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부사의품(不思議品)
維摩詰所說經 不思議品 第六
Chapter 6 Inconceivable
爾時舍利弗(이시사리불) 見此室中無有牀座(견차실중무유상좌) 作是念(작시념)
그 때 사리불(舍利弗)은 이 방안에 앉을 자리[牀座]가 없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At that time, when Sariputra saw that there was no bed or seat in this room, he thought to himself,
[不思議= 불가사의 하다' '도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보통사람의 생각으로는 미칠 수 없는 경지'라는 뜻입니다
부사의 품에는 화엄경의 事事無碍 이치가 설명 되고 있습니다.]
斯諸菩薩(사제보살) 大弟子衆(대제자중) 當於何坐(당어하좌)?
‘이렇게 많은 보살과 수많은 대제자들은 어디에 앉아야 할 것인가?’
Where should so many bodhisattvas and great disciples sit?
長者維摩詰知其意(장자유마힐지기의) 語舍利弗言(어사리불언)
장자 유마힐은 그러한 마음을 알고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Vimalakirti, the elder, knowing what he was thinking, said to Sariputra,
云何仁者(운하인자) 爲法來耶(위법래야)? 求牀座耶(구상좌야)?
도대체 (어찌하여) 그대는 진리=法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까, 아니면 앉을 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까?”
What is the matter, Benevolent One? Have you come for the Dharma or a seat?
舍利弗言(사리불언) 我爲法來(아위법래) 非爲牀座(비위상좌)
사리불이 말하되, 저는 진리를 위해서 왔지, 앉을 자리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Sariputra said, I have come for the Dharma, not the seat.
維摩詰言(유마힐언) 唯舍利弗(유사리불)
夫求法者(부구법자) 不貪軀命(불탐구명) 何況牀座(하황상좌)?
유마힐이 말하되, 唯=여보시오 (알았습니다) 사리불이여.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신명=軀命도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앉을 자리에 집착해서야 되겠습니까?
Vimalakirti said, O Sariputra, he who seeks the Dharma does not desire a body or a life, let alone a seat?
[不貪軀命= 몸과 목숨도 생각하지 않는다. 爲法忘軀(위법망구)=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린다는 위법망구의 유래가 열반경 설산동자가 수행자로써 떠돌아다니고 있을 때 어느 산길을 가다가 諸行無常 是生滅法(제행무상시생명법)= 모든 것은 무상하고, 이것은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칙이라는 말을 듣고는, 산중에서 누가 이런 말을 하는가? 하고 찾아보니 험상궂게 생긴 나찰이 나타나서 내가 그 법문을 했다고 하니까, 설산동자가 생각하기에 그 법문은 뭔가 좀 부족하다고 하니까 그 나찰이 반밖에 말하지 못했으나 지금 배가 고파서 도저히 그 나머지 법문을 해 줄 수가 없으니까 갓 죽은 사람의 피로 요기를 해야 뒷구절을 일러줄 수 있다고 해서 설산동자가 당신의 몸을 보시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머지 게송을 일러달라고 부탁합니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열반경 4구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소리든, 감각이든, 맛이든, 무엇이든 전부 생하고 멸하니, 그러나 그 현상이 끊어진 자리, 적멸한 자리가 고요한 적멸의 자리이다.
설산동자가 그 말을 듣고 깨달아서 너무나도 기뻐서 이 훌륭한 법구를 세상에 전하고자 손을 깨물어서 피를 내어서 암벽에쓰고는 약속한대로 나무에서 뛰어내리니까 나찰이 갑자기 제석천으로 변해가서 뛰어내리는 설산동자의 몸을 사뿐히 받아서 땅에 내려놓으면서 내가 당신의 수행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랬노라, 사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을 지키고 보호하고 때로는 시험하고 때로는 경책도 하는 제석천왕으로써 당신의 수행이 어느 정도 되었는가? 또 얼마나 심신이 지극한가? 정말 법을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세가 되었는가를 보기위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고백을 하는데, 그것이 석가모니 전생에 쌓은 수행이라는 내용입니다.
중국의 선지식을 모신 신라의 혜통국사, 달마스님의 제자 혜가스님들이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리는 위법망구의 표본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불교역사에는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夫求法者(부구법자) 非有色受想行識之求(비유색수상행식지구)
또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색, 수, 상, 행, 식을 구하지 않으며,
Anyone who seeks the Dharma does not seek the context of form, sensations, perceptions, mental activities, or consciousness;
非有界入之求(비유계입지구) 非有欲色無色之求(비유욕색무색지구)
계(界)나 입(入) 따위를 구하지 말아야 하며, 有欲=욕계, 色=색계, 無色=무색계도 구하지 말아야 하며,
he seeks nothing of realms or entrances; he seeks nothing for desires, form or formlessness.
[계= 육근+육진+육식은 18계. 육근+육진은 12입. 육근은 6입.
나의 주관을 나누면 6가지가 되고, 객관을 거기에 맞추면 6가지가 되고, 그 관계에서 일어나는 인식작용들이 6가지입니다.
非有欲,色,無色之求니라= 욕계는 우리가 사는 세상, 색계와 무색계는 천상인데, 그 어느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법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법은 그런 현상적인 것에 걸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구하려고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唯舍利弗(유사리불) 夫求法者(부구법자) 不著佛求(불착불구)
不著法求(불착법구) 不著衆求(불착중구)
사리불이여,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부처=佛에게 집착하여 구하지 말고, 부처의 가르침=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며,
승단=僧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아야 하며,
O Sariputra, those who seek the Dharma, is without attachment to the Buddha, without attachment to the Dharma, and without attachment to the Sangha.
[법을 구하는 것은 부처님이나 그 가르침에 매달리거나, 대중들에 집착해서 구하는 것도 아니다. 대중 衆을 쓴 것은, 사부대중, 불법을 수행하고 함께 구하는 단체, 법을 구하는 입장에서는 대중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夫求法者(불구법자) 無見苦求(무견고구) 無斷集求(무단집구) 無造盡證(무조진증)
修道之求(수도지구)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괴로움을 알고자=苦 함이 없이 구하고, 集=괴로움의 원인을 끊고자 구하는 것이 아니며, 盡證=멸함(열반)을 증득하고자 구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에의 길을 닦고자=道 함이 없이 구해야 합니다.
Anyone who seeks the Dharma does not seek it through perceiving suffering, eliminating the collective, or establishing cessation and cultivating the path.
[無見苦求=괴로움을 보고 구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이 괴로움이라는 문제에 집착해서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구하는 것도 아니다. 괴로움을 떨쳐버리고자 구하는 것도 아니다.
無斷集求= 사성제 苦集滅道의 集, 원인을 끊으려고 법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無造盡證=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 다함에 나아가는 것을 증득하려고 구하는 것도 아니고
修道之求=수도는 팔정도를 닦는, 도를 닦는 것을 위해서 법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대게 사성제의 올바른 수행을 위해서 법을 구하는 것을 당연하게 이야기하는데, 이 유마경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그러한 법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법이란 그러한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특정한 것을 내세워서 이것 때문에 법을 구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 法無戲論(법무희론) 若言我當見苦(약언아당견고)
斷集證滅修道(단집증멸수도) 是則戲論(시즉희론) 非求法也(비구법야)
왜냐 하면, 진리에는 무의미한 희론이 없기 때문이니, 만약 말하기를 나는 당연히 見苦=괴로움을 알고, 斷集=집착을 끊고,證滅=깨달음의 경계에 이르고, 修道=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닦는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의미한 희론(말장난)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Why? The Dharma is without conceptual elaboration. If one says, I need to perceive suffering, eliminate the collective, establish cessation, and cultivate the path, that is conceptual elaboration, not seeking the Dharma.
[戱論=고집멸도, 색, 수, 상, 행, 식, 욕계, 색계, 무색계 이 모두가 이론이기 때문에 희론, 말장난일 뿐, 법에는 희론이 없는 것이다
非求法也= 법은 말을 초월해 있다. 즉 어떠한 좋은 이론도 사실은 이론에 불과할 뿐 법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唯舍利弗(유사리불) 法名寂滅(법명적멸) 若行生滅(약행생멸)
是求生滅(시구생멸) 非求法也(비구법야)
사리불이여, 진리=法은 적멸(upanta)이니, 만약 생멸(현상)을 (반복하면) 이는 생멸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O Sariputra, the Dharma is called calmness and extinction (nirvana), and if one practices birth and death,
[唯=여보십시오 사리불이시여 法名寂滅=법이라고 하는 것은 굳이 이름하자면 적멸이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의 생멸멸이하면 적멸위락의 적멸입니다.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따라서 마음이 작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작용일 뿐 본체는 아니다. 본체에서 흘러나오는 작용은 적멸한자리, 적멸하니까 작용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본체자리가 어떤 형태로 있으면 한계가 있고 또 있는 것만 나오게 되지만, 적멸해서 아무것도 없는 자리이니까 무한히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텅 비고 아무것도 없는 적멸한 자리에서는 많이 나오게 되어있고 또 무한한 변화가 있게 되어있다. 그것이 본체자리이고, 그래서 법이라고 하는 것의 이름이 적멸이다.
若行生滅=그런데 거기서 생멸을 행 한다면, 是求生滅이요 非求法也며= 이것은 생멸을 구하는 것이고 법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동자의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이라. 구경에 가서는 적멸이 낙이 되고 적멸이 목표다.
여기서 법은 적멸이다 만약에 생멸을 행한다면 생멸은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이고 또 현상 따라서 흘러가는 것이 생각입니다. 내가 이런 말 하면 이렇게 알아듣고 저런 말하면 저렇게 알아듣고 춥고 더운 것 알아차리는 것은 전부 생멸, 우리마음의 생멸상태인데, 생멸의 마음작용이 있어야 이해를 하게 되고 표현을 하게 되는, 그런 작용이 필요하면서도 그 작용의 본 자리는 텅 비고 적멸하다. 적멸하니까 무럭무럭 끝없이 피어오르는 마음의 생멸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생멸 작용은 참 묘하게, 그 안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일어나는 것입니다. 뭔가 있으면 있는 만큼만 나올텐데, 마음의 자리가 적멸하고 텅 비어 없으니까 우리의 생각이 무한히 돌아가고, 생각이 흘러가고, 그 생각이 작용을 하는 그것을 한마디로 생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은 그 적멸한 본체자리이니 눈앞에서 계속 흘러가고, 생멸 변화하는 현상을 쫒아가지 말아라. 그것은 생멸에 불과한 것이고 본체는 아니다. 법을 중요하게 이야기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法名無染(법명무염) 若染於法(약염어법) 乃至涅槃(내지열반) 是則染著(시즉염착)
非求法也(비구법야)
法=진리는 번뇌에 물듦이 없는=無染이니, 만일 진리 내지는 열반에 집착해 染=물들었다면, 그것은 오염된 집착=染着일 뿐,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one is seeking birth and death, not the Dharma or even nirvana stains one, that is staining, not seeking the Dharma.
[법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것, 어디에도 젖지 않고,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공도리가 좋다고 하지만 공 도리에 집착하고 빠져서 그 공 도리에 물들면, 그것도 역시 병이지 바람직한 법은 아니다]
法無行處(법무행처) 若行於法(약행어법) 是則行處(시즉행처) 非求法也(비구법야)
진리는 대상=行處가 없으니, 만약 진리(법)를 행할 것 같으면, 이는 곧 대상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The Dharma has no place for action, but if one practices that Dharma, one is pursuing a place of action, not seeking the Dharma.
[是則行處요 非求法也며= 행하는 일, 흘러가는 일 흘러가는 곳 그것이지 법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法無取捨(법무취사) 若取捨法(약취사법) 是則取捨(시즉취사)非求法也(비구법야)
진리는 取捨=취하고 버림이 없으니, 만약 진리를 얻거나 버린다고 하면 이는 곧 취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The Dharma has no grasping nor renouncing, but if one grasps and renounces the Dharma, it is grasping and renouncing, not seeking the Dharma.
[만약에 취하고 버리는 취사가 있으면, 선악시비의 좋고 나쁜 것이 있게되고, 옳고 그름이 있게 되어서 좋은 것을 따라가고 옳은 것을 행하려고 하다보면 이미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치우치게 되면 금방 문제가 생기게 되고 그 문제는 온갖 다른 문제들을 끌어들여서 번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경전에서는 항상 중도, 취하고 버리는 것이 없어야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현실은 전부 취할 것과 버릴 것으로 구성되어있고 또 우리의 삶은 매일매일 취하고 버림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때 묻은 옷은 벗어서 씻어야 되고 또 새로운 옷을 갈아 입어야 되는 것도 취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는 것도 깨끗한 쌀은 취하는 것으로 우리 일상생활이라는 것이 취하고 버리는, 취사의 연속이지만 취사에 치우치지 말라, 취사에 빠져 있지 말라, 취사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편협하게 치우치면 그로 인해서 온갖 다른 문제들이 그야말로 칡넝쿨처럼 얽키고 섥키게 되어서 반드시 괴로움과 불행을 낳게 된다. 취하고 버리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法無處所(법무처소) 若著處所(약착처소) 是則著處(시즉착처) 非求法也(비구법야)
진리는 (그를 거두어들이는) 처소가 없으니, 만약 그러한 처소에 집착하면 그것은 처소에 집착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Dharma has no place, but it one attaches oneself to a place, then one is attaching oneself to a place, not seeking the Dharma.
[法無處所=법에는 처소, 어떤 일정한 장소가 없다
예를 들어 부다가야 보리수 밑에서 법을 얻었다고 해서 누구든지 그 보리수 밑에 가면 깨달아야 될 것이지만, 법은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갓바위가 영험 있다고 하지만 거기에 가는 모두에게 다 영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자세 때문에 영험이 있어지는 것이지, 장소에 영험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서리불이 밥 한 그릇을 부처님께 공양을 했는데, 부처님은 그 공양을 개에게 주고는 사리불에게 묻기를, '사리불이여 그대가 부처님에게 올린 한 그릇의 공양의 공덕이 많겠느냐? 내가 개에게 그 똑같은 한 그릇의 밥 보시의 공덕이 많겠는가?' 사리불이 '부처님이시여 제가 설사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렸다 하여도 그것은 내 수준으로 올린 것이고, 부처님은 비록 개에게 공양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처님의 수준으로 준 것이니, 어떻게 나의 수준과 부처님의 수준을 비교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도대체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중요한 것인데, 확신이 아직 부족하니까 자꾸 대상에 팔려서, 어디가면 공짜로 영험이 돌아오고, 성스러운 기도 도량에 가면 기도가 잘 되는 것으로 믿는데 사실은 내 마음자세 때문입니다.
불교는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자신에게 귀의하고, 진리에 귀의하고,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고 하는데도 자꾸 어떤 대상에 끌려 가니까 법에는 처소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강화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으면 자신의 힘이 생겨서 강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압니까?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일도 겪게 될 텐데 내 자신을 제대로 지키고 있어야 하늘이 무너질 때도 쏟아날 구멍을 찾을 수 있는 것이지, 내 자신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상황에 부딪첬을 때 완전히 혼비백산할 뿐일 것입니다]
法名無相(법명무상) 若隨相識(약수상식) 是則求相(시즉구상) 非求法也(비구법야)
진리는 형상이 없는=無相이니, 만약 형상=相을 따라서 분별하고자 하면 그것은 형상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Name of the Dharma is no-form, so if one is aware through form, that is seeking form, not seeking the Dharma.
[금감경에서 상을 떠난 사람이 부처님이라 했습니다. 법이란 무상, 상을 떠난 사람이다. 상을 떠난 경지가 법이라 했습니다. 상이란 눈앞에 들어나는 현상으로, 우리 모두가 현상= 눈앞에 들어나는 상을 보고 살지만, 눈앞에 나타난 어떤 상도 전부 헛것, 허상이라고 봐야 상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상에는 미혹되거나 빠지거나 집착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마거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육조스님이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후 오조스님에게 갔을 때, 그대가 여기에 뭐 하러 왔느냐고 물으니까? 惟求作佛(유규작불)이요 不求餘物(불구여물)이니이다. 오직 부처되기 위해서 내가 이절에 왔지, 다른 어떤 물건을 구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 한것과 같이, 사리불이 유마거사의 도량, 집, 수행 장소이고, 도량에 온 것이 '舍利弗言(사리불언) 我爲法來(아위법래) 非爲牀座(비위상좌)' 사리불이 법을 구하러 온 것과 같은 맥락의 구성입니다.]
法不可住(법불가주) 若住於法(약주어법) 是則住法(시즉주법) 非求法也(비구법야)
진리는 머무는 곳이 없으니, 만약 법이 머문다고 한다면 이는 법에 머물고자 하는=住法이지, 진리(법)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Dharma is without abiding, so if one abides in the Dharma, one is abiding in the Dharma, not seeking the Dharma.
[금강경에서 妙行無住, 아름다운 행위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했듯이 여기에서도 法不可住라 법은 가히 머물지 않는다.
왜 머무는 것을 경계해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 ? 무엇 하나도 머물러있지 않고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있는 이치를 꿰뚫어 본 그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지, 새로운 법도 아니고, 조작해서 억지로 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있는 사실을 제대로 보라고 하는 것일 뿐 다른 것은 아무것 없습니다. 그래서 무상도 상이 상 그대로 있어지지 않고, 또 본래 없었던 것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변하게 되어있고, 변하다 보면 결국 없어지게 되어있으니까 무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法不可住= 우리는 눈앞의 모습이 영원히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바른 안목을 자꾸 배움으로 해서 우리의 안목도 차츰차츰 교정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도 자꾸 훈습하고 익히고 몸에 배도록 해서 부처님의 안목을 닮아간다는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法不可見(법불가견) 聞覺知若行(문각지약행) 見聞覺知是則(견문각지시즉)
見聞覺知非求法也(견문각지비구법야)
진리는 보고, 듣고, 지각해서 식별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만약 보고, 듣고, 지각하며, 식별해 알고자 하면, 그것은 보고, 듣고, 지각하며, 식별해 아는 (것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The Dharma is not visible, not audible, not perceptible, nor knowable, but if you practice seeing, hearing, realizing, or knowing, you are seeing, hearing, realizing, and knowing, and not seeking the Dharma.
[우리는 일상사 전부가 견문각지 속에서 생활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런 견문각지로써 생활하는 안목은 한계가 있어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그것을 초월해서 견문각지를 따르지 않아야 된다.]
法名無爲(법명무위) 若行有爲(약행유위) 是求有爲(시구유위) 非求法也(비구법야)
진리는 인연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는=無爲이니, 만약 만들고자 하면 이는 만들어지는=有爲를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The name of the Dharma is unconditioned. If one practices the conditioned, one seeks the conditioned, not pursuing the Dharma.
是故舍利弗(시고사리불) 若求法者(약구법자) 於一切法(어일체법) 應無所求(응무소구)
사리불이여, 그러므로 만약 진리=法을 구하는 자는 마땅히 일체법에서 無所求=구하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Therefore, O Sariputra, if there is a person who seeks the Dharma, then he should have no seeking for all the Dharmas.
[사리불이 법을 구하러 왔다는 말에 대한 결론적인 대답이 無所求=구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노력을 해서 깨달으려고 하지만 어떤 위치를 깨달고 나면, 깨닫긴 틀림없이 깨달았지만, 그 깨달음에 대한 흔적이 없고, 아무 표시가 없는, 그냥 마음속에서 느낄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밖에 나타나는 것으로써 구하려고 하는 자세가 아니라, 사실은 구하는 것이 없는, 구해도 구한 흔적이 없고, 구한 흔적이 없으니까 어떤 흔적을 가지고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說是語時(설시어시) 五百天子於諸法中(오백천자어제법중) 得法眼淨(득법안정)
이와 같이 말하였을 때, 5백 명 천자들 모두는 모든 사물=法에 있어서 (진리를 바르게 볼 수 있는) 법안이 청정해짐=法眼淨을 얻었습니다.
When Vimalakirti said these words, five hundred celestial beings attained the purity of the Dharma eye amid all Dharmas.
[得法眼淨=법안은 진리의 눈, 법을 아는 안목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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