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권 5
阿難言:“我今於此重閣講堂,遠洎恒河上觀日月,擧手所指縱目所觀,指皆是物無是見者。
世尊!如佛所說,況我有漏初學聲聞,乃至菩薩亦不能於萬物象前剖出精見,離一切物別有自性。”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제가 지금 이 층층의 전각 강당에서 멀리 항하의 강까지와 위로는 해와 달을 보면서, 손으로 가리킬 수 있는 것과 눈이 가는 대로 볼 수 있는 것을 다 가리키는 것 모두는 물체일 뿐, 견(見)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루(有漏) 초학(初學)의 성문이라서 그렇다고 하나, 심지어 보살들의 큰 지혜로도 일체의 물상에서 일체의 물상 앞에서 정견(精見)을 쪼개어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니, 모든 물상을 떠나야만 별도로 성품의 자성(自性)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ㅡ만약 물상을 떠나서 따로 정밀하게 보는 정견이 있다면, 그 보는 주체가 도리어 물상과 같아서 실제로 그 본체가 있을 것이므로 가리켜 낼 수가 있겠지만, 비록 대성이라 할지라도 일체 물상 앞에서 물상을 제거해 버리고 하나의 물상이 아닌 정견을 가려 낸다면, 물상이 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물상을 보건대 이는 본래 허망한 것이므로 가리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일체물별유자성(離一切物別有自性), 자성(自性)은 모든 존재가 지닌 변하지 않는 본질이며 공성(空性)이다. 주관의 마음인 견분(見分)과 객관의 마음인 상분(相分)도 내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을 보는 상태는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주객을 떠나 있는 견(見)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참마음이고 진짜 '나'인 것이나, 견(見) 아닌 것이 없다.
물상과 허공은 견(見)이 아니다. 물상은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사물을 빠짐없이 골고루 보는 것이므로, 따라서 견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물상과 허공 자체는 견이 아니므로, 물상의 입장에서는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보는 입장에서는 견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佛言:“如是,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변물무비견(辯物無非見)
佛復告阿難:“如汝所言,無有精見,離一切物別有自性,則汝所指是物之中無是見者。
今復告汝!汝與如來坐祇陁林更觀林苑,乃至日月種種象殊,必無見精受汝所指;汝又發明此諸物中何者非見?”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대로 정견(精見)을 가려낼 수 없고 일체 물상을 떠나야만 별도로 정밀하게 보는 자성(自性)이 있다면, 네가 가리키는 물상 안에는 보는 주체의 견정(見精)이 없어야 하리라.
너에게 한 번 더 말하나니, 네가 지금 여래와 함께 앉아있는 기타림(祇陀林)에서, 다시 수풀과 동산에서부터 해와 달까지 살펴보아라. 가지가지의 다른 모습에서 네가 가리켜 낼 수 있는 견정(見精)이 없다면,
너는 다시 이 일체의 물상 가운데에서 무엇이 보는 것이 아닌지를 밝혀보아라.”
ㅡ만물은 상분(相分)으로, 견분(見分)을 떠나서는 상분이 드러나지 않는다. 여래께서는 아난 존자에게 상분 중에 견분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물상과 허공은 견(見)이 아니지만, 견이 빠짐없이 골고루 있어서, 우리가 사물을 본다. 따라서 견 아닌 것이 없다. 물상의 입장에서는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보는 입장에서는 견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阿難言:“我實遍見此祇陁林,不知是中何者非見?何以故?若樹非見,云何見樹?若樹卽見,復云何樹?如是乃至若空非見,云何爲空?若空卽見,復云何空?我又思惟是萬象中,微細發明無非見者。”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저는 실재로 이 기타림을 두루 보고 있으나, 이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보는 것이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나무가 보는 것이 아닌 비견(非見)이라면 어떻게 나무를 본다고 하겠으며,
만약 나무가 보는 주체라고 한다면, 어찌 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나아가 만약, 허공이 보는 주체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허공을 보겠으며,
만약, 허공이 보는 주체라면 어찌 허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다시 사유(思惟)하여 보니, 이 일체의 물상 가운데에서 세밀하게 밝힌다면, 보는 주체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佛言:“如是,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초학 망착(罔措)
茫然不知是義終始,一時惶悚失其所守。
그러자 대중 가운데 무학(無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초학의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듣고 아득하여서, 그 뜻의 나중과 처음을 몰라서 모두 놀라, 어느 뜻을 지켜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였다.
ㅡ부처님께서 대답하신 2가지의 이치가 정함이 없음을 의심한 까닭에 지키던 것을 잃은 듯하였다.
如來知其魂慮變慴,心生憐愍,安慰阿難及諸大衆:“諸善男子!無上法王是眞實語,如所如說不誑不妄,非末伽梨四種不死矯亂論議,汝諦思惟無忝哀慕。”
여래께서 그들의 넋이 변하여 놀란 것을 아시고 가련하게 여기시어, 아난 존자와 대중들을 달래면서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무상법왕(無上法王, 부처님)의 말은 진리그대로 설하는 진실어(眞實語)이며, 속이지 않는 불광어(不誑語)이며, 거짓이 없는 불망어(不妄語)이니, 말가리(末伽黎, 외도) 등이 죽지 않는다고 교란하는 네 가지 희론인 사종불사교란논의(四種不死矯亂論議)가 아니니라.
너희들은 자세히 사유하여 법을 원하는, 간절히 애모(哀慕)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라.”
ㅡ부처님은 아난존자가 적상심성(寂常心性)을 물은 후에 여러 가지 예를 들어 견성(見性)에 대하여 밝히셨다.
①전진(前塵)은 스스로 어두워도 견성은 훼손되지 않음을 들어서 견성이 바로 마음임을 밝히셨고,
②손은 스스로 쥐고 펴지만, 견성은 펴거나 쥐거나 하지 않음을 들어 견성은 움직이지 않음을 밝히셨고,
③펴지고 오그라드는, 서축(舒縮)하는 것은 변하는 것이고, 서축(舒縮)하지 않는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님을 들어 견성은 멸하지 않음을 밝히셨고,
④신심(身心)은 모두 묘하게 비추고 밝고 상적(常寂)한 진심이 드러낸 물상임을 들어 견성은 잃지 않는 것임을 밝히셨고,
⑤돌려보낼 수 있는 것은 아난이 아니고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은 바로 아난임을 들어 견성은 돌려보낼 수 없음을 밝히셨으며,
⑥사물은 차별이 있지만 견성은 차별이 없음을 들어 견성은 뒤섞이지 않음을 밝히셨다. ㅡ 한울림
▷문수보살께서 밝혀 주시기를 청함
是時,文殊師利法王子愍諸四衆,在大衆中卽從座起,頂禮佛足合掌恭敬而白佛言:
“世尊!此諸大衆,不悟如來發明二種精見色空,是非是義。世尊!若此前緣色空等象,若是見者應有所指;若非見者應無所矚。而今不知是義所歸故有驚怖,非是疇昔善根輕尟,唯願如來大慈,發明此諸物象與此見精元是何物,於其中閒無是非是。”
그 때에 대중 가운데 있던 문수사리 법왕자(法王子)가 사부대중(四部大衆)을 가련하게 여기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합장하여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대중은 여래께서 밝혀주신 정밀하고 밝게 보는 정명(精明)과 보는 근원의 견원(見元)과, 전연(前緣)의 물질(色)과 공(空)에 대하여 이것(是)인지, 이것이 아닌(非是)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 전연(前緣)의 물질의 형상인 색(色像)과 공(空像)이 보는 주체라면, 마땅히 손으로 가리킬 대상이 있어야 할 것이며,
만약 보는 주체가 아니라면, 당연히 볼 대상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의 대중들은 지금 이 이치가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놀라고 있을 뿐으로, 옛날부터 바른 근성의 선근(善根)이 모자란 탓은 아닙니다.
부디 여래께서는 대자(大慈)를 베푸셔서, 이 일체의 물상(物象)과 보는 정기의 견정(精見)은 본래 무엇이라서, 그 중간에 그렇다고 하는 시(是)라고도 할 수 없고, 그렇지 않다는 비시(非是)라고도 할 수 없는지에 대하여 밝혀주시옵소서.”
ㅡ대중이 불즉불리(不卽不離)의 묘리(妙理)를 몰라서 망연해 하자 문수보살이 대중을 대신해서 청문한 것이다.
색(色)과 공(空)이 견성이라면, 만상을 마주하는 능견(能見)의 견성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하고,
만약 색공이 견성이 아니라면 만상을 마주해도 보여지는 물건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뜻을 모른다.
이승보살(二乘菩薩)은 미세한 법집(法執)을 파하지 못하고고 상(相)을 여의어 견정을 깨달았으므로, 불즉불리(不卽不離)의 뜻을 모르고, 견분(見分)은 내분(內分)에 속하여 볼 수 없는데 법성(法性)에 들지 못한 사람은 외상(外相)만 파하고 내견(內見)을 볼 수 없어서 이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물상과 견정이 마주할 때 그 중간에 견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밝혀달라고 청문한 대목이다.ㅡ 한울림
견정(見精)과 색공(色空)이 같은 것의 시(是)인가? 다른 것의 비시(非是)인가?
견정(안근/主)이 색공(색진/客)을 보고 안식이 생긴다. 그러면 견정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면 견정이 없는 것인가? 견정이 없으면 색공이 보일 리가 없다.
그러면 견정이 있는 것인가? '있다'고 한다면 견정을 찾아낼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것이 견정인지 알 수가 없으니, 따라서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없다'고 한다면 색공을 볼 수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볼 수 있으니 견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견정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견정과 색공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사물 자체는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은 견(見)이 빠짐없이 골고루 있기 때문이다.ㅡ향적법진
▷본체는 하나의 동체(同體)라는 것을 보이시다.
佛告文殊及諸大衆:“十方如來及大菩薩,於其自住三摩地中,見與見緣幷所想相,如虛空花本無所有。
此見及緣元是菩提妙淨明體,云何於中有是非是?文殊!吾今問汝,如汝文殊,更有文殊是文殊者?爲無文殊?”
부처님께서 문수 보살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시방의 여래와 뛰어난 대보살들이 스스로 머무시는, 자주삼마지(自住三摩地) 가운데에서의 견(見)과 견의 경계(대상)의 견연(見緣)과 그리고 생각하는 모습의 상상(想相)들은 마치 허공의 꽃과 같은 것으로, 본래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이니라.
이 견(見)과 견의 경계(대상)의 견연(見緣)은 본래 보리의 묘하고 맑고 밝은 본체인 보리묘정명체(菩提妙淨明體)이거늘,
어찌 이러한 가운데에서 '이것(是)이다 이것이(非是) 아니다'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문수여, 너에게 묻겠으니,
너 그대로가 문수인데, 다시 문수가 있다고 하여서 이것은 문수이다, 문수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ㅡ견(見)이란 근(根)이고, 견연은 경계(境, 대상)이고, 생각하는 모습의 상상(想相)은 식(識)이다. 근경식, 3가지가 만법을 다 포섭하고 있어서, 모든 인연법이 원래 하나의 보각이므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안다면, 모든 의심이 가시는 것이다. 즉 모양(相)을 보는 것이 망령된 것이므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 없고, 성품을 보면 본래가 참된 것이므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자주삼마지(自住三摩地), 자성(自性)의 수능엄의 바른 선정인 수능정정(首楞正定)이다. 이 선정은 권교(權敎)와 소승의 출입이 있는 선정과 같지 않은 것이라서 자주(自住)라 하였다. 즉, 자주본지풍광(自住本地風光)은 닦아서 조작되는 것이 아니다.
*여허공화본무소유(如虛空花本無所有), 허공의 꽃과 같은 것으로, 본래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니라.;
부처님과 원돈(圓頓)보살은 변계소집(徧計所執)된 육식(六識)은 본래 공(空)이고 대상에 의존하는 근진(根塵)은 환(幻)과 같아서, 마치 눈병 걸린 사람이 보는 허공의 아른거리는 꽃과 같으며, 연(緣)에서 나와 그 본성(本性)이 없는 것니 본래 있지 않음과 같다는 것이다.
*운하어중유시비시(云何於中有是非是),능견(能見)인 견분(見分)과 연하는 상분(相分)을 요달(了達)하는 당체(當體)가 바로 진(眞)이다. 근(根)은 능연(能緣)이고 진(塵)은 소연(所緣)이며 식(識)은 연(緣)으로 생긴다.
*원시보리묘정명체(元是菩提妙淨明體), 원래 보리의 묘하고 맑고 밝은 본체인 보리묘정명체이다;
‘원(元)’이란 보리는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묘(妙)란 법신덕(法身德)으로 유(有)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라는 말이며,
정(淨)이란 해탈덕(解脫德)으로 처염불변(處染不変)이라는 말이고,
명(明)이란 반야덕(般若德)으로 영광독요(靈光獨耀)라는 말이다.
즉 보리란 이 삼덕(三德)을 깊이 간직한 체(體)로서 시비(是非)를 초월한 것이다.-능엄경강의
*자주삼마지(自住三摩地)는 진견(眞見)과 전상(轉相)인 견분(見分)이 서로 깊게 연이 된다.
이렇게 망립(妄立)된 것이 망능(妄能)을 일으킨다.
능견의 견분과 외진(外塵)인 상분(相分)이 서로 연(緣)하는 것에 비록 깊고 얕음이 있을지라도 모두가 허망(虛妄)한 상상(想相)인 것으로, 견정과 견연의 근본을 끝까지 찾아보면 모두가 묘정명체에서 발원한 것이다.
불보살님께서 삼매정정(三昧正定)에 머물며, 제8식을 돌려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이루어서 8식이란 이름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8식 중의 견분을 논하겠는가?
견분이 이미 없으니 상분이 성립될 수 없다. 견상의 2분은 원래 묘정명체(妙精明體)인 진심으로 시시비비(是是非非)의 희론법이 아닌 것이다. ㅡ한울림
“如是,世尊!我眞文殊,無是文殊。何以故?若有是者,則二文殊。然我今日非無文殊,於中實無是非二相。”
문수 보살이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가 실제 문수인데, '이것이 문수이다'라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것(是)이 '문수이다'라고 한다면, 바로 두 개의 문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저는 없는 문수가 아니오니, 그 가운데에서는 참으로 '이것(是)이다 이것이(非是) 아니다'라는 이상(二相)이 있을 수 없습니다.”
ㅡ일진법계(一眞法界)는 본래 시(是)와 비(非)의 두 상이 없음을 밝힌 것으로, 유(有)와 무(無), 시(是)와 비(非)의 이상(二相)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합현(合顯)
佛言:“此見妙明與諸空塵亦復如是,本是妙明無上菩提淨圓眞心,妄爲色空及與聞見,如第二月,誰爲是月?又誰非月?文殊!但一月眞,中閒自無是月非月。是以汝今觀見與塵,種種發明名爲妄想,不能於中出是非是,由是精眞妙覺明性,故能令汝出指非指。”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는 견(見)의 미묘한 밝음의 묘명(妙明)과 모든 공(空)과 육진 경계(色)도 역시 이와 같이 본래 묘하고 밝은 무상보리의 맑고 원만한 참 마음의 보리정원진심(菩提淨圓眞心)이니라.
이 참 마음이 허망하게 물체(色)와 공(空)과 보고(見)과 듣는 문(聞)으로 변하여서, 마치 제이의 달(第二月)과 같이 되었으니, 어느 것이 달이고, 어느 것이 달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문수여, 단지 하나의 달만이 참된 달이라 한다면, 그 중간에 '달이다 달이 아니다'라고 할 까닭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보는 주체인 견(見)과 대상 경계인 진(塵)을 살펴서 가지가지로 밝히는 것은 허망한 망상(妄想)이라 이름하나니, 그 가운데에서 '이것(是)이다 이것이(非是) 아니다'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진실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을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너로 하여금 '가리켜 밝히고, 가리켜 밝힐 수 없다'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ㅡ이 문답 가운데에서 각각 셋으로
질문의 3 가지는 '네가 문수인 것과 같이'와, '다시 문수라고 할 문수가 있는가?'와, '그러한 문수가 없는가'의 셋이고,
그 3 가지의 대답은 '제가 참 문수 입니다'라고 한 것은 보리정명체를 성립시킨 것이고,
'그러한 문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것은 공과 색이 곧 견임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나 현재 저는 없는 문수가 아니오니'라고 한 것은 공과 색이 견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보는 작용의 미묘한 밝음의 묘명(妙明), 견성은 바로 진심으로, 무시이래로 망상과 혼재해 있는 것이나, 망상이 견성의 광명을 영원히 차폐할 수 없는 것이라서 묘명이라 하는 것이다.
*본래 묘하고 밝은 본시묘명(本是妙明), 원래 그러한 것으로, 수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보리의 맑고 원만한 참 마음의 보리정원진심(菩提淨圓眞心), 무시이래로 진심은 천변만화하는 망상 중에 있으나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맑은 정(淨)’이라 하고, 이 진심이 변화하지는 않지만 천변만화하는 망상을 따라 끝없이 많은 작용을 나타내는 까닭에 원만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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