雖過魔行(수과마행) 而現降衆魔(이현항중마) 是菩薩行(시보살행)

모든 마군을 초월한 행이지만, 아직도 여러 마군을 항복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보살행이고, 

Although one has surpassed the demons but still manifests the appearance of subduing all demons, this is the practice of a bodhisattva. 

[마구니의 행= 불교에 방해되고, 불교와 반대되고, 정법이 아닌 경우를 魔라고 합니다. 마구니를 초월했지만 오히려 마구니와 더불어 살면서 온갖 마구니들을 항복 받을 수 있는 그것이 보살행이다. 나는 저런 마구니와 관계없다고 도외시하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상(), 사람들의 마음의 병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상'이라 해서, 생각 '상'을 쓰지 않고 형상 '상'을 씁니다. 고체화해서 형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주 뛰어난 안목입니다. 중생들의 마음에 관념이 형상화 되어버리면, 그 사람의 고집 꺾기 어렵습니다. 이 형상화된 서로의 상들이 부딪치면 소리 나고, 또 깨어져서 상처 나게 되는데, 많이 경험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雖過魔行(수과마행) 而現降衆魔(이현항중마) 是菩薩行(시보살행)= 보살행이 모든 장애를 극복했다고 하는 것에는 번뇌의 극복과 수도하여 성불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마의 소행이 있다. 이 두 가지를 극복하였음에도 계속해서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것은 본래 보살은 중생의 제도에 뜻이 있고 자기만의 수행에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자의 장애는 자신의 수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장애이며, 후자의 장애는 중생제도 과정에서 생기는 장애이다. 따라서 이 후자의 장애는 중생이 있는 한 무한히 계속된다.]

 

求一切智(구일체지) 無非時求(무비시구) 是菩薩行(시보살행)

일체를 남김없이 아는 지혜=一切智(sarvajjna)를 항상 구하지만,

때가 아닌 때에 얻고자 바라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Seeking all wisdom without seeking it at an inappropriate time is the practice of a bodhisattva. 

[일체지혜를 구함에 있어서, 경을 공부 할 때에만 구하고, 밖에 나가면 나와는 관계가 없고 불교와는 관계없고, 부처님 말씀과 관계없는 것이 되어 버리면 보살행이 아니다. 無非時求= 어느 때든지 구하지 아니한 때가 없다는 말입니다. 無非時求= 구하지 않는 때가 없지만, 항상 구하는, 항상 지혜의 관념 속에서 언제나 현명한 불교적인 삶을 사는 것이 보살행이다. 일체의 지를 구하되 법당 안에서만 구하는 것이 아니고 법당 밖에서도 구한다.

求一切智하되 無非時求란 부처님의 지혜는 우리의 삶 전반에서 적용되어져야 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雖觀諸法不生(수관제법불생) 而不入正位(이불입정위) 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제법이 공하여 생하지 않음=不生이라고 관하지만,

깨달음의 경계[正位]에 들고자 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Although one can see that all Dharmas do not arise, one still does not enter the place of awakening, and this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觀諸法不生= 근본적으로 현상은 생멸하지만, 즉 본질에 있어서는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관찰하지만, 正位(정위, 열반)= 불생불멸인 열반의 자리에만 들어가 있지는 않는다. 불생불멸을 알고 불생불멸을 늘 관찰 하지만, 불생불멸에 늘 빠져 있지 않는다. 즉 생멸한다. 본질은 영원한 불생불멸이지만 밖으로는 모든 것이 생멸하는 이 양변, 양쪽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인정하고, 수긍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보살행이다.]

 

雖觀十二緣起(수관십이연기) 而入諸邪見(이입제사견) 是菩薩行(시보살행)

12연기를 관하고 있으면서도 온갖 사견을 가진 중생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 보살행이며, 

Thought perceiving the twelve dependent arising, yet to enter various mistaken views, which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12연기=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12가지 인연, 12가지 조건 입니다.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과정입니다. 어떤 종교보다도 불교가 인간이 태어나서부터의 전 과정을 심리적이고 육체적 문제들이 이러한 12가지 과정과 조건에 의해서 생성 변멸한다는 것을 관찰하였고, 또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12연기의 안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삿된 견해에도 들어갈 줄 아는 것이 보살행이다. 전혀 당치않은 이론도 이해해주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소견이라도 등지지 말고 더불어 같이 생활하면서 그 사람들을 제도하고 바로 가르칠 줄 아는 것이 入諸邪見= 여러 가지 삿된 견해에 들어가는 것이 보살행이다]

[而入諸邪見(이입제사견)= 사견 속에 들어간다”를 지겸․현장․티베트 역은 나집과 반대로 번역하고 있다. 지겸 역을 예로 들면 “온갖 견해를 가졌음에도 무욕(無欲)하다” 하였다.]

 

雖攝一切衆生(수섭일체중생) 而不愛著(이불애착) 是菩薩行(시보살행)

중생을 자비심으로 감싸 안고 섭수하여 제도하지만, 애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Even though assimilating in all sentient beings, but does so without sentimental attachments, which is what the bodhisattva practice.

[일체 중생들을 섭원 섭수한다. 제도한다.  

사실은 부처님 지혜의 경전 말씀이 재미있고 또 굉장히 유익하고 내 삶과 영혼과 정신순화에 여러 면으로 좋은 것어서 공부한다손 치더라도,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남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참선도 중생제도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교리공부도 중생제도를 위해서 하는 것으로 불교적인 모든 행위는 다른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이나 보살들의 마음이고 불교의 마음입니다.

攝一切衆生 일체중생을 포섭하고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중생들에 대해서 너무 애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이다. 중도적인 행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雖樂遠離(수락원리) 而不依身心盡(이불의신심진) 是菩薩行(시보살행)

(번뇌와 망상으로부터) 遠離=멀리 떠나 있기를 즐겨 하지만

몸과 마음의 업이 다한 경계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몸과 마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보살행이다)

Though delighting in being apart, yet does not depend on the exhaustion of the body and mind, and this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雖行三界(수행삼계) 而不壞法性(이불괴법성) 是菩薩行(시보살행)

삼계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법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Even though on practice in the three realms yet does not decline Dharma nature, such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삼계= 欲界, 色界, 無色界 또는 온갖 계층의 삶들을 겪지만, 법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법의 성품은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가 없고, 각계각층, 다종다양한 삶의 양상이 없이 평등한 것입니다. 부처의 삶이나 중생의 삶이나, 축생의 삶이나, 지옥의 삶이나, 천상의 삶이나 이 법성 자리는 평등해서 삼계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삼계를 인연 따라 흘러 다니면서 살지만, 평등한 진리자리 법성자리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부처님의 안목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신선한 부처님의 공부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상황에 돌아가면 축생만도 못한 그런 삶을 살수도 있고, 남과 싸우기도 하고, 화도 내고 속이기도 하고, 남을 헤꼬지하는 수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온갖 차별된 중생의 삶을 산다는 것은 몹쓸 것이라고 해버리면 우리의 삶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어떤 삶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지옥의 삶도 부정하지 않고, 축생의 삶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긍정하면서 그보다 다른 차원의 삶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삼계를 행한다는 것은 온갖 차별된 삶의 여정입니다. 이런 삶, 저런 삶, 별별 삶을 삼계라고 합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의 별별 삶입니다. 

하루 가운데는 밤도 있고 낮도 있듯이, 하루의 삶속에는 부처님과 반대될 경우도 있고, 부처님과 딱 맞아 떨어질 때도 있는 그것이 사람의 삶이니까, 그런 반대되는 삶도 인정해주는 것이 보살의 삶이고 바람직한 삶이다.

삼계를 행하지만 법성의 경지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중생들의 삶속에 욕계 색계 무색계라고하는 온갖 각양각색의 삶이 있기 때문에 신선한 법성의 경지 진리의 경지가 존재할 필요가 되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계를 행하되 법성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부처님 생각을 하면서도 부처님을 등지는 일도 때로는 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부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삶도 전부 인정받게 되는 것이고 마음 놓게 되는, 좋은 경전입니다]

 

雖行於空(수행어공) 而植衆德本(이식중덕본) 是菩薩行(시보살행)

비록 공을 관하면서 수행하지만, 온갖 공덕의 뿌리를 심는 것이 보살행이며, 

Even though all actions are based on emptiness yet planting various virtuous roots, such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雖行於空= 비록 공을 행하며 공의 도리, 모든 것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알지만.

불교하면 언필칭 공, 공의 철학, 공의 도리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들은 실재하지 않고 계속 변멸하는 현상일 뿐 실제는 공입니다.

그러나 공이고 무상이라고 해서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植衆德本= 온갖 덕의 뿌리, 온갖 덕의 근본을 심는, 온갖 좋은 일은 다 한다. 열심히 복 짓고 산다. 그러나 어디에 집착해버리면 그것이 금방 무너지는 도리를 알아서 공의 도리를 행한다. 보통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손을 놓아 버리고 하지 않는 것이 병인데, 집착 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고, 보살행이다]

 

雖行無相(수행무상) 而度衆生(이도중생) 是菩薩行(시보살행)

무상의 도리를 알고 행하지만, 중생을 구제(제도)하고자 하는 것이 보살행이고, 

Although practicing formlessness, he can save all sentient being, which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불교의 핵심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으로 정제된 것들을 소개하고 있다고 이해해도 됩니다.

비록 무상을 행하지만 중생을 제도할 줄 아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고 보살행이다

상이 병이라서, 금강경에서는 無相(무상)으로 爲宗(위종), 으뜸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중생이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은 가관, 치우친 생각이고

중생이 본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관, 허무주의 완전 공에 떨어진 생각이고,

여기서는 중생이 본래 부처라서, 본래 부처인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 중도 정견이고 중도관이라는 말입니다.

과일, 꽃, 온갖 초나 향이 그야말로 허망하기 이를 때 없는 공양거리이고 받는 사람도 받는 물체도 허망한 줄 알지만 또 열심히 정성을 다해 올리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고 또 그런 자세가 중도행 즉 바람직한 소견이라는 것입니다]

 

[무상(無常) : 영원하지 않다.→초기경전에 많이 나오는 용어

무상(無相) : 모습이 없다.대승경전에 많이 나오는 용어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는 '육조단경'의 핵심내용으로서 이를 삼무(三無)라고도 한다. 혜능(慧能, 638~713) 대사의 삼무(三無)라는 말이다.
육조단경에서 "선지식이여! 나의 법문은 위(역대 불조)로부터 내려오면서 먼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바탕)를 삼으며,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나니(善知識 我自法門 從上已來 頓漸皆立:無念為宗 無相為體 無住為本)"라고 했다. 
無相이란 갖가지 차별상에서 떠나는 것을 말한다. 相이란 차별상을 말한다. 그리하여 차별의 현상(계)에 있으면서 현상을 여읨이다. 여기서 ‘相’은 망념으로 일어나는 허상을 말한다. 즉, 우리들 생각인 상(想)이 마음 밖 대상으로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그것이 상(相)이다. 따라서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무상이다. 그리고 무상(無相)이라는 것은 상(相) 속에 있으면서도 상을 떠나는 것이다. 즉, 차별상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그 차별상을 공(空)으로 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갖가지 차별상과 모든 경계에서 집착을 떠난 것이 무상이다. ‘상(相)’은 모두 망상에 물든 마음이다. 그러니 무상은 허상, 차별상, 망상에 물든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한다. 
특히 '금강경'에서는 사상(四相)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상(相)이라고 하는 것은 미혹한 중생들의 본업(本業)이다. 
사실은 상(相)이 있는 것이 아닌데, 미혹하기 때문에, 어리석기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서 없는 상을 있는 상으로 본다. 
'금강경'은 본래 없는 상(相)을 없는 상으로 가르쳐주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즉, 근본취지로 삼는다고 해서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는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무상(無相)이란 공(空)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유상(有相)의 반대어이다. 따리서 무상이란 집착하는 모습이 없다는 말이다. 
상(相, laksana)은 특히 대승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가진 개념이다. 흔히 인식주관이 허망 분별한 객관대상의 형상, 특성, 감정 등에 얽매인다는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는다. “망념을 여의면 일체 경계상이 없을 것”이라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차별상은 망념의 소산이며, 망념을 떠나면 일미평등(一味平等)의 법성(法性)을 체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상이란 4상(四相)인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음을 말하며, 4상으로 인해서 생기는 일체의 분별과 차별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즉, 무상(無相)이란 어떤 사물(대상)을 보면서 그 모양(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차별과 대립을 초월해 무한하고 절대적인 상태, 현상의 모양이 없는 진여법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생멸변천이 없는 무위법이며, 모든 집착을 여윈 경계이이다. 말하자면 갖가지 차별상과 모든 경계에서 집착을 떠난 것이 무상이다. 
無住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음, 마음이 머무르지 않음, 마음에 걸림이 없음을 말한다. 

사람의 본성이 세간의 선⋅악, 좋고⋅나쁨, 원수와 친한 이, 등과 더불어 말을 주고받고 공박하고 속이고 다투게 될 때에도 아울러 공(비어 실답지 않음)함을 알아서, 갚음이나 해칠 생각을 하지 아니하며, 생각 생각 가운데에 지나간 일들(앞의 허물)을 생각지 않은 것이다. 만일 앞생각과 지금생각과 뒷생각에 (남의 허물에 대한)생각 생각이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얽매임이라 하며, 모든 법(현상) 위에 생각 생각이 머물지(집착하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른 무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라는 말이다. 無住란 일어나는 생각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일어나는 생각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들과 서로 말을 주고받거나 좋지 못한 수작을 걸어오더라도 모두 헛것으로 돌려, 대들거나 해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바깥의 경계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다. 
無念이란 생각하되 생각에 꺼들려 집착하지 않음이다. 즉,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생각 속에 있으면서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요, 생각 속에 헛된 생각이 없는 것으로,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안으로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것이 무념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무념은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생각하며 대상과 접촉하는 작용이다. 대상과 접촉하면 보고 듣는 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작용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아야 비로소 무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무념에서 ‘무’는 잘못된 생각이 없는 것이지 바른 생각이 없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즉, 여기서 ‘염(念)’은 잡념 혹은 번뇌를 뜻한다.

'육조단경'에서 “선지식들이여, 지혜로 살펴서 안팎이 분명해야 자신의 본 마음을 안다. 본 마음을 알면 ‘해탈’이고, 해탈이면 ‘반야삼매’이며, 반야삼매는 ‘무념’이다. 
무엇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모든 법을 보되 마음에 집착이 없으면 바로 이것이 무념이다. 
이 마음을 쓰면 마음이 모든 곳에 두루 하되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오직 깨끗한 본 마음이 몸에 있는 감각기관에서 활동하되 경계에 물듦이 없게 해서 오고감이 자유로워 그 쓰임에 걸림이 없는 것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이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이니, 이를 무념행(無念行)이라고 한다. 
만약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끊기만 한다면 이는 법에 얽매인 것이며 한쪽에 치우친 견해라고 한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무념(無念)은 평등하다고 했다. 
「만약 무념(無念)을 얻은 사람은 마음이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 하는 것을 알 것이니 무념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는 실로 시각(始覺)과 다름이 없으니 그 까닭은 사상(四相 ; 생ㆍ주ㆍ이ㆍ멸)이 함께 있어서 다 자립함이 없음이니 본래 평등해 동일한 깨달음(覺)인 까닭이니라-작성자 정단]

 

雖行無作(수행무작) 而現受身(이현수신) 是菩薩行(시보살행)

無作=지음이 없음의 도리를 알고 행하지만 생을 받아 세간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보살행이며, 

Although one performs the unconditioned yet manifests the body of a living being, and this is the bodhisattva’s practice. 

[無作= 지음이 없는, 본래 마음자리, 진리의 입장 불성자리에는 조작이 있어도 지음이 없는, 아무리 지어도 지음이 없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지음이 없는 것이 본래 마음의 자리입니다.

태어나도 무작이라는 말은 태어나도 태어남이 없는 도리를 말하는데, 그러면서 우정 태어날 줄 아는 것이 보살행이다

무작의 도리를 알고 그러한 도리를 실천하지만 또 태어날 때 태어나고, 태어나서 중생제도 할 일 있으면 제도하고, 갈 일이 있으면 가고, 올 일 있으면 오는 그것이 보살행이다]

 

[무작(無作)이란 ① 生滅이 없는 이치. 無爲의 法性, 涅槃의 異名.
② 자연히 되는 것으로 造作이 없는 것.
③ 身·口·意의 造作이 없이 저절로 된 것.

즉 그 어떤 작위나 작용이 없다는 뜻으로, 외부의 작용을 받지 않고 스스로도 겉치레를 하지 않는 본래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말합니다. 또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며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생멸(生滅)도 하지 않는 것을 무작(無作)이라 합니다.
생명에는 모두 법신[(法身): 생명], 응신[(應身): 육체], 보신[(報身): 지혜]의 삼신(三身)을 갖추고 있습니다.
법신(法身)이 영원하다는 것은 이미 제경에서 설해져 있으나 수량품에서 처음으로 삼신(三身)이 그대로 본유상주(本有常住)라고 해서 삼신의 상주를 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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