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論釋薩波崙品 第八十八之餘卷 第九十七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8. 살타파륜품을 풀이함 ② 4

 

得如鏡像三昧”者,得是三昧者,觀三界所有,如鏡中像,虛誑無實。

‘득여경상(得如鏡像)삼매’란,  삼매를 얻은 이는 삼계(三界) 있는 모든 것이 마치 거울 속의 형상과 같은 것으로, 거짓이요 실체가 없는 것임을 며, 

 

“得一切衆生語言三昧”者,得是三昧故,能解一切衆生語言。

‘득일체중생어언(得一切衆生語言)삼매’란, 이 삼매를 얻은 까닭으로 일체 중생들이 하는 모든 말을 이해하게 되며, 

 

“一切衆生歡喜三昧”者,入是三昧,能轉衆生瞋心令歡喜。

‘일체중생환희(一切衆生歡喜)삼매’란, 이 삼매에 들어가면 중생들의 성내는 마음을 바꾸어서 도리어 기쁘게 할 수 있으며, 

 

“入分別音聲三昧”者,入是三昧中,皆能分別一切天、人音聲大小、麤細等。

‘입분별음성(入分別音聲)삼매’란, 이 삼매에 들어가면 일체의 하늘과 사람들의 음성의 크고ㆍ작고ㆍ거칠고ㆍ세밀한 것 등을 분별할 수 있으며, 

 

“得種種語言字句莊嚴三昧”者,得是三昧者,義理雖淺,能莊嚴字句語言,令人歡喜,何況深義!

‘득종종어언자구장엄(得種種語言字句莊嚴)삼매’란,  삼매를 얻은 이는 비록  이치가 얕을지라도, 그 문구 언어를 아름답게 장엄하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기뻐하게   있거늘, 하물며 깊은 이치의 심의(深義)이겠는가! 

 

“無畏三昧”者,得是三昧者,不畏一切魔民、外道、論師及諸煩惱。

“性常默然三昧”者,入是三昧者,常默然攝心;爲度衆生故,隨所應聞而出音聲,如天妓樂,應意而出。

‘무외(無畏)삼매’란, 이 삼매를 얻은 이는 일체 악마의 백성과 외도의 논사(論師)와 모든 번뇌의 성품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성상묵연(性常黙然)삼매’란, 이 삼매에 들어간 이는 항상 잠자코 있으면서 마음을 가다듬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그들이 응하여 듣는 바에 따라 음성을 내는 것이 마치 하늘의 음악이 뜻에 응하여 울려 나오는 것과 같으며, 

 

得無㝵解脫三昧”者,得是三昧者,於一切法中得無㝵智慧。

“離塵垢三昧”者,得是三昧者,諸煩惱、結使塵垢皆滅,卽是無生法忍三昧。

‘득무애해탈(得無礙解脫)삼매’란,  삼매를 얻은 이는 일체법에 대하여 막힘이 없는혜를 얻으며, 

‘이무구(離無垢)삼매’란,  삼매를 얻은 이는 모든 번뇌결사의 진구(塵垢, 때)가 모두  소멸하나니, 이는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삼매인 것이다.

 

“名字語句莊嚴三昧”者,得是三昧者,能種種莊嚴偈句語言說法。

“見諸法三昧”者,入是三昧者,以見世諦及第一義諦知諸法

‘명자어구장엄(名字語句莊嚴)삼매’란, 이 삼매를 얻은 이는 게송의 글귀와 언어를 갖가지로 아름답게 장엄하여서 설법할 수 있으며, 

‘견제법(見諸法)삼매’란, 이 삼매에 들어간 이는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보아서 제법을 알게 되며, 

 

諸法無㝵頂三昧”者,如人在山頂遍觀四方;菩薩住是三昧中,普見一切諸法無㝵。

“如虛空三昧”者,入是三昧者,身及外法皆如虛空,皆得自在。

‘제법무애정(諸法無礙頂)삼매’란, 마치 사람이 산의 정상에 있으면서 사방을 두루 살펴보는 것과 같이, 보살도  삼매에 머무르면서 일체법들을 두루 보아 막힘이 없으며, 

‘여허공(如虛空)삼매’란,  삼매에 들어간 이는 몸(내법,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과 바깥 법인 외법(外法,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이 모두 허공과 같이 자유자재하게 되며, 

 

“如金剛三昧”者,如金剛能破諸山;是三昧亦如是,能破障㝵六波羅蜜法,直至佛道。

“不畏著色三昧”者,得是三昧者,乃至天色不著,何況餘色!

‘여금강(如金剛)삼매’란, 마치 금강이 모든 산을 깨뜨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삼매 또한 이와 같아서 6바라밀을 장애하는 장애법을 깨뜨리고 곧장 부처님의 불도에 이르게 되며, 

‘불외착색(不畏著色)삼매’란, 이 삼매를 얻은 이는 하늘의 물질(色)조차도 오히려 탐착하지 않거늘, 하물며 그 밖의 물질(色)이겠는가?

 

得勝三昧”者,欲有所作,皆能得勝不負。

“轉眼三昧”者,得是三昧者,魔及魔民欲見菩薩短者,轉之令作好見。

‘득승(得勝)삼매’란, 어떠한 일을 하고자 하면 모두 이기게 되고 지는 일이 없으며, 

‘전안(轉眼)삼매’란,  삼매를 얻은 이는 악마나 악마의 백성이 보살의 단점(短點)을 보고자 한다면, 그것을 바꾸어서 좋게 보이게 하며, 

 

“畢法性三昧”者,得是三昧者,見一切法畢入法性中。

“能與安隱三昧”者,得是三昧,雖往來六道迴轉,自知必當作佛,安樂無憂。

‘필법성(畢法性)삼매’란, 이 삼매를 얻은 이는 일체법이 필경에는 법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능여안은(能與安隱)삼매’란, 이 삼매를 얻으면 비록 6도(道)에 왕래하고 있을지라도, 이것이 언젠가는 바뀌어서 반드시 부처님이 되어 안락하고 근심이 없을 것임을 스스로 알며, 

 

師子吼三昧”者,入是三昧者,皆能降伏一切魔民、外道,無敢當者。

‘사자후(師子吼, siṁhanāda. 부처님의 말씀을 사자(siṁha)가 포효하는 소리(nāda)에 비유한 말) 삼매’란,  삼매에 들어간  모두가 일체 악마의 백성을 항복시킬  있으며, 외도가 감히 당해  이가 없게 되며, 

 

“勝一切衆生三昧”者,得是三昧,於一切衆生最勝。一切有二種:一者、名字一切,二者、實一切。於三界著心凡夫及聲聞、辟支佛及初發意未得是三昧者中勝,故言一切。

‘승일체중생(勝一切衆生)삼매’란,  삼매를 얻으면 일체 중생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나게 되는 것으로,

일체(一切)라는 것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명자(名字, 이름)에서 일체, 

둘째는 진실의 실(實)이라는 것에서의 일체이다. 

삼계(三界) 탐착하는 마음을 지닌 범부와 성문과 벽지불과 처음 뜻을  초발의 보살로서 아직  삼매를 얻지 못한 이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일체(一切)라 하는 것이다. 

 

“花莊嚴三昧”者,得是三昧者,見十方佛,坐七寶蓮花上,於虛空中,雨寶蓮花於諸佛上。

‘화장엄(花莊嚴)삼매’란, 이 삼매를 얻은 이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7보로 된 연꽃 위에 앉아 계시며 허공 가운데에서 모든 부처님에게 보배 연꽃이 비처럼 내리는 것을 보며, 

 

“斷疑三昧”者,得是三昧者,雖未得佛,能斷一切衆生所疑。

“隨一切堅固三昧”者,諸法實相名堅固;得是三昧者,隨諸法實相,不隨餘法。

‘단의(斷疑)삼매’란,  삼매를 얻은 이는 비록 아직 부처님이 되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일체 중생들의 의심을 끊어   있으며, 

‘수일체견고(隨一切堅固)삼매’란,법의 실상을 견고(堅固)라 하나니,  삼매를 얻은 이는법의 실상을 따르고  밖의 다른 법은 따르지 않으며, 

 

“出諸法得神通力無畏三昧”者,得是三昧者,過出一切凡夫法,得菩薩六神通、十力、四無所畏。

“能達諸法三昧”者,得是三昧者,乃至諸法如、法性、實際中通達不住,乃至諸法平等。

‘출제법득신통력무외(出諸法得神通力無畏)삼매”란, 이 삼매를 얻은 이는 일체 범부의 법을 초월하여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신족통(神足通), 누진통(漏盡通)인 보살의 여섯 가지 육신통과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를 얻으며, 

‘능달제법(能達諸法)삼매’란, 이 삼매를 얻은 이는 제법의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에 이르기까지를 통달하나 그 것에 머물지 않아서, 이에 제법의 평등에 이르게 되며, 

 

“諸法財印三昧”者,財名善法,印者名相。如人得印綬,無敢陵易;菩薩得善法財印,亦無能爲作留難者。

“諸法無分別見三昧”者,若分別諸法,卽生憎、愛心;得是三昧者,見一切法,不作分別。

‘제법재인(諸法財印)삼매’란, 재(財)는 착한 법을 말하고, 인(印)은 상(相) 말하는 것으로,

마치 사람이 인수(印綬, 정인 正印)를 얻으면 감히 업신여길  없는 것과 같이, 보살도 착한법의 재보에 대한인(財印)을 얻게 되면 그를 방해할  있는 이가 없게 되며, 

‘제법무분별견(諸法無分別見)삼매’란, 만약 제법을 분별한다면,곧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삼매를 얻은 이는 일체법을 분별하는 것을 보지 않게 되며, 

 

“離諸見三昧”者,“見”者,六十二邪見,及色等法中取相,乃至佛見、法見、僧見、涅槃見,皆名爲見。所以者何?取相能生著心故。

‘이제견(離諸見)삼매’란, 견(見)이란 62종의 삿된 사견(邪見)과 물질(色) 등의 법에서 상(相)을 취하는 것과, 부처님에 대한 소견의 불견(佛見)ㆍ가르침에 대한 소견인 법견(法見)ㆍ승가에 대한 소견인 승견(僧見)ㆍ열반에 대한 소견인 열반견(涅槃見) 등도 모두 견(見)이라 하나니,

왜냐하면, 상(相)을 취하여서 탐착하는 마음의 착심(著心)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離一切相三昧”者,卽是無相解脫門相應三昧。“離一切著三昧”者,離一切相故,於一切法亦不著。

“除一切懈怠三昧”者,得是三昧者,如此中說乃至七歲不坐不臥。菩薩得是三昧,常無懈怠心,乃至得佛,初不止息。

‘이일체상(離一切相)삼매’란,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과 상응하는 삼매이며, 

‘이일체작(離一切作)삼매’란, 일체의 상(相) 여의어서 일체법에 대하여서도 탐착하지 않는 것이며, 

‘제일체해태(除一切懈怠)삼매’란,  삼매를 얻은 이는, 이 가운데에서 설한 바와 같이 칠년(七年) 동안 앉지도 않고 눕지도 않으니, 보살이  삼매를 얻으면 항상 게으른 마음이 없고 이에 부처님이 되기까지 그치거나 쉬지 않으며, 

 

“得深法明三昧”者,深法名諸佛法一切智慧等;菩薩得是三昧故,能遙見佛法,思惟籌量,知深妙無比。

‘득심법명(得深法明)삼매’란, 깊은 심법(深法)이란 곧 모든 부처님 불법의 일체지혜 등을 말하는 것으로,

보살이 이 삼매를 얻었기 때문에 멀리서부터 부처님의 불법을 보고 사유하며 헤아려서 그 깊고 오묘함이 견줄 데 없는 무비(無比)라는 것을 알게 되며, 

 

“不可奪三昧”者,得是三昧者,行菩薩法,無能奪其志者。

“破魔三昧”者,得是三昧力,魔雖是欲界主,菩薩以人身能破魔事。

‘불가탈(不可奪)삼매’란,  삼매를 얻은 이는 보살법을 행할 때, 그의 뜻을 빼앗을  있는 이가 없으며, 

‘파마(破魔)삼매’란,  삼매의 힘을 얻으면, 보살은 사람의 몸이지만  욕계(欲界)의 주인인 악마의 일을 깨뜨릴 수 있으며, 

 

“不著三界三昧”者,得是三昧,身雖在三界中,心常在涅槃故不著。

“起光明三昧”者,得是三昧者,能放無量光明,照於十方。

‘불착삼계(不著三界)삼매’란, 이 삼매를 얻으면 그 몸은 비록 삼계에 있을지라도 마음은 언제나 열반에 있게 되기 때문에 불착(不著)이라 하는 것이며, 

‘기광명(起光明)삼매’란, 이 삼매를 얻은 이는 무량한 광명을 놓아서 시방을 비추어 주며, 

 

見諸佛三昧”者,得是三昧,雖未得天眼、天耳,而能見十方諸佛,聞十方諸佛所說法,諮問所疑。

‘견제불(見諸佛)삼매’란,  삼매를 얻은 이는 비록 아직 천안(天眼) 천이(天耳) 얻지 못하였을지라도,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뵙게 되며,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들으면서 의심되는 바를 묻기도 하게 되는 것이다.

 

波崙住如是等三昧中,卽見十方無量阿僧祇諸佛在大衆中爲諸菩薩說般若波羅蜜。

살타파륜은 이와 같은 등의 삼매에 머무르면서 곧 시방의 무량한 아승기의 모든 부처님께서 대중들 가운데에 계시면서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하시는 것을 보게 되었다.

 

大智度論卷第九十七 終 대지도론 97권을 마침.

大智度論 論釋薩波崙品 第八十八之餘卷 第九十七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8. 살타파륜품을 풀이함 ② 3

 

問曰:曇無竭菩薩爲是生身?爲是法身,爲度衆生故,以神通力化作此身?

若化身者,何用六萬女、園觀、浴池種種莊嚴而自娛樂?

若是生身,云何能令薩波崙供養具皆在空中化成大臺,入諸三昧乃至七歲?

묻나니, 담무갈보살의 몸은 생신(生身)입니까?

아니면, 법신(法身)이라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신통력으로써 그 몸을 변화한 것입니까?

만약 변화한 화신(化身)이라면 어떻게 6만의 채녀(婇女)들과 원관(園觀)과 목욕하는 욕지(浴池) 등의 갖가지 장엄을 스스로 즐기는 것이며?

만약 그가 생신(生身)이라면, 어떻게 살타파륜의 공양 거리 모두가 공중에 있으면서 변화로 큰 화대(華臺)가 되게 하였으며?

모든 삼매(三昧)에 들어가서 7년 동안이나 계셨던 것입니까?

 

答曰:有人言:是生身菩薩,得諸法實相及禪定神通力故,欲度是城中衆生。

如餘菩薩利根故,能入禪定,亦能入欲界法;爲攝衆生故,受五欲而不失禪定。

如人避熱故,在泥中臥,還洗則如故。凡夫鈍根故,不能如是。

是故以神通力化作華臺,七歲入定;又以方便力故,能受五欲,如先義說

답하나니, 어떤 분은, “그는 곧 생신보살(生身菩薩)으로써, 제법의 실상(實相)과 선정과 신통력을 얻은 까닭에 이 성 안에 있으면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신 것이며,

그 밖의 다른 보살도 근기가 영리하기 때문에 선정에 능히 들어가고 또한 욕계(欲界)의 법에 들어가서 중생을 거두어 주기 위하여 5욕(欲)을 받으면서도 선정을 잃지 않나니,

마치 사람이 더위를 피하고자 일부러 진창 속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깨끗이 씻으면 본래대로 되는 것과 같은 것이나,

범부는 근기가 둔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신통력으로 화대를 변화로 만든 것이며,

7년 동안 선정(禪定)에 들었으며, 또 방편력으로 오욕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앞에서 그 이치를 설명한 것과 같으며, 

 

菩薩不但行一道,爲衆生故,行種種道引導之。如龍起雲,能降大雨、雷電、礔礰

菩薩亦如是,雖是生身,未離煩惱而能修行善法,爲衆生故不盡結使。

礔 벼락 벽, 礰 돌소리 력

보살은 다만 하나의 일도(一道)만을 행하지 않나니, 중생들을 위하여 갖가지의 도를 행하면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 마치 용이 구름을 일으켜서 큰 비를 내리고자 할 때, 우레와 번갯불이며 벼락을 치는 것과 같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이 생신은 아직 번뇌를 여의지 못하였을지라도 착한 선법을 잘 수행하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결사(結使)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有人言:是菩薩是法性生身,爲度衆香城人故,變化而度。若是生身,云何能令十方佛稱讚,而遣薩波崙令從受法,得六萬三昧?是故知是大菩薩變化身。

譬如大海中龍死相出時,如果熟應墮,金翅鳥則來食之;衆生亦如是,行業因緣熟故,大菩薩來度之。

어떤 분은, “이 보살은 바로 법성생신(法性生身)으로, 중향성의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변신하여 나타나서 제도하고 계시는 것이니,

만약 생신이라면 어떻게 시방의 부처님이 칭찬하면서 살타파륜을 그에게 보내어서, 그로 하여금 법을 받게 하며,  6만의 삼매를 얻게 하겠는가?

이 때문에도 그는 큰 보살로서 변화로 된 화신(化身)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큰 바다 속의 용이 죽을 조짐이 나타났을 때에는, 마치 과일이 익으면 떨어지는 것과 같아서, 금시조(金翅鳥)가 날아와서 그를 잡아먹는 것과 같은 것으로,

중생들도 이와 같아서 행한 업인연(業因緣)이 성숙한 까닭에 큰 보살이 와서 그들을 제도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爾時,薩波崙聞空中佛,大歡喜,大欲心生故,“我何時當得見曇無竭菩薩 說般若波羅蜜者,能令我心中愛、見等諸煩惱箭出?”

그 때에 살타파륜은 허공에서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기뻐하면서 큰 서원의 마음이 일어난 대욕심생(大欲心生)이었기에 ‘언제쯤이나 나에게 반야바라밀을 설해주시며, 내 마음 속에 있는 애착과 견해 등의 모든 번뇌의 화살을 뽑아내게 해 주실 담무갈보살을 뵙게 될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欲明是事故,此中佛說毒箭譬喩:如人毒箭在身,更無餘念:一者、苦痛急,二者、毒不疾出,則遍滿身中而失命。

波崙亦如是,諸邪、疑等箭入心,貪欲等毒塗箭。聞曇無竭菩薩能拔出此箭。

是人以邪見箭毒傷心,人畏貪欲等毒遍入身中,奪智慧命,與凡人同死;是故急欲見曇無竭菩薩,無復餘念。

부처님께서는 이러함을 명료하게 하시고자, 여기에서 독화살의 비유를 말씀하셨으니,

마치 사람이 독화살이 몸에 박혀 있으면 다시 다른 생각이 있을  없나니,

첫째는 고통 때문에 다급한 까닭이요,

둘째는 독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온 몸에 두루 퍼져서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살타파륜도 이와 같아서 모든 삿된 의심 등의 화살이 마음에 박혀 있고 탐욕 등의 독이  화살에 발라져 있는데,

담무갈보살이  화살을 뽑아낼  있다는 것을 듣고는, 

삿된 사견의 화살 독이 마음을 상하고  탐욕 등의 독이  속에 두루 퍼져 들어가 지혜의 목숨을 빼앗으면서 범부와 다름 없이 죽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때문에 급히 담무갈보살을 뵙고할 뿐, 그 밖의 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此中說斷諸所有心。所有心者,取相著,乃至善法中亦有是病。

이 가운데에서 ‘모든 존재하는 마음의 소유심(所有心)을 끊겠다’고 한 것에서,

‘존재하는 마음의 소유심(所有心)’이란 상을 취하는 집착하는 취상착(取相著)인 것이니,

나아가 착한 선법 가운데서에도 역시 이러한 병이 있는 것이다.

 

波崙目睹佛身,先所未見,從佛聞,得法喜故,離五欲喜,卽得一切法中無㝵知見。

살타파륜이 눈으로 직접 부처님 몸을 보았으나, 앞에서는 보지 못하였던 것이며,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듣고 법희(法喜)를 얻었기 때문에 오욕에 대한 기쁨을 여의고, 제법 가운데에서 막힘이 없는 지견인 무애지견(無礙知見)을 얻은 것이다.

 

無㝵知見者,如薩波崙力所得無㝵,非佛無㝵。

是時,得入諸三昧門 “諸法性觀三昧”者,能觀一切諸法實性。實性者,如先種種因緣說。

막힘이 없는 지견인 무애지견(無礙知見)이란, 살타파륜과 같은 이의 힘으로 얻게 되는 막힘없는 지견으로, 부처님의 막힘없는 지견인 불무애지견(佛無礙知見)은 아니며, 

이 때에 모든 삼매의 문에 들게 되었으니,

‘제법성관(諸法性觀)삼매’라 함은, 일체법의 진실한 성품인 실성(實性)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니,

진실한 성품의 실성(實性)이란 앞에서 갖가지 인연으로 설명한 것이다.

 

“諸法性不可得三昧”者,初得三昧,所謂空、無生、無滅;今得是三昧,則不著是性,不得其決定相。

‘제법성불가득(諸法性不可得)삼매’라 함이란처음에 얻은 삼매는 이른바 공(空)ㆍ무생(無生)ㆍ무멸(無滅)이지만이제  삼매를 얻으면   성품에도 집착하지 않고  결정된 결정상(決定相) 얻지 않는 것이며, 

 

“破諸法無明三昧”者,諸法於凡夫人心中,以無明因緣故,邪曲不正,所謂常、樂、我、淨;得是三昧故,常等顚倒相應無明破,但觀一切法無常、空、無我。

‘파제법무명(破諸法無明)삼매’라 함은, 제법은 범부인의 마음속에서는 무명(無明)의 인연 때문에 삿되고 굽고 바르지 않아서. 이른바 항상 있다는 상(常)ㆍ즐겁다는 낙(樂)ㆍ'나'라는 아(我)ㆍ깨끗하다는 정(淨)이라고 하지만,

이 삼매를 얻었기 때문에 항상하다는 등의 뒤바뀜에 상응하는 무명(無明)이 파괴되어서, 다만 ‘일체법은 무상(無常)ㆍ공(空)ㆍ무아(無我)이다 ’고 관찰할 뿐인 것이다.

 

問曰:若是菩薩破一切法中無明,此人不須見佛,何用至曇無竭菩薩所?

묻나니, 만약 이 보살이 일체법의 무명(無明)을 깨뜨렸다면, 이 사람은 오히려 부처님을 뵙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담무갈보살에게 갈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까?

 

答曰:破無明不唯一種有遮令不起亦名爲破,有得諸法實相故破無明。

又無明種數甚多:有菩薩所破分,有佛所破分,有小菩薩所破分、大菩薩所破分;如先說燈譬喩。

답하나니, 무명을 깨뜨린다는 파무명(破無明)에는 다만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니,

막아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도 역시 깨뜨리는 파(破)라고 하며,

제법의 실상을 얻은 까닭에 무명을 깨뜨리는 파무명(破無明)이 있는 것이며, 

또한 무명의 종류와 수효가 매우 많으니, 보살로서 깨뜨릴 부분이 있고 또 부처님으로서 깨뜨릴 부분이 있으며, 작은 보살로서 깨뜨릴 부분이 있고 대 보살로서 깨뜨릴 부분이 있는 것이니, 앞에서 등불의 비유로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又須洹亦名破無明,乃至阿羅漢方是實破;大乘法中亦如是,新發意菩薩得諸法實相故亦名破無明,乃至佛無明盡破無餘。是故薩波崙於佛法中邪見、無明及我見皆盡故,得名破無明三昧,無咎。

또한 수다원 또한 무명을 깨뜨린 파무명(破無明)이라 하며,

나아가 아라한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실로 파무명(破無明)한 것이니,

대승(大乘)의 법에서도 이와 같아서 새로이 뜻을 낸 초발의 보살이 제법의 실상을 얻었기 때문에 또한 파무명(破無明)하였다고 하는 것이며,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무명이 모조리 파괴된 진파(盡破) 되어서 남음이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살타파륜도 부처님의 불법 가운데에서 삿된 사견과 무명과 그리고 나라는 아견(我見)이 다하여서 파무명삼매(破無明三昧)라는 것을 얻은 것이니, 여기에 허물될 것이 없는 것이다.

 

“諸法不異三昧”者,得是三昧,觀一切法一相,所謂無相。

‘제법불이(諸法不異)삼매’라 함은 삼매를 얻으면 ‘일체법은 하나의 일상(一相)이니, 이른바 무상(無常)이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諸法不壞自在三昧”者,得是三昧,觀一切法如、法性、實際、無爲相故名不壞。得是法已,得自在,了了知諸法;爲佛道故,不證是法。

‘제법불괴자재(諸法不壞自在)삼매’란 삼매를 얻으며, ‘일체법은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ㆍ무위(無爲)의 상(相)이다’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파괴하지 않는 불괴(不壞)라 하며, 

 법을 얻은 뒤에는 자유자재하게 되어서 제법을 분명히 알게 되면서도부처님의 불도를 위하여 일부러  법을 증득하지 않는 것이며, 

 

“諸法能照明三昧”者,以摠相、別相知一切法。

‘제법능조명(諸法能照明)삼매’란, 전체의 총상(總相)과 각각의 별상(別相)으로 일체법을 아는 것이며,

 

“諸法離闇三昧“者,無明有二種:一者、厚,二者、薄。薄者名無明,厚者名黑闇。

破厚無明故名離闇,先破薄無明故名破諸法無明。

‘제법이암(諸法離闇)삼매’란, 무명(無明)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두터운 후(厚)한 것이요, 둘째는 얇은 박(薄)한 것으로,

두터운 것은 흑암(黑闇)이라 하며, 이 두터운 무명을 깨뜨리기 때문에 흑암을 여의는 이암(離闇)이라 하지만,

앞에서는 얇은 무명을 깨뜨린 까닭에 제법의 무명을 깨뜨리는 파제법무명삼매(破諸法無明三昧)라고 한 것이다.

 

“諸法無異相續三昧”者,五衆念念滅,相似相續生,死時,相續生而不相似。得是三昧,知諸法念念相續法不異。

‘제법무이상속(諸法無異相續)삼매’란, 5중(衆, 오온)은 생각마다 사라지면서도 서로가 비슷하게 끊어지지 않고 상속하는 상상상속(相似相續)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니, 서로 비슷하지는 않지만 죽을 때에도 끊어지지 않고 상속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나,

이 삼매를 얻으면 제법은 생각마다 상속하는 법이라서 달라지지 않는 염염상속법불이(念念相續法不異)라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諸法不可得三昧”者,卽是一切法空相應三昧。

‘제법불가득(諸法不可得)삼매’란, 곧 일체법공(一切法空)과 상응하는 삼매이며, 

 

“散華三昧”者,得是三昧者,於十方佛前,能以七寶華散佛。

‘산화(散華)삼매’란 삼매를 얻은 이는 시방의 부처님 앞에서 7보(寶)의 꽃을 부처님께 뿌리는 삼매이며, 

 

“諸法無我三昧”者,觀一切法無我。

‘제법무아(諸法無我)삼매’란, 일체법은 무아(無我)라고 관찰하는 사매이며,

 

“如幻威勢三昧”者,得是三昧者,能種種變化身。如大幻師,能引導衆生發希有心;如大幻師,以幻力故,能轉一國人心。

‘여환위세(如幻威勢)삼매’란, 이 삼매를 얻는 이는 갖가지로 몸을 변화하는 것이 마치 큰 환술사와 같아서,

중생들을 인도하여 희유(稀有)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마치 큰 환술사가 환술의 힘으로 일국(一國)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大智度論 論釋薩波崙品 第八十八之餘卷 第九十七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8. 살타파륜품을 풀이함 ② 2

 

▶論. 問曰:薩波崙何以忘,不問空中聲?

▷논. 묻나니, 살타파륜은 어찌하여 공중에서 나는 소리인 공중성(空中聲)에게 잊고서 묻지 않았던 것입니까?

 

答曰:薩波崙大歡喜覆心故忘;如人大憂愁、大歡喜,以此二事故忘。

답하나니, 살타파륜은 너무도 기쁜 마음으로 가려졌었기 때문에 잊어버린 것이니,

마치 사람이 큰 근심이 있거나 큰 기쁜 일이 있으면, 이 두 가지 때문에 다른 일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空中聲已滅,何以住此七日,不更求問處?

묻나니, 공중의 소리인 공중성(空中聲)은 이미 사라져 없거늘, 무엇 때문에 그 곳에서 7일 동안 머물면서 다시 물을 수 있는 문처(問處)를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까?

 

答曰:如本於空閑處一心求般若故,空中有聲;今亦欲一心如本,冀更聞聲,斷其所疑。

復次,薩波崙於世樂已捨,深入佛道,愛樂情至;空中聲告,少爲開示,竟未斷疑,其聲便滅。如小兒得少美味,著是味故,更復啼泣,而欲得之;薩波崙亦如是,得般若波羅蜜因緣味,不能通達,不知那去,是故住而啼泣。

답하나니, 본래는 비고 고요한 공한처(空閑處)에 있으면서 일심으로 반야를 구한 까닭에 공중에서 소리인 공중성(空中聲)이 있게 되었던 것과 같이, 지금도 일심으로 바라기를, 처음과 같이 다시 그 음성을 듣고 의심되는 것을 끊고자 한 것이다.

또 살타파륜은 세간의 즐거움을 이미 버리고 부처님의 불도에 깊이 들어가서 좋아하는 애락정(愛樂情)이 지극하였기에 공중성(空中聲)으로 인하여 조금은 열리게 되었으나, 아직 의심을 완전히 끊지 못하였데 그 소리가 곧 사라져버린 것이니, 

마치 어린아이가 맛있는 음식의 맛을 보면 그 맛에 탐착하는 까닭에 더욱 더 울고 보채면서 그 음식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이,

살타파륜도 반야바라밀의 인연의 맛을 얻기는 하였으나 통달할 수도 없었고, 또한 어디로 가야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곳에 서서 슬피 운 것이다.

 

問曰:何以乃至七日,佛身乃現?

묻나니, 무엇 때문에 7일이 되어서야 부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까?

 

答曰:譬如人大渴故,乃知水美。若二日、三日,精進欲未深;若過七日,恐其憂愁妨心,不任求道。是故七日憂愁。如譬喩,經中說。

답하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몹시 목이 마를 때에야 비로소 물의 참맛을 알게 되듯이, 2일ㆍ3일로써는 정진과 서원이 아직 깊지 못하나, 만약 7일이 지난 뒤에는 그 근심이 마음을 가로막아서 도를 구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한 것이다.

그 때문에 7일 동안이나 근심한 것이니, 이 비유는 경에서의 설명과 같은 것이다.

 

問曰:薩波崙何以愁憂乃爾,如喪愛子?

묻나니, 살타파륜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근심한 것이 마치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것과 같았던 것입니까?

 

答曰:般若波羅蜜於諸法中第一實,是十方諸佛眞實法寶;薩波崙得少氣味,未具足故憂愁。

如喪愛子,念其長大,多所成辦,冀得其力;菩薩亦如是,念增益般若波羅蜜力,得阿跋致已,成就佛事。

답하나니, 반야바라밀은 제법 가운데서 제일 진실인 제일실(第一實)로써,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진실한 법보(法寶)이니,

살타파륜은 약간의 기미(氣味)를 얻었기는 하였으나 아직 완전히 갖추지 못한 까닭에 근심한 것이니,

마치 사랑하던 아들을 잃은 후에, 그 아들이 자라나서 이룩할 일도 많을 것이며 그의 힘을 얻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반야바라밀의 힘이 더욱 늘어나면 아비발치(阿鞞跋致, 불퇴전)를 얻게 될 것이고, 그러한 뒤에는 불사(佛事)를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如子於父,孝行終身,無有異心;般若波羅蜜於菩薩亦如是,若能得入,乃至成佛,終不遠離。

如父見子,心卽歡悅;菩薩雖得種種諸法,不如見般若波羅蜜之歡喜。如子假爲其名;般若波羅蜜亦如是,空無定實,但有假名。如是等,是摠相因緣。

마치 아들이 아버지에게 효행을 하면서 죽을 때까지 다른 마음이 없었던 것과 같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대한 것도 이와 같아서, 만약 그 안에 들어가게 되면 부처님이 되기까지 끝내 멀리 여의지 않게 되는 것이,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보면 그 마음이 곧 기뻐지는 것과 같은 것이니,

보살이 비록 갖가지의 제법을 얻는다 할지라도 반야바라밀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보다는 못하며,

마치 아들에게 그의 이름을 임시로 붙여 주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공하여 일정한 실체가 없으나 다만 임시로 붙인 가명만이 있을 뿐인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은 바로 전체의 총상(總相)의 인연인 것이다.

 

父雖愛子,不能以頭目與之;菩薩爲般若波羅蜜故,無量世中,以頭目髓腦施與衆生。

子之於父,或不能報恩,若能報恩,正可現世小利,衣食歡樂等;菩薩於般若波羅蜜中,無所不得,乃至一切智慧,何況菩薩力勢、世閒富樂!

子之報父,恩極一世;般若之益,至無量世,乃至成佛。

子之於父,或好、或惡;般若波羅蜜無諸不可。子但是假名,虛誑不實之法;般若波羅蜜眞實聖法,無有虛誑。

아버지는 비록 아들을 사랑할지라도 그의 머리와 눈을 아들에게 줄 수 없지만,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위하여 무량한 세상 동안 머리나 눈ㆍ골수ㆍ뇌를 중생들에게 베풀었으며,

아들이 아버지에게 혹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기도 하나, 설령 은혜를 갚는다 하여도 이 세상에서의 조그마한 옷과 밥과 환락(歡樂) 등으로 이롭게 하는 것일 뿐이지만,

보살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일체지혜에 이르기까지 얻지 못하는 것이 없거늘, 하물며 보살의 세력으로 세간의 부(富)와 낙(樂)을 얻지 못함이 있겠는가?

아들이 아버지의 은혜를 갚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한 세상의 일세(一世)로 끝날 뿐이지만,

반야의 이익은 무량한 세세에 이르러서 이에 성불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며,

아들이 아버지를 혹은 좋아하기도 하고 혹은 싫어하기도 하지만, 반야바라밀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있을 수 없으며,

아들은 다만 임시로 붙인 가명일 뿐이라서 허광(虛誑)된 것이요 진실한 실법이 아니지만,

반야바라밀은 진실한 성인의 법으로서 거짓이란 없는 무유허광(無有虛誑)인 것이다.

 

子之報恩,雖得現世小樂,而有憂愁苦惱無量之苦;般若波羅蜜但得歡喜實樂,乃至佛樂。

子但能以供養利益於父,不能免其生、老、病、死;般若波羅蜜令菩薩畢竟淸淨,無復老、病、死、患。

子但能令父得世樂自在;般若波羅蜜能令菩薩於一切世閒爲天人主。

如是等,種種因緣譬喩差別相。世人皆知喪子憂愁故,以此爲喩。

아들이 은혜를 갚아서 비록 이 현세의 조그마한 즐거움은 얻게 될지라도 근심과 고뇌의 무량한 고통이 있지만,

반야바라밀은 다만 기쁨과 진실한 즐거움만을 얻으면서 이에 부처님의 즐거움인 불락(佛樂)에 이르게 되며,

아들은 다만 공양만으로 아버지를 이롭게 할 뿐, 나고(生)ㆍ늙고(老)ㆍ병들고(病)ㆍ죽는(死) 것은 면하게 하지 못하지만,

반야바라밀은 보살로 하여금 마침내 청정하여져서 다시는 나고(生)ㆍ늙고(老)ㆍ병들고(病)ㆍ죽는(死) 따위의 우환이 없게 하며,

아들은 다만 아버지에게 세간의 욕락에 자재(自在)함을 얻게 할 뿐이지만,

반야바라밀은 보살로 하여금 일체 세간에서 천상과 인간의 주인이 되게 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과 비유의 차별상(差別相)이 있으며,

세인(世人)들 모두는 아들을 잃는 그 근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로써 비유를 삼은 것이다.

 

問曰:空中佛現,是何等佛?先何以但有音聲而今現身?佛旣現身,何以不卽度,方遣至曇無竭所?

묻나니, 공중에서 부처님이 나타나셨다는데 그 분은 어떤 부처님이십니까?

앞에서는 음성만 있었을 뿐인데, 지금은 무엇 때문에 몸을 나타내신 것입니까?

기왕에 부처님께서 몸을 나타내셨다면, 무엇 때문에 곧 바로 제도하지 않으시고 담무갈에게로 보낸신 것입니까?

 

答曰:有人言:非眞佛,但是像現耳 或諸佛遣化,或大菩薩現作。

以先善根福德未成就故,但聞聲;今七日七夜一心念佛,功德成就故,得見佛身。

답하나니, 어떤 분은 “참 부처님이신 진불(眞佛)이 아닌 것으로, 다만 형상만을 나타나게 한 것일 뿐이다”고 말하며,

혹은 모든 부처님께서는 변화한 화불(化佛)을 보내기도 하고, 혹은 대 보살이 나타나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선근과 복덕이 아직 성취되지 못한 까닭으로 다만 소리만을 들었을 뿐이나,

이제는 밤낮으로 이레 동안을 일심으로 부처님을 생각하여, 그 공덕이 이루어진 까닭에 부처님의 몸을 뵐 수 있었던 것이다.

 

佛所以不卽度者,以其與曇無竭世世因緣,應當從彼度故。有人應從舍利弗度,假使諸佛現身,不能令悟。

佛讚言善哉者,以薩波崙至意求知去處、聞般若因緣故,佛現身而讚善哉。

부처님께서 바로 제도하시지 않으시는 까닭은 그와 담무갈과는 여러 세상 동안의 인연 때문에 마땅히 그에게서 제도되어야 한 때문이니,

어떤 사람이 사리불로부터 제도되어야 한다면 설령 모든 부처님이 몸을 나타내실지라도 그를 깨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며, 

부처님께서 “훌륭하다”고 찬탄하신 것은, 살타파륜이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면서 가야할 곳과 반야를 들을 인연을 알고자 한 때문에 부처님께서 몸을 나타내시어서 “장하도다”라고 칭찬하신 것이다.

 

過去諸佛行菩薩道時,求此般若,亦如是種種勤苦;以初發心,先罪厚重,福德未集故。佛安慰其心:“汝求般若波羅蜜,雖勤苦,莫懈怠,莫生退沒心!一切衆生行異,因時皆苦,受果時樂。當思惟諸佛無量功德果報,以自勸勉。”

如是安慰已,作是言:“汝從是東行,去此五百由旬,有城名衆香,乃至不久當聞般若波羅蜜。”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보살도를 행하실 때, 이 반야를 구하면서 역시 이러한 고생을 겪으셨던 것이니,

처음 초발심할 때에는 우선 죄가 두텁고 무거우며, 아지 복덕을 쌓지 못한 까닭에 부처님께서 그의 마음을 위로 하시면서 “그대는 반야바라밀을 구하느라고 비록 고생이 될지라도 게으르지도 말고 물러나거나 위축되는 마음을 내지 말라.

일체 중생들이 다른 수행의 인(因)을 지을 때에는 모두가 고통을 받지만, 과(果)를 받을 때에는 즐거우니,

마땅히 모든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과 과보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힘써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위로한 뒤에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이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가되 여기서 5백 유순을 가면 성이 있는데 이름은 중향(衆香)이며, 나아가 오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들을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이다.

 

問曰:衆香城在何處?

묻나니, 중향성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答曰:過去佛滅度後,但有遺法,是法不周遍閻浮提,衆生有聞法因緣處則到。

爾時,衆香國土樂,多出七寶故,以七寶作城。時薩波崙雖同在閻浮提,而在無佛法、無七寶處生,但傳聞佛名、般若波羅蜜是佛道。是人先世廣集福德,煩惱輕微故,聞卽信樂,厭惡世樂,捨其親屬,到空林中住,欲至有佛法國土。

音聲示語者,恐其異去,不得到曇無竭菩薩所,是故語之;次後佛爲現身,示其去處。

답하나니, 과거의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남기신 교법이 있기는 하나, 이 법은 염부제(閻浮提)에 두루하지 못한 것이므로 중생들이 법을 들을 인연이 있는 곳이면, 곧 그곳에 이르는 것이다.

이 때에 중향성의 국토는 풍요하고 안락하면서 7보(寶)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7보로써 성이 이루어져 있으며, 

이 때에 살타파륜은 비록 염부제에 같이 있었기는 하나 부처님의 불법이 없고 7보도 없는 곳에 태어난 것이며, 다만 부처님이라는 이름과 반야바라밀이 부처님의 불도(佛道)라는 것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이 사람은 전생에 복덕을 널리 쌓았고 번뇌가 경미한 까닭에 그러한 말을 듣고는 곧 믿고 좋아하면서 악한 악세의 욕락을 싫어하여 그의 친족들을 버리고는 빈 숲속에 머무르면서 부처님의 불법이 있는 국토에 이르고자 한 것이니, 

음성으로 말씀을 내보이신 것은 그가 다른 곳으로 가면서 담무갈보살에게 이르지 못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요,

그 다음에 부처님이 그를 위하여 몸을 나타내어서 그가 나아 갈 곳을 지시하신 것이다.

 

問曰:薩波崙因緣已具聞於上,今曇無竭因緣爲云何?

묻나니, 살타파륜에 대한 인연은 이미 위에서 자세하게 들었습니다. 이제 담무갈에 대한 인연은 어떻씁니까?

 

答曰:“鬱伽”,秦言“盛”;“達磨”,秦言“法”。

此菩薩在衆香城中,爲衆生隨意說法,令衆生廣種善根,故號“法盛”。

其國無王,此中人民皆無吾我,如鬱單越人,唯以曇無竭菩薩爲主。其國難到,薩波崙不惜身命,又得諸佛菩薩接助能到。大菩薩爲度衆生故,生如是國中;衆生無所乏短,其心調柔,易可得度故。

답하나니, 울가타(鬱伽陀, udgata)는 진(秦)나라 말로 흥성하다는 성(盛)이요,

달마(達磨, dharma)는 진나라 말로 법(法)이다.

이 보살은 중향성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그들의 뜻에 따라 법을 설하여서 중생들로 하여금 선근을 널리 심게 하였으므로 ‘법을 흥성시킨 법성(法盛)’이라 불렀으며, 

그 나라에는 아직 왕이 없었고, 그 곳에 있는 백성들은 모두는 '나'라는 오아(吾我)가 없었던 것이 마치 울단월(鬱單越, 북구로주 北拘盧洲, 다른 세계보다 복력이 뛰어난 승처 勝處) 사람들과 같았으니, 오직 담무갈보살만을 왕으로 삼고 있었다.

비록 그 나라에 도달하기 어렵다 하지만, 살타파륜은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며,

또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 보살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이러한 나라에 태어나는 것이며, 

그 곳에 있는 중생들은 모자란 것이 없고 그 마음이 조복되어 유연하기 때문에 제도되기 쉬운 것이다.

大智度論 論釋薩波崙品 第八十八之餘卷 第九十七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8. 살타파륜품을 풀이함 ② 1

 

▶經. “爾時,薩波崙菩薩受是空中已,從是東行。

不久,復作是念:‘我云何不問空中聲:'我當何處去?去當遠近?當從誰聞般若波羅蜜?'

是時卽住,啼哭憂愁,作是念:‘我住是中,過一日一夜,若二、三、四、五、六、七日七夜,不念疲極,乃至不念飢渴、寒熱,不聞聽受般若波羅蜜因緣,終不起也!’

▷경. “그 때에 살타파륜보살이 허공의 교시를 받은 뒤, 그곳으로부터 동쪽을 향해 가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생각하기를 ‘나는 어찌하여 공중에서 나는 소리인 공중성(空中聲)에게, 내가 어느 곳으로 가야 하며? 가는 곳이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 그 누구에게서 반야바라밀을 듣게 될 것인지? 등을 묻지 않았던 것일까!’라고 하였다.

이때, 그가 그 자리에 서서는 슬피 울며 근심하다가 생각하기를 ‘내가 이 자리에 서서 밤낮으로 하루나 이틀ㆍ사흘ㆍ나흘ㆍ닷새ㆍ엿새ㆍ이레 동안을 지낸다 할지라도 고달프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으며, 나아가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더움을 생각하지 않고, 반야바라밀을 받게 될 인연을 듣지 못하면 끝내 일어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須菩提!譬如人有一子卒死,憂愁苦毒,唯懷懊惱,不生餘念。

如是,須菩提!薩波崙菩薩爾時無有異心,但念:‘我何時當得聞般若波羅蜜?我云何不問空中聲:我應何處去?去當遠近?當從誰聞般若波羅蜜?

수보리야,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그의 외아들이 갑자기 죽자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오직 한탄과 번뇌만 있을 뿐, 그 밖의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그 때에 살타파륜보살에게는 다른 마음이 없었고 다만 생각하기를 ‘내가 언제쯤이나 반야바라밀을 듣게 될까? 나는 어찌하여 공중에서 나는 소리인 공중성(空中聲)에게, 나는 어느 곳으로 가야 하며, 가는 곳이 먼지 혹은 가까운지, 그 누구에게서 반야바라밀을 듣게 될 것인가를 묻지 않았던 것일까!’라고 하였느니라.

 

須菩提!薩波崙菩薩如是愁念時,空中有佛,語薩波崙菩薩言:‘善哉!善哉!善男子!過去諸佛行菩薩道時,求般若波羅蜜,亦如汝今日。

善男子!汝以是勤精進愛樂法故,從是東行,去此五百由旬,有城名衆香。其城七重,七寶莊嚴;臺觀、欄楯,皆以七寶飾;七寶之塹,七寶行樹,周七重。其城縱廣十二由旬,樂安靜,人民熾盛;五百市里,街巷相當,端嚴如畫,橋津如地,寬博淸淨。

수보리야, 살타파륜보살이 이와 같이 근심하고 있을 때, 공중에서 어느 부처님께서 살타파륜보살에게 말씀하셨으니,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선남자야,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보살도를 행하실 때, 반야바라밀을 구하신 것도 역시 그대가 오늘 날에 하는 것과 같았느니라.

선남자야, 그대는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법을 좋아하는구나!

이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나아 가거라. 여기로부터 5백 유순(由旬)을 가면, 이름이 중향(衆香)이라는 성(城)이 있으니라.

그 성은 일곱 겹으로 되어 있고 7보(寶)로써 장엄되어 있으니, 대관(臺觀)과 난간도 모두 7보로 꾸며져 있으며, 칠보로 된 참호(塹壕, 성곽을 둘러싼 구덩이, 흔히 물이 있음)와 7보로 된 나무들이 줄지어 주위를 일곱 겹으로 둘러싸고 있느니라.

그 성은 세로와 가로가 각각 12유순이요, 풍요하고 안락하고 고요하며, 백성들은 아주 흥성하느니라.

5백의 도시와 시골은 거리가 서로 서로 이어져 있으며, 단정하고 엄숙함이 마치 그림과 같고 교량과 나루는 마치 땅과 같이 넓으면서 깨끗하니라.

 

七重城上,皆有七寶樓櫓,寶樹行列,以黃金、白銀、車、馬瑙、珊瑚、琉璃、頗梨、紅色眞珠以爲枝葉。寶繩連緜,金爲鈴網,以覆城上。風吹鈴聲,其音和雅,娛樂衆生;譬如巧作五樂,甚可悅喜。

일곱 겹으로 된 성 위에는 모두 칠보로 된 망루(樓櫓, 지붕이 없는 전망대)가 있으며, 보배나무들이 줄지어 있으니, 황금ㆍ백은ㆍ차거(車璖)ㆍ마노(馬瑙)ㆍ산호(珊瑚)ㆍ유리(琉璃)ㆍ파리(頗璃)와 붉은 빛깔의 진주(眞珠)로 그 가지와 잎이 이루어져 있느니라.

보배로 이루어진 밧줄인, 보승(寶繩)이 촘촘하게 줄지어 있으며, 그 줄에는 금으로 된 방울이 있어서 성(城)을 덮고 있어서,  바람이 불면 방울 소리가 온화하고 청아하게 울리어 중생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마치 다섯 가지 음악인 오악(五樂)을 교묘히 연주하여 몹시 즐겁게 하는 것과 같으니라.

 

其城四邊,流池淸淨,冷暖調適;中有諸,七寶嚴飾;是諸衆生宿業所致,乘此寶娛樂遊戲。諸池水中種種蓮華:靑、黃、赤、白,衆雜好華遍覆水上,是三千大千世界所有衆華,皆在其中。

그 성의 사면에는 못인, 유지(流池)가 있으니, 그 물은 깨끗하면서도 차고 더운 냉난(冷暖)이 알맞게 적당하며, 그 가운데에 떠 있는 배들은 7보로 잘 꾸며져 있으니, 이것은 그 중생들이 전생에 지은 업의 소치(所致)로 이 보배로 된 배를 타고 즐기면서 오락을 즐기고 있으니, 

모든 못의 물에는 푸르고 노랗고 붉고 흰 여러 가지 연꽃이 있으며, 그 밖의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물 위를 가득히 덮고 있으니, 3천대천세계에 있는 갖가지 꽃들이 모두 그 곳에 있느니라.

 

其城四邊有五百園觀,七寶莊嚴,甚可愛樂。一一園中,各有五百池,池各縱廣十里,皆以七寶成,雜色莊嚴。諸池水中亦有靑、黃、赤、白蓮華彌覆水上;其諸蓮華大如車輪,靑色靑光、黃色黃光、赤色赤光、白色白光。諸池水中鳧鴈、鴛鴦,異類衆鳥,音聲相和。是諸園觀適無所屬,是諸衆生宿業所致,長夜信樂深法,行般若波羅蜜因緣故,受是果報。

그 성의 사면에는 5백의 유원지인 원관(園觀)이 있으니, 7보로 장엄되어 있어서 가히 좋아할 만하며,

하나 하나의 동산에는 각각 5백 개씩의 연못이 있고, 그 연못은 각각 세로와 가로가 10리(里)씩으로 모두가 7와 갖가지의 빛깔로 장엄되어 있으며, 모든 연못의 물도 역시 푸르고 노랗고 붉고 흰 연꽃들이 피어서 물 위를 온통 덮고 있느니라. 그 연꽃들의 크기가 마치 수레바퀴의 크기와 같으며, 푸른 빛깔의 연꽃에는 청색 광명이 나고, 노란 빛깔의 연꽃에는 황색 광명이 나며, 붉은 빛깔의 연꽃에는 적색 광명이 나고, 흰 빛깔의 연꽃에는 백색 광명이 나며, 

그 모든 연못의 물에는 오리와 기러기와 원앙새 등의 기이한 여러 가지 새들이 서로가 지저귀며 화답하고 있느니라.

이 모든 유원지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것이니, 이 모두가 그 중생들이 전생에 지은 업의 소치로서, 오랜 세월 동안 깊은 심법(深法)을 믿고 좋아하면서 반야바라밀을 행한 인연으로 이러한 과보를 받는 것이니라.

 

善男子!是衆香城中有大高臺,曇無竭菩薩摩訶薩宮舍在上。其宮縱廣一由旬,皆以七寶成,雜色莊嚴,甚可喜樂。垣牆七重,皆亦七寶;七重欄楯,七寶樓閣;寶塹七重,皆亦七寶;周圍深塹,七寶累成;七重行樹,七寶枝葉,七重圍繞。其宮舍中,有四種娛樂園:一名常喜,二名離憂,三名華飾,四名香飾。

선남자야, 이 중향성(衆香城) 안에는 크고 높은 대(臺, 누대)가 있으니, 담무갈 보살마하살은 그 궁전 위에 있느니라.

그 궁전은 길이와 너비가 1유순인데 모두가 7보로써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빛깔로 장엄되었으므로 심히 즐거워할 만하며, 일곱 겹으로 되어 있는 담장 모두도 역시 7보로 되어있으며, 일곱 겹으로 된 난간과 7보로 된 누각이 있고, 보배로 된 참호도 일곱 겹이어서 모두가 또한 7보로 되어 있느니라.

주위에 있는 깊은 참호는 일곱 겹으로 포개어 있고 일곱 겹으로 줄어지 선 나무들은 가지와 잎이 7보로 되어 있으면서 그 궁전을 일곱 겹으로 둘러싸고 있느니라.

그 가운데는 네 개의 유원지가 있으니, 첫 번째의 이름은 상희(常喜)요 두 번째의 이름은 이우(離憂)이며, 세 번째의 이름은 화식(華蝕)이요 네 번째의 이름은 향식(香飾)이니라.

 

一一園中各有八池:一名賢,二名賢上,三名歡喜,四名喜上,五名安隱,六名多安隱,七名遠離,八名阿跋致。諸池四邊,面各一寶,黃金、白銀、琉璃、頗梨;玫瑰爲池底,其上布金沙。一一池側有八梯陛,種種妙寶以爲嚴飾;諸梯陛閒,有閻浮檀金芭蕉行樹。一切池中種種蓮華——靑、黃、赤、白,彌覆水上;諸池四邊,生好華樹;風吹諸華,墮池水中。其池成就八種功德,香若栴檀、色、味具足。

낱낱의 동산 가운데에는 저마다 여덟 개씩의 못이 있으니, 첫째를 현(賢)라 하고, 둘째는 현상(賢上)이라 하며, 셋째를 환희(歡喜)라 하고, 넷째를 희상(喜上)이라 하며, 다섯째를 안온(安穩)이라 하고, 여섯째를 다안온(多安穩)이라 하며, 일곱째를 원리(遠離)라 하고, 여덟째를 아비발치(阿鞞跋致)라 하느니라.

모든 못의 사면이 저마다 한결같이 보배로 되어 있고, 못의 바닥은 황금과 백은과 유리와 파리와 붉은 옥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금모래가 깔려 있느니라.

그 낱낱의 못 가에는 여덟 개의 사다리 계단이 있으니, 갖가지의 묘한 보배로써 장식되어 있으며, 모든 사다리 계단 사이에는 염부단금(閻浮檀金)으로 된 파초의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느니라.

모든 못 속에 핀 갖가지 연꽃은 푸르고 노랗고 붉고 희면서 물 위를 온통 다 덮었으며, 모든 못의 네 둘레에는 아름다운 화수(華樹)들이 자라고 있으니, 바람이 불면 그 꽃들이 연못의 물위에 떨어지느니라.

그 못은 여덟 가지의 팔종공덕(八種功德)을 성취하였으니, 그 냄새는 전단(栴檀)과 같고, 빛깔과 맛을 두루 갖추었느니라.

 

팔종공덕(八種功德)= 그 못의 물이 달고 시원하고 부드럽고 가볍고 맑고 냄새가 없으며, 마실 때에 목을 상하지 않고, 마시고 나서는 배가 아프거나 하지 않는 등의 여덟 가지의 특징.

 

曇無竭菩薩與六萬八千女,五欲具足,共相娛樂;及城中男女俱入常喜等園、賢等池中,五欲具足,共相娛樂。

善男子!曇無竭菩薩與諸女遊戲娛樂已,日三時說般若波羅蜜。衆香城內男女大小,於其城中多聚人處敷大法座。

담무갈보살은 6만 8천의 채녀(婇女)와 함께 5욕(欲)을 두루 갖추어서 함께 서로가 즐겁게 지냈으며,

그리고 성 안의 남녀들도 모두 상희원(常喜園) 등의 유원지와 현지(賢池) 등의 못에 들어가서 5욕을 두루 채우면서 함께 서로 즐겁게 지냈느니라.

선남자야, 담무갈보살은 모든 채녀들과 함께 유희하며 즐겁게 지낸 뒤에 날마다 세 때씩 반야바라밀을 설하는데, 그 중향성 안의 남녀노소는 그 성 가운데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대법좌(大法座)를 펴나니, 

 

其座四足,或以黃金、或以白銀、或以琉璃、或以頗梨,敷以綩,雜色茵褥,垂諸幃帶;以妙白㲲而覆其上,散以種種雜妙花香;座高五里,張白珠帳。其池四邊,散五色花,燒衆名香,澤香塗地,供養、恭敬般若波羅蜜故

 綖 면류관 싸개 연, 실 선, 綩 갓 끈 원, 幃 휘장 위,

그 대법좌를 받치는 네 개의 다리는 혹은 황금이기도 하고 혹은 백은이기도 하며, 혹은 유리이기도 하고 혹은 파리이기도 하느니라.

좋은 원연(綩綖, dūṣya, 부드러운 면)으로 짠 여러 빛깔이 섞인 자리를 펴고 향낭의 띠인 위대(幃帶)를 드리우며, 묘한 흰 빛의 털 담요로 그 위를 덮고 여러 가지 묘한 꽃의 향을 뿌렸으며, 법좌의 높이는 5리(里)요 흰 구슬의 휘장을 둘러놓았느니라.

그 못의 사방에는 5색의 꽃을 뿌리고 갖가지 이름 있는 향을 사르며, 택향(澤香)을 땅에다 뿌리나니, 그것은 반야바라밀을  공양하고 공경하기 위한 것이니라.

 

曇無竭菩薩於此座上說般若波羅蜜;彼諸人衆如是恭敬供養曇無竭,爲聞般若波羅蜜故。於是大會百千萬衆,諸天、世人一處和集,中有聽者,中有受者,中有持者,中有誦者,中有書者,中有正觀者,中有如說行者。當是時中,衆生以是因緣故,皆不墮惡道,不退轉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담무갈보살이 이 자리에서 반야바라밀을 설하게 되나니, 저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이 담무갈을 공경하고 공양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을 듣기 위한 것이니라.

이 큰 모임에는 백천만의 모든 하늘들과 세간 사람들이 한 곳에 모였으니, 그 가운데에는 듣는 청자(聽者)ㆍ받아들이는 수자(受者)ㆍ지니는 지자(持者)가 있으며, 외우는 송자(誦者)가 있고, 베껴쓰는 서자(書者)가 있으며, 바르게 관찰하는 정관자(正觀者)가 있으며, 말씀한 대로 행하는 여설행자(如說行者)가 있으며, 

그 때에 그 곳에 있는 중생들은 이러한 인연으로 모두가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느니라.

 

汝善男子!往趣曇無竭菩薩,當聞般若波羅蜜。善男子!曇無竭菩薩世世是汝善知識,能汝阿耨多羅三藐三菩提,示、、利、喜。是曇無竭菩薩本求般若波羅蜜時,亦如汝今。汝去莫計晝夜,莫生障㝵心,汝不久當得聞般若波羅蜜!’

선남자야, 그대는 담무갈보살에게로 가서 반야바라밀을 들어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담무갈보살은 세세마다 그대의 선지식이니, 능히 그대를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하나니, 이 담무갈보살이 본래 반야바라밀을 구할 때에도 역시 그대와 같았느니라.

이제 그대는 그곳으로 가서 밤과 낮을 헤아리지 말고 장애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그대는 오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듣게 될 것이니라’라고 하였느니라.

 

爾時,薩波崙菩薩摩訶薩歡喜心悅,作是念:‘我當何時得見是善男子,得聞般若波羅蜜?

須菩提!譬如有人爲毒箭所中,更無餘念,唯念:‘何時當得良醫,拔出毒箭,除我此苦?’

如是,須菩提!薩波崙菩薩摩訶薩更無餘念,但作是願:‘我何時當得見曇無竭菩薩,令我得聞般若波羅蜜?我聞是般若波羅蜜,斷諸有心。’

그 때에 살타파륜 보살마하살이 기뻐하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언제쯤이나 이 선남자를 뵙게 되고 반야바라밀을 들을 수 있을까’라고 하였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독화살에 맞고서 다시는 그 밖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언제쯤 용한 의사를 만나서 이 독화살을 뽑아내어 나의 고통을 없애게 될까?’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살타파륜 보살마하살에게는 전혀 다른 생각없이, 오로지 원하기를 ‘언제쯤이나 나로 하여금 반야바라밀을 듣게 하여 주실 담무갈보살을 뵙게 될까?. 나는 이 반야바라밀을 듣고 모든 존재한다는 유심(有心)을 끊으리라’고 하였느니라.

 

是時,薩波崙菩薩於是處住念曇無竭菩薩,一切法中得無㝵知見已,卽得無量三昧門現在前,所謂諸法性觀三昧,諸法性不可得三昧,破諸法無明三昧,諸法不異三昧,諸法不壞自在三昧,諸法能照明三昧,諸法離闇三昧,諸法無異相續三昧,諸法不可得三昧,散華三昧,諸法無我三昧,如幻威勢三昧。

이 때에 살타파륜보살이 이곳에 서서 담무갈보살을 생각하고 있다가, 일체법 가운데에서 막힘없는 지견인 무애지견(無礙知見)을 얻게 되자 무량한 삼매문(三昧門)이 그의 앞에 나타나게 되었나니,

이른바 제법성관(諸法性觀)삼매ㆍ제법성불가득(諸法性不可得)삼매ㆍ파제법무명(破諸法無明)삼매ㆍ제법불이(諸法不異)삼매ㆍ제법불괴자재(諸法不壞自在)삼매ㆍ제법능조명(諸法能照明)삼매ㆍ제법이암(諸法離闇)삼매ㆍ제법무이상속(諸法無異相續)삼매ㆍ제법불가득(諸法不可得)삼매ㆍ산화(散華)삼매ㆍ제법무아(諸法無我)삼매ㆍ여환위세(如幻威勢)삼매였으며, 

 

得如鏡像三昧,得一切衆生語言三昧,一切衆生歡喜三昧,入分別音聲三昧,得種種語言字句莊嚴三昧,無畏三昧,性常默然三昧,得無㝵解脫三昧,離塵垢三昧,名字語句莊嚴三昧,見諸法三昧,諸法無㝵頂三昧,如虛空三昧,如金剛三昧,不畏著色三昧,得勝三昧,轉眼三昧,畢法性三昧。

득여경상(得如鏡像)삼매ㆍ득일체중생어언(得一切衆生語言)삼매ㆍ일체중생환희(一切衆生歡喜)삼매ㆍ입분별음성(入分別音聲)삼매ㆍ득종종어언자구장엄(得種種語言字句莊嚴)삼매ㆍ무외(無畏)삼매ㆍ성상묵연(性常黙然)삼매ㆍ득무애해탈(得無礙解脫)삼매ㆍ이진구(離塵垢)삼매ㆍ명자어구장엄(名字語句莊嚴)삼매ㆍ견제법(見諸法)삼매ㆍ제법무애정(諸法無礙頂)삼매ㆍ여허공(如虛空)삼매ㆍ여금강(如金剛)삼매ㆍ불외착색(不畏著色)삼매ㆍ득승(得勝)삼매ㆍ전안(轉眼)삼매ㆍ필법성(畢法性)삼매였으며, 

 

能與安隱三昧,師子吼三昧,勝一切衆生三昧,華莊嚴三昧,斷疑三昧,隨一切堅固三昧,出諸法得神通力無畏三昧,能達諸法三昧,諸法財印三昧,諸法無分別見三昧,離諸見三昧,離一切闇三昧,離一切相三昧,解脫一切著三昧,除一切懈怠三昧,得深法明三昧,不可奪三昧,破魔三昧,不著三界三昧,起光明三昧,見諸佛三昧。

능여안온(能與安穩)삼매ㆍ사자후(獅子吼)삼매ㆍ승일체중생(勝一切衆生)삼매ㆍ화장엄(華莊嚴)삼매ㆍ단의(斷疑)삼매ㆍ수일체견고(隨一切堅固)삼매ㆍ출제법득신통력무외(出諸法得神通力無畏)삼매ㆍ능달제법(能達諸法)삼매ㆍ제법재인(諸法財印)삼매ㆍ제법무분별견(諸法無分別見)삼매ㆍ이제견(離諸見)삼매ㆍ이일체암(離一切闇)삼매ㆍ이일체상(離一切相)삼매ㆍ해탈일체착(解脫一切著)삼매ㆍ제일체해태(除一切懈怠)삼매ㆍ득심법명(得深法明)삼매ㆍ불가탈(不可奪)삼매ㆍ파마(破魔)삼매ㆍ불착삼매(不著三昧)삼매ㆍ기광명(起光明)삼매ㆍ견제불(見諸佛)삼매였느니라.

 

波崙菩薩住是諸三昧中,卽見十方無量阿僧祇諸佛爲諸菩薩摩訶薩說般若波羅蜜。”

살타파륜보살이 이 모든 삼매 가운데에 머물면서 곧 시방의 무량한 아승기의 모든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마하살들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되었느니라.”

大智度論  釋涅槃如化品 第八十七卷 第九十六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8. 살타파륜품(薩陀波崙品) 풀이함 ① 3

 

爾時,空中聲復讚言:“善哉!”以其雖不見形而能信受善語故。

又復以其欲度一切衆生故,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不懈息。如是等因緣故,讚言“善哉”。

그 때에 공중에서 나는 소리인 공중성(空中聲)이 다시 찬탄하기를 “훌륭하도다”라고 하였으니, 비록 형상은 보이지 않았을지라도 능히 훌륭한 말을 믿고 받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일체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하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며, 마음으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나니, 이와 같은 인연으로도 찬탄하기를 “훌륭하도다”라고  것이다.

 

於三解脫門中應生信心者,是門,諸法實相所入門;離是三門,皆是虛誑、無有實者。

汝雖未得,應生大信根力:信根力故,漸具諸根。

‘공, 무상, 무작의 삼해탈문에서 믿는 신심(信心) 내어야 하다’고 함이란,  삼해탈의 문이 바로 법의 실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니, 이  가지 문을 여읜 모두는 거짓이며 진실함이 없으므로

“비록 네가 아직 얻지를 못하였을지라도  신근력(信根力)을 내어야 한다”는 것이니, 신근력(信根力) 때문에 점차로 모든 근(根)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以離相心求般若波羅蜜者,所謂觀諸法畢竟空,離衆生相、離法相。

‘상을 여의는 이상심(離相心)으로써 반야바라밀을 구한다’고 함이란, 이른바법이 필경공이라는 것을 관찰하면서 중생상(衆生相)을 여의고 법상(法相)을 여의는 것이다.

 

問曰:三解脫門攝在般若中不?若攝,何以別說?若不攝,云何經中說:“一切助道法,皆攝在般若中?”

묻나니, 삼해탈문은 반야 속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지 아닙니까? 

만약 반야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따로 설명하는 것입이며? 

만약 반야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여 경에서 “일체의 도를 돕는 조도법(助道法)은 모두 반야 가운데에 포섭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一切法皆入般若中。人皆畏苦,故求解脫,是故於般若分中,前說三解脫門。以何因緣得此解脫?離諸二邊 所謂衆生相、法相,行般若波羅蜜。

답하나니, 일체법은 모두가 반야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 모두는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해탈하기를 구하나니, 이러한 까닭으로 반야의 갈래 가운데에서 먼저 해탈문을 말하는 것이며,

어떠한 인연으로 이러한 해탈을 얻는 것인가? 

모든  가지 치우침인 이변(二邊), 이른바 중생상(衆生相)과 법상(法相) 여의고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問曰:初教“精進”,後教“三解脫門、般若”;今復欲爲何事故,教親近善知識?

묻나니, 처음에는 정진(精進)을 가르치고, 나중에는 3해탈문과 반야를 가르치는데, 

지금은 무었 때문에 “선지식(善知識)을 친근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까?


答曰:雖有好法,若無教者,行時多錯;譬如雖有好藥,亦須良醫。

又薩陁波崙是新發意菩薩,般若波羅蜜甚深,云何但聞空中略教而能自具足?是故教語親近善知識。

답하나니, 비록 좋은 법이 있어도 가르치는 이가 없으면 행할 때, 많은 착오가 생기나니,

이는 마치 비록 좋은 약이 있을지라도 용한 의사가 필요한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살타파륜은 바로 새로이 뜻을  신발의 보살이요,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거늘, 어떻게 다만 공중에서 나는 간략하게  교시하는 소리만을 듣고 스스로 완전하게 갖출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 “선지식을 친근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善知識義,如先說。今略說二相是善知識:一者、教一心向薩婆若,二者、教空、無相、無作、無生、無滅等般若波羅蜜法。若能如是行,不久得般若波羅蜜;如藥師爲病者說服藥法,汝能如法服,病則得差。

선지식에 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나, 지금 다시 요약하여 설명한다면,  가지의 바로 선지식이니,

첫째 일심으로 살바야(薩婆若)에 향하도록 가르치는 이요, 

둘째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ㆍ무생(無生)ㆍ무멸(無滅) 등의 반야바라밀의 법을 가르치는 이이다. 

만약 이와 같이 행할  있는 이라면 오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얻게 될 것이니, 

마치 약사(藥師)가 병든 이를 위하여  먹는 복용법 말해 주면서 “그대는  법대로 먹기만 하면 병이  나을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若從經卷聞,從菩薩說聞者,遣薩陁波崙至曇無竭菩薩所,彼中二處有般若:一、寶臺上金牒書,二、曇無竭所說。若人福德多者,從曇無竭所說聞;福德少者,從經卷聞。

‘경권으로부터 듣게도 되고, 또는 보살의 설법으로 듣게 된다’고 함이란, 

살타파륜을 담무갈보살에게로 보냈는데, 그 중의  곳에 반야가 있었으니, 

첫째는 보대(寶臺) 위에 있는 금첩(金牒)으로  책이요, 

둘째는 담무갈이 설하는 것이라. 

만약 복덕이 많은 이라면 담무갈이 설하는 법을 듣게 되겠지만, 복덕이 적은 이라면 경권으로부터 듣게 되는 것이다.

 

於師生佛想,以能教佛道因緣故。世閒小人,因緣事訖,則忘其恩義,作是念:“如人乘船度水,旣到彼岸,何用船爲?”是故說:“汝當知恩!應作是念:‘所從聞般若者,卽是我善知識。’”

‘법사에 대하여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내는 어사생불상(於師生佛想)’이라고 함이란, 부처님의 불도를 가르쳐   있는 인연 때문이니,

세간의 소인(小人)들은   일만 끝나면   은의(恩義)를 잊어버리고 생각하기를 ‘마치 사람이 배를 타고 물을 건너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언덕에 도달한 뒤라면  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기 때문에 말하기를

“너는  은혜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반야를 들려주는 이가 바로 나의 선지식이다’라고 생각해야 한다”라  것이다.


一切諸利中,般若利最勝;行是般若,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退轉。又復行般若因緣故,親近諸佛,常生有佛國中,離於八難,値佛在世。菩薩應作是念:“我得如是等諸功德,皆從般若得;般若波羅蜜從師而得,是故視師如佛想。”

일체의 이익 가운데에서 반야의 이익이 가장 뛰어난 것이니,  반야를 행하면 조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며,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이 되는 것이며,

또한 다시 반야를 행하는 인연으로 모든 부처님을 친근하고, 언제나 부처님이 계신 나라에 태어나며, 여덟 가지의 재난인 팔난(八難)을 여의고 부처님이 계시는 세상을 만나는 것이니,

보살은 마땅히 생각하기를 ‘내가 이와 같은 등의 모든 공덕을 얻는 것은 모두 반야로부터 얻은 것이요, 반야바라밀은 스승으로부터 얻은 것이다’라고 해야 하나니, 

 때문에 스승을 마치 부처님과 같이 여기라는 것이다.

 

팔난(八難, aṣṭa akṣaṇāḥ)부처님을 못 보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여덟 가지를 말하며,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존재를 받는 것. 수명이 너무 길어서 괴로움을 모르는 장수천(長壽天)에 태어나는 것. 변방의 변지(邊地)에 태어나는 것. 보고 말함에 있어서 장애가 있는 것. 세속적 지혜가 지나치게 뛰어난 것. 부처님이 안 계시는 세상에 태어나는 것


有人能說般若波羅蜜者,有大福德,多知識,多得供養;弟子初爲般若故隨逐,後漸漸爲供養利。是故說:“莫以世利故隨逐法師。”

어떤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이가  대복이 있으며, 아는 것이 많아서 공양을 많이 얻고 있을 때,  제자로서 처음에는 반야 때문에 따랐으나, 뒤에는 점차로 공양의 이익 때문에 따르게 되는 이도 있으니, 

이러한 까닭에 “세간의 이익 때문에 법사를 따르지 말라”고  것이다.


問曰:何以不但說親近善知識,而說是種種因緣?

묻나니, 무엇 때문에 다만 “선지식만 친근하라”고 말하지 않고 이러한 갖가지의 인연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有人旣得善知識,不得其意,反成讎隙而墮地獄,更相謗毀故。唯佛一人無有過失,餘人誰能無者?

답하나니, 어떤람은 이미 선지식을 만났으면서도 그의 뜻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원수가 되어서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며,  서로가 헐뜯기도 하기 때문이니, 

오직 부처님 만이 이러한 허물이 없으나,  밖의 다른 사람으로서  누가 이러한 허물이 없는 이가 있겠는가?

 

若弟子見師之過若實、若虛,其心自壞,不復能得法利。是故空中聲教:“若見師過,莫起嫌恨!汝應作是念:‘我先世福德不具足故,不得値佛,今値是雜行師;我不應念其過失,而自妨失般若!師之過失,不著於我,我但從師受般若波羅蜜法。’”

만약 제자로 있으면서 스승의 허물을 보게 되면 진실이거나 거짓이거나 간에, 그의 마음을 스스로 무너뜨리면서 다시는 법의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되나니, 이러한 까닭에 공중에서의 음성인 공중성(空中聲)이 다음과 같이 가르쳤던 것이니,

“설사 스승의 허물을 볼지라 혐오하거나 원한을 일으키지 말라!

너는 생각하기를 ‘나는 전생에 지은 복덕이 구족하지 못한 까닭에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고, 지금 이렇게 잡다한행(雜行)을 하는 스승을 만난 것이다. 나는 마땅히 그의 과실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반야를 잃는 일이 없어야 하리라. 

스승의 허물이 나에게 와서 달라붙지 않나니, 나는 다만 스승으로부터 반야바라밀의 법만을 받으면 되리라’고 하라.”


如狗皮囊盛好寶物,不應以囊故而棄其寶;如罪人執燭照道,不可以人罪故,不受其明,自墜溝壑;又如行,遣小人導道,不可以人小故不隨其語。如是等因緣,不應遠離於師。

비유하자면, 마치 개의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 속에 좋은 보물을 담아 놓은 것과 같으니, 그 주머니 때문에  보물을 버려서는  되는 것이며,

또한 죄인이 촛불을 가지고 길을 비추어 주는 것과 같으니,  사람의  때문에  촛불의 빛 받지 않아서 도랑이나 개천에 빠져서는  되는 것이며,

또한 길을  때, 어린 사람이 길을 인도하는 것과 같으니,  사람이 어리다 하여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은 인연으로 스승을 멀리 여의어서는  되는 것이다.

 

師若實有罪,尚不應離,何況此中魔作因緣,令說法者有深妙五欲!令弟子不染著法,說法者以方便故現受。方便者,所謂欲令衆生種福德因緣,亦爲同事攝衆生故。

만약 스승이 실로 죄가 있어도 오히려 여의지 않아야 하거늘, 

하물며  가운데에서 악마가 인연을 지어서 설법하는 이로 하여금 매우 오묘한욕(五欲)이 있게 하여서 제자로 하여금  법에 염착(染著)하지 않게 하는 것이겠는가!

 설법하는 이는 방편 때문에 받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방편이란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복덕의 인연을 심게 하고, 또한 그들과 일을 함께하는 함으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는 동사섭(同事攝)하기 위한 것이다.


復有諸菩薩通達諸法實相故,無所障㝵、無有過罪;雖作過罪,亦無所妨。如人年壯力盛,腹中大熱,雖食不適飮食,不能生病;又如有好藥,雖被惡毒,不能爲害。如是等因緣故,“汝於師所,莫起嫌恨而自失般若!”如經中說。

또한 어떤 보살들은법의 실상을 통달한 까닭에 장애되는 것이 없는 무장애(無障㝵)이고, 죄과도 없는 무유과죄(無有過罪)이며, 비록 죄과를는다 할지라도 역시 방해될 것도 없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장년(壯年)이 되어서 힘이 왕성할 때에는 뱃속의 소화기관도 왕성하여서, 부적당한 음식을 먹었어도 병이 일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한 좋은 약이 있으면 비록 악한 독을 입었을지라도 해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그대는 스승에 대하여 혐오나 원한을 일으켜서, 스스로 반야를 잃지 말라’고 하였으니,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은 것이다.


復有說法者持戒淸淨、離於五欲、多知多識、有好名聞、威德尊重,弟子受法而不顧錄,

“汝於是中莫生怨恨!當作是念:‘我宿世罪故,今爲小人,師不輕我,我自無福,不能得道。

又我於師所,應破憍慢以求法利。’”

또한 설법하는 설법자로서 계율을 깨끗하게 지니며, 오욕을 떠났으며, 지식도 많고, 좋은 명문(名聞)이 있고, 위덕이 높으나, 그 제자들이 법을 받는 관심을 두지 않으면 다음과 같이 말해주기도 하나니, 

“그대는 그러한 가운데에서 원망하지 말고 생각하기를, ‘나는 전생에 지은 숙세죄(宿世罪) 때문에 지금 소인(小人)이 되어 있는 것이며, 스승은 나를 업신여기지 않으시건만  자신이 복이 없어서 도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하며, 

또한 ‘나는 스승에 대한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고 법의 이익을 구해야 하리라’고 하여야 하며, 


有如是等種種諸師,菩薩爲求般若波羅蜜故,但一心恭敬,不應念其長短。

若能如是忍辱、於師一心不起增減者,汝於師所盡得妙法;如完牢之器,所受不漏。“薩陁波崙聞空中聲已,從是東行”,如經中廣說。

이러한 여러 스승들이 있으니, 보살이라면 반야바라밀을 구하기 위하여, 다만 일심으로 공경하면서 그의 장단점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만약 이와 같이 스승에 대하여 인욕하면서 일심으로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증감심(增減心)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대는 스승에게서 묘한 묘법을 전부 다 얻을 것이니, 마치 완전하고 견고한 그릇으로 받는 물건은 새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살타파륜이 공중에서 나는 음성을 듣고는 그 곳으로부터 동쪽을 향아여 나아간 내용은 경 가운데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大智度論卷第九十六 終 대지도론 96권을 마침.

大智度論  釋涅槃如化品 第八十七卷 第九十六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8. 살타파륜품(薩陀波崙品) 풀이함 ① 2

 

問曰:薩陁波崙未得阿鞞跋致,何以故名菩薩摩訶薩?

묻나니, 살타파륜(薩陀波崙, Sādapraruta, 상제常啼) 보살은 아직 아비발치(阿鞞跋致, 불퇴전)를 얻지 못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보살마하살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答曰:以有大菩薩故,小者亦名大。又以其雖未得實智慧而能深念般若波羅蜜故,不惜身命、有大功德故,亦名菩薩摩訶薩。

답하나니, 큰 대보살(大菩薩)이 있기 때문에 작은 소자(小者)에게도 역시 대(大)라 하기도 하며,

또 비록 그가 아직 진실한 지혜를 얻지는 못하였을지라도 반야바라밀을 깊이 생각하고 있는 까닭이며,

 몸과 목숨의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으며, 큰 공덕이 있기 때문에 역시 보살마하살이라 부르는 것이다.

 

問曰:何以名“薩陁波崙薩陁秦言常波崙名啼 ”?爲是父母與作名字?是因緣得名字?

묻나니, 무엇 때문에 살타파륜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 살타(薩陀, sadā)는 진(秦, 중국)나라 말로 ‘항상의 상(常)’이라는 말이요, 파륜(波崙, prarudita)은 ‘운다는 제(啼)’ - 

그의 부모가 지어 준 이름입니까? 아니면, 어떠한 인연이 있어서 얻게  이름입니까?


答曰:有人言:以其小時喜啼,故名常啼。

有人言:此菩薩行大悲心柔軟故,見衆生在惡世,貧窮、老病、憂苦,爲之悲泣,是故衆人號爲“薩陁波崙”。

답하나니, 어떤 말하기를 “그가 어릴 때에  울기를 좋아한 까닭에 ‘항상 우는 상제(常啼)’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어떤 말하기를 “이 사람은 대비(大悲)를 행하면서  마음이 부드러운 까닭에 중생들이 악한 세상에 있으면서 가난하고ㆍ늙고ㆍ병들고ㆍ근심하고ㆍ괴로워하는 것을 보고는 그들을 위하여 슬피 울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살타파륜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有人言:是菩薩求佛道故,遠離人衆,在空閑處,求心遠離,一心思惟籌量,勤求佛道,時世無佛。

是菩薩世世行慈悲心,以小因緣故,生無佛世。是人悲心於衆生,欲精進不失,是故在空閑林中。

是人以先世福德因緣,及今世一心、大欲、大精進 以是二因緣故,聞空中教聲,不久便滅。卽復心念:“我云何不問?”以是因緣故,憂愁啼哭,七日七夜。因是故,天、龍、鬼神號曰常啼。

어떤 말하기를 “이 보살은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기 위하여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서 고요한 공한처(空閑處) 있으면서 마음으로 멀리 여읨의 원리(遠離)을 구하고, 일심으로 사유하고 헤아리면서 부처님의도를 힘써 구하였는데, 그 때의 세상에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였으며,

 보살은 세세마다 자비심을 행하였으나, 인연이 작았기 때문에 부처님이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니, 이 사람은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비심(悲心) 정진하여 잃지 않기를 원한 때문에 고요한 공한처(空閑處)의  속에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전생에 쌓은 복덕의 인연과  세상에서의 일심(一心)으로서원을 낸 대욕(大欲)으로 크게 정진한 대정진(大精進)의   가지 인연으로 공중에서 가르침을 교시하는 음성을 듣게 되었으나, 오래지 앉아  사라져버렸으므로 그가 생각하기를 ‘나는 어찌하여서 묻지 않았던 것일까?’라고 하며,  인연으로 밤낮 7일 동안을 근심하면서 슬피 울었으니, 이로 인하여 하늘과 용과 귀신들이 ‘항상 우는 상제(常啼)’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佛答須菩提:“過去世有薩陁波崙菩薩,不惜身命,不貪財利。”“求般若波羅蜜時,在空閑林中,聞空中聲,到空林中”,如上說。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답하시기를 “과거 세상에 살타파륜(薩陁波崙)이라는 보살이 있었으니, 그는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명리를 탐내지 않았으며, 반야바라밀을 구할 때,  비고 고요한  속의 공한림(空閑林) 중에 있었는데, 허공에서 소리가 나서   숲에까지 들려왔느니라”고 하셨으니, 앞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問曰:空中聲爲是何聲?

묻나니, 공중에서의 소리란, 어떤 소리였던 것입니까?


答曰:若諸佛、菩薩、諸天、龍王憐愍衆生故,見是人不著世閒法、一心求佛道,以時無佛法,欲示其得般若因緣故,空中發聲。

有人言:是薩陁波崙先世善因緣人,在此林中作鬼神,見其愁苦。以其是先世因緣故,又是神亦求佛道 以是二因緣故發聲。

답하나니,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그리고 모든 하늘과 용왕이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사람이 세간법에 탐착하지도 않고 일심으로 부처님의도를 구하는 것을 보았으나,때는 아직 부처님의법이 없었으므로 그에게 반야를 얻는 인연을 보여주고자 공중에서 소리를  것이다.

어떤 말하기를 “이 살타파륜과 전생에 좋은 인연을 지었던 사람이  숲속의 귀신이 되어 있었는데, 그가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게 되었으며, 그 귀신도 전생에 지은 인연으로 역시 부처님의도를 구하고 있었으니, 

  가지 인연 즉, 살타파륜과의 전생의 인연과 스스로 불도를 구하는 두 인연 때문에 소리를  것이다”라고 하며, 


如蜜膊婆羅門爲須達多至王舍城,詣大長者家求兒婦時,蜜膊於王舍城大婆羅門衆中,飮食過度,腹脹而死,作鬼神,於王舍城城門上住。須達多聞是婆羅門已死,自往長者家宿。長者於後夜,起辦具飮食。

須達多問言:“汝有何事?爲欲娶婦嫁女?爲欲請大國王?爲是邑會?何其悤悤營事乃爾?”

長者答言:“我欲請佛及僧。”須達多聞佛名,驚喜毛豎。長者先得道迹,爲其廣說佛德。

이는 마치 밀박(密膊) 바라문의 경우와 같은 것으로, 수달다(須達多)라는 이가 왕사성(王舍城)으로 가서 며느리를 구하고자  장자(長者)의 집에 들렀을 때, 밀박(密膊) 바라문은 왕사성에 모인  바라문들 가운데에서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은 탓으로 배가 터져 죽은 뒤에 귀신이 되어서는 왕사성의 성문 위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었다. 

수달다도  바라문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장자의 집에 가서 묵었는데,   장자가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으므로 수달다가 묻기를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들을 장가를 들이시는 것입니까?  시집을 보내시는 것입니까? 아니며, 대국의 왕을 청하시는 것입니까? 고을 사람들을 모아서 잔치를 벌이시는 것입니까? 

어찌 그렇게 서두르면서 일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장자가 답하기를 ‘나는 부처님과 승가를 청하고자 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수달다는 부처님이라는 이름을 듣고 한편 놀라고, 한편으로는 기뻐서몸의 털이 곤두섰다. 

 장자는 이미 성인의 도에 머무는 도적(道跡)을 얻은 사람이라서, 수달다 위하여 부처님의 위덕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須達多聞已,愛樂情至,甚欲見佛。乘念佛心而小睡,以念佛情至故,須臾便覺,夜見月光,謂爲日出,卽起趣門,見城門已開 王舍城門初夜未閉,爲客來故;後夜早開,爲客去故。旣見門開,卽直向佛。

수달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좋아하는 정(情)이 우러나면서 부처님이 몹시 뵙고 싶어졌으며, 부처님에 대한 생각으로 잠도 자지 못하였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지극하였던 까닭에 잠깐 동안 잠들었다가 깨어나서 밤에  있는 달빛을 날이 새어서 해가 뜬 것이라 여기고는,  일어나서 성문으로 나아가서 보니 성문이 이미 열려 있었다. 

왕사성의 성문을 초저녁에 아직 닫지 않는 것은 손님들이 들어오게 하기 위한 것이요, 새벽에 일찍 여는 것은 손님들이 떠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는 문이 열린 것을 보고 곧장 부처님이 계신 곳을 향하여 나아갔다.


佛時在寒林中住。於其中路,月沒還闇,須達多心悔躊躇,欲還入城,時蜜膊神放身光明,照諸林野,告言:“居士!居士!莫怖莫畏,直去莫還,去得大利!”如彼經偈中廣說。

그때 부처님께서는 한림(寒林,  śītavana. 시신을 버리는 장소로, 주로 도시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운데에 머물고 계셨으니, 그 중간쯤 갔을 때에 달이 졌으므로 다시 어두워졌으므로, 수달다는 마음으로 후회하고 주저하면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는데,

그 때에 밀박신(密膊神)이 몸으로 광명을 놓아 모든 숲과 들을 환히 비추어 주면서 거사(居士)에게 말하기를 ‘거사여,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고 곧장 나아가되 돌아서지 마시오. 가게 되면  이익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고 하였으니, 

이는 경에서 게송으로 자세히 것과 같다.


須達多見佛,得須陁洹道,請佛及僧於舍衛城,盡形供養。

佛令舍利弗爲須達師,於舍衛作精舍。如須達知識神示導,薩陁波崙知識示導亦如是,是故見其愁苦而示導之。作是言:“善男子!汝從是東行,行時莫念疲極等。”

수달다가 부처님을 수다원의 도를 얻었으며 부처님과 승가를 청하여 사위성(舍衛城)에서 그의 몸이 다하도록 공양하였다. 

부처님은 사리불 존자로 하여금 수달다의 스승이 되게 하셨으며, 사위성에 정사(精舍)를 짓게 하셨다.

마치 수달다에게 지식(知識, 선지식)의 신(神)이 교시하여 인도한 것과 같이, 살타파륜의 선지식이 교시하여 인도한  또한 그러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가르쳐주고 인도하기를 

“선남자여, 그대는 여기서부터 동쪽을 향해 가라.  때에 고달픔 등을 생각하지 말라”고  것이다.


問曰:疲極、飢渴,交來切身,云何不念?

묻나니, 고달픔과 배고프고 목마름이 한꺼번에 어울려 오면 몸이 절박할 것이거늘,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答曰:大欲精進力故,一心愛樂佛道,不惜身命。休息、飮食等皆是助身法。是事雖來,不爲亂心,知皆虛誑無常、無實,如怨、如賊,但爲身樂故,何足存念!莫爲飢渴、疲極等故而捨佛道!

莫念晝夜者,莫念:“晝是行法,夜應止息。”實無晝夜,所以者何?日依須彌,影翳故名夜。

답하나니, 커다란 서원의 대욕(大欲)과 정진력 때문에 일심으로 부처님의 불도를 좋아하면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니, 휴식과 음식 등은 모두가 몸을 돕는 조신법(助身法)일 뿐인 것이다. 

고달픔과 배고프고 목마름 등이 비록 닥쳐올지라도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 모두가 거짓이요 무상하며 진실하지 않아서 마치 원수와 같고 도적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몸의 즐거움인 신락(身樂)을 위한 것일 뿐이거늘 어떻게 염두에  필요가 있겠는가?

배고프고 목마르며 고달픔  때문에 부처님의도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낮과 밤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막념주야(莫念晝夜)’라고 함이란, 낮에는 법을 행하고 밤에는 쉬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니, 실로 밤과 낮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해가 수미산(須彌山)에 의하여 그림자가 가려지므로 밤이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莫念內外者,衆生多著內法。內法名身,外法名五欲。內外法不定,性空故,不應著。

‘안과 밖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막념내외(莫念內外)’라고 함이란, 중생은 대개가 안의 내법(內法,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에 탐착하나니, 안의 법은 몸을 말하는 것이고, 

밖의 외법(外法,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은 눈의 경계(眼境)ㆍ 귀의 경계(耳境)ㆍ코의 경계(鼻境)ㆍ혀의 경계(舌境)ㆍ몸의 경계(身境)의 오욕(五欲)을 말하는 것이다. 

안팎의 내외법(內外法, 12입)은 일정하지 않으며,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기 때문에 탐착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莫觀左右者,人散心行道故,左右顧看;行者無緣觀後,當前則不得不視,故但言莫左右顧看。復次,惡魔常惑亂行者,或作種種形、或作好色、或作畏獸,在道左右,故言莫觀。是皆止其麤念。

‘왼쪽과 오른쪽을 돌아보지 말라는 막관좌우(莫觀左右)’라고 함이란,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길을 가기 때문에 좌우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니, 길을 가는 이가 이유도 없이 뒤를 본다면 당연히 앞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따라서 ‘좌우를 돌아보지 말라’고  것이다. 

 악마는 항상 수행하는 이를 미혹하고 어지럽게 하고자 혹은 갖가지 형상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아름다운 모습이 되기도 하고, 혹은 두려운 짐승이 되기도 하여서 길의 좌우에 있으므로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니,

이러한 것은 모두가 거친 생각의 추념(麤念)을 그치라는 것이다.


莫壞身相、色等相者,五衆和合故假名爲身。若說別更決定有身法,是則壞身相;若著無身法,是亦壞身相。

離是一異、有無等邊,行於中道,則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故說莫壞身相等。

此中佛自說因緣:“若壞是諸相,則於佛法有㝵;佛法有㝵者,則往來五道生死中,不能得般若波羅蜜。”

‘몸의 신상(身相) 물질의 색상(色相) 등을 파괴하지 말라’고 함이란, 5중(衆, 오온)이 화합한 까닭에 몸이라는 가명 임시로 붙인 것인데,

만약 다시 몸의 신법(身法)이 결정코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몸의 신상(身相) 파괴하는 것이며, 

또한 몸이 없다는 무신법(無身法)에 집착한다면, 이 또한 몸의 신상(身相) 파괴하는 것이니,  

동일한 일(一)ㆍ다른 이(異)ㆍ있음의 유(有)ㆍ없다는 무(無) 등에 치우친 소견을 여의고 중도(中道)를 행한다면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몸의 신상(身相)을 파괴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만약 이 모든 상(相) 파괴한다면  부처님의법에 장애가 있게 되나니, 

부처님의법에 장애가 있으면,  오도(五道)의 생사 가운데를 왕래하면서 반야바라밀을 얻을  없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薩陁波崙報空中聲言:而自說因緣,所謂:“薩陁波崙見一切衆生墮在無明黑闇中,我欲爲然智慧光明;

一切衆生有一切煩惱,我欲設一切佛法藥;一切衆生皆墮邪道,我爲是衆生故求無上道。”

是三種願,得般若波羅蜜則能具足,是故言受教。

살타파륜은 공중의 소리에 답하면서  자신이 인연을 말하였으니, 

이른바 “살타파륜이 일체 중생들을 보건대 무명(無明)의 어둠 속에 떨어져 있으므로, 저는 지혜의 광명이 되고자 합니다. 

일체 중생에게는 일체의 번뇌가 있으므로, 저는 일체 부처님법의 즐거움인 불법약(佛法樂, 불법락佛法藥)을 베풀고자 합니다. 

일체 중생 모두가 삿된 사도(邪道)에 떨어져 있으므로, 저는  중생들을 위하여 위없는 무상도(無上道)를 구하고자 합니다”고 한 것으로, 

  가지의 삼종원(三種願)은 반야바라밀을 얻으면  완전히 갖출  있는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교시를 받는 수교(受教)’을 말하는 것이다.


問曰:薩陁波崙不見其形,但聞其聲,何以便言受教?

묻나니, 살타파륜은 그의 형상을 보지도 못하고 다만, 소리만 들었을 뿐이거늘, 무엇 때문에  교시를 받는 수교(受教)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人所求事急故,聞聲則應;薩陁波崙亦如是。

復次,聞其所說理好,則知其人亦好故,不須眼見;如黑闇中有種種衆生,眼雖不見,聞其聲則知其種類。

답하나니, 사람이 다급하게 구하는 것이 있으며, 소리만을 듣고도 응하는 것이니, 살타파륜도 이와 같은 것이며, 

또한 그가 하는 말의 이치가 바른 것으로 들리면 그 사람 또한 좋은 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꼭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

마치 어둠 속에 여러 중생이 있을 때, 비록 눈으로는 보지 못할지라도 그 소리만을 듣고도 그 종류를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大智度論  釋涅槃如化品 第八十七卷 第九十六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8. 살타파륜품(薩陀波崙品) 풀이함 ① 1

 

▶經. 佛告須菩提:“菩薩摩訶薩求般若波羅蜜,當如薩陁波崙菩薩摩訶薩。是菩薩今在大雷音佛所行菩薩
道。”

▷경.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구할 때에는 마땅히 반야의 가르침을 구하느라

‘항상 눈물을 흘리며 반야를 구하는 사람인, 살타파륜(薩陀波崙, Sādapraruta, 상제常啼) 보살마하살과 같이 해야만 하느니라. 

 보살은 지금 대뢰음(大雷音)부처님의 처소에 있으면서 보살도(菩薩道)를 행하고 있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薩陁波崙菩薩摩訶薩云何求般若波羅蜜?”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살타파륜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구한 것인지요?”


佛言:“薩陁波崙菩薩摩訶薩本求般若波羅蜜時,不惜身命,不求名利。

於空閑林中,聞空中聲言:‘汝善男子!從是東行,莫念疲極,莫念睡眠,莫念飮食,莫念晝夜,莫念寒熱,莫念內外。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살타파륜 보살마하살이 본래 반야바라밀을 구할 때, 몸과 목숨의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았으며, 세상의 명성과 이익의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았느니라. 

그가 고요한  속의 공한림(空閑林) 가운데에 있었는데, 공중에서 소리가기를 ‘그대 선남자여, 이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가되 고달프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잠을 자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며, 음식을 먹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낮과 밤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며, 춥고 덥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안과 밖이라는 생각도 하지 말라.

 

善男子!行時莫觀左右。汝行時莫壞身相,莫壞色相,莫壞受、想、行、識相。何以故?若壞是諸相,則於佛法有㝵;若於佛法有㝵,便往來五道生死中,亦不能得般若波羅蜜。’

선남자여, 길을  때에는 좌우를 보지 말고, 그대가  때에 몸의 신상(身相) 파괴하지도 말며, 물질의 색상(色相) 파괴하지 말고, 수상행식(受想行識) 상(相) 파괴하지 말지니,  

왜냐 하면 만약  모든 상(相) 파괴하게 되면, 부처님의법에 장애가 있게 되고,

만약 부처님의법에 장애가 있으면 도(五道)의 생사(生死) 가운데서 왕래하게 되며, 반야바라밀을 얻을  없게 되기 때문이다’고 하였느니라.


爾時,薩陁波崙菩薩報空中聲言:‘我當從教!

何以故?我欲爲一切衆生作大明,欲集一切諸佛法,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그 때에 살타파륜보살이 공중의 소리에 대답하기를 ‘저는 마땅히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왜냐 하면, 저는 일체 중생들을 위하여  광명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요, 

일체 부처님의 불법을 쌓고자 하기 때문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느니라.


薩陁波崙菩薩復聞空中聲言:‘善哉!善哉!善男子!汝於空、無相、無作之法,應生信心,以離相心求般若波羅蜜,離我相乃至離知者、見者相。

當遠離惡知識,當親近供養善知識。何等是善知識?能說空、無相、無作、無生、無滅法及一切種智,令人心入歡喜信樂,是爲善知識。

살타파륜보살에게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으니,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대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법에 믿는 신심(信心) 내어야 하며 

상(相)을 여의는 마음으로써 반야바라밀을 구하면서, 나라는 아상(我相)을 여의야 하며,

나아가 , 오식(五識)으로 알아차리는 지자(知者)ㆍ색(色)을 보는 견자(見者)라는 상(相) 여의야 하느니라. 

마땅히 나쁜 벗을 멀리 여의어야 하고, 선지식(善知識)을 친근하면서 공양해야 하나니, 

어떤 이가 선지식인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 무생(無生)ㆍ무멸(無滅)의 법과 일체종지(一切種智)에 이르기까지를 설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믿음의 즐거움에 들게 하는 이가  선지식이니라.


善男子!汝若如是行,不久當聞般若波羅蜜 若從經卷中聞,若從菩薩所說聞。

善男子!汝所從聞是般若波羅蜜處,應生心如佛想。

善男子!汝當知恩,應作是念:“所從聞是般若波羅蜜者,卽是我善知識。我用聞是法故,疾得不退轉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親近諸佛,常生有佛國中,遠離衆難,得具足無難處。”

善男子!當思惟籌量是功德,於所從聞法處,應生心如佛想。

선남자여, 만약 이와 같이 행한다면 오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듣게 되리니, 혹은 경권 가운데에서 듣게 되거나 혹은 보살의 설명으로부터 듣게  것이니,

선남자여, 그대가  반야바라밀을 듣게 되는 곳은 마땅히 부처님과 같다고 생각해야 하느니라. 

선남자여, 그대는  은혜를 알아야 하며, 또한 생각하기를 ' 반야바라밀을 들려주는 이가  나의 선지식이니, 나는  법을 들음으로써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신속히 얻어서 모든 부처님을 친근(親近)하며, 항상 부처님이 계신국토에 태어나서 여러 재난을 멀리 여의어서 재난이 없는 무난처(無難處)를 완전히 갖추리라.'라고 하여야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공덕을 사유하고 헤아리면서  법을 듣게 되는 곳이라면, 마치 부처님과 같다고 생각하여야 하느니라.


‘汝善男子!莫以世利心故隨逐法師,但爲愛法、恭敬法故,隨逐說法菩薩。

爾時,當覺知魔事。若惡魔與說法菩薩作五欲因緣,假爲法故令受;若說法菩薩入實法門,以德力故受而無所染。

又以三事故受是五欲:以方便力故,欲令衆生種善根故,欲與衆生同其事故。

汝於是中莫生污心,當起淨想!自念:“我未知漚和拘舍羅,大師以方便法,爲度衆生,令得福德故,受是諸欲,於智慧無著無㝵,不爲欲染。” 

그대 선남자여, 세간의 이익을 구하는 마음으로 법사(法師)를 따르지 말것이며, 

다만 법을 사랑하고 법을 공경하기 위하여 설법하는 보살을 따르라.

그 때에는 악마의 마사(摩事)를 깨달아 알아야 하나니, 만약 악마가 설법하는 보살에게욕(五欲)의 인연을 지어주면서 거짓된 법을 위하여 그로 하여금 받게 하여도,  설법하는 보살이 진실한 실법(實法)의 문에 들어 갔다면,  공덕의 힘때문에 받고서도 물듦이 없을 것이니라. 

  가지  때문에 이 욕을 받는 것이니,  방편력 때문이요,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심게 하기 위한 때문이요, 중생들과 일을 함께 하기 위한 때문이니라.

그대는  가운데에서 물든 마음의 오심(污心)을 내지 말고 깨끗한 생각을 일으키며 생각하기를,

'나는 아직 구화구사라(漚和拘舍羅, upāyakauśalya. 방편선교方便善巧)를 알지 못하나, 대사(大師)가 방편의 법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고 복덕을 얻게 하기 위하는 것이니, 이 모든욕을 받되, 지혜에 있어서 집착도 없고 장애도 없으며, 욕탐에 물들지도 않으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善男子!卽當觀諸法實相!諸法實相者,所謂一切法不垢不淨。

何以故?一切法自性空,無衆生、無人、無我,一切法如幻、如夢、如響、如影、如炎、如化。

善男子!觀是諸法實相已,當隨法師,汝不久當成就般若波羅蜜。

復次,善男子!汝當復覺知魔事:若說法菩薩見欲受般若波羅蜜人,意不存念,汝不應起心怨恨;汝但當以法故恭敬,莫起厭懈意,常應隨逐法師。’”

선남자여, 법의 실상(實相)을 관찰해야 하나니, 제법의 실상이란, 이른바 일체법이 더럽지 않은 불구(不垢)이고 깨끗하지도 않은 부정(不淨)이니, 

왜냐 하면, 일체법은 스스로의 성품이 공한, 자성공(自性空)이며, 중생도 없는 무중생(無衆生)이고, 무인(無人), 무아(無我)이며,

일체법은 마치 환과 같은 여환(如幻)이고, 꿈과 같은 여몽(如夢)이고, 메아리와 같은 여향(如響)이며, 그림자와 같은 여영(如影)이며, 꿈아지랑이와 같은 여염(如焰)이고, 변화한  것과 같은 여화(如化)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법의 실상을 관찰한 뒤에는 법사를 따라야 하나니, 그대는 오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성취할 것이니라.

선남자여, 그대는 다시 악마의 마사(摩事)를 깨달아야 하리니, 설령 설법하는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을 보고도 염두에 두지 않을지라도, 그대는 마음에 원한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느니라. 

그대는 오직 법을 공경할 뿐이요, 싫증을 내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말아야 하며, 언제나 법사를 따라야 하느니라.”


▶論. 釋曰:上品中說:“新發意菩薩云何教性空法?”性空法畢竟無所有空,難解難得故。

佛答:“法先有今無耶?”
佛意:性空法非難得難知。何以故?本來常無,更無新異,汝何以心驚謂爲難得?是性空法雖甚深,菩薩但能一心勤精進,不惜身命,作如是一心求,便可得。此中說薩陁波崙本生爲證。

▷논. 해석하겠다. 앞의 품인 상품(上品, 열반여화품 涅槃如化品)에서 말하기를 “새로 뜻을  초발의 보살에게 성품이 공한 성공법(性空法)을 어떻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까? 

성품이 공한 성공법(性空法) 필경에 있는 바가 없는 필경무소유공(畢竟無所有空)이라서, 알기도 어렵고 얻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반문하시기를 “앞에서는 법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인가?”라고 하셨으니, 

부처님께서 뜻하신 바는, ‘성품이 공한 성공법(性空法) 얻기 어렵거나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니, 

왜냐 하면, 본래부터 항상 없던 무상(常無)한 것이요, 새로이 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마음으로 놀라면서 얻기 어렵다고 여기는 것인가!

 성품이 공한 성공법(性空法) 비록 심히 깊을지라도, 보살은 다만 일심으로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을 뿐이니, 이와 같이 일심으로 구한다  얻을  있다’는 것으로,  

여기에서 살타파륜의 본생(本生)을 말씀하시어 그것을 증명하셨다.


佛法有十二部經,或因修妒路、偈經、本生經得度;今佛以本生經爲證。若有聞者,作是念:“彼人能得,我亦應得。”是故說薩陁波崙菩薩本生因緣。佛告須菩提:“菩薩求般若波羅蜜,應如薩陁波崙。”

부처님의법에는 12부경(部經)이 있어서 혹은 수투로(修妬路, 수타라,  sūtra, 산문 형식의 경)와 게경(偈經,  gāthā, 가타伽陀)과 본생경(本生經, 본생담, 자타카 Jataka)으로 인하여 제도되기도 하나니,  

지금 부처님께서는 본생경으로써 증명을 삼으시는 것이니, 들은 이가 생각하기를 ‘그 사람도 얻었으니, 나 또한 얻을 수 있으리라.’고 하게 되기 때문에 살타파륜보살의 본생의 인연을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신 바는 “보살이 반야바라밀 구하기를 마땅히 살타파륜 보살과 같이 해야 한다”라고 하신 것이다.

 

반야경의 십이부경= 계경(契經), 응송(應頌), 기별(記別) 또는 기별(記莂), 풍송(諷頌), 자설(自說), 인연(因緣)

또는 연기(緣起), 본사(本事), 본생(本生), 방광(方廣), 희법(希法), 비유(譬喩), 논의(論議)이며,

장아함, 칠지경, 잡아함, 본사경의 12부경이 있음.


問曰:若般若波羅蜜無相、畢竟空,行禪定猶尚難得,何況憂愁啼哭散心求覓而當可得!

묻나니, 만약 반야바라밀이 무상(無相)이고 필경공(畢竟空)이라면, 선정을 행하여도 오히려 얻기 어려울 것이거늘, 하물며 근심하고 슬피 울면서 산란한 마음으로 구하여서 얻을  있겠습니까?


答曰:爲新發意菩薩說薩陁波崙。

답하나니, 새로이 뜻을  신발의 보살을 위하여 살타파륜을 말씀하신 것이다.


問曰:若薩陁波崙是新發意,十方諸佛云何現在其前,得諸三昧?不惜身,又見曇無竭,復得無量阿僧祇三昧,云何名新發意?

묻나니, 만약 살타파륜이 바로 새로이 뜻을 낸 신발의라면, 어찌하여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의 앞에 나타나신 것이며? 모든 삼매(三昧)를 얻은 것입니까? 

몸을 아끼지 않으면서 다시 담무갈(曇無竭, 다르모가타, Dharmogata, 법기 보살法起菩薩)을 뵙고 다시 무량한 아승기의 삼매를 얻었거늘, 어떻게 ‘새로이 뜻을  신발의(新發意)’라 것입니까?


答曰:新學菩薩有二種:一者、深心著世閒樂,軟心發意;二者、深心發意,不著世閒樂。軟心發意者,佛不以爲發心;深心發意者,乃名爲發心。如聲聞法中,佛語二比丘:“於我法中,乃至無如毛釐煖法。”佛觀是煖法最爲微小,凡人觀之以爲大;譬如國王,見一張㲲,不以爲多,貧者見之以爲多。以一心不惜身故,說薩陁波崙爲證。

답하나니, 새로이 배우는 신학(新學) 보살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깊은 심심(深心)으로 세간의 즐거움에 탐착하면서 연한 마음으로 뜻을 내는 연심발의(軟心發意)요, 

둘째는 깊은 심심(深心)으로 뜻을 내어서 세간의 즐거움에 탐착하지 않는 이이다. 

부처님께서는 연심발의(軟心發意)한 이는 발심하였다고 하시지 않으시며,

깊은 마음의  심심(深心)으로 뜻을  이라야 비로소 발심했다고 하시는 것이다.

성문법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가운데에는 털끝만큼의 난법(煖法, uṣmagata-dharma. 4제 四諦의 이치에 가까이 다가선 지혜)도 없다”고 하셨으니,

부처님께서는 이 난법(煖法)을 가장 미미하고 작은 것으로 보시는 것이지만, 범부인은 그것을 크다고 보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국왕은  장의 담요를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지만, 가난한 이는 그것을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과 같나니, 

일심으로 몸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살타파륜으로 증명을 삼으신 것이다.


問曰:若薩陁波崙菩薩能作如是苦行、從曇無竭得諸三昧,應當作佛,今何以故在大雷音佛所修菩薩行?

묻나니, 만약 살타파륜보살이 이와 같이 고행(苦行)할  있었다면, 담무갈(曇無竭, 다르모가타, Dharmogata, 법기 보살法起菩薩)로부터 모든 삼매를 얻고는 마땅히 부처님을 이루었어야 하셨거늘, 

지금 무엇 때문에 대뢰음(大雷音) 부처님 처소에서 보살의 행을 닦고 있는 것입니까?


答曰:佛法無量無邊,若千萬阿僧祇劫修勤苦行尚不可得,何況薩陁波崙一世苦行!復有菩薩具足菩薩道、十力、四無所畏等,爲衆生故住世閒,未取實際,如文殊師利等;薩陁波崙或能如此,故未作佛。

답하나니, 부처님의법은 무량하고 무변하나니, 아승기겁 동안 부지런히 고행을 닦을지라도 오히려 얻기 어려운 것이거늘, 하물며 살타파륜의  세상 동안의 고행이겠는가!

 어떤 보살은 보살도와 10력과 4무소외 등을 완전하게 갖추었으면서도 중생들을 위한 까닭에 세간에 머무르면서 실제(實際)를 아직 취하지 않는 이도 있나니, 마치 문수사리(文殊師利) 등과 같으며,

살타파륜도  이러한 이일 수 있기 때문에 아직 부처님이 되지 않은 것이리라.


菩薩三昧如十方國土中塵數,薩陁波崙所得六萬三昧何足爲多!

大雷音佛者,應如大龍王將欲降雨,震大雷音,烏雀、小虫悉皆怖畏;是佛初轉法輪時,十方衆生皆發心,外道邪見皆恐怖懾伏,是故天人衆生稱佛爲大雷音。是佛今現在。須菩提問:“薩陁波崙菩薩摩訶薩云何求般若波羅蜜?”

보살삼매(菩薩三昧)는 시방의 국토에 있는 미진과 같으나, 살타파륜이 얻은 것은 6만의 삼매이거늘 어찌 이것을 많다 할 수 있겠는가?

‘대뢰음불(大雷音佛)’이란, 마치 큰 용왕이 장차 비를 내리고자 할 때 크게 우레 소리를 떨치면 까마귀ㆍ참새ㆍ작은 곤충까지도 모두 두려워하는 것과 같이,

이 부처님께서 처음에 법륜을 굴리신, 초전법륜(初轉法輪) 하실 때에 시방의 중생들이 모두 발심하였으며, 외도(外道)와 삿된 사견을 지닌 이들이 모두 다 두려워하면서 굴복하였으니,

이러한 까닭에 하늘과 사람과 중생들이 그 부처님을 ‘대뢰음(大雷音)’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부처님께서는 지금 현재도 계시나니, 따라서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살타파륜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구한 것입니까?”라고 한 것이다.

大智度論  釋涅槃如化品 第八十七卷 第九十六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7. 열반여화품(涅槃如化品) 풀이함 3

 

須菩提復問:世尊!是諸聖人煩惱斷,所謂須洹果乃至阿羅漢果、辟支佛道、斷一切煩惱習 是諸斷皆如化不?

須菩提意:有爲法虛誑故如變化,無爲法眞實無作故不應是化,是故問。

수보리 존자가 여쭈었으니, 세존이시여, 모든 성인으로서 번뇌가 끊어진, 이른바 수다원의 내지는 아라한의 과와 벽지불의 도로써 일체의 번뇌와 습기가 끊어진 분들의 모든 끊어진 단(斷) 역시도 모두 변화와 같은 여화(如化)입니까?”라고 하였으니,

, 수보리 존자는 유위법은 거짓이기 때문에 변화와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무위법은 진실이요 조작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변화가 아니어야 한다 생각한 때문에 여쭌 것이다.

 

佛答:“一切法若生若滅皆如化。”何以故?本無今有、今有後無,誑惑人心故。

佛意:一切從因緣生法皆無自性,無自性故畢竟空,畢竟空故皆如化。

須菩提求諸法實相,意猶未息,故問佛:“何等法不如化?”

須菩提意謂:有一決定實法不如化,可依是法而精進求。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일체법은 나는 생(生)이나 없어지는 멸(滅), 모두가 변화와 같으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본래는 없었다가 지금은 있게 된 것이고, 지금은 있는 것이나 나중에는 없어지기도 하여서 사람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게 광혹(誑惑)시키기 때문이니, 

부처님께서 뜻하신 바는, ‘일체는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법이라서, 모두가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자성(無自性)이 때문에 필경공(畢竟空)이며, 

필경공이기 때문에 모두가 변화한 것과 같은 여화(如化)이다’는 것이다.

수보리 존자는법의 실상을 구하려는 뜻을 오히려 쉬지 않은 까닭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어떠한 법이 변화와 같지 않은 불여화(不如化)입니까?”라고 하였으니, 

수보리 존자의 뜻은 ‘어떤 하나의 결정된 진실의 일경정실법(一決定實法)으로서 변화와 같지 않은 것이 있다면,  법에 의지하여 정진하면서 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었다.

 

佛答:“有。若法無生無滅,卽是非化。”

何者是?所謂無誑相涅槃。是法無生故無滅,無滅故不能令人生憂。

佛分別一切有爲法畢竟空皆如化,唯有涅槃一法非如化。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만약 어떤 법으로서 나는것도 없는 무생(無生)이고 없어지는 것도 없는 무멸(無滅)이라면, 그것은 곧 변화가 아닌 불여화(不如化)이니라”고 하셨으니, 

어떠한 것인가? 이른바 거짓으로 속이는 상이 없는 무광상(無誑相) 열반이니,  법은 생함이 없는 무생(無生)이기 때문에 무멸(無滅)이며, 무멸(無滅)이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근심하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유위법은 필경공이라서 모두가 변화와 같은 여화(如化)이지만, 

오직 열반이라는 이 하나의 법만이 변화와 같지 않은 불여화(不如化)이다’라고 분별하여 주신 것이다.

 

爾時,須菩提白佛:“如佛說:‘平等法,非佛所作,非聲聞、辟支佛所作,有佛、無佛諸法常住性空相。’性空相卽是涅槃。”

須菩提意謂:深入般若波羅蜜中,涅槃亦空,上品中處處說;今佛何以說:“唯一涅槃不如化?”

是故引佛語爲難:“諸法實相,性空法常住,諸佛但爲人演說。性空者,卽是涅槃。

今何以於生滅法中別說無誑相涅槃不如化?”

그 때에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등법(平等法)은 부처님께서 만든 것도 아니고 성문이나 벽지불이 만든 것이 아닌 것으로, 

부처님께서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법은 항상 머물러 있어서 성품이 공한 상주성공(常住性空)의 상(相)이며,  성품이 공한 성공상(性空相)  열반(涅槃)입니다”고 하였으니, 

수보리 존자의 뜻은, ‘반야바라밀에 깊이 들어가면 열반 또한 공하다는 것을 앞품의 곳곳에서 말씀하셨거늘, 

지금은 부처님께서 무엇 때문에 오직  하나의 열반(涅槃)만이 변화와 같지 않은 불여화(不如化)라고 하시는 것일까?’라고 생각한 것이었으니,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따진 것이니,  “제법의 실상은 성품이 공한 성공법(性空法)이고,  법은 항상 머물러 상주(常住)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든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연설하신 것일 뿐입니다. 

성품이 공하다는 성공(性空)  열반(涅槃)이거늘, 나고 없어지는 생멸법(生滅法)에서 따로 ‘거짓으로 속이는 상이 없는 무광상(無誑相)의 열반이 변화와 같지 않은 불여화(不如化)이다’고 말씀하십니까?”라고  것이다.

 

佛答:“諸法平等常住,非賢聖所作。若新學菩薩聞則恐怖,是故分別說:生滅者如化,不生滅者不如化。”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제법은 평등하여 항상 머물러 있는 평등상주(平等常住)이니, 성현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새로 배우는 신학 보살들이 이러한 말을 들으면  두려움을  것이기 때문에 분별하여서 ‘나고 없어지는 생멸(生滅) 변화와 같은 여화(如化)이지만, 나고 없어지지 않는 불생멸(不生滅) 변화와 같지 않은 불여화(不如化)이다'라고 하느니라”고 하셨다.

 

問曰:唯佛一人是無誑人,一切人皆於佛所欲求實事,今佛何以說一切法都空、或說不都空?

묻나니, 오직 부처님  분만은 거짓으로 속임이 없는 무광인(無誑人)이시므로, 일체의 모든 사람들 모두는 부처님에게서 진실한 실사(實事)를 구하고자 하거늘, 

지금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일체법은 모두가 공한 도공(都空)이다”고 말씀하기도 하고, 

혹은 “모두 공하지 않은 불도공(不都空)이다”고 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佛此中自說因緣:“爲新發意菩薩故,說涅槃不如化。”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이 가운데에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새로이 뜻을  신발의(新發意) 보살들을 위하는 까닭에 ‘열반은 변화와 같지 않은 불여화(不如化)이다’고 말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問曰:可爲人故轉諸法相耶?

묻나니, 사람들을 위해서는법의 법상(法相)을 바꿀  있는 것입니까?

 

答曰:此中佛說“諸法相者性空”,性空云何可轉?

佛初得是諸法實相時,心但趣向涅槃寂滅。是時,十方諸佛、諸天請佛莫入涅槃:“一切衆生苦惱,當度脫之!”

佛卽受請,佛但爲度衆生故住。以是故,知有可利益衆生,隨事爲說。

답하나니,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법의 법상(法相)이란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다.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거늘 어떻게 바꿀  있겠는가?”라고 하셨으니, 

부처님께서 처음에 법의 실상을 얻었을 때, 그 마음은 다만 열반의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한 곳으로만 향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시방에 계신 모든 부처님과 하늘들이 부처님께 청하기를, “열반에 들지 마시고  일체 중생들을 고뇌에서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셔야만 합니다”고 한 것이며,

부처님께서도 곧 그러한 청을 받아들이셨으니, 부처님께서는 다만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머물렀을 뿐이시니,

그러므로 이롭게  중생이 있기만 하면 그에 따라서 그를 위한 법을 설한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觀諸有爲法虛誑故,涅槃爲實、不變不異。有新發意菩薩著是涅槃,因是著起諸煩惱;

爲斷是著故,說涅槃如化。若無著心,是時則說涅槃非如化。

復次,有二道:小乘道、大乘道。小乘論議,以涅槃爲實;大乘論議,以利智慧深入故,觀色等諸法皆如涅槃。

是故二說無咎。

모든 유위법은 허망하고 거짓된 허광(虛誑)이라고 관찰한 까닭에,  열반은 진실한 것으로써 변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지만, 새로 뜻을  신발의 보살이  열반에 집착한다면  집착으로 인하여 모든 번뇌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집착을 끊게 하기 위하여 “열반은 변화와 같은 여화(如化)이다”고 말씀하신 것이요, 

만약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면,  “열반은 변화와 같은 것이 아닌 불여화(不如化)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다시  가지의 도가 있으니, 소승의 소승도(小乘道)와 대승도(大乘道)가 그것이다. 

소승의 논의(論議)에서는 열반으로 진실로 삼지만, 대승의 논의에서는 예리한 지혜로써 깊이 들어가기 때문에 물질(色) 등의법은 모두가 열반과 같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가지의 설명에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

 

須菩提復問:“云何化新發意菩薩,令知平等性空?”

須菩提意謂:性空是凡夫人大怖畏處,聞性空無所有,如臨深坑。

何以故?一切未得道者,我心深著故,怖畏空法,作是念:“佛人勤修善行,終歸入無所有中!”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어떻게 새로 뜻을  신발의 보살을 교화하여서 그로 하여금 평등하고 성품이 공한 평등성공(平等性空) 알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수보리 존자의 생각으로는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 범부들이 크게 두려워할 만한이며,  

성품이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는 성공무소유(性空無所有)라는 말을 듣게 되면 마치 깊은 구덩이에 목전하여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니, 왜냐 하면, 아직 도를 얻지 못한 모든 이들은 '나'라는 아심(我心)에 깊이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공하다는 공법(空法)을 두려워하면서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착한행을 부지런히 닦도록 가르치면서도, 끝내는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 돌아가게 하는 구나'라고 할 것이 때문이다’라고  것이다.

 

以是故,須菩提問:“以何方便誨是新發意者?”

佛答:“諸法先有今無耶?”佛意:以新發意者怖畏後當無故,說:“諸法先有今無耶?”

이러한 때문에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어떠한 방편으로써 새로 발심한 신발의자(新發意者)들을 가르야 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제법이 앞에서 있다가 지금은 없는 것이던가?”고 하셨으니,

부처님의 뜻은, 새로 뜻을  이들은 나중에는 없게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제법이 앞에서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인가?”라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自了了知諸法先自無、今亦無,但以新發意者我見心覆故生驚怖;爲除顚倒,令得實見,竟無所失;

知諸煩惱顚倒實相,所謂性空,是時則無恐怖。如是等法,應新發意者:若諸法先有,以行道故無,應當恐怖;

初自無故,不應恐怖,但爲除顚倒耳。

수보리 존자가 스스로 ‘제법은 앞에서도 스스로 없는 선자무(先自無)이었고, 지금도 없는 금역무(今亦無)이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다만 새로이 뜻을 낸 이들이 나라는 소견의 아견(我見)으로 마음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놀라며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뒤바뀜을 없애 주면서 진실한 소견을 얻게 하는 것이니,

필경에 잃는 것도 없으면서 모든 번뇌와 뒤바뀜의 실상, 즉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곧 두려움이 없어질 것이므로 이와 같은 등의 법으로써 새로이 발심한 이들에게 가르치기를

“만약 제법이 앞에서는 있었다가 도를 행한 까닭에 없어지는 것이라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겠지만,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나니, 다만 뒤바뀜을 제거하면 될 뿐이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大智度論  釋涅槃如化品 第八十七卷 第九十六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7. 열반여화품(涅槃如化品) 풀이함  2

 

問曰:若爾者,此中何以說“離一切法相”?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에서 “일체법의 상(相)을 여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一切法不可盡壞,但離其邪憶想,一切法自離。如神通人壞色相故,則石壁無礙。

如佛說:“汝等當於五衆中修正憶念,斷貪欲,得正解脫。”是故說離相。

답하나니, 일체법 전부를 다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니, 다만 그 삿된 기억과  삿된 생각을 여의기만 한다면, 일체법은 저절로 여의게 되는 것으로, 마치 신통이 있는 사람은 물질의 색상(色相)양을 파괴하기 때문에 석벽(石壁, 돌벽)도 장애가 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그대들은 5중(衆, 오온) 가운데에서 바른 기억의 정억념(正憶念)을 닦고, 탐욕을 끊으면서 바른 해탈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여읨의 이상(離相)을 말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須菩提聞是已,心驚:“云何一切法若大若小都無本實?凡夫人虛妄,可無實事;聖人應有少許實!”

須菩提雖是阿羅漢,深貴佛法,亦爲新發意菩薩故問。

佛知須菩提意,欲明了是事,故說譬喩,反問須菩提:“於汝意云何?如化人復作化,是化有本實不空不?”

수보리 존자는 이러한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놀라면서 ‘어떻게 하여 일체법은 크건 작건 간에 도무지 근본과 실체가 없다고 하시는 것일까?

범부인은 허망하므로 진실이 없을 수도 있지만, 성인에게는 조그마한 진실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수보리 존자는 아라한이라서 부처님의 불법을 몹시 귀히 여기고 있기는 하나, 역시 새로이 뜻을 낸 초발의 보살들을 위하여 일부러 여쭌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의 뜻을 아시면서 이에 대하여 분명히 알게 하시고자, 비유를 말하면서 수보리 존자의 질문을 되받아서 묻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변화로 된 화인(化人)이 다시 변화를 짓는 것과 같아서, 이 변화(化)로 된 것은 근본과 실체가 있는 것이며 공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신 것이다.


答言:“不也!是化無有實事而不空者,空及化人二事,不合不散,皆空故,用空空故空。”

수보리 존자가 “아닙니다”고 대답하자,

부처님께서는 “이 변화(化)하는 것에는 진실한 실사(實事)나 공하지 않음이 없으니,

공(空)과 변화한 화인(化人)의 두 가지는 합하지도 않는 불합(不合)이고 흩어지지도 않는 불산(不散)이니,

모두가 공(空)한 때문이요, 그 공한 것도 공한 공공(空空)이라서 공(空)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問曰:何以名爲“空空故空”?

묻나니, 어찌하여 공한 것도 공한 공공(空空)이라서 공(空)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爲破十八事實故有十八空,破衆生心中變化空法故用空空。世閒人皆知幻化法不久住、無所能作,故名空;是故言:“空空故空,不應分別是空、是化”。

凡夫人知變化是空、不實,謂餘法爲實,是故以化爲喩,當知餘法與化無異。

如聖人所解,不得以化爲喩,以無所分別故。一切法名爲五衆;佛言:“色、受、想、行、識無不是化,以空故。”

답하나니, 열여덟 가지의 실상을 타파하기 위하여 십팔공(十八空)이 있으며,

중생의 마음속에서 변화하는 그 공법(空法)까지 타파하기 위하여 공공(空空)을 쓰는 것이다.

세간 사람들은 환화(幻化)의 법은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하고, 지을 수 없는 무소능작(無所能作)이기에 공이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설하시기를 “공한 것도 공한 공공(空空)이기에 공이라 하나니, ‘이것은 공하다’거나 ‘이것은 변화(化)이다’라고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범부인은 변화(化)는 공하여서 진실하지 않은 것임을 알면서도 그 밖의 다른 법은 진실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변화(化)로써 비유하신 것이며,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법과 변화(化)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인들이 이해하는 것과 같다면 변화로써 비유를 삼을 수가 없으니, 분별함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법을 5중(衆, 오온)이라 하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질의 색(色)ㆍ 느낌의 수(受)ㆍ생각의 상(想)ㆍ 지어감의 행(行)ㆍ인식의 식(識)의 오중(五衆, 오온)은 곧 변화(化)가 아닌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으니, 이는 공하기 때문이다.


須菩提白佛言:“世尊!凡夫法虛妄應如化,出世閒法亦如變化耶?所謂四念處乃至十八不共法。若四念處法等從因緣邊生故如化,是法果 所謂涅槃,亦復如化耶?若能起是行者 所謂須陁洹乃至佛,亦復如化耶?”

佛答:“若有爲、若無爲及諸賢聖皆是化,畢竟空故。”是義從初品已來,處處廣說,是故言:“一切法空,皆如化。”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범부의 법은 허망하므로 변화(化)와 같아야 하겠지만, 출세간의 법 또한 변화(化)와 같은 것입니까?

이른바 4념처 내지는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이니, 4념처의 법 등은 인(因)과 연(緣)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변화(化)와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법의 결과는 이른바 열반이거늘 어찌 변화(化)와 같으며, 그리고 이 행(行)을 일으키는 자(者)로서, 소위 수다원이나 나아가 부처님까지도 역시 변화(化)와 같은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유위와 무위와 그리고 모든 성현은 모두가 변화(化)이니, 그것은 필경공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으니,

이러한 이치는 초품(初品)을 비롯한 곳곳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법은 모두가 변화(化)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問曰:若一切法皆空、如化,何以故有種種諸法別異?

묻나니, 만약 일체법 모두가 공하여 마치 변화(化)와 같다면, 무엇 때문에 갖가지 법에 차별이 있는 것입니까?


答曰:如佛所化及餘人所化,雖不實而有種種形像別異。夢中所見種種亦如是,人見夢中好、惡事,有生喜者、有生怖者。如鏡中像,雖無實事,而隨本形,像有好醜。諸法亦如是,雖空而各各有因緣。

如佛此中說:“是化法中,有聲聞變化、有辟支佛變化、有菩薩變化、有佛變化、有煩惱變化、有業變化。是故一切法皆是變化。”

답하나니, 부처님께서 변화(化)로 만든 것이나, 그 밖의 사람이 변화(化)로 만든 것이 비록 진실하지는 않을지라도 갖가지 형상으로 다름이 있으며,

꿈속에서 보는 갖가지 형상도 이와 같으니, 사람이 꿈속에서 좋고 나쁜 일을 보면서 기뻐하는 이도 있고 두려워하는 이도 있으니, 마치 거울 속의 형상에도 비록 진실함이 없을지언정 본래의 형상을 따라 곱고 추함이 있는 것과 같이,

제법도 이와 같아서 비록 공(空)할지라도 저마다의 인연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가운데서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이 변화하는 화법(化法)에는 성문(聲聞)의 변화가 있고 벽지불(辟支佛)의 변화가 있으며, 보살의 변화가 있고 부처님의 변화가 있으며, 번뇌(煩惱)의 변화가 있고, 업(業)의 변화가 있느니라.

이러한 까닭에 일체법은 모두가 변화(化)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聲聞變化者,三十七品、四聖諦,乃至三解脫門。何以故?聲聞人住持戒中,禪定攝心求涅槃,觀內外身不淨,是名身念處。如是等法,爲涅槃故勤精進生起。是法本無而今有、已有還無,是爲聲聞變化。

‘성문의 변화’라 함이란, 37 조도품과 4성제(聖諦) 내지는 3해탈문(解脫門)이니,

왜냐 하면, 성문인은 지계(持戒)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선정(禪定)으로 마음을 가다듬어서 열반을 구하며, 안팎으로 몸의 부정(不淨)을 닦기 때문이니, 이를 신념처(身念處)라 하며, 

이와 같은 등의 법은 열반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 법을 일으키면, 본래 없었던 것이 비로소 있게 되고 이미 있었던 것은 다시 없게 되므로, 이것이 곧 성문변화(聲聞變化)인 것이다.


辟支佛變化者,所謂觀十二因緣等諸法。所以者何?辟支佛智慧深於聲聞人故。菩薩變化者,所謂六波羅蜜,及二種神通:報得及修得。佛法變化者,三十二相、八十隨形好、十力、一切種智等無量佛法。煩惱變化者,煩惱起種種業:善、不善、無記業、畢定業、不畢定業,善、不善、無動業等無量諸業。

‘벽지불의 변화’라 함이란, 이른바 12인연(因緣) 등의 제법을 관(觀)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벽지불의 지혜는 성문인보다 깊기 때문이며, 

‘보살의 변화’라 함이란, 이른바 6바라밀과 두 가지의 신통 즉, 과보로 얻는 보득(報得)과 수행으로 얻는 수득(修得)이 있으며, 

‘부처님 불법의 변화’라 함이란, 32상호와 80수형호(隨形好)와 10력(力)과 일체종지(一切種智) 등의 무량한 부처님의 불법이며, 

‘번뇌의 변화’라 함이란, 번뇌는 갖가지 업을 일으키나니,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업(無記業)과 필정업(畢定業)ㆍ불필정업(不畢定業)과 선(善)ㆍ불선(不善)ㆍ무동(無動)의 업 등의 무량한 업들이 있는 것이다.


問曰:諸煩惱是惡法,云何能生善業、無動業?

묻나니, 모든 번뇌 그것은 거친 악업(惡業)이거늘, 어찌하여 선업과 무동업을 낼 수 있는 것입니까?


答曰:有二種因:一者、近因,二者、遠因。人有我心,爲後身當常樂故修布施,是近因;爲離欲界衰惱不淨身故修禪定,是爲遠因。

復有人言:一切凡夫皆以我心和合故起業。有人言:無有離我心起第六識,住我心故起第六識,我心卽是諸煩惱根本。

답하나니, 이에 두 가지 원인이 있으니, 첫째는 가까운 원인인 근인(近因)이요, 둘째는 먼 원인의 원인(遠因)이다.

사람에게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이 있으면서 후생에 받는 몸이 언제나 쾌락하기 위하여 보시를 닦는 것은 바로 가까운 원인인 근인(近因)이며,

욕계(欲界)의 괴로움인 쇠뇌(衰惱)와 깨끗하지 못한 몸을 여의기 위하여 선정을 닦는 것은 바로 먼 원인의 원인(遠因)이다.

또 어떤 분은 말하기를 “일체 범부는 모두가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이 화합하기 때문에 업을 일으킨다”고 하기도 하며, 또 어떤 분은 말하기를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을 여의면 제6식(識)이 일어나지 않지만,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에 머무르기 때문에 제6식이 일어나는 것이니,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이 곧 모든 번뇌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問曰:煩惱是垢心,善心是淨心,垢、淨不得和合,何以言“住我心中能起善業”?

묻나니, 번뇌는 더러운 마음의 구심(垢心)이요, 착한 마음은 깨끗한 마음의 정심(淨心)입니다.

더러운 구(垢)와 깨끗한 정(淨)은 화합하지 못하거늘, 무엇 때문에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에 머무르면서 착한 선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不爾!一切心皆與慧俱生,無明心中亦應有慧;慧與無明相違法而一心中起。淨、垢亦如是。

凡夫未得聖道,云何能得離我心而行善?

瞋等煩惱中,則不得行善;我心無記柔軟故,是故煩惱心中生善業、無動業,無咎。

답하나니,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일체의 마음은 모두가 지혜와 함께 생기는 것으로, 무명심(無明心)에도 지혜는 역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혜와 무명은 서로 반대되는 법이면서도 한 마음의 일심(一心)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깨끗한 정(淨)과 더러운 구(垢) 또한 이와 같은 것으로,

범부는 아직 성인의 성도(聖道)를 얻지 못한 이거늘, 어떻게 나의 아심(我心)을 여읠 수 있으며, 착한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성을 내는 등의 번뇌 가운데에서는 선(善)을 행할 수 없지만,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은 무기(無記)라서 유연(柔軟)하기 때문에 번뇌심(煩惱心) 중에서 선업(善業)과 무동업(無動業, 부동행)과 무구업(無咎業)이 생기는 것이다.


業變化者,生一切果報法,所謂六道:惡業果報是三惡道,善業果報是三善道。惡業有上、中、下:上者地獄,中者畜生,下者餓鬼。善業亦有上、中、下:上者天,中者人,下者阿修羅等。上善業有種種輕重等分別,上惡業亦有輕重差別。次第輕重,如地獄中說;餘道亦如「分別業品」中說。

업의 변화의 업변화(業變化)라는 것은, 일체 과보의 법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른바 6도(道)를 말하는 것이다.

나쁜 악업의 과보는 삼악도이고, 착한 업의 과보는 삼선도이다.

나쁜 악업에는 상(上)ㆍ중(中)ㆍ하(下)가 있어서 상(上)은 지옥이요, 중(中)은 축생이며, 하(下)는 아귀이며,

착한 선업에도 상ㆍ중ㆍ하가 있어서, 상(上)은 하늘이요, 중(中)은 사람이며, 하(下)는 아수라 등이다.

상(上)의 착한 선업에도 갖가지의 무겁고 가벼운 경중(輕重)의 분별이 있고,

상(上)의 나쁜 악업에도 무겁고 가벼운, 경중의 차별이 있으니, 그 차례와 경중에 대해서는 지옥(地獄)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그 밖의 세계(道)에 대해서도 역시 '분별업품(分別業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問曰:若從業有,何以言變化?

묻나니, 만약 업을 따라 있게 된다면, 무엇 때문에 변화(化)를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凡夫人見諸法不如化;聖人知畢竟空相故,以天眼觀衆生皆無有終、始、中閒。如化主遠處作變化;業亦如是,在過去世中作今身變化。如變化事能種種令人生憂、喜、怖畏;智者觀之,皆無有實,而人橫生憂喜,是人可笑!業亦如是,是故說業變化。

답하나니, 범부인은 제법을 변화와 같지 않다고 보지만, 성인은 필경공한 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천안(天眼)으로 중생을 볼 때, 그 모두가 처음도 나중도 중간도 없는 것이 마치 변화를 짓는 화주(化主)가 먼 곳에서 그 변화를 짓는 것과 같음을 보는 것이니, 업 또한 이와 같아서 과거 세상 동안에 지금의 몸을 위한 변화(化)를 짓는 것이다.

변화(化)로 된 일들의 화사(化事)의 갖가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근심과 기쁨과 두려움을 내게 하나니,

지혜 있는 이는 그 모두에 실체가 없다고 보지만, 사람들은 제멋대로 근심이나 기쁨을 내고 있으니,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가히 우스운 것이며, 업 또한 이와 같은 까닭에 “업변화(業變化)”라고 하는 것이다.


問曰:是諸變化皆業所作,何以不但說業變化?

묻나니, 이 모든 변화는 모두가 업으로 되는 업소작(業所作)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업의 변화’라고만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業有二種:淨業,垢業。淨業者,聲聞變化乃至佛變化;垢業是煩惱變化。

復次,有二種業:凡夫業,聖人業。凡夫業是煩惱變化;聖人業,須陁洹乃至佛。

是故雖皆是業變化而廣分別,無咎。“是故,須菩提!當知一切法空皆如化。”

답하나니, 업에 두 가지가 있으니, 깨끗한 정업(淨業)과 더러운 구업(垢業)이다.

깨끗한 정업(淨業)이란 성문의 변화 내지는 부처님의 변화이며,

더러운 구업(垢業)업이란 곧 번뇌의 변화이다.

또한 두 가지 업(業)이 있으니, 범부의 업과 성인의 업이며, 

범부의 업이란 곧 번뇌의 변화요, 성인의 업이란 수다원에서부터 부처님까지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 모두가 업의 변화라 할지라도 자세히 분별하여도 허물이 되지 않기 때문에 “수보리야, 일체법은 공하여서 모두가 변화와 같은 여화(如化)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大智度論  釋涅槃如化品 第八十七卷 第九十六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7. 열반여화품(涅槃如化品) 풀이함  1

 

▶經. 須菩提白佛言:“世尊!若諸法平等、無所爲作,云何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於平等中不動而行菩薩事,以布施、愛語、利益、同事?”

▷경.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이 평등하여 작위가 없는 무소작(無所作)이라면,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평등한 가운데에서 동요하지 않으면서도 보시(佈施)와 애어(愛語)와 이익(利益)과 동사(同事)로써 보살의 일을 행하는지요?”

 

佛告須菩提:“如是!如是!如汝所說:‘是諸法平等、無所作。’若是衆生自知諸法平等,佛不用神力,於諸法平等中不動而拔出衆生吾我想,以空度五道生死乃至知者、見者相;度色相乃至識相,眼相乃至意相,地種相乃至識種相;遠離有爲性相,令得無爲性相,無爲性相卽是空。”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이 제법은 평등하여 짓는 바가 없느니라. 

만약  중생이 스스로법이 평등하다는 것을 안다면, 부처님께서 신력으로써법의 평등한 가운데에서 부동하면서도 중생들을 아집에서 구출하거나, 공으로써 5도(道)의 생사 내지는 아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의 상(想)에서 제도하거나,

물질의 색상(色相)ㆍ 느낌의 수상(受相)ㆍ생각의 상상(想相)ㆍ 지어감의 행상(行相)ㆍ분별의 식상(識相)과

눈의 안상(眼相)ㆍ 귀의 이상(耳相)ㆍ코의 비상(鼻相)ㆍ혀의 설상(舌相)ㆍ몸의 신상(身相) ㆍ 뜻의 의상(意相) 

땅의 요소인 지종상(地種相) 내지는 식의 요소인 식종상(識種相)에서 제도하거나, 

유위의 성상(性相)을 멀리 여의면서 무위의 성상(性相) 얻게  필요가 없었으리니, 

무위의 성상(性相)  공(空)이니라.”

 

須菩提言:“世尊!用何等空故一切法空?”

佛言:“菩薩遠離一切法相,用是空故一切法空。須菩提!於汝意云何?若有化人作化人,是化頗有實事不空者不?”

수보리 존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공(空)으로써 일체법이 공(空)한 것이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일체법의 법상(法相) 멀리 여의나니,  공(空)을 사용하기 때문에 일체법이 공(空)한 것이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변화로  화인(化人) 변화한 화인(化人) 만들 때,  변화에 행여 진실함이  있고 공(空)하지 않음이 있는 것인가?”

 

須菩提言:“不也!世尊!是化人無有實事而不空。”“是空及化人二事不合不散,以空空故空,不應分別是空、是化。何以故?是二事等,空中不可得,所謂是空、是化。所以者何?

須菩提!色卽是化,受、想、行、識卽是化,乃至一切種智卽是化。”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변화로 된 화인(化人) 진실함이 있거나 공(空)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공(空)과 변화한 화인(化人),  가지는 는 불합(不合), 흩어지지 않는 불산(不散)이며, 공조차도 공하다는 공공(空空, śūnyatāśūnyatā)이기 때문에 공한 것이니, ‘이것이 공(空)이요, 이것이 변화의 화(化)이다’라고 분별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가지는 똑같이 공(空)한  가운데서 이른바 ‘이것이 공(空)이다, 이것이 변화(化)이다’라고   없는 것이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수보리야, 물질(色)이  변화인 색즉시화(色卽是化)요, 느낌의 수(受)ㆍ생각의 상(想)ㆍ 지어감의 행(行)ㆍ분별의 식(識)  변화(化)이며 나아가 일체종지도  변화인 일체종지즉시화(一切種智卽是化)이기 때문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世閒法是化,出世閒法,所謂四念處、四正勤、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分、八聖道分,三解脫門,佛十力、四無所畏、四無礙智、十八不共法,幷諸法果;及賢聖人,所謂須洹、斯含、阿那含、阿羅漢、辟支佛,菩薩摩訶薩、諸佛。世尊!是法亦是化不?”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세간법이  변화(化)라면 출세간법(出世間法)도 역시 변화(化)인지요? 

이른바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분(覺分)ㆍ8성도분(聖道分)ㆍ3해탈문(解脫門)과 부처님의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礙智)ㆍ18불공법(不共法)과 아울러법의 과위와 

성현으로서 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라한(阿羅漢)ㆍ벽지불(辟支佛)과 보살마하살 그리고 모든 불ㆍ세존 등의 이러한  또한 변화(化)인지요?”

 

佛告須菩提:“一切法皆是化。於是法中,有聲聞法變化,有辟支佛法變化,有菩薩摩訶薩法變化,有諸佛法變化,有煩惱法變化,有業因緣法變化。以是因緣故,須菩提!一切法皆是化。”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체법은 모두가 변화(化)이니라.  법에서는 성문법의 변화(變化)가 있고, 벽지불법의 변화(變化)가 있으며, 보살마하살법의 변화(變化)가 있고, 모든 부처님의법의 변화(變化)가 있으며, 

번뇌법의 변화(變化)가 있고,  인연법의 변화(變化)가 있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수보리야, 일체법은 모두가 변화(化)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是諸煩惱斷,所謂須洹果、斯含果、阿那含果、阿羅漢果、辟支佛;佛道,斷諸煩惱習 皆是變化不?”

佛告須菩提:“若有法生滅相者,皆是變化。”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번뇌가 끊어진 것, 다시 말해서 수다원의 과와 사다함의 과와 아나함의 과와 아라한의 과와 벽지불도로써 모든 번뇌와 습기가 끊어진  모두도 변화(變化)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법에 나고 없어지는 생멸상(生滅相)이 있으면, 그러한 모두는 변화(變化)이니라.”

 

須菩提言:“世尊!何等法非變化?”佛言:“若法無生無滅,是非變化。”

수보리 존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법이 변화(變化)가 아닌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법으로서 나는 생(生) 없고 없어지는 멸(滅) 없다면, 그것은  변화(變化)가 아니니라.”

 

須菩提言:“何等是不生不滅非變化?”佛言:“無誑相涅槃,是法非變化。”

수보리 존자가 여쭈었다.

“어떠한 것이 나지도 않는 불생(불不生)이고 없어지지도 않는 불멸(不滅)이라서 변화가 아닌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거짓이 없는 무광상(無誑相) 열반이니,  법이 변화가 아니니라.”

 

“世尊!如佛自說:‘諸法平等,非聲聞作、非辟支佛作、非諸菩薩摩訶薩作、非諸佛作,有佛、無佛諸法性常空。’性空卽是涅槃,云何言涅槃一法非如化?”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한 바와 같이 제법의 평등은 성문이 만든 것도 아니고, 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며, 모든 보살마하살이 만든 것도 아니고, 모든 부처님께서 만든 것도 아닌 것으로,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제법의 법성(法性) 언제나 공(空)하며, 그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  열반이거늘, 

어찌하여 ‘열반의법(一法)만이 변화와 같은 것이 아닌, 비여화(非如化)이니라’고 말씀하시는지요?”

 

佛告須菩提:“如是!如是!諸法平等,非聲聞所作,乃至性空卽是涅槃。若新發意菩薩聞是一切法皆畢竟性空乃至涅槃亦皆如化,心則驚怖;爲是新發意菩薩故,分別生滅者如化、不生滅者不如化。”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제법의 평등은 성문(聲聞)이 만든 것이 아니요, 나아가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  열반이니라. 

만약 새로 뜻을  초발의 보살이 ‘이 일체법은 마침내 성품이 공한 필경성공(畢竟性空)이며 나아가 열반 또한 모두가 변화와 같은 여화(如化)이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으로  놀라고 두려워하나니, 

 새로 뜻을  초발의 보살을 위하여 ‘나고 없어지는 생멸(生滅) 변화와 같으며,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불생멸(不生滅) 변화와 같지 않다’고 분별하는 것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云何新發意菩薩,令知是性空?”

佛告須菩提:“諸法本有今無耶?”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새로 뜻을  초발의 보살들을 교화하여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을 알게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제법이 본래는 있었다가 지금에 와서 없어진 것이던가?”

 

▶論. 問曰:是事佛先已答,須菩提今何以更問?所謂:“世尊!若諸法平等,無所作爲,云何菩薩於諸法平等中不動而大利益衆生?”

▷논. 묻나니, 이러함에 대해서는 앞에 부처님께서 이미 대답하신 것이거늘, 수보리 존자는 무엇 때문에 다시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이 평등하여서 지음이 없는 무소작(無所作)이라면, 어떻게 보살이 제법의 평등한 가운데에서 동요하지 않으면서 중생들을 크게 이롭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한 것입니까?

 

答曰:以是事難解故,雖先說而更問。又經將訖,佛說“深空,凡夫、聖人所不能行、所不能到”;是故須菩提知一切法平等相定空,云何菩薩住是法中而能利益衆生?平等法無作相,利益是有作相。

답하나니,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록 앞에서 말씀하셨을지라도 다시 여쭌 것이며, 

또한 이제 경을 마치고자 하시면서 부처님께서는 깊은 심공(深空)에 대하여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범부나 성인이 행할  없는 것이요, 도달할 수도 없는 곳이기 때문에 수보리 존자는 “일체법의 평등한 평등상(平等相) 결정코 공(空)이라는 것을 알겠거늘, 어떻게 하여 보살이 이러한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이롭게 할까?”라고  것이니, 

평등법은 조작이 없는 무작상(無作相)이요, 이롭게 하는 것은 조작이 있는 유작상(有作相)이기 때문이다.

 

佛可須菩提意,還以須菩提問而答。可其平等,答其利益衆生,所謂若衆生自知諸法平等畢竟空,佛無恩力。若病人自知將適,則藥師無功。

須菩提復問:“若諸法實相畢竟空、無所能作,菩薩何以住是中而利益衆生?”若菩薩用是平等利益衆生,則壞實相!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의 뜻을 인가하시고, 도리어 수보리의 물음으로 대답하셨으니,

곧, 평등을 인정하시면서도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에 대하여 답하시기를, “만약 중생들 스스로가법의 평등과 필경공임을 안다면, 부처님의 은혜나 힘도 없는 것이다”고 하셨으니,

가령 병든 사람이 스스로 알맞게 약을 고를  안다면,  약사(藥師)의 공력도 없게 되는 것이다.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제법의 실상(實相)이 필경공이라서 짓는 것이 없다면, 보살은 무엇 때문에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지요? 

만약 보살이  평등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한다면,  실상(實相)을 파괴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佛答:“菩薩不以諸法實相利益衆生,但衆生不知畢竟空故,菩薩詔令知。”菩薩化衆生,是爲對治悉檀;須菩提以第一義悉檀無利益爲難。佛答:衆生顚倒不知,佛但破其顚倒。不言是實。是故菩薩住是平等相中,遠離我相乃至知者、見者相,是名“衆生空”;以是一切無吾我法,化衆生。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보살은법의 실상(實相)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중생들이 필경공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보살이 가르쳐 주어서 알게 하는 것일 뿐이니라”고 하셨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께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여 미혹을 대치하여서 이익을 주는, 대치실단(對治悉檀, prātipākṣika-siddhānta)으로, 수보리 존자는 제일의(第一義)의 입장인, 실단(悉檀, siddhānta)에서는 이익이 없다는 것으로 따진 것이나,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중생들이 뒤바뀌어 전도되어서 모르고 있으므로 부처님은 다만  뒤바뀜의 전도만을 깨뜨릴 뿐이니, ‘이것은 진실하다’라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에 보살은  평등상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나라는 아상(我相) 내지는 아는 지자(知者)와 보는 견자(見者)의 상(相)을 멀리 여의게 하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중생공(衆生空)이라 하며,

이러한 일체의 무아법(無我法)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느니라”고 하셨다.

 

실단(悉檀, siddhānta)은 ‘범주’나 ‘입장’을 의미하며 ‘성취’ ‘종(宗)’이라 의역하기도 한다.

 

衆生有二種:一者、愛多,二者、見多。愛多者,得是無我法,則生厭心、離欲;作是念:“若無我,何用餘物!”見多者,雖知無我法,於色等法中戲論若常、若無常等;是故次說色相、五衆、十二入、十八界,乃至遠離有爲性相,令得無爲性相 無爲性相卽是空。是名法空。

중생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애욕(愛)이 많은 이요, 둘째는 소견(見)이 많은 이이다. 

애욕이 많은 이는  없는 무아법(無我法) 얻으면  싫증을 내고 욕탐을 여의면서 생각하기를 ‘만약 내가 없는 무아(無我)라면  밖의 물건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며,

소견이 많은 이는 비록 무아법(無我法) 알지라도 물질(色) 등의 법에 대하여 ‘항상 하다’거나 ‘무상하다’는 등의 희론을 하기 때문에 물질의 색상(色相) 5중(衆, 오온)ㆍ12입(入)ㆍ18계(界)를 따라서 말하여 주며, 나아가 유위의 성(性)과 상(相)을 멀리 여의게 하고, 무위의 성(性)과 상(相) 얻게 하나니,

무위의 성(性)과 상(相)  공(空)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법공(法空)이라 하는 것이다.

 

問曰:須菩提何以作是問:“用何等空故一切法空?”

묻나니, 수보리 존자는 무엇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였으며  “어떠한 공(空)을 쓰기 때문에 일체법이 공(空)한 것입니까”라고 여쭌 것입니까?

 

答曰:空有種種:如火中無水、水中無火,亦是空;五衆中無我亦如是,或有衆生空,或有法空。

法空中,或有人言:“諸法雖空,亦不盡空,如色空中有微塵根本在。”

是故須菩提問:“以何等空故,一切法空?”

佛答:“以無所得畢竟空故,遠離一切相。”是故此中說衆生空、法空,是二空故,一切法無不空。

답하나니, 공(空)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마치 불 속에는 물이 없고, 물 속에는 불이 없는 것과 같은 것도 역시 공(空)이요,

5중(衆) 속에 무아(無我)인 것 또한 그와 같아서 혹은 중생공(衆生空)이 있기도 하고 혹은 법공(法空)이 있기도 하나니, 

법공(法空)에 대하여 어떤 분이 말하기를 “제법이 비록 공(空)할지라도 역시 모두가 다 공한 것은 아니니, 마치 공한 가운데에는 작은 티끌의 근본은 존재하여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기 때문에 수보리가 여쭈기를 “어떠한 공을 쓰기 때문에 일체법이 공한 것입니까”라고 한 것이며,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며서 필경공이기 때문에 일체의 상(相)을 멀리 여의느니라”고 하셨으며, 이러한 까닭에 이 가운데에서는 중생공(衆生空)과 법공(法空)을 말씀하신 것이며, 이 두 가지 공 때문에 일체법이 공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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