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照明品 第八十一 卷第九十一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1. 조명품(照明品)을 풀이함 3
須菩提!云何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以般若波羅蜜攝取衆生?
須菩提!菩薩見衆生愚癡,無有智慧,作是言:‘汝等何以故不修智慧?’衆生言:‘因緣未具故。’菩薩住檀波羅蜜中,作是言:‘汝等所須得智慧具,從我取之,所謂布施、持戒、忍辱、精進、入禪定。
是因緣具足已,汝等如是思惟:≺思惟般若波羅蜜時,有法可得不?若我、若衆生、若壽命、乃至知者、見者可得不?若色、受、想、行、識,若欲界、色界、無色界,若六波羅蜜,若三十七助道法,若須陁洹果,若斯陁含、阿那含、阿羅漢果、辟支佛道,若阿耨多羅三藐三菩提可得不?≻’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단바라밀을 행하며, 어떻게 반야바라밀로써 중생을 거두는 것인가?
수보리야, 보살은 중생이 어리석어서 지혜가 없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지혜를 닦지 않는가?’라고 할 때, 그 중생들이 말하기를 ‘인연을 아직 두루 갖추지 못한 까닭입니다’라고 한다면,
이 보살은 단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말하기를 ‘그대들이 필요한 지혜를 두루 갖추고자 한다면 나로부터 취할 것이니, 이른바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과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오.
이러한 인연을 두루 갖춘 뒤에, 그대들은, 곧 반야바라밀을 생각할 때에는 '얻을 수 있는 어떤 법이 있는가! 나(我)와 중생과 수명 내지는 아는 지자ㆍ보는 견자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라고 사유하여야 하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과 욕계ㆍ색계ㆍ무색계와 6바라밀과 37조도법과 수다원의 과위ㆍ사다함의 과위ㆍ아나함의 과위ㆍ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을 수 있는 것인가?'라고 사유하여야 하오’라고 하느니라.
是衆生如是思惟時,於般若波羅蜜中,無有法可得可著處;若不著諸法,是時不見法有生有滅、有垢有淨;不分別是地獄、是畜生、是餓鬼、是阿修羅衆、是天、是人,是持戒、是破戒,是須陁洹、是斯陁含、是阿那含、是阿羅漢、是辟支佛、是佛。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時,以般若波羅蜜攝取衆生。
이 중생들이 이와 같이 사유할 때,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얻을 수 있거나 집착할 수 있는 어떠한 법도 없나니,
만약 제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생겨나고 없어짐이 있는 유생유멸(有生有滅)이거나, 더럽고 깨끗함이 있는 유구유정(有垢有淨)의 어떠한 법도 보지 않으며,
‘이것이 지옥이다, 이것이 축생이다, 이것이 아귀이다, 이것이 아수라의 무리이다, 이것이 하늘이다, 이것이 사람이다, 이것이 지계(持戒)이다, 이것이 파계(破戒)이다, 이것이 수다원이다, 이것이 사다함이다, 이것이 아나함이다, 이것이 아라한이다, 이것이 벽지불이다, 이분이 곧 부처님이다’라고 분별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 반야바라밀로써 중생들을 거두어 주느니라.
須菩提!云何菩薩摩訶薩住檀波羅蜜中,以尸羅波羅蜜、羼提波羅蜜、毘梨耶波羅蜜、禪波羅蜜、般若波羅蜜,乃至以三十七助道法,攝取衆生?
須菩提!菩薩摩訶薩住檀波羅蜜中,以供養具利益衆生。以是利益因緣故,衆生能修四念處、四正勤、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分、八聖道分;衆生行是三十七助道法,於生死中得解脫。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以無漏聖法攝取衆生。
수보리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단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 내지는 37조도법으로써 중생을 거두는가?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단바라밀에 머무르면서 공양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나니,
이러한 이익의 인연으로 중생은 4념처(念處)와 4정근(正勤)과 4여의족(如意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분(覺分)과 8성도분(聖道分)을 닦으며, 중생은 이 37조도법을 행하여 생사 가운데서 해탈을 얻게 되나니,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무루(無漏)의 거룩한 성법(聖法)으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는 것이니라.
復次,須菩提!菩薩摩訶薩教化衆生時,如是言:‘諸善男子!汝等從我取所須物,若飮食、衣服、臥具、香華乃至七寶等種種資生所須,汝當以是攝取衆生,汝等長夜利益安樂,莫作是念:“是物非我所有。”我長夜爲衆生故,集此諸物;汝等當取是物,如己物無異。’教化衆生令行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乃至令得三十七助道法、佛十力乃至十八不共法,亦令得無漏法果,所謂須陁洹乃至阿羅漢果、辟支佛道、阿耨多羅三藐三菩提。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時,應如是教化衆生,令得離三惡道及一切生死往來苦。
또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교화할 때에 말하기를 ‘선남자들이여, 그대들은 나에게서 필요한 음식과 의복과 침구와 향화 내지는 7보 등의 갖가지와 살림에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가져가시오.
허나, 그대들은 이 물건으로써 중생들을 거두어 주되, 그대들을 오랫동안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여 준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이 물건들은 나의 소유(所有)가 아니며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중생들을 위하여 이러한 모든 물건들을 쌓았을 뿐이니, 그대들은 이 물건들을 자기 물건이나 다름없이 여기면서 가져가서 중생들을 교화하고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과 지혜를 행하게 하고 나아가 37조도법과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18불공법을 얻게 하며,
또한 무루법의 과위 즉 수다원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여야 하오’라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와 같이 중생들을 교화하며, 3악도와 일체 생사의 왕래하는 고통을 여읠 수 있게 하여야 하느니라.
復次,須菩提!菩薩摩訶薩住尸羅波羅蜜教化衆生,作是言:‘衆生!汝等少何因緣故破戒?我當與汝作具足因緣,若布施乃至智慧及種種資生所須。’
是菩薩住尸羅波羅蜜,利益衆生,令行十善,遠離十不善道。是諸衆生持諸戒,不破戒、不缺戒、不濁戒、不雜戒、不取戒,漸以三乘而得盡苦。
尸羅波羅蜜爲首,如檀波羅蜜說,餘四波羅蜜亦如是。”
또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시라바라밀에 머물러서 중생을 교화하며 말하기를 ‘중생들이여, 그대들은 어떠한 인연이 모자라서 계율을 깨뜨리는 것인가?
나는 그대들에게 그 인연 즉 보시 내지는 지혜와 갖가지 생활에 필요한 것을 두루 갖추어지게 할 것이니라’고 하느니라.
이 보살은 시라바라밀에 머물러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10선도(善道)를 행하고 10불선도(不善道)를 멀리 여의게 하나니,
이 모든 중생은 모든 계율을 지니어 계율을 깨뜨리지 않고 계율을 이지러뜨리지도 않으며, 계율을 흐리게 하지도 않고 계율을 섞이게 하지도 않으며, 계율에 집착하지도 않으면서 점차로 3승으로써 괴로움이 다하게 되느니라.
시라(보시)바라밀을 첫머리로 삼음은 마치 단바라밀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 나머지 네 바라밀 또한 그와 같으니라.”
▶論. 問曰:先說“菩薩行六波羅蜜等諸助道法,不具足菩薩道,則不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今須菩提應自知“行六波羅蜜等,具足菩薩道,應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以更問?
▷논. 묻나니, 앞에서 “보살은 6바라밀 등의 모든 도를 돕는 조도법(助道法)을 행하여도 보살의 도를 갖추지 못한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지금 수보리 존자는 마땅히 스스로 6바라밀을 행하여 보살의 도를 두루 갖추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여쭈는 것입니까?
答曰:須菩提不疑“云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今但問”云何具足菩薩道,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답하나니, 수보리 존자는 ‘어떻게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가’에 대하여서 의심한 것이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어떻게 보살의 도를 두루 갖추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까’라고 여쭌 것일 뿐이다.
佛答:“若菩薩用六波羅蜜等諸法,以方便力和合故能行;是時,具足菩薩道。
方便力者,不決定得是布施等三事,亦不離是三事,行檀波羅蜜;是時,照明菩薩道。”照明、具足是一義。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6바라밀 등의 제법을 이용한다면 방편력과 화합함으로써 행할 수 있고, 이 때에는 보살의 도를 두루 갖춘다”라고 하셨으니,
방편력(方便力)이란, 결코 이 보시의 시자 시물 수자의 세 가지 삼사(三事)에서 얻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이 세 가지 삼사(三事)를 여의고는 단바라밀을 행하지도 못하나니, 이러한 때에 보살의 도를 밝게 비추나니,
밝게 비춘다는 조명(照明)과 두루 갖춘다는 구족(具足)은 동일한 뜻이다.
若菩薩決定得布施等三事,直墮常顚倒、取相著法等過罪;若不得是三事,則墮斷滅邊,著空,還起邪見等諸煩惱,便離菩薩道。
若菩薩離是二邊 因空捨是施等假名字虛誑法,因諸法實相離是著空無施者、無受者;如阿耨多羅三藐三菩提相,觀是布施亦爾無異。如是布施名爲具足。乃至十八不共法亦如是。
舍利弗在會中,聞佛與須菩提說:“般若甚深果報,大有利益。”雖有利益,無決定性,云何可習?
만약 보살이 보시의 시자 시물 수자의 삼사(三事)를 결정코 얻고자 한다면 항상하다고 생각하는 상전도(常顚倒)와 상을 취하는 취상(取相)과 법에 집착하는 착법(著法) 등의 죄과에 떨어지게 되며,
만약 이 세 가지 삼사(三事)를 얻지 않는다면 단멸(斷滅, 단멸견)의 치우친 견해와 공에 집착한 착공(著空)에 떨어져서 도리어 삿된 사견 등의 모든 번뇌를 일으켜서 보살의 도를 여의게 되며,
만약 보살이 단멸(斷滅)과 착공(著空)의 두 가지 치우친 이변(二邊)을 여읜다면, 공(空)으로 인하여 보시 등의 임시로 붙인 가명의 거짓된 허광법(虛誑法)을 버리게 되며,
제법의 실상(實相)으로 인하여 이 공에 집착한 착공(著空)을 여의게 되면 보시하는 시자도 없고 받는 수자도 없나니, 마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상(相)과 같이 되는 것이다.
이 보시를 관찰하는 것 또한 그러하여 다름이 없으니, 이와 같은 것을 보시를 ‘두루 갖춘 구족(具足)’이라 하며,
나아가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사리불 존자는 이 모임 안에 있으면서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반야는 심히 깊으며 과보가 크고 이익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비록 이익이 있을지라도 결정된 성품이 없는 무결정성(無決定性)이거늘 어떻게 익힐 수 있습니까?”라고 여쭌 것이다.
단멸(斷滅, 단멸견, ucchedadṛṣṭi), 사후와 선악업의 과보를 부정하며, 사후에는 일체가 단절되어 존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
佛答:“菩薩行般若波羅蜜時,不壞色、不隨色,如是名習般若波羅蜜。”
菩薩初發心,爲知實法故,常行般若波羅蜜;次第隨其所宜,行布施等諸法。
是故常說:“菩薩行般若波羅蜜時,行布施等諸法。”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물질(色)을 파괴하지 않는 불괴색(不壞色)이고, 물질(色)을 따르지도 않는 불수색(不隨色)이니, 이와 같음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을 익힌다 하느니라”고 하셨다.
보살은 처음 초발심하면서 진실한 실법(實法)을 알게 되기 때문에 항상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차례대로 그 알맞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보시 등의 제법을 행하나니,
이 때문에 항상 말하기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보시 등 제법을 행한다”고 하는 것이다.
色不壞者,不言是色無常,不言是色空無所有,是名不壞色。不隨色者,不如眼見色取相生著。
復次,不說“是色若常、若無常、若苦、若樂等”,是名不隨色。常、無常等皆非色實相。
‘물질을 파괴하지 않는 불괴색(不壞色)'이라 함이란, ‘이 물질(色)은 무상한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 물질(色)은 공하여 있는 바가 없다’고 말하지도 않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물질을 파괴하지 않는 불괴색(不壞色)이다’고 하는 것이며,
‘물질을 따르지 않는 불수색(不隨色)’이라 함은, 눈으로 빛깔(色)을 보고 상(相)을 취하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또 이 물질은 ‘항상 있다는 상(常)’이라거나 ‘무상하다’거나 ‘괴롭다’거나 ‘즐겁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물질을 따르지 않는 불수색(不隨色)’이라 하는 것이니,
항상하다는 상(常)과 무상하다는 것 등 모두는 물질(色)의 실상이 아닌 것이다.
復次,不說“是色根本從世性中來、若從微塵中來、從大自在天中來”,亦不說“從時來”,亦不說“自然生”,亦不說“無因無緣而强生”。如是等名爲不隨、不壞。
또한 ‘이 물질의 근본인 색근본(色根本)은 '세간의 성품 가운데에서 왔다’거나 ‘작은 티끌에서 왔다’거나 ‘대자재천(大自在天, Maheśvaradeva) 가운데서 왔다’라고 말하지 않으며,
또한 ‘때가 되어서 왔다’고도 말하지 않고 ‘저절로 생겼다’고도 말하지 않으며,
또한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이 억지로 생겼다’고도 말하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 등을 ‘따르지도 않는 불수(不隨)이고, 파괴하지도 않는 불괴(不壞)이다’고 하는 것이다.
此中佛自說因緣:“是色性無故,不隨、不壞。”性無者,是色從一切四大和合,假名爲色;是中無定一法名爲色。如先“破色”中說。
是色從因緣和合生故,卽是無性;若無性,卽是性空。若得是色相性空,卽是習般若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亦如是。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이 물질(色)은 성품이 없기 때문에 따르지도 않는 불수(不隨)이고, 파괴하지도 않는 불괴(不壞)이다”고 말씀하셨으니,
‘성품이 없다는 무성(無性)’이란, 이 물질(色)은 일체가 4대(大)로 화합하여 임시로 물질이라는 가명을 붙인 것일 뿐이니, 이 가운데에는 물질(色)이는 정해진 어떠한 법도 없다는 것이니, 앞의 물질을 타파하는 색파(破色)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 물질(色)은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생긴 까닭에 그것이 곧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요,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은 곧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다.
만약 이 물질의 색상(色相)이 성공(性空)이라는 것을 얻으면,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익히는 것이니, 나아가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復問:“世尊!若諸法無自性可壞可隨者,云何菩薩習般若波羅蜜?不學般若波羅蜜,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佛可舍利弗意,自說因緣:“若菩薩用方便力行六波羅蜜,是人雖知諸法空,而能起般若波羅蜜。
다시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이 파괴할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무자성(無自性)이라면, 어떻게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익히는 것입니까? 반야바라밀을 배우지 않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사리불 존자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만약 보살이 방편력으로써 6바라밀을 행하면, 이 사람은 비록 제법이 공한 것임을 알지라도 능히 반야바라밀을 일으키는 것이다.
舍利弗!若菩薩求一切法,若得少許定性,則可取可著;今菩薩實求覓一切法,不得定實,所謂是般若波羅蜜、是禪波羅蜜,乃至是十八不共法,是諸法皆不可得;不可得故,何所取?
舍利弗!是名菩薩無取般若波羅蜜。菩薩應學無取般若波羅蜜。”無取尚不可得,何況般若等諸法!一切法無性故。
사리불아, 만약 보살이 일체법을 구할 때, 조금이라도 정해진 성품의 정성(定性)을 얻는다면 취하고 집착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지금 보살은 일체법을 실로 구하고 찾는 구멱(求覓)하여도 정해진 실체를 얻지 못하나니,
이른바 ‘이것이 반야바라밀이요 이것이 선바라밀이며, 나아가 이것이 18불공법이다’라고 하는 이 제법 모두는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니, 불가득이거늘 어떻게 취할 바가 있겠는가?
사리불아, 이를 이름하여 보살의 취함이 없는 무취(無取) 반야바라밀이라 하나니,
보살은 마땅히 취함이 없는 무취(無取)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취함이 없는 무취(無取)도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반야 등의 제법을 얻음이겠는가?
일체법은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舍利弗復問:“若一切法無性,云何知是凡人乃至佛?”
佛答:“一切法雖無根本定相,但凡人顚倒故著。菩薩行般若波羅蜜時,以方便力故,見一切法無根本,而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사리불 존자가 또 여쭈기를 “만약 일체법이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라면 어떻게 이것은 범부인이요 나아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일체법에는 비록 근본과 정해진 정상(定相)이 없을지라도, 다만 범부인들이 뒤바뀌어 전도(顚倒)된 까닭에 집착할 뿐이며,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방편력으로써 일체법에 근본이 없는 무근본(無根本)임을 알면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니라.
是菩薩深行諸法性空故,不見一切法有根本,不見故不懈不退;了了知一切法無我、無所有性、性常空。但衆生愚癡顚倒故,著是陰、界、入。
是時,菩薩思惟籌量諸法甚深寂滅相,而衆生深著虛誑顚倒。菩薩自立如幻師,種種神通變化,說法度人,如幻所作,無憎無愛,等心說法,所謂慳者教施等六法;復爲說轉勝法,令出生死,得須陁洹果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 보살은 제법의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라는 것을 깊이 행하는 까닭에 일체법에 근본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그렇게 보지 않기 때문에 게으르지 않고 물러나지도 않으며,
일체법은 무아(無我)이고 있는 바 성품이 없는 무소유성(無所有性)이며, 그 성품은 항상 공한 성상공(性常空)이나,
다만 중생들이 어리석고 뒤바뀐 까닭에 이 음(陰, 오온)ㆍ계(界 18계)ㆍ입(入, 12입)에 집착할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아느니라.
이 때에 보살은 제법이 매우 깊은 심심(甚深)한 적멸상(寂滅相)이나, 중생들이 거짓과 뒤바뀐 허광전도(虛誑顚倒)에 깊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사유하고 헤아리면서, 보살 스스로가 일어나서 마치 환술사와 같이 갖가지 신통으로 변화하여 법을 설하면서 사람들을 제도하나니,
마치 환술로 만들어진 이와 같이 미워함도 없고 사랑함도 없이 평등한 등심(等心)으로 법을 설하나니,
이른바 간탐하는 이에게는 보시 등의 여섯 가지 법을 가르쳐주며, 다시 그들을 위하여 점차로 더욱 뛰어난 법을 굴리면서 생사(生死)에서 벗어나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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