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四攝品 第七十八之餘 卷八十九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8. 사섭품을 풀이함 ② 3
是菩薩自不著故,亦教他令得無所著,無所著故無所㝵。譬如佛所化人布施,亦不受布施報,但爲度衆生故;乃至行一切種智,不受一切種智報。菩薩摩訶薩亦如是,行六波羅蜜,乃至一切法有漏、無漏、有爲、無爲,不住亦不受報,但爲度衆生故。何以故?是菩薩摩訶薩善達一切諸法相故。”
이 보살은 스스로가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집착함이 없게 하며,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장애되는 것도 없느니라.
비유하자면, 마치 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화인(化人)이 보시를 하면서도 또한 보시의 과보를 받지 않으며, 다만 중생들을 위하여 일체종지를 행할 뿐, 일체종지의 과보를 받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6바라밀 내지는 일체법의 유루ㆍ무루와 유위ㆍ무위를 행하면서도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이고 또한 과보를 받지도 않는 불수보(不受報)이나, 다만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할 뿐이니라.
왜냐 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일체법의 법상(法相)을 통달한 때문이니라.”
▶論. 問曰:八十隨形好是莊嚴身法,“識滿足”何以在隨形好中?
▷논. 묻나니, 80수형호는 몸을 장엄하는 법이거늘 ‘의식(識)이 만족하다는 식만족(識滿足)’이 무엇 때문에 수형호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까?
答曰:此識是果報生識,世閒好醜自然而知。凡人識不具足故,學人法乃知;佛一歲具足滿乃生故,身、識皆具足。餘人若八月、若九月處胎,摠言十月;菩薩處胎十月,摠得一歲,身根具足故,果報得識亦具足。
답하나니, 이 의식(識)은 과보로 생긴 것이니, 세간의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저절로 아는 것이다.
범부는 의식(識)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까닭에 인간의 법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지만,
부처님께서는 한 해 동안 완전히 갖추신 뒤에야 태어나신 때문에 몸과 의식의 신식(身識)이 모두 완전하게 갖추셨으며,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여덟 달 또는 아홉 달 동안 어머니의 태(胎)에 있으므로 통틀어 ‘열 달 동안’이라고 말하지만, 보살은 태 안에 열 달 동안 있었으므로 통틀어 ‘한 해 동안’이라 하는 것이며, 그 동안에 몸의 감관이 완전하게 갖추어진 것이므로 과보로 얻는 의식(識)도 완전하게 갖추어진 것이다.
問曰:足安立住處與安住處何異?
묻나니, 그 머무르는 곳에서 평평한 발바닥으로 편안히 선다는 족안립주처(足安立住處)와 머무르는 곳에서 편안하다는 안주처(安住處)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答曰:住處安者,如白衣勇士,牢持器仗,安據住處,則不可動。又出家時,魔民、惡鬼無能動轉令退敗者。四十二字義,如摩訶衍中說。一字盡入諸字者,譬如兩一合故爲二,三一故爲三,四一爲四,如是乃至千萬。又如阿字爲定,阿變爲羅,亦變爲波;如是盡入四十二字。四十二字入一字者,四十二字盡有阿分,阿分還入阿中。
답하나니, ‘머무르는 곳에서 편안하다는 안주처(安住處)’라 함이란, 마치 속인 중에 용감한 병사가 무기를 단단히 잡고 있어야 할 곳에 확고히 의거하여 있으면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으며, 또한 출가했을 때에는 악마의 백성인 마민(魔民)이나 악귀(惡鬼)들이 그를 동요시켜 물러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며,
‘42자(범어)’의 뜻에 대해서는 마하연(摩訶衍)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
‘한 글자의 일자(一字)가 모든 글자에 모두 다 들어간다’고 함이란,
비유하자면, 마치 둘이라는 것은 하나가 하나가 합한 까닭에 둘이 되고, 셋도 하나 하나가 합한 까닭에 셋이 되며, 넷도 하나 하나가 합한 까닭에 넷이 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해서 천ㆍ만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또 범어의 초자(初字)인 아자(阿字)는 일정하지만 아(阿)가 변하여 라(羅)가 되기도 하고 또한 변하여 파(波)가 되는 것과도 같나니, 이렇게 하여 모두 다 42자(字)에 들어가는 것이며,
‘범어의 42자가 하나의 일자(一字)에 들어간다’고 함이란, 42자에는 모두가 아(阿)자의 부분이 있어서 아(阿)자의 부분은 다시 아(阿)자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善知字故,善知諸法名;善知諸法名故,善知諸法義。無字卽是諸法實相義。所以者何?諸法義中,諸法無名字。須菩提問:“若諸法畢竟空無名字,云何菩薩住果報六神通,爲衆生說諸法?若畢竟無衆生,則無有法!”
글자(字)를 잘 알기 때문에 제법의 이름을 잘 알고, 제법의 이름을 잘 알기 때문에 모든 법의(法義)를 잘 알며,
‘글자가 없다는 무자(無字)’라 함이라, 그것이 곧 제법의 실상의(實相義)란 뜻이니, 왜냐하면, 제법의 법의(法義)에는 모든 법에 대한 명자(名字)가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제법이 필경공이라서 이름과 글자의 명자(名字)가 없다면, 보살이 어떻게 과보로 얻는 육신통에 머물러서 중생들을 위하여 제법을 설하겠습니까?
만약 필경에 무중생(無衆生)이라면 곧 법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佛可須菩提言:“如是!以十八空故,一切法不可得,我、衆生乃至知者、見者,乃至當知佛、菩薩皆空。如是知已,而爲衆生說是空法。”
若衆生是有而爲說空,是則不可;以衆生空,但從顚倒有,是故菩薩不失於空而爲說法。
不失者,不作諸法皆空,所說不空;若以所說不空,則爲失空相;若口說空而心是有,是亦爲失。
이에 부처님 께서는 수보리 존자의 말을 인가하면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18공(空)이기 때문에 일체법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이니, 나(我)와 중생 내지는 아는 지자(知者)와 보는 견자(見者)를 얻지 못하며,
부처님과 보살에 이르기까지도 모두가 공(空)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알고서 중생들을 위하여 이 공법(空法)을 설하는 것이다.
만약 중생이 존재하는 것임에도 그들에게 공을 설한다면, 그것은 곧 옳지 못한 것이지만 중생은 공한 것이요, 다만 뒤바뀜의 전도(顚倒)로 인하여 존재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보살은 공을 잃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법을 설하는 것이다.
‘잃지 않는 불실(不失)’이라 함이란, 제법 모두가 공하지 않다면, 말한 바가 불공(不空)이라는 것이니,
‘말한 바가 불공(不空)이다’고 한다면, 곧 공한 공상(空相)을 잃게 되는 것이니,
만약 입으로는 공이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존재한다면, 그것은 잃는 실(失)이 되는 것이다.
此中佛自說:“不二,不壞法相故。”欲明了是事,說譬喩:“如佛所化作化人,而爲說法,持戒、布施諸功德。”若以如是方便說法,是則無咎。則能拔出衆生於顚倒,無縛無解故。第一義中無縛無解,世諦故有縛有解。
此中佛自說因緣:“色不縛不解。何以故?是不縛不解中,無色相故。乃至識亦如是。”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둘이 아닌 불이(不二)를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법상(法相)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를 분명히 알게하시고자 비유로써 말씀하셨으니, 마치 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화인(化人)과 같아서, 그는 변화로 된 화인이지만 그를 위하여 지계(持戒)와 보시 등 모든 공덕에 대한 법을 설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방편을 써서 법을 설할지라도 그것은 곧 허물이 없는 것이니, 중생을 뒤바뀐 전도됨에서 구출하기 때문이요, 속박도 없고 벗어남도 없는 무박무해(無縛無解)이기 때문이다.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속박도 없고 벗어남도 없는 무박무해(無縛無解)이나,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이기 때문에 속박이 있고 벗어남도 있는 유박유해(有縛有解)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물질(色)은 속박하지 않고 벗어나지 않는 불박불탈(不縛不脫)이니, 왜냐 하면, 이 속박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는 불박불탈(不縛不脫) 가운데에서는 물질의 색상(色相)이 없기 때문이며, 나아가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신 것이다.
菩薩如是用不住法故,住空法中爲衆生說法;衆生不可得,衆生及一切法不可得故。
此中佛自說因緣,所謂無所有法不住無所有,譬如虛空不住虛空。自性法不住自性法,
譬如火不住火中。他性法不住他性法,譬如水性中無火性,又他性不定故。
보살은 이와 같이 머무르지 않는 불주법(不住法)으로써 공한 공법(空法) 가운데에 머물러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나, 중생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이니, 중생과 일체법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이른바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법(無所有法)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법(無所有法)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마치 허공이 허공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과 같고,
자성법(自性法)은 자성법(自性法)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은 마치 불이 불 가운데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다른 성품의 타성법(他性法)이 타성법(他性法)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은 마치 물의 성품 가운데에 불의 성품이 없는 것과 같으며, 또한 타성(他性)은 일정하지 않은 부정(不定)이기 때문이다”고 하신 것이다.
若能如是淸淨說法,是菩薩於諸佛賢聖則無有過。何以故?諸佛、賢聖不著一切法,說法者亦不著一切法。
諸佛、賢聖以畢竟空、皆寂滅相爲心所行,說法者亦如是。
諸佛、賢聖入三解脫門,得一切法實性,所謂無餘涅槃;說法者隨是法故,無咎。
此中佛自說因緣:“諸佛、賢聖得是法已,爲衆生說法,不轉法性,法性空無相故。”
만약 이와 같이 청정하게 법을 설한다면, 이 보살은 곧 모든 부처님과 성현에 대하여 허물이 없나니,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법을 설한 설법자(說法者) 또한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필경공으로써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심(寂滅相心)의 행할 바를 삼기 때문이니, 법을 설하는 설법자(說法者) 또한 이와 같다.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삼해탈문(三解脫門)에 들어가 일체법의 진실한 실성(實性)을 얻나니, 이른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니, 법을 설하는 설법자는 이 법에 따르기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이 법을 얻은 뒤에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되 법성(法性)을 굴리지 않나니, 법성은 공(空)하여 무상(無相)이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須菩提問:“若不轉法性,色等諸法與法性異不?”
佛答:“不也!何以故?色等諸法實相卽是法性故。”佛意:以菩薩說法時,亦不壞法性。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법성을 굴리지 않는다면 물질(色) 등의 제법은 법성과 다른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아니니라”고 하셨으니,
왜냐 하면, 물질(色) 등의 제법의 실상 그것이 곧 법성(法性)이기 때문이니, 부처님의 뜻은 보살이 설법할 때에도 법성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須菩提問:“色等諸法亦與法性不異,何以故但貴法性?”以佛答“色不異法性”故,
故須菩提難:“若不異者,云何分別有善惡、白黑、須陁洹等諸果?”
佛答:“色等法雖不離法性,以世諦故有分別,於第一義中無分別。”
何以故?得第一義聖人無所分別,聞有所得不喜,聞無所有不憂;得空無相證故,乃至微細法尚不取相,何況分別有善惡!未得實相者,欲得第一義故,有所分別。
佛此中自說因緣:“是法無言說,亦無生滅垢淨法者,所謂畢竟空、無始空。”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물질(色) 등의 제법이 또한 법성(法性)과 다르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다만 법성만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물질(色)은 법성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에 수보리 존자가 따져 묻기를 “만약 다르지 않다면, 어찌하여 분별하여서 선(善)ㆍ악(惡)과 백(白)ㆍ흑(黑)과 수다원 등의 모든 과위가 있는 것입니까?”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물질(色) 등의 법이 비록 법성을 여의지 않을지라도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 때문에 분별이 있는 것이니, 으뜸가는 이치의 제일의(第一義)에서는 분별이 없다”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제일의(第一義)를 얻은 성인들은 분별하는 것이 없어서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이라고 들어도 기뻐하지 않고,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라고 들어도 근심하지 않으니, 공(空)하고 무상(無相)을 증득한 까닭이다.
이에 미세한 법조차 상(相)을 취하지 않거늘, 하물며 분별하여 선과 악이 있다고 하겠는가?
아직 실상을 얻지 못한 이로 하여금 제일의(第一義)를 얻게 하려는 까닭에 분별을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가운데에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 법에는 언설(言說)도 없고, 또한 나고 없어지는 생멸((生滅))이거나 더럽고 깨끗하다는 구정(垢淨)의 법이 없나니, 이른바 필경공(畢竟空)이요 무시공(無始空)이다”고 하셨다.
問曰:此中何以但說二空名爲法?
묻나니,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필경공(畢竟空)과 무시공(無始空), 두 가지 공만을 법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一切所有:若法、若衆生。若言畢竟空,則破諸法;若言無始空,則破衆生。破此二法已,則一切法盡破。
此中菩薩爲衆生說法,是故以二空破二事;雖有餘空,不如畢竟空甚深畢盡。餘空如火燒木,猶有灰燼;畢竟空無灰無燼。有人言:若說十八空無咎,略說故說二空。
답하나니, 일체의 존재하는 법과 중생에 대하여 ‘필경공’ 이라고 하면 곧 제법을 파괴하는 것이며,
‘무시공’ 이라고 하면 곧 중생을 파괴하는 것이니,
제법과 중생, 이 두 가지 법을 파괴하고 나면 곧 일체법 모두를 파괴한 것이 되는 것이다.
보살은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두 가지 공으로써 두 가지를 파괴하나니,
비록 그 밖의 공이 있을지라도 필경공이 심히 깊어서 필경에 다하는 진(盡)보다 못하나니,
그 밖의 공은 마치 불이 나무를 태워도 여전히 재와 남은 불씨가 있지만, 필경공은 남은 재도 없고 남은 불씨도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18공(空)으로 설명하여도 허물할 것은 없지만, 요약하여 설하는 까닭에 필경공과 무시공, 두 가지 공만을 말한다”고도 하였다.
須菩提言:“若以世諦故分別有善惡、白黑及諸聖果者,第一義中凡夫人應有須陁洹等聖果!”
何以故?若以世諦虛妄中分別有諸賢聖者,第一義中凡夫應作賢聖。
須菩提分別實相、凡夫爲異。佛言:“第一義一相。”是故須菩提言:“凡夫應是聖人!”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만약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 때문에 분별하여 선ㆍ악ㆍ백ㆍ흑과 모든 성인의 과위가 있다고 한다면, 범부에게는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서도 수다원 등 성인의 과위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왜냐 하면 만약 세제(世諦)의 허망한 가운데에서 분별하면서 ‘모든 성현이 있다’고 한다면,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서는 범부도 성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보리 존자는 실상(實相)과 범부는 다르다고 분별하고 있으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일의(第一義)는 한 모양의 일상(一相)이니라”고 하셨으니,
이러한 까달게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그렇다면 범부도 마땅히 성인이어야 합니다”고 한 것이다.
爾時,佛答:“若凡夫知分別是第一義、是世諦者,凡夫人應有須陁洹等諸聖果;
以凡夫實不知道,不知分別道,不知行道、修道,何況得道果!”
그 때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범부가 ‘이것은 제일의(第一義)이다. 이것은 세제(世諦)이다’라고 분별한다면, 범부에게도 마땅히 수다원 등 모든 성인의 과위가 있어야 하지만,
범부는 실로 도(道)를 알지 못하고 도를 분별할 줄도 모르며, 도를 행하거나 도를 닦을 줄도 모르거늘, 하물며 도의 과위를 얻음이겠는가?”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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