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기신론 에 대한 기존의 시각
1. 기신론 에 대한 ‘전통적 견해’와 그에 대한 반론
종래에 元曉(617∼686)의 起信論別記의 宗體文에 입각하여 기신론을 중관과 유식사상의 종합·지양으로 보고, 원효가 기신론을 높게 평가한 것을 그의 和諍사상과 연결지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러한 견해를 편의상 ‘전통적 견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 요지는 기신론의 진여문은 중관사상에, 생멸문은 유식사상에 대응하며, 이 두 門이 한 마음(一心)에 있다는 점에서 두 가지 대립되는 사상이 相補的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견해’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선 원효가 별기를 짓고 소를 작성하기까지 상당한 時差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며, 특히 별기에서 진여문과 생멸문을 각각 중관과 유식사상으로 배대한 구절이 나중에 소를 작성할 때에 삭제된 것은 원효의 기신론에 대한 이해가 이후 성숙되어 이전의 견해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박태원은 일반적으로 기신론 사상을 여래장사상에 입각하여 이해하는 것은, 法藏(643∼712)이 그의 敎判에서 기신론 과 능가경을 ‘如來藏緣起宗’으로 규정한 이래, 이를 따른 일본학계의 성과를 한국의 불교학계가 무비판적으로 답습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기신론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오히려 유식사상, 특히 曇延(516∼588), 慧遠(523∼592), 원효 등 古주석가들이 근거한 眞諦계열의 舊유식에 입각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담연과 혜원 등은 攝大乘論에서 染法(遍計所執性)과 淨法(圓成實性)이 의존하는 것으로서 인식의 연기적 발생 그 자체인 依他起性을 설정하고, 그러한 의타기성이 알라야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설한 데 착안하여 기신론 생멸문의 알라야식을 유식사상에 입각하여 주석하였다. 또한 원효의 주석에 따르면, 기신론의 기본 구조는 一心二門이며, 그 二門가운데 생멸문에서 여래장이 ‘不生不滅’로서 언급되고 있으므로, 일심이 여래장보다 상위개념이며, 여래장은 어디까지나 “일심의 심원을 밝히고 지향하는 과정에서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는 중요한 보조개념”일 뿐이다.
한편, 원효는 오로지 생멸하는 식(一向生滅識)인 유식의 알라야식과 달리 기신론의 알라야식이 생멸과 불생불멸의 화합식으로 설해진 것에 주목하였는데, 박태원은 이 때문에 기신론과 유식사상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원효에 따르면, 알라야식에는 번뇌의 창고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業煩惱所感義門(해심밀경 )과 그러한 번뇌가 진여를 훈습하여 움직이게 한다는 根本無明所動義門(능가경)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 있으며, 전자는 常見을, 후자는 眞諦와 俗諦를 별개의 것으로 집착하는 견해(眞俗別體之執)를 각각 對治한다고 한다. 그런데 원효는 기신론이 채택하는 알라야식이 이 중 후자의 차원이며, 이와 같이 그 의미가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가지 서로 다른 알라야식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二意雖異, 識體無二也). 여기에서 박태원은 원효의 이러한 설명이 기신론이 기존의 유식사상으로부터 隔別된 사상이 아님을 입증한다고 보고 있다.
박태원은 원효가 이와 같이 유식과 기신론의 설을 和會시킬 수 있었던 이유를 이전의 두 주석가들과 마찬가지로 원효가 구유식설에 정통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진제 계열의 구유식은 玄奘(602∼664)이 도입한 신유식과 달리 알라야식의 본체로서 제9식, 이른바 淸淨無垢識으로서의 아말라식(amalavijñāna)을 인정하는데, 이는 곧 기신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眞如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장 이전까지 기신론은 여래장을 특별히 궁극적 개념으로 내세우지 않고도 기존의 유식사상의 개념을 활용하여 해명할 수 있었다는 것이 박태원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러나 이후 신유식, 이른바 法相유식이 중국에 들어오자 華嚴家인 법장은 이를 비판할 필요를 느꼈고, 敎判을 통해 유식사상(依理起事差別說)보다 한 단계 나아간 여래장사상(理事融通無礙說)으로서 기신론을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박태원은 이러한 비판은 오로지 생멸하는 식으로서의 알라야식을 인정하는 현장의 법상 유식에만 해당할 뿐이므로 기신론에 대한 유식적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독해만이 기신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앞으로 논의하겠지만,
예컨대 훈습 개념에 있어서 유식과는 너무나 다른, 염법(무명)과 정법(진여)간의 상호 훈습이 전개되는 기신론 특유의 사상을 기존의 유식설에 맞춰 논의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원효는 섭대승론 등의 훈습 개념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러한 훈습을 ‘不可思議熏’이라 불렀다). 오히려 이러한 특이한 훈습 개념은 여래장 계열 경전으로 알려진 승만경, 능가경 등을 통해 시사받을 수 있으므로, 필자 역시 유식사상으로 설명되지 않는 기신론 특유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여래장사상의 여러 개념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의 논의와 다소 방향은 다르지만, 버스웰(R. E. Buswell Jr.)은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의 대립에 주목하면서 기신론이 양자를 화회시킬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을 대등한 차원에서 다루는 것으로 박태원의 관점과는 다르지만, 기신론을 중관과 유식의 종합·지양이라는 틀로 보려는 ‘전통적 견해’와 다르다는 점에서 양자는 공통점이 있다. 버스웰의 논점은 다음과 같다.
기신론의 一心二門조직에서
⑴ 진여문은 眞諦로서 여래장을 나타내며 여기에는 空과 不空의 두 측면이 있고,
⑵ 생멸문은 俗諦로서 불생불멸과 생멸이 非一非異의 관계로 화합한 알라야식을 나타낸다. 한편, 알라야식으로서의 생멸문은 心진여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고, 그러한 歸入은 止(śamatha)·觀(vipaśyanā), 無念등의 수행을 포함하는 始覺(actualized enlightenment)이라는 과정을 통해 성취된다. 그러나 시각과 그것을 거쳐 도달한 本覺(original enlightenment)의 경지는 사실상 지각·관점의 차이―여래장과 법신의 광채와 청정함이란 것은 성자의 눈으로 보면 ‘본질적·내재적인’(本: 불생불멸) 것이지만, 중생의 눈으로 보면 ‘현실화되어야 할’(始: 생멸) 것이다―에서 나눠지는 것이므로 양자는 不二의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⑴ 진여문의 진여는 중생에게는 번뇌에 뒤덮인 여래장으로 보이지만, 깨달은 자에게는 법신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存在論적 개념임을 알 수 있다. ⑵ 생멸문(알라야식)은 시각과 본각으로서 自利利他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修證論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신론에서 여래장과 알라야식이 합치된다는 것은 존재론(ontology)이 수증론(救濟論, soteriology)에 융화됨과 수증론에도 존재론적 기반이 제공됨을 의미할 것이다.
우선 생멸문의 알라야식을 수증론적 개념으로 보는 입장은, 기신론의 생멸문이 覺과 不覺이라는 깨달음과 미혹의 세계를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진여문의 중심 개념이 여래장이며, 그것을 존재론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가? 우선 기신론 에서 ‘여래장’이란 말이 처음 나오는 곳은 “여래장이 무한한 본성으로서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라는 相大에 대한 설명 부분이며, 體·相·用三大가운데 相大는 생멸문에 배속되므로 여래장을 진여문의 기본 개념으로 삼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의 진여적인 속성(是心眞如相)이 대승의 본체(體)를 나타낸다”는 진여문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진여문의 논의 대상인 진여가 아무런 속성(相)이 없는 본체, 형언할 수 없는 본체(離言眞如)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기신론은 그러한 진여의 초월성과 함께 진여를 굳이 언어에 의해 그 속성을 나타내면 如實空과 如實不空을 들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依言眞如). 그런데 이는 승만경 등에서 여래장의 空, 不空을 설한 것과 대응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진여를 여래장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에게는 여래장으로, 깨달은 자에게는 법신으로 顯現하는 진여”를 존재론적인 개념으로 볼 경우, 이 때 ‘존재론적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생멸 현상의 배후에 놓여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어떤 절대적 실재를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원효가 지적했듯이 중생으로 하여금 생멸을 일으킨다거나 열반으로 인도하는 힘(生義)을 갖는 실재는 생멸문에 있는 알라야식이다. 버스웰도 이 점에 주목하여 알라야식을 수증론의 본체로서 생멸문에 두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존재론적 개념으로 설정된 진여는 모든 현상을 ‘일으키는’ 근본 원리라기보다는 생멸과 변화라는 현상 그 자체이며, 그런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론적 편견이 사라진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여문에서 不生不滅한 心性과 함께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言說相(음성, verbalization)·名字相(名句, description)·心緣相(名字와 言說의 분별, conceptualization)을 떠났음”을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차별적 인식(妄念)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현상 자체를 ‘진여’라 이름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여를 존재론적 개념이라 부르는 것은 진여를 불변의 실체 혹은 산출의 기반인 것으로 誤導할 우려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박태원과 버스웰의 논의는 그 해석학적 지향은 다르지만, 모두 유식사상 또는 여래장사상이라는 틀 안에서 기신론을 이해하려는 시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기신론을 불교사상사라는 테두리 안에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전통적 시각’과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론으로서 여래장사상은 물론 유식사상에도 비불교적인 요소가 있음을 주장하면서 그에 대한 귀결로서 기신론 역시 비불교적인 논서라고 주장하는 사상 경향도 나타났다. 서론에서 언급한 비판불교 운동이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2.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닌가? ― 비판불교의 경우
여래장사상의 성립과정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의 견해가 있다.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래장사상을 불교 외적인 인도 전통사조와 연관시키는 비판불교적인 견해가 그 첫 번째이고, 그것을 대승불교의 전통적·정통적인 ‘보살도’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견해가 두 번째 견해이다(이 두 번째 견해는 Ⅲ장 1절에서 다루기로 한다).
세 번째는 샤프(Robert H. Sharf)에 의해 제시된 견해로 ‘佛性’의 ‘性’ 개념에 주목하여 이를 인도불교의 중국화의 사례로 보고 있다. 그는 불성사상의 역사적 근원은 분명히 인도 사상에 있지만, 그것을 無情佛性과 같은 ‘보편적인 불성’으로 확대시킨 것은 중국불교 고유의 사상임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그는 이러한 불교의 중국화 과정 속에서도 불성에 관한 불교 내부의 담론은, 유학자들의 天然之性, 氣質之性등에 대한 “상대적으로 세속적이고 편협해 보이는” 그것과는 구별되는 불교 나름의 정체성을 지켰음을 지적한다.
~ 중략 ~
그렇다면 기신론 에서 그러한 유일 실재로 삼고 있다는 ‘一心’, 곧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기신론은 일반적으로 자기 구제(自利)와 중생 구제(利他)라는 소임을 다할 수 있는 큰 수레, 곧 대승(摩訶衍)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려 하는 논서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대승’이 대상(法)으로 삼는 ‘마음(心)’에 대하여 기신론 은 그 총론이라 할 수 있는 立義分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大乘(摩訶衍)이란 총괄하여 설명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法이요, 둘째는 義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衆生心을 말함이니, 이 마음이 곧 世間法(有爲, 생멸 변화)과 出世間法(無爲, 열반)을 포괄하며, 이 마음에 의하여 대승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어째서인가? 이 마음의 진여상이 대승의 체를 보이기 때문이고, 이 마음의 생멸인연상이 대승 자체의 상과 용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카마야는 여기에서 ‘마음’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포괄한다는 점과 그런 대상들의 의지처가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사실 이러한 ‘마음’은 자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일상적 자아와는 달리 진여에 歸入함으로써 보편성·포괄성을 획득한 절대적인 마음이라 해야 할 것인데, 그는 이러한 절대성을 획득한 대가로 ‘마음’은 차별적인 현상계의 존재 양태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리게 됨을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일반적으로 ‘마음’이라는 말이 생각한다든가 괴로워 한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문맥에서 그 의미를 지님에 대하여, 이러한 보편적인 ‘마음’은 불변의 無爲法인 출세간법까지도 그 外延(extension)에 포함시킴으로써 자발적 활동이라는 특질을 그 內包(intension)로부터 제거해버렸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기신론에서 말하는 ‘마음’은 단지 ‘실재’라는 의미만을 지니는 ‘개념의 괴물’이 되고 말았다고 말한다.
또한 ‘眞如(tathatā)’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如如)’라는 뜻을 가진 ‘tatha’로부터의 파생어라고 간주할 경우, 이 용어는 원래 無常이며 無我인 지속 가운데에서 事象을 ‘있는 그대로’ 잘 보거나 또는 모든 존재가 空함을 여실히 아는 행위와 관련된 문맥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추상화된 ‘tathatā’는 시간 속에서 의존적으로 발생한(緣起) 모든 존재들의 배후로 밀려나 “一切法의 眞如”라는 脫시간적이며 보편적인 理法으로 고착화되고 말았다.
~ 중략 ~
3. 기신론 의 성격 규정
그렇다면 기신론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하카마야의 지적대로 그것은 “단숨에 시간 밖으로 도피하여 세운 연역적 형이상학 체계”로서 세계의 일원적 구조를 해명하고 있는 논서인가? 그리고 그 결과 기신론 은 모든 현상적 차별을 관념적으로 호도하고 중생을 더욱 더 미혹에 빠뜨려 전혀 수행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만드는 논서라고 해야 하는가? 우선 기신론의 마음 개념이 ‘초시간적·관념적 실재’인지 검토해 보자. 앞에서 든 기신론 立義分의 문장에서 마음을 가리키는 단어로 ‘一心’ 대신 ‘衆生心’이 사용되었음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一心’이 대개 ‘眞如’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음에 대하여 ‘衆生心’은 ‘중생의 현실적인 마음’을 가리키고 있다.
아울러 ‘一心’과 ‘一心法’의 구분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입의분의 문장을 살펴보면, 대승의 法은 중생심이고, 대승의 義는 이 마음(是心)의 진여상과 생멸인연상이 보이는 體·相·用三大로 정의되고 있다. 여기에서 ‘이 마음’이란 곧 ‘중생심’임을 알 수 있고, 또 解釋分의 顯示正義에서 “일심의 법(一心法)에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고 하면서 心眞如門과 心을 내세우는 여래장사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츠모토는 이 때문에 유식사상을 dhātu-vāda의 傍系라고 규정했고, 그것은 유식사상이 아비달마불교의 다원적 실재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위의 책, pp. 206∼208.
生滅門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입의분의 진여상과 생멸인연상에 대한 설명을 전제로 해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이 때의 ‘一心法’ 역시 ‘중생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心眞如를 설명하는 가운데 “오직 한 마음이므로 진여라 한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一心’은 ‘진여’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심법으로서의 중생심이란 어떠한 마음인가? 기신론은 본각(性淨本覺)의 특징을 허공과 거울에 비유하여 ⑴ 如實空鏡, ⑵ 因熏習鏡(=如實不空), ⑶ 法出離鏡, ⑷ 緣熏習鏡의 네 가지 양상을 보이고 들고 있다(Ⅳ장 2절 참조). 여기에서 마지막 연훈습경은 그러한 본각=진여가 중생의 마음을 비추어 그들로 하여금 善根을 닦도록 하는 작용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중생심이 진여(淨法)의 작용이 미치는 대상이 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기신론은 ‘보살이 발심하여 나아가는 모습을 분별하여 설하는 부분(分別發趣道相)’에서 ⑴ 信成就發心, ⑵ 解行發心, ⑶ 證發心을 들고 있는데, 이 가운데 증발심이란 보살의 공덕이 완전히 이루어져 無明을 없애 萬象을 낱낱이 아는 지혜(一切種智)를 갖추며, 불가사의한 작용(不思議業)을 통해 세간에 顯現하여 중생을 이롭게 함을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부처와 보살의 자연스러운 작용력(自然業)이 있음에도 중생이 그러한 부처의 몸, 法身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기신론은 때묻은 거울과 같은 중생심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부터 중생심은 어리석은, 현실적인 중생의 모습을 나타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거울(鏡)에 비유된 본각 그 자체는 실체로서의 진여이지만, “그 거울 ‘안에서’ 무엇인가 일어나는 그 지점(當處)은 거울보다 훨씬 동적인 것”으로서 이러한 중생심은 “진여와 다르지도 않고 완전히 같지도 않은” 것이다. 따라서 “중생심은 진여의 바다(眞如海)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관건”이며, 그 위의 “파도에 불과한 우리들이 진여의 바다에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중생심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기신론이 현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공상적인, 이상주의적 체계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록 일심이 중심이 되어 여래장, 진여 등 ‘초시간적’ 개념들이 전면에 등장하고는 있지만, 緣熏習鏡이라는 진여의 작용을 받는 대상으로서 또는 부처의 自然業, 곧 자비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으로서의 중생심 역시 기신론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축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타락한 중생의 모습을 기신론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도 진여 그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는 이러한 현실적 마음, 곧 중생심을 중심으로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규정되고 있는지를 밝히기로 하였다―더욱이 언어적 규정을 떠나 있는 진여(離言眞如)는 그것을 ‘언어적 규정을 떠나 있는 어떤 것’으로 언설로써 규정하는 순간(依言眞如)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기신론의 생멸문의 설명이 아무리 그럴 듯 하더라도 비판불교에서 주장하듯 그러한 현실적 마음이 초월적·절대적 실재인 진여=일심으로부터 전개된, 그것에 의존하는 비실재적이고 순간적인 존재라면, 결국 중생심의 존재론적·수증론적 위상은 별 의미가 없게 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의존’, ‘전개’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기신론에서 覺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다음 구절을 보자.
本覺의 뜻이란 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시각이란 바로 본각과 같기 때문이며,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에 不覺이 있으며, 불각에 의하므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始覺과 本覺과 不覺의 의존 관계를 그려보면 본각에서 시작하여 불각→시각을 거쳐 다시 본각으로 돌아가는 圓環的구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본각과 시각의 관계를 논한 첫 문장을 통해 그 ‘의존’이라는 것이 논리적 의존 관계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각이라는 깨달음의 구현 과정을 논할 때 그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본각을 설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또한 불각, 곧 깨닫지 못함을 말할 수 있는 것 역시 깨달음이라는 논리적 기준에 비춰볼 때 가능한 것이므로 “본각에 의하여 불각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자가 상호 의존하고 있는 이러한 관계로부터는 본각에 대하여 어떠한 실체성도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각이 ‘존재’해야만 불각이라는 개념이 의미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의 부정(‘不’覺)이 반드시 그것(‘覺’)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은 龍樹가 廻諍論(Vigrahavy vartan ) 에서 논파한 것으로 이런 견지에서 본각을 단지 인식론적·의미론적으로만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불각의 뜻을 설명하는 다음 문장을 보자.
불각의 뜻이라고 말한 것은 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그 망녕이 있게 된 것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망념은 自相이 없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았으니, 마치 방향을 잃은 사람이 방향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었으나,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와 같아서 覺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었으나, 만약 각의 성질을 여읜다면 불각이 없을 것이며,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名義를 알아서 眞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만약 불각의 마음을 여읜다면 진각 자체의 모습이라고 말한 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불각을 방향을 잃은 것에 비유하여 “覺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不覺) 되었다” 라고 할 경우 覺이 不覺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결론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방향이 ‘있기’ 때문에 길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不覺(妄念) 그 자체의 실체성(自相, 自性)이 없음을 覺에 ‘의하여’라는 말로써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不覺과 마찬가지로 覺또한 실체성이 없음에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名義를 알아서 眞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라는 말은 오히려 (眞)覺의 개념 역시 불각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신론이 覺보다는 不覺(妄想, 無明)의 비실체성(空)을 강조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생멸문으로부터 진여문으로 들어감(從生滅門卽入眞如門)’이라는 제명 아래에서 다음과 같이 마음을 ‘방향 자체’에 비유하면서 그 영원성·불변성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망념·무명을 외적인 형상, 잘못 인식한 방향 등에 비유하면서 그 우연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형상이 없어서 온 방향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으니, 마치 사람이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 하지만, 방향 자체는 실로 변화된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으로 혼미하기 때문에 마음을 망념이라 하지만, 마음은 실로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며, 만약 관찰하여 마음에 망념이 없는 줄 알면 곧 (존재의 실상을) 따르게 되어 진여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 중략 ~ -海印의 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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