衆生、淨佛國土?”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보살마하살의 도(道)라서, 보살이  도를 행하여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있는지요?”


佛告須菩提:“菩薩摩訶薩從初發意已來,行檀波羅蜜,行尸羅、羼提、毘梨耶、禪、般若波羅蜜,乃至行十八不共法,成就衆生、淨佛國土。”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처음 뜻을 낸 초발의에서부터 단바라밀을 행하고 시라ㆍ찬제ㆍ비리야ㆍ선ㆍ반야바라밀을 행하며, 나아가 18불공법을 행하면서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云何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成就衆生?”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단(보시)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성취시키는지요?”


佛告須菩提:“有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時,自布施,亦教衆生布施,作是言:‘諸善男子!汝等莫著布施!汝著布施故當更受身,受身故多受衆苦。

諸善男子!諸法相中無所施、無施者、無受者,是三法性皆空;是性空法不可取,不可取相是性空。’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단바라밀을 행할 때, 스스로가 보시하고 또한 중생을 교화하여 보시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선남자들이여, 그대들은 보시에 집착하지 마시오. 그대들이 보시에 집착한다면, 그 때문에 다시 몸을 받아야 하고, 다시 몸을 받은 까닭에 많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오! 

선남자들이여, 제법의 법상(法相)에는 보시도 없고, 보시하는 시자 없으며, 받는 수자 없나니,   가지의 법상(法相) 모두가 공(空)한 것이오!

 성품이 공법(空法)은 취할 수도 없는 불가취(不可取)이니, 취할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인 것이오!’라고 하느니라.”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時,布施衆生,是中不得布施、不得施者、不得受者。何以故?無所得檀波羅蜜是名爲檀波羅蜜。是菩薩不得是三法故,能教衆生,令得須陁洹果,乃至令得阿羅漢果、辟支佛道、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단(보시)바라밀을 행할 때, 중생에게 보시하면서도 가운데에서 보시도 얻지 않고, 보시하는 시자 얻지 않으며, 받는 수자 얻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얻을 것이 없는 무소유(無所得)의 단바라밀, 이를 이름하여 단바라밀이라 하기 때문이니라. 

 보살은 보시물, 시자, 수자의  가지법(三法, 삼륜청정)을 얻지 않기 때문에 중생들을 교화하여 수다원의 과위를 얻게 하고 나아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얻게 하는 것이니라.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時,成就衆生。是菩薩自行布施,亦教他人行布施,讚歎布施法,歡喜讚歎行布施者。是菩薩如是布施已,生剎利大姓、婆羅門大姓、居士大家,若作小王、若轉輪聖王,是時,以四事攝取衆生。何等四?布施、愛語、利行、同事。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을 성취시키나니,  보살은 스스로가 보시를 행하고 또한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보시를 행하게 하며, 보시하는 법을 찬탄하고 보시를 행하는 이를 기뻐하며 칭찬하느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보시를 한 뒤에 찰리의  족성인 대성(大姓)과 바라문의  족성과 거사의  집안에 태어나거나 또는 작은 나라의 왕이나 전륜성왕이 되느니라. 

이 때에  가지의 사사(四事)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나니, 

어떠한 것이 사사(四事)인가? 보시(布施)와 애어(愛語)와 이행(利行)과 동사(同事)가 그것이니라.


是四事攝衆生已,衆生漸漸住於戒、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四念處乃至八聖道分、空、無相、無作三昧,得入正位中,得須陁洹果乃至得阿羅漢果,若得辟支佛道,若教令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作是言:‘諸善男子!汝等當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易得耳!何以故?無有定法衆生所著處,但顚倒故衆生著。是故汝當自離生死,亦當教他離生死;汝等當發心,能自利益,亦當得利益他人。’

須菩提!菩薩摩訶薩應如是行檀波羅蜜!

  가지의 사사(四事)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면, 중생은 점차로 계율과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과 4념처 내지는 8성도분과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삼매에 머물러 정위(正位) 안에 들게 되고,

수다원의 과위를 얻으며, 나아가 아라한의 과위까지를 얻고 

또는 벽지불의 도를 얻으며 또는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느니라.

그는 말하기를 ‘선남자들이여, 그대들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기 쉬운 것이오. 왜냐 하면, 어떠한 정해진 정법(定法)이 있어서 중생이 집착할 곳이란 없으나, 다만 뒤바뀌어 전도된 까닭에 중생이 집착할 뿐이라오. 

그러므로 그대들은 스스로가 생사(生死)를 여의면서 또한 다른 이도 교화하여 생사를 여의게 하여야 하며, 

그대들은 발심하여 스스로를 이롭게 하여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이익을 얻게 해야 하오’라고 하나니,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단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니라.


是行檀波羅蜜因緣故,從初發意已來,終不墮惡道,常作轉輪聖王。何以故?隨其所種,得大果報。是菩薩作轉輪聖王時,見有乞者,作是念:‘我不爲餘事故受轉輪聖王果,但爲利益一切衆生故。’

是時,作是言:‘此是汝物,汝自取之,莫有所難,我無所惜!我爲衆生故受生死,憐愍汝等故具足大悲。’

行是大悲,饒益衆生,亦不得實定衆生相,但有假名故可說是衆生;是名字亦空,如嚮聲,實不可說相。

이렇게 단바라밀을 행한 인연으로, 처음 뜻을 낸 초발의에서부터 끝내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전륜성왕이 되나니, 왜냐 하면  심는 바에 따른 큰 과보를 얻기 때문이니라. 

 보살이 전륜성왕이 되었을 때, 구걸하는 이를 보면 생각하기를 ‘나는 다른  때문에 전륜성왕의 과보를 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일체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전륜성왕의 과보를 받았을 뿐이다’고 하느니라. 

그 때에 그는 말하기를 ‘이것들은 바로 그대들의 물건이니, 어려워할  없이 그대들은 몸소 와서 가져가시오. 나는 아끼는 것이 없으며, 나는 중생들을 위하여 짐짓 생사를 받은 것일 뿐이니, 그대들을 가엾이 여긴 까닭이오’라고 하느니라.

그는 대비(大悲)를 두루 갖추고  대비를 행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하나, 또한 실로 일정하게 정해진 중생상(衆生相)을 얻지 않으며, 다만 임시로 붙인 가명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나,  이름 또한 공(空)한 것이라서 마치 메아리 소리와 같아 실로 그 상 말할  없는 불가설상(不可說相)인 것이니라.


須菩提!菩薩摩訶薩應如是行檀波羅蜜,於衆生中無所惜,乃至不惜自身肌肉,

何況外物!以是法故,能出衆生生死。

何等是法?所謂檀波羅蜜、尸羅波羅蜜、羼提波羅蜜、毘梨耶波羅蜜、禪波羅蜜、般若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令衆生從生死中得脫。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단바라밀을 행하면서 중생들에 대하여 아끼는 것이 없으니, 나아가 스스로의 몸의 살조차 아끼지 않거늘 하물며 바깥의 물건이겠는가?

이러한 법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이러한 법인가? 이른바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이니, 이는 중생들을 생사 가운데서 해탈하게 하는 법이니라.


復次,須菩提!菩薩摩訶薩住檀波羅蜜中布施已,作是言:‘諸善男子!汝等來持戒,我當供給汝等,令無乏短,衣、食、臥具乃至資生所須,盡當給汝;

汝等乏少故破戒,我當給汝所須,令無所乏,若飮食乃至七寶。

汝等住是戒律儀中,漸漸當得盡苦,成於三乘而得度脫:若聲聞乘、辟支佛乘、佛乘。’

또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단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보시를 한 뒤에 말하기를 ‘선남자들이여, 그대들은 어서 와서 계율을 지니시오. 나는 그대들에게 모자람이 없이 공급할 것이니, 의복ㆍ음식ㆍ침구에서 살림에 필요한 것까지의 모든 것을 공급하여 줄것이오! 

그대들이 모자라는 것이 있어서 계율을 깨뜨린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필요한 음식이나 이에 7보(寶)까지도 모자람 없이 모두 줄 것이오! 

그리하여 그대들은  계율의(戒律儀) 가운데에 머무르게 된다면, 점차로 괴로움을 다하게 되며, 성문승과 벽지불승과 불승의  3승(乘)을 타고 제도되어 벗어나게  것이오’라고 하느니라.


復次,須菩提!菩薩摩訶薩住檀波羅蜜中,若見衆生瞋惱,
作是言:‘諸善男子!汝等以何因緣故瞋惱?

我當與汝所須;汝等所欲,從我取之,悉當給汝,令無所乏,若飮食、衣服,乃至資生所須。’

또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단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만약 중생이 화를 내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선남자들이여, 그대들은 무슨 인연으로 화를 내고 괴로워하는 것이오? 

나는 그대들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줄것이니, 그대들이 바라는 것을 나에게서 가져가시오!

음식이나 의복에서 살림에 필요한 것까지 모자람이 없이 모두 주겠소’라고 하느니라.


是菩薩住檀波羅蜜中,教衆生忍辱,作是言:‘一切法中無有堅實,汝等所瞋,是因緣空無堅實,皆從虛妄憶想生,汝無有根本。汝瞋恚壞心,惡口罵詈,刀杖相加,以至害命!

汝等莫以是虛妄法起瞋故,墮地獄、畜生、餓鬼中及餘惡道,受無量苦。

汝等莫以是虛妄無實諸法故而作罪業;以是罪業故,尚不得人身,

何況得生佛世!諸人!佛世難値、人身難得,汝等莫失好時!若失好時,則不可救。’

 보살은 단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을 교화하여 인욕을 하게하면서 말하기를 ‘일체법 가운데에는 견실한 것란 없다오! 그대들이 화를 내는  인연도 공(空)하여 견실함이 없는 것이니, 모두가 허망한 기억과 생각에서 생기는 것으로써, 그대들에게  근본이 있는 것이 아니라오!

그대들은 성을 내어서 마음을 무너뜨리고, 욕설을 하고, 꾸짖고 칼과 몽둥이로 서로 해치며, 심지어 목숨까지도 빼앗나니, 그대들은  허망한 법으로 화를  까닭에 지옥과 축생과 아귀나  밖의 악도에 떨어져서 무량한 고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그대들은  허망하고 진실이 없는 때문에 죄업을 짓지 않도록 하시오! 

이러한 죄업 때문에 오히려 사람의 몸조차도 얻지 못할 것이거늘, 하물며 부처님이 계신 세상에 태어날  있겠소! 

여러 사람들이여, 부처님의 세상은 만나기 어려운 불세난치(佛世難値)이고, 사람의 몸은 얻기가 어려운 인신난득(人身難得)이니, 그대들은 이러한 좋은 때를 놓치지지 마시오. 

만약 좋은 때를 잃게 되면 구제될  없을 것이오!’라고 하느니라.


是菩薩摩訶薩如是教化衆生,自行忍辱,亦教他人令行忍辱,讚歎忍辱法,歡喜讚歎行忍辱者。

是菩薩令衆生住忍辱中,漸以三乘得盡衆苦。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住檀波羅蜜,令衆生住忍辱。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중생을 교화하면서 스스로가 인욕을 행하고 또한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인욕을 행하게 하며, 인욕하는 법을 찬탄하고 인욕을 행하는 이를 기뻐하면서 칭찬하느니라.

 보살은 중생으로 하여금 인욕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고 점차로 3승으로써 일체의 괴로움을 다하게 하나니,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단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중생으로 하여금 인욕에 머무르게 하느니라.


須菩提!云何菩薩摩訶薩住檀波羅蜜,令衆生精進?

須菩提!菩薩見衆生懈怠,作如是言:‘汝等何以懈怠?’衆生言:‘因緣少故。’是菩薩行檀波羅蜜時,語諸人言:‘我當令汝因緣具足,若布施、若持戒、若忍辱。如是等因緣,令汝具足。’

수보리야, 어떻게 보살이 단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중생으로 하여금 정진을 내게 하는가?

수보리야, 보살은 중생이 게으른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게으름을 피우는가?’라고  때,

 중생들이 말하기를 ‘인연이 적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면, 

 보살이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대들에게 인연을 두루 갖추게 하리니, 보시와 지계와 인욕 등의 인연을 그대들로 하여금 완전히 갖추게 할 것이오!’라고 하느니라.


是衆生得菩薩利益因緣故,身精進、口精進、心精進;身精進、口精進、心精進故,一切善法具足,修聖無漏法;修聖無漏法故,當得須陁洹果乃至阿羅漢果、辟支佛道,若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時,住精進波羅蜜,攝取衆生。

須菩提!云何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時,教化衆生令修禪波羅蜜?”

이 중생들은 보살로부터 이익되는 인연을 얻었기 때문에 몸으로 신정진(身精進)하고, 입으로 구정진(口精進)하고, 마음으로 심정진(心精進)하나니,

몸으로 신정진(身精進)하고 입으로 구정진(口精進)하고, 마음으로 심정진(心精進)하기 때문에 일체의 착한 선법을 두루 갖추고 거룩한 성무루(聖無漏)의 법을 닦느니라.

거룩한 성무루(聖無漏)의 법을 닦은 까닭에 장차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를 얻으며 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 정진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을 거두어 주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을 교화하여 선(禪)바라밀을 닦게 하는가?”

 

佛告須菩提:“菩薩見衆生亂心,作是言:‘汝等可修禪定!’衆生言:‘我等因緣不具足故。’菩薩言:‘我當與汝等作因緣,以是因緣故,令汝心不隨覺觀,亦不馳散。’

衆生以是因緣故斷覺觀,入初禪、二禪、三禪、四禪,行慈、悲、喜、捨心。衆生以是禪、無量心因緣故,能修四念處乃至八聖道分;修三十七助道法時,漸入三乘而得涅槃,終不失道。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時,以禪波羅蜜攝取衆生,令行禪波羅蜜。

부처님께서 이어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중생의 마음이 산란한 것을 보면 말하기를 ‘그대들은 선정을 닦아야 한다’라고  , 

 중생들이 말하기를 ‘저희들은 인연을 두루 갖추지 못한 까닭에 이러합니다’라고 한다면, 

 보살이 말하기를 ‘나는 그대들에게 인연을 지어 주리니,  인연으로 그대들의 마음이 거친 생각의 각(覺)과 세밀한 생각의 관(觀)을 따르지 않게 하겠으며, 또한 밖으로 내달리지 않게 하겠소”라고 하느니라.

중생들은 이러한 인연으로 거친 생각의 각(覺)과 세밀한 생각의 관(觀)을 끊어서, 초선(初禪)ㆍ제2선ㆍ제3선ㆍ제4선에 들어가고, 자(慈)ㆍ비(悲)ㆍ희(憙)ㆍ사(捨)의 마음을 행하나니, 

중생들은  선(禪)과 한량없는 마음의 무량심(無量心)의 인연으로 4념처 내지는 8성도분을 닦으며, 

37조도법(助道法)을 닦을 때에 점차로 3승에 들어가 열반을 얻으며 끝내 도(道)를 잃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 선(禪)바라밀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어서 선(禪)바라밀을 행하게 하는 것이니라.

大智度論  釋照明品  第八十一  卷第九十一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1. 조명품(照明品) 풀이함  1

 

►經. 須菩提白佛言:“世尊!若菩薩摩訶薩行六波羅蜜、十八空、三十七助道法、佛十力、四無所畏、四無㝵智、十八不共法,不具足菩薩道,不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世尊!菩薩摩訶薩當云何具足菩薩道,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경.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과 18공(空)과 37조도법(助道法)과 부처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을 행하여 보살의 도(道)를 두루 갖추지 못한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하면 보살도를 완전히 갖추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있는지요?”


佛告須菩提:“若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以方便力故,行檀波羅蜜,不得施、不得施者、不得受者,亦不遠離是法行檀波羅蜜,是則照明菩薩道。

如是,須菩提!菩薩以方便力故具足菩薩道;具足已,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乃至十八不共法亦如是。”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방편력으로 단(檀, 보시)바라밀을 행하나 시물(施物)을 얻지 않고, 보시하는 시자(施者)도 얻지 않으며, 받는 수자(受者) 얻지 않으며, 또한  법을 멀리 여의지도 않고 단바라밀을 행한다면, 이것이  보살도를 밝게 비추는 것이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은 방편력으로써 보살도를 두루 갖추며, 갖춘 뒤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있나니, 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 내지는 18불공법(不共法) 역시 그와 같으니라.”


舍利弗白佛言:“世尊!云何菩薩摩訶薩習般若波羅蜜?”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익히는지요?”


佛告舍利弗:“若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以方便力故,不壞色、不隨色。

何以故?是色性無故不壞不隨、乃至識亦如是。

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以方便力故,檀波羅蜜不壞、不隨。

何以故?檀波羅蜜性無故,乃至十八不共法亦如是。”

부처님께서 사리불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방편력으로써 물질(色)을 파괴하지 않는 불괴색(不壞色)이고, 물질(色)을 따르지도 않는 불수색(不隨色)이니라. 

왜냐 하면,  물질(色)은 색성(色性)은 없는 무성(無性)이기 때문에 파괴할 것도 없고 따르지도 않나니, 나아가 인식(識)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력으로써 단바라밀을 파괴하지도 는 불괴(不壞)이 따르지도 않는 불수(不隨)이니,  

왜냐 하면, 단바라밀의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기 때문이니, 나아가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舍利弗白佛言:“世尊!若諸法無自性可壞、可隨者,云何菩薩摩訶薩能習般若波羅蜜諸菩薩摩訶薩所學處?

何以故?菩薩摩訶薩不學般若波羅蜜,不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의 자성(自性)을 파괴할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다면,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과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워야  것을 익힐  있겠습니까?

왜냐 하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지 않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없기 때문입니다.”


佛告舍利弗:“如汝所言:‘菩薩不學般若波羅蜜,不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離方便力故可得。

舍利弗!若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若有一法可得,應當取;若不可得,何所取?

所謂此是般若波羅蜜、是禪波羅蜜、是毘梨耶波羅蜜、是羼提波羅蜜、是尸羅波羅蜜、是檀波羅蜜,是色、受、想、行、識,乃至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부처님께서 사리불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말과 같아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지 않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없지만, 방편력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얻을  있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서 만약 하나의법(一法)이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마땅히 취하여야 하겠지만, 만약 얻을  없다면 무엇 때문에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이것이 선(禪)바라밀이다, 이것이 비리야(毘梨耶, 정진)바라밀이다, 이것이 찬제(羼提, 인욕)바라밀이다, 이것이 시라(尸羅, 지계)바라밀이다, 이것이 단(檀, 보시)바라밀이다, 이것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다,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라고 하면서 취하고자 하겠는가?


舍利弗!是般若波羅蜜不可取相,乃至一切諸佛法不可取相。

舍利弗!是名不取般若波羅蜜乃至佛法,是菩薩摩訶薩所應學。菩薩摩訶薩於是中學時,學相亦不可得,何況般若波羅蜜、佛法、菩薩法、辟支佛法、聲聞法、凡夫人法!何以故?

舍利弗!諸法無一法有性。如是無性諸法,何等是凡夫人、須陁洹、斯陁含、阿那含、阿羅漢、辟支佛、菩薩、佛?

사리불아,  반야바라밀은 취할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이며, 나아가 일체의 불법도 취할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이니라. 

사리불아, 이것을 바로 반야바라밀에서부터 부처님의법까지를 취하지 않는 불취(不取)라 하며,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배워야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이  가운데에서 배울 때에도,  배우는 학상(學相) 또한 얻을  없거늘, 하물며 반야바라밀과법과 보살법과 벽지불법과 성문법과 범부인의 법이겠는가? 

왜냐 하면 사리불아,법의 어떠한 일법(一法)도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무성(無性)의 제법에서 어떠한 것이 범부인이며  수다원이고 사다함이며 아나함이고 아라한이며 벽지불이고 보살이며 부처님이겠는가?


若無是諸賢聖,云何有法?以是法故,分別說是凡夫人、須陁洹、斯陁含、阿那含、阿羅漢、辟支佛、菩薩、佛?”

만약 이러한 모든 성현이 없다면, 어떻게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때문에 분별하면서 ‘이 사람이 바로 범부인이요,  분이 수다원이며 사다함이요, 아나함이며 아라한이요, 벽지불이며 보살이요, 부처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舍利弗白佛言:世尊!若諸法無性、無實、無根、無本,云何知是凡夫人乃至是佛?”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에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고, 진실이 없는 무실(無實)이며, 근본이 없는 무근무본(無根無本)이라면, 어떻게  사람이 범부인이며, 나아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  있는지요?”


佛告舍利弗:“凡夫人所著處色,有性、有實不?”

부처님께서 사리불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범부들이 집착하고 있는 물질(色)이 성품이 있는 유성(有性)이고 진실이 있는 유실(有實)인가?”

 

“不也!世尊!但以顚倒心故。受、想、行、識,乃至十八不共法亦如是。”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다만 뒤바뀐 마음의 전도심(顚倒心)일 뿐이며, 수상행식(受想行識)에서부터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습니다.”


“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以方便力故,見諸法無性、無根本故,能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방편력으로써법에는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고 근본도 없는 무근본(無根本)이라고 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느니라.”


舍利弗白佛言:“云何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以方便力故,見諸法無性、無根本故,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방편력으로써 제법에는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고, 근본도 없는 무근본(無根本)이라고 보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지요?”


佛告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見諸法根本住中退沒、生懈怠心。

舍利弗!諸法根本實無我、無所有、性常空,但顚倒愚癡故,衆生著陰、入、界。

부처님께서 사리불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제법의 근본을 보면  속에 머물러서, 물러나거나 게으른 마음을 내지 않느니라. 

사리불아,법의 근본에는 실로 나가 없는 무아(無我)이고, 있는 바의 성품이 없는 무소유(無所有)라서 항상 공한 성상공(性常空)이지만, 다만 뒤바뀌고 어리석은 까닭에 중생은 음(陰, 오음 )ㆍ입(入, 12입)ㆍ계(界, 18계)에 집착하느니라.


是菩薩摩訶薩見諸法無所有、性常空、自性空時,行般若波羅蜜,自立如幻師,爲衆生說法:

慳者爲說布施法,破戒者爲說持戒法,瞋者爲說忍辱法,懈怠者爲說精進法,亂想者爲說禪定法,愚癡者爲說智慧法。

令衆生住布施乃至智慧,然後爲說聖法能出苦;用是法故,得須陁洹果乃至得阿羅漢果、辟支佛道,乃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보살마하살은법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며, 성품이 항상 공한 성상공(性常空)인 것을  때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스스로 일어서서 마치 환사(幻師, 환술사)와 같이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느니라. 

간탐하는 이에게는 보시하는 법을 말해 주고, 계율을 파한에게는 지계의 법을 말해 주며, 성을 내는 이에게는 인욕하는 법을 말해 주고, 게으른 이에게는 정진하는 법을 말해 주며, 생각이 산란한 이에게는 선정의 법을 말해 주고, 어리석은 이에게는 지혜의 법을 말해 주어서,  

 중생으로 하여금 보시 내지는 지혜에 머무르게 뒤에는 그들을 위하여 거룩한법(聖法)을 설해 주어서 능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있게 하나니, 

이러한  때문에 수다원의 과위를 얻고 나아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를 얻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도 얻는 것이니라.”


舍利弗白佛言:“世尊!菩薩摩訶薩得是衆生無所有,教令布施、持戒乃至智慧,然後爲說聖法能出苦;以是法故,得須陁洹果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중생의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를 얻고서도 교화하여 보시와 지계 내지는 지혜에 이르기까지 머무르게 하며, 그러한 뒤에는 그들을 위하여 거룩한 성법(聖法)을 설해 주어서 괴로움에서 벗어날  있게 하나니, 이러한 법으로 인하여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입니다.”


佛告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無有所得過罪。

何以故?舍利弗!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得衆生,但空法相續故名爲衆生。

舍利弗!菩薩摩訶薩住二諦中爲衆生說法:世諦、第一義諦。

부처님께서 사리불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얻을 죄과가 있지 않는 무소유득과죄(無有所得過罪)이니라. 

왜냐 하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을 얻지 않으나, 다만 공한법(空法)이 상속(相續)하기 때문에 중생이라  뿐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두 가지의 진리인 이제(二諦)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나니,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니라.


舍利弗!二諦中衆生雖不可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以方便力故,爲衆生說法。

衆生聞是法,今世吾我尚不可得,何況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及所用法!

如是,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以方便力故,爲衆生說法。”

사리불아, 이제(二諦) 가운데에서 비록 중생은 얻을  없다고 할지라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력으로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나니, 

중생은  법을 듣고도 금세에서 나라는 오아(吾我)조차도 오히려 얻을  없거늘,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그에 소용되는 법을 얻음이겠는가?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방편력으로써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느니라.”


舍利弗白佛言:“世尊!是菩薩摩訶薩心曠大!無有法可得若一相、若異相、若別相,而能如是大誓莊嚴。

用是莊嚴故,不生欲界、不生色界、不生無色界,不見有爲性、不見無爲性,而於三界中度脫衆生,亦不得衆生。何以故?衆生不縛不解;衆生不縛不解故,無垢無淨;無垢無淨故,無分別五道;無分別五道故,無業無煩惱;無業無煩惱故,亦不應有果報、以是果報故生三界中。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은 마음이 넓고 커서 하나라는 일상(一相)이나, 다르다는 이상(異相)이나, 구별되는 별상(別相)으로서는 얻을 수 있는 어떠한 법도 없으나, 이와 같이 큰 서원으로 장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엄 때문에 욕계(欲界)에 태어나지 않고, 색계(色界)에 나지도 않고, 무색계(無色界)에 나지도 않으며, 유위성(有爲性)도 보지 않고, 무위성(無爲性)도 보지 않으며,

삼계(三界) 가운데에서 중생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면서도 또한 중생을 얻지도 않습니다.

왜냐 하면, 중생은 속박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은 불박불해(不縛不解)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속박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은 불박불해(不縛不解)인 까닭에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는 무구무정(無垢無淨)이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는 무구무정(無垢無淨)이기 때문에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의 오도(五道)를 분별하지 않으며,

오도를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업(業)도 없고 번뇌도 없으며, 업도 없고 번뇌도 없기 때문에 또한 과보도 있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만, 이 과보 때문에 삼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佛告舍利弗:“如是!如是!如汝所言。若衆生先有後無,諸佛、菩薩則有過罪。諸法五道生死亦如是,若先有後無,諸佛、菩薩則有過罪。

舍利弗!今有佛、無佛,諸法相常住不異,是法相中尚無我、無衆生、無壽命,乃至無知者、無見者,何況當有色、受、想、行、識!若無是法,云何當有五道往來,拔出衆生處?

부처님께서 사리불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그대가 말한 바와 같아서, 만약 중생이 앞에서는 있다가 뒤에 없는 것이라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에게는 죄과가 있을 것이며, 제법과 5도의 생사(生死)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앞에서는 있다가 뒤에 없는 것이라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곧 죄과가 있을 것이니라.

사리불아,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간에 제법의 법상(法相)은 항상 머물러 달라지지 않는 상주불이(常住不異)이니,

이 법상(法相) 가운데에서는 오히려 무아(無我)이고, 무중생(無衆生)이고, 무수명(無壽命)이며, 나아가 아는 지자(知者)도 없고, 보는 견자(見者)도 없거늘, 하물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이러한 법이 없다면, 어떻게 5도를 왕래하면서 중생을 구할 곳이 있겠는가?

大智度論  論釋實際品 第八十 卷九十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0. 실제품(實際品) 풀이함 6

 

又問:“性空破一切法悉盡無餘,云何菩薩住性空中能行布施等諸善法?”

佛可須菩提意而說因緣:“菩薩知諸法實相,住是中,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諸法實相者,卽是性空。若一切法性不空,菩薩不應住是諸法性空中,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已,爲衆生說性空法,所謂色性空,受想行識性空,乃至爲衆生說一切種智、斷煩惱習性空法。”

다시 여쭈기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라면, 일체법을 파괴하여 남음이 없을 것이거늘, 보살이 어떻게 성공(性空)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보시 등의 모든 착한법을 행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보살은 제법의 실상을 알므로, 그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

법의 실상 그것이 곧 성공(性空)니, 만약 일체법의 성품이 성공(性空)이 아니라 보살은 법의공(性空)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할 것이니라. 

이미 중생들을 위하여 성품이 공한 성공법(性空法),  ‘물질(色)의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고, 수상행식(受想行識) 성품도 성공(性空)이다’는 것을 설명하셨으며, 

나아가 중생들을 위하여 일체종지로 번뇌의 습기를 끊는 것도 성공법(性空法)임을 설명하였다”라고 하셨다.


復次,“須菩提!十八空,若性不空,是爲壞空體。”何以故?十八空能令一切法空,

若自不空,則爲虛誑;又若不空者,則墮常邊著處,能生煩惱。

性空無實住處,無所從來、去無所至,是名常住法相。常住法相是性空之異名,亦名諸法實相。

是相中無生無滅、無增無減、無垢無淨。

또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만약 18공(空)의 성품이 공하지 않다면, 이것은 공의 체성을 파괴하는 것이 되나니, 왜냐 하면 18공은 일체법을 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만약 자성(自性)이 공하지 않다면 거짓이 되며,  만약 자성이 공하지 않다면 항상 있다는 소견의 상변견(常邊見)으로 집착하는 곳에 떨어지면서 번뇌를 내게 되는 것이다.

성품이 성공(性空)이라 실로 머무르는 곳도 없고, 오는 곳 없으며, 가도 이르는 데가 없나니, 이를 바로 항상 머무르는 법의 상주법상(常住法相)이라 하며,  

상주법상(常住法相)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의 다른 이름이며, 또한법의 실상(實相)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상주법상(常住法相) 가운데에서는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는 것이다.


“菩薩住是中,見一切法性空,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退、不疑、不悔。

何以故?不見諸法能障㝵者,以方便力故度衆生。”方便力者,畢竟無法、亦無衆生,而度衆生。

보살은 이 상주법상(常住法相)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일체법의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을 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후회하지도 않나니,

왜냐 하면, 장애가 되는 어떠한 법도 보지 않으며, 방편력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방편력(方便力)’이란 필경에는 법도 없는 필경무법(畢竟無法)이고, 또한 중생이 없는 무중생(無衆生)임에도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問曰:若衆生及法從本已來無爲,誰作方便爲度脫誰?

묻나니, 만약 중생과 법이 본래부터 무위(無爲)라면,  누가 방편을 지으며?  누구를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까?


答曰:性空名空性亦無,汝何以取是空性相作難?若有性空相,應當作難!

답하나니,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 공한 성품의 공성(空性)이라 하고, 또한 없는 무(無)라고 하거늘, 그대는 무엇 때문에  공한 성품의 공성(空性)의 상(相) 취하면서 따지는 것인가? 

만약 성품에 공한 성공상(性空相) 있다면 마땅히 따져도 되는 것이다!


復次,得諸法實相者,知是性空,是人則知諸法性空
無法、無衆生。

凡夫未得實相故,種種憶想分別;如狂人妄有所見,以爲實有。

爲度凡夫狂人故言:“爲衆生說狂法中有是諸法分別,實法中則無。”

菩薩欲滿本願故、又不著性空故,有度衆生。此中則不應難。

또한 제법의 실상을 얻은 이는 바로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임 알며, 이러한 사람은법의 성품이 성공(性空)이라서 법도 없고 중생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범부는 아직 실상을 얻지 못한 까닭에 갖가지로 기억하고 생각하며 분별하나니,

마치 미친 사람이 망령된 것이 보이면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는 것이다. 

이에 범부와 미친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미친 광법(狂法) 가운데에는 이러한 제법의 분별이 있지만, 진실한 실법(實法) 가운데에는 그러한 분별 없다”고 하신 것이다. 

보살은 본원을 만족시키고자 하며, 또한 성공(性空)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함이 있는 것이니, 이러함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復次,此經中佛自說因緣:“性空中衆生不可得,知者、見者亦不可得,乃至八十隨形好亦如是”

而菩薩立是法爲衆生說,是世諦故,非是實。

또한  경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 가운데에서는 중생도 얻을  없고 아는 지자(智者)ㆍ보는 견자(見者) 또한 얻을  없으며, 나아가 80수형호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보살은  법을 세워서 중생들을 위하나니, 이것은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로 말하는 까닭이요, 진실이 아니니라”고 하신 것이다.


此中佛說譬喩:“如佛作化人,又化作四部衆而爲說法,可有得道者不?”

須菩提言:“不也。所以者何?無定根本實事,何有得須陁洹乃至得佛者?”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비유로써 말씀하시기를 “만약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화인(化人)  변화로 사부대중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법을 설하면 도를 얻는 이가 있겠는가?”라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말하기를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정한 근본과 진실한 실사(實事)가 없거늘, 어떻게 수다원을 얻고 나아가 부처님이 되는 이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菩薩說法度衆生亦如是:衆生無有定實,但欲於顚倒中拔出衆生,著無顚倒中。無顚倒法亦無處所,是中無衆生,乃至無知者、見者。

雖空性一相,而顚倒多、不顚倒少;是故貴是性空不顚倒法。菩薩住此中,但破衆生妄想,不破衆生。

보살이 법을 설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것 역시도 이와 같아서, 중생은 정해진 진실이 없지만, 다만 뒤바뀐 가운데에서 중생을 구출하여 뒤바뀐 것이 없는 가운데에 놓아두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뒤바뀐 것이 없는 무전도법(無顚倒法) 역시도 처소가 없는 것이며,  가운데에는 중생도 없고 나아가 아는 이ㆍ보는 이까지도 없는 것이다. 

비록 공한 성품의 공성(空性) 하나의 일상(一相)이라 할지라도 뒤바뀌어 전도된 것은 많고, 전도되 않은 것은 적나니, 이러한 까닭에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과 뒤바뀌지 않는 부전도법(不顚倒法)을 귀하게 여기며, 

보살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다만 중생의 허망한 망상(妄想)만을 파괴할 뿐, 중생을 파괴하지는 않는 것이다.


又無漏法,乃至八聖道分,雖是無漏,以生滅故,不如第一義。“

須菩提!是性空,一切諸佛唯有是道,更無異道。”何以故?諸佛皆求實智不壞不異法,雖有十力、四無所畏諸異法,不名爲一道。所以者何?此皆是有爲法,轉變無常故。

是性空中,無衆生,亦無色等諸法。菩薩不爲菩薩道故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但爲性空故。

또한 무루법(無漏法)에서 8성도분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비록 무루법일지라도 나고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제일의(第一義)보다는 못하나니,

수보리야! 이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 일체 부처님께는  도(道)만 있을 뿐, 다른 도가 없는 것이니,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은 모두가 진실한 실지(實智)와 파괴되지 않고 달라지지 않는 불괴불이법(不壞不異法)을 구하기 때문이니라.

비록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 등의 여러 가지 다른 법이 있을지라도 하나의 일도(一道)라 하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모두는 바로 유위법(有爲法)이라서 옮아가고 변하면서 무상하기 때문이다.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 가운데에서는 중생도 없고 또한 물질 등의 모든법(色法)들이 없으니,

보살은 보살도를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지 않고, 다만 성품의 공한 성공(性空)만을 위하기 때문이다.


問曰:何等是性空?何等是菩薩道?

묻나니, 어떠한 것이 성품의 공한 성공(性空)이며? 어떠한 것이 보살도(菩薩道)입니까?


答曰:第一義中無分別,世諦中有分別。諸法實相名性空,餘布施等乃至八十隨形好是菩薩道。

雖行是法,不爲此法,爲求性空故,是故說:“不爲菩薩道故行。”是性空,先亦性空,中、後亦性空;

從本已來常空,無有作者;非是福德力故使空,亦非智慧力故使空,但性自爾故。

답하나니,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서는 분별이 없지만,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 가운데에는 분별이 있나니, 

제법의 실상을 성품의 성공(性空)이라 하고,  밖의 보시 등에서 80수형호에 이르기까지는 바로 보살도(菩薩道)이다.

비록 이러한 법을 행할지라도 이러한 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품의 성공(性空) 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보살도를 위해서가 아니요,  성품의 성공(性空) 행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도 역시 성품이 성공(性空)이고 중간과 나중에도 또한 성품이 성공(性空)이며, 본래부터 항상 공한 상공(常空)이라서 것이라 짓는 작자 없으며, 이것은 복덕의  때문에 공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지혜의  때문에 공하게 하는 것도 아니니, 다만 성품이 그러한 것일 뿐이다.


諸佛賢聖以大福德、智慧方便力故,破衆生心中顚倒,令知性空。

譬如虛空,性常淸淨,不著垢闇;或時風雲闇翳,世人便言:“虛空不淨。”更有猛風吹除風雲,便言:“虛空淸淨。”而虛空實無垢無淨。諸佛亦如是,以說法猛風,吹卻顚倒雲翳,令得淸淨,而諸法性常自無垢無淨。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복덕과 지혜와 방편력으로써 중생들 마음속의 뒤바뀜을 파괴하여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허공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여 더러움과 어두움이 달라붙지 않는 것이나, 간혹 바람이나 구름이 끼어서 어두워지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이 깨끗하지 못하구나”라고 하고, 

다시 세찬 바람이 불어서  어두운 구름을 걷어 없애면  “허공이 깨끗하여 졌다”고 하지만,

실로 허공에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께서도 이와 같이, 설법의 맹렬한 바람으로 뒤바뀐 번뇌의 구름을 걷어 없애어서 깨끗하게 하시나, 제법의 성품에는 항상 스스로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는 것이다.


是菩薩知一切法性空故,能行一切種種道度衆生;具足一切道,淨佛國土、教化衆生;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時,隨意壽命。隨意壽命者,菩薩得無生忍法,入如幻菩薩道,能一時變化作千億萬身,周遍十方,具足行一切菩薩道;處處國土中,隨衆生壽命長短而受其形。

如釋迦牟尼佛,於此國土壽命百年,於莊嚴佛國壽七百阿僧祇劫。佛法於五不可思議中是第一不可思議。

 보살은 일체법의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임을 아는 까닭 능히 일체 종류의 도를 행하면서 중생을 제도하고, 일체의 도를 두루 갖추며 부처님의 불국토를 깨끗하게 하고, 중생을 교화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에는 뜻대로 수명(壽命)을 누리나니, 

‘뜻대로 수명을 누린다는 수의수명(隨意壽命)’이라 함이란, 보살은 무생인(無生忍)의 법을 얻어서 환과도 같은 보살도에 들어가 일시에 변화하여 천억만의 몸이 되어서 시방에 두루하여 일체의 보살도를 두루 갖추어 행하되, 곳곳의  국토마다  안에 사는 중생의 수명이 길고 짧음에 따라  형상을 받는 것이니, 

마치 석가모니부처님이  국토에서는 수명이 백세뿐이었으나, 장엄불국(莊嚴佛國)에서는 수명이 7백 아승기겁인 것과 같으니, 이는 부처님의 불법의 다섯 가지 불가사의인 오불가사의(五佛可思議) 중에서 바로  번째 불가사의인 것이다.

 

오불가사의(五不可思議) (우익법사藕益法師의 설), 믿음과 발원과 명호를 지니는 것으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곧장 지위에 오르는 다섯 가지 불가사 한 뜻이다. 
첫째는 삼계를 가로질러 초월하니, 미혹 끊기를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바로 서방에서 사토(四土)를 가로질러 갖추니, 점차적으로 증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명호만을 지니니, 선관(禪觀)과 여러 방편을 빌리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는 이레를 기약으로 삼으니, 많은 겁과 많은 삶과 많은 해와 많은 달을 빌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한 부처님의 이름을 지니면 모든 부처님의 호념(護念)을 받으니 일체 부처님들의 이름을 지니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 석본연


佛告須菩提:一切法性空,是諸佛眞法!若得是法,則名爲佛;若說此法,名爲度衆生。

三世佛皆亦如是。離是性空,則無道無果。道者,八聖道分;果者,七種果。

所以者何?若離性空別有定法,則取相生著,著故亦無離欲,無離欲故則無道果。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체법의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 바로 모든 부처님의 진실한 불진법(佛眞法)이니, 만약  법을 얻으면  부처님이라 하고, 만약  법을 설하면 중생을 제도한다 하나니, 3세(世)의 모든 부처님도 이와 같으며,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 여의고는 도(道)도 없고 도과(道果)도 없으니, 도(道)는 8성도분이요, 도과(道果) 보리, 열반, 진여, 불성, 암마라식, 공여래장, 대원경지(능엄경의 칠상주과)의 일 가지의 과위이다. 

왜냐하면, 만약 성공(性空) 떠나서 따로 일정하게 정해진 법이 있다면  상(相) 취하여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니, 

집착하기 때문에 또한 욕탐을 떠날 수 없고, 욕탐을 떠날 수 없 때문에  도과도 없게 되는 것이다.


若離性空,雖行布施、持戒,行慈、悲等,善法力故,雖不墮惡道,生天果盡,還墮惡道,如本不異。

行性空法,亦不著性空,卽是涅槃。行餘法,生著心,有退失;若行此法,則無退失。

만약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 여의면 비록 보시와 지계를 행하고 자비 등을 행할지라도 착한법의  때문에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에 태어나기는 하지만,  과보가 다하면 다시 악도에 떨어져서 본래대로요 다르지 않게 되나니,

성품이 공한 성공법(性空法)을 행하고 또한 성공(性空)에도 집착하지 않는것이  열반인 것이다. 

 밖의 다른 법을 행하면 집착하는 마음을 내게 되고 물러남이 있지만, 만약  성공법(性空法) 행한다면 물러나거나 잃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


須菩提歡喜白佛言:“甚希有!菩薩行是性空法,亦不壞性空相。”

수보리 존자가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참으로 희유한일입니다. 

보살은  성품이 공한 성공법(性空法) 행하면서도 역시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의 상 파괴하지 않습니다”고 하였다.


佛答:“若色等法與性空異,菩薩則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以故?有空法則不可得離。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물질 등의법 등이 성품의 공한 성공(性空) 다르다면,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나니, 왜냐 하면, 공한 공법(空法)이 있는 것이라면 여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須菩提!今色等諸法實性空;菩薩知是法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所以者何?此中無有一法定是常,但凡夫生我心故,著內外法,不得脫生、老、病、死,是故菩薩行是性空,和合六波羅蜜,不壞色等諸法相 所謂若空、若不空、若空不空、若非空非不空;不作如是示諸法相,是名不壞。

所以者何?色實相卽是性空,性空云何自壞性空?乃至菩提亦如是。”此中佛說譬喩:如內虛空不壞外虛空,以同體故。”

수보리야, 지금 물질 등의 모든 색법은 실로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니, 보살은 이 법을 알고 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느니라.

왜냐하면, 이 가운데에는 결코 그것은 항상한 상(常)이라는 어떠한 일법(一法)도 없기 때문이니,

다만 범부가 나라는 아심(我心)을 내는 까닭에 안팎의 내외법(內外法)에 집착하고, 나고ㆍ늙고ㆍ병들고ㆍ죽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이니라.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이 성품의 공한 성공(性空)을 행하여 6바라밀에 화합하고, 물질 등의 모든 색법의 상(相)을 파괴하지 않나니,

이른바 ‘공하다, 공하지 않다, 공하기도 하고 공하지 않기도 하다, 또는 공한 것도 아니고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와 같이 제법의 상(相)을 보지 않나니, 이를 곧 파괴하지 않는 불괴(不壞)라고 하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물질의 실상이 곧 성품의 공한 성공(性空)이기 때문이니, 성공(性空)이거늘 어떻게 스스로 성품이 공한 것을 파괴할 수 있겠는가? 이에 보리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하느니라”고 하셨으며,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으니, ”마치 안의 내허공(內虛空)이 바깥의 외허공(外虛空)을 파괴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체성이 같은 때문이다”고 하신 것이다.

大智度論  論釋實際品 第八十 卷九十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0. 실제품(實際品) 풀이함 7

 

須菩提問:“世尊!若諸法性空無別異,菩薩於何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佛可其意言:“如是!若分別有二相,則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阿耨多羅三藐三菩提名實智慧,於色法中不行,所謂不著、不染。

所以者何?是智慧不爲取色故行,是故不行色中。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세존이시여,법은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라서 달라짐이 없다면, 보살은 어디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그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만약 분별하여 이상(二相)이 있다고 한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다”라고 하셨으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진실한 실지혜(實知慧)라 이름하여 물질의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아니니, 이른바 집착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물질(色)을 취하기 위하여 행하지 않기 때문이므로 “물질(色) 가운데에서 행하지 않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復問:“若菩提不取中行、不捨中行,當於何處行?”

取名實法,捨名空法。取名著行,捨名不著行。取名二行,捨名不二行。如是等分別。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보리를 취(取)하는  가운데에서 행하지 않고, 버리는 사(捨) 가운데에서 행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취(取)하는 것을 실제의 실법(實法)이라 하고, 버리는 사(捨)를 공한 공법(空法)이라 하며, 

취하는 것을 집착하는 착행(著行)이라 하고, 버리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 불착행(不著行)이라 하며, 

취하는 것을 둘의 이행(二行)이라 하고, 버리는 것을 둘이 아닌 불이행(不二行)이라 하나니, 

이와 같이 분별하는 것이다.


佛反問須菩提:“於汝意云何?佛所化人爲何處行?”

須菩提言:“是化人無處行,化人無心、無心數法故。菩提亦如是。”

부처님께서 반문(反問)하시면서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화인(化人) 어느 곳에서 행하겠는가?”라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답하기를 “이 변화로  화인이 행하는 곳은 없습니다. 변화한 화인은 마음도 없고 마음에 속한 심수법도 없기 때문이니, 보리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復問:“於汝意云何?阿羅漢夢中菩提爲在何處行?”

須菩提言:“阿羅漢尚不眠,何況夢中菩提有行處!”

 물으시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라한이 보리를 꿈 속의 어느 곳에서 행하는 것인가?”라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답하기를 “아라한은 오히려 잠도 자지 않거늘, 하물며 꿈속에서 보리를 행하는 곳이 있음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問曰:菩提有三種:阿羅漢菩提、辟支佛菩提、佛菩提。阿羅漢菩提不在有漏心中、無記心中行,但在無漏心中行;佛何以故問“阿羅漢夢中菩提何處行”?

묻나니, 보리에는  가지가 있어서, 아라한의 보리와 벽지불의 보리와 부처님의 보리입니다. 

아라한의 보리는 유루(有漏)의 마음과 무기(無記)의 마음에서 행하지 않고 다만 무루(無漏)의 마음에서만 행할 뿐이거늘,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아라한이 꿈속에서는 어느 곳에서 보리를 행하는가?”라고 물으신 것입니까?


答曰:阿羅漢是一切漏盡聖人則無夢,佛以必無處故問,欲明必無行法。

답하나니, 아라한은 일체 번뇌가 다한 성인이어서 꿈이 없으니,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반드시 없는 필무(必無)이므로 반드시 행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밝히시고자 물은 것이다.


問曰:乃至佛猶尚有眠,何以知之?佛嘗命阿難:“汝四襞優多羅僧敷,我欲小眠,汝爲諸比丘說法。”

묻나니, 나아가 부처님조차도 오히려 잠을 주무시나니,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일찍이 아난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접어서 삼의(三衣)의 하나인 우다라승(優多羅僧, 승가리)을 펴라. 나는 잠시 동안 잠을 자고 싶구나. 너는 여러 비구들을 위하여 법을 설해 주어라”고 하신 것이며, 


又薩遮尼乾問佛:“佛自念晝日有眠不?”

佛言:“春末夏初,以時熱故小眠息,除食患故。”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살차니건(薩遮尼乾)이 부처님께 여쭈기를 “부처님께서는 낮에 주무셨던 기억하십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늦은 봄에서 초여름까지는 날이 더웠기 때문에 잠깐 동안 자면서 쉬었다. 식곤증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느니라”고 하셨으니, 

 

薩遮尼乾白佛:“餘人有言:‘晝日眠是癡相。’”

佛言:“汝置!汝不別癡相。諸漏能生後身相續不斷者,是名癡相。雖常不眠亦是癡;若是諸漏永滅無餘,雖眠不名癡。”如是等,經中處處說。須菩提何以言“阿羅漢尚不眠”?

살차니건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다른 사람들의 말로는 ‘낮잠을 자는 것은 바로 어리석은 치상(癡相)’이라고 합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너는 어리석은 치상(癡相) 분별하지 못하는구나. 모든 번뇌로 다시 몸을 받고 태어나면서  상속(相續)을 끊지 못하는 것을 바로 어리석은 치상(癡相)이라 하는 것이니, 비록 항상 잠을 자지 않는다 하여도 그것 또한 어리석은 것이요, 만약  번뇌가 영원히 다하여 남음이 없다면 비록 잠을 잔다 할지라도 어리석다고 하지 않느니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경의 곳곳에서 말씀하거늘, 수보리 존자는 무엇 때문에 “아라한은 오히려 잠을 자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眠有二種:一者、眠而夢,二者、眠而不夢。阿羅漢非爲安隱著樂故眠,但受四大身法,應有食、息、眠、覺,是故少許時息名爲“眠”;不爲夢眠。故須菩提言:“阿羅漢尚不眠。”

답하나니, 잠을 자는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것이요, 

둘째는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아라한은 안온하기 위하여 쾌락에 집착하면서 잠을 자는 것이 아닌 것으로, 다만 4대(大)의 몸을 받았기에 당연히 먹고 쉬고 잠자고 깨어나는 법이 있을 뿐이므로, 잠깐 동안 쉬는 것을 잠을 잔다고 하지만 꿈을 꾸면서 자는 잠이 아닌 것이라. 

따라서 수보리 존자가 “아라한은 오히려 잠을 자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有人言:“離欲者,得禪定,色界繫四大入身中,身心歡樂則無有眠;慧解脫阿羅漢,色界四大不入身中,故有眠”

是故須菩提言:“阿羅漢尚不眠。”是故阿羅漢有眠、有不眠。佛以方便力,爲度衆生,受人法故現眠。

어떤 말하기를 “욕탐을 여읜 이는 선정을 얻어 색계(色界)에 매인 4대(大)가  속으로 들어오면서 몸과 마음이 기뻐지므로 잠자는 일이 없지만, 

혜해탈(慧解脫)의 아라한은 색계의 4대가  속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잠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때문에 수보리 존자가 “아라한은 오히려 잠을 자지 않는다”고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잠을 자기도 하고, 잠을 자지 않기도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방편력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하는 법을 받아 짐짓 잠자는 일을 보이시는 것이다.


須菩提復問:“若不行者,云何菩薩從一地至十地,乃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보살이 어떻게  번째 지위의 일지(一地)에서부터 10지(地)까지 이르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까?”라고 하였다.


佛可其意:“菩提雖無處行,未具足六波羅蜜諸法,終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菩薩住色相,乃至菩提相中住,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捨色等法,亦不著菩提相,

知色等法卽是菩提,常寂滅,無法若增、若減、若垢、若淨,若得道、若得果。”

但世諦故說菩薩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第一義中無有色乃至菩提。

부처님께서 그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보리는 비록 행하는 곳이 없다고 할지라도 아직바라밀의법을 두루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끝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나니,

 보살은 물질의 색상(色相) 머무르고 나아가 보리의 상(相) 머물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만, 물질 등의법을 버리지도 않고, 또한 보리의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물질 등의 색법(等法)이  보리요 항상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이나, 더한다거나 줄어든다거나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거나 도를 얻는다거나 과위를 얻는다는 등의 어떠한 법도 없는 것임을 알지만, 

다만 세속 이치인 세제(世諦) 때문에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말하는 것일 뿐, 제일의(第一義)에서 물질(色)에서 보리에 이르기까지도 없다”고 하셨다.


欲明是事故,反問須菩提:“於汝意云何?汝斷煩惱得道時,有所得不?

所謂如夢等五衆、若道、若道果,決定一法不?”

부처님께서는 이러함을 밝히고자 짐짓 반문하시면서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는 번뇌를 끊고 도를 얻었을 때에 얻을 것이 있는 것인가?”고 하셨으니,

이른바 꿈과도 같은 5중(衆, 오온)이 도(道)나 도과(道果)로서 결정코 어떠한 일법(一法)이라도 얻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須菩提言:“不得也!”所以者何?須菩提意:住無相門中入道,云何取相?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얻을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모양 없는 무상문(無相門)에 머무르면서 도에 들거늘, 어떻게 취하겠는가!’라고  것이다.


佛言:“汝若乃至不得微細少法,云何說汝爲阿羅漢?”

須菩提言:“世諦法故,說言阿羅漢;凡夫顚倒法中有得、有失,有衆生、有法。”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그대가 미세한 조그마한법(少法)까지도 얻지 못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아라한이라고 말하는 것인가?”라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세제법(世諦法) 때문에 아라한이라 말하는 것이니, 범부의 뒤바뀐 전도법(顚倒法) 가운데에서는 얻음도 있는 유득(有得)이고, 잃는 것도 있는 유실(有失)이며, 중생도 있는 유중생(有衆生)이고, 법도 있는 유법(有法)인 것입니다”고 하였다.


佛言:“菩提亦如是,世諦法故,說有菩薩、說有色等乃至菩提;菩提中,無有定法,亦無衆生,亦無菩提。

菩薩觀是菩提法,無有增、無有減。所以者何?諸法性如是。

菩薩亦不得是諸法性,何況有初發心乃至十地,及六波羅蜜、三十七品乃至十八不共法當有所得!無有是處!

이에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으니, 

“보리 또한 그와 같으니라. 세속의 이치인 세제법(世諦法) 때문에 보살이 있다고 말하고, 물질(色) 등에서 보리에 이르기까지가 있다고 말하지만, 보리 가운데에는 정해진법(定法)도 없고 또한 중생도 없으며 또한 보리도 없는 것이다.

보살은 이러한 보리의 법을 관찰하되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나니, 왜냐하면,법의 성품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보살 또한 이 제법의 법성(法性)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최초의발심이 있겠으며, 나아가 10지(地)와 6바라밀과 37품(品) 내지는 18불공법이 있겠는가?

얻는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이어야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한 것이다!


所以者何?諸法性是一切法根本尚不可得,何況六波羅蜜等是作法當有定實!

如是!菩薩行是諸法性,得佛時,能大利益衆生。

왜냐하면, 제법의 법성(法性)은 곧 일체법의 근본임에도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이 짓는 작법(作法)이자 정해진 실체로서 있는 6바라밀 등이겠는가?

이와 같이 보살은 제법의 법성(法性)을 행하여 부처님이 되는 득불(得佛)한 때에 중생들을 크게 이롭게 하느니라.”


大智度論卷第九十 終 대지도론 90권을 마침.

大智度論  論釋實際品 第八十 卷九十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0. 실제품(實際品) 풀이함 5

 

問曰:無始生死展轉甚多,何以止齊無明?

묻나니, 비롯함이 없는 무시(無始)로부터 생사(生死)를 전전하면서, (갈애와 취함의 애취(愛取)에 대한 집착이) 아주 많았거늘, 무엇 때문에 무명으로 한정하는 것입니까?


答曰:是事先已答。菩薩思惟,爲人從苦得脫故,求苦因緣。衆生過去、現在老死等苦,不可得除;爲除未來世老死苦,斷相續,不令復生。

如良醫,過去病不可治,現在病亦不可治;服藥但能治應起病,破其冷熱,不復令起。

又如失火燒舍,不爲己過去火故勤滅,亦不爲現在火故勤滅,但爲未來火不令更燒故勤滅。

답하나니, 이러함에 대한 것은 앞에서 이미 대답하였다. 

보살이 사유하기를 사람들을 고통에서부터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하여 괴로움의 고인연(苦因緣) 구할, 중생이 겪는 과거와 현재의 노사(老死) 등의 괴로움을 제거시킬  없지만, 

미래 세상에 있어서 노사 등의 괴로움을 제거시키기 위하여  상속(相續)을 끊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마치 용한 의사가 과거의 병은 치료할  없고, 현재의 병도 낫게   없을 때에는 약을 먹여서 냉(冷)과 열(熱)을 파괴하는 치료를 하여서 다만 앞으로 병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으며,

 잘못하여 불이 나서 집이 탈때, 이미 불이 탄 때문(과거)에 끄고자 애쓰지 않고, 또한 현재 불이 타고 있는 것도 끄려고 하지 않되, 다만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것만은 더 이상 타지 않도록 애쓰 것과 같다.


良醫、滅火人勤方便亦不虛。菩薩滅衆生苦惱亦如是:過去苦已滅,無所復能;

現在苦惱,先世因緣成就故不可卻;但破未來世老死等苦因緣故。破是生法,老死等苦自然永滅。

이 용한 의사와 불 끄는 사람이 힘써 행하는 방편이 헛된 것이 아니듯이, 보살이 중생의 고뇌를 없애고자 하는 것도 이와 같으니,

과거의 괴로움은 이미 사라진 이멸(已滅)한 것이므로 다시 작용하지 않은 것이고,

현재의 괴로움은 전생의 인연으로 성취된 것인지라 물리칠 수 없는 것이나,

다만 미래 세상에 늙어 죽는 등의 괴로움의 고인연(苦因緣)만을 파괴할 수 있을 뿐이니,

이러한 태어남의 생법(生法)과 늙어 죽는 등 괴로움을 파괴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영원히 소멸하는 것이다.

 

是故菩薩欲滅未來世老死等苦因緣生,得現在“有”等八因緣:一名有漏業。

二名現在世諸煩惱,所謂四取、一愛。是二種煩惱,從二心數法生,所謂受及觸。觸能生一切心數法,受前生故,得名觸是受因緣。受雖能生三毒,一切衆生,愛是舊煩惱。

그러므로 보살은 미래 세상에 있어서 늙어 죽는 노사(老死) 등의 괴로움의 고인연(苦因緣) 생기는 것을 소멸시키고자 현재에서 존재의 유(有) 등의 여덟 가지 팔인연(八因緣)을 얻는 것이니, 

첫째는 유루업(有漏業)이라 하고, 

둘째는 현재 세상의 모든 번뇌인 현재세제번죄(現在世諸煩惱)로써, 이른바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의 사취(四取)와애(一愛, 갈애, 탐욕)이다. 

  가지의 번뇌는 두 마음에 속한 법으로부터 생기나니, 이른바 느낌의 수(受)와 접촉의 촉(觸)이다.

접촉의 촉(觸)은 일체의 마음에 속한 심수법을 내나니, 느낌의 수(受) 이전에 생기는 것이므로 그렇게 이름하는 것이며,

접촉의 촉(觸)은 바로 느낌의인연(受因緣)이니,

비록 느낌의 수(受)가 3독(毒)을 낼지라도 일체 중생들은   번뇌에 애착하는 것이다.

 

觸因緣是內六入,如先說。雖有外六入,內六入無故觸等心數法不生,是故內六入得名。

名色是六入因緣,如此中說。初入胎識,是名色因緣。

접촉의 촉인연(觸因緣)은 바로 안(眼, 눈)ㆍ이(耳, 귀)ㆍ비(鼻, 코)ㆍ설(舌, 혀)ㆍ신(身, 몸)ㆍ의(意, 뜻)의 내육입(內六入)이니,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비록 색(色, 물체)ㆍ성(聲, 소리)ㆍ향(香, 냄새)ㆍ미(味, 맛)ㆍ촉(觸, 닿임)ㆍ법(法)의 외육입(外六入)이 있을지라도 안의 내육입(內六入)이 없으면 접촉 등의 마음에 속한 심수법이 생기지 않나니,

이러한 까닭에 내육입(內六入)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명색(名色)은 바로입(六入)의 인연이니, 이 가운데에서의 설명과 같이, 처음에 태(胎) 속으로 들어가는 의식의 식(識)은 바로 명색(名色) 인연인 것이다.


識、名色在胎中,此中雖
有六入,未成就、未可用故,未得名字。旣生嬰孩,未能有所作,但有六入。轉大有六觸。如小兒蹈火履冰,但有觸,未知苦樂。轉大受苦樂,未深愛著。

如小兒雖瞋,未能起殺等惡業;雖喜,未能起施等善業。年及成人,得苦生恚、得樂生愛。求樂具故,取欲等四取。取時,能起善惡業。

식(識)과 명색(名色) 태(胎)에 있을 때, 안에서 비록입이 있을지라도 아직 성취되지 못하여서 작용할  없으므로 아직 이름(名)을 얻지 못하나, 

이미 태어난 젖먹이는 아직 어떠한 동작을  수도 없이, 다만 6입만 있을 뿐이며, 

점차 성장하면서 안촉(眼觸), 이촉(耳觸), 비촉(鼻觸), 설촉(舌觸), 신촉(身觸), 의촉(意觸)의 육촉(六燭)이 있게 된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불을 밟고 얼음을 밟아도 다만  접촉만이 있을 뿐, 고통과 쾌락을 아직  모르지만 점차로 커가면서 고통과 쾌락을 느끼게 되나, 아직은 깊이 애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마치 어린 아이가 비록 화를 낼지라도 아직 살생(殺生) 등의 나쁜 업은 일으킬  없으며, 

비록 기뻐할지라도 아직 보시 등의 착한업을 아직은 일으킬  없지만, 

나이가 들어서 성인(成人)이  뒤에 괴로움을 만나면 화를 내고 즐거움을 얻으며 사랑의 애(愛) 내는 것과 같이,

쾌락거리를 구하는 까닭에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의 4취를 취하며, 이를 취할 때에 선악의 업을 일으키게 되는 것다.


若知先一世無明、業因緣,則億萬世可知;譬如現在火熱,過去、未來火亦如是。

若無明因緣更求其本,則無窮,卽墮邊見,失涅槃道,是故不應求;若更求,則墮戲論,非是佛法。

만약 전생의  세상 동안의 무명에 대한 업인연을 알게 된다면 억만 세상 동안의 일도   있을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현재의 불이 뜨거운 것과 같이 과거와 미래의  또한 그러한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무명인연(無明因緣)의  근본을 추구해 본다면 끝없이 무궁하므로  치우친 견해의 변견(邊見)에 떨어지고 열반의 도를 잃게 되기 때문에 구하지 않아야 하며,

만약 다시 구한다 하면  희론에 떨어질 것이니, 그것은 부처님의법이 아닌 것이다.


菩薩欲斷無明故,求無明體相;求時,卽入畢竟空。何以故?佛經說:“無明相:內法不知,外法不知,內外法不知。”菩薩以內空觀內法,內法卽空;以外空觀外法,外法卽空;以內外空觀內外法,內外法卽空。

如是等一切是無明相,如先品『德女經』中“破無明”廣說。

보살은  무명을 끊고자 무명의 체상(體相)을 구하며, 구할 때에는  필경공으로 들어가나니,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는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무명상(無明相)이란,

나(我)의 소의(所依)가 되는 안촉(眼觸), 이촉(耳觸), 비촉(鼻觸), 설촉(舌觸), 신촉(身觸), 의촉(意觸)의 내육입(內六入)의 내법(內法)으로도 알지 못하고,

나(我)의 소의(所依)가 되는, 색처(色處) · 성처(聲處) · 향처(香處) · 미처(味處) · 촉처(觸處) · 법처(法處)의 외육입(外六入)의 외법(外法)으로도 알지 못하며, 

내적인 6근(六根)과 6식(六識)과 외적인 6경(六境)의 18계(十八界)인, 안팎의 내외법(內外法)으로도 알지 못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보살이 내공(內空)으로써 내법(內法) 관찰하면 내법(內法)  공하고,

외공(外空)으로써 외법(外法)을 관찰하면 외법(外法) 역시  공하며, 

내외공(內外空)으로써 내외법(內外法) 관찰하면 내외법(內外法)  공하나니,

이와 같은 일체가 바로 무명상(無明相)이니, 마치 앞에 품(品)의 '덕녀경(德女經)'에서 무명을 파괴하는 대하여 자세히설명한 바와 같은 것이다.


復次,菩薩求無明體,卽時是明,所謂諸法實相,名爲實際。觀諸法如幻如化,衆生顚倒因緣故,起諸煩惱,作惡罪業,輪轉五道,受生死苦。譬如蠶出糸自裹縛,入沸湯火炙。

凡夫衆生亦如是,初生時未有諸煩惱,後自生貪欲、瞋恚等諸煩惱;是煩惱因緣故,覆眞智慧,轉身受地獄火燒湯煮。

또한 보살이 무명의 체(體)을 구하면, 그것이 곧 명(明)이 되나니,

이른바 법의 실상을 실제(實際)라 하니, 법을 관찰하면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은 것인데도 중생들의 뒤바뀐 전도인연(顚倒因緣) 때문에 모든 번뇌를 일으켜 나쁜 죄업을 짓고, 오도(五道)를 바퀴   전전하면서 생사의 고통을 받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누에가 실을 뽑아내어  몸을 둘러싸고 감은 뒤에 끊는 물속에 들어가 삶아지는 것과 같이,

범부 중생도 이와 같아서 처음에 태어날 때에는 아직 모든 번뇌가 있지 않다가,  스스로가 탐욕과 성냄 등의 모든 번뇌를 내나니, 이러한 번뇌의 인연 때문에 진실한 지혜를 가리게 되며, 몸을 바꾸면서 지옥의 불에 타고 끊는 물에서 삶아지는 것이다.

 

菩薩知是法本末皆空,但衆生顚倒錯故受如是苦。菩薩於此衆生起大悲心,欲破是顚倒故,求於實法,行般若波羅蜜,通達實際;種種因緣教化衆生,令住實際。是故住實際無咎。

보살은 이러한 법의 본말(本末)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공한 것이나, 다만 중생들이 뒤바뀌고 착각한 까닭에 이러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을 아나니, 보살은 이러한 중생들에 대하여 대비심을 내어서 뒤바뀜의 전도를 깨뜨려 주고자 짐짓 진실한 실법(實法)을 구하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실제(實際)를 통달하고, 갖가지의 인연으로 중생을 교화하며 실제에 머무르는 것이니, 이러한 까달게 머무른다 하여 허물되지 않는 것이다.


復次,經中說:“若衆生與實際異,菩薩不應行般若波羅蜜。”

異者,實際是畢竟空,衆生際是決定有;若爾者,應難:“若諸法實際相空,菩薩云何爲衆生故修是實際?”若衆生畢竟空、實際定有,無衆生則無所利益,爲誰故行實際?

 경에서 말하기를 “만약 중생과 실제(實際)가 다르다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없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다르다는 이(異)’라고 함이란, 실제는 바로 필경공이고, 중생제(衆生際)는 결정코 존재하는 유(有)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제법의 실상이 공하다면 보살이 어떻게 중생들을 위하여  실제를 닦는 것인가?

만약 중생이 필경공이고 실제가 반드시 있는 유(有)라면, 중생은 없는 것이므로 이롭게  것도 없거늘, 누구를 위하여 실제를 행하겠는가?’라고 따져야  것이다.


今衆生際實不異實際,故行般若波羅蜜。欲覺悟狂惑顚倒凡夫故,行般若波羅蜜;令衆生住實際中,而不壞實際。

是時,須菩提更問:“若衆生際、實際不異,云何以實際著實際?”自性不應自性中住,如指端不能自觸指端。

그러나 여기에서는 중생제(衆生際)는 실로 실제(實際)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뒤바뀌어 전도된 범부를 깨우쳐 주고자 하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실제(實際)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면서도 실제(實際)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이 때에 수보리 존자가  여쭙기를, “만약 중생제와 실제가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실제로써 실제에 집착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자성(自性)이 자성(自性) 가운데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은 마치 손가락 끝은  손가락 끝을 만질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佛可其意,菩薩以方便故,建立衆生於實際,如衆生、實際不異,一亦不可得。
若是一,則壞實際相。

所以者何?得是一性故。菩薩知是二法不一不二,亦不不一、亦不不二,畢竟寂滅無戲論相。

菩薩生大悲心,但欲拔出衆生離於顚倒故,教化衆生。

부처님께서 그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보살은 방편으로써 중생을 실제에 세우면서도 중생과 실제가 동일하다거나 다르다는 것을 또한 얻을  없다”고 하셨다. 

만약 동일하다고 한다면  실제의 상(相) 파괴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동일한 일성(一性) 되기 때문이다. 

보살은 중생과 실제의 이법(二法)이 하나도 아닌 불일(不一)이요, 둘도 아닌 불이(不二)이며, 또한 하나가 아닌 것도 아닌 불불일(亦不不一)이요, 둘이 아닌 것도 아닌 역불불이(亦不不二)이며, 마침내 고요히 사라진 필경적멸(畢竟寂滅)한 것이라서 희론의 상(相) 없는 것임을 알며,

보살은 대비심을 내어서 다만 중생들을 구출하면서 뒤바뀜의 전도로부터 여의게 하고자 하는 까닭에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又問:“云何名方便?”

佛言:“菩薩行般若波羅蜜時,以方便力故,建立衆生於檀中,說是檀先際、後際空,中際亦爾。”如經中廣說。

菩薩知實際者到衆生邊。如先「檀品」中說。衆生聞已發心,折薄煩惱,深著布施。菩薩憐愍衆生:“我從慳中拔出,今復著布施。衆生若受布施,福盡受諸苦惱;又受富貴因緣,得作大罪,則墮地獄。”

여쭈기를, “어떠한 것을 방편이라 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방편력으로써 중생을 단(檀, 보시) 가운데에 세우고  단을 설하면서 ‘선제(先際)와 후제(後際)도 공하며 중제(中際)도 이와 같다’고 하느니라”고 하셨으니,  가운데서 자세히 말씀하신 바과 같다.

보살은  실제(實際)를 알기 때문에 중생들에게 이르게 되나니, 앞의 '단품(檀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중생은 이러한 말씀을 들은 뒤에 발심하여 번뇌를 꺾고 보시에 깊이 집착하니, 

보살은 중생을 가엾이 여기어, “나는 간탐 가운데에서 그를 구출했다”고 하면서 이제는 다시 보시에 집착하게 된다. 

중생이 만약 보시를 받았어도 복이 다하면 모든 괴로움을 받게 되고,  복덕과 부귀의 인연을 받으면서  죄를 짓게 되면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是故愍此衆生得少許時樂而受苦長久,是故菩薩爲說布施實相,所謂畢竟空,作是言:“是布施過去已滅,不可見、不可得、不可用,但可憶念,如夢所見無異;未來未生故,亦無所有、畢竟空。是布施先、後際無故,中際亦無。”

如破六塵中破色法中說:“現在布施雖眼見,分分破析,乃至微塵不可得。”布施三世空,施者、受者、果報亦如是。

 중생은 잠시 동안만의 즐거움을 얻을 뿐, 괴로움은 오랜 세월동안 받게 되는 까닭에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그들을 위하여 보시의 실상(實相),  필경공을 설해 주면서 말하기를, “이 보시가 지나가고 나면 이미 소멸하는 것이므로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으며, 수용할 수도 없고 다만 기억할  있을 뿐인 것이 마치 꿈에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며, 미래는 아직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있지 않아서 필경공이며,  보시는 선제와 후제도 없기 때문에 중제도 또한 없다”고 하는 것이다.

육진(六塵)을 파한 곳과 색법(色法)을 타파한 가운데에서 말한 것과 같이, 현재의 보시가 비록 눈으로   있다 할지라도 부수고 쪼개어서 작은 미진(微塵) 이르면 얻을 수가 없는 것이며, 

보시는 3세(世) 동안  공한 것이니, 보시하는 시자(施者) 받는 수자(受者) 과보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菩薩語施者言:“布施等法是初入佛法門”實際中,實際相亦無,何況布施!汝莫念、莫著布施等法!若不念、不著如布施體相,如是布施者,則得甘露味、甘露果。”

甘露味者,是八聖道分;甘露果者,是涅槃。菩薩雖住實際中,以方便力,布施門度衆生。餘波羅蜜亦如是,如經中廣說。

보살은 보시하는 이에게 말하기를 “보시 등의 법은 부처님의법에 들어가는문이다. 실제(實際) 가운데에는 실제의 상(相)조차 없거늘 하물며 보시이겠는가!

그대는 보시 등의 법을 생각하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말라. 

만약 생각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면 보시의 체상(體相)과 같아지나니,

이와 같은 보시는 감로미(甘露味)와 감로의 열매를 얻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감로미(甘露味)란  8성도분이며, 감로의 열매란  열반(涅槃)인 것이다.

보살이 비록 실제(實際) 가운데에 머무를지라도 방편력인 보시의 문(門)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나니, 

 밖의 다른 바라밀에서도 역시 이와 같으니, 경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다.


須菩提白佛言:“世尊!若一切法性空,性空中無法及非法、亦無衆生,菩薩云何住是空中求一切種智?”

佛答:“菩薩安立性空中故,能行是布施等諸法。”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의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라면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 가운데에는 법과 법이 아닌 것도 없고, 또한 중생도 없거늘, 보살은 어떻게  공한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일체종지를 구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 가운데에 편히 머무르기 때문에  보시 등의법을 행하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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