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권 7
▷과거사를 인용하여 다시 밝히시다.
阿難白佛言:“世尊!必妙覺性非因非緣。世尊云何常與比丘,宣說見性具四種緣,
所謂因空、因明、因心、因眼。是義云何?”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기필코 이 미묘한 깨달음의 성품인 각성(覺性)이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라면,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비구들에게 항상 말씀하시기를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은 네 가지의 연(緣)을 갖추고 있으니,
이른바 '공(空)을 인(因)하고 밝음(明)을 인하고 마음(心)을 인하고 눈(眼)을 인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이러함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ㅡ아난 존자는 견정(見精)을 묘각성(妙覺性)으로 잘못 알고 있다.
공명(空明)한 심안(心眼)은 空明心眼의 4종류의 연(緣)으로 식(識)을 낼 수 있지만,
묘각성(妙覺性)은 공명심안(空明心眼)을 떠난 불변의 진체(眞體)이다.
연(緣)이 생기는 법은 공(空)을 인(因)하여 있으며(有), 밝음을 인(因)하여 나타나며(現), 마음을 인(因)하여 알며(覺), 눈을 인(因)하여 보는(見) 것이니, 이것이 곤 세간의 명상(名相)이므로, 제일의에 있어서는 모두 실없는 논리일 뿐이다.
견성이 자연이라면 인연 중에는 견성이 없고, (견성이) 인연이라면 자연 중에는 없다.
인연의 용(用)이 없으면 자연의 체가 드러나지 않고, 자연의 체가 없으면 인연의 용(用)이 생기지 않는다.
일체상(一切相)과 일체법(一切法)은 단지 사량(思量)하고 분별(分別)함이며 상(相)에 미혹함일 뿐, 견성이 아니다.
*제일의(第一義), 성지(聖智)로써 얻어지는 일승묘법(一乘妙法)으로 최상의 진리이다.
佛言:“阿難!我說世閒諸因緣相,非第一義。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세간의 인연상(因緣相)을 설한 것으로, 가장 뛰어난 제일의(第一義)를 설한 것이 아니니라.
ㅡ모든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에는 2제(二諦)에 의거하시는 것으로,
세제(世諦)에 의거함을 정서(情緖)에 따른 설법이라 하고,
제일의(第一義)에 의거함을 지혜(智慧)에 따른 설법이라 한다.
▷왜곡됨을 밝히시다.
阿難!吾復問汝。諸世閒人說我能見。云何名見?云何不見?
아난아, 너에게 다시 묻겠으니,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나는 능히 볼 수 있다(能見)’고 하는데,
어떠한 것을 보는(見) 것이라 하고, 어떠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不見) 하는가?”
ㅡ여기에서 설하는 인연과 앞에서 설하는 인연은 다른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진여가 연(緣)을 따른다고, 자연에 대한 집착을 파하셨고, 여기에서는 진여는 불변이라고 하셨다.
비단 묘각성(妙覺性)만이 인연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견정도 인연에 속하지 않는다.
밝을 때는 밝음을 보고 어두울 때는 어두움을 본다. 명암(明暗)은 경계에 속하여 변하지만 견성은 변화가 없다.
阿難言:“世人因於日、月、燈光見種種相,名之爲見;若復無此三種光明,則不能見。”
아난 존자가 말씀 드렸다.
“세상 사람들은 햇빛과 달빛과 등불 빛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상(相)이 보이면 보는(見) 것이라고 하며,
햇빛과 달빛과 등불 빛이 없으면 볼 수(不見) 없다고 합니다.”
ㅡ위의 3 가지의 빛으로 인하여야만 능히 볼 수 있는 것은 화합상(和合相)이라 이름 할 수 있는 것으로, 참된 견체(見體)는 아니다. 참된 견체는 화합상이 아니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니, 그것은 연(緣)을 따라 생기는 것도 아니며, 대상 경계를 따라 없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
“阿難!若無明時名不見者,應不見暗;若必見暗,此但無明云何無見?
阿難!若在暗時,不見明故名爲不見;今在明時不見暗相,還名不見。
如是二相俱名不見。若復二相自相𣣋奪,非汝見性於中暫無,如是則知二俱名見,云何不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약 밝음이 없을 때에는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당연히 어둠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어둠을 분명히 본다고 한다면, 이것은 단지 밝음이 없는 것일 뿐이니, 어찌 보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난아, 만약 어두울 때에는 밝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과 같이 밝은 때에 어두운 상(相)을 볼 수 없는 것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밝고 어두운 이상(二相) 모두를 다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라.
비록 밝음과 어둠이 서로 번갈아 능멸하여 빼앗아 바뀐다고 할지라도, 너의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상주진심)은 밝음과 어두움 가운데에서 잠시도 떠난 적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두 가지 경우의 모두를 본다고 말해야 할 것인 즉, 어찌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ㅡ이것이 곧 연(緣)을 따라 생기지도 않으며, 대상을 따라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연(緣)을 여의야 한다.
是故阿難!汝今當知,見明之時,見非是明;見暗之時,見非是暗;見空之時,見非是空;
見塞之時,見非是塞,四義成就。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지금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밝음을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보는 주체)은 밝은 것이 아니요,
어둠을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보는 주체)은 어두운 것이 아니며,
허공(空)을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보는 주체)은 빈것이 아니요,
막힘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보는 주체)은 막힌 것이 아닌 것이니,
이러한 것이 네 가지의 뜻이니라.
ㅡ밝음, 어두움, 허공, 막힘 모두는 연진(緣塵)에 속하는 것이며, 보는 주체는 아니다. 보는 주체는 참된 지혜를 증명하는 것으로 연에서 벗어난 것이고, 보이는 대상은 참된 이치를 증명하는 것으로 상(相)에서 벗어난 것이다.
▷상(相)을 여의야 한다.
汝復應知,見見之時,見非是見;
다시 네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보는(見) 것이 견정을 볼 때, 보는(見) 것은 견정이 아니니라.
ㅡ묘각심(견성)이 이 견분을 비추어보는 견견지시(見見之時)에 견정은 견성의 묘각지가 아닌 견비시견(見非是見)이다.
상분이 견분과 화합하지도 않으며, 견분이 묘각지와 화합하지 못하므로 견정은 묘각지를 볼 수 없다.
진견(眞見)이 홀연 망견(妄見)을 볼 때, 진견은 자체 중의 일분망견(一分妄見)을 여의어 망에 떨어지지 않는다.
혹은 능견(能見)의 진견이 소견(所見)의 망견(妄見)을 볼 때, 이 진견은 망견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즉, 밝고 어두움이 보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비록 견체(見體)가 연(緣)을 벗어났음을 깨달았을지라도 견체를 볼 수 없지만, 보는 주체를 볼 때에 보는 것은 보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견체가 상(相)을 여의었음을 깨달아서 참된 견체를 보게 된다.
見性微妙 猶且離見,見不能及。云何復說因緣、自然及和合相?
견성은 미묘하여서 오히려 보는(見) 것을 떠난 것이니, 보는(見) 것도 능히 미칠 수가 없거늘 어떻게 다시 인연이다 자연이다 화합상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ㅡ그래서 견정은 견성을 볼 수 없는 견불능견견(見不能見見)이며,
견정이 견성에 미칠 수 없는 견불능급야(見不能及也)이다
진견(眞見)은 오히려 보는 정기를 떠나 있어서, 보는 정기로도 미칠 수 없는데, 어떻게 인연이니 자연이니 화합상(和合相)이라고 하겠는가!
*見猶離見, 見不能及이란?, 진견은 견정(見精)의 자상을 여의고, 진견이 드러나면 망견(妄見)이 사라져서 견정(見精)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견(眞見)이 망견(妄見)에 응함을 견정(見精)이라 하고, 견정이 망견을 여의면 진견(眞見)이라 한다.
汝等聲聞狹劣無識,不能通達淸淨實相,吾今誨汝,當善思惟,無得疲怠妙菩提路。”
너희 성문들은 소견이 좁고 낮아서 아는 것이 없어서 청정한 실상(實相)을 능히 통달하지 못한 것이니,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리니, 마땅히 잘 생각하여서 묘한 보리(菩提)의 길에서 피곤해 하거나 게으르지 않도록 하여라.”
ㅡ앞에서는 상분(相分)을 파하였고, 이 단에서는 견분(見分)을 파하였다.
견성(見性)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닌, 자기 업식이 변현된 것이다.
묘각지(妙覺智)와는 더욱 거리가 있어서, 묘각지가 이 견성을 비추어 볼때, 업상(業相)과도 화합하지 않는데, 업상이 일으킨 전상(轉相)이나 현상(現相)과 화합할 리가 없다.
상분(相分)이 견분(見分)과 화합할 수 없고, 견분이 묘각지와 화합할 수 없으며, 견분은 묘각지를 볼 수 없다.
묘각지는 견문(見聞)이 다다를 수 없으며, 사의(思議)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견정(見精)은 현량(現量)과 연하는 성경(性境)으로, 서로 뒤섞이지는 않지만 아직 능소(能所)가 있다.
만약 묘각지가 진여경(眞如境)을 연(緣)하면 여여리(如如理)와 여여지(如如智)가 하나가 되어 능소가 없다.
이 경지에 견정(見精)은 미치지 못하므로, 따라서 이 견정을 파하여 능소(能所)에 떨어지지 않아야 묘각에 바로 들어간다.
이것이 진정하고 묘한 보리로(菩提路)이다.
앞에서 10회에 걸쳐 견성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십번현견(十番顯見), 열 번에 걸쳐 견성을 밝힌 것이다.
상주진심(常住眞心)의 상(常)은 변화가 없어 항상함이요,
주(住)는 오고 가지 않으며 '하나'에 머묾이고,
진(眞)은 틀림이 없고 잡스러움이 없는,
심(心)은 둘이 없는 참 마음의 뜻이다.
상주진심은 불변의 청정한 마음으로 견성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능엄경' 견도분의 초반에 일체중생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상주진심(묘정명심, 견성)을 모르고, 색성향미촉 등 눈앞에 다가오는 다섯 상황이 조건(緣)이 되고, 수만 생을 통하여 쌓아온 업의 종자(因)가 서로 반응하여 실상과 거리가 있는 환상(幻相)을 조작해내는 반연심이 상주진심인 줄 알고, 그 반연심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도적을 자식인줄 알고 애지중지하다가 자산(진여자성)을 탈탈 털리는 것과 같다고 일깨웠다.
환상이란 헛것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눈병이 들었을 때 손으로 눈을 누르고 있다가 땔 때, 허공에 꽃이 보이거나 달이 두 개로 보이는데, 이들은 모두 허상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앞의 다섯 경계와 스스로의 업식 종자가 조작해 낸 허구를 진실한 인식이라 믿으며 서로 자신이 인식한 것이 옳다고 우긴다. 이것이 번뇌이며 다툼의 시작이며 세계평등평화를 해치는 근본 원인이며 육도윤회를 계속하는 씨앗이다.
'능엄경'에서의 정의에 의하면, 견성은 묘각성(妙覺性)으로 불변(不變)의 체(體)이며 진공(眞空) 수연(隨緣)의 용(用)이 있다묘유(妙有)진공의 체와 묘유의 용을 함유하지만 능소가 없다.
화엄의 '법성게(法性偈)의 첫 게(偈)인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의 법성(法性)에 해당된다.
이 견성은 무소부지(無所不知),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무소불지(無所不至), 미치지 못하는 바가 없으며
무소불능(無所不能), 할 수 없는 바가 없고, 무소불조(無所不照), 비추어 밝히지 못하는 바가 없는,
전지전능한 공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묘정명심(妙淨明心) 혹은 묘각성(妙覺性)이라 한다.
또한 견성인 묘각지(妙覺智)는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미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사의(思議)가 도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말을 여의고 상이 끊어진 이언절상(離言切相)이며, 언어가 밝힐 대상이 아닌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그러면, 견성과 견정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견정(見精)이란 연생(緣生)하는 것이 아닌, 즉 색성향미촉의 다섯 경계에 꺼둘리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업식(業識)이 변현한 것으로, 자증분(自證分)에 배대시킬 수 있으나 묘각지(妙覺智, 견성)와는 한 층의 격차가 있다.
업식이 변현한 것이라면, 아직 업상이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며, 소위 업장소멸(業障銷滅)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업상이 있으면 자연적으로 '나'가 있다는 전상이 있고, 내가 있으면 견문각지하는 대상이 있게 되므로, 주관인 '나'와 객관인 '대상' 즉 능소(能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과 견정은 한 층의 격차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상분(相分, 색성향미촉)을 파한 다음 견분(見分, 색수상행)을 파하나, 자증분(自證分)을 파하기는 어렵다.
상분이란 명암색공(明暗塞空) 등이며, 견분이란 견문각지(見聞覺知) 등이다.
이들 상분과 견분은 자증분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이들 상분과 견분에 집착하여, 이들 상분과 견분이 진실하다고 오인하면 안된다.
묘각심(견성)이 이 견분을 비추어보는 견견지시(見見之時)에 견정은 견성의 묘각지가 아닌 견비시견(見非是見)이다.
상분이 견분과 화합하지도 않으며, 견분이 묘각지와 화합하지 못하므로 견정은 묘각지를 볼 수 없다.
그래서 견정은 견성을 볼 수 없는 견불능견견(見不能見見)이며,
견정이 견성에 미칠 수 없는 견불능급야(見不能及也) 라고 하였다.ㅡ한울림의 견성(見性)과 견정(見精)에 관한 글을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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