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論釋實際品 第八十 卷九十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0. 실제품(實際品)을 풀이함 5
問曰:無始生死展轉甚多,何以止齊無明?
묻나니, 비롯함이 없는 무시(無始)로부터 생사(生死)를 전전하면서, (갈애와 취함의 애취(愛取)에 대한 집착이) 아주 많았거늘, 무엇 때문에 무명으로 한정하는 것입니까?
答曰:是事先已答。菩薩思惟,爲人從苦得脫故,求苦因緣。衆生過去、現在老死等苦,不可得除;爲除未來世老死苦,斷相續,不令復生。
如良醫,過去病不可治,現在病亦不可治;服藥但能治應起病,破其冷熱,不復令起。
又如失火燒舍,不爲己過去火故勤滅,亦不爲現在火故勤滅,但爲未來火不令更燒故勤滅。
답하나니, 이러함에 대한 것은 앞에서 이미 대답하였다.
보살이 사유하기를 사람들을 고통에서부터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하여 괴로움의 고인연(苦因緣)을 구할 때, 중생이 겪는 과거와 현재의 노사(老死) 등의 괴로움을 제거시킬 수 없지만,
미래 세상에 있어서 노사 등의 괴로움을 제거시키기 위하여 그 상속(相續)을 끊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마치 용한 의사가 과거의 병은 치료할 수 없고, 현재의 병도 낫게 할 수 없을 때에는 약을 먹여서 냉(冷)과 열(熱)을 파괴하는 치료를 하여서 다만 앞으로 병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으며,
또 잘못하여 불이 나서 집이 탈때, 이미 불이 탄 때문(과거)에 끄고자 애쓰지 않고, 또한 현재 불이 타고 있는 것도 끄려고 하지 않되, 다만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것만은 더 이상 타지 않도록 애쓰는 것과 같다.
良醫、滅火人勤方便亦不虛。菩薩滅衆生苦惱亦如是:過去苦已滅,無所復能;
現在苦惱,先世因緣成就故不可卻;但破未來世老死等苦因緣故。破是生法,老死等苦自然永滅。
이 용한 의사와 불 끄는 사람이 힘써 행하는 방편이 헛된 것이 아니듯이, 보살이 중생의 고뇌를 없애고자 하는 것도 이와 같으니,
과거의 괴로움은 이미 사라진 이멸(已滅)한 것이므로 다시 작용하지 않은 것이고,
현재의 괴로움은 전생의 인연으로 성취된 것인지라 물리칠 수 없는 것이나,
다만 미래 세상에 늙어 죽는 등의 괴로움의 고인연(苦因緣)만을 파괴할 수 있을 뿐이니,
이러한 태어남의 생법(生法)과 늙어 죽는 등 괴로움을 파괴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영원히 소멸하는 것이다.
是故菩薩欲滅未來世老死等苦因緣生,得現在“有”等八因緣:一名有漏業。
二名現在世諸煩惱,所謂四取、一愛。是二種煩惱,從二心數法生,所謂受及觸。觸能生一切心數法,受前生故,得名觸是受因緣。受雖能生三毒,一切衆生,愛是舊煩惱。
그러므로 보살은 미래 세상에 있어서 늙어 죽는 노사(老死) 등의 괴로움의 고인연(苦因緣)이 생기는 것을 소멸시키고자 현재에서 존재의 유(有) 등의 여덟 가지 팔인연(八因緣)을 얻는 것이니,
첫째는 유루업(有漏業)이라 하고,
둘째는 현재 세상의 모든 번뇌인 현재세제번죄(現在世諸煩惱)로써, 이른바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의 사취(四取)와 일애(一愛, 갈애, 탐욕)이다.
이 두 가지의 번뇌는 두 마음에 속한 법으로부터 생기나니, 이른바 느낌의 수(受)와 접촉의 촉(觸)이다.
접촉의 촉(觸)은 일체의 마음에 속한 심수법을 내나니, 느낌의 수(受) 이전에 생기는 것이므로 그렇게 이름하는 것이며,
접촉의 촉(觸)은 바로 느낌의 수인연(受因緣)이니,
비록 느낌의 수(受)가 3독(毒)을 낼지라도 일체 중생들은 이 옛 번뇌에 애착하는 것이다.
觸因緣是內六入,如先說。雖有外六入,內六入無故觸等心數法不生,是故內六入得名。
名色是六入因緣,如此中說。初入胎識,是名色因緣。
접촉의 촉인연(觸因緣)은 바로 안(眼, 눈)ㆍ이(耳, 귀)ㆍ비(鼻, 코)ㆍ설(舌, 혀)ㆍ신(身, 몸)ㆍ의(意, 뜻)의 내육입(內六入)이니,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비록 색(色, 물체)ㆍ성(聲, 소리)ㆍ향(香, 냄새)ㆍ미(味, 맛)ㆍ촉(觸, 닿임)ㆍ법(法)의 외육입(外六入)이 있을지라도 안의 내육입(內六入)이 없으면 접촉 등의 마음에 속한 심수법이 생기지 않나니,
이러한 까닭에 내육입(內六入)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명색(名色)은 바로 육입(六入)의 인연이니, 이 가운데에서의 설명과 같이, 처음에 태(胎) 속으로 들어가는 의식의 식(識)은 바로 명색(名色)의 인연인 것이다.
識、名色在胎中,此中雖有六入,未成就、未可用故,未得名字。旣生嬰孩,未能有所作,但有六入。轉大有六觸。如小兒蹈火履冰,但有觸,未知苦樂。轉大受苦樂,未深愛著。
如小兒雖瞋,未能起殺等惡業;雖喜,未能起施等善業。年及成人,得苦生恚、得樂生愛。求樂具故,取欲等四取。取時,能起善惡業。
식(識)과 명색(名色)은 태(胎)에 있을 때, 그 안에서 비록 육입이 있을지라도 아직 성취되지 못하여서 작용할 수 없으므로 아직 이름(名)을 얻지 못하나,
이미 태어난 젖먹이는 아직 어떠한 동작을 할 수도 없이, 다만 6입만 있을 뿐이며,
점차 성장하면서 안촉(眼觸), 이촉(耳觸), 비촉(鼻觸), 설촉(舌觸), 신촉(身觸), 의촉(意觸)의 육촉(六燭)이 있게 된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불을 밟고 얼음을 밟아도 다만 그 접촉만이 있을 뿐, 고통과 쾌락을 아직 잘 모르지만 점차로 커가면서 고통과 쾌락을 느끼게 되나, 아직은 깊이 애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마치 어린 아이가 비록 화를 낼지라도 아직 살생(殺生) 등의 나쁜 업은 일으킬 수 없으며,
비록 기뻐할지라도 아직 보시 등의 착한 선업을 아직은 일으킬 수 없지만,
나이가 들어서 성인(成人)이 된 뒤에 괴로움을 만나면 화를 내고 즐거움을 얻으며 사랑의 애(愛)을 내는 것과 같이,
쾌락거리를 구하는 까닭에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의 4취를 취하며, 이를 취할 때에 선악의 업을 일으키게 되는 것다.
若知先一世無明、業因緣,則億萬世可知;譬如現在火熱,過去、未來火亦如是。
若無明因緣更求其本,則無窮,卽墮邊見,失涅槃道,是故不應求;若更求,則墮戲論,非是佛法。
만약 전생의 한 세상 동안의 무명에 대한 업인연을 알게 된다면 억만 세상 동안의 일도 알 수 있을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현재의 불이 뜨거운 것과 같이 과거와 미래의 불 또한 그러한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무명인연(無明因緣)의 그 근본을 추구해 본다면 끝없이 무궁하므로 곧 치우친 견해의 변견(邊見)에 떨어지고 열반의 도를 잃게 되기 때문에 구하지 않아야 하며,
만약 다시 구한다 하면 곧 희론에 떨어질 것이니, 그것은 부처님의 불법이 아닌 것이다.
菩薩欲斷無明故,求無明體相;求時,卽入畢竟空。何以故?佛經說:“無明相:內法不知,外法不知,內外法不知。”菩薩以內空觀內法,內法卽空;以外空觀外法,外法卽空;以內外空觀內外法,內外法卽空。
如是等一切是無明相,如先品『德女經』中“破無明”廣說。
보살은 그 무명을 끊고자 무명의 체상(體相)을 구하며, 구할 때에는 곧 필경공으로 들어가나니,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는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무명상(無明相)이란,
나(我)의 소의(所依)가 되는 안촉(眼觸), 이촉(耳觸), 비촉(鼻觸), 설촉(舌觸), 신촉(身觸), 의촉(意觸)의 내육입(內六入)의 내법(內法)으로도 알지 못하고,
나(我)의 소의(所依)가 되는, 색처(色處) · 성처(聲處) · 향처(香處) · 미처(味處) · 촉처(觸處) · 법처(法處)의 외육입(外六入)의 외법(外法)으로도 알지 못하며,
내적인 6근(六根)과 6식(六識)과 외적인 6경(六境)의 18계(十八界)인, 안팎의 내외법(內外法)으로도 알지 못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보살이 내공(內空)으로써 내법(內法)을 관찰하면 내법(內法)은 곧 공하고,
외공(外空)으로써 외법(外法)을 관찰하면 외법(外法) 역시도 곧 공하며,
내외공(內外空)으로써 내외법(內外法)을 관찰하면 내외법(內外法)도 곧 공하나니,
이와 같은 일체가 바로 무명상(無明相)이니, 마치 앞에 품(品)의 '덕녀경(德女經)'에서 무명을 파괴하는 것에 대하여 자세히설명한 바와 같은 것이다.
復次,菩薩求無明體,卽時是明,所謂諸法實相,名爲實際。觀諸法如幻如化,衆生顚倒因緣故,起諸煩惱,作惡罪業,輪轉五道,受生死苦。譬如蠶出糸自裹縛,入沸湯火炙。
凡夫衆生亦如是,初生時未有諸煩惱,後自生貪欲、瞋恚等諸煩惱;是煩惱因緣故,覆眞智慧,轉身受地獄火燒湯煮。
또한 보살이 무명의 체(體)을 구하면, 그것이 곧 명(明)이 되나니,
이른바 제법의 실상을 실제(實際)라 하니, 제법을 관찰하면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은 것인데도 중생들의 뒤바뀐 전도인연(顚倒因緣) 때문에 모든 번뇌를 일으켜 나쁜 죄업을 짓고, 오도(五道)를 바퀴 돌 듯 전전하면서 생사의 고통을 받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누에가 실을 뽑아내어 제 몸을 둘러싸고 감은 뒤에 끊는 물속에 들어가 삶아지는 것과 같이,
범부 중생도 이와 같아서 처음에 태어날 때에는 아직 모든 번뇌가 있지 않다가, 후에 스스로가 탐욕과 성냄 등의 모든 번뇌를 내나니, 이러한 번뇌의 인연 때문에 진실한 지혜를 가리게 되며, 몸을 바꾸면서 지옥의 불에 타고 끊는 물에서 삶아지는 것이다.
菩薩知是法本末皆空,但衆生顚倒錯故受如是苦。菩薩於此衆生起大悲心,欲破是顚倒故,求於實法,行般若波羅蜜,通達實際;種種因緣教化衆生,令住實際。是故住實際無咎。
보살은 이러한 법의 본말(本末)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공한 것이나, 다만 중생들이 뒤바뀌고 착각한 까닭에 이러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을 아나니, 보살은 이러한 중생들에 대하여 대비심을 내어서 뒤바뀜의 전도를 깨뜨려 주고자 짐짓 진실한 실법(實法)을 구하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실제(實際)를 통달하고, 갖가지의 인연으로 중생을 교화하며 실제에 머무르는 것이니, 이러한 까달게 머무른다 하여도 허물되지 않는 것이다.
復次,經中說:“若衆生與實際異,菩薩不應行般若波羅蜜。”
異者,實際是畢竟空,衆生際是決定有;若爾者,應難:“若諸法實際相空,菩薩云何爲衆生故修是實際?”若衆生畢竟空、實際定有,無衆生則無所利益,爲誰故行實際?
또 경에서 말하기를 “만약 중생과 실제(實際)가 다르다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수 없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다르다는 이(異)’라고 함이란, 실제는 바로 필경공이고, 중생제(衆生際)는 결정코 존재하는 유(有)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제법의 실상이 공하다면 보살이 어떻게 중생들을 위하여 이 실제를 닦는 것인가?
만약 중생이 필경공이고 실제가 반드시 있는 유(有)라면, 중생은 없는 것이므로 이롭게 할 것도 없거늘, 누구를 위하여 실제를 행하겠는가?’라고 따져야 할 것이다.
今衆生際實不異實際,故行般若波羅蜜。欲覺悟狂惑顚倒凡夫故,行般若波羅蜜;令衆生住實際中,而不壞實際。
是時,須菩提更問:“若衆生際、實際不異,云何以實際著實際?”自性不應自性中住,如指端不能自觸指端。
그러나 여기에서는 중생제(衆生際)는 실로 실제(實際)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뒤바뀌어 전도된 범부를 깨우쳐 주고자 하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실제(實際)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면서도 실제(實際)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이 때에 수보리 존자가 또 여쭙기를, “만약 중생제와 실제가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실제로써 실제에 집착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자성(自性)이 자성(自性) 가운데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은 마치 손가락 끝은 제 손가락 끝을 만질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佛可其意,菩薩以方便故,建立衆生於實際,如衆生、實際不異,一亦不可得。若是一,則壞實際相。
所以者何?得是一性故。菩薩知是二法不一不二,亦不不一、亦不不二,畢竟寂滅無戲論相。
菩薩生大悲心,但欲拔出衆生離於顚倒故,教化衆生。
부처님께서 그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보살은 방편으로써 중생을 실제에 세우면서도 중생과 실제가 동일하다거나 다르다는 것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하셨다.
만약 동일하다고 한다면 곧 실제의 상(相)을 파괴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동일한 일성(一性)이 되기 때문이다.
보살은 중생과 실제의 이법(二法)이 하나도 아닌 불일(不一)이요, 둘도 아닌 불이(不二)이며, 또한 하나가 아닌 것도 아닌 불불일(亦不不一)이요, 둘이 아닌 것도 아닌 역불불이(亦不不二)이며, 마침내 고요히 사라진 필경적멸(畢竟寂滅)한 것이라서 희론의 상(相)도 없는 것임을 알며,
보살은 대비심을 내어서 다만 중생들을 구출하면서 뒤바뀜의 전도로부터 여의게 하고자 하는 까닭에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又問:“云何名方便?”
佛言:“菩薩行般若波羅蜜時,以方便力故,建立衆生於檀中,說是檀先際、後際空,中際亦爾。”如經中廣說。
菩薩知實際者到衆生邊。如先「檀品」中說。衆生聞已發心,折薄煩惱,深著布施。菩薩憐愍衆生:“我從慳中拔出,今復著布施。衆生若受布施,福盡受諸苦惱;又受富貴因緣,得作大罪,則墮地獄。”
또 여쭈기를, “어떠한 것을 방편이라 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방편력으로써 중생을 단(檀, 보시) 가운데에 세우고 이 단을 설하면서 ‘선제(先際)와 후제(後際)도 공하며 중제(中際)도 이와 같다’고 하느니라”고 하셨으니, 경 가운데서 자세히 말씀하신 바과 같다.
보살은 이 실제(實際)를 알기 때문에 중생들에게 이르게 되나니, 앞의 '단품(檀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중생은 이러한 말씀을 들은 뒤에 발심하여 번뇌를 꺾고 보시에 깊이 집착하니,
보살은 중생을 가엾이 여기어, “나는 간탐 가운데에서 그를 구출했다”고 하면서 이제는 다시 보시에 집착하게 된다.
중생이 만약 보시를 받았어도 복이 다하면 모든 괴로움을 받게 되고, 또 복덕과 부귀의 인연을 받으면서 큰 죄를 짓게 되면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是故愍此衆生得少許時樂而受苦長久,是故菩薩爲說布施實相,所謂畢竟空,作是言:“是布施過去已滅,不可見、不可得、不可用,但可憶念,如夢所見無異;未來未生故,亦無所有、畢竟空。是布施先、後際無故,中際亦無。”
如破六塵中破色法中說:“現在布施雖眼見,分分破析,乃至微塵不可得。”布施三世空,施者、受者、果報亦如是。
이 중생은 잠시 동안만의 즐거움을 얻을 뿐, 괴로움은 오랜 세월동안 받게 되는 까닭에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그들을 위하여 보시의 실상(實相), 즉 필경공을 설해 주면서 말하기를, “이 보시가 지나가고 나면 이미 소멸하는 것이므로 볼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으며, 수용할 수도 없고 다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인 것이 마치 꿈에서 본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며, 미래는 아직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있지 않아서 필경공이며, 이 보시는 선제와 후제도 없기 때문에 중제도 또한 없다”고 하는 것이다.
육진(六塵)을 파한 곳과 색법(色法)을 타파한 가운데에서 말한 것과 같이, 현재의 보시가 비록 눈으로 볼 수 있다 할지라도 부수고 쪼개어서 작은 미진(微塵)에 이르면 얻을 수가 없는 것이며,
보시는 3세(世) 동안 다 공한 것이니, 보시하는 시자(施者)와 받는 수자(受者)와 과보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菩薩語施者言:“布施等法是初入佛法門”實際中,實際相亦無,何況布施!汝莫念、莫著布施等法!若不念、不著如布施體相,如是布施者,則得甘露味、甘露果。”
甘露味者,是八聖道分;甘露果者,是涅槃。菩薩雖住實際中,以方便力,布施門度衆生。餘波羅蜜亦如是,如經中廣說。
보살은 보시하는 이에게 말하기를 “보시 등의 법은 부처님의 불법에 들어가는 첫문이다. 실제(實際) 가운데에는 실제의 상(相)조차 없거늘 하물며 보시이겠는가!
그대는 보시 등의 법을 생각하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말라.
만약 생각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면 보시의 체상(體相)과 같아지나니,
이와 같은 보시는 감로미(甘露味)와 감로의 열매를 얻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감로미(甘露味)란 곧 8성도분이며, 감로의 열매란 곧 열반(涅槃)인 것이다.
보살이 비록 실제(實際) 가운데에 머무를지라도 방편력인 보시의 문(門)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나니,
그 밖의 다른 바라밀에서도 역시 이와 같으니, 경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다.
須菩提白佛言:“世尊!若一切法性空,性空中無法及非法、亦無衆生,菩薩云何住是空中求一切種智?”
佛答:“菩薩安立性空中故,能行是布施等諸法。”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의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라면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 가운데에는 법과 법이 아닌 것도 없고, 또한 중생도 없거늘, 보살은 어떻게 이 공한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일체종지를 구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 가운데에 편히 머무르기 때문에 이 보시 등의 제법을 행하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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