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無明住地 - 무명이 머무르는 근본 자리

 

若知一切苦(약지일체고) 斷一切集(단일체집) 證一切滅(증일체멸)

만일 온갖 苦=괴로움을 알고,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集=집착을 끊으며, 모든 괴로움의 滅=소멸을 증득하고

修一切道(수일체도) 於無常壞世閒(어무상괴세간) 無常病世閒(무상병세간)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道=길을 닦는다면, 무상하게 부서지는 세간, 무상하게 병든 세간에서

得常住涅槃(득상주열반) 於無覆護世閒(어무부호세간) 無依世閒(무의세간) 爲護爲依(위호위의)

常住=항상 머무르는 열반을 얻을 것이며, 보호해 주는 이 없는 세간, 의지할 데 없는 세간에서, 보호해 주는 이가 되고 의지할 이가 될 것입니다.

 

何以故(하이고) 法無優劣故得涅槃(법무우열고득열반) 智慧等故得涅槃(지혜등고득열반)

왜냐하면, 법에는 優=뛰어남과 劣=열등함이 없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며, 지혜가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며, 

解脫等故得涅槃(해탈등고득열반) 淸淨等故得涅槃(청정등고득열반)

해탈이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며, 청정이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습니다.

是故涅槃一味等味(시고열반일미등미) 謂解脫味(위해탈미)

그러므로 열반은 하나의 맛=一味이고, 평등한 맛=等味이니, 이른바 해탈의 맛=解脫味입니다.

 

世尊(세존) 若無明住地(약무명주지)  세존이시여, 만약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不斷不究竟者(불단불구경자) 不得一味等味(불득일미등미) 謂明解脫味(위명해탈미)

끊지 못하고 다 마치지 못한 사람은 하나의 맛, 평등한 맛을 얻지 못한 것이니, 이른바 明=지혜의 맛, 脫=해탈의 맛을 말하는 것이니,

何以故(하이고) 無明住地不斷(무명주지불단) 不究竟者(불구경자)

왜냐하면, 무명의 잠재적 번뇌=무명주지를 끊지 못하고, 끝내지 못한 사람은 

過恒沙等所應斷法(과항사등소응단법) 不斷不究竟(불단불구경)

항하강(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을 다 끊지 못했으며 

過恒沙等所應斷法不斷故(과항사등소응단법불단고)

항하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마땅히 얻어야 할 법을 얻지 못하였으며, 

過恒沙等法應得不得(과항사등법응득불득) 應證不證(응증불증)

항하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마땅히 깨달아야 할 법을 증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是故無明住地積聚(시고무명주지적취) 生一切修道斷煩惱上煩惱(생일체수도단번뇌상번뇌)

그러므로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쌓여서 모든 修道=닦음를 통해서 끊어야 할 번뇌와 上煩惱=부수적 번뇌를 낳으며,

[상번뇌(上煩惱)=무엇을 하는 과정상에서 일어나는 번뇌라는 뜻.]

彼生心上煩惱(피생심상번뇌) 止上煩惱(지상번뇌) 觀上煩惱(관상번뇌)

그것은 마음을 장애 하는 번뇌, 止=멈춤을 장애 하는 번뇌, 觀=관찰을 장애 하는 번뇌, 

禪上煩惱(선상번뇌) 正受上煩惱(정수상번뇌) 方便上煩惱(방편상번뇌)

禪=선정을 장애 하는 번뇌, 正受=삼매를 장애 하는 번뇌, 방편을 장애 하는 번뇌, 

智上煩惱(지상번뇌) 果上煩惱(과상번뇌) 得上煩惱(득상번뇌)

智=지혜를 장애 하는 번뇌, 果=과보를 장애 하는 번뇌, 得=얻음을 장애 하는 번뇌, 

力上煩惱(영상번뇌) 無畏上煩惱(무외상번뇌)

力=힘을 장애 하는 번뇌, 無畏=두려움 없음을 장애 하는 부수적 번뇌=上煩惱 등을 낳습니다.

 

如是過恒沙等上煩惱(여시과항사등상번뇌) 如來菩提智所斷(여래보리지소단)

이와 같이 항하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부수적 번뇌=상번뇌는 여래의 보리 지혜로 끊어야 할 바이니, 

一切皆依無明住地之所建立(일체개의무명주지지소건립)

그 모든 것은 모두 무명의 잠재적 번뇌=무명주지를 의지하여 지은 바이며(세워진 것이며)

一切上煩惱起(일체상번뇌기) 皆因無明住地(개인무명주지) 緣無明住地(연무명주지)

모든 부수적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 무명의 잠재적 번뇌=무명주지를 원인으로 한 것이며, 무명의 잠재적 번뇌=무명주지를 조건으로 (반연)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무명주지를 끊어야 함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무명주지(無明住持)에 대해 “심불상응(心不相應)하는 시작이 없는 것”이라 했다. 심불상응(心不相應)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이란 뜻으로, 마음이 상응해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번뇌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번뇌를 말한다.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하여 부처의 경계에 들기 전까지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언제나 마음과 서로 반응하고 있는 무명(無明)이다. 이것을 근본무명(根本無明)·무시무명(無始無明)·원품무명(元品無明) 또는 항행불공무명(行不共無明)이라 한다.

일체 모든 번뇌는 이 무명주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수도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상번뇌(上煩惱)도 무명주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실천적인 사성제(四聖諦)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청정하고 평등한 열반을 얻은 것으로 세상의 의지할 바가 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만일 무명주지를 끊지 못하고 끝내지 못한 이는 진정한 열반의 맛인 한맛과 평등한 맛을 얻지 못한 것이라 설한다. 수행을 방해하고 장애하는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 근본무명, 무명주지의 힘은 강력해서 오로지 부처님의 지혜로만이 끊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혜총스님]

 

[마음과 상응하지 않음은 무시(無始)의 무명주지(無明住地)이다’라고 하는데 이 시원적(始原的)인 번뇌야말로 우리 인간의 원점으로 생각되는 것이며 이것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망상, 번뇌가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여기에 심불상응(心不相應)이란 외계로부터의 자극에 응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로서 여러 가지 기번뇌(起煩惱)의 찰나심이라는 찰나상응(刹那相應)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체의 기번뇌는 찰나 찰나에 생기하는 것이지만 무명은 그 근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
무명(無明; avija, avidya)이란 명(明), 명지(明知) 등 진실한 지혜가 없는 것, 여실지견(如實知見)을 결여(缺如)한 것이다. 그것은 진실한 지혜, 여실지견을 획득할 때 무명은 명(明)으로 됨을 의미하고 있다.-혜경스님]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에서 지말무명(枝末無明)이 파생되는데 생사의 근본 원인이이 무명주지에 의해서 있게 된다. 무명이란 어두운 번뇌의 마음에는 지혜의 빛이 없기 때문에 어둠을 뜻하는 말로 쓰이면서 동시에 무지(無知)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번뇌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 무명주지이므로 『승만경』에서는 이 무명주지의 힘이 가장 크다는 것을 강조하여 오직 부처님의 지혜로서만 끊을 수 있다 하였다.ㅡ지안스님]

20. 得少分涅槃 - 불완전한 열반, 부분적인 열반

 

世尊(세존) 阿羅漢辟支佛最後身菩薩(아라한벽지불최후신보살)

세존이시여, 아라한, 벽지불, 최후신의 보살은 

爲無明住地之所覆障故(위무명주지지소부장고) 무명주지에 덮여 있기 때문에 

於彼彼法不知不覺(어피피법불지불각) 저 여러 가지 법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以不知見故(이불지견고) 所應斷者不斷不究竟(소응단자불단불구경)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땅히 끊어야 할 바를 끊지 못하고 구경에 이르지 못하며,

以不斷故(이불단고) 名有餘過解脫(명유여과해탈) 非離一切過解脫(비리일체과해탈)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허물이 남아 있는 해탈=有餘過解脫이라 이름하며, 온갖 허물을 여읜 해탈이 되지 못하므로 

名有餘淸淨(명유여청정) 非一切淸淨(비일체청정)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청정=有餘解脫이라 이름하며, 모든 청정이 아니기 때문에 

名成就有餘功德(명성취유여공덕) 非一切功德(비일체공덕)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공덕=有餘功德을 성취하였다 이름할지언정, 온갖 공덕을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유여(有餘)란 무여(無餘)에 대비되는 말로써 번뇌의 잔여, 남음이 있으므로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以成就有餘解脫(이성취유여해탈) 有餘淸淨(유여청정) 有餘功德故(유여공덕고)

(모든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해탈,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청정,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공덕을 이루는 것이며,

知有餘苦(지유여고) 斷有餘集(단유여집) 證有餘滅(증유여멸) 修有餘道(수유여도)

그러므로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를 알며,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원인=을 끊으며,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며,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는 것이니, 

是名得少分涅槃(시명득소분열반)

이를 불완전한 열반(부분적 열반)=少分涅槃을 얻었을 뿐이라고 이름하며,

[열반(涅槃)= 범어 Nirvama를 음사한 말로 적멸(寂滅), 멸도(滅度), 원적(圓寂)이라 번역한다. 때로는 취소(吹消)라고도 번역했는데 바람에 촛불이 꺼지듯이 번뇌의 불길, 혹은 욕망의 불길을 꺼버렸다는 뜻이다.]

得少分涅槃者(득소분열반자) 名向涅槃界(명향열반계)

불완전한 열반을 얻은 이는 열반의 경지를 향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 장(章)은 부처님과 2승(二乘), 대력보살과의 사이에 차이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말하는 항(項)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미완성의 깨달음과 완전한 깨달음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을 다시 분류하면 2승 또는 대력의 보살이 얻은 지혜는 (1)완전하지 않고 (2)번뇌를 완전히 끊어 없애고 있지 않으며 (3)또 번뇌를 남기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해탈이 아니며 (4)부분적으로는 청정하지만 완전하게 청정해 있지 않다. (5)모든 공덕을 성취한 것은 아니다. (6)진리의 일부분을 앎에 불과하고 완전하게 진리를 깨닫고 있지 않고 (7)소분(小分)의 열반을 얻었을 뿐 완전한 열반을 얻고 있지 않다 등의 것이 열거된다. 따라서 그들은 진실한 대열반계로 향하는 과정에 있다라고 해설한다.
유여의 고를 알고, 집(集)을 끊고, 멸(滅)을 밝히고[證], 도(道)를 닦는다[修]는 순차로 알게 되고(知), 끊어지고(斷), 밝혀지고(證), 닦아(修)지지 않으면 안 되는 진리이다.  이것은 4성제(四聖諦)의 고․집․멸․도제(道諦)에 대응하는 것이다. 
‘인생은 고(苦)’라고 하는 진리를 완전히 아는 것이 불교 인간관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그 귀착점이다. 인생이 고라고 인식할 때 해탈에의 길을 구하게 된다.
인생은 고라고 하는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해 그 고는 ‘왜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원인을 추구할 때 여기에 미혹한 생존을 있게 하는 무명과 갈애(渴愛)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알게 되면 그 무명과 갈애를 끊으려는 작용이 일어난다.
이 번뇌가 끊어 없어진 경지를 열반이라고 하는데 이 경지야말로 심신(心身)의 평온(平穩), 평안(平安)에 직결된 경지이며 그것을 실증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경지가 된다.
이 깨달음, 적정(寂靜)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여덟 가지의 성도(聖道) 8정도 또는 8지성도(八支聖道)가 실천도로 된다.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사색(正思),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위(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기억(正念), 올바른 마음의 통일(正定)의 여덟 가지이다.
네 가지의 진리를 완전히 알았을 때 참다운 완전한 지혜를 얻는 것이나 유여의 고 내지는 유여의 도를 닦는 한, 그것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유여의 지, 단, 증, 수란 도대체 어떠한 것인가. 참으로 4제(四諦)를 인식했다면 어떠한 사태를 만날지라도 불퇴전(不退轉), 부동(不動)의 평온을 얻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도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 행동이나 그 사람의 인생 모두에 걸쳐 그 진리가 항상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동요하고 때로는 번뇌에 사로잡히는 존재이다.
2승 또는 대력의 보살은 완전한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과정에 있는 한, 그러한 상황에 놓여져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그런 사람을 '소분(小分)의 열반을 얻은 사람이라 하고, 열반계(涅槃界)로 향하는 사람이라 이름한다'라고 본문에 있는 것이다.
완전한 열반계란, 열반이란 원래부터 번뇌를 지멸(止滅)한 적정(寂靜)의 경지를 이름 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입멸하는 것을 열반에 드는 것과 같은 의미로 해석한다. 만일 열반에 드는 것을 죽는 것과 같은 뜻으로 이해한다면 불교는 열반을 궁극의 목적으로 할 때, 죽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로써는 커다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불교에서 유여, 무여의 두 가지 열반의 동기는 인간이 살아있는 한, 번뇌를 완전히 지멸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육체가 남는 한 유여라고 생각하며 그 열반을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한 것이다.
이에 반해 육체가 멸해 비로소 무여의 열반이 있는 것이라는 것은 본래의 열반무명의 남김 없는 이탐(離貪), 멸(滅)을 열반이라 이름한다라고 하는 아함(阿含)․니카야의 해석과 모순하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도대체 무엇인가. 적어도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열반의 해석이 아함․니카야의 열반과 다르게 된 것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또 번뇌를 완전히 끊는 것을 목표로 한 아함․니카야의 초기 불교와 번뇌 즉 보리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사고방식의 차이이다.
예를 들면 『법화경』「여래수량품」게송에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까닭에(爲度衆生故) 방편으로써 열반을 나타낸다(方便現涅槃). 더욱이 참으로는 멸도치 않고(而實不滅度) 항상 여기에 머물며 법을 설한다(常住此說法).”
산스크리트 본(梵本) 역(譯)에 의하면,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내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 나는 교묘한 수단을 말한다. 더욱이 그 때, 나는 깨달음의 경지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서 가르침을 설한다.”(第3)

앞에서는 번뇌를 완전히 끊는 것을 목표로 한 아함․니카야의 초기 불교와 번뇌즉보리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말했는데, 여기서는 석존이 80세에 쿠시나가라(Kusinagara)에서 입멸한 것은 임시로 열반을 나타낸 것이어서 오히려 이 세상에 있어 항상 법을 설하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진실한 것이라고 한다.
이 사상을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라 한다. 즉 부처님은 완전한 지혜에 의해서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여의고 있으므로 이 생사의 미혹한 세계에 정체하는 일이 없다. 뿐만 아니라 또한 대비(大悲)를 가지고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열반해 버리는 일 없이 이 미혹의 세계 속에서 활동한다는 사상이다.
불화(佛畵)에 유명한 석가금관출현도(釋迦金棺出現圖)라는 것이 있다. 석존이 입멸해 대열반에 들었으므로 불제자들이 석존의 죽음을 한탄하며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으면 하는 간절히 원한 그 마음을 살피시고 석존이 천천히 관에서 얼굴을 내민다는 그림이다. 만일에 열반이라는 것이 입멸을 의미하는 것만 이라면 부처님과 중생과의 사이에 가로막는 심연(深淵)은 어떻게 넘을 수 있겠는가. (내가 입멸한 후에는 법(法)을 주저(洲渚), 즉 등불로 하라)라고 붓다가 유계(遺誡)하였더라도 그 법을 설하는 부처님이 현실로 지금 이 우리들 곁에 계시면서 「상주차설법(常住此說法)」을 하시는 것에 참으로 일체중생을 제도하지 않고는 그만 두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서원에 대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은 열반에 들어 버린 채로 있다면 중생과 연결되는 장소가 없어지므로 「방편현열반(方便現涅槃)」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육신은 멸하더라도 법신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고 하는 불교의 사상에 뒷받침되고 있지만 여기에 열반에 관한 사상적인 전개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대승불교는 자기만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이타행의 완성에 궁극적인 목적을 둔 이상, 대반열반에 들어가 버린다면 부처님은 다시는 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는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의 사상이 생겨나는 근거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리하여 2승 및 대력의 보살은 스스로가 열반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어도 참다운 대승의 열반을 얻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 소분(小分)의 열반을 얻은 사람을 열반계에 향하도록 한다라고 하는 본문의 이해가 있었던 것이다.-혜경스님]

[아라한이나 벽지불, 최후신 보살의 열반에 대해 완전한 열반이 아니라 일부분만 열반한 소분열반(少分涅槃)이라고 설했다.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 등 3승은 할 일을 다 마치지 않았고 할 일이 남아 있는 경계라는 것이다. 무사인(無事人)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주지에서 완전히 벗어난 무여열반(無餘涅槃)이 아니라 무명주지에 덮여 있어 무명이 남아 있으므로 끊어야 할 번뇌가 남아 있는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수행으로 사바세계의 번뇌를 끊었지만 아직 과거의 업보로부터 받은 근본무명의 몸을 벗지 못한 열반이라는 것이다.
열반은 반열반(般涅槃)·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도 하는데 산스크리트 ‘니르바나(nirva)’를 음역한 것이다. 적멸(寂滅)·원적(圓寂) 등으로도 번역하는데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불어 꺼서 생사의 고해를 벗어나는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뜻한다. 따라서 열반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역사적으로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열반을 실체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경량부(經量部)에서는 열반이란 다만 번뇌를 멸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경전인 <열반경>에서 열반은 상(常)·락(樂)·아(我)·정(淨)의 4덕(四德)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열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변화 없이 상주(常住)하기 때문에 ‘’이라 하며, 번뇌가 다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을 초월한 진정한 즐거움의 세계이므로 ‘’이라 하고, 허망한 나인 망아(妄我)를 벗어나 진정한 자아, 진아(眞我)에 도달한 경계이므로 ‘아’라 하며, 염오(染汚)에 덮인 생사의 세계를 여읜 청정한 세계이므로 ‘’이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4덕을 갖추지 않은 소승의 열반은 유위열반(有爲涅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이에 대해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위열반(無爲涅槃)이라 하여 이를 최상의 목표로 삼았다. 대승불교 안에서도 종파에 따라 열반에 대한 해석에 차이가 있는데 유식사상(唯識思想)에 근거한 법상종에서는 열반을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등의 4종의 열반으로 나누어 해석했다.
이중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은 앞에서 설명한 유여열반·무여열반과 같고, 본래자성청정열반은 성정열반(性淨涅槃)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존재가 실상(實相)에 있어서는 진리 그 자체인 진여(眞如)의 이체(異體)라는 절대적 차원에서 열반을 말한 것이며, 무주처열반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모두 여의고 생사의 세계를 벗어났으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열반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을 가리킨다.-혜총스님]

 

[이 경은 성문(아라한), 연각(벽지불)의 二乘과 一乘의 차이점으로 그들의 사성제가 서로 다름을 지적하고 있다. 곧 이승이 말하는 苦·集·滅·道의 사성제는 知的인 한계가 있는 진리(有量聖諦)인 반면, 일승이 믿는 여래장과 여래 법신에 대한 가르침이야말로 그러한 한계가 없는 진리(無量聖諦)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성제는 각각 作聖諦와 無作聖諦라고도 불리는데, 후자가 참다운 진리인 이유를 이 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작성제가 한계가 있는 진리인 이유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모든 苦를 알고, 모든 集(원인)을 끊으며, 모든 滅을 깨닫고, 모든 道를 닦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세존이시여, 有爲생사와 無爲생사가 있으며, 열반도 또한 이와 같아 有餘열반과 無餘열반이 있는 것입니다. 무작성제가 (지적인) 한계가 없는 진리인 이유는 자기 자신에 의지함으로써 모든 苦를 알고, 모든 集을 끊고, 모든 滅을 깨닫고, 모든 道를 닦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세존이시여, 법을 파괴함으로 해서 고통이 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통의 소멸(이라 불리는 여래의 법신)은 시초가 없고, 作爲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궁극을 떠났으며, 항상 머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본래 깨끗하여(自性淸淨) 일체의 번뇌장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이 법신에는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많은, 분리되지 않은, 불가사의한 佛法(佛性)이 수반됩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여래 법신이 번뇌장을 떠나지 않은 것을 여래장이라고 이름합니다.

요컨대 성문·연각 등이 진리로 삼고 있는 작성제가 조건지워진 존재, 곧 有爲法의 소멸을 열반으로 보는 것과 달리, 佛智의 영역인 무작성제는 본래 깨끗하며 常住하는 법신을 통찰하되, 그것이 중생의 현실(번뇌장)을 떠나 있지 않은 모습(여래장)을 보는 지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부증불감경에서 중생계와 열반계를 하나의 세계(一法界)로 본 것과 일치한다. 또한 부증불감경에서 현실적으로 법신이 번뇌에 둘러싸여(在纏) 중생에게 내재되어 있지만, 그 법신이 보살과 여래로 전개되어 나아갈 수 있음을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승만경에서도 법신이 번뇌를 초월하여(出纏) 여래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부증불감경이 無明의 지위를 단지 암시적으로 언급한 것과 달리 승만경은 무명·번뇌를 현실적인 존재자로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승만경은 이승과 여래의 열반을 비교하면서 끊기 힘든 번뇌로서 ‘無明住地’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범부의 삶이 신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게 됨에 대하여(分段死), 성문과 연각 등은 그러한 한계를 벗어나 자유로이 몸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不思議變易死).

그러나 그들이 비록 범부가 느끼는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따라서 “다시 미래의 몸을 받지 않는다(不受後有)”라고 선언하더라도, 그들의 열반은 완전한 열반이 못 된다(有餘涅槃)고 설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중생이 윤회하면서 받는 육체적 한계(分段身, bhāgya-kāya)를 벗어나 뜻한대로 태어나는 意生身(manomaya-kāya)을 얻게 되었지만, 그것은 중생이 겪는 생사를 두려워하는 미세한 번뇌로 인해 얻게 된 또 다른 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문과 연각이 얽매여 있는 미세한 번뇌를 승만경 은 무명주지라고 하였다.

승만경에서 무명주지는 모든 번뇌가 생겨날 수 있는 근본 번뇌인 ‘住地번뇌’ 가운데 하나로서 나머지 네 가지 주지 번뇌를 오래 머물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번뇌로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승만경은 네 가지 주지 번뇌를 끊더라도 이러한 무명주지는 여래의 지위에 이르러야만 끊을 수 있다고 설한다.

그렇다면 무명주지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승만경은 “성문과 벽지불이 無漏를 다하지 못한 것”을 무명주지라고 할 뿐, 더 이상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성문과 벽지불이 ‘두려워하는 바’가 바로 중생의 생사라면, 이들 二乘이 얽매여 있는 무명주지란 결국 열반을 중생계를 떠난 초월적 실재로 보는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부증불감경에서 ‘일법계에 대한 바르지 못한 知見’으로 지적한 增減의 二見에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기신론의 ‘근본불각’ 또는 ‘근본무명’ 개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기신론의 근본불각(근본무명)이 이와 같이 생사에 대한 두려움, 곧 무위법(열반)에 대한 집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기신론에서의 깨달음은 중생계 내에서의 자비의 실현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기신론 해석분의 ‘分別發趣道相’에서 보살의 수행이 궁극에 이른 證發心에서 “자연히 불가사의한 작용이 있어 온 세계에 (법신을)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고 말한 데에서 잘 알 수 있다.

무명주지 개념과 더불어 승만경이 여래장사상사에 기여한 바는 여래장에 空과 不空의 두 가지 뜻이 있음을 천명한 데에 있다. 우선, 이 경은 무명주지가 아라한과 벽지불이 끊을 수 없는 미세한 번뇌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래장 역시 이들이 볼 수 없고, 얻을 수도 없음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여래장을 볼 수 있는 여래의 지혜(如來藏空智)는

⑴ 모든 번뇌로부터 구별되는 청정한 지혜 또는 법신 그 자체인 空여래장,

⑵ 무한하며 불가사의한 佛法또는 법신의 공덕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不空여래장 두 가지가 있다고 설한다.

이 두 가지는 다음과 같이 기신론의 진여문의 두 가지 뜻을 설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고승학]

19. 三種意生身生及無漏業生 - 佛菩提智所斷(부처님만이 끊을 수 있는 번뇌)

 

世尊(세존) 又如取緣有漏業(유여취연유루업) 因而生三有(인이생삼유)

세존이시여, 또 마치 번뇌의 연(取緣)과 유루업의 인으로 말미암아 삼계= 三有를 낳는 것과 같이,

如是無明住地(여시무명주지) 緣無漏業因(연무루업인)

이러한 무명의 주지의 연과 무루업의 因=원인으로 말미암아

[루(漏)'는 번뇌를 의미한다. ‘흘러내린다’, ‘액체 같은 것이 샌다’는 뜻으로, 무루는 번뇌가 없다는 말이고, 유루는 번뇌가 있다는 말이다. 유루라는 것은 번뇌를 가진, 번뇌에 더럽혀진 것이라는 의미이며, 무루는 그 반대의 의미이다.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외적인 자극이 오면 그것에 물들어 내적인 습기로 말미암아서 번뇌에 노출되는 현상을 '루(漏)'라 한다. 따라서 ‘유루’란 육근에서 ‘번뇌’라는 허물을 항상 만들어 누출한다는 말이다.- 아미산]

 

生阿羅漢辟支佛大力菩薩三種意生身(생아라한벽지물대력보살삼종의생신)

아라한, 벽지불, 대력 보살들의 세 가지 의생신을 내는 것이니,

[의생신(意生身), 범어 마노말야(摩奴末耶). 신역에서는 의성신(意成身) 또는 곧 화생신(化生身)이며, 변화신(變化身)이다. 겁초(劫初)의 인신(人身)ㆍ색계신ㆍ무색계신, 그리고 사람이 죽은 후 다음 생의 몸을 받을 때까지의 중유신(中有身)을 포함한다.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이 아니라 뜻(意)에 의해서 化作 · 化生된 몸을 말한다. 또 그와 같은 의미에서 色界 · 無色界의 天을 意成天이라고도 한다.]

 

此三地(차삼지) 彼三種意生身生及無漏業生(피삼종의생신생급무루업생)

이러한 세 가지 지위와 세 가지 의생신이 낢과 무루업이 나는 것이

依無明住地(의무명주지) 有緣非無緣(유연비무연)

모두 무명주지를 의지하는 것이므로 연이 있는 것이지, 연이 없는 것이 아니며,

是故三種意生及無漏業(시고삼종의생급무루업) 緣無明住地(연무명주지)

그러므로 세 가지 의생신 및 무루업은 모두 무명의 잠재적 번뇌=무명주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세 가지 의생과 무루업이 모두 무명주지를 반연한 것입니다.)

世尊(세존) 如是有愛住地數四住地(여시유애주지수사주지)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유애주지   가지 주지는 

不與無明住地業同(불여무명주지업동)

무명주지로 업이 같지 않나이다.

無明住地異離四住地(무명주지이리사주지) 佛地所斷(불지소단)

무명의 잠재적 번뇌=무명주지 번뇌는 네 가지 잠재적 번뇌를 떠나는 것과 달라서  불지(佛地)에서 끊는 바이며,

佛菩提智所斷(불보리지소단) 何以故(하이고)

부처님의 菩提智=깨달음의 지혜로써 끊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阿羅漢辟支佛斷四種住地(아라한벽지불단사종주지) 無漏不盡(무루불지)

아라한과 벽지불도 네 가지 잠재적 번뇌=무명주지는 끊었지만 무루업은 다 끊지 못해서 

不得自在力(불득자재력) 亦不作證(역불작증)

자재력을 얻지 못하며, 역시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였으니,

無漏不盡者(무루불진자) 卽是無明住地(즉시무명주지)

무루업을 다 끊지 못하였다는 것은 곧 무명의 잠재적 번뇌=무명주지 때문입니다.

 

[이 항에서는 두 가지의 것이 설해져 있다. 즉

(1)번뇌를 연(緣)이라 하고 번뇌가 있는 업=유루(有漏)의 업을 인으로 하여 욕․색․무색이라는 세 종류의 미혹한 생존이 생기고

(2)번뇌의 근본이라는 무시(無始)의 무명, 원초(原初) 무명(無明)이 무명주지를 연으로 하고 번뇌가 없는 업=무루(無漏)의 업을 인으로 하여 여기에 아라한․벽지불․보살이라고 하는 세 종류의 의생신(意生身)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근본무명은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이라는 세 종류의 사람들의 무루의 업에 조력하여 의생신을 생하게 한다고 한다. 환언하면 무명은 3종의 의생신을 생하는 연으로 된다고 하는 것이다.
범부는 번뇌의 생활을 영위함에 반하여 2승(阿羅漢과 辟支佛)과 보살과는 번뇌를 극복할 수 있는 무루의 업을 쌓고 있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근본적인 상이(相異)가 있다. 그렇지만 2승과 대력보살은 무명주지를 완전히 이탈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깨달음을 얻은 부처에는 미치지 못한 것은 이미 설한바와 같다.
다만 그 무명은 3종의 의생신을 생하는 연으로서 2승․대력보살의 무루업에 조력하기 때문에 무명주지라 하여도, 앞서 말한 4주지번뇌(四住地煩惱) 중의 무색계의 사혹인 유의 애착에 주하는 번뇌와는 명칭은 비슷하지만 실제의 작용은 다르다.
다만 3종의 의생신을 생했다고 하여도 무명주지에 의하는 한 아직 무명주지를 끊지 못한 점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이다.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고서야만 자재력을 얻는 것이며, 2승․대력보살은 아직 이 자재력을 얻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혜경스님]

 

 [승만경은 상주불변의 여래장과 함께 끊기 힘든 번뇌로서 무명주지가있음 강조하며, 염법(무명) 정법(여래장)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요소를 하나의 이론 체계에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무명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중생의 현실을 설명해낼 없기 때문일 것이다. 승만경에서 무명주지는 모든 번뇌가 생겨날 수 있는 근본 번뇌인 ‘住地번뇌’ 가운데 하나로서 나머지 네 가지 주지 번뇌를 오래 머물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번뇌로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승만경은 네 가지 주지 번뇌를 끊더라도 이러한 무명주지는 여래의 지위에 이르러야만 끊을 수 있다고 설한다.
그렇다면 무명주지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승만경 은 “성문과 벽지불이 無漏를 다하지 못한 것”을 무명주지라고 할 뿐, 더 이상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성문과 벽지불이 ‘두려워하는 바’가 바로 중생의 생사라면, 이들 二乘이 얽매여 있는 무명주지란 결국 열반을 중생계를 떠난 초월적 실재로 보는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부증불감경에서 ‘일법계에 대한 바르지 못한 知見’으로 지적한 增減의 二見에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기신론의 ‘근본불각’ 또는 ‘근본무명’ 개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승학]

 

[승만부인은 삼계가 번뇌와 유루업인에 의해 펼쳐지는 것처럼 무명주지의 연과 무루업의 인으로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과 같은 의생신(意生身)이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과 같은 의생신도 모두 무명주지에 의지하므로 연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이 의생신은 범부중생의 의생신과 불보살의 의생신이 다르다. 범부중생의 의생신은 잠자다 꿈속에 나타나는 몸처럼 남녀육신의 인연을 빌리지 않는다는 뜻에서 의생신이라 하지만 불보살의 경우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큰 원력으로 의생신을 나타낸다.
하지만 승만부인은 중생의 의생신은 물론이거니와 번뇌가 없는 다른 차원에서 생기는 아라한이나 벽지불, 대력보살의 의생신이라 할지라도 근본무명인 무명주지를 벗어날 수는 없다고 설한다. 즉 번뇌가 있는 유루업(有漏業)을 인연하여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세계가 펼쳐지고, 번뇌가 없는 무루업(無漏業)을 인으로 번뇌의 근본이라는 시작도 없는 원초적인 무명주지를 연으로 하여 아라한·벽지불·대력보살이라고 하는 세 종류의 의생신(意生身)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라한 벽지불과 대력보살은 무명주지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였으므로 자재한 힘을 증득하지도 못했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경계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혜총스님]

 

[흔히 자주 사용하고 있는 선인(善因)은 선과(善果)를, 악인(惡因)은 악과(惡果)를 초래한다는 말이 있다. 『법구경(法句經)』제183게(偈)의 '모든 악(惡)을 행하지 않을 것(諸惡莫作), 선(善)을 획득(獲得)할 것(衆善奉行), 자기의 마음을 맑[淨]힐 것(自淨其意), 이것이 제불(諸佛)의 가르침(是諸佛敎)이다'를 불교의 생활법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인과응보의 사상은 불교 이전에 이미 우파니샷트에서 생육(生育)된 사상이다. 이 사상이 인도 고대 민족의 공유사상으로서의 윤회 사상과 결부되어 윤리적 요청으로서 인도 종교에 확고한 기반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과응보의 사상이 불교에 커다란 영향력을 주었던 것이다. 불교는 여기에 업이라는 직접적 원인에 간접적 원인으로서의 연(緣)을 집어 들어 이 인(因)과 연(緣)에 의해서 결과[果]가 생겨난다는 사상을 빚어냈다. 이 인도 연도 서로 똑같은 원인이므로 일반적으로는 하나로 하여 인연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친인연(親因緣) 즉 우두머리가 되는 인연은 소위 인을 말하며, 소인연(疎因緣), 즉 지엽 인연을 연이라 한다.
설일체유부, 아비달마 불교는 이 모든 인연을 인의 측면에서 분류하여 6인(六因), 즉 능작인(能作因)․구유인(俱有因)․동류인(同類因)․상응인(相應因)․변행인(遍行因)․이숙인(異熟因)이라 하고, 연(緣)의 측면에서 분류하여 4연(四緣), 즉 인연(因緣)․등무간연(等無間緣)․소연연(所緣緣)․증상연(增上緣)으로 한다. 이른바 6인 4연[六因四緣]이라는 사상을 낳은 것이다.-혜경스님]

18.二種煩惱

 

煩惱有二種(번뇌유이종) 何等爲二(하등위이)

(이와 같이 아라한과 벽지불이 능히 끊지 못한) 번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謂住地煩惱及起煩惱(위주지번뇌급기번뇌)

잠재적 번뇌=住持번뇌와 현재적 번뇌=起번뇌이며, 

住地有四種(주지유사종) 何等爲四(하등위사)

잠재적 번뇌=住持번뇌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넷인가?

謂見一處住地(위견일처주지) 

현상 사물을 보고 들음에 있어 무지하기 때문에 생기는 번뇌=見一處住持煩惱와,

[견일처주지번뇌란, 견혹(見惑)이라 하여 일방적인 편견에서 생기는 번뇌로서 말하자면 지식상의 번뇌이다. 인간의 행동은 하나의 인식에서 생기는 것이나 잘못된 견해에 바탕을 둔 경우 그 행동도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사물의 진리, 도리를 파헤치지 않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도리에 미혹한 견해를 견혹, 즉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 의 번뇌라고 한다.-혜경스님]

欲愛住地(욕애주지) 욕망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욕계의 사혹)=欲愛住持煩惱, 

色愛住地(생애주지) 육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색계의 사혹)=色愛住持煩惱,

有愛住地(유애주지) 윤회 생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무색계의 사혹)=有愛住持煩惱가 그 네 가지입니다.

此四種住地(차사종주지) 生一切起煩惱(생일체기번뇌)

이 네 가지 잠재적 번뇌=주지번뇌가 일체 모든 현재적 번뇌=기번뇌를 일으키는 것으로,

起者剎那心剎那相應(기자찰나심찰나상응)

현재적 번뇌=기번뇌란 찰나의 마음과 찰나에 相應=서로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이러한 기번뇌는 외부의 자극에 대한 감정의 변화를 따라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과 서로 번뇌로써 상응해 복잡한 심적 작용인 번뇌를 일으킵니다.)

 

[번뇌란 마음을 교란하는 것으로 선정에 들지 못하는 것이 이 번뇌 때문이다.
주지번뇌는 번뇌의 근본을 말하고 기번뇌는 주지번뇌로부터 파생되어 생겨나는 번뇌다.
이 번뇌를 견도위와 수도위에서 끊는 종류를 나눠 견혹(見惑) 수혹(修惑)이라고도 말하는데
견일처주지는 견혹이며, 욕애주지는 수혹이다.수혹을 사혹(思惑)이라고도 한다.
견혹은 깨닫지 못한 무지의 상태에서 견도위에 들어가 사성제(四聖諦)의 이치를 관찰하여 끊게 된다.
욕애주지는 욕계의 사혹으로 오욕락 등에 집착하여 욕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번뇌다.
색애주지는 색계에서 일어나는 사혹이며 유애주지는 무색계에서 일어나는 사혹이다. 무명주지는 곧 근본무명으로 모든 번뇌가 이를 의지해 일어난다. 파순(波旬)은 욕계 육천의 임금으로 선정을 방해하는 마왕(魔王)이라 한다.ㅡ지안스님]

 

[감정상의 번뇌를 사혹(思惑)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3계(三界)에 배당하여 욕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번뇌를 (2)욕애주지의 번뇌, 색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번뇌를 (3)색애주지의 번뇌. 무색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번뇌를 (4)유애주지의 번뇌라 한다. 이 세 가지 (2), (3), (4)는 사혹의 번뇌이다.
여기서 3계(三界)란 인간, 유정이 유전하고 상속하는 미혹한 세계의 과보로 성립한 것으로서 (1)욕계 (2)색계 (3)무색계의 셋을 말한다.
욕계(欲界)란, 욕소속(欲所屬)의 계(界), 색계(色界)란, 색소속(色所屬)의 계, 무색계(無色界)란, 무색소속(無色所屬)의 계라는 의미여서 애욕, 특히 식욕, 음욕, 수면욕이 소속하는 계를 (1)욕계라고 한다. 이것은 유정, 인간이 머무는 세계인데 이 욕계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및 천신의 6욕천(六欲天)이 포함된다.
색계는 욕계의 더럽고 사나운 색(色; 物質․肉體)을 떠났어도 미묘 청정한 색, 즉 물질로부터 이룩되는 세계로서 일명을 유색천(有色天), 색행천(色行天)이라고도 한다. 이 세계는 4선(四禪)을 닦은 사람이 죽은 후에 태어나는 곳으로서 천상의 초선천(初禪天), 2선천(二禪天), 3선천(三禪天) 및 4선천(四禪天)이 포함된다.
무색계는 무색천(無色天) 또는 무색행천(無色行天)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물질을 초월한 세계이므로 물질적인 생각(色想)을 떠난 4무색정(四無色定)을 닦은 사람이 사후에 태어나는 천계(天界)이다.
그런데 이 3계 가운데에서 욕계와 색계에서 일어나는 사혹(思惑)을 경문은 (1)욕애주지, (2)색애주지, (3)유애주지의 번뇌라고 한다. 이들은 각각 유정을 욕계에 주(住)하도록 하는 사혹, 색계의 선정에 머물게 하는 것을 집착하여 이탈하고 있지 않는 사혹 즉 생사를 반복하는 미혹의 세계를 떠나는 사혹을 말하며, 무색의 선정으로 바꾸어 머물게 하여 이탈시키지 않는 사혹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번뇌는 수행에 의해서 끊어 없애지 않으면 안 되나 번뇌를 끊는 수행 단계의 차이에 의해 번뇌를 견혹과 사혹[修惑]으로 나눈다. 그 가운데 견혹은 견도(見道)에 의해서 끊을 수 있는 번뇌로서 올바른 인식을 갖고 진리를 듣는 것에 의해 끊어 없앤다지만 수도에 의해서 끊어 없어지는 사혹 쪽은 이론에 의하는 것같이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다. 점점 수행함에 의해서 단제되는 것이다.
고인(古人)의 '견혹돈단파석(見惑頓斷破石)과 같이, 사혹점단우사(思惑漸斷藕絲)와 같이' 라는 말과 같이 돌을 자르는 것처럼 빨리 끊을 수 있는 견혹에 반하여 연꽃처럼 줄기를 꺾어도 가느다란 실이 뒤에 남아서 쉽게 꺾을 수 없는 사혹은 점차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불교(아비달마 불교)의 서적인 『구사론』에 의하면 견혹은 사혹보다도 작용이 격렬하다 하며 견혹을 「이사(利使)」라고 하며 사혹을「둔사(鈍使)」라고 한다. 이 견혹에 (1)신견(身見) (2)변견(邊見) (3)사견(邪見) (4)견취견(見取見) (5)계금취견(戒禁取見)이라는 성질이 맹렬하고 날카로운[猛利] 다섯 이사(利使)가 있다.
(1)신견은 본래 5온(인간을 형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의 모임)이 임시로 화합한 존재인 유정[人間]의 신심(身心)을 집착하여 내[我], 내 것[我所]에 집착하는 견해이다. (2)변견이란, 내 몸이 죽은 후에도 상주한다고 하는 상견(常見)과 사후에는 단멸하고 만다는 단견(斷見)에 집착하는 견해이다. (3)사견은, 모두가 잘못된 망견(妄見)을 말하며 (4)견취견은, 신견, 변견, 사견을 진실하다고 집착하는 망견을 말하고, (5)계금취견은, 정인(正因) 정도(正道)가 아닌 것을 정인 정도라고 집착하는 견해이다. 이것에 반하여 그 성질이 느리고 둔하여 제압하기 어렵다고 하는 사혹에는 다섯 가지의 둔사(鈍使)가 포함된다. 즉 탐, 진, 치, 만(慢), 의(疑)의 다섯이다. 사(使)란, 우리의 마음을 부려[使]서 미혹한 생활을 영위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종자라고 보는 네 가지 주지의 번뇌가 기본이 되어 실제로 활동하는 번뇌를 기(起)의 번뇌라고 한다. 이것이 여러 가지의 형태, 108 또는 8만 4000이라고 하는 번뇌로 되어 구체적인 것으로 된다. 그것은 마치 초목이 자라는 것 같이 마음의 잡초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자가 되는 번뇌와 활동이 되어 나타나는 번뇌의 두 종류가 있으나 이 번뇌들은 어찌하여 생기(生起)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 불교의 이해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본문에 「기(起)는 찰나심(刹那心)의 찰나(刹那)에 상응(相應)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한 찰나마다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외계의 대상과 접촉할 때마다 마음은 그것에 대응하여 가는 것이다.
일본 성덕태자의『승만경의소』에는「찰나심(刹那心)」이란 식심(識心)을 말하며, 「상응(相應)」이란 수(受)․ 상(想)․행(行) 등을 말한다. 우리 인간들의 식심(識心)은 그대로의 감수(感受) 등의 작용으로 된다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의 인식이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라는 여섯 가지의 대상, 즉 6경(六境)에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라고 하는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 즉 6근(六根)이 대응하고 안․이․비․설․신․의라는 6식(六識)이 생긴다. 그리고 이 근(根)․경(境)․식(識)의 3사(三事)가 화합함에 의해서 접촉이 생긴다 라고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6식(六識) 중에서 앞의 5식[前五識]은 의식(意識)에 의해서 통일되어서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하는 인식이 생긴다. 이리하여 「식(識)」은 인식의 주체가 되고 심왕(心王)이라 이름한다. 이 심왕이 일어날 때, 그에 종속하여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을 심소(心所)라고 부른다.
심법 또는 심왕은 하나로서 마음의 주체라 이름하고, 그 체(體)는 앞서 말한 6식이다. 이 마음은 의(意) 또는 식(識)이라 하며 인식의 주체가 된다. 이에 반해 심소유법(心所有法)을 심소법(心所法)이라 하여 마흔 여섯[四十六]을 헤아린다. 이것은 심왕이 일어날 때 이것에 수종하여 일어나는 종속적 심작용이다. 이 심왕과 심소는 반드시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심소의 46종을 상응법(相應法)이라 부르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아름다운 꽃이 있다고 하자. 그 아름다운 꽃인 대상, 즉 경(境)은 향기가 그윽하고 복숭아 색으로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고 그 윤곽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복숭아꽃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그런 경우 ‘복숭아꽃이다’라고 하는 인식은 심왕과 심소가 공동작용을 하여 우리에게 ‘복숭아꽃이다’라고 하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끊임없이 외계의 사물에 작용하여 그 위에서 자기본위적인 마음의 작용이 생긴다. 이를테면 저 꽃을 내가 가지고 싶다, 꺾어서 내 방에 꽂아 두고 싶다 등등의 마음의 작용이 생긴다. 거기에 자기중심의 번뇌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번뇌는 외계의 대상, 외계의 사물로부터 받는 감각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근원적으로 우리들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번뇌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원점이라고 해도 좋으나 무시이래(無始已來)의 무명이라는 번뇌이다. 이 무명주지의 번뇌가 근본이 되어 앞서 말한 4주지(四住地)의 번뇌의 종자가 줄기로 되고 다시 그 줄기에서 108가지 번뇌의 잎이 되고 꽃이 된다. 중요한 것은 밖으로 나타난 잡초라고 일컫는 번뇌를 베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마음속에 잠재하는 잡초의 뿌리를 캐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남전(南傳)『법구경』의 주석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저녁 무렵 기원정사의 집회당(集會堂)에 많은 비구가 모여서 이것저것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비구들은 오랜 기간의 행걸(行乞) 생활로부터 오랜만에 정사(精舍), 즉 절에 돌아온 때였으므로 그들의 화제(話題)는 자연히 어제까지 행걸(行乞)해 온 그 마을 그 거리의 모습에 집중했다. 그때 스승인 붓다가 이 집회당에 나타나셔서, “비구들이여, 지금 거기서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었는가”하고 물었다. 비구들은 “예, 이 마을, 저 거리, 그곳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그것은 모두 외계의 토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들이 참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은 외계(外界)의 토지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토지이다. 마음의 밭[田]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붙잡을 수 없이 번잡하고 욕망을 쫓아서 향하는 마음을 제어(制御)하는 것은 참으로 좋다 제어된 마음은 안락을 가져오리. (『법구경』35偈).’-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원효소- 혹 어떤 자는 설한다. “견도에서 끊어져야 할 번뇌는 見一處라고 하고, 수도에서 끊어져야 할 번뇌는 3가지 愛라 하고, 법집의 분별을 무명이라 설한다. 이 5가지는 6식에 있으면서 일어나는 것이고 그 5가지 종자는 5가지 주지의 惑이라 한다.” 혹 어떤 자는 설한다. “5가지 예리한 번뇌는 견일처 주지번뇌라 하고, 욕계의 단계에서 무명주지와 견일처를 제외한 일체 번뇌는 욕애라 하고, 무명주지와 견일처를 제외한 색계 번뇌는 색애라 하고, 무명주지와 견일처를 제외한 무색계 번뇌는 유애라 한다. (중략)” 혹 어떤 자는 설한다. “근본식에서 생득주지는 견일처라고 하고, 작득주지는 3가지 密로 분류한 3가지 유애이다. 근본을 짓기 때문에 이 4가지 종류를 합하여 비롯함이 없는 무명주지라고 설명하고, 곧바로 마음에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므로 상응하지 않는다고 한다. (중략)”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일체중생의 식은 (중략) 오직 붓다만 그 처음과 끝을 알 뿐이다. 때문에 이와 같은 3명의 주장이 모두 그 이유가 있다. (중략) 지금 이 경전에 의거하여 하나의 의미를 도출하면, 전체적으로 번뇌는 3종류가 있다”라고 설한다. (중략) '대승기신론'에서는 “아리야식에 의지하여 무명이 있다고 설하며, (중략) 홀연히 망념을 일으키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라고 설한다. 이 문장에서 보면 제8식에서 현기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궁극적 의미의 진리를 등져 일어나는 것을 혹이라고 한다. 이것으로써 주지를 삼으며, 이에 주지의 이전에 더 이상 어떤 법도 일어남이 없다. 그러므로 비롯함이 없는 무명주지라 한다”라고 설한다. 이 문장들에 의거하여 무명 주지번뇌는 오직 현기일 뿐 종자가 아니라고 알아야 할 것이다.]

世尊(세존) 心不相應無始無明住地(심불상응무시무명주지)

세존이시여, 心不相應=마음이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은 無始無明=시작을 알수 없는 무명의 잠재적 번뇌=住持煩惱입니다.

(세존이시여, 우리 마음과 외부의 경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항상 존재하는 번뇌의 근본인 무명주지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상응하지 않음은 무시(無始)의 무명주지(無明住地)이다’라고 하는데 이 시원적(始原的)인 번뇌야말로 우리 인간의 원점으로 생각되는 것이며 이것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망상, 번뇌가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여기에 심불상응(心不相應)이란 외계로부터의 자극에 응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로서 여러 가지 기번뇌(起煩惱)의 찰나심이라는 찰나상응(刹那相應)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체의 기번뇌는 찰나 찰나에 생기하는 것이지만 무명은 그 근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시이래의 번뇌라고 하는 무명은 인간이 영원하게 끊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인가 아닌가.
여기에 우리는 임마누엘 칸트(Kant)가 문제로 삼은 근본악(根本惡: Radikalbose)의 개념을 상기(想起)한다. 과연 무명은 그와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까.
무명(無明; avija, avidya)이란 원래 명(明), 명지(明知), 즉 진실한 지혜가 없는 것, 여실지견(如實知見)을 결여(缺如)한 것이다. 그것은 진실한 지혜, 여실지견을 획득할 때 무명은 명(明)으로 됨을 의미하고 있다.
이에 반해 근본악을 문제로 하는 칸트의 입장은 ‘나의 행위가 보편적 율법에 상응하지 않아 그 때문에 악을 버리고 선을 추구하려고 한다. 더구나 선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곳에 윤리에서 종교의 세계에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라고 이해된다.
불교의 입장은 선(善)과 불선(不善), 무명(無明)과 명(明)을 대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표리(表裏)의 관계에 서서 파악하고 무명이 여실지(如實智)에 의해서 소멸되는 곳에 명(明)이 나타난다고 본다.
탐수면(貪隨眠)을 버리고 진수면(瞋隨眠)을 없애[除去]고 내가 있다 하는 견만수면(見漫隨眠)을 근절하여 무명을 버리고 명을 일으켜서 현법(現法)에서 고(苦)의 멸(滅)을 이룬다. (『중부(中部)』제1권) 라고 한다. 말하자면 번뇌의 내면에의 전환을 생각하고 있었던 점에서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무명의 멸, 즉 ‘진실지(眞實智)의 획득은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승만경』은 이 무명주지는 비유해서 말하면 욕계 제6천(第六天)의 마왕 파순의 마(魔)의 권속을 시켜서 정법의 홍통을 방해하도록 한다. 그런데 그 힘은 극대(極大)하여 말하자면 번뇌의 왕이 된다. 이 번뇌가 있는 이상 4종의 주지번뇌의 근절은 있을 수 없고 또한 모든 번뇌를 제거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것은 오직 부처님의 보리지(菩提智)에 의해서만이 없앨 수 있는 것이어서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혜경스님]

世尊(세존) 此四住地力(차사주지력) 一切上煩惱依種(일체상번뇌의종)

세존이시여, 이러한 네 가지 잠재적 번뇌=주지번뇌의 힘은 모두 부수적 번뇌=上煩惱의 의지할 종자이지만,

比無明住地(차무명주지) 筭數譬喩所不能及(산수비유소불능급) 筭 셈 산

무명의 잠재적 번뇌=주지번뇌의 큰 힘에 비교하면 산수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네 가지 무명주지번뇌의 세력은 일체의 선한 행위를 방해하려는 번뇌인 상번뇌가 의지할 곳이며 종자입니다. 그러나 무명주지번뇌에 비하면 다른 여타의 번뇌는 숫자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이 세력이 약합니다.)

 

世尊(세존) 如是無明住地力(여시무명주지력)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무명의 잠재적 번뇌= 주지번뇌의 힘은 

於有愛數四住地(어유애수사주지) 無明住地其力最大(무명주지기력최대)

네 가지의 욕망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무명의 잠재적 번뇌=주지번뇌의 힘보다 매우 큰 것이니,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무명주지번뇌의 세력은 무색계(無色界)에서 일어나는 번뇌인 유애주지번뇌(有愛住地煩惱)와 색계나 욕계에서 일어나는 번뇌인 수번뇌 등 네 가지 종류의 주지번뇌의 세력보다 더 큽니다.)

譬如惡魔波旬(비여악마파순) 於他化自在天色力壽命(어타화자재천색력수명)

마치 악마 파순이 (욕계의 여섯 번째 하늘) 타화자재천에서 육체적인 능력과 수명과 권속과 
眷屬衆具自在殊勝(권속중구자재수승)

여러 가지 생활필수품 및 장신구를 가장 잘 이용하듯이, 

如是無明住地力(여시무명주지력) 於有愛數四住地(어유애수사주지)

이러한 무명의 잠재적 번뇌=주지번뇌의 힘은 네 가지의 윤회 생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주지번뇌 보다 

其力最勝(기력최승) 恒沙等數上煩惱依(항사등수상번뇌의)

그 세력이 강하니, 항하 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부수적 번뇌=상번뇌의 의지하는 바가 되며, 

亦令四種煩惱久住(역영사종번뇌구주) 역시 네 가지 잠재적 번뇌=주지번뇌를 오래 머물도록 하므로,

阿羅漢辟支佛智所不能斷(아라한벽지불지소불능단)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지혜로도 능히 끊지 못하며, 

唯如來菩提智之所能斷(유여래보리지소능단)

오직 여래의 깨달음의 지혜=菩提智라야 능히 끊을 수 있는 것이니,

如是世尊(여시세존) 無明住地最爲大力(무명주지최위대력)

이와같이 세존이시여, 무명의 잠재적 번뇌=주지번뇌의 힘이 가장 큰 것입니다.(이 무명주지번뇌의 세력은 저 네 가지 종류의 주지무명의 세력보다 강합니다.)

 

[<승만경>은 번뇌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주지번뇌(住地煩惱)와 기번뇌(起煩惱)이다. 주지번뇌는 모든 생물을 안고 키우는 대지처럼 모든 번뇌의 근본이다. 그리고 기번뇌는 실제로 일어나는 번뇌이다. 근본이 되는 주지번뇌는 잘못된 미혹한 견해(見惑), 편견에서 생기는 지적인 번뇌인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욕계의 모든 경계를 탐하는 사혹(思惑)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번뇌인 욕애주지(欲愛住地)·색계의 모든 경계를 탐하는 사혹(思惑)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번뇌인 색애주지(色愛住地)·무색계의 마음에 집착하는 사혹(思惑)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번뇌인 유애주지(有愛住地)로 나뉜다.
이 네 가지 주지번뇌를 낳은 번뇌가 바로 무명주지 번뇌이다. 이 무명주지의 번뇌가 뿌리가 되어 네 가지 주지번뇌의 종자에서 자란 나무에서 백팔번뇌, 팔만사천번뇌 등으로 셀 수 없는 기번뇌의 잎들이 피어나는 것이다.
승만부인은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수행을 닦아 증득한 지혜로 네 가지의 주지번뇌를 제거할 수 있지만 무명주지만은 끊을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여래의 지혜(佛智)’만이 이 무명주지마저도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덧붙여 생사가 쉴 새 없이 펼쳐지는 미혹한 세계를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로 나누는데, 욕계는 식욕, 음욕, 수면욕이 치성한 세계로 유정, 인간이 머무는 세계인데 이 욕계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및 천신의 6욕천(六欲天)이 포함된다. 그리고 색계는 욕계의 탐욕은 없으나 미묘한 형체(色)는 있는 세계로 4선(四禪)을 닦은 사람이 죽어서 나는데 천상의 초선천(初禪天), 2선천(二禪天), 3선천(三禪天) 및 4선천(四禪天)이 포함된다. 세 번째 무색계는 색계와 같은 미묘한 형체도 없는 순전한 정신세계이므로 물질적인 생각[色想]을 떠난 사무색정(四無色定)을 닦은 사람이 태어나는 천계(天界)이다.
이 삼계에서 일어나는 번뇌가 주지번뇌인데 이 주지번뇌는 아라한이나 벽지불 등 2승이 멸할 수 있지만 주지번뇌를 일으키는 무명주지번뇌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기번뇌가 아니라 ‘마음이 상응하지 않는, 시작이 없는’ 심불상응(心不相應)의 태초 이전 무시(無始)의 번뇌라서 오직 여래의 보리의 지혜(菩提智)만이 끊을 수 있다고 한다.-혜총스님]

['仏全'4에 기술된 '승만경보굴'의 설명을 예로 들면, ‘일승’이란 명칭이 경의 제목에도 나타나고 다섯 번째 장의 제목으로도 제시되는 이유를 밝히는 설명 방법으로 활용된다. 다시 말하면 경의 제목으로서 일승은 삼세제불이 세간에 출현하신 본래의 의도를 나타낸 그 體이고, 다섯 번째 장의 제목으로서 일승은 4가지 측면에서 그 用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수행차제라면 승만이 처음 붓다를 찬탄하고 섭수를 요청한 이후 보리심을 발하고, 그 다음 보살행을 수습하는데, 그 수습으로 인해 스스로 수계를 서원하고 그 원행이 이루어지면 정법을 증득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고, 

둘째 섭수의 측면이라면 초지 이상 불지에 이르기까지 섭수장에서는 십지 이상에 오르는 것을, 일승장에서는 그 불과를 밝히기 위해서이고, 

셋째 一門 인과 차제라면 첫 1장은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고, 다음 3장은 보살행을 수습하는 것이고, 일승장은 불과를 획득하는 것을 설하기 위해서이고,

넷째 설법 차제라면 첫 3장은 설법의 방편을 일으켜 사람과 법을 중요하게 여기어 헐뜯음을 그치고 의심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고, 섭수장 이후는 바로 종지를 열어 밝히는 것으로서 行法 가운데 섭수장과 일승장이 포함된다고 해설하는 등등이다(p.94上5-下15 참조)-김홍미]

唯有如來得般涅槃(유유여래득반열반) 一切所應斷過(일체소응단과)

오직 여래만이 반열반을 얻었사오니, 온갖 끊어야 할 허물을

皆悉斷滅(개실단멸) 成就第一淸淨(성취제일청정)

모두 끊어 버리고 제일가는 청정을 성취한 까닭이오며,

阿羅漢辟支佛有餘過(아라한벽지불유여과) 非第一淸淨(비제일청정)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남은 허물이 있으므로 제일가는 청정이 아니지만

言得涅槃者是佛方便(언득반열자시불방편)

열반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唯有如來得般涅槃(유유여래득반열반) 爲一切衆生之所瞻仰(위일체중생지소첨앙)

오직 여래만이 반열반을 얻으시어 온갖 중생들의 우러러 봄이 되어
瞻 볼 첨, 仰 우러를 앙, 

出過阿羅漢辟支佛菩薩境界(출과아라한벽지불보살경계)

아라한, 벽지불, 보살들의 경계에서 초월하였사오며, 

是故阿羅漢辟支佛去涅槃界遠(시고아라한벽지불거열반계원)

그러므로 아라한과 벽지불은 열반계와의 거리가 멀지만,

言阿羅漢辟支佛(언아라한벽지불) 觀察解脫四智(관찰해탈사지)

아라한과 벽지불이 해탈하는 네 가지 지혜를 관찰하여

究竟得蘇息處者(구경득소식처자) 亦是如來方便有餘不了義說(역시여래방편유여불요의설)

마침내 번뇌가 쉬는 경지=蘇息處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 역시 여래의 방편이니, 업의 잔재를 남기는 것이고 궁극적인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한 가르침=不了議設일 뿐입니다.

蘇 차조기 소, 향할 소, 되살아날 소

 

[오늘날 불교의 4대 명절 가운데 열반재(涅槃齋)는 석존께서 입멸하신 2월 15일을 추억하는 불사(佛事)로서 의의를 갖는다. 「반열반(般涅槃)」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의 음사인데 팔리어에서는 닛바나(nibbana)라고 한다. 멸(滅)․적멸(寂滅)․멸도(滅度)로 번역하고, 해탈, 마음의 평안을 말한다. 원래는 불을 입으로 불어서 끄는 것, 불을 입으로 불어서 끈 상태로서 번뇌의 불길을 불어서 끄고 깨달음의 지혜, 보리를 완성한 상태를 말한다.
두 종류의 열반에서 성문․연각은 최종적인 열반을 육체가 죽고 없어진 상태, 회신멸지(灰身滅智)한 곳에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에 의해 참다운 열반이 획득되는 것이어서 그 점을 취하게 되면 불교는 죽음에 의해서 얻어지는 열반을 구극(究極)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그렇다면 과연 그렇다면 열반이란 그러한 것일까?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열반이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다만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열반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대승에서의 열반의 이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승만경』은 아라한과 벽지불은 아직 참다운 열반으로 떠나는 것은 멀다고 한 이유는

(1)여래는 일체의 공덕을 갖추고 있으나 2승은 갖추지 못했다.

(2)여래의 공덕은 한량없지만 2승의 공덕은 유한(有限)한 것이다.

(3)여래의 공덕은 넓고 크지만 2승의 그것은 사의(思議)할 수 있는 것이다.

(4)여래는 모든 번뇌를 끊어서 청정하지만 2승은 아직 끊지 못한 번뇌를 갖는다.

(5)대열반을 얻은 여래만이 일체중생의 의지처가 되지만 2승은 중생의 의지처가 되지 못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벽지불(辟支佛)」이란, 산스크리트어의 프라티에카-붓다(pratyeka-buddha)의 음사로서 독각(獨覺), 연각(緣覺)으로도 번역되는데 이것은 역사상 실존(實存) 인물이 아니다.
정설(定說)은 아니지만, 필자의 소견으로는 「초기불교의 아라한은 거의 부처님과 동등하게 번뇌를 여의게 되었으므로, 부처님의 十號에서 응공(應供), 즉 아라한이 있다. 거기서 부처님과 제자들과의 차별이 필요하게 되어, 스승이 있어 깨달은 유사각(有師覺)과 스승 없이 깨달은 무사각(無師覺), 즉 독각(獨覺)이 있게 되었으며, 제자들은 모두 부처님을 스승으로 따라 배웠기 때문에 성문(聲聞)의 유사각(有師覺)이라 했고, 부처님께서는 스승이 없이 홀로 깨달았다고 하여 무사각(無師覺)이 되고 그 깨달은 내용이 연기(緣起)였기 때문에 연각(緣覺)이라고 했지 않나」라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아라한과 벽지불에게는 윤회․다시 태어남으로 이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생을 다했다고는 말할 수 없고 해야 할 것을 이루지 못했으며 아직은 가지고 있어서 버려야할 것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참다운 열반과는 아주 먼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2승(二乘)이 자기의 완성만을 목적으로 함에 대해 보살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염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 도달점인 열반도 다른 것이라고 하는 뜻이다.
2승은 번뇌를 끊어서 열반을 획득했다고 스스로는 만족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변하기 쉬운 존재에 깊은 공포의 염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것은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진실한 열반이 아니고 여래만이 반열반(般涅槃)했다고 하는 것이 경문의 이해였다. 더욱이 2승의 열반 획득도 실은 여래가 방편으로 시설한 것으로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혜경스님]

17. 二種死

何以故(하이고) 有二種死(유이종사) 何等爲二(하등위이)?

그 까닭을 말씀드리자면, 두 가지 죽는 것이 있사오니,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하면,

謂分段死(위분단사) 不思議變易死(불사의변이사)

하나는 육체적 죽음=分段死이고, 다른 하나는 부사의 하게 변화하여 죽는=不思議變易死입니다.

分段死者(분단사자) 謂虛僞衆生(위처위중생)

육체적 죽음=분단사는 허망한 중생을 일컫는 말이요,

 

[「분단사(分段死)」, 인간은 저마다의 과보를 받고 생존하고 있으므로 그 생존 방식에는 분분단단(分分段段)의 차이가 있다. 신심(身心)이 멸하여 없어진다는 것은 그 생존의 모습인 형태의 크고 작음과 수명이 길고 짧음을 수반하는 신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즉 구도생활에 들어가지 않은 우리들의 육체의 죽음을 말한다. 계내(界內)의 생사라고도 한다. 「분단사란 허위의 중생」이란, 번뇌가 있는 범부의 죽음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은 선(善)․악업(惡業)을 인(因)으로 하고, 번뇌(煩惱)장을 연(緣)으로 한다. 이 세상에 과(果)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수명(壽命)에는 길고 짧음이 있고, 육체에는 크고 작음 등의 일정한 한계를 갖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범부의 신체를 분단신이라 한다. 이 분단신(分段身)을 받고 윤회하는 것을 분단생사라 한다. 결국 사람 제각각의 과보에는 분분 단단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不思議變易死者(불사의변이사자) 부사의 하게 변하여 죽는 것은

 

[아라한이나 벽지불 및 대력의 보살은 번뇌장을 끊었으므로 분단생사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번뇌는 없지만 분별(分別)이 있는 업(業)을 인(因)으로 하고 아직 끊지 못한 알아야할 바에 대한 장애인 소지장(所知障)을 연(緣)으로 하여 그 과보인 몸, 즉 의생신(意生身)을 받는다. 이 의생신을 가지고 보살의 행을 닦아 불과(佛果)에 이른다고 한다. 그 신체는 보살의 행을 닦는다는 비원(悲願)에 의해서 수명도 육체도 변화 개역할 수 있고, 일정한 한도가 없으므로 변역신(變易身)이라 한다. 이 변역신을 받는 것을 변역생사라 한다.]

 

謂阿羅漢辟支佛大力菩薩意生身(위아라한벽지불대력보살의생신)

아라한이나 벽지불이나 대력 보살들의 마음대로 태어나는 몸=意生身으로부터

[의생신(意生身), 범어의 마노말야(摩奴末耶)의 번역. 신역에서는 의성신(意成身)이라 한다. 부모가 낳은 육신이 아니고,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 곧 화생신(化生身)이며, 변화신(變化身)이다. 겁초(劫初)의 인신(人身)ㆍ색계신ㆍ무색계신ㆍ중유신(中有身)을 포함한다. 보살은 몸도 마음대로 원력을 따라 나타내고, 그들이 활동하는 환경도 마음대로 나타낸다. 또 그와 같은 의미에서 色界 · 無色界의 天을 意成天이라고도 한다.]

 

乃至究竟無上菩提(내지구경무상보리)

위없는 보리에 이르기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궁극적으로 위없는 깨달음입니다)

 

二種死中(이종사중) 以分段死故(이분단사고)

두 가지 죽음에서 육체적 죽음이 없어졌으므로 말미암아 

說阿羅漢辟支佛智(설아라한벽지불지) 我生已盡(아생이진)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를 일러서 ‘나의 생은 이미 다했다’=我生已盡(태어남을 다하였다)을 설하며,→고제(苦諦)의 지혜

得有餘果證故(득유여과증고) 說梵行已立(설범행이립)

업의 잔재가 남음이 있는 과=有餘果]=를 증득하였으므로 청정한 행=梵行이 已立=이미 완성했다고 설하며,→멸제(滅諦)의 지혜

[원효소에서 '성스러움(梵, ārya)은 멸제의 청정한 특성을 이름하기 때문이고, 성스러운 행을 현증하므로 梵行이라 한다.'에서 ‘성스러움’이라는 글자가 내포하는 의미를 멸제의 청정한 특성이라 풀이한 다음, 그것을 통해 범행이란 청정한 멸제를 
체험적으로 현증하는 것이라 해석한 것이다.-김홍미]

 

凡夫人天所不能辦(범부인천소불능판) 七種學人先所未作(칠종학인선소미작)

범부와 인간 천상의 사람의 과보를 얻을 중생은 능히 판단하지 못하며,

아라한이 되기 전의 일곱 단계 성자=七種學人들은 앞서 끊지 못하였던 

虛僞煩惱斷故(허위번뇌단고) 說所作已辦(설소작이설)

허망한 번뇌를 끊었으므로 所作=지어야 할 바를 已辨=모두 마쳤다고 설하며,→도제(道諦)의 지혜

阿羅漢辟支佛所斷煩惱(아라한벽지불소단번뇌) 更不能受後有故(갱불능수후유고)

아라한과 벽지불이 끊은 바 번뇌는 다시 後有=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으므로

說不受後有(설불수후유)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不受後有라고 설하는 것이나, →집제(集諦)의 지혜

非盡一切煩惱(비진일체번뇌) 亦非盡一切受生(역비진일체수생)

그러나 모든 번뇌를 다 끊은 것도 아니며, 또한 다시 受生=모든 생(윤회하는 삶)을 다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故說不受後有(고설불수휴유)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何以故(하이고) 有煩惱是阿羅漢辟支佛所不能斷(유번뇌시아라한벽지불소불능단)

왜냐하면, 어떤 번뇌는 아라한이나 벽지불로는 끊지 못할 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에서는 분단생사와 변역생사라고 하는 두 가지의 생사를 중심으로, 아라한․벽지불이라는 2승의 해탈은 분단생사만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아라한․벽지불은 범부의 분단생사는 여의었으나 소지장, 즉 알아야할 바에 대한 장애를 끊지 못했기 때문에 지혜를 은폐하고 있는 소지장을 끊고 부처님의 지혜에 근접하는 과정에 있다. 따라서 변역생사를 여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아라한․벽지불의 2승이 분단생사를 여의었을 뿐 변역생사를 여의지 못하는 한,

(1) 나[我]의 생존(生存; 생사의 미혹)은 다했다(我生已盡)라는 고제(苦諦)의 지혜도 분단생사를 다했음에 불과할 뿐이고, (2) 자기는 청정한 행을 완성했다고(梵行已立)고 하는 멸제(滅諦)의 지혜도 번뇌장을 끊었을 뿐 소지장은 의연하게 남아 있으며,

(3) 해야 할 것을 해서 마쳤다(所作已作․所作已弁)라고 하는 도제(道諦)의 지혜도 범부나 수행해도 아라한이 될 수 없는 7종류의 수행자가 되지 않은 것을 지었을 뿐이며 또

(4) 이미 윤회 재생해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몸을 받는 일이 없다(不受後有)고 하는 집제(集諦)의 지혜도 분단생사에 한할 뿐이다. 그것들은 부처님의 해탈과 비교하면 커다란 간격이 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아라한․벽지불은 번뇌장을 끊고 있는 점에서는 후유를 받지 않는다고 해도 별일이 없지만 모든 번뇌, 소지장을 완전히 끊지 않은 한, 참으로 불수후유(不受後有)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한․벽지불은 자기 스스로는 해탈해 다시는 미혹한 생존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은 것이 아닌 한, 참다운 해탈이 아니다 라고 경문은 말한다.
그에 관해서는 전단(前段)에서 아라한․벽지불은 열반을 얻었다고 말해도 그것은 불, 여래의 방편일 뿐 참다운 열반은 여래만이 있다고 하는 이해와 상응(相應)하는 것이다.
「부사의(不思議) 변역사(變易死)」란 아라한이나 벽지불, 대력(大力)의 보살들은 구도생활에 들어가 있으므로 계내(界內)의 생사, 즉 분단사(번뇌가 있는 죽음)를 면하여 3계(三界)를 나오지만 아직 남기고 있는 생사가 있다고 한다. 이것을 변역생사(變易生死), 변역사(變易死)라고 한다.
수명도 육체도 자유로 변화, 다시 바꿀 수[改易] 있으므로 일정한 한계가 없는 것을 변역사라고 한다. 이것이 있음에 의해서 차츰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하는 변역사를 받는 사람은 번뇌의 장애를 끊은 아라한․벽지불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진해서 생사의 세계에 머무는 큰 능력을 가진 보살이다라고 한다. 다만 무성(無性)과 성문, 연각 및 부정(不定)의 2승도(二乘徒)를 분단생사에 들어간다[五性 各別]고 하는 입장(法相唯識)도 있다.-혜경스님]

 

[분단생사는 중생들이 육도를 윤회하면서 유루(有漏)의 선악업을 인(因)으로하고 번뇌의 장애(煩惱障)을 연(緣)으로 하여
욕(欲界) ․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 안에서 거친 과보를 받데 되는데, 그 과보가 수명의 장단이라든지 신체의 대소 등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분단(分段)이라 한다. 이러한 분단을 받아 윤회하는 것을 분단생사라 하고, 변역생사(變易生死)는 삼계 안에서 윤회하는 몸을 여의고 성불할 때까지 자기의 수행정도를 따라 삼계 밖에서 받는 생사를 말한다. 미계(迷界)를 벗으나 오계(悟界)이르기까지의 사이에 해당하는 생사를 말하며, 몸의 형태나 수명에 한계가 없는 생사이다. 번뇌가 없는 선정과 서원의 힘에 의해 미묘한 작용이 불가사의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부사의변역생사 (不思議變易生死)라고도 한다.

성문이나 벽지불 대력보살 등은 변역신의 상태에서 생사를 받는, 이 변역생사는 의생신으로써 생사를 받기 때문에 분단생사와 다르므로 실질적인 생사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ㅡ지안스님]

 

[분단사(分段死)의 분단(分段)은 분한(分限)과 형단(形段)이란 뜻으로 범부는 각각 지은 업의 인과에 따라서 신체에 크고 작으며 가늘고 굵은 형단이 있고, 목숨에 길고 짧은 분한이 있어서 그렇게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 안에서 나고 죽기 때문에 분단생사(分段生死)라 한다.
한편 변역생사(變易生死)는 삼계 안에서 무수히 나고 죽는 윤회하는 몸을 여읜 뒤로 성불하기까지, 미계(迷界)를 벗으나 오계(悟界)이르기까지 성자(聖者)가 받는 삼계 밖의 생사로서 몸의 형태나 수명에 어떤 한계가 없는 생사이다. 이를 번뇌가 없는 선정과 서원의 힘에 의해 미묘한 작용이 불가사의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부사의변역생사(不思議變易生死)라고도 한다. 아라한이나 벽지불이나 대력보살들이 마음대로 태어나는 몸, 즉 자기의 뜻대로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 - 의생신(意生身)이요, 의성신(意成身), 화생신(化生身)의 몸을 받아 보살행을 닦아 부처님의 경계에 이르고자 정진하다가 죽음으로써 분단생사와 다름을 알 수 있다. 이 부사의변역생사를 뛰어넘어야 마침내 불과(佛果)를 이루는 것이다.
아라한과 벽지불 등 2승은 자기 자신만의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수행해왔기 때문에 설령 스스로 번뇌를 끊어서 열반을 획득했다고 만족하더라도 참다운 무여열반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그 까닭은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알아야 할 바(所知)의 참다운 실상을 알지 못하게 하는 장애, 소지장(所知障)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남아 있고, 할 일이 남아있으며 대승의 공덕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아라한과 벽지불 등 2승은 부처님과 같이 일체중생의 의지처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혜총스님]

何以故(하이고) 以依佛出家而受具足(이의불출가이수구족)

그 까닭은 부처님에 의지하여 출가하였고, 구족계를 받는 것이므로

是故說大乘威儀戒是比尼(시고설대승위의계시비니)

그러므로 대승의 위의인 계=大乘威儀戒가 곧 比尼=교단의 규범이며, 

是出家是受具足(시출가시수구족) 출가이며, 구족계를 받는 것이라 설하는 것이며,

是故阿羅漢無出家受具足(시고아라한무출가구족)

그러므로 아라한은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는 일이 없사오니, 

何以故(하이고) 阿羅漢依如來出家受具足故(아라한의여래출가수구족고)

왜냐하면 아라한은 여래를 의지하여 출가하였고, 또 구족계를 받는 까닭입니다.

 

[수구족(受具足)은 비구․비구니가 반드시 받아야할 계를 받는 것, 즉 구족계를 받는 것으로 비구(出家僧)나 비구니가 반드시 받아야할 계로서 그 계에는 무량한 계덕(戒德)이 갖추어져 있음으로 구족계라고 한다. 통상적으로 비구는 250계, 비구니에게는 500계(四分律에 의함)라고 말하지만, 이와 같은 수구족을 6처의 하나로 한 것은 대승을 믿고 보살행을 행하는 사람은 스스로 그 위의(威儀)를 반듯이 할 필요가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성문이나 연각의 가르침에 의해서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는 일은 없는 것이어서 여래에 귀의해 비로소 출가, 구족계를 받는다고 한다. 성문, 연각의 가르침에 의해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는 것은 대승의 방편 시설이며 어디까지나 여래가 있고 대승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자기의 완성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하는 대승의 정신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세존은 중생의 구제, 해탈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세존이 대승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르친 것이 이상의 6처, 즉 여섯 가지의 의지처이다. 이와 같이 대승을 떠나 소승은 없고 소승은 대승에 귀납되는 것을 가르친 것이 이 단(段)의 취지이다.-혜경스님(제주불교신문)]

 

[그[원효] 스승은 정법으로서 머뭄과 소멸은 경장과 논장이고 바라제 목차 등 4가지는 율장을 연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 해석한 이유를 말한다. 무엇 때문에 이 藏[율장]을 별도로 4가지로 열었는가? 근본과 지말, 포섭과 들어감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왜인가? 바라제목차는 지말이고 비니로부터 나온 것이다. 비니는 근본이어서 그 지말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포섭의 의미는 이승이 인식할 대상이다. 이 실례가 대승이 포섭하는 의미를 표시하기 때문이 다. 이를테면 6처는 지말이고 대승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대승은 근본 이어서 그 지말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출가는 작은 부분의 계이고 구족계 수지는 구족계이다. 작은 부분의 계를 지니고 구족계로 들어가며, 구족계에 들어갈 때는 별도의 작은 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같이 들어간다는 의미는 그들[二乘]이 인식할 대상이다. 이 실례가 대승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승이란 작은 수레이고 여래와 대승은 원만한 수레이다. 작은 수레를 가지고 원만한 수레에 들어가며, 원만한 수레에 들어갈 때는 별도의 작은 수레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포섭하고 들어간다는 의미를 표시하기 위해 비니에 대한 글의 의미를 별도로 연 것이다.

(2) 그러므로 구룡은 말한다. ‘허위 중생’이라 한 것은 이를테면 범부들 에게 여러 공덕이 없기 때문에 ‘虛’라고 하고, 많은 번뇌를 지니기 때문에 ‘僞’라고 하는 것이다. 비록 성인이 있더라도 다수로부터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勝鬘經疏詳玄記]

 

15. 二乘有恐怖 - 이승(二乘)들은 두려움이 있다.

阿羅漢歸依於佛(아라한귀의어불) 阿羅漢有恐怖(아라한유공포)

아라한은 부처님께 귀의하였으나, 아라한은 공포가 남아 있으니,

何以故(하이고) 阿羅漢於一切無行怖畏想住(아라한어일체무행포외상주)

왜냐하면, 아라한은 一切無行=온갖 것에 대한 행이 없으며, 두려워하는 생각에 머물기 때문에

如人執劍欲來害己(여인집검욕래할기) 是故阿羅漢無究竟樂(시고아라한무구경락)

마치 어떤 사람이 칼을 들고 와서 나를 해치려 함과 같으므로, 아라한은 끝까지 즐거움이 없나니,

何以故(하이고) 世尊(세존)! 依不求依(의불구의) 如衆生無依(여중생무외)

그 까닭은 세존이시여, 의지할 데를 구하지 않는 이에게 의지하는 것인데, 저 중생들은 의지처가 없으므로

彼彼恐怖(피피공포) 以恐怖故則求歸依(이공포고즉구귀의)

그들은 가는 데마다 공포를 느끼고, 공포를 느낌으로 말미암아 의지처를 구하나니,

如阿羅漢有怖畏(여아라한유포외) 以怖畏故依於如來(이포외고의어여래)

그와 같이 아라한은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므로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소승과 대승의 입장을 아라한과 불․세존․여래와의 대비 중에서 파악하려 하고 있다. 즉 소승의 최고의 깨달음이라는 아라한에게는 궁극적인 즐거움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는 당연히 두려움이 있어 이 두려움 때문에 여래에 의존한다. '따라서 의존하지 않는 여래는 의존할 바를 구하지 않는다.'란 아라한과 여래․불․세존과의 사이에 그런 까닭에 소승과 대승의 차이가 있다라고 말한다.

아라한이란 범어의 아르핫트(arhat)의 음역으로 응공(應供)․살적(殺賊)․불생(不生) 등으로 번역된다.
응공이란, 사람들의 공양을 받기에 마땅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살적이란, 번뇌의 적(賊)을 죽였다는 뜻이고, 불생이란 영원히 열반에 들어가 다시는 생사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 나고 죽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원어의 음사에 의한 아라한 또는 나한(羅漢)으로 호칭한다.-혜경스님]

 

[여기서 승만부인은 아라한이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소승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대승으로 나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라한은 세상의 존경을 받을 만한 성자요, 공양과 보시를 받을 가치가 있는 수행자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성자이지만 생사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열반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아라한(阿羅漢)은 의역하여 번뇌의 적을 물리쳤다는 살적(殺賊)이라고도 하고, 일체의 지혜를 얻어 공양을 받을만한 자라는 뜻에서 응공(應供)이라고도 하며, 또 다시는 나고 죽지 않는다는 뜻에서 불생(不生)이라고도 하며 더 배워야 할 것이나 더 알아야 할 것이 없다는 뜻에서 무학(無學)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부처와 여래의 열 가지 명호인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하나로 부처의 지위를 증득한 유정(有情), 즉 부처 또는 여래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부파불교 시대 이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이 커지자 부처님과 수행자로서의 아라한을 구분하게 되면서 성문의 최고위인 아라한과를 얻은 자를 통틀어 아라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혜총스님]

[ 첫 번째 비유의  2가지 의미= 아라 한에게는 공포가 있기 때문에 곧 귀의처를 구한다는 비유는 동일하다는 비유이고, 그 반대로 여래에게는 공포가 없기 때문에 귀의처를 추구 하지 않는다고 나타낸 것은 다르다는 비유이다.

원효는 합(合) 중에 아라한에게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여래를 의지해야 한다고 한 것은 통틀어 2가지 의미를 합한 것이다. 귀의의 대상으로서 여래는 귀의처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김홍미]

 

16. 唯有如來得般涅槃 - 오로지 여래만이 열반의 세계를 얻음

世尊(세존) 阿羅漢辟支佛有怖畏(아라한벽지불유포외)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두려움을 갖습니다.

是故阿羅漢辟支佛(시고아라한벽지불) 有餘生法不盡故有生(유여생법불진고유생)

또한 아라한과 벽지불에게는 有餘=업의 잔재가 남아 있어, 生法=윤회와 재생으로 이어지는 성질이 다하지 않았으므로 태어남이 있으며,

有餘梵行不成故不純(유여범행불성고불순) 事不究竟故當有所作(사불구경고당유소작)

有餘= 업의 잔재가 있음에 梵行=청정한 행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순수하지 못하며,
일이 끝나지 못하였으므로 마땅히 지어야 할 바가 있으며,

[성스러움(梵, ārya)은 멸제의 청정한 특성을 이름하기 때문이고, 성스러운 행을 현증하므로 梵行이라 한다]

不度彼故當有所斷(불도피고다유소단) 以不斷故去涅槃界遠(이불단고거열반계원)

피안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이 있으며, 끊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열반의 세계=涅槃界와는 거리가 머나이다.

[아라한은 번뇌를 끊고 해탈한 점에서는 사람들에게 공양을 받기에 마땅하고, 최고의 지위에 있는 성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며, 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두려움은 있을 수 없다. 두려움이 없으면 영원한 즐거움을 느끼면 좋을 따름이다. 그런데 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일까. 이에 관하여 본경은 ‘아라한은 일체에 행하는바 없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 의미는 ‘아라한은 스스로의 깨달음만을 목표로 하고 다른 중생에 대한 행, 즉 대승 보살행의 이타행이 빠져 있다’고 한다. 만일 일체중생을 위해 생각하고 또한 그를 위한 행을 행한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안심감을 줄 것이지만 자기 자신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일체중생이 생사의 세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한, 절대의 안락을 얻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즉 아라한에게는 대승의 보살의 항상 일체중생의 해탈․구제를 염하고 그를 위한 행을 실천하는 자비행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아라한이 ‘부처님께 귀의하고 여래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아라한은 번뇌로 인한 장애인 번뇌장(煩惱障)을 끊고 있지만 일체지를 위해 걸림돌이 되는 알아야할 것에 대한 장애인 소지장(所知障)을 끊지 못했으므로 최고의 지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리해 일체지(一切智)를 얻은 불․여래에 의지한다는 필연성이 있다고 한다.-혜경스님]

 

何以故(하이고) 唯有如來應正等覺得般涅槃(유여래응정등각득반열반)

그 까닭을 말하면, 오직 여래ㆍ응공ㆍ정등각만이 반열반에 들 수 있사오니,

成就一切功德(성취일체공덕) 온갖 공덕을 모두 성취한 까닭이오며,

故阿羅漢辟支佛不成就一切功德(고아라한벽지불불성취일체공덕)

아라한ㆍ벽지불은 온갖 공덕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나

言得涅槃者是佛方便(언득열반자시불방편)

열반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唯有如來得般涅槃(유유여래득반열반) 成就無量功德(성취무량공덕)

오직 여래만이 般涅槃=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사오니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한 까닭이오며, 

故阿羅漢辟支佛成就有量功德(고아라한벽지불성취유량공덕)

아라한ㆍ벽지불은 有量功德=한량 있는 공덕을 성취하였으나,

言得涅槃者是佛方便(언득열반자시불방편)

열반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성문과 연각,  2승이 도달하는 열반과 여래의 열반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5가지 점에서 나타내고 또한 여래의 반열반은 부처님의 방편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 이 1단이다. 여기서 2승과 여래의 서로 다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열반을 매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선 열반에 대해서 해설하면, ‘열반(파 nibbana, 범 nirvana)이란, 원래 불어 끄는 것으로서 번뇌의 불을 불어 끈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탐욕, 진에, 우치라고 하는 번뇌의 3독․삼화(三火)를 지멸(止滅)한 적멸(寂滅)의 경지를 이름 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초기불교의 아함(阿含)․니카이야에서의 정형구(定型句)로서 열반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탐욕(貪欲)의 멸(滅), 진에(瞋恚)의 멸(滅), 우치(愚痴)의 멸(滅), 이것을 열반이라 한다」〈『상응부』제4권〉 혹은 「갈애(渴愛)를 여의는 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상응부』제1권〉 등을 볼 수 있고, 한역에서는 번뇌의 숲에서 탈출한다는 것으로서 출조림(出稠林)이라는 역어가 주어져 있다.
이와 같이 열반 본래의 의미는 번뇌를 모두 끊은 적정(寂靜)의 경지이다. 그런데 후세의 수행자들이 그와 같이 노력 정진하면서도 생존하는 한, 바꾸어 말하자면 육체가 존속하는 한, 번뇌를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사유되어 여기에 '육체의 사멸(死滅)에 의해 열반이 있다'라고 하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nirupadhisesa-nirvana)과 육체가 있어도 탐내고[貪]․성내고[瞋] ․어리석음[癡]을 멸한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sopadhisesa-nirvana)이라고 하는 두 가지 열반을 세우게 되었다.
오늘날 절 행사의 하나에 열반재(涅槃齋)가 있는데 이것은 석존께서 입멸하신 2월 15일을 추억하는 불사(佛事)로서의 의의를 갖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일반에는 열반에 드는 것을 사멸(死滅)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는 풍조가 생긴 것이다.-혜경스님]

[부처님의 반열반(般涅槃)=  恒河를 건넌 붓다는 다시 遊行을 계속하여 跋耆의 수도 毘舍離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기를 맞은 붓다의 일행은 夏安居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붓다는 더위와 장마에 시달려 몸져 눕게 되었다. 비구들은 이것이 최후가 아닌가 해서 우울했다. 그러나 붓다는 굳은 정신력으로 병을 극복하고 우기가 끝날 무렵엔 비사리를 떠나 다시 북쪽으로 유행의 길을 떠났다. 붓다가 파바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准陀라는 사람의 공양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또 병을 일으켜 붓다는 위독하게 되었다. 
 經典에 의하면 버섯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하는데, 병이 난 붓다는 쿠시나라로 돌아갈려고 무척 애를 쓴것 같다. 
파바에서 쿠시나라로의 길은 왕사성에서 사위성에 이르는 당시의 인도에 있어서 주요한 교통로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그 大道를 따라 최후의 遊行을 마치고 붓다는 다시 사위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쿠시나라에 이르러 붓다의 생명력은 다하고 말았다. 
 "아란아, 나는 지쳤다. 눕고 싶다.  저 砂羅나무 사이에 자리를 깔아다오."
 "世尊, 두렵습니다." 하고 아란은 대답하고 砂羅 숲속의 並木 아래 자리를 깔자 붓다는 그곳에 누웠다. 그것이 붓다의 죽음의 무대였다. 붓다의 죽음을 불교술어로는 般湼槃(Prinibbana의 音譯. 완전한 寂滅의 뜻으로서 붓다의 죽음을 말한다.)이라고 한다. 
쿠시나라 교외의 砂羅  숲속에서 몸져 누운 붓다는 병상 가에 둘러선 많은 비구들을 보고 말했다. 
 "비구들아, 어쩌면 그대들 중에는 아직 敎法에 대해서, 僧伽에 대해서  혹은 실천의 방법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 질문을 해라. 뒤에, 그때 나는 스승의 옆에 있었는데도 왜 물어보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비구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스승의 죽음을 앞에서 선뜻 질문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붓다는 두번 세번 재촉했다. 비구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붓다는 다시, "그대들은 나를 숭앙하기 때문에 질문을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으나, 그래서는 안된다. 친구가 친구에게 묻는 것같은 기분으로 질문을 해라." 그렇게 말을 해도 역시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다. 

그때 시자 阿難이 말했다. "世尊아, 진실로 회유한 일이지만, 이제야말로 한 사람의 비구도 敎法에 대해 僧伽에 대해 혹은 실천의 방법에 대해 조금도 의문을 남긴 자가 없다고 믿습니다."
 붓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또 비구들에게 일렀다. "그럼 비구들아, 내가 말하마. <이승의 일은 壤法(Vayadhamma의 譯. 모든 것은 變移하는 것이라는 뜻)이니라. 放逸하지 말고 精進할지라.> 이것이 나의 최후의 말이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눈을 지긋이 감고 영원의 정적에 잠겼다.

 이와 같은 붓다의 죽음의 모습을 전해 주는 경전을 <大般涅槃經>이라고 한다. 그것은 붓다의 '크나큰 죽음'의 모습을 서술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여강(如岡)]

一乘章第五

5. 일승(一乘)

[一은 다른 것이 없다는 뜻이고, 乘은 움직여 간다는 뜻이다.-일승법계도원통기에서]

14. 攝受正法是摩訶衍 -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대승(大乘)이다

摩訶衍者出生一切

[대승에 머물면서 대승을 섭수하는 것은 곧바로 이승에 머물면서 이승의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법을 섭수하는 것이다]

汝今更說(여금갱설) 一切諸佛所說攝受正法(일체제불소설섭수정법)

그대는 이제 다시 일체 여러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바, 정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해 보라

勝鬘白佛(승만백불) 善哉世尊(선재세존) 唯然受教(유연수교)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오로지 부처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卽白佛言(즉백불언)  그리고는 곧 부처님께 아뢰었으니,

世尊(세존) 攝受正法者是摩訶衍(섭수정법자시마하연)

세존이시여,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곧 대승=摩訶衍입니다.

何以故(하이고) 摩訶衍者(마하연자) 出生一切(출생일체)

聲聞緣覺世閒(성문연각세간) 出世閒善法(출세간선법)

그 까닭을 말하면, 마하연은 온갖 성문과 연각과세간 선법과 출세간 선법을 낳기 때문입니다.

世尊(세존) 如阿耨大池出八大河(여아뇩대지출입대하) 阿 언덕 아, 耨 김맬 녹

세존이시여, 마치 아뇩지 큰 연못에서 여덟 개의 큰 강이 흘러나오듯이,

[阿耨大池(아뇩대지)= 아뇩달지(아누달지), 또는 아뇩지(아누지), 인도 설산(雪山)의 북쪽에 있는 못. 아누달용왕이 이곳에 살며, 맑고 찬물을 흘러내려 섬부주(瞻部州)를 비옥하게 한다고 하는 인도 전설의 못.]

如是摩訶衍(여시마하연) 出生一切聲聞緣覺世閒出世閒善法(출생일체성문연각세간출세간법)

마하연에서도 온갖 성문과 연각과 세간 선법과 출세간 선법이 나옵니다.

 

[세간과 출세간의 선법에 대하여 원효소에서 “세간과 출세간이란 앞의 이승 중에 견도 이전을 세간이라 하고, 견도 이상을 출세간이라고 한다. 또한 앞의 2가지 중에 세속 의 선법을 세간이라 하고 아래에서 설해진 6처 등의 법처럼 무루의 선법을 출세간이라 한다. 아래의 4가지 해탈적 통찰[智]과 열반 등처럼 지금 그 2가지 중에 장차 일체 선법은 모두 대승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세간과 출세간이라 설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대승으로부터 4가지 결과가 출생하는데, 성문과 연각은 곧 이승이고 세간이란 인천승을 말하고 출세간이란 보살승을 말한다고 한다. 지금은 앞의 해석으로써 올바름을 삼을 것이다”라는 것이다.-김홍미]

 

[관념(觀念)의 족쇄에 묶여 있는 사람을 중생이라고 하고, 관념의 족쇄를 풀어버린 이를 깨어난 이라 하네.

관념이 만든 세계를 세간(世間)이라 이름하고, 관념의 세계를 뛰어넘으면  그곳이 바로 출세간(出世間)이리.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벌려 놓았네.

관념을 여기서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한다.

첫째는 관례적 일상용어인 관념의 의미 즉 6근(根) 6경(境) 육식(六識)이 조합해서 만든 18경계(境界)에서 일어난 상념(想念)들이 만들어낸 생각들을 관념이라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불교 명상수행의 핵심열쇠 낱말이라 할 수 있는 관(觀:vipassan)과 념(念:sati)이 그것이다.

18경계(境界)는 한마디로 관념(觀念)의 세계(世界)이다. 정지, 정념(Sampajanna, sammasati)과 위빠사나(Vipassana) 지혜를 개발하여 관념의 족쇄를 풀어라, 그 구체적 수단과 방법이 8정도이며, 이를 통해 사쌍팔배(四雙八輩: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와 과를 증득한 사문)의 도(道)와 과(果)를 성취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것은 관념의 족쇄 10개를 완전히 풀어버린, 또는 3개 이상을 풀어버린 상태를 말하며, 부처님은 그런 수행자를 진정한 사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계신다.

대승불교 경전인 금강경의 대의가 무엇이던가? 오직 관념이 만든 유위법의 세계는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 위의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갯불 같은 상념(想念)의 세계다. 이 산냐(想: sanna)의 노름 놀이를 깨어버리라는 뜻 이외에 무슨 또 다른 것을 말하려 함이 아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데미안』에는 첫머리에 알을 깨고 나오라는 중요한 구절이 있다. 헤세가 말하는 알은 곧 세계이다. 그 세계는 저마다 사람들 자신의 관념이 지어놓은 산냐[想]의 세계가 아니고 무엇이랴!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원인과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라고 하는 쑤바 바라문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라문 청년이여, 중생(衆生)들의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주인으로 하는 자이고, 업을 상속하는 자이고,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고, 업을 권속으로 하는 자이고, 업을 의지 처로 하는 자이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난다“(MN135 업에 대한 작은 분석경).

또 바라문에 대한 명확한 정의(定義)를 내리신 내용이 바셋타경이다(숫타니파타 3품제 9 전재성 역, 맛지마니까야 3권 98 대림스님 옮김). 부처님께서는 바셋타와 바라드와자라 바라문 학인에게 출생과 가계 때문에 혹은 계급 때문에 거룩한 자가 되고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로 인해 거룩한 자가 되고 바라문인 자가 되고 행위로 인해 이름만 바라문인, 즉 바라문이 아닌 자도 됩니다. 감관을 수호하고 제어하고 자제하고 사는 이것이 바라문이 되고 이것이 으뜸가는 바라문입니다. 이러한 님을 ‘거룩한 님’이라 하고 아라한과 동일시한다고 숫타니파타 주석서 1497에서 밝히고 있다.-임기영]

世尊(세존) 又如一切種子(우여일체종자) 皆依於地而得生長(개의어지이득생장)

세존이시여, 또 마치 온갖 씨앗이 모두 땅을 의지하여 싹이 나서 자라는 것과 같이,

如是一切聲聞緣覺世閒出世閒善法(여시일체성문연각세간출세간선법)

이러한 온갖 성문과 연각과 세간 선법과 출세간 선법이 

依於大乘而得增長(의어대승이득증장) 대승을 의지하여 자랍니다.

是故世尊(시고세존) 住於大乘攝受大乘(주어대승섭수대승)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대승에 머무르며  대승을 받아들이는 것은

卽是住於二乘攝受二乘(즉시주어이승섭수이승) 一切世閒出世閒善法(일체세간출세간선법)

곧 2승에 머물러 2승의 세간 선법과 이승의 출세간 선법을 거두어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六處 - 여섯 가지 요점

[세존께서 설명하셨던 6처와 같으니, 이를테면 정법의 머뭄, 정법으로서 소멸, 바라제목차(prātimokṣa), 비니(vinaya), 출가, 구족계 수지이다]

如世尊說六處(여세존설육처) 何等爲六(하등위육)?

마치 세존께서 설하시는 여섯 가지 요점=六處를 말씀하심과 같사오니, 6처란 것은,

謂正法住正法滅(위정법주정법멸) 波羅提木叉(바라제목차) 叉 깍지낄 차, 갈래 차, 

이른바 ① 바른 법이 머무는 것 (바른 가르침의 유지)=正法住, ② 바른 가르침(법)의 소멸=正法滅, ③ 계본=波羅提木叉, 

比尼出家受具足(비니출가수구족) 尼 신중 니, 여승 니, 

④ 교단의 규범=毘尼, ⑤ 출가하는 것, ⑥ 구족계를 받는 것이며, 

爲大乘故說此六處(위대승고설차육처) 대승을 위하여 이러한 여섯 가지 요점을 설하셨으니,

何以故(하이고)? 正法住者(정법주자) 爲大乘故(위대승고)

왜냐하면, 바른 법=正法의 유지는 대승을 위하기 때문이니,

說大乘住者卽正法住(설대승주자즉정법주)

대승이 머무는 것이 곧 정법이 머무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이며,

正法滅者(정법멸자) 爲大乘故(위대승고) 說大乘滅者卽正法滅(설대승멸자즉정법멸)

정법의 소멸은 대승을 위하여 말씀하신 때문이므로, 대승의 소멸이 곧 정법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이며,

波羅提木叉(바라제목차) 比尼此二法者(비니차이법자) 義一名異(의일명이)

바라제목차=계본과 비니=교단의 규범, 이 두 가지는 뜻은 한 가지면서 이름만 다른 것이니,

比尼者卽大乘學(비니자즉대승학)

교단의 규범은 곧 대승의 배움입니다.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산스크리트어: प्रातिमोक्ष Prātimokṣa, 팔리어: Pāṭimokkha)는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에 관한 조항을 모아둔 것으로 목차(木叉)로 줄여 부르거나, 계본(戒本)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경우 출가한 스님은 구족계를 받는데, 율장 가운데 사분율에 근거한 조항들로 비구가 지켜야할 250 가지 계, 비구니가 지켜야할 348 가지 계와 같은 율의 조항들을 뜻한다-위키]

[‘비니(比尼, 毘尼, 毗尼)’, 범어 ‘vinaya’를 음역한 것이며, 그 뜻은 ‘율(律)’이다. 많은 경에서는 이 비니(毗尼)보다는 ‘비나야(毘奈耶)’로 번역되어 쓰였다. - 들우물]

 

[비니〈(比(毗․毘)尼)〉란 산스크리트어 비나야(vinaya)의 음사인데 율(律), 멸(滅), 조복(調伏), 이행(離行), 화도(化度)로 번역한다.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을 말한다. 수도생활 상에 정해진 규칙, 이 율(律)에 의해서 죄를 멈추게 하여 죄를 멸하고 일상생활을 조화시키며 악행을 제복(制伏)한다. 율(律) 또는 조복(調伏)이라 번역함과 같이 붓다의 계율을 말한 것이다.율(律) 또는 조복(調伏)이라 번역함과 같이 붓다의 계율을 말한 것이다. 이 양자에 의해서 선을 얻는 적극적인 면과 악을 여의는 소극적인 면이 결과로서 이루어진다고 하여 지악수선(止惡修善)이라고 하는 불교 계율의 기본을 보살행의 의지처로 한 것이 바라제목차 비니의 처(處)라 한다.

도(道)를 구하는 사람은 출가의 생활에 철저해야 한다는 출가의 처(處)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 출가는 초기의 불교에서는 '집에서 집을 없애기 위해서 출가한다'라고 하는 것처럼 재가의 생활을 떠난 사람을 출가자라고 부르고 있다. 출가(出家)란 재가의 생활, 가정적이며 세속적인 생활을 떠나 도(道)를 구하며 수행자로서의 생활을 하는 것 혹은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재가의 생활에는 여러 가지의 속박이 있어 집착을 낳는 요소가 많기 때문에 재가의 생활을 하고 있어서는 수도에 방해가 되므로 출가의 생활에 들어간다라고 하는 것이 원시불교의 출가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도(道)를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출가의 생활을 취(取)해 승원(僧院)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재가의 생활 속에 도를 구하는 것을 강조한다.
전자는 몸[身] 출가의 입장, 즉 수염과 머리를 깍고 삼의일발(三衣一鉢)의 유행(遊行) 탁발의 생활에 들어가는 것이며 후자는 마음[心]의 출가, 즉 재속인 채로 불문(佛門)에 귀의하고 보살행을 실천하여 가는 삶을 말한다.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대승의 보살 사상이 발전함에 따라서 재가 생활을 계속하면서 불도를 행하는 사람도 출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른바 출가의 참뜻은 도를 구하는 수행자이다. 머리를 깎고 3의1발(三衣一鉢), 즉 옷 세 개(상의․중의․하의)와 발우 하나로 무집착의 생활을 계속하며 승단(상가)의 일원이 되어 계율을 엄수하여 가는 것을 본분으로 하는 것은 초기불교에서의 출가자의 입장이었다.
신출가(身出家)는 초기불교의 비구와 대승의 보살승으로 삭발하고 승원에 들어간(승가의 일원이 된다) 사람을 말하고 심출가(心出家)는 소위 대승의 보살거사(菩薩居士)로서 속가에 있는 그대로 불문에 귀의하고 보살도를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특히 시정(市井) 속에 있으면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대승의 법을 생활 위에 구현화하려고 하는 소위 보살행자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유마경』에 등장하는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있고 그리고 지금 『승만경』의 주인공인 승만 부인을 들 수 있다.-혜경스님]

 

[원효는 “㉯, 즉 ‘세존께서 설명하셨던 6처와 같다’고 한 것에서 6처는 소승의 삼장이고, 처(處)는 學處[훈련 주제]라고 풀이하고, 곧바로 앞의 성문, 독각의 세간과 출세간의 선법을 출생한다고 설해지고 있는 학처이다”라고 해설한다. 이를테면 원효는 세존께서 설명하신 이 6 가지 훈련주제가 곧바로 대승에 머물면서 정법을 섭수하는 방법과 이승에 머물면서 이승의 일체 선법을 섭수하는 주제라고 읽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6처가 대승에 머물면서 정법을 섭수하는 방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승 삼장인 6처가 바로 그대로 실례이고, 동시에 이승에 머물면서 이승의 모든 선법을 섭수하는 주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에 대해 ㉰, 즉 ‘대승을 위해 이 6처로 설한 것이다’는 원효의 해설을 살펴보면, 근본[如世尊]으로써 지말[說六處]을 포섭하는 것이고, 이승에 속한 사람들에게 점차로 대승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6처로서 설한 것이므로 대승을 여의지 않는다고 파악하고 있다. 
비록 6처가 기존 이승의 학처이더라도 근본인 세존께서 대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마하연이라는 정법을 섭수하는 충분한 훈련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를 대승적으로 재구성된 이 6처로 설해진 것이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6처에 대한 원효의 구체적 해설을 살펴보자.
6처는 곧 소승의 교법으로서 삼장이다. 학처가 되기 때문에 處라고 한 것이다. ‘정법의 머뭄’이란 수다라장이다. 올바로 가르친 진리를 ‘정법’이라 하는데 이 교법으로 증상심학을 성취할 수 있고, 한 경계에 대해 머물 수 있다. 그러므로 ‘住’라 한 것이다. (중략) ‘정법으로서 소멸’이란 달마장이다. 이것은 정법의 말씀이고 또한 능전을 제시한 것이다. 이 
교법으로 증상혜학을 성취할 수 있고 번뇌를 끊기 때문에 ‘소멸’이라 한 것이다. (중략) 그 아래 4가지 처는 비니장으로 연 것이다. 능전과 소전으로 각각을 2가지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바라제목차’는 곧 간략한 문장이고, 이것을 별해탈계라 번역하며, 소전의 법으로부터 능전의 가르침을 목록화한 것이다. ‘비니’라고 말하는 것은 곧 자세한 문장이고 이것을 소멸이라고 하며, 또한 소전으로부터 능전을 목록화한 것이다. 출가라 하는 것은 사미의 계이고 구족계를 받는다는 것은 큰 승려
의 계이며, 이 두 가지는 그 소전의 교법을 여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원효는 6처를 소승의 삼장으로 해설하면서 그럼에도 정법의 머뭄이 대승의 머뭄이 될 수 있는 것은 대승의 광대한 증상심학 안에서 학처로서 ‘경장이 거칠고 얕은 부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정법으로서 소멸도 대승의 광대한 증상혜학 안에서 학처로서 ‘논장이 거칠고 얕은 부분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명칭만 다를 뿐 의미는 동일한 바라제목차와 비니도 대승불교도의 훈련이고, 출가와 구족계 수지 역시, 모두 비니로서 대승의 위의계’라는 경문에 대해 원효는 “대승의 계는 통틀어 삼업을 단속하여 내적으로 작은 부분에서조차 몸과 말의 끝을 단속하는 것”이라 재해석하고 있다. 즉 소승을 위해 위의계라 하더라도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는 단속을 토대로 하는 대승보살의 계로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만약 대승과 소승이 다르다면 아라한에게 별도로 비니를 세워야 할 것이고 별도로 출가하고 구족계를 수지하는 무리가 있어야 할 것이지만 그들에게 별도의 가르침을 세울 수 없고 그 때문에 별도로 출가하고 구족계를 수지하는 무리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한에게는 출가와 구족계 수지가 없다. 왜냐하면 별도의 탈 것이 없고 오직 一佛乘일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원효는 이승에 머물면서 이승의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법을 모두 섭수하는 것으로 알려진 6처를 붓다에 의해 대승적으로 재구성된 것으로 주석하여, 비록 그 구체적 내용이 소승의 삼장이더라도 누구라도 대승에 머물면서 정법을 섭수할 수 있는 훈련 주제라고 해설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경문에서 승만 왕비의 설명을 참조하면 이 6처 중 아라한에게는 출가와 구족계 수지라는 2가지가 없다. 이를테면 붓다에게 의지하지 않는 한, 붓다와 동일한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할 기회가 그들에게 없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아라한일지라도 여래를 의지하여 출가하고 구족계 수지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김홍미]

 

[역사적으로 대승은 부파불교 시대 이후에 발생한 신불교 운동으로, 대승의 출현은 개인적 수행에서 나아가 대사회적인 이타행을 실천하는 보살의 육바라밀 수행과 공사상을 사상적 특징으로 하고 있어 가히 혁명적인 불교의 변화라 하겠다. 계율적인 면에서도 섭율의계(攝律儀戒)·섭선법계(攝善法戒)·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의 삼취정계(三聚淨戒), 즉 계율을 지키고 선법을 닦고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포괄적인 대승계가 출가자들뿐만 아니라 재가자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여기서 일승장(一乘章)이라는 말은 이 장의 끝부분에, “만일 여래께서 저들의 욕망을 따라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면 곧 대승이며 삼승이 없는 것이니, 삼승이 일승에 들어가고, 일승이 곧 제일의(第一義)가 됩니다”라는 법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법화경>의 비유에서 보듯이 불타는 집과 같은 사바세계에서 철없는 아이들과 같은 중생들을 구하고자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세 가지 탈 것(三乘)’을 부처님께서 보이신 것은 곧 일불승의 진실을 열어서 나타내어 보이기 위한 부처님의 교묘한 선교방편(善巧方便)인 것이다.-혜총스님]

 

[대승, 1승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한 장으로 '승만경' 전체 15장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4장까지는 승만부인이 부처님의 허락을 받고 자기의 생각을 말한 것에 대해, 이 장에서는 그 생각이 제불의 생각과 다르지 않음을 알고 부처님께서 승만부인에게 ‘섭수정법을 설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승만부인이 부처님께 법을 말하고 있다.
1승장(一乘章), 대승=불승=1승이라는 사상과 3승 사상(三乘思想)과의 관계를 보면, 일승을 불승(佛乘)이라 하고 또 그것을 대승으로 보는 사상이 대승경전, 특히 '법화경'의 중심사상으로 되어 있다.
『법화경』은 1승을 근본적인 입장을 하고 있으나 1승을 3승 문제와의 관련에서 설하는 것은 ‘방편품’과 ‘비유품’의 2품(二品)이다. ‘사리불이여, 여래는 오직 1승(一乘)만을 가지고서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한다. 다른 승(乘)인, 혹은 2[二], 혹은 3[三]은 있을 수 없다’라고 하여 '법화경'은 1불승진실(一佛乘眞實)을 개현(開顯)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2승, 3승은 방편설(方便說)이었다고 한다. 진실법은 1승법(一乘法), 즉 불승(佛乘), 유일(唯一)한 승(乘)이라고 선언한다. 이처럼 3승법은 제불의 방편설(方便說)이었다고 한다. 즉 3승은 제불의 교화로서 설해진 것이다.

구마라습은 3승을 성문․벽지불․불승이라 하고 축법호(竺法護)는『정법화』에서 성문․연각․보살의 도(道)라고 한다.
이 중에서 앞의 둘을 2승이라 부르는 것도 관습적이지만 문제는 보살승을 불승, 1승이라 하는 입장(이 경우에는 3승 중의 보살승은 1승, 1불승으로 파악하고 있다)과 3승 외에 1불승을 세우는가, 어떤가의 문제가 있다.
그와 같은 사실은 보살승의 내용에 관계되는 것이나 그것은『비유품』의 화택(火宅) 삼거(三車)라는 비유에서 볼 수 있는 양거(羊車: 성문승), 녹거(鹿車: 연각승), 우거(牛車: 보살승)의 3거에 대해 대백우거(大白牛車: 1불승) 라고 하는 1불승을 따로 세우는 입장, 즉 이른바 4거가(四車家)와 3거(三車) 중의 우거(牛車)와 1불승인 대백우거를 동일로 보는 3거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법화경』 등의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어서 『쟈타카』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은 석존의 전생을 가리켜 보살이라고 하거나 석존 또는 과거불(過去佛)이나 미래불에 한해서 사용되고 있던 부파불교의 보살에 대한 관념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승만경』에서 설하는 1승은 1불승을 보살승으로 하는 법화의 사상을 이어 받은 것임을 우선 명확히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이 1승장 제5에서 1승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승만부인이 “세존이시여, 대승에 주(住)하여 대승을 섭수하는 것은 곧 2승에 주하여 2승과 일체의 세간․출세간의 선법(善法)과를 섭수 하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일체의 교법은 대승에서 발하고 대승에 포섭되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원래 대승불교, 적어도 『법화경』 이전에는 성문에 도달하기 위해서의 승(乘), 즉 수행을 닦아 가면 아라한에, 연각승을 수행하면 연각에, 보살승을 수행하면 보살․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처럼 제각각 수행의 결과를 설정하고 각각의 존재 방식을 설하고 있었다.
“3乘 가르침은 천차만별인 중생 근기에 상응하도록 불법 설하기 위한 선교방편”
“연못에서 여덟 개의 큰 강이 비롯되듯 모든 가르침 1乘의 가르침에서 흘러나와”
그런데 『법화경』에 이르러 그러한 3승의 가르침은 중생의 근기에 서로 다름이 있는 것처럼 부처님의 설법에도 제각각의 근기에 상응하도록 천차만별로 설한, 이른바 선교방편이라고 하여 진실은 오직 1불승이었다고 가르쳐 타이른다.
따라서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어느 것도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한 것이어서 결코 그것들이 의의가 없는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승만경』은 그것을 이어 받아서 그대로 1불승과 같은 값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본 『승만경』의 입장이다. 여기서는 1승은 2, 3과 대립하는 1승이 아니라 2승, 3승을 포섭하는 절대의 1승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3승을 여기서는 1승이라는 생각 속에 해소시키고 정법을 섭수하는 것은 대승 1승법에 철저히 하는 것, 즉 3승을 안에 포섭하는 넉넉한 세계를 갖는 것이다.
이것을 두 가지의 비유로 해설한다. 하나는 아뇩달지(阿耨達池: anavatapta)의 비유여서 이 연못에서 여덟 개의 큰 강[八大河]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모든 가르침은 1승이라고 하는 진실한 가르침에서 흘러나오는 것과 같다고 설한다.
또 대지가 모든 종자를 양육하여 번성, 증장시킨다고 하는 대지의 비유에 의해서 1승법은 모든 가르침, 일체세간․출세간․선법을 생하고 증장시킨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 인간은 자칫하면 자기가 걷는 길을 최고로 생각하고, 이윽고 그것에 고집하며 남을 고려하지 않는 일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 『숫타․니파타』, 즉 붓다의 말씀을 모은 글인 『경집』제883게와 4게(四偈)에도 있음과 같이 '어떤 사람들이 진리이다.'라고 말하는 그 견해마저도 다른 사람들이 '허위이다. 허망하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다른 집견(執見)을 품고 논쟁을 한다. 무슨 까닭에 여러 길의 사람은 동일한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883게(偈))
“진리는 하나이며 제2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진리를 안 사람은 다투는 일이 없다. 그들은 각자 다른 진리를 칭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길의 사람은 동일한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884게)
여기에 예로부터 ‘진실은 오직 하나’라는 사상의 한 조각을 엿볼 수 있다. 더구나 붓다에 있어서의 진리․연기(緣起)의 법문은 여래의 출세(出世), 미출세(未出世)에 관계없이 보편(普遍)의 진리로서 있었던 것이며, 과거의 제불도 또한 그와 같은 진리를 설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승, 즉 1승법이 진실한 가르침으로서 모든 것을 포섭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뇩달지(阿耨達池)에서 흘러나오는 8대하[八大河]의 명칭은 갠지스 강이라던가, 인더스강이라던가, 하는 이름이 있어서 각각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의 연못이다.
그것은 마치 붓다가 4성(四姓)의 평등을 설함에 있어서 예를 들면 여러 큰 강이 있다. 즉 강가, 야무나, 아치라바티 등은 큰 바다에 도달하면 앞의 이름과 성(姓)을 버리고 다만 큰 바다라고 만 말한다.(『증지부』제4권)
어떠한 강이라도 갠지스[恒河]에 흘러 들어가는 것은 모두 그들의 이름과 성(姓)을 잃는다. 항하(恒河)도 바다에 들어갈 때, 이미 있었던 것과 같이 보이지 않는다.(『쟈타카』제6권)-혜경스님(제주불교신문)] 

12. 捨三種分 - 세 가지 버려야 하는 것

世尊(세존)! 我今承佛威神(아금승불위신) 更說大義(갱설대의)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다시 큰 뜻을 말하고자 합니다.

佛言(불언便說(편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편히 말해 보아라.

勝鬘白佛(승만백불) 攝受正法攝受正法者(섭수정법섭수정법자)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으니,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것과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은

無異攝受正法(무이섭수정법) 無異攝受正法者(무이섭수정법자)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고,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사람과도 다르지 않으며,

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섭수정법선남자선여인) 卽是攝受正法(즉시섭수정법)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 선여인이 바로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기 까닭으로,

何以故(하이고)? 若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약섭수정법선남자선여인)

왜냐하면,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 선여인은

爲攝受正法(위섭수정법) 捨三種分(사삼종분)

정법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세 가지를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正法攝受), 법과 사람이 하나라는 것, 다시 말해 사람을 떠나 바른 법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정법을 거두어들이려는 사람은 몸과 목숨과 재산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정법을 위해 일체의 집착을 끊고 법신의 몸을 얻고, 불법을 얻고, 불가사의한 공덕과 중생의 공양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불법의 참 가치는 출세간법의 진제(眞諦)에 있고 속제(俗諦)에 있지 않다. 비록 진속이 다르지 않는 진속불이(眞俗不二)라 하지만 법을 위하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이 나올 때 정법이 지켜지며 섭수의 공이 살아나는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에 의해 정법의 가치가 살아 있게 될 것이다.ㅡ지안스님]

 

何等爲三(하등위삼)? 謂身命財(위신명재)

버려야 할 세 가지란, 이른바 몸과 목숨과 재물을 말하는 것이며,

善男子善女人捨身者(선남자선여인사신자) 生死後際等(생사후제등)

선남자 선여인이 몸을 버릴 수 있다면, 생사 윤회가 끝날 때와 같이

離老病死(이노병사) 得不壞常住(등불괴상주) 無有變易(무유변이)

늙음, 병, 죽음을 여의고, 망가짐(부서짐)이 없이 항상 그대로 있어, 변하고 바뀌지 않는

不可思議功德如來法身(불가사의공덕여래법신)

불가사의한 공덕인 여래의 법신을 얻을 것이며,

捨命者(사명자) 生死後際等(생사후제등) 畢竟離死(필경이사)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생사 윤회가 끝날 때와 같이 마침내는 죽음을 떠나서 

得無邊常住不可思議功德(득무변상주불가사의공덕)

가이없고, 常住=항상 머무르며, 불가사의한 공덕을 얻어서 

通達一切甚深佛法(통달일체심심불법) 모든 깊고 깊은 부처님 법을 통달하게 될 것이며,

捨財者(사재자) 生死後際等(생사후제등) 得不共一切衆生(득불공일체중생)

재물을 버릴 수 있다면 생사 윤회가 끝날 때와 같이, 모든 중생과 함께 하지 않으며, 

無盡無減(무진무감) 畢竟常住(필경상주)

다함도 없으며, 줄어들지도 않으며, 마침내 항상 머무르게 되어, 

不可思議具足功德(불가사의구족공덕) 得一切衆生殊勝供養(득일체중생수승공양)

불가사의한 온갖 공덕을 具足=얻게 되며, 모든 중생의 뛰어난 공양을 받게 될 것입니다.

 

世尊(세존)! 如是捨三分善男子善女人(여시사삼분선남자선여인)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세 가지를 버리는 선남자와 선여인은 

攝受正法(섭수정법) 常爲一切諸佛所記(상위일체제불소기)

정법을 받아들인 까닭으로 항상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게 되며, 

一切衆生之所瞻仰(일체중생지소첨암)

모든 중생으로부터 우러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몸과 목숨과 재산, 세 가지는 사람만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이 세 가지에 집착하고 이것을 위해 투쟁하고 온갖 업을 짓게 된다. 정법을 거두어들이려는 사람은 몸과 목숨과 재산을 버려야 한다는 말은 정법을 위해 일체의 집착을 끊으라는 말이다. 세속적인 사상(四相)의 욕망과 집착을 끊고 법신의 몸을 얻고 불법을 얻고 불가사의한 공덕과 중생의 공양을 얻으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정법을 위법망구로 거두어들이라는 것이다. 정법을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정법을 실천할 때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사람 자체가 곧 정법이 되고, 정법의 보살행을 통해 부처님 법이 세상에 꽃피우게 된다. 몸과 목숨과 재산을 버리는 일은 세속에서 쉬운 일이 아니지만 쉽지 않은 일을 통해 불가사의하고 신묘한 가피가 발현하는 것이다. 무상한 몸과 목숨과 재산의 짐을 벗어버리고 영원한 생명, 무량수 무량광의 법신을 얻어야 함을 승만부인께서 우리에게 사자후를 한다.-혜총스님]

世尊(세존)! 又善男子善女人攝受正法者(우선남자선여인섭수정법자)

세존이시여, 또 선남자와 선여인으로서 정법을 받아들이는 이는 

法欲滅時(법욕멸시) 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朋黨諍訟(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명당쟁송)

불법이 장차 멸하고자 할 때에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당파=朋黨을 만들어서 분쟁을 일으키고 송사 하여

破壞離散(파괴이산) 以不諂曲不欺誑(이불첨곡부기광) 不幻僞愛樂正法(부환위애락정법)

화합을 깨뜨리고 (파괴하고) 不曲=굽히지 않고 不諂=아첨하지 않으며, 不欺誑=속이지 않으며, 거짓된 짓을 하지 아니하므로, 올바른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이어  

諂 아첨할 첨, 欺 속일 기, 誑 속일 광, 僞 거짓 위, 朋 벗 붕

攝受正法入法朋中(섭수정법입법붕중) 불법의 동무가 되나니, 

入法朋者(입법붕자) 必爲諸佛之所授記(필위제불지소수기)

불법 동무가 이는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수기를 받게 될 것입니다.

 

世尊(세존)! 我見攝受正法如是大力(아견섭수정법여시대력)

세존이시여, 저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에 이와 같은 큰 힘이 있음을 보거니와, 

佛爲實眼實智(불취보안보지) 爲法根本(위법근본)

부처님께서는 진실한 눈이시며, 진실한 지혜이시며, 법의 근본이 되시며,

爲通達法(위통달법) 爲正法依(위정법위) 亦悉知見(역실지견)

법(진리)에 통달하시며, 올바른 가르침의 의지처이시며, 역시 모두 다 보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 攝受正法大精進力 - 정법을 받아들이어 크게 정진하는 힘

爾時世尊於(이시세존) 勝鬘所說攝受正法大精進力(승만소설섭수정법대정진력)

그때 세존께서는 승만 부인이 설한 바 올바른 가르침=정법을 받아들임의 큰 정진력에 대하여 

起隨喜心(기수희심) 如是勝鬘(여시승만)! 如汝所說(여여소설)

함께 기뻐하는 마음=隨喜心을 일으키시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니, 그러하다, 승만이여! 그대가 설하는 바와 같으니라.

攝受正法大精進力(섭수정법대정진력) 如大力士少觸身分(여대력사소촉신분)

바른 법=정법을 거두어들이어 크게 정진하는 힘은 마치  장사가 몸을 조금만 건드려도 

生大苦痛(생대고통) 매우 고통스러 것과 같이,

如是勝鬘(여시승만)! 少攝受正法(소섭수정법) 令魔苦惱(영마고뇌)

그러하다, 승만이여! 정법을 조금만이라도 받이들이면, 마군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니,

我不見餘一善法令魔憂苦(아불견여일선법영마우고) 如少攝受正法(여소섭수정법)

나는 다른 어떤 선한법=善法도 마군을 그렇게 괴롭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정법을 조금만 받아들이는 것과 같을 것이 없느니라.

 

又如牛王形色無比(우여우왕형색무비) 勝一切牛(승일체우)

또한 마치 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소=牛王과도 같이, 우모양과 빛깔이 매우 훌륭하여, 다른 여늬 소들보다 견줄 수 없이 뛰어나듯이

如是大乘少攝受正法(여시대승소섭수정법) 勝於一切二乘善根(승어일체이승선근)

이와 같이, 대승으로써 정법을 조금만 받아들여도 일체 이승들의 선근보다 뛰어나나니,

以廣大故(이광대고)

매우 넓고 큰 까닭이니라.

 

又如須彌山王端嚴殊特(우여수미산왕단엄수특) 勝於衆山(승어중산)

또한 마치 수미산이 어떠한 산보다 단정, 엄숙하고 특수하여 여늬 다른 산들보다 뛰어나듯이

如是大乘捨身命財(여시대승사신명재) 以攝取心攝受正法(이섭취심섭수정법)

대승으로써 몸과 목숨과 재산을 버리고, 제도해 주려는 마음으로 정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攝取心= 섭취는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제도해 주신다는 뜻이며, 그러한 마음을 갖는 것]

勝不捨身命財初住大乘一切善根(승불사신명재초주대승일체선근)

몸과 목숨과 재산을 버리지 못하고 처음 대승에 머무는 이들의 선근보다 우승하나니,

何況二乘(하황이승) 以廣大故(이광대고)

하물며 대승의 넓고 큰 선근을 이승들과 비교하겠는가?

 

是故勝鬘(시고승만) 當以攝受正法(당이섭수정법) 開示衆生(개시중생)

이러한 까닭에 승만이여, 마땅히 정법을 거두어들임으로써 중생들에게 열어 보여주는 것이며,

教化衆生(교화중생) 建立衆生(건립중생)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며, 중생들을 建立=성취시키는 (깨우쳐 주는) 것이니라.

如是勝鬘(여시승만) 攝受正法如是大利(섭수정법여시대리) 如是大福(여시대복)

그러므로 승만이여,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이와 같이 큰 이익이 있으며 며, 이와 같은 크나큰 복이 있으며,  

如是大果(여시대과) 이와 같은 큰 과보가 있느니라.

勝鬘(승만) 我於阿僧祇阿僧祇劫說(아어아승지아승지겁설) 승만이여, 내가 아승지아승지겁 동안  

攝受正法功德義利(섭수정법공덕의리) 不得邊際(불득변제)

정법을 받아들임의 공덕과 이익을 설한다 하여도 그 끝이 없을 것이니,

是故攝受正法(시고섭수정법) 有無量無邊功德(유무량무변공덕)

그러므로 정법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한량없으며 가이없는 공덕이 있는 것이니라.

 

[이상으로 정법을 섭수하는 장의 내용을 마쳤다. 이 장에서 강조하는 점은 정법을 섭수하기 위해서는 정법을 섭수하려는 사람이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법이 바른 길임을 알았다면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보살행을 통해 정법을 섭수하고 나아가 정법을 위해서라면 몸, 목숨, 재산 등의 집착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인 법신을 얻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혜총스님]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자체가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고, 성취시키는 것이라 하였다. 이익과 과보가 크기만 하다고 말씀하여
부처님이 승만의 말을 인정해 주고 있다. 본질적 의미로 볼 때 정법이란 중생의 본래 깨달음의 참 마음이다. 이 본각진심(本覺眞心)이 정법이므로 이를 떠난 정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본각진심이 드러나면 정법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는 사법(邪法)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인(正人) 사법을 설하면 사법이 정법이 되고 사인(邪人)이 정법을 설하면 정법이 사법이 된다.” 하였다.ㅡ지안스님]

10. 四種寶藏 가지 보배

 

又如大地有四種寶藏(우여대지유사종보장) 何等爲四(하등위사)

대지에는  가지의 보배창고=寶藏 있으니, 어떤 것이 가지인가?

一者無價(일자무가) 二者上價(이자상가) 三者中價(삼자중가) 四者下價(사자하가)

첫째  값을 매길 없는 보배둘째는 값이 비싼 보배셋째는 값이 적당한 보배넷째는 값싼 보배이니,

是名大地四種寶藏(시명대지사종보장이것을 대지의 가지 보배창고라 합니다.

如是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建立大地(여시섭수정법선남자선여인건립대지)

이와 같이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 선여인은 대지를 건립하여

得衆生四種最上大寶(득중생사종최상대가)

중생의 가지 가장 크고 훌륭한 보배를 얻게 되는 것으로

[내가 가진 보배란  마음이다 마음을 무가지보(無價之寶) 한다보배로써의 가치가 너무 높아 값을 매길 없다는 뜻이다.-지안스님]

 

何等爲四(하등위사) 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섭수정법선남자선여인)

가지 보배는 무엇인가?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 선여인이

無聞非法衆生以人天功徳善根而授與之(무간비법중생이인천공덕선근이수여지)

불법= 듣지 못한 비법 중생에게는 천상이나 인간의 선근 공덕으로 가르치고

求聲聞者授聲聞乘(구성문자수성문승) 求縁覺者授縁覺乘(구연각자수연각승)

성문을 구하는 이에게는 성문의 가르침을 주고연각을 구하는 이에게는 연각의 가르침을 주고

求大乘者授以大乘(구대승자수이대승) 如是得大寶衆生(여시득대보중생)

대승을 구하는 자에게는 대승의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훌륭한 보배(가르침) 얻는 중생들은

皆由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개유섭수정법선남자선여인)

정법을 받아들인 모든 선남자 선여인들로 말미암아 

得此奇特希有功徳(득차기특희유공덕)

 奇特=신기하고 희유한 공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 부류의 중생들에게 법을 베푸는 것을 두고 보배라고 하는가? 결국 섭수 정법자는 성불을 향해 가는 보살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평등 무차별하게 법을 펼치는 보살행을 통해 가치를 매길 없는 무가지보의 공덕을 쌓게 되기 때문에 부류의 중생은 그대로 보살의 보배 창고와 같은 것이다.
섭수정법자가 중생을 바른 법으로 제도하는 일은 무수한 보배를 생산하는 일과도 같다. 섭수정법자가 보살행을 실천하는 마음과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마음은 하나이다. 다시 말해 정법이 섭수되지 않으면 평등 무차별한 보살행의 마음을 없는 것이다. ‘ 법만이 옳다. 인간과 천상에서 복락을 누리는 길만이 최상이다. 성문승만이 옳다. 연각승만이 옳다 차별적인 사상(四相) 취해서 집착하지 않고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인연이 그래서 불교에서 중요한 것이다.-혜총스님]

* 攝受正法 無異波羅蜜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임과 바라밀
世尊(세존)! 大寶藏者(대보장자) 卽是攝受正法(즉시섭수정법)

세존이시여 보배 창고라는 것은   정법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世尊(세존)! 攝受正法(섭수정법) 攝受正法者(섭수정법자) 無異正法(무이정법)

세존이시여, 정법을 받아들인다 하였지만, 정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법과 다르지 않으며, 

無異攝受正法(무이섭수정법) 正法卽是攝受正法(정법즉시섭수정법)

정법을 받아들인다는 것과도 다르지 않으니, 정법이 곧 정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른 법을 거두어들인다는 자체가 바른 법인 , 정법은 바로 육바라밀이라는 보살행이라는 것이다중생은 보살행을 실천함으로써 더욱 상승된 성숙한 세계로 나아갈 있다. 동시에 잊고 살았던 자기의 본래 고향집으로 돌아갈 있다. 본래의 마음, 불성(佛性)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만이 가진 참으로 멋진 도리라 하겠다.
정법은 바로 보살행이다. 그러므로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자체가 정법인 동시에 여러 방편으로 정법을 세우는 바라밀이 대승의 정법임을 밝히고 있다이렇게 육바라밀을 통해 성숙한 중생이 정법을 섭수하게 되므로 육바라밀의 보살행이 그대로 정법이요 정법섭수의 수행이라는 것이다.-혜총스님]

 

11. 正法無異波羅蜜 정법과 육바라밀

[대승에 머물면서 대승을 섭수하는 것은 바로 이승에 머물면서 승의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법을 섭수하는 -김흥미]

 

[바라밀(波羅蜜)’이란 도피안(到彼岸)으로 미혹의 세계인 차안(此岸)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 도달함을 말한다.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함은 정법을 거두어들이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라는 여섯 가지 바라밀행의 실천을 대승불교에서는 강조한다.-혜총스님]

[정법섭수와 바라밀이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이 육바라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정법이 무엇인가혹은 수행이 무엇인가그것은 결국 인간성을 성숙시켜 주는 것이다바꾸어 말하면 대승에 있어서의 정법은  보살행으로 귀착된다는 말이다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려는 마음바라밀다의 완덕을 갖추고 있는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이해할 있다.  
불교를 복귀사상(復歸思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본래의 마음순수한 자리도 돌아가는 이것이 불교요 이것이 
깨달음 자체의 마음 보리심이라는 것이다.ㅡ지안스님]

 

檀波羅蜜 - 보시바라밀

世尊(세존)! 無異波羅蜜(무이바라밀) 無異攝受正法(무이섭수정법)

세존이시여, 바라밀과 다르지 아니하며, 정법을 받아들인다는 것과도 다르지 아니하니

攝受正法卽是波羅蜜(섭수정법즉시바라밀) 何以故(하이고)?

정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라밀입니다. 왜냐하면?

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섭수정법선남자선여인)

올바른 가르침=정법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은 

應以施成熟者以施成熟(응이시성숙자이시성숙)

마땅히 보시로써 성숙시킬 중생에 대해서는 보시로써 성숙케 하는 것이니

乃至捨身支節將護彼意而成熟之(내지사신지절장호피의이성숙시)

나아가 몸과 사지를 버려서라도 그들의 뜻을 따라 보리심을 보호하면서 성숙하게 하니,

彼所成熟衆生建立正法(피소성숙중생건립정법) 是名檀波羅蜜(시명단바라밀)

그렇게 성숙된 중생이 정법에 안주하는 (바른 법을 세우는 ) 단바라밀(보시바라밀)이라 이름하며,

 

[보시(布施)는 베푸는 자(施者)와 받는 자(受者)와 보시한 물건(施物) 세 가지가  청정한 삼륜청정(三輪淸淨), 삼륜공적(三輪空寂)이어야 하며, 상(相)에 대한 어떤 집착도 없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되어야 한다]

 

尸波羅蜜 - 지계바라밀

應以戒成熟者(응이계성숙자) 以守護六根(이수호육근淨身口意業(정신구의업)

마땅히 계율(지계)로써 성숙시킬 중생에 대해서는 여섯 가지 감각 기관=六根 守護=지켜 보호하며몸과 (), 뜻으로 짓는 업을 깨끗이 하는 것이니

乃至正四威儀(내지정사위의將護彼意而成熟之(장호피의이성숙지)

나아가 가지 행주좌와=威儀 올바르게 하여 그들의 보리심을 보호하면서 성숙하게 하는 것이니,

彼所成熟衆生建立正法(피소성숙중생건립정법) 是名尸波羅蜜(시명시바라밀)

그렇게 성숙된 중생이 정법에 안주하는 (정법을 세우는 ) 시바라밀(지계바라밀)이라 이름하며,

 

[사위의(四威儀)= 행주좌와(行住坐臥수행자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바른 행실이나 몸가짐을, 걷고 정지하고 앉고 눕는 가지 동작 (((() 구분한 것이다. 동작은 인간의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기거동작이며, 몸은 항상 이러한 동작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있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사념처(四念處) 수행의 하나인 신념처(身念處) 직접적 대상이 된다.]

[지계(持戒) 온갖 착한 법을 머무르게 한다. <대지도론>만일 이익을 구한다면 응당 계를 굳게 지님을 마치 귀중한 보배를 애석히 여김과 같이 하고 마치 몸과 목숨을 보호하듯 해야 하나니, 계는 바로 온갖 착한 법이 머무르는 곳이다. 마치 발이 없으면서 가려고 하고 날개가 없으면서 날고자 하고 배가 없으면서 건너려 해도 그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만일 청정한 계율이 없으면서 묘한 과위를 얻으려 함도 그와 같다 했다.-혜총스님]

 

 羼提波羅蜜 - 인욕바라밀

應以忍成熟者(응이인성숙자) 若彼衆生罵詈(약피중생매리) 욕할 ,  꾸짖을 

마땅히 인욕으로써 성숙시킬 중생에게는, 비록 중생이 욕하고, 꾸짖고 

毀辱誹謗恐怖(훼욕비방공초) , 욕될 , 헐뜯을 ,  헐뜯을  

헐뜯고 욕설하고 비방하고 위협하고 두렵게 하는 경우에도

以無恚心饒益心(이무가에심요익심) 第一忍力乃至顏色無變(제일인력내지안색무변)

화내지 않는 마음과 이롭게 하려는 마음과 크게 참는 힘으로써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將護彼意而成熟之(장호피의이성숙지) 彼所成熟衆生建立正法(피소성숙중색건립정법)

저들의 뜻을 따라 보호하면서 성숙시키면, 성숙시킨 중생이 정법을 세우게 되나니,

是名羼提波羅蜜(시명찬제바라밀 뒤섞일 

이것은 찬제바라밀(인욕바라밀)이라 이름하며,

 

[인욕(忍辱)은 아무리 곤욕을 당할지라도 참고 견디어 평정한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법화경>에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은 수많은 모욕과 경멸에도 참고 견디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성불할 존재임을 말하며 존경했다. 상대방이 어떠한 모욕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나를 손상시키려 해도 그 욕됨에 대해 꾹 참고 견디는 수행으로써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毘梨耶波羅蜜 - 정진바라밀

應以精進成熟者(응이정진성숙자) 於彼衆生不起懈心(어피중생불기해심)

마땅히 정진으로써 성숙시킬 중생에게는  중생들에게 게으르고 나태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生大欲心第一精進(생대욕심제일정진) 乃至若四威儀(내지약사위의)

하고자 하는 욕망을 내게 하여 가장 훌륭한 정진과 나아가 행주좌와=사위의로써

將護彼意而成熟之(장호피의이성숙지)  그들의 뜻을 따라 보호하여 성숙시키면

彼所成熟衆生建立正法(피소성숙중색건립정법) 是名毘梨耶波羅蜜(시명비리야바라밀)

이렇게 성숙된 중생들은 정법을 세우게 되나니이것을 비리야바라밀(정진바라밀)이라 이름하며,

 

[정진(精進)은 모든 일의 근본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게으름을 경계하면서 말씀하셨다. “게으름이란 것은 모든 행(行)의 폐단인 것이다. 가정에 있으면서 게으르면 옷과 밥을 공급하지 못하고 사업을 이루지 못하며, 출가하여서 게으르면 능히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니라. 일체 모든 일이 모두 정진(精進)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나니, 집에 있으면서 정진하면 의식이 풍요하고 사업이 더 넓어져서 세상이 칭찬하고 감탄하며, 출가하여서 정진하면 행하는 도(道)가 다 이루어지느니라.” 부처님의 최후의 가르침이 게으르지 말라는 것임을 새겨야 한다. 부지런히 정진하는 수행으로써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禪波羅蜜선정바라밀

應以禪成熟者(응이선성숙자) 於彼衆生以不亂心(어피중생이불란심)

마땅히 선정으로써 성숙시킬 중생에게는저들 중생에게 不亂心=산란하지 않은 마음과

不外向心(불외향심) 第一正念乃至久時所作(제일정념내지구시소작)

밖으로 향하지 않는 마음과 가장 올바른 생각과 나아가 오래전에 일과

久時所說終不忘失(구시소설종불망실) 將護彼意而成熟之(장호피의이성숙지)

오래 전에 말한 바를 끝내 잊지 않고저들의 뜻을 따라 보호하여 성숙되게 하면,

彼所成熟衆生建立正法(피소성숙중생건립정법) 是名禪波羅蜜(시명선바라밀)

이렇게 성숙된 중생들이 정법을 세우게 되나니 이것을 선바라밀(선정바라밀)이라 이름하며,

 

[선정(禪定)은 고요한 마음(定心)으로 모든 악을 없앤다. 신통의 수승한 업은 선정이 아니면 생기지 않고, 무루의 지혜로운 뿌리는 고요함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별역잡아함경>에 “선정을 깊이 닦으려면 저 온 땅이 모두 다 허망하고 거짓인 것으로 관찰하여 진실로 땅이 있다고 전혀 보지 아니하며, 물과 불과 바람과 네 가지 무형과 이 세상과 저 세상과 해와 달과 별과 의식으로 알음과 봄과 들음과 추구하는 관찰과, 마음·의식의 경계와 또는 저 지혜로 미치지 못하는 곳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두 다 허망하고 거짓이어서 진실한 법이 없다고 관찰한다”고 했다.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을 바르게 보고 지혜를 얻어 정법을 섭수하는 것이다. 호수에 물결이 일면 아무 것도 비치지 않지만 고요하면 모든 사물이 비치는 것도 같다.]

 

般若波羅蜜 - 반야바라밀

應以智慧成熟者(응이지혜성숙자) 彼諸衆生問一切義(피제중생문일체의)

마땅히 지혜로써 성숙시킬 중생에게는저들이 묻는 일체의 이치에 대하여

以無畏心而爲演說(이무외심이위연설)一切論(일체론) 一切工巧(일체공교)

두려움이 없는 마음으로써 일체의 논의와 일체의 工巧=기술을 연설하되

究竟明處(구경명처)  乃至種種工巧諸事(내지종종공교제사)

궁극적인 지혜를 내게 하는 곳과 나아가 갖가지 방편으로써 

將護彼意而成熟之(장호피의이성숙지) 彼所成熟衆生建立正法(피소성숙중생건립정법)

저들의 뜻을 따라 보호하여 성숙시키면이렇게 성숙된 중생들이 정법을 세우게 되나니

是名般若波羅蜜(시명반야바라밀이것을 반야바라밀(지혜바라밀)이라 이름합니다.

 

[지혜(智慧)는 세상을 바르게 보게 한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있는 그대로 알아서 옳고 그름을 가려내게 한다. 지혜행을 닦은 사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하다. 가는 길은 환하게 밝아서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궁극에는 보리(菩提)를 성취하게 한다. 이렇게 불교를 신행하는 사람은 생활 자체가 육바라밀의 실천으로 채워져야 정법을 섭수할 수 있다. 정법을 섭수하는 보살행을 통해 성불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혜총스님]

 

是故世尊(시고세존)! 無異波羅蜜(무이바라밀) 無異攝受正法(무이섭수정법)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이러하므로 바라밀과 다르지 않으며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것과도 서로 다르지 않으니,

攝受正法卽是波羅蜜(섭수정법즉시바라밀)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바라밀입니다.

* 大水源比喩 수원(水源)

世尊(세존)!又如劫初成時(우여겁초성시) 有大水聚(유대수취)

세존이시여! 또한 겁이 처음 이루어질 때에 수원=大水聚 있어서

出生三千大千界藏(출생삼천대천계장) 及四百億種種類洲(급사백억종종유주)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보배와 4백억 종류의 갖가지 육지에 이르기까지를 이루어내듯이

如是攝受正法(여시섭수정법) 出生大乘無量界藏(출생대승무량계장)

이러한 정법을 거두어들이면 대승의 한량없는 세계와

一切菩薩神通之力(일체보살신통지력일체 보살의 신통한 힘과

一切世閒安隱快樂(일체세간안은쾌락)   한가할  사이  本字 

일체 세간의 안온하고 즐거운 =快樂함과

一切世閒如意自在(일체세간여의자재) 及出世閒安樂劫成(급출세간안락겁성)

일체 세간의 뜻과 같이 자재함과 그리고 출세간의 안락을 낳게 하는 것이며, 겁이 이루어지는 등은

乃至天人本所未得(내지천인본소미득) 皆於中出(개어중출)

천상이나 인간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 (본래부터 얻지 못하던 것이) 모두 가운데서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불교의 중요한 명제이다. 올바른 진리를 받아 지니지 못하면 그야말로 사법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일체 공덕과 선근이 정법을 섭수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하여 정법을 거두어들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대승의 근본 서원이 정법을 섭수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말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안락이 정법섭수에서 나온다고 밝히면서 점을 분명히 인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지안스님]

 

9. 堪能四重重任 -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자의 가지 책임

 

又如大地持四重檐(우여대지지사종담) 何等爲四(하등위사)

대지가 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과 같으니, 어떤 것이 가지인가?

一者大海(일자대해) 二者諸山(이자제산) 三者草木(삼자초목) 四者衆生(사자중생)

첫째는  바다이고둘째는 여러 산이고셋째는 초목이고넷째는 중생들이니

如是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여시섭수정법선남자선여인建立大地(건립대지

이와 같이 바른 법=正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 선여인도 대지를 건립하여 

堪能荷負四種重任(감능하부사종중임) 喩彼大地(유피대지 견딜 

 가지 무거운 책임을 능히 짊어지려고 하니비유하자면  대지와 같습니다.

 

何等爲四(하등위사)?謂離善知識(위이선지식) 無聞非法衆生(무문비법중생)

어떤 것이 넷인가 하면선지식을 떠나 (만나지 못하여) 정법이 아닌 =非法 들은 중생들을

以人天善根而成熟之(이인천선근이성숙지) 求聲聞者授聲聞乘(구성문자수성문승)

인간과 천상의 선근으로써 키워주고, 성문을 구하는 자는 성문의 가르침=聲覺乘 주고

求緣覺者授緣覺乘(구연각자수연각승) 求大乘者授以大乘(구대승자수이대승)

연각을 구하는 자는 연각의 가르침=緣覺乘 주고, 대승을 구하는 자는 대승의 가르침=大乘 주는 것이오니

是名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建立大地(시명섭수정법선남자선여인건립대지)

이를 이름하여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 선여인의 

堪能荷負四種重任(감능하부사종중임)

네 가지 무거운 책임을 감당할 터전을 마련함=建立大地이라 합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사람을 네 개의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크게 나누면 (1)불교를 믿지 않고 법을 등지고, 법을 비방하는 무리들과 (2)불법을 믿고 불도를 걸어가려는 부류의 둘이 된다고 생각한다. 전자(前者)는 불교에 연(緣)이 없는 사람, 불법을 듣고자 하는 귀를 갖지 않은 사람이다. 이러한 부류도 또 둘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는 물론 다른 종교를 굳게 믿고 불교를 믿지 않는 부류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불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를 무시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특히 후자는 흔히 세간에서 말하는 ‘연(緣)이 없는 중생[無緣衆生]’이다. 그러나 ‘연이 없는 중생은 제도하기 어렵다’라고 말하듯 전혀 무연(無緣)의 사람은 문제 밖이라 도외시해서는 진정으로 섭수정법자(攝受正法者)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무연의 사람이라도 정법을 섭수하기 위해서는 짊어지고 갈 것이 요구된다.-혜경스님]


世尊(세존)!如是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建立大地(여시섭수정법선남자선여인)

세존이시여이와 같이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 선여인은 터전을 마련하여

堪能荷負四種重任(감능하부사종중임) 普爲衆生作不請之友(보위중생작불청지우)

가지 무거운 책임을 능히 짊어짐으로써, 널리 중생을 위하여 청하지 않은 =不請友 되어 

 

[불청지우(不請之友) = 청하지 않은데도 친절을 베풀어 오는 , ·菩薩 중생을 구제(救濟)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작용해 오는 것을 벗에 비유함, 벗은 서로 상호부조를 본분으로 하는데 청하기 때문에 구제의 손길을 뻗치는 것은 참다운 벗이라고 없다고 함에 의해서 불청지우가 되기를 강조한다.]

 

大悲安慰哀愍衆生(대비안위애민중생) 爲世法母(위세법모)

중생들을 편안하게 위로하며 불쌍히 (어여삐) 여겨서 세상에서 진리의 어머니=法母 되는 것입니다.

 

[ 장에서 취택(取擇) 내용으로서는 

 방편(方便) 진실지(眞實智)와의 관계 

정법이란 일승법(一乘法)이라는 ,

따라서 정법을 섭수(攝受)하는 것은 붓다(buddha) 설한 대승정신(大乘精神) 몸으로써 나타내야 ,

모든 서원은 필경 섭수 정법이라는 하나의 서원(誓願) 귀일(歸一) ,

공덕은 헤아려 없는 ,

정법을 섭수하는 사람은 온갖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대승보살을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떠한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평등하게 정법의 공덕(功德) 나누어 준다고 하는 무거운 책임을 짏어진 사람일 ,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나아가 세상 사람들의 법모(法母) 되고 불청지우(不請之友) 벗이어야 ,

이리하여 섭수 정법자가 그대로 정법의 체현자(體現者)이기 때문에 섭수되는 정법과 섭수하는 사람이 일치한다.
   여기에 정법을 섭수한다는 의의가 있다그것은 대승 보살행의 실천 항목으로서의 육바라밀행을 행하는 사람이며 그와 같은 사람의 행위가 그대로 정법을 섭수하는 것이 된다고 결론짓고 있다.
   붓다는 이상과 같이 이해하는 부인의 설하는 바에 대해 정법을 받아 기억하는 일은 넓고 크기 때문에 모든 중생에게도 반드시 정법을 전하여 정법을 받아 기억하는 사람이 되도록」 거듭하여 부인의 이해에 찬동하고 있다.]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의 가지 책임이란 바로 정법을 거두어들이려는 대승보살의 책임이다. 선지식을 만나지 못해 정법을 듣지 못한 불우한 중생들에게 선근을 심어 키우게 인간세상과 천상에서 복을 누리도록 하고 2승들에게는 그들의 근기에 맞는 방편을 쓰고, 대승을 구하는 자에게는 대승법으로써 가르침을 주겠다는 것이다.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하지 못한다.’ (不能度無緣衆生) 말이 있듯이 부처님 법에도 인연이 있어야 한다ㅡ지안스님]

 

[불능도무연중생(不能度無緣衆生)이란 말처럼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제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무시하거나 방관하지 말고 새벽이슬에 젖어들 듯이 서서히 부처님 정법에 물들어 믿음의 땅에 서도록 해야 한다
정법을 섭수하는 사람은 불청지우(不請之友) 되는 것은 기다리지 말고 부르지 않아도 달려가라는 것이다. 고통의 소리가 들리고 보이면 즉각 달려가 도와주는 좋은 벗이 되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제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좋은 벗을 위해서는 그를 이롭게 하고 인자하게 보살피는 것이니, 주기 어려운 것을 주고, 하기 어려운 것을 하며,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비밀스러운 것도 서로 털어 놓고, 서로 잘못을 드러내지 않고, 괴로움에 처했을 외면하지 않으며, 가난하고 보잘 없더라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이다.”
복지시설 등에서 봉사에 동참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바로 불청지우이다. 남이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도움이 되고자 나선 참으로 착한 벗들이다.-혜총스님(불교신문)]
 

[근기(根機)= 근기는 천차만별이지만 보통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 가지 나눈다. 선가(禪家)에서는 참선하는 사람을 상근기, 교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중근기, 염불하는 사람을 하근기로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맞지 않다. 왜냐하면 능엄경에 보면 대세지보살은 염불삼매로 원통을 얻었기 때문이다. 대세지보살은 상근기 중에서도 상근기인데 염불로 원통을 얻었으니 하근기라는 말은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전국의 선방에서 참선하는 사람은 모두 상근기인가? 그렇지 않다. 참선수행하는 사람 중에는 불교교리에도 어둡고 자비심과 덕도 부족하고 정진력도 약한 하근기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기는 수행방법에 따라 정해진 것이 아니다. 또한 경전에 따라 상근기의 경전이 따로 있고, 중근기의 경전, 하근기의 경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근기가 뛰어난 사람은 초기경전인 아함경을 읽고도 (), 연기(緣起), 중도(中道) 깨닫기도 하며 반야경을 읽으면서도 유심(唯心)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보면 교리에 따라 상근기를 대상으로 법문과 중근기를 대상으로 법문과 하근기를 대상으로 법문을 나눌 수는 있다.

(1) 하근기(下根機) 대상으로 법문은 인천도(人天道). 생사윤회를 설하고 삼악도의 고통과 천상의 행복을 설하며 불선업(악업) 쌓으면 삼악도에 태어나고, 선업을 쌓으면 천상 또는 인간에 태어난다는 인과응보의 도리를 설하는 것이다. 법문은 초기불교의 경전(니까야, 아함경)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지만 대승불교의 경전에서도 많이 말씀하셨다.

 인천도의 수행법은 오계(五戒) 십선업(十善業)이다. 또한 천상에 태어나는 (天道) 오법(五法) 여기에 속한다. 오법은 믿음(), 보시(布施), 지계(持戒), 다문(多聞), 지혜(智慧). 이것들이 인천도(人天道)로서 천상이나 인간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게 된다.

 그런데 하근기 중에서도 높은 근기는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니 , 생사윤회를 믿고 업을 지어서 과보를 받는 인과응보의 도리를 아는 것이다.

 하근기 중에서도 낮은 근기는 복을 빌고 소원성취를 하기 위하여 염불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을 빌어서 불보살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사견(邪見) 바탕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기가 낮은 사람은 이런 방편으로라도 불법과 인연을 맺는 것이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복을 빌더라도 기도하는 동안에는 마음으로는 겸손하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착한 마음을 것이고, 입으로는 부처님 명호를 부르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착한 말을 것이고, 몸으로는 부처님의 상을 향해 절하고 공양을 올리는 착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선업이 쌓이다 보면 나중에는 정법(正法) 가르쳐주는 선지식이 나타나서 정법을 배우고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2) 중근기(中根機) 대상으로 법문은 해탈도(解脫道). 성문도(聲聞道) 연각도(緣覺道) 여기에 속한다. 성문도는 삼법인과 사성제의 법문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다. 연각도는 십이연기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다.  해탈도는 주로 자리(自利) 수행이며 이타(利他) 수행은 적다.

 해탈도의 수행법은 팔정도(八正道) 사념처(四念處) 시작으로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 사마타、위빠사나를 포함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다. 수행법으로 성문도에서는 사사문과(四沙門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를 증득하며, 연각도에서는 벽지불의 깨달음을 증득한다.

 해탈도의 과정은 오분법신(五分法身)이라고 하니 (), (), (),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 과정이다.

계가 청정해지면 후회가 없고, 후회가 없으면 기쁨이 일어나고, 기쁨이 일어나면 몸이 가볍고 편안하며, 마음이 즐거워진다.

마음이 즐거우면 고요해지고 선정에 든다.

선정에 들면 법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 지혜가 일어난다.

지혜가 일어나면 세간법(오온) 염오(厭惡)하게 되고, 염오하면 탐욕을 떠나고(離欲) 가지 취착(욕취, 견취, 계금취, 아취) 소멸한다.

취착이 소멸하면 해탈한다. (盡智)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견이 생겨난다. (無生智)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은 이미 확립되었으며, 해야 일은 마쳤고, 다시는 후생의 존재() 받지 않는다.” 것이다. 이것이 해탈도의 과정이다.

(3) 상근기(上根機) 대상으로 법문은 보살도(菩薩道). 보살도는 보리심의 서원을 발심한 때로부터 시작한다. 보리심을 내지 않은 사람은 아직 보살이 아니다. , 전생에는 보리심을 냈으나 금생에 태어나서 아직 대승법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다시 선지식을 만나고 대승법을 만나서 다시 보리심을 내게 된다.

 보리심은일체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 나는 반드시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기를 서원합니다.” 이와 같이 서원하고 발심하는 것이다보살도는 자리(自利) 이타(利他) 덕이 원만한 이다.

과거에 연등불(燃燈佛) 세상에 출현하셨을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의 몸인 수메다 , 선혜보살(善慧菩薩) 서원을 세웠다. “나는 원하면 아라한이 있는 충분한 지혜와 능력이 있다. 그러나 어찌 혼자서만 가랴. 일체중생을 성숙시켜서 해탈시키기 위해 무상정등정각을 이루리라.” 이것이 보살의 서원이다.

 보살도의 수행법은 육바라밀(六波羅蜜) 십바라밀(十波羅蜜)이다. 또한 사섭법(四攝法), 삼취정계(三聚淨戒) 보살행(菩薩行)이다. 또한 보현십종광대행원(普賢十種廣大行願)이다. 모든 수행법의 우두머리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보리심과 반야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못한 모든 수행법은 보살도라고 이름할 없으며 그것은 인천도나 해탈도에 속하는 것이다. 보살도를 닦아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사선근(四善根), 보살십지(十地) 등각(等覺) 거쳐서 묘각(妙覺) 이르면 성불한다.

보살에는 초학보살(初學菩薩.新學菩薩) 지혜가 성숙한 보살이 있다. 초학보살은 대승으로 발심한지 오래되지 않아서 지혜가 미숙한 보살 말한다. 또는 전생에는 이미 보리심을 냈으나 금생에 아직 대승법을 만나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대승법을 다시 만난 보살도 초학보살로 본다. 이들은 아직 지혜가 미숙하기 때문에 다시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다.

4. 대기설법(對機說法)

보살도에서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행을 한다. 물론 초학보살은 아직 지혜가 약하기 때문에 보살행을 하지 못하며 다시 법을 배우고 익혀서 지혜가 성숙했을 비로소 보살행을 하게 된다.

 지혜가 성숙한 보살은 인천도와 해탈도(성문도, 연각도) 보살도를 모두 알고 통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생들을 교화하여 성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천도의 근기에게는 인천도로서 교화하고, 성문도의 근기에게는 성문도로서 교화하고, 연각도의 근기에게는 연각도로 교화하고, 보살도의 근기에게는 보살도로 교화하여 보살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승만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 堪能四重重任 내용참고~

지혜가 성숙한 보살은 인천도와 해탈도(성문도, 연각도) 보살도를 모두 알고 통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생들을 교화하여 성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천도의 근기에게는 인천도로서 교화하고, 성문도의 근기에게는 성문도로서 교화하고, 연각도의 근기에게는 연각도로 교화하고, 보살도의 근기에게는 보살도로 교화하여 보살행을 하는 것이다.그런데 보살도의 근기를 교화할 때도 방편선교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초학보살에게는 거기에 맞는 법으로서 교화하고 지혜가 어느 정도 성숙한 중생에게는 거기에 맞는 법으로서 교화하는 것이다다시 말해서 초학보살에게는 보리심을 발하도록 하고 나서 인천도와 해탈도를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기초교리와 기초수행법을 알아야 대승의 수행법을 공부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천도와 해탈도를 알아야 나중에 보살행을 하여 중생을 교화할 있기 때문이다.​

지혜가 어느 정도 성숙한 보살에게는 대승법을 가르친다. 반야의 공성(空性) 육바라밀(六波羅蜜) 여래장(如來藏)유심(唯心) 도리와 보현보살의 행원(行願)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도리를 공부하여 통달해야 한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스스로 먼저 통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성자 지견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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