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乘起信論에서의 ‘如來藏’ 개념 연구 / 고승학
서울大學校人文大學院 (석사학위논문)
Ⅳ. 기신론 의 여래장 개념
4. 同體大悲의 근거로서의 여래장
앞 절에서는 기신론의 생멸문을 이루는 시각, 본각, 불각 개념이 각각 정법 훈습 중의 망심 훈습, 정법 훈습 중의 진여의 자체상 및 용훈습, 그리고 무명·망심·망경계의 염법 훈습을 통해 기술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기신론은 염법 훈습과 정법 훈습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또한 염법은 무시의 때로부터 훈습하여 단절하지 않다가 부처가 된 후에는 곧 단절함이 있으나, 정법 훈습은 곧 단절함이 없어서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이 뜻이 무엇인가? 진여법이 항상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곧 멸하고 법신이 밝게 나타나 用훈습을 일으키므로 단절함이 없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여래장사상의 두 가지 이론적 전제를 보여주고 있다: ⑴ 무명은 그 始源을 알 수는 없지만 실체성이 없으므로 언젠가는 소멸되는 것이다. ⑵ 여래 법신은 끊임없이 중생을 제도하고 있기 때문에 常·樂·我·淨이라는 사바라밀다의 덕을 갖출 수 있다.
⑴은 여래장의 두 가지 의미 가운데 空여래장 개념을 표현하고 있으며, ⑵는 번뇌가 그렇게 공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번뇌의 소멸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중생에게 내재된 법신인 여래장이 중생을 내부로부터 각성시키고, 번뇌로부터 떠난 법신이 중생을 외부로부터 해탈로 이끌어주어야 가능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특히 그러한 법신의 작용이 끊이지 않는 것을 가리켜 법신의 常-바라밀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신론에서는 진여의 용훈습의 항상성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여가 항상 훈습하고 있다는 염법이란 무엇인가?
승만경을 다루면서 언급했듯이 여래장사상은 본래 청정한 여래장이 번뇌에 물드는 것은 “범부의 경계가 아니며, 여래의 경계”라고 강조해왔다. 여기에서 번뇌가 여래장을 물들이기 위해서는 여래장과 대등한 존재론적 위상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승만경은 상주불변의 여래장과 함께 끊기 힘든 번뇌로서 무명주지가 ‘있음’을 강조하며, 염법(무명)과 정법(여래장)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요소를 하나의 이론 체계에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무명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중생의 현실을 설명해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신론은 무명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명의 훈습에 의하여 일어난 식이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二乘의 지혜로 깨달을 것도 아니니, 이는 보살의 처음의 正信에서 발심하고 관찰함으로부터 저 법신을 증득한다면, 조금이라도 알게 되며, 보살구경지에 이른다 하더라도 다 알 수는 없고 오직 부처만이 끝까지 다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이 마음이 본래부터 그 본성이 깨끗하지만, 무명이 있어서 이 무명에 의하여 물들게 되어 染心이 있는 것이니, 비록 염심이 있으나 항상 변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뜻은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창조주의 개념이 없는 불교에서는 유신론적 전통에서 논의된 惡(evil)의 기원에 관한 문제, 곧 神正論(theodicy)이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불교 역시 고통(duḥkha)으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유신론적 전통의 악에 해당하는 고통의 본질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초기불교에서는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시급히 벗어날 것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무명의 ‘기원’을 다루는 문제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거부되었다(‘독화살의 비유’). 곧 무명·번뇌를 주어진 것으로, 苦성제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에서와 같이 본래 청정하면서도 무명에 물드는 모순적 성격을 가지는 본체를 상정하는 이론이 등장하면서 불교에도 무명과 여래장의 관계를 밝히는 ‘신정론’이 요청되었다. 예컨대 기신론에서 무명을 바람에, 여래장을 물에 비유할 경우, 무명은 실체가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없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명은 어떤 방식으로 ‘있는’ 것일까? 또 무명의 바람에 의해 물결이 이는 것을 ‘마음(자성청정심=여래장)이 물드는 것’이라 할 경우, 그러한 물듦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불교, 특히 여래장사상에서 제기된 ‘신정론’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레고리(Peter N. Gregory)는 기신론을 통해 검토한 결과 위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이 문제가 佛智에서나 해결 가능한 신비(mistery)로 남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렇게 ‘시초를 알 수 없는’ 무명(염법)이긴 하지만, 그것이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며, 언젠가는(부처가 된 후) 지멸될 수 있고, 그것은 “정법의 훈습”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 점은 여래장사상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여기에서 중생에게 해탈의 外緣으로서 작용하는 용훈습이 항상 그치지 않는다는 앞의 인용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신론은 본 논서가 밝히고자 하는 ‘진여’가 결국 여래장, 여래 법신임을 밝힌 다음, 그것의 작용(用)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또한 진여의 用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와 여래가 본래 因地에서 대자비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을 닦아서 중생을 섭화하며, 크나큰 서원을 세워 일체의 중생계를 모두 度脫시키고자 하여 劫의 수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모든 중생을 돌보기를 자기 몸과 같이하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衆生相을 취하지 않는다.
기신론은 이러한 진여의 작용은 모든 중생을 자기 몸과 같이 보는 ‘同體大悲’의 발로라고 보고, 이러한 자비심은 “모든 중생과 여래의 몸이 진여로서 평등함”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 생겨난 마음이라고 해설한다(이는 앞 장에서 살펴본 보성론의 ‘眞如平等’의 뜻에 해당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작용이 중생에게 가해질 때 중생은 무명을 없애고, 불가사의한 여러 작용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본각의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을 말하며, 앞 절에서 다룬 진여의 용훈습을 부연 설명한 것이다.
기신론은 이와 같이 진여의 용훈습을 여래 법신의 자비심으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보고, 중생이 수행을 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자비심을 닦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기신론은 ‘수행신심분’에서 수행의 五門으로 ⑴ 施門, ⑵ 戒門, ⑶ 忍門, ⑷ 進門, ⑸ 止觀門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6바라밀에 대응되며 ⑸ 지관문은 그 중의 선정과 지혜를 합한 것이다. 본 논서는 마지막 지관문에 대하여 상당히 자세히 해설하고 있다. 여기에서 止는 “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하는 것”으로, 觀은 “因緣生滅相을 분별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특히 다음과 같이 止와 觀의 관계를 논한 대목이 주목된다.
만약 사람이 오직 止만을 닦으면 곧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게으름을 일으켜 여러 善을 즐기지 않고 大悲를 멀리 여의게 되니, 이러므로 觀을 닦는 것이다.
만약 止를 닦으면 범부가 세간에 主着함을 대치하고 二乘의 겁약한 소견을 버릴 수 있으며, 만일 觀을 닦으면 二乘이 대비를 일으키지 아니하는 狹劣心의 허물을 대치하고, 범부가 선근을 닦지 않음을 멀리 여읜다.
기신론은 이와 같이 마음을 고요히 하는 止와 그 고요해진 마음으로 세간의 무상함과 중생의 고통을 여실히 보며, 그들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키는 觀을 함께 닦을 것을 함께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신론의 觀이 현상계에 어떠한 실체도 없음(空)을 여실히 아는 지혜인 반야바라밀다와는 다소 성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기신론은 觀의 내용으로 특히 “일체중생이 無始로부터 모두 무명의 훈습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을 생멸케 하여 이미 큰 고통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고통도 한계가 없어서 버리고 여의기가 어렵건만 이를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 이처럼 매우 가련한 존재임을 늘 생각해야 한다”는 大悲觀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기신론의 수행으로서의 觀은 여래장사상을 “지혜의 자비적 전개”라고 부르는 所以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중생이 이러한 수행을 하고 그 수행이 완성된 결과 다른 중생들에게 정법 훈습을 끊임없이 가할 수 있는 근거는 그의 존재가 여래장(在纏位의 法身)으로 규정되기 때문일 것이다(“一切衆生如來藏”).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게 하는” 중생 내부의 因과 그들 앞에 불보살로 현현하여 그러한 내부의 因을 끌어내는 중생 외부의 緣은 모두 법신이 在纏位와 出纏位라는 서로 다른 존재 양태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우 출전위의 법신인 여래는 중생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존재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그의 業用, 곧 진여훈습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반면, 하나의 개체로서 유한한 중생의 번뇌는 그것이 아무리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끊임없는 진여의 용훈습에 의해 결국에는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는 보살로서의 일천제는 결코 성불하지 않지만, 중생으로서의 일천제는 언젠가는 성불한다는 입능가경의 說과도 통함이 있다). 아울러 진여의 용훈습이 同體大悲로부터 비롯되었고 동체대비의 마음이 ‘진여평등’, 곧 중생과 여래가 진여로서 평등하다는 점에 대한 인식에서 나올 수 있다면, 중생에게 내재된 진여, 곧 재전위의 법신으로서의 여래장은 동체대비의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海印의 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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