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淨佛國土品 第八十二 卷第九十二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2. 정불국토품(淨佛國土品) 풀이함  2

 

須菩提白佛言:“世尊!若菩提卽是道、道卽是菩提者,今菩薩未作佛,應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云何說諸佛、多陁阿伽度、阿羅呵、三藐三佛陁有三十二相、八十隨形好、十力、四無所畏、四無㝵智、十八不共法、大慈大悲?”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리가 곧 도인 보리즉시도(菩提卽是道)요, 도가 곧 보리인 도즉시보리(道卽是菩提)라면,

보살이 아직 부처가 되지 않았을 때에도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할 것이거늘, 

어떻게 다타아나가도(多陀阿伽度)ㆍ아라하(阿羅訶)ㆍ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이신 모든 부처님에게는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와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과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있는 것인지요?”


佛告須菩提:“於汝意云何?佛得菩提不?”

“不也!世尊!佛不得菩提。何以故?佛卽是菩提,菩提卽是佛。”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처님은 보리를 얻은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보리를 얻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이  보리인 불즉시보리(佛卽是菩提)요, 

보리가  부처님인 보리즉시불(菩提卽是佛)이기 때문입니다.”


“如須菩提所問:‘菩薩時亦應得菩提!

菩提!是菩薩摩訶薩具足六波羅蜜、三十七助道法,具足佛十力、四無所畏、四無㝵智、十八不共法,具足住如金剛三昧,用一念相應慧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時名爲佛,一切法中得自在。”

“수보리야, 그대가 물은 바와 같아서 보살일 때에도 역시 보리를 얻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6바라밀과 37조도법을 완전하게 갖추고,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 4무애지와 18불공법을 완전하게 갖추며,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를 완전하게 갖추어  생각의 일념(一念)에 상응하는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 이를 부처님이라 하나니, 일체 가운데서 자재(自在)하게 되는 것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云何菩薩摩訶薩淨佛國土?”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지요?”

 

佛言:“有菩薩從初發意已來,自除身麤業、除口麤業、除意麤業,亦淨他人身、口、意麤業。”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낸 초발의에서부터 스스로가 몸의 거친 업인 신추업(身麤業)을 제거하고, 입의 거친 업인 구추업(口麤業)을 제거하며, 뜻의 거친 업인 의추업(意麤業)을 제거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의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추업(麤業)을 깨끗하게 하여 주느니라.”


“世尊!何等是菩薩摩訶薩身麤業、口麤業、意麤業?”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을 보살마하살의 몸의 거친 업인 신추업(身麤業)이라 하고, 입의 거친 업인 구추업(口麤業)이라 하며, 뜻의 거친 업인 의추업(意麤業)이라 하는지요?”


佛告須菩提:“不善業,若殺生乃至邪見,是名菩薩摩訶薩身、口、意麤業。

復次,須菩提!慳貪心、破戒心、瞋心、懈怠心、亂心、愚癡心,是名菩薩意麤業。

復次,戒不淨,是名菩薩身、口麤業。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살생(殺生) 내지는 삿된 사견(邪見)의 착하지 못한 불선업(不善業)을 바로 보살마하살의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추업(麤業)이라 하느니라.

또한 수보리야, 간탐하는 간탐심(慳貪心)과 계율을 깨뜨리는 파계심(破戒心)과 성을 내는 진심(瞋心) 게으른 해태심(懈怠心) 산란한 난심(亂心) 어리석은 우치심(愚癡心) 바로 보살의 뜻의 거친 업인 의추업(意麤業)이라 하며, 

 계율이 깨끗하지 못한 것을 바로 보살의 몸과 입의 거친 업인 추업(麤業)이라 하느니라.


復次,須菩提!若菩薩遠離四念處行,是名菩薩麤業;遠離四正勤、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分、八聖道分、空三昧、無相、無作三昧,亦名菩薩麤業。

復次,須菩提!菩薩摩訶薩貪須陁洹果,乃至貪阿羅漢果證、辟支佛道,是名菩薩摩訶薩麤業。”

또한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4념처(念處)의 행을 멀리 여의면, 이를 바로 보살의 거친 추업(麤業)이라 하며,

4정근(正勤)과 4여의족(如意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분(覺分)과 8성도분(聖道分)과 공삼매(空三昧)와 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삼매를 멀리 여의는  또한 보살의 거친 추업(麤業)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수다원의 과위를 탐내고 나아가 아라한의 과위를 탐내면서 벽지불의 도를 증득한다면, 이것을 바로 보살마하살의 거친 추업(麤業)이라 하느니라.”


▶論.釋曰:上來須菩提常種種問空法,以時會疑其己體寂滅無戲論法猶復多問,是以不問而心念。

復次,有菩薩及諸天深入禪定,不好語言而欲得法利,是故須菩提不發言而心念。

▷논. 해석한다. 위에서부터 수보리 존자는 언제나 갖가지로 공한법(空法)을 여쭈는 것이니,

그 때에 모임에 있는 대중들에게 의혹이 있는 까닭에, 그는 이미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이며, 희론이 없는 무희론법(無戱論法)을 체득하였음에도 오히려 다시 많은 질문을 하는 것으로, 여쭈 않을 때에도 마음으로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어떤 보살과 하늘들은 선정에 깊이 들어 있으면서 말하기는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법의 이익을 얻고자므로, 수보리 존자는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마음으로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問曰:須菩提雖無言,而世尊以言答?

묻나니, 수보리 존자는 말이 없었는데, 세존께서는 말씀으로 대답하신 것입니까?


答曰:佛身色,視無厭足;如色無厭,聲亦如是,雖語而不妨細禪定行,是故佛以言答。

復次,佛安立寂滅相,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中住,不分別一切法若善、若不善等;衆生有疑而問,佛隨所問、所念而答,是故不與須菩提同。

답하나니, 부처님의 색신(身色)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질 않으니, 마치 빛깔(色)에 싫증냄이 없는 것과 같이, 음성에 있어서도 역시 이와 같으니, 비록 말씀을 하실지라도 미세한 선정의 행에 방해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말씀으로 대답하신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적멸상(寂滅相) 편안히 안립하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에 머물러 일체법의 착한 것과 착하지 못한  등을 분별하지 않으셨으며, 

중생이 의심하면서 여쭈면, 부처님께서는 그가 묻는 것과 생각하고 있는 것을 따라 대답하셨으니,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와는 같지 않은 것이다.


須菩提聞是六波羅蜜等諸法甚深義,不能得其邊,

是故問:“何等是菩薩道?行是道,如淸淨無所著六波羅蜜等諸善法莊嚴?”

수보리 존자는  6바라밀 등의 제법의 매우 깊은 이치를 들으면서도  끝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 보살의 도이기에  도를 행하면서 깨끗하고 집착없는 청정무소작(淸淨無所著)의 6바라밀 등의 착한법을 장엄하는 것입니까?”라고 여쭌 것이다.


佛知其意,於須菩提所益雖少,爲增益諸菩薩故,答:“六波羅蜜等是菩薩道。”

부처님께서는 그의 뜻을 아시고 비록 수보리 존자에게는 이로움이 적을지라도 모든 보살들을 더욱 이롭게 하기 위하여 대답하시기를 “6바라밀 등이 바로 보살의 도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六波羅蜜是菩薩初發心道;次行四禪、八背捨、九次第定及三十七道品,但求涅槃;十八空、佛十力等微細,但爲求佛道。

六波羅蜜道,多爲衆生故;三十七品等,但求涅槃;十八空等,於涅槃中出過聲聞、辟支佛地,入菩薩位道。是三種,皆是生身菩薩所行。所以者何?分別諸法故。

6바라밀은 바로 보살이 처음발심할 때의 도(道)이며,

그 다음으로 4선(禪)과 8배사와 9차제정  37도품(道品)을 행하는 것은 다만 열반을 구하는 것일 뿐이며,

18공(空)과 부처님의 10력 등의 미세한 법은 부처님의도만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6바라밀의 도는 거의 모두가 중생들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요,

37품 등은 다만 열반을 구하는 것일 뿐이며,

18공 등은 열반 가운데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초월하여 보살 지위의 도에 들게 하는 것이니,

  가지는 모두가 생신(生身) 보살이 행하는 것이니, 왜냐하면,법을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今又一切法皆是菩薩道,是法性生身菩薩所行,不見諸法有好惡,安立諸法平等相故。

此中佛自說因緣:“菩薩應學一切法,若一法不學,則不能得一切種智。”

學一切法者,用一切種門,思惟、籌量、修觀、通達。

다시 일체 모두는 보살의 도이니,  법성(法性)은 생신의 보살이 행하는 것으로, 제법에 좋고 나쁨이 있음을 보지 않나니, 제법의 평등한 평등상(平等相) 편안히 안립(安立)한 까닭이다.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보살은 마땅히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하나의법이라도 배우지 않으면 일체종지를 얻을  없다”고 하셨으니,

‘일체법을 배운다는 학일체법(學一切法)’이라 함이란, 일체 종류의 방편문으로써 사유하고 헤아리며 닦고 관찰하여 통달하는 것이다.


須菩提白佛:“若一切法一相,所謂空,云何菩薩學一切法?
將無於無戲論相法中作戲論耶?

所謂此彼諸法。”略說是戲論相:此東、彼西,是上、是下,是常、是無常,是實、是虛、是世閒、是出世閒,乃至是二乘法、是佛法。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약 일체법이 하나의 일상(一相)이라 이른바 공(空)한 것이라면, 보살이 어떻게 일체법을 배우는지요? 

이는 희론이 없는 무희론상(無戲論相) 법에서 희론을 하시는 것이 아닌지요?”라고 하였으니, 이른바법에 대하여 ‘이것이다, 저것이다’ 한다는 것이니, 

 희론의 상(相)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것은 동쪽이다, 저것은 서쪽이다, 이것은 위다, 이것은 아래이다, 이것은 항상이다, 이것은 무상하다, 이것은 진실이다, 이것은 거짓이다, 이것은 세간이다, 이것은 출세간이다, 나아가 이것은 2승의 법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법이다”고 하는 것이다.


佛可具說:“一切法空相。若法實定有不空者,卽是無生無滅,無生無滅故無四諦,無四諦故無佛、法、僧寶,如是三寶等諸法皆壞。

今諸法實空,乃至空相亦空;衆生愚癡顚倒故著。是故於衆生中起悲心,欲拔出故,求佛身力;欲令衆生信受其語,捨顚倒,入諸法實相。

是故菩薩雖知諸法空,而爲利益衆生分別說;若衆生自知諸法空,菩薩但自住空相中,不須學分別一切法。”

부처님께서 그의 말을 인가하시면서 “일체법은 공한 공상(空相)이니, 만약 법이 실로 일정하여 공하지 않다면, 그것은 곧 생겨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인 것이다. 

무생무멸(無生無滅)이기 때문에제(四諦)도 없게 되고, 사제가 없기 때문에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의 삼보도 없게 되나니, 만약 이와 같다면, 삼보(三寶) 등의법은 모두 파괴되는 것이다.

지금 제법은 진실로 공한 실공(實空)이고 나아가 공한 공상(空相)마저 공한 것이지만, 

중생이 어리석고 뒤바뀐 까닭에 집착하는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비심(悲心) 일으켜, 그들을 구하고자 부처님 신력(身力) 구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말씀을 믿고 받게 하며, 뒤바뀜을 버리고법의 실상에 들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비록법이 공한 법공(法空)이라는 것을 알지라도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분별하여하는 것이니, 

만약 중생들 스스로가 제법이 법공(法空)이라는 것을 안다면, 보살은 다만 스스로 공한 공상(空相) 가운데에 머무를 뿐, 일체법을 배우고 분별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다.


菩薩行菩薩道時,從初發意已來,如是思惟:“一切法無定實性,但從因緣和合起;
是衆因緣亦各各從和合起,乃至到畢竟空。畢竟空唯是一法實;餘者無性,故皆虛誑。我從無始世來,著是虛誑法,於六道中厭受苦惱。我今是三世十方佛子,般若是我母,今不應復隨逐虛誑法。”

是故菩薩乃至畢竟空中亦不著,何況餘法,所謂檀波羅蜜等!

보살이 보살도를 행할 때, 처음 뜻을 낸 초발의에서부터 생각하기를 ‘일체법은 정해진 진실한 성품이 없는 무정실성(無定實性)이고, 다만 인연의 화합으로부터 생기는 것일 뿐이며,  모든 인연 또한 저마다의 화합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이에 필경공에 도달하게 되나니, 오직 필경공이라는 이 하나의법만이 진실이요,  밖의 다른 것은 무성(無性)이 때문에 모두가 거짓인 것이다.

나는 비롯함이 없는 무시(無始)의 세상으로부터  거짓된 법에 집착하여 6도(道) 가운데에서, 싫어하면서도 고통을 받았었다. 

나는 이제  3세(世)와 시방(方)의 부처님의 제자인 불자(佛子)요, 반야는 바로 나의 어머니이시니, 지금부터 다시는 거짓된 허광법(虛誑法)을 따르지 않으리라.’고 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나아가 필경공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집착하지 않거늘, 하물며  밖의  즉, 단바라밀 등이겠는가?”라고 하셨다.


爾時,菩薩照明菩薩道,其心安隱,自念:“我但斷著心,道自然至。”

知是事已,念衆生深著世閒,而畢竟空亦空、無性、無有住處,衆生難可信受。

爲令衆生信受是法故,學一切法,修行生起是度衆生方便法。

그 때에 보살은 보살도를 밝게 비추며 그 마음이 안온하여지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다만 집착하는 착심(著心)만을 끊으면 도(道)에 저절로 이르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것을 알고 나서는 생각하기를 ‘중생은 세간에 깊이 집착하지만 필경공일 뿐이며, 또한 그 공도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라서 머무르는 곳이 없으므로 중생들은 믿어 받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중생으로 하여금 이 법을 믿고 받게 하기 위하여 일체법을 배우는 것이다.

수행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법(方便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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