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論釋平等品 第八十六 第九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6. 평등품(平等品) 풀이함 5

 

問曰:先處處說“諸法卽是平等相,平等卽是諸法實,名異而義同。色如,非色、非離色”,今何以說“平等出過一切法”?

묻나니, 앞의 곳곳에서 ‘제법은 곧 평등상(平等相)이고, 평등은 곧 제법의 실상(實相)이라서, 이름은 달라도 뜻은 동일한 것이니, 물질의 색여(色如)는 물질이 아닌 비색(非色)이나, 물질을 여의는 것이 아닌 비이색(非離色)이다’라고 말씀하셨거늘,

지금은 무엇 때문에 평등이 일체법을 벗어난다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一切法有二種:一者、色等諸法體;二者、色等法中行 凡夫邪行,賢聖正行。此中說平等,於凡夫行中出,不言色等中出。復次,平等無能行、無能到。

於是須菩提驚問:“佛亦不能行、不能到?”須菩提謂:是法雖甚深微妙難行,是事佛應當得!

답하나니, 일체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물질(色) 등 제법의 체성의 체(體)요,

둘째는 물질(色) 등의 법 가운데서의 행(行)이니, 범부는 삿된 행의 사행(邪行)이요, 성현은 바른 행의 정행(正行)인 것이다.

이 가운데서 말하는 ‘평등’은 범부의 행을 초월하는 것으로, 물질(色) 등을 초월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평등은 행할 수도 없는 불능행(不能行)이고, 다다를 수 없는 불능도(不能到)이니,

여기에서 수보리 존자가 놀라면서 여쭈기를 “부처님께서도 또한 행할 수 없는 불능행(不能行)이고 이를 수 없는 불능도(不能到)입니까?”라고 하였다.

수보리 존자는 ‘이 법은 매우 깊고 미묘한 것이라서 행하기 어려울지라도, 부처님만은 마땅히 하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佛答:“從須陁洹乃至佛皆無能行、無能到。”佛意:三世十方佛不能行、不能到,何況一佛!平等性自爾故。

須菩提復問:“佛於一切法中行力自在,佛無㝵智慧,無處不到,云何言不能行、不能到?”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수다원에서 부처님에 이르기까지가 모두를 행할 수도 없는 불능행(不能行)이고, 다다를 수 없는 불능도(不能到)이니라”고 하셨으니,

부처님의 뜻은 ‘삼세(三世)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행할 수가 없는 불능행(不能行)이고, 다다를 수 없는 불능도(不能到)이거늘, 하물며 한 부처님이겠는가!

평등한 성품의 평등성(平等性)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고 하신 것이며, 

때문에 수보리 존자가 또 여쭈기를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에서 행하는 행력(行力)이 자재하시며, 부처님의 걸림 없는 무애지혜(無礙智慧)는 모든 곳마다 이르지 않음이 없거늘, 어찌하여 행할 수도 없는 불능행(不能行)이고, 다다를 수 없는 불능도(不能到)이라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佛答:“若佛與平等異,應有是難:‘何以不能行、不能到?’今凡夫平等、須陁洹平等、佛平等,皆一平等,無二無分別。”是凡夫乃至佛,自性不能自性中行、不能自性中到;自性應他性中行。

是故佛說:“若佛與平等異,佛應行平等。但佛卽是平等故,不行、不到,非以智慧少故。”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만약 부처님과 평등이 다른 것이라 한다면 마땅히 ‘무엇 때문에 행할 수도 없는 불능행(不能行)이고, 다다를 수 없는 불능도(不能到)이라 하는가’라고 따져야 하겠지만,

지금 범부의 평등과 수다원의 평등과 부처님의 평등은 모두가 같은 하나의 일평등(一平等)이라서 둘도 없는 무이(無二)이고 분별도 없는 무분(無分)이니라”고 하셨으니,

이 범부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의 자성(自性)은 자성(自性)에서 행할 수 없고, 자성(自性)에 이를 수도 없으며, 자성(自性)은 마땅히 다른 성품의 타성(他性)에서 행하여져야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부처님과 평등이 다르다고 한다면 부처님은 마땅히 평등을 행해야 되는 것이지만, 다만 부처님이 곧 평등일 뿐이기 때문에 행하지도 않고 이르지도 않는 것이니, 지혜가 적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라”고 하셨다.


須菩提白佛言:“若平等,凡夫乃至佛不可得異,今凡夫、聖人不應有差別!”

佛可須菩提問:“平等中無差別,世諦故凡夫法中有差別。”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만약 평등하여서 범부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다름을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범부와 성인에 차별이 있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의 질문을 인가하시면서 “평등한 가운데에는 차별이 없지만,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이기 때문에 범부의 법에서는 차별이 있는 것이다”고 하셨다.


復問:“若凡夫乃至佛無有差別,云何三寶大現於世閒,大利益衆生?”

佛答:平等卽是法寶,法寶卽是佛寶、僧寶。何以故?未得法時,不名爲佛;得平等法故名爲佛;得是平等法故,分別有須陁洹等差別。

또한 여쭈기를 “만약 범부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차별이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삼보(三寶)가 세간에 나타나서 중생들을 크게 이롭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평등이 곧 법보(法寶)요, 법보가 불보(佛寶)이며, 승보(僧寶)이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아직 법을 얻지 못한 때에는 부처님이라 하지 않지만, 평등한 법을 얻으면, 그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나니, 이 평등한 법을 얻은 까닭에 분별하면서 수다원 등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


須菩提受佛教:“是法皆無合、無散,無色、無形、無對,一相,所謂無相。唯佛有是力,於空、無相中,分別是凡夫、是聖人。”佛告須菩提:“如是!如是!若諸佛不分別是法,云何當知有地獄乃至十八不共法?”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서 “이 법은 모두가 합하지 않는 불합(不合), 흩어지지 않는 불산(不散)이며, 무색(無色), 무형(無形)이며, 대할 수도 없는 무대(無對)의 일상(一相)인, 이른바 무상(無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부처님만은 이러한 힘이 있으시므로 공(空)ㆍ무상(無相)인 가운데에서 ‘이는 범부이고, 이는 성인이다’라고 분별하십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만약 모든 부처님께서 이러한 법을 분별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지옥 내지는 18불공법이 있음을 알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問曰:諸佛如日出,不能令高者下、下者高,但能照明萬物,令有眼者別識;諸佛亦如是,亦不轉諸法相,但以一切智照,爲人演說令知。汝何以故言:“若佛不分別諸法,云何知有地獄乃至十八不共法?”如今畜生等現目所見,人皆識知,何須佛說!

묻나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마치 해가 돋을 때와 같아서, 높은 곳을 낮게 하거나, 낮은 곳을 높게 할 수는 없으나, 다만 만물을 밝게 비추어서 눈이 있는 이로 하여금 구별하여고 알게 할 뿐인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도 이와 같아서 제법의 상을 바꾸지 않고, 다만 일체지(一切智)로써 비추어 주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연설하여 알게 하실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만약 부처님이 제법을 분별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옥에서부터 18불공법 내지는 18불공법까지가 있음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마치 지금 축생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사람들 모두가 분별하여 아는 것과 같은 것이거늘,

어찌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한 것이라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佛雖不作好醜諸事,而演說示人。知有二種:一者、凡夫虛妄知,二者、如實知。

知畜生等相,是凡人虛妄知;佛爲知實相,故言:“佛不分別諸法,云何知有地獄等。”

復次,諸佛法寂滅相、無戲論;此中若分別有地獄等相,不名爲“寂滅”、“不二”、“無戲論法”。

佛雖知寂滅、不二相,亦能於寂滅相中分別諸法,而不墮戲論。

답하나니, 부처님께서 비록 좋거나 추한 모든 것들을 짓지 않으셨으나, 연설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보이셨으며,

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범부들이 허망하게 아는 허망지(虛妄知)요,

둘째는 여실하게 아는 여실지(如實知)이다.

축생 등의 상을 아는 것은 곧 범부인들이 허망하게 아는 허망지(虛妄知)이니, 부처님께서는 그 진실한 실상(實相)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부처님이 제법을 분별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옥 등이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또 모든 부처님의 불법은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라서 희론이 없는 것이니,

이 가운데에서 만약 지옥 등의 상(相)이 있다고 분별한다면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이고,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며, 희론이 없는 무희론법(無戲論法)’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비록 적멸상(寂滅相)이고, 불이상(不二相)이라는 것을 아셔서, 적멸상(寂滅相)이고, 불이상(不二相) 가운데에서 제법을 분별하시면서도 희론에 떨어지지 않으시는 것이다.


離諸法實相者,雖眼見畜生等,亦不能如實知其相。如牛,角、足、尾等諸分邊和合,更有牛法生,是爲一。諸分多、牛法一,一不作多、多不作一。

제법의 실상(實相)을 여읜 이는 비록 눈으로 축생 등을 볼지라도 ,역시 그 상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나니, 마치 소(牛)의 뿔과 발과 꼬리 등의 여러 부분이 화합하여서 다시 소(牛)라는 법이 생겨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이, 모든 부분은 여럿이지만, 소(牛)라는 법은 하나인 것이니,

하나는 여럿이 되지 않는 일불작다(一不作多)이고 여럿은 하나가 되지 않는 다불작일(多不作一)인 것이다.


有人言:此說非也!除此諸分,應更有牛法力用可見。牛法衆分和合生,而牛法不異衆分。何以故?見此衆分合故名爲見牛,更不見餘物爲牛。

異者破一,一者破異,不一不異破一異;若無一異,云何有不一不異?若入是諸法平等中,爾時,始如實得牛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러한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이 여러 부분을 제외하고 다시 '소'라는 법이 있어야 하고, 힘의 작용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소'라는 법은 여러 부분이 화합하여서 생긴 것이나, '소'라는 법은 여러 부분과 다르지도 않나니, 왜냐 하면 이 여러 부분이 합친 것을 보기 때문에 '소'를 본다고 하는 것이요, 그 밖의 다른 물건을 보면서 '소'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이(異)란, 하나인 일(一)을 깨뜨리고, 하나인 일(一)은 다른 이(異)를 깨뜨리며,

하나가 아닌 불일(不一), 다른 것도 아닌 불이(不異)로는 하나이면서 다른 일이(一異)를 깨뜨리며,

만약 하나인 것과 다른 것이 없는 무일이(無一異)라면, 어찌하여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것이 있겠는가?

만약 이 모든 제법의 평등함 가운데에 들어가면 그 때에서야 비로소 여실하게 소의 상(相)을 얻게 되는 것이다.


是故言:“若佛不分別諸法相、不說二諦,云何善說畜生等?

所謂於平等不動而分別諸法。”不動者,分別諸法時,不著一異相。

그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만약 부처님이 제법의 법상(法相)을 분별하지 않고, 두 가지의 진리인 이제(二諦)를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축생 등을 잘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으니,

이른바 평등에서 부동(不動)하면서 제법을 분별하는 것이라.

‘동요하지 않는, 부동(不動)’이라 함이란, 제법을 분별할 때, 하나인 일(一)이다ㆍ다른 이(異)라는 상(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須菩提白佛:“如佛於諸法等中不動,辟支佛乃至凡夫於諸法等中亦不動。何以故?諸佛平等相,乃至凡夫亦平等相。

世尊!若爾者,佛云何分別諸法是色異,色性異、受性異,乃至有爲、無爲性異?

若不分別諸法,菩薩行般若波羅蜜時,不得從一地至一地,乃至淨佛國土。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마치 부처님께서 제법 등에서 동요하지 않으시는 것과 같이, 벽지불 내지는 범부도 제법 등에서 역시 동요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은 평등한 평등상(平等相)이요, 나아가 범부 또한 평등상(平等相)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그러하다면,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제법을 분별하시면서, 이 물질이 다른 색이(色異)이고, 물질의 성품도 다른 색성이(色性異)이며, 느낌의 성품이 다른 수성이(受性異)이고, 나아가 유위와 무위의 성품에 이르기까지 다르다고 말씀하시는지요?

만약 제법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한 지위의 일지(一地)로부터 다른 일지(一地)에 이르며, 나아가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佛答:“於汝意云何?推尋色等相,爲是空不?”“世尊!實空!”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色) 등의 상(相)으로 미루어 생각하여서 찾아보는 추심(推尋)하여 보면, 그것이 곧 공(空)한 것이던가?”라고 하시자,

“세존이시여, 실로 공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空中有異相法不?”答言:“不!”何以故?是畢竟空,以無相智慧可解,是中云何有異相?

佛語須菩提:若空中無異相,空便是實,是故汝云何於空中分別諸法作是難?畢竟空中,空亦不可得,各各相亦不可得,汝云何以空、各各相爲難?

“공한 가운데에서는 다른 모양의 이상법(異相法)이 있는가?”라고 하시자,

“아닙니다”고 대답하였으니, 왜냐 하면, 이 필경공은 무상지혜(無相智慧)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니, 이 가운데서 어떻게 다른 이상(異相)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곧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만약 공한 가운데에 다른 이상(異相)이 없다면 공한 것이 바로 진실된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어찌하여 공한 가운데에서 제법을 분별하면서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인가?

필경공 가운데에서는 공함 또한 얻을 수 없고, 저마다의 각각의 상(相) 또한 얻을 수 없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그 공한 것과 저마다의 각각의 상(相)을 따지는 것인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以是因緣故,當知諸法平等中,無分別故無凡夫人;但凡夫人,非實相、不離實相,凡夫實相卽是聖人相。
是故言:“不但凡夫、不離凡夫,乃至佛亦如是。”

須菩提以平等相大利益,欲知平等定相,是故問:“爲是有爲?爲是無爲?”佛答:“非有爲、非無爲。”

何以故?若有爲,皆是虛誑作法;若無爲,無爲法無生住滅故無法,無法故不得名無爲。因有爲故有無爲,如經中說:“離有爲,無爲不可得。”如離長無短,是相待義。

이러한 인연으로 제법이 평등한 가운데에서는 분별이 없으니, 범부인도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다만 범부는 진실한 모양이 아닌 비실상(非實相)이면서도 진실한 실상(實相)을 여의지도 않는 것이니, 범부의 진실한 실상(實相)이 곧 성인의 상(相)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범부도 아니고 범부를 여의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신 것이다.

수보리 존자는 이 평등상(平等相)은 크게 이익이 있으므로, 평등에 대한 정해진 정상(定相)을 알고자 한 까닭에 여쭈기를 “이것은 유위(有爲)입니까? 무위(無爲)입니까?”라고 한 것이며,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만약 유위라면 그 모두는 거짓이어서 조작된 작법(作法)이요,

만일 무위라면 무위법은 나는 생(生)ㆍ머무르는 주(住)ㆍ없어지는 멸(滅)이 없으므로 법이 없는 무법(無法)이기 때문이다.

무법(無法)이기에 무위라는 이름을 붙일 수조차 없지만, 유위로 인하여 무위가 있게 되는 것이니,

이는 경에서 “유위를 여의고는 무위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마치 긴 것을 여의고는 짧은 것도 없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곧 상대(相待)되는 이치의 상대의(相待義)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問曰:有爲法是無常,無爲法是常,云何言“離有爲,無爲不可得”?

묻나니, 유위법은 무상한 것이요, 무위법은 항상한 것이거늘, 어떻게 “유위를 여의고는 무위를 얻을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無爲法無分別故無相;若說常相,不得言無相。破有爲法故名無爲,更無異法。如人閉在牢獄,穿牆得出;破壁是空,更無異空,空亦不從因緣生。無爲法亦如是,有爲法中先有無爲性,破有爲卽是無爲。是故說“離有爲,無爲不可得”。是有爲、無爲性皆不合不散,一相,所謂“無相”。

답하나니, 무위법은 분별이 없기 때문에 무상(無相)이지만, 만약 항상 있는 상이라 한다면 ‘무상(無相)이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며, 유위법을 깨뜨리기 때문에 무위라 하는 것이요, 다시 다른 법은 없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담장을 뚫고 나오게 되는 것과 같아서, 그 벽을 파괴하면 그것이 곧 허공이요 다시는 다른 허공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허공은 또한 인(因)과 연(緣)으로부터 생기지 않는 것이니, 무위법도 이와 같아서, 유위법 가운데에 먼저 무위의 성품(性)이 있어서 유위가 파괴되면, 곧 그것이 무위인 것이다.

때문에 말하기를 “유위를 여의고는 무위를 얻을 수 없다”고 하며, 이 유위와 무위의 성품(性)은 모두가  합하지 않는 불합(不合), 흩어지지 않는 불산(不散)이며, 일상(一相)인, 이른바 무상(無相)인 것이다.


佛以世諦故說是事,非第一義。何以故?佛自說因緣:“第一義中無身、口、意行;有爲、無爲法平等,卽是第一義。”觀是有爲、無爲法平等,亦不著一相。菩薩於第一義中不動而利益衆生;方便力故,種種因緣爲衆生說法也。

부처님께서는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 때문에 이러함을 말씀하시는 것이요, 제일의(第一義)에서가 아니니,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서는 몸(身)과 입(口)과 뜻(意)의 행(行)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며, 유위ㆍ무위법의 평등함이 바로 제일의(第一義)인 것이다.

이 유위와 무위의 법이 평등하다고 관찰하면서도, 또한 그 하나의 일상(一相)에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니, 이 보살은 이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서 동요하지 않으면서 중생들을 이롭게 하며, 방편력의 갖가지 인연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이다.


大智度論卷第九十五 終 대지도론 95권을 마침.

大智度論  論釋平等品 第八十六 第九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6. 평등품(平等品) 풀이함 4

 

卽時衆中聽者心生懈怠,是故佛說:“是一切法皆是助道因緣。”若於是法中邪行謬錯,是名不實;若直行不謬,卽是助道法。是法爲助道故,不爲果。是布施等是有爲法,道亦有爲,同相故相益。道果者,所謂諸法實無出生,一相無相,寂滅涅槃;是故於涅槃不能有益。如時雨能益草木,不益虛空。是故菩薩知是助道法及道果,從初發心來所作善法布施等,知皆是畢竟空,如夢乃至如化。

바로 그 때에 대중 속에서 듣는 이들이 마음에 게으른 생각을 내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일체법은 모두가 도를 돕는 인연인 조도인연[助道因緣)이니라”고 하셨으니,

만약 이 법에 대하여 삿되게 행하거나 그릇됨이 있으면, 이를 진실하지 않은 불실(不實)이라 하며,

만약 곧은 행으로 잘못이 없다면, 그것이 곧 도를 돕는 조도법(助道法)인 것이니,

이 법은 도를 돕기 위한 것이요 과위(果)를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보시 등은 곧 유위법(有爲法)이요, 도(道) 또한 유위이니, 동일한 동상(同相)이기 때문에 도와 과위의 도과(道果)가 서로 이익되게 하는 것이니, 이른바 제법은 실로 벗어나는 출(出)도 나는 생(生)도 없으며, 하나의 일상(一相)이요 무상(無相)이라서, 고요히 사라진 적멸열반(寂滅涅槃)인 것이며,

이러한 까닭에 열반에는 이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마치 때를 맞추어 내리는 비는 풀과 나무를 이롭게 하나, 허공을 이롭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보살은 이 도를 돕는 조도법과 도과(道果)를 알면서 처음 초발심한 때부터 착한 선법으로써 짓는 보시 등은 모두가 필경공이라서 마치 꿈과 같은 여몽(如夢)이고,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은 여화(如化)라고 아는 것이다.


問曰:若菩薩知諸法實相,何用行布施等爲?

묻나니, 만약 보살이 제법의 실상을 안다면, 보시 등을 행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答曰:佛此中說:“布施等不具足,不能成就衆生。”菩薩莊嚴身及音聲語言,得佛神通力,以種種方便力能引導衆生。是故菩薩爲成就衆生故,行檀波羅蜜,亦不取檀波羅蜜若有、若無相,亦不戲論如夢等諸法,直行乃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以故?般若波羅蜜不可取相,乃至十八不共法亦不可取相。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이 가운데에서 “보시 등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면 중생을 성취시킬 수 없느니라”고 하셨으니,

보살은 몸과 음성과 언어를 장엄히 하고, 부처님의 불신통력을 얻어서 갖가지 방편력으로써 중생들을 인도할 수 있기 때문에 보살은 중생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단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또한 단바라밀에 대하여 있고 없다는 상(相)을 취하지 않으며, 또한 꿈과 같은 등의 제법에 대하여 희론을 펴지도 않고 곧장 행하여서, 이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니,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은 상을 취할 수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이며, 나아가 18불공법 또한 상을 취할 수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이기 때문이다.


知一切不可取相已,發心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作是念:“一切無根本,不可取相,如夢乃至如化;以不可取法不能得不可取相法。但以衆生不知是法故,我爲是衆生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菩薩從初發心來所有布施,爲一切衆生,所謂布施等諸善法爲一切衆生故修,不自爲身。

일체의 것이 불가취상(不可取相)이라는 것을 안 뒤에는 발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며,

그리고는 생각하기를 ‘일체의 것은 근본이 없는 무근본(無根本)이고 상을 취할 수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이며, 마치 꿈과 같고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은 것이다.

취할 수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의 법으로써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의 법을 얻을 수 없는 것이나, 다만 중생들이 이러한 법을 모르기 때문이니, 나는 이러한 중생들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할 뿐이다’라고 하며, 

이 보살이 처음 초발심해서부터 일체의 보시를 하면서도 일체 중생들만을 위하나니,

이른바 보시 등의 모든 착한 선법은 일체의 중생들을 위하여 닦는 것이요,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此中佛自說因緣:“不爲餘事故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但爲一切衆生故。”所以者何?是菩薩遠離怜愍衆生心,但行般若波羅蜜,求諸法實相,或墮邪見中。是人未得一切智,所求一切智事,心未調柔,故墮諸邊,諸法實相難得故。是故佛說:“菩薩從初發心,怜愍衆生故,著心漸薄,不戲論畢竟空 若空有此過,若不空有彼過等。”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그 밖의 다른 일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일체의 중생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왜냐하면, 이 보살이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다만 반야바라밀만을 행한다면, 제법의 실상만을 구하면서 혹 삿된 사견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아직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하였으며, 구하고 있는 일체지에서도 마음이 아직 조복되지 못하여 유연하지 못한 때문에 모든 치우침의 변(邊)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니, 제법의 실상은 얻기가 어려운 때문이다.

이러한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처음 초발심해서부터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탐착하는 마음이 점점 얇아지는 것이며, 필경공에 대하여서도 ‘만약 공(空)하다면 이러한 허물이 있다’거나, ‘만약 공하지 않은 불공(不空)이라면 저런 허물이 있다’는 등의 희론을 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問曰:如餘處“菩薩自利益,亦利益衆生”,此中何以但說利益衆生,不說自利?自利、利人有何咎?

묻나니, 다른 곳에서는 “보살은 자기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또한 중생도 이롭게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만 “중생만을 이롭게 한다”고만 말씀하시는 것이며, “자기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고는 말씀하지 않는 것입니까?

자기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에 어떤 허물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答曰:菩薩行善道爲一切衆生,此是實義;餘處說“自利,亦利益衆生”,是爲凡夫人作是說,然後能行菩薩道。入道人有下、中、上:下者,但爲自度故行善法;中者,自爲亦爲他;上者,但爲他人故行善法。

답하나니, 보살이 착한 선도(善道)를 행하는 것은 일체 중생들을 위한 것이니, 이것이 곧 진실한 이치의 실의(實義)이며,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고 또한 중생들도 이롭게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범부인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며, 그러한 뒤에 보살도를 잘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에 들어가는 입도(入道)하는 사람에게는 하ㆍ중ㆍ상이 있으니,

하(下)의 사람은 다만 자기 스스로만을 제도하기 위하여 착한 선법을 행하는 이요,

중(中)의 사람은 자기 자신도 위하면서 다른 이들을 위하는 이이며,

상(上)의 사람은 다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착한 법을 행하는 이이다.


問曰:是事不然!下者,但自爲身;中者,但爲衆生;上者,自利亦利他人。若但利他,不能自利,云何言上?

묻나니, 그러한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하(下)의 사람은 다만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요,

중(中)의 사람은 다만 중생들만을 위하는 이며,

상(上)의 사람은 자기도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는 이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만을 이롭게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상인(上人)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答曰:不然!世閒法爾,自供養者不得其福,自害其身而不得罪。以是故,爲自身行道,名爲下人。一切世人但自利身,不能爲他。若自爲身行道,是則斷滅,自爲愛著故。

若自能捨己樂,但爲一切衆生故行善法,是名上人,與一切衆生異故。若但爲衆生故行善法,衆生未成就,自利則爲具足。若自利益,又爲衆生,是爲雜行。

답하나니, 그렇지 않은 것이다. 세간의 법이 그러한 것이니, 자기 자신에게만 공양하는 이도 그 복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해치는 이도 죄를 얻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도를 행하는 이를 하인(下人)이라 하나니,

일체 세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을 이롭게 할 뿐, 다른 이들은 위하지 못하나니, 만약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도를 행한다면 이것은 곧 단멸(斷滅)이니, 자신만을 애착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 자신의 쾌락을 버리고 다만 일체 중생들만을 위하여 착한 선법을 행한다면, 이를 이름하여 상인(上人)이라 하나니, 일체 중생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며, 만약 중생들만을 위하여 착한 선법을 행한다면, 그 중생들이 아직 성취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자기의 이익은 곧 두루 갖추게 되나,

만약 자신을 이롭게 하고 또 중생들을 위한 것이면 그것은 잡다한 잡행(雜行)이 되는 것이다.


求佛道者有三種:一者、但愛念佛故,自爲己身成佛;二者、爲己身亦爲衆生;三者、但爲衆生 是人淸淨行道,破我顚倒故。是菩薩行般若波羅蜜時,無衆生乃至無知者、見者,安住是中,拔出衆生著甘露性中。甘露性者,所謂一切助道法。何以故?行是法得至涅槃,涅槃名甘露。住是甘露性中,我等妄想不復生。是菩薩自得無所著,亦令衆生得無所著,是名第一利益衆生。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는 이에게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다만 부처님만을 좋아하고 생각하여 자기 몸이 부처님이 되기만을 구하는 이요,

둘째는 자기의 몸도 위하면서 또한 중생들을 위하는 이이며,

셋째는 다만 중생들만을 위하는 이이니, 이러한 사람은 청정하게 도를 행하면서 나(我)라는 뒤바뀜의 아전도(我顚倒)를 깨뜨리기 때문이니, 이러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중생도 없는 무중생(無衆生)이고 나아가 아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도 없으며, 이러한 가운데에 편히 머무르면서 중생을 구출하여 감로의 성품인 감로성(甘露性)에 놓아 주는 것이다.

감로의 성품인 감로성(甘露性)이라 함은, 이른바 일체의 도를 돕는 조도법(助道法)이니,

왜냐 하면, 이러한 법을 행하여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므로, 열반을 감로라 하는 것이며,

이 감로성(甘露性)에 머무르면 나(我) 등의 망상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보살은 자기 자신이 집착함이 없음을 얻었으며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집착함이 없게 하나니, 이를 이름하여 중생을 제일 이롭게 하는 제일이익중생(第一利益衆生)이라 하는 것이다.


問曰:上說“但利益衆生故行道”,今何以故“自得無所著,令衆生得無所著”?

묻나니, 앞에서는 다만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도를 행할 뿐이다”고 말씀하셨거늘,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자기 자신도 집착함이 없고 중생으로 하여금 집착함이 없게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不得已故!若自無智慧,何能利人?以是故,先自得無所著,然後教人。若是功德可得與他如財物者,諸佛、大菩薩所有功德皆應與他,乃至調達、怨賊皆可與之,然後更自修集功德;但是事不然,不可我作而他得。是亦世俗說,非第一義。何以故?第一義中無衆生、無一無異等分別諸法相,此中說亦無所著處。

답하나니, 부득이 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에게 지혜가 없으면 어떻게 다른 이를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먼저 자기 자신이 집착함이 없음을 얻고나서, 그 뒤에 남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공덕을 재물과 같이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있는 바의 모든 공덕을 모두 다 주어야 하고, 나아가 조달(調達, 제바달다提婆達多, Devadatta)같은 원적에게도 주어야 하며,

그러한 뒤에 다시 스스로가 공덕을 닦고 쌓아 가겠지만, 그렇지가 못한 것이며, 자신은 하지 못하면서 다른 이만 할 수 있도록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도 세속의 설명일 뿐 제일의(第一義)는 아닌 것이니, 왜냐 하면,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서는 중생도 없는 무중생(無衆生)이고, 하나도 없는 무일(無一)이고 다른 것도 없는 무이(無異)이며, 동등하게 제법의 상을 분별하기 때문이니,

이러함 가운데에서 “집착할 곳이 없는 무소착처(無所著處)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復次,如先說“不可說相是第一義”,此中可說故是世俗。

爾時,須菩提問:“佛於道場所得法,爲用世諦故得?爲用第一義諦?”須菩提意:若以世諦故得,卽是虛妄不實;若以第一義故得,第一義中無得、無得者,不可說、不可受。

또한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상(相)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설상(不可說相)이 곧 제일의(第一義)이지만, 이 가운데에서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가설(可說)이기 때문에 이것은 세속의 이치인 것이다.

그 때에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부처님께서 도량(道場)에서 얻으시는 법은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로써 얻는 것입니까? 제일의(第一義)로써 얻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는데,

수보리 존자는 ‘만약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로써 얻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한 것이요, 만약 제일의로써 얻는 것이라면 제일의에서는 얻음도 없는 무득(無得)이고 얻는 이도 없는 무득자(無得者)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설(不可說)이고, 받을 수도 없는 불가수(不可受)이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佛答:以世俗語言故說“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中無得者、無有得法。何以故?若是人得是法,卽是二法;二法中,無道、無果。二法者,是菩薩、是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如是二法,皆是世諦故有。

若二者,佛法何得不虛妄!若有人不得第一義,但以二法分別諸法,是則虛妄;諸佛、大菩薩得第一義故,爲度衆生令得第一義,雖分別諸法,非是虛妄。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세속의 언어로써 ‘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말하는 것일 뿐, 이 가운데에서는 얻는 이도 없는 무득자(無得者)이고 얻을 법도 없는 무유득법(無有得法)이니라”고 하셨으니,

왜냐 하면, 만약 이러한 사람(人)과 이러한 법(法)을 얻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두 가지의 법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이법(二法)에는 도가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위도 없는 무과(無果)이니, 이법(二法)이란 곧 보살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모두가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만약 두 가지라면 부처님의 불법이 어떻게 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으뜸가는 이치인 제일의(第一義)를 얻지 못하고 다만 두 가지 법으로써 제법을 분별할 뿐이라면 이것이 곧 허망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과 큰 대보살은 으뜸가는 이치인 제일의(第一義)를 얻었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으뜸가는 이치인 제일의(第一義)를 얻게 하면서 비록 제법을 분별할지라도, 그것은 허망한 것이 아닌 것이다.


須菩提復問:“世尊!若用二法無道、無果,今以不二法故有道、有果耶?”

佛答:“二法無道、無果,不二法亦無道、無果。”

수보리 존자가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두 가지의 이법(二法)으로써 도가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위도 없는 무과(無果)라고 한다면, 이제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으로써 도가 있는 유도(有道)이고 과위가 있는 유과(有果)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두 가지의 이법(二法)에서도 도가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위도 없는 무과(無果)이며,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에서도 도가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위도 없는 무과(無果)이니라”고 하셨다.


問曰:餘處說“二法是凡夫法,不二法是賢聖法”,如『毘摩羅詰經』不二入法門中說。

묻나니,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두 가지의 이법(二法)은 곧 범부의 법이요,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은 성현의 법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마치 '비마라힐경(毘摩羅詰經, 유마경)'의 불이입법문(不二入法門)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答曰:不二入是眞實聖法。或有新發意菩薩未得諸法實相,聞是不二法,取相生著。是故或稱讚不二法,或時毀呰。又佛遮二邊、說中道,所謂非二、非不二。二法名各各別相;不二名一空相。以是一空相破各各別異相;破已,事訖,還捨不二相 是卽是道、是果。何以故?諸賢聖雖讚歎無二法,爲不著故。用是法得道、得果,用是法無道、無果 卽是戲論;無戲論是平等法。

답하나니, 불이입(不二入)은 곧 진실한 성인의 법이니, 혹 새로 뜻을 낸 초발의 보살이 아직 제법의 실상을 얻지 못하였을 때 이 불이법을 들으면 상을 취하면서 집착을 내기도 하기 때문에, 혹 불이법을 칭찬하기도 하고 혹 헐뜯기도 하는 것이며, 

또 부처님께서는 이 두 가지의 치우친 견해를 막으시면서 중도(中道)를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둘이 아닌 비이(非二)이고 둘이 아닌 것도 아닌 비불이(非不二)이다”고 하신 것이다.

두 가지 법의 이법(二法)이란 각각의 다른 모양의 별상(別相)을 말하는 것이며,

둘이 아닌 불이(不二)란 바로 하나의 공한 모양의 일공상(一空相)을 말하는 것이니,

이 하나의 일공상(一空相)으로써 저마다 다른 각각의 상을 깨뜨리는 것이며, 깨뜨려서 그 일이 끝나면 다시 둘이 아닌 모양의 불이상(不二相 )도 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곧 도(道)요 곧 과위(果)인 것이다.

왜냐 하면 모든 성현은 비록 둘이 없는 무이법(無二法)을 찬탄할지라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 법으로써 도를 얻는 득도(得道)하고 과위를 얻는 득과(得果)한다’거나, ‘이 법으로써는 도가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위도 없는 무과(無果)이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희론이니, 희론이 없는 것이 곧 평등한 평등법(平等法)인 것이다.

 

須菩提白佛言:“若諸法無所有性,何等是平等?”佛答:“若離有性、無性,假名爲平等。若菩薩不說一切法有 不說一切法性、不說一切法相等顯示,亦不說無法 無法性、無法相等顯示,亦不說離是二邊更有平等相,一切處不取平等相,亦不言無是平等,不妨行諸善法,是名諸法平等。”復次,諸法平等者,所謂出過一切法。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약 제법이 있는 바가 없는 성품의 무소유성(無所有性)이라면, 어떠한 것이 평등한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성품이 있는 유성(有性)이거나,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을 여읜다면, 이를 임시로 가명하여 평등(平等)이라 한다”라고 하셨으며, 

만약 보살이 일체법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고, 일체법의 법성을 말하지도 않으며, 일체법의 상(相) 등도 말하지 않으나, 드러내어 보이는 현시(顯示)하며,

또한 법이 없는 무법(無法)과 무법성(無法性)과 무법상(無法相) 등도 말하지 않으나, 드러내 보이는 현시(顯示)하며, 

역시 이러한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고서 다시 평등상(平等相)이 있다고도 말하지 않으니,

일체의 경우에서 평등상을 취하지 않고, 또한 이 평등이 없다고도 말하지 않아서, 모든 착한 선법을 행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제법평등(諸法平等)’이라 하는 것이며, 

다시 ‘제법평등(諸法平等)’이란 이른바 일체법에서 초월하는 것이다.

大智度論  論釋平等品 第八十六 第九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6. 평등품(平等品) 풀이함 3

 

諸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分別諸法,當知是地獄、是餓鬼、是畜生、是人、是天是四天王天乃至是他化自在天,是梵天乃至是非有想非無想處天;是四念處乃至八聖道分;是內空乃至是無法有法空;是佛十力乃至是十八不共法不?”

모든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서 제법을 분별하지 않으셨다면 ‘이것은 지옥이다, 이것은 아귀이다, 이것은 축생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하늘이다, 이것은 4천왕천(天王天)이며 나아가 이것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다,

이것은 범천(梵天)이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천(非有想非無想處天)이다, 이것은 4념처이며 나아가 8성도분이다,

이것은 내공(內空)이며 나아가 이것은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10력이며 나아가 이것은 18불공법이다’라고 알수 있는 것인가?”


須菩提言:“不知也!世尊!”

“以是故,須菩提!當知佛有大恩力,於諸法等中不動,而分別諸法。”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렸다. “알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야, 부처님은 큰 은혜의 힘이 있기에 제법의 평등한 가운데에서 부동(不動)하면서 제법을 분별하시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如佛於諸法等中不動,凡夫人亦於諸法平等中不動,須陁洹乃至辟支佛亦於諸法平等中不動。

世尊!若諸法等相、卽是凡夫人相、卽是須陁洹相,乃至諸佛卽是平等相。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마치 부처님께서 제법의 평등한 가운데에서 부동(不動)하신 것과 같이 범부인 또한 제법이 평등한 가운데에서 부동하며, 수다원 내지는 벽지불도 또한 제법의 평등 가운데에서 부동인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이 평등한 평등상(法等相)이라면, 그것이 곧 범부인의 상(相)이요 곧 그것이 수다원의 상(相)이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이니, 그것이 곧 평등상(法等相)인 것입니다.


世尊!今諸法各各相,所謂色相異,受、想、行、識相異;眼相異,耳、鼻、舌、身、意相異;地相異,水、火、風、空、識相異;欲相異、瞋、癡相異,邪見相異;禪相異,無量心相異,無色定相異;四念處相異,乃至八聖道分相異;檀波羅蜜相異,乃至般若波羅蜜相異;三解脫門相異;十八空相異;佛十力相異,四無所畏相異,四無㝵智相異,十八不共法相異;有爲法性異,無爲法性異;是凡夫人相異,乃至佛相異 諸法各各相異,云何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諸法異相中不作分別?

세존이시여, 제법은 저마다의 상(相)이 있으니, 이른바 물질의 색상(色相)이 다르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상(相)이 다르며,

눈(眼)의 상(相)이 다르고 이비설신의(耳鼻舌身意)의 상(相)이 다르며,

땅(地)의 상(相)이 다르고 물(水)ㆍ불(火)ㆍ바람(風)ㆍ허공(空)ㆍ식(識)의 상(相)이 다르며,

탐욕의 상(相)이 다르고, 성내는 진상(瞋相)과 어리석은 치상(癡相)이 다르며, 삿된 사견의 상이 다르고, 선(禪)의 상이 다르며, 무량심(無量心)의 상이 다르고, 무색정(無色定)의 상이 다르며, 4념처의 상이 다르고 나아가 8성도분의 상이 다르며,

단바라밀의 상이 다르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의 상이 다르며, 삼해탈문의 상이 다르고 18공(空)의 상이 다르며, 부처님의 10력의 상이 다르고, 사무소외의 상이 다르며, 사무애지의 상이 다르고 18불공법의 상이 다르며,

유위법성이 다르고 무위법성이 다르며, 이 범부인의 상이 다르고 나아가 부처님의 상도 다르며,

이와 같이 제법은 저마다 각각의 상(相)이 다르거늘,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어떻게 제법의 이상(異相) 가운데에서 분별하지 않을 수 있는지요?


若不作分別,不能行般若波羅蜜;若不行般若波羅蜜,不能從一地至一地;若不從一地至一地;不能入菩薩位;不能入菩薩位故,不能過聲聞、辟支佛地;不能過聲聞、辟支佛地故,不能具足神通波羅蜜;不具足神通波羅蜜故,不能具足檀波羅蜜,乃至不能具足般若波羅蜜,從一佛國至一佛國供養諸佛,於諸佛所種善根,用是善根能成就衆生、淨佛國土。”

만약 분별을 하지 않는다면 반야바라밀을 행할 수도 없으며, 만약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못한다면 하나의 지위인 일지(一地)로부터 다른 일지(一地)에 이를 수도 없을 것이며,

만약 일지(一地)로부터 다른 일지(一地)에 이르지 못한다면 보살위(菩薩位)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며,

보살위에 들지 못한다면, 그로 인하여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초월할 수 없을 것이며,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초월할 수 없기 때문에 신통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도 없을 것입니다.

신통바라밀을 두루 갖추지 못한 까닭으로 단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도 없을 것이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어 한 부처님의 나라인 일불국(一佛國)으로부터 다른  일불국(一佛國)에 이르러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모든 부처님 처소에 선근을 심으며, 이 선근으로써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의 불국토를 깨끗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佛告須菩提:“如汝所問:‘是諸法相亦是凡夫人,亦是須陁洹乃至佛。世尊!是諸法各各相,所謂色相異,乃至有爲、無爲法相異,云何菩薩摩訶薩觀一相不作分別?’

須菩提!於汝意云何?是色相空不?乃至諸佛相空不?”“世尊!實空。”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묻기를 ‘이 제법의 법상(法相)에는 역시 범부인이 있고 또한 수다원 내지는 부처님ㆍ세존이 있으며, 이 제법에는 저마다의 각각의 상(相)으로서 이른바 물질의 색상(色相)이 다르고 나아가 유위와 무위의 법까지도 그 상 모두가 다르거늘,

어찌하여 보살마하살은 하나의 일상(一相)으로 관찰하며 분별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물질의 색상(色相)은 공한 것이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의 상도 공한 것인가?”

“세존이시여, 실로 공한 실공(實空)입니다.”


“須菩提!空中各各相法可得不?所謂色相乃至諸佛相。”須菩提言:“不可得!”

佛言:“以是因緣故,當知諸法平等中,非凡夫人、亦不離凡夫人,乃至非佛、亦不離佛。”

“수보리야, 공한 가운데에서 각각의 상법(相法), 이른바 물질의 색상(色相)에서 모든 부처님의 상까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렸다. “얻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러한 인연으로 제법이 평등한 가운데에서는 범부인도 아니고 범부인을 여의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부처님도 아니고 또한 부처님을 여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是平等,爲是有爲法?爲是無爲法?

佛言:“非有爲法,非無爲法。何以故?離有爲法,無爲法不可得;離無爲法,有爲法不可得。

須菩提!是有爲法、無爲法,是二法不合、不散,無色、無形、無對,一相,所謂無相。佛亦以世諦故說,非以第一義。何以故?第一義中無身行、無口行、無意行,亦不離身、口、意行得第一義。是諸有爲法、無爲法平等相,卽是第一義。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第一義中不動,而行菩薩事,饒益衆生。”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평등(平等)은 유위의 법입니까? 아니면, 무위의 법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유위의 법도 아니고 무위의 법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유위의 법을 여의고는 무위의 법은 얻을 수 없으며,

무위의 법을 여의고서는 유의의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 이 두 가지의 이법(二法)은 합하지 않는 불합(不合), 흩어지지 않는 불산(不散)이며, 무색(無色), 무형(無形)이며, 대할 수도 없는 무대(無對)의 일상(一相)인, 이른바 무상(無相)이니라.

또한 부처님께서는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로써 말씀하신 것이요, 제일의(第一義)로써 말씀하신 것이 아니니라.

왜냐 하면,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는 몸의 신행(身行)도 없고, 입의 구행(口行)도 없고, 뜻의 의행(意行)도 없으며,

또한 몸과 입과 뜻의 신구의(身口意)의 행(行)을 여의지 않고 으뜸가는 제일의(第一義)를 얻기 때문이니라.

이 모든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의 평등한 상(相)이 곧 제일의(第一義)이니,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서 동요하지 않으면서 보살로서의 일을 행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하느니라”


▶論. 釋曰:須菩提思惟:“佛答實見者、妄見者無異,垢淨見無故。”思惟已,問佛:“見實者無垢無淨,見不實者亦不垢不淨,一切法性無所有故;無所有中無垢無淨,所有中亦無垢無淨。”

▷논. 해석하겠다.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서 진실하게 보는 이와 허망하게 보는 이에 차이가 없다고 대답하신 것은 더러운 구(垢)ㆍ깨끗한 정(淨)이 없다고 보신 까닭이다’고

수보리 존자가 사유한 뒤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진실하다고 보는 견실자(見實者)는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무구무정(無垢無淨)이며, 진실하지 않다고 보는 견부실자(見不實者) 또한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무구무정(無垢無淨)이니, 일체법의 성(性)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 가운데에서는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는 무구무정(無垢無淨)이며,

있다는 것의 소유(所有) 가운데에서도 또한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無所有,斷滅見故,不應有垢淨!所有無常見故,不應有垢淨!所有若決定是有,則不從因緣生,不從因緣生故常,常故無垢無淨。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는 아주 없다는 단멸(斷滅)이라고 보기 때문에 더럽고 깨끗한 것이 있지 않아야 하고,

있다는 것의 소유(所有) 가운데에서는 항상 있다는 상(常)이라고 보기 때문에 더럽고 깨끗한 것이 있지 않아야 하나니,

만약 있다는 소유(所有)에는 결정코 있는 것이라면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않은 것이요,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있는 것이며, 항상 있기 때문에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는 것이다.


須菩提白佛:“實見者、不實見者,是義云何?”佛答:“垢、淨雖無別相可說,諸法平等故是名爲淨。若分別說垢淨相,是事不然!一切法平等故,我說名淨。”

佛告須菩提:“諸法實相,如、法性、法住、法位、實際是平等;菩薩入是平等中,心無憎愛。是法,有佛、無佛常住。”作法皆是虛誑,是故說:“無作法,有佛、無佛常住。”聽者心卽取相,著是諸法平等;如人以指指月,不知者但觀其指而不視月。 是故佛說:“諸法平等相亦如是,皆是世諦;世諦非實,但爲成辦事故說。”譬如以金貿草,不知者言:“何以以貴易賤?”答曰:“我事須用故。”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진실하다고 보는 견실자(見實者)와 진실하지 않다고 보는 견부실자(見不實者)의 뜻은 어떠한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은 대답하시기를 “ 더러운 구(垢)와 깨끗한 정(淨)이 비록 상에 다름이 없다고 할지라도 제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이를 깨끗한 정(淨)이라고 하느니라.

만약 분별하여서, 더러운 구(垢)와 깨끗한 정(淨)의 상을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이니, 일체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나는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제법의 실상인 여(如)ㆍ법성(法性)ㆍ법주(法住)ㆍ법위(法位)ㆍ실제(實際)는 곧 평등한 것이니, 보살은 이 평등한 가운데에 들어가서 마음에 미워하고 사랑하는 증애(憎愛)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셨으며, 

이 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항상 머물러 있는 상주(常住)하는 것이며,

조작하는 작법(作法)은 모두가 거짓이니, 이 때문에 “조작이 없는 무작법(無作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항상 머물러 상주(常住)하는 것이다”고 하셨으니,

이를 들은 이들이 곧 마음으로 상을 취하면서 이 제법은 평등하다고 집착하나니,

마치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알지 못하는 이는 다만 그 손가락만을 보면서 달은 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법의 평등상(法等相)도 이와 같아서 모두가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이니, 세제(世諦)는 진실이 아니요 다만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짐짓 말로 하였을 뿐인 것이니라”고 하셨으니,

비유하자면, 마치 금을 풀과 바꾸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것을 모르는 이는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귀중한 것을 천한 것과 바꾸느냐”고 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나에게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是平等義不可說,一切名字語言音聲悉斷。何以故?諸法平等是無戲論寂滅相;但覺觀散心中有語言故有所說。

이 평등한 이치의 평등의(平等義)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일체의 이름이나 언어나 음성 등이 모두 끊어진 것이니,

왜냐 하면, 제법의 평등함은 바로 희론이 없는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으로, 다만 거친 생각의 각(覺)이거나 세밀한 생각의 관(觀)으로 산란한 마음 가운데에서 언어가 있기 때문에 말하는 바가 있을 뿐인 것이다.


須菩提從佛聞諸法平等相,解其旨趣,爲諸新發意菩薩故問:“世尊!若一切法空、不可說、如夢乃至如化,云何菩薩於無根本法中而生心作是願‘我當具足檀波羅蜜,乃至爲衆生如應說法’?”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으로부터 제법의 평등상(平等相)을 듣고 그 뜻을 다 이해하였지만, 새로 뜻을 낸 모든 초발의 보살들을 위하여 일부러 여쭌 것이니, 곧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이 공하여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설(不可說)이고, 마치 꿈과 같은 여몽(如夢)이고,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은 여화(如化)와 같다면,

보살이 어떻게 근본이 없는 무근본법(無根本法) 가운데에서 마음을 내어 서원하기를 ‘나는 마땅히 단바라밀을 완전히 갖출 것이며, 나아가 중생들을 위하여 그들에 맞추어 법을 설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佛以反問答須菩提:“布施等乃至陁羅尼門說法等,此諸法非如幻、如夢等耶?”須菩提言:“實爾!”是諸法雖有利益,不出於如夢法。

부처님께서 반문(反問)으로써 대답하시기를 “수보리야, 보시 등에서부터 다라니문(陀羅尼門)의 설법 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법은 마치 환과 같은 여환(如幻)이고, 변화한  것과 같은 여화(如化)와 같은 것이 아니던가?”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실로 그렇습니다. 이 모든 제법은 비록 이익은 있다 할지라도 꿈과 같은 여몽법(如夢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須菩提復問:“世尊!夢等法皆虛妄不實,菩薩爲求實法故,行般若波羅蜜得佛道,云何行不實法?不實法不能行檀波羅蜜等!”佛可須菩提言:“如是!如是!布施等法皆是思惟、憶想分別、作起生法,不得住如是法中成一切種智。”

수보리 존자가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꿈 등의 법은 모두가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하지만, 보살은 진실한 실법(實法)을 구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부처님의 불도를 얻거늘,

어떻게 하여 진실하지 못한 불실법(不實法)을 행하는 것인지요? 진실하지 못한 불실법(不實法)으로는 단바라밀 등을 행할 수 없습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의 말을 인가하시면서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보시 등의 법은 모두 사유(思惟)와 기억의 억상(憶想)과 분별(分別)에 의하여 짓고 일으켜서 내는 법이니, 이와 같은 법에 머무르게 되면 일체종지를 이룰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大智度論  論釋平等品 第八十六 第九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6. 평등품(平等品) 풀이함 2

 

佛言須菩提:“於汝意云何?汝所說諸法如夢、如嚮、如焰、如影、如幻、如化不?”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제법은 마치 꿈과 같은 여몽(如夢)이고, 메아리와 같은 여향(如響)이며, 아지랑이와 같은 여염(如焰)이고, 그림자와 같은 여영(如影)이며, 환과 같은 여환(如幻)이고, 변화한  것과 같은 여화(如化)와 같은 것인가?”


須菩提言:“爾!世尊!世尊!若一切法如夢乃至如化,菩薩摩訶薩云何行般若波羅蜜?

世尊!是夢乃至如化,虛妄不實。世尊!不應用不實虛妄法能具足檀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이 마치 꿈과 같은 여몽(如夢)이며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은 여화(如化)와 같은 것이라면,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이러한   내지는 여화(如化)와 같은 것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진실하지 않고 허망한 불실허망법(不實虛妄法)으로써는 단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를 완전히 갖출  없습니다.”


佛告須菩提:“如是!如是!不實虛妄法不能具足檀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行是不實虛妄法,不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須菩提!是一切法皆是憶想思惟作法,用是思惟憶想作法,不能得一切種智。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진실하지 않고 허망한 불실허망법(不實虛妄法)으로는 단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를 완전히 갖출  없으며, 

 진실하지 않고 허망한 불실허망법(不實虛妄法) 행할지라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일체법은 모두 기억과 생각의 억상사유(憶想思惟)로 짓는 작법(作法)이니,  

이러한 기억과 생각으로 짓는 억상사유작법(憶想思惟作法)으로는 일체종지를 얻을  없느니라.


須菩提!是一切法能助道法,不能益其果,所謂是諸法無生、無出、無相。

菩薩從初發意已來,所作善業,若檀波羅蜜乃至一切種智。何以故,知諸法皆如夢乃至如化。

如是等法不具足檀波羅蜜乃至一切種智,不能得成就衆生、淨佛國土、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야,  일체법으로써 도를 돕는 조도법(助道法)은  과(果)를 유익하게  수도 없나니, 

이른바 법은 무생(無生)이고, 벗어남도 없는 무출(無出)이며, 무상(無相)이니라.

보살이 처음 뜻을 일으킨 초발의에서부터 짓는 착한업(善業)은 단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이니,

왜냐 하면, 모두는 꿈과 같고 나아가 변화와 같음을 알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등의 법으로는 단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를 완전히 갖추지 못하며,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도 못하는 것이니라.


是菩薩摩訶薩所作善業,檀波羅蜜乃至一切種智,知如夢乃至如化;亦知一切衆生如夢中行,乃至知如化中行。

是菩薩摩訶薩不取般若波羅蜜是有法,用是不取故,得一切種智,知是諸法如夢無所取,乃至諸法如化無所取。

何以故?般若波羅蜜是不可取相,禪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是不可取相。

 보살마하살은 지은  착한업(善業)으로써, 단바라밀 내지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는 마치 꿈과 같은 여몽(如夢)이고 나 변화한  것과 같은 여화(如化)라는 것을 알며, 

또한 일체 중생들도 꿈과 같은 여몽(如夢) 가운데에서 행하고 있으며,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은 여화(如化) 가운데에서 행하고 있는 것을 아나니,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취하지 않는 불취(不取) 반야바라밀이니라. 

불취(不取)를 이용하기 때문에 일체종지를 얻나니, 법은 꿈과 같아서 취할 것이 없으며, 나아가법은 변화한 것과 같아서 취할 것이 없음을 아느니라.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이  취할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이기 때문이요 

선(禪)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 역시도 곧 취할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이기 때문이니라.


是菩薩摩訶薩知一切法是不可取相已,發心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何以故?一切法不可取相,無根本定實,如夢乃至如化;用不可取相法不能得不可取相法。

但以衆生不知不見如是諸法相,是菩薩摩訶薩爲是衆生故,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菩薩從初發意已來所有布施,爲一切衆生故;乃至有所修智慧,皆爲一切衆生,不爲己身。

菩薩摩訶薩不爲餘事故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但爲一切衆生故。

 보살마하살이 일체법을 취할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발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나니,

왜냐 하면, 일체법은 취할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이요 

근본과 정해진 진실이 없는 무근본정실(無根本定實)이라서 마치 꿈과 같고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으니, 

취할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으로써 취할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 법(法)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니라. 

다만 중생들이 이와 같은법의 상(相)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할 뿐이므로,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중생들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니라.

 보살이 처음 뜻을 낸 초발의에서부터 보시하는  모두가 일체 중생들을 위한 때문이요, 

나아가 닦고 익히는 모든 지혜도 모두가 일체 중생들을 위한 것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니라. 

보살마하살은  밖의 다른 일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 아닌, 다만 일체 중생들을 위한 것일 뿐이니라.


是菩薩行般若波羅蜜時,見衆生無衆生,但衆生相中住;乃至無知者、無見者,知見相中住,令衆生遠離顚倒;遠離已,置甘露性中;住是中者,無有妄相,所謂衆生相乃至知者、見者相。是時,菩薩動心、念心、戲論心皆捨,常行不動心、不念心、不戲論心。

須菩提!以是方便力故,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自無所著,亦教一切衆生令得無所著。世諦故,非第一義。”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중생을 보아도 중생이 없는 무중생(無衆生)이므로 다만 중생이라는 상(相)에만 머무르나니, 나아가 아는 지자(知者)도 없고 보는 견자(見者)도 없으므로 알고 보는 지견상(知見相)에만 머무르면서 중생으로 하여금 뒤바뀜의 전도(顚倒)를 멀리 여의게 하며, 멀리 여읜 뒤에는 감로의 성품인 감로성(甘露性) 가운데에 있게 하느니라. 

감로성(甘露性) 가운데에 머무른다면, 허망한 망상(妄相), 소위 중생상(衆生相) 내지는 아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의 상(相) 없으며, 

이 때에 보살은 동요하는 마음의 동심(動心)과 생각하는 마음의 염심(念心)과 희론하는 마음의 희론심(戱論心) 모두를 버리고 동요하지 않는 부동심(不動心) 생각하지 않는 마음의 불염심(不念心)과 희론하지 않는 마음의 불희론심(不戲論心)을 항상 행하니느라.

수보리야, 이러한 방편력으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자기 스스로 집착함 없이 일체 중생들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집착함이 없게 하나니, 

이것은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이기 때문이요 으뜸가는 이치의 제일의(第一義)인 것은 아니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世尊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時,得諸佛法,以世諦故得?以第一義中得?”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여기에서 세존이란 여래 10호로서의 불ㆍ세존을 말하는 것임)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실에는 모든 부처님의법을 얻되,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 때문에 얻으신 것인지요?

아니면 으뜸가는 이치의 제일의(第一義) 때문에 얻으신 것인지요?”


佛言:“以世諦故說佛得是法,是法中無有法可得、是人得是法。

何以故?是人得是法,是爲大有所得;用二法,無道無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  때문에 ‘부처님은  법을 얻는다’고 하느니라. 

  가운데에는 ‘이 사람이  법을 얻는다’는 어떠한 법도 없나니, 왜냐 하면,  사람이  법을 얻는다면 이것은  크게 얻을 것이 있다는 대유소득(大有所得)이 되는 것이니, 

  가지의 이법(二法)으로써는 도도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도 없는 무과(無果)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行二法無道無果,行不二法有道有果不?”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가지의 이법(二法) 행하여서 도도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도 없는 무과(無果) 이라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을 행한다면 도도 있는 유도(有道)이고 과위도 있는 유과(有果)인지요?”


佛言:“行二法無道無果,行不二法亦無道無果;若無二法、無不二法,卽是道、卽是果。

何以故?用如是法得道、得果,用是法不得道、不得果是爲戲論。諸平等法中,無有戲論;無戲論相,是諸法平等。”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가지의 이법(二法) 행하여 도도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도 없는 무과(無果)이라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 행하여도 역시 도도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도 없는 무과(無果)이니라. 

만약 두 가지의 이법(二法)도 없고,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 없다면, 그대로가 도인 즉시도(卽是道)요, 그대로가 과위인 즉시과(卽是果)이니라. 

왜냐 하면, 이와 같은 법으로써 도를 얻고 과위를 얻는 것이니,

이러한 법으로써 도를 얻지 못하고 과위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희론이 되기 때문이니라. 

모든 평등법 가운데에서는 희론도 없고 희론의 상(相) 없나니, 이것이 법의 평등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諸法無所有性,是中何等是平等?”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법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성(無所有性)이거늘,  가운데서 어떠한 것이 평등인지요?”


佛言:“若無有法、無有無法,亦不說諸法平等相;

除平等,更無餘法離一切法平等相。平等者,若凡夫、若聖人,不能行、不能到。”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법이 있지 않은 것이 무법(無有法)이고, 법이 없음도 없는 무유무법(無有無法)이라면, 법의 평등한 평등상(平等相) 역시도 말하지도 못하느니라. 

평등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법도 없는 것으로, 일체법을 여의는 것이 평등한 평등상(平等相)으로,

평등(平等)이란 범부나 성인이거나 간에 행할 수도 없고 이를 수도 없는 것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乃至佛亦不能行、亦不能到?”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나아가 부처님까지도 역시 행할 수도 없고 이를 수도 없는지요?”


佛言:“是諸法平等,一切聖人皆不能行、不能到,所謂諸須陁洹、斯陁含、阿那含、阿羅漢、辟支佛、諸菩薩摩訶薩及諸佛。”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법의 평등(平等)은 일체 성인, 이른바 모든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과 모든 보살마하살과 모든 부처님까지도 모두 행할 수도 없고 이를 수도 없는 것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佛者一切諸法中行力自在,云何說佛亦不能行、不能到?”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법 가운데서 행하는 행력(行力) 자재하거늘, 어떻게 부처님도 행하실  없고 이르실  없다고 하시는지요?”


佛告須菩提:“若諸法平等與佛有異,應當如是問。

須菩提!今諸凡夫人平等,諸須陁洹、斯陁含、阿那含、阿羅漢、辟支佛、諸菩薩摩訶薩、諸佛及聖法皆平等,是一平等無二,所謂是凡夫人、是須陁洹乃至佛,是一切法平等中皆不可得。”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제법의 평등(平等)이 부처님과 다름이 있다면 마땅히 그와 같이 물어야 할 것이지만, 

수보리야, 모든 범부인들도 평등하며, 모든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과 모든 보살마하살과 부처님과 성인의 법도 모두 평등한 것이니,

이것은 같이 평등한 일평등(一平等)이라서 둘이 없는 것이니, 이른바 ‘이것은 범부인이다, 이것은 수다원 내지는 부처님이다’ 하는 것은 이렇게 제법이 평등(平等)한 가운데에서는 모두 얻을  없는 것이니라.”

 

菩提白佛言:“世尊!若諸法平等中皆不可得 是凡夫人乃至是佛。世尊!凡夫人、須陁洹乃至佛爲無有分別?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의 평등(平等) 가운데에서는 모두 얻을  없는 것이라면 ‘이것은 범부인이다, 나아가  분은 불ㆍ세존이시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범부와 수다원에서 부처님에 이르기까지의 분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佛告須菩提:“如是!如是!諸法平等中,無有分別是凡夫人、是須陁洹乃至是佛。”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 하느니라.법이 평등(平等)한 가운데에서는 ‘이 사람은 범부인이고,  사람은 수다원이며, 나아가  분은 불ㆍ세존이다’라는 분별이 없느니라.”


“世尊!若無分別諸凡夫人、須陁洹乃至佛,云何分別有三寶現於世間 佛寶、法寶、僧寶?”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범부인과 수다원 내지는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분별이 없는 것이라면,

어찌 분별하여서 3보(寶)가 있는 것인지요? 

현재 세간에는 불보(佛寶)와 법보(法寶)와 승보(僧寶)가 있습니다.”


佛言:“於意云何?佛寶、法寶、僧寶與諸法等異不?”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불보ㆍ법보ㆍ승보가법의 평등(平等)과 차이가 있는 것인가?”

 

須菩提白佛言:“如我從佛所聞義,佛寶、法寶、僧寶與諸法等無異。世尊!是佛寶、法寶、僧寶卽是平等;是法皆不合、不散,無色、無形、無對,一相,所謂無相。

佛有是力,能分別無相諸法處所:是凡夫人、是須陁洹、是斯陁含、是阿那含、是阿羅漢、是辟支佛、是菩薩摩訶薩、是諸佛。”

佛告須菩提:“如是!如是!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이치(義)를 따른다면 불보ㆍ법보ㆍ승보는 제법이 평등(平等)한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불보와 법보와 승보가 곧 평등한 것이니, 이 법 모두는 합하지 않는 불합(不合), 흩어지지 않는 불산(不散)이며, 무색(無色), 무형(無形)이며, 대할 수도 없는 무대(無對)의 일상(一相)인, 이른바 무상(無相)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힘이 있으시어 무상(無相)인 제법의 처소에서 ‘이 사람은 범부이다, 이 사람은 수다원이다, 이 사람은 사다함이다, 이 사람은 아나함이다, 이 사람은 아라한이다, 이 사람은 벽지불이다, 이 사람은 보살마하살이다, 이분은 부처님이시다’라고 분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大智度論  釋七喩品 第八十五卷 第九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5. 칠유품(七喩品) 풀이함  3

 

雖二法皆不實,而不實中有差別。如十善、十不善二事,皆有爲法故,虛誑不實;而善、不善有差別 殺生法故,墮惡道;不殺故,生天上。如布施、偸盜二事,雖取相著心,是虛誑不實,而亦有差別。如衆生乃至知者、見者無所有,而惱衆生有大罪,慈念衆生有大福。

비록 불청정법(不淸淨法)과 청정법(淸淨法)의  가지  모두가 진실하지 않을지라도 진실하지 않은 가운데에서 차별이 있는 것이니, 마치  가지의 십선(十善)과 열 가지의불선(十不善)과 같은 것으로,  가지 모두가 유위법(有爲法)이기 때문에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으며, 

선(善)과 불선(不善)에는 차이가 있나니, 산목숨을 죽인 까닭에 악도에 떨어지고,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마치 보시와 도둑질의  가지에서도 비록 상(相) 취하여 마음으로 집착하는 착심(著心)하는 모두가 바로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은 것이지만, 또한 그 중에서 차이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며, 

마치 중생 내지는 아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는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지만, 중생들을 괴롭히면  죄가 있게 되고, 중생을 자비로 대하면  복이 있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如慈能破瞋、施能破慳,雖二事俱是不實,而能相破。是故佛說:“諸法無有根本定實如毫釐許所有。”欲證明是事故,說夢中受五欲譬喩。

'인자한 자(慈)'는 성내는 진(瞋) 깨뜨리고, '베푸는시(施)'는 간탐을 깨뜨리나니,

이 두 가지가 비록  같이 진실하지 않다 할지 서로를 파괴할 수가 있으므로 부처님께서는 “제법에는 털끝만큼도  근본과 정해진 실체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이러함을 증명하시고자 ‘꿈속에서욕(五欲)을 받는 등’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須菩提意:若一切法畢竟空無所有性,今何以故現有眼見、耳聞法?以是故,佛說夢譬喩。

如人夢力故,雖無實事而有種種聞見,瞋處、喜處;覺人在傍,則無所見。如是,凡夫人無明顚倒力故,妄有所見;聖人覺悟,則無所見。一切法若有漏若無漏、若有爲若無爲,皆不實,虛妄故有見聞。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만약 일체법이 필경공이라서, 지닌  성품이 없는 무소유성(無所有性)이라면, 무엇 때문에 지금 눈으로는 빛깔(色)을 보고, 귀로는 법(法)을 듣게 되는 것인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꿈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으니, 

마치 사람이 꿈이라는  때문에 비록 진실함이 없을지라도 갖가지를 듣고 보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은 그의 곁에 있으면서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범부인은 무명(無明)의 뒤바뀐 전도력(顚倒力) 때문에 망령되이 보는 것이 있지만, 

성인은 깨친 분이시므로 보는 것이 없으니,

일체법은 유루(有漏)ㆍ무루(無漏)와 유위(有爲)ㆍ무위(無爲)의 모두는 진실하지 않고 허망하기 때문에 보거나 듣는 일이 있는 것이다.


又如夢中見六道生死往來、見須陁洹乃至阿羅漢,夢中無是法而夢見,夢中實無淨、無垢。業果報六道亦如是,顚倒因緣故起業,業果報亦應空。除卻顚倒故名爲道;顚倒無實故,道亦不應實。鏡中像、嚮、焰乃至如化亦如是。

또한 마치 꿈속에서도(六道)에 생사 왕래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수다원에서 아라한에 이르기까지도 보게 되나니,

꿈속에서는 이러한 법이 없음에도 꿈으로는 보는 것이며, 꿈속에서는 실로 깨끗한 정(淨)도 없고 더러운 구(垢)도 없는 것이니, 업의 과보와도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나, 뒤바뀐 전도인연(顚倒因緣) 때문에 업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업의 과보 또한 마땅히 공한 것이다.

뒤바뀜의 전도(顚倒)를 물리쳐 없애기 때문에 도(道)라 하지만, 뒤바뀜의 전도(顚倒)는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도(道) 또한 진실하지 않아야 하나니, 거울 속의 형상과 메아리와 아지랑이에서 변화한 화(化) 등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佛反問須菩提:“於是法中有垢者、有淨者不?”

須菩提意:一切法中無我,云何當說有垢、有淨者?是故言無。

佛言:“若無受垢、受淨者,垢、淨亦無。”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반문(反問)하시면서 “이 법에도 더러운 구(垢)가 있고 깨끗한 정(淨) 있는가?”라고 하시니, 

수보리 존자가 ‘일체법은 나가 없는 무아(無我)이거늘, 어떻게 더러운 구(垢)가 있고 깨끗한 정(淨) 있다고 하겠는가!’라고 생각한 때문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더러운 구(垢)를 받아들이는 이나 깨끗한 정(淨) 받아들이는 이가 없다면,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또한 없는 것이다”고 하셨다.


問曰:若分別諸法,阿毘曇等經中有垢、有淨,但受垢淨者無。三毒等諸煩惱是垢,三解脫門諸助道法等是淨。

묻나니, 만약 제법을 분별한다면 '아비담(阿毘曇)' 등의 경에서는 “더러운 구(垢) 있고 깨끗한 정(淨) 있으나, 다만 더러운 구(垢)와 깨끗한 정(淨) 받아들이는 이가 없을 뿐이니,

삼독(三毒) 등의 모든 번뇌가 바로 더러운 구(垢)요,

삼해탈문(三解脫門) 등의 모든 도를 돕는 조도법(助道法)이 바로 깨끗한 정(淨)이다”고 하였습니다.


答曰:雖有是說,是事不然!若衆生法無所屬,亦無作者;若無作者,亦無作法,無縛無解。如人爲火所燒,畏而捨離,非火離火;衆生亦如是,畏五衆苦故捨離,非苦離苦。若無垢淨者,無有解脫。

답하나니, 비록 그러한 설명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만약 중생과 법이 속한 데가 없는 무소속(無所屬)이라면, 또한 짓는 작자(作者)도 없을 것이고, 

만약 짓는 작자(作者) 없다면 또한 짓는 작법(作法)도 없어서, 속박도 없는 무박(無縛)이고 벗어남도 없는 무해(無解)이니, 

마치 사람이 불에 데이면 불이 두려워서 버리고 여의나, 불이 불을 여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중생들 또한 이와 같아서, 오중(五衆, 오온)의 괴로움이 두렵기 때문에 버리고 여의는 것이요 

괴로움이 괴로움을 여의는 것은 아니니, 만약 더러운 구(垢)와 깨끗한 정(淨) 없으면 해탈도 없는 것이다.


復次,佛此中自說因緣,所謂:“我、我所法中住,衆生受垢、受淨。

我畢竟無故,垢淨無住處;住處無故,無垢、無淨。”

또한 부처님께서 친히 이 가운데에서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나(我)와  것의 아소(我所)라는 법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은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고 깨끗한 것도 받아들이지만, 나(我)는 끝내 없는 필경무(畢竟無)이기 때문에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머무를 곳이 없으며, 머무를 곳이 없기 때문에 더러운 구(垢) 없고 깨끗한 정(淨) 없다”고 하신 것이다.


問曰:我雖無,我見實有,凡夫人住此中起諸煩惱。

묻나니, 나(我)에게는 비록 나라는 견해의 아견(我見)이 없다고 할지라도, 범부인은 실로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答曰:若無我,我見無所緣,無所緣云何得生?

답하나니, 만약 나(我)와 나라는 견해의 아견(我見)이 없으면 반연할 소연(所緣)도 없나니, 

반연할 소연(所緣) 없거늘 어떻게 번뇌를 내겠는가?


問曰:雖無我,於五衆中邪行謂有我,生我見;五衆是我、我所。

묻나니, 비록 나가 없는 무아(無我)일지라도중(五衆, 오온) 가운데에서 삿된행으로 나(我)가 있고 나라는 견해의 아견(我見)을 내면서 ‘오중(五衆, 오온)이  나요,  것이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答曰:若以五衆中定生我見因緣,於他五衆中何以故不生?

若於他五衆生者,則爲大錯亂!是故我見無有定緣,但顚倒故生。

답하나니, 만약 오중(五衆, 오온) 가운데에서 결정코 나라는 아견(我見)을 내는 인연이 있다면,

타인의 오중(五衆, 오온) 가운데에서는 무엇 때문에 내지 않는 것인가? 

만약 타인의 오중(五衆, 오온) 가운데에서도 낸다면  혼란이 오게  것이기 때문에 나라는 소견의 아견(我見)은 일정한 인연이 없는 것이나, 다만 뒤바뀌어 전도된 것이기 때문에  뿐인 것이다.

 

問曰:若顚倒生,何以故但自於己身生見?

묻나니, 만약 뒤바뀜의 전도 때문에 내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다만 자신의 몸에 대해서만 견해를 내는 것입니까?


答曰:是顚倒狂錯,不應求其實事。又復於無始生死中來,自於相續五衆中生著;是故佛說:“住我心衆生受垢、受淨。”

답하나니, 이 뒤바뀜의 전도는 미치고 그릇된 광착(狂錯)이라  실제의 일을 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비롯함이 없는 무시(無始)로부터 나고 죽는 생사(生死)를 거듭하면서 상속(相續)한 오중(五衆, 오온) 가운데에 스스로 탐착을 내는 것이니,

이러한 까닭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我)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에 머무르는 중생은 더러운 구(垢)도 받고 깨끗한 정(淨) 받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又實見者無垢無淨;若我定有實見者應有垢淨!如實見者不垢不淨,以是因緣故無垢無淨。無垢無淨者,見諸法實相。又於諸法實相亦不著,是故無垢;諸法實相無相可取,是故無淨。

復次,八聖道中不著,是名無淨;除諸煩惱,不著顚倒,是名無垢。

또한 여실하게 보는 실견자(實見者) 더러운 구(垢) 없고 깨끗한 정(淨) 없지만, 만약 나(我)는 결정코 진실한 것이 있다고 보는 이에게는 더럽고 깨끗함이 있어야 하나니,

여실하게 보는 실견자(實見者)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는 이는법의 실상을 보게 되나, 또한 제법의 실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더러운 구(垢)가 없으며, 제법의 실상은 취할 만한 상이 없는 무상가취(無相可取)인 까닭 깨끗한 정(淨) 없는 것이다.

성도(八聖道) 가운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바로 깨끗함이 없는 무정(無淨)이라 하며, 

모든 번뇌를 없애고 뒤바뀜의 전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바로 더러움이 없는 무구(無垢)라 하는 것이다.

 

大智度論  論釋平等品 第八十六 第九十五    
86. 평등품(平等品)을 풀이함 1

▶經. 須菩提白佛言:“世尊!見實者不垢不淨,見不實者亦不垢不淨。何以故?一切法性無所有故。

世尊!無所有中無垢無淨,所有中亦無垢無淨。世尊!無所有中有所有中亦無垢無淨。

世尊!云何如實語者不垢不淨,不實語者亦不垢不淨?”

▷경.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진실이라고 보는 이도 더럽지 않은 불구(不垢)이고, 깨끗하지도 않은 부정(不淨)이며,

진실하지 않다고 보는 이도 더럽지 않은 불구(不垢)이고, 깨끗하지도 않은 부정(不淨)이니, 

왜냐 하면, 일체법의 법성(法性)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 가운데에는 더러움이 없는 무구(無垢)이고 깨끗함도 없는 무정(無淨)이라면, 

있는 것의 소유(所有) 가운데에서도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없는 무구무정(無垢無淨)인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 가운데에 있는 바의 소유(所有)가 있으며 또한 더럽고 깨끗함이 없는 무구무정(無垢無淨)입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여실하게 말하는 여실어자(如實語者)도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여실하게 말하지 않는 불실어자(不實語者) 또한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것인지요?”


佛告須菩提:“是諸法平等相,我說是淨。

須菩提!何等是淨是諸法平等?所謂如、不異、不誑,法相、法性、法住、法位、實際,有佛、無佛法性常住,是名淨。世諦故說,非最第一義;最第一義,過一切語言論議音聲。”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이법의 평등한 평등상(平等相) 나는  ‘깨끗한 정(淨)이다’고 말하느니라.

수보리야, 어떤 것이 깨끗한 정(淨)인가? 

그것은법의 평등함이니, 이른바 여(如)와 불이(不異)와 불광(不誑)과 법상(法相)과 법주(法住)와 법위(法位)와 실제(實際)으로,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법성(法性)이 항상 머무르는 상주(常住)하는 것을  깨끗한 정(淨)이라 하느니라. 

하지만,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로써 말하는 것일 뿐, 최제일의(最第一義)는 아니니,

최제일의(最第一義) 일체의 언어와 논의와 음성을 초월한 것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一切法空、不可說,如夢、如嚮、如焰、如影、如幻、如化,云何菩薩摩訶薩用是如夢、如嚮、如焰、如影、如幻、如化法,無有根本定實,云何能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作是願 ‘我當具足檀波羅蜜,乃至具足般若波羅蜜;我當具足神通波羅蜜,具足智波羅蜜,具足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四念處,乃至具足八聖道分;我當具足三懈脫門、八背捨、九次第定;

我當具足佛十力,乃至具足十八不共法;我當具足三十二相、八十隨形好,具足諸陁鄰尼門、諸三昧門;我當放大光明遍照十方,知諸衆生心,如應說法’?”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이 공(空)하여 말로 설명할 수도 없으며, 마치 꿈과 같은 여몽(如夢)이고, 메아리와 같은 여향(如響)이며, 아지랑이와 같은 여염(如焰)이고, 그림자와 같은 여영(如影)이며, 환과 같은 여환(如幻)이고, 변화한  것과 같은 여화(如化)이라면,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이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으며 아지랑이와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은 법이라서, 그 근본이 없고 정해진 실체가 없는 것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리고 원하기를 ‘나는 마땅히 단(檀, 보시)바라밀을 완전히 갖출 것이며, 나아가 반야바라밀까지를 완전히 갖추리라.

나는 마땅히 신통(神通)바라밀을 완전히 갖추고 지혜바라밀을 완전히 갖추며, 4선(禪)과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과 4념처(念處)를 완전히 갖추고 나아가 8성도분(聖道分)을 완전히 갖추어야 한다. 나는 마땅히 3해탈문과 8배사(背捨)와 9차제정(次第定)을 완전히 갖추리라.

나는 마땅히 부처님의 십력을 완전히 갖출 것이며, 나아가 18불공법까지를 완전히 갖추리라.

나는 마땅히 32상호와 80수형호(隨形好)와 모든 다린니(陀鄰尼, dhāraṇī, 다라니)의 문과 모든 삼매의 문을 완전히 갖추리라.

나는 장차 큰 광명을 놓아 시방을 두루 비추어서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알아 그들이 응하는 바에 따라 법을 설하리라’고 하는지요?”

大智度論  釋七喩品 第八十五卷 第九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5. 칠유품(七喩品) 풀이함  2

 

“於汝意云何?揵闥婆城,如日出時見揵闥婆城,無智人無城有城想、無廬觀有廬觀想、無園有園想;是揵闥婆城頗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不?”

“不也!世尊!是揵闥婆城畢竟不可得,但誑愚夫眼,云何當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건달바성(乾闥婆城), 곧 해가 돋을 때에  건달바성을 보면, 지혜 없는 사람은 성(城)이 없음에도 성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관(廬觀, 망루)가 없음에도 망루가 있다고 생각하며, 동산이 없음에도 동산이 있다고 생각하나니, 

 건달바성에 행여 업인연이 있어서  업인연으로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기도 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건달바성은 끝내 얻을  없으며, 다만 어리석은 범부의 눈을 속일 뿐이거늘, 어떻게 업인연이 있으며, 그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겠으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건달바성(乾達婆城), gandharva의 음역인 건달바와 나가라의 뜻인 성(城)을 딴 복합어이며,

①건달바가 교묘한 솜씨로 공중에 지어 낸 성. 어떤 사물이 거짓된 환영으로 생겨났을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 쓰이는 비유적인 말. 심향성(尋香城), 신기루(蜃氣樓). 건달성(乾達城). → 건달바(乾達婆)


“於汝意云何?是揵闥婆城有修道,用是修道,若著垢、若得淨不?”

“不也!世尊!是揵闥婆城無有實事,不可說垢、淨。”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건달바성이 도를 닦음이 있으며, 그 닦은 도로써 더러운 구(垢) 집착하거나, 깨끗한 정(淨) 얻음이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건달바성에는 진실함이 없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없습니다.”


“須菩提!於汝意云何?幻師幻作種種物,若象、若馬、若牛、若羊、若男、若女,於汝意云何?是幻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不?”

“不也!世尊!是幻法空無實事,云何當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환술사가 환술로 만든 여러 가지로써, 코끼리나 말이나 소나 양이나 또는 남자나 여자가 있을 때, 그대가 생각하기를  환(幻)에는 업인연이 있으며,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기도 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환법(幻法)은 공하고 진실함이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업인연이 있고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겠습니까!”


“於汝意云何?用是幻有修道,用是修道,若著垢、若得淨不?”

“不也!世尊!是法無有實事,不可說垢、淨。”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환(幻)에 도를 닦음이 있고,  닦은 도로써 더러운 구(垢)에 집착하거나, 깨끗한 정(淨)을 얻음이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환법에는 진실함이 없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없습니다.”


“須菩提!於汝意云何?如佛所化人,是化人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不?”

“不也!世尊!是化人無有實事,云何當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화인(化人)이 있어서,  변화한 화인(化人)에게 업인연이 있고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천에 태어나는 일이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변화한 화인(化人)에게는 진실함이 없으니, 어떻게 업인연이 있고,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겠으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於汝意云何?是化人有修道,用是修道,若著垢、若得淨不?”

“不也!世尊!是事無有實,不可說垢、淨。”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변화한 화인(化人)에게도 도를 닦음이 있으며,  닦은 도로써 더러운 구(垢)에 집착하거나, 깨끗한 정(淨)을 얻음이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화인에게 진실함이 없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없습니다.”

 

“佛告須菩提:“於意云何?於是空相中,有垢者、有淨者不?”

“不也!世尊!是中無所有,無有著垢者、無有淨者。”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공한 공상(相中) 가운데에 더러운 구자(垢者) 있고 깨끗한 정자(淨者)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운데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라서 더러운 구(垢) 집착하는 이도 없고, 깨끗한 정(淨)에 집착하는 이도 없습니다.”


“須菩提!如無有著垢者,無有淨者,以是因緣故亦無垢、淨。

何以故?住我、我所衆生有垢、有淨,實見者不垢、不淨。如實見者不垢、不淨,如是亦無有垢、淨。”

“수보리야, 마치 더러운 구(垢)에 집착하는 이도 없고, 깨끗한 정(淨)에 집착하는 이도 없는 것과 같이, 이러한 인연 때문에 또한 더러운 구(垢) 깨끗한 정(淨) 없느니라. 

왜냐 하면, 나(我)와  것의 아소(我所)에 머무르는 중생은 더러운 구(垢)가 있고 깨끗한 정(淨) 있지만, 

진실하게 보는 이에게는 더러운 구(垢)도 없고 깨끗한 정(淨)도 없으며 

여실하게 보는 이에게도 더러운 구(垢)도 없고 깨끗한 정(淨)도 없 때문이니라. 

이와 같아서 더러운 구(垢)도 없고 깨끗한 정(淨) 역시 없는 것이니라.”


▶論.
問曰:佛已處處答是事,今須菩提何以復問?

▷논. 묻나니, 부처님께서 이미 곳곳에서 이러함에 대한 대답을 하셨거늘, 지금 수보리존자는 무엇 때문에 다시 여쭌 것입니까?


答曰:義雖一,所因事異,所謂一切法,若有佛、若無佛,諸法性常住,空無所有,非賢聖所作。般若波羅蜜甚深微妙,難解難量,不可以有量能知;諸佛賢聖憐愍衆生故,以種種語言名字、譬喩爲說。

利根者解聖人意,鈍根者處處生著,著於語言名字,若聞說“空”,則著空;聞說“空亦空”,亦復生著;若聞“一切法寂滅相,語言道斷”,而亦復著。

답하나니, 이치는 비록 같을지라도 원인이 되는 소인(所因)에는 차이가 있으니, 이른바 일체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법의 성품은 언제나 머물러 있는 제법성상주(諸法性常住)이며, 공하여 있는  없는 공무소유(空無所有)이니, 성현이 만든 것이 아닌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려우며 유량(有量)으로써  수도 없으나,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까닭에 갖가지의 언어와 이름과 비유로써 그들을 위하여 해설하신 것이니, 

근기가 영리한 이근자(利根者) 성인의 뜻을 이해하지만 근기가 둔한 둔근자(鈍根者) 곳곳에 집착하여서, 그 언어와 이름에 집착하나니, 

만약 ‘공하다’는 말을 들으면  공에 집착하고, ‘공도 또한 공하다는 공역공(空亦空)’이라는 말을 들으면 다시 집착을 내나니, 만약 일체법은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이라서 ‘말이 끊어진 어언도단(語言道斷)이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다시 그것에 또한 집착하느니라.


自心不淸淨故,聞聖人法爲不淸淨;如人目瞖,視淸淨珠,見其目影,便謂珠不淨。

佛種種因緣說。見有過罪而生於疑,作是言:“若一切法空,空亦空,云何分別有六道?”

常生如是等疑難故,須菩提以經將訖,爲衆生處處問是事,是故重問。佛可須菩提意。

스스로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성인의 법을 들어도 깨끗하지 않게 여기는 것이, 마치 눈병  사람이 깨끗한 구슬을 보면서도  눈병 때문에 가려져서 보는 것이라서 그 구슬이 깨끗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갖가지의 인연으로 말씀하심에도 허물이 있다고 보면서 의심하며 말하기를

“만약 일체법이 공하며, 공한 것도 또한 공하다면 어찌하여 분별 하여서 6도(道)가 있고, 항상 태어나는 것이 있는 것인가?”라고 하는, 이와 같은 등의 의심과 힐난 때문에 수보리 존자가 경을 마치려  즈음 중생들을 위하여 곳곳에서 이러한 것들 묻고 있는 것이니, 때문에 거듭하여 다시 여쭌 것이며,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의 뜻을 인가하신 것이다.


問曰:須菩提以“有”難“空”,佛云何可其意?

묻나니, 수보리 존자는 존재의 유(有)로써 공을 따지거늘,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의 뜻을 인가하신 것입니까?


答曰:佛可其說“諸法空常住,有佛、無佛不異”,不可其難“云何分別有六道等”。何以故?以其難欲破空故。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제법은 공하여 항상 머물러 상주(常住)하는 것이며,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을 인가한 것이지, 

“어찌하여 분별하여 6도(道) 등이 있겠는가?”고 하는 힐난을 인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힐난으로써 공을 부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是中佛解其所難,所謂凡夫人不入聖法,未得聖道,不知無所有性,不善修習空三昧故。顚倒者,四顚倒;愚癡者,三界繫無明。雖不說餘煩惱,而此二法虛誑不實。顚倒卽是妄語虛誑;若從顚倒所生業及果報,以根本不實故,衆生雖深著,亦無定實。以是故五道皆空,但有假名。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는  힐난하는 바를 해설하셨으니, “이른바 범부인은 성인의 법에 들지 못하고, 아직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하였으며, 지닌  성품이 없는 무소유성(無所有性)을 알지 못하여서 공삼매(空三昧)를  닦아 익히지 못한 까닭이다”고 하신 것이며, 

뒤바뀜이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가지 뒤바뀜의 사전도(四顚倒)요 

어리석다는 것은 삼계에 매인, 계계(界繫)인 무명(無明)이다. 

비록  밖의 다른 번뇌는 말하지 않았을라도   가지의 이법(二法)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으며, 뒤바뀌어 전도된 것이니, 그것은 곧 거짓말이요 속임수인 것이다.

만약 뒤바뀜의 전도를 따른다면 업과 과보가 근본부터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이 비록 깊이 탐착하여도 정해져 있거나 진실함이 없으므로 5도(道)는 모두가 공하여서 다만 임시로 붙인 가명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又汝難諸賢聖;是諸賢聖以斷顚倒差別故有異名,以顚倒不實故無所斷。又復滅失、無所有故名爲“斷”。若實有法,可斷;尚無斷法,何況顚倒!是故一切賢聖果皆是無所有。

斷顚倒卽是聖人果,果卽是斷。爲果所修道亦同無所有,是故修道時,必當用空、無相、無作。道、果分別故,賢聖有差別;今實無所有法不能得,無所有云何有差別?是故不應難。

 그대는 모든 성현에 대하여 따지면서  모든 성현은 뒤바뀜의 전도와 차별을 끊었기 때문에 다른 이름의 이명(異名)이 있다고 하지만, 뒤바뀌어 전도된 것이라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끊을 것도 없는 것이며, 

 없어지고 잃게 되어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끊는 단(斷)이라 하지만, 

실로 끊을  있는 어떠한 법도 없거늘 하물며 뒤바뀌어 전도된 것이 겠는가?

때문에 일체 성현의 과(果, 과위) 모두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인 것이다.

뒤바뀌어 전도된 것을 끊은 것이  성인의 과위인 성인과(聖人果)요, 과(果)  끊는 단(斷)이니, 

이 과(果)를 위하여 닦는 도(道) 또한 동일하게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므로 도를 닦을 때에는 반드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법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도(道)와 과(果) 분별하기 때문에 성현이라는 차별이 있지만, 

지금 실로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법(無所有法)에서는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를 얻을  없거늘, 어떻게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따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須菩提意:若但顚倒故有世閒,若有顚倒亦應有實,虛實相待故。

是故問:“世尊!凡夫所著,頗有實生著起業;業因緣故,六道生死,不得解脫?”佛答言:“不!”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만약 뒤바뀌어 전도된 까닭에 세간이 있는 것이라면,  뒤바뀜의 전도가 있다는  또한 진실한 것이어야 하리니, 거짓의 허(虛)와 진실의 실(實)은 상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때문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범부들이 집착하는 것에 자못 진실함이 있어서 집착하여서 업을 일으킨다면,  업의 인연 때문에 6도의 생사에서 해탈을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니니라”고 하셨다.


何以故?此中佛自說因緣:“但顚倒故生著,若無顚倒,云何有相待實法?乃至無毫釐許實事,畢竟無故”

왜냐 하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다만 뒤바뀜의 전도 때문에 집착을  뿐이니, 만약 뒤바뀜의 전도가 없다면 어떻게 상대되는 진실한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아가 털끝만큼의 진실함도 없으며, 필경에도 없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問曰:諸佛所行實義,所謂畢竟空,此非實耶?

묻나니, 모든 부처님께서 행하시는 진실한 이치의 실의(實義)는 이른바 필경공인데, 이것은 진실이 아닌 것입니까?


答曰:是第一義空亦因分別凡夫顚倒故說;若無顚倒,亦無第一義。若凡夫顚倒少多有實,第一義亦應有實

답하나니, 이 제일의공(第一義空) 또한 분별로 인한 것이니, 범부들이 뒤바뀌어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만약 뒤바뀌어 전되됨이 없다면 역시 으뜸가는 이치의 제일의(第一義)도 없을 것이며,

만약 범부들의 뒤바뀜의 전도됨이 많건 적건 간에 그 중에 진실이 있다면, 제일의에도 마땅히 진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問曰:若二俱不實,云何得解脫?如人手垢還以垢洗,云何得淨?

묻나니, 만약 두 가지가 다 같이 진실하지 않다면 어떠게 해탈을 얻는 것입니까?

마치 사람의 손이 더러울 때에는 도리어 더러운 물에 씻는 것과 같거늘, 어떻게 깨끗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答曰:諸法實相畢竟空,第一義實淸淨。以有凡夫顚倒不淸淨法,故有此淸淨法 不可破壞,不變異故。以人於諸法實相起著,欲生煩惱,是故說:“是法性空無所有,無所有故無實。”

답하나니, 제법의 실상(實相)은 필경공이고 제일의(第一義)이라서 진실로 청정하나, 범부가 뒤바뀌어 전도되어서 깨끗하지 못한 불청정법(不淸淨法)이 있기 때문에 이 깨끗한 청정법(淸淨法)이 있는 것이니, 파괴할 수도 없고 변하여 달라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제법의 실상에 대하여 탐착과 욕탐을 일으켜서 번뇌를 내기 때문에 “이 법의 성품인 법성(法性)은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무소유이기 때문에 진실함이 없는 무실(無實)인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大智度論  釋七喩品 第八十五卷 第九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5. 칠유품(七喩品) 풀이함  1

 

▶經. 須菩提白佛言:“世尊!若諸法性無所有,非佛所作,非辟支佛所作,非阿羅漢所作,非阿那含、斯陁含、須陁洹所作,非向道人、非得果人、非諸菩薩所作,

云何分別有諸法異 是地獄、是畜生、是餓鬼,是人、是天,乃至是非有想非無想天?

用是業因緣故,知有生地獄者;是業因緣故,知有生畜生、餓鬼者;是業因緣故,知有生人中,生四天王天乃至生非有想非無想天者;是業因緣故,知有得須陁洹、斯陁含、阿那含、阿羅漢、辟支佛者;是業因緣故,知是諸菩薩摩訶薩;是業因緣故,知是多陁阿伽度、阿羅訶、三藐三佛陁?

▷경.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의 성품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라서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고 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며, 아라한이 만든 것도 아니고 아나함과 사다함과 수다원이 만든 것도 아니며, 도를 향한 향도인(向道人)이 만든 것도 아니고 과를 얻은 득과인(得果人)이 만든 것도 아니며, 모든 보살이 만든 것도 아니라면,

어찌 분별하여서 ‘이것은 지옥이다, 이것은 축생이다, 이것은 아귀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하늘이다, 나아가 이것은 비유상비무상천(非有想非無想天)이다’라고 하며서 제법이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까?

 업인연(業因緣)으로 지옥에 나는 이가 있음을 알고,  업인연으로 축생과 아귀에 태어나는 이가 있음을 알며,  업인연으로 인간에 태어나고 4천왕천(天王天)에 태어나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천에 태어나는 이가 있음을 알며,  

 업인연으로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을 얻는 이가 있음을 알고,  업인연으로 그들이 보살마하살임을 알며,  업인연 때문에  분이 다타아가도ㆍ아라하ㆍ삼먁삼불타임을 아는 것입니다.


世尊!無性法中,無有業用。作業因緣故,若墮地獄、餓鬼、畜生,若生人、天乃至生非有想非無想天;

以是業因緣故,得須陁洹、斯陁含、阿那含、阿羅漢、辟支佛;菩薩摩訶薩行菩薩道,當得一切種智,得一切種智故,能拔出衆生於生死中”

세존이시여, 성품이 없는 무성법(無性法) 가운데에서는 업의 작용인 업용(業用)이 없음에도 업을 지은 인연 때문에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떨어지고, 인간ㆍ천상에 태어나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천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업인연 때문에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을 얻고, 보살마하살이 보살의 도를 행하면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게 되며, 일체종지를 얻은 까닭에 중생들을 생사 가운데서 구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佛告須菩提:“如是!如是!無性法無業無果報。

須菩提!凡夫人不入聖法,不知諸法無性相,顚倒愚癡故,起種種業因緣。是諸衆生隨業得身:若地獄身,若畜生身,若餓鬼身,若人身,若天身 若四天王天身,乃至非有想非無想天身。

是無性法無業無果報,無性常是無性。如須菩提所言:‘若一切法無性,云何是須陁洹乃至諸佛得一切種智?’

須菩提!於汝意云何?道是無性不?須陁洹果乃至諸佛一切種智是無性不?”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성품이 없는 무성법(無性法)에는 업도 없고 과보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범부인은 성인의 법에 들지 못하고,법이 성품이 없는 무성상(無性相) 알지 못하여서 뒤바뀌고 어리석은 까닭에 갖가지의 업인연을 일으키는 것이니, 

 모든 중생들은  업을 따라서 몸을 얻게 되는 것으로,  지옥의 몸이나 축생의 몸이나 아귀의 몸이나 사람의 몸이나 하늘의 몸이나 4천왕의 몸이나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천의 몸이 그것이니라. 

하지만  성품이 없는 무성법(無性法)에는 업도 없고 과보도 없으니,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은 항상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니라.

수보리야, 그대가 말하기를 ‘만약 일체법이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라면, 어떻게 하여  수다원 내지는 모든 부처님이 일체종지를 얻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는데,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도(道)는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인가? 수다원과에서 모든 부처님의 일체종지까지도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인가?”


須菩提言:“世尊!道無性須陁洹果亦無性,乃至諸佛一切種智亦無性。”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도(道)는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고, 수다원의 과위도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의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도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입니다.”


“須菩提!無性法能得無性法不?” “不也!世尊!”

“수보리야, 성품이 없는 무성법(無性法) 성품이 없는 무성법(無性法) 얻을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佛告須菩提:“有性法能得有性法不?”“不也!世尊!”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성품이 있는 유성법(有性法)은 성품이 있는 유성법(有性法)을 얻을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無性法及道,是一切法皆不合不散,無色、無形、無對,一相,所謂無相。

須菩提!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以方便力,見衆生以顚倒故著五衆:無常中常相、苦中樂相、不淨中淨相、無我中我相,著無所有處。是菩薩以方便力故,於無所有中拔出衆生。”

“수보리야, 성품이 없는 무성법(無性法) 도(道),  일체법은 모두 합하지 않는 불합(不合), 흩어지지 않는 불산(不散)이며, 무색(無色), 무형(無形)이며, 대할 수도 없는 무대(無對)의 일상(一相)인, 이른바 무상(無相)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방편력으로써 중생들을 보니, 뒤바뀌어 전도된 까닭에 5중(衆, 오온)에 집착하며, 무상한 가운데에서 항상하다는 상상(常相)과 괴로움 가운데에서 즐겁다는 낙상(樂相)과 깨끗하지 않는 가운데에서 깨끗하다는 정상(淨相)과 무아(無我) 가운데에서 나라는 아상(我相)으로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집착하고 있으니, 

 보살은 방편력으로써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 가운데에서 중생을 구출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凡夫人所著,頗有實不異不?著故起業;業因緣故,五道生死中不得脫?”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범부인들이 집착하는 것에는 자못 진실함과 다를 바가 없음이 있어서, 그에 집착하기 때문에 업을 일으키며, 그 업인연 때문에 5도(道)의 생사 가운데에서 벗어지 못하는 것인지요?”


佛告須菩提:“凡夫人所著起業處,無如毛髮許實事,但顚倒故。

須菩提!今爲汝說譬喩,智者以譬喩得解。

須菩提!於汝意云何?如夢中所見人受五欲樂,有實住處不?”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범부인들이 집착하여 업을 일으키는 곳에는 털끝만큼의 진실함도 없으니, 다만 뒤바뀌어 전도된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제 그대를 위하여 비유로 설명하리니, 지혜로운 이는 비유로써 이해하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이 꿈속에서 오욕락(五欲樂) 누린다면, 실로  머무는 주처(住處)가 있는 것인가?”


須菩提白佛言:“世尊!夢尚虛妄不可得,何況住夢中受五欲樂!”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꿈도 오히려 허망하여 얻을  없거늘, 하물며 꿈속에서 오욕락(五欲樂)을 누리는 것이겠습니까!”


“於汝意云何?諸法若有漏若無漏、若有爲若無爲,頗有不如夢者不?”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법으로서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와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인 것에 행여 꿈과 같지 않은 것이 있던가?”

 

“世尊!諸法若有漏若無漏、若有爲若無爲,無不如夢者。”

“세존이시여,법으로서 유루와 무루와 유위와 무위인 것에는 꿈과 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佛告須菩提:“於汝意云何?夢中有五道生死往來不?”“世尊!無也!”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꿈속에 오도(五道)가 있어서 생사하면서 왕래함이 있는가?”

“세존이시여, 없습니다.”


“於汝意云何?夢中有修道,用是修道,若著垢、若得淨不?”

“不也!世尊!何以故?是夢法無有實事,不可說垢、淨。”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꿈속에서 도(道)를 닦음이 있고,  닦는 도로써 더러운 구(垢)에 집착하거나 또는 깨끗한 정(淨)을 얻음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꿈의 법에는 진실함이 없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없기 때문입니다.”


“於汝意云何?鏡中像有實事能起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餓鬼、畜生,若人、若天 四天王天處乃至非有想非無想天處不?”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거울 속의 형상에 진실함이 있어서 업인연을 일으킬  있고,  업인연으로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에 떨어지며, 또는 인간이나 4천왕천처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천처의 하늘에 나는 것인가?”


須菩提言:“不也!世尊!是像無有實事,但誑小兒,是事云何當有業因緣,用是業因緣當墮地獄乃至非有想非無想處?”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형상에는 진실함이 없으니, 다만 어린아이만을 속일  있을 뿐일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어떻게 업인연이 있고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겠으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천에 태어나겠습니까?”


“於汝意云何?是鏡中像有修道,用是修道若著垢、若得淨不?”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거울 속의 형상이 도를 닦으며, 그 닦은 도로써 더러운 구(垢)에 집착하거나 또는 깨끗한 정(淨)을 얻음이 있는가?”


須菩提言:“不也!世尊!何以故?是像空無實事,不可說垢、淨。”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형상은 공(空)하여 진실이 없으므로 더러운 구(垢)라거나 깨끗한 정(淨)이라고 말할  없기 때문입니다.”


“於汝意云何?如深㵎中有嚮,是嚮有業因緣,用是業因緣若墮地獄乃至若生非有想非無想處不?”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깊은 산골짜기에서 메아리가 울릴 때,  메아리에 업인연이 있고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는 일이 있는가?”


須菩提言:“不也!世尊!是事空無有實音聲,云何當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것은 공하여 실제의 음성이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업인연이 있으며,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고,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於汝意云何?是嚮頗有修道,用是修道,若著垢、若得淨不?”

“不也!世尊!是事無實,不可說是垢、是淨。”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메아리에 행여 도를 닦는 것이 있고,  닦는 도로써 더러운 구(垢)에 집착하거나 또는 깨끗한 정(淨) 얻음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메아리에는 진실이 없으므로 ‘이것은 더러운 구(垢)이고, 이것은 깨끗한 정(淨)이다’고 말할  없습니다.”


“於汝意云何?如焰非水水相,非河河相,是炎頗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不?”“不也!世尊!焰中水畢竟不可得,但誑無智人眼,云何當有業因緣,用是業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치 아지랑이는 물이 아님에도 물의 수상(水相) 되고, 하천(河川)이 아님에도 하천의 되는 것과 같나니 (물처럼 보이고, 하천과 같이 보이는 것), 

 아지랑이에 행여 업인연이 있어서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는 일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지랑이에서는 끝내 물을 얻을  없으나, 다만 지혜 없는 사람의 눈을 속일 뿐인 것이거늘 어떻게  업인연이 있으며,  업인여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於汝意云何?是焰有修道,用是修道,若著垢、若得淨不?”

“不也!世尊!是焰無有實事,不可說垢、淨”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아지랑이에 도를 닦음이 있고, 이 닦는 도로써 더러운 구(垢)에 집착하거나 또는 깨끗한 정(淨)을 얻음이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아지랑이는 진실하지 않은 것이므로 더러운 구(垢)라거나 깨끗한 정(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大智度論  釋四諦品 第八十四 第九十四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4. 사제품(四諦品) 풀이함  3

 

問曰:佛無量阿僧祇劫來習微妙法,所謂十八不共法,乃至無㝵解脫,諸甚深業,何以但說苦、集、滅、道?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무량한 아승기겁으로부터 미묘한 묘법(妙法)  18불공법 내지는 무애해탈(無礙解脫) 등에 이르기까지의 매우 깊은 모든 업을 익히셨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괴로움의 고(苦)ㆍ쌓임의 집(集)ㆍ사라짐의 멸(滅)ㆍ도(道)만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衆生所畏急者,無過於苦;爲除苦已,然後示以佛道。如人重病,先以除病爲急;然後以寶物、衣服莊嚴其身。

답하나니, 중생들에게 두렵고도 급한  가운데에서 괴로움의 고(苦)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괴로움의 고(苦)를 제거시킨 연후에 부처님의도를 보이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중한 병이 들었으면 우선 병을 없애 주는 것이 급한 일이며,  뒤에 보배나 의복으로 그의 몸을 장엄시켜주는 것과 같으며, 

 

苦者,受五受衆身是一切苦本,性卽是苦;是苦略而言之,是生、老、病等,如經中處處廣說。

苦集者,愛等諸煩惱;愛是心中舊法,以是故,佛說“愛能生後身,故是苦因”,苦因卽是集。

‘괴로움의 고(苦)’라 하는 것은, 고수(苦受) 낙수(樂受) 희수(喜受) 우수(憂受) 사수(捨受)의 오수중(五受衆)의 몸을 받으면 그것이 바로 일체 괴로움(苦)의 근본이니, 성품이  괴로움인 것이며,  

 괴로움(苦)을 요약하여 말한다면,  나고(生)ㆍ늙고(老)ㆍ병(病)들고 하는  등이니, 경의 곳곳에서 괴로움(苦)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괴로움의 쌓임인 고집(苦集)’이란, 애욕(愛) 등의 모든 번뇌이니, 애욕(愛)은  마음속에 있는 오래된 법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애욕(愛)은 후세의 몸을 내게 하기 때문에 바로 괴로움의 원인인 고인(苦因)이다”고 하셨는데,  괴로움의 원인인 고인(苦因)이  쌓임의 집(集)인 것이다.


若人欲捨苦,先當斷愛,愛斷苦則滅,斷愛卽是苦滅。苦滅卽是道,觀是五衆種種因緣,苦及苦集過罪,所謂無常、苦、空、無我,如病、如瘡、如怨、如賊等,於八聖道分中爲正見,餘七事助成發起,能斷一切法中愛;如以酒發藥。此人於一切世閒無所復貪,得離苦火,然後示以妙法。

만약 사람이 괴로움(苦)을 버리고자 한다면 우선 애욕(愛)을 끊어야 하며, 애욕(愛)이 끊어지면 괴로움(苦)이  사라지나니, 애욕(愛)을 끊는 것이  괴로움이 사라지는 고멸(苦滅)이요, 괴로움이 사라지면  그것이 도(道)이며, 

중(五衆, 오온)의 갖가지 인연인 괴로움(苦)과 그리고 괴로움이 쌓인 고집(苦集)의 죄과(罪過)는 이른바 ‘무상하고ㆍ괴롭고(苦)ㆍ공하고ㆍ무아(無我)이며, 마치 질병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원수와 같고 도적과 같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8성도분(聖道分)에서의 바른 소견의 정견(正見)이 그것이다. 

 나머지 일곱 가지는 이 정견을 도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일으키면서 일체 가운데에서의 애욕(愛)을 끊게 하나니, 마치 술로써 약을 발동시키는 것과 같으며,

이러한 사람은 일체의 세간에서 다시는 탐하는 것이 없어서 괴로움(苦)의 불을 여의게 되나니, 그러한 뒤에 미묘한법을  그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復次,此中佛自說因緣,所謂:“於四聖諦中攝一切善法。”有人言:“佛何以但說苦等四法?”以是故,佛說:“一切助道善法皆攝在四諦中。”助道善法因緣故,分別有三寶。衆生不信三寶故,不得離六道生死。

또한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사성제 가운데에의 모든 착한법을 포섭한다”고 하시자,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괴로움 등의  가지 법만을 말씀하실까?”라고 한 까닭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의 도를 돕는 착한법은 모두가제(四諦, 사성제) 가운데에 포섭되어 있나니, 도를 돕는 착한법의 인연으로 분별하여 3보(寶)가 있게 되지만, 중생들은 3보를 믿지 않기 때문에도의 생사를 여읠  없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問曰:須菩提何以作是麤問,言:“爲以苦滅、以苦智滅?以集滅、集智滅?”

묻나니, 수보리 존자는 무엇 때문에 ‘괴로움의 사라짐인 고멸(苦滅)인가? 고지멸(苦智滅)인가? 집멸(集滅)인가?, 집지멸(集智滅)인가?’라는 거친 질문의 추문(麤問)을 한 것입니까?


答曰:此非麤問!今問:“見苦等四諦體故滅?爲用智故滅?”愛等諸煩惱滅故,名有餘涅槃。

若以苦諦得道,一切衆生牛羊等亦應得道!若用苦智得道,離苦則無智;離苦智不名爲“苦諦”,但名爲“苦”。

苦諦、苦智和合故生,不得言“但以苦滅”、“但以智滅“。乃至道諦亦如是。

답하나니, 이것은 거친 질문의 추문(麤問)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괴로움 등의 사제(四諦)의 체(體, 체성)를 보기 때문에 사라지는 멸(滅)인가? 지혜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인가?’를 여쭌 것이며,

애욕(愛) 등의 모든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에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고 하는 것이며, 

만약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로써 도를 얻는다면, 일체 중생인 소나  따위도 역시 도를 얻어야 하며,

만약 괴로움의 지혜인 고지(苦智)로써 도를 얻는다면 괴로움(苦)을 여의면 지혜가 없는 것이니, 고(苦)와 지(智)를 여의고서는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라고 하지 못하고 다만 괴로움(苦)이라고  뿐일 것이며,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는 괴로움(苦)과 지혜(智)가 화합한 까닭에 생기는 것이라서 ‘괴로움(苦)만으로써 사라진다’고 말할 수도 없고 ‘지혜(苦)만으로써 사라진다’고도 말할  없나니,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佛答:”不以苦諦滅,亦不以苦智滅,乃至道諦、道智亦如是。我說:‘是四諦平等卽是滅。’不用苦諦滅,不用乃至道諦滅。’”何以故?是苦等四法皆從緣生,虛妄不實,無有自性故不名爲實,不實故云何能滅?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로써 사라지지도 않고, 또한 고지(苦智)로써 사라지지도 않나니, 나아가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와 도지(道智)도 또한 이와 같다. 

나는 ‘이  가지 진리인 사제(四諦)는 평등하며, 그것이 곧 사라짐의 멸(滅)이다’고 하나니,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로써도 사라지지 않고 나아가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로써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니,

왜냐 하면,  괴로움 등의  가지의 사법(四法)은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며,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아서 스스로의 자성(自性) 없으므로 진실한 실(實)이라고 말 할 수 없으며,  

진실하지 않은 불실(不實)이거늘 어떻게 능히 사라질  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다.

 

問曰:二諦有漏,凡夫所行法故,可是虛誑不實;道諦是無漏法,無所著,雖從因緣和合生而不虛誑;又滅諦是無爲法,不從因緣有。云何言“四法皆是虛誑”?

묻나니, 두 가지 진리인 이제(二諦)는 유루(有漏)라서 범부가 행하여야  법이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되고 진실하지 않으나,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는  무루(無漏)의 법이며 집착도 없고 비록 인연의 화합에 의해 생겼을지라도 거짓된 것이 아니며,

또한 사라짐의 진리인 멸제(滅諦)는 바로 무위(無爲)의 법이라서 인연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네 가지의 사법(四法) 모두가 거짓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初得道,知二諦是虛誑。將入無餘涅槃,亦知道諦虛誑,以空空三昧等捨離道諦,如說栰喩。

滅諦亦無定法。如經中說:“離有爲,無無爲,因有爲故說無爲。”苦滅如燈滅,不應戲論求其處所。是故佛說:“不以用苦乃至用道得滅。”

답하나니, 처음에 도를 얻으면  가지 진리인 이제(二諦)가 거짓인 것을 알게 되며, 장차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고자 할에는 역시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도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 공공삼매(空空三昧) 등으로써 도제(道諦) 버리고 여의나니, 마치 뗏목의 비유인 벌유(筏喩, 벌유경)를 말씀하신 것과 같다.

사라짐의 진리인 멸제(滅諦)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법이 없으니, 마치 경에서 설명하기를 “유위(有爲)를 여의고는 무위(無爲)가 없는 것이니, 유위로 인하여 무위를 말하게 된다”고  것과 같이, 

괴로움의 사라짐인 고멸(苦滅)은 마치 등불이 꺼지는 것과 같나니, 희론으로써  처소를 구하지 말아야 하며,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 “괴로움으로써도 사라지게 되지 않고, 나아가 도로써도 사라지게 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問佛:“何者是四諦平等?”佛答:若無八法處 所謂四諦、四諦智,是則平等。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어떠한 것이제(四諦)의 평등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여덟 가지 법의 처소인 팔법처(八法處), 제(四諦)와 4제의 지혜인 사제지(四諦智)가 없으면 이것이  평등이다”라고 하셨으며, 


復次,須菩提!四諦如實、不誑、不異,如、法性、法相、法住、實際,若有佛、無佛,法相常住,不用心、心數法及諸觀,但爲不誑衆生故住。一切餘法皆顚倒,妄著 顚倒果報生故,雖能與人天喜樂,久久皆虛妄變異;但有一法,所謂諸法實相,以不誑故,常住不滅。如是菩薩行般若波羅蜜,通達諸法實諦

또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사제는 여실하여 속이지도 않으며 다르지도 않은 것이며, 여(如)와 법성(法性)과 법상(法相)과 법주(法住)와 실제(實際)이니라.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간에 법상(法相)은 항상 머물러서 상주(常住)하며,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이나 모든 관(觀)이 필요하지도 않으며, 중생을 속이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제법은 모두 뒤바뀌어 전도(顚倒)된 허망한 탐착의 망착(妄著)이요, 전도된 과보로 생기는 까닭에 비록 사람과 하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있을지라도 오래되면 허망하게 변하는 것이나, 오직 하나의 일법(一法)만이 있을 뿐이니, 이른바법의 실상(實相)이 그것이다. 

그것은 속이지 않기 때문에 항상 머무르면서 소멸하지 않나니, 

보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제법의 진실한 이치인 실제(實諦)를 통달하는 것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復問:“云何菩薩通達得實諦,過聲聞、辟支佛地,入菩薩位?”

佛答:若菩薩思惟籌量求諸法,無有一法可得定相,見一切法皆空若在四諦、若不在四諦。非四諦者,虛空、非數緣盡;餘在四諦。若觀如是法空,爾時,入菩薩位。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어떻게 보살은 진실한 이치인 실제(實諦)를 통달하여 얻으며, 성문이나 벽지불을 넘어서 보살위에 들어가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사유하고 헤아리면서법을 구한다면, 얻을 수 있는 어떠한 일법도 없나니, 일체법은 모두가 공하여서 혹은제에 있기도 하고 혹은제에 있지 않기도  것을 보게 되나니,

사제가 아닌 것은 허공(虛空)과 비수연진(非數緣盡, apratisaṁkhyā-nirodha. 비택멸非擇滅, 무위)이나,  밖의 것은제에 있느니라. 

만약 이와 같이 법공(法空)을 관찰한다면, 그 때에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느니라”고 하셨다.


問曰:何以不說“空亦空觀,入菩薩位”?

묻나니, 무엇 때문에 ‘공한  또한 공하다고 관(觀)하면 보살의 지위에 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答曰:不須是說。何以故?若說諸法空,卽是空,空亦空;若是空不空,不名爲一切空。是故行是空,得入菩薩位。

菩薩住是性地中,不墮頂。性地者,所謂菩薩法位。如聲聞法中,煖法、頂法、忍法、世閒第一法,名爲性地。是法隨順無漏道,故名爲性,是中住必望得道;菩薩亦如是,安住是性地中,必望作佛。能生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

답하나니, 그 말씀은  필요가 없으니, 왜냐 하면, 만약 제법의 공한 것을 말하면 그것이 바로 공이요,  공한  또한 공한 것이기 때문이며, 

만약  공한 것이 공하지 않다면 일체공(一切空)이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을 행하여 보살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보살은  성지(性地)에 머물러 정위(頂位)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지(性地, gotra-bhūmi. 종지種地 혹은 종성지種性地)란 보살의 법위(法位)를 말하는 것이니, 마치 성문법 중의 난법(煖法)과 정법(頂法)과 인법(忍法)과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과 같은 것을 일컬어 성지라 하는 것과 같으며,

 법은 무루도(無漏道)를 따르기 때문에 성(性)이라 하며,  가운데에 머무르면 반드시 도를 얻고자 희망하나니, 

보살 또한 이와 같아서  성지 가운데에 편히 머물러 반드시 부처님이 되기를 바라면서 능히 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을 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3보(三寶)를 믿고 난법(煖法)이 더욱 나아가서 죄와 복이 그치고 평등해지기 때문에 정법(頂法)이라 하나니, 
마치 사람이 산으로 올라가서 꼭대기에 닿으면 양쪽의 거리인 이수(里數)가 같아지는 것과 같다.
정(頂)으로부터 인(忍)에 이르고, 이어서 아라한에 이르기까지는 한쪽의 길인 일변도(一邊道)이고, 
난(煖)으로부터 정(頂)에 이르기까지가 일변도(一邊道)이니,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48권 4


是菩薩住在禪地中攝心,分別思惟籌量諸法,通達四諦 所謂知見苦,亦非緣苦生心。知苦是凡夫受身著苦因緣故,受諸憂惱;是人身皆如賊、如怨,無常、空等。得是已,卽時捨,不取苦相,亦不緣苦諦,菩薩法位力故。乃至道諦亦如是。但一心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知是四諦藥病相對,亦不著是四諦,但觀諸法如實相,不作四種分別觀。

 보살은 선지(禪地)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마음을 가다듬어법을 분별하여 사유하고 헤아리면서 4제(諦)를 통달하나니, 이른바 괴로움(苦)을 지견(知見)하나 또한 괴로움을 반연하지 않으면서 마음으로 괴로움(苦)을 알며, 

 범부는 몸을 받아서 괴로움(苦)의 인연에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근심과 고뇌를 받으며, 

 사람의 몸은 모두가 마치 도둑과 같고 원수와 같으며 무상하고 공하다는 것 등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얻은 뒤에는 즉시 버리고서 괴로움(苦)의 취하지 않으며 또한 괴로움의 진리를 반연하지도 않나니, 이것은 보살의 법위력(法位力) 때문이며, 나아가 도제(道諦)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으니,

다만 일심(一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만 회향하고  4제(諦)를 약(藥)과 병(病)이 서로 마주하는 것과 같이 알면서도 또한  4제에 집착하지 않으며, 다만법의 여실상(如實相)만을 관찰하면서  가지의 분별관(分別觀)을 짓지 않을 뿐인 것이다.


須菩提問:“云何如實觀諸法?”

佛言:“觀空。須菩提!若菩薩能觀一切法若大若小皆空,是名如實觀。”

復問:“用何等空?”佛答:“用自相空。”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어떻게법을 여실하게 관찰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공을 관하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일체법은 크건 작건 간에 모두가 공(空)이라는 것을 관찰한다면, 이를 여실관(如實觀)이라 하느니라”고 하셨다.

다시 여쭈기를 “어떠한 공(空)을 이용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자상공(自相空)을 이용하느니라”고 하셨다.


問曰:十八空中佛何以但說自相空?

묻나니, 18공(空)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자상공(自相空)만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是中道空。內、外空等是小空,畢竟空、無所得空等是甚深空,自相空是中空。自相有理破故而心不沒,而能入甚深空中。

답하나니, 이 중도공(中道空) 내외공(內外空) 등은  조그마한공(小空)이요, 

필경공(畢竟空)과 무소득공(無所得空) 등은  매우 깊은 심심공(甚深空)이지만, 

자상공(自相空)은  가운데에서 스스로의 상(相)을 공하게 하고 존재한다는 유(有)의 이치를 파괴하기 때문이니, 

그러함에 마음이 위축되지도 않고 매우 깊은 심심공(甚深空) 안에 들어가는 것이니, 


是菩薩得如是法,觀一切法皆空,乃至不見一法有性可住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觀諸法如阿耨多羅三藐三菩提,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自性空;非佛所作,非大菩薩所作,非阿羅漢、辟支佛所作,常寂滅相,無戲論語言。衆生不能知見如實相,是故菩薩行般若波羅蜜,以方便力,爲衆生說法。

보살은 이와 같은 법을 얻어서 일체법은 모두가 공하다고 관찰하면서, 나아가 성품이 있어서 머무를  있는 어떠한 일법도 보지 않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법을 관찰하는 것이 마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같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자성(自性)이 공한 것이라서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요,  보살이 만든 것도 아니요, 아라한이나 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며, 언제나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며, 언어(言語)의 희론이 없고 중생으로서는  여실한 여실상(如實相) 알거나  수도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력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이다.


方便力者,菩薩得無生忍法,入菩薩位,通達菩薩第一義諦。觀是道相甚深微妙,無得無捨;用妙智慧不可得,何況可得口說!

‘방편력(方便力)’이란 보살이 무생인(無生忍)의 법을 얻고 보살위에 들어가 보살의 제일의제관(第一義諦觀)을 통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 도의 도상(道相)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서 얻는 것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으며, 묘한 지혜로써도 얻을  없거늘 하물며 입으로 말할  있음이겠는가!


大悲心深念:“衆生以空事故,墮三惡道,受大劇苦;若我直說是法,則不信不受,則破壞法,墮於地獄!我今當成就一切善法、莊嚴身三十二相,引導衆生,起無量無邊諸佛神通力,得成佛道,一切衆中主,於諸法得自在。若讚惡法,衆生猶尚當受,何況實法!”是菩薩如所願思惟行,爲衆生說,使皆度脫。

큰 대비심(大悲心)으로 중생들을 깊이 생각하나, 중생은 공연한 일을 하여서 삼악도에 떨어져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보살이 생각하기를 ‘내가 만약 이 법을 곧장 말해 주어도 믿지 않고 받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법을 파괴하여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나는 이제 마땅히 일체의 착한 선법을 성취하고, 몸을 32상호로 장엄하여서 중생들을 인도하되, 무량하고 무변한 모든 부처님의 신통력을 일으켜 부처님의 불도를 이루어서 일체 중생 가운데에서 주인이 될 것이며, 제법에서 자재를 얻으리라.

나쁜 악법을 찬탄하여도 중생들은 받아들이거늘 하물며 진실한 실법(實法)이겠는가!’라고 하나니,

이 보살은 그의 소원대로 사유하고 행하면서 중생들에게 설법하여 모두를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大智度論卷第九十四 終 대지도론 94권을 마침.

大智度論  釋四諦品 第八十四 第九十四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4. 사제품(四諦品) 풀이함  2

 

▶論. 問曰:佛法、菩薩法大有差別:佛是一切智,菩薩未是一切智。

須菩提何故生疑而問佛:“何等是諸菩薩法?何等是佛法?”

▷논. 묻나니, 부처님의법(佛法)과 보살법(菩薩法)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 곧 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요 보살은 아직 일체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수보리 존자는 무엇 때문에 의심을 내어서 부처님께 “어떠한 것이 모든 보살법이며, 어떠한 것이 불법입니까”라고 여쭌 것입니까?


答曰:此中佛教菩薩如佛所行,應如是行六波羅蜜等乃至一切種智。是故須菩提問:“若如佛行,與佛何異?”佛可其意,應如是問。

답하나니,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보살에게 “마치 부처님이 행하는 바와 같이, 마땅히 그렇게 6바라밀 등에서부터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를 행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부처님과 같이 행한다면 부처님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그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이와 같이 묻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셨던 것이다.


色等諸法行處是同,但智慧利鈍有異。此中佛自說因緣:“菩薩雖如實行六波羅蜜而未能周遍,未能入一切門,是故不名爲佛。若菩薩已入一切種智門,入諸法實相中,以一念相應智慧,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斷一切煩惱習,得諸法中自在力,爾時名爲佛。”

물질(色) 등의 제법에 대한 행하여야 할 행처(行處)는 동일하지만, 다만 지혜의 영리함과 둔함에 차이가 있는 것이니,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보살은 비록 여실하게 6바라밀을 행할지라도 아직 두루하게 원만하지 못하고, 아직 일체문(一切門)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나니,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이라 하지는 못하지만, 만약 보살이 이미 일체종지(一切種智)의 문과 제법의 실상에 들어가서  생각의 일념(一念)에 상응하는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일체 번뇌의 습기를 끊고 제법 가운데에서 자재로운 힘을 얻었다면, 그 때에는 부처님이라 한다”고 하셨다.


如月十四日、十五日,雖同爲月,十四日不能令大海水潮;菩薩亦如是,雖有實智慧淸淨,未能具足諸佛法故,不能動一切十方衆生。

月十五日光明盛滿時,能令大海水潮;菩薩成佛亦如是,放大光明,能動十方國土衆生。

마치 14일과 15일의 달은 비록 동일하게 보이는 달일지라도 14일에는  바닷물에 조수가 있게   없는 것과 같이,

보살 역시도 이와 같아서 비록 진실한 실지혜(實智慧)가 있어서 청정하다 할지라도 아직은 일체 부처님의법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까닭에 시방의 일체 중생을 움직일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광명이 찼을 때의 15일의 달은  바닷물에 조수를 있게   있는 것과 같이, 보살이 성불(成佛)하는 것 또한  이와 같아서  광명을 놓고 시방국토의 중생을 움직일  있는 것이다.


此中佛自說譬喩:“如向道、得果,雖同爲聖人而有差別。”

菩薩亦如是,行者名爲菩薩,從初發心乃至金剛三昧;佛已得果,斷一切法中疑,無所不了,故名爲佛。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비유로 말씀하셨으니, “비록 도에 향하는 향도(向道)와 과를 얻은 득과(得果)가 같은 성인(聖人)들이라 할지라도 차이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고 하셨으니, 

보살 또한 이와 같아서 수행하고 있는 이를 보살이라 하며, 처음발심해서부터 금강삼매(金剛三昧)에 이르기까지의 부처님은 이미 과위를 얻었으며, 일체법 가운데에서 의심을 끊으셔서 모든 것을 두루 환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다.


須菩提復問:“自相空法中差別不可得
所謂是地獄乃至天,是性人、八人,是須陁洹乃至佛!

世尊!如地獄等衆生不可得,業因緣亦應不可得。

何以故?作業者不可得;業不可得故,果報亦不可得。佛云何說佛與菩薩有差別?”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스스로가 공한 자상공(自相空)의 법 가운데에서는 이른바 ‘이것은 지옥이요 나아가 천상이다. 이것은 성인(性人)이며인(八人, 八忍)이다.  분은 수다원이요 나아가 부처님이시다’라는 차별은 얻을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지옥 등에서와 같이 중생은 얻을  없으므로 업인연(業因緣)도 마땅히 얻을  없어야 하는 것이니, 왜냐 하면, 업을 짓는 작업자(作業者) 얻을  없고, 업(業)을 얻을  없으므로 과보(果報) 또한 얻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부처님과 보살에는 차별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佛可須菩提意,還以所問答須菩提:“衆生不知自性空法故,能起善惡業。”如經中廣說。

衆生者,凡夫,未入正位人;是人我心顚倒,煩惱因緣故起諸業。

業者,有三種:身、口、意。是三種業有二種:若善、若惡,若有漏、若無漏。

惡業故墮三惡趣,善業故生天、人中。善業復有二種:一者、欲界繫,二者、色、無色界繫。

色、無色界繫生業名不動,不動業故生色、無色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도리어 그가 묻는 것으로 대답하시기를 “수보리야, 중생들은 스스로의 성품이 공한 자성공법(自性空法)을 모르기 때문에 선악의 업을 일으키느니라”고 하셨으니, 경에서 자세히 설명하신 바와 같으며, 

‘중생(衆生)’이란 범부로서, 아직 정위(正位)에 들지 못한 사람으로, 이러한 사람은 '나'라는 아심(我心)으로 뒤바뀐 전도번뇌(顚倒煩惱)의 인연 때문에 모든 업을 일으키고 있으며, 

업에는  가지가 있으니, 몸의 신업(身業)과 입의 구업(口業)과 뜻의업(意業)이 그것이다.

  가지의에도 각각  가지씩이 있으니, 선(善)과 악(惡)이요,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이다.

나쁜 때문에악취(三惡趣)에 떨어지고 착한 때문에 천상과 인간에 태어나며, 

착한업에도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욕계에 매인 욕계계(欲界繫)요, 

둘째는 색계와 무색계에 매인 색무색계계(色無色界繫)이다. 

색계와 무색계에 매여서 태어나는 업을 부동업(不動業)이라 하며,  부동업 때문에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若衆生自知諸法性空,卽時不生著心,著心不生故不起業,乃至不生色、無色界。以實不知故生。以是事故,菩薩摩訶薩盡受行布施等法乃至十八不共法,無所失、無所少;乃至用如金剛三昧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大饒益衆生。衆生得是利益故,不復往來五道生死。

須菩提復問:“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時,實得是五道不?”佛言:“不得!”

만약 중생들이 스스로 제법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인 것을 안다면, 즉시 탐착하는 착심(著心) 내지 않을 것이며, 

탐착하는 착심(著心)을 내지 않기 때문에 업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지 않겠지만, 

실로 모르고 있기 때문에 태어나게 되나니,

이러한 까닭 보살마하살은 보시 등의 법에서부터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받아서 행하면서 잃는 것도 없고, 줄어드 것도 없으며, 나아가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서 크게 중생들을 이롭게 하며, 중생들은 이러한 이익을 얻은 까닭에 다시는도(五道)의 생사에 왕래하지 않는 것이다.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실 때에 실로 도(五道)를 얻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얻지 않느니라”고 하셨다.


問曰:佛先說“大利益故,不墮五道”,今云何言“不得”?

묻나니, 앞에서 부처님께서 “큰 이익 때문에 오도(五道)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얻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決定取相邪見、墮邪見。五道生死不得,但凡夫人以顚倒因緣起業,假名有生死五道,其實如幻、如夢。

답하나니, 결정코 상(相) 취한다면 삿된 사견이니, 삿된견에 떨어진다고도(五道)의 생사를 얻지는 않으나, 다만 범부들이 뒤바뀌어 전도된 인연으로 업을 일으키는 까닭에 임시로 가명 붙여서도(五道)의 생사가 있다고 하는 것일 뿐이니, 그것은 실로 환과 같은 여환(如幻)이고 꿈과 같은 여몽(如夢)인 것이다.


復問:“得黑、白等四種業不?”佛言:“不。”

또한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검거나  것의 흑백(黑白) 등의  가지의 사종업(四種業)을 얻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아니니라”고 하셨으니, 


“黑業”者,是不善業,果報:地獄等受苦惱處。是中衆生,以大苦惱悶極,故名爲黑。

受善業果報處,所謂諸天。以其受樂隨意自在明了,故名爲“白業”。是業是三界天。

善、不善業受果報處,所謂人、阿修羅等八部。此處亦受樂、亦受苦,故名爲“白黑業”。

“無漏業”能破不善 有漏業能拔衆生令離善惡果報中。

검은 업의 흑업(黑業)이란 착하지 못한 업의 과보로써, 지옥 등의 고뇌를 받는 것이니,  안에 있는 중생은 크게 괴로워하면서  고통이 극심하기 때문에 검은 흑(黑)이라 하며,

착한 업의 과보를 받는 곳이란, 이른바 모든 천상이니, 그곳에서는 쾌락을 누리면서 뜻에 따라 자유자재하며, 밝고 환하기 때문에  업의 백업(白業)이라 하며, 이러한 업을 받는 곳은  삼계(三界)에 있는 하늘이며,

착한 선업(善業)과 착하지 못한 불선업(不善業)의 과보를 받는 곳은 이른바 사람과 아수라 등의부(八部)들이며, 이곳에서는 즐거움을 받기도 하고 또한 고통도 받기도 하기 때문에 검고  업의 흑백업(黑白業)이라 하며, 

무루업(無漏業)은 착하지 못한 불선(不善) 깨뜨리며, 

유루업(有漏業)은 중생들을 구제하여 선악의 과보에서 여의게 하는 것이다.

 

팔부(八部), 불법을 수호하는 하늘(deva), 용(nāga), 야차(yakṣa), 건달바(gandharva), 아수라(asura), 가루라(garuḑa), 긴나라(kiṃnara), 마호라가(mahoraga)를 말한다.


問曰:無漏業應是白,何以言非白非黑?

묻나니, 무루업(無漏業)은 바로  백업(白業)이어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은 비백비흑업(非白非黑業)이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無漏法雖淸淨無垢,以空、無相、無作故無所分別,不得言白。

黑、白是相待法,此中無相待故不得言白。

復次,無漏業能滅一切,諸觀中分別故有黑、白,此中無觀故無白。

답하나니, 무루업(無漏業)은 비록 깨끗하여 더러움이 없다 할지라도 공(空)하고ㆍ무상(無相)이고ㆍ무작(無作)이기 때문에 분별함이 없으므로 ‘희다’고 말할  없으며, 

검고 흰 흑백(黑白)이라는 것은 서로가 대비되는 법이니, 이 가운데는 서로 대비됨이 없기 때문에 역시 ‘희다’고도 말할  없는 것이다.

또한 무루업(無漏業) 일체의 관(觀)을 능히 소멸시키나, 관(觀) 가운데에서는 분별하기 때문에 검고  흑백(黑白) 있지만,  가운데에는 관(觀)이 없기 때문에   등이 없는 것이다.


須菩提復問:“若不得是四種業,云何分別是地獄乃至阿羅漢?”若無黑業,云何說是地獄、畜生、餓鬼?若無白業,云何說是天、人?若無黑白業,云何說是阿修羅道?若無不白不黑業,云何說是須陁洹乃至阿羅漢?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이러한 네 가지의 업(業)을 얻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이것은 지옥이다’ 내지는 ‘아라한이다’라고 분별하는 것입니까? 

만약 검은 흑업(黑業)이 없다면 어찌하여 ‘이것은 지옥이다, 축생이다, 아귀이다’라고 말하며, 

만약  백업(白業)이 없다면 어찌하여 ‘이것은 하늘이다.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만약 검고  흑백업(黑白業)이 없다면 어찌하여 ‘이것은 아수라의 도이다’라고 말하며, 

만약 희지도 검지도 않은 불백불흑업(不白不黑業)이 없다면 어찌하여 ‘이것은 수다원이요 나아가 아라한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佛答:若一切衆生自知諸法自性空者,菩薩不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意,亦不於六道中拔出衆生。

何以故?衆生自知諸法性空,則無所度;譬如無病則不須藥,無闇則不須燈明。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일체 중생이 스스로 제법의 성품이 공한 자성공(自性空)이라는 것을 안다면,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내지도 않으며, 또한 육도(六道) 가운데에서 중생을 구출하지도 않으리라. 

왜냐 하면, 중생 스스로가법의 법성(法性) 공(空)하다는 것을 안다면, 제도될 바가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병이 없으면 약이 필요 없고 어두움이 없으면 등불이 필요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須菩提!今衆生實不知自相空法故,隨心取相生著,以著故染,染故隨於五欲,隨五欲故爲貪所覆,貪因緣故,慳、虛誑、嫉妒、瞋恚、鬪諍,以瞋恚故,起諸罪業,無所識知。是故壽終隨業因緣生於彼處,續作生死業,常往來六道中,無復窮已。

是故菩薩於諸佛及弟子所聞說諸法空,而慈愍衆生:“衆生以狂愚顚倒故生著,我當作佛,破衆生顚倒,令解諸法空相。” 所以者何?諸法不爾如凡人所著。

수보리야, 지금 중생들은 실로  자상공(自相空)의 법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을 따라 상(相) 취하고 탐착을 내며, 탐착하기 때문에 물이 들며, 물든 까닭에욕(五欲)을 따르며, 오욕(五欲)을 따르기 때문에 탐욕에 가리우고, 탐욕의 인연 때문에 간탐하고 속이고 질투하고 성내며 다투는 것이며,  

성을 내기 때문에 모든 죄업을 일으키며 아는 것이 없나니, 이러한 까닭에 목숨을 마치면 업의 인연을 따라 그곳에 태어나며, 나고 죽는 생사업을 계속 지으면서 언제나 가운데에서 왕래하나니, 다하여 그칠 날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모든 부처님과  제자에게서법이 공(空)하다는 말씀을 듣고, 중생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지만, 중생들이 어리석고 뒤바뀌어 전도된 까닭에 탐착을 내고 있으므로 ‘나는 마땅히 부처님이 되어서 중생들의 뒤바뀜을 깨뜨리고 제법의 공한 공상(空相) 알게 하리라.’고 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모든 법은 범부가 집착하는 것과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衆生法無有定實,但自於無所有中憶想分別,望有所得;

無衆生中起衆生想,無色中起色想,無受想行識中起識想。

以狂顚倒故,是人能起身、口、意業,於六道生死中不能得脫。

중생과 법은 일정하거나 어떠한 진실함도 없거늘, 다만 스스로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 가운데에서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얻을 것이 있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중생이 없는 무중생(無衆生) 가운데에서 중생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물질이 없는 무색(無色) 가운데에서 물질(色)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며, 수상행식(受想行識) 없는 가운데에서 식(識)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있나니, 

미치고 뒤바뀐 광전도(狂顚倒)된 까닭에  사람은 신구의(身口意) 업을 일으켜도(六道)의 나고 죽는 생사(生死)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라.


若但生衆生法想,結縛猶輕,易可得度。生貪欲、瞋恚,於是中起諸重業,是爲重縛,受此業果報,則難可得度;譬如積微塵成山,難可得移動。

菩薩爲是衆生故,欲破其生死因緣果報故,於般若中攝一切善法,行菩薩道,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爲衆生說四聖諦,所謂苦、苦集、苦滅、滅苦道,種種因緣開示、敷演。

만약 중생이라는 생각과 법이라는 생각만을 내고 있을 뿐이라면 그 결박(結縛)은 오히려 가벼워서 쉽게 제도될 수 있지만, 탐욕과 진에(瞋恚)를 낸다면, 이 가운데에서는 여러 중한 업을 일으키게 되므로 이것이 곧 거듭 얽어매인 중박(重縛)이 되나니, 이러한 업으로 과보를 받게 되면 제도하기 어려우니, 마치 작은 미진(微塵)이 쌓여서 산이 되면 움직이거나 옮기기 어려운 것과 같으니라.

보살은 이러한 중생들을 위하여 그 나고 죽는 생사 인연과 과보를 파괴시키고자 반야가운데서 일체의 착한 선법을 포섭하며, 보살도를 행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중생들을 위하여 사제(四諦)를 설하나니,

이른바 괴로움의 고(苦)와 괴로움의 쌓임인 고집(苦集)과 괴로움의 사라짐인 고멸(苦滅)과 괴로움이 사라지는 길의 멸고도(滅苦道)를 갖가지의 인연으로 열어 보이고 널리 펴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大智度論  釋四諦品 第八十四 第九十四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4. 사제품(四諦品) 풀이함  1

 

▶經. 須菩提白佛言:“世尊!若是諸法是菩薩法,何等是佛法?”

▷경.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 모든법이 바로 보살법(菩薩法)이라면, 어떠한 것이 부처님의 불법(佛法)인지요?”


佛告須菩提:“如汝所問‘是諸法是菩薩法,何等是佛法’者,須菩提!菩薩法亦是佛法。

若知一切種,是得一切種智,斷一切煩惱習,菩薩當得是法;佛以一念相應慧知一切法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是爲菩薩、佛之差別。譬如向道、得果異,是二人俱爲聖人。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無㝵道中行,是名菩薩摩訶薩;解脫道中無一切闇蔽是爲佛。”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묻기를 ‘이 모든법이 바로 보살법(菩薩法)이라면, 어떠한 것이 부처님의 불법(佛法)인가?’라고 하였는데, 

수보리야, 보살법(菩薩法)  부처님의 불법(佛法)이니라. 

만약 일체의 종류를 안다 이것이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은 것이요, 일체 번뇌의 습기를 끊은 것이니라. 

보살은 마땅히  법을 얻어야 하지만, 부처님은  생각과 상응하는 지혜의 일념상응혜(一念相應慧)로써 일체법을 알며,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으니,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과 부처님의 차이이니라. 

비유하자면, 마치 도에 향하는 향도(向道)와 과를 얻음의 득과(得果)가 다르지만,   사람 모두가 성인인 것과 같이, 

수보리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로서 무애도(無礙道)에서 행하는 이를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이라 하며, 

해탈도(解脫道)에서 일체의 어둡게 가려져서 막힘의 암폐(闇蔽)가 없는 분을  부처님이라 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一切法自相空,自相空法中,云何有差別之異是地獄、是餓鬼、是畜生、是天、是人、是性地人、是八地人、是須陁洹人、是斯陁含、阿那含、阿羅漢人、是辟支佛、是菩薩、是多陁阿伽度、阿羅呵、三藐三佛陁?世尊!如諸人不可得,業因緣亦不可得,果報亦不可得!”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이 자상공(自相空)이라면, 자상(自相)이 공한 공법(空法) 가운데에서 어떻게 ‘이것은 지옥이요, 이것은 아귀요, 이것은 축생이요 이것은 하늘이요, 이것은 사람이다,  분은 성지인(性地人)이요,  분은지인(八地人)이요,  분은 수다원이요,  분은 사다함이요, 아나함이요, 아라한의 사람이요,  분은 벽지불이요,  분은 보살이며,  분은 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ㆍ아라하(阿羅呵)ㆍ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이다’고 차별할 수 있는지요? 

세존이시여, 마치 모든 사람을 얻을  없는 제인불가득(諸人不可得)인 것과 같이 업의 인연도 얻을  없는 업인연불가득(業因緣亦不可得)이며, 과보 또한 얻을  없는 과보불가득(果報不可得)인 것입니다.”


佛言:“如是!如是!如汝所言,自相空法中,無衆生、無業因緣、無果報。

須菩提!衆生不知是諸法自相空,是衆生作業因緣 若善、若惡、若無動:罪業因緣故,墮三惡道中;福業因緣故,在人、天中生;無動業因緣故,色、無色界中生。是菩薩摩訶薩行檀波羅蜜乃至十八不共法時,盡受行是助道法;如金剛三昧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得已,饒益衆生。是利常不失故,不墮五道生死中。”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자상공(自相空)의 법에서는 중생도 없고, 업의 인연도 없으며, 과보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중생들은 법이 자상공(自相空)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중생은 업의 인연으로써 선(善)하거나 악(惡)하거나 무동(無動, aniñja. 착한 과보를 얻음이 결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인 업인연을 짓고 있나니, 

죄업(罪業)의 인연으로 삼악도에 떨어지고, 복업(福業)으로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며, 무동업(無動業)의 인연으로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단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를 행할 때, 도를 돕는 조도법(助道法)을 남김없이 행하며,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얻고 나서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나니, 

이러한 이익은 항상 잃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의 오도(五道)의 생사 속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已,得五道生死不?”

佛言:“不得也!須菩提!”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뒤에 오도(五道)에서의 생사를 얻으시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얻지 않느니라.”


“世尊!得業若黑、若白、若不黑不白不?” 佛言:“不也!”

수보리 존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업으로서 검거나 희거나 혹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것을 얻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얻지 않느니라.”


“世尊!若不得,云何說是地獄、餓鬼、畜生、人、天、須陁洹乃至阿羅漢、辟支佛、菩薩、諸佛?”

“세존이시여, 만약 얻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이것은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간ㆍ천상이고, 수다원 내지는 아라한이며, 벽지불이다 보살이며, 모든 부처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시는지요?”


“須菩提!若衆生知諸法自相空,菩薩摩訶薩不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不拔衆生於三惡趣,乃至五道往來生死中。

須菩提!以衆生實不知諸法自性空故,不得脫五道生死;是菩薩從諸佛所聞諸法自性空,發意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야, 만약 중생들이법의 자상(自相)이 공(空)하다는 것을 안다면,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지도 않고, 또한 중생을악취(三惡趣, 삼악도) 내지는 오도(五道)에서 생사 왕래하는 가운데에서 구제하지도 않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중생은 실로법이 자상공(自相空)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도의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법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듣고 뜻을 내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니라.


須菩提!諸法不爾如凡夫人所著;是衆生於無所有法中,顚倒妄想分別得法 無衆生有衆生相,無色色相,無受想行識受想行識相;乃至一切有爲法無所有,用顚倒妄想心,作身、口、意業因緣,往來五道生死中不得脫。

수보리야,법이란 마치 범부들이 집착하고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중생들은 있지도 않은 무소유(無所有)의 법에서 뒤바뀌어서 허망한 생각의 전도망상(顚倒妄想)으로 법을 얻겠다고 분별하는 것이니, 

중생은 없는 것임에도 중생의 상(相) 있다고 생각하고, 물질(色)은 없는 것임에도 물질의 색상(色相) 있다고 생각하며, 수상행식(受想行識) 없는 것임에도 수상행식(受想行識) 상(相) 있다고 생각하며, 

나아가 일체의 유위법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임에도 뒤바뀌고 허망한 생각의 전도망상(顚倒妄想)으로 몸과 입과 뜻의, 신구의(身口意)의 업인연을 지어서 5도의 생사에 왕래하면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라.


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一切善法內般若波羅蜜中,行菩薩道,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已,爲衆生說四聖諦苦、苦集、苦滅、苦滅道,開示分別。

一切助道善法皆入四聖諦中,用是助道善法故,分別有三寶。何等三?佛寶、法寶、僧寶。不信拒逆是三寶故,不得離五道生死。”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일체의 착한법을 반야바라밀에 받아들여서 보살도를 행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뒤에는 중생들을 위하여성제(四聖諦) 즉, 괴로움의 고(苦)와 괴로움의 쌓임인 고집(苦集)과 괴로움의 사라짐인 고멸(苦滅)과 괴로움이 사라지는 길의 고멸도(苦滅道)를 열어 보이고 분별하느니라. 

일체의 도를 돕는 착한 모두는 사성제(四聖諦) 들어가며,  도를 돕는 착한법으로써 분별하여보(三寶)가 있으니,

무엇이 셋인가? 불보(佛寶)와 법보(法寶)와 승보(僧寶)이니, 보를 믿지 않고 거역하기 때문에도의 생사를 여읠  없는 것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用苦聖諦得度?用苦智得度?用集聖諦得度?用集智得度?用滅聖諦得度?用滅智得度?用道聖諦得度?用道智得度?”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인 고성제(苦聖諦)로써 바라밀을 얻는 득도(得度)를 하는 것입니까? 

고지(苦智)로써 바라밀을 얻는 것입니까? 쌓임의 거룩한 진리인 집성제(集聖諦)로써 바라밀을 얻는 것입니까?

집지(集智)로써 바라밀을 얻는 것입니까? 사라짐의 거룩한 진리인 멸성제(滅性諦)로써 바라밀을 얻는 것입니까?

멸지(滅智)로써 바라밀을 얻는 것입니까? 도의 거룩한 진리인 도성제(道聖諦)로써 바라밀을 얻는 것입니까?

도지(道智)로써 바라밀을 얻는 것입니까?”


佛告須菩提:“非苦聖諦得度,亦非苦智得度;乃至非道聖諦得度,亦非道智得度。

須菩提!是四聖諦平等故,我說卽是涅槃;不以苦聖諦,不以集、滅、道聖諦,亦不以苦智,不以集、滅、道智得涅槃。”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인 고성제(苦聖諦)로써 바라밀을 얻는 것도 아니요 

또한 고지(苦智)로 바라밀을 얻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도의 거룩한 진리인 도성제(道聖諦)로써 바라밀을 얻는 것도 아니요 또한 도지(道智) 바라밀을 얻는 것도 아니니라.

수보리야, 성제는 평등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열반이라고 말하나니,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인 고성제(苦聖諦)에 의해서가 아니고 쌓임ㆍ사라짐ㆍ도의 거룩한 진리에 의해서가 아니며, 또한 고지(苦智)에 의해서도 아니고, 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에 의해서가 아니면서도 열반을 얻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何等是四聖諦平等?”

“須菩提!若無苦、無苦智,無集、無集智,無滅、無滅智,無道、無道智,是名四聖諦平等。

復次,須菩提!是四聖諦如、不異、法相、法性、法住、法位、實際,有佛、無佛,法相常住,爲不誑不失故。

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爲通達實諦故,行般若波羅蜜。”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성제의 평등함인지요?”

“수보리야, 만약 고도 없는 무고(無苦)이고, 고지도 없는 무고지(無苦智)이며, 집도 없는 무집(無集)이고, 집지도 없는 무집지(無集智)이며, 멸도도 없은 무멸(無滅)이고 멸지도 없는 무멸지(無滅智)이며, 도도 없는 무도(無道)이고 도지도 없는 무도지(無道智)라면, 이를 바로성제의 평등함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성제는 여(如)ㆍ불이(不異)ㆍ법상(法相)ㆍ법성(法性)ㆍ법주(法住)ㆍ법위(法位)ㆍ실제(實際)이니,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법의 법상(法相) 항상 머무르면서 속이지도 않고 잃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진실한 이치인 실제(實諦)를 통달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云何菩薩摩訶薩爲通達實諦故,行般若波羅蜜時,如通達實諦故,不墮聲聞、辟支佛地,直入菩薩位中?”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진실한 이치인 실제(實諦)를 통달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진실한 이치인 실제(實諦)를 통달한 그대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고 곧장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게 되는지요?”


佛告須菩提:“若菩薩摩訶薩如實見諸法;見已,得無所有法;得無所有法已,見一切法空 四聖諦所攝、四聖諦所不攝法皆空。若如是觀,是時,便入菩薩位中;是爲菩薩住性地中,不從頂墮。

用是頂墮故,墮聲聞、辟支佛地。是菩薩住性地中,能生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

是菩薩住是初定地中,分別一切諸法,通達四聖諦:知苦,不生緣苦心;乃至知道,不生緣道心。

但順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觀諸法如實相。”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사실대로 여실(如實)하게 제법을 보고,  뒤에는 있는 바가 없는 무소득(無所得)의 법을 얻고, 있는 바가 없는 무소득(無所得)의 법을 얻은 뒤에는 일체법은 공한 것으로, 사성제에 속하거나성제에 속하지 않은 법이거나 간에 모두가 공하다고 보는 것이니라. 

만약 이와 같이 관찰한다면, 이 때에  보살의 지위에 들게 되나니, 이를 보살의 성지(性地)에 머무르면서 정위(頂位)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정위(頂位)로부터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는 것이지만,  보살은 성지 가운데에 머물러서 선(四善)과무량심(四無量心)과무색정(四無色定)을 능히 내느니라.

 보살은  초정지(初定地)에 머물러서 일체법을 분별하면서성제를 통달하여 괴로움의 고(苦)에서는 괴로움을 반연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되, 나아가 도(道)에서도 도를 반연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며, 

다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만을 따르면서법의 사실대로의 여실상(如實相)을 관찰할 뿐이니라.”


“世尊!云何觀諸法如實相?”佛言:“觀諸法空。”

“세존이시여, 어떻게 제법을  사실대로의 여실상(如實相) 관찰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법이 공한 법공(法空)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니라.”


“世尊!何等空?”

佛言:“自性空。是菩薩用如是智慧觀一切法空,無法性可見住是性中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何以故?無性相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非諸佛所作,非辟支佛所作,亦非阿羅漢所作,亦非向道人所作,亦非得果人所作,亦非菩薩所作。但衆生不知不見諸法如實相,以是事故,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以方便力故,爲是衆生說法。”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공(空)한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제 성품인 자성(自性)이 공한 것이니라. 이 보살은 이와 같은 지혜로써 일체법이 공한 것을 관찰한다면, 볼 수 있는 어떠한 법성(法性)도 없으며, 이러한 법성(法性)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왜냐 하면 성품의 상이 없는, 무성상(無性相)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기 때문이니라.

그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만든 것도 아니요, 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며 또한 아라한이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도에 향한 향도인(向道人)이 만든 것도 아니며, 과보를 얻은 득과인(得果人)이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보살이 만든 것도 아니 것이나,

다만 중생이 제법의 사실대로의 여실상(如實相)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할 뿐이니라.

이러한 까닭에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력으로써 이러한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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