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淨佛國土品 第八十二 卷第九十二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2. 정불국토품(淨佛國土品) 풀이함  3

 

觀衆生心行所趣,知好何法、念何事、何所志願。觀時悉知衆生所著處皆是虛誑顚倒,憶想分別故著,無有根本實事。爾時,菩薩大歡喜,作是念:“衆生易度耳!所以者何?衆生所著皆是虛誑無實。”

중생들의 마음 작용의 심행(心行) 나아가는 곳을 관찰하여 어떠한 법을 좋아하고, 어떠한 일을 생각하며,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나니, 

관찰할 때, 중생들이 집착하는 곳은 모두가  거짓이고 뒤바뀐 것이며, 기억하고 생각하며 분별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라서  근본과 진실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나니,

그 때에 보살은 크게 기뻐하면서 생각하기를 ‘중생은 제도하기 쉬울 뿐이다! 왜냐하면, 중생이 집착하고 있는  모두가 거짓이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譬如人有一子,喜在不淨中戲,聚土爲穀,以草木爲鳥獸,而生愛著;人有奪者,瞋恚啼哭。其父知已,此子今雖愛著,此事易離耳,小大自休。何以故?此物非眞故。

菩薩亦如是,觀衆生愛著不淨臭身及五欲是無常,種種苦因,知是衆生得信等五善根成就時,卽能捨離。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아주 더러운 앉아서 흙을 모아 곡식이라 하고, 풀과 나무를 길짐승ㆍ날짐승이라 하면서, 좋아하면서 애착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것들을 빼앗아 버리면 화를 내고 슬피 울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지금은 비록 애착하고 있지만 이러한 것은 쉽게 포기할  있다는 것을 알고, 작은 것이건  것이건 간에 그대로 놓아두는 것과 같으니, 왜냐 하면,  물건들은 진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들이 부정하고 냄새나는 몸과욕에 애착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덧없고 갖가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관찰하면서  중생이 신근(信根)·정진근(精進根)·염근(念根)·정근(定根)·혜근(慧根)의 다섯 가지의 오선근(五善根)이 성취될 때에는  버리고 여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다.


若小兒所著實是眞物,雖復年至百歲,著之轉深,不可得捨;若衆生所著之物定實有者,雖得信等五根,著之轉深,亦不能離。

以諸法皆空、虛誑不實故,得無漏淸淨智慧眼時,卽能遠離所著,大自慚愧;譬如狂病,所作非法,醒悟之後,羞慚無顏。

만약 어린 아이가 집착하는 것이 실로 진짜 물건이라면, 비록 나이가  살에 이를지라도 더욱  집착하면서 버릴  없을 것이요, 

만약 중생이 집착하고 있는 물건이 결정코 진실이요 존재하는 것이라면, 비록 신근 등의 오선근을 얻었을지라도 더욱  집착하게 될 것이므로 역시 여읠  없을 것이다. 

그러나법 모두는 공한 것이고 거짓의 허광(虛誑)된 진실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번뇌 없는 깨끗한 지혜안(智慧眼)을 얻었을 때에는  집착하던 것을 멀리 여의고 스스로 크게 부끄러워하게 되나니,

마치 미친 광병(狂病)이 들었을 때에 하는 일은 법다운 것이 아니므로, 정신이 들어서 그것을 보게 되면 부끄러워하면서 면목 없어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菩薩知衆生易度已,安住般若中,以方便力教化衆生:“汝等當行布施,可得饒財,莫恃是布施果報而自憍高!此中無有堅實,皆當破壞,與未布施時無異。”持戒等乃至十八不共法,亦如是。

是諸法雖淸淨、大有所益,皆是有爲法,從因緣生,無有自性;汝等若著是法,能生苦惱。譬如熱金丸,雖是寶物,捉則燒手。

보살은  중생이 제도되기 쉽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반야 가운데에 편히 머무르며 방편력으로 중생을 교화하면서 “그대들은 보시를 행하여 넉넉한 재물을 얻게 되었을지라도 이 보시의 과보를 믿고 뽐내지  것이다. 이것은 견실함이 없고 모두가 언젠가는 파괴되어 아직 보시하지 못하였을 때와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니, 지계(持戒) 등에서 18불공법까지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법이 비록 깨끗하여 크게 이익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모두는 유위(有爲)의 법이라서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며, 스스로의 성품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인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이러한 법에 집착한다면 고뇌를 낳는 것이니, 마치 이글거리는 쇠구슬이 비록 보물이라 하여 손으로 잡으면  손을 데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如是菩薩教化衆生行菩薩道,自無所著,亦爲衆生說無所著。以無著心行檀波羅蜜故,於檀中不住。

不住者,所謂布施時不取三種相,亦不著果報而自高生罪業,布施果報滅壞時亦不生惱。尸羅波羅蜜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如是。

此中佛自說不住因緣有二種:一者、菩薩深入空,不見諸法性,故不住;二者、不以小事爲足,故不住。

是菩薩無有異心,但一向能生菩提道。

보살은 이와 같이 중생을 교화하면서 보살도를 행하며, 스스로 자신이 집착하지 않고 또한 중생들에게도 집착하지 않도록 설하여 주며, 

집착이 없는 무착심(無著心)으로써 단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에 단(檀, 보시) 가운데에도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이니,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라 함이란, 이른바 보시할 때, 시자 시물 수자의 세 가지 상(相) 취하지 않고, 또한 과보에 집착하여 뽐내면서 죄업을 내지도 않으며, 보시의 과보가 파괴되고 소멸할 때에도 괴로움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니, 

시라(지계)바라밀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친히  머무르지 않는 불주인연(不住因緣)에 두 가지가 있는 것을 말씀하셨으니,

“첫째는 보살이 공에 깊이 들어가서법의 법성(法性) 보지 않기 때문에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요, 

둘째는 작은 일로써는 만족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이다”고 하신 것이다. 

 보살은 다른 마음없이 다만 한결같이 보리도(菩提道)를  뿐인 것이다.


須菩提白佛:“若一切法無生,云何菩薩能生菩提道?”

佛可須菩提意:“一切法無生,我實處處說諸法無生,非爲凡夫說,但爲得無作解脫、不起三種業者說。”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약 일체법은 생겨남이 없는 무생(無生)이라면, 보살이 어떻게 보리도를 내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일체법은 무생(無生)이니, 나는 실로 곳곳에서법이 무생(無生)이라는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범부를 위하여 설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무작해탈(無作解脫)을 얻어서  가지의 삼종업(三種業)을 일으키지 않는 이를 위하여 말하는 것일 뿐이다”고 하셨다.


復問:“世尊!佛自說:‘有佛、無佛,諸法法相常住。’如聖人法相空,凡夫亦如是!”

佛可其所說,諸法實相常住,以衆生不知不解故,起菩提道。但爲除凡夫顚倒法,故名爲道;若決定有道可著者,卽復是顚倒。道、非道平等卽是道,是故不應難!

다시 여쭙기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친히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법의 법상(法相)은 항상 머무르는 상주(常住)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마치 성인의 법상이 공한 것과 같이처럼 범부 또한 이와 같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가  말을 인가하시면서 “제법의 실상(實相)은 항상 머무르는 상주(常住)하는 것이나, 중생들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리도(菩提道)를 일으키는 것이니, 다만 범부들의 뒤바뀌어 전도된 법을 제거하기 위하여 도(道)라  뿐이며,  

만약 결정코 집착할 만한 도가 있다면 그것 역시도 뒤바뀌어 전도(顚倒)된 것이니,  

도(道)와 도가 아닌 비도(非道)가 평등한 그것이 바로 도(道)이므로 따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須菩提復問:“云何可得菩提?用生道故得耶?”佛言:“不也!”

何以故?生道者,菩薩觀是有爲法生滅相謂是實,是故言不。如先說熱金丸喩。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어떻게 보리를 얻을  있습니까? 나는 생도(生道)로써 얻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아니니라”고 하셨으니,

왜냐 하면, 생도(生道)란, 보살이  유위법의 생멸(生滅)하는 상(相) 관찰하면서 이것을 진실이라 여기기 때문에 ‘아니니라’고 하신 것으로, 마치 앞에서 ‘이글거리는 쇠구슬’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不生法卽是無爲,無作法故,亦不可以得菩提。“生不生”,二俱有過故。

“非生非不生得菩提耶?”答言:“不也!”

나지 않는 불생법(不生法), 그것이하는 것이 없는 무위법(無爲琺)이며, 지음도 없는 무작법(無作法)이기 때문에, 역시 보리를 얻을  없나니, 나는 생(生)이거나 나지 않는불생(不生),  가지는  같이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것도 아닌 비생(非生)이고 나지 않는 것도 아닌 비불생(非不生)이면서 보리를 얻습니까”라고 하자,

“아니니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問曰:若“生不生”二俱有過,“非生非不生”復不應有過,何以言不得?

묻나니, 만약 생(生)과 불생(不生), 두 가지가  같이 허물이 있다면, 나는 것도 아닌 비생(非生)이고 나지 않는 것도 아닌 비불생(非不生) 허물이 없어 하거늘, 무엇 때문에 “얻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까?


答曰:若分別“非生非不生“是好、是醜,取相生著故,故言有過;若能不著,則是菩提道。

須菩提問:“若不以四句得者,云何得道?”佛答:“不以道、不以非道,則得菩提。”

何以故?“菩提卽是道,道卽是菩提。”

답하나니, 만약 나는 것도 아닌 비생(非生)이고 나지 않는 것도 아닌 비불생(非不生)을 분별한다면, 이것은 좋은 것이요 저것은 추한 것이라고 상(相) 취하면서 집착하기 때문에 ‘허물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만약 집착하지 않을  있다면, 그것이 바로 보리도(菩提道)인 것이다.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네 구절의 사구(四句)로써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여 도를 얻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은 대답하시기를 “도(道)로써도 하지 않고, 도가 아닌 비도(非道)로써도 하지 않으면  보리를 얻는다”고 하셨으니, 왜냐 하면 보리(菩提)가 곧 도(道)요, 도(道)가 곧 보리(菩提)이기 때문이다.


菩提名諸法實相,是諸佛所得究竟實相,無有變異。一切法入菩提中,皆寂滅相;如一切水入大海,同爲一味。

是故佛說:“菩提性卽是道性。”若菩提性、道性異者,不名菩提爲無戲論寂滅相,

是故說:“菩提卽是道,道卽是菩提。”

보리를법의 실상이라 하므로 이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얻는 구경(究竟)의 실상이니,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일체법은 보리 가운데로 들어가 모두가 고요히 사라지는 적멸상(寂滅相) 되는 것은, 마치 일체의 강물  바다로 들어가 똑같이 하나의 일미(一味)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리의 성품인 보리성(菩提性)이  도의 성품인 도성(道性)이다”고 하셨으니, 

만약 보리성(菩提性)과 도성(道性)이 다르다면, 이 보리를 이름하여 “희론이 없는 고요히 사라진 무희론적멸상(無戱論寂滅相)”이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보리(菩提)가 곧 도(道)요, 도(道)가 곧 보리(菩提)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復次,是二法異者,行道不應到菩提 諸法因果,不一不異故。

須菩提復問:“若爾者,菩薩行道應便是佛!”所以者何?道卽是菩提故。

又佛應是菩薩!何以故?菩提卽是道故。今何以說有差別 佛有十力等、三十二相、八十隨形好?

또한  가지의 법이 다르다면 도(道)를 행하여도 보리(菩提)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니,

왜냐 하면, 제법의 원인인 인(因)과 결과의 과(果)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 존자가 다시 여쭈기를 “만약 그러하다면 보살이 도를 행하고 있으면 마땅히  부처님이어야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道)가 곧 보리(菩提)이 때문입니다. 

또한 부처님도 보살이어야 할 것이니, 왜냐 하면 보리(菩提)가 곧 도(道)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차별이 있어서 부처님에게는 10력 등과 32상과 80수형호가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須菩提爲新學菩薩故,分別難佛:“菩薩應卽是佛!”

佛以反問答:“佛得菩提不?”

答言:“不也!何以故?菩提不離佛、佛不離菩提;二法和合故,是佛是菩提”

是故不應難言“菩薩卽是佛”。此摠相答。

수보리 존자는 새로 배우는 신학(新學) 보살들을 위하여 분별하면서 부처님께 “보살은 마땅히 부처님이어야 합니다”고 따지는 것이므로, 

부처님께서는 반문(反問)하시어 대답하시기를 “부처님은 보리를 얻는 것이던가?”라고 하셨다.

수보리 존자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라고 하였으니,

왜냐 하면, 보리는 부처님을 여의지 않는 보리불리불(菩提不離佛)이고, 부처님은 보리를 여의지 않는 불불리보리(佛不離菩提)이라서, 이  가지 법이 화합한 까닭에 부처님이 그대로 보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따지면서 ‘보살이  부처님이다’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전체의 총상(總相)으로서의 대답인 것이다.


問曰:佛是衆生,菩提是法,云何言“佛卽是菩提”?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바로 중생이요, 보리는 바로 법이거늘, 어떻게 부처님이  보리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答曰:先有三十二相莊嚴身、六波羅蜜等功德莊嚴心,而不名爲佛;得菩提故,名之爲佛。是故言:“佛與菩提不異。”

微妙淸淨五衆和合假名爲佛,法卽是五衆,五衆不離假名,菩提卽是五衆實相,一切法皆入菩提故。是故“佛卽是菩提、菩提卽是佛”,但凡夫心中分別有異。

답하나니, 먼저 32상(相)이 있어서 몸을 장엄한 장엄신(莊嚴身)이고, 6바라밀 등의 공덕이 있어서 마음을 장엄한 장엄심(莊嚴心)이라 하여도 부처님이라고는 하지 않으나, 

보리를 얻은 까닭에 부처님이라 이름하게 되기 때문에 ‘부처님과 보리는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미묘하고 깨끗한중(五衆, 오온)의 화합을 임시의 가명으로 부처님이라고  것이니, 그것이 곧 오중인 것이며,

오중은 임시로 붙인 가명(假名)을 여의지 않으니,

보리가 중의 실상이며, 일체법 모두는 보리에 들기 때문에 부처님이  보리요 보리가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나, 다만 범부가 마음으로 다르다고 분별할 뿐인 것이다.


問曰:汝先論議中說言“菩提與道不一不異”,經中何以說“道卽是菩提,菩提卽是道”,“佛卽是菩提,菩提卽是佛”?

묻나니, 당신께서는 앞의 논의(論議)에서 말씀하시기를 “보리와 도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하셨는데, 

경에서는 무엇 때문에 “도가  보리요 보리가  도이며, 부처님이  보리요 보리가  부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一、異雖俱不實而多用一,故此中說“菩提卽是道,道卽是菩提”,無咎!

如常、無常是二邊,常多生煩惱故不用,無常能破顚倒故多用;事旣成辦,亦捨無常。

此中亦如是,若以觀種種別異法故多生著心;若觀諸法一相 若無常、苦、空等,是時煩惱不生;

著心少故,是故多用是“一”。於實義中,一亦不用;若著一,卽復是患。

답하나니, 동일하다는 일(一), 다르다고 하는 이(異) 이것이 비록 다 같이 진실하지 않을지라도 동일하다는 일(一)이라는 말을 많이 쓰기 때문에 여기에서 “보리가 곧 도요 도가 곧 보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니, 잘못되지 않은 것이다.

‘항상하다는 상(常)’과 ‘무상(無常)하다’는 두 가지의 치우친 견해에서도

‘항상하다는 상(常)’이라 함은 번뇌를 많이 내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고,

‘무상(無常)하다’고 함은 능히 뒤바뀜의 전도를 깨뜨리기 때문에 많이 사용하지만, 그것이 이미 이루어지면 역시 무상함도 버려야 하는 것이니, 

여기에서도 이와 같아서, 만약 갖가지의 다른 법들을 관찰한다면, 그 때문에 집착하는 착심(著心)을 많이 내게 되지만,

만약 제법이 일상(一相)이라서 즉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다 하는 등으로 관찰한다면, 이 때에는 번뇌가 생기지 않고 집착하는 착심(著心)도 적게 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 동일하다는 일(一)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이치의 실의(實義) 가운데서는 이 동일하다는 일(一)도 사용하지 않나니,

만약 동일하다는 일(一)에 집착한다면, 그것이 곧 다시 우환거리가 되는 것이며,

 

復次,別異無故,一亦不可得,相待法故;但以不著心,不取一相,故說無咎。一不實故,菩薩不得卽是佛。

復次,今佛更答須菩提,自說因緣:“菩提雖寂滅相,而菩薩能具足六波羅蜜等諸功德,住金剛三昧,以一念相應慧,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爾時,於一切法中自在,得名爲佛。”

또한 다른 것이 없는 별이(別異)이기 때문에 동일함 또한 얻을  없나니, 서로 대비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집착하지 않는 불착심(不著心)으로 동일하다는 일상(一相)도 취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여도 잘못이 없을 뿐이다. 

동일하다는 일(一)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보살이  부처님일 수는 없으며, 

또한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수보리에게 대답하시면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보리는 비록 조용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라 할지라도 보살은 6바라밀 등의 모든 공덕을 완전히 갖추고,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머물러  생각의 일념(一念)과 상응하는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그 때에 일체 가운데에서 자재하게 되어서 부처님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