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乘起信論에서의如來藏’ 개념 연구 / 고승학

서울大學校人文大學院 (석사학위논문)

 

2. 생멸문의 구성 

앞 절에서는 기신론에서 대승의 본체인 중생심, 곧 알라야식이 불생불멸과 생멸, 각과 불각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요소들의 결합(眞妄화합식)으로 정의된 배경을 능가경을 통해 살펴보았다. 본 절에서는 그러한 각 요소들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 그것들이여래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1) 始覺의 四相 

기신론은 알라야식에 의하여 전개되는 중생의 세계가 모두 깨달음()과 미혹(不覺)이라는 두 가지 범주에 포섭된다고 설하면서覺’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覺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본체(心體)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하니, 망념을 여읜 相은 허공계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어 法界一相이며 바로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니, 이 법신에 의하여 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신론은 이어 覺에는 本覺(근원적인 깨달음)과 始覺(현실화된 깨달음)이 있고,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不覺은 본각에, 시각은 불각에 의지하고 있다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정의와 같이 覺을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떠난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마음의 본체에 처음부터 不覺(無明)이 없다는 말이 되고, 이는 覺이란 것이 별다른 작용이 없음을 함축하는 것이 아닌가? 반대로 비추는 작용을 통해 비로소 법신을 현현시킨다면, 이는 本覺이 아닌 始覺에만 覺이 있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원효는 허공계와 같이 遍在한 覺의 모습을 지혜광명이 법계를 두루 비추는 성질(覺照性)로 파악하면서 覺과 번뇌, 본각과 시각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각이란) 단지 어두움(불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밝게 비추는 작용도 있는 것이니, 이 비추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번뇌를 끊을 수 있다. 만약 먼저 미혹했다가 뒤에 깨닫는 것을 각이라 한다면, 시각에는 각이 있고 본각에는 각이 없을 것이다. 만약 본래 미혹하지 않음을 각이라 하면 본각은 각이고 시각은 각이 아닐 것이다. 번뇌를 끊는 뜻도 이와 같아서 앞서는 번뇌가 있었으나 뒤에 번뇌가 없어진 것을 끊음이라 한다면 시각은 끊음이 있고 본각은 끊음이 없으며, 본래부터 번뇌를 여읜 것을 끊음이라 한다면 본각은 끊은 것이고 시각은 끊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본래 끊었기에 본래 범부가 없을 것이지만, … 아직 시각이 있지 않기 때문에 본래 범부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원효는 본각에는 법신과 같이 망념이 없이 세계를 평등하게 비추는 뜻이 있지만, 중생의 입장에서 깨달음이 아무런 노력(始覺) 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시각이 본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불각으로부터 시작하여 구경각이라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의 消息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신론은 중생이 실천 수행(始覺)을 통해 얻은 궁극적인 깨달음, 곧 究竟覺을마음의 본원(心源)을 깨달은 것”으로 정의하는데, 이 단계에서는 모든 미세한 생각(微細念)을 여의고 마음의 본성을 바로 볼 수 있어 마음이 상주하며 마음에 최초로 일어나는 相이 없는 無念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는 마음에 일어나는 악념을 제거하려는 범부의 소극적인 수행인 不覺으로부터 거친 분별과 집착(麤分別執着: 주관과 객관을 분별하고 나와 내 것에 대하여 집착함)을 버린 초발의보살 등의 相似覺, 분별하는 거친 생각(分別麤念相: 내적으로 자아와 대상에 집착함)을 떠난 법신보살의 隨分覺을 거쳐 도달한 것이다.

원효는 여기에서 범부의 수행을 불각이라 부른 것은 범부가 비록 악념(滅相)이 나쁜 것임을 알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꿈과 같은 것임을, 곧 공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해설한다. 다시 말해 범부는 아직 번뇌의 空과 여래장의 不空이라는 근본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한편, 기신론은 중생이 망념을 가지고 있는 한 깨닫지 못했다(不覺)고 설하고 있으므로 구경각에 이르지 못한 시각의 나머지 단계들도 모두 불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동요함이 없는(無初相可知) 구경각에 이르면, 망념이 사라져(無念) 중생의 四相의 차별을 두루 보게 되지만, 실제로는 어떠한 차별도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원효는 여기에서 四相의 차별이 없다는 것은 四相의 분별이 一心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설한다. 그는 이어 별기에서 능가경과 승만경의 불생불멸의 여래장에 대한 설을 인용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一心’은 여래장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울러 승만경에서 설하였듯이 일심으로서의 여래장은 비록 무명에불가사의’하게 오염되지만, 구경각의 위치에서는 그것을 덮고 있던 무명(번뇌)이 사라져 순수한 법신만이 드러나게 되므로 마음이 상주한다(心卽常住)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신론은마음의 본성을 보게 되어(得見心性)” 마음이 상주하게 되었다고 설하고 있으므로, 구경각에서 常住不變의 마음을 얻은 것이 단지 미세념을멀리 여의었기(遠離)’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효는 이에 대하여 그러한 마음의 동요가 무명불각에 의해 일어났지만 그것은 꿈과 같으며, 그러한 꿈은본각의 불사의훈’에 의하여 벗어날 수 있다고 해설한다. 삼계를 유전하던 중생은 그러한 본각의 훈습에 의해자기 마음이 본래 동요한 바가 없음을 깨닫고, 이제는 고요하게 할 바도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一如의 자리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번뇌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다루기보다는 그것을 꿈과 같이 실체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마음 속에 본래 유전하지 않는(不生不滅) 법신(여래장)이 있음을 바로 볼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본각의 불사의훈이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찾는 마음(厭樂心)’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이는 승만경에서 언급한 여래장의 작용력에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원효는 구경각에서 깨우친 마음의 初相을 生相으로 보고, 수분각, 상사각, 불각은 각각 마음속의 住相, 異相, 滅相을 깨달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또한 각각의 四相을 8식과 관련하여 정리하는데,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가장 미세한 모습으로 구경각에 이르러 깨닫게 된 生相(원효는 이를 業相, 轉相, 現相의 셋으로 본다)을 알라야식의 위치에 놓은 점이 주목된다(< 2> 참조). 이는 불각으로부터 구경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표층으로부터 심층으로 전개되는 자기 의식의 정화 과정에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시각의 四相을 원효의 해석과 함께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2> 시각의 四相과 그 내용

2) 本覺의 구조 

다음으로 실천 수행, 곧 시각의 토대가 되는 동시에 그것이 궁극에 이르러 도달하게 된 구경각으로서의 본각의 구조를 살펴보자. 기신론은 본각이 번뇌()을 따를 경우의 모습(本覺隨染)으로 智淨相과 不思議業相을 들고 있는데, 먼저 지정상은법력의 훈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다. 智淨相이란 법력의 훈습에 의하여 여실히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하기 때문에 화합식상을 깨뜨리고 상속심상을 없애어 법신을 현현하여 지혜가 맑고 깨끗하게 됨을 말한다.

위의 정의는 지정상이 보살의 수행 결과 화합식인 알라야식 가운데생멸’이라는 요소를 제거함으로써불생불멸’인 법신을 드러낸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의생멸’은 물론 무명을 가리키며, 그것을깨뜨림’으로써 사라지는 것은 상속심 자체가 아닌 상속심의 相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앞에서 알라야식을 생멸과 불생불멸이非一非異’하게 화합한 것으로 정의했기 때문에 무명(생멸)이 없어짐으로써 상속심(알라야식) 자체가 사라진다면, ‘非一’이라는 규정에 위배될 것이다.

한편, 무명이 바뀌어 明이 된다는 것(법신의 현현)은 생멸이 불생불멸과非異’의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기신론이 무명과 자성청정심(여래장)의 관계를 바람과 물에 비유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바람에 의해 바다에 물결이 생기는 것(動相)이 자성청정심이 무명에 의해 움직이는 것과 같다면,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가라앉아 물의 본성(濕性)이 드러나는 것은 무명과 함께 변화하는 마음의 모습(相續心相)이 사라져 자성청정심의 지혜의 본성(智性)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효는 上記인용문의법력의 훈습’을진여법의 內熏하는 힘’으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수행자의 마음 속에 있는 여래장의 작용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지정상을 갖추게 되면, 다음과 같은業用’으로서의 不思議業相이 발생한다고 한다.

不思議業相이란 지혜가 맑아짐에 의하여 모든 뛰어난 경계를 짓는 것이니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상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으로부터 본각의 불사의업상은 진여문에서의 如實不空에 상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원효는 불사의업상이 나타내는무량한 공덕의 상이 끊어짐이 없는’ 이유를 應身의 常住와 관련하여중생이 다하지 않으므로 업용도 다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여래장의 不空(具足無量性功德)이라는 개념이 중생의 무한성과 그에 대한 부처의 무한한 자비를 매개로 하여 佛身의 常住性으로 이어짐을 볼 수 있다.

기신론은 이상에서 살펴본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이라는, 염법과의 상관 관계 속에서의 본각(隨染本覺)과 함께 본각 그 자체의 깨끗한 성질(性淨本覺, 覺體相)로서 다음의 넷을 들고 있다: ⑴ 如實空鏡은 마음에나타낼 만한 법이 없는(無法可現)’ 공한 모습 그 자체를 나타내며, ⑵ 因熏習鏡(=如實不空) 일심에 항상 머물면서 염법에 더럽혀지지 않고 중생을 훈습하는 본각의 작용을 나타낸다. ⑶ 法出離鏡은 번뇌애와 지애라는 두 가지 장애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여읜 것으로 수염본각의 지정상에 대응된다. 마지막으로 ⑷ 緣熏習鏡은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 善根을 닦도록 하고 그들의 생각에 따라 나타내는 것으로 수염본각의 불사의업상에 대응된다. 원효는 수염본각의 불사의업상과 성정본각의 연훈습경의 차이로 ⑴ 전자가 응신과 시각의 업용을 밝힌 데 비하여 후자는 본각과 법신의 작용을 나타낸다는 점, ⑵ 전자가 緣의 親疎를 가리지만 후자는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3) 不覺과 알라야식의 전개(生滅因緣) 

기신론에서 不覺은 알라야식의 두 구성요소 가운데생멸’에 해당하며, 불각으로부터 전개되는 알라야식의 여러 모습(生滅因緣相)은 중생의 번뇌와 고통이 어떻게 발생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기신론은 불각을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여(不如實知眞如法一故)” 발생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 불각의 마음으로부터 중생에게 망념이 일어난 것은각에 의하기 때문(依覺故)”이라고도 설하고 있다. Ⅱ장 3절에서 언급했듯이각에 의한다”는 구절은 단지 각과 불각의 상호 의존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어야 하지만, “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모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는 좀더 설명이 필요하다. 원효는 이를 근본불각(근본무명), 곧 방향을 잃은 것(迷方)으로 보고, 불각의 마음으로부터 망념이 발생한 것은 業相(무명업상)의 動念으로서 방향을 잘못 아는 것(邪方)과 같다고 해설한다. 여기에서 굳이 방향을 잃은 것과 방향을 잘못 아는 것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기신론 본문과 원효의 해설로부터 방향을 잃은 것으로써 불각을 설명하려는 의도는 다음의 사실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길을 잃는다는 개념이 올바른 방향이 따로 있음을 전제할 때에만 성립할 수 있듯이, 중생의 근본불각 역시 불각과는 별도로 각이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모르는 것”으로 정의된 근본불각은 그러한 각과 불각의 상대성을 보지 못하고 양자를 절대적인 두 실재로 보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앞 장에서 살펴본 부증불감경의一法界에 대한 바른 知見”이 없는 상태와 같을 것이다. 부증불감경에서 중생계와 열반계가 하나(一法界)인 근거가 모든 중생이 여래장이라는 사실, 곧 중생에게 법신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 있었다면, 기신론에서 각과 불각이하나의 진여법’으로 연결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염본각의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은법신의 현현’, ‘무량한 공덕’ 등의 용어로 설명되며, 이는 여래장의 본체()와 속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체 중생에게 두루 선근을 닦도록 하는 것으로 정의된 성정본각의 연훈습경은 여래장의 무한한 작용()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기신론의 본각은 여래장의 본체·속성·작용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불각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와 관련하여 기신론은 각과 불각을 同相과 異相의 관계로부터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 同相이라고 말한 것은 여러 가지 瓦器가 모두 똑같은 微塵의 性相인 것처럼 無漏()와 無明(不覺)의 여러 가지 業幻도 다 똑같은 진여의 성상인 것이다. 이러므로 경에서는 이 진여의 뜻에 의하여일체중생은 본래 열반·보리의 법에 常住하여 들어가 있는 것이니, 이는 닦을 수 있는 상이 아니며, 지을 수 있는 상이 아닌지라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色相을 볼 만한 것이 없으며 색상을 봄이 있는 것은, 오직 염법의 업환에 따라 지은 것이지 智色不空(부처의 무량한 광명)의 성질은 아니니 智相은 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異相이라고 말한 것은 여러 가지의 와기가 각기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이와 같이 무루와 무명이 隨染幻의 차별이며 性染幻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원효의 해설에 따르면, 무루()와 무명(불각)은 모두 진여가 업에 의해 나타난 공한 작용(業幻)이라는 점에서 같다(同相). 그러나 무명은 평등성을 어김으로써 그 본성이 물들어 차별(異相: 六染心등)이 있고(性染幻의 차별), 무루는 비록 평등성을 그 본성으로 하지만 무명의 차별에 따라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 갖가지로 차별(본각의 온갖 공덕, 始覺의 四相등)이 있게 된다(隨染幻의 차별).

특히 異相의 관점은 무루(정법=)가 무명(염법=불각)따른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無漏(anāsrava)라고 하면 더 이상 정념과 번뇌가 새어나오지 않는 상태로 열반과 같은 無爲法을 지칭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기신론의 무루는 무명을 따르기도 하고(隨染), 역으로 무명에 작용을 가하기도 하는 활동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루는 단지 진여의 業幻이라 했으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진여가 활동성(隨染性)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신론은 진여의 본체와 속성(自體·相)으로서대지혜광명의 뜻”과자성청정심의 뜻”, “常·樂·我·淨의 뜻” 등을 들면서 진여를여래장’, ‘여래 법신’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여래장사상에서 여래장이 번뇌에 물드는 것(隨染)불가사의한’ 일로서 믿음의 대상, 곧 이론적 전제가 되어 있으며, 위에서 살펴본 진여의 隨染性은 이러한 여래장의 隨染性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안다”는 말은 결국 각이 불각을 떠나 있지 않고, 불각을 따라 반응하며(隨染), 불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근본무명으로부터 어떠한 번뇌가 발생하는가? 이하에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생략하고 그 대략적인 모습만 밝히고자 한다.

기신론은 근본불각(근본무명)으로부터 세 가지 미세한 번뇌(三細)와 여섯 가지 거친 번뇌(六麤)가 발생하게 된다고 설하는데, 원효는 이들을 支末불각이라 하였다. 먼저 三細는 ⑴ 불각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는 無明業相, 그러한 무명업상으로부터 생겨난 주관적 의식인 能見相, 주관적 의식으로부터 전개되어 보이는 대상 세계인 境界相으로서, 원효는 이 셋을 모두 알라야식의 자리에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六麤는 3세의 경계상에 의지하여 발생한 것으로 ⑴ 대상에 대한 주관적 好惡의 감정인 智相, 智相에 의하여 苦樂을 일으키고 망념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相續相, 상속에 의하여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는 執取相, 잘못된 집착으로 인해 개념과 언설에 얽매이는 計名字相, 假設에 불과한 개념적 규정을 실재인 양 집착하여 업을 일으키는 起業相, 그런 업에 의해 과보를 받는 業繫苦相등이 있다. 원효는 이 가운데 지상을 제7식에, 상속상부터 기업상까지는 生起識(6)에 두고, 업계고상은 앞의 다섯 가지가 낸 과보(彼所生果)라고 해석한다. 아울러 그는 5蘊과 관련하여 상속식부터 기업상까지를 각각 識蘊, 受蘊, 想蘊, 行蘊에 대응시키고 있다.

기신론은 이어서 알라야식이라는 심층 의식으로부터 사고하고 지각하는 표층 의식이 전개되어 나오는 양상(生滅因緣)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간단히 心→意→意識”의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에서心’은 알라야식으로서 생멸의 근원()인 알라야식이 무명이라는 조건()을 만나 중생의 의식과 함께 번뇌가 전개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心, 곧 알라야식으로부터 ⑴ 業識, ⑵ 轉識, ⑶ 現識, ⑷ 智識, ⑸ 相續識의 五意가 전개되어 나오는데, 이 가운데 특히망념이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는” 상속식이 三世의 인과를 일으키는 것으로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상속식도 결국은 心으로부터 전개된 것이므로 기신론은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의 법이 사라진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라는 唯心사상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원효는 이 가운데 업식, 전식, 현식을 3세와 마찬가지로 본식(알라야식)에 대응시키고, 지식은 제7식에 대응시키고 있다. 원효는相續心’과相續識’을 구분하면서 전자는 알라야식 자체로 보고, 후자는 의식(6)에 대응시키고 있다. 이어 이러한 상속식으로부터 意識(分別事識, 分離識)이 전개되는데, 이것은 자아(, 我所)와 감각적 대상(六塵)에 대한 분별·집착을 가리킨다. (원효는 의식을 6추의 집취상, 계명자상, 기업상에 대응시키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의식의 전개 과정은 마음의 본체(心體, 알라야식)에 있는생멸’이라는 인자()가 무명이라는 조건()을 만나서 일어난 것이다. 심→의→의식”의 과정이 이 가운데 因의 측면에서 기술된 것이라면, 緣으로서의 무명이 일으키는 마음의 오염된 모습은 六染心이라는 개념을 통해 기술된다. 기신론은 이를無明(住持)의 훈습에 의하여 일어난 식’으로 규정하면서, 執相應染, 不斷相應染, 分別智相應染, 現色不相應染, 能見心不相應染, 根本業不相應染의 6염심과 그것들을 끊을 수 있는 각각의 단계를 信相應地로부터 如來地에 이르는 수행 계위로서 제시하고 있다.

원효는 이들 6염심은 앞에서 살펴본 5의와 의식에 해당한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⑴ 집상응염은 의식으로 지적인 번뇌(見惑)와 정서적인 번뇌(思惑)가 증가하는 것, 곧 추분별집착에 상응하는 것이다. ⑵ 부단상응염은 상속심으로 대상 세계에 대한 집착(法執)이 증가되는 것이며, ⑶ 분별지상응염은 智識으로 空觀에 의해 止滅할 수 있다. ⑷ 현색불상응염, ⑸ 능견심불상응염, ⑹ 근본업불상음염은 각각 현식, 전식, 업식에 대응한다.

여기에서상응’이란 ⑴⑶의 경우 마음()과 대상(念法)이 구분됨으로써 주관(知相)이 물들거나 깨끗해질 때 객관(緣相)도 따라서 물들거나 깨끗해짐을 말한다. ⑹에서의불상응’이란 알라야식에 아직 대상 세계에 대한 주-객 분별이 생기기 전으로 주관과 객관의 대응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곧 ⑷⑹은 극히 미세한 의식 안에서 범부가 인식하지 못하는, 극히 미세한 번뇌가 생겨난 것을 가리킨다.

기신론은 이상의 6염심을 통틀어 煩惱礙라 하며, 근본무명(무명주지)을 智礙라 한다. 앞 소절에서 다룬 본각의 법출리경과 지정상은 이 두 가지 번뇌를 벗어난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번뇌애를 진여의 根本智(如理智)를 막는 것으로, 지애를 세간의 自然業智(後得智=如量智)를 막는 것으로 설하고 있는 점이다. 다시 말해 기신론에서의 지적인 장애(智礙)란 세속을 敎化하는 등의 행위를 일으키지 않는 소승적 태도로서 승만경에서 설한두려워함이 남아있는 아라한’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기신론은 이러한 지애(근본무명)를 제거할 수 있는 수행 계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앞에서 살펴본 시각의 구경각 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시각의 구경각은 보살지가 다한 것(菩薩地盡)으로 번뇌애인 6염심 가운데의 업식 등을 제거한다고 설할 뿐, 지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기신론에 대한전통적 입장’은 유식에 대응되는 생멸문의 구경각에 아직진여에 대한 집착’이라는 근본무명(지애)이 남아 있고, 그것은 중관에 대응되는 진여문의 말을 떠난 진여(離言眞如)에 의해 타파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결과 본각에 이르러 지애와 번뇌애가 모두 사라져 지혜가 깨끗해지고(智淨相) 중생을 위한 불가사의한 작용(不思議業相)을 발생시킨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진여문과 생멸문이 중관과 유식에 대응됨을 전제할 때만 성립할 수 있을 것이며, 기신론 본문 자체는 구경각에 어떤 집착이 남아있는지, 본각이 시각의 구경각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깨달음인지 등을 명시하고 있지 않으므로, 필자는 이러한추론’을 피하고자 한다. 오히려 필자는 기신론에서 시각과 본각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본 논서가 도입하고 있는훈습’이라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논하기로 한다. -海印의 뜨락

이상에서 살펴본 불각의 구조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3> 不覺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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