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論釋實際品 第八十 卷九十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0. 실제품(實際品) 풀이함 7

 

須菩提問:“世尊!若諸法性空無別異,菩薩於何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佛可其意言:“如是!若分別有二相,則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阿耨多羅三藐三菩提名實智慧,於色法中不行,所謂不著、不染。

所以者何?是智慧不爲取色故行,是故不行色中。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세존이시여,법은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라서 달라짐이 없다면, 보살은 어디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그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만약 분별하여 이상(二相)이 있다고 한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다”라고 하셨으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진실한 실지혜(實知慧)라 이름하여 물질의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아니니, 이른바 집착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물질(色)을 취하기 위하여 행하지 않기 때문이므로 “물질(色) 가운데에서 행하지 않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復問:“若菩提不取中行、不捨中行,當於何處行?”

取名實法,捨名空法。取名著行,捨名不著行。取名二行,捨名不二行。如是等分別。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보리를 취(取)하는  가운데에서 행하지 않고, 버리는 사(捨) 가운데에서 행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취(取)하는 것을 실제의 실법(實法)이라 하고, 버리는 사(捨)를 공한 공법(空法)이라 하며, 

취하는 것을 집착하는 착행(著行)이라 하고, 버리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 불착행(不著行)이라 하며, 

취하는 것을 둘의 이행(二行)이라 하고, 버리는 것을 둘이 아닌 불이행(不二行)이라 하나니, 

이와 같이 분별하는 것이다.


佛反問須菩提:“於汝意云何?佛所化人爲何處行?”

須菩提言:“是化人無處行,化人無心、無心數法故。菩提亦如是。”

부처님께서 반문(反問)하시면서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화인(化人) 어느 곳에서 행하겠는가?”라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답하기를 “이 변화로  화인이 행하는 곳은 없습니다. 변화한 화인은 마음도 없고 마음에 속한 심수법도 없기 때문이니, 보리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復問:“於汝意云何?阿羅漢夢中菩提爲在何處行?”

須菩提言:“阿羅漢尚不眠,何況夢中菩提有行處!”

 물으시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라한이 보리를 꿈 속의 어느 곳에서 행하는 것인가?”라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답하기를 “아라한은 오히려 잠도 자지 않거늘, 하물며 꿈속에서 보리를 행하는 곳이 있음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問曰:菩提有三種:阿羅漢菩提、辟支佛菩提、佛菩提。阿羅漢菩提不在有漏心中、無記心中行,但在無漏心中行;佛何以故問“阿羅漢夢中菩提何處行”?

묻나니, 보리에는  가지가 있어서, 아라한의 보리와 벽지불의 보리와 부처님의 보리입니다. 

아라한의 보리는 유루(有漏)의 마음과 무기(無記)의 마음에서 행하지 않고 다만 무루(無漏)의 마음에서만 행할 뿐이거늘,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아라한이 꿈속에서는 어느 곳에서 보리를 행하는가?”라고 물으신 것입니까?


答曰:阿羅漢是一切漏盡聖人則無夢,佛以必無處故問,欲明必無行法。

답하나니, 아라한은 일체 번뇌가 다한 성인이어서 꿈이 없으니,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반드시 없는 필무(必無)이므로 반드시 행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밝히시고자 물은 것이다.


問曰:乃至佛猶尚有眠,何以知之?佛嘗命阿難:“汝四襞優多羅僧敷,我欲小眠,汝爲諸比丘說法。”

묻나니, 나아가 부처님조차도 오히려 잠을 주무시나니,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일찍이 아난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접어서 삼의(三衣)의 하나인 우다라승(優多羅僧, 승가리)을 펴라. 나는 잠시 동안 잠을 자고 싶구나. 너는 여러 비구들을 위하여 법을 설해 주어라”고 하신 것이며, 


又薩遮尼乾問佛:“佛自念晝日有眠不?”

佛言:“春末夏初,以時熱故小眠息,除食患故。”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살차니건(薩遮尼乾)이 부처님께 여쭈기를 “부처님께서는 낮에 주무셨던 기억하십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늦은 봄에서 초여름까지는 날이 더웠기 때문에 잠깐 동안 자면서 쉬었다. 식곤증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느니라”고 하셨으니, 

 

薩遮尼乾白佛:“餘人有言:‘晝日眠是癡相。’”

佛言:“汝置!汝不別癡相。諸漏能生後身相續不斷者,是名癡相。雖常不眠亦是癡;若是諸漏永滅無餘,雖眠不名癡。”如是等,經中處處說。須菩提何以言“阿羅漢尚不眠”?

살차니건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다른 사람들의 말로는 ‘낮잠을 자는 것은 바로 어리석은 치상(癡相)’이라고 합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너는 어리석은 치상(癡相) 분별하지 못하는구나. 모든 번뇌로 다시 몸을 받고 태어나면서  상속(相續)을 끊지 못하는 것을 바로 어리석은 치상(癡相)이라 하는 것이니, 비록 항상 잠을 자지 않는다 하여도 그것 또한 어리석은 것이요, 만약  번뇌가 영원히 다하여 남음이 없다면 비록 잠을 잔다 할지라도 어리석다고 하지 않느니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경의 곳곳에서 말씀하거늘, 수보리 존자는 무엇 때문에 “아라한은 오히려 잠을 자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眠有二種:一者、眠而夢,二者、眠而不夢。阿羅漢非爲安隱著樂故眠,但受四大身法,應有食、息、眠、覺,是故少許時息名爲“眠”;不爲夢眠。故須菩提言:“阿羅漢尚不眠。”

답하나니, 잠을 자는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것이요, 

둘째는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아라한은 안온하기 위하여 쾌락에 집착하면서 잠을 자는 것이 아닌 것으로, 다만 4대(大)의 몸을 받았기에 당연히 먹고 쉬고 잠자고 깨어나는 법이 있을 뿐이므로, 잠깐 동안 쉬는 것을 잠을 잔다고 하지만 꿈을 꾸면서 자는 잠이 아닌 것이라. 

따라서 수보리 존자가 “아라한은 오히려 잠을 자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有人言:“離欲者,得禪定,色界繫四大入身中,身心歡樂則無有眠;慧解脫阿羅漢,色界四大不入身中,故有眠”

是故須菩提言:“阿羅漢尚不眠。”是故阿羅漢有眠、有不眠。佛以方便力,爲度衆生,受人法故現眠。

어떤 말하기를 “욕탐을 여읜 이는 선정을 얻어 색계(色界)에 매인 4대(大)가  속으로 들어오면서 몸과 마음이 기뻐지므로 잠자는 일이 없지만, 

혜해탈(慧解脫)의 아라한은 색계의 4대가  속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잠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때문에 수보리 존자가 “아라한은 오히려 잠을 자지 않는다”고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잠을 자기도 하고, 잠을 자지 않기도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방편력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하는 법을 받아 짐짓 잠자는 일을 보이시는 것이다.


須菩提復問:“若不行者,云何菩薩從一地至十地,乃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보살이 어떻게  번째 지위의 일지(一地)에서부터 10지(地)까지 이르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까?”라고 하였다.


佛可其意:“菩提雖無處行,未具足六波羅蜜諸法,終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菩薩住色相,乃至菩提相中住,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捨色等法,亦不著菩提相,

知色等法卽是菩提,常寂滅,無法若增、若減、若垢、若淨,若得道、若得果。”

但世諦故說菩薩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第一義中無有色乃至菩提。

부처님께서 그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보리는 비록 행하는 곳이 없다고 할지라도 아직바라밀의법을 두루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끝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나니,

 보살은 물질의 색상(色相) 머무르고 나아가 보리의 상(相) 머물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만, 물질 등의법을 버리지도 않고, 또한 보리의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물질 등의 색법(等法)이  보리요 항상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이나, 더한다거나 줄어든다거나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거나 도를 얻는다거나 과위를 얻는다는 등의 어떠한 법도 없는 것임을 알지만, 

다만 세속 이치인 세제(世諦) 때문에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말하는 것일 뿐, 제일의(第一義)에서 물질(色)에서 보리에 이르기까지도 없다”고 하셨다.


欲明是事故,反問須菩提:“於汝意云何?汝斷煩惱得道時,有所得不?

所謂如夢等五衆、若道、若道果,決定一法不?”

부처님께서는 이러함을 밝히고자 짐짓 반문하시면서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는 번뇌를 끊고 도를 얻었을 때에 얻을 것이 있는 것인가?”고 하셨으니,

이른바 꿈과도 같은 5중(衆, 오온)이 도(道)나 도과(道果)로서 결정코 어떠한 일법(一法)이라도 얻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須菩提言:“不得也!”所以者何?須菩提意:住無相門中入道,云何取相?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얻을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모양 없는 무상문(無相門)에 머무르면서 도에 들거늘, 어떻게 취하겠는가!’라고  것이다.


佛言:“汝若乃至不得微細少法,云何說汝爲阿羅漢?”

須菩提言:“世諦法故,說言阿羅漢;凡夫顚倒法中有得、有失,有衆生、有法。”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그대가 미세한 조그마한법(少法)까지도 얻지 못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아라한이라고 말하는 것인가?”라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세제법(世諦法) 때문에 아라한이라 말하는 것이니, 범부의 뒤바뀐 전도법(顚倒法) 가운데에서는 얻음도 있는 유득(有得)이고, 잃는 것도 있는 유실(有失)이며, 중생도 있는 유중생(有衆生)이고, 법도 있는 유법(有法)인 것입니다”고 하였다.


佛言:“菩提亦如是,世諦法故,說有菩薩、說有色等乃至菩提;菩提中,無有定法,亦無衆生,亦無菩提。

菩薩觀是菩提法,無有增、無有減。所以者何?諸法性如是。

菩薩亦不得是諸法性,何況有初發心乃至十地,及六波羅蜜、三十七品乃至十八不共法當有所得!無有是處!

이에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으니, 

“보리 또한 그와 같으니라. 세속의 이치인 세제법(世諦法) 때문에 보살이 있다고 말하고, 물질(色) 등에서 보리에 이르기까지가 있다고 말하지만, 보리 가운데에는 정해진법(定法)도 없고 또한 중생도 없으며 또한 보리도 없는 것이다.

보살은 이러한 보리의 법을 관찰하되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나니, 왜냐하면,법의 성품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보살 또한 이 제법의 법성(法性)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최초의발심이 있겠으며, 나아가 10지(地)와 6바라밀과 37품(品) 내지는 18불공법이 있겠는가?

얻는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이어야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한 것이다!


所以者何?諸法性是一切法根本尚不可得,何況六波羅蜜等是作法當有定實!

如是!菩薩行是諸法性,得佛時,能大利益衆生。

왜냐하면, 제법의 법성(法性)은 곧 일체법의 근본임에도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이 짓는 작법(作法)이자 정해진 실체로서 있는 6바라밀 등이겠는가?

이와 같이 보살은 제법의 법성(法性)을 행하여 부처님이 되는 득불(得佛)한 때에 중생들을 크게 이롭게 하느니라.”


大智度論卷第九十 終 대지도론 90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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