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권 4
▷견성(見性)은 대소(大小), 내외(內外), 서축(舒縮), 명암(明暗), 통하고 막힘의 통색(通塞) 등에 있지 않다.
佛告阿難:“一切世閒大小內外諸所事業各屬前塵,不應說言見有舒縮。譬如方器,中見方空,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세간의 크거나 작다는 대소(大小)나, 안이나 밖이라는 내외(內外)의 여러가지 작용인 사업(事業)은 각각의 앞의 경계인 전진(前塵)에 달려 있을 뿐이니, 보는 성품이 펴지고 움츠려드는, 서축(舒縮)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느니라.
비유하자면, 모난 그릇 속에서 모난 허공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ㅡ일체세간은 중생과 기계(器界), 대소(大小)와 내외(內外)는 한 세계, 한 집안 등이며, 여러가지 사업은 펼쳐지고 움츠러들며, 좁고 단절되는 등의 유(類)를 말한다. 이것은 만법이 다 전진(前塵)에 속하여서 나의 영각(靈覺)과는 관계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진은 크고 작음이 있지만 보는 주체는 서축(舒縮)하지 않다는 것이다.
吾復問汝,此方器中所見方空,爲復定方?爲不定方?若定方者,別安圓器空應不圓;若不定者,在方器中應無方空。汝言不知斯義所在,義性如是云何爲在。
내가 다시 너에게 묻겠으니, 모난 그릇에서 보는 모난 허공은 모나게 정해진 정방(定方) 이겠는가?
모나게 정해지지 않은 부정방(不定方) 이겠는가?
만약 정해진 모남의 정방(定方)이라면, 둥근 그릇에 담을지라도 그 허공은 반드시 둥글지 않아야 할 것이며,
만약 정해진 모남이 아닌 부정방(不定方)이라면, 모난 그릇 속에 있을지라도 당연히 모난 허공이 없어야 할 것이다.
네가 말한 ‘그 뜻이 있는 곳을 모른다’는 뜻의 내용인 의성(義性)이 이러한 것이니,
능히 보는 견성(見性)이 큰 곳에 있다고 하겠는가?
작은 곳에 있다고 하겠는가?
ㅡ그릇은 전진(前塵)을 비유한 것이고, 허공은 보는 주체를 비유한 것이다.
견성(見性)은, 만유의 본체로써 변함이 없는 것이지만 인연에 의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것으로, 일체가 평등하고 불생불멸하여 변화가 없는, 수연불변(隨緣不變)이며,
연(緣)을 따라 일(事)을 일으키는 동작이 있는 불변(不變)의 진여(眞如)는 그 자체가 변치 않는 것이지만, 외연(外緣)을 만나면 만유를 내는 불변수연(不變隨緣)으로, 이러한 수연불변(隨緣不變)과 불변수연(不變隨緣)의 두 가지 공능이 있음을 밝혔다
阿難!若復欲令入無方圓,但除器方空體無方,不應說言更除虛空方相所在。
아난아, 만약 둥글고 모남이 없는 무방원(無方圓)으로 들어가게 하려면, 단지 모난 그릇만 없애면 될 것이지만,
허공 자체는 모남이 없으니, 더 이상 허공에 있는 모남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나니,
▷생각을 버림
若如汝問,入室之時縮見令小,仰觀日時汝豈挽見齊於日面?若築牆宇能夾見斷,穿爲小竇寧無竇迹?是義不然。
네가 질문한 바대로, 방에 들어갔을 때 보는 성품이 움츠러져 작아지는 것이라면,
고개를 들어 해를 바라 볼 때에는, 그 보는 성품을 늘려서 해에 맞추어야 할 것이다.
만일 담장이나 지붕에 끼어서 보는 작용이 끊어진다면,
벽에 작은 구멍을 뚫었을 때에는 어찌하여 이은 흔적이 없는 것인가?
네가 말한 뜻은 그렇지 않느니라.
ㅡ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ㅡ결론지어 나타내다.
一切衆生從無始來迷己爲物,失於本心爲物所轉,故於是中觀大觀小;
일체 중생들이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스스로를 물체로 미혹하여, 본래의 본신(本心)을 잃고 물체를 따라 굴러 온 까닭에,큰 것을 보고 작은 것을 보는 것이니라.
ㅡ일체 중생들이 무시로부터 자신을 모르고 불질을 자기라고 여겨서, 즉 마음 속의 의식이 마치 밖의 물질처럼 나타나는 자신의 마음을 밖의 물질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밖에 있는 의식의 대상이 되는 물질은 오직 마음 속의 의식이 나타난 것이다'라고 무성섭론(無性섭攝論)에서 말하였다. 그러나 인식하는 성품은 허망한 것이고 오직 하나의 마음일 뿐이니, 이것이 참다운 자기(自己)이다.
마음은 상주진심(常住眞心)이고, 청정해서 모양이 없고 공적해서 허공과 같은 성정명체(性淨明體)이다.
그릇(器)은 육진경계이고, 허공(空)은 볼 줄 아는 성품인 견성(見性)에 비유하고 있다.
허공이 네모 또는 둥근 모양이 없듯이 견성도 모양이 없다.
허공은 모양이 없으므로 축소되거나 늘어나지 않는다.
아난은 눈(眼根)을 견정(見精)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견(見)의 크기를 말하고 있다.
눈은 카메라 렌즈와 같은 기관일 뿐이고, 보고 아는 것은 마음이다.
따라서 견성(見性)은 크기가 없으나, 견정(見精)은 시력과 관계가 있다.
인간의 눈에는 380nm~780nm 사이의 가시광선만 보인다고 한다.ㅡ 향적법진.
若能轉物則同如來,
만약, 물체를 굴릴 수 있다면, 여래와 같아서,
ㅡ약능전즉동여래(若能轉物則同如來), 물체를 굴리는 전물(轉物)의 공은 반드시 묘지(妙智)에 의지하여서 원만한 이치를 깨닫고, 법집(法執)을 파하고, 마음 밖에 한 법(法)도 없는, 법법(法法)이 유심(唯心)이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는 것이다.
만물을 자기로 돌려 천지와 내가 동근(同根)으로, 만물이 모두 나와 한 몸임을 아는 것이 사법계(事法界)에서 깨달아, 이법계(理法界)로 들어가는 것이다.
身心圓明不動道場,於一毛端遍能含受十方國土。”
신심(身心)이 뚜렷이 밝고 원만하여서, 부동(不動)의 도량에서,
하나의 털 속에 시방국토를 두루 머금어 들일 수 있느니라.”
ㅡ이것은 체자재(體自在)를 밝힌 것으로,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에 속한다.
이미 만물을 운전하여서 몸은 법성신(法性身)으로 두루 비추고 임하며, 마음은 묘명심(妙明心)으로 영명통철(靈明洞徹)하여서 만물과 신심이 본래 하나의 체(體)이니, 즉 신심(身心)이 바로 법계(法界)로써, 부동(不動)의 도량(道埸)인 것이다.
*견성이 사각형에 있으면 사각형이고, 원형에 있으면 원형이 되는 이것이 불변수연(不變隨緣)의 뜻이다.
사각형의 안도 허공이고 원형의 안도 허공이다. 사각과 원은 다르지만 허공은 다르지 않은 이것이 수연불변(隨緣不變)의 뜻이다.
허공은 원래 방원이 없으나 용기(用器)를 따라 방원(方圓)이 있어지는 것이니, 용기를 없애면 허공은 본래의 허공으로 돌아간다. 방에 들어갈 때 방이 작다고 할 수 있지만, 견성이 작다고 할 수 없으나, 일체중생이 무시래(無始來)로 본래 광대하고 원명하고 묘한 마음을 모르고, 맑음에 따라 견정(見精)을 이루고 색을 취하여서 근(根)을 이루어 분주한 것이니,
이렇게 하여서 안으로는 부진근(浮塵根)에 막히고, 밖으로는 기계(器界)에 갇힌다.
업식(業識)을 따라 오음과 4대(四大)가 화합한 것이 분단신(分段身)이다.
묘하고 밝은 진성(眞性)은 갇히고 나뉘어서 안으로 몸이 되고 밖으로는 경계가 된다.
만약 진성이 법계에 변만(遍滿)함을 깨달으면 안으로의 심신에서 해탈하고 밖으로의 세계에 꺼둘리지 않는다.
묘성은 원통(圓通)하고 육근이 호용(互用)하고, 부진(浮塵)과 세계(世界)는 하나의 법계를 이룬다.
몸은 법성신(法性身)이고 원명(圓明)한 앎은 무상지각(無上知覺)이다.
부동도량(不動道場)인 몸은 시방에 편재(遍在)하고, 한 터럭 끝에 무변(無邊)의 국토를 머금고 있으나,
일체중생은 자기의 참된 견성을 모르고 밖으로 대소방원(大小方圓)에 분망할 뿐이다.ㅡ 한울림
▷보는 주체가 대상 경계와 함께 묘체(妙體)이다.
阿難白佛言:“世尊!若此見精必我妙性,令此妙性現在我前,見必我眞,我今身心復是何物?而今身心分別有實,彼見無別分辨我身,若實我心令我今見,見性實我,而身非我,何殊如來先所難言:‘物能見我?’唯垂大慈開發未悟。”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이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이 틀림없는 저의 미묘한 성품의 묘성(妙性)이라면, 이 묘성(妙性, 견정)은 지금 바로 제 앞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앞에 있는 보는 정기(견정)가 분명한 저의 진실한 성품이라면, 지금의 제 몸과 마음은 어떠한 것입니까?
지금 이 몸과 마음은 분별하는 실체가 있는 실유(有實)이나,
저의 견정(見精)은 따로이 제 몸을 구분하여 가려내지 못합니다.
만약, 참으로 앞에 있는 견정(見精)이 제 마음이라면, 저로 하여금 지금 보게 하셨으니,
견성(見性)이 실제로 '나'이나, 이 몸은 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래께서 좀 전에 ‘물체도 나를 볼 수 있으리라’고 힐난하신 말씀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부디 대자(大慈)로써 깨닫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옵시소서.”
ㅡ묘성은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라서 몸 과 마음과는 다른 것이다. '지금 이 몸과 마음은 분별하는 실체가 있는 실유(有實)이다'라고 한 것은, 마음은 분별함이 있겠지만 보는 주체는 분별함이 없어서 몸과는 분리되어 다른 물상을 이루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보는 주체가 물상에 있고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물상이 나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한 것이니, 이는 미혹한 마음으로 깨닫기 어렵다는 말이다.
견성실아(見性實我), 이신비아(而身非我),
견성(見性)이 진실로 '나'라고 한다면, 몸은 내가 아니고 하나의 물건이 된다.
물능견아(物能見我), 견성(見性)이 만약 물건이라면, 물건은 마땅히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나 물건은 볼 수가 없다.
견(見)은 대상이 아니다
의식(意識, 마음)은 항상 주객(主客)으로 나누어지고, 주관이 객관을 본다.
주관의 마음인 견분(見分), 견식(見識), 주(主) → 객관의 마음인 상분(相分), 상식(相識), 객(客)이니,
따라서 보는 것도 마음이고, 보이는 것도 마음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상태는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니, 마음이 주객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구경각(究竟覺)의 상태를 말할 때, 각심초기(覺心初起) 심무초상(心無初相)을 말한다.
마음에서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을 알고 보니, 마음에는 처음의 모습이 없더라.
만약 처음의 초상(初相)이 있다면, 견분(주)이 상분(객)을 보듯이, 보는 마음과 보이는 마음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구경각은 주객이 없는 상태라야 한다.
참선요지(參禪要旨)에서는 오온(五蘊)이 공(空)함을 보는 것을 각조(覺照)라고 한다.
마음이 공(空)을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두 가지의 경계가 사라진다. 보는 마음과 대상인 공성이 하나가 되고, 이를 분명하게 항상 아는 마음인 요료상지(了了常知)라고 한다. 이 앎은 주객이 없는 상태, 이것이 진짜 '나'이다.ㅡ향적법진
▷비실(非實)임을 밝히시다.
佛告阿難:“今汝所言:‘見在汝前’是義非實。若實汝前,汝實見者,則此見精旣有方所非無指示。且今與汝坐祇陁林,遍觀林渠及與殿堂,上至日月前對恒河,汝今於我師子座前,擧手指陳是種種相,陰者是林,明者是日,㝵者是壁,通者是空,如是乃至草樹纖毫大小雖殊,但可有形無不指著。若必有見現在汝前,汝應以手礭實指陳何者是見。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지금 네가 말한 견정(見精)이 네 앞에 있다고 한 뜻은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참으로 네 앞에 있어서 네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이라면, 그 견정(見精)은 장소가 있는 것일테이니, 그 장소를 가리켜 보일 수 있으리라.
나는 지금 너와 함께 기타림(祇陀林)에 앉아서, 수풀과 냇물과 법당과 위에 있는 해와 달과 앞에 마주한 항하 강을 두루 보고 있으니, 너는 이제 내 사자좌(師子座) 앞에서 손을 들어 이 가지가지 모양을 가리켜 보아라.
그늘진 것은 숲이고, 밝은 것은 해이며, 막힌 것은 벽이고, 통한 것은 허공이다.
이렇게 풀과 나무와 티끌과 먼지에 이르기까지 비록 크고 작음은 다를지라도, 모양이 될 만한 것은 가리키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
만약, 견정(見精)이 분명히 네 앞에 있다면, 너는 손으로 확실하게 가리켜 보아라. 어느 것이 견정(見精)인가?
ㅡ아난 존자가 견성(見性)과 신심(身心)이 다른 각체(各體)라고, 잘못되게 집착하여서 견성이 앞에 있다고 의심하는 것에 대하여, 신심(身心)과 견성(見性)이 둘이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
阿難!當知若空是見,旣已成見,何者是空?若物是見,旣已是見,何者爲物?汝可微細披剝萬象,析出精明淨妙見元,指陳示我,同彼諸物分明無惑。”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만약 허공을 견정(見精)이라 한다면, 허공은 이미 견정(見精)이 되었거늘, 어느 것을 허공이라고 하겠느냐?
만약 물상을 견정(見精)이라 한다면, 물상은 이미 견정(見精)이 되었거늘, 어느 것을 물상이라고 하겠느냐?
너는 세밀하게 만상(萬象)을 헤치고 벗겨서, 밝고 깨끗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보는 작용의 근원을 쪼개고 골라내어, 저 일체의 물상들을 분명하게 지적하여 보여서 저 물상과 같이 분명하게 의혹이 없도록 하라.”
ㅡ처음에 견정(見精)을→ 다음에 보는 근원의 견원(見元)을→ 나중에 정밀하게 보는 주체인 정견(精見)을 말하였다
이것은 모는 주체가 미묘하고 정밀하게 밝은 정명심(精明心)에 근본하였으므로 총합하여 '정(精)'이라 하였으며, 마음으로부터 처음 나오는 것이므로 보는 근원인 '견원(見元)'이라 하시고, 작용에 의한 응용본체(應用本體)를 가르키는 것이므로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이라 하였으며, 본체에 의하여 쓰임을 가리켜서 정밀하게 보는 '정견(精見)'이라 한 것이다.
만상(萬象)을 풀어헤쳐서 분석하여서 이 정명정묘(精明淨妙)한 견원(見元)을 골라내어 보아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靜•明•淨•妙은 견원의 모습은, 즉 본각(本覺)이 갖추고 있는 성(性)의 공덕상(功德相)이다.
정(精)은 만상이 혼탁하게 할 수 없음이고,
명(明)은 덮을 수 없음이며,
정(淨)은 오염시킬 수 없음이고,
묘(妙)는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므로 견원(見元)이라 하는 것이다.
견원(見元)을 견정(見精), 견성(見性)이라고도 하며, 중생의 식정원명(識精元明)과 같은,
두 근본 중에 진본(眞本)은 물상(物象)과 동체(同体)인 것이다.ㅡ한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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